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7월 6일 초하루 신중기도 법문 2024-07-06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 無名無相絕一切(무명무상절일체) --

 

        안녕하십니까. 오늘 갑진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법성게 세 번째 게송 <無名無相絕一切(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그 게송이거든요.

        지난번부터 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자 손바닥 한번 치고. 10번 외우고 또 한 번 치고. 무명무상절일체, 똑같이 시작합시다.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박수 1)

 

        이럼 다 된 거예요. 무명무상절일체 법문이 다 이루어졌거든요.

        그럼 무명무상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부처님 세계를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 세계. 부처님 세계는 이름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범부는 이름으로 살아요. 이름으로. 보살은 이름을 끊고 벗어나요. 부처님은 이름이 없어요. 근데 범부는 이름으로 살고, 보살은 이름을 벗어나면서 살고, 부처님은 이름이 없이 사신다.

        또 형상이라는 게 있는데, 모든 형태에 형상이 있고, 형골이 있어요. 뼈 골자(). 형상에는 형상의 뼈가 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제법진실상(諸法 眞實相)이라 이러거든요. 제법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형상의 뼈예요. . 허공에는 허공의 뼈가 있고, 산에는 산의 뼈가 있는데, 그걸 허공골, 산골이래요. 그래서 산을 보되 산의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산의 뼈를 본다. 허공을 보되 허공의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허공의 뼈를 본다. 그게 진실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세계는 형상을 보고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형상의 뼈를 본다. 내가 죽고 사는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죽고 사는 진실상을 본다. 그럼 형상은 없어요, 진실상을 보면. 형상에 형상이 없다. 몸에 몸이 없다. 죽음에 죽음이 없다. 죽음의 뼈를 보면 죽음이 없거든요. 죽음의 형태를 보면 죽음이 있어요. 그래서 무명무상은 부처님의 세계다. 부처님이 아닌 사람은 이름으로 살고 형상으로 사는 거예요. 그건 이제 범부의 세계다 이거죠.

 

無名無相 絕名離相 十佛普賢 大人境界

무명무상 절명이상 십불보현 대인경계

事事物物 法性性起 無障無礙 圓滿具足

사사물물 법성성기 무장무애 원만구족

 

 

        그래서 무명무상은 절명이상(絕名離相)이라. 절명이상은 보살경계인데, 보살은 형상을 딱 보고 그 진실상을 점점 찾아서 들어가니까 이름에서 이름을 끊어요. 끊을 절자, 이름 명자, 절명이라. 이름에서 이름을 끊는다. 근데 범부는 자꾸 좋은 이름 차지하려고 이름에 계속 매달리고, 이름을 구해가는 게 범부거든요. 그래서 이름에 속아서 인생 망치는 거예요. 이름이 아무것도 아닌데 이름에 속아요.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이름 하나 때문에어디 나오는 말이죠. 이름에 속아서 일생 망치는 거예요. 그다음에 형상에서 형상을 여읜다. 버릴 이자(). 상에서 상을 버려요. 그 진실상을 보지, 형태상을 안 본단 말이에요. 진실상, 형태상. 그래서 이름에서 이름을 끊고 형상에서 형상을 버린다.
        그러면 이 세계가 어떤 세계냐 그러면, 십불보현 대인경계(十佛普賢 大人境界). 십불보현이 있는데 이게 이제 대인경계란 말이에요. 부처님 경계다 이 말이지. 이 부처님 경계는 사사물물이 법성성기(事事物物 法性性起), 모든 물건 물건 하나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그 진성이 나타난 세계다. 이걸 이제 알고 이 속에서 사는 게 부처님인데, 법성이 원융해서, 법의 본성이 다 통해서 이상이 둘이 없다. 둘이 없는 게 또 법성이다. 법성은 둘이 없다. 그래서 그 무이법성이 나타난 게 일체 사물이다, 이거예요. 무이법성 소연지물이 일체 사물이다. 이게 법성 소연인데 원인이에요, 이게 성품이. 둘이 없어요. 근데 이 법성이 하늘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무이법성이 땅으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죽음으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삶으로도 나타나서, 사사물물이 법성의 그 성이 일어난 현상이다. 이게 부처님의 세계인 거예요. 법성성기라는 게.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다. 그러니까 이 손가락도 이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고, 하나 굽힐 때도 그렇고, 둘 굽힐 때도 그렇고, 탁 치는 것도 그게 소리가 아니라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다. 가만히 있을 때도 법성성기. 그러니까 거기에는 장애가 전혀 없어요. 그걸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래요. 법성성기는 무장무애다. 그걸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그래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어. 원만구족해. 그 세계를 말하는데, 그걸 간단히 말하면 무상무명이라. 무명무상,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진실상 법성세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무명무상절일체거든요. 그리고 이제 십불보현이 되면 자연히 이름에 살지 않고 모양에 살지 않아요.

