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수륙재]9월 12일 국행수륙재 3재 법문 2021-09-12

      진관사는 나라를 위해서 재를 모시는 절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진관사가 그런 역할을 했던 걸 잘 몰라요. 중국 태산에 가보니까, 그 나라를 위해서 재를 지내던 곳이 태산이거든요, 태산. 임금이 1년에 한 번씩 거기 가서 참가를 했어요.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 알고있고, 중국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아요. ‘중국 태산은 나라를 위해서 재를 지냈던 곳이다.’ 그러나 진관사는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크게 재를 모셨던 곳이다.’ 하는 것은 아는 분만 알지, 대부분 잘 몰랐어요. 근자에 와서 진관사에서 수륙대재를 이렇게 크게 봉행함으로 해서 널리 옛날부터 진관사에서는 나라를 위해서 큰 재를 모셨던 곳이다.’ 하는 걸 이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종교 그러면은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의전이에요. 의전이라고 하는 게, 의례 의전이 그렇게 중요한데, 그 의전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살려서 이렇게 봉행하는 진관사 수륙대재는, 정말로 지금 현재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코로나를 빨리 소멸시켜서 온 세상이 태평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그러한 재가 되고, 또 하나는 이 땅에 살고있는 우리 중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수중고혼 또 육지의 모든 많은 중생들이 다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모두 이고득락하기를 간곡히 발원하는 큰 재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주역이 돼서 이 재를 지금 봉행하고 계십니다. 그 뜻이 꼭 이루어져서 빨리 코로나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질병에서 벗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근심 걱정에서 다 벗어나시기를 간곡히 발원을 합니다.

       사람이라고 한다면은 원을 가진 사람과 원이 없는 사람, 이 두 가지 류로 나눌 수가 있어요. 원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사람들이고, 원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고, 남의 심부름꾼, 종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큰 원을 가지고 있기에 이 재에 모두 다 참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원을 어떻게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여러분들 가족, 친지 그리고 자녀들 모두 다 한 단계 향상되기를, 한 단계 더 올라가서 더 잘 살 수 있도록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을 갖는다 말이죠.

      그러면 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자기를 닦는 겁니다. 자기를 닦는 것 중에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를 닦는 것. 두 번째로는 지금 이렇게 의전 연구를 해서 열심히 나를 닦는 거. 세 번째로는 그야말로 내 본성자리를 찾는 참선 명상을 해서 나를 찾는 거. 이런 세 가지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그 원을 이룹니다. 이 세 가지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원이 얼마만큼 이루어지느냐가 달려 있어요. 정말로 자기 원이 잘 다 이루어지려고 한다면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가지고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했을 때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염불, 과연 염불을 한다고 운명이 바꿔질 수가 있을까. 내 업이 바꿔질 수 있을까. 지난번에 외국 대사 부인들에게 참선, 명상을 가르치는데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데 뭐라고 질문하느냐. ‘이 세상에 전쟁이 없고, 질병이 없고, 천재지변이 없고,’ 이런 것을 간곡히 발원하는 발원문을 먼저 말을 했더니, “그 원이, 그 발원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무엇을 갖느냐 하면 종교를 갖는다. -아주 종교적인 분이더라고요. 종교를 갖는 분이다.- 그런데 종교의 힘이 아니고 그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천재지변을 물리치고 질병에서 벗어나고 전쟁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네는 종교에 간절하게 매달린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부딪쳐 있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됩니다. 종교에 의해서 자 이거를 없애게 해주세요, 이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부탁하는 것이 되지요. 어떻게 하면 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그 길을 찾아내는 것이 참선이고 명상이다. 그렇게 하니까 그때 얼른 또 긍정도 굉장히 잘해요. 질문도 잘하고. “부탁하는 것과 내가 내 길을 찾아가는 것과 같지가 않다 이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바른길이에요. 이것이 바로 명상이고 이것이 바로 참선이다.” 이렇게 말해준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코로나가 이렇게 난리가 나고, 또 세상 가만히 보면 지금 무엇이 염려가 되냐. 지금 젊은 청소년들, 어린 애들이 크고 나면 어떤 세상이 될까? 자세히 살펴보면 난감해요. 왜 난감하냐.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얘들은 크는데, 하는 짓이 너무 난감한 짓만 하거든요, 어른들이. 그런데 그걸 보고 자란 애들이 그것 말고 다른 길을 갈 방법이 없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느냐. 그럴 적에 어른들이 복잡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내가 잘살기 위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세상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을 가질 것인가, 이것뿐이거든요. 세상이 잘 사는 세상을 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내가 아니죠 그거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잘 안 살아도 좋으니까 온 세상이 편안하게 해달라. 온 세상이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이 마음이 간절해진다면 지금과 같은 그렇게 괴상망측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이 세상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이렇게 가르치는 사고 방식을 자세히 찾아보니까 이런 방법을 역대로 모든 현인 성자들은 읊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거는 노자도 똑같이 불선지선, 앞 가지 않고, 남을 앞 가게 밀어주고, 나는 뒤에 밀어주고 가는 사람이 되겠다. 이게 불선지선이거든요. 주역에서도 그렇게 가르쳐요. ‘앞 가고자 하지 말고, 나를 위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길이다.’ 이렇게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확신을 할 것이 그렇게 말만 있지, 노자나 주역에서는 그렇게 되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방법을 제시하는 가르침은 불교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서 올바로 가고 올바로 성장하고 올바로 크게 성공하게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은 불교가 가장 옳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로 내 길을 내가 찾아야 되겠다고 혼자 간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처음에는 누구의 가르침이 있어야 돼요. 그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고, 경전입니다. 그러면 경전에 의해서 우리는 내 길을 아는 거예요. 내가 어느 곳으로 가야 될지를 안다 이 말이죠.

