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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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3일 음력 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3-03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관사 임인년 2월 초하루 법문은 <공양올리는 이야기>, 공양 올리는 이야기, <꽃공양 진실>, 꽃공양 진실,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無明行議 造業受報 三界六道 生死輪廻 무명행식 조업수보 삼계육도 생사윤회光明覺智 遍满法界 莊嚴佛刹 神通自在광명각지 변만법계 장엄불찰 신통자재 불교에서 가르치기를, 범부중생은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생멸로 윤회(生死輪廻)를 하고, 일체제불은 장엄불찰(莊嚴佛刹)에 신통으로 자재(神通自在)한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면 삼계육도에서 나고 죽는 윤회를 하는 원인은 뭐냐. 무명행식(無明行議)이다. 무명, 어리석음이다. 뭐에 어리석음이냐. 진여열반을 몰라서 그렇다. 진여열반을 몰라서 그렇다. 그래가지고 진여열반 속에서 조업수보(造業受報)한다. 스스로 업을 지어서 스스로 결과를 받는다. 그래가지고 삼계육도에 생멸윤회를 하는데, 일체여래, 일체제불은 깨달음을 얻어서 광명각지(光明覺智)가, 광명, 밝고 넓은 깨달음의 지혜가 변만법계(遍满法界)라, 온 법계에 가득하기 때문에 장엄불찰에, 장엄이라는 건 공덕인데 그 한량 없는 공덕으로 쌓여 있는 부처님 국토에 신통이 자재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그래서 진여열반을 모르면 생사윤회를 하고, 진여열반을 깨달으면 장엄불찰에 신통자재한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생사윤회하는 범부가 어떻게 하면 그 한량 없는 공덕 세계에 생사 없이 신통이 자재하겠는가. 그 첫 번째가 신심이고요. 믿는 마음이고, 그 신심을 그대로 이루어서 부처님 세상에 하나 되면 되거든요. 그러면 신심으로 부처님 세상에 하나 되는 공덕 방편이 뭐냐. 그게 공양 올리는 거예요.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중생이 일체여래와 하나 되는 일이고, 또 삼계육도 생사윤회에서 장엄불찰 신통자재로 들어가는 일이거든요. 들어간다. 그래서 공양을 올리는데, 그 공양을 올리는 의미가 뭐냐. 내가 일체여래의 광명각지 신통자재를 공경히 믿는 순간에 내가 변해요. 내가 광명각지의 문이 열리고 내 생각과 내 몸이 광명각지에 부처님 몸으로 변하기 시작해요. 또 그리고 내가 공양을 올릴 때, 보통은 세간물인데, 세간물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무명 의식으로 보는 물건이다. 깨달음이 없는 생각으로 보는 물건이 꽃도 있고, 향도 있고, 과일도 있고, 나물도 있고, 이거는 무명 의식으로 보는 세간물인데, 이걸 부처님께 올리는 마음을 또 일으키는 순간에 그건 세간에 중생이 보는 그냥 세상 물질이 아니라 부처님의 물질로 바뀌게 돼요. 그래서 향을 올리면 세간물의 향이 아니라 그게 해탈향이 된다. 해탈향. 생각으로 보면 나무향인데 이걸 신심으로 보면 해탈향이다. 그래서 한 신심이 일어나는 순간에 내 생각이 부처님 마음으로 바뀌고, 내 몸이 부처님 몸으로 바뀌고, 내 물질이 부처님 물질로 바뀌게 돼요. 이게 공양 올리는 난사의 비법이라고 그래요. 생각하기 어려운 비밀법이다. 그래서 향도 올리고 초도 올리고 하면, 그 초가 그냥 세간 물질로 생각으로 보는 초는 기름덩어리로 만들어서 녹으면 없어지는 건데, 그게 아니라 광명각지, 부처님 마음으로 볼 때는 그게 해탈이에요. 그게 온 우주법계를 다 비추고도 남는 지혜광명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걸 반야라고 하거든요. 그냥 초를 하나 손으로 들었을 때는 그게 물질의 초인데, 그걸 ‘부처님에게 올려야 되겠다’ 이런 신심을 내서 부처님을 향해서 올리는 순간에 그게 광명초가 되고, 그늘이 없는 초가 되고, 온 우주법계의 그 광명을 가득히 비추는 초가 된다. 그래서 등은 반야등이고 향은 해탈 향이고 그런 거죠. 이것을 법공양이라 그래요. 생각으로 올리는 물공양이 아니라 신심으로 올리는 법공양이다. 讚花 : 꽃을 찬탄함 찬화七寶池中呈國色 연못속의 연꽃송이 아름다움 드러내고칠보지중정국색一枝月裏占天香 달빛속의 계수꽃은 하늘향기 간직했다일지월리점천향世尊拈起示諸人 세존께서 들어올려 대중에게 보이시고세존념기시제인達摩傳來開五葉 달마조사 전해와서 다섯잎을 피워냈다달마전래개오엽 근데 오늘 법문은 꽃 공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에요. 꽃을 많이 올리는데 그 꽃중에 꽃을 연꽃이라고 하는데요. 연꽃. 이 연꽃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염원을 하느냐 이런 말씀이죠. 그래서 연꽃에 대한 찬탄이 있는데, 꽃을 찬탄한다(讚花). 한자로는 칠보의 연못 속에서 정국색이라(七寶池中呈國色), 국색은 제일 아름다움을 국색이라고 그러는데요. 나라 국자, 빛 색자. 일국에서 최고다 이 소리죠, 국색은. 근데 이 연꽃은 땅 위에 있고 물속에서 피는데, 그 모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주 이 세상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정국색이다 이거지요. 드러낼 정자. 또 일지월리점천향이라(一枝月裏占天香). 이거는 꽃이라는 게 단순히 지상 수중에 있는 물건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저 하늘의 기운까지 다 여기에 들어있다. 그래서 달 속에도 꽃이 있는데, 달 속에 무슨 꽃이 있냐. 달 속에는 계수나무가 있다. 그래서 그 달 속의 계수나무에도 꽃이 피어 있는데, 그 계수나무에는 천향이라, 하늘의 향기를 가득히 가지고 있어요. 점자는 거기 점유할 점자, 가지고 있을 점자거든요. 그러니까 이 꽃 한 송이에 땅의 기운, 물의 기운, 하늘, 달의 기운이 다 깃들어 있어서 무진장 공덕이 갖춰져 있는 것이 꽃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그런데 그 꽃을 불자가 공양물로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당신이 깨달은 해탈, 당신이 깨달은 열반, 당신이 지금 노닐고 있는 극락세계, 이런 것을 떡 보이는 도구로도 사용을 했어요. 그래서 세존이 염기시제인이라(世尊拈起示諸人), 세존이 그걸 떡 잡아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또 달마가, 달마조사가 그 꽃을 가지고 왔다. 달마가 가지고 온 꽃은 뭐냐. 달마가 법이 있는데, 달마는 그 법을 깨달아서 그 법을 전하려고 왔는데, 그 법을 표현할 때 꽃으로 표현한 거죠. 그래서 달마가 전래(達摩傳來)하니, 달마가 이걸 전해가지고 오니, 그 한 꽃이 다섯 잎이 피었다. 개오엽(開五葉)이라. 이렇게 꽃을 찬탄을 해요. 이걸 우리 말로 이제 쉽게 번역을 해보면, 연못 속에 연꽃송이 아름다움 드러내고 달빛 속의 계수꽃은 하늘 향기 간직했다. 세존께서 들어올려 대중에게 보이시고, 달마조사 전해와서 다섯 잎을 피어냈다. 이렇게 이제 번역을 해봤는데요. 그래서 이 꽃이라고 하는 공양을 올릴 때 범부 불자가 공양을 올릴 때는 부처님과 하나 되고, 내가 부처님 속에 들어가는 공양물로 올리는 공양이고요. 부처님이 꽃을 이렇게 들어 보일 때는 해탈 열반 극락세계를 보이는 걸로 꽃을 들으시고, 달마조사가 동쪽으로 올 때는 달마가 전하고자 하는 법을 가지고 왔는데 그 법을 표현할 때 꽃으로 달마의 전하고자 하는 법을 표현했다 이거죠. 이게 꽃 공양 진실입니다. 世尊拈花 세존염화諸佛所證法 解脫涅槃境 제불소증법 해탈열반경世尊擧拈花 迦葉微笑呈세존거렴화 가엽미소정 그래서 거기에 대한 진실에 대한 말씀을 더 드리면 세존이 염화(世尊拈花)라, 염화라는 건 꽃을 잡아들었다 이거거든요. 잡을 염자가 있어요. 제불소증법(諸佛所證法)은 일체제불 여래가 증득한 바 법, 증득이라는 건 마음으로 얻은 걸 말해요. 마음으로 물득이 아니라 심득이다. 그걸 증득이라고 그러는데, 증명할 증자, 얻을 득자. 제불여래가 마음으로 얻은 법은, 내용은 어떤 거냐. 부처님이 뭘 얻었을까. 깨달음은 얻는 건데, 깨달음은 뭐 누구한테 물건을 물려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건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서 뭘 얻었을까. 이걸 해탈 열반 경계(解脫涅槃境)다. 경계라는 건 그 경지, 그 세계 이 말이죠. 해탈 열반의 경지다. 극락 세계의 경지다. 광명 세계의 경지다 이 말이죠. 제불소증법은, 제불께서 얻은 법은 해탈 열반의 경계이니, 이 해탈 열반을 얻도록 평생을 설법을 하셨는데, 이걸 한번 보일 때 뭘로 보였느냐. 꽃으로 보였다 이거죠. 세존이 거렴화(世尊擧拈花)하니, 세존께서 염화라는 건 꽃을 잡는다. 거자는 들 거자인데, 꽃을 잡아서 떡 들어 보이니. 그럼 이거는 중생의 생각으로 보는 물질 꽃을 보인 거냐. 중생이 생각으로 보면 분명히 물질의 꽃인데, 부처님이 이 세상 물질의 꽃을 구경시키려고 꽃을 보인 건 아니다 이거에요. 그럼 뭐냐. 해탈 열반의 경계를 꽃 한 송이를 떡 들어서 이렇게 보였다. 근데 누가 그걸 알았냐. 가섭이, 가섭 존자가 미소정(迦葉微笑呈)이라, 빙긋이 웃음을 드러냈다. 이게 세존이 염화하고, 세존께서 꽃을 잡고, 가섭이 미소하고, 가섭은 빙긋이 웃음을 드러내고. 이것이 해탈열반 이심전심 사자상승(師資相承). 해탈열반은 물질로 주고 물질로 받을 수 없으니까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심전심. 그러니까 꽃을 들어 보였지만 그것은 해탈 열반을 전한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해탈 열반을 전해 받을 때 꽃을 가서 받는 거는 의미가 없죠. 마음으로 전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 꽃을 쫓아가서 받아오는 게 아니라 빙긋이 웃은 거에요. 전하는 분의 마음을 훤히 안 거죠. 이게 이심전심이에요. 전할 때도 마음으로 전하고 받을 때도 마음으로 받는데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는 거다 이 말이죠. 이심전심. 