스님 법문

[신중기도] 7월 10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1-07-10

2021710일 음력 6월 초하루 신중기도 종범스님 법문

 

-불신(佛身)과 불성(佛性)이야기-

 

신축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법문할 내용은 부처님, 중생심, 마음씀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佛圓光 : 佛身佛智이야기

불원광 : 불신불지이야기

三佛圓融 十身無礙 身智光明 普照法界

삼불원융 십신무애 신지광명 보조법계

佛身普現 十方三世 佛智妙光 常放光明

불신보현 시방삼세 불지묘광 상방광명

無障無礙 圓滿具足 普門示現 靈通自在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부처님, 부처님은 누군가. 왜 부처님인가. 어째서 부처님이 되었나. 그런 뜻인데요. 부처님은 둥글고 밝다. 그래서 둥글 원자, 빛 광자, 원광(圓光)이라고 그럽니다, 원광. 불원광(佛圓光). 어째서 원광인가. 부처님은 몸이 태어난 몸에서 깨달은 몸을 얻었다. 깨달은 몸이 둥글고 밝다. 이런 뜻이죠. 둥글다는 말은 끝이 없다. 밝다는 말은 어둠이 없다. 끝이 없고 어둠이 없는 몸을 깨달음을 통해서 얻으셨다. 그걸 부처님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 몸을 불신(佛身), 부처님 불자, 몸 신자, 불신 이렇게 쓰는데, 깨달은 몸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의 마음을 불지(佛智), 부처님의 지혜, 깨달은 마음이에요. 깨달은 몸, 깨달은 마음. 이것을 불신불지(佛身佛智),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범부는 뭐냐. 범부는 태어난 몸을 가지고 살아요. 태어난 몸. 그래서 범부의 몸을 날 생자, 몸 신자, 생신(生身)이라고 하거든요, 생신. 근데 부처님은 그 태어난 생신의 몸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불신을 얻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요. 그리고 범부는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생각하는 마음. 그런데 부처님은 지혜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 자기 경험에서 오거든요, 생각은. 그래서 경험을 업이라고 그러는데, 범부가 아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업식(業識)이라고 해요, 업식. 알 식자. 부처님은 깨달은 지혜로 안다. 불지라고 그러고. 불지와 업식.

그럼 깨달음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느냐. 해탈을 얻었는데, 불교가 가르치고 서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탈이에요, 해탈. 그럼 해탈은 뭐냐.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하고, 다 벗어나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찬탄할 때, 삼불이 원융하고(三佛圓融), 십신이 무애하고(十身無礙), 그렇게 하는데요. 부처님에게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불이 있는데, 이 삼불이 다 함께 통해요. 원융이란 말은 함께 통한다. 또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는데, 이 열 가지 몸이 걸림이 없어요. 십신이 무애라. 그래서 신지광명이 보조법계라(身智光明 普照法界).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온 법계를 다 비춘다. 이렇게 예경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불신이 보현 시방삼세라(佛身普現 十方三世). 부처님의 몸이 시방삼세에, 온 공간에, 온 시간에 널리 다 나타난다. 그래서 불지묘광佛智妙光), 부처님의 지혜 묘한 광명이,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볼 때도 거기에 묘한 광명이 있고, 허공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고, 사람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어서, 일체 나타난 현상이 묘광이 아닌 게 없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어두운 밤에도 어두움을 느낄 때는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어두움을 느끼고, 밝음을 느낄 때도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밝음을 느낀다. 그래서 밝거나 어둡거나, 있거나 없거나가 전부가 묘할 묘자, 빛 광자, 묘광(妙光)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에요.

