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다라니] 3월 17일 천독다라니기도 법문 2019-03-17

 

 

祈禱 기도

                              一心至心 일심지심 일심으로 지심으로

                              懇求精勤 간구정근 간절히 구하여 정성을 그치지 않으면

                              加被具足 가피구족 가피와 구족을

                              圓滿成就 원만성취 원만히 성취한다.

 

      오늘 다라니 천독 기도 회향이라고 법문해달라고 해서 왔거든요. 기도가 뭐냐. 기도는 문 여는 거예요. 문을 연다. 금은보화가 방안에 가득 있는데, 그 방에 금은보화가 있는 줄 모르고, 밖에서 가난하게 돌아다니던 사람이, ‘저 안에 가면 금은보화가 가득히 있다.’는 말을 듣고, ‘에이, 있기는 뭐가 있어.’ 안 믿고 안 열면 그대로 그렇게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거고, ‘그래, 저 안에 가면 있어?’ 그 말을 듣고 문을 확 열면 그 안에 보물이 가득하게 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보물 속에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문을 연 그 노력에 의해서 금은보화가 생겼느냐? 그게 아니죠. 본래부터 있던 거예요. 있는데 그 보물이 있는 줄 모르고 헤매고 다녔을 뿐이에요. 있는 걸 얻은 거지, 없는 걸 만든 게 아니다. 이게 기도예요. ‘다 열면 정말로 공덕이냐이렇게 의심할 수 있거든요. 의심 안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고, 전생에서부터 엄청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많이 속아보면 의심이 많듯이, 좋은 일 많이 안 한 사람일수록 의심이 많아요. 사람한테 많이 시달려 볼수록 사람 안 믿거든요. 한 마디 딱하면 의심 없이 바로 알 때 그거를 선근인연(善根因緣)이 깊다.’라고 해요. 선근이란, 착할 선자, 뿌리 근자인데, ‘착한 종자가 가득히 쌓였다.’ 그거죠, 착한 종자가. 그 말 딱 믿고, 그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바로 딱 들어가는 거예요. 옛날에 어떤 큰 스님이 집안이 가난해서 새우젓을 짊어지고 평생 새우젓 장사를 이 마을 저 마을로 하러 다녔는데, 지나가다가 보니까 누각이 큰 게 하나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도 있고, 저기 가서 잠시 쉴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잠시 쉬는데, 그 누각위에서 무슨 말소리가 들려요. 그 말소리를 듣는 순간에 가슴이 시원한 게, 일생의 고민이 다 풀렸어요. 그래서 새우젓 지게 내던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스님 된 예가 있거든요. 그 말이 그렇게 큰 변화를 준 거는 그 말을 믿음과 동시에 그 말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자기 문이 열린 거예요.

 

      기도는 문을 여는 거다. 문이란 게 한 번 딱 열면 여는 힘으로 그 안에 있는 보물이 다 생긴 게 아니고, 본래 가득히 있었는데, 지금까지 문이 닫혀서 모르던 것을 문을 여는 그것으로 그냥 지금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진장보배를 만나게 된다 그거예요. 중국에서 국민당 군인들하고 공산당 군인들하고 전쟁이 일어났어요. 국공합작전쟁이라고 하는데, 국민당 군대가 대만으로 갔거든요. 저 시골에서 온 군인들이 많은데 뜨거운 물을 본 일이 없어요. 수도를 틀면 물이 나오거든. 그래서 자기 군대에도 가져다 놓고 수도를 틀어요. 시장에 가서 이 수도꼭지 틀면 물이 나옵니까?’하니까 상인이 나온다고 하지, 않나온다고 해요(웃음). 사다가 부대에 가서 걸어놓고 트니까 안 나와. 다시 가서 왜 물이 안 나오냐?’고 했더니, 엄청나게 질책을 해요. 그런 것이 문화충격이고, 시사 하는 바가 많이 큰데요. 수도 틀면 나오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나오도록 물이 다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거지, 튼다고 나오냔 말이에요. 연결 안 됐으면 안 나오는 거예요. 나오도록 다 연결됐는데, 연결된 수도꼬지를 틀면 바로 나온다, 기도라는 게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에요. 그런 게 기도예요. 있는 거 그대로 맞이하는 게 기도지, 없는 거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걸 의심만 하면, ‘그거 해가지고 되냐.’ 이런 의심만 하게 되요. 이거는 수도꼭지 걸어놓고 튼다고 물이 나오냐이런 거예요. 나오게끔 되어있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건 그렇고 기도라는 것이 뭐냐. 기도는 기원한다고, 바랄 기자, 원할 원자 기원이라고 하고, 빌 축자, 원할 원자 축원이라고도 하는데, 이 기도는 기원, 축원보다도 더 의미가 강한 언어예요. 기도한다, 기원한다, 축원한다 중에 기도가 의미가 가장 강한 건데, 그걸 해석해 보면 이런 거예요. 기도라는 것은 일심지심(一心至心)이다. 기도는 일심이다. 기도는 지극할 지자, 마음 심자, 지심이다. 한 마음, 지극한 마음. 지극한 마음은 열을 할 수 있는데 한둘만 하는 게 아니고, 열을 할 수 있다면 열에 근접하게 지극, 극에 이른다는 말이거든요. 극치, 극에 도달했다. 불교에 모든 얘기하는 구조가 일심지심. 일심 한 마음, 두 가지 생각이 있으면 그걸 산란이라고 하는데, 기도는 산란한 게 아니에요. 이 생각 일으켰다 저 생각 일으켰다 하는 건 산란인데, 산란한 건 기도라고 안 해요. 한 마음으로 집중시키는 거예요. 일심이라고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계속하는 걸 지심이라고 해요. 기도는 일심이고 기도는 지심이다.

