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1월24일 음력 1월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3-01-24

 

        계묘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계묘년 정월 초3일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소원을 이루는 행위이다. 소원을 이루는 행위가 기도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불교에서 소원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교에요. 그래서 불교의 소원은 깨달음이죠. 깨달음. 깨달음이란 있는 걸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왜 깨달음을 얘기하는가. 인간의 모든 문제가 깨닫지 못한 데서 생겼다, 이렇게 가르치고, 깨달음을 이루는 동시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근데 그럼 깨달음을 어떻게 이루느냐. 범부라고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가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 그걸 어려운 말로 보리행이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보리는 깨달음이고, 행은 행위고, 범부보리행(凡夫菩提行). 이제 보살들이 깨달아가는 행위가 있어요. 그걸 보살보리행(菩薩菩提行). 그리고 이미 깨달음을 이루신 제불, 과거, 현재, 미래, 삼세제불께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를 하는가. 그걸 이제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

 

 

凡夫菩提行

범부보리행

念佛行 :

염불행 :

六法供養 獻供念佛 隨時禮敬 禮敬念佛

육법공양 헌공염불 수시예경 예경염불

如來名號 稱名念佛 輕典讀誦 持誦念佛

여래명호 칭명염불 경전독송 지송염불

 

禮懺行 예참행

罪業懺悔죄업참회 :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종신두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六情懺悔육정참회 : 内立六情 依而生識 外作六塵 執爲實有

내립육정 의이생식 외작육진 집위식유

不知皆是 自心所作 起諸煩惱 自以纏縛

부지개시 자심소작 기제번뇌 자이전박

(大乘六情懺悔,元曉撰)(대승육전참회, 원효찬)

 

誓願行 : 普賢菩薩 十種大願(普賢行願品)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범부가 이 깨달음을 이루는 기도 행위는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거든요, 범부들은. 작법(作法), 법을 만들어요. 지을 작자, 법 법자. 또 법을 세우는 형식을 가지고 한단 말이에요. 이걸 의식이라 그래요. 법 세우는 형식. 그래서 절을 어떻게 한다, 공양을 어떻게 올린다, 이게 전부 작법 의식이거든요. 이게 범부들이 하는 기도 행위예요.

 

       그러면 범부들이 하는 첫 번째 기도가 염불행(念佛行) 기도인데요. 염불. 생각할 염자, 부처님 불자. 부처님을 생각하는 행위의 기도인데, 왜 부처님을 생각하는가.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티끌 세간 경계예요. 육진(六震) 세간(世間)이라고 그러는데, 티끌 세간 경계, 눈에 보이는 티끌, 귀에 들리는 티끌 이런 거, 몸에 부딪히는 티끌, 티끌 경계만, 티끌 경계만, 꿈에서도 이걸 어려운 말로 진경(塵境)이라고 그러거든요. 티끌 진짜, 경계 경자. 이 세간 진경만, 진경만 생각하는 게 범부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모든 기억 속에, 생각 속에 남아 있는 게 사람 생각, 물질 생각, 자기 몸 생각, 과거 생각, 미래 생각, 그것뿐이에요. 인간이란 다 똑같아요. 말을 안 해도 그거 생각하고, 말을 해도 사람 생각, 물질 생각, 몸 생각, 과거 생각, 현재 생각, 미래 생각, 삼세 육진, 이거 빼면 없어요. 삼세 육진 빼면. 근데 그 삼세 육진이라는 게 전부 다 허망하고 무상해서 그냥 흘러가 버려요. 그래서 아무리 내 몸이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이거 얼마 못 가거든요. 그러면 몸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게 공허해요. 그거 몸 만든다고 요새 많이들 노력하는데, 그 만든 몸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사라져 갈 때 공허해요. 사람을 얻는다고 많이 노력하는데, 사람 얻는 것도 내 몸이 약해지면 사람도 다 떠나가요. 사람을 많이 얻은 것도 공허해. 공허라는 건 텅 비었다 이 말이죠. 물질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데 소유하던 내가 사라지면 내가 소유한 물질도 다 사라져요. 공허해요. 그런데 범부들은 그걸 모르고 이 삼세 육진만 추구할 수도 있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구하던 것이 그거니까 안 구할 수가 없어요. 모르고 하고, 알면서 구하다가 마지막에 공허하다, 가슴이 텅 비었다. 이게 나중에는 이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옛날 말로 때는 늦으리.’ 때가 늦었다는 거에요, 어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부처님이 제시한 게, <뭘 구해도 구하는 건 공하다. 깨달아라. 깨닫는 것만이 진실하다.>

