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11월 7일 49재 법문 2022-11-07

 

지심제청 지심제수

世身無住 生滅無定

세신무주 생멸무정 

猶如露電 夢幻泡影

유여로전 몽환포영

本身靈明 寂照含空

본신영명 적조함공

却觀世間 相似昨夢

각관세간 상사작몽

나무아미타불

 

        오늘 천혼 당령, 천도하는 혼령에, 해당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진관사에서 대법회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영가께서 극락세계에 가는데 극락세계는 어떻게 가는가.

 

 

        세신(世身), 세상 세자, 몸 신자, 세신은 부모에게서 받고, 세상에서 자랐는데, 부모 떠나고 세상 떠나면 없는 몸이다. 그걸 세상 몸이라고, 세신이라고 하죠. 이 세상 몸이라는 것은 부모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또 세상에 있는 공기, 세상 음식, 세상 의복, 이 세상 물질 떠나서 이 몸은 없다. 그런데 이 세신은 머묾이 없다. 무주(無住)하여, 없을 무, 머물 주, 머묾이 없어서, 생멸이 무정이니, 이 나고 죽는 것이 정해진 게 없다. 생멸이 무정(生滅無定)이라. 태어나서 언제 이 몸을 마칠지, 어떻게 마칠지 전혀 정해진 게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몸이 나고 죽음이 정해진 거 없는 것이, 마치 비유로 들자면,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고,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猶如露電 夢幻泡影), 이런 말씀인데요.

        이슬이라는 건 뭐냐. 이 몸이라는 게 가만히 보면 신여조로(身如朝露). 아침 이슬이다. 아침 이슬이 처음 생길 때는 아주 영롱한데, 해가 뜨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게 아침 이슬인데, 인생이라는 게 초로(草露)와 같다.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 이제 이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또 이 세상 몸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어떻게 빨리 지나가는지 번개와 같다. 한평생이 번개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사람은 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데, 과거가 꿈과 같다. 내 개인의 과거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내 생각 속에만 있는 게 내 과거인데, 나의 과거에 좋았던 일이나 힘들었던 일이 전부 꿈과 같다.

        그리고 세상사가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문화라든지 형식이라든지 역사가 다 환과 같다. 환이라고 하는 것은 허깨비를 말하는데 허깨비가 뭐냐. 사람 인형을 만들어서 그 뒤에서 다른 사람이 그 인형을 조종할 때, 뒤에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그 인형을 환이라고 그래요. 허깨비라고. 그래서 이제 성 위에 인형을 올려놓고 그 성 뒤쪽에서 줄을 올렸다 내렸다 해서 그 성 담 위에 있는 인형을 움직이는데 그걸 보고 환이라 그러고, 그 뒤에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이거죠. 그러면 이 세상 만물이라는 게 사람들이 다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다. 그래서 세상 만물을 환이라고 그래요. 허깨비라고. 정해진 게 없고. 사람들이 만드는 대로 초가집을 만들면 세상 만물에 초가집이 수북하고, 기와집을 만들면 기와집, 고층 빌딩을 만들면 고층 빌딩, 나무를 잘 가꾸면 살림이 울창한데 이걸 전부 베어내 버리면 그냥 민둥산만 보이고, 세상 만물은 전부 인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다, 이렇게 가르치고.

