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11월24일 음력 11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2-11-24

 

-영단의식(靈壇儀式)의 신묘인연(神妙因緣)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임인년 동짓달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영단의식, 영단의식의 신묘한 인연, 영단의식 신묘한 인연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불교는 만다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만다라, 만다라는 만남이라는 뜻이에요. 만난다. 그럼 어떻게 만나느냐. 그 만다라를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단상이라는 단()으로도 번역을 하고, , 그래서 단에서 만난다. 또 도량으로도 번역을 해요. 도량. 그래서 이제 도량은 구역을 정해서 불보살님 모두 모시고 일체 호법신장을 다 모시고 그 도량에서 모두 만난다.

        그래서 만나는 데는 그 만나는 형식이 필요한데, 부처님을 만날 때는 불단, 그리고 신중님을 만날 때는 신중단, 일체중생의 혼령, 영혼을 만날 때는 영단, 이렇게 단을 설치를 해요.

 

        그래서 꼭 삼단에서 만남을 구현을 하는데, 부처님은 어떻게 됐냐. 상주정토(常住淨土), 항상 정토에 머물러요, 부처님은. 그리고 보살님은 처염상정(處染常淨), 머물러 있기는, 머무를 처, 물들 염, 그 물 들었다는 건 중생세계인데, 중생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그 정신세계는 늘 부처님 세계에 계시고, 그래서 처염상정이라 그래요. 그다음에 일체 범부들은 어떻게 되냐. 그 고해 생사(苦海生死), 고통바다, 고통바다에서 나고 죽으며 머물러요. 그래서 그 고해생사에서 나고 죽음에 머무르는 그런 분들을 일단 모신다. 그렇게 그 모심으로 이루어지는 그 만다라 단상이 영단이에요. 영단.

 

        그러면 이 영단에서는 어떻게 신묘한 일이 벌어지는가. 아주 신묘해요. 가끔 택시 타면 스님, 절에 간 지 오래됐어요?” 그렇게 물어요. “조금 됐는데요.” 그러면 극락세계 정말 있어요?” “있죠.” “근데 왜 우리한테는 안 보이는데요?” “눈 감아서 안 보여요.” “눈을 어떻게 감는데요?” 이 세속의 티끌이 눈에 탁 가려 가지고 극락세계가 안 보여요. 그 세속 티끌을 어려운 말로 속진(俗塵)이라고 그러는데, 세속 속, 티끌 진. 속진. 그 속진이라는 건 뭐냐. 번뇌인데, 번뇌가 뭐냐. 이 몸 하나 때문에 걱정하는 게 번뇌에요. 그래서 무서운 말이 너 죽을래.” 그러는 거예요. 걱정 근심이 이 몸 하나예요. 몸 하나. 그게 이 몸 하나 걱정 때문에 극락세계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속이라는 거는 전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전부 세속이에요. 아버지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 근데 이 아버지가 얼마 못 가요. 어머니 이름 얼마 못 가요. 어린이라는 이름 이것도 얼마 못 가요. 청년이라는 이름 이것도 얼마 못 가고, 노인이라는 이름이 가장 오래 가는데, 50년도 가고, 노인 이것도 얼마 못 가요. 이름 다 없어지고, 모양 다 없어지고, 이게 세속의 티끌이거든요.

 

 

