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3월 22일 윤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3-03-22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윤이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게 이제 상당히 중요한데, 부처님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이 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 있다, 그게 경전이거든요. 근데 여래 소설법이 어디서 나왔냐. 여래 소득법(如來所得法)에서 나왔다. 얻은 바 법.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 깨달음으로부터 말씀이 나왔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여래소득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여래소설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 잘 몰라요. 금강경에 보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하는 데서, 여래소설법은 불가취(不可取), 취할 수가 없다, 불가설(不可說)이다, 말할 수가 없다, 비법(非法)이다, 법도 아니다, 비비법(非非法)이다, 비법도 아니다.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저 뒤에 가면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22라고 하는 금강경이 있는데, 거기는 무슨 말씀이 있냐면, 아어아뇩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少法可得)이니, 아주 조그만한 것도 내가 얻은 바가 없으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여래의 깨달음이다, 이랬어요. 내가 깨달음에서 무유소법가득이라, 아주 작은 것도, 가득이라는 건 얻은 건데, 얻은 게 없다. 그걸 일러서 여래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래 놨으니 여래의 깨달음이 과연 어떤 거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이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대승불교에서는 여래가 어디에 몸을 쉬는가, 그게 여래의 불토(佛土)인데, 불토를 불찰(佛刹)이라고 하거든요. 사찰 찰자. 여래의 불찰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게 정토종이에요. 그거를 한자로 쓰면 연꽃이라는 연자, 종파라는 종자, 연종(蓮宗)이라고 그래요. 연종은 불찰이다. 불찰 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게 정토종이 돼요. 그리고 여래의 깨달음을, 이제 법을 중심으로 해서 깨달은 법, 그걸 화엄종이라고 그러는데, 그거는 다 통한다고 둥글 원자 하나 써가지고 원종(圓宗)이라,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게 여래의 깨달은 내용을 대승불교식으로 설명하는 게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그래서 그거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 여래의 깨달은 내용인데, 그게 해인삼매다. 법성원융이다. 그래서 그런 화엄을 중심으로 하면 그걸 원종이라 그러고, 여래가 머무르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면 그걸 정토종, 연종이라고 그러고. 그럼 여래가 머무는 거는 극락세계고, 여래가 말씀하신 건 법성원융, 원융무애, 원종이라고 한다면 여래의 마음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어요. 그걸 선종(禪宗)이라 그래요. 극락세계도 치우고, 법성원융도 치우고, 순전히 여래의 마음, 그걸 중심으로 하는 분을 조사(祖師)라고 그러는데, 그 조사가 중심이 되는 종단이라고 조종(祖宗)이라고 하거든요. 조종. 조사라는 할아버지 조자. 그건 왜 조종이냐. 명 불심종(佛心宗)이라. 부처님 마음을 밝히는 종파다. 다른 건 다 안 해요. 불심만 밝혀. 이렇게 연종, 원종, 조종, 이게 이제 대승불교의 아주 핵심이에요. 오로지 부처님 계신 곳을 내가 가야 되겠다. 그러면 그게 정토종인데 염불만 하면 부처님 계신 국토에 가요. 부처님이 깨달은 해인삼매를 내가 알아봐야 되겠다 그러면 이제 법성원융무이상, 화엄삼매에 떡 들고, 화엄경을 공부하면,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이고,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고, 일순간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순간이고. 이걸 정리해 놓은 게 의상스님이 원교종요(圓敎宗要)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원교 해인삼매의 말씀이 화엄경인데, 화엄경에 종이라는 건 근본이라는 말이고, 요라고 하는 건 허리라는 말인데, 아주 근본 뿌리에 해당하고 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원교종요. 화엄법성도, 그게 의상스님의 저술인데 이게 어렵단 말이에요. 이게 극락세계에도 내가 가야 아는 거고, 원종도 화엄삼매에 들어야 알고, 이제 여래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것도 조사의 마음에 들어가야 그걸 계합(契合)이라고 그러는데, 계약할 계자, 합할 합자. 그러니까 어려워요.

