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9월 7일 음력 8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1-09-07

-부처님 가르침-이야기

 

     오늘은 비가 좀 옵니다.

     진관사 신축년 8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 제목은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이런 말씀입니다.

     불교를 교학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교학이라 그러는데,- 이 불교 교학에는 부처님 설법의 가르침이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까, 그 부처님 가르침을 종류별로 나누는데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가르칠 교자, 형상 상자, 교상(敎相), 그 교상을 판단해서 해석한다, 그래서 판석이라,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그런데 이 불교 학문마다 교상판석이 다 특징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교상판석에 대체적인 내용을 오승(五乘) 차별이라, 다섯이란 오자고, 수레 승자, 그 수레 승자는 가르칠 교자의 뜻이고, 길 도자, 길이라는 뜻인데, 부처님의 교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니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이거죠. 그 다섯이 뭐냐. 인천승(人天乘), 인간에게 태어날 사람, 천상에게 태어날 사람에게 하신 법문, 성문승(聲聞乘), 출가 수도할 사람에게 하신 법문, 연각승(緣覺乘), 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에게 한 법문, 보살승(菩薩乘), 보살도를 닦는 분에게 한 법문, 불승(佛乘),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말씀하신 법문, 이렇게 해서 이게 오승 차별인데, 이게 참 자세하고 중요해요.

 

說法儀式

설법의식

三轉十二行

삼전십이항

此處鹿野苑이니 如來轉法輪이라

차처녹야원 여래전법륜

三轉十二行 五人得道跡

삼전십이항 오인득도적

(雜阿含經23)(잡아함경 제23)

(三轉者 示轉 勸轉 證轉) (삼전자 시전 권전 증전)

三遍說

삼변설

法華經法說 喩說 因緣說

법화경 법설 유설 인연설

 

     그런데 오늘은 그 오승 차별을 말씀할 시간은 없고, 부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설법을 했느냐, 이걸 설법의식(說法儀式)이라고 하거든요. 내용은 오승차별 교상판석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설법하는 방식, 설법 진행하는 차례, 이런 걸 설법 의식이라고 그러는데, 그 설법을 부처님이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 그걸 연구를 해 보니까 312(三轉十二行) 법문이 있었다. 처음에 법화경 화성유품(化城)에 보면, 312항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게 뭔 말인지 참 알기가 어려웠어요. 다닐 행자인데 거기서는 순서라는 뜻이기 때문에 항 이렇게 읽어야 되거든요. 312. 항렬(行列)이라고 할 때도 그 한자 쓰고.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312항 방식이 있었다 이거고요.

그다음에는 법화경에 보면 삼변 설법 의식(三遍說)이 있었다. 그 변자는 두루 할 변잔데, -첫 번째 한 번, 두 번째 한 번, 세 번째 한 번,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럴 때 그 변자를 쓰는데요.- 삼변, 첫 번, 두 번째, 세 번째, 삼변설법이라고 그러는데 이런 것이 이제 설법 방식이에요

     312항 법문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씀인데, 잡아함경 23권에 보면, 차처는 녹야원이니(此處鹿野苑), 이곳은 녹야원이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장소 녹야원인데, 여래가 전법륜이라(如來轉法輪), 부처님께서 법의 수레를 운전하셨다. 법륜이라고 하는 얘기는 수레 륜자가 법을 비유한 말이고, 그걸 운전했단 말은 법을 설했단 말이고, 전법륜은 설법인데, 녹야원이라고 하는 곳은 설법한 곳이고 또 보다가야는 깨달은 곳이다. 그래서 녹야원에서 설법을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설법을 했느냐. 312항으로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나와요. 그럼 삼전이라는 얘기는 세 번 설법을 한다 이 말인데요. 세 번. 세 번을 하니까 12번이 됐다. 이게 312항인데 이게 뭔 말이냐. 부처님이 고진멸도 사성제 법문를 하실 적에 그 사성제를 삼전으로 하셨다. 세 번씩 하셨다 이거예요. 그래서 사성제를 세 번씩 하다 보니까 열두 번이 됐다. 이게 312항 법문이거든요.

