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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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7월 10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7-10
2021년 7월 10일 음력 6월 초하루 신중기도 종범스님 법문 -불신(佛身)과 불성(佛性)이야기- 신축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법문할 내용은 부처님, 중생심, 마음씀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佛圓光 : 佛身佛智이야기불원광 : 불신불지이야기三佛圓融 十身無礙 身智光明 普照法界 삼불원융 십신무애 신지광명 보조법계佛身普現 十方三世 佛智妙光 常放光明 불신보현 시방삼세 불지묘광 상방광명無障無礙 圓滿具足 普門示現 靈通自在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부처님, 부처님은 누군가. 왜 부처님인가. 어째서 부처님이 되었나. 그런 뜻인데요. 부처님은 둥글고 밝다. 그래서 둥글 원자, 빛 광자, 원광(圓光)이라고 그럽니다, 원광. 불원광(佛圓光). 어째서 원광인가. 부처님은 몸이 태어난 몸에서 깨달은 몸을 얻었다. 깨달은 몸이 둥글고 밝다. 이런 뜻이죠. 둥글다는 말은 끝이 없다. 밝다는 말은 어둠이 없다. 끝이 없고 어둠이 없는 몸을 깨달음을 통해서 얻으셨다. 그걸 부처님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 몸을 불신(佛身), 부처님 불자, 몸 신자, 불신 이렇게 쓰는데, 깨달은 몸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의 마음을 불지(佛智), 부처님의 지혜, 깨달은 마음이에요. 깨달은 몸, 깨달은 마음. 이것을 불신불지(佛身佛智),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범부는 뭐냐. 범부는 태어난 몸을 가지고 살아요. 태어난 몸. 그래서 범부의 몸을 날 생자, 몸 신자, 생신(生身)이라고 하거든요, 생신. 근데 부처님은 그 태어난 생신의 몸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불신을 얻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요. 그리고 범부는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생각하는 마음. 그런데 부처님은 지혜를 가지고 산다. 그래서 생각은 어디서 왔느냐. 자기 경험에서 오거든요, 생각은. 그래서 경험을 업이라고 그러는데, 범부가 아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 그래서 업식(業識)이라고 해요, 업식. 알 식자. 부처님은 깨달은 지혜로 안다. 불지라고 그러고. 불지와 업식. 그럼 깨달음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느냐. 해탈을 얻었는데, 불교가 가르치고 서원하는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탈이에요, 해탈. 그럼 해탈은 뭐냐.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하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하고, 다 벗어나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찬탄할 때, 삼불이 원융하고(三佛圓融), 십신이 무애하고(十身無礙), 그렇게 하는데요. 부처님에게는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불이 있는데, 이 삼불이 다 함께 통해요. 원융이란 말은 함께 통한다. 또 부처님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는데, 이 열 가지 몸이 걸림이 없어요. 십신이 무애라. 그래서 신지광명이 보조법계라(身智光明 普照法界).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온 법계를 다 비춘다. 이렇게 예경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불신이 보현 시방삼세라(佛身普現 十方三世). 부처님의 몸이 시방삼세에, 온 공간에, 온 시간에 널리 다 나타난다. 그래서 불지묘광佛智妙光)이, 부처님의 지혜 묘한 광명이,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을 볼 때도 거기에 묘한 광명이 있고, 허공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고, 사람을 볼 때도 묘한 광명이 있어서, 일체 나타난 현상이 묘광이 아닌 게 없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어두운 밤에도 어두움을 느낄 때는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어두움을 느끼고, 밝음을 느낄 때도 묘한 광명이 바탕이 돼서 밝음을 느낀다. 그래서 밝거나 어둡거나, 있거나 없거나가 전부가 묘할 묘자, 빛 광자, 묘광(妙光)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부처님에 대한 설명이에요. 그래서 그 부처님 세계는 깨닫고 나면 해탈인데, 그 해탈은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을 한다. 그래서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래요, 무장무애. 장애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게 부처님의 깨달은 해탈이에요. 무장무애. 그리고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고 그래요, 원만하고 다 갖추어져서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남는 거 하나도 없어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그리고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그래요. 보문이란 말은 넓을 보자, 문 문자인데, 온갖 곳에, 넓은 문이라 이 말은 여러 곳에, 온갖 곳에, 일체 처소에, 시현이란 말은 나타난다. 이게 깨달은 부처님의 세계에요. 그리고 영통자재(靈通自在)라,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한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럼 이 영통자재라는 게 뭔가. 부처님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고 가고 싶은 데 가요. 그게 영통이에요. 저곳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와요.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라고 하는 30권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법문이 부처님이, 세존이 미리 도솔(世尊未離兜率)하시고,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강왕궁(已降王宮)하시고, 이미 왕궁에 강림을 하시고, 이렇게 나와요. 미출모태(未出母胎)에,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도인이필(度人已畢)이라, 중생제도에 마쳤다. 이게 영통자재에요. 신령스럽게 통해서 자재하는 거예요. 이걸 깨달음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장무애 원만구족 보문시현 영통자재, 그래서 신통이란 말을 쓰는데, 신통이란 말이 허공을 날라다니고, 먼 곳을 일시에 가고, 이것은 현상신통이고, 이 각지, 깨달은 지혜의 신통은 이런 거예요.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사바세계에 오고, 사바세계를 떠나지 않고 도솔천에 가고, 이곳을 움직이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이게 영통자재에요. 衆生心 : 佛性心性이야기 중생심 : 불성심성이야기①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②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③ 淨心(정심) 染心(염심) ④ 性心(성심) 緣心(연심) 清淨法身 汝之性也 圓滿報身 汝之智也 청정법신 여지성야 원만보신 여지지야 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천백억화신 여지행야 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자성구삼신 발명성사지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六祖壇經, 參請機緣제6) 불리견문연 초연등불지 (육조단경, 참청기연제6) 그러면 이런 깨달음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얻었나. 중생심(衆生心)에서 시작해서 얻은 거예요. 중생심, 중생의 마음. 중생의 마음이 없으면 불원광도 없어요. 불원광, 중생심, 이게 두 번째 이야기인데요. 그런데 중생심은 다른 말로 하면 불성(佛性)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이다.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이고, 깨달음을 얻는 본성이다, 이런 말이죠. 불성. 그리고 심성(心性)이라고 그래요, 중생심을. 심은 마음 심자인데, 온갖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그 낮에나 밤에나 기억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마음이 심인데요. 그 마음속에 근본 성품이 있는데, 그걸 심성이라고 그래요, 심성. 중생에는 성심도 있고 용심(用心)도 있고, 쓰는 마음. 우리가 오고 가고 하는 건 용심인데, 쓰는 마음인데, 그 용심 속에는 바탕이 되는 성심이 있어요. 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씨앗,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본성. 그래서 불성이다. 심성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이게 다 중생심이거든요. 중생심은 불성이다. 중생심은 심성이다. 그런 말이죠. 덥기는 덥고, 법문도 점점 잠 오는 법문만 하고. 잠이 와. 왜냐. 평소에 안 들어보던 말이라 법문 업식이 많이 형성이 안 돼서. 법문은 아는 소리를 해야 듣지, 모르는 것 소리하면 못 듣는 게 업식이 형성이 안 돼 가지고 그래요, 업식이. 내가 처음에 절에 와서 심지법문 한다고 그랬는데, 시골에서 심지는 호롱불 심지밖에 모르는데.(웃음) 그래서 호롱불 심지법문 하나 싶어가지고 했더니 나중에 보니까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 법문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 업식이 안 되면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얘기 하면 잠 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중생심이 이렇게 용심도 있고 성심도 있는데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하는 논에서는 眞如心(진여심), 生滅心(생멸심), 이렇게 가르쳐요. 진여심이란 말은 참 그대로 그냥 변함이 없는 거예요. 참 그대로. 참 진자, 같을 여자. 허공이 무너져도 변함이 없고, 지구가 없어져도 변함이 없고, 이걸 진여심이라고 해요. 생멸심이라는 건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찰나심이에요. 찰나 찰나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그걸 생멸심이라고 그래요. 이게 중생심이거든요. 그리고 自性清淨心(자성청정심), 자성이 항상 물듦이 없어요. 청정해요. 그리고 煩惱妄想心(번뇌망상심), 이게 중생심이에요. 번뇌망상이 항상 있는데, 자성청정심이 또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중생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청정심과 번뇌망상심을 다 가지고 있다. 이게 중생심이죠. 그리고 관심론(觀心論) 같은 데서는 간단하게 중생심을 청정할 정자, 마음 심자, 淨心(정심)이라 이렇게 가르치고, 또 물들 염자, 마음 심자, 染心(염심)이라 이렇게 가르쳐요. 정심은 자성청정심이고, 물든 마음 염심은 번뇌망상심이라 이 말이죠. 그리고 보통은 중생심을 말할 때 性心(성심), 자성청정 본성, 성심이 있고, 또 인연을 따라서 늘 좇아가는 인연 연자, 마음 심자, 緣心(연심)이 있다. 이게 중생심이에요. 중생심은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 중생심을 잘 맑히면 바로 번뇌망상심, 염심, 물든 마음, 인연을 좇아다니는 연심, 나고 죽고 하는 생멸심, 이것이 그대로 지혜광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다른 게 없어요. 그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경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느냐. 부처님의 청정법신(清淨法身)이 중생의 본성이다. 청정법신은 너의 본성이다(汝之性也). 부처님의 지혜광명신, 원만보신은 너의 지혜다(圓滿報身 汝之智也). 부처님의 천백억화신 자비원력신은 너의 행동이다(千百億化身 汝之行也). 이렇게 가르쳐요. 중생에게는 본성이 있고 지혜가 있고 행동이 있는데, 중생의 행동은 부처님의 천백억화신이고, 중생의 지혜는 부처님의 원만보신, 지혜광명이고, 중생의 본성은 부처님의 청정법신이다. 그게 중생의 본성, 불성이에요. 그래서 자성에 구삼신하니(自性具三身), 자성에 삼신이 갖춰져 있으니, 법신, 보신, 화신, 부처님의 삼신이 중생의 자성심에 갖춰져 있다. 그러니까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라. 발명이라는 게 없는 거 만들어 내는 게 아니고, 여기서는, 펼 발자, 펼쳐서, 밝을 명자, 밝히면, 중생에 있는 자성심을 펼쳐, 밝혀, 펼치고 밝히면. 근데 범부에게는 번뇌망상심이 있어서, 번뇌망상심 때문에 자성청정심이 펼쳐지질 않고 밝혀지질 않아요. 예를 들면 이게(컵) 청정법신, 진여광명인데 이걸 떡 보이면 이걸 지혜로 보지 않고 번뇌망상으로 보니까, ‘이것은 그릇이다. 시장에서 파는 거다, 내거다, 네거다’, 이런 것만 알지, 이거 자체가 지혜광명 청정법신이라는 걸 몰라요. 이걸 번뇌망상이라고 그래요. 번뇌망상에 가려져서 그것이 펼쳐질 수가 없다. 그래서 발명이라는 건 번뇌망상에 가려진 지혜몸을 펼치고 밝히면, 성사지(成四智)라,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지가 사지라고 그러는데, 사지라는 말은 중생의 의식이 전부 바뀌어서 네 가지 지혜가 되는 거예요. 8식이 바뀌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되고, 7식이 바뀌어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6식이 바뀌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5식이 바뀌어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이걸 사지라고 그러는데, 펼쳐서 밝히면 부처님이 이룩한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이게 불성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냐. 성불하는 게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하고. 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게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견이라는 건 눈으로 보는 거고, 문이라는 건 귀로 듣는 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상인연을 불리, 아니 불자, 여윌 리자, 여의지 않고, 일상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라. 뛸 초자, 그러할 연자인데, 초연히 불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초연등불지라. 삼신사지 경지에 오른다 이 말이에요. 불지는 삼신 사지인데. 그러면 눈으로 물건을 보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삼신사지에 올라가요. 이게 초연등불지라고. 어째서 그렇게 되냐. 초연이란 말은 뛴다는 말이데, 뛴다는 말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매이지 않는다. 눈으로 이렇게 그릇을 보더라도 그릇에 매이지 않고 바로 삼신사지에 들어간다. 법신, 보신, 화신. 조금 아까 얘기한 네 가지 불지에 들어간다 이거예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초연이라, 이걸 거부하는 게 아니라, 초연이라, 거부가 아니에요, 수행이 라는 건 거부가 아니라 초연이에요. 초연이란 건 보되 보는 데 매이지 않는 걸 초연이라고 해요. 매이지 않으면 초연이에요. 뛰어난 듯이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아니하면 거기에서 뛰어난 듯이, 이 말이거든요. 