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11월 24일 49재 법문 2021-11-24

  

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生本無生 滅本無滅

생본무생이요 멸본무멸이로다

生滅本虛 實相常住

생멸이 본허하야 실상이 상주로다

夢踏青山脚不勞

몽답청산각불로요

影入水中衣不濕

영입수중의불습이로다

나무아미타불

 

      49재는 영가분을 극락세계로 모시는 일인데 극락세계로 어떻게 가냐. 우리 몸이 인연 따라 생멸하는 몸이 있고, 불성이, 불성은 뭐냐, 아는 본성, 아는 본성이 둥글고 밝은 몸이 있다. 그래서 인연 생멸, 불성 원명,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인연 생멸하는 몸은 오온색신이라 다섯 가지가 뭉쳐서 보이는 몸이다. 불성 원명의 몸은 청정법신이다, 청정한 법의 몸이다, 이거예요.

      오온색신는 연생연멸로 인연 따라 나고 인연 따라 가는 것으로서 무상한데, 불성원명신은 둥글고 밝아서, 둥글다는 것은 시방 허공보다 더 넓고 백천 태양보다 더 밝다, 시방허공 백천일광, 그건 청정법신이다. 청정이란 말은 아무것도 그거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런 뜻이죠.

      그래서 인연생멸신을 또 거두고 불성원명 청정법신으로 돌아가면 그 세계를 극락 세계라,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둥글고 밝은 아는 본성은 이 몸이 나도 본래 난 것이 없고,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몸이 사라져도 본래 사라진 게 없다. 생멸은 본래 허망한 것이고 실상은 항상 머문다(生滅本虛 實相常住). 실상은 뭐냐, 원명불성, 둥글고 밝은 아는 본성이다, 그거죠. 그래서 생멸을 무상이라고 그러고요, 항상함이 없다고, 불성을 실상이라고 그러는데, 진실한 실자, 모양 상자, 이 인연으로 왔다 갔다 하는 무상한 것이고 둥글고 밝은 불성의 몸은 상주라, 항상 머문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 몸으로 돌아가는 게 극락세계예요. 비유로 말하면, 몽답청산에 각불로(夢踏青山脚不勞), 꿈에 청산을 돌아다녔는데 방에 잠들어 있는 다리는 피곤하지가 않다. 이 몸이 인연 따라 오고 가고 해도 원명불성 청정법신은 항상 해서 늘 극락세계에 있다, 그 말이죠. 영입수중의 의불습이라(影入水中衣不濕), 물가에 가서 물을 내려다보면 자기 그림자가 물속에 들어있는데 자기 옷을 만져보면 하나도 젖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자는 물속에 들어가 있지만 내 몸은 물속에 안 들어가듯이, 이 무상한 몸은 오고 가고 하지만 청정법신는 항상 머물러서 늘 극락세계에 있다. 이런 법문인데요.

 

汝等一人 發眞歸元 此十方空 皆悉消殞

여등일인 발진기원하면 차시방공이 개실소운이니

云何空中 所有國土 而不振裂 (楞嚴經卷九)

운하공중에 소유국토가 이불진열이리오(능엄경권구)

나무아미타불

 

      그러면 이 불성은 본래 우리 사람과 같고, 이 몸을 받았다가 몸을 또 버리고, 나고 죽는 것은 꿈과 같은데, 꿈이라는 것은 꿈꿀 때는 분명히 있는데 꿈꾸면 꿈은 없어져요.