물질은 꽃이지만 그 전한 건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 꽃이라는 것은 부처님은 마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고 중생은 부처님에 다가가는 공양물로 쓴다. 이게 꽃의 진실법입니다. 그리고 이 달마가 동쪽에 온 것은 부처님이 다 전한 해탈 열반법을 전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그 당시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이렇게 온갖 공덕과 온갖 방법으로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는 해탈, 본래부터 열반인 그 본래 열반, 이장 해탈, 떠날 이자, 장애 장자, 모든 장애를 떠났다, 장애를 버리는 것이 해탈이다. 열반은 본래 열반이에요. 본래 적멸, 본래 생사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는 게 그게 열반이지, 본래 열반, 이장 해탈, 장애 없는 해탈, 그거를 부처님이 항상 언설과 방편으로 전하셨는데 거기에 전하지 못한 게 있어요. 이 가섭이나 이런 분들에게 마음으로만 전했지, 말로 설법으로 전하지 못한 게 있는데 그거를 교회 별전이라 그래요. 교설로 전한 건 해탈 열반인데, 교설로 전하지 못한 그 마음으로만 전한 게 있다. 그게 뭐냐. 본래 진면목이라고 그러는데, 표현할 때 본래 진면목. 여래의 본래 진면목, 보살의 본래 진면목, 범부의 본래 진면목, 그거는 부처님이 교설로 전하지 않았다. 達摩五葉 달마오엽吾本来兹土 傳法救迷情 오본래자토 전법구미정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血脈論)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 (혈맥론) 그래서 달마는 그걸 부처님이 전하지 않은, 비밀로 전한, 부처님 설법 밖에 따로 전한 그런 본래 진면목법을 전하기 위해서 달마가 동쪽으로 왔다. 이게 이제 달마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달마의 게송 중에 달마오법이라는 게송이 있는데 달마의 다섯 가지 법, 그게 오법이 아니라 이파리 엽자, 잎새 엽자, 달마오엽(達摩五葉), 달마오엽 게송이 있는데요. 달마 저술로 전해지는 혈맥론(血脈論)이라고 하는데, 달마 혈맥론에 달마오엽 게송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뭐라고 했냐. 달마가 스스로 게송을 짓기를 오본래자토(吾本来兹土), 내가 본래, 오본래, 자토, 이것이라는 자자가 있고 흙 토자가 있는데요. 자토는 이 동쪽을 말하는 거죠. 내가 본래 이 동쪽에 온 것은 전법구미정(傳法救迷情)이라, 법을 전해서 미한 유정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와서 일화(一花)에, 한 꽃송이에 개오엽(開五葉)이라, 다섯 이파리가 핀다. 개자는 개화라고, 필 개자죠. 오엽은 다섯 이파리, 한 꽃송이에 다섯 이파리가 필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는 자연성(結果自然成)이라, 열매가 맺는 것은 자연히 이루어진다. 이런 게송을 남겼는데 그 일화라는 거는 한 꽃이죠. 그거는 누구나가 다 본래 진면목이 있는데, 일체제불의 본래 진면목, 일체 범부의 본래 진면목, 이 일체 보살의 본래 진면목, 이것은 다 똑같다. 평등하다. 그래서 이 본래 진면목을 평상심이라고 그래요. 평등하고 항상한 마음을 범부나 보살이나 여래나 다 똑같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평상심 진면목을 나는 전하러 왔지, 세존께서 다 말씀하신 해탈 열반법을 따로 전하러 온 건 아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달마법이 어떻게 전해지냐. 일화오엽으로, 한 꽃이 그게 본래 진면목인데, 그 꽃에서 다섯 이파리가 피는 것으로 결과가 다 이루어진다. 다 법을 전하게 된다. 이런 얘기죠. 그러면 이게 일화는 달마고, 오엽은 나중에 해석을 하기를 다섯 조사, 다섯 선종 이렇게 얘기를 해요. 다섯 이파리는 다섯 조사가 달마 밑에서 이어졌다. 혜가 조사, 승찬 조사, 또 도신 조사, 홍인조사, 혜능 조사 해가지고 이 다섯 조사에 달마까지 합하면 육조라, 여섯 조사다 이렇게 되거든요. 달마 밑에 다섯 조사가 이루어진 게 그게 오엽이고, 또 그 다섯 조사 밑에 조사 선종이 다섯 선종이 있는데 그게 오엽이다 이거죠. 그러면 달마선법을 이어받은 다섯 선종의 이름은 뭐냐. 임재선종, 조동선종, 그다음에는 위양선종, 그다음에는 운문선종, 그다음에는 법안선종. 그래서 이거를 오조사 선종이라고 그러는데요. 달마 이후에 이렇게 오조사 오선종이 발달을 해서 달마가 전하고자 하는 본래 진면목 법을 다 이루었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일화개오엽이라, 한 꽃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 말이죠. 達磨傳法 달마전법父母未生前 本來眞面目 부모미생전 본래진면목擧世無相似 物物元無側(宗梵着語)거세무상사 물물원무측(종범착어) 그래서 달마전법(達磨傳法)을 이제 보면 달마전법은 딴 게 아니에요. 일체중생, 일체보살, 일체제불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가 나를 낳지 않았을 그 이전에,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얼굴은 부모가 낳아준 얼굴인데 부모가 낳지 않았을 때에 나의 본래 진면목 그건 뭐냐. 그걸 전한 게 달마의 한 송이 꽃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꽃이라고 하는 것은 공양 올릴 때도 꽃이요, 부처님 해탈 열반을 전할 때도 꽃이요, 일체 모든 분들의 본래 진면목을 전할 때도 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범부들은 일심정성으로 꽃 한송이 떡 올릴 때 내 몸은 여래가 되고, 이 공양물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해탈 열반이 되고, 이 공양물은 본래 진면목이 된다. 이런 신심으로 올리는 게 공양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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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2월 26일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졸업식과 법화경반 수료식 법문
총무 법해스님 2022-02-26
축하드립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많은 졸업을 하셨을 겁니다. 유치원에서부터 학교 정규 과정이라든지 또는 여러 문화 교육 등 많은 졸업을 했는데, 그 어떤 졸업보다 오늘 이 졸업장이 빛이 날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 삶을 성공하기를 또 발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다들 행복하고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왜 행복하지 못할까. 그거는 우리가 익히고 내가 행동한 것이 탐욕, 고통스러운 삼독심을 많이 익혔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데요. 여러분들은 기초 교리서부터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또는 경전을 배우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또 그것을 익히고 또 익히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신다면, 아마 나날이 행복하고 또 주변이 다 환희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세 가지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문사수(聞思修) 이렇게 얘기하죠. 많이 듣고, 들을 문자입니다. 많이 듣고 그 들은 것을 깊이 내 몸으로 익히는 수행을 하고, 또 사유하고 그것을 익히고 그렇게 하면 생각이 지혜로 바뀝니다. 우리가 생로병사 우비고뇌로 내가 생각한 대로 삶을 살다 보니까 늘 고통이 따랐는데, 그 생각이, 부처님 가르침이 내 거가 되어서, -요즘 말로 하면 메타인지가 되는 거죠,- 그게 지혜가 되어서 삶이 늘 자유롭고 평온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이 된다고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졸업이라고 끝이 아니고, 불교는 문사수, 듣고 또 듣고 그거를 사유하고 내거화, 내 몸이 다 기억해가지고 그거를 지혜로 발현할 때 너무 행복하고 세상에 주인은 자신이고 또 나와 인연이 되는 분들은 다 부처님으로 보이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전생에 나라를 여러 개를 구해서 이렇게 진관사를 만났어요. 그렇죠. 이렇게 좋은 도량을, 저부터도 좋은 도량을 만나고, 우리 진관사에 오시는 신도님 또는 스님들, 우리 직원분들이 그렇게 선량할 수가 없어요. 이거는 우리 김용철 교수님이 증명을 좀 해주셔야 되는데, “진관사가 제일이죠?” (김음철교수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열심히, 다른 거 할 거 없어요, 시비할 것도 없어요, 마음을 우울하게 할 것도 없어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시다. 그리고 아까 보니까 부동품계를 주더라고요. 부동(不動), 움직이지 않아야 돼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물이 고요하게 비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물을 다 비치는데, 그걸 해인이라 그럽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라 그러거든요. 마음이 고요해야 되는데, 그냥 보는 대로 엎어지고 전도되는 거에요. 잘못 넘어지고 보는 대로 시비하고 보는 대로 탐욕하고 보는 대로 화를 낸다 이거예요. 그런데 내가 제일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 누군가요. 남편 아들 딸 가까운 사람일수록 화가 더 많이 나죠. 그때 화내지 말고, 설령 화나는 말을 하더라도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를 보는 게 뭐예요. 