그리고 기도는 간절하다는 간자가 있어요. 구할 구자. 간구라고 해요. 간절하게 구하는 거다. ‘뭔 기도하지?’ 그래요. 그런 건 아니에요. ‘뭔 기도하지.’ 아들기도를 할까, 내 기도를 할까, 가족전체 기도를 할까. 이거는 간구가 아니에요. ‘구하면 좋지.’ 이런 거거든요. 원 기도의 기본 의미는 간구예요, 간절히 구하는 거예요. 기도는 일심이다, 기도는 지심이다, 기도는 간구다, 간절하게 구하는 것이 기도다.

 

       또 기도는 정근이다.’라고 해요. 정근이 뭐냐. 정성을 다해서, 정자가 흰쌀 정자인데, 정미라고 할 때 쌀 껍데기가 붙으면 정미라고 안하거든요, 현미라고 하지. 쌀의 알맹이만, 하얀 알맹이만 드러날 때 그걸 정미라고 해요. 정미소라고 하잖아요. 그 정자와 부지런할 근자, 정근. 정이라는 것은 정성이란 뜻이에요.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거다. 부지런할 근자는 중단하지 않는다. 하다 안하다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하는 걸 근이라고 하고, 정성을 다하는 걸 정이라고 하고. 그래서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게 그게 정근이다. 별거 아니에요. 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는 한 마음이다, 기도는 지극한 마음이다, 기도라는 것은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그게 기도예요. 다른 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가피가 있고 구족이 있는데, 구족이라는 것은 갖출 구, 만족할 족, 아무 것도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이 대원을 원만 성취한 거, 큰 원을 원만하게 다 성취한 것을 구족이라고 해요. 그래서 기도 성취 중에는 구족성취가 있습니다. 더 이상 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거예요. 그 경지에 도달하는 기도 성취를 구족성취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가피 성취가 있어요. 가피, 뭘 구하던 것이 이루어진 거. 그거는 부분적인 것이지 전체적이고, 또 과정적인 것이지 어떤 최종적인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가피성취가 있고, 구족성취가 있다. 기도하면 바로 성불하는 거예요. 기도하여 소원성취,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가피성취예요. 그래서 가피와 구족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이 그게 기도다. 오늘 법문의 주제가 이런 거예요. 가피도 성취하고 구족도 원만 성취하는 것이 그게 기도인데, 그게 왜 되냐. 기도는 문 여는 거기 때문에, 만드는 게 아니고, 문 여는 것이므로, 조작이 아니고 개문(開門)이다. 열 개자, 문 문자. 내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개문, 문 여는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하게, 금은보화가 가득 있는데, 문만 열면 되는데, 근데 왜 문을 못 여냐. 믿지 못해서 못 열고, 믿는다 하더라도 하지 못해서 못 열어요. 믿지 못하고 하지 못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로 역사가 2,000년 가까이 됐는데, 불교라는 것은 인생의 정신이기 때문에 , 이 정신이라는 것은 전해진다고 다 안착되는 건 아니에요. 전해 받는 쪽에서 말할 때 전래라고 하거든요, 전해 왔다고. 전하는 쪽에서 말할 때는 전수라고 해요, 줄 수자. 전래, 전수. 불교 유통 역사를 볼 때 전래라는 말을 써요, 전해왔다. 인도나 중국에서 자기들 중심으로 말할 때는 한국에 불교를 전수해줬다고 말하죠. 그럼 전한다는 얘기는 불이 있는데, 나무에다가 불을 이렇게 대면 점화와 같은 의미에요. 나무에다 아무리 불을 대도 나무가 안타면 불은 꺼지고 말아요. 점화가 돼서 발화가 됐을 때, 불이 확 일어났을 때, 그 때 불교가 한국에 온 거예요. 그냥 횃불을 가지고 불이 타다가 아무 나무도 타는 나무가 없으면 꺼지고 말죠,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우리 정신력의 바탕이 아주 강한 거 같아요. 불교전래사를 가만히 보면 불교에서 엄청난 일을 이룬 것이 문헌에 계속 나타나요. ‘, 이건 정신토양이 그렇게 깊고 이렇게 광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삼국유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불교에 관계된 게 대부분이에요. 한국고대불교전래사를 이해할 때 삼국유사가 그렇게 중요한 책이거든요. 기도에 대한 영험한 사례가 엄청나게 많아요, 삼국유사에. 