      그래서 꿈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꿈에 볼 때는 분명한데 꿈을 깨는 순간에 꿈에 본 건 다 없어지고, 본래 과거부터 있던 것만 확 드러난다 이거지요. 몽경(夢境)은 없어지고 현상만 드러나는 게 꿈꾸다 꿈 깨는 거다. 그래서 이 불성을 모르고 번뇌 망상으로만 살아가다가 그 불성을 깨닫는 순간에 여등일인(汝等一人), 너희들 한 사람이라도 발진기원(發眞歸元)하면, 그 진실을 발생시켜서 불성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냐. 번뇌망상으로 살아가고 바라보던 세상 만물은 일시에 다 없어진다, 일시에. 그걸 시방 허공, 시방공(十方空)이라고 그랬어요. 이 시방의 허공도 다 없어진다. 실개소운(悉皆消殞)이라, 사라질 소, 없어질 운자가 있는데, 다 없어진다. 운하공중(云何空中), 어찌 허공 속에, 소유국토(所有國土), 있는 바 국토가, 이불진열(而不振裂), 진열이라는 것도 역시 없어질 진자가 있고 없어질 열자가 있는데, 없어질 열, 어찌 없어지지 않겠는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다 얻는 순간에 깨달음을 얻기 전 세상 만물은 다 없어진 거예요. 그럼 뭐만 남았나. 깨달은 이후에 보는 세상만 드러난 거죠. 꿈꾸다가 꿈에서 깨는 순간에 꿈에 보던 건 다 없어지고 본래 꿈을 깼을 때 나타난 현상만 있다. 깨달음에서 나타난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그래요. 번뇌 망상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그래요. 사바세계는 거기에 좋은 생각도 있고 나쁜 생각도 있고, 나쁜 생각으로 쫓아가면 고통이 오고, 좋은 생각으로 쫓아가면 즐거움이 와서, 나쁜 생각에서 고통이 오고 좋은 생각에서 즐거움이 오기 때문에, 고와 낙이 항상 반반씩 따라다닌다 그래요. 그래서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는데, 고진감래 옛날에 그렇게 썼는데, 요새 번역할 때 보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이렇게 번역을 하더라고요. 그게 사바세계에요. 쓴 것이 다 하면 좋은 것, 단 것이 온다, 이게 고진감래인데 그건 말이 좀 이상하거든, 그러니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번역 잘했어요. 그걸 사바세계라고 그래요.

      근데 극락세계는 항상 즐거워요. 그래서 극락이라고 그래요. 아주 궁극적으로 즐겁다. 왜 그러냐면 번뇌 망상 세계가 아니고 부처님이 깬 세계, 깨달음에서 얻은 세계거든요. 딱 깨닫고 나니까 극락세계더라, 깨닫기 전에는 사바세계였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시방 허공이 다 없어졌는데 왜 시방 허공이 여전히 남아 있나. 그거 이제 꿈꾸는 사람은 여전히 꿈속에 있는데 꿈 깬 사람에게만 극락세계가 나타나는 거지, 옆사람이 꿈을 깼다고 그래도 꿈꾸는 사람은 그대로 꿈속에서 나올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느낀 극락세계를 옆에 있는 사람도 모른다, 그게 극락세계에요. 극락세계에는 저런 소리(핸드폰 벨소리)도 사바세계로 보면 전화벨 소리인데, 이제 깬 세상에서 보면 극락세계인 거예요. 다 극락세계더라, 깬 세계에서 보면. 근데 이게 사바세계로 보면 무슨 소리, 무슨 소리, 무슨 소리 딱 정해서 하고. 그래서 이 극락세계라는 것은 주소도 없고 정해진 곳이 없어요. 또 무슨 누가 만들었냐, 무슨 어떤 건설회사가 만든 게 아니에요. 극락세계는 깨달음을 통해서 나타난 세계다 이거지요. 깨달음을 통해서. 그럼 뭘 깨달았느냐. 원명 불성, 둥글고 밝은 그 불성을 깨달으니까 펼쳐진 세계는 극락세계고, 자기 자신은 둥글고 밝은 불성이 나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우리한테 모두 둥글고 밝은 본래 불성 몸이 있는데, 꿈꾸는 거와 같은 그런 꿈 몸을 가지고 산다. 근데 꿈은 깬 순간에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사람이 이게 주인이 바뀌면 모든 물건 물건마다 모두가 다 주인이 바뀌었듯이, 꿈을 깨고 나면 꿈에서 본 건 하나도 없고 전부 현상이듯이, 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풀 한 포기도 극락세계고 나무 하나도 극락세계고 티끌 하나도 극락세계고 하늘도 극락세계고. 그러니까 사바세계는 그냥 일순간에 없어지고 극락세계만 그대로 나타난다 이 말이죠.