 

釋迦如來八相成道

석가여래팔상성도

兜率來儀相 昆藍降生相 四門遊觀相 逾城出家相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

雪山修道相 樹下降魔相 鹿苑轉法相 雙林涅槃相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

護明菩薩 : 不受福德 發菩提心 常修功德 恒時廻向

호명보살 : 불수복덕 발보리심 상수공덕 항시회향

(釋門儀範上, 莊嚴念佛)

(석문의범상, 장엄염불)

 

鑽木而得火 掘地而得水

찬목이득화 굴지이득수

精勤正方便 無求而不獲

정근정방편 무구이불획

世間無救護 中貪愛癡毒

세간무구호 중탐애치독

哀愍衆生故 求智慧良藥

애민중생고 구지혜양약

(佛所行讚破魔品13)(불소행찬파마품제13)

 

        그래서 이제 한 가지 또 방법이 여래소설법, 여래소득법, 이런 거 말고 여래소행법(如來 所行法)을 한번 보자. 여래가 행하신 법. 그래서 그 많은 경전 이거 말고, 이제 여래가 어떻게 태어나셔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계시다가, 어떻게 가셨나. 이게 이제 불소행(佛所行)이라고 그래요, 불소행. 부처님이 행하신 바, 마명보살이 불소행찬을 지었는데 그 불소행찬(佛所行讚)8가지로 딱 구분해서 설명한 걸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 하고, 그건 불소행찬을, 부처님이 행하신 바를 찬탄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여덟 가지로 구분을 했어요. 이렇게 마명보살 불소행찬을 팔상성도로 구분해가지고. 우리나라 큰 절에는 팔상전이 거의 다 있어요. 이게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여래가 행하신 바를 보면 짐작할 수가 있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게 이제 여덟 가지로 했는데, 장엄염불을 할 때 이 석가여래의 팔상성도를 이제 하는데 이게 참 좋아요. 장엄염불에 석가여래 팔상성도예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이 얼마나 좋아. 그 여덟 가지만 외우면 부처님 일생이 환하게 들어오거든요. 그게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럼 첫 번째는 부처님이 도솔래의상이라고, 도솔천인데 참 재밌어요. 도솔이라는 말은 지족(知足)이라는 뜻입니다. 알 지자, 만족할 족자. 그래서 도솔암이라는 데도 있고 지족암이라는 데도 있어요. 같은 소리예요. 그럼 모든 그 정신적 능력은 만족하는 데서 생긴다. 부처님이 오신 데가 지족천, 도솔천이에요. 그래서 만족했어요. 거기서 도솔천에서. 그런데 만족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두 가지 현상인데, 하나는 만족을 소유해서 타락하는 경우가 있고, 만족에서 깨달음을 늘 간직해서 거기서 또 새로운 길로 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타락하지 않고 도솔천에서 잘 계셨다고 해서, 보호할 호자, 밝을 명자, 호명보살(護明菩薩)이라고 해요. 호명이라는 말은 마음이 늘 깨어 있어서 그 밝은 마음을 늘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가지고 호명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온갖 게 풍족한 데가 도솔천인데, 도솔천에 계실 때 불수복덕(不受福德)이라, 복덕을 하나도 안 받았다. 이 복덕을 받아버리면 타락해요.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지위를 누리지 않고 재산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게 성자예요. 지위를 안 누려. 늘 사람들과 지위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다가가. 그게 호명보살이에요. 재산이 많은데 그걸 쓰지를 않아. 청빈해. 그래서 그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은데, 늘 청빈 겸손을 하면 그게 호명이다. 돈 있다고 펑펑 쓰면 그건 타락하는 거고, 직위 높다고 권한을 부리면 그건 타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왔다 이거예요, 호명보살로. 그래 가지고 늘 또 상수공덕(常修功德)이라, 늘 공덕을 닦아. 그리고 또 항시회향(恒時廻向)이라, 항상 닦은 공덕을 내가 안 쓰니까 돌려줘, . 그럼 거기서 오래 계셔도 될 텐데 아니다 이거예요. 도솔천보다 고통이 있는 사바 세계로 가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온 게 올 래자, 의식이라는 의자인데, 그게 옥편에 보면 의식 의자가 <올 의> 그렇게 돼 있어요. 온다는 뜻이고. 올 래, 올 의. 도솔천에서 내려오는데 어떻게 내려왔냐.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어요. 코끼리. 불교에 동물의 아주 상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사자요, 하나는 코끼리인데, 사자는 깨달음을 이루어서 설법하는 걸 상징한 게 사자예요. 그래서 사자후라고 그래요. 근데 수행하는 거는 코끼리예요. 코끼리라는 놈이 재밌는 게, 아무리 물이 깊고 물살이 세도 헤엄치는 법이 없어요. 이 놈이. 한 발짝 한 발짝, 뛰는 법도 없고, 다 더듬어서 깊은 곳은 깊은 곳대로 밟고 가고, 얕은 곳은 얕은 곳대로 밟고 가고, 그걸 수행에다가 비유한 거예요. 그래서 수행은 건너뛰는 법이 없어요. 다 마주해서 거기서 지혜를 얻는 게 수행이거든요. 도망가는 건 수행이 아니에요. 마주해서 지혜를 얻는다.

