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6월 6일 음력 5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4-06-06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안녕하십니까.

        손을 이렇게 올리시겠습니다. 올리셨어요? 두 손바닥을 이렇게 한번 쳐보세요. 시작. 그리고요. 이렇게 손을 들고 왼손 엄지손가락을 먼저 굽혀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까지, 오늘 해야 할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그 구절을 10번을 똑같이 외우겠습니다. 시작.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내리시겠습니다.

 

        오늘 갑진년 5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인데요. 법문 제목은 <의상조사 법성계(義相祖師法性偈)> 두 번째 게송 <제법부동본래적> 그 내용입니다.

 

        이 법성게는 화엄경 종요(宗要)인데, 종요라는 말은 종교라는 종자, 중요할 요자, 뿌리고 줄기다 이 소리예요. 종자는 뿌리라는 말이고, 요 자는 줄기라는 말인데. 이 의상조사법성게는 화음경 종요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 이 사구를 깨달을 증자, 증득할 증자, 나눌 분자, 증분(證分)사구라고 그래요. 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한 게송이다 이 소리거든요.
        깨달은 세계. 그 밑에서부터는 이제 교분이라고 그래가지고, 깨달은 세계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래서, 가르칠 교자, 나눌 분자, 교분(敎分)이라 그래요. 그래서 교분은 26, 증분은 4. 이래서 730. 이 법성게가 구성된 거거든요.

 

正覺境界 玄極妙體 窮坐實際 眞極法身

정각경계 현극묘체 궁좌실제 진극법신

法性圓融 無障無礙 諸法不動 本來寂滅

법성원융 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何是諸法 法性是也 何故不動 圓融故

하시제법 법성시야 하고부동 원융고

何故本來寂 無二相故(叢髓錄 法記文)

하고본래적 무이상고(총수록 법기문)

諸法者 指前法也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 無住法性也

제법자 지전법야 부동자 지전성야 성자 무주법성야

故此和尙云 約今日五尺身之不動 爲無住也 本來寂者 指

고차화상운 약금일오척신지부동 위무주야 본래적멸 지

前無二相也 只是五尺法性 側無餘物 故云本來寂也

전무이상야 지시오적법성 측무여물 고운본래적야

古記云 表訓德 問和尙言 云何無住 和尙曰 卽我凡夫

고기운 표훈덕 문화상언 운하무주 화상왈 즉아범부

五尺身 稱於三際 而不動者 是無住也”(叢髓錄 眞記文)

오척신 칭어삼제 이부동자 시무주야”(총수록 진기문)

 

        그러니까 이거는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럼 깨달은 세계가 뭐냐. 정각경계(正覺境界)라 바를 정자고, 깨달을 각자고. 정각경계. 경계라는 말은 세계라는 말과도 틀리고, 지위라는 말과도 틀리고요. 그냥 정각 그 자리에요. 세계는 시간이 있다는 얘긴데, 시간도 없고, 지위는 아래 위가 있다는 얘기인데 아래 위도 없고, 정각 그대로, 정각경계. 이 정각경계인데 이 정각 경계는 현극(玄極)이라. 현묘할 현자하고, 지극할 극자하고. 현극, 생각이 미칠 수가 없다. 오직 삼매로 들어갈 수 있다. 현극이라, 미묘한 몸이다. 이래가지고 묘체라고 하거든요. 현극묘체(玄極妙體).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거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데, 그 현극묘체는 시간이 없는 곳이라, 미묘한 몸이다. 그리고 궁좌실제(窮坐實際). 궁극적으로 남김없이 진실의 세계에 떡 도달하면, 그게 궁좌실제인데, 진극법신(眞極法身)이다. 아주 진실의 극치, 참 진자, 지극할 극자, 진극의, 진실 극치의 법의 몸이다. 정각경계 현극묘체 궁좌실제 진극법신.