        물거품이라는 게 있는데 물거품이라는 건 뭐냐. 인간의 감각이다. 사람은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감각이 견문각지(見聞覺知)라고 가르쳐요. 눈으로 보고 견, 귀로 듣고 문, 코로 입으로 몸으로 느끼고 각 의식으로 알고, 판단하고, 이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냥 물거품처럼, 이게 영원한 게 아니고 사라져요. 이게 뭔 소리냐면, 태어났을 때 감각하고, 또 아동 시대의 감각하고, 소년 청년 시대의 감각하고, 노년 시대 감각하고, 이 감각이 다 틀려요. 그래서 그전에 전혀 나도 몰랐는데, 칠십이 넘어보니까, 우선 이 보이는 감각이 틀려요. 옛날엔 딱 보면 그냥 확 다 들어왔는데, 요새는 옆에 있는 것도 안 보여요. 눈앞에 가까운 것만 보이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 봐요, 늙으면.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맨날 없다고 그래요, “야 없다. 없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가면 바로 있거든요. 그게 감각이 틀려서 그래요. 나 그거 옛날에 몰랐어요. 맨날 없는 게 그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못 봐요. 그리고 기억도 어릴 때는 기억을 하는데 어제 한 거 기억 못해요. 그래서 이 감각이라는 게 영원한 게 아니고, 이게 물방울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건데, 그걸 모르면 그게 기억이 허망함을 모르게 된다. 다 틀리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감각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이 몸이 있는데 이 몸을 감각을 일으키는 뿌리라고 그래요. , 뿌리 근자. 감각을 일으키는 뿌리라고. 그럼 이 감각을 느끼려면 대상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보는 대상, 듣는 대상. 그래서 근이, 대상은 불교에서 경계 경자를 쓰는데, 경계, 근경(根境), 그래서 이 몸과, 몸과 다른 대상 경계에 딱 마주치면, 이걸 촉경(觸境)이라고 하는데, 어려운 말로, 몸이 경계에 접촉한다, 촉경. 그러면 이 몸에서 의식이 발동을 해요. 이걸 발식(發識)이라고 그래요. 촉경하면 발식을 하는 게 이게 근인데, 이 근이 노화된다든지, 근이 기능이 떨어지면, 발식 자체가 둔해요. 눈이 또 뭘 보는 게 그게 촉경인데, 촉경하면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거기서 의식이 일어나야 돼요. 발식을 해야 보지 발식을 못하고 이 몸이 그냥 시신이 됐다든지 하면 못 보는 거예요. 근데 이 몸이 숨 떨어지기 전에도, 이 몸의 이 뿌리 상태가 쇠약하니까, 보는 감각이나 듣는 감각이나, 그래서 나이 들면 옛날에 맨날 물어요, ‘뭐라고? 뭐라고?’ 그래서 다 싫어해요. 두 번 물으면 다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늙으면 숨지기 전에 이미 감각이 많이 3분의 2 이상이 죽어서 살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세상의 몸이다.

        그리고 그림자라는 게 있는데 노전몽환포(露電 夢幻泡). 포는 물결, 감각을 말하고, 그림자는 의식 자체를 말하는데, 뭐를 사람이라고 하느냐. 첫째는 숨을 쉬어야 사람이고, 그래서 숨 쉬나 이걸 꼭 확인하거든요. 두 번째는 의식이 있어야 사람이에요. 의식이 있나. 사람 알아보나. 이걸 묻는다고. 근데 이 의식이라는 게 전부 세상에서 익힌 걸 의식이라 그래요. 세상 의식. 그래서 이 의식을 불교에서 어떻게 깨달았느냐 하면은 현행(現行)의식, 나타날 현자하고, 행할 행자하고, 현행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밖으로 움직이는 의식인데요, 외현(外現)인데, 이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의식이고, 들을 수 있는 거 의식이고, 행동하는 거 의식이고, 이게 다 현행 의식인데, 보통 사람은 이제 이것만 알아요. 그런데 그 현행 의식이 한 번 경험이 되면 이게 전부 쌓여요.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걸 함장식(含藏識)이라 그래요. 포함할 함자, 저장할 장자. 내가 뭘 봤던 건 그냥 그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함장이 돼, 포함해서 저장이 돼요. 들었던 것도 저장이 되고, 이걸 줄여서 장식이라고도 하고, 안다 이 말이죠. 의식이라는 식자 포함해서 저장됐다 이 소리죠. 그리고 이게 어느 순간 되면 다시 나와요. 나오는 건 현행이고, 저장되는 건 장식인데, 그래서 나오는 그 기능을 종자라고 한단 말이죠. 장식은 또 종자식(種子識). 그래서 함장식, 종자식이 딱 속에 있어요. 다 함장 종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뭐 오늘 진관사에 다녀왔다.” 그러면 이게 다 함장이 되고 그게 종자가 돼서, 진관사라는 말만 들어도 오늘 다녀왔던 게 튀어나와, ‘그랬다. 그래서 진관사는 어떤 거다.’ 다 그 기억하는 대로 행동을 하게 돼요. 그래서 이거를 현행식, 종자식. 이 종자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봐도 몰라요. 내가 이런 걸 보면, 이거는 어릴 때부터 이거는 종이다, 이거는 글씨다, 종자가 딱 만들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이거 보면 , 이거 종이지, 글씨지딱 알아요. 근데 이걸 전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 이거 내놓으면 이거 몰라요. 근데 이 종자식이 전부 행동하는 데서 생기고, 행동하는 것이 저장돼서 다시 또 현행으로 나오고, 현행이 다시 종자가 되고, 종자가 다시 현행이 되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해요. 이걸 세간 몸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그림자라는 건 뭐냐 하면은, 내가 물에 들어가서 물을 딱 보면 그 물 안에 내 모습이 있는데, 내가 그 물속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그 물속에 지금 그림자로 비춰진거다 이 소리잖아요. 거울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내가 뭘 보든지 자기 종자 의식으로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보는 건 자기 다 의식의 그림자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참 중요한 가르침이에요, 이 가르침이. 내가 사람을 봐도 어떤 사람은 어떻다.’라고 속에 다 저장된 종자 의식에 따라서 지금 그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 저장된 종자대로 본다. 그러니까 이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 종자 의식의 그림자라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라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이제 요즘 심리학이나 다른 정신의학에서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써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근데 불교에서는 무의식이라고 안 하고 종자식이라고 그래요. 그게 무의식보다 종자식이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소리예요. 무의식은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면서 행동하는 걸 무의식이라고 그러는데,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걸 의식이라 그러고, 여러 사람이 똑같이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는 걸 집단 무의식이라고 그러고, 또 개별 개별 행동하는 걸 개별 무의식이라고 그러는데, 불교에서 가르치는 거는 현행식, 종자식. 현재 움직이는 거는 현행식인데, 그 움직이는 바탕이 종자가 저장돼 있어서 그 종자에 의해서 현재 행동을 나타낸다는 거예요. 이게 현행이에요.