        그럼 이제 우리가 인생 문제라는 말을 요새 쓰는데, 인생이 뭐가 문제냐. 인생 문제 뭐 많아요. 근데 결국은 생로병사거든요, 인생 문제는. 근데 생로병사가 어떻단 말이냐. 그 생로병사를 생로병사로 해결하려면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인생 문제는 인생으로 해결 안 된다. 아무리 건강 관리를 잘해도 건강에 대한 걱정은 놓을 수가 없어요. 무슨 병이 나올지 모르고, 무슨 사고가 나올지 모르고, 그게 마치 정치 문제는 정치로 해결이 안 된다. 정치 세계는 맨날 싸우게 돼 있고요.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공격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에요. 안 돼요. 또 좋았다가도 금방 나빠지는 게 정치 현상이거든요. 그래서 정치 문제는 정치 문제로 해결이 안 되고. 경제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경제가 맨날 좋다 나쁘다 이러는데, 경제 걱정 없는 때가 없어요. 경제 걱정 안 하는 건 제가 보질 못했거든요. 정치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고, 인생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어요. 근데 이게 건강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고. 멀쩡한 얼굴을 가지고 엄마들은 얼굴 반쪽 됐네. ”이래요. 내가 볼 땐 온쪽인데, 엄마는 반쪽이라고 그래요. 이게 엄마의 걱정이 거기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걱정 안 나타난 걸 본 거고, 걱정 나타난 걸 보면 반쪽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끝날 일이 없어요. 정치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경제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인생 문제 해결 안 되고, 건강 문제 해결 안 되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기서 진실상을 보면 해결이 돼요. 진실상. 그 진실상을 뭐라고 비유를 하냐면 꿈꾸는 과정에서, 꿈속에서 꿈을 해결하려면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어요. 꿈으로는 꿈이 해결이 안 돼요. 꿈에서 깨어나야만 꿈을 해결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이거예요. 사사물물이, 모든 물건, 천지만물이 법성성기다. 둘 없는 법성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이거지. 성기라는 게 법성의 성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죽어도 법성이고, 살아도 법성이고, 보여도 법성, 안 보여도 법성이다. 무장무애하고 원만구족하다. .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사사물물 법성성기 무장무애 원만구족. 깜깜한 것도 법성이고, 밝은 것도 법성이고, 작은 것도 법성, 큰 것도 법성, 이게 그거거든요. 물골, 물건의 뼈, 또 사물의 진실상, 이건 말이, 그게 진실상은 어려운 말인데 뼈다 뼈. 산을 보되 산의 뼈를 본다. 산골, 물골. 근데 우리 말에, 말에 뼈가 있단 말이 있어요.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언골. 이거는 나쁜 뜻으로 쓰이는 말이에요. 한바탕 싸우고 난 사람들은 말을 할 때 그 싸웠던 감정이 말 속에 들어있어. 그걸 말에 뼈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요. 아주 진실상. 죽음의 진실상.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의 형상을 보고 슬퍼하는 거예요. 죽음의 형상을 보고.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슬퍼할 수밖에 없는 거지. 여기서 이제 무명무상절일체라.

        근데 이것은 제불이 방광(放光)경계, 이렇게 광명을 비추는 경계고, 보현이 입정경계라, 보현이 삼매에 들었을 때 법성성기 무장무애 경계란 말이죠. 그러면 이제 거기서 이 의상 스님의 제자들이 이 의상 스님의 법성게 법문을 놓고, 자기들이 해석을 달아서 그걸 후대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거는 보현이 삼매 속에서 증득한 세계다. 그래서 이걸 증득한 세계라는 말을 어려운 말로 증득할 증자하고 나눌 분자하고 증분이라고 그래요. 증득한 분야. 그럼 보현이 삼매 속에서 딱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음을 얻은 세계가 뭐냐. 무명무상절일체라는 거에요. 이름도 형상도 없는 그런 세계다.