 

       코끼리를 타고 턱 오셔서 이제 사바세계에 강생을 하는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昆藍降生相), 룸비니에서 강생을 하는데, 강생이라는 게 이제 완전히 도솔천 천신이 아니라 사바세계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했다. 내릴 강, 태어날 생. 그러니까 나보다 한 단계 낮은 데로 가야 그게 깨어 있는 사람이에요. 높은 데로 가서만 계속 따라다니면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그건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강생을 한 거예요. 상생을 한 게 아니라. 높은 데 가서 난 게 아니라 낮은 데로 와서 났다 이거지요. 그렇게 부처님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인데,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나. 생로병사가 있다. , 이게 생로병사가 있는 한 인간의 성공과 인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정반왕은 국왕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어머니는 그 집안이 뭐 화목하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아내는 부부의 사랑과 아이 양육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로병사를 보고 난 후에는, 이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전에는 죽음을 앞에 둔 시한부 인생이 성공을 한들 뭐하며, 소유를 한들 뭘 하겠냐. 이게 이제 꽉 꽂힌 거죠. 이게 이제 코끼리가 가는 길이에요. 생로병사를 마주했으면 이거를 그냥 피해 가고, 덮어두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걸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뭐 술을 많이 먹는다든지, 쾌락에 많이 또 치우친다든지 그게 아니에요. 이 생로병사, 이 놈이 뭐야 이게. 죽음이라는 게 이게 뭐야. 딱 마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문유관상이라고, 동서남북에서 이걸 보고 난 뒤에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아버지 노릇 해가지고도 안 되고, 그래서 석가모니, 아버지 노릇 안 했어요. 아주 웃기는 사람이에요. 아들은 낳는데 아버지 노릇을 안 했어. 이런 수가 어딨어요. 남편 노릇도 안 했어요. 남편인데도 남편 노릇 안 하고, 아들인데도 아들 노릇 안 했어요. 정반왕 아들이잖아요. 이게 참, 이게 말이 안 돼, 내가 볼 때는 이거. 아들 노릇도 안 한다, 남편 노릇도 안 한다, 아버지 노릇도 안 한다, 왕을 물려받으니 왕 노릇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생로병사 이거 해결하는 길로 들어선단 말이에요. 근데 다른 사람은 생로병사 이건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왕을 하느냐, 어떻게 자식을 키우느냐, 어떻게 부부가 사랑을 나누느냐, 가정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만 관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관심 없어요. 죽음 앞에 부부가 뭐며, 가정이 뭐며, 왕이 뭐냐 이거에요. 참 희한한 분이에요, 이분이.

 