나무를 보되, 봐요. 거기에 매이지 아니하면 그게 초연이에요. 뛰어난 거다. 물질을 보되 보는 물질에 매이지 않으면 그게 초연이다. 그래서 견문연을 여의지 않고,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히 어디에도 매임이 없이, 삼불 사지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것이 전부 중생의 몸속에 다 들었다. 그런데 중생은 태어난 몸만 알고, 태어난 몸, 부처님의 깨달은 몸을 모른다. 태어난 몸하고 깨달은 몸하고, 깨달은 몸을 불신이라고 하고, 태어난 몸을 생신이라고 그러는데, 이 생신을 자기로 여기고, 불신을 자기로 여기는 게 그게 제불과 중생의 차이점인데요. 자기라고 하는 건 뭐냐. 옛날 언해본에 보면 자기를 어떻게 번역을 했느냐 하면, 내 몸 이랬어요, 내 몸, 스스로 자자는 나, 몸 기자는 몸(自己), 그러면 내 몸이라고 하는 느낌이 다른 거예요.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불신,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억화신, 이게 내 몸인데, 중생이 느끼는 내 몸은 태어난 몸만 내 몸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태어난 몸이 뭐냐, 난 몸인데, 난 몸. 난 몸은 뭐냐. 생로병사지요. 생각은 번뇌망상이지요. 중생이 나라고 느끼는 내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을 내 몸으로 아는 거예요. 이게 난 몸이에요, 난 몸. 그걸 내 몸이라고 한다 그거죠. 자기. 그런데 부처님이 느끼는 내 몸은, 자기는 청정법신, 원만보신, 백업화신, 그게 내 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태어난 몸은 생로병사 번뇌망상이니까 만날 걱정근심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망상으로 시작해서 망상으로 끝나는 게 일생이에요. 더 오래 살아봐야 별수도 없어. 만날 망상하다가 끝나요. 백 년 망상하나 50년 망상하나 그게 그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미움받겠네, 여기 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그러는데.(웃음) 이 몸도 건강을 맨날 챙기는데, 건강 챙겨봐야 나중에 화장할 땐 똑같아요. 집 하나도 관리를 하려면 맨날 청소하고 그래야 되는데, 수리하고, 나중에 포크레인 가지고 뜯을 때는 청소했던 집이나, 청소 잘 안 했던 집이나 똑같아요. 그러니까 알고 보면 보이고 들리는 일에 그렇게 얽매일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아무리 집을 쓸고 닦아봤자 나중에 포크레인으로 뜯을 때는 아무 표도 없고, 아무리 몸을 잘 보호해 봤댔자 죽어서 화장할 때는 아무런 표시도 없고. 그러면 그 몸이 죽기 전에 자기 본래 몸, 불성 몸, 이걸 본신이라고 하는데, 본신, 본성 몸, 불성 몸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본 몸이란 말이죠. 본 몸 자기. 난 몸 자기, 난 몸 자기에서 본래 몸 자기로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건 생각지도 못하고 태어난 몸에 얽매여 살다가 죽어요. 또 그게 한이 안 풀려 가지고 내세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12연기, 생사윤회에요. 善用心 : 六塵三昧 이야기 선용심 : 육진삼매 이야기① 眼見色 分別色 不隨念 色塵三味 안견색 분별색 불수념 색진삼매② 耳聞聲 分別聲 不隨念 聲塵三味 이문성 분별성 불수념 성진삼매 ③ 鼻聞香 分別香 不隨念 香塵三味 비문향 분별향 불수념 향진삼매 ④ 舌嘗味 分別味 不隨念 味塵三味 설상미 분별미 불수념 미진삼매 ⑤ 身覺觸 分別觸 不隨念 觸塵三味 신각촉 분별촉 불수념 촉진삼매 ⑥ 意分別 一切法 不隨念 法塵三味 (神會和尙禪話錄) 의분별 일체법 불수념 법진삼매 (신회화상선화록)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첫째, 매이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데, 본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첫 번째 발걸음이 매이지 않는 연습. 이 매이지 않는 연습을 뭐라고 그러냐 하면 선용심(善用心)이라고,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쓰는 거다. 용심을 잘하면 이 난 몸에서 본래 몸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그러면 마음 잘 쓰는 게 뭐냐. 일상생활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이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진(六塵)이라고 그러는데, 6진 속에서 우리가 사는데, 그 육진 속에서 자재를 얻어요. 그걸 육진삼매(六塵三昧)라고 해요. 마음을 잘 쓰는 것은 보고 듣는 데서,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자유자재를 얻는다. 그게 육진삼매에요. 이 법문은 혜능선사 제자 신회(神會)선사라고 있는데, 그 신회선사어록에 아주 중요하게 수록된 법문인데, 육진삼매가 이것이 일상삼매다. 삼매는 바를 정자, 볼 관자, 정관(正觀), 바를 정자, 볼 견자, 정견(正見), 바르게 보고 바르게 자재하는 걸 삼매라고 그래요. 정관, 정견. 그러면 눈의 삼매가 어떤 거냐. 안견색(眼見色)하고, 눈으로 색을 본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게 다 색이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 사물이 다 색인데, 눈으로 온갖 사물은 다 보고, 분별색(分別色)하되, 보이는 것을 분별해서 다 구분을 해요. 요거는 물질이다, 요거는 물이다, 나무다, 여기는 똑같이 다 하는 거예요.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아니 불자,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따라서 생각한다는 말은 이걸 꼭 가져야 된다, 이걸 꼭 버려야 된다, 이건 값이 비싼 거다, 이건 가치가 없는 거다, 이렇게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 소리예요. 이 수념이 문제예요, 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따라서 생각하는 게 문제에요. 보고 듣는 덴 허물이 없어요. 따라서 생각하는 게 허물이요. 이 수념 때문에, 따라서 생각하는 번뇌망상 때문에 중생이 고통을 받는다 이거죠. 그래서 안견색하고 분별색하되, 색을 보고 색을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색진삼매(色塵三味)다. 보이는 티끌로부터 다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아, 이거 참.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이거 보는 데는 허물이 없어요. 근데 이거는 내가 싫어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좋아하는 거다.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저 밖에서 요령소리가 나오면 들을 뿐이에요. 근데 저게 무슨 소리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다, 내가 싫어하는 소리다, 이렇게 하는 건 따를 수자, 생각 념자, 따라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망상이에요. 걱정근심이란 건 전부 망상에서 오는 거예요. 죽어보지도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따라서 생각하는 거거든요. 이게 번뇌망상이에요. 아이, 죽어보면 될 거 아니에요. 미리 걱정하지 말고. 똑같아요. 이문성(耳聞聲)하고, 귀로 소리를 듣고, 분별성(分別聲)하되, 소리를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성진삼매(聲塵三味)라, 듣는 티끌로부터 정관, 정견, 자재를 얻는다. 똑같이 나와요. 비문향(鼻聞香)하고, 분별향(分別香)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향진삼매(香塵三味)라. 코로 냄새를 맡고, 맡는다는 말은 들을 문자를 써요, 똑같이. 들을 문. 냄새를 코로 듣는다. 맡는다 이 말이죠. 맡고. 분별향하되, 냄새, 향기를 분별하되, 불수념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향진삼매라. 냄새로부터 삼매를 얻어요. 정관, 정견, 자재를 얻어. 또 설상미(舌嘗味)하되, 혀로 맛 볼 상자가 있는데, 맛을 맛보되, 설상미하고, 짜고 맵고 한 맛을 맛보고, 분별미(分別味)하되, 맛을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게 미진삼매(味塵三味)라. 맛의 티끌로부터 삼매를 얻는다. 신각촉(身覺觸)하고, 몸으로 촉각을 느끼고, 분별촉(分別觸)하되, 촉을 분별하되, 내가 접촉한 대상이 차냐 더우냐 이런 걸 다 분별하되, 불수념(不隨念)하면, 따라서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촉진삼매(觸塵三味)다. 의분별(意分別) 일체법(一切法)하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기억 속에. 그래서 색성향미촉을 외진(外塵)이라고 그러고, 바깥 티끌, 법을 내진이라고 그래요, 기억 속에 있다고, 안에 있는 티끌이다. 그러면 우리 의식 속에는 온갖 사람도 있고, 물질도 있고, 그냥 걱정도 있고 다 있어요. 기억을 통제할 수는 없어요. 이게 조금 후에 내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를지 아무도 모르고요, 또 오늘 저녁에 잘 때 무슨 꿈 꿀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 기억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마치 허공의 바람을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기억을 하되 그 기억에 안 따라가면 돼요. 기억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느끼고 내버려 둬요. 그러면 그것이 법진삼매라(法塵三味). 기억을 안 일어나게 한다든지, 기억을 멀리한다든지 이건 잘못이고, 기억이 일어나면 기억을 느끼되 그 느끼는 기억에 못 하는 생각이나 나쁘다는 생각을 안 일으키고 자기 평상심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그게. 기억의 삼매라고 하는 거지요. 이렇게 하는 게 중생의 번뇌망상에서 자성청정심, 해탈 경지로 돌아가는 첫걸음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매이지 않는 훈련을 해야 되요. 공연히 매이는 거예요. 몸에 매이고, 그래서 몸 꾸미려고 애를 쓰는데 몸 그거 꾸며봤댔자 화장할 때 아무 소용도 없고요. 이러면 또 성형외과 의사분들이 들으면 싫어할 거 같아. 그런 거예요. 그리고 집 꾸미려고 그러고, 여러 가지 꾸미려고 그러는데, 그거 다 부질없는 거거든요. 그러면 뭐가 중요하냐. 내 생각이 자유로운 거. 생각이 자유롭다라는 건 매이지 않을 때 생각이 자유로워요. 그래서 보되 보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듣되 듣는데 매이지 않고 자재를 얻고,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 자재를 얻으면 이것이 중생의 번뇌망상 속박에서 해탈경지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에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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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5일 백중기도 입재 법문
가섭스님 2021-07-05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때보다도, 올해 백중은 입재를 맞이하면서 ‘다른 해보다도 좀 더 진중해진다고 해야 하나요, 마음이 좀 무겁게 입재를 임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솔한 마음으로 백중 입재를 하고, 우리가 회향할 때쯤 되면 코로나가 진정으로 집단 방역이 와서 누구나 다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가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 코로나라고 하는 이런 전염성 바이러스는 전 인류가 다 같이 잘해야 돼요. 이 바이러스가 진화를 해요. 변이라고 하는데, 변이바이러스, 환경에 맞춰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진화해요. 마치 우리의 마음이 욕망을 따라가면 그 욕망에 좀 더 좀 더 물들어서 커지듯이 바이러스도 그런 거 같아요. 백중 입재를 맞이해서, 백중이란 말은 불교 말로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 합니다. 우란분이란 말은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말이에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것은 목련존자의 이야기입니다. 목련경에서 유래된 이야기인데, 목련존자의 어머니에서 유래된 이야기이지요. 근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한 번도 거꾸로 매달려 본 적이 없잖아요. 거꾸로 매달리면 안 됩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있어요. 혹시라도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운동기구 중에 거꾸리라는 게 있어요, 발을 걸쳐 머리가 땅으로 가는 거. 그거 5분만 하고 계셔 보세요. 피가 몰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5분, 10분이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된다면 그 고통은 끝이 없겠죠. 무간(無間)의 고통이에요. 정말 사이가 없는, 정말 쉴 사이 없이 고통을 받는 과보인데, 혹여라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런 어려운 인연에 닿아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면은 이 백중을 맞이해서 그것을 해원(解冤)하는, 맺힌 마음을 풀어내는 그런 의미 있는 불교의 5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 워낙 자리를 잡아서,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 날 가장 많이 절에 오지만, 우리가 농경사회, 1970년대에는 이런 백중이나 동지나 입춘, 이때 절에 많이 왔어요. 그때보다는 지금 신도들이 좀 더 불교적이고 좀 더 세련된 거지요. 뭔가 아는 불자들인 거죠. 옛날에는 민속신앙과 결합이 되면서 백중이란 걸 굉장히 크게 봤습니다. 본래 백중은 음력으로 7월 15일인데, 오늘이 입재니까요, 음력 7월 15일인 8월 22일, 일요일 오전에 우리 진관사는 회향을 하는데, 백중은 백종(白踵)이라고도 불렀어요, 백종, 흰 백자에 발뒤꿈치 종자를 써서 ‘발뒤꿈치가 하얘진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논에 들어갈 일이 없다.’ 옛날에는 농사를 다 지었으니까. 발뒤꿈치에 논 흙이 묻을 일이 없는 거예요. 이제 백중이 지나게 되면 모든 자라던, 성장하던 나무나 풀들이, 위로 오르던 물들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결실을 맺는 거예요. 열매가 단단해지기 시작해요. 벼도 익고 과실도 익고 그래요. 논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발뒤꿈치가 하얘진다고 해서 백종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불교적으로 와 가지고는 백중(百衆)이 되었죠. 백 명의 대중을 모시고 부모님의 무문(無門)갈래에 가시기를 염원하는 거잖아요. 또는 백 가지 음식을 차려 가지고 백 명의 스님을 모시고. 그래서 백중은 다른 말로는 스님들에게 수행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공양을 내는 날이기도 해요. 요즘에는 백중 회향을 승보 공양의 날이다, 그래서 삼보 중에 스님들에게 공양 내는 날이다, 이렇게 또 새로운 신행 문화가 움트기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찰에서 그렇게 행사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백중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목련존자로부터 출발했다 말이에요. 목련존자가 견성을 하고 삼매에 들어보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의 지중함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지극한 거거든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좀 일찍 여의었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 여의었는데, 올해가 40년 됐어요. 