 

此訂分者 言語道斷故絶名也 心行處滅故離相也

   차정분자 언어도단고절명야 심행처멸고이상야

   問 若爾 此處 與淨名默何別 答淨名默者 以名相倒

  문 약이 차처 여정명묵하별 답정명묵자 이명상도

  離此名相 方爲默也

  이차명상 방위묵야

 

 

        그래서 그걸 언어도단(言語道斷)이기 때문에, 거기는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절명(絶名)이라고 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기 때문에, 생각의 길이 또 없어졌기 때문에 이상(離相)이라고 그런다. 상을 여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제 저술이 시작돼요.
그러니까 물어요. 그렇다면 말의 길이 끊어진 게 이제 불교에 몇 가지 사례가 있는데, 문수보살이 유마거사하고 둘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토론을 해요. 그런데 문수보살이 나는 이런 이런 것이 법성원융무이 법성무이경계라고 나는 본다. 이러니까 유마는 입을 닫고 말을 안 했어요. 이걸 유마묵연(默然)이라고 그러는데, , 침묵이라는 묵자, 그러할 련자. 문수는 말을 했는데 유마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제 유명한 얘기예요. 유마가 왜 말을 하지 않았나? 진정으로 둘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려면 말이 거기는 끊어졌다, 이런 소리예요. 그래서 유마는 말 없는 걸로 둘이 없는 세계를 보였고, 문수는 말을 통해서 둘이 없는 세계를 보였다. 이런 뜻이거든. 그래서 이제 무명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유마식으로 말을 하나도 안하는 세계가 있어요. 말이 없어. 무명무상이야 그대로.

        그러는데 무명무상 여기서 말하는 그 내용하고 유마거사가 말을 닫은 그 내용하고 어떻게 다르냐 이렇게 이제 묻는 거예요. 십불보현 대인경계 무명무상절일체하고 유마거사가 말을 딱 닫은 그 세계하고 어떻게 다르냐. 그러니까 대답을 해요. 답이라 정명묵자(答淨名默者)는 정명은 유마거사인데 유마거사가 말을 딱 닫은 것은 이명상도(以名相倒)해라. 거기에는 이름도 형상도 딱 끊어진 세계다. 거꾸러질 도자를 쓰는데 거꾸러질 도자는 끊어졌다 이거예요. 없다, 거기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유마는 딱 말을 닫았고.

 

九會佛默 名相中默 故玄別也 謂不捨名相 即此名相中默

   구회불묵 명상중묵 고현별야 위불사명상 즉차명상중묵

   非如虛空都無物也 此約普賢訂分辨耳

   비여허공도무물야 차약보현정분변이

      (叢髓錄 眞秀大德記. 韓佛全6-770)

      (총수록 진수대덕기. 한불전6-770)

 