        그 팔상성도 그걸 보면 그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이건 문학도 최고의 문학이고 철학도 최고의 철학이에요. 또 종교도 최고의 종교예요. 이거 안 움직이면 이게 철학과 무슨 문학으로 끝이는데, 이걸 움직이면 종교가 되는 거예요. 움직이면. 그래서 한 게 이제 유성출가(逾城出家)에요. 출가는 모든 걸 버린다는 거예요. 출가라는 게 집 떠나는 게 아니라, 다 버리는 게 출가예요. 그런데 전부가 다 그 생로병사 하라고 하는 동의하는 사람이었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부처님도 좀 비겁해요. 밤에 월장으로 도망갔어. 담 넘어서. 부처님이라고 다 위대한 게 아니에요. 아버지 노릇 안 한 거로 보면 그 위대한 거 아니라고 그게. 그 사람이 전부가 위대해야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 어떤 사람은 내가 못하는 게 많다고. 못하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왜 잘해야 되는데요. 잘하는데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요. 왜 잘해야 돼. 그 석가모니 보면 다른 거 다 팽개치고, 오직 생로병사 하나 해결한 거 그거에요. 그 유성출가를 했다고. 유성출가를 하는데,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어. 근데 유성출가가 이렇게 재미있어요. 이렇게 아주 통쾌해. 다른 사람 다 동의 안 하고 다 못 하게 해도 나는 하는 거에요. 이게 살아있고 깨어있는 정신이거든요.

 

        그리고 설산(雪山)에 들어갔어요. 설산에 갔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성은 나왔지만은, 태자의 의복이 그대로 있고, 태자의 머리가 그대로 있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머리를 깎아요. 그 머리를 깎는 거는 그 신분에 따르는 이익을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머리라는 게 신분을 말하는 거거든요. 또 옷을 벗는다는 거는 사회의 지위를 버린다는 거예요. 근데 이걸 어디서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나 보니까, 수행자가 옆에 있어요. 그래서 그 옷을 나하고 바꿔 입을 수 없느냐그러니까, “좋다. “그럼 당신은 수행자 옷이 없으면 뭘 입고 수행할 거냐?” “, 나는 수행자가 아니고, 수행자 옷을 입고 사냥을 하면 동물들이 안 도망가서, 내가 사냥 쉽게 하려고 이거 입은 거다.” 이래요. 여기에서 또 큰 문학적인, 철학적인 의미가 있어요. <옷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꿔 입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건 이제 하나도 없는 거예요. 머리 깎아서 신분도 버리고, 또 옷을 다 바꿔가지고 사회 지위도 버리고, 이제 진짜로 된 거지.

        그다음에는 이걸 누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다니게 되는 거죠. 이게 이제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인데, 설산이라는 게 저 히말라야 눈 덮인 게 아니에요. 거기 간 일이 없어요. 저 성자들이 많고, 사상가가 많고, 고행자가 많은 사람을 찾아다닌 거거든. 그래서 보니까 선정주의자도 있고, 고행주의자도 있고, 논리주의자도 있고, 많은 사람이 있어요. 다 만나봐도 생로병사가 해결이 안 돼요. 그 사람들도 지금까지 배운 거, 익힌 거 다 버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 한, 지금까지 뭘 익혔어도 다 버려버려요. 이것도 참 이게 희한해. 보통 자기 지식이 신통찮다고 느껴져도 그거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요. 쓸모없는 거. 쓸모없는 지식을 주장할수록 소리를 더 크게 높여. 큰 소리로 말하는 거 절대 들으면 안 돼요. 옛날에 어명을 전할 때 큰 소리로 전하는 법이 없어. ‘어명이요하면 그냥 온몸이 바르르 떨리지. 근데 내용 없는 말은 크게 떠들어도 하나도 겁도 안 나. 그래서 이제 , 이 문제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이제 마지막에 선정을 깊이 드는데, 고행과 선정을 함께 닦자. 이제 배우려야 배울 데도 없고, 구하려야 구할 데도 없으니까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얼마나 안 일어났는지, 팔상성도 그림에 보면 부처님 머리에 새가 앉아 있어요. 참 이게 피카소가 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절에 가니까 있더라니까. 피카소는. 발상이 이거 얼마나 이게 상징적인 발상인지, 머리에 새가 딱 앉아 있어요. 통도사에도 팔상전이 있는데 그 새가 앉아 있어. 하도 그게 좋아서 어느 책 내는데 그걸 표지로 쓴 적이 있어요.

 

        고행과 선정을 함께 하는데, 그 고행과 선정이라고 안 하고 팔상성도에서는 설산수도상 다음에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나무 밑에서 마구니를 항복시켰다. 이게 나오거든요. 깨달음이란 말도 없어요. 수하항마상, 그다음에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녹야원에 가서 법을 말씀하시고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구시나성(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게 팔상이거든요.

