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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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3일 음력 1월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2-03
임자년 임인년, 임자년 지나갔네요. 임인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법문은 새해맞이 삶의 이야기, 새해맞이 삶의 이야기, 이런 내용입니다. 한자로는 연초생활담론, 연초생활담론 그렇습니다. 불교의 목표 목적은 현증수복(現增壽福), 현세에는 수명과 복덕을 증장시켜서 기르고, 당생정찰(當生淨刹), 당내의 내생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구경성불(究竟成佛), 마침내는 성불해서, 전법도생(傳法度生),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표이고 목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복을 닦기를 기원하는 축원을 계속합니다. 그래 가지고 축원문에 보면 무병장수 축복을 해요. 무병장수 복을 빌어요. 병 없이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는 그런 축원. 그다음에 부귀공명 축원. 무병장수 부귀공명.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고 좋은 이름 남기고. 그다음에 자손 창성, 창은 빛날 창자인데, 자손이 빛나고 왕성하고, 복덕구족, 지금 부모나 자손이나 다 복덕이 구족하고, 천재는 설소(千災雪消)하고, 천 가지 재앙은 눈처럼 녹고, 만복은 운흥이라(萬福雲興), 만가지 복덕은 구름처럼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을 계속하거든요. 이것이 복덕축원이에요. 열심히 살다. 성공하다.쪽팔리다. 부끄럽다.창피猖披하다(猖 : 옷 입고 띠 매지 않은 모양 창. 披는 被義) (猖披 衣不帶之貌 狂妄偏邪 漢韓大辭典9. 233) (창피 의부대지모 광망편사 한한대사전9.233)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삶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잘 사는 삶이 어떤 삶인가. 열심히 살다, 열심히 성공하다,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는 삶, 잘 사는 삶이라고 하거든요.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다. 성공에는 여러 가지 좋은 거 다 성공이에요. 학업 성공도 성공이고, 사업 성공도 성공이고,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도 성공이고, 온갖 것이 다 성공이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이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문제는 행복이다.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더라. 열심히 살아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살다 보면 뭐 남는 게 없더라.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저 행복하고 싶다. 성공하고 싶지도 않고 열심히 살고 싶지도 않고 행복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도 많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행복하고 그게 좋은 거예요, 하여튼. 열심히 살고 성공하고 행복하고. 근데 사람은 참 오묘한 것이 돼서 부끄러움도 알고요, 성공 속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이 또 굉장히 나를 괴롭혀요. 우리나라 근래에 보면 대한민국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라는 게 있는데,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 그 사람을 등용할 때 청문회를 해보면, 거기에 지명돼서 나오는 사람들이 다 성공한 사람들이에요. 학벌 좋고 지금까지 경력 좋고, 업적 좋고 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위공직자 후보자로 나와서 청문을 받는데, 전부가 다 ‘부끄럽습니다.’라는 말을 해요. 부끄럽습니다. 그거 안 하는 사람 없어요. 또 한마디 더 해요. ‘그때는 그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이 부끄럽다, 관행이다, 이 말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이라는 게 사람에게 있다. 성공 그 속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공도 하고 부끄럽지도 않고 행복하기도 하고, 이게 가장 잘 사는 건데 그렇게 쉽게 될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 이 부끄러움이 ‘쪽 팔린다’는 말이 있어요 또. 쪽 팔린다. 그래서 그 쪽이라는 거는 얼굴을 좀 세속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에요, 그때는 쪽이. 저쪽 저쪽 그게 아니라 얼굴, 사람의 얼굴을 속되게 표현할 때 쪽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누구를 만나서 얼굴을 못 들 그런 처지가 되면 쪽을 못 쓴다. 그러니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 말이거든요. 쪽을 못 썼다, 이 말이에요. 그 쪽 팔린다라는 건 팔려 버리면 없어져요. 그래서 그 말은 체면이 깎인다. 그걸 쪽 팔린다고 그래요. 체면이 깎인다.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고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게 얼굴이라는 게 뭔가 자기 자신을 얼굴로 표현하는데 그 얼굴 안 서는 일이 종종 있다. 체면 안 선다, 쪽 팔린다, 이런 거고요. 또 창피스럽다(猖披)는 말이 있어요. 창피스럽다. 창피라는 거는 한자인데 그게 개 견변에 빛날 창자한 건데, 개처럼 움직이는 걸 창자라고 그러고, 피는 그게 이불 피자와 같은 건데. 그게 뭔 말이냐면 개가 옷 입듯이, 허리띠 매지 않고 옷 입는 걸 창피라고 그래요. 옷은 입었는데 허리띠를 안 맸어. 그럼 그 모습이 아주 이상하거든요. 그걸 창피라고 그래요. 그래서 창피라는 걸 한한대사전에 찾아보면 창피는 의부대지모(衣不帶之貌)라, 옷은 입었는데 허리띠를 매지 않은 모습이다. 한번 상상을 해봐요. 옷 입고 허리띠를 안 맸다. 그 아주 이상할 거 아니에요. 그런 모습을 느낄 때 창피스럽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창피라는 게 이게 뭐냐. 근데 인터넷에서 이상한 사연을 하나 봤는데, 어떤 예비 시어머니 될 사람이 예비 며느리한테 며느리 자격 시험을 보겠다고 A4 용지로 한 세 장을 글을 만들어서 문항을 쭉 썼어요. 그런데 첫째 문항이 시어머니한테 전화하기 이건데 첫 번째 3일에 한 번, 두 번째 일주일에 한 번, 세 번째 한 달에 한 번,네 번째 두 달에 한 번 이런 문항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그다음에 아들한테 밥 차려주기. 매일같이 뭘 차려주고 뭘 차려주고. 그래서 그걸 보고 예비 며느리 될 사람이 말을 했대요. 여기 보기에 하나가 없다. 뭐냐. 한 번도 안 차려주기. 한 번도 전화 안 하기. 이게 있어야 되는데 이게 없어서 난 볼 수가 없다고. 그러고 하는 말이 전화 한 번도 안 하고 밥 한 번도 안 차려주고 이거 있으면 내가 볼지도 모르는데 이게 없어서 난 안 본다고. 그러니까 그 예비 시어머니 될 사람한테 예비 며느리 될 사람이 ‘이거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도 돼요?’ 물었대요. 그러니까 딱 하는 말이 ‘창피스럽게 그걸 왜 올려요.’ 그러더래요. 여기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며느리 자격시험 보는 건 욕심인데, 자기 욕심이 외부에 알려지는 건 싫어하는 거예요. 욕심이 알려지는 걸 창피스럽다고 그래요. 이게 인간이에요. 자기가 시험 본 답안지인데 그거 뭐 정당하고 떳떳하면 인터넷에 아무리 알려져도 상관없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알려지는 건 창피스럽다고 그러고, 며느리 자격 시험은 보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 말 듣고 내가 생각한 게 있어요. 나 같으면 이거 자격시험 보기 전에 예비 시어머니 면접부터 보겠다고. 면접부터 보겠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쫙 해서 뭐라고 대답하는지 보자고, 그래 나와야지, 그거를 그냥 안 본다고 그러는 건 너무 얌전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성공에는 욕망인데, 자기 욕망 속에는 창피스러워하고 쪽 팔려 하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최대한 줄이면서, 성공도 하고 행복도 하고 또 복도 받고. 이것이 잘 사는 길이고 이것이 아주 복되게 사는 길이거든요. 세상살이 : 인생 없이 세상 살기 인생살이 : 인생으로 세상 살기 멋지게 살기! 근데 어떤 큰 스님은 ‘지금 행복하십시오’ 이런 가르침을 주신 분이 계세요. 지금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오늘은 안 하고 내일은 하고 그게 아니라, 지금 행복한 것이 그게 기도고 그게 정진이거든요. 그리고 그 전에 경봉 큰스님, 통도사 경봉 큰스님은 늘 무슨 말씀을 했느냐면, ‘멋지게 살아라, 멋지게 살아라’ 이런 말을 계속 하셨어요.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멋지게 하고 가거라. 지금 행복하다는 말도 참 중요한 말씀인데, 누구나 다 이루기 어렵고, 멋지게 살라는 말도 우리 이 느낌의 멋이라는 걸 느끼고 있거든요. ‘야 멋있다. 멋지다’ 이런 말을 써요. 그런데 또 겉멋 들면 안 된다 이래요, 겉멋. 그래서 멋도 참 멋이 있고 겉멋이 있는데, 이게 분수에 맞고 능력에 맞고 자기 내면과 외면이 같이 맞을 때 그게 멋지고 멋있는 거거든요. 