        그 세계를 어떻게 말로 표현했느냐 하면, 법성원융(法性圓融), 법성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현극묘체요, 진극법신이다. 또 이 법성원융은 무장무애(無障無礙). 무장무애. 그걸 법성게에서는 무이상(無二相)이라 이랬거든요. 무이상인데, 무이상은 무장무애, 장애가 하나도 없고 걸림이 하나도 없다. 법성원융이라는 말은 안 통하는 데가 없다, 이 소리예요. 하나에서 모든 것이 통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고. 일찰나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찰나고. 이렇게 돼서 법성원융 무장무애, 이게 현극묘체 진극법신이다. 이것이 궁좌실제의 경계고, 정각의 경계다. 참 시작부터 겁을 많이 준다, 진짜. 겁 줘, 완전히 겁줘.

        제법부동 본래적멸(諸法不動 本來寂滅). 부동이라는 건 뭐냐 하면, 생겼다 사라졌다 생겼다 사라졌다 이게 동이에요. 움직일 동자. 생멸이 동인데, 이 정각의 경계에는 우주만상이 다 생겨도 생긴 게 아니에요. 우주만상이 없어져도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게 불생불멸이에요. 그래서 이게 불생불멸을 동하는 것이 없다고 그래가지고 부동이라 그래요. 또 낳다 죽었다 하는 게 없다고 그래가지고 무생이라고 그래요. 무생. 무생 부동. 제법은 뭐냐? 천지만물 우주만법, 인간의 사대오온, 일체 현상을 다 제법이라고 그러는데, 일체 현상을 부처님의 깨달음 삼매로, 정각산매로 딱 들어가 보면, 우주만법이 생겨도 생긴 게 없어요. 없어져도 없어진 게 없어요. 그걸 해인삼매(海印三昧), 또 수몽세계로. 해인삼매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모든 형상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추어도 바닷속에 그 비추어진 형상이 없어요. 근데 보이긴 보이는 거예요. 또 그 바다에 비춰졌던 그림자가 없어져도 없어진 게 없어요. 그런데 바다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또 수몽(睡夢)이라는 건 잠들어서 꿈꿀 때, 잠들어서 꿈을 꾸면 이 꿈이라는 게 언제 시작됐는지 시작을 몰라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내가 꿈을 언제부터 꾸기 시작했나 그거 아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꿈을 꿀 때는 그게 꿈인 줄을 몰라요. 꿈을 한창 꿀 때는 그게 꿈인 줄 몰라요. 그런데 꿈에서 깨면 비로소 그때 꿈에서 깼을 때 꿈꾼 걸 알아요. 꿈 깨기 전에 모르거든요. 근데 꿈꾼 걸 이제 꿈에서 깨서 아는데, 그 꿈에서 깬 걸 아는 그 꿈 깬 마음이 언제 사라지는지 몰라요. 내가 꿈꾸다 꿈을 탁 깼잖아요. 그래서 꿈꾸다 깬 거 알죠? 알다 보면 그거 꿈에서 깬 줄을 안 생각이 조금 지나가면 없어지거든요. 근데 그게 언제 없어졌는지도 몰라요. 이거 참 너무 쉬운 거 얘기하나. 이게 제법부동에 대한 설명이에요. 꿈이 났어도 난 게 없고요. 꿈이 사라졌어도 사라진 게 없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살고 죽는 게 심각한가. 그 진실을 못 보고 형상만 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걸 형상이라는 상자, 집착할 집자, 상집이라고 하거든요. 상에 집착하면 나고 죽는 게 있어요. 근데 상에서 진실을 보면 그걸 법성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형상을 말할 때는 제법이라고 하고 형상의 진실을 말할 때는 법성이라고 그래요. 제법은 생로병사가 있는데, 법성은 원융하다, 안 통하는 데가 없다. 그래서 무장무애라, 생로병사는 늘 장애가 따라오는데, 법성은 원융해서 무장무애, 장애가 없다. 이게 이제 해인삼매거든요. 법성게는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제법은 부동하야, 본래적멸이라. 적멸이라는 건 뭐냐. 나고 죽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나고 죽는 건 생멸인데 나고 죽는 게 아니다. 그럼 뭐냐. 달이 연못 속에 비치면 연못 그 물 깊숙한 데 달이 들어있어요. 그게 보이거든요. 근데 그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갔으면, 그 들어간 흔적이 있어야 될 건데,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연못 밑바닥을 뚫고 지나갔는데 물에는 흔적이 없다. 물속으로 뚫고 들어간 흔적이 없거든요. 왜 흔적이 없나? 안 들어갔다는 얘기예요, 달이. 그냥 하늘에 있다는 얘기죠. 하늘에 있어요. 달은 하늘에 있는데, 분명히 연못 속에도 달이 있어요. 이것은 연못 속에 달이 비춰지지만, 사실은 달이 연못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나고 죽는 걸 맨날 느끼지만, 이 해인삼매에 딱 들어가 보면 이게 나는 게 나는 게 아니다, 없어지는 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걸 불생불멸이라고 하거든요. 불생불멸. 이건 깨달은 세계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이게 느껴지나. 삼매에 들면 돼요. 