       근데 그 세속 티끌이 그냥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서 못 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라고 하는 이름을 쓰는데, <본래 신령스럽다> 할 때 본영(本靈)이라고 그래요. 본영. 근본 본, 신령 영. 그 본영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속에서 살아도, 늙고 움직이고 해도, <항상 그 신령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할 때 그걸 혼령(魂靈)이라고 그래요. . 혼이라는 혼자. 신령스럽다는 신령 령자. 혼령, 혼은 움직인다는 거예요. 움직이지 않으면 혼이 아니에요. 태어나고 죽고 살고 해도 신령스러운 게 늘 있어요. 그리고 또 온갖 생각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는데, 그 속에도 신령스러움이 있어요. 그걸 마음 심자, 신령 령자, 심령(心靈)이라고 그래요. 심령. 근데 이 신령스러움은 항상 있다. 그래서 그걸 그냥 신령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신령. 그런데 그 신령을 이 몸 걱정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몸을 내려놔야 돼요. 몸 안 내려놓으면 도 못 닦아요. 그래서 몸 걱정만 하면 그건 불교가 아니고, 몸교가 되는 거예요. 몸교. 몸교는 다 믿어요. 몸교 안 믿는 사람이 없어요. ‘건강하세요. 뭐 어쩌고. 항상 그대로네요.’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어린이, 청년, 노인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데 어떻게 항상 그대로예요. 이게 전부 몸교거든요. 근데 이 영단에서 부를 때 그 신령스러운 걸 부르지, 여자였던 세속 몸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 혼령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령스러움을 부르지, 남자였던 그거 안 부르고, 아버지였던 그거 안 부르고, 청년이었던 그거 안 부르고, 늙은 노인이었던 그거 안 부르고, 그냥 본래 신령스럽고, 혼 속에서 신령스럽고, 마음속에서 신령스러운 그 영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영가(靈駕) 이러지, 아무개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에요. 영가라는 건 가자는 수레 가자인데, 임금이 타는 수레는 높았다, 이걸 어가라고 그러고, 그리고 시렁 가자하고 같은 뜻인데 시렁은 높은 데 걸려 있다, 이래서 <높다>라는 존칭어예요, 가자가, 수레 가자가. , 높은 영.

 

        그래서 영가를 이제 부르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요. 그래서 그걸 맞이할 영자, 혼이라는 혼자, 영혼이라고도 하고, 또 대령(對靈)이라고 그래요. 그 영을 대한다, 맞이해서 모신다 이거죠. 대령. 근데 이런 대령들을 그냥 보신소청(普伸召請)이라, 널리 불러, 영만 부르는 거예요. 그 사람으로 있을 때 그 사람 그런 거 안 불러요. “누구세요?” 그러면 택배인데요.” 그런 택배 같은 거 안 불러요. 택배를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 영을 부르는 거예요. 택배 기사의 영을. 근데 세속에서는 그 영을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붙여준 이름, 그거 이름 그거 죽으면 없어져요. 그래서 이름 부르고 뭐 한다고 부르고. “우체국인데요.” 이래 부르고. 이게 전부가 허망한 이름이고, 거기서 영을 잃어버린 거예요. 신령 심령 혼령.

 

        그래서 영단에서는 혼령을 불러요. 그래가지고 혼령을 널리 소청이라고, 부를 소, 청할 청, 그래가지고 소청인데, 한두 사람만 부르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와도 영단이 모자라지 않아요. 이게 신령의 세계예요. 그러니까 세속의 세계와 신령의 세계가 있다. 세속의 세계는 넓고 좁은 데가 있지만, 신령의 세계는 넓고 좁은 게 없어요. 티끌 하나에도 시방세계가 다 모이는 게 신령의 세계에요. 이게 또 뭔 소리인지. 이게 이 세속을 가지고 신령을 측량하면 측량이 안 돼요. 이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다 모여도 비좁지 않은 것이 신령의 세계다.

 

魂靈著語

혼령착어

生來一陣清風起 滅去澄潭月影沈

생래일진청풍기 멸거징담월령침

生滅去來無罣礙 眞身面目更何尋(勸供諸般文.1574)

생멸거래무괘애 진신면목갱하심(권공제반문.1574)

靈明性覺 清淨心光 能凡能聖 本自圓明

영명성각 청정심광 능범능성 본자원명

 

 