지혜예요. 이제 불교대학원까지 나오셨으니 그걸 우리가 반야라 그러는데, 반야,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이거를 알아차리는 거예요. 화가 나면 어떻게 해요. 내 공덕이 다 타버려요. 백 가지 장애의 문이 열려요. 한 번 화를 냈는데 백 가지 장애가 오더라 이거예요. 또 억지로 억지로 공덕을 쌓아 모아놨는데 그게 홀라당 다 타버리더라는 거예요. 일인이 장락(一忍長樂)이라고 그랬거든요. 한번 그 화남을 내가 알아차렸을 때, 그 화를 눌러버렸을 때, 일인, 한 번 참으니까 길이 길이 즐거움이 찾아오더라 이런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우리 많은 교수님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분들이 와서 또 예배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은 어느새 내가 익힌 악업이 다 소멸이 되고, 부처님 채널로도 바뀌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저 고마워요, 그저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올해도 코로나가 이제 막바지라서 진짜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각별히 조심을 하시고, 될 수 있으면 집에 계시는 것보다 절에 오면 절에 오는 시간, 그 시간이 공부하는 시간이에요. 단장을 하고 오시다 보면. 그 안에 있으면 뽀글뽀글 뭐가 안 돼요. 특히 우리 보살님들은 살림을 하다 보니까 늘 거기에 그냥 매여있게 되거든요. 거기를 훌쩍 떠나와서, 오는 시간에, 연구를 하면서, 또 여기 와서 지극정성, 진심으로 대하는 연습을 부처님께도 하고 도반들께도 하고, 도량도 가꾸고 하다 보면 어느새 그게 내 몸에 배어가지고 다들 모르게 부처님 채널이 되어서 보는 족족 지혜로워지고 보는 족족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더 배우고 또 배우고 또 익히고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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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2월 25일 5재 법문
종범스님 2022-02-25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佛身佛智 圓滿具足 解脫涅槃 極樂淨土 불신불지 원반구족 해탈열반 극락정토로다 오늘 법문의 핵심 요지는 불신불지라(佛身佛智), 부처님께서 깨달은 몸, 불신, 부처님께서 얻은 지혜, 불지, 불신불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니, 원만하고 다 갖추어졌으니, 해탈열반(解脫涅槃)이요, 해탈이요, 열반이요, 극락정토(極樂淨土)라. 지극히 즐겁고 깨끗한 땅으로만 이루어진 정토다. 이것이 오늘 법문의 핵심 요지입니다. 사언 사구 16자, 사언, 네 가지 말로 이루어진 사구가 있는데, 사언 사구해서 보니 16자 뿐입니다. 生滅世間 無常虛妄 生老病死 憂悲苦惱생멸세간 무상허망 생로병사 우비고뇌 부처님이 왜 깨달음을 얻었느냐, 그것은 이 생멸세간(生滅世間)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세는 삼세라는 뜻이고, 간은 공간이라는 뜻인데, 시방삼세세간만사가, 생멸세간이 무상허망(無常虛妄)하다. 무상하다, 항상함이 없고, 허망하다, 그 생멸세간이 무상허망한 것이 뭐냐. 생로병사 우비고뇌(生老病死 憂悲苦惱)더라, 생로병사하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그거더라. 그래서 이 석가모니라는 분이 이 무상하고 허망하고 생로병사하고 우비고뇌, 이거 말고 뭐가 없을까. 거기서 만족을 못했어요. 이거 말고 뭐 틀림없이 있을 것 같은데, 이거 말고 뭐가 없을까.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아주 심각하게 가진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한 걸 알아야 하거든요. 근데 그걸 탈출구를 찾을 생각도 못하고, 생각을 해봤댔자 찾지도 못하고 그래요.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인생 진실상이다. 이거는 이제 인도식 사유적인 논리 표현이고, 동아시아나 우리나라에서는 감각적인 직관 표현을 했는데요. 생로병사, 굉장히 사유적인 논리적 표현이에요. 그런데 우린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인기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논리적 표현을 하는 사람들은 인기가 없어요. 직관적으로 감각적으로 한 방씩 표현하는 사람이 인기가 있어요. 감정체계가 그래서 그렇지요. 그러면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 무상허망 이런 걸 감각적으로 표현한 말은 ‘인생은 낙화유수다.’ 낙화유수. 인생이라는 게 한평생 살 때는 몰랐는데 죽을 때 가만히 뒤돌아 보면, 낙화유수다. 꽃이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것 같다. 낙화라는 건 환하게 피었던 꽃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건 죽은 것 같고. 어디 떨어졌느냐. 흐르는 물에 떨어졌는데, 이 흐르는 물이 떨어진 꽃을 놔두지 않고 흘려보내 버려요. 사람이 임종을 맞이하면 절대 안 놔둬요. 바로 흔적도 없이 변해버려요. 그리고 말로는 영결식을 한다, 장례식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보내는 거에요, 이거.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으면 가라 이거거든요. 기가 막힌 거예요, 알고 보면. 숨진 사람을 안 놔둬요. 유수가 낙화를 머물러 두지 않는다, 유수무정송낙화(流水無情送落花)라, 흐르는 물은 무정해서 낙화를 보낸다. 이런 고인의 시간이거든요. 또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인생은 한바탕 봄에 꾸는 노곤한 꿈과 같다. 이렇게 인생을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했어요. 인생은 낙화유수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다. 근데 한참 젊을 때는 어림도 없어요. 몰라요. 전혀 몰라요. 임종에 가까워야 그걸 알게 돼요. 석가모니는 이 낙화유수 일장춘몽 이거 말고 뭐가 없겠나. 그래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오로지 그쪽으로 매진을 해서 얻어낸 게 있는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깨달은 몸이, 불신이, 태어난 몸이 아니고 깨달은 몸, 불은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불인데, 이걸 동사적으로 표현하면 깨달음이에요. 깨닫는다. <깨닫는다>라고 하면 행위를 중심으로 할 때 깨달음이고 그 깨달은 결과를 형용사적으로 표현하면 <불> 그래요. 그래서 깨달은 몸이다. 이건 태어난 몸이 아니고, 그걸 불신이라고 하고. 근데 깨달은 몸을 얻고 나니까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걸 깨달은 지혜, 불지. 깨달은 몸으로, 깨달은 지혜로 어디에 도달했느냐. 해탈에 도달을 했다 그래요. 모든 장애에서 벗어났다고 해탈인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요, 해탈은. 그리고 열반은 생사가 아예 없어요. 나고 죽는 게 아예 없어요. 예를 들면 파도가 아무리 일렁여도 물은 항상 그대로다. 그래서 파도의 물과 같은 게 그게 열반이다. 해탈열반. 그다음에 극락세계. 이 태어난 몸을 가지고 살 때는 고락이 반반인데, 고통이 있으면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고통이 있고, 이 해탈열반에는 장애가 없으니까, 무상하고 허망함이 없으니까 오직 즐거움뿐이다. 그래서 극락이라고 그런다. 지극히 즐거움의 궁극이다. 정토라는 것은 그 깨달은 지혜로 보면 이 세상에 깨끗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다. 더러운 건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나쁜 건 없어요. 그 나쁜 게 어디서 나왔느냐.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만든 거예요. 그게 정토에요. 그게 부처님이 얻으신 거에요. 해탈열반 극락정토,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彼岸實相 寂滅寶宮 解脫境界 華藏莊嚴 피안실상이요 적멸보궁이요 해탈경계요 화엄장엄이요事事究竟 一切歡喜 西方淨土 極樂世界사사구경이오 일체환희니 서방정토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이 극락세계는, 주제가, 주어가 극락세계인데, 극락세계는 피안실상(彼岸實相)이다. 생각으로 보는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하고, 지혜로 보는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하는데, 극락세계는 지혜로운 피안의 세계다 그거죠. 그리고 극락세계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적멸이라는 말은 생멸이 없다 이게 적멸인데, 고요할 적자, 멸할 멸자, 생멸 적멸, 생멸 없는 보배궁전이다. 생멸은 없는데 좋은 게 많아. 그래서 보배 보자, 집 궁자. 또 여기는 해탈경계(解脫境界)다. 아무런 장애가 없는 세계, 그 경계다. 화장장엄이다. 화장이라는 말은 꽃 화자, 감출 장자, 꽃은 공경이라는 말이고, 온갖 공덕이 모인 그런 걸로 장엄되어 있다, 꾸며져 있단 말이죠, 화장장엄. 그리고 사사구경(事事究竟)이다. 이 생각의 세계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마지막이 있고, 이게 생각인데, 이 지혜는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이 없어요. 오직 그거, 그거뿐이에요. 