       그럼 경전 가운데서 가장 참선 수행의 아주 기본 교재가 되고 있는 능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에서 보면, 사람이 정말로 자기 길을 제대로 찾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기탁념(棄濁念) 그래요. 이 세상에 혼탁하게 물 들은 것을 씻어내 버리고. 탁은 혼탁하고 물들고. 그러니까 혼탁하게 물든 것은 뭡니까. 보고 듣고 배워서 욕심내고 화내고 하는 것들이 전부 혼탁하게 물들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요. 이걸 내버리는 거예요. 이걸 내버려서 발묘명(發妙明) 하는 것에다가 전념을 다 해라. 이 오묘하고 환히 밝은 지혜가 있으면 그런 일을 안 하게 되니까 이런 지혜를 찾아내는데 전력을 다해라. 지혜가 있으니까 찾아내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캄캄한 밤에 길을 갈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물이 들고 진흙탕에 빠지지마는, 훤한 낮에 길을 가니까 물에 빠지는 일이 없다, 이것이 묘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훤한 낮 길을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훤한 낮 길은 어디에 있느냐. 내 욕심 하나, 내 오욕 하나, 내 화내는 마음 하나,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나니까 날이 훤히 밝아지더라. 하나씩 그것이 열리지 않으면은 밝은 날이 아니라 컴컴한 밤이었어요. 근데 컴컴한 밤에서 화내는 마음 하나 떨쳐 내버리고, 컴컴한 밤에서 그야말로 욕심부렸던 탐욕 하나 떨쳐 내버리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묘명이에요. 아주 무궁무진하게 밝은 지혜가 거기서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에요. 밝은 지혜가 쏟아져 나오는 그때에는 바로 훤히 밝은 대낮이 됐다. 그러니까 다시는 잘못 가는 길을 안 가게 되는 그런 경지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내 오욕을 내버리고 내 마음의 습관 들었던 모든 것을 싹 씻어 내버렸더니 훤히 밝은 낮이 되더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능엄경이에요.

      그러면 이런 말을 들으니까 아 나도 한번 내버리고 밝은 낮으로 가야지이렇게 발심을 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발심을 하게 능엄경에서 가르쳤지, 완전하게 열게는 또 안 돼 있어요. 그럼 여는 것은 누가 하느냐. 자기가 하는 거란 말이에요. 자기가 하는 거예요. 부지런하면 부자 된다. 옛날부터 대부는 유천(大富由天)이요, 소부는 유군(小富由勤)이다, 그래요.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적은 부자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 그런데 그러면 적은 부자 되는 것은 누구든지 따 놓은 당상이에요. 가난하게 살라고 살게 돼 있지가 않아요, 내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 말은 맞기는 맞는데 안 부지런해버리면 부자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는 것과 행동이 그렇게 다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 오늘 이런 행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이 행사 끝에 무엇을 하느냐. ‘, 그동안에 내가 알고 있던 거, 잘못된 거, 버릴 거, 지금까지는 알기만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걸 실천해 옮기자, 실천에 옮기자.’ 이 다짐이 오늘의 행사의 다짐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을 해서 실천에 옮기니까 어떻게 돼요. 기탕념하고 발묘명하는 위치에 이르게 됐다.

