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백중기도] 7월 11일 백중기도 초재 법문 2021-07-11

20210711 백중기도 초재 가섭스님 법문

 

반갑습니다. 저번 주에 백중 입재를 하고, 첫 번째, 백중 7재 중에 오늘은 초재입니다. 올해 백중은 작년 코로나 이후에 맞는 백중이다 보니까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올해 백중은 앞으로 저랑 몇 번을 만나면서 백중기도를 해 나가실 건데, 저는 올해 백중의 큰 주제로 <대전환, 그리고 공동체> 이렇게 정했습니다. 저번 시간에 첫 번째 입재할 때도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데 우란분이라고 하는 것, 우란분재라고 하는 것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라고 하는 뜻이라고 그랬죠. 거꾸로를 바로 하는 게 우란분재의 원래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전환이에요, 전환. 돌린다, 그런 뜻이거든요. 불교의 수행, 신행이라는 것이 돌리는 거거든요. 돌리는 거. 이고득락도 돌리는 거죠. 괴로움을 돌려서 즐거움을 얻는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괴로운 마음을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돌리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은 이렇게 백중이란 거 자체가 원래의 조상을 모셔서 좋은 법담을 들려 드리고 또 법연을 열어드리는 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마음의 전환이에요, 돌리는 거예요. 그리고 백중이라는 것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전환 시키는 것 플러스 공동체의 마음을 갖는 거예요. 결국은 백중이라고 하는 것이 백 명의 대중을 모셔서 백 가지 음식을 차려 가지고 그 은덕으로 본인의 부모님을 좋은 곳으로 인연 맺게 하는 그러한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 내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혼자 기도하고, 혼자 수행하고 혼자 덕을 쌓아서 좋은 갈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쉽게 말하면 우리 승가공동체나 아니면 우리 수행공동체나 우리 불교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서 함께 그 공과 덕을 나누어서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백중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 대전환이라는 것과 공동체라고 하는 의미를 제대로 새기는, 자기화하는 그런 것이 바로 백중의 참의미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번 주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백중의 유래와 공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백중을 하는 우리의 목표,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다, 보통 output이라고 얘기하죠, 효과. 백중을 해서 우리가 어떤 효과를 누릴 거냐.’라는 것으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첫 번째는 법연을 베풀어서, 법연의 주인공이 이기 때문에 백중의 7재는 내가 직접 참여하고 잔을 올려드리고 경전을 같이 독송하면서 부모님에게,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드리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죠. 그냥 입재만 해놓고, 물론 스님들이 알아서 정말 여법하게, 특히 우리 진관사 같은 경우에는 많은 스님들이 정말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극정성으로 간절하게 해드리지요. 거기다가 내가 와서 직접 잔을 올려드리고 독송을 같이 하는 것, 이게 합쳐지면 그 공덕이야말로 뭐라 비교할 수가 없죠.

그리고 중요한 게, 법연을 내가 스스로 참여하는 것, 내 마음을 밝히는 것을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육정참회라는 걸 얘기했어요, 육정참회. 육정참회는 불교의 수행 중에 굉장히 중요한 항목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원효스님께서도 육정참회론이라든지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6가지 기관을 가지고, 6가지 기관을 잘 관리하는 것이 수행의 깊이를 더하고 또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가장 기초적인, 가장 기본적인 수행의 단계다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죠. 그리고 육정을 단속을 해야 수행이란 맛을 볼 수 있어요. 육정을 그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놔도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 말이죠. 그래서 이 수행이라든지, 기도라든지, 신행이라든지 이것은 안이비설신의 이 6가지를 잘 관리 감독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라는 거예요. 이걸 그대로 놔두고, 내가 기도를 해서 가피를 얻고, 성취하겠다는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를 논밭에 풀어놓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면 가을에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없죠. 그래 놓고는 뭐가 이루어졌니, 뭐가 안 이루어졌니, 좋으니, 나쁘니, 영험하니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아무 소용이 없는 얘기에요.