그래서 시작과 종말은 생각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생각이 시작이라고 해서 그게 시작이 아니고 생각이 마지막이라고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 절대로 아니에요. 딱 그거 하나뿐이에요. 이거는 그냥 딱 이거지, 이게 뭐 언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언제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사사가 구경이라. 일 사자나 물건 물자나 똑같은 말인데 사는 물이요, 물은 사요, 사물인데, 딱 이게 그냥 구경인 거예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런 생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진실되게 생각불급처, 사량불급처(思量不及處), 진실경계다. 이걸 구경이라고 그래요. 구경열반. 구경이라는 건 그 이전도 없고, 그 이후도 없다. 그냥 그게 전체로 진실이다, 이 소리예요. 이게 깨달은 세계에요. 사사가 구경이다. 딱 그게 진실이고 그거 이상없다. 근데 생각이 이거는 뭐고 저거는 뭐고, 이건 태어나는 거고 이거는 죽는 거고, 이걸 전부 다 의식사량이라고 그러는데, 의식은 생각이거든요. 사량은 생각한다는 소리예요. 생각으로 생각하는 거지, 진실 경계는 사사가 구경이다. 물건물건마다 그게 절대적이라는 소리예요. 그래서 큰스님들 법문할 때 이런 막대기 같은 걸 이렇게 보이고요, 또 쿵 쳐서 소리를 내고 이래요. 소리 나는 거 그것뿐이고, 보이는 거 그것뿐인 거예요. 그게 구경인 거예요. 그런데 생각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왜 저러나’ 그 행위를 분석을 하고 평가를 해요. 분석 평가는 전부 생각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분석 평가 이건 의식의 산물이에요. 극락세계가 이러니 가기가 쉽지 않아요. 분석으로 가려고 그러고 평가로 가려고 하면 못가요. 바로 이 진실로 가는 거거든요, 진실로. 그리고 사사가 구경이요, 일체가 환희(一切歡喜)다. 즐거움이라는 게 환희인데, 어디에 즐거움이 있고 어디에 즐거움이 없느냐. 모든 것이 다 즐거움이다. 죽으면 죽는 대로 즐겁고, 살면 사는 대로 즐겁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잠을 자면 잠을 자는 대로,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일체가 환희로운 세계. 피안실상 적멸보궁 해탈경계 화장장엄 사사구경 일체환희 이런데 여기가 서방정토 극락세계다. 서방이라는 건 비유인데, 동아시아에서 동방은 청방이고, 북방은 흑방이고, 남방은 붉을 적, 적방이고, 서방은 백방이라고 그랬어요. 희다고. 청황적백흑. 중방은 황이고, 누르다고. 그래서 이건 비유한 말이에요. 서방은 백방이라. 백이라는 건 뭐냐. 청백이라. 아주 맑고 희어서 다른 잡된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더러운 거 하나도 없는 깨끗한 정토다. 그게 서방정토인데, 그게 극락세계다. 전부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세계다, 이 소리죠. 깨닫지 못하고 사바세계, 의식세계는 무상 허망 생로병사 우비고뇌 그랬는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느냐.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지,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함을 못 느끼면 깨달음은 절대 안 와요. 그리고 뭐가 오냐. 무상하고 허망한 걸 자꾸 연장해서, 무상한 걸 무상하지 않도록만 바라지, 무상 속에 진실이 있는 걸 깨달으려고 안 해요. 그래서 석가모니도 무연중생은 부도중생이라. 인연 없는 중생은 중생계도 못해요. 인연 없는 중생이 뭐냐. 인생의 무상함을 전혀 안 믿고 그 무상만 계속 연장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오래 사세요, 건강하세요’, 그러잖아요. 그게 그 소리에요. ‘건강하십시오’ 그러면 건강할 리가 있어요? 나이 들어서 건강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사람들마다 다 오래 살고 건강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지 사실의 표현은 아니에요. 사실은 나이 들면 아픈 거예요. 그게 사실이고, 바라는 거는 건강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석가모니는 건강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극락세계를 깨달았다 그 말이에요. 그거 참 희안하지. 그런 깨달은 내용을 더 말하면 뭐냐. 前而無始 後而無終 今而無住 常住法界 전이무시하고 후이무종하고 금이무주이 상주법계로다覺智光明 普周遍滿 華藏利海 應現自在각지광명이 보주변만하며 화장찰해에 응현이 자재로다나무아미타불 깨달은 몸이 불신이고, 깨달은 지혜가 불지고,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세계를 불찰이라 그래요. 찰이라는 말은 한자로 번역하면 흙 토자와 같아요. 사찰이라는 찰자가 차트라라는 범어인데 찰이라고 음역을 했어요. 불찰. 꿈을 깼을 때는 막 험한 산악지역이었는데 그걸 딱 깨니까 자기 안방이더라. 그런 거와 같아요. 깨닫기 전에는 전부 이게 나쁜 걸로 가득한 산하대지였는데 깨닫고 나니까 극락정토더라. 그래서 그걸 불찰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그 불신불지를 가지고 불찰에서 마음대로 노니는 걸 그걸 신통이라고 그래요. 신통. 신통은 뭐냐. 불용이다. 깨달은 불의 작용이다. 그 얘기에요. 불신 불지 불찰 불용 그거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데 믿는 사람은 극락세계에 가고, 안 믿으면 못 가. 그러니까 이게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아서 갔지만 그 뒤에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믿고 그 부처님의 인도하는 공덕으로 가거든요. 이런 소리 왜 하나. 안 믿으면 못 간다 겁주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데. 자동차가 아무리 빨라도 안 타면 못 가요. 타야 가요. 그래서 이걸 믿어서 그 가피를 입으면 그게 믿음의 공경인데 어마어마한 가피를 입을 수가 있어요. 어린 애가 저 혼자는 못 가는데 어른 손에 이끌려서 어른에게 업혀서 가면, 어른하고 똑같이 갈 수 있어요. 그게 신심공덕이라는 거예요. 신심공덕. 뒤의 사람들은 신심공덕으로 가는데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아서 이루었다 이 차이죠. 그전에 부산 다닐 때 보면, 부산 파리란 게 있어요. 기차에 올라와 있는데 그 파리가 희안하더라고. 부산 파리가 기차에 들어오면 가는 줄도 모르니까 서울까지 가요. 그게 공덕이에요. 부처님 깨달은 몸은 전이무시(前而無始)하고, 앞에도, 앞 전자, 말 이을 이자, 무시, 시작이 없다. 과거에 시작이 없어요. 후이부종(後而無終)하고, 뒤에도, 미래에도 끝이 없어요. 금이무주(今而無住)하고, 지금도 어디에 머뭄이 없다. 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걸 뭐라고 하냐. 상주법계(常住法界)라. 항상 상, 머물 주, 항상 머무는 법의 세계다.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는 상주법계인데, 그 상주법계는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몸이다 이거죠. 상주일체 불타야중(常住一切 佛陀耶衆), 상주하시는 일체 부처님, 이런 예불문이 있거든요. 상주. 그래서 이 생멸신에서 상주신을 깨달은 것이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 상주신은 과거의 시작도 없고 미래의 끝도 없고 현재 머무는 데도 없어 오직 지혜로만 볼 수가 있어요. 그러면 몸을 딱 깨닫는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변했는데 그걸 깨달을 각자, 지혜 지자, 각지(覺智)라고 하고, 각은 불이니까 불지라고 해요. 각지가 광명(覺智光明)이다. 각지광명. 항상 밝다. 그래서 보주변만(普周遍滿)이다. 널리 두루해서, 넓을 보, 두루할 주, 보주. 변만, 두루할 변, 가득할 만. 화장찰해(華藏利海)라. 그 각지로 보면 티끌 티끌이 전부 극락세계고 물건 물건이 전부 극락세계에요. 이 깨달은 지혜로 보면 극락세계 아닌 데는 없어요. 그런데 생각으로 보면 전부 좋고 나쁜 게 있어 가지고 안 좋아지고. 그리고 생각을 해보면 지금 좋은 게 또 금방 나빠져. 또 지금 나쁜 게 금방 좋아지고. 도대체가 생각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젊을 때는 좋아하다가 나이 드니까 싫어하더라고요. 우리 어머니를 보니까 참 희한하더라고요. 젊을 때는 아버지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고, 나이가 드니까 아버지 안 좋은 소리를 솔솔하더라고요. 그래서 과거에 우리 아버지가 젊을 때 뭐 했는지 나이 들어서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서 다 알게 되죠. 그래서 느낀 게 있어요. 이거 부부간도 절대 끝까지 믿을 수가 없다. 지금 안 해도 나이 들면 무슨 나쁜 소리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 남편도 나이 들면 무슨 나쁜 소리 할지도 모르고. 우리 어머니가 절대로 아버지를 그렇게 굉장하게 봤는데 나이가 드니까 안 하던 얘기를 슬슬 해줘요. 그래서 크게 깨달았어요. 사람 생각이라는 게 절대 이게 오래 가는 게 아니구나. 근데 각지는 광명인데 각지는 생각이 아니에요. 왜 생각이 아니냐면 이거 딱 보면 이게 뭔지 알아요. 아는데, 이게 좋다, 나쁘다는 분별은 없어. 알기만 알고 분별이 없다, 이게 지혜예요. 딱 보면 이거 뭐 안경이라는 것도 아는데, 이게 언제 생길까, 언제 없어진다, 이런 분별이 없어요. 이게 지혜와 생각의 차이에요. 생각은 분별을 하는데, 지혜는 보기만 하고 분별은 없다. 그래서 지혜는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아는 거는 이거는 분별 해석인데, 분별이라는 건 구별하는 거에요, 구별해석. 세간 지식이라는 게 전부 해석이에요. 이거는 자기 생각의 산물이지, 진실 실상이 아니에요. 