     그러면 세 번씩 하는 게 뭐냐.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 , 인간에게 괴로움, 첫 번째는 보일 시자, 운전할 전자, (~) 보이는 말씀을 하세요. 중생에게 괴로움이 있다, 이걸 시전(示轉)이라 그래요. 보일 시자, 운전할 전자, 시전. 인간에게 괴로움이 있다. 그러면 괴로움에 대해서 생노병사니 우비고뇌니 뭐 이런 자세한 설명 안 해도, 상근대지는 , 인생에게 괴로움이 있구나.’ 금방 알아요. 그래서 상근기는 시전만 해도 된다는 거예요. 보이기만 보여도. 그다음에 이제 중근기는 권해야 돼요(勸轉).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중근기가 필요한 법문이죠. 고통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제 하근기는 고통을 누가 알았느냐, 이런 안 사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고통을 알았다. 이게 증명할 증자, 증전(證轉)이에요. 증전. 이렇게 돼서 고성제도 이렇게 고를 보이고, 고를 알기를 권하고, 고를 알았다는 걸 자신으로 증명을 하고 이렇게 시전, 권전, 증전, 삼전을 하고, 집성제(集聖諦)도 집이라는 것이 번뇌라는 것이 있다, 이걸 보이고, 그다음에 번뇌는 끊어야 한다, 이렇게 권하고, 나는 번뇌를 끊었다, 이렇게 증하고, 멸도 마찬가지로, 멸은 얻어야 된다, 멸이 있다. 이렇게 시전을 하고. 멸은 얻어야 한다, 권전을 하고, 나는 열반 적멸을 얻었다 이렇게 증전을 해서, 하근기는 이 증전까지 가야 법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도전도 마찬가지예요. 닦는 길이 있다, 이거 보이는 거고, 도는 닦아야 된다, 이건 권하는 거고, 나는 도를 닦았다, 이렇게 증전을 하고. 이렇게 사성제를 시전, 권전, 증전, 삼전을 하니까 열두 번이 됐다. 이거예요. 이게 이제 312항 법문이다. 이것이 설법 의식이라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게송이 차처는 녹야원이니(此處鹿野苑), 이곳은 녹야원이니, 여래 전법륜이라(如來轉法輪), 여래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312항으로 하셨으니(三轉十二行), 세 번 굴려서 열두 번으로 하셨으니, 오인이 득도적이라(五人得道跡), 다섯 사람이 도의 세계를 얻었다. 이것이 부처님의 설법 의식이에요.

     그다음에 법화경의 삼변설법은, 법화경을 보면, 방편품에서는 법을 설해요. 법 자체를. 그리고 비유품 이하로는 비유로 설해요. 그리고 화성유품에 가면 인연을 설하는데 인연은 사례거든요.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과거에 어떻게 어떻게 했다 이렇게. 법설, 유설, 사례설, 그러니까 이제 설법은 이런 걸 갖추는 게 필요하다 이거지요. 법이 어떤 거다. 비유로 말하면 어떻다, 사례로 말하면 어떻다, 이렇게 법으로 설법하고, 비유로 설법하고, 사례로 설법하고. 이런 내용이 있다 이거예요. 옛날에 이게, 학교에서 이런 거 가르친다고, 연구한다고 애 먹었어요, 이런 이런 거 아주. 포교 방법론이라고 하는 과목이 있는데, 이게 계속 발표되고 토론하고 하는 내용이거든요. 설법 의식 이런 거. 그건 그렇고.

 

說法大要

설법대요

諸法空相 제법공상

諸法從因生이요 諸法從因滅이라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

如是滅與生沙門說如是(佛本行集經48)

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 (불본행집경)

諸法從緣生이요 諸法從緣滅하니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

我佛大沙門常作如是說이라(常用法門)

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 (상용법문)

未曾有一法不從因緣生

미증유일법 부종인연생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中論4)

시고일체법 무불시공자(중론제4)

 

唯心所現 유심소현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심여공화사 화종종오음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일체세계중 무법이부조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약인욕구지 삼세일체불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응당여시관 심조제여래

 