 

        그러니까 한평생 산다는 게 전부 생각으로 살고, 몸으로 살고, 이렇게 허깨비로 살고, 번개같이, 살고 꿈같이 살고, 이슬같이 산다. 불교의 이 한 평생 사는 의미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종자 의식 속에는 뭐가 있나. 그거는 세신이라고 안 하고, 근본 본자, 몸 신자, 본신(本身)이라고 그래요. 본래 몸. 그럼 극락세계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없어지는 그 몸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몸도 생각도 세상 건 세상에서 사라져요. 근데 안 사라지는 게 있는데 그건 본래 몸이다. 본신이 있다. 그래서 이 본신이 뭐냐 하면, 의식이 아니고 성각(性覺)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본성이라는 성자, 깨달을 각자. 각은 안다는 말인데, 세상에서 익히고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본성이 안다. 그래서 이걸 성각이라고 그러고, 의식은 생각이 안다, 생각 의, 알 식. 그래서 이제 마음이라고 그럴 때 그 본성이라는 본성심이 있고, 세상에서 익혀서 세상대로 아는 의식심이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의식은 세상대로 보는 거고, 그 본성이 아는 거는 본래 마음이 아는 거다. 이거 성각. 의식. 극락세계는 성각이 가는 거예요. 의식이 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성각으로 돌아가서 딱 보면, 의식으로 볼 때는 좋고 나쁜 게 있는데,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쁘냐. 내 몸에 필요한 건 다 좋아요. 근데 내 몸에 필요치 않은 건 다 나빠요. 순전히 이 세상 몸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내 몸을 위해서 살아요. 나이가 드나 똑같아요. 나이 든 사람이라고 나은 거 하나도 없어요. 노인도 보면 순전히 자기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몸에 필요한 대로 말을 해요. 그러니까 인간을 믿으면 곤란해요. 그럼 누구를 믿어야 되냐. 그 본래 본성의 마음에 가까운 사람 말은 믿어도 돼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아버지 좋은 대로만 하게 돼요.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식 좋은 대로만 하게 돼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볼 때는 이 몸에 필요 없는 건 다 원하질 않아요. 그런데 이 본성의 마음으로 보면 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이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전부가 극락세계예요. 그래서 의식심에서 성각 본성이 아는 마음으로만 돌아가면 자기 엉덩이를 움직이지도 않고 극락세계에 간다. 그러니까 이게 의식심으로 보면 이게 괴로운 건데, 본성심으로 돌아가면 괴로움이 없어요. 전부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석가모니와 그 석가모니 대단한 제자들이 이걸 깨달은 거예요. 본성으로 돌아가면 모든 세계가 다 극락세계다. 의식으로 판단하면 내 몸에 좋은 건 좋다고 하고, 내 몸에 안 좋은 건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좋고 나쁜 게 있는 거를 사바세계라고 그러는데요. 사바세계라는 말은 고와 낙이 있다는 소리예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는 소리인데, 극락세계라는 말은 괴로운 거 없다는 소리예요. 지극히 즐겁다. 그러니까 괴로운 건 하나도 없고 즐거운 것만 있다. 그거 왜 그러냐. 이 몸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본래 아는 지혜로 보니까, 하늘을 봐도 하늘이 즐겁기만 하고, 고통이 없고, 땅을 봐도 땅이 즐겁기만 하고 고통이 없어서 무유중고(無有衆苦)하고, 많은 고통은 하나도 없고, 단수제락(但受諸樂)이라, 다만 모든 즐거움만 받는다. 근데 어째서 그러냐. 의식심으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있는데, 성각심으로 보면 나쁜 건 없다. 나쁜 거 없는 걸 극락세계라고 하고, 법계실상(法界實相)이라고 그러는데, 법계는 온 우주인데, 우주의 진실상이다. 법계실상.

