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5월1일 음력 4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2-05-01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진관사는 제가 한 4, 50년 전으로 기억을 하는데, 어느 스님과 함께 점심 때쯤 시내버스 타고 내려서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스님들께서 아마 저쪽 방 같은데 발우 공양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시내에 살면서 대중이 여법하게 발우공양하는 도량이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발우공양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상이 좋았습니다. 근데 스님들 오시면 맞이하는 스님을 지객 스님이라고 하는데, 지객 스님께서 나오셔 가지고 스님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양을 다시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아니 스님들 지금 공양 시간인데 밥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냥 주십시오.” 하니까, 난 그때 들어보고 처음 들어보는데, “어찌 저희들이 먹는 밥을 드리겠습니까. 다시 해서 드리겠습니다.” 이래요. 그래 가지고 스님들이 다 공양 끝난 뒤에 나가시고, 큰 방으로 저하고 그 스님을 안내하더라고요. 그래서 큰 방에 공양을 차려주셨어요. 큰 방에 이렇게 안내하는 것이 가장 큰 대접입니다. 대중이 사는 판도방(判道房), 도를 닦는 방, 그 큰 방은 이 법당 다음으로 중요한 방입니다. 그 방으로 안내해서 공양을 차려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게 먹고, , 오방번 이런 걸 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다 달아 드리고 내려갔어요. 그런 좋은 인상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진관 큰스님께서 주석하시면서 대중과 수행을 함께 하고 도량을 정비하고 살던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 회주 스님이나 우리 새로운 법해주지스님, 이런 모든 스님들이 그 진관 스님의 문도일 겁니다.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이렇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까 아주 기분도 좋고, 그래서 오늘 와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새벽에 와가지고 오늘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오늘이 딱 초파일 일주일 전이에요. 그래서 잘 아시겠지만, 우리 부처님의 탄생, 또 탄생에 담긴 의미, 또 부처님이 최초로 말씀하신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소통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이 지구촌을 지금의 개념으로 파악하면 이해가 안 갑니다. 불기 올해 몇 년이죠? 2566년에다가 부처님이 80살까지 사셨어요. 이걸 더 해야 돼요. 부처님이 돌아가신 해를 불기 1년으로 쳤어요, 세계불교도대회에서. 그래서 지금 그 불기로 3천 년이 넘는데,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여러 가지 근거를 가지고 정한 게 2566년입니다. 여기에다가 80살을 더하면은 많죠. 2646년이에요. 그런데 그때 당시의 80세는요, 정말 대단한 천수를 누리신 분입니다. 지금 지구상의 4대 성인, 이런 분들 중에도 부처님이 가장 유복하게 태어나셨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고, 교육도 받고, 또 천수를 다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어디로 태어나셨어요? 옆구리로 태어났대요. 오른쪽 옆구리인지. 부처님은 제왕절개 일호에요. 옛날에는 안 믿었는데 다 요즘 배로 나오잖아요. 앞서 간 분인데, 왜 그런 말이 있느냐면 이제 인도에서는 우주를 주재하는 신을 범천이라고 합니다. 범천. 범천의 머리 꼭대기로 태어나는 계급이 있어요. 이건 바라문 계급이에요. 종교 계급입니다. 바라문이 제일 위의 계급이에요. 그다음에 옆구리로 나오는 계급이 왕족이나 귀족이에요. 그리고 우리와 같이 나오는 게 평민이에요. 그다음에 이제 수드라라고 이 노예 계급은 범천의 발바닥으로 태어난다 이랬어요. 그래서 사성제가 있는 거예요. 네 계급이 정해져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인도가 지금 민주사회라 해도 이것을 극복 못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로는 헌법도 다 민주적이지만 실질적인 사회 풍토는 이게 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있어요. 불가촉천민이라는 게 있어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들, 이건 짐승 취급도 못 받아요. 그래서 다섯 계급이 있는데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범천의 정수리, 옆구리, 또 우리와 같이, 아니면 발바닥으로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부처님은 그래서 바라문 계급이 아닌 왕족으로 태어나서 옆구리로 탄생하셨다.

