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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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6월29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6-29
공양 올리는 이야기獻供行法⑤ - 味 공양의 진실 - 酥酪味(소락미) • 白米味(백미미) • 珍羞味(진수미) 안녕하십니까. 오늘 임인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공양 이야기 중에서 음식 공양, 음식 공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음식 공양을 이름으로 붙일 때 진수공양, 진수라는 건 음식 진, 음식 수, 진수(珍羞)라고 하거든요. 백미음식, 흰 쌀을 가지고 올리는 음식, 또 우유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서 올리는 공양인데, 우유로 만든 음식을 소락(酥酪)이라고도 하고, 가장 잘 만든 음식을 제호(醍醐)라고 하는데 이게 다 공양을 위한 음식들인데요.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맛 미자를 써서 미공양이라고 그래요. 맛 미자 미공양. 미공양은 소락미, 백미미, 진수미인데 왜 이 우유로 만들어서 올리는 공양이 제일 앞에 나오느냐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을 하시는 도중에 우유 공양을 드시고 체력을 회복해서 성불했어요. 그래서 이 우유 공양을 불교 공양 역사에서 최초 공양이라고 그래요, 최초. 불교의 최초 공양은 소락미 공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순타라고 하는 부처님 제자가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렸는데 그건 최후 공양이라, 최후,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이름이 소락미 공양, 우유로 만들어서 올리는 음식의 공양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이 공양이라는 게 뭐냐.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공양을 올리는 순간에 이 내 몸에 한정돼 있던 내가 온 법계로 퍼져나가는 공덕을 말해요. 공양을 한번 올리면 그 공양 인연으로 작은 내 몸이 온 우주에 전달이 된다. 그래서 공양 올릴 때 발원하기를,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이, 원하옵니다 이 공덕이,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하야, 일체에 다 전해져서,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이, 나와 중생이,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원하옵니다.” 이렇게 발원을 하거든요. 그게 공양을 올리는 순간에 나의 몸이 온 우주를 향해서 퍼져나가게 돼요. 그리고 공양을 올리는 순간에 지금 공양 올리는 몸은 사람 몸인데, 수수인신(蠅受人身)이나,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았으나, 심동여래(心同如來)라, 마음은 부처님과 똑같아진다. 그래서 인신심불(人身心佛)이다. 인신, 사람 몸으로 마음이 부처님과 같아지는 행위가 공양이다. 이렇게 법문을 해요. 그 공양 올리는 순간만은 내 몸은 사람인데 그 마음은 부처님이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음식이라고 하면 나물이라든지 국이라든지 탕이라든지 그냥 일상생활에서 먹는 걸 다 음식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이 음식 공양은 상단에는 안 올려요. 부처님 불단에는 국도 안 올리고 나물도 안 올리고 탕도 안 올리고 안 올려요. 그 안 올리는 이유가 있어요. 그럼 신중단하고 영단에만 올려요. 그래서 상단 마지는 향화 등촉 다과 이런데, 향과 꽃과 등과 차와 과일, 향화등다과 이 5가지가 상단에 올리는 공양인데 간이 하나도 안 들어갔어요. 맛이 안 들어갔어요. 그래서 사람이 싱거울 때는 상단마지라고 해요. 마지라는 게 공양물이라는 말이거든요. 상단 마지가 싱겁다고. 米供養 拜獻禪悅味 미공양 배헌선열미食味酥酪 造出天廚供 成道當初 牧女先來送 식미소락 조출천주공 성도당초 목녀선래송老母會將 托在金盤奉 獻上如來 大覺釋迦尊노모증장 탁재금반봉 헌상여래 대각석가존惟願 慈悲哀愍受此供유원 자비애민수차공 근데 이 맛이라는 거는 선열미(禪悅味)라고 해서 선정에 들어있는 맛을 뜻하는 건데 부처님의 선정은 보통 선정하고 달라요. 그래서 이 맛은 안 하고. 또 이 맛은 법을 깨우치는 게 아니라 허기를 달래는 거라 그래서 제일 배고픈 순서대로 공양을 올려요. 일체 중생에게 제일 먼저 공양을 올리고, 그다음에는 호법성신에게 공양을 올리고, 이제 마지막에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려요.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음식은 영단에 음식을 잘 차리는 거고, 그다음에 천상신장에게 공양하고 이제 제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그 유래를 보면, 이건 옛날 진언권공 의식문이나 지금 석문의범에 있는 음식 내용은 똑같은데, 그렇게 됐어요. 식미소락(食味酥酪)은, 음식으로 맛을 내는 우유 공양은, 조출천주공(造出天廚供)이라, 얼마나 그 음식 맛이 좋은지 하늘 주방에서 만들어낸 공양물이다. 주방이 인간 주방이 아니고 하늘 주방에서 만들어낸 음식물이다 이거죠. 근데 성도당초(成道當初)에, 부처님이 도를 이룰 그 처음에 목녀가 선래송(牧女先來送)하니, 그 소 치는 여인이 먼저 와서 공양물을 보내왔습니다. 근데 보통 ‘목녀가 공양을 올렸다’ 그 말만 있는데, 여기 의식문에는 ‘목녀의 노모가 있어서 준비했다’, 이렇게 나와요. -나 이것도 처음 봤네.- 그 안에 노모가 증장(老母會將), 일찍이, 탁재금반봉(托在金盤奉)이라, 금반에다가, 좋은 쟁반에다가 얹어서 받들었는데, 그것을 헌상여래 대각석가존(獻上如來 大覺釋迦尊)이로다, 여래 대각 석가존에게 헌상을 했다, 올렸다. 이런 데서 이제 미공양이 유래가 됐으니까 이런 맛으로 이루어지는 음식, 배고픔을 달래는 이런 음식이 일체중생 또 호법성신, 삼세여래에게 순서를 바꿔서 올린다. 그러니까 유원(惟願), 원하옵나니, 자비 애민(慈悲哀愍)으로 자비로서 애민이 여겨서, 수차공(受此供)하소서, 이 공양을 받으소서. 이렇게 작법을 하고 찬미(讚米)가 있는데, 여기서 이제 쌀 미자를 썼어요. 讚米 찬미解使衆生皆飽滿 많은 중생 다 포만케 하여해사중생개포만能令萬劫免飢虛 무궁세월 기허를 면하게 하도다.능령만겁면기허酥酡美味獻諸天 소락의 좋은 맛 제천에 헌공하고소타미미헌제천香積上方呈我佛 향적의 상품으로 여래께 올리도다.향적상방정아불소락이나 진수는 안 쓰고, 대표적으로 쌀 미자를 쓰는데, 이 미는 백미의 음식이나 진수의 음식이나 우유의 음식이나 똑같은 거예요. 근데 이 음식 공양을 왜 올리느냐. 이제 얘기를 하기를, 해사중생개포만 (解使衆生皆飽滿)하고, 여기서 해자는 해석할 해자인데, 이거를 자전에 찾아보면 많을 해자, 많다, 가지가지다, 이런 해자가 돼요. 그래서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온 중생으로 하여금, 개포만하고, 다 배부르게 하고, 배고픈 중생이 다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서 공양 올린다. 중생이 제일 먼저 나오죠. 왜냐하면 불보살은 허기가 없어요. 그러니까 허기를 느끼는 중생에게 맛의 공양을 제일 먼저 올린다, 이게 작법 의식의 순서예요. 그래서 능령만겁면기허(能令萬劫免飢虛)하소서. 능히 만겁이 지나가도록, 미래의 세월이 영원하도록, 기허, 배고프고 허전하고 이런 걸 면하게 하소서. 공양 한 번 딱 받고는 미래의 세월이 다 하도록 배고프고 허증 나는 고통이 영원히 없어지게 하십시오. 이런 거죠. 소타미미(酥酡美味)로, 소타, 타자도, 우유 음식 타자인데, 우유 음식 소, 우유로 만든 이 맛 좋은 음식으로 헌제천(獻諸天)하나이다. 모든 천상에게, 하늘 신장에게 헌공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맛 중에서 제일 좋은 거, 향적상방(香積上方)으로, 유마경에 보면 향적세계의 음식이 나오는데, 우주법계에서 제일 좋은 음식이 향적불 세계 음식이다. 근데 향적불 세계에서도 방자는 모 방자인데, 등급이라는 방자에요, 등급. 1등급, 2등급, 3등급 하는. 상방이라는 건 향적 세계에서도 가장 상등급의 음식으로 정아불(呈我佛)이니라, 나의 부처님께 정, 바칩니다. 이렇게 돼서 일체 중생에게 공양을 하고, 제천신장에게 공양을 하고, 일체 여래에게 공양을 하는데, 순서를 제일 먼저 중생에게 하고, 그다음에 호법신장에게 하고, 그다음에는 여래에게 한다. 이것이 불교의 공양 법도죠. 願我一身化多身 一一身出百千手 원아일신화다신 일일신출백천수各執香花燈茶果 供養十方諸佛陀각집향화등다과 공양시방제불타(學祖譯 眞言勸供)(학조역 진언권공) 그러면 이게 뭘 의미하느냐.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이 원하면 다 이루어지는 게 이게 묘법이거든요. 원하옵니다. 뭘 원하느냐. 아일신이 화다신하고(願我一身化多身), 나의 한 몸이 많은 몸으로 이루어지고, 나의 한 몸이 많은 몸으로 만들어지고, 또 그 몸 하나하나에서, 일일신에서 출백천수하야(一一身出百千手), 그 많은 몸이 한 몸에서 나왔는데 그 몸 하나하나에서 백 가지 천 가지 손이 나와서, 각집향화등다과(各執香花燈茶果)하야, 그 손 하나하나마다 향과 꽃과 등과 차와 과일을 다 받들어서, 공양시방제불타(供養十方諸佛陀)하나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이게 공양의 의미예요. 한 몸이 무량 몸이 되고, 그 무량 몸 중 하나하나 몸에서 백천수가 나오고, 백 가지, 천 가지 손이 나오고, 그 손 하나하나가 향화등다과미, 향공양, 화공양, 등공양, 다공양, 과공양, 미공양, 음식 맛의 공양을 받들어서 공양시방제불타(供養十方諸佛陀)하나이다, 시방제불타께 공양한다. 공양시방제달마, 공양시방제승가, 작법이 그렇게 돼 있어요. 불법승 삼보에게 이렇게 공양을 올린다. 이렇게 올리는 순간에 내 한 몸이 온 우주에 가득하고, 나는 지금 사람의 몸인데 공양 올리면 그 공덕으로 마음은 여래 마음이 된다. 인신이 불심이다. 사람은 몸은 사람인데 인신인데 마음은 여래다, 불심이다. 언제 부처님이 되냐. <공양 올리는 그 순간에는 내 마음이 부처님이다> 이거예요. 참 기가막혀요. 禪悅味 선열미阿羅漢 : 四禪八定 次第禪定 有餘涅槃 無諍三昧 아라한 : 사선팔정 차제선정 유여반야 무쟁삼매菩 薩 : 般若三昧 於相見空 觀色觀空 觀照法界 보 살 : 반야삼매 어상견공 관색관공 관조법계如 來 : 海印三昧 遍照法界 大寂光明 寂照常照여 래 : 해인삼매 변조법계 대적광명 적조상조 근데 이 맛을, 음식에는 맛이 있는데, 그 맛은 이 선정의 희열, 선열미(禪悅味)라고 선정의 희열미를 음식 공양의 맛에 비유해서 올린다. 이제 선정에 깊이 들었을 때 그 기쁨이 있는데 그게 선열이란 말이죠. 선정 희열, 기쁨, 그게 이 선정 희열 기쁨이 어떤 거냐. 아라한(阿羅漢)의 선정에는 무쟁삼매(無諍三昧)가 있고, 아라한의 삼매는 무쟁삼매, 없을 무, 다툴 쟁, 다툼이 없는 삼매에 드는 것이 아라한의 선열이다. 선정 희열이다 이거죠. 보살(菩薩)의 삼매는 반야삼매(般若三昧)에요. 여래(如來)의 삼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다.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이라, 능인, 능인은 부처님인데, 부처님 해인삼매 중이라. 무쟁삼매, 반야삼매, 해인삼매를 말하는 건데. 그럼 아라한 무쟁삼매는 뭐냐. 사선팔정 차제선정(四禪八定 次第禪定)인데, 아라한 삼매는 차재선이 있어요. 차재선. 초선, 이선, 삼선, 사선. 이것이 사선인데 딱 순서가 정해졌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색계선이라고 해요. 욕계 색계 무색계 3계 중에, 욕계는 무선이고, 욕계는 선이 없고, 삼매가 없단 말이에요. 왜냐. 욕망이 들끓으면 삼매가 없어요. 욕계무선이라. 색은 보이는 세계인데, 이 색계에 사선사정이 있어요. 첫 번째가 이생희락선(離生喜樂禪)인데, 색계 초선에 이제 들어가려면 욕계 욕망을 순간만이라도 다 버리면 그게 이욕이란 말이에요. 이욕. 욕망을 버렸을 때 기쁨이 확 일어나요. 그게 희락이에요. 그래서 이생희락선이라, 욕망을 버렸을 때 나타나는 즐거움이다. 