진실 실상으로 딱 보기만 하지, 허망한 해석은 없다. 그걸 지혜라고 그래요. 저 사람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이거는 해석이에요. 진실실상은 그냥 그 사람 자체일 뿐이에요. 자체일 뿐인데, 내가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있으면 거기서부터 좋고 나쁜 사람이 생기는 거에요. 바라는 대로 해주면 좋고, 바라는 대로 안 해주면 나쁜 거예요. 그런데 각지는 그렇지 않다. 진실뿐이기 때문에.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고. 딱 그 광명뿐이다 이거지요. 각지는 광명이다. 시비가 아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다. 그래서 그게 보주변만이어서 두루하고 가득해요. 화장찰해에요. 좋은 걸로만 가득해요. 응현자재(應現自在)예요. 응현이라는 건 신통인데 신통이라는 건 뭐냐. 보는 데로 다 보이는 거예요, 장애가 없으니까. 어디 갈 게 없고. 한 생각 속에 온 우주가 다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온 우주법계에 다 간다. 구하는 대로 얻는다. 구하는 대로 얻는다는 거는 뭐냐. 이거를 이렇게 좋게 보면 좋은 거에요. 좋지 않게 보면 좋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보는 거지 이 사물에는 좋고 나쁜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물에 물이 없다. 죽음에 죽음이 없다. 고통에 고통이 없다. 내가 느낄 뿐이다. 그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한 생각만 딱 달라지면 우주가 다 극락세계에요. 한 생각이 어리석은 번뇌로 딱 뒤덮이면 좋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불교에서 항상 염송하는 게 나무아미타불도 있고, 마하반야바라밀도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있고. 이게 전부 그 소리에요. 이게 각지광명인데 깨달은 지혜 광명인데 수명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아미타 무량수라고 해요. 그럼 생각은 생겼다 사라졌다 하니까 이 생각이 삶과 죽음이 없는 지혜 광명으로 돌아갔다. 그걸 이제 나무라고 그러는데, 나무라는 건 일심 예경 그 소리에요. 일심으로 한마음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아미타불께 일심예경한다, 이게 나무아미타불. 그리고 이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돌아간다. 이 뜻이 마하반야바라밀, 큰 지혜로 저 피안의 세계에 간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생각에서 가장 높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게 불교에서 항상 외우는 거에요. 나무아미타불, 마하반야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똑같은 얘기에요. 또 신통이라는 건 사무외 딱 들면 여기에 앉아서 온 우주에 가득한 거예요. 석가모니를 생각하면 석가모니불이 눈앞에 떡 나타나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아미타불이 나타나고, 이런 거에요. 佛智廣大同虛空 普遍一切衆生心 불지광대동허공 보변일체중생심悉了世間諸妄想 不起種種異分別 실료세간제망상 불기종종이분별이로다(華嚴經제80卷,入法界品)(화엄경제80권,입법계품)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대방광불화엄경이 80권이 있는데, 그 제 80권 중에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인데요. 불지광대하여 동허공(佛智廣大同虛空), 불지가, 부처님의 깨달은 지혜가 넓고 큰 것이 허공과 같다. 보변일체중생심(普遍一切衆生心), 두루하게 다 살핀다. 실료세간제망상(悉了世間諸妄想)이라. 이 세간의 생각으로 시작이 아닌 걸 시작이라고 하고, 중간이 아닌 걸 중간이라고 하고, 마지막이 아닌 걸 마지막이라고 하고, 좋은 것도 아닌데 좋은 거라고 하고, 나쁜 것도 아닌데 나쁘다고 하고. 이게 전부 세간제망상인데, 세간의 모든 허망한 생각, 이걸 다 알아요. 모르는 게 없는 거다 이 뜻이에요. 그런데 불기종종이분별(不起種種異分別)이라. 가지가지 다른 분별상, 다른 해석상, 다른 차별하는 생각을 안 일으켜요. 그래서 깨달음을 왜 못 얻느냐 하면, 이 분별 차별 해석하는 마음이 앞을 가려서 못 깨닫거든요. 그래서 인문학을 많이 한 사람은 인문학적인 장애가 생겨서 더 못 깨달아요. 책 쓰고 글 쓰고 해석하고 논문 발표하고 이것이 머리에 꽉 차가지고 본인이 해석하지 않으면 살지 못해요. 그냥 단순하게 소리로만 딱 들으면 극락세계인데, 해석을 하면 좋고 나쁘고, 사바세계다 이거죠. 아주 간단히 그냥 단 몇 초 만에 순간적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는데 본인의 그 생각이 장애가 돼서 못 간다. 그래서 불지를 설명할 때 실료세간제망상이야, 세간의 모든 망상을 다 알지만, 불기종종이분별이라, 가지가지 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 그러냐면 지혜실상으로 딱 보고 지혜실상으로 자재만 하지 거기에 분별해서 스스로 빠지지 않아요. 인간은 다 자기 생각에 빠지거든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극락세계를 못 가는 거지, 한 생각을 돌이켜서 지혜실상으로 바로 딱 만나면 극락세계에요.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약인욕구지 삼세일체불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응당여시관 심조제여래 (60華嚴經제10卷, 夜摩宮揭品)(60화엄경제10권, 야마궁게품) 十方諸佛利 莊嚴悉圓滿 시방제불찰 장엄실원만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염념보리심이면 처처안락국이로다나부아미타불 오늘 법문 마지막 구절인데요. 시방제불찰(十方諸佛利)에, 시방의 온 부처님의 깨달은 나라가,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이다. 장엄이 없는 거 없이 다 가득하다. 염념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생각 생각이 보리심이면, 생각에 빠지지 않고 하나의 지혜로 들어가면 이 말이거든요. 보리심이라는 게. 깨닫는 마음, 깨달은 마음, 지금 깨닫는 마음이 보리심이고 깨달은 마음이 보리심인 거예요. 염념이 보리심이니. 하나의 지혜로 들어가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그런다. 그럼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 보리심을 일으킨 그 자리가 극락세계에요. 어디, 여기서 차표 끊어서 어디 가는 게 아니라. 그래서 처처가 안락국이다. 곳곳이 편안하고 즐거운 국토다. 오늘 법문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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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량참법기도] 2월10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2-02-10
마하반야바라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비도량참법 오늘 다 마친 거죠. 다 마쳤습니다. 애쓰셨습니다. 저도 총무스님 전화를 받고 입재하는 날부터 유튜브로 참여를 했습니다. 전체 다 하지는 못하고요. 근무하면서 책상 앞에 핸드폰 켜놓고. 오늘은 자비도량참법, 임인년 새해를 열면서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했는데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게 자비하고 도량하고 참법하고 이렇게 세 가지가 결합해 가지고 이루어진 건데, 참법이라고 하는 것이 참회할 때 참자, 그 참은 지나온 세월 동안에, 내가 무시겁래(無始劫來) 동안에 신구의 삼업으로 지었던 잘못들을 뉘우치고 본인의 마음을 정비하는 거예요. 비유하건대 여기 들어오니까 괜찮은데, 밖에 서 있으니까, 추운 데 서 있으니까 숨 쉴 때마다 안경이 자꾸 서리가 껴요. 성에가, 김이 껴서 잘 앞이 안 보여요. 성에가 안경에 끼는데 따뜻한 데 들어오면은 딱 사라지잖아요. 추운 데 가면은 또 성에가 끼고. 참법이라고 하는 거가 이 안경에 성에 낀 것을 다 사라지게 하는 거와 같은 거에요. 비유하건대 너무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참법이 돼야 된다는 거죠. 형의상학적인 거나 비현실적인 거나 또 신비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참법이 돼야 해요. 그런데 그 참법이 자비도량을 하는 참법이거든요. 자비도량이라고 하는 거는 원래 내가 갖추고 있는 도량이에요. 그 자비도량이라고 내가 갖추고 있는 도량인데, 입김에 성에가 끼듯이 그동안에 자비도량을 자꾸 흐리는, 자비도량을 흩트리는 그런 행위로 인해서 자비도량의 성품을 자꾸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그거를 이제 회복하는 그런 기도 또 발원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게 자비도량참법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원래의 자비도량참법이, 다 아시겠지만, 지나온 과거세에 내가 지은 업을 참회하기 위해서 시작된 게 자비도량참법이에요. 혜공이란 스님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자비도량이 원래 내가 갖추고 있는 성품이다라는 거죠. 원래 이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새롭게 뭔가를 신설하는 게 아니라, 원래 내가 갖추고 있던 건데, 그렇게 성에가 끼고 먼지가 껴 있는, 그동안에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먹었던, 마음 먹음으로, 마음 씀씀이로 인해 생겼던 것들을 이 10권의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쭉 씻고 나가는 과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자비도량참법 하다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하냐면, ‘스님 내 얘기 같아요.’ 