 

世間五欲燒衆生 猶如猛火焚乾草

세간오욕소중생 유여맹화분건초

亦如焰幻無有實 亦如泡沫不久停

역여염환무유실 역여포말불구정

四大五蘊假合成 筋骨相纏而暫有

사대오온가합성 근골상전이잠유

智者誰應貪著此 凡夫迷故生欲心

지자수응탐착차 범부미고생욕심

如是諸幻我已知 是故於中不貪著

여시제환아이지 시고어중불탐착

欲求畢竟自在樂 今當於此證菩提

욕구필경자재락 금당어차증보리

我已解脫於世間 如空中風難可繫

아이해탈어세간 여공중풍난가계

(方廣大莊嚴經 降魔品21)

              (방광대장엄경 항마품제21)

 

         근데 여기서 이제 오늘 주목하는 게, 핵심이 수하항마상이에요. 항마. 항복이라는 건 없앤단 말이에요. 항이라는 건 없앤다. 마라고 하는 게 있어요. . 마라는 게 뭐냐. 이 녀석이 나쁜 놈인데, 쓸데없는 거 알면서도 구하는 게 있어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요게 마거든.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네. 그게 마란 말이에요. 그거를 마주친 거예요. 안 되는 줄 나도 알아요, 이래요. 근데 나는 해요. 알면서 하는 경우에 마라고요. 그래서 뭐를 안 좋은 줄 아냐 하니까, 이제 선정에 딱 들고 보니까 이 몸이 무상하다 이건 알아. 근데 무상한데 버리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이 몸이 죽을 줄 알면서도 계속 몸에 매이는 게 그게 마거든요. 이 몸 죽을 줄 누가 몰라. 근데 몸이 막상 죽는다고 그러면 안 죽으려고 그래요. 이거 참 이게, 그래서 인간은 논리적이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은 논리거든요. 말 다 안 돼요. 자기만 안 되나. 다 안 돼요, 말이. 처음부터 말이 안 돼. 혼자만 말 안 되는 게 아니에요. 말은 논리란 말이에요. 뭐 며느리가 일 잘하면 기분이 좋은데, 딸이 시집에서 일 많이 하면 기분이 아주 나빠. 이게 말이 되냐고 이게요. 말 안돼. 그 말 안 되는데 좋은데 어쩔거여. 좋은데. 그렇잖아요. 사위가 처갓집에 와서 일을 잘하면 기분이 좋아. 근데 내 아들이 장인 장모한테 가서 일 많이 하면 아주 속이 뒤틀려서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와요. 이게 말이 되냐고. 그러니까 말 안 된다고 탓할 거 없어요. 다 말이 안 돼요. 이게 이제 마구니거든요. 마구니.

 