그래서 40년째 뭘 해드리면 좋을까 하다가 이만하게 그림을 그려 가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 사진이 바래면 못 쓰니까 이만하게 진영을 하나 그려 가지고- 법당에 모셔놨어요. 40년 기념으로. 잘 했지요. 딱 모셔놓으니까 뭔가 그래도 생전에, 내가 어렸을 때 못 했던 은혜 갚음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스로가 들더라고요. 물론 학인 때는 못 했지만, 소임 살면서는 제가 늘 어머니 기제사를 모셨고, 백중 때도 늘 동참해서 모셨어요.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승속을 떠납니다. ‘스님들은 출가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없겠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역대의 큰스님들도, 진묵스님이나 우리가 잘 아는 경허스님도 견성을 하고 어머님을 모셔다가 같이 생활을 했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부모님, 선망부모에 대한 지극한 마음은 출가자나 출가자 아닌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게는 똑같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련존자도 이렇게 마음이 열리고 나서 어머니가 어디 계신가 보니까 어머님이 나쁜 갈래에, 춥고 어둡고 그런데 가 계신 거예요. 보니까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그때 마침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어머님이 살아생전에 불교의 인과나 윤회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었어요, 다른 믿음을. 그래서 다른 수행자라든지 다른 마음 닦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지 않고 좀 심술을 부린 거 같아요. 놀부 심보가 있었다고. 탁발을 하러 오면, 공양을 얻으러 오면 흔연하게 주는 게 아니라 좀 괴롭히기도 하고. 마음이 우란분이었던 거 같아요. 거꾸로 되어있었던 거 같아. 우리도 가끔 심술 날 때 있잖아요. 사촌이 땅을 산다든가 옆집이 아파트를 넓혀서 이사를 간다든가 좋은 차를 산다든가 하면 약간 좀 거시기하잖아요? 어머니도 그렇다 보니까 나쁜 갈래에 빠져있는데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막 올라오는 거예요.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살아생전에 길을 가다가, 급하게 길을 가다가 딱 멈춰가지고 거미를 밟을 뻔했던 거예요. 근데 그걸 잘 발견해 가지고 거미를 밟지 않고 잘 지나친 거예요. 그냥 지나쳤는데 거미를 살려주려고 지나친 게 아니라 신발에 묻을까 봐. 차이가 있어요. ‘거미를 살려줘야 되겠다,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이게 아니라 ‘어, 거미를 밟으면 내 신발이 지저분해지는데’ 하면서 안 밟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 자체가 공덕이 돼서 거미를 살려준 공덕으로 거미줄이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그걸 타고 올라오는 거예요. ‘아, 어머니는 이제 조금 나쁜 갈래에서 벗어나는구나.’ 하고 있는데 밑에, 나쁜 갈래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 거미줄을 잡고 막 같이 올라오는 거예요. 거미줄이 끊어지겠어요? 안 끊어지겠어요? 그건 몰라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끊어질 거 같지만 모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머니 마음에 불안한 거예요, 끊어질까봐. 그래서 냅다 올라오는 사람을 발로 찼어요. 옆으로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떨어지면서 그 반동으로 거미줄이 똑 떨어져 버렸네. 그래서 올라오다가 다시 나쁜 갈래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그때 목련존자가 ‘아, 나의 공력으로는, 나의 힘으로는 어머니를 무문 갈래로 인도할 수가 없겠구나.’ 해서 어머니를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좋은 갈래로 가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가서 ‘우리 어머님이 좋은 갈래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게 되지요. 그러면서 우란분경이 형성이 되고, 그게 유래가 돼서 우란분재, 백중이 우리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겁니다. 그만큼 목련존자는, 어떻게 보면 신통제일, 10대 제자 중에 신통제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효행제일인거 같아요, 효행제일. 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전원일기 아시죠? 2021이라는 전원일기 프로그램을 했어요. 거기에서 너무 오랜만에, 우리 어렸을 때 전원일기 안 보고 자란 사람 없을 거예요. 그 전원일기를 올 해 출연진들을, 최불암씨, 김혜자씨 등 다 출현을 시켜서 다시 하는데, 제가 보다가 눈물샘이 터져 가지고 펑펑 울었어요. 어떤 장면에서 제가 눈물이 터졌냐 하면, 김회장 댁에, 최불암씨가 김회장이잖아요, 전화기를 새로 놓은 거예요. 옛날엔 전화 처음 놓으면 얼마나 희안합니까. 며느리들도 막 와서 자기 친정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거에요, 며느리들이. 반가워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전화기를 딱 놓고 머리맡에, -옛날엔 안방에 전화기를 놨어요, 왜냐하면 밖에 놓으면 쓰니까 못 쓰게 하려고,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머리맡에 전화기를 딱 놓고 자는데, 김혜자씨가 자다가 일어난 거예요. 일어나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리고는 전화기를 듭니다, 누운 상태로. 전화기를 들어서 ‘거기 우리 엄마 좀 바꿔주세요. 우리 엄마는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우리 엄마는 이런 옷을 입고 있고...’ 이렇게 혼자 이야기를 해요. ‘우리 엄마한테 시집간 딸이 잘살고 있다고 꼭 좀 전해주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최불암씨가 옆에서 깼어요, 중얼중얼하니까. 최불암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잠꼬대하냐’고 그래요. 잠꼬대가 아니라 진짜 엄마가 보고 싶은 거죠. 이제는 나이도 들고 자식들도 다 결혼하고 나니까 어머님이 더더욱 생각이 나고, 본인도 나이가 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어머니, 시집올 때의 어머니가 생각이 나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어요. 전화기를 놓고는 김혜자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바라는 거는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추운 데가 뭐예요? 나쁜 갈래거든요. 추운 거만큼 힘든 게 없잖아요. 배고프고 추운 거만큼 견디기 힘든 건 없어요. 추위는 어떻게 피할 데가 없어요. 더위는 그늘이나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좀 피할 수 있지요. 근데 추위는 정말로, 배고프고 추운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 지극한 마음에 동화가 돼 가지고, 동기화가 되어 전염이 되어 나도 모르게 TV를 보면서 늦깎은 비구가 휴지를 가지고 눈물을 닦으면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한 번 더 했는데, 신도들이 막 울더라고요. ‘왜 우느냐?’고 그러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누구나 다 가슴에는 그런 그리움들이 있는데, 그리움들을 잘 해원해야 하는데, 그리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미운 그리움도 있고, 진짜 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거든요. 지금 어머님의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그 부모님과 관계가 정말 좋은 부모 자식간이 있는가 하면은, 부모님과 관계가 영 좋지 않은 자식도 있거든요. 백중이라고 하는 것은 선망부모, 돌아가신 분도 천도를 해야되지만, 지금 내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살아계신 부모님과도 이 49일 동안에, 혹여나 관계가 좀 소원하다면 그 소원한 관계를 해원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된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에 해원하고 헤어져야 돼요. 우리가 재를 지내거나 내지는 기념일이 되어 제사를 모실 때 정말 매해, 제가 절에서 기제사를 지내다 보면은, 매해 제사 때마다 우는 분들이 계세요. 특히 딸들이 좀 그래요. 물론 정이 많고 속정이 깊으니까 그렇겠지만. 그런데 그 우는 딸들을 보면 뭔가 아쉬워. 뭔가 남아있어요. 좀 더 잘해드릴걸. 좀 더 내 마음을 표현할걸. 이런 생각들이 있단 말이에요. 돌아가시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살아있을 때 해야 되는데, 백중이라는 것은 그런 1차적인 의미가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백중을 지내야 되는 의미는, 작년에도 지냈잖아요, 여기서 절을 10년간 다닌 분은 10번째 지낼 거고, 20년 다니신 분은 스무 번째 지낼 거고, 그죠, 30년 된 분은 30번째 지낼 거란 말이에요. 매년 지낸단 말이에요. 똑같은 백중을 매년 지낼 필요가 있느냐. 단순히 부모님을 모셔 가지고 7번을 제사를 지내드리고 음식을 베풀어드리고 하는 의미로다가 한다면 1번이면 끝나요. 그런데 매년 지내드리는 의미가 뭐냐. 백중은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예요. 법음이라는 거예요. 법음, 법의 음성.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고,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는 법석을 마련하는 자리에요. 부모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거예요. 혹여라도 부모님이 서운한 게 있고, 아쉬운 게 있고, 또 부족한 게 있다면, 내지는 나쁜 갈래에 가 있다면, 나쁜 갈래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춥고 배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고 마음이 어두운 거예요.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탐진치를 보통 얘기하잖아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는 치암(癡闇)이에요, 어리석을 치에 어두울 암자, 치암. 어리석음은 캄캄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구분이 안돼.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암만 이야길 하고 설득한다고 해도 믿질 않아요. 믿지 않으니까 행동을 안하게 되죠. 절에 와서 기도하고 성취하는 사람을 보면요, 지나가는 스님이 하시는 말씀도 따라하는 사람은 성취를 해요. 앉혀놓고, 여기 총무스님께서 길게 얘기하면서 차도 따라주고 먹을 것도 주고 선물도 주고 해도 안 해요. 왜? 맘이 어두워서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성취를 못 합니다. 근데 스님이 지나가다가 ‘108배나 하고 가.’ 그런데 그 말이 확 꽂혔어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열심히 하고 간 사람은 뭔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마음이 밝기 때문에 그래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 표현한 게 어떤 부처님 말씀이나 어떤 우리에게 득이 되는 얘기를 했을 때 귀에 안 들어와요. 어둡기때문에. 안 보이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어리석음은 치혹(癡惑)이라고 해요. 치혹. 혹은 의혹. 미혹할 때, 의심한단 얘기에요. 어리석음은 두 번째 의심하는 거예요. 진짜로? 그렇다고? 마음에서, 또 하나는, 계속 갈등하는 거예요. 이렇게 할까, 이렇게 할까. 이 절이 좋을까, 저 절이 좋을까. 저 스님이 잘할까, 이 스님이 나을까. 스님 찾아 삼만리, 도량찾아 삼만리. 이러다가 시간을 다 보내요. 우리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그런 분들은 없는 거 같아요, 보니까. 이렇게 암하거나 혹한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이에요, 암혹. 암혹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 이게 나쁜갈래거든요. 마음의 나쁜 갈래는 암혹이에요. 마음이 어둡고 뭔가 천지구분을 못하는 상태가 되거든요. 이게 나쁜 갈래에요. 다른 게 나쁜 갈래가 아니고. 목련존자가 어머님께 지극함을 유래로 백중이 시작되었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나쁜 갈래에 빠져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가려면 첫 번째로는, 우리 종단에서 만든 불교성전에 보면 565페이지인가에 나와요. 거기에 보면 목련존자 얘기가 나오면서 부모님께 삼보를 믿게 하는 게 효도요, 부모님께 계행을 지키게 하는 게 효도요, 부처님께 선행을 하게 되는게 효도요, 부처님께 공덕을 짓게 하는 것이 효를 갚는 일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중에 첫 번째는 부모님을 모셔서 부모님이 혹시라도 이렇게 거꾸로 되어있는 마음들을 돌리게끔 하는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하는. 그러니 입재해 놓고 1,3,5,7만 와야합니까? 1,2,3,4,5,6,7 다 와야 합니까? 다 와야 해요. 왜냐. 여러분이 법을 여는 법의 주최자입니다. 잔치를 여는 주최자예요. 근데 손님을 모셔놓고 이렇게 단을 장엄스럽게 다 모셔놓고 법을 여는, 여기 위패를 모셨으면 여러분들 한분 한분이 다 복위(伏爲)란 말이에요. 복위, 복위자, 엎드려서 받드는 거란 거죠. 근대 엎드려서 해놓고는 이름만 걸어놓고 안 오면 안된다 말이죠. 둘째는 백중을 해야 되는 이유가 내 마음을 밝히는 것.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그런 말이 있어요. 잘못되면 조상탓이라고. 그런데 조상이 잘못되면 누구탓이다? 내탓이다 이거에요. 내 마음을 밝혀야지만이 조상의 마음이 편하겠지요. 이거는 뭐 유치원 애들도 아는 얘기에요. 우리 가정이 편안해야 우리 부모님이 편안하지 맨날 지지고 볶고 남편하고 싸우고 부인하고 싸우고 애들하고 싸우면 편안하게 생겼습니까.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을 참회해야 되요. 두 번째는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첫 번째는 어머님의, 선망부모님의 마음을 밝혀드리는 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이고, 그건 지금 입재했으니까 7번 잘 참석하면 되는 거고, 두 번째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내 마음을 밝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참회다. 첫 번째 참회는 어떤 참회가 있는가 하면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육정참회(六情懺悔). 여섯가지의 정, 정은 다른 말로는 근(根)이라고도 해요. 육근, 안이비설신의, 들어보셨죠? 육근. 그걸 다른 말로는 정이에요. 그놈의 정 때문에, 정 때문에 아시죠? 우리 정 때문에 그렇게 살은 거예요. 사랑 때문에 사시는구나. 다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정이 굉장히 무서운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중생을 다른 말로 유정(有情)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육정참회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참회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안이비설신의는, 우리 선망부모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 욕망에, 집착에, 감각에 매여있어요. 감정에 매여 있거든요. 