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천일기도]천일기도 중 200일 기도 회향 법문 2019-10-30

- 기도는 함께 가는 길입니다. 곁을 지켜주는 마음이 모든 것을 이룹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오늘은 덕원스님의 200일 회향이라고 들었습니다. 천일기도 중에 200일은 첫 고개를 두 번째 넘는 거지요. 기도를 해보면 제일 어려운 때예요. 100일째가 제일 어렵지만, 이제 조금 기도 맛을 알면서도 어렵기 때문에 200일 째가 아주 어렵습니다. 이건 해 본 사람만 알아요. 이때에는 본인의 원력도, 다짐도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마도 오늘 진관사 신도분들께서 그런 마음을 모아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신 것 같습니다. 기도는, 그것도 천일기도는 앞으로 진관사의 천년의 역사를 준비하는 겁니다. 그동안 진관사의 천년의 역사가 많은 스님들의 기도와 회향, 원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의 기도는 지금의 자신을 닦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 보면 진관사의 미래 역사를 준비하는 것이고, 한국불교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참으로 의미 있는 불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덕원스님의 200일 회향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200일 회향은 본인이 원력을 세운 바도 있지만, 여기 있는 모든 분들 한 분 한분의 마음이 모아져서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800일 동안도 지금 마음과 변함없이 이뤄지기를 다짐하고 약속하는 의미에서, -이건 스스로의 약속이에요, 여기 계신 분들이 앞으로 천일 회향할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것. 기도 중에 제일 큰 힘은 곁을 지켜주는 겁니다. - 그런 약속의 의미로 박수 한 번 칠까요!

이제 법문 다 끝났습니다.(웃음) 그래서 제 소개를 좀 하면, 제 이름은 가섭이라고 합니다. 호는 중경이라고 하는데, 가섭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으셨죠? 가섭존자 때문에. 저도 덕원스님처럼 시봉이 하나 있어요. 거기도 천일기도 중인데, 그것도 북한산에서. 여기 올라가면 중흥사라고, 거기서 500일 기도를 넘겨서 600일 다 되갑니다. 그런데 상좌하나가 해인승가대학을 다닐 때 방학하면 절에 오거든요, 인사한다고. 2학년 쯤 와서 울상인 거예요.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니까, 망설이다가 스님, 이름을 좀 바꿔주시면 안 돼요?” 하는 거예요. “누구 이름을?” “스님 이름이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보통 은사스님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위자는 무슨 자요, 아래 자는 무슨 자라고 대답하거든요. 이름 댈 때마다 위자는 가자요, 아래 자는 섭입니다.” 한 거예요. 그러면 스님들이 네 스님은 가짜냐?”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맘이 상해 왔어요. “그래, 나 원래 가짜다. 가짜 아닌 게 어딨냐, 다 가짜지.” 하고 넘어갔어요. 6년 전에 제가 지금 포교원장 스님께 건당법호를 받았어요. 제가 중경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중자 경자예요. 중자예요, 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자도 아니에요. 그냥 중자예요. 이제 이름 안 잊어버리겠죠.