생각을 딱 멈추고 그 진실의 세계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달이 연못에서 보이지만, 달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환히 보여요. 달이 또 연못 속에서 사라졌지만 진짜 달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이 환히 보여요. 그래서 이 몸은 생로병사를 하지만, 이 몸의 진실, 즉 허공에 있는 달과 같은 몸의 진실을 가만히 보면, 이거는 달 그림자가 물속에 들어갔다, 물속에서 나왔다 하는 거와 똑같아서 제법이 부동이에요이게. 제법은 생멸이 없다. 본래적멸이라. 나고 죽는 게 본래 없다. 이게 깨달은 세계거든요. 제법부동본래적. 손바닥을 한 번 딱 쳤다. 그러면 소리가 나요, 거기서. 근데 이 소리가 나기는 났는데 소리가 온 데가 없어요. 왼손에서 온 것도 아니고 오른손에서 온 것도 아니고. 우리 귀에서 온 것도 아니고. 온 데가 없어요. 또 이게 소리가 사라졌는데 또 사라져서 가는 데가 없어요. 어디로 갔는지. 동쪽으로 갔는지 서쪽으로 갔는지. 이거 참 강원에서 맨날 이런 거 가르쳐요. 이런 거 가르치면 재미없다고 그러거든요. 재미없냐. 이 생각으로 사는 세상하고 틀린 거예요. 생각 세상하고 틀리니까 재미없다고 그러는데, 이게 이제 마음 공부를 조금 시작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들려도 들리는 게 없다. 보여도 보이는 게 없다. 이 몸이 죽음을 느끼지만, 사실은 죽음이라는 게 없다. 그건 뭐와 같으냐. 얼음이 녹아도 물은 녹는 게 아니다. 바람이 잠잠해지지만, 공기는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래서 삼매에 딱 들면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어요. 그걸 무장무애라 그래요. 근심 걱정 없는 세계가 무장무애의 세계다. 근심 걱정 없는 세계가 법성원융 세계다. 법성원융이라는 게 뭐냐. 하나가 있는 곳에 다섯이 있고, 다섯이 있는 곳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없으면 넷밖에 안 돼요. 근데 이게 엄지 하나가 있음으로써 이걸 굽히면 다섯이 돼요. 그러니까 이 하나는 다섯과 함께 있고, 다섯은 혼자 다섯이 아니라, 하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라도 빠지면 다섯이 안 되거든요. 이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리고 세상만사는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거기 때문에 이 엄지손가락이 셀 때는 하나인데, 마칠 때는 열이에요. 하나, , 셋 넷 이래 가지고 셀 때, 시작할 때는 하나인데 끝마칠 때는 열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손가락 하나가 하나도 됐다가 열도 됐다가 이걸 인연법이라 그래요. 그리고 이 새끼 손가락도 하나, , , 넷 이렇게 세어 나갈 때는 이게 다섯인데, 돌아올 때는 이게 또 여섯이 돼요. 새끼손가락 하나가 다섯도 되고 여섯도 되고. 그리고 시작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새끼 손가락서부터 시작하면 이게 하나가 돼요. 엄지손가락에서 시작하면 엄지손가락이 하나가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만사는 인연 따라서 첫째도 될 수 있고, 마지막도 될 수 있고, 중간도 될 수 있고, 이걸 전부 인연법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인연법을 깨달으면 장애가 없어요. 하나가 열도 되고 열도 하나가 되고. 하나가 다섯 되고 다섯이 하나가 되고. 물속에 달이 보여도 달이 물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물속에 달이 안 보여도 달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기가 막히지. 기가 막힌 게. 이 땅에서는 밤낮이 있는데 땅에서는, 태양은 밤낮이 없다. 이것도 가르쳐요. 땅에서는 해가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해가 보일 때는 낮이고, 해가 안 보일 때는 밤이란 말이에요. 근데 해에는 밤낮이 없다. 그거 참 이상해. 그래서 이 삼매에 든 사람은 생사가 없는데 삼매에 들지 못한 사람은 나고 죽음이 있다. 그래서 이 생로병사가 있는 거는, 내가 정신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는 생로병사가 있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삼매에 들면 생로병사는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다 생로병사가 없느냐 그건 아니에요. 마치 꿈을 꿀 때는 꿈이 있는 거거든요.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이 없어요. 꿀 때는 있는데 깰 때는 없다. 그래서 꿈을 못 깬 사람은 꿈이 있고 꿈을 깬 사람은 꿈이 없다. 박수를 치든지 말든지 나는 물이나 한잔 마시고. 아 참 이게 공연히 법성계를 시작해가지고,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지. 왜냐하면 모르는 소리 하니까 어렵다고 하거든요. 아는 소리만 하면 어렵다고 안 해요. 근데 모르는 소리 하니까 어렵다고 그래.