        그래서 삼세 육진을 구하는 거와 전혀 다른 것이 염불이에요.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거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몸 생각, 사람 생각, 물질 생각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거든요.

       그럼 염불을 어떻게 하느냐. 작법 의식 염불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염불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공양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육법공양(六法供養) 헌공염불(獻供念佛), 공양을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공양물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염불이에요. 공양물을 잘 씻어서 불단에 올리는 것 자체가 다 염불이고 그렇거든요. 수시예경(隨時禮敬) 예경염불(禮敬念佛), 불전에 가서 수시로 때에 따라서 절을 딱 올리면 절하는 게 그게 염불이에요. 그래서 공양물도 올리고 절도 하고 여래명호(如來名號) 칭명염불(稱名念佛), 여래의 여러 명호를, 이름을 칭명한다, 부를 칭자. 이름 명자. 자꾸 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칭명염불이라고. 경전독송(輕典讀誦) 지송염불(持誦念佛).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잘 독송하면 그 경전독송 하나하나가 전부 염불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질 지자, 외울 송자, 항상 간직해서 외운다고 지송이라고 하거든요. 소지한다는 지자가 있어요. 외운다고 하는 송자. 지송염불.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혼자 해도 되지만 여럿이 할 때 작법 의식이 깊어지고 강해져요. 여럿이 하게 되면.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건 그게 아주 재미있어요. 누가 옆에 있으면 자기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성격이 있어요. 근데 혼자 있으면 편한 모습을 보여요. 인간이란 묘한 동물이에요. 그래서 혼자 들어가 있으면, ‘뻔하구나. 저 편케 있으라고 하는구나.’ 틀림없어요. 혼자 있으면 이제 편하게 지내려고 그러고, 옆에 누가 있으면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아주 본능적인 그런 습관이 나와요.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같은 동성끼리 같이 있는 거보다 남녀 이성이 같이 있으면 더 강한 걸 보이려고 더 애를 써요. 그거 참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남녀가 한 법당에서 동참을 해서, 대중을 형성해가지고, 이렇게 경전을 읽고, 공양을 올리고, 예경을 올리고 하면, 나에게 있던 그동안 그 감춰져 있던 능력들이 막 솟아나요. 그리고 지금까지 구했던 삼세 육진을 쫓아다니던 그런 습관들이 사라져요. 그래서 이거를 어려운 말로 <죄업은 소멸하고 선업은 증장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죄업이라는 건 나에게 괴로움이 되는 삼세 육진을 구하던 그런 것이 다 죄업이에요. 그래서 죄업은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해서 소멸을 하고, 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선업, 좋은 업은 증장을 한다. 더욱더 성장한다 이 말이죠, 증장이라는 말은. 그거를 이제 기도라고 그래요.

 

       그리고 예참(禮懺)기도가 있는데,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참회를 하는 걸 예참이라고 그러는데, 예참은 죄업을 참회한다, 첫 번째가. 천수경에 보면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지금 옛적부터 지금까지 지은 악업인데, 악업이라는 건 뭐냐. 첫째는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는 게 악업이에요. 자해해타. 근데 나타날 때는 남 해치는 걸로 나타나요. 그런데 해타를 하면 그게 자해가 돼요. 자기를 해치는 게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자기가 이로와요. 지금까지 많은 복덕과 이익을 성취한 사람들은 다 남을 해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타(利他) 를 하면 자리(自利)가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나를 이롭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들은 우선 탐욕이 앞서니까 남 해치는 일을 하게 돼요.