      이 법문은 능엄경이라고 하는 경 9권째에 있는 법문이고, 그다음에.

 

一時佛在 阿蘭若法菩提場中 始成正覺

일시불재 아란야법보리장중 시성정각

其地堅固 金剛所成 上妙寶輪 及衆寶華

기지견고 금강소성 상묘보륜 급중보화

諸色相海 無邊顯現 常放光明 恒出妙音

제색상해가 무변현현하야 상방광명하며 항출묘음하니라

(華嚴經 世主妙嚴品)(화엄경 세주묘엄품)

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화엄경 세주묘엄품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법문인데, 어느 때에 부처님이 아란야법보리장중(阿蘭若法菩提場中), 그러니까 우리가 가서 참배하는 보리수나무 아래 거기예요. 사바세계의 눈으로 보면 보리수나무인데 깨달아서 보니까, 시성정각(始成正覺)을 하니, 기지가 견고(其地堅固)하여, 그 땅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항상 해서 안 없어진단 말이지, 견고해서. 비유로 말하면 금강소성(金剛所成)이라, 금강이라는 것은 불변성, 또 이게 청정성, 광명성, 세 가지를 말하는데 순금이에요, 금강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게 섞인 게 없다. 늘 빛이 난다. 불변, 순일, 순일한 거 또 광명, 이건 온 세계가 변하지도 않고 청정하고 빛나서 깨닫기 전에는 나무 밑 풀 위에 앉았는데, 깨닫고 보니까 그냥 이게 항상 빛나고 항상 청정하고 항상 견고하다, 이 기지가 견고하야 금강소성이며, 거기에 없는 게 없다. 상묘보륜(上妙寶輪), 가장 묘한 보배 둘레와 중보화가(及衆寶華), 여러 가지 보배 꽃이 많이 있고 제색상해(諸色相海)가 빛깔 모양 그런 바다와 같은 세계들이 무변현현(無邊顯現)이라 끝없이 나타난다, 그게 극락세계에요.

      그래서 상방광명(常放光明)하며 항출묘음(恒出妙音)이라, 항상 광명을 내고 늘 묘한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깨닫는 순간에 소리 소리가 다 극락 계고요, 모양 모양이 다 극락세계다, 이거지요.

      그래서 한 마음이 본래 마음으로 딱 돌아가면 그냥 그대로 가 다 극락세계고요. 한 마음이 번뇌 망상으로 시름에 젖으면 물을 봐도 거기가 근심의 세계요, 나무를 봐도 근심의 세계요, 사람을 봐도 근심의 세계에요. 그래서 극락세계는 깨달은 청정심에 나타난 세계다 그 말이에요. 깨달은 청정심, 보리 청정심 그러면 번뇌 망상심은 이게 어디를 가도 근심 걱정이 따르고, 보리 청정심은 어디를 가도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래서 오늘 영가를 그 부처님이 깨달은 극락세계로, 이렇게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우리 힘으로는 가기가 힘드니까 부처님의 가피, 도움을 받아서 모신다 이 말이죠.