멋이 아주 매우 높을 때 그걸 멋지다라고 표현을 해요. 멋있다보다 더 강력한 말을 멋지다, 멋 중에 최상의 멋을 멋지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가. 멋지게 살려면 구하는 것이 없이 살아야 돼요. 구하다 보면, 행복을 구해도 행복의 노예가 돼요. 재물을 구하다 보면 재물의 노예가 되고, 사람을 구하다 보면 사람의 노예가 되고, 구하는 건 전부 얽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멋지게 살려면 아무 데도 구하는 거 없고 얽매임 없이 살 때 그게 멋진 거거든요. 釋尊掩關 達磨面壁세존엄관 달마면벽 그래서 누가 멋지게 살았나 석가세존이 마갈 엄관하시고,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엄관했다. 이 관이라는 거는 자기 안이비설신의, 보고 듣는 감각기관인데, 구하려면 감각기관을 항상 열어야 돼요. 뭐가 있나 눈으로 살피고, 뭐가 들리나 귀로 살펴야 돼요. 근데 딱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그리고 본래 자기를 관찰해요. 그러면 본래 자기와 세상의 자기가 딱 조화가 될 때 그게 멋진 거예요. 본래의 나와 세상의 나, 그리고 달마 대사가 소림 면벽이라, 달마 대사가 소림에서 벽을 바라봤다. 벽을 바라봤다는 건 구하는 마음을 막았다는 소리에요, 그게. 눈으로 구하는 거 막고 귀로 구하는 거 막고 그게 벽이에요.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세상의 나는 앉아 있는 나고, 본래의 나는 그대로 항상 하는 나, 본아와 세아가 딱 조화를 이루어서 아무 데도 매임이 없으니 그걸 일러서 멋지게 사는 거라고 한다. 心如境亦如 無實亦無虛 심여경역여 무실역무허有亦不管 無亦不拘 유역불관 무역불구不是賢聖 了事凡夫불시현성 요사범부(龐居士語錄卷上) (방거사어록권상) 법문할 때 많이 하는 말씀인데, 중국에 방거사라는 분이 있었는데요. 방거사, 당나라 때인데, 그분의 무슨 법문이 있느냐. 유역불관 무역불구(有亦不管 無亦不拘), 유는 사는 건데 사는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고. 관계한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 사는 것에도 전혀 집착이 없어요. 왜냐하면 본래의 나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무역불구라 죽는 것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아요. 이게 멋지게 사는 거예요. 사는 데도 집착하지 않고 죽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유역불관 무역불구 그런데 그게 불시현성(不是賢聖)이라, 현인도 성인도 아니다. 현성이 아니다. 그럼 뭐냐 요사범부(了事凡夫)라. 세상 일에 아무 구하는 일이 없는 평범한 범부다, 이런 얘기예요. 요사범부, 마칠 요, 일 사.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난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는데 이게 참 멋진 거예요. 사는데도 집착하지 않고 죽는데도 구애받지 않고 또 어느 격이 없어. 현인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고 요사범부라. 구하는 일이 없는 평범한 범부다. 그런 법문이 있고요. 浮雲富貴非留意 蝸角功名豈染情 부운부귀비유의 와각공명기염정春日快晴春睡足 臥聽山鳥百般聲춘일쾌청춘수족 와청산조백반성(清虚堂集卷1)(청허당집권) 評曰 鳥聲什麼 法界藏身 無生歌曲 평왈 조성십마 법계장신 무생가곡 聽而復聽 長聲空谷 청이부청 장성공곡 조선시대 서산 스님은 부귀를 뭐라고 봤냐 그러면 뜬구름이라고 봤어요.부귀, 부하고 귀한 것이, 재산과 권력이 뜬구름이다. 왜냐하면 이슬같이 날라가는 게 재산이고 권력이거든요. 그래서 부운부귀에 비유의(浮雲富貴非留意)하니, 뜬구름과 같은 부귀에 생각을 두지 아니하니, 이게 서산스님 자기 인생관이죠. 부귀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와각공명에 기염정(蝸角功名豈染情)가, 공명을 달팽이 뿔로 본 거예요. 달팽이를 보면 이렇게 뿔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좋은 이름 얻는 거는 달팽이 뿔과 같다. 달팽이 뿔과 같은 그런 공명에 기염정, 어찌 감정을 물들이겠는가. 거기에 감정을 두겠는가. 춘일이 쾌청춘수족하니(春日快晴春睡足), 봄날이 아주 쾌청해서 봄 잠이 만족하니, 와청산조 백반성이라(臥聽山鳥百般聲), 산새의 여러 가지 소리를 누워서 듣는다. 이게 서산스님 시인데요. 이게 멋지게 사는 거예요. 부귀도 공명도 아무 상관이 없고 따뜻한 봄날 봄 잠이 만족해. 이게 잠이라는 게 잠자리만 좋다고 잠이 오는 게 아니에요. 꿈자리가 편안해야 이게 잠이 만족해요. 그러니까 꿈자리도 좋고 잠자리도 좋아야 되지, 잠자리는 좋은데 꿈자리가 사나우면 좋은 그 침구를 만드나 마나예요. 근데 봄의 날씨도 좋고 봄 잠도 좋아서 경치도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고 잠도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뭐 하느냐. 여러 가지로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편안히 듣는다. 이런 게 이제 멋지게 사는 겁니다. 이런 게 구함이 없이 즐거운 거. 구함 없이 즐거운 거, 지금 행복한 거 참 멋진 거거든요. 그래서 종범이 거기다가 평을 하기를, 평왈 조성은 십마호(鳥聲什麼), 도대체 이 새 소리는 뭐냐. 법계장신에 무생가곡이라(法界藏身 無生歌曲), 이 법계의 온갖 몸에서 나오는, 장자는 감출 장자, 여러 가지라는 말인데요. 법계의 여러 몸에서 나오는 생멸 없는 가곡이다. 노래다. 불생불멸의 노래다. 청이 부청하면(聽而復聽), 듣고 또 들으면 장성공곡이라(長聲空谷), 빈 골짜기에 소리가 길게 들린다. 이 빈 골짜기에 소리가 길게 들린다는 말은 뭐냐, 이 빈 골짜기라는 공곡은 적멸보궁이라는 뜻이에요. 적멸보궁. 적멸보궁에 이게 뭐냐 적멸보궁에 원광원음이라. 장성이라는 건 둥근 광명 둥근 음성이다. 적멸보궁 원광, 둥글 원자 빛광자, 둥글 원자 소리 음자, 새 소리 하나 들으면 생사 없는 적멸보궁에서 들려오는 우주의 꽉 찬 광명이고 우주에 꽉 찬 소리다. 그렇게 종범이 평을 달아봤어요. 過去中未來 未來中現在 과거중미래 미래중현재三世互相見 一一皆明了삼세호상견 일일계명료 (華嚴經 普賢行品)(화엄경 보현행원)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에 궁금한 게 전혀 없어요. 의심나는 거 전혀 없고 궁금한 거 없고 불안한 거 없고요. 이게 뭐 괴로운 거 없고.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삼세호견(三世互相見)을 얘기를 했는데요. 삼세호상견, 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 아니에요. 상견이라는 거는 호상이라는 건 서로 호, 서로 상 서로서로 본다. 이게 호상견인데, 이게 뭔 소리냐. 이런 지혜가 있는 사람은 미래가 있는데 그 미래가 과거의 미래라는 거예요. 과거의 미래, 과거 중의 미래, 미래는 과거다, 그래서 과거 속의 미래다. 또 현재는 미래 중의 현재라는 거예요. 미래 가운데 현재라는 거예요. 그러면 경문은 과거 중의 미래요, 미래 중의 현재라 이렇게 돼 있는데, 과거 가운데 미래고 미래 가운데 현재다, 이거를 말로 이어서 생각해 보면, 현재의 미래, 현재는 바로 미래다. 그러니까 현재만 떡 보면 미래는 저절로 보이는 거예요. 이게 지혜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또 미래는 과거예요. 과거 중의 미래니까 그 미래를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과거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예요. 또 현재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예요. 현재의 미래고 미래의 과거다. 미래는 과거고 또 현재는 미래다. 그러니까 뭐 궁금할 게 하나 없어요. 무슨 이상할 거 하나 없고 어디 가서 물어볼 거 하나 없어요. 과거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요, 또 현재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게 미래에요. 이렇게 삼세가 서로서로, 삼세를 서로서로 보니 일일이 개명요라(一一皆明了), 하나하나가 다 분명하다, 또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하나를 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궁금한 거 하나 없죠. 미래는 바로 현재고 현재는 바로 미래인데, 미래는 바로 과거다. 과거 봐요 그러면 그게 현재예요. 현재 봐요 그러면 그게 미래에요. 그러니까 지나간 한 100년만을 가만히 연구를 해봐도 앞으로 무슨 일이 돌아올지 훤히 다 알거든요. 멋지게 사는 거예요. 그래서 금년에 기도 잘해서, 처음이 1년이니까 시작이 한 해거든요. 시작을 아주 복되게 하면 1년 내내 복되거든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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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월 27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1-27