        또 탐하는 대로 안 되면 분노가 일어나요. 그 탐욕과 분노가 전부 자기 어리석음에서 나왔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이거 알려면 굉장히 마음공부를 깊게 해야 돼요.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났다, 이렇게 알고 있거든요. 근데 진실은 내가 저 사람에게 욕심을 부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난데, 자식이 청소를 안 하고 산다고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가 있어요. 아니, 자식이 청소를 안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청소하고 살기를 바라는 내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청소 안 하고 사는 자식은 편안하고 좋은데, 왜 어머니가 난리예요. 남편이 내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난다. 남편이 왜 부인 말을 들어야 돼요. 남편은 남편, 나는 나, 그게 현실이잖아요. 남편이 자기 멋대로 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남편은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자기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자기 욕심은 어리석어서 욕심을 내는 거고 이게 탐진치거든요. 이거 알려고 마음공부를 조용히 해보면, ‘나의 분노가 나의 욕심이구나, 나의 욕심은 나의 어리석음이구나.’ 이걸 알게 돼요. 그래서 그런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죄업들을 전부 참회한다. 이것은 다 신구의 삼업에서 나왔다. 생각과 말과 행동, 의가 왜 중요하냐면 범부들은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생각이 없으면 말할 수도 없고요. 생각이 없으면 뭐를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저거 딱 보면 저것들은 생각이 일어나야 그걸 알지, 생각이 안 일어나면 몰라요. 그래서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게 나의 말도 건강하게 하는 거고, 나의 행동도 건강하게 하는 거라, 생각이 없으면 전혀 말도 못하고 행동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숨도 쉬고 맥박도 뛰는데 의식이 정지가 되면 식물인간이라고 그래요. 사람이라고 안 해요. 사람은 생각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일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생각은 사람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거지요. 그래서 신구의 삼업이니까,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차별해서 생각을 좋게 하고, 말을 좋게 하고, 행동을 좋게 하고, 이게 이제 죄업 참회거든요.

        그다음에 육정참회(六情懺悔)라는 게 있어요. 제 생각인데,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 하나하나 감정이 실려가지고 육근이 감정이 거기에 묻어서 감정대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저게 좋은 게 아닌데, 자기 감정으로 좋게 봐요. 이 자기 감정에 속아서 고생하는 거 참 많아요. 쉬운 말로는 이제 콩깍지 씌었다 이러는데, 그 콩깍지라는 게 자기 감정의 콩깍지거든요. 콩깍지만 씌운 게 아니에요. 자기 감정에 속아서 분노를 해요. 분노한 건 말이 없더라고요. 뭔 딱지에 분노한 거. 좋게 씌운 건 콩깍지고, 나쁜 감정이 눈을 가린 건 뭐라 그러죠? 충청도 말로는 소가지 피운다 이랬는데. 소가지. 자기 소가지에 속는 거예요. 막 분노가 일어나는 거를 속인데, 충정도 사람들은 거기다 가지라는 말을 쓰더라고, 싸가지, 소가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지라는 게 이런 게 이게 이제 싹 아자, 가지 지자, 처음에 일어나는 걸 말하거든요. 잘 안 보이지만 일어나는 거. 자기 분노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자기 탐애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그런 거는 다 참회하는 게 그게 육정참회에요. 그런데 이 원효 선사가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는 저술을 지었는데, 아주 중요한 저술이에요. 그래서 이게 좋고 나쁜 게 개시자심소작(皆是自心所作)이라, 다 자기 마음이 지은 바다. 그걸 모른다라는 거예요, 범부들은. 좋고 나쁜 거, 이게 슬프고 괴로운 게, 전부 자기 마음이 지은 거라는 거에요. 자심소작이라는 거에요, 자심소작. 죽음이라는 게 과연 나쁜 거냐. 또 태어난다는 게 좋은 거냐. 그거 아니에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게 과연 좋은 거냐.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빨리 죽는 게 좋은 거냐. 그것도 아니에요. 전부가 좋고 나쁘게 생각하는 건 자심소작이에요. 자심소작. 그래서 그 자심소작인 걸 모르고 기제에 번뇌(起諸煩惱)하야, 모든 번뇌를 일으켜서, 번뇌는 망상이거든요. 쓸데없는 생각. 번뇌 망상.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서, 자이전박(自以纏縛)이라, 스스로 묶일 전자가 있고, 묶길 박자가 있는데, 스스로 자기 생각에, 자기 어리석음에 스스로 묶인다 이거예요. 자승자박이라는 말은 있어요. 자기 줄에 자기가 묶인다. 그럼 자기 줄이 뭐냐. 자기 어리석음이다라고 하는 거죠. 자기감정. 그래서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감정을 편안하게 맑히면 되요. 내 문제는 내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기 문제예요. 남편 문제가 아니고, 아내 문제가 아니고, 자식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야, 내 문제. 내가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하면, ‘너는 너, 나는 나, 내가 당신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당신이 내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어쩌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 당신은, 당신은 나였나.’ 죽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죽음이 없어요. 또 삶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삶이 없어요. 이게 지혜거든요. 근데 자기 감정이 삶을 보고 죽음을 봐서 거기에 어떤 건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니까, 이게 전부 자기 감정이 자기 눈을 가려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내 감정에 속는 이런 감정을 참회합니다.