기쁨이다. 이게 이생희락 색계초선이란 말이죠. 근데 이때에는, 초선에서는 선정에 들어 있는데도 각관(覺觀)이 있다. 각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귀에 들리는 것도 있고, 느낌과 관찰이 있단 말이죠. 이게 초선에 각관이 있고 또 희락이 있다. 즐거움을 느껴요. 이게 아주 초선에는 감각도 있고 기쁨도 있다. 처음에 입정을 해도 다 마찬가지에요. 이런 순서로 가. 이게 이생희락 색계초선이고. 그다음에 정생희락(定生喜樂)인데, 선정이 조금 깊어지면 그 조용한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데 그게 희락이에요. 기쁘고 즐겁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각관이 있어요. 보이고 들리는 게 다 있어. 이 선정 아주 초기에 일어나는 게 감각하고 기쁨이에요. 그 감각하고 기쁨이 있는 거는 선정의 아주 초기 현상이에요. 색계 제3선에 이제 올라가면 이희묘락(離喜妙樂)이라, 기쁨이 없어요. 즐거움을 여이어요. 2선에서는 이런 거 다 느끼는 거예요. 각관을 다 느끼고 희락을 느낀단 말이에요. 근데 제3선에 올라가면 희락을 못 느끼고요. 각관도 못 느끼고요. 그런데 온몸이 가득히 즐거워요. 그래서 이걸 이희묘락이라, 즐거움을 여윈 묘한 즐거움이다. 기쁨을 여윈 묘한 즐거움이다. 이게 색계 제3선이란 말이에요. 그게 제4선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냐. 즐거움이 없어요. 그리고 기쁨도 없어요. 이희불고불락(不苦不樂). 부각부관. 그런데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불고불락을 버릴 사자, 사라고 하는데,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평등한 마음, 평등한 마음, 그게 사념인데, 버릴 사자 사념인데, 불고불락 불락사념이란 말이죠. 그 불고불락심이 아주 청정해요. 여기서 이제 도를 깨닫는 거예요. 초선, 2선, 3선에서는 못 깨달아요. 4선에 올라가서 도를 깨닫는다. 즐거운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감각에 팔리지도 않고, 불고불락심이, 외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이 아주 청정하다. 그런 상태로 딱 보면 거기서 도를 깨닫게 되고, 석가모니도 처음에 성도할 때도 색계 제4선에서 성도를 했고, 열반하실 때도 이 색계 제4선에서 열반을 했다. 이렇게 초기 경전과 화엄경 십지품 제3지 발광지에서 자세히 가르치고 있어요. 그다음에 무색계 사정(無色界 四定)이 있는데, 선정이 아니고 사정인데, 무색계에 딱 들어가면 허공이 끝이 없는 걸 보게 되는 선정이에요, 허공이. 이걸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고 그래요. 허공이 끝이 없이 허공계에 들어가요. 또 허공계를 이해하는 인식계가 있는데 그 끝없는 인식계에 들어가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더 깊이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걸 느끼게 돼요, 이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고. 더 깊이 들어가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 이게 이제 무색계 사정이란 말이죠. 그래서 색계 사선정하고 무색계 사정을 합해서 사선 팔정(四禪八定)이라고 하는데, 무색계는 정뿐이니까, 그 색계는 선도 있고 정도 있으니까, 사선 팔정이라고 하죠. 이것은 전부 차제정(次第定)이에요. 초선, 중선, 3선, 4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근데 이제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수상멸정이 있어요. 수, 느낌, 상, 생각, 다 없어진 정이 있는데, 그걸 멸진정(滅盡定)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멸진정에 들으면 얼마나 오래 가는지 몰라요. 1겁도 가고 이겁도 간다고. 전생사를 얼마나 깊게 보는지 몰라요. 그런데 다시 나와 멸진정이 끝나려니까, 그래서 그걸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열반은 열반인데 완전히 생사가 끝난 열반이 아니라 유여, 남음이 있는 열반이다. 유여열반이라. 그런데 삼계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없어서 삼계 혹이, 삼계 미혹이 다한 결과이다. 근데 무쟁삼매(無諍三昧)인데, 무쟁삼매라는 게 뭐냐. 이 세간 물질을 두고 아라한은 다투지 않아요. 물질을 두고 다투지 않아요. 왜 그러냐. 아라한은 타심통(他心通)을 얻어서 물질을 가지고 다툼이 생기면 그 물질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물질을 다투는 사람의 마음을 봐요. 그래서 안 다퉈요. 그러니까 이게 아주 중요한데, 어른들이 뭐라고 야단치잖아요. 그런데 야단치는 소리를 들으면 안 돼요. 어른들이 이제 무슨 심보로 야단치는가. 그 심보를 들여다보면 싸울 일이 없어요. 다투는 사람의 마음을 보고 그 물질을 놓고 서로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무쟁삼매요, 유여열반이요, 무쟁삼매다. 4선 8정이 차제선정이다. 이것이 이제 아라한의 무쟁삼매요, 이것이 아라한 선열의 맛이다. 그런데 보살은 이 멸진정에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반야로 도피하는 거, 이게 반야바라밀이다. 그럼 반야는 뭐냐. 어상견공(於相見空)이라, 이 모든 일은 물질에서 공을 보는 게 반야에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오는 우리 몸인데 ,우리 몸이 딱 불생불멸임을 보는 게 반야다 이거지요. 우주 만법이 다 불생불멸인 걸 보는 게 반야에요. 이게 반야삼매예요. 그러니까 멸진정에 들 필요가 없어요. 색에서 공을 본다. 상에서 공을 본다. 이게 반야삼매다. 그래가지고 보살은 관색관공(觀色觀空)이라 중생들이 보는 색도 봐요. 중생들은 이거를 이런 이런 색으로 본다. 그 색만 보고 색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불생불멸 무생법이다, 생멸 없는 법이다, 이걸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색도 보고 공도 본다. 그래가지고 이걸 관조법계(觀照法界)라고 그래요. 관조, 온 법계를 이렇게 관색관공으로, 관조라는 말은 본다는 말인데, 본다. 그래서 보살삼매는 관조삼매라고 해요. 일체 색이 다 중생들이 보는 세계가 있지만 그 모두가 불생불멸 제법공상이다. 이게 반야삼매라고 해요. 그래서 이 관조삼매 반야삼매가 이게 보살 삼매에요. 그러니까 이런 삼매 음식을 중생에게 올리고 신장에게 올리고 여래에게 올린다 이거지요. 기가 막히다. 여래삼매는 뭐냐. 해인삼매(海印三昧)인데 해인은 비유란 말이죠. 바다가 넓고 깊은데 뭐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모든 그림자가 바다에 다 비춰. 그게 해인이에요. 그래서 여래는 보살처럼 뭐 일부러 보고 색을 보고 공을 보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턱 보면 변조법계라(遍照法界), 시방 법계를 다 비춘다. 그래가지고 대적광명이야. 항상 크고 큰 고요하고 고요한 광명이 적조상조(寂照常照)라, 이 적조가 이게 해인 삼매인데, 고요한 상태로 본다. 적이라는 건 고요하다 이 말이죠. 조라는 건 본단 말이고, 또 항상 본다. 그래서 여래는 입정, 출정이 없어요. 정에 들고 정에서 나오는 게 적조이기 때문에 그게 해인삼매. 적적히 보고 항상 본다. 이러한 삼매, 해인삼매, 반야삼매, 무쟁삼매, 이러한 삼매의 선열미로 중생에게 올리고, 신장에게 올리고, 여래에게 올리는 것이 맛의 음식으로 공양 올리는 뜻이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오늘 말씀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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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6월 25일 백중기도 입재 법문
가섭스님 2022-06-25
마하반야바라밀.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한 번도 안 맞춰봤는데 이 정도 맞으면 엄청난 겁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오늘은 하안거 입재하고나면 늘 기도 입재하게 되는 백중입재일입니다. 오늘 백중을 입재하면서, 늘 이때만 되면 우리 불자들은 백중을 입재하게 되는데, 백중은 말 그대로 불교 5대 명절이기도 하고, 다른 말로는 우란분재 이렇게 얘기를 하죠. 백중이라는 말은 100가지 음식을 마련해서 100명의 대중을 모셔서 정성을 다해서 부모님을, 선망한 조상들을 추모하는 걸 의미하기는 하죠. 그래서 100가지 음식과 100명의 대중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첫 번째로 인연을 갖춰야 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백중을 기도 입재 하면서 첫 번째로 준비해야 될 것이 <내 마음에 인연을 갖춰야 된다.> 근데 <그 인연을 어떻게 갖추느냐?> 라는 거잖아요. 마치 농번기는 한참 지나서 지금은 들녘들이 모도 많이 자라고, 밭에 곡식들도 많이 자라 있지만, 농사를 짓기 전에 이렇게 밭을 갈고 씨를 뿌리듯이, 그런 마음의 준비가 입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입재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죠. 마음의 결을 다듬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근데 그 마음의 결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에 내가 절에 오기 전에 마음과 달라야 되겠죠. 우리 마음의 결을 다듬는 첫 번째가 인연을 갖춰라. 어떤 인연을 갖출 거냐. 우리가 누구를 만나면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좋은 인연이라는 걸 내 마음에 갖춰놔야 그다음에 결과가 따라 오겠죠.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원인과 결과지만, 어떻게 보면 원인적인, 인과적인 것보다는 인연이라는 말은 어떤 씨앗을 우리의 마음속에 뿌릴 거냐가 더 무게 중심에 와 있죠. 여러분이 지금 이 백중을 입재하면서 마음에 어떤 씨앗을 뿌릴 거냐. 그 인연을 갖추는 거거든요. 어떤 씨앗을 뿌릴 겁니까. 백중천도재를 하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마음속에 발원들을 하죠. 그게 발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씨앗을 뿌리는 건데, 아마도 여기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씨앗이 다 다를 겁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백중을 통해서 조상을 추모하고 기리고 또 천도해서 내가 뭔가를 얻을 거라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첫 번째로 인연을 갖춰야 되는 것은, 이 백중 49일 동안의 첫 번째 인연은 뭐냐 그러면, <밖에서 구하지 마라>. 이게 제가 입재를 하면서 첫 번째 여러분에게 드리는 화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밖에서 구하지 마라. 우리는 밖에서 너무 많은 것을 구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그게 인지상정이죠. 그런데 밖에서 구하면 한 번도 만족한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밖에서 하는 건 항상 내 안에 들어오면 갈등 내지는 갈증, 이 두 가지로 됩니다. 갈등과 갈증. 그래서 이번 49일 동안에는 밖에서 구하는 게 아니라, 밖에 나가 있던 시선들을 끌어들여서 내 안에서 뭔가를 구해야 되겠다. 좀 전에 우리 주지스님께서 49일 동안에 뭐 염송하라고 그랬습니까? 지장보살. 금세 까먹었어요? 지장보살를 염송하라고 했죠. 