        그다음에 화엄회상에서 석가모니는 딱 방광만 하고 설법은 전부 보살이 해요. 그래서 그걸 화엄구회불묵(九會佛默)이라고 구회에서 불이 묵언을 했다. 화엄경이 이제 모임이 9번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화엄구회불묵. 화엄회상에서 부처님은 딱 10도 방광이라고 10번 방광만 했지, 설법은 안 해요. 그 문수 보현 뭐 이런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설법을 해요. 그러면 화엄회상에서 부처님이 말씀을 안 하신 거 하고 유마가 말을 딱 닫은 거 하고 어떻게 다르냐. 침묵도 단계가 있고 성격이 있거든요. 유마의 침묵과 화엄의 부처님의 침묵은 어떻게 다르냐, 이걸 이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엄구회의 불이 묵연한 것은 명상중묵(名相中默)이라. 말을 딱 끊어서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화엄구회는 일체 보살들의 설법을 다 들어요. 말과 형상 속에서 침묵을 하는 거예요. 이게 이제 최고의 침묵이에요. 말을 일체 그냥 끊는 것보다 말을 다 들으면서 말을 안 하는 게 최고의 그게 침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보면 그렇거든요. “시끄럽다, 말하지 마라이런 거 있거든. 그것보다도 하는 소리를 전부 다 들어. 그러면서 본인은 하는 말이 없어. 그게 최고인 거예요. 막 우격다짐으로 말하지 말라고 막 침묵령을 내리는 것보다, 이 사람 하는 말도 듣고, 저 사람 하는 말도 듣고, 말을 다 들으면서 자기는 하는 말이 없어. 그러면 뭐 하냐. 표정으로 말을 해요. 그 말들이 다 좋으면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표정으로, 좋으면 기쁜 표정을 내고, 안 좋으면 또 안 좋은 표정을 내고, 이제 부처님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 말에 따라서 발바닥에서도 방광을 하고, 무릎에서도 방광을 하고, 정수리에서도 방광을 하고, 그렇게 그 경우에 따라서 빛만 내보이지 말은 안 해요. 그게 부처님의 침묵이다. 이렇게 제자들이 얘기를 해요. 그래서 유마의 침묵과 부처님의 침묵하고는 멀리 다르다. 전혀 이게 같을 수가 없다 이런 식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의 침묵은 불사명상(不捨名相)이니, 이름과 형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형상 속에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이름과 형상에 매이지 않는 거예요. 이름 속에 있으면서 이름에 매이지 않고 형상 속에 있으면서 형상에 매이지 않는 게 이 부처님의 해탈 경계다 이거죠. 불사명상이니, ()는 이 화엄의 침묵은, 명상 중 침묵(此名相中默)이라,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 거와는 같지 않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해요. 이것은 보현의 증분에 의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보현이 깨달은 경지가 이 경지고, 이 경지는 또 석가모니 부처님이 방광하는 경지가 이 경지다. 보살은 입정을 하고 부처는 방광을 하는데, 입정 방광의 내용이 무명무상절일체다 이거죠. 뭔 소린지 참 답답하긴 답답하네요. 답답하긴 답답해. 무슨 소리야 도대체가 무슨 소리야? 이게 이제 부처님이 이제 그 광명을 나타내는 세계고, 보현이 삼매에 든 세계인데, 그 세계에 가지 못한 입장에서 이 소리를 들어놓으니 같이 안 통한단 말이에요, 이게. 꿈을 꾸면서 꿈 깬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싸니 그게 꿈 깬 사람 떠드는 소리가 꿈꾸는 사람에게 잘 안 들린단 말이에요.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이 십불보현 대인경 무명무상절일체 이 세계에 가는 방법이 뭐냐. 이게 이제 반야바라밀 반야 수행이에요. 반야 수행은 뭐냐 하면은 의식을 맑혀서 진실상에 들어가는 건데, 이게 이제 반야 도피안이라고 바라밀이라고 해요. 그러면 행동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경 읽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기도하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염불하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의식을 중지하고 지혜 광명을 불러내는 게 이게 수행이거든요. 그래서 지혜로, 피안이라는 거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진실상 그걸 말하는 거예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진실상이 그게 저 언덕이다, 피안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가는 방법은 방법이 없어요. 뭐가 없느냐. 생각을 맑히고 지혜를 일으키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혜는 반야라고 그러고 생각은 의식이라고 그러거든 의식. 그럼 생각을 이게 맑히는 방법이 뭐냐. 경 읽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선행하고 그 방법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하다 보니까 싱겁네. 결론이. 결론이 싱거워 뭔가 좀 특별한 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없어요.

 

無名無相絕一切者 如上初初 不見名相處也

   무명무상절일체자 여상초초 불견명상처야

     (叢髓錄 眞記. 韓佛全6-776)

     (총수록 진기. 한불전6-776)

 

       그리고 또 하나 방법은 세 번째 무명무상절일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화엄이다, 뭐 반야심경이다, 염불이다 이런 말, 여러 가지 법문의 말이 위에 있었는데, 이런 거 시작하기 그전에, 초초, 처음의 그 처음에 한 법문도 말하기 전 처음 있었는데, 그 처음보다 더 처음, 한 말도 안 했을 때, 처음에는 불견명상(不見名相)이라, 이름도 형상도 보지 않은 그 세계가 있었다. 명상을 보지 않은, 곳 처자(), ,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다. 그게 본래 명상이 있었던 게 아니고요. 배워 익혀서 명상이 생겼거든요. 처음에 딱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이름도 없어요. 그냥 적나라 적세세라고, 빨간 모양 몸뿐이에요. 그걸 적나라 적세세라는 말을 썼는데, 그냥 발가벗은 몸 그것뿐인데, 얘가 이제 이 몸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냥 버릴 수가 없잖아요. 이거 살아야 돼. 몸을 유지해야 돼. 유지하려다 보니까 몸에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부지런히 익혀야 돼요. 그래서 뭘 보니까 이름부터 물어. 이거 이름 뭐냐고. 왜냐하면 이름은 왜 필요하냐면 그 물건의 성격에 맞춰서 보통 이름을 붙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름을 알면 성격을 아는데 너무너무 도움이 돼요. 그러니까 어린애들 이 녀석 하는 짓이 보면, 맨날 물어. 뭐 이름 묻고, 이거 뭐 하는 거냐고 묻고. 그게 왜 그러냐면 지금 저 살 궁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나, 나에게 도움이 안 되나. 전부 익혀가는 거예요. 근데 그걸 엄마들이 보면 귀찮거든. ‘그만 물어라그러면 막 화내요. 지는 살려고 묻는데 엄마는 그만 물으라 그래요. 근데 이걸 다 익히는 과정이 있어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나쁜 건 버리고 좋은 건 취해야 돼. 그게 욕심이에요. 그게 전부 이게 이 몸을 위해서 배우고 익힌 것이 명상이지, 본래는 명상이 없는 거예요. 초초의 불견명상처야, 그 배우기 전에 그 처음 처음에는 명상을 보지 않는 세계가 있었다. 이렇게 이제 또 얘기를 해요. 그래서 명상을 끊는 세계가 있고, 말을 닿는 세계가 있고, 말 속에서 침묵하는 세계가 있고, 또 처음에 이름과 형상을 아예 보지 않는 세계가 있었다.