        그러니까 인생은 꿈이다. 꿈이라는 게 뭐냐. 꿈을 꿀 때는 꿈이 있었는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이 없다. 그럼 그게 뭐냐. 인생은 괴로움이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괴로움이 있다. 깨달은 후에는 무장무애라. 괴로움이 없다. 그 누구나 다 괴로움이 없느냐. 아니다. 괴로움이 없는 걸 깨달았을 때 없지, 깨닫기 전에는 괴로움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如來大醫王 善治煩惱病

여래대의왕 선치번뇌병

一念正心現 諸法寂滅相

일념정심현 제법적멸상

 

        그래서 여래는, 부처님은, 대의왕이라고 그러는데, 큰 대자, 의원 의자, 임금 왕자, 여래는 대의왕(如來大醫王)인데, 무슨 병을 가르치는 큰 의원이냐. 선치번뇌병(善治煩惱病)이라. 선치라는 건 잘 치료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무슨 병을 잘 치료하느냐. 번뇌병. 범부에게 번뇌병이 있어. 쓸데없이 생각해서 쓸데없이 괴로워하는 거. 한 생각을 가만히 맑히면 문제가 없어요. 한 생각을 일으키면 문제가 생겨. 이게 가장 문제예요. 생각을 일으키면 문제가 생기고, 생각을 안 일으키면 문제가 안 생겨요. 며칠 전에 어느 곳에서 조금 쉬는데, 옆에 할머니들 둘이 앉아서 또 쉬더라고요. 그러면서 얘기를 한참 하는데, 내가 보니까 허리가 많이 굽었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다니는데, 하는 얘기는 뭐냐 하면, 전부 시골에 자기 집 땅 있는 거 얘기하고, 서울의 건물에서 세 받는 거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가만히 쳐다봤어. 저 몸이 며칠 못 살겠는데, 땅 얘기하고 건물 얘기만 해요. 아니, 사람 죽으면 건물이 많아도 아무 소용없고, 땅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그거 나 참 너무. 그러고 이제 가끔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다 보면, 용산역이나 영등포역쯤 지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막 싸워요. 왜 싸우나 가만히 들어보면, 빨리 일어나라고 할머니가 그러면, 할아버지 또 안 일어나. 왜 안 일어나느냐고, 왜 지금부터 일어나냐고 막 싸워. 그래서 그 왜 저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 조그마한 이익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생각할 때는 빨리 일어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롭다고. 할아버지가 생각할 때는 조금 더 앉아 있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생각이 틀린 거예요. 근데 문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금방 죽기 전까지 그 이로운 거 그거 구하다가 아무 정신도 못 차려. 그리고 어떤 할머니는 너무 기가 막힌 소리를 해요. 요새 이놈의 영감이 도대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래요.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인생 경험이 있고 인생에 다 판단이 있는데 할머니 말을 왜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안 들어요. 또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경험이 있고 판단이 있는데 할머니 말 안 듣듯이, 할머니도 마찬가지예요. 할아버지가 하라고 한다고 하겠어요. 이게 전부 이런 거예요. 전부가. 그래서 이런 걸 번뇌병이라 그래요. 번뇌병. 항상 이익만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거 이게 번뇌거든요. 맨날 이익을 추구해요. 뭐가 더 좋고 뭐가 더 나쁘냐. 그러다 결론은 죽는 거예요. 결론은. 그래서 탐생에 불각사(貪生 不覺死). 사는 것만 탐하다가 죽는 거를 모른다. 오늘도 살려고 산에 올라가는데요. 산에서 못 내려오는 사람도 있어요. 사고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종종 보면 북한산에 헬기 뜨거든요. 사고 났다는 얘기예요. 죽는 건 다 같이 느끼는데 사는 것만 탐하다가 죽어요. 이게 번뇌병이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는 것만 생각하는 거. 그래서 이런 번뇌병을 잘 치료하는 것이 부처님인데, 그래서 여래는 대의왕이라고 한다. 큰 의원 중에도 가장 으뜸가는 의원이다 이거죠.