이런 얘기를 많이 해요. ‘제 얘기를 여기에 써놓은 것 같아요.’ 그렇게 와닿는 사람은 자비도량참법을 참 잘한 거예요.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자기가 그동안에 잊고 있었던 내지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서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것은 아주 자비도량참법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유튜브로 보거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신도분들은 이번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이걸 통해서 어떤 기도를, 어떤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하셨나요. 지금 현상적으로 보면 우리 도량에, 우리 도량이라는 게 우리 생활 터전인데, 우리 터전에서 그래도 제일 먼저 좀 해결해야 될 거는 이 바이러스가 빨리 좀 가라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오늘 보니까 5만 명이에요. 이게 10만 명까지 가고 최대는 30만 명까지 간다는데요. 그러면서 이제 일상으로의 회복이 빨라질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게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근데 그렇게 반작용이 많으면 거기에 따른 작용들도 있기 때문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다만 이제 그럴수록 이 고비를 우리가 지혜롭게 좀 잘 넘겨야 되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위생이라든지 그리고 지침을 잘 따라가지고 지혜롭게 건강하게 넘겨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마는. 참 고비고비마다, 벌써 3년째니까요. ‘다음에 오면은 아마 코로나가 끝날 거다’ 기대를 하고 있으면은 와장창 이렇게 또 숫자가 많아지고. 그래도 이번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4, 5월 적어도 부처님 오신 날쯤 되면은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일상화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보고, 또 좀 더 욕심을 내보면 ‘이번 부처님 오신 날은 연등 행렬을 하면서 연등을 손에 손에 들고 모든 신도들이 도량을 함께 돌면서 등을 좀 밝혔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도 같이 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 자비도량참법으로 우리 도량에 우선적으로 이런 바이러스가 좀 빨리 소멸해서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됐고요. 또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우리 신도분들은 아마도 각자가 다 다른 발원과 원력들을 세우셨겠죠. 그런데 그런 소원과 원력들이 이루어지려면 자비도량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요소를 해결을 해야 돼요. 명확하게 파악을 해가지고. 그럼 자비라고 하는 도량이, 자비 도량이 내 마음의 도량일 수도 있고, 또 진관사처럼 이렇게 도량을 꾸미는 것도 도량이라고 하고, 여러분들은, 우리 신도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이 도량이에요. 도량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을 모셔서 우리가 예불을 드리고 공양을 올리는 것도 도량이지만, 부처님이 머물러 있는 곳은 다 도량이란 말이죠. 여러분이 이제 집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부처님이 이렇게 계시니까 그곳도 도량이다. 광의적인 개념에서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근데 어떤 도량이 자비라고 하는 거는 뭐냐. 자비는 우리 불자들이 누구나 다 알고 다 이해하고 있는 거지만, 좀 더 쉽게 이해하자면 맑고 밝은 거예요. 이 자비라고 하는 거는 따뜻하고 또 온화한 거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그게 자비 지혜라고 표현을 하죠. 자비라고 하는 거는 긍정적인 마인드에요. 상대방을 어여삐 봐주고 나 스스로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도량을 꽉꽉 채워 나갈 때, 가득가득 채워나가는 거 그게 자비도량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람을 대하고 일상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요. 왜 그렇지 못하냐. 이 세 가지 때문이에요. 첫 번째가 탐욕이에요. 탐욕. 탐욕 때문에 자비도량이 흩트러지는 거죠. 그럼 탐욕이 뭐냐. 그건 좀 있다가 같이 알아보기로 하고요. 두 번째는 번뇌. 탐욕도 번뇌, 큰 개념으로는 탐욕도 번뇌지만, 여기서 말하는 번뇌는 걱정이에요. 걱정. 걱정과 염려. 세 번째는 망상이에요. 망상. 이게 다 같은 개념, 같은데 좀 달라요. 그래서 이거를 잘 우리가 알아야지, 내가 알게 모르게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에 지금 오랜 습기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어요. 탐욕은 뭐냐 그러면 탐은 일종의 탐내는 거잖아요. 내 것이 아닌데 탐내는 게 탐이에요. 탐낸다. 욕심내는 거잖아요. 그 욕은 뭐냐. 탐욕할 때 탐은 내 것이 아닌데 내 걸 만들려는 거고, 욕은 노력한 만큼만 얻어야 하는데 노력한 이상으로 뭔가를 바라는 걸 욕이라고 해요. 탐욕은 뭐예요.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을 내가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것, 그게 탐욕이라는 거죠. 우리가 이제 일상생활에서 바라는 욕구하고 탐욕하고는 아예 색깔이 다르죠. 이 탐욕 때문에 사람이, 마음이 사나와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따뜻한 우리 마음들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탐욕이 올라오면 마음은 도리어 불이 나는 것 같지만 마음은 더 굳어진다, 차가워져요. 그다음에는 두 번째가 번뇌인데, 걱정하고 염려하고.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질병 중에 하나가, 마음 질병 중에 하나가 걱정과 염려예요. 이게 습관화돼서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걱정이 너무 많아요. 또 염려가 너무 많아요. 그게 일상화 돼 있고. 그래서 대표적인 게 ‘죽겠네, 죽겠네’ 그러잖아요. 죽겠네. 죽지도 않으면서 ‘죽겠네’ 그래요. 근데 그런 것들이 이제 ‘습관화되기 때문에, 저도 가끔씩 ’힘들어 죽겠네‘ 이 얘기 잘합니다. 힘들어 죽겠네. 근데 그거는 걱정이 그 안에 다 녹아 있어요. 염려, 걱정이. 근데 실제로 그 걱정과 염려가 현실적으로 물론 문제가 돼서 대립이나 갈등이나 여러 가지 부딪침들이 있지만, 대부분이 관념적으로 생각으로 걱정하고 생각으로 염려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이거를 내려놔야 되는데 염려와 걱정이 한번 올라오게 되면 그거는 그 흐름으로 계속 끌려가게 돼요. 염려 걱정을 하는 거는 자꾸 알아차려야 되는데 ‘내가 걱정거리다, 걱정이 있다’라고 하면은 걱정하는 나를 자꾸 봐요. 자비도량참법을 기도할 때 제 개인 경험으로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첫 번째 얻어지는 힘이 뭐냐 그러면, 시선이, 관점이 밖의 현상에 가 있던 관점이 내 안으로 들어와요. 특히 뒤에 6, 7, 8, 9권 가면, 앞에서는 잘 모르던 게 뒤에 6, 7, 8, 9권쯤 가면, 이 시선을 내 안으로 두게 돼요. 나의 안이비설신의를 살피게 되고, 나의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살피게 되고, 그런 구조로 돼 있죠. 그 힘을 그대로, 이 걱정과 염려로 내 일상에서 이렇게 꾸며져 있는 그런 마음들을 자꾸 거둬들이는 연습을 해야 돼요. 그래야 자비도량이 회복될 수 있어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는 어떠한 기원이나 또 소원을 성취하는 발원도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자비도량을 회복하는 게 핵심이에요. 그 자비도량참법을 회복하면 그 외에는 자연스럽게 성취가 된다는 거예요. 마치 밖에서 안경에 서리가 껴서 앞이 잘 안 보이는 사람이 따뜻한 방에 들어오면 성에도 안 낄뿐더러 앞이 잘 보이듯이, 내 마음의 그런 자비도량만 회복하면 사물이 여실하게 다 보인다. 또렷하게 보고, 좀 더 쉽게 말하면 끌려 다니지 않는다. 걱정이나 염려로 끌려가지 않는다. 근데 이 걱정이나 염려는 어디서 오는 거냐. 불신에서 와요. 불신, 믿지 않음, 믿지 못함으로. 이거는 거의 100% 비례 돼 있어요. 본인을 믿지 못하면 걱정하게 되고 또 염려하게 되요. 이런 얘기 하면 또 오해받을 것 같아 조심스러운데, 요즘에 무속이 유행이잖아요. 이제 정초가 되니까 점을 보러 한 번씩 가시잖아요. 신수 보러 왜 가냐 이거예요. 궁금하니까 가는 거거든요. 걱정되니까. 올해 혹시나 나쁜 일이 있으면 피하려고. 근데 우리가 가끔 취미로 한 번씩 하는 건 괜찮은데, 너무 거기에 빠져가지고 지침이 되는 사람이 있어요. 생활의 지침. 자비도량참법이 생활의 지침이 돼야 되는데 그런 게 지침이 된 분들도 내가 주위에서 가끔 봅니다, 불자들 중에. 근데 왜 그러느냐. 걱정과 염려 때문에 그래요. 그 걱정 가진 분들 때문에, 그 신점이나 점을 보러 다니는데 왜 그러느냐. 그 마음 바탕을 쭉 따라가 보면 자기를 못 믿어요. 