        그래서 신령의 세계를 영단에 모시고, 신령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요. 이게 혼령착어(魂靈著語)라는 거예요. 부칠 착, 말씀 어. 신령의 세계는 이런 거다. 신령의 세계는 영명성각(靈明性覺)인데, 신령 령, 밝을 명.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이 아는 건데, 태어나서 아는 게 아니고 본성이 아는 거, 그 각자는 안다는 소리예요, 이걸 영명성각이라고.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의 마음. 각이나 식자나 안다는 같은 의미에요. 영명성각은 청정심광(清淨心光)이라. 청정해. 청정하단 말은 모양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 그리고 무엇이 거기 붙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청정이라고 그래요. 다른 것이 없다. 그 마음광명이다, 이거예요. 근데 그게 허공과 같아서, 이게 세속의 인연을 점점 줄이면 신중, 보살, 부처님 이렇게 성위에 올라가요. 그리고 이 세속의 인연을 점점 더 많이 만들면 생사범부에 내려가. 이게 그래서 능범능성(能凡能聖)이라고, 범부해도 되고, 능자는 된다 이 소리죠, 범부도 가능하고 성인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범부가 돼 있어도 그 신령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세속으로 눈을 감아서 신령을 못 볼 뿐이지. 그래가지고 본자원명(本自圓明)이라, 신령의 세계는 본래 스스로 둥글고 밝다. 둥글다는 말은 끝이 없다. 밝다는 항상 보고 듣고 느낀다는 거지. 본자원명이라. 그렇게 딱 그 신령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침으로 인도를 해요. 영단에서 하는 일이 그거예요.

 

        그리고 신령의 세계에서 죽고 사는 생사를 보면 생래는, 태어나는 것은 일진청풍기(生來一陣清風起), 한 차례, 일진이라는 건, 한 차례, 청풍은, 맑은 바람이 휙 일어나는 거와 같다. 이게 태어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 몸 위에서만 살다가 죽을 때 되면 허망하기 그지없어요. 재산도 전부 몸에 따라붙은 거고, 명예도 몸에 따라붙은 거라, 사랑도 몸에 따라붙은 건데, 이 몸 하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사랑도,-아이고 유행가 이름 같네,- 사랑도 명예도 재산도 뭣도 다 날아가는 거예요. 그게 우리 인생살이에요. , 이거 기가 막혀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게 신령의 세계에서 볼 때 태어나는 것은 일진청풍기라. 한 차례 맑은 바람이 휙 일어나는 것 같다.

        멸거, 죽어서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징담월령침(滅去澄潭月影沈)이라. 징담이라는 건 맑을 징, 연못 담인데 가을 연못이 꼭 그와 같아요. 맑은 연못에 달빛이 환하게 비쳤다가 그 달빛이 없어지는 것 같다. 잠길 침. 그런데 달빛이 그 연못에 비쳤지만, 저 허공 달은, 담월은 없어. 그렇지. 찾지 못했지. 못 찾은 거 맞아요. 없어진 달을 어떻게 찾아. 그 달빛이 연못 안에 분명히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버렸어요. 근데 그게 달빛이 연못에 비쳤어도 달은 그대로고, 없어졌어도 달은 그대로고, 바람이 일어났어도 공기는 그대로고, 바람이 사라졌어도 공기는 그대로고. 그게 본래 신령스럽고 혼이 신령스럽고 마음이 신령스럽다, 이런 거죠.

 

 

生本無生 滅本無滅 生滅本虛 實相常住

생본무생 멸본무멸 생멸본허 실상상주

還會得 無生滅底一句麼 俯仰隱玄玄 視聽明歷歷 若也會得

환회득 무생멸저일구마 부앙은현현 시청명력력 약약회득

頓證法身 永滅飢虛

돈증법신 영멸기허

 

        그래서 이런 영을 턱 불러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 영혼을 내가 부르는 수행이 있는데, 그걸 자기 주인공이라고 그래요. 주인공아. 주인공아. 이렇게. 근데 이건 혼령이라는 말인데 혼에 신령이 있다. 그러면 혼령이여, 혼령이여, 나의 혼령이여.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의 혼령을 안 보니까 나라도 불러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하늘보다 높고 땅속보다 깊은 나의 혼령이여, 나의 혼령이여. 여기는 뭐 시어머니, 며느리도 없고, 아버지, 아들도 없고, 가난하고 부자도 없고, 그냥 신령한 것만 있는 거예요. 그걸 불러라. 그래가지고 명상을 해요. 자기 신령 명상. 떡하니 명상을 하고. 그러면 그거는 살아서 자기가 자기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거거든요. 살아서. 그 혼령이 극락세계에 가는 거지, 세속에서 어린이 청년 엄마 아버지가 가는 게 아니에요. 그 엄마 아버지는 이 몸 흩어질 때 다 흩어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그 혼령을 일깨워서 혼령을 근심 걱정 없는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그것이 영단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말씀이지요.