그래서 그 부처님 세계는 깨닫고 나면 해탈인데, 그 해탈은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한다. 그래서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래요, 무장무애. 장애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게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이에요. 무장무애. 그리고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고 그래요, 원만하고 다 갖추어져서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남는 거 하나도 없어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그리고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그래요. 보문이란 말은 넓을 보자, 문 문자인데, 온갖 곳에, 넓은 문이라 이 말은 여러 곳에, 온갖 곳에, 일체 처소에, 시현이란 말은 나타난다. 이게 깨달은 부처님의 세계에요. 그리고 영통자재(靈通自在),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한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럼 이 영통자재라는 게 뭔가. 부처님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고 가고 싶은 데 가요. 그게 영통이에요. 저곳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와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라고 하는 30권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법문이 부처님이, 세존이 미리 도솔(世尊未離兜率)하시고,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강왕궁(已降王宮)하시고, 이미 왕궁에 강림을 하시고, 이렇게 나와요. 미출모태(未出母胎),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도인이필(度人已畢)이라, 중생제도에 마쳤다. 이게 영통자재에요.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하는 거예요. 이걸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래서 신통이란 말을 쓰는데, 신통이란 말이 허공을 날라다니고, 먼 곳을 일시에 가고, 이것은 현상신통이고, 이 각지, 깨달은 지혜의 신통은 이런 거예요.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사바세계에 오고, 사바세계를 떠나지 않고 도솔천에 가고, 이곳을 움직이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이게 영통자재에요.

 

衆生心 : 佛性心性이야기

중생심 : 불성심성이야기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淨心(정심) 染心(염심)

性心(성심) 緣心(연심)

清淨法身 汝之性也 圓滿報身 汝之智也

청정법신 여지성야 원만보신 여지지야

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천백억화신 여지행야

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자성구삼신 발명성사지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六祖壇經, 參請機緣6)

불리견문연 초연등불지 (육조단경, 참청기연제6)

 

그러면 이런 깨달음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얻었나. 중생심(衆生心)에서 시작해서 얻은 거예요. 중생심, 중생의 마음. 중생의 마음이 없으면 불원광도 없어요. 불원광, 중생심, 이게 두 번째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중생심은 다른 말로 하면 불성(佛性)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이고, 깨달음을 얻는 본성이다, 이런 말이죠. 불성. 그리고 심성(心性)이라고 그래요, 중생심을. 심은 마음 심자인데, 온갖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그 낮에나 밤에나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마음이 심인데요. 그 마음속에 근본 성품이 있는데, 그걸 심성이라고 그래요, 심성. 중생에는 성심도 있고 용심(用心)도 있고, 쓰는 마음. 우리가 오고 가고 하는 건 용심인데, 쓰는 마음인데, 그 용심 속에는 바탕이 되는 성심이 있어요. 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본성. 그래서 불성이다. 심성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이게 다 중생심이거든요. 중생심은 불성이다. 중생심은 심성이다. 그런 말이죠.

덥기는 덥고, 법문도 점점 잠 오는 법문만 하고. 잠이 와. 왜냐. 평소에 안 들어보던 말이라 법문 업식이 많이 형성이 안 돼서. 법문은 아는 소리를 해야 듣지, 모르는 것 소리하면 못 듣는 게 업식이 형성이 안 돼 가지고 그래요, 업식이. 내가 처음에 절에 와서 심지법문 한다고 그랬는데, 시골에서 심지는 호롱불 심지밖에 모르는데.(웃음) 그래서 호롱불 심지법문 하나 싶어가지고 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 법문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 업식이 안 되면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얘기 하면 잠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중생심이 이렇게 용심도 있고 성심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하는 논에서는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이렇게 가르쳐요. 진여심이란 말은 참 그대로 그냥 변함이 없는 거예요. 참 그대로. 참 진자, 같을 여자. 허공이 무너져도 변함이 없고, 지구가 없어져도 변함이 없고, 이걸 진여심이라고 해요. 생멸심이라는 건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찰나심이에요. 찰나 찰나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그걸 생멸심이라고 그래요. 이게 중생심이거든요.

그리고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자성이 항상 물듦이 없어요. 청정해요. 그리고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이게 중생심이에요. 번뇌망상이 항상 있는데, 자성청정심이 또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중생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청정심과 번뇌망상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이게 중생심이죠.

그리고 관심론(觀心論) 같은 데서는 간단하게 중생심을 청정할 정자, 마음 심자, 淨心(정심)이라 이렇게 가르치고, 또 물들 염자, 마음 심자, 染心(염심)이라 이렇게 가르쳐요. 정심은 자성청정심이고, 물든 마음 염심은 번뇌망상심이라 이 말이죠. 그리고 보통은 중생심을 말할 때 性心(성심), 자성청정 본성, 성심이 있고, 또 인연을 따라서 늘 좇아가는 인연 연자, 마음 심자, 緣心(연심)이 있다. 이게 중생심이에요. 중생심은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중생심을 잘 맑히면 바로 번뇌망상심, 염심, 물든 마음, 인연을 좇아다니는 연심, 나고 죽고 하는 생멸심, 이것이 그대로 지혜광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게 없어요.