불신할 때, 믿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불신은 부처님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스님들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더 큰 문제는 자기를 못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못 믿으니까 걱정이 되고 염려가 돼요. 요즘에 현대인들이 이 걱정과 염려, 그로 인해서 자기 생활에 만족도가 떨어지고, 자기 자신을 못 믿으니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들에 대해서 동경하게 되고, 끊임없이 나보다 조금 더, 나보다 좀 더 잘 나고, 나보다 좀 더 잘 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그러면은 굉장히 동경하죠. 동경한 만큼 어떻게 돼요. 마음은 허전해져요. 허전해지니까 걱정과 염려가 되고 생활에 불만이 나게 되고 이게 여러 가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염려와 걱정을 내려놔라>라는 것은 결국은 <나 자신을 믿어라>라는 거에요. 조금 어려운 얘기인데 대승기신론이라고 하는 논서가 있어요. 거기 보면 사신(四信) 오행(五行)이 나오거든요. 네 가지의 믿음과 다섯 가지 행. 네 가지 믿음의 첫 번째가 근본신이라고 그래요. 근본신. 근본신이 뭐냐.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믿냐. 자비도량참법하는 사람은 ‘내가 이미 자비도량을 갖추고 있다’라고 믿고 시작해야 돼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자비도량참법을 하는데 내가 원죄가 있어서, 죄가 많아서, 업장이 두터워가지고 그걸 씻어낸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원래 판을 바꾼다는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자비도량을 갖추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씀씀이가 무시겁래로 살았던 그런 찌꺼기 내지는 그런 때를 씻어낸다라는 마음 바탕으로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자비도량이라고 하는 걸 믿어야 되는 거죠. 여러분이 진관사에 아침에 오려고 출발할 때 어떤 마음을 먹고 옵니까. 진관사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아마 가면은 총무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실 거야, 그런 믿음이 있잖아요. 와서 또 총무스님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주지스님 보면 넉넉해지고 그런 게 있잖아요. 부처님 보면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것처럼 그런 믿음으로 출발해야 된다는 거죠. 믿음으로 출발해야 된다. 두 번째는 염려와 걱정, 번뇌죠. 이거를 좀 내려놔야 된다. 그래야 자비 도랑이 생겨요. 세 번째로는 망상이에요. 망상. 망상은 현실적으로 나를 명확하게, 아주 냉철하게 본인의 생활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생활을 해야 되는데, 붕 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은 나는 이 정도의 생활의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인정하기 싫어가지고 더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관계라든지 생활들이 얽히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망상은 하지 말아야 돼요. 망상은 다른 말로 몽상이라고 그래요. 몽상. 꿈속에서 뭔가를 짓고, 꿈속에서 아무리 로또가 맞아도 꿈 깨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그래서 망상을 내려놔요. 망상을 한 마음을 자꾸 내려놔요. 내가 지금 망상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점검을 해봐야 됩니다. 내가 탐욕에 지금 물들어 있지 않은가. 내가 걱정과 염려에 찌들어 있지 않은가. 내가 망상 내지는 몽상에 빠져 있지 않은가. 이 세 가지를 점검을 쭉 해서 이 세 가지를 잘 내려놓으면, 정리가 되면 그대로 자비도량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억지로 갖추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비도량은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 근데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너무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2022년 새해가 열렸는데 걱정들을 많이 해요. 물론 이제 코로나라든지 여러 가지 외부적 환경에 의한 염려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자신에 대한 염려들이 많죠. 그런 염려들을 좀 내려놓고, 그 내려놓은 마음에 자비도량을 세워나가요. 정월달에 임인년을 맞아가지고 이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1년을 내가 어떻게 설계할지, 어떻게 꾸며갈지를 계획하는 아주 좋은 시간이라고 봅니다. 자비도랑참법 기도를 하면 거기서 적어도 한 구절이라도 내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어요. 자비도량참법하다 보면 각자가 자기 근기마다 딱 와 닿는 구절이 있어요. 열 사람이 하면 열 사람이 다 달라요. 그러면 그걸 찾아야 돼요. 어떤 분들은 자비도량참법 하면서 하염없이 우는 분들도 계세요.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내가 정말로 그동안에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잘 못 썼구나.’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도 있죠. 근데 그중에서도 이제 정말 자기를 울렸던, 마음을 울렸던 그런 구절들을 잘 캡처해가지고, 요즘에는 핸드폰에 기록할 수 있으니까, 사진도 찍을 수 있으니까, 그런 거를 찰칵 찍어가지고, 마음으로도 찍고, 핸드폰으로도 찍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거를 되뇌면서 자비도량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된다. 자비도량을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꾸준한 되돌림표를 통해서 내가 자비도량기도를 할 때 그 마음들을 잊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저번 주에는 입춘 기도도 하셨을 겁니다. 입춘 기도 때는 입춘방을 붙이잖아요. 입춘대길 건양다경 이런 거 붙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제 그런 말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지황금출. 소지라는 말은 청소한다는 말인데, 봄이 와서 소지하니 황금출, 황금이 나온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이거를 금방 증명할 수가 있어요. 소파 밑이나 장롱 밑이나 한번 쓸어보세요. 10원짜리 동전이라도 하나 나와요. 잊어버렸던 신용카드가 나올 수도 있어요. 그것보다도 우리 마음을 잘 소지하니까, 청소하니까, 쓸고 닦으니까 거기서 황금이 나오더라. 황금은 뭐예요. 바로 우리가 본연에 가지고 있던, 본래 성품, 본래 부처라는 그리고 그 본래 부처가 다른 말로는 자비도량이잖아요. 본래 부처가 사는 데가 자비도량이란 말이에요. 자비도량에서만 부처님이, 본래 부처님이 나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마음 정비를 잘하면 지금 얘기했던 이 세 가지 탐욕, 걱정과 염려, 망상, 이 세 가지만 잘 정비를 해도 거기서 황금이 나온다는 거예요. 황금이, 부처님 성품이 나온다, 자비도량이 나온다. 여기 황금은 자비도량을 얘기해요. 여러분이 내 안에 자비도량이, 그 자비도량 안에, 내가 그동안에 놓치고 있던 ‘내 아내도 내 남편도 내 부모님도 내 자녀들도 내 자비도량 안에서 내가 돌봐야 되겠구나’라는 마음을 내면 보는 시야가 달라지잖아요. 내 자비도량을 가꾸면 말 그대로 진정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는데, 자비도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도량으로 초대하지 않고, 번뇌가, 욕심이, 걱정과 염려가 또 망상이 지글지글하는 거기에, 그 마음으로 남편을 초대하고 아내를 초대하고 자녀를 초대하고 또 이웃의 인연들을 초대하니까 힘든 거에요. 힘이 안 든다는 게 이상한 거에요. 힘들게 그렇게 하지 말고, 자비도량을 열어라. 자비도량을 열면 거기에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스스로의 믿음과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법당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고, 가장 일반적으로 요즘에는 지장보살님하고 관세음보살님이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저는 이 두 분 보살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분을 비증보살(悲增菩薩)이라고, 비증, <자비로서 중생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분을 자비할 때 비자, 증명할 때 증자 써가지고 비증보살이라고 해요. 문수, 보현은 지증보살(智增菩薩)이라고 해요. 지혜를 우리에게 증명하는 분이다. 근데 비증보살이, 이 두 분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 두 분이 특징이 있는데, 지장보살님부터 말씀을 드리면, 파란 머리에 지팡이를 가지고 계세요. 그 지팡이를 가만히 보면 큰 고리가 이렇게 세 개가 있고, 그 고리 두 개 양쪽에 3개씩 동전만한 고리가 달려있어요. 근데 그 지팡이가 뭘 의미하냐. 