지장보살 염송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밖에서 지장보살를 염송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지장보살를 염송해야 하는 거 이게 마음의 결이에요. 결의 변화입니다. 무심코 그냥 밖에서 우리가 기존 하던 대로 지장보살님을 염송하던 것들을 끌어와서 내 마음의 심중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지장정근을 해야 된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49일 동안의 첫 번째 인연을 갖추는 것은 밖에서 구하지 마라. 그 밖에서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망령된 인연을 버려야 된다, 놔야 한다, 망령된 인연을. 망령된 인연이라는 것은 허망한 인연입니다. 허망한 인연을 내가 놓지 않으면 밖에서 자꾸 구하게 돼요. 지금 이 말씀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지눌스님께서 쓰신 수심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생이 허덕거리는 것은 밖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 다 모든 보물이 들어가 있는데, 이미 갖춰져 있는데, 그거를 다른 말로 법장이라 하고 다른 말로 연화장이라고 하죠. 근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 자꾸 찾다 보니까, 그 구한 것이 나에게 갈증이 되고, 구한 것이 나에게 나의 삶 속에 갈등으로 점철돼 간다. 그래서 밖에서 구하지 마라. 두 번째로는, 한여름에, 좀 있으면 여름 휴가 가면 해수욕들 가시죠. 해수욕. 바닷가에 가서 가족들하고. 진관사 쭉 오다 보니까 북한산 자락에 물놀이 하는 데가 있대요. 보니까 거기 이미 차가 만석이야. 차가 엄청나게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물놀이를 가면 우리는, 물놀이가 핵심이 아니라, 물놀이를 가면, 여름 되면 우리는 선글라스를 끼죠. 선글라스 다 있으시죠. 선글라스를 왜 껴요. 눈부시니까. 물론 패션으로 끼시는 분도 있어요. 보니까 패션이 아니라 자외선을 차단해서 눈을 보호하기 위한 거잖아요. 근데 그 선글라스에 따라서 보이는 게 어떤 빨간 선글라스를 끼면 빨갛게 보일 거고, 또 약간 누런 선글라스면 누렇게 보이겠죠. 그 선글라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 눈을 보호하는 것도 있지만, 세상이 그 선글라스에 의해서 다르게 보여지는 거예요. 그래서 인연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 자외선으로 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끼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그런 결을 다듬는 것이 그런 역할을 하는 거다라는 겁니다. 아주 쉬운 일이에요. 마음 결을 다듬는 거. 그래서 순간순간에 밖에 향해 있던 마음들을 자꾸 내 안으로 끌어들이면 그것 자체가 이 백중 49일 동안에 가장 큰 준비이면서도 꼭 필요한 그러한 인연을 갖추는 거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절에 살 때 절에 항상 틀어놓는, 언젠가부터인지 몰라도 아주 어렸을 때는 아닌 것 같고 초등학교 그 당시에는 국민학교였죠. 국민학교 다닐 때에 절에서 틀어놨던 염불이 하나 있어요. 근데 그 염불이 너무 좋아서 어렸을 때 들었는데 그 스님의 염불 소리도 참 구성지고 좋았지만 그 내용이 너무너무 가슴에 와닿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면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그때 한글로, 그전에는 다 한문으로 이런 경전을 읽고 그랬는데, 유일하게 한글로 염불한 염송, 염불이었어요. 그게 뭐냐면 부모은중경입니다. 부모은중경. 비구니 원정이라는 스님이 음반을 내신 건데, 옛날에는 테이프였어요. 테이프를 사와가지고 법당에 트는데 이게 옛날에 자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니까 돌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법당 가서 테이프를 계속 돌리게 하는 소임이 저였어요. 염불이 안 끊어지게, 그래서 그 염불이 어떤 거냐. 한번 들려드릴까요. .....서 되의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야 하므로 뼈가 검고 또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을 듣자 가슴을 오리는 듯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오면 어머니의 은혜를 갚사오리까?" ....... 음성이 좋으시죠. 이걸 계속 들을까요 그냥, 법문 하지 말고. 근데 어렸을 때도 이걸 들으면, 아주 철이 없을 때인데도 어머니의 은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되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중이라고 하는 것이 선망 부모의 은혜를 갚는 건데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거죠. 부모은중경은 한 번씩은 읽어보셨겠지만, 부처님하고 아난하고 나누는 대화란 말이죠. 어느 날 부처님하고 아난하고 길을 가다가 뼈 무덤을 보고 부처님이 예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예를 하니까 아난이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삼계의 대도사이시고 사생의 자부신데 어떻게 뼈 무덤에다가 예를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 뼈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아난이 “살아 생전에는 모습이 있으니까 남자인지 여자인 줄 아는데 뼈만 보고 어떻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이 뼈가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는 검고도 가벼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 이유가 뭐냐. 그것 때문에 쭉 얘기를 하는 거예요. 조금 전에 경전에 나왔듯이 “아기를 낳을 때 서말 서되나 되는 피를 흘리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양육할 때 젖을 먹이면서 본인의 몸에 있는 진액을 다 아이에게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나이 80이 되더라도 60대 아들이 소식이 없으면 노심초사하는 게 부모님의 마음이다.”까지 쭉 얘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부모님이 은혜라고 하는 건 그만큼 지중하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이제 그런 지중함을 살아 생전에 갚으면 좋은데 살아 생전 못 갚고 꼭 인연이 다 하고 나서 그런 마음들이 돌아가죠. 그게 왜 그럴까요? 알 수가 없어요. 꼭 지나고 나면 후회하죠. 왜 그러냐 그러면, 우리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미혹. 미혹하기 때문에 그런 인연들을 그때그때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하게 된다. 오늘 이 백중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런 미혹한 마음들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은혜를 아주 진중하게 되뇌이는 그런 49일을 준비해야 된다라는 겁니다. 부모은중경에 보면 부모의 은혜 10가지가 나오잖아요. 10가지가. 내가 오늘 10가지를 적어왔는데 이걸 한번 잘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첫 번째로는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아기를 잉태하여 품어 주고 지켜주는 은혜. 여기는 주석을 달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다 뜻을 알잖아요. 10가지만 새겨보자라는 거예요, 마음속에. 두 번째로는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감내해 주신 은혜. 셋째는 아이를 낳으시고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 넷째는 입에 쓴 것 삼키시고 단 것은 먹이시는 은혜. 다섯째는 마른 자리 내어주고 젖은 자리 뉘시는 은혜. 여섯째는 젖을 먹여 키워주신 은혜. 일곱째는 더러운 것 깨끗하게 씻어주신 은혜. 여덟째는 먼 길 가는 자식을 걱정하는 은혜. 아홉째는 자식 위해 궂은 일도 자청하신 은혜. 열 번째 끝까지 사랑하고 염려하는 은혜. 이렇게 10가지인데, 이 10가지 마음으로 우리는 자식을 키우고, 또 우리 자식들은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죠. 근데 이제 문제는 이러한 마음들을 서로 간에 알면 좋은데 자식은 잘 몰라요, 그 마음을. 근데 본인이 이제 부모가 돼 보면 그걸 좀 알죠. 근데 이미 그때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돌이키기가 어렵죠. 우리가 그런 마음들을 자식에게 잘 물려주려면 우리 스스로가 이런 마음들을 잘 잊지 말고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막상 일상에 돌아가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마음을 안으로 들여야 되는데, 마음을 바깥으로 자꾸 돌리다 보니까 어떤 경계나 아니면 현상에 빠져서 화를 내기도 하고 험한 말을 하기도 하고 상처되는 말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지나고 보면 내가 부모에게 정말 잘해야 할 것 중에서 맛있는 걸 사드리고 좋은 옷을 해 드리고 이런 것보다도, 공통적으로 많은 분들이 하는 얘기가 뭐냐면 따뜻한 말 한마디 해드릴 걸, 따뜻한 소식 한 번 전해드릴 걸,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돈이 드는 게 아니에요. 물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거는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거를 못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 마음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 때문에, 바뀌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백중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다른 의미로 우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 우란분이라고 하는 게 목련 존자가 자기 어머니를 보니까 이생에 인연을 잘못 맺어서 어떤 과보를 갖고 있냐면 거꾸로 매달려 있는 인연을 과보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란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듭니까. 생각만 해도 힘들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 우리 몸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도 뒤바뀐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 뒤바뀐 생각을 바로 세우는 것, 바로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 백중 49일 동안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이고요. 뒤바뀐 생각이 뭐예요. 몽상이잖아요. 몽상, 전도몽상이라 그러잖아요. 뒤바뀐 생각 그 뒤바뀐 생각을 접어야 되는데, 그 뒤바뀐 생각을 하는 게 바로 미혹, 아까 말씀드린 미혹하다. 