그래서 육정참회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밝혀야 되는데, 육정참회를 하다 보면 그다음에 실상참회가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설명이 약간 부족했어요. 시간이 몰리다 보니까 조금 부족했는데, 이 실상참회는 <모든 상은 비상이다>라고 생각한다고 했어요.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모든 상이 있는 거 자체가 인연 따라 이루어진 거지 원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집착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상은 비상이다. ‘그 비상인 것이 여래의 모습이다그랬어요, 부처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법이다. 법은 연기다. 이렇게 죽 연결이 되는 거죠. ‘우리가 당신은 부처님입니다라고 맨날 진관사에서는 인사말을 하는데 그 부처님이 그대로 비상이다라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란 거에요. ‘당신은 부처님입니다하면 이 법문을 들은 분들은 , 내 모든 것들이 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다 비상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핵심이거든요. 그래야 번뇌 근심 걱정이 내려앉을 수가 있어요. 이 비상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가 잘 안 되면 그래서 비유를 든 게 허공 비유에요. 저번 주에는 컵 뚜껑을 들고 얘기를 했는데, 여기에 종이 한 장이 있으면 종이 한 장을 다 태운다고 불을 붙여 태울 때 종이가 다 타고나면 재가 남잖아요. 재도 바람에 싹 날아가면 아무것도 안 남잖아요. 이게 비상이란 말이에요. 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허공을 의지해서 불도 나고 종이도 타고 재도 남고 재도 다 사라지지만, 그 허공은 그대로 있단 말이에요. 허공에 비유한 게 비상이에요. 허공에 비유한 게 여래이고, 허공에 비유한 게 부처님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요 대목이 약간 설명이 부족해 가지고 복습하는 차원에서 같이 했어요.

 

제가 오다 보니까 서울시교육청에서 버스 정거장에 광고를 붙여놨는데 카피가 있어요. 카피, 광고문인데, 뭐라고 돼 있냐 하면 <지구의 온도, 배울수록 내려갑니다.>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밑에 부제로 설명이 휴지 대신에 손수건을 쓰고,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보다는 텀블러를 쓰고, 그러면 글을 아는 만큼, 배운 만큼 지구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거예요.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서 지금 난리거든요.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도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인지를 못 하지만, 우리가 인지 못 하는 사이에 지구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요. 지금 캐나다 이쪽에서는 난리입니다. 왜 난리냐. 온도가 55도까지 올라가요. 수돗물을 틀면 뜨거운 물이 나와요. 그런데 또 계절이 바뀌는데 폭설이 내려요. 이런 기후의 변덕스러움이 왜 왔느냐. 원래 지구가 그런 거냐. 안 그렇다는 거예요. 지구는 원래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너무 많은 자원으로 너무 많이 소비하다 보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그걸 그대로 갖다 쓰면, 그 출발이 어디냐 하면, 우리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 카피를 보면서 배운 만큼 지구 온도가 내려가는 만큼, 우리가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만큼 우리 마음의 욕망의 온도도 내려간다. 그러니까 백중이라고 하는 이 기도는 여름 뜨거운 삼복에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를 내리는 거예요, 핵심이. 적어도 그렇게 해야 된다. 지금 백중기도를 하면서, 입재 해서 같이 오면서,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만 드글드글 끓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의 온도를 확 끌어올리는 재료가 되는 게 있어요. 그게 다섯 가지의 욕망과 일곱 가지의 정 때문에 그래요. 오욕칠정이라고 그럽니다. 오욕칠정. 다섯 가지 욕망이 있거든요. 우리가 먹는 식욕, 요즘에는 많이 먹어서 병이 되지, 많이 안 먹어서 병이 나는 사람은 없어요. 많이 먹어서 병이 나잖아요. 그게 식탐이에요. 식욕, 많이 먹어서. 그리고 잠에 대한 욕망인데, 이것은 좀 부지런해야 되는데, 부지런하지 않고 자꾸 눕고 싶은 거예요.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서 있다가 앉는 것만 해도 얼마나 편한데요. 이건 해본 사람만 알아요. 젊을 때 기도를 한다고 4시간 반, 다섯 시간을 서 있던 적이 있어요. 정근할 때. 지장청을 하는데, 4시간을 계속 서서 지장청을 한 거예요. 중간에 사제나 다른 스님이 교대를 해줘요. 교대를 해줘서 목탁을 옆에서 쳐줘요. 목탁을 네 시간 동안 치다가 목탁을 내려놓으려고 하면 손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목탁을 한 십 분 동안 들고 있어요. 그러다 서서히 움직이면 점차 펴지잖아요. 네 시간 동안 서 있다가 앉으면 관절에서 아우성을 쳐요. 뚝뚝 소리가 나고. 그런데 무릎 꿇고 앉는 순간,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한 거죠. 사람은 지금보다 더 편한 걸 자꾸 찾는 거예요. 수면욕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런 오욕이라는 것에 항상 우리가 얽매져 있고, 그죠. 오욕 때문에 내 마음의 욕망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요. 이걸 내려놔야 되요. 내려놔야지만이 된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마음을 전환시켜야 되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천년고찰 진관사에 그동안 많이 왔다 간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왔다 간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현재 바라고 이루고자 한 것들을 와서 바래서, 기원해서, 바람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열에 여덟은 진관사 와서 마음을 돌린 거예요. 마음을 전환시킨 거란 말이에요. 이 자리에 오신 분들도 마음을 전환시켜야 되요. 어떻게? 내 마음에 들끓던 그 마음들을 나 스스로가 관찰하고 내려놓으려고 노력을 해야 되요. 그래야 진관사의 천년 역사의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어요. 주파수가 맞을 수가 있어요. 진관사라는 이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진 훌륭한 멋진 도량은 그런 에너지의 응집력이 있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와야 그걸 타가는데, 엉뚱한 채널을 가지고 오니까 와서 기도를 해도, 안 한 거 보단 좋지만, 크게 마음의 전환에, 크게 마음의 기쁨에, 마음의 충만함을 얻어가지 못한다.

