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4월12일 음력 3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1-04-12

--법문(法門)이야기--

 

      이번 달 초하루 법문은 <법문(法門)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법문. 법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법문을 맨날 하는데, ‘법문은 무엇인가.’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법문은요, 법을 보이는 문이다.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보이고 싶은데 보일 방법이 없어서 문을 냈단 말이죠. 그래서 문이 없으면 법을 못 보이니까 법을 보이는 문을 내서 법을 보게 한다. 그것이 법문입니다.

 

言法門者 示法之門 開方便門 示眞實相

언법문자 시법지문 개방편문 시진실상

 

      법문은 시법지문(言法門者 示法之門)이라, 법을 보이는 문이다. 그것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고 해요. 지붕에 올라가려면 그냥은 못 올라가니까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방편은 지붕에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거죠. 그래서 방편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법, 방편문을 열어서 진실법을 본다. 그런데 이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이에요.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

      그러면 진실법이라는 것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법인데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연법이라고 해요, 인연법. 부처님이 인연법을 깨달아서 무아를 얻으시고, 또 해탈을 얻으시고, 극락을 얻으시고, 사바세계에서는 복락을 얻으셨다. 사바세계에서는 복으로 즐거운 복락, 극락세계에서는 지혜로 즐거운 안락, 그게 전부 인연법을 통달함으로 얻어진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고, 극락에서는 지혜의 즐거움을 얻는데, 그게 정토안락이다. 그게 극락세계죠.

      근데 이 인연법이라는 것은 나기는 났는데, 인연생법(因緣生法), 모든 법이 인연으로 나는데, 그게 한군데 중심이 있는 게 아니에요. 또 변방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법은. 그래서 그걸 났으되 난 것이 없는 적멸법(寂滅法)이라고 해요, 인연생법이. 생멸법이 난 곳에 난 것이 없고, 사라지는 곳에 사라짐이 없는 적멸. 적멸이란 생멸이 없다 이 소리예요. 그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중도(中道)라고 해요. 인연생법은 적멸이요 중도이니, 그 중도가 어떻다는 말인가. 공공적적(空空寂寂)해요. 찾아보면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해요. 그런데 항상 요요명조(了了明照)해요. 알 요자가 있는데 분명하다는 소리예요. 분명하고 분명하고 밝게 비춘다. 이게 인연법이에요. 인연생법이, 인연으로 생멸하는 법이 적멸중도이니, 또 공공적적하고 요요명조라. 이 법이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극락세계에서는 편안한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해탈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대광, 대웅, 크게 빛나고 크게 웅장한 그런 지혜자재, 대광대웅 지혜자재법이 전부 이 인연법을 통달하느냐, 인연법을 통달하지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거지요.

      이게 법문인데, 법문은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모양으로 하고 그래요. 언설법문(言說), 행위법문, 형상법문, 이게 전부다가 법을 알려주는 문이거든요.

 

闇夜明燈

암야명등

 

譬如闇中寶 無燈不可見

비여암중보 무등불가견

佛法無人說 雖慧莫能了

불법무인설 수혜막능료

(華嚴經 須彌偈品)

(화엄경 수미게품)

 

      근데 이 법문이 얼마나 중요한가. 비유로 말하면 법문은 암야명등(闇夜明燈)이라. 깜깜한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과 같다. 법문이 없으면 갈 길이 없어요. 어두운 밤에 불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듯이, 어두운 밤에 등불과 같은 것이 법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偈品)>이라고 하는 경문에서 명등을 얘길 했는데, 이 밝은 등불이 하는 일이 뭐냐. 보물찾기하는 거예요. 보물. 그래서 비유하자면, 비여암중보(譬如闇中寶),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금은보화가 있는데, 무등이면 불가견이라(無燈不可見),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못 본다 말이죠. 왜냐. 어두워서. 근데 어떡하면 보냐. 밝은 등불을 가지고 가서 비추면 보여요. 그래서 불법도 무인설하면(佛法無人說), 이 부처님이 보이는 이 인연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말하지 아니하면, -말한다는 게 이게 법문이죠,- 법문을 하지 아니하면, 수혜막능료라(雖慧莫能了). 비록 지혜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법문을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보이고자 하는 극락법, 복락법, 이런 해탈법, 자재법, 지혜법을 그냥 어떻게 보이냐. 법문을 통해서 보인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등불을 비추어서 그 보물을 얻는다. 이걸 법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법문은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이다.