근데 중생 그러면 따라오는 게 미혹이란 말이에요. 부처님 그러면 지혜 광명이고, 중생 그러면 미혹인데, 그 미혹함이라고 하는 건 두 가지 줄기로 우리가 거기에 빠져듭니다. 그 미혹함 첫 번째가 뭐냐. 이 몸에 대한 잘못된 뒤바뀐 생각이에요. 이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지는 이 몸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경계에 대한 미혹인데, 이 경계라고 하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마음 경계예요. 어떤 마음에 어떻게 빠져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혹이라는 게 두 가지죠. 몸에 대한 미혹과 경계에 대한 미혹. 이거를 이제 바꾸는 건데 어떻게 바꾸느냐. 몸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몸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몸은 무상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무상하다. 목련 존자 어머님이 그 거꾸로 매달린 과보를 받는 것은 첫 번째는 몸이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상하다는 건 뭐야. 항상함이 없다는 거잖아요. 항상함이 없다. 여러분 지금까지 오시면서 몸이 항상 했던 거예요? 계속 변하고 있잖아요. 경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 무상하다는 것 중에 무상하다고 그래서 그냥 기대를 져버리면, 그걸 기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이게 아이러니한 겁니다. 무상이 몸을 기대야지 참을 얻을 수가 있어요. 그 무상함 속에 참이 있는 거예요. 무상이라는 것은 가화합된 거지만 그 가화합된 속에서 의지하고 뭔가 마음을 결을 바꾸고, 마음을 변화시켜야지만이 참으로 갈 수가 있어요. 근데 이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다 덧없다 놔버리면 참으로 가는 진여문 자체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까지 못 가더라도, 이 몸이 무상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순간순간 계속 까먹어요. 까먹어서 이 몸에 집착을 하죠. 이 몸의 느낌에 집착을 하고, 이 몸의 편안함에 집착을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 감각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고, 느낌적인 것이 편하지 않고 그러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그렇단 말이에요.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이 커지면 불행해지고. 아주 단순한 겁니다. 단순한 이치인데 그 경로를 잘 이해하면 체득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 순간순간에 마음의 경계에 빠지고 몸의 경계에 빠지니까 그 한 단계도 가지 못하는 거예요. 몸이 허망한 것 맞아요. 이 몸이. 그런데 이 몸을 의지하지 않고는 부처님전에 예경할 수가 없잖아요. 허망하다고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이 허망한 몸을 굴려서, 움직여서 내가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고 자비한 마음으로 바꾸는 거다. 근데 마음의 근본은 항상 “아. 이 몸은 항상 무상한 거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지만이 뒤바뀐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아시겠죠. 나중에 아난존자가 묻습니다, 부처님에게. “부모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됩니까?” 부모은중경에 아주 명징하게 나와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갚는 여섯 가지 방법이 명징하게 나와 있어요. 그 부모의 은혜를 갚는 여섯 가지 방법은 축약된 본 말고, 핸드폰으로 이렇게 부모은중경을 찾으면 원문도 나오고 해석된 것도 나오고 다 나와요. 그거를 읽어보시면 아주 명확하게 해설된 거 있으니까 거기서 부모의 은혜를 갚는 여섯 가지 방법을 꼭 숙지하시고, 다음 백중 회향 전에 와가지고, 올 수 있는 인연이 또 된다면 꼭 물어볼 거예요. 꼭 물어볼 거니까 숙제니까 그렇게 알아주시고. 백종 입재하면서 오늘 말씀드린 두 가지, 뭐예요? 하나는 밖에서 구하지 마라. 밖에서 구하지 마라. 두 번째로는 마음을 바로 하자. 뒤바뀐 마음을 바로 하자. 이 두 가지가 오늘 입재 법문의 핵심이니까, 49일 동안 이 두 가지를 명심해서 49일 동안에 늘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요즘에 추앙이라는 말을 많이 쓰대요.- 부모님을 추모하고 추앙해서 부처님 가피가 늘 함께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축원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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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10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6-10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生身太空塵 태어난 몸은 허공의 티끌 한 점이고 생신태공진이요識心夢念想 생각은 꿈꾸는 몽상과 다름없네! 식심몽념상하여浮雲自去來 뜬구름이 덧없이 오고 가듯 부운이 자거래하니身識如是相 몸과 생각의 모습도 그러하네!신식이 여시상이로다나무아미타불 돌아가신 분을 극락세계로 모시는 것이 재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재는 어떻게 올리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몸, 움직이는 생각이 있고, 석가모니가 깨달은 몸, 석가모니가 이룩한 지혜, 그게 이제 극락세계는 깨달은 몸이 도달한 곳이고 이룩한 지혜로 머무는 곳인데요. 지금 한문으로 읽은 내용이 생신(生身)은, 날 생자, 몸 신자, 이 세상에 태어난 몸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청정법신, 아무 데도 물들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변함이 없는, 물듦이 없고 변함이 없는 그 몸을 깨달았는데 그걸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법 법자, 몸 신자. 이 세상에 태어난 몸을 인연소생신, 인연으로 태어났다. 이 청정법신에다가 인연소생 세상에 태어난 몸을 비교를 해보니까, 이 태어난 몸은 태공진(太空塵)이라, 저 태허공에, 넓고 넓은 허공에 한 점의 티끌과 같다. 청정법신은 끝없는 허공과 같다. 이런 몸이거든요. 평생을 세상에서 움직인 생각은 그 청정법신을 깨달아서 이룩한 지혜, 생신이 법신이 되고, 생각이 지혜가 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 지혜는 보광명지(普光明智), 넓을 보, 빛 광, 밝을 명, 지혜 지, 넓게 빛나고 밝은 지혜, 보광명지. 그 보광명지에다가 알 식, 마음 심(識心), 생각하는 마음을 비교해 보니까 몽념상(夢念想)이라. 꿈의 꿈꾸는 생각과 같다. 생각은 꿈과 같고, 우리 태어난 몸은 허공에 한점 티끌과 같다. 그래서 그 모습이 부운이 자거래(浮雲自去來)하니, 구름이 스스로 스스로 가니 이 태어난 몸과 생각하는 생각이 마치 그와 같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이렇게 뜬구름과 같고, 허공에 티끌과 같고, 꿈꾸는 생각과 같은 그런 걸로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깨달은 청정법신, 부처님이 이룩한 보광명지 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런 얘기죠. 一切凡夫 妄想執著 일체범부는 망상집착으로住於世間 生滅相續 주어세간하야 생멸이 상속하고三世諸佛 般若觀照 삼세제불은 반야관조到於彼岸 眞如法界 도어피안하니 진여법계요淸淨法界 常住法界 청정법계요 상주법계이니 壽光無量 福德具足 수광이 무량하고 복덕이 구족하며神通自在 極樂世界신통이 자재하니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그럼 뭘 깨달았나.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게 불가사이하고, 생각할수록 무량공덕이라, 한량없는 공덕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있고, 도를 많이 닦아서 얻은 마음이 있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그 완전한 깨달음을 대각이라고 하는데, 큰 대자, 깨달음, 그 대각을 얻은 마음이 있고, 세상살이에 골몰하는 마음이 있고, 인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요, 이 마음이라는 게. 그래서 세상살이에 골몰하는 마음을 범부심이라 이러고, 도를 닦아가는 마음을 보살심이라 하고, 대각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을 두 마디로 설명하면 자성청정심, 신통광명심. 부처님은 그 마음의 근본 바탕, 자성, 그 근본 바탕에 티끌 한 점도 붓지 않은 청정한 모습으로 왔다. 그래서 이게 자성청정심이고. 그 자성청정심을 얻으면 어떻게 되냐. 거기서 한량없는 신통과 광명이 나온다. 이걸 신통광명심이라고 해요. 부처님의 마음은 자성청정심, 신통광명심이고, 도를 닦아가는 보살의 마음은 보살심, 범부심, 제불심. 보살의 마음은 반야관조(般若觀照), 반야는 지혜인데, 지혜가 하는 일은 볼 관자, 비출 조자, 보는 거예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사람을 보고, 생각이 일어나는 걸 보고, 생각이 사라지는 걸 다 봐요. 이걸 반야관조심이라고 해요. 반야관조. 그럼 범부의 마음은 뭐냐. 보는 대로 취하고 집착을 해요. 보는 대로 얻으려고 하고, 취하려고 하고,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이걸 망상집착심이라고 해요. 허망한 생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일체범부는 망상집착으로(一切凡夫 妄想執著), 주어세간(住於世間)하니,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낳다 죽었다 하는 공간이에요. 범부가 머무는 것은 낳다 죽었다하는 세간 공간에 머문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생멸이 상속이라(生滅相續).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된다 이 말이죠. 생멸 상속. 근데 삼세제불은(三世諸佛) 보살행을 통해서 반야를 관조(般若觀照)하니, 망상집착을 하는 게 아니라 반야로 관조를 하니까 모든 지 딱 보면 취할 게 하나도 없어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걸 청정법계(淸淨法界)라. 망상 집착을 하면 생로병사 생멸상속인데, 반야로 관조를 하면 청정법계다. 뭐든지 딱 보면 두려울 게 없어요. 색즉시공이에요. 딱 보니 죽음이 없는데요. 딱 보면 태어나는 게 없어요. 그런데 망상 집착을 하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끝없이 생멸이 상속을 해요. 보면 없다. 그러면 없는 것 때문에 어떡하냐. 없는 것도 없는 거예요. 없는 거를 자세히 보면 없는 게 없어요. 있는 걸 자세히 보면 있는 게 없어요. 이게 반야관조에요. 그래서 반야관조하면 모든 것에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데, 망상집착하면 전부 생겼다 사라지고 탐나고 두렵고 그런 거예요. 취한 거 버리고. 딱 보면 취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 없고. 그래서 그걸 세간이라고 하지 않고 피안(彼岸)이라고, 건너 공간이다. 피안. 보면 피안인데 집착하면 생사에요. 