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緣生緣滅 五蘊緣身연생연멸은 오온연신이요 無生無滅 眞如法身무생무멸은 진여법신이로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 청정묘국, 극락세계는 청정한 묘한 국토이다. 극락세계 청정묘토를 가는데 어떻게 가느냐. 우리 몸에 생로병사신이 있고 불생불멸신이 있는데, 그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 몸으로 극락세계에 간다. 그 법문이거든요. 연생연멸(緣生緣滅)은, 인연으로 나서 인연으로 사라지는 것은, 오온연신(五蘊緣身)이요, 다섯 가지가 뭉쳐서 이루어진 인연의 몸이요.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낳음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진여, 무생무멸은 진여법의 몸(眞如法身)이다. 진여법,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도 여여상여(如如常如)하고, 그러하고 그러해서 항상 그러하고, 하늘과 땅이 사라진 뒤에도 여여상여라, 그러하고 그러해서 항상 그러하다. 그 몸을 진여법신이라, 진여법의 몸이다. 이 진여법은 일체 범부는 모르고, 일체제불, 깨달은 사람이 뭘 깨달았냐. 이 진여법을 깨달은 거예요. 진여법을 깨달으면 그 순간에 일체의 세계가 극락세계가 돼요. 진여법신은 극락 세계다. 진여법신으로 돌아가면 극락세계를 마주하는 거죠. 勿形一念 靈明性覺 물형일념이 영명성각이니先天後地 圓明常照 선천후지하야 원명상조로다不可思議 解脫境界 불가사의 해탈경계가無相無礙 寂滅寶宮무상무애하여 적멸보궁이로다나무아미타불 그러면 불생불멸하고 극락세계인 것을 도대체 누가 아느냐. 불생불멸은 누가 알고 극락세계는 누가 아는가. 이게 참 중요한 문제인데요. 중생이 미혹하는 게 대상만 알고 마음을 모른다. 집경미심(執境迷心)을 한다. 집경, 경계에만 집착하고 마음을 미혹한다. 그걸 미혹범부라고 그래요. 경계, 경계가 뭐냐. 감각 대상인데, 눈의 대상, 귀의 대상, 생각의 대상, 감촉의 대상인데요. 그 경계에만 집착하고 그 경계를 아는 마음은 모른다. 그걸 미혹이라고 하죠. 그 마음은 경계를 떠나서 찾아보니 없더라. 마음은 몸에 찾아봐도 없더라. 그래서 마음은 분명히 대상을 느끼는데, 찾아보면 몸에도 없고, 허공에도 없고, 어떠한 장소에도 없더라 이거에요. 그래서 마음을 알아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찾아봐도 없는 마음을 알 수가 있는가. 멱심불가득(覓心不可得), 찾을 멱자가 있는데요. 마음 심자, 멱심. 불가득, 얻을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정심활연명(靜心豁然明), 고요할 정자, 마음을 고요히 한 활연이라, 활연이라는 건 걸리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인데요. 걸리는 게 하나도 없이 밝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에서 찾으면 안 되고, 마음은 고요히 하면 나타난다 이거예요. 이게 아주 불가사의 비법이에요. 마음은 찾지 마라. 마음을 고요히 하라. 정심이면 활연명인데, 멱심이면 불가득이라. 삼초입정이, 마음을 삼초만 딱 그치면, 정이라는 건 그칠 정자인데요. 그친다는 말이에요. 정에, 그치는 데 든다, 입정. 3초만 딱 이렇게 멈추면 보이는 걸 알아요. 그냥 보면 모르는데, 보는지 안 보는지도 모르는데, 딱 그치고 보면 ‘내가 보고 있구나’ 이걸 알게 돼요. 딱 그쳐서 들으면 ‘내가 듣고 있구나’ 이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지금 현재 눈으로 보는 그게 마음이고, 귀로 듣는 그게 마음인데, 만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으면서 그 마음이 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는 보는 줄도 모르고 보고, 듣는 줄도 모르고 듣는단 말이지요. 딱 그쳐보면 내가 보는 걸 알아요. 보는 것까지는 알아요. 딱 그치고 들으면 듣는 것까지는 알아요. 근데 삼초입정으로 보고 들으면, 노래를 들을 때도, 그냥 들으면 노래 듣는 줄도 모르고 들어요. 딱 그쳤을 때 ‘내가 노래 듣고 있구나’ 또 ‘뭘 보고 있구나’ 그런데 이 마음이 이게 너무 불가사의해서, 노래 들을 때는 노래 들어도 하나도 이게 뭐 순서도 없고 무슨 조작도 없고, 바람 소리 들을 때는 바람 소리 들어도 아무런 뭐 하는 일 없이 그냥 들어요. 이걸 부동성용(不動性用)이라고 해요. 이걸 부동, 움직임이 없이 본성이 작용을 한다. 마음이라는 게. 뭐를 시작하고 계획해서 하는 게 아니라, 부동성용으로 본성 작용이요, 그냥. 부동이라는 건 조작 없이, 동의 없이. 그냥 하늘 볼 때는 부동성용으로 그냥 하늘을 봐요. 땅 볼 때는 움직임이 없는 본성 작용으로 그냥 땅을 보고. 화날 때는 그냥 화내고. 좋아할 때는 그냥 좋아해서. 이게 하늘로 고정되어 있으면 땅을 못 볼 텐데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사람도 보고 못 보는 게 없어요. 이걸 불가사의 본성, 본심이라고 하거든요. 생각할 수 없는 본성심, 본래심이다. 뜨거울 때는 뜨거운 거 알고, 차가울 때는 차가운 거 알아서, 이게 마음이 뜨거운 걸로 고정돼 있다면 차가운 걸 못 느낄 텐데, 자꾸 또 느끼고. 못 느끼는 게 없는데 무슨 조작해서 느끼는 게 아니라 아무런 순서도 없이 조작도 없이. 평생을 보고 들었어도 그 본성, 본심은 털끝만큼도 동요가 안 됐어요. 이걸 부동현용이라고, 동의 없이 작용을 나타냈다. 그게 마치 해인삼매라고 그러는데, 바다에 여러 가지 모양이 비춰졌지만 바다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바다가 움직여서 바다의 그림자가 비춰진 게 전혀 아니다. 이 말이요. 부동현용 해인 삼매. 이 마음을 고요히 하고 고요히 하고 있다. 어떤 것도 아니지만, 어떤 것도 다 해당되는 그 본성심이 다 나타나더라. 마음은 모든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해요. 그럼 거기가 극락세계에요. 마음은 모든 것이 아닌데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럼 마음은 생로병사가 아닌데 생로병사를 다 하고, 마음은 불생불멸이 아닌데 불생불멸을 다 하고, 마음은 천지 만물이 아닌데 천지 만물을 다 하고, 모든 것이 아니면서 모든 것을 다 한다. 그게 진여법신이고 그게 극락세계거든요. 그리 가시는 거예요. 그걸 이제 글자로 표현하면 물형일념(勿形一念)이, 말라는 아니다, 말 물자가 있고 형상 물자가 있는데, 형상 아닌 일념이, 한 생각이, 한 생각이라는 건 이 생각 저 생각이 아니라, 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생각도 한 생각이라고 하고, 요걸 딱 보는 그 감각의 생각도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 본래심도 한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형상이 아닌 본래 한 생각이 영명성각(靈明性覺)이라, 신령스럽게 밝고 본성이 스스로 안다, 이걸 성각이라고 하거든요. 본성이라는 성자, 느낄 각자, 영명성각이라고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인데요. 영명성각. 영명성각이 신령스럽게 밝아요. 찾아보면 없어, 근데 별별거 다 보고 다 들어요. 그런데 이것이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라.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이라는 것은 이장(雉障)이라고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 벗어날 이자, 장애 장자, 이장. 열반은 본래 불생불멸을 열반이라고 하고, 해탈은 생로병사의 모든 근심 걱정에 장애가 있었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본래열반, 이장해탈(雉障解脫) 처음에는 깨닫기 전에는 근심 걱정이 많고 무슨 여러 가지 속박과 장애가 많았는데, 이걸 깨닫고 나니까 근심 걱정 속박 장애에서 다 벗어났다, 그걸 해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영명성각의 본래 신성이 불가사의 해탈경계라, 생각할 수 없는 해탈경계다. 그럼 그 경계가 어떠하냐. 무상무애 적멸보궁(無相無礙 寂滅寶宮)이라. 적멸이라는 것은 생멸이 없다는 소리예요. 생멸이 없다는. 고요 적자, 멸할 멸자. 생멸 없는 그 세계에 무한한 공덕이 있다. 그걸 보궁이라고 하거든요. 적멸보궁. 적멸보궁이 왜 적멸보궁이냐면 무상무애, 이게 불가사의 해탈경계인데, 일체제불이 깨달은 경지를 가르침으로 표현하자면 무상무애라. 무상이라고 하는 건 없을 무자, 상이라고 하는 형상 상, 서로 상자, 그 상자를 써서 무상이라고 그러는데, 깨닫기 전에는 상에 상이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까 상에 상이 없다. 이게 깨닫기 전에는 상을 상으로 보고, 상에 집착을 했어요. 딱 본래 영명성각이 열리는 순간에 상에 상이 없다는 걸 깨달아요. 왜 그러냐. 이게 다 인연으로 생겼기 때문에 자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자상이. 자체상이 없다는 거예요, 인연상이기 때문에. 일체상은 인연상이요, 자체상이 없다. 이 마음이 탁 고요에서 열리는 순간에 모든 상은 인연상이요, 자체상이 없다, 이걸 보게 돼요. 시계는 시계의 자체상이 없고, 여러 가지 부품이 모여서 이제 인연상이란 말이죠. 이 상에 비해서 근심 걱정이 있는 거예요. 이 몸도 자체상이 없어요. 인연상이에요. 여러 가지 모여서 몸이 된 거지 이거 자체 상이 없어요. 무상. 그래서 모든 상에서 벗어나게 돼요. 하늘에도 하늘 자체상이 없고요, 땅에도 땅 자체상이 없어요. 이걸 통달무상이라고 그러는데, 무상을 통달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지옥에도 지옥 자체상이 없고 세간에도 세간 자체상이 없어서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따라 사라져요. 그래서 형상에 집착하는 건 다 어리석은 고통이에요. 요즘 방송에서도 그런 얘기하데요. 재미있는 얘기. 좋아한다, 사랑한다, 집착한다, 원수 됐다, 이게 딱 돌아가는 과정이에요. 좋아하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원수되고. 세상사가 다 이렇게 돌아가요. 지금 원수 된 사람이 다 좋아하던 사람이지, 안 좋아한 사람이 누가 원수가 돼요. 그럼 그 이유는 뭐냐. 상에 자체상이 없다는 걸 모르고 다 이 형상에 집착하는 미혹으로 생긴 거거든요. 이게 통달무상을 하면 상에 상이 없어요. 그러니까 무애가 돼요. 큰 것도 자체상이 없고 작은 것도 자체상이 없으니까 이게 하나도 장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고, 저 가는 티끌에 시방을 다 포함한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왜 가능하냐면 무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가는 티끌에도 자체상이 없고, 시방 허공도 자체상이 없어서, 상 없는 것이 상 없는 데 들어가는 게 장애가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일 찰나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 찰나고, 일 찰나도 자체상이 없고 무량겁도 자체상이 없어요. 