 

        그럼 부처님은 거기에 갔어요. 근데 오늘 영가는 그런 업을 많이 못 익혔기 때문에 의식심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의식심으로 돌아가신 분이 성각심으로 머무는 극락세계에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 그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간다. 그걸 가피(加被)라고 그래요. 인도 받아서 가는 걸 가피로 간다. 가피라고 하는 건 더할 가, 증가할 가자, 입혀줄 피자. 자기 힘으로는 못 가도 이제 인도를 받으면 간다 이거거든요. 어린아이가 어른 따라가면 가듯이. 그래서 부처님의 가피로서 이 오늘 영가가 극락세계에 가시기를 발원하고 예경하는 것을 재를 올린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고요. 그러면 이런 공덕으로 오늘 영가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극락세계에 가시게 된다.

       그러면 세신은 여섯 가지 비유로, 노 이슬, 전 번개, 몽 꿈, 환 껍데기, 포 물거품, 영 그림자, 이렇게 여섯 가지 비유로 세상의 몸을 설명하는데, 그럼 본래 몸은 어떤 거냐. 본신은 영명하다(本身靈明), 신령 령자, 밝을 명자, 신령스럽고 밝다. 신령스럽다는 말은 이 본신은 주소가 없어요.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산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이 몸을 움직이지만 몸에도 안 머물러요. 몸에도 몸 조사해 보면 그 신령스러운 성각의 마음이 안 보여요. 그래서 옛날 한자를 보면 그 마음 심자를 심장 모양으로 만들었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이 마음이 심장에 있는 걸로 알았는가 봐요. 그래서 마음 심자를 심장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심장 열어봐도 마음 안 보여요. 몸 열어봐도 마음 안 보여요. 그래서 이걸 영명성각(靈明性覺)이라고 그래요. 신령스럽게 밝은 본성의 마음이다. 영명성각은, 적조(寂照)가 적이라는 건 고요할 적잔데, 그림자가 없어요. 모양이 없어요. 그런데 항상 비추어 비출 조자. 적조가 얼마나 오래 많은 곳을 비추냐. 시간도 끝이 없고 공간도 끝이 없어요. 이걸 함공(含空)이라고 그래요. 머금을, 삼킬 함, 허공 공자. 허공을 다 삼켜버려, 끝이 없어요. 그래서 이 본신은 영명하여 적조가 함공(寂照含空)하니, 고요히 비치는 것이 허공을 다 삼켜버리니, 이게 우리 본래 몸이에요. 그래서 그 본래 몸을 떡 깨닫고 각관세간(却觀世間)하니, 다시 세상에서 받은 몸을 이렇게 보니, 본래 몸의 상태에서 세상 몸을 보니, 상사작몽(相似昨夢)이라, 상사라는 건 같다 이 말인데요. 작몽은 어제저녁에 꾼 꿈을 어제 작, 꿈 몽, 작몽이라고 그래요. 어제저녁에 꿈을 꿨는데, 오늘 아침 보면 꿈이 간데 없거든요. ‘다 엊저녁 꿈의 일이야.’ 이런 말이 있어요. 꿈꿀 때는 분명히 확실하게 있었는데, 꿈 깨고 나면 없어. 그래서 한 평생 이 몸 가지고 살 때는 너무 분명하고, 너무 아주 심각했는데, 한 목숨 딱 지고 나면 간 곳이 없어요. 남는 건 본래 마음뿐인데, 그 본래 마음은 아직 못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겨우 찾는다는 것이 또 세상 몸을 다시 찾아요. 이걸 윤회라 그래요. 극락세계에 못 가고 세상 몸을 다시 찾는다. 근데 극락세계에 가게 되면 이제 부처님 나라로 가는 거예요. 이걸 왕생이라 그러거든요. 가서 난다. 극락왕생. 극락왕생을 이제 안 하면 생사 윤회하는 거예요. 죽고 사는 걸 되풀이 하는 거지. 그래가지고 생사윤회냐 극락왕생이냐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생사윤회 극락왕생. 엊저녁에 꿈과 같아서 이게 내 본래 몸으로 세상 몸 보니까 이거 그냥 완전히 한바탕 꿈이었다. 그래서 도 닦는 사람이 이 의식의 마음을, 보고 듣고 하는 이 견문각지의 마음을 잠시 다 처음에는 모으고, 그 다음에는 살피고, 그 다음에는 맑혀서, 이 마음을 맑히는 건 아무것도 안 하면 저절로 맑혀져요. 