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희로애락이잖아요, 희로애락. 희로애락이란 게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하는 거예요. 마음을 느끼는 거란 말이죠. 그렇게 이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더 나아가서는 그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그렇게 이쁘고 아름답고 멋있던 사람이 같이 살다 보니까, 같이 살다가 낳아보니까, 지금은 눈에 넣어서가 아니라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으면 좋겠다. 얼마나 속을 징글징글 썩이는지. 그게 다 이 칠정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이쁘고 아름답고 멋있는 것이 살다 보니까 웬수가 따로 없어.’ 라고 느끼는 것. 그게 칠정 때문에 그렇다는 거.

그래서 우리가 백중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의 오욕칠정을 통해서 올라가는 우리의 마음의 온도를 내려야 된다. 그것에 백중의 참의미가 있다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은평구를 운전해서 오는데 언덕이 몇 개 있어요. 어떤 40대 후반에서 50대 되는 거사님이 서울시에서 운행하는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앞에다가 가방을 큰 거 하나를 싣고, 비가 오니까 누구를 마중하러 가나 봐요, 우산 두 개를 싣고 가는 걸 운전하고 오면서 봤어요. 그 언덕배기를 낑낑대고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보기엔 내려서 끌고 가는 게 더 편할 거 같은데, 언덕을 얼마나 힘겹게 올라가는지 내가 옆에서 지나치는 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정도로 용을 쓰면서 올라가요. 언덕배기에 딱 올라갔는데, 제가 신호에 걸렸어요. 근데 그 거사님이 그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와 가지고 언덕에 올라오는 순간 좍 내려가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내리막이니까. 내려가는데, 내가 신호가 풀리면서 지나가면서 그 거사님을 유심히 봤어요. 얼굴과 몸이 땀 범벅이에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걸 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자전거를 타면서 언덕배기를 올라오는 사람이 요거만 올라오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하다는 걸 아는 거죠. 그러니까 참고 그 언덕배기를 땀을 흘리며 올라오겠죠.

그런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오욕칠정 때문에 내가 부글부글하는 걸 알아요. 아는 데 거기서 그친단 말이에요. 이걸 전환시켜서, 이 오욕칠정의 욕망을 조금 전환시켜 가지고 우리가 마음을 쓰면, 그 오욕칠정이라는 것이, 아까 얘기했듯이 전부 다 비상이야, 원래 상이 아니야, 원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현재 느껴지는 인연 따라 온 감정일 뿐이야라고만 알아차려도 큰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걸 모르니까 만날 거기에 끌려가는 거예요, 오욕칠정에. 부글부글, 뽀글뽀글, 찌글찌글 맨날 그러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백중 7재 동안에 진관사에 오면서, 진관사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쌓았던 기도의 공덕을 오롯하게, 고스란히 내가 담아가려면 그 마음의 전환을 해야 한다. 그것을 안 하고는 절반밖에 가져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능소화가 늘어지게 필 때에요. 능소화가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런데 능소화가 질 때는 더럽기가, 촌스럽기가 이를 데가 없어요. 우리가 능소화가 환하게 필 때는 참 화려하다, 예쁘다 그러는데, 능소화가 질 때는 아따, 더럽다, 추하다그런단 말이에요. 우리가 태어나거나 살아갈 때는 꽃을 보듯이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내는데, 늙거나 죽음을 앞두거나 죽으면,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해요. 이게 분별심이거든요, 분별심.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이 죽음에 관련된, 과연 죽음이란 게 두려운 거냐,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공동체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셔서 마음의 온도, 마음의 욕망의 온도를 우리가 수행하고 신행할수록, 알아갈수록 자신의 마음의 욕망의 온도는 내려간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말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