        그리고 서원행(誓願行) 기도가 있어요. 서원행. 원을 크게 세우고 원을 깊게 세우면 그 원이 나를 인도해요. 나의 서원이 나를 인도한다. 이게 원이 없으면 내가 갈 방향이 없어서 뭐 제대로 못해요. 그래서 내가 의지를 딱 가지고 자기 의지가 정해지면, 의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데, 언제 이루어지냐. 언제든지 이루어져요. 이렇게 의지가 없으면 이루어질 게 없어. 그래서 이 서원행 기도라는 거는 서원을 딱 세우면 그 서원이 나를 인도하기 때문에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기본적인 서원은 사홍서원이고요. 아주 위대한 서원은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라는 게 있어요. 보현보살 십종 대원(普賢菩薩 十種大願)이라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걸 이렇게 외우기만 해도, 다 안 외우고 제목만 외워도, 십종 대원, 그게 나를 이끌고 가는 등불이 돼요. 또 나를 인도하는 방향이 돼요.

       그래서 이제 이런 것이 불교 기도의 작법 의식 기도의 내용이에요. 염불행 기도, 예참행 기도, 서원행 기도. 이제 범부들은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게 돼요.

 

菩薩菩提行 보살보리행

世間人生 生老病死 剎那不住 生滅不息

세간인생 생로병사 찰나부주 생멸불식

一念妙體 勿形段者 惺惺寂寂 寂寂惺惺

일심묘체 물형단자 성성적적 적적성성

六波羅密 菩提行 육바라밀 보리행

布施 持戒 忍辱 : 修福菩提行, 般若 : 修慧菩提行

보시 기계 인욕 : 수복보리행, 반야 : 수혜보리행

精進 禪定 : 福慧雙修菩提行

정진 선정 : 복혜쌍수보리행

        그런데 이제 보살은 감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반야로 사는데, 보살들은 다 보는데 두 가지를 봐요. 첫째는 인생을 봐요, 인생. 그다음에 마음을 봐요.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 속에 사는데, 세월과 공간 속에 사는 게 인생이란 말이죠. 세간인생(世間人生)은 가만히 보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어. 생로병사. 그래서 이 생로병사를 또 가만히 보니까 찰나부주(剎那不住). 한순간도 머물질 않아요. 우리가 한참 있다보면 달라진 것 같지만, 그게 순간순간 달라져서 지금까지 달라진 거지, 가만히 있다가 달라진 게 아니거든요.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 70년 후에 내 모습이라. 그러면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은 70년 후에 어디로 갔나. 태어났을 때 이 모습이 변해서 지금 모습이 된 거지, 두 놈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언제 변했나? 순간순간 변하는 거예요. 순간순간. 그래서 젊은이들이 상대편이 뭐 예쁘다, 잘생겼다 그러는데, 지금 예쁘고 잘생긴 모습이 얼마 안 가요. 지금 노인은 옛날 청춘이 없었나. 지금 청춘은 그럼 앞으로 노인이 없나. 이게 이제 찰나부주라는 거예요.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걸 보는 거예요, 보살은. 세상만 보는 게 아니라 인생을 본다. 근데 보통 사람들은 인생을 못 봐요. 그냥 세상만 보고 쫓아가다가 늙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허무와 통곡이라고 해요. 인생은 허무하구나. 그 허무한 감정이 너무 슬퍼서 통곡을 한다, 그래요. 찰나부주에서 생멸불식(生滅不息)이라. 나고 죽는 일이 멈추지를 않는다. 쉬지 않는다. 그런데 그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까? 가만히 보니까 마음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일념(一念)이라고 그랬어요. 한 일자, 생각 념자. 일념, 한 생각. 왜 한 생각이라는 말을 쓰냐 하면은, 이 생각은 들으면 듣는 생각이 일어나고, 보면 보는 생각이 일어나는데, 보고 듣고 맨날 해도 늘 들을 때도 그대로 있고, 듣지 않을 때도 그대로 있는 한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산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물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슬픔을 아는 것도 그대로 있고, 또 즐거움을 알 때도 그대로 있고, 늘 한 생명이라는 게 있더라 말이지요. 그걸 일념이다. 그걸 마음이라고 한다는데 마음은 일념이에요. 그래서 일념은 그러면 어디에 있냐. 형체가 없어. 그래서 묘할 묘자, 몸 체자, 묘체라고 하거든요.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네. 