 

        영단에 보면 대령 의식이라는 게 있어요. 영을 모시는 의식. 영을 먼저 일깨워서 모시면 벌써 천도가 다 된 거요. 그래가지고 영에서 보면 태어나도 본래 태어난 게 없고, 바람 한번 일어나는 것 같아서 죽어도 본래 죽는 게 없다. 연못에 달빛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생멸은 본래 이게 허망한 거고 그 신령스러운 진실상은 항상 하는 거다. 이렇게 법문을 해요. 실상은 상주라. 생멸은 본허(實相常住 生滅本虛). 그러면 이거 하나, 이 신령일구(一句), 이걸 신령을 조금 풀어서 쓰면 무생멸(無生滅)이라는데, 생멸 없는 한 구절. 신령일언구(一言句), 무생멸일언구. 무슨 소리인지, 진짜. 무생멸일언구가 있다. “아무게야하면 그 소리는 사라지는데, 생멸 없는 일언구는 안 사라져요. 봐요. 소리는 사라지잖아요. 근데 그 소리를 내는 신령은 안 사라지는 거예요. 이걸 무생멸일언구라고 그러거든요. 한 일자, 말씀 언자, 구절 구자. 부르는 소리는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 부르는 신령한 한 언구 그 본체는 안 사라져요.

 

        그래서 그거를 알면 어떻게 되냐. 자기 본래 몸을 안다. 그걸 법신(法身)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지금 움직이는 걸 생신(生身), 태어난 몸이라고 그러고, 법신, 생신, 법 법자, 몸 신자. 그러면은 기허(飢虛), 모자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져요. 이게 세속의 티끌로 모자람이 있는 거예요. 신령한 데 돌아가면 신령 한 데는 모자람이 없어. 그러면 그 신령한 게 어디 멀리 있느냐. 아니에요. 부앙에 은현현(俯仰隱玄玄)하고, 앉고 일어날 때 그냥 그대로 다 있고, 보고 들을 때 그대로 다 있다, 이렇게 해요.

 

普伸召請

보신소청

以此振鈴伸召請 今日靈駕普聞知

이차진령신소청 금일영가보문지

願承三寶力加持 今日今時來赴會

원승삼보력가지 금일금시래부회

因緣聚散 今古如然 虛徹廣大靈通 往來自在無礙

인연취산 금고여연 허철광대영통 왕래자재무애

今日靈駕 承佛神力 仗法加持 來詣香壇 受沾法供

금일영가 승불신력 장법가지 내예향단 수첨법공

         그래가지고 다 이제 불러서 모시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인연취산(因緣聚散)은 금고여연(今古如然)이나, 인연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가 만나서 내가 태어나고, 이 몸이 늙어서 사라지는 그런 것인데,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허철하고 광대하고 영통한(虛徹廣大靈通) 이 신령은, 허철 광대 영통이라고 그래요. 신령은 텅 비어서 못 가는 데가 없어요. 철이라는 건 사무칠 철자인데 다다른다는 소리예요. 다 거기에 다다라요. 텅 비어서 못 다다르는 데가 없어요. 또 광대해요. 넓고 커. 영통해요. 신령스럽게 다 통한다. 이게 우리의 본신이고 우리의 법신이에요. 이것만이 나지, 지금 있는 거 다 사라져요. 그런데 근심 걱정은 지금 보는 이 몸 하나 때문에 근심 걱정 다 하다 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나는 별 사람인 것처럼 떠드는데 미안하긴 해요 좀. 똑같아요. 그래서 알면서 매달리는 게 몸이에요. 이거 몸 죽을 줄 누가 몰라요. 그런데 몸만 위해서 살지, 다른 걸 위해서 살 줄은 모르는 거예요. 죽을 줄 알면서 매달리는 거, 참 안타까운 거지요. 허철 광대 영통해서 왕래가 자재무애(往來自在無礙).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자재하고 걸림이 없다.

 

       금일 영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이 향단(香壇), 향을 늘 피운다고 향단이라고도 하거든요, 영단을. 향단에 와서 이 법의 공양을 잘 받아라. 이렇게 의식을 봉행하는 것이 영단 의식이거든요.