우리 마음에 감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감정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감정.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부처님 빼고, 부처님만 빼고 뭐라고 막 비방을 하면 모두 화를 내죠.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 감정인데, 이 감정은 2억 5천만 년 전에,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들이잖아요, 진화론에서 보니까 우리가 산소농도가 이렇게 대기 중에 24%였다가 15%로 내려갈 때가 있었어요. 화산 폭발하고. 그래서 숨을 안 쉬어야 하니까 이 갈빗대가 원래는 척추까지 있었는데 이게 진화하면서 올라오게 된 거예요. 폐가 커진 거예요. 그리고 더 나가서는 뼈도, 뼈 안에도 이렇게 공기주머니가 있어요. 닭을 보면 닭 뼈가 안이 비어있지요. 겉은 단단한데 안은 비어있어요. 그 닭이 그때 진화하면서 그 뼛속에다 공기를 채우려고 뼈가 그렇게 생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갈빗대가 위로 올라오면서 폐가 커지면서 진화를 하는데 새끼를 지금까지는 밖에 낳아두면 알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걸로 끝났는데, 젖을 물리는 포유류들이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몸속에 잉태하기 시작한 거예요. 잉태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갈빗대가 위로 올라옵니다. 진화할 때. 그러면서 폐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서 아기를 낳죠. 자기의 젖을 물려서 키우기 시작해.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식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식을 낳아 본 사람하고 안 낳아 본 사람하고 집착의 크기가 달라요. 달라, 스님들은 안 낳아 봐 가지고 평생 애들이야. 철이 없어요.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옛날 어른스님들이 제가 뭐 할 때 스님들은 나이 먹어도 철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기분 나빴어요. 제가 조금 아까 얘기했죠. 저 욕하면 싫어한다고. 스님들이 도 닦으러 온 사람들인데 철이 없어. 그런데 살아보니까 철이 없어. 뭐 이렇게 집착이 별로 없어요. 스님들이 보면은. 끝에 가면 결국은 웃는 힘들이 있어. 그게 조금씩 조금씩 몇억 년 동안에 이어오던 인간이 갖는 감정, 집착 이런 것들이 안하다 보니까 조금씩 주는 것 같아요. 이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아기를 기르는 것은 이것보다 위대한 일은 없어요. 다만 감정의 출발이 어디냐, 이걸 말씀드리다가 여기까지 온건데, 그 감정이라는 것은 몇억 년 동안에 이렇게 우리의 DNA속에 쌓였다. 감정이란 그렇게 생긴거다. 감정은 원래 있던 게 아니란 거예요. 감정이 내가 이생에 생명을 타고 나면서 쌓이고 만들어졌던 거다. 그래서 이 육정이라는 것은 그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고, 빠지기 쉽고, 홀리기 쉽고, 속기 쉬워요, 쉬운 말로. 쉬운 말로 사기당하기 쉬워요. 좀더 좋은 거, 좀더 편안한 거, 좀더 좋은 소리, 좀더 안락한 거, 이런 거 보면 그쪽으로 가게 돼있어요. 이때 그 마음을 탁 알아차려서 잡는 게 육정 참회에요. 그렇게 해야 마음이 밝아진다. 육정참회를 하고 나면, 육정참회는 자비도량참법이나, 거기에 보면 열 가지의 참회가 나오는데, 열 가지를 기준 삼아서 참회하는 게 나오는데, 거기에 육정참회가 나와요. 안근에 대한 참회, 비근에 대한 참회 등 자비도량참법 해보시면 거기 나온단 말이에요, 그 얘기고. 그리고 나서는, 자기마음을, 어리석음을 밝히면, 아까 암혹이라고 했죠, 암혹, 암혹한 마음을 밝혀서 밝게 하면 내 마음이 밝은 만큼 부모님도 밝아진다.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내 마음이 지글지글 뽀글뽀글 갈등과 대립과 맨날 불만으로 산만함으로 가득가득한데 어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힘이 있겠느냐는 거예요. 마음이 밝혀. 마음이. 육정참회를 통해서. 육정참회를 하다보면은 그다음에 마지막 실상참회입니다. 실상참회는 뭐냐. 말 그대로 실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참회를 하면 할수록. 이 실상참회의 키워드는 그건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건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제상은 비상이다(諸相非相)>. 입으로 따라 해야 되요. 제상은 비상이다. 제상은 비상이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란 거예요. 아시죠. 금강경에 나오죠.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런 얘기가 나온다 말에요. 비상, 모든 상이 아니라고 보는 게 여래를 보는 거예요. 여래를 봐야지 마음이 밝아지죠. 우리 맨날 진관사에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여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래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당체요, 여러분은 부처님이요, 여러분은 연기적 존재요, 여러분은 모든 상이 비상이다. 마음이 확 밝아져야하는데, 이 얘길 들으면. 번뇌가 싹 녹아내리고 밝아져야 하는데, 눈빛들이 아리송해. 아리송해. 모든 상은 비상이에요. 여기에 뚜껑이 있어요. 이걸 정말 강한 불로 태우면 뭐만 남아요? 허공만 남아요. 허공. 허공은 타지 않아요. 허공의 다른 말은 비상이에요. 허공, 그게 반야에요. 허공이, 이 컵이 허공을 의지해서 타고, 불이 허공을 의지해서 이 컵을 태우지만 결국은 이 컵도 사라지고 불도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하나가 허공이에요. 허공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허공같은 게 뭐냐, 바로 반야다. 내가 부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게 허공이에요. 그 에너지는 무한한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여래다, 나는 진리다, 나는 부처님이다, 나는 비상이다, 모든 상이 아니다, 아, 나는 허공과 같은 존재다. 비어있다는 게 아니에요. 허공은 꽉 차있는 겁니다. 그런데 허공은 텅텅 비어있어요. 아시겠지요? 다 알아듣는 눈빛이네요. 백중은 이렇게 내 조상의 마음을 밝히는 기간으로, 순간으로, 법석으로 만들고, 말미암아 내 마음도 늘 그렇게 실상반야로 늘 부처님의 마음으로 함께 해서 늘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늘 승리하는, 번뇌에 지지않고 늘 승리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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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6월10일 음력 5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6-10
-身命과 慧命 이야기- 오늘 진관사 신축년 5월 초하루 법문은 <몸생명, 지혜생명>, 몸생명, 지혜생명,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생명을 신명(身命)이라고 하고,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활은 거의가 다 몸생명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몸생명을 위한 불교를 또 옛날에는 생활불교라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치유라고도 해요, 치유. 힐링(healing)이다. 그게 다 몸생명 불교라는 얘기에요. 생활불교, 치유불교. 다스린다는 말이죠, 치유는. 우리나라가 70년대에 대학생 불교수련회가 사찰에서 많았거든요. 그런데 수련회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관심 사항이 뭐냐.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불교 교의, 불교에서 가르치는 뜻, 그것에 관심이 있고요. 그다음에는 불교가 우리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생활에 도움, 생활의 이익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기간을 정해서 여름에 결제를 하고, 겨울에 결제를 하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서 결제를 해서 참선을 하는데, 학생들이 하는 참선은 깨달음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는가, 운동선수들은 어떻게 하면 운동경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많았어요. 생활불교라고 하고요. 福德 복덕日日有 千祥之慶 時時無 白害之災 일일유 천상지경 시시무 백해지재壽山高屹 福海汪洋 수산고흘 복해왕양身無一切病苦厄難 心無一切貪戀迷惑 신무일체병고액난 심무일체탐연미혹三障頓除 五福增崇 (釋門儀範 祝願篇)삼장돈제 오복증숭 (석문의범 축원편) 그리고 일상생활도 부처님께 축원을 하는데, 거의가 몸생명을 위한 축원이에요. 불교의식문 축원문에 보면 만날 하는 게, 일일유 천상지경이라(日日有 千祥之慶), 나날이 천 가지 좋은, 상서로운 복이 있고, 시시무 백해지재라(時時無 白害之災), 때때로 백 가지 해로운 재앙이 없어진다. 이런 걸 원하거든요. 수산이 고흘(壽山高屹)하고, 이런 거. 수명, 목숨 산이, 목숨이 저 산처럼 아주 높고, 복해가 왕양하고(福海汪洋), 복 바다가, 바다처럼 깊고 넓고,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이고요. 신무일체병고액난(身無一切病苦厄難)하게 해주시고요, 몸에는 일체 병고와 액난, 병고가 없도록 해주시고, 심무일체탐연미혹(心無一切貪戀迷惑), 마음에는 탐연, 탐내고 얽매이는 미혹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런 게 전부가 몸과 생활을 위한 축원이거든요. 삼장이 돈제하고(三障頓除), 삼장이 있는데, 세 가지 장애, 세 가지 장애는 혹업고(惑業苦)라고 해서, 미혹장애, 업장장애, 고난장애, 마음이 미혹한 장애, 악업이 쌓이는 장애, 고난이 다가오는 장애, 이런 혹업고 삼장을 바로 한꺼번에 제거하게 해주시고. 오복이 증숭하고(五福增崇), 오복은 불교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유가 서적에서도 많이 말하는데, 사람이 항상 필요한 거예요. 수(壽), 부(富), -수명, 재부, 재물부자,-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강녕(康寧, 건강할 강자, 편안할 녕자). 수, 부, 강녕, 항상 건강을 필요로 하잖아요. 늘 써붙여요. 수부강녕, 부모강녕, 이런 거. 어른들에게는 강녕이란 말을 쓰고, 아이들에게는 건강이란 말 쓰고 그러더라고요. 그 뜻은 같은 뜻인데, 애들에게 ‘강녕하시오’란 말 잘 안 쓰고요. 유호덕, 넉넉할 유자인데, 덕이 넉넉하고, 심덕이 있는 게 복이라고요. 마음의 덕이 있는 게. 고종명이라고 해서 자기 수명대로 사는 거, 수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횡사(橫死)라고 해요. 뜻밖에 죽었다고, 비명횡사, 이런 거. 객사, 밖에 나갔다가 생각지 않게 죽었다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 명을 차분히, 편안히 맞게 해주세요. 이런 게 오복인데, 오복이 증숭이라, 계속 높이 높이 불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축원을 매일 해요. 그게 복덕(福德)입니다. 이런 복덕 축원을 항상 한단 말이에요. 그게 신명이에요. 生活 생활三法和合 名爲衆生삼법화합 명위중생 一壽 二煖 三識 (涅槃經33)일수 이난 삼식 (열반경33) 行住坐臥 語默動靜 着衣喫飯 痾屎放尿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그런데 몸이 살아가는 거, 몸이 구성된 거, 이런 걸 또 가르치고 있는데, 이 몸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열반경 제33권에서는 몸이라는 걸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요. 첫째는 뭐냐. 목숨 수자(壽)를 썼는데, 목숨이 끊어지면 몸이 아니에요. 몸은 목숨이다. 목숨은 뭐냐. 숨 쉬는 거거든요. 그래서 수명이라고 그러는데, 그건 어려운 말이고, 목에 있는 숨이에요. 우리말로. 목에 숨이 있으면 그게 몸이에요. 한심해요. 몸이라는 거,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에 숨 쉴 때 몸이지, 몸에 숨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기가 막혀요. 그다음에, 따뜻할 난자(煖). 몸이 따뜻해야 몸이에요.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면 몸이 아니에요. 체온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호흡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다음에 식이라고 해서, 알 식자(識)인데, 의식이에요. 의식이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의식이 있나 없나 이러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체온도 있고, 호흡도 있고 의식만 돌아오지 않은 걸 식물인간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의식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3가지가 다 함께 있을 때 그걸 중생이라고 한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산다는 게 아무리 복을 빌고 좋은 걸 많이 해도, 이 몸 자체가 생각에 잘못이 있다든지, 체온에 잘못이 있다든지, 호흡에 잘못이 있으면 그냥 몸이 아닌 거예요. 사는 게 아닌 거예요. 이런 거 참 중요해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생활(生活)을 뭐라고 그러냐. 행주좌와(行住坐臥), 이게 생활이에요. 행, 돌아다니고, 주, 멈추고, 머물 주자가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멈춘다는 뜻이거든. 돌아다니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좌, 앉기도 하고, 와, 누워서 자기도 하고. 이게 생활이에요. 행주좌와. 어떤 삶을 살아도 행주좌와는 마찬가지예요. 다니고 멈추고 앉고 자고, 그거죠. 그리고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어, 말하고, 묵,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동, 움직이고, 정, 고요하고. 어묵동정. 행주좌와. 이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생활이에요. 생명활동. 그리고 생활을 항상 이야기하는 말 중에 착의끽반(着衣喫飯)이란 말을 써요. 착의, 옷 입고, 끽반, 밥 먹고. 이 옷 입고 밥 먹지 아니하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산다는 게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밥 먹는 게 사는 거고, 옷 입는 게 사는 거예요. 그 뭐 대단하게 생각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재밌는 게 있는데, 아시방뇨(痾屎放尿)란 말이 있는데, 아시는 대변보는 걸 말해요. 대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돼요. 방뇨는 소변보는 걸 말해요. 소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이게 사는 거예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가고 서고 앉고 자고, 말하고 조용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또 옷 입고 밥 먹고, 대변보고 소변보고, 이거예요. 여기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똑같은 거예요. 이게 생활인데, 이걸 잘하기 위해서 옷 잘 입고, 밥 잘 먹고, 잘하기 위해서. 또 화장실 잘 꾸미고. 화장실도 참 웃겨요. 아시방뇨가 중요하지, 화장실 변기가 중요한 게 아닌데, 변기만 좋으면 뭐 해요. 변을 잘 보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그렇지. 근본이 이건 거예요. 변 보고, 옷 입고, 밥 먹고, 움직이고. 이게 생활인 거예요. 그게 그냥 생활이에요. 근데 이 생활이 오래가냐. 오래 안 가거든요. 만날 건강을 위해서 밥도 먹고, 건강을 위해서 병치레도 하지만, 밥을 먹는 사람이나 안 먹는 사람이나 죽어요. 병이 있는 사람도 죽고 병이 없는 사람도 죽어요. 