        그래서 이 몸이 색수상행식 오온인데, 오온은 무상하다. 근데 이 무상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느냐. 욕락(欲樂)을 구한다. 욕망의 즐거움을 구해요. 이게 이제 무상과 욕락이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게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무상함을 느끼면 이거를 접어두고 딴 길을 찾아야 될 건데, 이 무상함을 뒤덮기 위해서 욕락을, 욕망과 쾌락을 얻어가지고, 이 몸의 무상함을 잠시 마비시키고, 잠시 덮어두고, 잠시 외면하고 살다가, 이제 무상이 들이닥쳐서 완전히 명줄이 끊어지면 그때는 후회해요. 그게 인생의 통곡이에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생무상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울음이 나오는데 그걸 인생 통곡이라고 그래요. 근데 때는 늦었지.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이 있다. 그래서 욕락을 불교에서는 그냥 오욕이라고 그래요. 오욕. 재색식명수,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재물, 사랑, 먹는 거, 명예, 편안한 거, 이거를 구한단 말이여. 인생무상을 해결하는 방법이. 그래서 그 기록에 보면, 오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다 태우는데, 그거는 맹화(猛火)와 같다. 아주 맹렬하게 불타는 불길과 같다는 거예요, 오욕이. 재물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쾌락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그건 왜 그러냐. 이 인생무상의 공포가 있어서 그래요. 공포가 욕락을 부른다. 이 몸이, 오온신상이라고 하는 것은 포말(泡沫)과 같다. 물거품과 같다. 그래서 이 물거품이 차 타고 가다도 꺼질 수가 있고, 잠들더라도 꺼질 수가 있고, 배고파서 꺼질 수가 있고, 이게 어느 순간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를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걸, 그것이 생각이 나면 날수록 그 욕락을 더 맹렬하게 더 구해요. 그래서 오온 신상은, 오온의 몸 모습은 여포말이오, 물거품 포, 물거품 말, 포말과 같고, 탐애욕락은, 욕락을 탐애하는 것은 여맹화라, 사나운 불길과 같다.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凡夫迷故生欲心)하고, 범부는 그걸 알기는 아는데 깊이 알지 못한다고, 미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욕심을 내요. 그 욕락에 욕심을 내요. 근데 나중에는 욕락에 한계가 와. 인생무상을 덮을 수가 없어. 그래서 죽을 때 다 울면서 죽는 거예요. 인생 무상을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지금까지 돈 벌고 출세하고 했거든. 근데 해결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지자, 진짜 지혜로운 이는, 수응탐착차(智者誰應貪著此), 누가 그 무상을 덮기 위해서 욕락을 탐하고 집착하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부처님이 그런 마구니를 무상한 줄 알면서, 욕락에 집착하는 마구니를 다 항복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는 게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다는 거를 깊이 알았기 때문에 이게 된 거예요. 깊이 모르면 그게 슬쩍 덮혀버려요. 내가 나 죽을 때 무슨 소용이 있나, 그건 한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역시 돌아서면 욕심내요. 부처님이 어떻게 그 인간의 욕망을 항복시켰지? 이거는 인생의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목숨이라는 게 이게 물거품 같다. 이거를 깊이 보니까 욕망이 들러붙지를 못해요. 그래서 해결한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인생무상을 알고 욕락이 허망함을 알아서, 거기에 전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와도 공포심이 안 생겼어요.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을 다 해결했어요. 그걸 항마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해결하고 보니 무상과 욕락에 구하는 마음이 딱 사라지니까, 거기에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여기 대웅광명이 나타난 거예요. 여기 대웅, 크게 웅장한 광명.

 

        그래서 이런 거를 이제 가르칠 때 첫 번째는 조복(調伏)이라고, 조복. 조화시킬 조자, 항복시킬 복자. 조복. 인생이 무상한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계속 욕망과 쾌락을 쫓아서 달려나가는 그 망아지와 같은 마음을 잡아당겨서 복종시킨다는 거에요. 모든 근심 걱정과 인생 재앙은 너의 욕망에서 왔다. 시어머니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며느리한테서 온 게 아니야. 남편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아내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식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기 욕망 해결하려고 여러 사람 다 만나고, 안 태어나려고 하는 아들 낳으려고 온갖 고생 다 했거든. 그래서 아들 때문에 애먹는 거예요. 아들만 안 낳어도 애 훨씬 적게 먹었을 거예요. 딸 때문에 애먹지, 그 딸만 안 낳어도 훨씬 편안했을 텐데. 결혼만 안 했어도 얼마나 신선같이 살았을 텐데, 이 결혼을 해가지고. 왜 결혼했어요? 욕망 때문에 결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자가 가는 길이에요. 지혜로운 이가 가는 길이다. 이거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를 듣고 우리 이제 잠시라도 마음을 씻어내면 그걸로 족한 거지, 우리가 다 석가모니 되라고. 야단나요. 야단나. 안돼요, 안돼. 안돼. 안돼. 그래서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이라, 미했기 때문에, 알기는 아는데 깊이 모르고 껍데기로 알기 때문에, 계속 욕심을 내다가 통곡하면서 죽는 거예요. 부처님이 이렇게 처음에는 조화를 시키려고 하고, 그다음에 복종시키고, , , 조하고, 복을 하면 마음이 딱 복종이 되면 고요해져요. 고요할 적자를 써요. . 조 복 적. 고요 적자. 그 다음에 깨끗할 정자를 딱 써요. 마음이 깨끗해져요. 욕락을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요. 명이요. 첫 번째는 조, 두 번째는 복, 세 번째는 적, 네 번째는 정, 그 다음에는 밝아져, , 다섯 번째, 그 다음에 통해버려요. 이게 조복적정명통 이런 순서로 가는 거예요. 조복적정명통. 그래서 밝아져서 통하니까, 모든 게 욕심이 아니고 명심이다. 밝은 마음이다. 욕심과 명심이 있어요. 그걸 보리라고 그래요. 보리. 욕심을 번뇌라고 그러고, 이게 전부 이름만 달라요. 뭘 욕락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그래요. 그냥 밝은 마음을 명심이라고 한다고. 밝은 명자, 마음 심자. 그걸 깨달은 마음이다.

