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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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 7일 신중기도 법문
주지스님 2019-03-07
오늘이 몇 월이지요? (2월) 2월은 바람달(영등달)이라고 해서 ‘영등할매’가 예쁜 옷을 입혀서 딸을 데리고 오면 다홍치마를 휘날리게 하느라고 바람이 불어 흉년이 들고, 분홍치마에 옥색저고리를 입혀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며느리가 미워서 다홍치마를 얼룩지게 하느라고 비가 내려 풍년이 든다고 해요. 심술궂다고 하는데, 다 옛말들이에요. 2월 초하루는 바람달이어서 조심해야 한다고 하고, 경상도 운문사에서는 2월 초하룻날 마을에 내려가 쑥떡을 탁발해 옵니다. 요즘은 그런 풍속은 없어졌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쑥떡을 먹고 1년 무탈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따 쑥떡을 드릴 거예요. 올 해 삼재가 뭐죠? 뱀띠, 닭띠, 소띠. 그런데 그 세 띠만 해당하는 게 아니에요. 사주에 사유축이 있으면 그대로 삼재예요. 그러니까 모두 조심하라는 의미예요.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여 이상한 집에 기웃거려 부적을 만들거나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좋은 부적 있죠! 신묘장구대다라니. 최고의 다라니입니다. 대비주는 관세음보살대비주입니다. 천독기도, 천일기도 회향하고 옴마니 반메훔 족자 받아가셨죠. 공양도 제 때 제 시간에 맞춰서 받으셔야합니다. 다 나눠주시면 됩니다. 보시하면 됩니다. 여러분들도 집안이 무슨 일이 있으면, 꽃공양, 떡공양하고, 그게 다 공양의 근원입니다. 제가 언젠가 공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씀드렸죠. 참회할 때는 해탈향, 만행은 꽃공양, 마음이 불안하면 감로다, 차공양을 하면 됩니다. 등은 반야등, 그리고 보리과는 과일입니다. 선열미이므로 찹쌀을 올려도 좋고, 팥을 올려도 좋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는 팥을 올리면 좋고, 액땜을 하고 싶다면 찹쌀밥을 지어 대중공양을 올리시면 좋습니다. 4월 초하루는 부처님 오신 날이 있으니 더 좋아요. 2월도 8일 출가재일, 15일 열반재일이 있으니 그에 맞춰 천독다라니기도를 올리잖아요. 그만큼 도량이 맑다는 의미입니다. 한명 하는 것 보다, 10명 하면 더 기운이 세지고, 20명이 하면 더 세집니다.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라고 하잖아요. 다른 절에서들 성지순례 오시면 어떻게 이렇게 절이 깨끗하냐고 합니다. 보세요, 깨끗하잖아요. 우리 신도들의 기운이 맑아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니까 도량이 청정한 거예요. 그러면 삼보천룡이 다 오시는 거예요. 도량이 더러우면 삼보청룡도 안 오세요. 나쁜 생각 가지고 절에 안 오시잖아요. 첫 발 내디디면 천릿길을 간다고 하듯이, 좋은 생각 내시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또 사경을 하면 재앙이 소멸됩니다. 인등은 지혜입니다. 초는 백년해로입니다, 수명장수와 지혜도 되고. 미역과 칼국수는 자손번창입니다. 우리가 공덕을 몰라서 안 짓는 건 아니잖아요. 여력이 안 되면 못 지어요. 그렇지만 물질적인 공덕만 공덕이 아닙니다.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화안, 얼굴을 환하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집니다. 찡그리면 주변사람들도 불편하게 됩니다. 좋은 마음, 밝은 생각 내면, 기운이 다 좋아집니다. 출가재일이 되면 우리 스님들은 삭발한 머리를 한번 만져봅니다. 내가 왜 삭발을 했나. 밥을 못 먹어서 온 것도 아니고, 뭐가 부족해서 온 것도 아니고, 도를 닦기 위해서 왔거든요. 단료형고(但療形枯) 위성도업(爲成道業)이라고 해요.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도 형태의 마름을 고치기 위해서 먹는 거지, 맛을 탐해서 먹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드는 음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수행식이라고 해요. 자연식이고요, 이 음식을 먹으면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식이라고 해요. 여러분도 맑게 먹고 맑게 살면 모든 것이 맑아집니다. 우리가 3월1일은 뭐 했죠? 삼일절 행사했죠? 문재인대통령이 어디 태극기를 들고 나오셨는지 아세요? 진관사태극기였습니다. 진관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입니다. 불교신문에 기사에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 들고 나왔습니다. 독립운동과 깊은 인연을 지닌 사찰은 템플스테이로 의미를 살려 좋은 반응을 얻었다.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초월스님의 태극기를 보관 중인 서울 진관사,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때 출가했던 공주 마곡사, 평창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월정사, 경북 영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장육사 등이 템플스테이로 3·1 운동 정신을 되새겼다. 용성스님은 범어사에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용운스님과 백용성스님이 옥살이를 하셨을 때, 백초월스님이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15세에 영원사에서 출가하셨습니다. 함양군, 고성군, 은평구, 진관사와 MOU체결을 하여 같이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초월스님을 기려야 하겠습니다. 백초월스님께서는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그 스님을 기려 우리는 6월달에 추모제를 합니다. 올 해는 100주년 행사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는 항상 기도로서 일관해야 합니다. 바른 견해(정견)로 마음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 정진하자 -위부 노화엄스님-佛法在日用處 (불법재일용처)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으며 (부처님은 법계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行住坐臥處 (행주좌와처) 가고, 머물고, 눕는데 있으며喫茶喫飯處 (끽다끽반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데 있으며語言相問處 (어언상문처) 말을 서로 주고받는데 있으며(말을 상스럽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구업을 지으면 안 됩니다. 