건강하다고 좋아하지만, 건강한 사람도 죽는다는 거예요. 이걸 신명이라고 하거든요. 몸생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죽어요. 그러면 이게 죽고 나면 뭐가 남는 게 있나 없나, 도대체. 뭐가 남아. 아무것도 안 남나. 이거거든요. 慧命 혜명謂自性清淨心 難可了知 위자성청정심 난가료지彼心爲煩惱所染 亦難可了知 (勝鬘經自性清淨章제13) 피심위번뇌소염 역난가료지 (승만경자성청정장 제13)世尊 於此起煩惱 剎那心 剎那相應 (勝鬘經一乘章제5) 세존 어차기번뇌 찰나심 찰나상응(승만경일승장제5)自性清淨心 常寂常光 자성청정심 상적상광煩惱所染心 剎那相應번뇌소염심 찰나상응 無明行識 名色幻身 무명행식 명색환신定觀照見 眞如法身 정관조견 진여법신在水邊人 但見其水 與像別異 (法圖記叢髓錄) 재수변인 단견기수 여상별이 (법도기총수록)只由不以其水 爲眼故也 (卷下之一 法記)지유부이기수 위안고야 (권하지일법기) 그래서 몸생명에는 지혜생명이 있다. 지혜생명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해요, 지혜 혜자, 목숨 명자, 혜명. 그래서 생명을 얻어서 생명으로 살다가 생명으로 죽고, 다음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걸 윤회라고 그러는데, 혜명은 한번 얻으면 영원해요. 혜명. 그래서 부처님이 이 신명 속에서 혜명을 얻었다. 신명은 생로병사인데, 혜명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에요.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고 청정하고. 이 생로병사에서 상락아정의 혜명을 깨닫는 거예요. 깨닫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이 몸속에 지혜생명이 있는데 모르거든요. 있는데 모르는 거예요,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걸 혜명을 얻는다. 또 혜명을 전한다. 혜명을 또 잇는다고 해요, 이어. 그러니까 이 지혜생명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이게 마음인데,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뇌심이 있고, 자성심이 있다. 번뇌심을 물들 염자, 마음 심자, 염심(染心)이라고 하고, 자성심을 깨끗할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도 하고. 항상 이걸 가르쳐요. 그러면 자성심은 청정심이라.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 항상 있는 거예요, 자성청정심. 그런데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또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기도 해요. 이걸 번뇌소염심(煩惱所染心)이라고 해요. 번뇌에 물든 바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고, 자성청정심을 도대체 어떻게 아냐. 이걸 난가료지(難可了知)라고.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다. 승만경에서 아주 자세히 가르치고 있는데요. 우리에게 다 자성청성심이 있는데, 알기가 어렵다는 거거든요. 또 번뇌소염을, 그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게 되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 번뇌심도 알기 어렵고, 자성심도 알기 어렵다. 자성이 그렇게 청정하면 왜 번뇌에 물드느냐. 번뇌에 물들었으면 왜 자성이 또 청정하냐. 청정과 번뇌가, 염심과 정심이 항상 함께 있어요. 번뇌심 떠나서 청정심이 있는게 아니고, 청정심 떠나서 번뇌심 있는 게 아니고, 항상 함께 해요. 항상.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승만경에서,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어차에(於此), 어차라는 건 무명을 말하는데, 미혹한 마음이다 이거죠, 미혹. 미혹이라는 게 뭐냐. 초기 경전에선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황금 덩어리가 있어요. 그래서 황금 덩어리를 싸가지고 와서 오래 있다 보니까 그게 누런 독사뱀이었어요. 독사뱀이 서려 있는 것을 황금으로 잘못 보는 것이 무명이다, 그것이 미혹이다라고 설명을 했어요. 독사가 잠 들어있는데 이걸 황금으로 봤단 말이죠, 독사를. 황금으로 보이니 그걸 주워 왔어요. 그게 업이란 말이에요. 나중에 독사가 집에서 깨어나서 사람을 해쳤어. 그게 고통이다.> 이렇게 혹업고를 설명을 하는데요. 대승 경전에서는 이 무명을 어떻게 설명을 하냐. <어떤 사람이 저녁에 뱀이 서려 있는 걸 봤는데, -역시 뱀이네.- 나중에 보니까 그 뱀이 뱀이 아니고 검은 삼 껍질로 만든 밧줄이었다. 그래서 검은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걸 미혹이라고 해요. 사실은 밧줄인데 ‘아, 여기 큰 뱀이 서려 있네.’ 해서 그걸 뱀으로 잘못 보는 순간에 겁이 나서 보이지도 않는데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쳤어요. 도망가는 게 업이고 다치는 게 고라고, 혹업고.> 이게 번뇌에요. 첫째는 잘못 보는 거예요, 무명. 잘못 본 것에 기초를 해서 또 행위를 하는 거예요. 행위에 의해서 또 고통이 오는 거예요. 이게 전부 번뇌인데, 문제는 뱀으로 잘못 보는 마음이 아무리 잘못 봐도 그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에요. 달라짐이 없이 그대로 잘못 보는 거예요. 이게 청정심 그대로 번뇌심이다. 이게 어렵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 번뇌심은 근본이 뭐냐 하면 뭘 일으키는 건데, 일으킬 기자(起), 번뇌는 기야라, 일으키는 거다. 일으킴이 없으면 번뇌가 아니에요. 뭘 자꾸 일으켜. 뭘 자꾸 만들어. 그럼 일으키면 어떻게 되냐. 찰나심(剎那心)이 돼요. 청정심이 찰나. 찰나심은 뭐냐, 순간순간 마음인데, 사람 볼 때는 순간 사람 보는 마음이 일어나요. 나무 볼 때는 순간 나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물건 볼 때는 순간 물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게 찰나심이에요.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剎那心 剎那相應). 항상 함께해요, 보이는 것과. 함께하는 것을 상응이라고 하거든요. 서로 상자, 응할 응자. 내가 여기 물잔을 보면 이게 찰나심인데, ‘아, 요거는 물을 마시는 그릇이구나.’ 이렇게 상응을 해요. 그래서 물을 마셔요. 이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이게 번뇌에요. 그래서 사람을 보면 사람을 딱 보고 그 사람과 함께해요. 그래서 마음에 들면 아주 좋은 생각이 일어나고, 마음에 안 들면 막 화가 나서 싸우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도망가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쫓아가기도 하고 이게 번뇌에요. 번뇌심은 항상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찰나 찰나 상응하는 거예요. 그게 오래 안 가요. 요거 볼 때는 요거에 함께 하다가, 또 다른 거 보면 다른 것과 함께해요. 금방 화를 내다가 그거 지나면 화가 안 나고 딴 게 와요. 또 어떤 때는 동시에 앞으로 볼 땐 화나고, 뒤로 돌아서서는 웃고 이런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찰나심이 찰나상응하는 게 아주 빠르고 복잡하고 이런데, 문제는 그 찰나찰나 대상과 함께 해도 함께 하는 그 근본 뿌리는 자성청정심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가 눈이 있는데, 얼굴의 눈이 나무를 보기도 하고, 사람을 보기도 하고, 물건을 보기도 하고 하는데, 물건을 볼 때도 눈이고, 나무를 볼 때도 눈이고, 사람을 볼 때도 눈이고, 눈 하나 그대로인 상태에서 온갖 걸 다 보고 온갖 것과 다 함께한다. 또 그거 지나가면 다른 것과 함께하고. 이게 찰나심 찰나상응이라고 가르쳐요. 자성청정심과 이렇게 찰나상응심이 항상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괴로우냐. 늘 찰나상응심으로만 살기 때문에 그래요. 자성청성심으로 딱 돌아가면 찰나상응심은 없어요. 우리가 근심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대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거든요. 사람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물질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또 여러 가지 생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그래서 생각과 사람과 물질을 떠나면 괴로움이 없어요. 근데 그것은 전부가 찰나상응심이다. 찰나찰나에 다른 대상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괴로움은 밖에서 온 거기 때문에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뭐냐. 그게 자성청정심이거든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으로 딱 돌아가면 괴로움은 없어요. 그런데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괴로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것을 갖다 집어넣어요. 사람한테 괴로우면 물건으로 그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또 물건한테 괴로우면 사람으로 또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그거는 늘 찰나의 마음을 찰나로써 치료하려고 하니까 맨날 괴로움의 형태가 바뀔 뿐이지 괴로운 행위는 계속된다 이거죠.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상적상광이라(自性清淨心 常寂常光).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나는 게 자성청정심이에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자성청정심이 있는데 찾아보면 없어요. 마음을 보려고 아무리 몸을 갈라봐도 안 보여요. 그런데 항상 마음이 있어요. 이걸 상적상광이라고 하거든요.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난다고. 번뇌소염심은, 번뇌에 물든 마음은 찰나상응이라(煩惱所染心 剎那相應). 늘 찰나찰나에 상응을 해요. 그래서 우리 주인이 항상 바뀌는 거예요. 어떤 때는 물질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재물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몸이 내 주인이 됐다가.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늘 한평생 모르고 살다가 모르고 죽는다 말이지. 그래서 우리 몸을 명색(名色)이라고 그러는데, 이름 명자, 보인다는 빛 색자, 명색, 명은 생각이에요. 수상행식이라는 반야심경의, 수상행식은 안 보이고 이름만 있다고 이름 명자를 써요. 색은 우리 몸인데 지수화풍이라고 그래요. 우리 몸은 지수화풍, 흙과 물과 따뜻한 거와 호흡, 바람 이런 걸로 되어있다, 이게 색인데. 이 명색은 환신(名色幻身)이에요. 환같은 거예요, 헛개비와 같다. 금방 있다 금방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안에 자성청정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환속에서 참됨을 찾아야 된다고 해서 즉환명진(卽幻明眞)이라고 하는데, 환에 당도해서 참을 밝힌다. 즉환명진. 그런데 여기서 정관조견(定觀照見)이라고, 선정이란 정자는 대승불교에서 멈춘다고 봐요. 멈춰서 보는 것으로, 멈춰 본다, 이게 정관인데, 선정이란 정자와 볼 관자. 멈춰 본다는 말이에요. 정관으로. 조견오온개공이라고 있는데, 조도 볼 조자고, 견도 본다는 볼 견자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딱 보면, 이게 정관조견이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보면, 정관으로 조견을 하면, 진여법신이라(眞如法身). 우리 명색환신이 그대로 진여, 참 그대로 법의 몸이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명색환신에서 진여법신을 조견한다, 본다. 보는 게 어렵나.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안 보이냐. 찰나상응으로 항상 사는 거예요.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그래서 못 깨닫지. 정관으로 조견하면 진여법신이 이 생로병사 명색화신에서 그대로 보인다 이거죠. 이걸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대로 있는데 왜 못 보냐. 이걸 신라화엄가에서는 뭐라고 하냐 하면,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잘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이 있는데 그걸 총수록(叢髓錄)이라고 해요,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 총수록이 있는데, 총수록 네권이 있는데 그 세 번째 권에 무슨 말이 있나 하면, 사대오온 명색화신에서 진여법신 자성청정심을 못 보는 이유를 비유로 설명을 해보자면, 수변인이(在水邊人), 물가의 사람이, 물가에 있는 사람이, 수변, 물가에 있는 사람이란 말은 맑은 연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어떤 사람이 갔어요.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연못 안에는 여러 가지 물에 비친 그림자 영상이 있는데, 그 영상만을 보지, 영상 그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순간에는 물을 못 봐요. ‘아, 저건 산이다. 저건 나무다. 저건 돌이다.’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볼 때는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지 물은 볼 수가 없다. 그럼 물을 못 보는 이유는 뭐냐. 지유(只由), 오직, 말미암아, 오직 그것때문이다 그 말인데, 무엇 때문이냐. 기수로, 그 물로써 위안고(不以其水 爲眼故也)라, 눈을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이라고 하는 건 보는 건데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에요. 그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는 것은 오직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보지 못한다. 이게 뭔 소린가 하면, 연못 속에는 연못 속에 비친 물건이 없어요. 산이 보여도 물속에 산이 없고요. 사람이 보여도 물속에는 사람이 없고요. 구름이 보여도 물속에 구름이 없거든요. 오직 물 하나뿐이에요. 그런데 연못 속에 가서 보는 사람은 물속에 있는 그림자만 보지, 그림자 보는 그 순간에, 그 찰나에는 물은 전혀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연못가에 가서 보는 사람이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만 보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 법문이었어요. 기가 막힌 법문.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사람을 봐도 전부 우리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인 거예요. 재물을 봐도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고. 자성청정심이 없으면 사람을 보되 사람을 볼 수가 없고, 산을 보되 산을 볼 수가 없고, 물질을 보되 물질을 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물속에 뭐가 비쳐도 전부 물뿐인 거예요. 물 다 퍼 내봐요. 거기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지, 거기. 그냥 빈 연못 바닥뿐이지. 아, 이것 참 기가 막혀요. 밖에 걸 딱 보는데 이게 내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잔데, 밖에 것 보다가 내 자성청정심 모르는 거예요. 연못가에 가서 딱 보니까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 보다가 물은 못 본다 말이죠. 그래서 그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 물뿐이라는 것을 알듯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게 전부 자성청정심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보이고 듣는데 절대 괴로울 수가 없어요. 항상 즐거워요. 그걸 상락아정이라고 그래요. 그럼 그걸 보는 방법이 뭐냐 이거죠. 