        그러면 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일념정심현(一念正心現)이면, 한 생각이 번뇌망상에 전혀 물들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를 바를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 하거든요. 한 생각이 마음 그대로 나타나는 거를 일념정심이라고 그래요. 여기에 하늘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땅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한 생각에 일체 티끌이 끼어들지 않은, 거기에 붙어 있지 않은 그 본래의 마음을 바를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 그래요. 한 생각에 정심이 그대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냐. 제법이 적멸상(諸法寂滅相)이라. 모든 현상이 불생불멸의 모습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이게 사라지는 속에도 일어남이 있고, 일어나는 속에도 사라짐이 있는데, 생각으로는 제법의 형상만 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만 보고 일어나는 것만 보고, 이래요. 이래서 하나를 피하고, 하나를 얻고, 또 하나 얻고, 하나 피하고, 이걸 전도몽상이라고 그러거든요. 있는 거는 영원히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것이 또 그 안에 있어요. 있는 속에 없는 게 있어요. 이거 참 무슨 소린지 진짜 이 옛날에 강원에서 글 배울 때요, 강사 스님이 경을 막 새겨줘요. 새겨주다가 가끔 가끔 뭐라고 했느냐 하면요. “무슨 소리인지 나도 하나도 모르겠다이래요. 그러면 그 말은 귀가 번쩍 띄어요. ,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선생님도 모르네. 뭐 이래가지고 아이고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그런 게 있는데 이걸 깊이 깊이 관찰 통달이라고 그러는데, 관찰하고 통달하면 없는 속에도 있는 것이 있어요. 있는 속에도 없는 것이 있고. ()아무 때나 쳐서 호응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생은 관찰이다. 인생은 통달이다. 인생은 많이 이루어서 되는 게 아니라, 관찰해서 된다 이래요. 성취냐 관찰이냐. 이거 또 무슨 소리야? 도대체. 가만히 관찰해 보면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근데 내 생각으로 보면 없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지혜가 높은 사람은 없는 게 없는 것을 보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는 걸 보고 살아라 이거예요. 그게 관찰 통달이에요. 근데 나이가 100살이 됐다. 100살이 돼서도 그게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나이가 60에 죽었다. 60에 죽어도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마를 더 살고 안 살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이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부르고 막 물동이를 두드렸어요. 왜 그러냐. 이 사람은 오늘로써 몸의 고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니까 몸의 고통이 없어진 걸 나는 축하한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거 보통 사람이 이래 하면 미쳤다고 안 하겠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왜 물동이 두드리고 노래하느냐. 그런데 거기에 깊이 보면 깊은 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는 속에도 고통이 있고, 죽는 속에도 고통이 없는 도리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살고 죽는 건 전혀 의미가 없고, 문제는 이 삶이 뭐며, 죽음이 뭔가를 관찰하고 통달하면, 이 죽고 사는 속에도 물속에 달이 있지만 진짜 달은 하늘에 있다는 걸 알듯이 아무 장애가 없어요. 그걸 법성원융 무장무애라고 하거든요. 죽는 속에도 사는 게 있고, 사는 속에도 죽는 게 있고, 하나 속에도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도 하나가 있어서 이 세상에 어떤 거 하고도 장애가 없어요. 번뇌병이 없어. 그걸 법성원융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걸 생각으로 알아들으려면 뭐 그 긴가 민가하고 속이 좀 답답해요. 그런데 꿈을 꾸면서도 꿈에서 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 자기는 꿈속에 있지만은 꿈 밖에 사람도 있고 말소리도 있는가보다 이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아주 중요해요. 이게. 이게 이걸 들어놓으면 다 이 세계에 가게 되고 이 세계를 깨닫게 돼요. 