 

標月手指

표월수지

 

手指標月 因指看月

수지표월 인지간월

觀指爲月 亦亡其指

관지위월 역망기지

(楞嚴經2)

(능엄경 제2)

 

      그다음에 법문은 표월수지(標月手指). 표라는 것은 목표라는 표자인데, 여기서는 가리킬 표자예요. 달을 가리키는, 표월, 수지, 손 수자, 손가락 지자, 손가락이다. 달이 있는데 달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달이 저기 있다이렇게(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달은 저기 있고, 뭘로 가리키느냐. 수지, 손 수, 손가락 지, -발가락을 족지라고 그러는데, 손가락을 수지라고 그래요.- 손가락이다 그거죠. 달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서 달을 보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법문과 같다고 얘길 하거든요.

      이 법문은 능엄경 제2권에 있는 법문인데, 수지로 표월하면(手指標月), -경문에 있는 내용이에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지간월이라(因指看月). 그 손가락으로 인해서,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볼 관자, 달 월자, 달을 본다. 이게 방편이고 이게 법문이거든요. 손가락을 가리키는 목적은 달 보게 하는 데 있는 거예요. 그래 수지표월하면 인지간월이에요. 손가락으로 인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잘못해 가지고 관지위월하면(觀指爲月),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생각하고 달이라고 여기면, 이게 법문을 잘못 듣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역망기지라(亦亡其指). 그 손가락까지 또한 잃어버린다. 왜 그러냐. 손가락은 달이 아닌데 이걸 달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게 달이니까 손가락도 없어진 거예요. 변질됐다 말이지.

      근데 이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법인데, 적멸법이고, 무슨 말이든지 말을 하는 것은 생겼다 사라지거든요. 이건 생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적멸중도를 내가 지혜로 깨닫기 전에 그 적멸중도를 이야기한 말씀을 가지고 이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하면, 그 말씀은 생멸이라. 그래서 이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을 때 달을 못 보고 손가락으로 달이라고 여기는 거와 같다. 이렇게 되면 손가락도 제대로 못 보고 잃어버린 게 된다.

      이 외에 비유가 많아요. 금강경에서는 <지아설법이 여벌유(知我說法 如筏喩者)>, 정신희유분 제6(第六 正信希有分)에 나오는 법문인데,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아야 한다.’ 뗏목은 배인데요, 물 건너는 배는, 배가 없으면 물을 못 건너가는데, 그 배가 저 건너가고자 하는 피안은 아니에요. 이는 배를 통해서 저 언덕에 도달을 했으면 그다음부터는 배는 버린다. 법문은 물을 건너가는 배와 같다. 법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법문은 보물을 찾게 하는 밝은 등불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니까 법문을 잘 들어야 해요. 법문 안 들으면 안 돼요. 아주 잘 들어야 해요. 법문을 들어보면 맨날 똑같은 소리 한다 싶어서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저 법문 다 아는 법문이다 싶어 심드렁한 사람도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고요. 법문을 잘 들으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면 이게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생각의 구조와 체계가 완전히 바뀌어요. 그걸 육종진동(六種震動)이라고 그러는데, 우주가 6가지로 막 진동을 한다. 그런데 늘 이 손가락만 보고 달을 못 보는 법문을 들으면 아무리 법문을 들어도 감동이 없어요, 진동이 없어. 심장이 안 움직이고. 이 눈동자가 안 움직여. 그걸 저는 표현할 때 말똥말똥 청법이라고 그래요. 그저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어. 눈이 완전히 광명이 나고 온몸이 움직여서 한량없는 감동을 얻는 게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감동 없이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으면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나중엔 졸게 돼요. 그냥 조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반드시 말똥말똥 순서가 있어요. 그래서 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법문은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래서 법문은 무조건 들어야 돼요. 법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거기 때문에 다 깨달음이 들려지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말하든지 간에.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법 자체를 봐야 돼요. 그래서 항상 들으면 그게 성불이고, 그게 해탈이고, 그게 극락이에요. 법문 듣는 것이 극락이고, 법문 듣는 것이 그게 깨달음이고, 그게 바로 해탈하는 거다. 중요한 거죠.