기도하고, 경 읽고, 마음 닦고, 참선하고 하는 게 전부 이 찰나번뇌심에서 자성청정심을 보는 행위에요. 그거 전체를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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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12일 음력 4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5-12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관사 4월 초하루 법문은 <마음 법문 이야기>, 마음 법문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문 중에 인과 법문과 마음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큰스님들 법문을 계속 들어보면 인과 법문이 제일 많고요, 인과 법문하고 똑같이 많은 법문이 마음 법문이에요. 대승불교 이전의 가르침은 인과의 가르침이고, 대승불교에서 이후는 마음의 가르침이거든요. 대승불교는 마음을 말하는 불교다.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법문의 명칭 心地法門 唯心法門 심지법문 유심법문一念子法門 一卷經法門일념자법문 일권경법문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 (雲水壇頌)(운수단송) 이 마음 법문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제일 많이 부르는 명칭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이에요.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은 땅과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거든요. 땅은 비유고 마음은 당체인데, 해당되는 몸, 그 당체와 비유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심지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절에 와서 심지법문한다고 해서 심지법문이, -저 시골 산중에서 호롱불을 켰는데, 그 호롱불 불붙는 게 심지거든요,- 그 호롱불 심지 얘기를 하나 그랬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마음 얘기에요. 마음은 땅과 같다. 그래서 마음과 비유를 동시에 얘기할 때 심지다. 이렇게 얘길 하고요. 마음 법문을 유심 법문(唯心法門)이라고 해요. 오직 유자, 마음 심자. 오직은 그것뿐이다 이 말이거든요. 마음뿐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유심불교다. 이렇게 말해요. 유심 법문이라고 그러고. 마음 법문을 일념자법문(一念子法門)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라는 일자, 생각 념자, 아들 자자인데, 이 생각이라는 것은 찰나염도 있고, 일념도 있는데, 찰나염이라는 것은 보면 보는 대로 생각이 일어나고, 들으면 듣는 대로 일어나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일어나고 이게 찰나염이에요. 찰나 찰나, 순간 순간 생겼다 사라지는 그 염이 찰나염이에요. 일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항상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온갖 생각이 일어났었는데, 항상 일어나요. 그러면 그 항상한 생각은 일어나되 일어남이 없는 생각이에요. 사라지되 사라짐이 없는 생각, 그걸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요. 즐거웠던 마음은 금방 사라지는데, 그냥 또 생각이 그 밑에 바탕으로 있어요. 괴로웠던 마음도 사라지는데 사라지면서 그 바탕 속에 생각이 남아 있어요. 그 한 생각, 일념, 그 일념과 찰나염. 그래서 한 생각 법문이다. 한 생각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한 생각은 그냥 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걸 성품 성자, 마음 심자를 써서 성심(性心)이라고 해요. 일념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일념자법문. 자(子)자는 남자, 여자하는 것처럼 어조사에요, 어조사. 모자, 탁자 이런 식으로. 그래 일념이건데, 거기다 어조사 자자를 붙여서 일념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일권경(一卷經)이라고, 한 권의 경이 있다. 그러면 한 권의 경은 뭐냐. 보통 세간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되어있는데, 지묵(紙墨), 묵자, 이게 세간경이거든요. 근데 일권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일권경이 어디 있느냐. 나에게 있다, 이거에요, 나에게. 일체중생에게. 그래서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하니,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래서 전개는 무일자(展開無一字)라, 펼쳐서 설명하는 것은 한 글자도 없다. 그런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뿜어낸다. 서산스님 운수단게송(雲水壇頌)인데, 서산스님 이후에 법회 청법할 때마다 이걸 계속했어요.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고,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다. 일권경 법문이에요. 글자도 없고, 종이도 없고, 먹도 없는데 항상 대광명을 뿜어내고 있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게 마음 법문이지요. 그러면 이 마음 법문을 할 때 항상 외우는 경전 내용이 있는데요. 법문이라는 게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경전(經典)설법이에요. 경전설법. 경에 증거가 있는 설법이다. 그 경이라는 것이 표준이기 때문에, 법문을 할 때는 경전이나, 조사어록이나 증거를 가지고 해요. 어록증거, 조사어록의 증거. 경전증거. 이게 경증, 록(錄)증인데, 록에 증거가 있느냐. 이런 거죠. 그런데 이 마음 법문 할 때는 항상 증거로 표준을 삼는 내용이 대승기신론에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謂衆生心)>. 맨날 하는 거예요. 소언이라는 것은 말하는 바, 법이라는 것은, 위 말하자면, 중생심이다. 소언법자 위중생심.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법이라는 것은 뭐냐. 법은 법계인데, 법의 세계. 십법계가 있다고 가르쳐요. 십법계. 십법계는 뭐냐. 육도중생법계. 중생대계가 육도라고. 육도중생이 있고. 사위현성법계, 현성, 성은 불보살이고, 현은 불보살 이전에 신심수행불자, 신행불자를 말하는데, 사위는 성문, 연각, 보살, 불, 이렇게 사위현성에다가, 육도중생을 합하면 십법계거든요. 이 십법계가 중생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소언법자는 위중생심이니,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시작하는 게 대승기신론이에요. 이게 딱 경전 증거죠. 경증. 이걸 유식한 말로 하면 전증(典證)이라고 해야 하는데, 경전이라는 책 전자하고 짊어질 증자, 전은 불전이라. 불전이란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전정을 불전이라고 하거든요. 불전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게 법문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많이 얘기하는 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법문은 화엄경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 게송인데, 일체라고 하면 역시 십법계를 얘기해요. 유심은 오직 마음. 조는 만들었다. 십법계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 이게 일체유심조거든. 그다음에는 잘 안 말하는데, 화엄경 십지품 제6 현전지에 무슨 말씀이 있냐하면 삼계소유가, 욕계, 색계, 무색계 이건 중생세계를 말하는데, 온갖 중생세계에 있는 것이, 있는 바가 단지 일심이다. 다만, 다만이라는 것은 오직이란 말인데, 오직 한 마음이다. 일체 중생의 세계가 오직 한 마음이란 거예요. 삼계소유가 단시일심(三界所有但是一心)이라. 다만이라는 말이나 오직이라는 말이나 그것밖에 없다, 하나다라는 소리에요. 오직 한 마음이다. 이게 경증이지요. 유심법문. 경증. 그리고 또 많이 말하는 경전 증거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무일중생도 이불구유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如來智慧).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但以妄想執着 而不證得)>. 항상 외우는 대목인데, 무일중생, 없을 무, 한 일, 중생, 이불구유, 말 이을 리, 아니 불, 갖출 구, 있을 유. 여래지혜, 여래지혜를 한 중생도 갖추어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중생중생마다 다 여래지혜를 갖추고 있다. 여래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한 중생도 없다. 그런 의미에요. 그런데 왜 모르느냐. 단이망상집착으로, 단지 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 알지 못한다. 증득이란 안다는 말이죠. 알지 못한다. 이런 걸 큰 스님들이 보통 때 다 해요. 항상 읽고 항상 하고 그래요. 그러면 마음이라는 게 여래지혜도 있고, 망상집착도 있다 이 말인데, 여래는 화엄경에서 십신(十身)여래를 말하거든요. 열 십자, 몸 신자. 열 가지 여래가 있다. 거기에는 진여여래, 법성여래, 지혜여래, 신통여래, 자비여래, 복덕여래, 선정여래, 자성여래, 이 전체를 말하면 십신여래예요. 십불세계. 그게 여래인데, 그 여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를 다 여래지혜라고 해요. 중생중생마다 여래지혜를 다 가지고 있는데, 망상집착으로 모른다 말이에요. 이런 법문을 늘 하는 것이 마음 법문이에요. 마음의 緣起연기 無明六道衆生무명육도중생無明緣行 行緣識 識緣名色 名色緣六入 六入緣觸 觸 무명연행 행연식 식연명색 명색연륙입 육입연촉 촉緣受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 有緣生 生緣老死憂悲苦惱 연수 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유연생 생연노사우비고뇌 그럼 이 마음 법문을 이렇게 할 때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마음의 세간연기, 마음의 불보살연기,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 이 마음이 망상집착으로 나타날 때는 육도중생이 되는 거예요. 이걸 세간연기라고 해요. 그러면 세간연기에 근본 마음은 뭐냐. 무명심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간은 무명소현(無明所現)이다. 무명이 나타난 것이 세간법이다. 마음에는 망상 집착이 있어요. 망상집착을 간단히 말하면 무명이에요. 밝은 게 없다. 밝은 게 없다는 말은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는 얘기죠. 못 보는 건 아니에요. 보긴 보는데 진실하고 다르게 보는 거예요. 진실하고 어떻게 다르게 보냐. 불그스름한 재료를 가지고 밧줄을 만들어서 마당에 놨는데, 어두컴컴할 때 어떤 사람이 불그스름하고 거무스름한 자료로 만든 밧줄을 보고 뱀으로 본 거예요, 뱀으로. 이것을 사승미혹(蛇繩迷惑)이라고 하는데, 뱀 사자, 줄 승자. 이 줄을,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거다. 밧줄은 거기 있어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밧줄을 밧줄로 본 게 아니라 뱀이 서려 있는 걸로 봤다 이거예요. 그런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 이거죠. 무명. 그래서 무명이 있으면 생로병사우비고뇌가 전부 무명에서 나와요. 꿈을 꾸면 꿈속에서 온갖 일이 다 펼쳐지듯이, 무명이 나타나면 무명으로부터 온갖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이 생겨요. 그걸 무명연기라고 그럽니다. 연기는 인연으로 일어난다 이 말이죠. 무명연기. 그런데 신심을 일으켜서 청정함을 닦고 지혜를 점점 넓혀가면 무명연기에서 광명을 이뤄요, 광명. 그래서 제불은 광명이고 중생은 무명이다. 육도중생은 무명이요, 삼세제불은 광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마음이 펼쳐지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 무명에서 광명으로 나아갈 때 핵심이 뭐냐, 그게 신심인데. 신심이라는 것은 뭐냐. 이 망상집착, 무명, 또 업력, 호법자, 협력자, 망상, 집착과 무명, 업이 되풀이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 근본마음이 있고, 광명마음이 있다. 이걸 들으면 이걸 딱 믿고 그리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 돌아가면 그게 무명연기가 아니라 청정연기라고 해요. 그럼 청정연기는 어떻게 되냐. 그 한마음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걸 간단히 말하면, 돌이킬 반자가 있고, 비춰볼 조자가 있는데, 반조(返照)라고 하거든요, 반조. 반조가 있고. 돌아갈 귀자가 있고, 근원이라는 원자가 있는데 귀원(歸源)이라고 해요. 무명연기에서 청정연기로 돌아가는 분기점을 반조, 귀원. 귀원을 해야 돼요, 귀원. 돌아가야 돼요. 돌아가야 된다. 또 반조는 돌이켜봐야 돼요. 맨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근심걱정하고 여기에서 이런 마음이 나온 것이 뭔가, 그 나온 것을 되돌려서 뒤로 돌아본다, 이게 반조거든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어떤 분은 의상본계론 그런 게 있는데, 돌이킬 귀자와 반자, 감정이란 정자를 써서 반정(返情)이라고 해요. 능엄경에서는 돌이킬 반자, 들을 문자, 반문(反聞)이라고 해요. 반문이란 뭐냐 하면, 소리를 듣는 그놈을 듣는 거예요. 됩되듣는다, 다시 듣는다, 됩되들어. 내가 귀로 소리를 듣잖아요. 그러면 보통 세간으로 듣는 것은 저 소리에 따라서 듣는데, 이걸 돌아가면서 듣는 것은 이 듣는 놈을 들어요. 이 듣는 놈이 소리가 있나 없나, 듣는 놈한테는 무슨 소리가 있나. 듣는 놈을 자꾸 듣는 거예요. 밖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듣는 놈을 돌이켜 듣는다. 이런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무명의 망상집착이 없어요. 그래서 망에는 근원이 없다. 그냥 허망하게 들었을 뿐이에요. 그 밧줄을 뱀으로 봤는데, 뱀은 나온 데가 없어요. 허망하게 잘못 봤을 뿐이에요. 근원이 없어. 그런데 밧줄은 근원이 있거든. 그래서 듣는 놈은 근원이 있고, 밖으로 듣고 망상집착을 한 놈은 근원이 없다. 또 법문을 할 때 맨날 하시는 법문이 암실과 명등인데, 암실은, 깜깜한 방을 암실이라고 그러죠. 명등은 밝은 등불이란 말예요.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으니까 무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그랬는데, 등불을 딱 켜니까 어두움은 근원이 없어, 어두움은 등불을 켜는 순간에 싹 없어졌어요. 그리고 본래 그 방의 모습만 확 드러났다. 그래서 방의 모습이 확 드러나는 건 광명이고 어둠이 싹 없는 건 그건 무명이다. 그래서 망상집착을 걱정하지 말고 한마음을 돌아봐서 잘 챙기면 망상집착은 근원이 없어서 일시에 사라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삼세제불 광명심입니다. 일체중생은 무명심으로 살아가고 삼세제불은 광명심으로 나타난다. 무명에서 광명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게 그게 청정연기라고 그래요, 정연기. 光明諸佛出現 광명제불출현煩惱盡時 生死卽絶 生滅滅已 번뇌진시 생사즉절 생멸멸이寂照現前 應用無窮 名之爲佛 적조현전 응용무궁 명지위불(節要收錄 荷澤法語)(절요수록 하택법어) 법문이 많은 법문 중에, 번뇌가 다 하는데, 망상집착이 다 없어지는 때에 생사는 없다. 생사는 즉절하나니, 생사가 없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게 가장 문제인데, 죽고 사는 걸 번뇌소연으로 보는 게 불교에요. 죽고 사는 건 번뇌로 나타나는 거다. 이게 불교에요. 번뇌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 죽고 사는 것은 무명 미혹으로, -미혹도 역시 잘못 본다,- 느껴지는 거다. 왜 그러냐. 이 모든 중생과 사물이 생기는 거나 없어지는 거나 똑같은 하나의 진실법이에요. 생기는 것도 진실법이고 없어지는 것도 진실법이에요. 봄에 피는 저런 잎새도 계절이고, 가을에 지는 단풍도 계절이지. 