 

法法悉皆別 法性無二相

법법이 실개별이나 법성은 무이상이니

無二法性土 清淨常樂鄉

무이법성토가 청정상락향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이 깨달은 세계는 하나하나 모양 모양이 전부가 다르게 보는 그런 세계들이 다 하나로 통하는 세계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하나가 다르다라는 거를 법 법자, 서로 상자, 법상(法相)이라 그러고, 하나하나가 다 함께 통하는 것을 법 법자, 성품 성자, 법성(法性)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이 허공의 모양으로 보면 조그마한 침공, 바늘 꽂는 허공, 또 실공, 집 안에 들어간 허공, 또 온 우주를 다 감싸고 있는 태허공, 태공이 다 다르죠. 태공이라고 그러면 끝없이 펼쳐진 허공이고, 실공이라고 그러면 실내에 들어가서 보는 허공 공간이고, 침공이라고 그러면 바늘 침, 바늘 하나 꽂았다가 빼면 얼마나 이게 작아요. 그런데 허공으로 보면 바늘 꽂은 허공이나 방 안에 들어간 허공이나 온 시방 허공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 말이에요. 다를 바 없이 함께 통하는 것을 어려운 말로 둥글 원자, 융통할 융자, 금융이라고 하는 융자가 있어서, 원융(圓融)이라고 그래요. 그것이 또 함께 다 조화를 이루는 걸 무애(無礙)라고 그래요. 없을 무자, 걸릴 애자, 장애가 없는 거. 원융무애. 극락세계는 원융무애 극락세계에요. 하늘과 땅이 장애가 없고 원융무애하고, 죽고 사는 것이 장애 없이 원융무애하고, 이걸 염불로 외울 때는 <무장무애 원융무애> 그렇게 외워요. 장애 없다는 걸 없앨 무자 두 번 넣어서 무장무애 원융무애. 이 무장무애 원융무애 극락 세계가 깨달음에서 나타난 세계다 그거죠. 이건 누가 만든 게 아니고 주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바늘 꽂았다가 뺀 그 공간이나 방에 들어간 그 공간이나 끊임없이 펼쳐진 그 하늘 공간이나 그 공간으로 볼 때는 전부 원융무애하고 무장무애하다.

      그러니까 이런 세계에 가는 게 그게 얼마나 좋은 거예요. 근데 이거 다 못 가요. 왜냐하면 번뇌 망상을 다 버리질 못해서. 그 망상 끊으면 좋은 줄 누가 몰라요. 근데 그 끊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좋은 일 하면 좋은 거 다 알지, 근데 좋은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 좋은 일 하는 것이 몸에 안 배가지고, 사람은 생각이 지배하는 것보다 몸이 지배하는 게 훨씬 무서워요. 몸 습관은 좀처럼 이게 바뀌질 않아요. 생각은 작심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마음을 낼 수 있단 말이죠. 작심. 내일도 마음을 낼 수 있는데, 이 몸이란 녀석은 안 따라와요. 그게 문제예요. 그래서 석가모니 같은 분들은 몸과 마음이 함께 해서 갔고 보통 사람은 마음은 있는데 몸이 안 따라가서 못 갔고 이거 차이예요. 그동안에 제자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나와서 보살이라고도 하고 선지식이라고도 하고 이런 분들이 계속 나와가지고 이 불교가 계속 이어지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법법은 실개별(法法悉皆別)이나, 이게 모양 모양들은 하늘 모양, 땅 모양, 물건 모양은 다 다르지만은, 법성은 무이상(法性無二相)이라, 법성은, 법의 그 본성은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모든 허공 모양이 하나듯이 그래서 무이법성토(無二法性土)가 그 두 가지 모양 없는 법성의 세계가 국토, 법성국토가 청정상락향(清淨常樂鄉)이라, 다른 거 아무것도 섞인 게 없이 항상 즐거운 고향이다, 이렇게 돼요.

      오늘 영가분께서 그 세계로 가시라고 지금 이렇게 의식을 잘 봉행하고 있는 거예요.