 

因果法門

인과법문

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

(佛本行集經48)

(불본행집경제48)

諸惡莫作 諸善奉行

제악막작 제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教

자정기의 시제불교

(法句經下卷,述佛品)

(법구경하권,술불품)

白居易 謁鳥窠道林禪師 問曰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백거이 알조과도림선사 문왈 여하시불법대의 사왈

諸惡莫作 衆善奉行 白曰 三歲孩兒 也解恁麽道 師曰

제악막작 중선봉행 백왈 삼세해아 야해임마도 사왈

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 白遂作禮

삼세해아수도득 팔십노인행부득 백수작례

(傳燈錄4)

(전등록제4)

 

      그러면 법문은 방편인데 어떤 방편문을 많이 여냐. 제일 많이 기본적으로 여는 게 인과법문(因果法門)이에요. 인과. 이게 아주 인연의 근본이거든요. 인과는 어떻게 해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이 따로 있고, 귀한 사람이 따로 있고,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걸로 알아요. 그래서 조상 자랑하고, 지위 자랑하고, 신분 자랑하고. 요즘에는 외모 가지고 한몫 보려는 사람 많거든요. 이게 다 시대정신과도 뒤떨어진 거예요.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는 키 크고, 학벌 좋고, 지위 좋고, 소득 높으면 인기가 있었는데요.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이거 다 쓸모없이 돼 버렸어요. 왜 그러냐. 그거 다 필요 없고, 나를 인정해주느냐,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 요 사람만 필요하게 된 거예요. 키 크고 돈 잘 벌고 해봐야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거예요. 요새도 결혼하고 사람 만날 때 나 좋아하냐, 나 인정하냐 이 사람하고 해야지 괜히 다른 것 보고 하다가는 큰일 나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 법하고 맞는 거예요. 부처님 법은 벌써 그 당시에 조상을 보지 마라, 용모를 보지 마라, 배경을 보지 마라. 그러면 뭘 보냐.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업을 봐라. 이게 행업(行業)이에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 사람이 조상이 어떻든, 농사지으면 농부고, 물건 만들면 물건 만드는 사람, 공장에 다니는 이고, 또 학문을 하면 학자고, 노래 부르면 가수지, 업만 소중하지 다른 건 다 소중하지 않다. 이게 부처님 법이에요. 이게 평등과 인과예요. 인과 속에는 평등이 있어요. 사람은 다 평등하다. 근데 뭐가 중요하냐. 업이 중요하다. 업은 행위인데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의 용모가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거든요. 또 나의 배경이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니까, 내가 어디에 소속되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래서 나를 어떻게 바꾸냐, 나를 누가 구제하냐. 나를 내가 구제하는 거죠, 누가 구제해. 나의 행위로. 나를 누가 바꾸냐. 내가 바꾸는 거죠, 나의 행위로. 이렇게 평등과 인과를 얘기한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자기 행위는 말하지 않고 자기 결과만 비관한다든지, 잘못되면 이것이 미혹인데, 내가 공부 열심히 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지?’ 이러면 미혹이에요. 어떤 사람은 나는 많이 먹는데도 살이 안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먹는다고 다 살찌는 게 아니에요. 잠을 잘 안 잔다든지, 너무 과도하게 움직이면 몸에 살이 못 쪄요. 또 어떤 사람은 먹는 것도 없이 살만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완전히.. 아니 먹는 거 없이 어떻게 살이 쪄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먹은 게 기억이 안 날 뿐이에요. 먹기는 엄청 먹었는데 먹는 게 기억에 없는 거예요. 기억이 안 나. 아주 재밌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잠 한숨도 못 잤다는 사람이 있어요. 잠 잔걸 기억 못 할 뿐이에요. 며칠 동안 잠 못 잘 수가 없어요. 그러면 카메라 켜놓고 지켜볼까요? 그러면 안 한다고 그래요. 자기도 잔 거 알거든, . 그러니까 이게 순전히 자기 업이 자기를 바꿔요. 다른 건 바꿀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걸 항상 우리가 놓치고 살아요. 그래서 자기 업을 중요시 여기는 게 아니라 누구 자랑하기 바빠. 내가 어떤 사람이다. 그건 허망하고 무상해서 금방 사라지고 자기 업만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불교라는 것을, 결국은 깨달아야 실상법을 아는 거고, 실상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스승은 가르쳐야 되고 제자는 실행해야 되는 거거든요. 이 가르치고 실행하는 거 외에는 실상법을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는 건 불가능해요. 깨달아야 되요. 그러니까 스승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제자들은 진실하게 실행해서 그걸 깨달아야만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니까 불교경전 보면, 주로 실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어요. 나도 처음에 절에 와서 뭐 예불을 해라, 뭐 운력을 하라, 뭐를 하라 하는데, 매일 하라 소리만 하지 불교가 뭐다고 불교 내용을 가르치는 게 별로 없더라고. 얼마나 신경질이 나고 답답했는지 몰라요. 아니 불교가 뭔지 시원하게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별로 없어요, 맨날 뭘 하라고 해요. 근데 구조가 그렇더라고. 업을 바꿔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업 바꾸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때 그걸 알아요? 그거라도 그걸 지금 나같이 설명을 해주지. 몰라요. 전부 실천, 수행 쪽에 말이 많은 것도 업을 바꾸게 하는 거니까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수행법문이죠. 불교가 어렵다고 그러지만 어려운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게 중요해요. 불교를 가르친 여러 가지 말씀을 다 배우려면 못 배워요. 문제는 실천하면 된다 그거죠.