거기에 보면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가 실명을 했어요. 지금도 아이가 소중하지만, 예전엔 더 소중했거든요. 아들 하나 잘 낳아서 키우면 보험 들 필요도 없고요. 평생 노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안 걱정할 것도 없고, 집안 노동력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온 집안을 종합적으로,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들이에요. 요즘 애들은, 제 고향이 충청도인데 충청도 말로, 싸가지가 별로 없어요. 싸는 우리말이고, 아지는 한문인데, 강한 말을 쓸 때 대부분 우리말과 한문을 같이 쓰는 말입니다. 왜 싸가지가 없냐. 부모는 별로 생각도 안하고 부모에게 갚을 능력도 없어요. 그래서 요즘 아들은 예전처럼 전체가 보장되는 아들이 아니에요. 나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부모가 나를 낳아서 기르긴 길렀는데, 그 기른 은혜만 먹고 내가 튀어버렸어. 별별 아들이 다 있는데, 신라시대엔 전혀 안 그래요. 삼국유사 여러 번역에 다 나오는 향가인데요. 노랫말을 지어서 아이에게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계속 부르게 했어요. 삼국유사에는 향가가 많거든요. 신라 때 부르는 노래.

 

  盲兒得眼加被 맹아가 눈 뜬 가피(눈 먼 아이가 눈을 얻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서 천수관음 앞에 빌어 살우나이다

 즈믄()손 즈믄눈을 가지셨아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오니 하나를랑 주시옵시사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三國遺事卷3 삼국유사권3, 芬皇寺千手觀音 盲兒得眼분황사천수관음 맹아득안)

 

이런 노래로 계속 기도를 했대요.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 내가 관세음보살이어도 안 주고는 못 배겨요. 천수천안, 우리 옛말에선 즈믄이라고 했어요. 천손을 가지시고 천안을 가지셨으니. 어떤 향가를 보면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주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주지 않으면 나빠요.’라는 내용이 들어간 것도 있어요. 우리 민족의 감정인 거 같아. <서방가(西方歌)>라는 향가도 있는데, ‘달아, 서방으로 가시나이까. 서방에 가시면 아미타불님께 말씀해주소서. 그리워하는 님이 여기에 있다고 말씀해주소서. , 나를 버린다면 48원이 이루어질까.> 아미타불의 48원은 누구든지 자기를 원하고 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겠다, 이게 원이거든요. 가고자하는 내가 있는데, 나를 버리면 과연 48원이 이루어지겠냐.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원을 이루기위해서라도 꼭 해줘야 된다, 이런 식이에요. , 이러니까 이게 우리 인간사 중에 너무 강하게 들이대는 사람은 조심해야 되요. 그게 안 이루어지면 가만히 안 있어요. ʻ천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도 안 준다면 진짜 나빠요.’인데 다행히 그 말은 없어요.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란 말이 있어요. 그게 오늘날까지 내려와요. 이게 반대로도 나타나요. <가시는 걸음걸음에 깔아드리오리다.> 이건 반대인데요, 반대라도 감정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재미없다고, 보복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자기가 먹었던 것을 소화해서 한으로 간직하고 그것이 공덕으로 피어나게 하는 이런 인격자가 있긴 있는데, 많지 않아요. 그러니까 물불 안 가리고 들이대는 사람은 우선 조심해라. 차후에 보복당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얘기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얼마 있다가 눈을 얻었어요. 눈을 떴어요. 안과, 과학적으로 접근할 일은 아니고. 왜 그러냐. 본래 눈이 있었는데, 기도를 통해 만든 것이 아니고, 가려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뜬 거예요. 기도라는 게 이런 거예요. 일심, 지심, 간구, 정근. 그러면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의지해 눈을 얻었으니까 가피라고 하거든요. 눈이 가려져 있었는데 떴으니까 더할 가자, 입힐 피자, 더 입혀줬다. 이거거든, 이게 가피성취예요.