 

        그래서 지금 몰라도 이게 전부 법문 들은 인연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통도사 극락암에 경봉 큰스님이 법문하실 때 꼭 하신 말씀이, 이 법문이라고 하는 걸 알라고 생각하지 마라. 알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들어라. 들으면 듣는 순간부터 이익이 된다 이랬어요. 법문을 그냥 들으면 듣는 순간부터 이익이 된다. 그래서 그분이 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몸에 좋은 보약은 그 보약이 뭔지 모르고 먹어도 먹기만 하면 몸에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문은 아는 게 아니에요. 믿고 이루는 거예요. 믿고 이루는 게 법문이지, 들어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경전 끝에는 늘 신수봉행(信受奉行) 대원성취(大願成就) 이런 게 있거든요. 믿고 받고 받들어 행해서 대원을 성취한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몰라도 그냥 들어요. 들으면 다 그게 이익이 돼요. 법성원융 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알면 그대로 거기 다 있는데 그걸 몰랐다 해도 그걸 듣는 것 자체가 큰 이익이다 이 말이죠. 그것도 10번씩이나 외웠으니 얼마나 이익이여, 그게. 보통 이익이 아니잖아요. 10번씩이나 외웠으니.

 

八識妄心 自生分別

팔식망심 자생분별

寂滅寶宮 虛受生滅

적멸보궁 허수생멸

 

        그래가지고 제법이 적멸상인데, 제법이 생사 없는 세계인데, 그럼 생사 없는 세계에서 왜 생사를 느끼느냐. 그걸 번뇌망상이라고 하고 팔식망심(八識妄心)이라 그래요. 이제 생각이 8가지가 있는데 그걸 팔식이라고 하거든요. 그 팔식이라는 놈은 늘 생각하는 것이 이 몸만 위해서 생각을 해요. 몸만 위해서 그래서 그걸 허망할 망자, 마음 심자, 팔식망심이라고 하거든요. 이 팔식망심이 자생분별(自生分別)해서 스스로 이걸 있다 하고 생각을 내요. 분별은 생각을 낸단 말인데, 이걸 또 이걸 사라지면 이걸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내요. 근데 사실은 이게 생겨도 생긴 게 아니거든요. 이게 사라져도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촛불이 탁 켜져도 그게 생긴 게 아니에요. 그냥 보일 뿐이에요.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니거든요. 또 촛불이 꺼져도 그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그런데 팔식이라는 놈은 보이면 생겼다고 하고, 안 보이면 없어졌다고 하고. 이걸 자생분별이라고 그래요. 스스로 분별심을 낸다. 스스로 다르다는 생각을 낸다 이거죠. 그래서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적멸한 세계에서 허수생멸(虛受生滅)이라. 헛되이 나고 죽는 고통을 받는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불교거든요.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隨緣赴感未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자보리좌

(華嚴經 如來現相品)(화엄경 여래현상품)

 

 