일념묘체(一念妙體), 눈으로 보이는 몸이 아니에요. 귀로 들리는 몸이 아니에요. 근데 있기는 있는 거예요. 한 생각 묘체는 물형단자(勿形段者), 형상 덩어리가 아니다. 형단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한 생각 묘체를 찾아보려고 온 몸을 해부를 하고, 해체를 해봐도 그거 안 보여요. 그런 데 있는 거예요. 그거를 확실히 지혜로 얻을 때, 그 한 생각을 얻을 때 증득(證得)이라고 그래요. 증명할 증자, 얻을 득자. 보이는 걸 얻으면 수득이에요. 받을 수자, 얻을 득자. 그냥 받아서 얻는 거예요. 근데 이건 한 생각을 내 지혜로 얻으니까, 이건 손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는 것도 아니고, 증득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받아서 얻는 게 아니라 내 지혜로 얻는 거다. 지혜로 얻는다는 게 이게 얼마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맨날 이거 손으로 받고만 얻었는데. 이 물형단자인데, 이거는 항상 아는데 항상 고요해, 이걸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그러거든요. 깨 성자가 있어요. 마음심 심방 변에, 별 성한 거. 항상 깨어 있어. 항상 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는데, 찾아보면 실체가 없어. 물형이라. 물형. 명명물형이라, 밝고 밝게 다 아는데 형상이 없어. 아닐 물자, 형상 형자, 형상은 아니야. 그럼 이거 어떻게 아냐. 내 지혜로 아는 거예요. 보아서 아는 게 아니라 지혜로 아는 거예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고요하고 고요한데 항상 고요한데, 항상 알아. 근데 이 세상에 있는데 안 보이는 게 너무 많거든요. 예를 들면 이 법당이 지금 있잖아요. 법당이 보면 불상도 모셔져 있고 벽도 있고 이런 것도 다 있는데, 여기에 하나 안 보이는 게 있어요. 뭐가 안 보이냐. 이 법당을 처음에 설계한 마음이 있는데, 설계자의 마음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걸 여기다 배치할 때 이 배치하는 사람의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 배치된 상만 보이지 배치한 사람의 마음은 안 보이거든요. 근데 여기 이렇게 놓여 있는 거는 그 놓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놓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걸 가만히 보면 바둑알이 왔다 갔다 하고, 장기 알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면 왔다 갔다 하는 장기알은 보이는데, 그걸 옮기는 사람의 손도 보이죠. 근데 그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 그 생각은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장기알이 왔다 갔다 해서 뭘 잡히고 잡고 그게 아니라, 순전히 생각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보면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이상하냐. 누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를 하는데 그게 음란화라고 전시 못한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아주 성화라고 아주 존중시해야 된다고 그래요. 근데 가만히 그걸 보면 그림이라는 게 전부 물감이거든요. 그 물감이 음란이 어디 있고 신성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다만 그 그린 사람의 생각일 뿐이에요. 화가의 생각. 화가가 이렇게 이거는 코다라고 생각을 표현한 거지, 이게 물감이지, 무슨 코예요. ‘요건 입이다라고 그러면 그 화가가 입이라고 표현해서 그렇게 물감을 칠한 거지, 그게 입은 무슨 입이에요. 이게 마음이거든요. 그러니까 딱 보면 이건 그림이다. 화가의 생각을 표현한 거다. 그렇게 알아야지, ‘저 그림이 예쁘네.’ 예쁘긴 뭐가 예뻐요, 물감인데. 흑판에다가 이렇게 이제 산을 그린다든지 세계 지도를 그리거든요. 그러면 흑판에다가 분필를 가지고 그린다. 여기는 유럽이고, 여기는 아시아, 그 무슨 아시아고 유럽이에요. 그냥 흑판이지. 그런데 뭐가 있냐. ‘여기는 아시아, 이 구역은 유럽이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은 항상 있는 거예요. 항상 있는데 눈으로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거를 지혜로 깨닫는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게 기도에요.