 

證入樂鄉

증입약향

一從違背本心王 幾入三途歷四生

일종위배본심왕 기입삼도역사생

今日滌除煩惱染 隨緣依舊自還鄉 (入室偈)

금일척제번뇌염 수연의구자환향 (입실게)

 

 

        그리고 영단의식에서는 이 신령스러운 마음이 한 번 세속에 물듦으로 인해서, 이게 이제 신령스러운 마음을 본심왕(本心王)이라고도 하는데, 근본 본, 마음 심, 임금 왕, 본심왕, 신령스러운 마음이 세속에도 능하고, 청정에도 능하기 때문에 그냥 세속적인데 물들었어요. 근데 세속적인데 물듦으로부터 삼도 사생(三途歷四生)에 들어갔다 나왔다. 삼도는 지옥 아귀 축생, 사생은 태생 난생 습생 화생, 태로 나고 변화로 나고. 이런 여기에 이제 늘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금일 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만이 오늘 이 영단에 떡 모셔서 그 세속에 물든 번뇌를 싹 다 버리니까 오직 그 신령한 혼령으로만 돌아간다. 그러니까 수련의구(隨緣依舊), 그저 마음대로 옛날처럼, 환향(還鄉)이라고 쓰는데 신령한 본바탕, 그걸 돌아갈 환, 고향 향, 환향이라고 신령한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我今以此香湯水 灌浴孤魂及有情

아금이차향탕수 관욕고혼급유정

身心滌除令清淨 證入眞空常樂鄉 (灌浴偈)

신심세척영청정 증입진공상락향 (관욕게)

 

 

        그러면 이게 신령 삼매에 들어야 이 세속 원한이 싹 없어져요. 신령 삼매에 들지 못하면 세속 의식으로는 세속 원한을 풀 수가 없어요. 세속 생각을 가지고는 세속에 한 되는 거, 원 되는 거, 불평불만을 풀 수 없어요.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신령 삼매로 탁 들어가면 이 세속적인 거 모든 게 허공에 뜬구름과 같아서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릴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그때 이제 모든 세속적인 그런 마음의 한들이 다 녹아 버려요.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요. 그래가지고 이걸 환향이라고 그래요. 고향으로 돌아간다. 신령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모든 세속적인 걸 다 씻어서 상락향으로 돌아간다. 여기는 환자를 안 쓰고 증입(證入)이라고 쓰는데, 증명할 증자, 들어갈 입자, 내 마음 그대로 깨달음으로 들어간다. 이거예요. 마음 깨달음을 증명할 증자를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이건 뭔 말이냐. 마음 눈으로 본다. 마음 눈으로. 이 얼굴 눈은 익힌 대로 봐요. 그래서 안 익힌 건 못 봐. 눈으로 본다고 그러는데 그거 아니에요. 익힌 대로 보는 거예요. 익힌 게 보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한 번도 안 본 거는 봐도 몰라요. 이상해요. 그래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한 번도 안 본 거 있잖아요. 그거 모르고, 한 번도 안 들어본 얘기는 몰라요. 내가 절에 처음 와 가지고 심지법문한다고 그래서, 심지법문이 마음 심, 땅 지. 땅 지는 비유고, 마음 법문을 심지법문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심지는 그 산촌 시골에서 호롱불 심지 그거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호롱불 얘기를 왜 하지.’ 그렇다고. 그러니까 익힌 게 없으면 들어도 모르고, 익힌 게 없으면 봐도 몰라요. 근데 이 영혼이라는 거는 그냥 알아, 그냥 알아요. 이걸 증입이라고 그래요. 스스로 그걸 깨달아서 알지 들어서 아는 게 아니다. 그래서 상락향에 들어간다고 그래요. 상락향. 항상 즐거운 고향에 돌아간다. 그런 인연을 이루는 것이 영단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대령을 해서, 이렇게 영가를 깨끗하게 해가지고, 그다음에는 시식을 해요. 그다음에 극락세계로 다 보내드리고. 이런 일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래서 오늘 법문은 영단의식의 신령한 인연 이야기였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