     그러면 부처님이 설법한 대요, 법을 설한 큰 요점은 뭐냐 이게 이제 설법대요(說法大要)인데, 이 설법을 연구를 해보면 부처님이 증지라는 게 있는데, 증득한 지혜, 증지소지후 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증지로 알 바요, 다른 일로는 알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증득은 깨달음인데 깨달으면 뭐가 생기냐. 지혜가 생기거든요. 이게 증득한 지혜인데 이걸 증지라고 하고, 그 증득한 세계의 부분을 증분이라 그래요. 특히 의상 화엄학에서 이런 말을 많이 쓰는데 증지 영역을 증분, 나눌 분자. 그러면 그 증지가 이루어지면 이제 교설(敎說)을 하는데, 가르쳐서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럼 그 교설 부분을 교분이라 그래요, 교분. 근데 부처님의 증분은 알 수가 없고 이제 알 수 있는 방법은 교설 교분을 통해서, 왜냐하면 증분에서 다 나온 게 교설이기 때문에, 교설 교분을 통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증분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 교설 교분을 분류를 해보니까, 크게 나누면 두 가지라는 거죠. 첫째는 제법이 공한 모양을 말했다(諸法空相). 공상. 둘째는 유심소연(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라고 하는 걸 말했다. 공상과 유심, 이게 교분의 큰 세계예요.

     그럼 공이라는 건 뭐냐. 공이라는 걸 일반적으로 알기가 어려운 게 보통 사람이 느낀 공간은 허공밖에 없는데, 허공, 빈 공간, 근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간은 인연 공을 말해요. 허공 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인연 공, 인연을 공이라고 그래요. 그거 뭔 말이냐. 인연이라는 것은 인연소생인데, 인연으로 난 바인데, 인연은 뭐냐. 말미암는다 이거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저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생긴다. 그래서 이것저것이 다 인연소생이다. 그것도 소멸도 마찬가지예요.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없어지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생기고 사라지는 게 인연뿐이다. 생기는데 자체가 없다. 이게 인연 공이죠, 사라지는데 자체가 없다. 이게 인연이 공이에요. 죽음이라는 건 없고, 그 죽음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거예요. 말미암음이 있을 뿐이다. 태어남이란 없고 태어남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인연으로 태어났고, 머무르는 것도 인연으로 머물고, 죽는 것도 인연으로 죽으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인연만 있는 거예요. 이거 참 문제여,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인연만 있지, 나고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이게 인연 공이거든요. 그래서 제법이 공상은 전부 인연상이다 이거죠.

     그래서 제일 많이 독송하는 게송이 제법이 종인생이오(諸法從因生), 모든 법은 이 모든 법이라는 건 생멸법, 또 출세간법(出世間法), 제불이 성불하는 것도 법이고, 범부가 윤회하는 것도 법인데 이게 범부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 범부 인연으로 범부가 생기고, 제불이 그냥 생긴 게 아니라 제불 인연으로 제불이 생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고 범부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는 거예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범부 종자를 심지 아니하면 범부는 없어요. 그래서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한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범부 종자가 안 심어져. 그러니까 종자를 심기 때문에 생긴다 이거예요. 그럼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한다, 그러면 그때는 복덕이 이루어지고 지혜가 이루어져서 불종자가 생긴단 말이에요. 범종과 불종이 전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거기 때문에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인연만 있을 뿐이다. 그게 제법이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나고 제법종인생, 제법이 종인멸이라(諸法從因滅).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여시멸여생(如是滅與生), 이와 같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사문은 설여시라(沙門說如是), 사문께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이거는 부처님이 성불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님을 사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성불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 부처님 제자가 밖에 나갔는데 사리불이 물었어요. 당신 누구 제자냐. 석가모니 제자다. 석가모니가 뭔 법을 말했냐. 그러니까 이걸 말한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이와 같이 사라지고 설하는 것을 우리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그걸 듣고 사리불이 깨달아서 부처님 제자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이거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안 외우고, 제법이 종연생이요(諸法從緣生), 제법이 종연멸이니(諸法從緣滅), 아불대사문(我佛大沙門)은 상작여시설(常作如是說)이라, 이렇게 외웠어요. 이거는 이제 지도론을 보고 약간 변형해서 한 건데 너무 외우기가 편해요.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지니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게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외우는 방식이에요. 위와 같이 하면 뜻은 아주 명확한데 외우기가 조금 불편해요. 그거 얼마나 좋아, 제법이 종연생이오, 제법이 종연멸이니, 아불대사문은,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상작여시설이라,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법문할 거 없으면요, 이것만 가지고 하면 돼요. 이거 한 구절만 가지고. 그럼 법문이 훌륭해요. 옛날 노인들도 마찬가지요 뭐, 법문이 맨날 새로운 게 나오나. 그러니까 이것도 한 게송 읽으면 끝나는 거예요. 준비할 것도 없어, 법문이라는 게. 제법이 종연생이오 제법이 종연멸이니 아불대사문은 상작여시설이라,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게 인연법이란 말이죠. 인연법. 그럼 인연법은 뭐냐. 공이요 그게. 공이라는 것은 생겨도 생긴 게 없으니까 불생이고, 사라져도 사라진 게 없으니까 불멸이거든요. 그 불생불멸이 공인데 그 공이 인연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알면 바로 해탈하는 거예요. 인연을 몰라가지고 미혹한 거거든요.