그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경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느냐. 부처님의 청정법신(清淨法身)이 중생의 본성이다. 청정법신은 너의 본성이다(汝之性也). 부처님의 지혜광명신, 원만보신은 너의 지혜다(圓滿報身 汝之智也). 부처님의 천백억화신 자비원력신은 너의 행동이다(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이렇게 가르쳐요. 중생에게는 본성이 있고 지혜가 있고 행동이 있는데, 중생의 행동은 부처님의 천백억화신이고, 중생의 지혜는 부처님의 원만보신, 지혜광명이고, 중생의 본성은 부처님의 청정법신이다. 그게 중생의 본성, 불성이에요.

그래서 자성에 구삼신하니(自性具三身), 자성에 삼신이 갖춰져 있으니, 법신, 보신, 화신, 부처님의 삼신이 중생의 자성심에 갖춰져 있다. 그러니까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 발명이라는 게 없는 거 만들어 내는 게 아니고, 여기서는, 펼 발자, 펼쳐서, 밝을 명자, 밝히면, 중생에 있는 자성심을 펼쳐, 밝혀, 펼치고 밝히면. 근데 범부에게는 번뇌망상심이 있어서, 번뇌망상심 때문에 자성청정심이 펼쳐지질 않고 밝혀지질 않아요. 예를 들면 이게() 청정법신, 진여광명인데 이걸 떡 보이면 이걸 지혜로 보지 않고 번뇌망상으로 보니까, ‘이것은 그릇이다. 시장에서 파는 거다, 내거다, 네거다’, 이런 것만 알지, 이거 자체가 지혜광명 청정법신이라는 걸 몰라요. 이걸 번뇌망상이라고 그래요. 번뇌망상에 가려져서 그것이 펼쳐질 수가 없다. 그래서 발명이라는 건 번뇌망상에 가려진 지혜몸을 펼치고 밝히면, 성사지(成四智),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지가 사지라고 그러는데, 사지라는 말은 중생의 의식이 전부 바뀌어서 네 가지 지혜가 되는 거예요. 8식이 바뀌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고, 7식이 바뀌어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6식이 바뀌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5식이 바뀌어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이걸 사지라고 그러는데, 펼쳐서 밝히면 부처님이 이룩한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성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성불하는 게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하고. 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견이라는 건 눈으로 보는 거고, 문이라는 건 귀로 듣는 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상인연을 불리, 아니 불자, 여윌 리자, 여의지 않고, 일상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 뛸 초자, 그러할 연자인데, 초연히 불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초연등불지라. 삼신사지 경지에 오른다 이 말이에요. 불지는 삼신 사지인데. 그러면 눈으로 물건을 보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이게 초연등불지라고. 어째서 그렇게 되냐. 초연이란 말은 뛴다는 말이데, 뛴다는 말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매이지 않는다. 눈으로 이렇게 그릇을 보더라도 그릇에 매이지 않고 바로 삼신사지에 들어간다. 법신, 보신, 화신. 조금 아까 얘기한 네 가지 불지에 들어간다 이거예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초연이라, 이걸 거부하는 게 아니라, 초연이라, 거부가 아니에요, 수행이 라는 건 거부가 아니라 초연이에요. 초연이란 건 보되 보는 데 매이지 않는 걸 초연이라고 해요. 매이지 않으면 초연이에요. 뛰어난 듯이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아니하면 거기에서 뛰어난 듯이, 이 말이거든요. 나무를 보되, 봐요. 거기에 매이지 아니하면 그게 초연이에요. 뛰어난 거다. 물질을 보되 보는 물질에 매이지 않으면 그게 초연이다. 그래서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어디에도 매임이 없이, 삼불 사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것이 전부 중생의 몸속에 다 들었다.