 

能知此實體(능지차실체) 이 진실체의

寂滅眞實相(적멸진실상) 적멸 진실상 알면

則見正覺尊(즉견정각존) 정각세존을 친견함이니

超出語言道(초출어언도) 어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言語說諸法(언어설제법) 언어로 제법을 말하나

不能顯實相(불능현실상) 실상은 나타낼 수 없다.

平等乃能見(평등내능견) 평등해져야만 본다.

如法佛亦然(여법불역연) 법과 같아서 여래도 그러하다.

(華嚴經須彌偈讚品 智慧菩薩頌)(화엄경수미게찬품 지혜보살송)

 

        근데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이제 문제는 진실상인데, 진실상, 형상 때문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데, 이 근심 걱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형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형상은 형상으로 해결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리고 지금 보면 우리가 전부 강해져서 강해져서 크게 되려고 하거든요. 근데 더 강하고 더 빠르고 하다 보면, 언제 나보다 더 빠른 사람이 나올지 몰라서, 언제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올지 몰라서, 불안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형상은 형상으로 해결이 안 된다.

        그럼 형상을 해결하는 방법은 형상의 진실상을 봐야 된다 이거야. 이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형상의 진실상으로 가는 게 반야바라밀, 지혜로 저 언덕에 가는 거, 지혜로 저 언덕에 간다. 형상 없는 진실상에 간다 이 말이죠. 근데 이 진실상을 아는 게 쉽지가 않아.

 