     그리고 중론 제4권에서는 뭐라고 그랬냐 하면 미증유일법(未曾有一法)이 미증유라는 건 일찍이 없다 이 말이죠. 그 어떤 한 법도 부종인연생(不從因緣生)이라,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전부 인연이란 말이에요. 인연이 생기는 인연이 생기면 생기고, 사라지는 인연이 생기면 사라지는 거여. 그러니까 늙는 것도 인연이고. 늙는 자체는 없어요. 생기는 것도 인연이여. 머무르는 것도 인연이고. 그러니까 미증유일법도 부종인연생이라, 한 법도 인연을 좇아서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한 것은 미증유, 일찍이 없다. 그러니까 시고로, 이런 거로, 이렇기 때문에, 일체법이(是故一切法), 범부법이나 제불법이나 무슨 생멸법이나 불생멸법이나 일체법이, 무불시공자라(無不是空者), 무불이라는 건 아님이 없다 이거지요. 시공자 이 공이, 자자는 어조사고, 공 아닌 것이 없다. 공이라는 것은 불생불멸 인연법인데, 인연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면 이 인연 공 이런 거를 경전에서 가르칠 때 인연은 무생이라. 생긴 게 없다. 그래서 이 생긴 걸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인연은 무생. 또 인연은 무아라. 내가 없는 거. 내가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인연은 무법이라, 법이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전부 인연이기 때문에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닌 거예요. 인연이 형성돼서 일체법이지, 인연이 사라지면 일체법은 사라진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생법, 무아법, 무법법, 이렇게 보면 모든 게 전부 인연뿐이지, 법도 없고 자아도 없고 소생도 없고. 이게 무생 무아 무법, 이걸 통달하면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무생을 통달하고 무아를 통달하고 무법을 통달하면 그게 깨달음이다. 그러면 이게 뭐만 있느냐. 그 무생 무아 무법 인연이라는 걸 누가 아느냐 이거예요. 그걸 마음이라 그런다. 그래서 법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법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이 깨닫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고, 집착하는 거는 범종이고 깨닫는 건 불종인데 부처 종자는 깨닫는 거고 범부 종자는 집착하는 거예요. 근데 집착을 하는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에서 유심소현(唯心所現)을 말할 때, 야마궁중게찬품 법문인데,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거다. 범부도 마음이 나타난 거고 제불도 마음이 나타난 거다 이 말이죠. 심여공화사(心如工畫師), 마음은 그림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화종종오음(畫種種五陰)이라, 가지가지, 오음이라는 건 중생의 몸인데, 중생의 몸을 만든다. 그래서 일체세계 중(一切世界中), 일체 세계 가운데, 무법이 부조라(無法而不造), 어떤 법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약인욕구지(若人欲求知), 사람이 욕구, 삼세 일체불(三世一切佛), 삼세 일체 부처님을 굳이 알기를 구하고자 하면, 응당여시관하라(應當如是觀), 응당히 다음과 같이 딱 관찰을 하라. 심조제여래(造諸如來)니라,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드느니라. 80화엄에서는 일체유심조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이건 육십화엄이야, 육십화엄에서는 심조제여래. 위에서는 화종종오음 무법부조 이래 가지고 어떤 법도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 어떤 중생의 몸도 다 만든다. 이러니까 마음은 일체 중생도 만들고 삼세제불도 만들고, 산하대지도 만들고 못 만드는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부처님의 설법대요는 인연과 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미혹하고 집착해서 쓰면 범부 종자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마음을 관찰하고 공덕으로 쓰면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건데요. 이건 가르칠 때 이렇게 가르치는 거고, 실제 상에는 어떠냐. 마음과 현상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현상이 있는 곳에 그대로 전체가 마음이다. 이거 인제 형상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범부고, 형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형상과 마음이 분리되지 아니한 상태로 돌아가면 깨달음인데, 마음이 있는 곳에 보이고 들리고 하는 형상이 없는 곳이 없고, 형상이 있는 곳에 마음이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불교학자를 들라면 규봉(圭峰)과 청량(淸凉)을 들 수가 있는데 그 규봉의 불교관을 보면 강원에서 가르치는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도서>, 도서는 그게 동아시아 불교학의 아주 기본 개론이에요. 그래서 전체 불교에 아주 중요한 지침을 주는 학자가 규봉 종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규봉 청량. 이렇게 말을 해요. 청량은 이제 화엄학의 최고봉이거든요. 청량 규봉 그렇게 말 안 하고 규봉 청량 그러는데, 규봉 청량이 이제 중요한 가르침이 뭐냐. 제법은, 모든 법은, 전일심지제법(全一心之諸法)이라. 일심을 온전히 한 제법이라는 거예요. 제법이 있는 곳에 일심이 없을 수가 없다. 또 일심은 전제법지일심(全諸法之一心)이라, 한마음은 제법을 온전히 한 한마음이다. 한마음이 있는 곳에 제법이 없을 수가 없다. 참 이런 게 선지식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물건(컵을 가르키시며)이 하나 있으면 이게 그대로 온전한 마음이에요. 또 이게 온전한 마음이 있으면 바로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이 있을 때 그 하늘을 보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하늘이 있냐, 죽음이 있을 때 죽음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죽음이 있는가. 또 좋아할 때 좋아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좋아할 수 있나. 그러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 있고 없고가 전부 마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법은 전일심지제법이라, 제법은 한마음을 온전히 한 제법이다. 일심은 전제법지일심이라. 한마음은 제법을 온전히 한 한마음이다.