이거 장애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걸 깨달은 분을 삼세제불이라고 그래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들이다. 그분들이 머무는 곳이 극락세계에요. 그래서 무상무애 적멸보궁이라. 적멸이라는 건 무상무애란 말이에요. 무상무애. 무상무애한데 없는 게 없어요. 무진장 보배궁전이에요. 그걸 적멸보궁이라고 하거든요. 佛放光明遍世間 照耀十方諸國土 불방광명변세간하니 조요시방제국토라演不思議廣大法 永破衆生凝惑暗 연부사의광대법하야 영파중생치혹암이로다(華嚴經제2권, 世主妙嚴品)(화엄경제2권, 세주묘엄품)나무아미타불 이 법문은 화엄경 제2권 세주묘엄품에 수록된 법문인데, 부처님이 뭐 하는 분이냐. 영명성각 적멸보궁, 이 대광명을 항상 비춰서, 상에 상이 없는 줄 모르고 상에 집착해서 근심 걱정하는 중생들을 깨우치는 게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할 일은 크게 없어요. 상에 상이 없는 줄을 모르고 상에 집착해서 좋아하고 사랑하고 집착하고 원수 되고 만날 이 모양을 되풀이하는 거를 생사유래라고 하거든요. 그런 치혹암, 그런 치혹암을 비춘다. 불방광명변세간하니(佛放光明遍世間), 부처님이 광명을 비추는 것이 세간에 두루하니, 시방제국토(十方諸國土)에 항상 밝게 비춘다. 연부사의광대법하야(演不思議廣大法), 불가사이한 광대법을 연설해서, 영파중생치혹암(永破衆生凝惑暗)이라, 중생의 어리석고 미혹한 어둠을 영원히 없애주신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생로병사가 전부 상에 상이 없는 줄 모르고 상에 집착하는 고통이에요. 그러면 상에 상이 없는 줄을 알아, 무상법을 통달해서, 상에 자재하게 되면 그것이 적멸보궁이요, 그것이 극락세계라, 이걸 깨우치는 게 부처님이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百福莊嚴 常樂淨土 백복장엄의 상락정토여壽光無量 極樂世界 수광무량의 극락세계라若人一念 願生樂刹 약인일념 원생낙찰하면剎那往生 受用無窮찰나에 왕생하여 수용이 무궁이로다나무아미타불 백복이 장엄(百福莊嚴)이라, 백복. 백복이라는 게 온갖 복덕을 백복이라고, 장엄이라는 건 다 갖춰져있다. 그러면 이 복이라는 게 뭐냐. 유가에서는 오복을 가르치고 불가에서는 만복을 가르치는데요. 오복, 만복. 그런데 만복이라는 게 뭔가 개념이 전혀 달라요. 유가에서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서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불교는 만 가지 복덕이 있거든요. 불교는 선정을 복덕이라고 그래요, 선정을. 선정 복덕이라고. 왜 선정 복덕이냐. 뭐든지 마음이 딱 안정되면 그게 거기에요. 마음이 딱 집착하면 그게 화에요. 그러니까 하늘을 봐도 마음이 딱 안 잡히고. 땅을 봐도 마음이 딱 안 잡히고, 그게 하늘 보면 하늘 복이고 땅 보면 땅 복이요, 사람 보면 사람 복이고, 보는 것마다 복덕이란 말이죠, 선정이 되면. 그러니까 극락세계는 백복장엄이라, 모든 복덕으로 다 장엄이 돼 있다, 꾸며졌다 이거죠. 그래서 상락정토(常樂淨土)다. 항상 즐거운 청정토다. 수광무량(壽光無量)이라.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다. 어둠이 없고 죽음이 없다는 거지요. 상에 집착하면 항상 공포가 따르는데 그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예요. 암흑에 대한 공포예요. 어두움을 싫어해요. 죽음을 싫어해요. 근데 상에 상이 없는 줄을 알면 죽음의 죽음이 없고 어두움의 어두움이 없기 때문에, 극락세계에요. 죽는 게 극락세계고, 어두운 게 극락세계인데, 상에 미혹하니까 공포를 느끼죠. 공포를 느끼면 고통이에요. 그래서 수광무량, 수명과 광명이 무량한 극락세계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약인이 일념이(若人一念) 원생낙찰하니(願生樂刹), 낙찰은 즐거울 락자, 불찰이라는 찰자, 국토라는 말인데 즐거운 국토 극락세계에, 어떤 사람이 한 생각으로 극락세계에 나기를 원하면, 찰나왕생(剎那往生)하여 수용이 무궁이라(受用無窮), 찰나 순간에 극락세계에 왕생해서 그 극락세계에 백복장엄 상락정토의 낙을 수용하는 것이 한량이 없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삼세제불은 뭘 봐도 상에 상이 없는 걸 보는데 상에 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래서 깨달은 마음을 불심이라고 하고, 또 부처님을 공경한다 하는 것도 불심이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것도 불심이고, 깨달은 마음도 불심이에요. 그래서 깨달은 마음을 불심이라고 하는데 뭘 깨달은 마음이냐. 이 상에 상이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뭘 보든지 상에 상이 없는 걸 보기 때문에 염념 불심(念念佛心)이라고 그래요. 생각 생각이 다 깨달은 바다. 그게 부처님 마음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진진(塵塵)이 불국이라, 티끌 티끌이 다 부처님 나라다, 이게 극락세계에요. 티끌 진자, 진진. 부처님 불자, 나라 국자. 염념이 불심이니 진진이 불국이라. 범부 입장에서 보면 염념이 불심이면, 생각 생각이 깨달은 마음이면 진진이 불국이라, 티끌티끌이 부처님나라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염념이 불심이니, 생각 생각이 깨달은 마음이니 뭐든지 상에 상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걸 봐도 항상 정심현용이라, 고요한 마음이 나타나요. 어상에 무상하니, 상에 상이 없으니 정심이 현용이라, 고요한 마음이 나타난다. 진진이 불국이요. 하나하나 다 부처님 나라에요, 극락세계란 말이죠. 딱 한 마음으로 원생낙찰하면, 극락세계에 가기를 원하면, 마음으로 가는 거니까 차표 살 일도 없고 승용차 시동 걸 일도 없고 다리 움직일 일도 없고 한 털 끝도 움직이지 않고 바로 간다. 이거예요. 이걸 불가사의 왕생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이 극락세계 왕생하는 법이다.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今日靈駕 一念信心 금일영가 일념신심으로面見彌陀 往生樂刹면견미타하야 왕생낙찰하소서나무아미타불 두 마음은 근심 걱정의 마음이고 한 마음은 해탈경계의 마음인데, 근심 걱정은 해탈 경계, 근심 걱정은 한자로 쓰면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그래요. 근심 우, 슬플 비. 괴로울 고, 번거로울 뇌, 우비고뇌. 근데 근심 걱정 없는 건 해탈경계다. 일념신심(一念信心)으로, 두 가지 생각 갖지 마시고, 세상도 좋으니까 집착하는 재미도 있거든요. 집착을 더 해 볼까. 또 극락세계가 있다 하니 극락세계도 가볼까, 이런 건 이게 두 가지 마음이에요. 집착은 끝이 없어요. 집착할 때는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고통이에요. 이게 참 문제에요. 집착할 때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래서 집착해요. 근데 지나고 보면 괴로움이 와요.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그냥 한 마음으로 딱 되면 바로 극락세계인데, 두 마음이 계속 산란하게 되면 이게 괴로움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법문이 금일 영가께서는 일념신심으로 한 생각 믿는 마음으로 면견미타하야(面見彌陀), 바로 면전에서 아미타불을 딱 친견을 해서 왕생 낙찰(往生樂刹)하소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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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기도] 1월 16일 대웅전 천일기도 입재 법문
주지 계호스님 2022-01-16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좋은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발길 머무는 곳,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 오신 오늘이 천일기도 입재날입니다. 저희 은사 스님이, 제가 몇 번 말씀드리는데, 63년도부터 오셔 가지고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천일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선행 스님이 이렇게 처음으로 기도에 입재했어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죠. 시작했다 하면 벌써 반쯤 가는 거예요. 또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은 불교에 십재일이 있거든요. 초하루날은 정광부처님이 주관하시고, 8일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약사부처님이에요. 그다음에 14일은, 오늘이 14일입니다, 보현보살재일이에요. 보현행원품을 저희 스님은 평생 실천하셨어요. 보현보살은 실천의 보살이에요.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보살이고, 지장보살은 비증보살이고. 십오일은 혹시 무슨 재일인지 아세요. 아미타재일, 미타재일이라 그러죠. 그리고 18일은 지장재일이고, 23일은 대세지보살, 24일은 다 아시죠, 관세음보살재일이고, 28일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29일은 약왕보살이에요. 그다음에 30날은 석가모니부처님인데, 이렇게 십재일 가운데 보현보살 재일날에 입재를 하니까 너무 좋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도는 내 안에 업장이라는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백신이에요. 우리가 감기 들면은 감기약 먹고 치유하죠. 기도라는 거는 내 안에 있는 업장 소멸부터 돼야지 기도가 잘 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는 치유고 정화에요. 내 몸을 정화해주는 거예요. 우리가 그냥 물 대신 정화수 떠다 놓고 기도 하시듯이, 몸의 정화를 시켜주는 건 기도밖에 없어요. 