      그다음에 모든 가르침이 다 똑같아요. 기신론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참선 수행의 교과서가 있습니다, 기신론. 그걸 보면 참 기가 막히게 잘 돼 있거든요. 개일심(開一心)하야, 일심 한 마음 한 마음을 딱 밝혀가지고, 열어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가는 게 아니에요. 명이문(明二門)이에요.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을 딱 이렇게 밝혀주는 거예요. 그러면은 우리가 지금 세상 살아가는 데 이 세상에서 생멸문이라고 하는 문은 무엇이냐. 정말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비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결국은 생멸문에 빠져서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이게 생멸문이에요. 그런데 일심을 훤히 딱 깨닫고 나니까, 깨닫는 일심은 뭐냐.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제 마음에 달렸다는 거에요. 이미 부처님께서 무엇을 아셨습니까.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이걸 알았어요. 알았는데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고 또 실천에 안 옮기면 그것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지금부터 마음을 실천하는 일에 적극 나선단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느냐. 이때 실천에 옮기니까 그야말로 일심이 훤히 밝아서 그 자리에는 근심 걱정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조금도 잘못 가는 길이 없는 밝은 길, 그 자리가 무슨 길이냐. 진여문이라. 그러면 이제 이 진여문에 드는 사람과 생멸문에 든 사람 이 두 가지를 한번 비교를 한다면, 생멸문에 든 사람은 임종기가 됩니다. 요즘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돼서 그런지 만나도 야 이 녀석. 너 이리 와.’ 이렇게 친하게 얘기해 주던 이런 노장들이 없어요, 이제는. 만나면 그냥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은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되면 좀 있으면은 아는 사람 다 가고 나니까 결국 남는 것은 내 차례구나, 한심스럽고 통곡하는 일만 남는 거예요. 이럴 적에 정말로 여기에서 훌훌 벗어가지고 진여문으로, 진여문의 생사에서 해탈하는 해탈문으로 우리가 가야 되겠는데 이 생사해탈이 그렇게 어려운 문인가. 어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돼요. 지금 생사해탈은 사람들보다 미물들이 더 잘하고 있어요. 산속에 올라가 보면 산속에 수많은 짐승들이 사는데 짐승들 뼈 하나도 없어요. 왜 없을까. 자기가 가게 되면은 숨기고 가요. 그런데 사람은 가면서 자기 몸을 숨겨요? 못 숨겨요? 못 숨겨요. 그 옛날에 선지식들은 숨겼어요. 자기 임종하는 모습을 남에게 안 보였어요. 지금 오대산에 한암 노스님. 여러분들 잘 아시죠. 625 때 임종하는 날이 오니까 모시고 있던 스님이 만화스님이었는데, 손주상좌인 만화스님 보고, ‘야 너 진부 가서 약 좀 지어와라.’ 그런데 그때 어떤 상황이었느냐. 오대산은 격전지예요. 북한 사람들하고 격전을 했었어요. ‘스님, 지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기 총소리 안 들리십니까.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놈의 자슥이, 어른이 하라고 하면 해야지.’ 어른 말을 안 듣는다고 소리를 질러서, 할 수 없이 만화스님이 나가셨어요. 약을 가지고 돌아와서 보니까 이런 의자에 앉아 가버리셨단 말이에요. 그 모습을 안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자기의 마지막 모습, 딱 가는 모습을 그렇게 안 보여준 근자에 가장 큰 스님이세요. 남 보는 앞에서도 근사하게 잘 가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드물지만, 여기 밖에 우리 신도님들도 계시는데, 열심히 절에 다니면서 염불을 했던 분들 가운데 깜짝 놀라게 잘 돌아가신 분들 많아요. 진부에 그런 노인네가 계시는데, 보살이신데, 아침에 가서 보니까 밤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 목욕재계하고, 머리 다 빗어서 딱 묶고 그렇게 옷 새로 갈아입고 이불 덥고 그냥 가신 거예요, 편안하게.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하느냐. 일생을 염불만 했어요, 그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생을 염불만 하니까, 그이는 그렇게 해서 가더라고요. 그렇게 가니까 월정사에서 난리가 났어요. 보살이 중보다 더 잘 가버렸단 말이에요, 중보다도. 또 저희보다 한참 선배인데 돈암동에 가면 거기는 비구니 스님이에요. 이 스님은 지장보살을 열심히 하셨어요. 딱 임종이 끝났는데 손에서 단주가 달칵달칵 돌아갔어요. 지장보살을 그 정도 해야 그렇게 임종을 하세요. 그러니까 그 정도 될려면 얼마만큼 했다는 거예요. 그냥 해서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 밖에 계신 모든 신도 여러분. 그냥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하면 그와 같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실제로 하면 된다 하는 것이 일심이란 말입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바로 내가 가는 길이 극락이고,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생멸문에는 나는 가지 않는다. 생사에서 내가 해탈할 수 있다. 실제로 하자. 일심 마음을 딱 다잡는단 말이죠.