뭐든지 딱 보면 무서울 거 없어요. 탐 날 거 없어요. 집착하면 무섭고 탐나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이 지혜로 봤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봤기 때문에 어떻게 되냐. 도어피안(到於彼岸)이라, 피안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그 피안이 어떤 세계인가. 진여법계(眞如法界)다, 참 그대로 법의 세계다. 진여법계. 피안이다. 청정법계(淸淨法界)다. 뭐가 변하고 물들고 그게 아니라 그대로 청정한 법계다. 상주법계(常住法界)다. 항상 상자, 머물 주자. 항상 하는 상주. 그리고 거기는 수광이 무량하고(壽光無量),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고. 청정법계는 수명이 없어요. 백 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천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만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저 허공과 같이 무량해요, 수명이. 수명이 무량하고. 또 복덕이 구족하고(福德具足), 좋은 게 복덕인데 좋은 게 한량없이 많아요. 그리고 신통이 자재하고(神通自在), 신통이 자재라는 것은 보는 지혜로 딱 보면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가고 싶은 데 다 가는 게 그게 신통이에요. 비행기 타고 화성이나 달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지혜로 간단 말이죠. 지혜로 딱 보면 이곳을 움직이지 않고 저곳에 가. 그런 것을 신통이라고 해요. 그래서 신통이 자재하니 그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한다. 여기까지 아까 읽은 것이거든요. 非識所能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니고 비식소능식이며 亦非心境界 또한 마음의 대상도 아니다. 역비심경계이니其性本淸淨 그 신령한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기성이 본청정하야開示諸群生 중생에게 길을 열어 깨우친다. 개시제군생이로다(화엄경, 보살문명품)나무아미타불 이 마음이라는 건 불가사이하다. 왜 불가사이하냐. 그냥 망상집착을 가지고 탐내고 화내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해도 그 근심 걱정하는 속에 자성청정심이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래서 불가사의하다는 거예요. 아주 희한해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금방 화냈다가 금방 또 웃을 수가 있는 거예요. 화내는 속에도 그 본래 깨끗한 마음이 그냥 들어있어요. 즐거워하는 속에도 본래 깨끗한 마음이 그냥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수연심(隨緣心) 불변심, 수연이라는 건 따를 수 자, 인연 연자, 인연을 따르는 마음이 있다. 인연 따르는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오면 사람 보고, 하늘이 열리면 하늘 보고, 어두울 때는 어두운 거 보고, 밝을 때는 밝은 거 보고 다 보는 거예요. 그걸 수연심이라고 하거든요. 인연 따른 마음, 근데 아무리 어두운 걸 봐도 마음 청정심이 어두워지질 않아요. 아무리 밝은 걸 봐도 마음 청정심이 밝아지지 않아요. 사람을 봐도 마음 그 청정심이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나무를 봐도 그 청정심이 나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걸 불변심이라고 해요. 하나도 변함이 없는 상태로 모든 거를 다 보고 모든 걸 다 판단하니까 수연심 불변심이라고 한다. 이 사바세계를 세간법이라고 하는데, 이 세간법에 근심걱정을 하다가도 극락세계에 딱 가면 극락세계 그대로 담아요. 마음이 사바세계 된 게 아니고 세간법이 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해인삼매라는 말로 이제 멋지게 가르쳤는데, 해인이라는 건 바다 해자, 도장 인자인데, 바다가 있고 거기 비춰진 그림자가 있단 말이에요. 그 그림자를 하얀 종이에 도장 찍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비유로 도장 인자를 쓰는데, 바다라는 건 물이에요, 해수. 바닷물은 그냥 바닷물일 뿐이야. 그런데 이 바닷물에 비추어지는 그림자는 아주 다양하다. 나무도 비치고 사람도 비치고 구름도 비치고 해도 비치고 달도 비치고 어두운 것도 비치고, 밝은 것도 비치고. 이걸 해인이라고 해요. 아무리 해인의 모습이 다종다양해도 해수는 항상 바닷물인 거예요. 그냥. 밤중이 되었다고 바닷물이 밤중이 된 게 아니고요, 햇빛이 올라왔다고 해도 바닷물이 햇빛 된 게 아니고 그냥 바닷물 그대로 변함이 없는 상태로 온갖 것이 나타나는 것마다 다 비친다. 이걸 불변수연이라, 이것이 해인삼매다. 이렇게 가르쳐요. 이것도 신통인 게 어째서 신통이냐. 바다에 높은 산이 비췄다고 해서 바닷물이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산 정상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대로 바닷속을 보니 높은 산이 바닷물 속에 환히 비춘단 말이에요. 이게 신통이에요. 산이 제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바닷속에 비치고 물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않고 산 그림자가 바닷속에 다 비친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아무리 세간 속에서 근심 걱정하고 애를 태우고 살았어도 극락세계에 가면 이 세간법은 없고 그대로 극락세계에 그냥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청정법신을 깨닫고, 보광명지를 성취하고 극락세계에 노니는데, 일체 모든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서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하는 사람들도 극락세계로 오면 그날로 극락세계에서 복을 받는 거지, 산 보고 왔다고 그래서 마음이 산 된 게 아니고, 싸우고 갔다고 마음이 싸우는 게 아니다 이거죠. 그런데 이것은 역비심경계(亦非心境界)라, 자성청정심 보광명지는 마음이 저 밖에서 알아내고 밖에 가서 찾는 게 아니다. 있는 장소가 없어요. 바닷물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처럼. 기성이 본천정(其性本淸淨)하야, 마음 자성청정이 본래로 청정해서, 개시제군생(開示諸群生)이라, 여러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 청정의 길, 복덕의 길을 열어서 인도한다. 그러니까 극락세계를 인도하는 삼세제불의 인도받을 수 있는 자성심을 일체범부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반야관조, 반야로 딱 보는 행위를 통해서 갔는데, 오늘의 영가는 반야관조행을 닦을 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간다 이거에요. 그 인도가 반야용선이라고 그래요. 반야의 배. 용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 올라가듯이 반야라는 보이지 않는데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반야용선을 타고 간다. 믿으면 바로 가는데 안 믿으면 갈 수 없어요. 못 가. 아무리 이렇게 법문을 해도 아무도 못 가는 거예요. 그게 또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가라고 법문하지 못 가라고 법문 하는 거 아닌데 아무나 갈 수 없는 거에요. 그 마음은 불가사이 한 거지요. 이렇게 공덕을 드리고, 아들 딸 드리고 가족들이 손주 손녀가 인연을 짓는데 안 믿을 이는 없죠. 안 믿을 이는 없어요. 그렇게 잘 믿으시고, 반야용선의 인도를 잘 받아서 극락세계 왕생하도록 하는 게 재를 지내는 뜻입니다.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今日當靈 直往樂土 금일영가 직왕낙토하야無盡福樂 無盡受用무진복락을 무진수용하십시오나무아미타불 오늘 영가께서는 바로 낙토에 가서, 직왕낙토(直往樂土)라, 낙토는 극락세계를 즐거운 락자, 흑 토자, 낙토라고 그래요. 극락세계를 줄이면 낙토. 바로 극락세계 낙토에 가셔서 무진복락(無盡福樂)을, 없을 무, 다할 진, 다함없는 끝없는 복과 즐거움을 무진수용(無盡受用)하십시오. 끝없이 끝없이 수용은, 받을 수자, 쓸 용자, 받는다는 말인데, 끝없이 끝없이 받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 법문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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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6월 5일 일요가족법회 법문
주지 법해스님 2022-06-05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절기 적으로도 더울 때가 됐어요. 다들 건강을 조심하고 내 몸을 살피셔야 해요. 특히 음식을 조심스럽게 드셔야 돼요. 이열치열이거든요. 우리 위장이 제일 먼저 음식을 받아들이는데, 위장은 화생토입니다. 위장은 따뜻한 기운이 들어와야지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찬물을 자꾸 마시게 되면 위가 위축이 되어서 다른 힘든 나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신심(信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신심입니다. 신심은 곧 공덕의 어머니가 됩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내가 짓고 내가 한 행동인데, 선한 행위가 쌓여서 미래를 좌우하는 게 공덕이에요. 불교에서 말하지 않아도, 사회생활에서 신뢰라는 건 너무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않고, 부부가 서로를 믿지 않고, 학생이 스승을 믿지 않고, 친구가 친구를 믿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괴로움이에요. 우리 불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 믿을 신자, 마음 심자, 믿는 마음. 딱 마음을 믿게 되면 결정심이라 그래요. 내가 일단 그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믿으면 하나가 되는 거, 하나가 되어서 결정심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이럴까 저럴까가 아니라 결정심이 생기기 때문에 신심을 다른 말로 결정심이다, 또는 일심이다, 한마음이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면 그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라는 나의 꿈이 발견이 돼요. 그것을 우리는 원력(願力)이라 그러죠. 원력, 내가 하고자 하는 원할 원자, 힘 력자, 꿈을 발견할 수 있어요. 믿음이 생기면 내가 뭐를 해야 되겠다라는 결정이 내 스스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생기면 그다음에 원력이 생긴다. 원력이 생기면 그다음에는 열심히 마음을 모아서 정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이 길이 맞다. 맞다고 생각하면은 그거를 그냥 열심히 내가 정성을 들인다.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행하는 게 정성이에요.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 진실한 마음을 이게 맞다고 내가 생각했으면 끊임없이 부단히 그것을 하다가 보면 그다음에는 공덕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공덕, 공덕은 선근이 쌓여서, 내가 잘한 일이 거기에 축적이 되어서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걸 공덕이라고 하고, 공덕, 원력이 있으면 가피가 있어요. 