오늘 200일 회향이니까, 기도할 때 함께 곁을 지켜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함께 하는 게 중요한지 짧게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워낙 진관사는 역사가 있는 절이기도 하고, 절도 많지만, 제가 보기에는 절이라고 다 똑같은 절은 아니에요. 절중에서도 상품 절이 있고, 중품 절, 하품 절이 있어요. 진관사는 참 격조 있는 절이에요. 올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깔끔할 수가 없고, 스님들이 그렇게 정갈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기분 좋다,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사찰에는 스님들도 있지만, 그 사찰에서 함께 신행하는 신도들의 마음자세도 중요해요. 우리 마음속에는 각자의 고민과 갈등과 어려움이 있지만, 진관사에 딱 들어오는 순간 진관사와 하나로 어우러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색깔 내지 않고, 진관사의 스님들이 이끄는 대로, 이렇게 잘 어우러진 것 같아요.(박수) 진관사는 한 폭의 그림 같아요. 그 그림은 경전 속에 나오는 화합승가가 그대로 구현되는 거 같아서 참 기분 좋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잘 아시겠지만, 여러 가지 바람을 가지고,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출발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보다도, 출발은 각자 다르더라도 그 과정을 거치면서 다져지는 마음이 중요하거든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어요. 이 선물을 얼마큼 내가 많이 받아가는 가는, 출발은 다르지만- 우리가 진관사에 올 때 출발은 다 다르잖아요. 어떤 분은 근처에서 오신 분도 있고, 종로에서 오신 분도 있고- 올 때 마음은 진관사에 가야 되겠다, 부처님 뵈러 가야겠다, 스님 뵈러 가야겠다.’ 하고 오잖아요. 이 마음으로 이 법당에 어우러져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다 가져왔을 때 부처님 선물을 받아갈 수 있는 건데, 마음속에 집에서 속 썩던 걸 다 끌어안고 오면 부처님 선물을 담아갈 그릇이 없어요. 그래서 오면서 이런 것을 다 내려놔야 합니다. 내려놓으라고 길에 다리도 놓고 약간 언덕도 있어 숨도 차고 그러잖아요. 법당에 부처님 앞에 딱 앉았을 때는, 명심할 것은 첫 번째는 지혜로운 마음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자비로운 마음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절에 다니면서 지혜와 자비는 억수로 많이 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막상 지혜가 뭐냐, 자비가 뭐냐고 물어보면 애매해요. 뭘 알기는 알겠는데, 똑 부러지게 이야기를 못하겠어요. 이건 법랍이 많아도 마찬가지예요. 요금 스님들은 출가한 이후를 승랍이라고 하고, 법계를 받으면 법랍이라고 하는데, 신도들은 절에 오래 다닌 것을 절랍이라고 한대요. 제가 여기 보니까 절랍이 10년 이상, 많게는 40년 이상이 되는 거 같은데, 절랍이 오래 되어도 지혜가 뭐냐고 가족들에게 설명할 때 잘 안 돼요. 자기 것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게 되면 자연스럽게 됩니다. 잊고 있다가도 그 자리에 가면 되는 게 자기 게 된 거예요. 자전거를 배울 때 생각해 보세요. 처음 배울 때는 엉거주춤하지만 막상 배워놓고 자전거 탈 일이 없어요. 10년을 안 타다가, 탈 일이 생겨 타면 타져요. 그게 자기 거가 된 거예요.

지혜가 뭐냐. 지혜는 맑고 밝은 마음이에요. 지혜가 생겨서 뿔이라도 생기고, 미래가 보이는 게 아니에요. 덕원 스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게 특별한 능력이 생기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덕원스님이 지금 기도하는 이유는 뭐냐. 지금 마음을 맑고 밝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게 출발이에요. 내가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알려면 자리에 앉아 내 마음이 맑고 밝은가를 보면 알아요. 이건 0.5초도 안 걸려요. 이건 누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본인만 할 수 있어요. 이건 부처님도 못 해줘요. 나만 할 수 있어요. 법당에 딱 앉으면 숨을 깊게 쉬면서 내 마음이 밝은가, 맑은가’. 이게 출발점이에요. 마음이 밝지도 맑지도 않은데, 탁하고 어두운데, 어떠한 소원이 이루어지겠어요. 거기에 어떠한 원이 성취가 되겠습니까. 밝고 맑아야 명징하게 사물이 보이듯이, 맑고 밝아야 내가 하고자 하는 길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법당에 오시면 부처님께 삼배하고 나서 내 마음이 맑은지 밝은지 부터 살펴봐야합니다. 그리고 맑고 밝지 않다면 맑고 밝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 자리에 부처님의 지혜가 내려앉는 거예요. 그것도 알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드러내는 것뿐인데, 우리가 신앙적으로 표현하다보니까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내려앉는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의 자비인데, 자비는 뭐냐. 따뜻한 거예요. 온화한 거예요. 그래서 내 마음이 자비로운가 살피려면 앉아서 내 마음이 따뜻한가, 온화한가, 온순한가 봐야 해요. 마음이 차갑고 굳어있는데,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틀 수가 없어요. 이 자비라는 것은 경전에 보면 생명을 움트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고, 부처님을 자비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자비로서 다가오시고, 자비로서 이끌어주시고, 자비로서 우리를 제도해 주세요. 그래서 부처님 자체가 자비에요. 부처님=자비에요. 그 자비를 맑고 밝게 쓰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이 사문만 벗어나면 맑고 밝게 , 따뜻하고 온화하게, 온순하게 하기가 쉽지 않아요. 가깝게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 속을 썩이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말을 안 들어요.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내 뜻대로 안 돼요.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에요? 가족? 남편? 제일 가까운 사람은 나예요. 내가 제일 내 뜻대로 안 돼요. 내 뜻대로 되려면 지혜롭고 자비로워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그 힘을 지금까지 안 길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참회입니다. 참은 과거에 했었던 것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것이고, 회는 미래에 내가 지을 바 불선업을 짓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우는 것이 회에요. 참회는 무시이래로 모든 것을 참회하는 건데, 참회를 해야만 자기 자신이 맑아지는 것이고, 참회를 통해 자기 자신을 부처님 앞에 토해내야 해요. 그래야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참회라는 것은 반성하는 건데, 우리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갈등도 하고 대립도 하지만, 저는 그 중 가장 큰 문제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가지고 있는 것은 사회적 부, 권력, 사회적 지위도 마찬가지고, social position이 있는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는 말을 못하는 사회에요. 저는 이것이 가장 안타까워요.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정말 힘 있는 사람들이 잘못할 수 있지요, 그 때 잘못 했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돼요. 잘못한 걸 덮으려고 하니까 부정과 부패가 생기는 거예요. 그건 불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착하지 못한 업을 질 수 밖에 없는 한계에 살잖아요. 그걸 덮으려고 하지 마시고, 그걸 숨기려 하지마시고 그걸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게 참회에요. 참회진언 다 아시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참회진언을, 점심 먹으면서 참회진언을, 저녁에 잠들면서 참회진언을 해보세요.