하면 안 맑혀져요. 마음은 물과 같아서 이 더러워진 물을 맑히는 거는 그냥 가만 놔두면 맑혀져요. 근데 이걸 젓는다든지 막 움직이면 안 맑혀져요. 그래서 우리 혼란한 마음, 어지러운 마음을 맑히는 방법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럼 마음이 점점 조용해지고 점점 맑아져요. 마음이 어느 정도 맑아지면 잠시 잠시라도 이 세상 몸에서 본래 몸을 보는 때가 있어요. 그거를 뭐라고 하냐면 내가 이 몸을 벗어나 보는 체험을 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내가 이 몸이 있는데 이 몸에서 잠시 나와 보는 체험을 했다. 이 본래 몸을 경험했다, 이 소리예요. 내가 이 몸을 벗어나 봤다. 진짜냐. 모르죠, 다른 사람은. 근데 그게 사실이에요. 이 몸이 있는 상태로 그냥 본래 몸을 딱 본 거예요. 그리고 본 순간만은 이 세상 몸에서 벗어나 본 거거든요. 그러면 점점 그 생각을 맑히는 노력이 깊어지면 그 본래 몸에 딱 바탕을 두고, 이 세상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살아서 해탈하면 좋고, 그 다음 좋은 건 죽어서 극락 가는 거예요. 그다음 이제는 다시 죽고 사는 대로 되풀이 하는 거고. 그걸 가르치는 게 불교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믿고 지금 이렇게 49재를 다 지내고 있는 거지요.

衆生廣大無有邊이나 如來一切皆護念이로다

중생광대무유변 여래일체개호념 

轉正法輪하야靡不至하니 昆盧遮那境界力이로다

전정법륜 미부지 비로자나 경계력

(華嚴經 世界成就品)(화엄경 세계성취품)

나무아미타불

         그러면 이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장애가 전혀 없어요. 이게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그래서 중생이 광대하다(衆生廣大), 넓고 크다 그러면 끝이 없다는 말이죠. 중생이 많고 많고, 무유변(無有邊), 그 끝이 없으나, 여래가 일체를 개혼념(如來一切皆護念)이라. 그 본성을 깨달은 부처님들은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다 보살필 보호할 호, 생각 념, 다 보호해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사람 눈으로 생각하면 몇 사람 못해요. 근데 이 본성의 마음으로 살피면, 멀고 가까운 걸 다 살필 수가 있다, 이런 얘기죠. 그래가지고 전정법륜(轉正法輪)의 법륜을 가르치는데, 바른 가르침을 펼쳐서, 바른 가르침이라는 게, 이 의식의 마음은 항상 몸을 의지해서 세상 것만 따라가니까 그거는 생사윤회밖에 안 되고 해탈이 안 된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극락세계에도 가고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 자유를 느낀다. 이렇게 말하는 게 바른 가르침을 펼치는 거거든요. 바른 가르침을 펼쳐서 미부지(靡不至)하니,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구석구석에 다 이르는 게 이 본성으로 보살피는 노력이다, 이거예요. 이거는 비로자나 경계력(昆盧遮那 境界力)이라. 이 본성의 광명을 비로자나라고 하는데 비로자라는 건 대광명이란 소리예요. 대광명이라는 건 그늘 없는 광명, 그늘이 없어요. 또 시종 없는 광명, 처음과 끝이 없는 광명을 대광명이라고 그러는데, 그 대광명을 비로자나라 그래요. 비로자나 경계력이라, 비로자나께서 펼치는 힘이다. 그래가지고 이 깨달은 분이 머무는 세계가 극락세계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머무는 세계가 사바세계요. 사바세계는 괴로움이 있는 게 왜 괴로우냐. 이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몸에 안 좋으면 괴로운 거예요. 몸에 좋으면 즐거운 거고. 그래서 사바세계는 고락이 있고 극락세계는 고락이 없다. 이래가지고 비로자나 경계력인데, 오늘 영가께서 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극락세계에 가서 왕생하십시오, 이 말씀이거든요.