가피나 공덕이나 같은 말이에요. 내가 받는 거, 그걸 받을 수 있으면 그런 다음에 성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그 제일 밑바탕이 믿음이에요. 우리 한문화 체험관의 지하가 흙다움이죠. 그 믿음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흙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처럼, 뿌리와 같은 거예요. 그 뿌리가 깊이 박히고, 그다음에 원력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열심히 하는 건 줄기, 그다음, 뿌리가 깊고 줄기가 튼튼하면 그다음에 뭐가 생겨요?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얻을 수 있잖아요. 열매를 얻는 것이 공덕의 과예요. 그렇게 하는 거를 신심이라고 해요.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걸 믿느냐. 우리는 뭐를 믿고 있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있어요. 부처님 말씀 이전에 동양은 주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한국은 유교 사상이 뿌리를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유교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어질 인자(仁)입니다. 어질 인자. 어질 인자는 관계에요. 사람 인 변에 두 이자이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관계를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유교에서는 ‘어질 인자는 나의 씨앗이다.’라고 얘기해요. 내가 분자가 되는 씨앗이다. 이렇게 해서 논어에 보면 어질 인자, 배울 학자가 제일 첫 번째에 나오는 겁니다. 배울 학자. 인의예지, 성인이 말씀하신 거를 깊이 배워서 그걸 내 거로 습득해서 살다가 보면 만족한 삶을 살고 군자가 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도교에서는 유불선이잖아요. 도교에서는 또 뭐라 그러느냐. 도교에서는 제일 첫 글자가 도라는 글자에요. 도덕경에 보면 도는 뭐냐.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연이 돌아가는 섭리를 우리가 배우면 너무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살 수가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그 도라는 건 이 자연이 내가 뭔가를 계속 채우려는 마음, 이 마음을 버리고 계속 아는 것도 들어내고, 가진 것도 들어내고, 이렇게 해서 계속 들어내라, 비워라. 이게 도교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부처님은 각(覺)을 말씀하셨어요. 각, 깨달을 각자. 그럼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뭐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없는 것을 알아내는 게 깨달음이 아니에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을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거를 알아내는 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러면 뭐를 알아냈느냐. 생사대사(生死大事)가, 우리가 밥 먹고 생활하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이 곧 해탈이더라. 그래서 생사대사가 곧 번뇌와 고통이 아니고 그게 곧 적멸이더라. 생사대사는 곧 적멸이다. 그 마음의 차이거든요. 마음의 차이. 그래서 우리 진관사에서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하지요. 누가? 내가. 내가 부처라는 거를 알면 이걸 믿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마음의 정원 진관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스님이 계속 주장을 해요. 당신은 부처고, 우리 엄마도 부처고, 우리 아들도 부처고, 우리 선생님도 부처고, 다 부처님이다, 그거를 이제 인지를 했어요. 그걸 믿었어요. 믿으면 믿음대로 부처님처럼 내가 행동하고 보는 것도 부처님처럼 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게 되고, ‘내가 뭐 스님이 말해도 거기 내가 뭐..’ 이러면서 스스로를 자학하는 거.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자신감. 스스로 자자에 믿을 신자. 스스로를 믿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이 나의 팔자를 바꾸는데 근본입니다. 믿음이 형성이 되면 그다음에는 방향이 설정이 됐어요. 내가 뭐를 해야 되겠다라는 원력, 꿈이 생겼어요. “난 부처님처럼, 스님께서 부처님처럼 행동하면 내가 행복하다니까”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고질병이 있어요. 믿으라 해도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무슨 고질병이냐. 매일 치료를 하고 약을 먹는데도 죽을 때까지 치료가 안 되는 병이 있어요. 뭘까요? 첫째는, 배고픔이에요. 밥 한 끼 먹으면 그다음 배가 안 고파야 하는데 시간이 되면 또 배가 고파요. 그래서 평생 먹는 거예요. 그것도 잘 먹으면 되는데 탐욕으로 먹고, 잘못 먹고. 이게 고질병이에요. 배고픈 병. 근데 이제 다 치료가 됐나 하고 먹기 싫어서 안 먹으려니까 죽더라 이거에요. 할머니들이 그러시잖아요. ‘아이고 물도 안 넘어간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아이고 입이 모래알 씹는 것 같다.’ 이게 죽을 때가 다 됐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배고픈 병이고, 그거보다 더 중병이 또 하나 있어요. 만족하지 못하는 병이에요. 만족하지 못하는 병이 두 번째 고질병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하면 좋을까 저걸 하면 좋을까. 특히 만족하지 못하는 게 부모와 자식 관계에요. 예를 들어 아들이 핸드폰을 사달라고 졸라서 핸드폰을 사 주고 나면, 엄마 입장에선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을 거 같죠.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까지는 그 핸드폰에 빠져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엄마 자전거 사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것뿐만 아니에요. 그냥 이걸 가지면 저걸 가지고 싶고. 그중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게 수명이에요. 백 살을 산들 여러분들 죽고 싶다고 말하겠어요? ‘아 나는 죽고 싶어.’ 는 세계의 3대 거짓말에 들어간다잖아요. 수명, 만족하지 못해요. 배 속에서 죽는 사람, 한 살이 되어서 죽는 사람, 또 어린아이가 되어서 죽는 사람, 노인이 되어서 죽는 사람, 다 죽는데, 죽을 때 ‘나 잘 죽는다’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여여하게 가신 분을 보았습니다. 우리 진자 관자 진관스님은 손을 흔들면서 ‘모두 무병장수하라, 고맙다,’ 그렇게 하고 제 손을 잡고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아무 소용이 없다. 복을 지어라. 복을 지으면 네가 살기가 좋고, 네가 지은 복으로 많은 사람이 편하게 산다. 마음을 닦아라.’ 이런 말을 하면서 여여하게 가셨어요. 저희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지식들이 그렇게 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가셨어요. ‘나는 이제 갈 시간이다. 내가 없더라도 법을 믿고, 너 자신을, 자신의 마음을 밝혀라.’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을 말씀하셨거든요. 그다음 재산이에요. 한 개를 모아놓으면 두 개를 가지고 싶고. 그 말에 맞는 속담이 있죠. <말을 구하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말이요. 사람의 가지고 싶어 하는 그런 물욕, 이게 만족을 못하게 해서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해요. 또 하나는 명예에요. 명예도 마찬가지예요. 회장, 국회의원, 대통령... 내 자식에게 권한을 물려줄 때도요. 자식 몇 남매 중에서 누가 나한테 잘할까. 그 사람한테 물려주고 싶어요. 권세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못해요. 그러면 <내가 내 스스로 만족한다> 그 말이 뭐냐.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오직 만족할 줄 안다. 이 말을 옛날에 칠보사에 석주큰스님이,-저는 그때 그 당시에 무슨 말씀인지 몰랐어요,- ‘이거 최고 부자 부적이야’ 하셨어요. 이 부자 부족을 96살 먹은 노스님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100장 이상을 쓰신다는 거예요. 그냥 붓을 띄지 않고 오유지족을 그렇게 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 그걸 붙여놓으면 부자가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내 스스로가 만족하면 사고를 당해도 ‘아이고 큰 일 날 뻔했어. 내가 죽을 뻔했네. 이만하니 다행이다.’ 이러면 아픔이 좀 덜해요. 항상 만족할 수 있는 거, 이거를 배우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만족을 하는가.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 곧 현재의 내 마음이 부처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부처인 줄을 내가 봐야 돼요. 내가 봐야지 내가 부처인지 알죠. 그러면 보는 연습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염불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우리 여기 있는 어린이, 청소년 친구들은 잠자기 전에 관세음보살을 매일 하는 거에요. 매일 그러면 내 입에서 그냥 자동으로 관세음보살이 나오게 돼요. 내 입에서 좋아도 관세음보살이 나오고, 싫어도 관세음보살이 나와요. 그걸 안 하고 그냥 “스님이 마음을 봐라” 하니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마음이 보이지는 않아요.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해요. 고요하게 하는 게 명상이에요. 그리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염불을 하는 거예요. 안 되면 절을 해요. 절을 자꾸 하다가 보면 마음이 훈훈해져요.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내 자신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게 정진이에요. 그게 원력이에요. 자꾸만 자꾸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해야 되는데 그거는 안 하고, 나무를 땅에 심어야 되는데, 믿음으로 심어야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데, 종이에 그림만 그리는 거에요, 나무를. 그림을 그리면 나무 열매가 열려요? 꽃이 펴요? 안 열려요. 