 

      기도는 또 이상한 게 있어요. 구하는 것은 별 수 없는 걸 구했는데, 경과가 아주 좋은 게 있어요. 어떤 사람이 시어머니가 꼴보기 싫어서 몰래 ʻ우리 시어머니 빨리 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는데, 시어머니는 안 죽고, 자기 마음이 확 변해서 시어머니에게 인간적인 깊은 이해를 하게 되고 동정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는 철조망이 다 걷혀서 평화가 이루어졌어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사이가 먼 사람일수록 미워하게 되거든요. 미워하는 철조망이 싹 걷히면 자기 아들처럼, 자기 딸처럼 사랑까지 하게 되요. 또 자기 자신처럼 온갖 걸 다 받아들이게 되요. 자신을 왜 미워하지 않냐하면 자신은 모든 걸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수 있지. 너 그럴 수 있어. 너는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 괜찮아.’ 이게 자신에게 향한 감정이거든요. 불교에서 아상, 인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를 생각하는 거, 아상은 탐욕이라고 해요. 탐욕을 왜 부리느냐. 나 때문에 부리는 거거든. 자기를 위해서는 다 욕심을 내요. 그런데 인상은 뭐로 설명하냐하면, 인상은 분노라고 해요. 나한테 분노하는 게 아니에요. 엄청나게 잘 못 한 거 투성인데, 자기 자신에 대해선 분노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기가 분하게 여기고 노엽게 여긴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분노한 감정이 확 가셨으면 평화가 오는 거예요.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아니라 철조망이 있었다면, 아침마다 괴롭지 않았을 것을.’ 그 철조망 때문에 그래요. 그걸 확 걷어내면 되는데, 못 걷어내서, 이게 또 기도의 영험이에요. 처음에 자기중심적으로 목표를 가지고 기도를 했는데, 하다보니까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확 바뀌어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게 기도의 영험이에요. 이광수의 <>이라는 소설에서 나오는 주제이기도 한데요, 신라시대의 어떤 스님이, 조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는데, 어떤 여인을 사랑하게 돼서 낙산사 관세음보살 앞에 가서 그냥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했는가 봐요. 근데 어느 순간 하룻저녁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뭘 얻었느냐, ‘한평생이 꿈인 것을 이제야 알았노라.’ 인생이 꿈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모든 것이 꿈 깨면 그만인데. 이게 엉뚱한 거예요. 구하기는 여자를 구했는데, 얻은 것은 한평생이 꿈인 걸 알았어요. 소설가, 문학가의 플랜을 쫓아다니면 핵심을 몰라요. 문장에 헤매는 게 소설이거든. 결론은, 구하기는 그 여인과 함께 하기를 구했단 말이에요. 얼마나 간절하게 구했던지, 간구. 꿈을 얻었는데, 그 꿈속에서 무얼 얻었느냐. ‘한평생이 꿈인 줄을 이제야 알았노라.’ 전혀 다르잖아요. 이게 또 기도예요. 그러니까 한평생이 꿈인데, 거기서 뭘 얻고 안 얻고, 전부가 꿈이다 말이죠. 평생이 꿈인데, 얻는 것도 꿈이고, 잃는 것도 꿈이고, 가는 것도 꿈이고, 오는 것도 꿈이고. 오고 가고 얻고 잃을 땐 도저히 몰라요. 영리한 사람은 죽기 30분전에 알아요. 인생이 꿈인 것을. 좀 덜 영리한 사람은 10분전에도 몰라요. 좀더 덜 영리한 사람은 1분전에도 몰라요, 1분전에도. 석가모니가 영리하다는 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도 죽는다는 걸 요즘 말로 뼈 때리게 안 거예요. 그냥 어설프게 안 게 아니고. 이게 위대하다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7살인가 8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봤는데, 나도 죽는다는 걸 꿈에도 몰랐어요. 그때 나도 죽는다는 걸 알았으면 지금보다도 더 순수하게, 더 간절하게 살지 않았을까. 