그런데 중생은 태어난 몸만 알고, 태어난 몸, 부처님의 깨달은 몸을 모른다. 태어난 몸하고 깨달은 몸하고, 깨달은 몸을 불신이라고 하고, 태어난 몸을 생신이라고 그러는데, 이 생신을 자기로 여기고, 불신을 자기로 여기는 게 그게 제불과 중생의 차이점인데요. 자기라고 하는 건 뭐냐. 옛날 언해본에 보면 자기를 어떻게 번역을 했느냐 하면, 내 몸 이랬어요, 내 몸, 스스로 자자는 나, 몸 기자는 몸(自己), 그러면 내 몸이라고 하는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불신,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억화신, 이게 내 몸인데, 중생이 느끼는 내 몸은 태어난 몸만 내 몸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태어난 몸이 뭐냐, 난 몸인데, 난 몸. 난 몸은 뭐냐. 생로병사지요. 생각은 번뇌망상이지요. 중생이 나라고 느끼는 내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을 내 몸으로 아는 거예요. 이게 난 몸이에요, 난 몸. 그걸 내 몸이라고 한다 그거죠. 자기. 그런데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자기는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업화신, 그게 내 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태어난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이니까 만날 걱정근심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망상으로 시작해서 망상으로 끝나는 게 일생이에요. 더 오래 살아봐야 별수도 없어. 만날 망상하다가 끝나요. 백 년 망상하나 50년 망상하나 그게 그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미움받겠네, 여기 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그러는데.(웃음) 이 몸도 건강을 맨날 챙기는데, 건강 챙겨봐야 나중에 화장할 땐 똑같아요. 집 하나도 관리를 하려면 맨날 청소하고 그래야 되는데, 수리하고, 나중에 포크레인 가지고 뜯을 때는 청소했던 집이나, 청소 잘 안 했던 집이나 똑같아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보이고 들리는 일에 그렇게 얽매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집을 쓸고 닦아봤자 나중에 포크레인으로 뜯을 때는 아무 표도 없고, 아무리 몸을 잘 보호해 봤댔자 죽어서 화장할 때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그러면 그 몸이 죽기 전에 자기 본래 몸, 불성 몸, 이걸 본신이라고 하는데, 본신, 본성 몸, 불성 몸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본 몸이란 말이죠. 본 몸 자기. 난 몸 자기, 난 몸 자기에서 본래 몸 자기로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건 생각지도 못하고 태어난 몸에 얽매여 살다가 죽어요. 또 그게 한이 안 풀려 가지고 내세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12연기, 생사윤회에요.

 

善用心 : 六塵三昧 이야기

선용심 : 육진삼매 이야기

眼見色 分別色 不隨念 色塵三味

안견색 분별색 불수념 색진삼매

耳聞聲 分別聲 不隨念 聲塵三味

이문성 분별성 불수념 성진삼매

鼻聞香 分別香 不隨念 香塵三味

비문향 분별향 불수념 향진삼매

舌嘗味 分別味 不隨念 味塵三味

설상미 분별미 불수념 미진삼매

身覺觸 分別觸 不隨念 觸塵三味

신각촉 분별촉 불수념 촉진삼매

意分別 一切法 不隨念 法塵三味 (神會和尙禪話錄)

의분별 일체법 불수념 법진삼매 (신회화상선화록)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첫째, 매이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데, 본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첫 번째 발걸음이 매이지 않는 연습. 이 매이지 않는 연습을 뭐라고 그러냐 하면 선용심(善用心)이라고,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쓰는 거다. 용심을 잘하면 이 난 몸에서 본래 몸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그러면 마음 잘 쓰는 게 뭐냐. 일상생활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이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六塵)이라고 그러는데, 6진 속에서 우리가 사는데, 그 육진 속에서 자재를 얻어요. 그걸 육진삼매(六塵三昧)라고 해요. 마음을 잘 쓰는 것은 보고 듣는 데서,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자유자재를 얻는다. 그게 육진삼매에요. 이 법문은 혜능선사 제자 신회(神會)선사라고 있는데, 그 신회선사어록에 아주 중요하게 수록된 법문인데, 육진삼매가 이것이 일상삼매다. 삼매는 바를 정자, 볼 관자, 정관(正觀), 바를 정자, 볼 견자,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바르게 자재하는 걸 삼매라고 그래요. 정관, 정견.