우리 진관사 신도님들은 이 진관사를 믿고, ‘여기는 깨달음의 도량이다, 나를 발견하는 도량이다, 내 꿈을 이루는 도량이다, 나는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마음, 한 마음, 이 믿음을 가지신다면 여러분들은 최고의 가치를 이룰 수 있어요. 안 되는 게 없어요. 내가 가진 잘못을 보고 트집을 잡고 비방하고 그러면, 내가 전생에 업이 많아가지고 -업이라는 건 내가 그렇게 익힌 습관이 더 많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오늘부터는 얼른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부처님 마음으로 돌리는 거, 이거 제일 빨리 돌릴 수 있는 게 관세음보살이예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러면 경계에 내 마음이 쫓아가지 않아요. 내 마음이 그쪽으로 쫓아가는 생사,-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생사대사 생로병사 우비고뇌. 그러니까 태어나고 죽고 생활하고 거기서 우비고뇌, 슬프고 괴롭고 이런 것이 곧 생사해탈이다. 그게 다른 게 아니다. 중생이 곧 부처다. 니가 곧 부처다. 이거를 믿어라. 그걸 믿는 것이 신심이다. 여러분들은 다 믿어요? 믿죠. 그걸 믿었으면 이제 가는 거예요. 열심히 공덕을 닦아가는 거에요. 닦아가면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된다? 정성스럽게 해야 된다. 정성이라는 건 참된 마음을 최선을 다하게 쓰는 마음이 정성이에요. 지극정성. 뜻을 모아서 지극하게 참된 마음을 행하는 거, 그게 예배예요. 예배. 여기 부처님께 와서 예를 하고 기도를 하고 이렇게 하면 자연적으로 좋은 행위가 계속 축적이 되어가지고, 그 축적이 된 걸 우리는 공덕이라고 얘기해요. 공덕이 축적되면 어떻게 되느냐. 분명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다. 내가 나를 부처로 보고 그러면 세상이 다 부처님 세상으로 바뀌고 어떤 경계에도 부처님 시방 세계가 다 들었다 했거든요. 부처님으로 본다면 이게 얼마나 좋겠어요. 특히 우리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은 어마어마한 희망이 있어요. 복이 있으니까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고 내 꿈을 발견할 수 있게 그 길로 벌써 입도, 도에 들어간 거예요. 내가 가진 것을, 내가 공부 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니까 더 행복하더라 이거예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으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살게 이끌어주고 발견해주고 시스템을 구축해주고 이렇게 해주면서 내가 기쁨을 얻는 거예요. 또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기부를 하면서 내가 기뻐져요.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니 공덕이 자라더라, 좋은 일이 쌓이더라, 이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내가 너무나 행복하고 늘 만족하고 고질병이 없어져요. 그러면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들어있고, 하나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들어 있으니 참 고맙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감사합니다.’ 특히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되겠더라고요. 서로 그 집착만 없으면 자유로워요. 집착을 내려놓고 그냥 그 아이가 꿈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또 모든 거를 지금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다 해주면 안 돼요. 경험을 쌓게 해줘야지, 부모들이 다 해주면 이 아이들의 권한을 뺏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든지 그냥 아이들이 하게 해주세요. 지금 어렸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확장하고 경험을 쌓게 해야합니다. 우리 진관사가 인생학교라고 제가 얘기를 하죠. 인생학교에서 그걸 배우고 또 서로 가르쳐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정원 진관사가 신심을 구축하게 되고 나의 원력을 이루게 되고 가피를 받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될 것 같고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이다. 내 옆에 있는 분이 부처님이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지혜로운 행위다’, 반야심경에 정답이 다 나와 있어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은 다 허망하거든요. 이거 지금 시계라고 말할 수 없어요. 시계를 해체해 보니까 플라스틱이고 하나의 철이고 건전지가 들어있고 어느 걸 보고 시계라고 말하겠어요. 그래서 오온이 공한 것을 여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매일 읽으세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 -반야라는 말은 지혜거든요.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 마음, 밝고 맑은 공덕이 되는 그 행위 그게 지혜예요.- 반야를 행하게 되면 어디에 도착하게 되느냐. 해탈의 경계, 적멸의 세계에 갈 수가 있다. 그 내용이에요. 사리자는 누구를 얘기하냐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사리자라고 해요. 나라고 지칭하면 돼요. 내 스스로에게 반야심경을 매일 읽어주는 거예요. 내 모든 세포에게 반야심경을 읽어주면 몇 개만 기억하고, 오늘은 이만큼 기억하고, 내일은 이만큼 기억하고, 그게 점점점점 쌓이고 쌓이면 내 온몸이 다 반야바라밀로 바뀌어요.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다 같이 합장해 보세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은 신심을 가지고 내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공덕(功德), -공에 힘 력자거든요.- 나의 재능을 가지고 힘껏, -덕이라는 것은 행하다,- 바른 마음을 향해서 노력해 나가는 것이 공덕이에요. 내가 바른 마음을 가지고 행해서 계속 그 재능을 축적해 가는 게 공덕이에요. 그렇게 되면은 결국 내가 행복하고 모든 것에 만족하고 이렇게 살 수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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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2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6-02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人生이 如草露하니(인생여초로) 인생은 풀잎에 이슬 같으니 光陰이 夢一場이라(광음몽일장) 한평생이 하룻밤 꿈인 듯하다. 於中有靈心하니(어중유영심) 그중에 신령한 마음이 있으니 天終這不終이로다.(천종저부종) 하늘은 다해도 ‘이것’은 다함이 없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 극락세계 가셔야 되요. 극락세계가 어느 곳에 있으며, 극락세계에 누가 가며, 극락세계를 어떻게 가는가 그게 오늘 법문의 내용입니다. 극락세계는 삼세 제불이 깨닫고 역대 조사가 깨닫고 천하 선지식이 깨달은 세계인데요. 어떻게 깨달았냐. 사람에게는 의식이 있고, 생각, 지혜가 있는데, 그 지혜로 얻은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합니다. 지혜로 얻은 세계. 의식으로 얻은 세계를 생로병사 우비고뇌라고, 나고 죽고 근심 걱정하는 거. 나고 죽고 근심 걱정하는 것은 모두 생각에서 오는 거고, 극락세계는 지혜에서 온다. 그래서 생각으로 보면 한평생이 긴 것 같지만 지혜로 보면 한평생이 일순간이다. 그래서 지혜로 한평생을 돌아볼 때, 인생이 여초로하니(人生如草露), 인생이 풀잎에 이슬과 같다. 생각으로 보면 한평생이 까마득하고 먼데요. 지혜로 딱 돌아보면 한평생이라는 게 풀잎에 맺은 이슬이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지는 그런 이슬과 같다. 그래서 광음이 몽일장이라(光陰夢一場), 한평생 시간이 하룻저녁 꿈꾸고 깬 것과 같은 것이 우리 인생사다, 이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그럼 어중의 유영심(於中有靈心)만이, 그 가운데 그러면 한평생이 풀잎에 이슬과 같은 줄 알고 한평생이 한바탕 꿈꾸는 것과 같은 것을 아는 그건 뭐냐. 그걸 아는 거. 그걸 신령스러운 마음이라고 그러는데요. 신령 령자. 진짜 그 신령스러운 마음이 인생이 허망한 것도 알고 한평생이 순간이라는 것도 아는데 그 지혜의 신령스러운 마음이 극락세계를 간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나고 죽는 그 사이에 신령스러운 마음이 있으니 그 신령스러운 마음은 천종하되 저부종이라(天終這不終), 하늘은 끝이 나도 그 신령스러운 마음은 끝이 없다. 그게 깨달은 지혜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라는 게 뭐냐. 낮에는 밝은 거 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거 보고, 잠을 자면 꿈을 꾸고, 소리가 나면 소리 나는 거 듣고, 소리가 안 나면 그 조용한 것을 안다. 소리가 날 때는 소리 듣고, 소리가 안 날 때는 그 조용한 것을 들어서, 보일 때나 안 보일 때나 소리를 들을 때나 소리를 안 들을 때나 나고 죽음이 없이 항상 하는 마음, 그걸 깨달은 거예요. 생각은 우리 몸에 매여 있고, 생각은 우리 몸의 대상을 쫓아가는데, 이 생각은 몸 떠나서 있을 수가 없어요. 또 생각은 몸으로 접촉하는 대상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근경에 머문다. 근이라는 건 육근, 우리 몸이고요. 경계라는 것은 보고 듣고 하는 대상인데, 몸과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게 생각인데, 이 지혜는 몸이 있을 때는 몸을 느끼고 몸이 없을 때는 몸이 없는 걸 느끼고, 보일 때는 보는 걸 느끼고 안 보일 때는 안 보이는 걸 느끼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안 느끼고 해도 전혀 이게 지장을 받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비유하기를 거울에다가 비유를 하는데, 거울에 사람이 비칠 때나, 나무가 비칠 때나 해가 비칠 때나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거울에 안 비쳐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허공을 비칠 때나, 맨날 비쳐도 맨날 그대로예요. 그래서 이거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라, 인연 따라서 사람도 되고 인연 따라서 나무도 보고 인연 따라서 눈도 감고 인연 따라서 눈도 떠도 그 청정한 지혜는 거울에 물건 비치나 안 비치나 똑같듯이, 항상 청정한 상태로 항상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래서 수연하되 불변이요, 인연을 따르되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되 인연을 따른다. 이걸 깨닫는 걸 정각(正覺)이라고 하거든요. 바를 정자, 깨달은 각자. 그래서 그걸 지혜로 돌아가면 그게 극락세계에요. 몸에 매이고 대상에 매이면 그게 생로병사 우비고뇌 사바세계고. 사바세계가 딴 게 아니고 몸에 매이고 대상에 매이는 게 사바세계고, 몸에 자유롭고 대상에 자유로운 것이 그게 지혜의 극락세계다. 그래서 생각으로 살면 몸 걱정, 뭘 보는 대로 구할 마음이 생겼어, 구할 걱정. 구하고 나면 그게 금방 또 심드렁해져서 버리게 되고, 버려야 되는데 안 버리게 되면 또 속상하고. 