업장 소멸도 기도밖에 없고. 이렇게 시작하는 날 신도님들이랑 스님네들이랑 함께 동참하면서 같이 기도하는 게 이게 같이 공부하는 거예요. 세상에 혼자 공부하는 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독살이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대중이 정진하고 대중이 공부시켜주는 거거든요. 그리고 선행 스님은 법명 그대로 선행이에요. 다 같이 큰 박수 한번 쳐주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성과 간절함이 있고, 그다음에 친절함이 있는데, 간절함은 지혜예요. 친절은 자비에요. 물론 지혜는 밝음이고 자비는 맨날 따뜻함이라 그랬는데, 간절히 간절히 하다 보면은, 정성을 기울여서 하다 보면 그대로 지혜가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친절하다 보면 자비가 되는 거지요. 자비에는 무적이라 그랬어요. 적이 없다고 그랬어요. 지혜는 번뇌 망상이 없다고 그랬거든요. 진실하게 정말 성실하게 하다 보니까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살아지는 사람이 있고, 살아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어떤 게 제일 좋겠어요. 물 흐르듯이 살아가는 게 최고 좋아요. 억지로 살아가려고 할 거 없고, 억지로 살아내려고 할 것도 없이. 그러니까 선행스님이 기도를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다 한 마음이 돼 가지고 도와주셔야 돼요. 그러니까 조력을 해주는 게 우리들의 역할이거든요.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에, 내 마음을 정화시키고, 내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지, 그게 참 믿음인 거예요.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게 다 부처님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하루도 기도하기 어려운데, 열흘, 7일, 3•7일, 한 달,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천일기도를 하는 동안에, 정말 선행스님이 기도 잘할 수 있게 도와줘야 되고, 청소도 좀 해드려야 되고, 같이 독경도 해야 되고요. 법화경 공덕이 얼마나 좋은지, 제가 읽어보니까, 그전에도 좀 독송을 했는데, 지금 새로 새로 또 느껴지더라고요. 자실인의(慈室忍衣)라고 있거든요. 자비의 방과 인욕의 옷, 그런 것이 다 법화경의 사상이거든요. 그리고 정작 정법의 자리에서 아상, 인상 이런 거 상이 없는 법공의 자리에 앉아가지고, 자비로운 생각, 인욕의 생각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최고의 기도에요. 그래서 제가 그전에 처음 와가지고 육비탕을 가르쳐줬는데, 육비탕의 첫째가 뭐냐 하면 신심이에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묵언, 말을 많이 해서 좋은 건 없어요. 오죽하면 옛날에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뭐라 그랬어요. 은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말도 할 때만 많이 하고 그렇게 막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조금씩 묵언하면서 그다음에 여유를 갖자. 마음의 편안함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복잡다단하면은 살아가는 게 복잡해져요. 그러니까 여유 있게 하고. 그다음에 아까 자비라고 그랬죠. 자비를 베풀면서 인내, 인욕하는 거예요. 자실인의 그게 그대로 법화경 사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이 뭐 이렇게 하는 거 보기 전에 내가 스스로 바른 마음, 바른 생각으로 믿으면은 그게 기도로 최고의 기도에요. 그러니까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정진을 많이 하다 보면 남의 말 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 이렇게 추운 겨울에 보현보살재일날 천일 기도를 했으니까 잘 마지막 회향하도록 우리가 도와드려야 되겠죠. 마음으로 약속하시면서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기도 성취하십시다, 다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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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월 12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1-12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生老病死 憂悲苦惱 無明緣起 業識所現생로병사 우비고뇌 무명연기 업식소현佛身充滿 諸佛刹境 十方佛刹 莊嚴圓滿불신충만 제불찰경 시방불찰 장엄원만이로다나무아미타불 오늘 김동욱 영가님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49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가. 사바세계와 다른 곳이다. 사바세계는, 사바라는 말은 범어인데, 한문으로면 감내해야 된다는 감자하고 인내해야 된다는 인자하고, 감인세계(堪忍世界)라고 그래요, 감인. 감내하고 인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사바세계다. 그럼 극락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극락은 무유중고(無有衆苦)하고, 무유는 없단 말이죠. 있음이 없다. 중고, 온갖 고통이, 많을 중자, 고통 고자, 온갖 고통이 하나도 없고 단수제락(但受諸樂)이라, 다만 모든 즐거움만 있다. 그래서 극락이라는 것은 즐거움의 궁극이다. 그래가지고 극락세계에는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요. 그거밖에 없으면 다른 게 없기 때문에 있는 줄 모르거든요. 그래서 불교에서 제사를 천도(薦度)라 그러는데, 천도는 그쪽으로 인도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해드리는 일이다. 그런 뜻이고요. 이 사바세계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데, 그 생로병사는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있다.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이걸 사바세계 생로병사 우비고뇌 이렇게 가르쳐요. 사바세계는 생로병사가 있고 우비고뇌가 있다. 그러면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어디서 왔는가. 무명에서 왔다(無明緣起). 무명은 없을 무자, 밝을 명자, 밝음이 없는 데서 왔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럼 밝음이라는 건 뭔가. 이 세상은 나와 우주를 포함해서 하나뿐인데, 일법계(一法界), 한 일자, 법 법자, 세계 계자, 일법계, 일 진실 뿐인데, 그 일법계 일 진실을 알지 못하는 걸 무명이라고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일법계를 아는 밝은 지혜가 없다. 밝은 지혜가 없는 걸 무명이라고 하고. 그래서 생로병사 우비고뇌는 한 법계, 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밝음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이 됐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그래가지고 그 한 법계를 알지 못하는 걸 무명이라고 하는 하는데, 그 무명에는 업이 따른다. 업은 행동인데요. 모르면 모르는 행동이 나온다, 이거죠. 알면 아는 행동이 나오고. 그래서 그 업으로 나타난 바다(業識所現). 어려워지네요. 이 세상 하나밖에 없어요. 죽고 사는 게 없어요. 내가 태어날 때 그게 처음이 아니고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그게 마지막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만 알고 법계를 모르니까, 내가 나는 순간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고, 내가 가는 순간을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거 아니에요. 내가 세상에 나오나 안 나오나 똑같아요. 그걸 모르고 내 몸만 아니까, 몸만 알고 하나를 모르니까, 그걸 무명이라고 하고, 그 몸만 아는 생각이 나오고, 몸만 하는 행위가 나와서, 그 생각과 행위로 여러 가지 생로병사하고 우비고뇌의 고통이 따른다. 그럼 불교는 깨달음인데 석가모니가 뭘 깨달았나. 하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일법계. 하나를 깨닫고 보니까, 그 깨닫는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변하고, 그 생각은 무명이 아니라 광명이다. 그리고 생각이 지혜로 변할 때, 이 하늘과 땅이 완전히 광명으로 변하는 웅장함이 있어요. 그래서 절에 가면 대웅(大雄)이라는 간판이 붙었고, 대광명(大光明)이라고 하는 간판이 붙어 있거든요. 대광명은 무명이 광명으로 변했다는 소리고, 대웅이라는 것은 하나를 깨달은 웅장함, 그걸 대웅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 사바세계는 무명이고 극락세계는 광명이다. 그러면 이 사바세계는 무명에서 뭐가 나오냐. 속박(束縛)이 나와요, 무명에서부터는. 얽힐 속, 얽힐 박. 얽혀 있어요. 매여 있어요. 어디에 매여 있냐. 내 몸에 매인 거예요. 한 법계를 알면 몸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예요. 한 법계를 모르니까 몸이 전부인 거예요. 그러니까 산에 가서 풀 한 포기 보면 그걸 알아요. 저 풀 한 포기가 있어도 산이고, 없어도 산이라는 거 알아요. 그러면 이 우주 법계에서 내 한 몸이 있어도 한 법계예요. 없어도 한 법계인데,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전부예요. 