근데 이 기도를 통해서 그 여인이 문제가 아니라 내 일생이 꿈이구나, 이거를 절실히 아니까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꿈 깨는 일밖에 없거든. 그래서 꿈 깨기 위해서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서방정토 극락세계 염불만 했다. 이런 게 나오거든. 이런 게 기도의 또 영험이에요. 꿈인 줄 알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안에 꽉 있는데, 밖으로만 계속 헤매다 보니까 모르다가 간절하게 구함을 통해서 그 알 수 있는 능력의 문을 연거죠. 이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참회 기도가 있어요. 참회가 어려운 게 자기 집착, 자기밖에 없으니까 이걸 미혹이라고 그러거든요, 자기 미혹. 미혹이라는 게 잘 못 본다는 거거든요. 뭘 잘 못 보냐, 자기를, 자기미혹. 자기는 오래 살 거다, 자기는 건강할거다, 자기는 아는 것이 바를 거다, 이런 자기 미혹이 있고, 이게 한 번에 자극을 받아 무너지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요. 당황해서, 이걸 공황장애라고 해요. ‘나는 능력이 없네, 나는 가치가 없네.’ 자기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우울증이라고 하는데,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옛날에 화병인데요. 우리 할머니도 화병이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하도 바람을 피워서 화병 났다고. 화병이니 우울증이니 이런 게 뭐냐 하면 자기 가진 걸 모르는 게 우울증이에요. 인간은 자기 가진 걸 몰라요. 이게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 워낙 강하다 보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건 항상 몰라요, 빈털터리에요. 이걸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 이게 인간이에요. 이게 우울증이에요. 외국말로 하면 노이로제. 노이로제라는 건 우울증인데, 가진 걸 모르는 거예요. 뻔한 거예요. , 기가 막혀요. 언젠가 여기 법문하러 왔는데, 참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아가씬데 재를 하더라고. 저 아가씨가 어째 젊은 나이에 갔나 했더니, 무슨 미스코리아에 출현해서 선으로 당선이 됐는데, 진이 못 됐다고 죽었대요. 우리는 미스코리아 진선미 자체를 못 들잖아요. 참가도 못 하잖아. 출전해서 선에 당첨도 못 되는데, 선에 된 사람이 진이 못 됐다고 극단선택을 했다는 거여. 그런 거를 노이로제라고 하고, 그런 거를 우울증이라고 해요. 그게 전부 자기미혹이에요. 그래서 정신이 건강하면 밖으로 구하는 것보다 현재 있는 걸 먼저 느껴야 해요.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면 어때, 여기 사는데. 바람피는 할아버지를 볼 게 아니라 지금 나하고 사는 할아버지를 보면 철조망이 걷히잖아요. 보살 마음이 하나 더 일어나면 내 남편이 아직도 능력이 있네.’ 더 가면 바람피는 건 좋은데 건강만 해치지 않게. 저녁에 내 집에 돌아올 힘은 있게 피소.’ 이 정도까지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강력하고 힘센 힘이 못 나와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부정적인 것만 많이 받아들이고 현재 자기에게 있는 건 하나도 모르고 있는 걸 모르는 게 그게 노이로제고 우울증이다. 스트레스란 뭐냐. 계속 더 입으려고만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80인데 대중 앞에만 나가면 떨린다고 하더라고요. 왜 떨리냐. 더 잘 보일려고. 이유는 모르고 자꾸 더 입으려고 하는 게 스트레스예요. 가진 걸 모르는게 노이로제고. 근데 기도를 하면 노이로제나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절대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것이 구족성취에요. 절대평화. 이건 다 만드는 게 아니고, 본래 있는 건데, 그냥 문 열어서 쓸 뿐이다. 뭐 이런 거예요.