        이랬는데 탄생의 제일성(第一聲)이 뭐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거예요. 그전에는 등을 스님들이 다 만들어서, 철사부터 해서 만들어서 다 붙일 때 거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팔각이니까 이런 식으로 썼었어요. 지금은 등을 한 달, 일주일 이상 다 달아 되니까, 종이로 못 달죠. 비도 안 맞아야 되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이 탄생의 제일성이라고 그래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보살님, 거사님, 여기 지금 진관사 경내에 계시는 모든 분들의 본질 자리, 이 본질 자리는 위아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이니까 그 마음이 높고, 신도니까 낮고 이런 게 아니에요. 그 마음은 같은 거예요. 이걸 이야기했는데 지금 이야기하니까 이해가 가는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2646년 전에 이 말씀은 목숨 내걸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노예나 바라문이나 왕족이나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다 이래 버리니까. 그래서 불교를 민주적이지 않은 독재자들은 안 좋아해요. 똑같다 하니까. 평등. 그러니까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바탕. 우리식으로 하면 불성입니다. 불성 부처님이죠.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을 표현한 이야기예요.

        그다음에 나온 말이 삼계개고 아당안지.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18계 중생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이게 다 고통이다. ‘삼계개고, 다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 이게 삼계개고 아당안지 선언입니다. 이런 탄생 설화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삶은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도 버리고 출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신 날이 일주일 후 초파일이죠. 이분은 어디서 태어나느냐 하면 룸비니동산에서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무슨 나무? 무우수(無憂樹). 불교는 세 가지 나무를 기억해야 돼요. 무우수입니다. 근심 없는 나무입니다. 인도에선 아쇼카라고 그래요. 아쇼카. 무는 없다는 뜻이니까 영어로 보면 아가 부정이에요. 근심이 없는 나무, 아쇼카, 아쇼카 대왕이 있잖아요. 화장실을 우리 뭐라고 해요? 해우소라고 그래요. 근심 푸는 것. 근심은 어떻게 해서 생길까. 그러면 이 고통은? 담아두려고 하니까 생겨요. 비교하니까 생겨요. 비워야 돼요. 비워야 돼. 여러분이 만약에 진관사에 초하루날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여러분 수행을 위해서 오셨다면 첫째 마음을 내려놓아야 돼요. 내려놓고 비워야 됩니다. 비워야 채우지요, 채우려고 비우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신도님들 수준이 높아졌어요. 그전에는 제가 출가할 때만 해도요, 스님들 법문도 없었고요. 열심히 자기 이름, 자기 가족 축원 나오나, 나오면 얼른 내려가서 후원에 가서 밥 먹고 있어요. 스님들은 기도하고 있는데. 이름만 나오면 끝난 거야. 근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지금은 법문이 주죠. 그렇게 됐습니다.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무는 무우수예요.