봄에 피는 나뭇잎새만 진실이고 가을 단풍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진실이고 사라지는 것도 진실인데, 이걸 망상집착으로 태어나는 건 좋아하고 사라지는 건 싫어해요. 아무것도 안 사라지면 그런 법계가 어디 있나. 그런 건 없어요. 안 사라지면 큰일이에요. 그거참, 사라져야 새로워진다. 새로워짐이 있으면 사라짐이 있다. 이게 당연한 건데, 나고 죽는 걸 똑같이 즐거워하지 않고, 어떤 건 즐거워하고 어떤 건 괴로워해요. 이거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다, 이거죠. 이 세상에 좋아하고 싫어할 거 없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 어리석은 욕심이에요. 그러참,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게. 그래서 번뇌진시(煩惱盡時)에,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즉절(生死卽絶)하나니, 생사가 곧 끊어지나니, 생멸이 멸이하고(生滅滅已), 나고 죽는 것이 다 없어지고, 나고 죽는 것이 하나의 진실법만 있고, 나고 죽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적조가 현전하면(寂照現前), 마음의 근본 바탕이 적조라고 그러는데,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고 막 찾아보면 그림자도 하나 없고, 티끌도 하나 없고 모습도 하나 없고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걸 적, 고요할 적자,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마음이 큰 것이 오면 큰 걸 보고, 작은 것이 오면 작은 걸 보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있는 것도 보고, 없는 것도 보고, 모든 걸 다 봐요. 이걸 조, 비칠 조자, 라고 해요. 그래서 무명은 사라지고 적조가 현전이라, 현전이란 나타난다는 이 말인데, 나타날 현자, 앞 전자, 전자는 어조사고. 그냥 나타나요. 적적하고 명명한, 밝고 밝고, 적적명명, 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밝고 밝은 마음이 나타나면 이게 광명인데, 거기서 응용이 무궁(應用無窮)해요. 응용무궁. 거기서 무한 공덕이 나와요. 이 적조심에서. 그걸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명지위불이라(名之爲佛). 이건 강원에서 늘 배우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절요에 수록한 하택 신회선사 법어예요. 적조가 현전하면 응용이 무궁이니 명지위불이라. 적적하고 맑고 맑은 마음이 나타나면 응용이 끝이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이런 게 마음이에요. 如來證涅槃 永斷於生死 여래증열반 영단어생사若有至心聽 常得無量樂 약유지심청 상득무량락(36권 열반경 제20권) 그리고 열반경에 보면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하니, 여래께서 열반을 얻으니, 생사에서 진실법을 얻는 거예요.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열반은 진실이라. 영단어생사(永斷於生死)라, 여래가 열반을 얻으니 생사가 영원히 없어졌다. 단, 끊어질 단자는 없어졌다는 소리예요. 생사는 없어요. 나고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오직 진실상이 있을 뿐이지 생사법은 없다. 무명에서 광명을 얻으면 모든 나고 죽는 모습이 전부 진실상 밖에 없다. 이거거든요. 영단어생사라, 영원히 생사가 없다. 약유지심청(若有至心聽)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상득무량락(常得無量樂)이라,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런 법문인데, 열반경이라고 하는 경이 36권 열반경도 있고, 40권 열반경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주로 보는 경은 36권 열반경이에요. 그래서 36권 열반경 제 20권에 수록된 거거든요. 그러면 열반이라는 게 생사가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곧게 해석할 수가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상락아정도 열반이라고 그러지만, 열반에 4차원으로, 4원으로, 열반에 4원이 있다, 열반에 네가지 근원이 있다. 첫째는 원적(圓寂)열반이에요. 원적열반. 원자는 둥글 원자인데, 둥글다는 것은 무변이라, 끝이 없다 이 소리거든요. 끝없이 고요해요. 이게 원적이에요. 고요할 적자. 끝없이 형태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고. 이것을 원적열반이라고 해요. 원적열반. 그 다음에는 원명(圓明)열반. 둥글면서 또 밝아요.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해요. 끝없이 밝아요. 끝없이 고요해요. 세 번째는 원성(圓成)열반이라고,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히 다 이루어졌어요. 네 번째는 원만(圓滿)열반, 끝없이 가득히 차서 없는 게 없어요. 열반을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열반은 원적이다, 열반은 원명이다, 열반은 원성이다, 열반은 원만이다. 이런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떡 증득하고 나면 생사는 없다. 그런데 이런 법문을 듣는 사람도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열반경 게송이에요. 掬水月在水 弄花香满衣 (法演禪師語錄卷中)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 (법연선사어록권중) 그러면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조교(祖敎)와 경교(經敎), 조사의 가르침, 달마나 육조나 임제나 마조나 이런 선사들을 조사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경에서 가르침을 경교라고 그래요. 조사의 가르침을 조교라고 하고. 조교과 경교. 그래서 항상 경교와 조교,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이 뭐냐.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게 동북아시아의 불교현상이에요. 조교, 경교. 그런데 조교와 경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떤 분은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은 ‘닭은 추우면 높은 횟대에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이게 조사의 가르침이에요. 그거참, 닭은 날씨가 추우면 횟대로 올라가. 그런데 오리는 날씨가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가르치는데, 어떤 조사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조교라는 것은, 조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국수에 월재수(掬水月在水)하고, 또 경교라는 것은 농화향만의(弄花香满衣)라.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국수라는 것은 물 뜰 국자, 움킬 국자가 있는데, 물을 그릇으로 뜬다는 말이에요. 물을 그릇으로 한 바가지 딱 떴는데, 뜨기는 물을 떴는데 물 안을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그 물속에 달이 있어요. 이 달은 생각지 못한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물을 떴단 말이에요. 물을 뜨고 물을 바라보니까 물 속에 달이 있어. 그게 조사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조사의 가르침은 뭐냐. 농화에 향만의라, 희롱할 농자, 꽃 화자. 희롱이라는 건 자꾸 가까이 하는 거죠. 꽃을 가까이 하고 꽃을 가까이하다 보니까, 향기 향자, 가득할 만자, 옷 의자, 그 꽃의 향기가 옷에 가득히 배어있다. 이걸 경교라고 해요. 경의 가르침이다. 참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금강경을 읽고, 법화경을 읽고, 화엄경을 읽고, 열반경을 읽고, 천수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으면 그 법의 향기가 몸에 가득히 배어요. 그래 읽기는 경을 읽었는데 그 향기가 몸에 가득해요. 이걸 농화에 향만의라고. 챙기기는 마음을 챙겼는데 마음 하나를 딱 챙기고 나와보니까 그 마음속에 무진무궁하게 다 있어요. 그걸 국수에 월계수라, 눈을 뜨고 보니 물에 달이 있더라. 이런 식으로 죽 지금까지 법문을 해 온 법문이 마음법문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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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12일 음력 3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4-12
--법문(法門)이야기-- 이번 달 초하루 법문은 <법문(法門)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법문. 법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법문을 맨날 하는데, ‘법문은 무엇인가.’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법문은요, 법을 보이는 문이다.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보이고 싶은데 보일 방법이 없어서 문을 냈단 말이죠. 그래서 문이 없으면 법을 못 보이니까 법을 보이는 문을 내서 법을 보게 한다. 그것이 법문입니다. 言法門者 示法之門 開方便門 示眞實相언법문자 시법지문 개방편문 시진실상 법문은 시법지문(言法門者 示法之門)이라, 법을 보이는 문이다. 그것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고 해요. 지붕에 올라가려면 그냥은 못 올라가니까 사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방편은 지붕에 올라가는 사다리와 같은 거죠. 그래서 방편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법, 방편문을 열어서 진실법을 본다. 그런데 이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이에요. 진실법을 보이는 문이 법문. 그러면 진실법이라는 것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법인데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연법이라고 해요, 인연법. 부처님이 인연법을 깨달아서 무아를 얻으시고, 또 해탈을 얻으시고, 극락을 얻으시고, 사바세계에서는 복락을 얻으셨다. 사바세계에서는 복으로 즐거운 복락, 극락세계에서는 지혜로 즐거운 안락, 그게 전부 인연법을 통달함으로 얻어진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고, 극락에서는 지혜의 즐거움을 얻는데, 그게 정토안락이다. 그게 극락세계죠. 근데 이 인연법이라는 것은 나기는 났는데, 인연생법(因緣生法)이, 모든 법이 인연으로 나는데, 그게 한군데 중심이 있는 게 아니에요. 또 변방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연법은. 그래서 그걸 났으되 난 것이 없는 적멸법(寂滅法)이라고 해요, 인연생법이. 생멸법이 난 곳에 난 것이 없고, 사라지는 곳에 사라짐이 없는 적멸. 적멸이란 생멸이 없다 이 소리예요. 그거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해서 중도(中道)라고 해요. 인연생법은 적멸이요 중도이니, 그 중도가 어떻다는 말인가. 공공적적(空空寂寂)해요. 찾아보면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해요. 그런데 항상 요요명조(了了明照)해요. 알 요자가 있는데 분명하다는 소리예요. 분명하고 분명하고 밝게 비춘다. 이게 인연법이에요. 인연생법이, 인연으로 생멸하는 법이 적멸중도이니, 또 공공적적하고 요요명조라. 이 법이 세상에서는 복의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극락세계에서는 편안한 즐거움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해탈을 얻는 법이고, 이 법이 대광, 대웅, 크게 빛나고 크게 웅장한 그런 지혜자재, 대광대웅 지혜자재법이 전부 이 인연법을 통달하느냐, 인연법을 통달하지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는 거지요. 이게 법문인데, 법문은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모양으로 하고 그래요. 언설법문(言說), 행위법문, 형상법문, 이게 전부다가 법을 알려주는 문이거든요. 闇夜明燈 암야명등 譬如闇中寶 無燈不可見 비여암중보 무등불가견佛法無人說 雖慧莫能了 불법무인설 수혜막능료(華嚴經 須彌偈品)(화엄경 수미게품) 근데 이 법문이 얼마나 중요한가. 비유로 말하면 법문은 암야명등(闇夜明燈)이라. 깜깜한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과 같다. 법문이 없으면 갈 길이 없어요. 어두운 밤에 불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듯이, 어두운 밤에 등불과 같은 것이 법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偈品)>이라고 하는 경문에서 명등을 얘길 했는데, 이 밝은 등불이 하는 일이 뭐냐. 보물찾기하는 거예요. 보물. 그래서 비유하자면, 비여암중보(譬如闇中寶)는, 깜깜한 어둠 속에 있는 금은보화가 있는데, 무등이면 불가견이라(無燈不可見),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못 본다 말이죠. 왜냐. 어두워서. 근데 어떡하면 보냐. 밝은 등불을 가지고 가서 비추면 보여요. 그래서 불법도 무인설하면(佛法無人說), 이 부처님이 보이는 이 인연법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이 말하지 아니하면, -말한다는 게 이게 법문이죠,- 법문을 하지 아니하면, 수혜막능료라(雖慧莫能了). 비록 지혜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법문을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러면 부처님이 보이고자 하는 극락법, 복락법, 이런 해탈법, 자재법, 지혜법을 그냥 어떻게 보이냐. 법문을 통해서 보인다. 보물이 있기는 있는데,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등불을 비추어서 그 보물을 얻는다. 이걸 법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법문은 어두운 밤에 밝은 등불이다. 標月手指 표월수지 手指標月 因指看月 수지표월 인지간월觀指爲月 亦亡其指관지위월 역망기지(楞嚴經제2권)(능엄경 제2권) 그다음에 법문은 표월수지(標月手指)라. 표라는 것은 목표라는 표자인데, 여기서는 가리킬 표자예요. 달을 가리키는, 표월, 수지, 손 수자, 손가락 지자, 손가락이다. 달이 있는데 달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달이 저기 있다’ 이렇게(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면 달은 저기 있고, 뭘로 가리키느냐. 수지, 손 수, 손가락 지, -발가락을 족지라고 그러는데, 손가락을 수지라고 그래요.- 손가락이다 그거죠. 달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서 달을 보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법문과 같다고 얘길 하거든요. 이 법문은 능엄경 제2권에 있는 법문인데, 수지로 표월하면(手指標月), -경문에 있는 내용이에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인지간월이라(因指看月). 그 손가락으로 인해서, 손가락으로 말미암아, 볼 관자, 달 월자, 달을 본다. 이게 방편이고 이게 법문이거든요. 손가락을 가리키는 목적은 달 보게 하는 데 있는 거예요. 그래 수지표월하면 인지간월이에요. 손가락으로 인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잘못해 가지고 관지위월하면(觀指爲月),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고 생각하고 달이라고 여기면, 이게 법문을 잘못 듣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역망기지라(亦亡其指). 그 손가락까지 또한 잃어버린다. 왜 그러냐. 손가락은 달이 아닌데 이걸 달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게 달이니까 손가락도 없어진 거예요. 변질됐다 말이지. 근데 이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도법인데, 적멸법이고, 무슨 말이든지 말을 하는 것은 생겼다 사라지거든요. 