      그래서 맨날 하는 법문이 있는데, 그 법문이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법문이에요. 칠불은 여러 부처님들이, 통계는 모두 가르쳤다, 이 말인데, 통자는 모두라는 말이고, 계라는 건 가르쳤다는 말이고, 모든 부처님이 모두 가르친 게 칠불통계인데, 법구경 술불품(法句經下卷,述佛品)이라는 데 있어요. 제악은 막작하고(諸惡莫作),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제선은 봉행하고(諸善奉行),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고, 자정기심(自淨其心)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맑혀라. 시제불교(是諸佛教)이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짓지 말고, 선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행하고, 마음을 맑혀라. 자정기심. 자기마음을 다 자정하라. 스스로 맑혀라. 그러면 이것이 제불교니라. 여러 부처님의 똑같은 가르침이니라. 법구경 술불품의 법문인데,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실천하려고 들면 정말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욕심내지 말고, 제악막작은 하지 말고 그냥 소악이라도 막작하면, 적을 소자, 적은 악이라도 짓지 아니하면 그게 불교 실천이고 수행이고요. 제선은 그만두고, 적은 선, 몇 가지만이라도 받들어 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정기심은 항상 해야 돼요. 내 생각을 맑히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모든 것이 내 생각에서 나오니까.

      근데 경덕전등록이라는 30권 책이 있는데, 고승들 행적을 적어놓은 책이거든요. 30권 중에 4번째 권에 도림(道林)선사라고, 길 도자, 수풀 림자, 이 도림선사라고 하는 행장이 적혀 있는데, 그 도림선사를 아주 문장으로 유명한 소동파가 가서 뵙게 됐어요. 도림선사한테 소동파가 물었어요.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 부처님 법에 큰 뜻, 부처님 법에 중심의 큰 뜻이 무엇이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다.” 경에는 제선(諸善)이라고 많이 썼는데 보통 말할 때는 많을 중자, 중선이라고 해요. 제나 중이나 많다는 의미죠. “불교의 대의는 제악은 막작하고 중선은 봉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하잖아요. 그러니까 소동파가 그 소리가 영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소동파를 백거이(白居易)라고 해서 백이라고 하는데, 백왈(白曰), 말하기를, “스님이 하신 그런 말씀은 3세해아(三歲孩兒)라도,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야해임마도(也解恁麽道). 야해는 또한 안다, 임마도는 당신과 같이 그렇게 말할 줄은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랬거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하는 말씀이,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이 말이 젊을 때부터 그렇게 감동이 왔어요. 그 두 번째 말씀,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삼세해아가 수도득이나(三歲孩兒雖道得) 팔십노인이 행부득(八十老人行不得)이라. 세 살 먹은 아이가 비록 말할 수는 있지만, 팔십 노인도 실행할 수는 없다.” 행부득이라는 것은, 행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행을 하지 못한다는 거거든. 팔십 노인도 다 못해요. 나이 든다고 다 잘하는 줄 알아요? 나이 들어도 똑같아요. 하는 짓이 안 바뀌어요. 