        그래서 수미정상게찬품에서, 능지차실체(能知此實體), 이 형상의 진실체, 진실한 몸, 진실체. 이거는 적멸진여상인데, 생멸이 전혀 없고 참 그대로의 모습이 형상 진실체고 만물의 뼈다. 어떤 사람들은 뼈다구다 이런 말은 쓰는데, 뼈나 뼈다구나 비슷하죠. 사물에 뼈다구가 있다. 이거는 형상인데 여기 뼈다구가 있다는 거예요. 이 뼈다구를 보면 이것이 있든지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무장무애 원만구족 해탈이라 그래요. 사물에서 형상을 보지 않고 뼈다구를 보면 무장무애하고 원만구족하고 극락세계고 해탈세계다. 가르치는 게 그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간단해요. 생각을 딱 맑혀서 사물의 진실상을 보면 끝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왜 안 되냐면 어릴 때부터 이 몸 살리려고, 이 이름과 형상을 꽉 익혀놨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를 스스로 못할 뿐이에요. 살려고 익혔는데 그걸 벗어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렇지, 전생에서부터 조금 닦은 사람은 무명무상절일체 덜커덕 끝나는 거예요, 거기서. 다시는 또 이름과 형상을 싣지 않아요. 그걸 돈오돈수(頓悟頓修)라 그래요. 그대로 알아서 그대로 다 닦아버렸다. 돈오돈수라는 얘기, 돈오라는 건 금방 알았다는 얘기고, 돈수라는 얘기는 더 이상 형상을 안 쫓아간다 이거예요. 형상 안 쫓아가면 그걸 돈수라 그래요. 바로 전체를 다 닦았다. 돈이라는 건 금방이라는 소리고 전체라는 소리거든요. 아무것도 아닌건데. 이렇게 되면 그 적멸진실상(寂滅眞實相) 사물의 실체를 보면 이 사람은 즉견정각존(則見正覺尊)이다. 바로 부처님을 보는 거다. 그 실체를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을 보는 거다. 부처님이 그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그때는 어떻게 되냐. 초출어언도(超出語言道). 언어도라는 건 말의 세계인데 모든 말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되요. 말은 생각이에요. 근데 진실상을 보면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니까 말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전부 말로 살아요. 말로. 근데 말에서 왜 못 벗어났느냐. 진실상을 못 봐서 그래요. 그래서 말은 말로 해결하려고 그러니까 말이 또 말을 만들고, 말이 또 말을 만들어서,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래서 꿈에서 벗어나려면 꿈을 깨야 하듯이, 말에서 벗어나려면 진실상을 봐야 한다. 이걸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언설로 설제법(言語說諸法)이나, 말로서 모든 법을 이야기를 하지만, 불능현진실이라 진실을 나타낼 수가 없다. 말로써 여러 가지를 말은 하지만 진실은 못 나타낸다. 그게 왜 그러냐. 말은 하지만 실제 진실상은 못 나타내요. 내가 느낀 좋은 진실이 있는데 이거 다른 말로 아무리 해봐야 내 느낀 진실상을 나타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뭐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데도 소용없어요. 그건 말하는 사람의 감정만 있을 뿐이지, 저쪽 사람은 전혀 모르니까, 몇 시간을 얘기해도 그건 아니고 하면 끝나요, 그냥. 방법이 없어요. 그건 아니라는데 뭐 아무 방법 없어요. 그러니 불능현진실이라, 진실을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되냐. 평등내능견(平等乃能見)이라. 내 생각이 이 이름과 형상에 매이지 않고, 평등해지면 무이상, 두 가지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내 마음이 평등해진다. 사는 거와 죽는 것이 평등하고, 있는 거와 없는 것이 평등하고, 보이는 거와 안 보이는 게 평등하고. 내 마음이 일심청정 평등세계를 다 이루게 되면 그때 이제 진실상이 보인다는 거예요. 내 생각이 평등하지 않은데 평등한 세계가 보일 리가 있나요? 근데 이제 하나 분명한 것은 중생들은 이걸 보지, 이걸 보는 마음을 못 보는 거예요. 쎄하네 아주. 쎄해요. 이거 보잖아요. 근데 이것만 딱 생각이 여기에 멈춰 있지, 이걸 보는 마음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걸 보는 건 사물을 보는 건 용이라 그러고 이 마음은 체라 그래요. . 근데 범부는 단용무체라. 다만 사물을 보는 작용만 있지, 그 사물을 보는 마음의 본체를 모른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이에요. 의상스님이 특히 범부는 단용무체라. 용이라는 거는 쓸 용자인데 이게 그릇이다. 이거는 물이다. 이건 책이다. 사람이다. 이게 작용이에요. 그런데 이 그릇을 보는 마음은 체란 말이에요. 몸이 몸체란 말이지. 본체. 체는 못 보고 용만 본다. 다만 용뿐이다. 체가 없다. 그래서 그 체로 들어가야 진실상인데, 이 용에서만 머문다 이거예요. 이거 파도다 뭐다. 파도의 진실상은 뭐예요? 물이잖아요. . 그러니까 보는 대상에 매이지 않고 보는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게 진실상이에요. 그걸 평등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마음은 평등하거든. 왜 평등하냐. 요 작은 걸 보는 것도 마음이고, 큰 걸 보는 것도 마음이니까, 마음으로는 크고 작은 게 평등해. 이상해요? 무슨 최면 거는 것 같네. 그걸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보는 것도 마음이고, 내 몸을 보는 것도 마음이다. 형상으로 보면 저 사람하고 내 몸하고 다른데, 보는 마음으로 보면 저 사람 보는 마음이나 내 몸 보는 마음이나 똑같잖아요. 이걸 무이평등이라고 그래요. 둘이 없는 평등이다. 그 세계로 돌아가면 이거 문제가 전혀 없어요. 무장무애 원만구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안 돌아가고 형상으로 돌아가니까 문제가 이제 끝날 날이 없는 거죠. 모든 근심 걱정은 이름과 형상에서 온다 이거죠. 그래서 평등해야 이제 이게 보는데, 법도 그러하지만 불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제 화엄에서는 이게 있는 거, , 이걸 깨달은 불 이게 차별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불을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을 본다.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제상이 상이 아닌 걸 보면, 즉견여래다. 바로 여래불을 본다 이거죠. 이런 사물을 볼 때 진실상을 보면 바로 여기서 부처를 본다. 이 소리예요. 사물의 진실상과 여래상이 다른 게 아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