        그래가지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하죠. 동서남북 4대문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생로병사가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이렇게 관찰하시고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출가해서 어느 나무 밑에서 성도 하시나요? 보리수입니다. 여기 보리수나무 어디 있을 거예요. 제가 옛날에 94년도 봄에 앞뒤 배낭을 메고 인도를 다니는데, 일반적으로 여행사를 통하면 못 가는 곳이 있어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드가야, 거기에 강이 니련선하란 강이고, 그 강을 넘어서 저 멀리 바라보면 산이 하나 보여요. 야산이. 그게 전정각산이에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 마지막 고행하셨던 산이에요. 저는 논두렁길 산길 해가지고 반나절을 걸어가서 거의 참배했거든요. 그 산에 가면 지금은 지형이 변했지만,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메말라 있고 원숭이만 다니고 부처님이 정진하시던 굴, 문도 없습니다. 앞에 바위가 하나 이렇게 막아져 있고. 이런 데서 고행을 하시다가 , 방향을 잘못 틀었다.’ 부처님은 29살까지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셨던 분이에요. 그쵸. 태자였으니까. 그다음에 출가하신 뒤 6년간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행을 하신 분입니다. 인도의 수행법은 그때만 해도 고행이 대세였어요. 육신을 학대함으로 해서 오는 그 마음의 행복을 얻으려고 그리했던 겁니다. 쌀 한 톨로 하루를 연명하는 부처님 고행상 보면은 뼈가 다 드러나 있잖아요. 이렇게 고행을 하셨는데 이것이 아니더라는 거지요. 극단주의를 지양하는 거예요. 쾌락도 너무, 고행도 고행만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순간적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어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아요. 그리고 또 그 이전 단계는 고통 때문에 수행이 안 돼요. 저한테 가끔 와서 묻는 분들 이렇게 대담해보면 어떤 거냐면 스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좀 참선 좀 하고 싶은데 무릎이 아파서 참선을 못합니다. 무릎이 아파서 앉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그런 분들한테 늘 드리는 말씀이 있어요. 이게 기본이 이제 좌선이니까 좌복에 이렇게 지금 스님들처럼 앉아 계시지만, 이것은 참선 잘하기 위해서 앉는 것이지, 자세가 좋으려고 참선하는 건 아니에요. 본말이 이게 전도됐다고. 무릎이 아픈 분이 좌복에 앉아서 화두를 들면 고통 때문에 화두가 달아나거든요. 그러면 무릎을 안 아프게 해야지요. 그럼 의자에 앉으면 돼요. 발 뻗고 이렇게 하면 더 힘드니까 편한 의자에 앉으셔서 공부하면 되는 겁니다. 공부 잘하기 위해서 앉는 거란 말이지, 잘 앉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대신에 의자에서 깊숙이 몸을 묻으면 한 5분 가면 졸려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입니다. 어떤 것도 무겁지 않은데 눈꺼풀만큼 무거운 게 없어요.

        그래서 이게 진짜 의미가 뭔가 이것을 우리가 파악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6년간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행을 하다 보니까 그게 아니다 해서 그 굴에서 내려오셔요. 내려오면 이제 니련선하 강이 흐릅니다. 거기 강에 몸을 담가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져요? 고행자는 수행자는 목욕을 안 해야 돼요. 목욕을 했네. 수행을 너무도 잘하니까, 고행을 잘하니까 5명이 멀리서 늘 지켜봤는데, 저 고다마 시따르타가, -부처님 태자 때 이름이 고다마 시따르타에요.- 부처님이 성은 샤카족, 석가, 우리 말로 석가인데, 그 전 이름은 고타마 시타르타- 고타마 시타르타가 타락했다, 목욕했다, 해서 떠나요. 그런데 목욕하다가 지쳐가지고 쓰러져요. 쌀 한 톨로 연명한 고행자가 목욕하니까 쓰러져. 그러니까 한 소녀가 지나가다가 유미죽이라고, -우유에다가 쌀을 넣어서 죽을 끓이면 유미죽인데 고소합니다.- 그걸 이제 입에 넣어줘요. 그걸 먹고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어나요. 힘이 나는 거예요. 근데 그 모습을 본 5명의 수행자는 타락했다 해서 떠나버려요. 이제는 자기 주위에는 어느 누구도 없어요.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 이제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하고 일주일 만에 드디어 정각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그 앞산이 전정각산, 정각을 이루기 전에 산이고, 이 인도에 가면 보리수가 큰 게 있는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해서 보리수가 된 거예요. 보리는 <깨달다> 이 말이지요, 보리살다. 우리 보살님 보고 보살님 보살님 하는데 깨달은 중생이라는 표현이니까 얼마나 큰 칭찬이에요. 큰 스님들도 좋으신 큰 스님들을 보살님 같다 하거든요. 고암 큰스님 이런 분들 늘 보살님 같다, 보살님 같다그랬어요. 보살님이라는 칭호는 대단한 칭호입니다. 그냥 함부로 쓰는 칭호가 아니에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나무가 보리수예요. 열반하신 나무는 사라쌍수 사라수라는 나무가 있는데 두 개가 이렇게 있어요. 그래서 사라쌍수하에서 돌아가십니다.