노인이 왜 저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젊은 사람이 못하는 건 노인도 못해요. 허망한 거예요, 아주. 삼세해아가 수도득,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비록 말은 하지만, 팔십 노인도 행부득이라, 팔십 노인이라도 실행할 수는 없다. 생각을 해봐요. 모든 선을 다 실행하고, 모든 악을 하나도 안 지으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참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소동파가 거기서 항복을 했어. 백수작례(白遂作禮). 백거이라는 소동파가 드디어 수자, 지을 작자, 예배 예자, 드디어 예배를 했다. 항복했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중요한 게 업을 바꾸는 인과법문이고, 업을 바꾸는 수행법문이거든요. 이런 법문을 자꾸 들어야 이게 성불이 돼요. 극락세계 가고 복을 받는다.

 

願力法門 원력법문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善男子 應修十種廣大行願 何等為十 一者

입부사의해탈경계 보현행원품 선남자 응수십종광대행원 하등위십 일자

禮敬諸佛, 十者普皆迴向 虚空界盡 我禮乃盡 而虚空界不可盡故 我此禮

예경제불, 십자보개회향 허공계진 아례내진 이허공계불가진고 아차예

敬 無有窮盡 如是乃至眾生界盡 眾生業盡 眾生煩惱盡 我禮乃盡 而眾生

경 무유궁진 여시내지중생계진 중생업진 중생번뇌진 아례내진 이중생

界乃至煩惱無有盡故 我此禮敬 無有窮盡 念念相續 無有間斷 身語意業

계내지번뇌무유진고 아차예경 무유궁진 염념상속 무유간단 신어의업

無有疲厭(40華嚴經40)

무유피염(40화엄경제40)

 

      그다음에 많이 하는 게 원력법문(願力法門)이에요. 원을 세워야 되거든. 천수경에도 보면 전부 원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거든요. 사홍서원도 그렇고. 근데 원 중에 가장 큰 원이 <법계원왕 대원법문> 이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에요. 법계원력의 왕이 보현보살인데, 법계원왕의 대원법문이다, 크게 원하는 법문이다. 그런 법문을 읽기만 해도 그게 성불이에요. 우리 한국불교에서 보면 늘 독송하는 게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보문품, 아미타경, 보현행원품, 요런 정도가 상용지송이라고 그래요. 상용지송경이라. 항상 하는 지송경이거든요. 수지독송하는데. 그런데 원을 말한 건 역시 보현행원품이에요. 보현행원품이 80권 화엄경에도 없고, 60권 화엄경에도 없고, 40권 화엄경 맨 마지막경 1권이 보현행원품, 우리가 읽는 내용이거든요. 40권 화엄경 마지막 권 1권이에요. 그런데 화엄경 전체에 아주 결론이고 실천이 바로 이 보현행원품이에요. 이거는 행원이, 실행하고 서원하는 행원이 바로 성불이고, 화엄경이거든요. 시작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 이게 원융법이에요. 그래서 시작이 대원이 되면 금방 성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을 세워라. 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서원을 세우기를 그렇게 강조를 해요. 그래서 인과법문, 원력법문은 법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중요한 법문인데, 그런 법문을 듣고 인과를 믿고 원력을 세우면, 서원을 발심이라고 해요. 이게 신심과 발심이거든. 인과를 믿고 원을 세우면 그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거다. 그래서 발보리심(發菩提心). 신인과(信因果). 그러면 성불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법문을 죽 계속해주시니까 법문을 많이 들어라. 듣는 것만큼 공덕이 된다. 그리고 인과를 믿어라. 또 서원을 세워라. 서원이 확실하면 바로 성불한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