        그리고 화엄경 여래현상품(華嚴經 如來現相品)이라는 데서는, 이 깨달은, 법성원융 무장무애를 깨달은 그 부처님의 세계를 게송으로 전하는 게 있는데, 깨닫고 보니까 그 진여불성이, 진여라는 건 생별 없는 아는 성품이, 진여 불성, 이 진여불성이 깨닫는 순간에 불신광명이 돼요. 부처님 몸 광명이 돼요. 깨닫기 전에는 진여불성이고 깨달은 후에는 불신 광명이라, 부처님 몸 광명이 된다. 이거를 이제 번뇌망상하고, 또 각지광명하고, 깨달은 지혜 광명하고, 깨닫기 전에는 꿈이 없는데 꿈속에서 느끼듯이 번뇌망상이라고 그래요. 그걸 깨달은 후에는 깨달은 지혜 광명이 있어, 그게 원만보신인데. 뭔 소리인지 진짜 모르겠다. 이거 진짜. 근데 이런 소리 안 하면 안 되거든요. 깨닫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고 깨달은 후에는 지혜 광명이다. 깨달은 후에는 지혜 광명이고 깨닫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다. 그런데 이 지혜 광명이 부처님 몸이다, 불신이다. 그래서 깨달은 후에 이 부처님의 이 깨달은 지혜 광명이 온 세상에 없는 데가 없어요이걸 불신이 충만어법계라(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 이렇게 가르쳐요. 불신이 충만어법계하여,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이라. 일체 중생 앞에 다 나타나 있다. 그러면 여기에도 부처님 몸이 들어있고, 우리 몸에도 들어있고, 저 티끌티끌에도 들어있고, 손을 이렇게 이제 올리면, 이게 생각으로 보면 손인데, 이 부처님 깨달은 지혜를 보면 이게 부처님 지혜 광명이에요. 그래서 큰 스님들이 법문할 때 주장자를 탁, 여기에 지혜 광명이 있다 이 소리예요. 생각으로 보면 막대기인데, 지혜로 보면 이게 지혜 광명이란 말이야. 보현일체중생전이라 일체중생 앞에 지혜광명이 다 나타나 있는 거예요. 다 나타나 있다 이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꽃 한송이를 보이기도 하고, 꽃이 그게 꽃이 아니라 지혜 광명이라 이 말이에요. 손을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다른 물건을 이렇게 들어서 보이기도 하고,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未不周), 인연 따라서 두루하지 아니한 데가 없으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항상 그 깨달은 자리에 전혀 움직이는 게 아니다. 움직임이 없이 두루하고 두루함이 없이 그 움직임이 없다. 맨날 이렇게 가르쳐요. 맨날. 천날만날 이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이런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할 수가 있어요. 나도 한번 깊은 세계에 한번 들어가 봐야 되겠다. 또 이런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닫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이 깨달음이라는 게 부처님 깨달음하고 보통 사람 깨달음하고 달라요. 부처님은 깨닫는 순간에 일체 번뇌 망상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걸 돈오돈수(頓悟頓修)라 그래요. 금방 깨닫는 순간에 다 닦았다. 그런데 이제 보통 사람은 알기는 아는데 번뇌망상은 여전히 일어나는 거예요. 이 무장무애 세계를 알았어, 깨달음을 통해서. 근데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은 여전히 일어나. 이럴 때는 어떻게 되냐. 그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이 안 일어날 때까지 더 닦아야 돼요. 이걸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그래요. 깨달은 후에도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부처님은 깨닫는 순간에 번뇌 망상 안 일어났어. 번뇌 망상이 아예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데,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번뇌 망상이 안 일어날 때까지 계속 더 닦으면 된다. 그래서 그걸 큰스님들이 비유로 말할 때 태양이 딱 떴는데, 태양이 딱 뜰 때 높은 산은 바로 환하게 밝았는데요. 깊은 골짜기는 아 이게 금방 밝는 게 아니라 해가 점점 높이 솟아올라와야 깊은 골짜기까지 완전히 비춰진다. 근데 높은 봉우리는 금방 그냥 환하게 밝아버리잖아요. 그거와 똑같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처음에 태어났는데, 뭐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몸도 있고, 있는 건 다 있어요. 있는 거 다 있는데, 걷지도 못하고, 힘을 못 써. 근데 이게 점점 세월이 지나가서 잘 먹고 잘 크면 나중에는 완전히 이제 장성을 해가지고 어른이 된다 이거죠. 그러면 처음에 어린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 법성이 원융하고 무장무애한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근데 그 어린아이가 힘을 못 쓰는 거는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과거에서부터 늘 해오던 번뇌 망상은 그대로 일어나고 근심 걱정은 그대로 있다.
        그러니까 아이가 클 때까지 잘 키워야 되듯이, 번뇌 망상이 아무것도 안 일어날 때까지 계속 더 닦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궁좌실제중도상이라고 그래요. 그걸 궁좌실제,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상의 도달한다. 앉는다는 건 도달한다는 말이거든요. 이게 이제 화엄경 도리에요.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