구해야 되는데 못 구하고 나면 또 속상하고. 맨날 근심 걱정, 그걸 어려운 말로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하거든요. 근심 우, 슬픈 비, 괴로울 고, 걱정할 뇌.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그게 사바세계 생각의 세계고, 수연불변, 항상 청정 인연 따르되 변하지 않은, 항상 청정한 지혜 광명 자재 세계는 그게 극락세계다. 극락 가기 얼마나 쉬운지 몰라요. 금방 가는 거예요. 금방. 사바세계와 극락세계 차이가 백지장 한 장 차이도 없어요. 바로 지혜로 돌아가면 바로 극락이고 생각에 머물면 사바세계다. 그런 지혜의 세계를 眞如佛性 菩提自性 진여불성 보리자성無漏智性 無生法忍이니무루지성 무생법인 釋迦世尊 始成正覺에석가세존 시성정각寂滅場中 華藏刹海이니적멸장중 화장찰해 壽福具足의 極樂世界로다수복구족 극락세계나무아미타불 그 지혜의 마음을 가지가지로 이름을 붙이는데 첫 번째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런다. 진여, 참 진자, 같을 여자. 참 그대로 똑같은, 불성은 깨달을 각자, 성품 성자인데, 느껴요. 그 느끼는 성품 그게 불성이고. 또 보리자성(菩提自性)이라. 보리도 깨달음인데, 그 깨달은 본성, 생각은 본 걸 기억하고 대상을 쫓아가고 그게 생각인데, 이거는 보기 전에, 대상을 쫓아가기 전에 자체 본성이다. 그게 보리자성. 무루지성(無漏智性)이다. 없을 무자, 샐 루자인데, 없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아요. 없을 때는 없는 거 알고 있을 때는 있는 거 알고, 태어날 때는 태어난 거 알고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그걸 깨달아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모든 걸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하거든요. 깨달음이라는 건 간단한 거예요. 모르던가 아는 거. 없는 거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모르던가 아는 거. 무루지성이라. 없어지지 않는 지혜의 본성.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법의 지혜, 참을 인자는 지혜라는 뜻인데 나고 죽음이 없는 법의 지혜. 나고 죽음이 없단 말은 이게 항상 알고 항상 청정해서 뭘 보되 보는 거에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상태로 본단 말이에요. 뭘 알 때 불변 상태로 알고 그걸 인연 따른다고 수연이라고 하거든요. 막 화를 낼 때는 불같이 일어나는데 화를 내고 나면 또 그냥 그만이에요. 어디 갔는지 화가. 그러니까 화를 불같이 내도 그 지혜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주 미치는 일인데, 이게 무루지성이라는 거에요. 아주 슬플 때는 한없이 슬픈데, 그 슬픔 속에 그냥 지혜가 변함없이 있어요. 그게 불변 수연이라고. 그게 무생법 지혜라. 그렇게 석가세존이 처음으로 그걸 바르게 깨달았는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고 죽음이 없는 적멸장에(寂滅場中), 생멸을 생로병사라 그러고, 적멸을 불생불멸이라고 그러는데요. 나고 죽음이 없다. 거울에 물건이 비칠 때 그 거울의 물건이 난 게 아니고 거울에 물건이 사라질 때 거울이 사라진 게 아니고. 그래서 그걸 적멸이라고 그래요. 고요할 적자, 없을 멸자. 나고 죽음이 없는 속에 적멸장에, 화장찰해(華藏刹海)라, 화장이라는 건 공덕이 많다 이 말인데 꽃 화자, 감출 장자. 감출 장자는 많다. 꽃 화자는 공덕이라. 그 생멸 없는 세계에 공덕이 한량없이 많아요. 그 한량 없이 많은 세계가 있는데 그걸 찰해라고, 찰이라는 말은 국토라는 말이고, 해는, 바다 해자는 복수, 무량수 많다 이 말이거든요. 적멸장중에 화장찰해라. 나고 죽음이 없는데 한량없는 공덕 세계가 있다. 거기가 어디냐 그러면 수복이 구족한, 수명과 복덕이 다 갖추어진 극락세계(壽福具足의 極樂世界)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극락세계라는 나의 생각에서 나의 지혜로 돌아가는 거지, 엉뚱한 데로 가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나의 생각에서, 나의 생각은 사바세계, 나의 지혜는 극락세계. 그럼 극락세계에 가려면 어떻게 되냐. 생각이 지혜로 싹 바뀌면 되요. 생각이 지혜로 바뀌면 극락세계에요. 생각 일어나서, 몸 걱정, 구할 걱정, 버릴 걱정, 이런 거 하다 보면 거기에 이제 사바세계 생로병사 근심 걱정이고. 그리 되면 어떻게 되냐. 마음을 깨끗하게, 조용하게 하면 극락 가는 길이에요. 조용하고 깨끗하면 극락이다. 시끄럽고 쫓아가면 그거는 근심 걱정이다. 그래서 극락을 일순간이라도 체험할 수가 있어요. 몸을 딱 바르게 하고, 생각을 다 거두어서 그대로 조용히 하면 거기에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는 세계를 내가 느낄 수가 있어요. 그런 근심 걱정이 없는데 들어가면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나타나요. 근심 걱정 없는 속에 한없는 공덕을 극락세계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생각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깨끗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지혜 광명이 확 드러나요. 그 지혜 광명이 드러난 체험을 한 분들을 삼세 제불이라고 하고, 역대 조사라 그러고 천하 선지식이라 그래요. 생각을 고요하게 하는 데까지 수련하는 분들은 도를 닦는다 이래요. 그러면 그 생각을 고요하게 해서 지혜 광명이 드러난 분들을 도를 이룬다 이러는데요. 수도, 성도. 생각을 깊게 가지면 그 생각이 깊어졌을 때 눈을 감았다가 눈을 딱 뜨면 보이는 게 환히 나타나듯이, 지혜 광명이 온 누리에 차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런데 전생에서부터 약간 인연이 있는 분들은 금방 되는 거예요. 그런 길이 있는 걸 모르고 또 그런 말을 들어도 믿음이 깊게 안 생겨서 그런 체험을 안 해서 그렇지, 살아서 극락세계 체험하는 거 금방 되는 건데, 이 몸에 이제 생각의 습관이 너무 깊이 들어가지고 그런 말을 들어도 잘 들어오지도 않고 안 들려요. 소리가 들려도 그걸 잘 익히지를 않고 익힌다고 하더라도 몸에 다른 게 너무 많이 익혀져서 잘 못 들어가서 그렇지, 그거 아무 것도 아닌 건데 못해요. 생각이 조용하면 거기서 지혜 광명이 확 드러나는데 그걸 도를 이룬다고 하고 그걸 극락세계에 간다고 한다 이거죠. 淨極光通達 맑음이 깊어 광명이 드러나면정극광통달寂照含虛空 고요하게 봄이 허공을 삼킨다. 적조함허공却來觀世間 다시 세간을 보면각래관세간猶如夢中事 꿈속의 일과 같다.유여몽중사(능엄경제6권) 이걸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이라고 하는데, 깨끗함이 깊어지면 광명이 온 누리에 나타난다. 통이라는 거는 온 누리고 달이라고 하는 건 나타난다 이 말이에요. 온 누리에 나타난다. 그러면 적조가 함허공(寂照含虛空)이라, 그 지혜는 첫째는 고요해요. 고요하다는 말은 형체도 없고 머물러 있는 주소가 없어요. 무주. 적정무주, 아주 희한한 거예요. 적정이라는 거는 있어도 그림자가 없어요. 또 머물러도 주소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어렵다고 그러는 거예요. 있기는 있는데 그림자도 없고 머무를 주소도 없다. 적정(寂靜), 고요 적, 고요 정. 무주, 없을 무, 머물 주. 생각은 몸에 머물면 돼요, 생각은. 그래서 이거 몸이 탈 나면 생각이 탈 나요. 그걸 요새 정신 건강이라고 그래요. 정신 건강은 몸부터 탈 나거든요. 그런데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머무는 데가 없어서 몸 아무리 갈라봐도 지혜 안 보이거든요. 근데 이게 어디 있는지 그냥 시방세계에 꽉 찼는데 머무는 장소가 없어요. 참 희한한 거에요. 정극하면 광통달. 정극하면, 맑음이 깊으면 빛이 시방에 가득하나니, 적조가 함허공이라, 그 고요히 비치는 광명이 허공을 다 삼킨다. 들어오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세간을 보니,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하니, 세간이라는 거는 생로병사 근심 걱정인데요. 이 생로병사 근심 걱정하는 이 세상만사를 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라, 꿈속에 일과 같다. 극락세계에서 사바세계를 보면 꿈속에 일이에요, 이게. 그런데 생각으로 생로병사 근심 걱정할 때는 꿈속의 일인지 전혀 모르죠. 그걸 선지식들이 가르칠 때 꿈도 깨어나야 꿈인 줄 알지, 꿈꿀 때는 꿈인 줄 모른다 이래요. 인생도 다 살고 봐야 인생이 잠깐이다 알지, 한참 욕심에 부풀어서 세상을 다 얻으려고 그러는데 ‘인생이 잠깐이다’ 이런 말했다가는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어떻게 해요.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참 그거 희한한 게 생각과 지혜의 차이, 생각에 헤맬 때는 생각이 그게 허망하고 꿈 같은 줄 꿈에도 몰라요. 근데 이 지혜로 돌아가서 이 생각의 세계를 보니 유여몽중사라, 꿈속의 일과 같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오늘 영가께서는 지혜를 깨달아서 갈 수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가냐. 이 극락세계를 믿고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래서 부처님이 접인 도사(接引導師)가 되고,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영접해서 인도하는 접인 인도자가 되고, 지장보살 길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되고 그래서 불보살의 안내를 받아서, 뭐 타고 가냐. 지혜의 배를 타고 간다. 그 지혜의 배를 반야용선이라고 그래요. 반야가 지혜 아니에요. 배가 용이 끄는 배다. 용이라고 하는 건 가기는 가는데 어디 있는지 잘 안 보이는 게 용이거든요. 접인도사 일로왕보살의 인도를 받아서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에 간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지 마시고 극락세계에 가시라고요 하는 거예요.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願生華藏蓮華界 원생화장연화계화장연화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願生華藏蓮華界 원생화장연화계화장연화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直往華藏極樂國 직왕화장극락국바로 화장극락국에 왕생하여 無量壽福盡受容하십시오 무량수복진수용무량한 수복을 다 받으십시오!나무아미타불 화장연화계 극락세계로 가는데, 극락세계는 청정한 공덕으로 가득한데 그걸 연꽃에 비유했어요. 연꽃이 꽃은 피는데 물들지 않는다. 화장이라는 건 많은 공덕으로 쌓인 극락세계. 원생 그러면 거기에 가서 나십시오 이런 뜻이에요. 다른 데 가지 마시고, 또 생각에 빠져서 몸에 매달리고 또 보이고 들리는 대상에 쫓아가서 다시 근심 걱정하는데 돌아가지 마시고 화장연화계, 공덕으로 가득 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원한다는 말은 그렇게 해라 이 말이거든요. 화장 연화 극락세계에 가십시오. 가서 거기에 나십시오. 원생화장연화계, 화장연화 극락세계에 가서 나십시오. 직왕화장극락국하야(直往華藏極樂國), 바로 공덕이 가득한 극락국에 가서 무량수복을, 한량없는 수명, 거울이 아무리 물건을 비춰도 그대로고, 물건이 떠나도 그대로라 수명이 한량이 없다 이 말이죠. 극락 수명은. 그러면 극락 복덕은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으니까 복덕이 한량이 없다. 그래서 한량없는 수명과 복덕을 진수용하십시오. 다 받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오늘 법문을 다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