참회라고 하면 내가 크게 잘못을 해서 뭔가 반성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참회진언의 뜻을 알면 이게 기가 막힙니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은 길상이란 뜻이잖아요. 못자는 부처님이란 뜻이에요. 모지는 보리, 지혜라는 뜻이에요. 사다야는 살타의 뜻이에요, 야는 복수, 여럿에게, ~들의 뜻입니다. 사바하는 이루어지다, 귀의하다의 뜻입니다. 길상의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귀의하다라는 뜻입니다. 참회진언을 해석해보면 내 마음에 길상의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가득가득 채워나가는 것이 참회진언입니다. 우리의 참회에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도 있지만, 진참회는 내 마음속에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채워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상에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보살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보살님들의 가피력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예요. 그러니까 참회진언을 해야 합니다. 참회진언을 하는 것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채워나간다는 자기 다짐이기 때문에, 그걸 통해서 자기가 성장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참회진언을 통해서 내 마음을 지혜롭게, 자비롭게 채워나가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곁을 지켜줘야겠습니다.

제가 오늘 오는데, 법문을 30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넘으면 신도들이 싫어해요. 2-3분이라도 일찍 끝내줘야 해요. 그래서 한 가지 얘기만 하고 오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스님이 신도들을 데리고 여행을 갔어요. 젊은 스님인데, 비가 추적추적 오는 거예요. 중국에는 성지가 워낙 많으니까 성지순례를 간 거예요. 제 얘긴 아니에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80세가 된 노보살님이 스님을 딱 만나는 순간 비가 오는데 그 비에 젖은 땅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하는 거예요. 젊은 스님이 너무 당황했어요. 말렸지만, 노보살님이 3배만 할 줄 알았는데 계속 하더래요. 가이드를 불러 절을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려달라고 했대요. 이 젊은 스님은 오도 가도 못했대요. 안 받고 가려니 신도들 눈이 있고. 우리도 생각하면 초파일 제등행렬 때 등을 들고 앞에서 가면 노보살님들이 그 아스팔트에서 절을 해요. 그때마다 울컥울컥해요. 그 절을 받기도 부끄러운 거예요. 한편으로는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스님도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가이드가 노보살님에게 절하지 마세요, 스님께서 불편해하십니다.”하니까, 그 노보살님이 합장을 하고 나는 스님에게 절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의 부처님께 절을 한 것입니다.”라고 하셨대요. 이 젊은 스님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 노보살님은 그 스님의 불성에 절을 한 거예요. 우리는 다 그걸 가지고 있잖아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보살님들이 절을 하시는 것 보면, 절을 받으면서도 저분이 나 가섭이 아니라, 내안의 가섭분에게 해야하는데.’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절을 할 때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절을 하면 좋겠고, 또 절을 받는 사람들도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거구나.’하고 좀 더 겸손하게, 좀 더 겸양하게 수행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진관사 신도분들 다 그러시겠지요?

앞으로 남은 800일 동안 지금 마음처럼 변함없이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요. 합장을 같이 해주시겠습니까? (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