그러면 눈의 삼매가 어떤 거냐. 안견색(眼見色)하고, 눈으로 색을 본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게 다 색이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 사물이 다 색인데, 눈으로 온갖 사물은 다 보고, 분별색(分別色)하되, 보이는 것을 분별해서 다 구분을 해요. 요거는 물질이다, 요거는 물이다, 나무다, 여기는 똑같이 다 하는 거예요.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아니 불자,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따라서 생각한다는 말은 이걸 꼭 가져야 된다, 이걸 꼭 버려야 된다, 이건 값이 비싼 거다, 이건 가치가 없는 거다, 이렇게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 소리예요. 이 수념이 문제예요,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따라서 생각하는 게 문제에요. 보고 듣는 덴 허물이 없어요. 따라서 생각하는 게 허물이요. 이 수념 때문에, 따라서 생각하는 번뇌망상 때문에 중생이 고통을 받는다 이거죠. 그래서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색을 보고 색을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색진삼매(色塵三味). 보이는 티끌로부터 다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 이거 참.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이거 보는 데는 허물이 없어요. 근데 이거는 내가 싫어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좋아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저 밖에서 요령소리가 나오면 들을 뿐이에요. 근데 저게 무슨 소리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다, 내가 싫어하는 소리다, 이렇게 하는 건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망상이에요. 걱정근심이란 건 전부 망상에서 오는 거예요. 죽어보지도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거든요. 이게 번뇌망상이에요. 아이, 죽어보면 될 거 아니에요. 미리 걱정하지 말고. 똑같아요.

이문성(耳聞聲)하고, 귀로 소리를 듣고, 분별성(分別聲)하되, 소리를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성진삼매(聲塵三味), 듣는 티끌로부터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똑같이 나와요. 비문향(鼻聞香)하고, 분별향(分別香)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향진삼매(香塵三味). 코로 냄새를 맡고, 맡는다는 말은 들을 문자를 써요, 똑같이. 들을 문. 냄새를 코로 듣는다. 맡는다 이 말이죠. 맡고. 분별향하되, 냄새, 향기를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향진삼매라. 냄새로부터 삼매를 얻어요. 정관, 정견, 자재를 얻어. 설상미(舌嘗味)하되, 혀로 맛 볼 상자가 있는데, 맛을 맛보되, 설상미하고, 짜고 맵고 한 맛을 맛보고, 분별미(分別味)하되, 맛을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게 미진삼매(味塵三味). 맛의 티끌로부터 삼매를 얻는다. 신각촉(身覺觸)하고, 몸으로 촉각을 느끼고, 분별촉(分別觸)하되, 촉을 분별하되, 내가 접촉한 대상이 차냐 더우냐 이런 걸 다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촉진삼매(觸塵三味). 의분별(意分別) 일체법(一切法)하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기억 속에. 그래서 색성향미촉을 외진(外塵)이라고 그러고, 바깥 티끌, 법을 내진이라고 그래요, 기억 속에 있다고, 안에 있는 티끌이다. 그러면 우리 의식 속에는 온갖 사람도 있고, 물질도 있고, 그냥 걱정도 있고 다 있어요. 기억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이게 조금 후에 내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를지 아무도 모르고요, 또 오늘 저녁에 잘 때 무슨 꿈 꿀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 기억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마치 허공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기억을 하되 그 기억에 안 따라가면 돼요.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느끼고 내버려 둬요. 그러면 그것이 법진삼매라(法塵三味). 기억을 안 일어나게 한다든지, 기억을 멀리한다든지 이건 잘못이고, 기억이 일어나면 기억을 느끼되 그 느끼는 기억에 못 하는 생각이나 나쁘다는 생각을 안 일으키고 자기 평상심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그게. 기억의 삼매라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게 중생의 번뇌망상에서 자성청정심, 해탈 경지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매이지 않는 훈련을 해야 되요. 공연히 매이는 거예요. 몸에 매이고, 그래서 몸 꾸미려고 애를 쓰는데 몸 그거 꾸며봤댔자 화장할 때 아무 소용도 없고요. 이러면 또 성형외과 의사분들이 들으면 싫어할 거 같아. 그런 거예요. 그리고 집 꾸미려고 그러고, 여러 가지 꾸미려고 그러는데, 그거 다 부질없는 거거든요. 그러면 뭐가 중요하냐. 내 생각이 자유로운 거. 생각이 자유롭다라는 건 매이지 않을 때 생각이 자유로워요. 그래서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듣되 듣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재를 얻으면 이것이 중생의 번뇌망상 속박에서 해탈경지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에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