        근데 돌아가신 이야기까지 많이 하면 시간이 없으니까, 부처님의 생애를 정리하자면, 지금으로부터 2646년전에 태어나신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하고, 35세에 부처님이 되는 거예요. 정각을 이루고 45년 동안 중생교화를 위해서 길에서 길로, 길에서 길로, 이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그 실현을 위해서 정말로 맨발로, 맨발로 인도 전역을 다니시면서 교화하신 그런 위대한 성인 중에 성인이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하는 의미는, 등에 보면 이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주로 많이 쓰여 있는데, 등을 밝히는 이유는 자등명이에요. 자신의 등불을 밝혀라,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거예요. 수행을 통해서. 수행은 여러 가지가 있죠. 뭐 기도도 있고, 염불도 있고, 부처님 경전을 보는 강경도 있고, 또 참선도 있고, 또 능력껏 재능 보시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보시하는 거예요. 돈만이 아니고 무슨 기술이 있으면 기술을 보시해서 이웃과 함께하는 이런 여러 가지 행을 통해서 스스로 부처임을 확인하는 일이 이게 자등명입니다. 자신의 등불을 밝히는 거고. 그다음에 법등명은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가 이럴 것이라, 부처님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서 우리가 등을 초파일 날 밝히는 겁니다.

         근데 등은 어디에서 빛이 나나요. 어두운 곳에서 빛이 납니다. 어제 시내에서 3년 만에 연등회 제등 행렬을 했는데, 밤에 하는 이유가 그래요. 낮에는 햇볕이 강해서 등이 빛을 발하지 못해요. 그런데 밤이 되면 등이 밝아져요. 이게 이제 어둠을 밝히는 등이듯이, 진리의 등을 밝히고 자신의 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등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같으면 저 모서리에다가 달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가다가 넘어질세라. 경축하는 의미가 진리의 등 그다음에 자신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고, 그다음에 부처님이 오신 본래 의미를 실천해 옮기는 것, 이게 이제 1년 열두 달 늘 하면 좋겠지만 안 되니까 초파일 봉축 기간만이라도 좀 해보자는 거예요. 이게 뭐든지 습관들여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다음에 그러면 이제 부처님이 6년의 고행 끝에 성도 하시고 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첫 말씀이 기재기재다, 참 기특하고 기특하다.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원만 덕상이 본래 다 갖추어져 있구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6년 고행할 때는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의 씨앗이 있는 줄 몰랐던 거예요. 근데 깨닫고 보니까 본래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도 마찬가지죠. 본래 다 부처라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셔?. 여러분이 부처라면 안 믿지요. 겸양이 너무 심해. 종이라고 하면 믿어. 아니 종이라고 하면 믿는 분들한테는 여러 가지 방편이 많이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주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인이라고 하면 안 믿고 종이라고 믿는 것은 이건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문벌로 봐도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들이니까 석가족이에요. 샤카족. 이것같이 귀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불자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됩니다. 저는 스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요. 물론 살다 보면 허물도 생기고 하지만 부처님 제자로서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다잡고 수행합니다. 그래서 나는 택시 잡으려고 하다가 누가 뛰어가서 얼른 잡으면 손해 보고 말아요. 스님이니까 손해 보는 것도 많아요. 싸우다가도 누가 막 대들다가 왜 그러쇼.” 소리 한 번 지르면 스님이 소리를 질러요 그래. 그러면 당신이 나를 지금 스님으로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습니까?” 하면은 그 사람도 이제 쭈삣해요. 그러나 수행자니까 참아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손해라는 생각도 없이 참아야 돼요. 근데 아직 수행이 덜 됐으니까 어쩌다 한 번씩 성질이 나오는 거죠. 그러나 성질 내는 횟수가 줄어들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고요. 진관사 스님들한테 와서 괜히 시비하지 말고. 이게 다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자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 우리가 다 여래의 원만 덕상을 지니고 있다. 이 강한 믿음, 믿음이 있어야지, 믿지 않으면 한 발 더 나아갈 수 없어요.