 

        근데 이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왜 명심 하나만 있으면 될 텐데, 욕심이 왜 있었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게 또 재밌어요. 멀쩡하게 낮에 일해도 저녁에 꿈꾸는 수가 있어요. 꿈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그 꿈이 오로지 나인 걸 알 수가 있어요. 그 욕심에서 벗어나면 욕심도 내 마음인 걸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이러니까 불교가 어려워. 실컷 높은 데 갔는데, 가고 나니까 가지 않았을 때와 다름이 없어요. 그래서 <큰 깨달음을 얻으니까, 내가 깨달음에서 얻은 바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 이건 깨달은 분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리고,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아니거든요. 그런 거죠.

 
       그래서 이 항마라는 거, 우리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데 석가모니는 어떻게 안 되는 일은 왜 안 할 수 있었을까. 안 되는 일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 할 수 있었던 것은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몸을 위해서 뭘 구해봤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깊이 알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록에 그런 말이 있어요. 욕구필경자재락(欲求畢竟自在樂)이 있는데, 이 욕락의 쾌락이 아니라, 필경자재락, 필경이라는 건 영원한 걸 말하거든요. 영원히 자재하는 즐거움이 따로 있는데, 그거는 보리다. 그래서 이 보리를 얻으려고 하고, 그 세속적 욕망을 무상한 줄 알아서, 두려움이 막 생기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공포가 생겨도, 이 마라는 거는 공포예요. 공포. 그래서 그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나.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범부거든. 그러니까 이 공포를 욕락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이게 석가모니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딱 얻고 나니까 자재락이 생겨요. 자재. 욕락이 아니라 자재락이다. 그 자재락이 딱 생기고 보니까, 이 밖으로 구하던 욕심하고 이 자재락하고를 비교해보니, 욕심은 개똥불, 개똥불 아시나 모르겠네. 몰라요? 이게 난 어렸을 때 많이 봤는데, 이게 무슨 벌레 같아, 벌레. 그런데 그 불빛이 있어요. 그걸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벌레인데. 주지스님 아셔, 개똥불? 반딧불. 충청도에서는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비교를 했어요. 자재락은 태양이고, 욕락은 반딧불이다. 그렇게 비교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뭘 위해서 살아야 하나. 왜냐면 기도하면 하는 거 있어요. 만수무강하고, 소원 성취하고, 자손 창성하고, 복덕구족하고. 자손 창성해봐야 그 녀석들 다 우리한테 도움도 안 돼요. 저들 살기 바빠. 부귀 영화하고. 부귀 영화 해봐야 근심 걱정 더 많아. 차라리 가난하고 마음 편한 게 낫다니까요. 그래서 축원 하는데 저거 구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런 생각 나요, 내가. 오래 살아봐야 그거 별거 아니여. 힘만 들어. 그런 건데 그게 다 욕락으로 해결하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알면서 못하는 게 범부니까 그거 어떻게 해요. 다 석가모니 되라고, 지금 당장 여기서 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도 이런 이야기라도 듣고 죽으면 내세에는 돼. 이제 점점 가까이 가는 거죠. 그게 방편이에요, 방편.

 

        그래서 오늘 이제 부처님 생애에서는 항마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부처님은 왜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건 인간에 대한 관찰이 깊어서 그랬다. 그 아이한테 뭐 돈 몇 푼 더 줘봐야 그건 욕락인데, 그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요. 인생무상의 통곡이 와. 무상 통곡을 놔두고 집 하나 사주고 뭐 하나 사주고 해봐야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안 되는데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짓을 하는 거예요. 말 되는 짓만 하는 게 흔한가 그게. 다 말 안 되는 짓을 하는데.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