      이렇게 다잡으면서 오늘 이 행사를 하신다면 그야말로 그 공덕이 여러분들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들 주변 모든 식구들에게 갑니다. 한 사람, 그런 분을 보면 그 식구들이 전부 감동을 해요. 모든 일가친척들이 다 감동하고 그렇게 되면 또 그런 사람이 또 나오게 되고, 또 나오게 되고, 이런 사람이 수없이 나와서 이 세상 정말로 태평성대가 되도록, 태평성대를 만드는 일에 다 함께 한 번 여러분 최선을 한번 다해보시죠.

      그런데 가장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요약하면 뭐라고 가르쳤느냐.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른 곳에서는 일심이 먼저 나오고, 일심 마음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만법이 나중에 나와요. 그런데 화엄경은 만법이 먼저 나와요. 만법을 통괄해서 일심을 밝힌 것이 화엄경이다. 그러면은 만법을 통괄하는 것은 여러분들, 이 세상 사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말이에요. 이 일도 해봐야 되고, 저 일도 해봐야 되고, 가족도 가져봐야 되고, 온 세상을 같이 살아봐야 돼요. 세상에 돈도 벌어봐야 되고, 출세도 해봐야 되고. 다 출세도 해보니까 결국은 출세를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내 마음이 얌전하고 착한 사람은 출세를 하더라. 돈을 잘 번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잘 벌더냐. 정말로 어떻게 하든지 세상을 위해서,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 큰 부자가 되더라. 그냥 큰 부자가 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온 세상을 다 잘살게 만들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큰 부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질 않고 내가 부자가 되려고 하니까 큰 부자가 안 된단 말이에요. 이게 통만법이에요. 만법을 총괄해가지고 탁 달통을 하니까 그 자리가 바로 아주 맑고 깨끗한 일심 자리더라. 일심 자리 하나 딱 알고 나니까 만법이 통괄하게 되더라. 이렇게 거꾸로 붙여도 되고 옳게 붙여도 되는 말이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이에요. 이렇게 가르쳐서 모든 분들이, 모든 신도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정말로 발심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럼 이렇게 모든 경전은 발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전에서 발심이 됐어요. 그러면 발심만 되고 안 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이 발심을 실천에 옮기는 거다. 실천에 옮기는 방법이 뭐냐 그러면 염불, 참선 두 가지예요.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에요. 참선 아주 일념하는 것이나 일념으로 염불하는 것이나 똑같아요. 염불해서 일념되는 것과 참선해서 일념되는 거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이치를 깨닫게 만들어주고 깨달은 이치를 행동으로 옮기려니까,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은 참선과 염불 두 가지 길, 두 문이다.

      그러면 그 문 중의 하나가 지금 수륙대재를 모시는 거예요. 그 문에 여러분 지금 이렇게 들어섰으니까 이 문에서 정말로 더 큰 발심, 더 큰 발심은 어떤 것이냐. 나는 한참 염불하는 것을 권장하기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 세 번만 불러라. 그러면 온종일 수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 하는 말을 수없이 한 일이 있는데,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 세 번 부르는 게 하루에 수만 번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더라고요. 그러니까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이 나오려면 잘 때에 관세음보살을 안 놓쳐야 눈을 뜨면 관세음보살이 나오지, 놓쳐버리면 안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안 될까. 그것은 간절하게 하면 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눈을 뜨자마자 불러주고, 눈을 감기 전에 불러주고. 여러분 잠 오는 거 아세요? 모르세요? 잠 오는 것 알고 자요? 그냥 자요?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냥 자지. ‘아 잠 오는구나.’ 그거 알고 자는 법이 없어요. 그냥 자요. 그러니까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얼마만큼 일념이 간절해야 그게 가능하느냐. 딱 잠들기 전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사르르 이렇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일념이 돼야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 일념이 되고 나면 안 될 일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요.

      여러분 열심히 큰 행사 잘 모시고 나서, 그야말로 눈을 감기 전에 관세음보살을 부를 줄 알고, 눈을 뜨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줄 알 때까지 열심히 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큰 뜻을 다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빌고 또 빕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