 

莊嚴佛剎 華藏剎海

장엄불찰 화장찰해

極樂世界 常樂淨土

극락세계 상락정토

十方諸佛剎 莊嚴悉圓滿

시방제불찰 장엄실원만

面見阿彌陀 即往安樂剎

면견아미타 즉왕안락찰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장엄이라는 건 나열되고 펼쳐진 것이 장엄인데, 이 장엄 부처님 세계가,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그 여러 가지가 나열된 그 부처님의 세계가, 찰이라는 건 사찰이라고 하는데, 이게 차트라라고 범어인데 국토라는 뜻이에요, 찰자가. 부처님의 국토, 부처님의 나라가. 화장찰해(華藏剎海), 화장이라는 온갖 좋은 걸로, 꽃 화자, 감출 장자, 온갖 좋은 걸로 펼쳐진 세계다. 그래서 장엄불찰(莊嚴佛剎)이라고도 하고 화장찰해라고도 하는데 그게 극락세계다 이 말이죠. 고통은 하나도 없고, 번뇌망상에서 고통이 오는데 이 깨달은 세계는 번뇌 망상이 없으니까 온갖 세계가 다 극락 세계인 거예요.

      그럼 번뇌망상의 특징은 뭐냐. 구하는 마음인데, 구하는 마음의 특징은 뭐냐. 만족할 줄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잘해 줄래야 잘해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만족 못 하는 물건들이 돼가지고. 지혜의 특징은 구하는 게 없어요. 무구. 보통 일체 중생이 구하다 죽거든요. 그러면 얻은 게 없느냐. 얻은 거 많이 있어요. 그런데 얻은 것은 며칠 지나가면 또 만족 못 해요. 많이 가봐야 한 달밖에 못 가요. 아무리 좋은 걸 얻어도. 또 다른 거 또 구해요. 그거 버리고. 그런 것이 번뇌망상인데 그 번뇌망상을 가진 인간한테 아버지가 만족시킬 방법이 있나요, 어머니가 만족시킬 방법이 없어요. 그 번뇌망상심을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근데 전부 이 부모들이 속아서 자식들 좀 행복하게 해주려고 아무리 좋은 걸 해줘도 자식은 그걸로 만족을 못 하는데. 또 부모도 만족 못 하는 것도 알아요. 모르는 거 아니에요. 알면서 또 계속 대책 없이 해줘. 뭘 해도 아들, 딸들이 만족 못 할 거다, 그거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러면서도 안 해줄 수가 없는 거라. 계속해주고 싶어서 그냥 해주는 거예요. 그러다 해주다 죽고, 구하다 죽고.

      그래서 극락세계로 가십시오, 이거 보다. 장엄불찰 화장찰해가 극락세계에요. 상락정토(常樂淨土). 극락이란 말은 고통이 없단 말이고, 상락이란 말은 항상 즐겁단 말이지요. 정토라는 말은 거기 다른 부정한 거 깨끗하지 않은 게 섞이지 않아서. 그래서 시방제불찰(十方諸佛剎), 시방의 모든 부처님 나라가 장엄이 실원만하니(莊嚴悉圓滿), 그 꾸며진 것이 다 원만해야 부족함이 없어요. 그러니 오늘 영가께서는 면견아미타(面見阿彌陀)하고, 바로 면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극락세계에 계신 부처님을 아미타불이라고 그러거든요. 이 사바세계에 오신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이라고 그러고요, 그 불성에서 항상 빛나는 부처님을 비로자나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석가모니불이 이제 아주 고생하는 부처님인데 늘 사바세계에 계신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이라 그래요. 극락세계에 계신 부처님을 아미타라 그러고, 항상 불성 광명을 그대로 비추는 부처님을 비로자나불이라고 그런다. 그러니까 면견아미타하고, 바로 대면해서 바로 눈앞에서 아미타불을 친견하시고, 즉왕안락찰(即往安樂剎), 곧 즉자, 갈 왕자, , 바로, 지체 없이, 안락찰, 편안하고 즐거운 상락정토 극락세계로 곧 가십시오. 마지막 염불만 한 번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莊嚴佛剎 華藏剎海

장엄불찰 화장찰해

極樂世界 常樂淨土

극락세계 상락정토

十方諸佛剎 莊嚴悉圓滿

시방제불찰 장엄실원만이니

面見阿彌陀 即往安樂剎

면견아미타하야 즉왕안락찰하십시오

 

오늘 법문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