     그러면 이제 불종자가 점점 성장을 해서 열매를 맺으면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인데,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이 다 통달을 했다. 그러면 마음이 물질이오, 물질이 마음이라, 그래서 마음이라는 구분도 없고 물질이라는 구분도 없고 과거 현재도 없고 그냥 자재할 뿐이다 이 말이죠. 자재, 자재. 그냥 갈 때는 가는 걸로 온전하고 올 때는 오는 걸로 온전하고 앉을 때는 앉는 걸로 온전해서 그냥 자재하고 자재할 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공상과 유심을 말했다. 여기서 모든 수행이 다 나오고. 마음을 불종자를 심는 걸로 쓰면 온갖 수행공덕이 여기서 다 나오는 거예요. 또 수행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일체법이 전부 인연 공상이라는 걸 알면 거기서 범부 종자는 심어지지 않는다, 범부 종자가 심어지려면 경계를 분별하고 집착해야 범부가 이어지는데 경계를 볼 때 분별하는 마음을 그치고 또 경계를 볼 때 경계가 공함을 관찰을 하면 범부 종자는 없다. 뭐 이렇게 돼서 경계는 없고 마음뿐인 게 이게 처음 깨달음인데 나중에는 경계도 마음도 다 구분이 없이 그냥 자재하는 게 구경각이다 이거죠.

     오늘 초하루 본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