그래서 몸의 속박도 있고, 그다음에 사람의 속박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반드시 붙들려고 애를 쓰지요. 물질의 속박도 있고. 이런 속박이 있는 거예요. 이게 무명의 고통이죠. 그다음에는 공포가 있어요. 두려움. ‘내가 구하는 게 구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런 두려움이 있단 말이에요. 또 불안이 있어요. 편안하지 않아요. 그다음에 고뇌가 있다. 괴롭고 걱정이 돼요. 그런데 깨달음을 통해서, 깨달을 각자, 이 불안하고 근심하는 생각이 지혜로 확 바뀌는 순간에 무명이 광명이 되고, 그 속박이 해탈이 돼요. 그 일법계를 깨닫는 순간에 속박은 전혀 없어요. 그걸 해탈이라고 해요. 다 벗어났다, 풀렸다. 풀릴 해자, 벗어날 탈자, 해탈(解脫).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어서 지혜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공포가 환희가 돼요. 그래서 불교 경전에는 즐거울 환자, 기쁠 희자, 환희(歡喜)라는 말이 많이 나와요. 그게 깨달음의 공덕이에요.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내용이다, 그거지요. 그리고 불안이 안락이 돼요. 불안한데 좋은 음식을 먹어도 그때뿐이고, 바로 불안한 마음이 어딘가 스며들어 있어요. 좋은 걸 봐도 그렇고. 그런데 불안한데 이 깨달음으로 얻어서 광명을 찾으면 안락(安樂), 편안하고 즐거워요. 그리고 이 고뇌가 괴로움, 걱정 없는 즐거움을 얻어서 그걸 극락이라고 그런다. 고뇌가 극락이 됐다. 그 세계로 보내드리려고 지금 오신 거예요. 그러면 이 재를 올리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보은, 돌아가신 분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는 거고요. 둘째는 본인의 공덕이 있어요. 이 재를 하는 동안에, 재에 참여를 하면서, 내 생각과 몸에 지혜와 광명의 종자가 스며들어서, 그게 나중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돼요. 그래서 공덕을 착할 선자, 뿌리 근 자, 선근(善根)이라고 그러는데 선근, 착한 종자가 된다, 이 말이죠. 뿌리라는 거. 그러니까 재 지내는 건 참 좋은 거예요. 부모에 대한 보은도 되고, 나 자신에 대한 선근이 된다. 착한 뿌리가 된다, 이 말이죠. 근데 이 극락세계는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 순간에 그 지혜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 그걸 불신이 충만법계(佛身充滿)라고 그래요. 부처님 몸은 깨달은 몸이거든요. 태어난 몸은 바로 사라지는데, 깨달은 몸은 법계에 가득해요. 그래서 충만법계해서 시방불찰(十方佛刹)에, 시방에, 찰이라는 게 사찰인데, 이 사는 중국의 행정 관청 이름이고요, 중국 발음은 시라고 하는데, 그런데 인도에서 어떤 스님이 말을 타고 경전을 싣고 오셨는데, 그 말을 보호하던 행정 관청이 그게 시거든요. 그래서 그 시는 이 사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게 중국 발음이고요. 찰은 차트라라고 하는 언어인데 국토라는 뜻이에요. 국토, 나라 땅. 그래서 중국 발음 사하고 인도 발음 차트라하고 합쳐서 사찰이라고 하는데요. 그 사찰은 부처님이 본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부처님이 본 세상이다. 그래서 중국 행정관청은 그 당시 무슨 시, 무슨 시, 무슨 시가 있거든요. 그것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사찰, 사원, 이러는데, 꾸며진 모든 게 깨달은 극락세계에 대한 표현이에요. 대웅전도 그렇고 대광명도 그렇고, 저 연꽃도 그렇고, 다 깨달음에서 얻어진 극락세계를 표현하는데, 그걸 불교 용어로는 장엄(莊嚴)이라고 그럽니다. 장엄. 장엄은 다 꾸민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극락세계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 장엄을 통해서 극락세계를 느끼라고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시방불찰에는, 시방에 온 우주에 있는 이 불찰에는, 장엄이 원만하거든요. 근심 걱정 없다. 근심 걱정은 우주 법계가 하나라는 걸 모르는 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다음에 이제 극락세계에 대한 얘기인데요. 常住法界 眞言宫中 般若海會 寂滅道場 상주법계 진언궁중 반야해회 적멸도량大智光明 安養淨土 華藏莊嚴 極樂世界대지광명 안양정토 화장장엄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나무라는 말은 돌아간다는 말이고, 아미타라는 건 무량수라는 뜻이고, 한량없는 수명, 또 무량광이라는 뜻이 한량없는 광명, 그게 극락세계에요. 깨달은 세계의 이 몸은 그걸 지신이라고도 하고 불신이라고 하는데, 지혜몸, 깨달은 몸,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하다. 그런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나무라고 하는 건 범어인데, 귀의한다, 귀원(歸元)한다, 돌아갈 귀자, 근원이라는 원자, 귀원,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걸 나무아미타불이라고 그래요. 나 어릴 때 나무아미타불은 스님들만 하는 건 줄 알고, 스님 지나가시면 인사로 나무아미타불 이랬어요. 나무아미타불 그것도 공덕이 됐는가 봐요. 그런 걸로 절에 온 것 같아요. 나무아미타불, 그러니까 수명이 무량하면 죽음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광명이 무량하면 어두움이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극락세계거든요. 죽음도 없고 어둠도 없는 세계로 돌아간다. 나무아미타불. 이런다고요. 이 극락세계는 상주법계(常住法界)에요. 항상 머무는 법계다. 또 진언궁중(眞言宫中)이에요. 참을 드러내는 궁전 가운데다. 말이라는 건 드러내는 거잖아요. 이게 진언이라고 하는 건 참된 걸 드러내는 궁중이다. 진언궁중. 반야해회(般若海會)다, 반야라는 것은 이 형상에서 형상이 없는 공격을 보는 게 반야예요. 이게 이제 물질인데, 이걸 떡 보면 이 형상은 유생유멸인데, 이렇게 나타난 것도 있고 사라지는 것도 유생유멸인데, 이건 생각으로 본 거고 반야로 보면 이게 불생불멸이에요. 그래서 유생유멸에서 불생불멸을 보는 걸 반야라고 해요. 생각으로 보면 이건(물컵을 가르치시며) 생겨난 거죠. 근데 이걸 근원으로 보면 생겨도 생긴 게 없어요. 왜냐면 흙으로 뭉쳐진 것일 뿐이지 이게 자체가 없어요. 이게 너무 오묘해서 말만 들어도 설레는데요. 이 몸도 여러 가지 요소가 뭉쳐졌을 뿐이지 자체가 없어서 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사라져도 사라진 게 아니라, 반야로 우리 몸을 다 관찰하면, -그 관찰해서 보는 걸 조견(照見)이라고 그러는데요. 조명이라는 조자, 볼 견자,- 이 몸이 불생불멸이에요. 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 그러는데요, 큰 그런 반야로 생로병사가 없는 저 극락세계로 건너간다. 이걸 바라밀이라고 하거든요. 이 반야 세상이 극락세계에요. 그걸 바다 해자, 모일 회자, 전체 바다는 전체잖아요. 전체 그것만이 모여 있는 해회, 반야해회. 적멸도량(寂滅道場), 도량은 장소라는 뜻인데요. 생멸이 없는 그 장소, 그 말이에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대지광명(大智光明)이라. 대지는 큰 대자, 지혜 지자인데, 이 대지는 정각 공덕으로 대지출(正覺功德大智出)이라. 그 깨달은 공덕으로 지혜가 나왔다. 깨닫기 전에는 대지가 안 나와요. 그래서 이 대지로 밝히는 세계가 극락세계다. 대지. 안양정토(安養淨土), 마을 이름도 안양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그게 불교 용어인데, 편안할 안자, 기를 양자인데, 거기서는 즐거울 락자와 같은 뜻이에요. 안락(安樂)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한자 용례에 보면 양은 락야라, 기를 양자는 즐겁다는 뜻이다. 그런 용례가 있어요. 그래서 극락암이라는 절도 있고 안양암이라는 절도 있는데, 똑같은 말을 쓰기 싫어하는 거예요. 같은 말이에요. 안양정토라, 편안하고 즐거운 깨끗한 토, 정자는 죽고 사는 게 없다는 뜻이에요. 무덤도 없고.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색이 공하니까 이 세상에 더러운 건 하나도 없어요. 더러운 건 이 형상을 보고 판단하는 게 더러운 거죠. 이 반야로 보면 색이 공하니까 이걸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그러거든요. 색즉시공이라는 옛날에 영화도 나와 있었어요, 색즉시공. 근데 딴 걸로 번역해서 말하더라고요. 색이라는 건 형태라는 뜻이에요. 근데 영화에서는 남녀가 만나는 걸 색이라고 번역을 했더라고요, 그거야 뭐 어찌 번역하든 내가 알 바 아닌데. 평생이 공한 걸 보면 이 세상에 더러운 건 없어요. 대변을 봐도 그것이 공한 걸 반야로 보면 더러움 자체가 없어요. 죽음을 봐도 반야로 보면 죽음 자체가 없어요. 색이 공이에요. 공은 불생불멸이고 색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고, 이루어졌다 머물다가 파괴되다가 사라지는 거. 반야로 떡 보면 이 생멸 현상에서 생멸이 없는 적멸도량으로 들어가는데 그 적멸도량은 피안이라고 하거든요. 피안 저쪽, 저쪽 세계. 그래서 안양정토다. 화장장엄(華藏莊嚴)이다. 화장이라는 꽃 화자, 감출 장자인데, 여러 가지 공덕으로 저장돼 있다. 이게 화장이고요. 공덕으로 저장돼서 꾸며져 있다. 이걸 장엄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극락세계는 모두가 즐거워서 즐거운 줄도 모르게 즐겁다, 이게 극락이에요. 즐거운 거 아는 건 그건 안락인데 안락은 즐거운 걸 알아요. ‘아 편안하다’, ‘아 좋다’ 이게 안락이거든요. 근데 극락은 편안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즐거운 것을 모르는 거예요. 요새 행복이라는 말 많이 쓰는데 행복이라는 건 행복을 전혀 못 느끼고 사는 게 그게 행복이에요. ‘아 나는 행복하다’ 그러면 그 순간뿐이에요. 진짜 행복하면요, 행복이 뭔지도 몰라요. 