 

        그래서 이 보살들은 일상 정진으로 기도를 해요. 일상 정진, 항상 기도를 해요.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려고 노력을 해요. 그게 일상정진기도거든요. 그렇게 돼서 바라밀행을 닦는데, 바라밀행 대표적인 걸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보시 지계 인욕(布施 持戒 忍辱) 이렇게 하는데, 이거는 복을 닦는 일상 기도예요. 보시 지계 인욕을 하면 복이 생겨요. 그다음에 반야(般若)라고 했는데, 이 반야는 지혜를 닦는 일상기도예요. 반야를 닦으면 지혜가 불어나거든요. 이게 중간에 정진 선정(精進 禪定)이 있는데, 정진 선정은 복과 지혜를 쌍으로 함께 닦아요. 정진을 계속하고 선정을 닦으면 거기에 지혜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지혜도 생겨 이걸 쌍수(福慧雙修)라고 그래요. 이래가지고 복을 닦는 거를 수복(修福)이라고 그러고, 수복기도, 수복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반야를 수행하는 거는 수혜(修慧), 닦을 수, 지혜 혜, 지혜를 닦는 일상 정신 기도. 그다음에 정진과 선정을 항상 닦는 것은 복혜쌍수, 복과 혜를 쌍으로 닦는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보살은 스스로 항상 자기 지혜를 가지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하지 않고도 일상이 항상 기도인 거예요. 일상이. 그럼 보살은 전혀 작법 의식을 안 하느냐? 해요. 여럿이 모일 때는 함께 하면 좋아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편하게만 있느냐. 아니에요. 늘 일상 정진 기도를 한단 말이에요.