천수경에 보면 천수다라니가 어떤 거냐.

 

                   慈光照處蓮花出이요 자광조처연화출

                   자비광명 비춘 곳에 극락세계 나타나고

                   慧眼觀時地獄空이라 혜안관시지옥공

                   혜안으로 바라볼 때 지옥은 없다.

                  又況大悲神呪力 우황대비신주력 그뿐인가, 대비신주력은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성불찰나중 중생이 찰나에 성불한다.

                                                                       (神呪着語 신주착어)

 

자광조처연화출이요, 제사 지낼 때 항상 하는 말이거든요. 연화는 극락세계를 말하는데, 극락세계가 어디서 나오냐. 자기자신에서 나온다. 자기광명이 비추는 곳에, 자광조처에 연화출이라, 극락세계가 출현한다. 내 마음이 자기심으로 충만하면 가는 데마다 극락세계인 거예요. 자광조처연화출이라, 자기광명 비추는 곳에 극락세계가 나타나고, 출자는 나타날 현()자와 같은 뜻이고, 출현한다고 하죠.

혜안관시지옥공이라,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지옥은 없다. 지옥은 전부 어리석은 마음에서 나타난 거다. 지혜의 눈으로 볼 때 지옥은 없다. 이게 불교거든요.

又況, 우황, 그뿐이겠나, 또 우자, 하물며 황자, 大悲神呪力 대비신주력, 대자대비관세음보살님의 다라니 주문은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성불찰나중, 중생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진다. 중생이 찰나에 성불한다. 성불이라는 것이 자기의 근원을 완전하게 깨달아서 완전한 평화, 완전한 행복을 이루는 것을 성불이라고 하는데, 완전평화, 완전성불이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이 다라니의 위신력이다.

 

      이런 거를 계속해요. 그런데 한자가 되어 잘 이해가 안 되는 장벽이 있고, 그런 말을 듣는다 해도 지금까지 계속 자기미혹, 이런 것에 빠져있어서, 잘 믿을 수가 없고, 믿어도 또 순간뿐이고, 오래 가지 않아서 그런 건데, 잠시 믿고 잠시만 했다 해도 거기에는 엄청난 인연이 쌓여있어요. 그래서 이런 걸 가피 중에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이라고 해요. 어두울 명, 연기 쏘일 훈. 어둡다라는 건 자기도 모르게 연기를 옷에 쏘이면 서서히 연기 냄새가 몸에 배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가득해지는 것을 명훈, 명훈가피라고 해요. 아까처럼 꿈에 나타난 것은 현몽가피라고 하고. 신라시대 의상스님의 그 유명한 제자중의 하나가 지통(智通)제자인데, 지혜 지자, 통할 통자, 이 지통이 태백산 조그만 절에서 화엄경 공부를 하는데, 한 번은 그 절 앞으로 멧돼지가 지나가요. 그걸 보고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한테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 부처님이 말을 하는 거예요. 이런 걸 현신(現身)가피라고 하는 거예요. 나타날 현자, 몸 신자. 뭔 말을 하느냐. ‘저 앞에 지나간 멧돼지는 너의 전생이고, 지금 너는 너의 금생이고, (부처님 존상)는 너의 내생이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 삼세가 일찰나다.’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삼세일념(三世一念), 생각 염자를 생각이라는 뜻도 되고, 찰나를 번역할 때 생각 염자로 번역을 해요. 일찰나를 일념이다라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은 일찰나가 무량겁이란 얘기에요. ‘, 이게 삼세가 일찰나네. 과거현재미래가 일찰나에 다 있네.’ 이거를 깨닫고, 의상스님께 말씀드려서, 의상스님으로부터 법성게 글과 인(도장)을 받아서 계속 정진하여 지통이라고 의상스님의 십대제자 중에 하나인 아주 유명한 제자가 됐거든요. 내가 간구하게 되면 불가사이하게 저기 모셔졌던 부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또 꿈에 나타나고. 또 가피를 얻어서 잃었던 문을 다시 얻고, 이런게 원리는 똑같은 거예요. 만드는 게 아니라 문 열어서 얻는 거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