 

지심제청 지심제수

 

西方淨土 極樂世界 壽光無量 極樂世界

서방정토 극락세계 수광무량 극락세계

昆盧遮那 佛利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

비로자나 불찰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

華藏剎海 莊嚴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

화장찰해 장엄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

眞如實相 具足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

진여실상 구족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

一念往生하고 一超往生하시어 無盡福樂 無盡受用하십시오

일념왕생 일초왕행 무진복락 무진수용

       서방정토 극락세계라(西方淨土 極樂世界), 서방은 백방(白方)인데, 동서남북을 할 때 서쪽을 백에다가 비유를 해요. 백방은 본성 세계다, 이 소리예요, 서방은. 본성 세계는 더러운 건 없고 깨끗한 것만 있다. 그래서 서방정토 백방정토 이 말이죠. 본성정토. 그게 본성 정토가 서방정토에요. 극락세계다. 근데 극락세계는 수광무량(壽光無量)이요,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어요. 무량수 무량광 이러거든요. 그걸 아미타불이라고 그래요. 무량수 무량광.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한 걸 아미타라고 그러는데, 나무란 말은 공경, 기원 공경하고, 그쪽 근원으로 돌아간다. 공경 기원을 나무라고 그래요. 그러면 무량수 무량광의 세계에 공경심으로 돌아간다. 공경심이라는 말은 다른 생각 없는 걸 공경이라고 그러거든요. 잡념이라고 하는 거는 공경이라고 안 하고, 그냥 한 마음으로 일심을 공경이라고 그래요. 어떤 사람이 뭐 하다가 이거 해서 될까?’ 그러면 공경이 아니에요. 그냥 되는 걸로 한 마음으로 하는 걸 그걸 공경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수광무량 극락세계. 비로자나 불찰정토(昆盧遮那 佛利淨土). 이 비로자나불의 찰이라는 건 이 진토 티끌 흙덩어리를 찰이라고 그러는데, 그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국토, 진토 세계, 불찰 정토, 거기가 수광 무량 극락 세계다. 화장찰해 장엄정토(華藏剎海 莊嚴淨土), 화는 공덕인데 많은 공덕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바다, 바다도 많다는 소리고. 그 불찰의 많은 세계에 온갖 좋은 걸로 꾸며져 있는데, 나쁜 거 하나도 없이 좋은 걸로만 꾸며져 있는데 그걸 장엄이라고 하거든요. 장엄이라는 건 좋은 걸로만 가득하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그렇게 좋은 걸로만 가득한 정토, 수광이 무량한 극락 세계. 진여실상 구족정토(眞如實相 具足淨土). 참 그대로 본성, 참 그대로 진실상에 온갖 것이 없는 거 없이 좋은 건 다 있다. 그걸 구족이라고 하거든요. 구족, 갖추어졌다. 그 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에 오늘 영가께서 일념왕생(一念往生)하시고, 한 생각으로 가서, 한 일자, 생각 념자. 가면 될까 안될까 이 두 생각 갖지 말고, 한 생각으로 왕생, 가서 나시고, 일초왕생(一超往生), 한 번 딱 떼서, 한 걸음에, 한 일자, 뛸 초자, 한 걸음 딱 옮겨서 바로 가서 나셔서, 왕생하셔서, 무진복락(無盡福樂), 끝없는 복과 즐거움을 무진수용(無盡受用)하소서, 끝없이 받고 쓰소서.

 

        이런 법문으로 오늘 법문을 다 마쳤습니다. 49재 잘 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