육바라밀이에요. 지옥문 앞에서 지옥에 오는 모든 중생들을 육바라밀로, 바라밀을 연설하면서, 마음을 전환시켜준, 그런 마음을 바꾸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신다고요. 여러분도 자비도량을 꾸려가면서 뭔가 의지하는 게 필요하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지장보살의 이 육환장, 여섯 고리가 있는 이 지팡이를 마음에 다 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힘들 때마다 이 지장보살의 지팡이가 여러분을 지탱해 줘요. 또 하나는, 그 지팡이를 딱 이제 마음에 지니고, 그다음에 관세음보살님은 가만히 보면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화려한 화관을 쓰고, 그 화관 중앙에 부처님이 한 분 계세요. 근데 그 부처님이 어느 부처님이냐 그러면은, 아미타 부처님이에요. 관세음보살님의 덕성 중에, 이근원통 또 대자대비니 여러 가지 덕성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내가 보기에는 으뜸인 것은 어딜 가든 어느 때든 항상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내가 어떤 생활을 하든 간에 항상 이마에는 아미타부처님을 딱 이렇게 모시고, 아미타 부처님이 여는 복락 세계의 보살로서 계시는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미관 위에 쏙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다가 자비도량을 탁 새기세요. 타투라고 하나, 문신을 새기는 거 있잖아요. 이걸 하나씩 새겨줄까요. 자비도량이라고. 근데 지금은 안 보이는데 다 새겨져 있어서, 여기에 제3의 눈이 생긴 거예요. 제3의 눈이. 여기 자비도량이 다 써 있어요. 마음에는 지장보살님의 그 든든한, 내가 힘들고 어려운 갈래로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는 지장보살님의 지팡이가 있는 거고, 내 이마에는 항상 나의 앞길을 밝혀줄 수 있는, 자비도량을 열 수 있는 자비도량의 제3의 눈이 이 순간에 딱 생긴 거라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올해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 살다가 아무 일이 없겠지만, 일이 생기면 진관사 와서 우리 총무스님한테 얘기하면 다 해결돼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걱정이. 걱정하지 말고 자비도량을 잘 마음으로 열어서 모든 일을 성취하는 그런 불자가 되시기를 발원하면서 오늘 이야기 접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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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하례법회] 2월6일 신년하례법회 주지스님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2-02-06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네 번의 설날을 맞이했습니다. 음양의 설날과 절기의 설날. 양력의 설날은 양력 1월 1일이고, 음력의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입니다. 그리고 절기로는 동지의 작은 설이라고 한 번 쉬었고, 입춘날 새해를 맞이해서 <이제 큰 복이 돌아오십니다>라는 의미의 새해를 지났어요. 그래서 네 번의 새해를 지내면서 처음에 하는 인사가 뭐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입니다. 그런데요, 광덕스님하고 일타스님께서 하신 세배는 <아송구 군영신(我送舊君迎新)>이에요. <나는 묵은 것을 보내니 그대는 새것을 맞이하소서>. 송구 신축 영신 임인년이에요. 올해가 임인년이죠. 흑범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그냥 백범이 아니에요, 흑범이에요. 용은 오복을 불러들이고, 호랑이는 삼재팔난 재액을 면한다고 해요. 그래서 보통 민속화 같은 데서 호랑이 그림을 <재액난을 다 없애주십시오>하는 의미로 딱 정면에 붙인다든지 합니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라고 그러죠. 왼쪽에는 청룡이 지켜주고 오른쪽에는 백호가 지켜주는데, 올해는 임인, 흑범이에요. 그래서 코로나19도 잘 견뎌내고, 모든 것을 다 견뎌내 가지고 아주 용감무쌍하게 헤치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진관사에서는 기도로 평생을 일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기도라는 것은 금방 생겨나는 게 아니고, 안개 속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내 몸에 가피가 됩니다. 그래서 삶이 그대로 수행이고, 수행이 그대로 삶이에요. 특별히 기도도 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거는 예외로 더 열심히 하자는 의미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이 단조로워야지 모든 게 단조롭습니다. 내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게 습관화되는 거거든요. 습관화되는 내 몸이 그대로 인생이에요. 그럼 우리는 좋은 습관을 쌓아야 되겠죠. 항상 기도하는 자세,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 그래서 종교의 최고의 정의는, 호법부장도 하셨던 세영스님께서 최고의 종교는 친절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자비도 있어야 되지만, 친절 지혜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비는 미소로 전개되고, 친절은 지혜로서 표현돼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을 위해서 배려하고 남을 위해서 좋은 말 하고. 그래서 우리가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정삼업진언 하죠. 제일 많이 일으키는 업이 구업이에요. 부처님은 금구성언이라 해가지고 하시는 말씀 말씀보다 아주 금구의 성언인데, 중생은 하다 보면 그게 구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피 격언에 보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세 가지를 생각해 봐야 된다고 그랬어요. 첫 번째 물음은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거예요. 진실한가. 두 번째 물음은 필요한가. 세 번째 물음은 친절한가. 이 세 가지, 진실의 문, 필요의 문, 그다음에 친절의 문인데, 이 세 가지를 감당할 수 없으면 침묵의 방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결론이 뭐예요. 말하지 말라는 거죠. 우리 그 묵언표찰 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면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아요.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라고 하듯이, 말로써 우리는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말로써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되면서, 서서히 기도하면서, 1년 내내, 올해는 내가 무엇으로 화두를 삼을까, 명상을 할까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눈에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귀에는 익힌 걸 좋아하거든요. 노래를 많이 하는 사람은 노래 가사 들으면 하루 만에 외워요. 그렇지만 익히지 않은 거는 안 익혀져요. 불경을 독송하려면요 안 익혀져요, 안 익혔기 때문에. 제가 요새 경전을 좀 독송하다 보니까 그 경전의 공덕이 내가 함으로써 모든 사람 주위가 밝아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여러분들이 천수경을 한다든지 관음경을 한다든지 법화경을 한다든지 금강경을 한다든지 그 경의 공덕이 모든 사람에게 다 누려졌으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야 되겠죠. 그렇게 꼭 하시는 걸로 합시다. 그래서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그다음에 노인의 즐거움이 되고 위급하고 어려운 때에 양식이 된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어떤 책이든지, 경전을 독송한다든지, 책을 본다든지, 여러 가지 내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를 보면은 다 이익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는 입에 뭐 한다고요? 염불하듯이 좋은 말하고 좋은 생각 내시고요. 왜냐하면 생각이 행동이고 행동이 습관이기 때문에, 그 습관이 우리 몸이에요. 그러니까 좋은 습관 지어가지고 1년 내내 무탈하시고요. 자비도량참법기도도 사실은 십악업을 녹이는 기도예요. 그러니까 과거무시겁래에, 제가 그랬잖아요, 내 안의 업장을 소멸해가지고 드러내는 기도가 바로 백신이라고. 그러니까 우리 열심히 하고 열심히 정진 합시다. 이 금강저를 오늘 선물한다는데, 금강진언 <옴 오륜니 사바하>아시죠. 제가 법인할 때 항상 금강저를 가지고 있죠,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악이 나한테 침범하지 말아라> 이런 의미예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 내 마음에 나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 탐진치 삼독까지 다 없애면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서 열심히 합시다. 부처님 되십시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