        그다음에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이제 여기 등이 달려서 하는 말인데, 여러분 심청가 아시나요. 심청가 아시죠. 그 심청가의 마지막 대목이 뭐예요. 심봉사 눈 뜨는 장면이에요. 어떻게? 공양미 300석에 제물이 돼가지고 팔려가서 자기 아버지 눈을 뜨기 위해서 효녀 심청이가 인당수에 제물이 되잖아요. 봉은사 화주승이 300석 하면은 눈 뜰 거라고 하니까 믿고 자기가 인당수에 뛰어들어서 죽었는데, 그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연꽃이 나타나서 효녀 심청을 받아요. 그래가지고 이게 바닷가 가로 나가니까 백성들이 보고 임금님한테 알려요. 그래서 연꽃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 임금님이 자기 부인으로 삼지요. 근데 늘 왕비가 되어도 아버지 눈이 떠졌을까 궁금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요즘 같으면 tv도 있고 라디오도 있고 아버지 찾습니다.’ 하면 되는데,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니까, 전국의 맹인 잔치를 열어요. 전국에 있는 맹인들은 다 모여라. 심학규도 가지요. 뺑덕어미가 데리고 가다가 젊은 사람한테 눈 맞아서 도망가고 그 과정이 재미있게 이렇게 연출되는데, 효녀 심청이 가보니까 전부 맹인인데 아버지가 저 뒤에 혼자 앉아 계시는 거예요. 눈을 안 떴지. 눈을 떴으면 왜 왔겠어요. 그러니까 막 달려가 아버지 저 청입니다. 아버지 딸 청입니다.” 하면서 막 통곡을 하니까 심봉사가 어떻게 돼요? 꿈에도 그리던 자기 딸 목소리가 들리니까 눈을 뜨려고 막 껌뻑껌뻑 하다가 툭 뜨네.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거기에 있는 모든 맹인들이 눈을 뜹니다. 눈을 뜨는 거예요. 이게 이제 하이라이트예요. 이게 불교의 화엄경에 있는 중중무진 연기 사상의 바탕한 심청전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눈을 떴다는 건 뭘까. 육신의 눈을 뜬 것도 뜬 것이지만, 지혜의 눈을 떴다는 이야기지요. 자등명 법등명 아까 말씀드린. 제 눈을 뜬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경쟁할 필요가 없어요. 이 등들도, 이 많은 등이 있는데 빛은 서로 방해하지 않아요. 이 빛이 저 빛을 비치고 이 빛이 저길 비치고 해서 완전히 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누르고 성공하려 한다 이런 개념인데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 지구촌이에요. 코로나가 지구촌 한쪽에서 일어나니까 지금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연결돼 있어요. 이거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연기법이에요. 연기.

         이 부처님이 성도 하시고 나서 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도 소멸한다. 이게 연기법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저나 또 이 법당에 앉아 계시는 진관사의 거룩한 스님들, 또 지금 의자에서 제 말씀을 듣는 여런 분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되어야 여러분이 잘 되고, 여러분이 잘 돼야 저도 잘 됩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이런 큰 마음을 가지고, 동체대비심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또 나의 모든 재능이 있으면 그것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이런 자세를 가지고 맞이하는 것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불자의 자세이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스님들도 그러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하면 그건 독각승이에요. 그러나 그 큰 원력을 가지고 저희들도 수행하고 또 저희들도 기도하고 염불하고 축원하고 합니다. 성스러운 우리 부처님이 오신 날을 맞이해서 모든 불자들이 본래 스스로 부처임을 확인하고 그 확인한 그 지혜를 가지고 사유의 자비로 베푸는 그런 멋있는 4월 초파일이 되기를 발원하며 제 말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