 

諸佛菩提行 제불보리행

一念妙體 常住寂照 三世諸佛 同證同悟

일념묘체 상주적조 삼세제불 동증동오

圓融圓通 無障無礙 不可思議 解脫境界

원융원통 무장무애 불가사의 해탈경계

 

        그러면 이제 제불은 어떻게 하냐.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은 어떻게 하냐. 제불은요, 일념묘체(一念妙體)뿐이에요. 보고 듣는 게 다 한 생각 미묘한 몸이 보는 세계예요. 저건 집이 아니라 한 생각이 보는 세계다. 소리가 좋고 나쁜 게 있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이 듣는 세계예요. 이게 접촉되는 게 좋고 나쁜 게 아니라 한 생각이 이게 접촉하는 세계예요. 그래서 대상은 없고 한 생각만 있는 거예요. 범부는 한 생각은 없고 대상만 있어요. 그래서 이걸 전도망상이라고 하거든요. 자기는 없고 대상만 쫓아간다고. 그런데 이제 제불이 되면 일념묘체가 항상 있어서 보는 것도 저게 일념묘체의 세계다, 듣는 것도 일념묘체의 세계다. 이제 물에다가 비유하는데, 연못에 가서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연못 물 속에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저 물속에 있는 사람 만난다고 물에 들어가면 사람이 있냐? 어떻게 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연못 속에 보이는 사람 만난다고 물속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물속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없어요) 그게 무슨 원리인고 하니, 그 물속에 보이는 사람이 그대로 물인 거예요. 사람이 아니고 물인 거예요. 그러니까 물속에 뭐가 비춰져도 다 물이듯이, 산을 봐도 그게 한 생각인 거예요.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예요. 하늘을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죽음을 의식해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 이거 말 안 해야 되는데. 무서운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좋은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이게 깨달은 경지예요. 대상은 없고 마음뿐이다. 범부는 마음은 없고 대상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중간에 보살은 이제 범부도 느끼고, 그 마음도 느끼고 늘 그쪽으로 가는 게 보살이고, 그래서 일념묘체가 상주적조(常住寂照)를 해요. 항상 그대로 고요히 비춰. 그래가지고 이걸 삼세제불이 동증동어(三世諸佛 同證同悟). 삼세제불이 다 똑같이 증득하고 똑같이 깨달았어. 그래가지고 원융원통(圓融圓通)이요, 이 한 생각이 원융원통해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무장무애(無障無礙). 이 한 생각이 모두 나타나는 경지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 이래가지고 이 경지를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라고 한다.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경계다 이거지요. 아무데도 매이지 않고. 그래서 이 경지를 부처님의 경우에는 원성원만, 원만원성 또 원성원융,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수용한다. 둥글 원자가 있죠. 이룰 성자, 원성(圓成). 원만히 이루어. 이건 시작이 결과고, 결과가 시작이고, 이걸 원성이라고 그래요. 또 원융, 원만히 수용을 해. 받아서 쓴다. 원성원융. 또 이걸 수수즉득이라고 표현하는데, 의상스님 같은 경우에는. 불보살의 기도는 따를 수, 필요할 수, 필수품이라는 수자가 있거든요. 바랄 수자인데,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바람을 따라서, 이게 수수예요. 즉득이라, 곧 얻는다. 이게 부처님 기도예요. 근데 부처님은 좋은 걸 딱 생각하면 좋아져요. 참 좋지요. 있는 거 생각하면 있어요. 없는 거 생각하면 그냥 없는 거예요. 이게 원성원융 수수즉득. -아이, 이런 거 말하다가 시간 다가고 참. 뭘 알면 아는 거 얘기하고 싶은 게 또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냥 평범한 말로 하면 양이 안 차서 그래요.- 부처님 기도는 원성원융 수수즉득. 필요한 대로 바라는 대로 바로 얻어. 또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받아. 수용. 기도는 다 하는데 방식만 다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맞춰서, 이렇게 의식 작법으로 기도를 하는 게 맞아요. 염불기도, 예참기도, 서원기도 쭉 하면 거기에 온갖 중생의 죄업은 다 소멸되고, 좋은 업이 성장해서 결국은 다 깨달음으로 가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