그냥 고통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극락세계가 그런 거거든요. 궁극적인 편안함이라. 궁극안락. 覺心初起 心無初相 無終無始 常放光明 각심초기 심무초상 무종무시 상방광명壽光無量 極樂世界 常壽無窮 常光無邊수광무량 극락세계 상수무궁 상광무변이로다나무아미타불 스님들만 나무아미타불 할 게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도 안 해본 분들도 연습으로 한번 해보실래요. 연습으로 극락 가면 되거든요. 그 형식 갖추지 말고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형식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면 돼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만하실까요. 아미타불을 연습해 보면 좋아요. 나쁜 건 하나도 아니거든요. 죽음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거 얼마나 좋아요. 나무아미타불. 그런데 이 사바세계의 속박과 또는 공포와 불안과 고뇌가 어디서 왔느냐. 한마음이 미혹(迷惑)한 데서 왔다. 한마음이 이 우주법계가 일법계라는 걸 모르는 미혹에서 왔다, 이거예요. 일법계의 미혹상, 한 법계를 미혹한 그 지점에서 와서 모든 고뇌는 일법계 미혹상이다. 그 미혹이 뭐냐. 이렇게 하나를 보고 하나인 줄 모르고 둘로 봤다는 거죠. 하나를 둘로 봤다 이거예요. 그 둘로 보는 순간에 그 모든 에너지가 발동을 해서 그게 속박이 되고 그게 공포가 되고 그게 고통이 돼버렸어요. 그러면 그 처음에 하나에서 하나를 모르는 것이 뭐냐. 잠든 거와 같다고 가르쳐요. 잠이 들면 보이는 게 없거든요. 일법계를 못 보고 잠드는 거와 같다. 그럼 잠들면 어찌 되냐. 꿈을 꿔요. 그걸 몽상이라고 그러는데. 꿈에는 보는 게 있거든요. 그런데 꿈꾸는 동안에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게 꿈이라는 걸 몰라요. 예를 들면 꿈에서는 꿈을 모른다. 그럼 꿈을 언제 아나. 꿈을 깨고 나면 알거든요. 꿈을 딱 깼을 때 ‘내가 꿈 꿨구나’를 알지, 꿈꾸는 도중에는 꿈인 줄은 모른단 말이죠. 그럼 꿈 깨고 나면 꿈은 없었다, 이걸 알게 돼요. 그런데 꿈꾸는 동안에는 꿈이 있어요. 그래서 깨닫고 보면 생로병사가 없는 거예요. 생로병사는 꿈속에 일이다. 깨달은 사람들은 부처라고 보면 돼요. 여러 부처를 제불이라고 하거든요. 제불에는 대광명뿐이지 생로병사가 없어요. 잠들어서 꿈꾼 마음을 깨달으면 이걸 각심초기(覺心初起)라고 하는데, 심초기라는 건 그 꿈꾸는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생각 그걸 깨달아 버리면, 꿈꾸는 처음 생각을 깨달으면, 그 꿈꾼 마음은 없었다 이거예요. 이래서 문제인 거예요. 억울해요. 깨닫고 보면 없는 걸 가지고, 깨닫기 전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니 얼마나 억울해요. 얼마나 분통이 터져요. 그래서 각심초기하면, 그 꿈꾸는 처음 일어난 마음을 깨달으면, 심무초상(心無初相)이라,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본래 마음은 처음 꿈꾸는 마음이 없었다. 초상, 처음 생각이 없었다는 거지요. 그래가지고 그 꿈꾸는 마음이 없는 그 깨달은 마음으로 보면 무종무시(無終無始)라, 마지막도 없고 처음도 없고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밝다, 광명을 일으킨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에게는 생로병사가 없고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생로병사가 있는데, 깬 사람은 꿈이 없고,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에서 보는 것이 있다, 이런 겁니다. 극락 가기가 너무 쉬워요. 한 생각으로만 돌아가면 바로 극락 가는 거예요. 두 생각으로 생사가 있었기 때문에, 한 생각으로 돌아가면 극락 가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한 생각이 이루어지면 극락 가요. 근데 이 생각도 생각하다 보면 그게 생로병사인 거예요. 무종무시 상방 광명 수광무량 극락세계(壽光無量 極樂世界), 수명과 광명이 한량없는 극락세계, 상수무궁(常壽無窮)이라, 항상 한 수명이 다함이 없어요. 끝이 없다, 이거지요. 또 상광무변(常光無邊)이라, 항상 밝은 그 광명이 변방이 없다. 중심부가 없고 주변부가 없다 이거죠. 그러하니 극락세계는 이러하고, 오늘 영가께서 이 법회를 통해서 어떻게 가시냐. 佛身周遍等法界 普應衆生悉現前 불신주편등법계 보응중생실현전種種教門常化誘 於法自在能開悟종종교문상화유 어법자재능개오 (華嚴經제2권, 世主妙嚴品)(화엄경 제2권, 세주묘엄경)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一念成一念 淨土即現前 일념성일념 정토즉현전面見阿彌陀 往生安樂利면견아미타하고 왕생안락찰하소서나무아미타불 본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모든 걸 봐도 하나로 본다는 거지요. 모든 걸 들어도 하나로 듣고, 모든 움직임을 움직여도 하나로 움직이고 그랬는데, 잠드는 것처럼 슬며시 모든 순간에서부터 하나를 보지 못하고 둘을 봤어요. 그래서 둘을 보면 좋고 나쁜 게 있고 취하고 버릴 게 있어서 거기서 속박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왔는데, 다시 한 생각이 한 생각으로 돌아오면, 한 생각으로 보고, 한 생각으로 움직이고 한 생각으로 행동하면 속박이 전혀 없어요. 고통은 두 생각에서 온단 말이에요. 두 생각을 두 생각이라고 안 하고 여러 가지가 섞였다. 여러 가지 잡자가 있는데 그걸 잡념(雜念)이라고 그래요. 잡이라는 건 이것저것 함께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일념 잡념. 그래서 모든 고통은 잡념에서 오고 극락세계는 일념에서 온다. 그 원인은 아주 간단해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잡념이 더 어렵고 일념이 더 쉽거든요. 그래서 오늘 영가가 극락 가는 일은 너무 간단하다. 일념이 성일념하면(一念成一念), 한 생각이 한 생각을 이루면, 정토가 즉현전이라(淨土即現前), 더러움이 없는 극락세계의 국토가 곧 눈앞에 나타난다. 면전아미타하고(面見阿彌陀), 바로 대면해서 아미타불을 보고, 왕생안락찰(往生安樂利)하소서, 왕생이라는 게 가서 난다 이거죠. 안락찰, 극락세계인데, 안락한 세계, 안락한 국토에 왕생하소서, 이 말이에요. 일념은 본래 두 생각이 생기기 전에 그 생각을 일념이라고 하고요. 또 일념이 일념을 이루었을 때 그 마지막 일념은 여러 가지 잡념이 있다가, 그 잡념이 다시 한 생각으로 된 생각을 일념을 이루었다, 이렇게 하거든요. 우리가 지금 일념이 아니고 잡념으로 사는데, 극락 가려면 잡념이 다시 일념으로 형성되면 극락세계가 바로 보이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극락세계가 정말 있습니까’, 묻는 분들도 있거든요. ‘있다.’ ‘어딨냐.’ ‘눈앞에 있다.’ ‘왜 나한테는 안 보입니까.’ ‘그건 한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안 보인다.’ 그러는데. ‘글쎄요’ 이러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고개를. 안 믿는 게 당연한 거죠. 워낙 잡념에 빠져서 사니까. 어려워요, 믿는 게. 그래서 일념으로 일념을 이룬다라고 할 때, 그 첫 번째 일념은 비율로 설명할 때 360도 중에서 0도라는 거예요. 첫 번째 일념은. 그러면 그 0도에서 어떻게 해야 되냐. 180도로 해서 다시 이제 360로 돌아오면, 0도에서 출발해서 360도로 돌아오면 똑같아요. 그 첫 번째 일념은 0도고 나중에 일념은 360도다. 똑같은데 전혀 틀려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래 일념이었어요. 본래 한 생각이었는데 세상에 온갖 집착과 속박에 사는 잡념이 끼어들어가지고, 공포 불안 고뇌를 겪다가 다시 또 일념으로 들어가면 그게 일념이 일념을 이루는 건데 그거는 0도에서 360도로 돌아온 거다. 그러니까 극락 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택시 부를 것도 없어요. 걸어갈 것도 없고 무슨 뭐 여행 수속 밟을 거 전혀 없어요. 한 생각이 한 생각으로 돌아가면 극락왕생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염불도 듣고, 보고, 공양도 올리고 하니 얼마나 극락 가기가 쉬울 것인가. 그래서 어렵게 가지 마시고 바로 눈앞에서 가십시오. 그런 법문을 해드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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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천일기도회향] 1월 9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 및 대웅전 천일기도 회향법문
가섭스님 2022-01-09