이건 생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적멸중도를 내가 지혜로 깨닫기 전에 그 적멸중도를 이야기한 말씀을 가지고 ‘이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하면, 그 말씀은 생멸이라. 그래서 이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을 때 달을 못 보고 손가락으로 달이라고 여기는 거와 같다. 이렇게 되면 손가락도 제대로 못 보고 잃어버린 게 된다. 이 외에 비유가 많아요. 금강경에서는 <지아설법이 여벌유(知我說法 如筏喩者)라>, 정신희유분 제6(第六 正信希有分)에 나오는 법문인데, ‘나의 설법을 뗏목의 비유와 같이 알아야 한다.’ 뗏목은 배인데요, 물 건너는 배는, 배가 없으면 물을 못 건너가는데, 그 배가 저 건너가고자 하는 피안은 아니에요. 이는 배를 통해서 저 언덕에 도달을 했으면 그다음부터는 배는 버린다. 법문은 물을 건너가는 배와 같다. 법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법문은 보물을 찾게 하는 밝은 등불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니까 법문을 잘 들어야 해요. 법문 안 들으면 안 돼요. 아주 잘 들어야 해요. 법문을 들어보면 맨날 똑같은 소리 한다 싶어서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저 법문 다 아는 법문이다 싶어 심드렁한 사람도 있는데 이게 잘못된 거고요. 법문을 잘 들으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면 이게 완전히 바뀌는 거예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생각의 구조와 체계가 완전히 바뀌어요. 그걸 육종진동(六種震動)이라고 그러는데, 우주가 6가지로 막 진동을 한다. 그런데 늘 이 손가락만 보고 달을 못 보는 법문을 들으면 아무리 법문을 들어도 감동이 없어요, 진동이 없어. 심장이 안 움직이고. 이 눈동자가 안 움직여. 그걸 저는 표현할 때 말똥말똥 청법이라고 그래요. 그저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어. 눈이 완전히 광명이 나고 온몸이 움직여서 한량없는 감동을 얻는 게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감동 없이 말똥말똥하게 법문을 들으면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나중엔 졸게 돼요. 그냥 조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반드시 말똥말똥 순서가 있어요. 그래서 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법문은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래서 법문은 무조건 들어야 돼요. 법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거기 때문에 다 깨달음이 들려지는 거예요, 어떤 방법으로 말하든지 간에.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법 자체를 봐야 돼요. 그래서 항상 들으면 그게 성불이고, 그게 해탈이고, 그게 극락이에요. 법문 듣는 것이 극락이고, 법문 듣는 것이 그게 깨달음이고, 그게 바로 해탈하는 거다. 중요한 거죠. 因果法門 인과법문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佛本行集經제48권) (불본행집경제48권)諸惡莫作 諸善奉行 제악막작 제선봉행自淨其意 是諸佛教자정기의 시제불교(法句經下卷,述佛品)(법구경하권,술불품) 白居易 謁鳥窠道林禪師 問曰 如何是佛法大意 師曰 백거이 알조과도림선사 문왈 여하시불법대의 사왈諸惡莫作 衆善奉行 白曰 三歲孩兒 也解恁麽道 師曰 제악막작 중선봉행 백왈 삼세해아 야해임마도 사왈三歲孩兒雖道得 八十老人行不得 白遂作禮삼세해아수도득 팔십노인행부득 백수작례(傳燈錄제4권)(전등록제4권) 그러면 법문은 방편인데 어떤 방편문을 많이 여냐. 제일 많이 기본적으로 여는 게 인과법문(因果法門)이에요. 인과. 이게 아주 인연의 근본이거든요. 인과는 어떻게 해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이 따로 있고, 귀한 사람이 따로 있고, 천한 사람이 따로 있는 걸로 알아요. 그래서 조상 자랑하고, 지위 자랑하고, 신분 자랑하고. 요즘에는 외모 가지고 한몫 보려는 사람 많거든요. 이게 다 시대정신과도 뒤떨어진 거예요.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는 키 크고, 학벌 좋고, 지위 좋고, 소득 높으면 인기가 있었는데요.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이거 다 쓸모없이 돼 버렸어요. 왜 그러냐. 그거 다 필요 없고, 나를 인정해주느냐, 나를 인정하지 않느냐, 요 사람만 필요하게 된 거예요. 키 크고 돈 잘 벌고 해봐야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거예요. 요새도 결혼하고 사람 만날 때 나 좋아하냐, 나 인정하냐 이 사람하고 해야지 괜히 다른 것 보고 하다가는 큰일 나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부처님 법하고 맞는 거예요. 부처님 법은 벌써 그 당시에 조상을 보지 마라, 용모를 보지 마라, 배경을 보지 마라. 그러면 뭘 보냐.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업을 봐라. 이게 행업(行業)이에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 사람이 조상이 어떻든, 농사지으면 농부고, 물건 만들면 물건 만드는 사람, 공장에 다니는 이고, 또 학문을 하면 학자고, 노래 부르면 가수지, 업만 소중하지 다른 건 다 소중하지 않다. 이게 부처님 법이에요. 이게 평등과 인과예요. 인과 속에는 평등이 있어요. 사람은 다 평등하다. 근데 뭐가 중요하냐. 업이 중요하다. 업은 행위인데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의 용모가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거든요. 또 나의 배경이 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가 나를 구제하니까, 내가 어디에 소속되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게 인과법이에요. 그래서 나를 어떻게 바꾸냐, 나를 누가 구제하냐. 나를 내가 구제하는 거죠, 누가 구제해. 나의 행위로. 나를 누가 바꾸냐. 내가 바꾸는 거죠, 나의 행위로. 이렇게 평등과 인과를 얘기한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자기 행위는 말하지 않고 자기 결과만 비관한다든지, 잘못되면 이것이 미혹인데, 내가 공부 열심히 안 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지?’ 이러면 미혹이에요. 어떤 사람은 ‘나는 많이 먹는데도 살이 안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먹는다고 다 살찌는 게 아니에요. 잠을 잘 안 잔다든지, 너무 과도하게 움직이면 몸에 살이 못 쪄요. 또 어떤 사람은 먹는 것도 없이 살만 찐다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완전히.. 아니 먹는 거 없이 어떻게 살이 쪄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은 먹은 게 기억이 안 날 뿐이에요. 먹기는 엄청 먹었는데 먹는 게 기억에 없는 거예요. 기억이 안 나. 아주 재밌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잠 한숨도 못 잤다는 사람이 있어요. 잠 잔걸 기억 못 할 뿐이에요. 며칠 동안 잠 못 잘 수가 없어요. 그러면 카메라 켜놓고 지켜볼까요? 그러면 안 한다고 그래요. 자기도 잔 거 알거든, 또. 그러니까 이게 순전히 자기 업이 자기를 바꿔요. 다른 건 바꿀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걸 항상 우리가 놓치고 살아요. 그래서 자기 업을 중요시 여기는 게 아니라 누구 자랑하기 바빠. 내가 어떤 사람이다. 그건 허망하고 무상해서 금방 사라지고 자기 업만 계속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불교라는 것을, 결국은 깨달아야 실상법을 아는 거고, 실상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스승은 가르쳐야 되고 제자는 실행해야 되는 거거든요. 이 가르치고 실행하는 거 외에는 실상법을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는 건 불가능해요. 깨달아야 되요. 그러니까 스승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제자들은 진실하게 실행해서 그걸 깨달아야만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는 거예요. 그니까 불교경전 보면, 주로 실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어요. 나도 처음에 절에 와서 뭐 예불을 해라, 뭐 운력을 하라, 뭐를 하라 하는데, 매일 하라 소리만 하지 불교가 뭐다고 불교 내용을 가르치는 게 별로 없더라고. 얼마나 신경질이 나고 답답했는지 몰라요. 아니 불교가 뭔지 시원하게 가르쳐 주면 좋겠는데 별로 없어요, 맨날 뭘 하라고 해요. 근데 구조가 그렇더라고. 업을 바꿔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업 바꾸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니까. 그런데 그때 그걸 알아요? 그거라도 그걸 지금 나같이 설명을 해주지. 몰라요. 전부 실천, 수행 쪽에 말이 많은 것도 업을 바꾸게 하는 거니까 그런 거예요. 그게 바로 수행법문이죠. 불교가 어렵다고 그러지만 어려운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게 중요해요. 불교를 가르친 여러 가지 말씀을 다 배우려면 못 배워요. 문제는 실천하면 된다 그거죠. 그래서 맨날 하는 법문이 있는데, 그 법문이 칠불통계(七佛通戒)라는 법문이에요. 칠불은 여러 부처님들이, 통계는 모두 가르쳤다, 이 말인데, 통자는 모두라는 말이고, 계라는 건 가르쳤다는 말이고, 모든 부처님이 모두 가르친 게 칠불통계인데, 법구경 술불품(法句經下卷,述佛品)이라는 데 있어요. 제악은 막작하고(諸惡莫作), 모든 악은 짓지 말고, 제선은 봉행하고(諸善奉行),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고, 자정기심(自淨其心)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맑혀라. 시제불교(是諸佛教)이니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짓지 말고, 선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행하고, 마음을 맑혀라. 자정기심. 자기마음을 다 자정하라. 스스로 맑혀라. 그러면 이것이 제불교니라. 여러 부처님의 똑같은 가르침이니라. 법구경 술불품의 법문인데,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실천하려고 들면 정말 이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욕심내지 말고, 제악막작은 하지 말고 그냥 소악이라도 막작하면, 적을 소자, 적은 악이라도 짓지 아니하면 그게 불교 실천이고 수행이고요. 제선은 그만두고, 적은 선, 몇 가지만이라도 받들어 행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정기심은 항상 해야 돼요. 내 생각을 맑히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모든 것이 내 생각에서 나오니까. 근데 경덕전등록이라는 30권 책이 있는데, 고승들 행적을 적어놓은 책이거든요. 30권 중에 4번째 권에 도림(道林)선사라고, 길 도자, 수풀 림자, 이 도림선사라고 하는 행장이 적혀 있는데, 그 도림선사를 아주 문장으로 유명한 소동파가 가서 뵙게 됐어요. 도림선사한테 소동파가 물었어요. “여하시불법대의(如何是佛法大意)냐. 부처님 법에 큰 뜻, 부처님 법에 중심의 큰 뜻이 무엇이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다.” 경에는 제선(諸善)이라고 많이 썼는데 보통 말할 때는 많을 중자, 중선이라고 해요. 제나 중이나 많다는 의미죠. “불교의 대의는 제악은 막작하고 중선은 봉행하는 것입니다.” 아주 명쾌하잖아요. 그러니까 소동파가 그 소리가 영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소동파를 백거이(白居易)라고 해서 백이라고 하는데, 백왈(白曰), 말하기를, “스님이 하신 그런 말씀은 3세해아(三歲孩兒)라도,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야해임마도(也解恁麽道)라. 야해는 또한 안다, 임마도는 당신과 같이 그렇게 말할 줄은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랬거든.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러니까 도림선사가 하는 말씀이,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이 말이 젊을 때부터 그렇게 감동이 왔어요. 그 두 번째 말씀, 무슨 말씀인가 하면, “삼세해아가 수도득이나(三歲孩兒雖道得) 팔십노인이 행부득(八十老人行不得)이라. 세 살 먹은 아이가 비록 말할 수는 있지만, 팔십 노인도 실행할 수는 없다.” 행부득이라는 것은, 행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행을 하지 못한다는 거거든. 팔십 노인도 다 못해요. 나이 든다고 다 잘하는 줄 알아요? 나이 들어도 똑같아요. 하는 짓이 안 바뀌어요. 노인이 왜 저래.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젊은 사람이 못하는 건 노인도 못해요. 허망한 거예요, 아주. 삼세해아가 수도득,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비록 말은 하지만, 팔십 노인도 행부득이라, 팔십 노인이라도 실행할 수는 없다. 생각을 해봐요. 모든 선을 다 실행하고, 모든 악을 하나도 안 지으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참 기가 막히지. 그러니까 소동파가 거기서 항복을 했어. 백수작례(白遂作禮)라. 백거이라는 소동파가 드디어 수자, 지을 작자, 예배 예자, 드디어 예배를 했다. 항복했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중요한 게 업을 바꾸는 인과법문이고, 업을 바꾸는 수행법문이거든요. 이런 법문을 자꾸 들어야 이게 성불이 돼요. 극락세계 가고 복을 받는다. 願力法門 원력법문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善男子 應修十種廣大行願 何等為十 一者 입부사의해탈경계 보현행원품 선남자 응수십종광대행원 하등위십 일자禮敬諸佛, 十者普皆迴向 虚空界盡 我禮乃盡 而虚空界不可盡故 我此禮 예경제불, 십자보개회향 허공계진 아례내진 이허공계불가진고 아차예敬 無有窮盡 如是乃至眾生界盡 眾生業盡 眾生煩惱盡 我禮乃盡 而眾生경 무유궁진 여시내지중생계진 중생업진 중생번뇌진 아례내진 이중생界乃至煩惱無有盡故 我此禮敬 無有窮盡 念念相續 無有間斷 身語意業 계내지번뇌무유진고 아차예경 무유궁진 염념상속 무유간단 신어의업無有疲厭(40華嚴經제40권) 무유피염(40화엄경제40권) 그다음에 많이 하는 게 원력법문(願力法門)이에요. 원을 세워야 되거든. 천수경에도 보면 전부 원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있거든요. 사홍서원도 그렇고. 근데 원 중에 가장 큰 원이 <법계원왕 대원법문> 이게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에요. 법계원력의 왕이 보현보살인데, 법계원왕의 대원법문이다, 크게 원하는 법문이다. 그런 법문을 읽기만 해도 그게 성불이에요. 우리 한국불교에서 보면 늘 독송하는 게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보문품, 아미타경, 보현행원품, 요런 정도가 상용지송이라고 그래요. 상용지송경이라. 항상 하는 지송경이거든요. 수지독송하는데. 그런데 원을 말한 건 역시 보현행원품이에요. 보현행원품이 80권 화엄경에도 없고, 60권 화엄경에도 없고, 40권 화엄경 맨 마지막경 1권이 보현행원품, 우리가 읽는 내용이거든요. 40권 화엄경 마지막 권 1권이에요. 그런데 화엄경 전체에 아주 결론이고 실천이 바로 이 보현행원품이에요. 이거는 행원이, 실행하고 서원하는 행원이 바로 성불이고, 화엄경이거든요. 시작과 결과는 다르지 않다. 이게 원융법이에요. 그래서 시작이 대원이 되면 금방 성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을 세워라. 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서원을 세우기를 그렇게 강조를 해요. 그래서 인과법문, 원력법문은 법문 중에 가장 많이 하는 중요한 법문인데, 그런 법문을 듣고 인과를 믿고 원력을 세우면, 서원을 발심이라고 해요. 이게 신심과 발심이거든. 인과를 믿고 원을 세우면 그것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거다. 그래서 발보리심(發菩提心). 신인과(信因果). 그러면 성불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법문을 죽 계속해주시니까 법문을 많이 들어라. 듣는 것만큼 공덕이 된다. 그리고 인과를 믿어라. 또 서원을 세워라. 서원이 확실하면 바로 성불한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