반갑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무슨 날이에요? 법해 스님께서 명확하게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그냥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에요. 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법석을 함께해 주셔서 더욱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천일이라는 시간은 이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아주 티끌만큼 작은 시간이고, 또 지구의 나이에 비해서도 티끌만치 작은 시간이에요. 개인의 역사로 봤을 때, 요즘에는 80까지 산다고 쳤을 때, 80년 동안에 그 무언가를 위해서 3년간을 오롯하게 일심으로 여일하게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짧거나 얇거나 그렇지 않죠. 또 진관사 창건 이래로 봐도 천일기도는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돌이켜 보면 진관사의 모든 대중들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그중에서도 꼭 집어서 얘기를 하면은, 우리 총무 법해 스님이 복이 제일 많은 것 같고요. 훌륭한 상좌를 둬서 옆에서 천일기도 회향을 하는 것 자체가 큰 복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덕원 스님이 이렇게도 견디고 저렇게도 인내했던 그 공력이 의미가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천일기도는 덕원스님 개인을 위해서도 기도를 했지만, 천일기도라고 하는 것이 개인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진관사에 있는, 진관사에 소속돼 있는 모든 신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화평하기를 기도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개인이 힘들고 어렵고 또 마음에 여러 가지 올라오는 것들을 잘 제어하면서 기도를 했는데, 그런 것들을 잘 받아 가려면 이제는 여러분들이 역할을 해줘야 된다 하는 거죠.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덕원 스님을 잘 모시고 잘 찬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덕원 스님이 천 일 동안에 뭘 위해서 기도했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뭘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아마도 마음의 갈애와 마음의 번뇌를 잘 덜어내려고 기도했을 거예요. 여러분의 마음에서도 여러분의 갈애와 여러분의 번뇌를 잘 덜어내는 게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그걸 배워가야 된다는 거예요. 뭘 채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아마도 그 천 일 동안에는 덜어내고 비워내기 위한 시간이었을 거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일기도 그러면 성취, 그러니까 뭔가를 채우고 뭔가를 이룬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 성취라고 할 때의 그 성취는, 이룬다는 것은 채움의 이룸이 아니라 비움의 이룸이라는 거에요, 비움. 그걸 우리가 정말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있는 갈애, 갈애라는 게 뭐예요. 갈증이에요. 갈증. 누군가에게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빈 곳을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사람이 됐든 물질이 됐든 간에 자기의 빈 마음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그 바람, 그 갈증. 그런데 그 갈증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우리는 물질적인 거나 아니면 내가 지금 눈에 보이는 상대방에게 그걸 채우려고 하다 보니까 바람대로 안 되면 어떻게 돼요. 바람대로 안 되면 투정 부리게 되잖아요, 짜증 내게 돼요. 그래서 이 마음의 갈애와 번뇌를 얼마큼 잘 제어하고 비워갈 거냐. 그런 것이, 우리가 그것을 잘 기억해내는 것이 오늘 천일기도 회향하는 덕원 스님의 기도의 공력을 그대로 잘 받아내는 거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금요일 오래 인연이 있는 스님이 갑자기 종단에 큰 소임을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임을 그만두고 선방을 갔다고 그래요. 저기 산청에 깊은 산중에 법당 하나밖에 없어요, 건물이. 거기에 무문관이라고 하는 수행터에서 정진을 하고 있어서, 산속을 차를 몰고 -도로에서도 한 20분 들어가야 돼요,- 산꼭대기로 갔는데, 제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큰 광고판이 붙어 있는 걸 봤어요. 그 광고판이 아마 아이들 학습지를 만드는 회사 같아요. 그런데 그 광고를 보고 내가 깜짝 놀랐어요. 운전하다 보면 잠이 올락말락 할 때 있잖아요. 근데 그 광고 문구를 보고 정신이 바짝 났어요. 뭐라고 쓰여 있느냐 그러면, <사유하고 행동하라>. 일반 아이들 학습지 광구인데 뭐라고 쓰여 있냐면, <사유하고 행동하라>, 이렇게 쓰여 있는 거예요. 옛날에 어르신들한테 법문 듣다가 뒤통수 한 대 딱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있거든요. 그런 것처럼 운전하다가 정신이 바짝 났어요. <사유하고 행동하라>, ‘나는 과연 저렇게 사유화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런 반조가 되면서, 어떻게 저런 카피를 학습지에서 했는지. 만약에 정말로 그 학습지 광고한 것처럼 그 회사가 아이들에게 그렇게만 가르쳐도 조만간에 한 10년간, 10년 뒤에, 세계에서 제일 뛰어난 나라가 되지 않을까. 물질이나 경제 규모가 아니라 행복 지수로 정말 최고의 나라가 되지 않을까. 근데 우리나라가 경제 지수는 세계 7위니 탑 텐이니 뭐라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행복 지수를 올리게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버는 걸 얼마큼 잘 쓰게 해 주느냐, 잘 쓰게 할 수 있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근데 아직까지도 잘 벌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뭐냐하면 아직도 채우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비유를 하나 들고 싶어요. 바다에서는 뭐가 나요? 바다에서는 해산물이 나잖아요. 산에서는 나물도 나고 산삼도 나고 그러죠. 근데 바다에 가서 산삼이나 나물을 얻으려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뭐냐면 바다에서 해산물 원하는 거는 잘못된 게 아니에요. 바다에서 나물이나 산삼을 원하는 게 나쁜 거지, 바다에서 해산물을 얻는 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죠. 이 얘기를 왜 드리냐 그러면 내 마음에 번뇌가 사라지고 갈애가 사라지고 평화롭고 고요하고 따뜻하고 맑고 온화하고 그거를 바라려면은 그 마음밭으로 바꿔야 한다 이 말이에요. 그게 천일기도를 한 이유에요. 그런데 덕원 스님이 천일기도 열심히 해서 회향을 맞이했는데 여러분의 마음밭은 아직도 바닷속이에요. 여기서 금을 원하고 산삼을 원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 마음밭을 바꿔야 돼요. 변화시켜야 돼요. 그 말씀을 드리려고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마음밭을 바꾸자. 내 마음 밭을 바꾸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갈애, 갈증, 목마름 이런 것들을 좀 내려놓고, 혹시라도 그런 게 있다면 내려놓고, 마음에 번뇌도 내려놓고 마음을 한번 차분히 들여다 봐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그래도 진관사에서 나름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이니까 다 아시겠지만, 마음이 산란할 때는 공부, 경전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게 아니에요. 뭘 해야 돼요? 마음이 산란할 때는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산란한 마음을 먼저 가라앉혀 그거부터 없애야 해요. 근데 이제 마음이 확 산란해 있는데 ‘그래 기도를 하라고 그랬지.’ ‘기도를 해야 되겠구나’, 경전을 읽어요. 그러면 마음은 가라앉는 것 같아도 그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게 뭐냐 그러면, 마음이 혼란하거나 마음이 번잡스럽거나 마음이 들떠 있거나, 쉽게 말하면 마음이 화나 있을 때는 그 화 나 있는 걸 가라앉히고 기도를 해야 돼요. 물론 이제 공덕이 많은 분들은 기도하다 보면 그 화난 마음이 가라앉고 사라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갈애와 번뇌가 일어날 때는 그걸 잘 가라앉혀야 되는데. 경전에 보면은요, 놀라운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경전 구절을 보고 탄복을 한 적이 있는데, 무슨 구절이냐 그러면, <사라질 번뇌에 사라지라고 집착한다>. 다시 한 번 더 할게요. <사라질 번뇌에, 사라질 번뇌를, 사라지라고 집착한다.> 여기서 이미 게임이 끝나버렸어요. 게임 오버. 게임이 끝났어요. 여기서 모든 게, 내가 현재 마음이 지글지글 막 보글보글 끓는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질 거란 말이에요. 무상무아의 이치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거기에 딱 들러붙어가지고, ‘번뇌야 사라져라, 번뇌야 사라져라’ 그냥 씨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혹여라도 괴로움이 있거나 갈등이 있거나 마음이 아픈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건 언젠가 사라진다는 거에요. 사라지는 거 붙들고 지금 사라지지 말라고, 사라지라고 주문하면서 사라지지 말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 잘 생각하면 마음 위치를 싹 체득할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 방법을 그 마음의 습관 때문에 그걸 계속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사라질 번뇌에 사라지라고 집착하고 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우리 덕원 스님의 천일기도 회향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그 공력 잊지 마시고, 공력을 잊지 않는 방법은 마음의 갈애와 번뇌를 우리가 비워내는 거다. 그 갈애와 번뇌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사라질 번뇌이기 때문에 사라지라고 집착하지 마라. 여러분 마음속에 늘 부처님의 미소와 함께 하는 그런 호랑이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