진어, 항상 진실한 말만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부처님은 진어자 여어자 실어자 불망어자라 하셨는데, 중생은 항상 구업만 짓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남의 흉을 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공덕이 안 되는 거예요. 장점만 보는 것도 보시입니다. 눈의 보시에요.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입의 보시예요. rfo서 우리는 항상 좋은 말,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所作所爲處 (소작소위처) 짓고 움직이는데 있다. 수행은 일상사입니다. 특별한 것 없습니다. 그래서 평상심이 그대로 도라고 했습니다. 불법은 일상생활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 일 그 자체예요. 사람이 하는 일상사를 두고 달리 불법이란 있을 수 없어요. 일상사를 버리고 따로 불법을 찾는다면, 그는 영원히 찾지 못합니다. 일상사를 버리고 불법을 찾는 것은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일이며, 금그릇을 버리고 따로 금을 찾는 일이에요. ‘금강경’에 “일체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皆是佛法)”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이 불법이에요. 항상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자기가 남에게 이를 주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항상 좋은 일만 하셔야 되요. 그래서 우리가 불기를 닦는다든지, 향로를 닦는다든지 촛대를 닦는 것도 다 공덕을 짓는 일입니다. 마지 올리는 것도 그렇고, 화장실 청소하는 것도 그렇고, 공양간에서 그릇하나 씻는 것도 공덕입니다. 불법이고. 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봄(見보다) 비구니 스님의 偈頌盡日尋春不見春(진일심춘불견춘)이요 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못 찾았네.芒鞋遍踏壟頭雲(망혜답파롱두운)로다 짚신이 다 닳도록 온 산을 다 헤매였네. (봄은 느끼는 거예요.)歸來偶過梅花下(귀래우과매화하)니 집으로 돌아오다 매화밑을 지났는데春在枝頭已十分(춘재지두이십분)이로다. 봄은 이미 매화가지위에 한껏 와 있었네.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몫이고, 행복은 음미하는 자의 몫이고, 가피는 느끼는 자의 몫이에요. 미래와 행복과 가피는 다 자기 몫이에요. 남이 해주는 건 없어요. 그래서 행복도 항상 느껴야지, 부처님의 가피도 항상 느껴야지 남이 대신하는 건 아니에요. 공부도 자기가 스스로 해야 돼요. 기도도 할 때 스님이 해주겠지 하지만, 뭘 해줘요. 내가 해야 합니다. 도량도 중요하고, 스님도 중요하고, 본인도 중요합니다. 정법한 곳을 다녀야합니다. 이상한 곳을 다니면 돈만 없어지지 되는 일이 없어요. 이상한 곳에 다니며 묻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하세요. 하기 힘들면 <옴>이라도 하세요.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본인이 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우리 불자들도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부처님같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정진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답게 생활하고, 부처님과 같이 말씀하고, 부처님같이 정진하고, 부처님같이 부처님 되면 그대로 부처님이에요. 다같이 부처님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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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3월 3일 일요법회 법문
덕현스님 2019-03-03
오늘은,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가 있는 날입니다.진관사는 독립운동유적지로서 이곳에서 발견되었던 태극기를 관람하기 위해 오늘 다함께 한옥박물관에 가서 관람을 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선조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자리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법회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그리고 또 하나, 독립, 해탈,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죠, 니르바나. 내 안의, 내 자신, 자진해서 스스로의 독립이 되고 해탈을 이룬다면 자유자재하게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렇게 나 하나만으로도 자유, 해방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들은 얼마나 더 절절했을까 싶습니다.우리는 그러한 선조들의 노력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오늘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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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2월 24일 일요법회 법문
선우스님 2019-02-24
오늘 갑자기 날이
확 달라지는 느낌, 봄이 갑자기 온 느낌을 받으십니까?겨울 옷도 잘 세탁해서 넣고 봄 옷을 이제 꺼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세월이 참 빠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가진 사람은 순간순간 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행복하십니까? 매일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매일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여 여기에 여러분들이 오신 겁니다.이유가 있어서 무엇인가 일어났다는 연기를 내게
어떻게 적용할까? <내가 있으므로 세상이 있고, 내가 멸하면
세상도 멸합니다.>그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에요? <나> 입니다.그러므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첫 번째는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급 변화하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하루에 나를 만나는 시간을 적어도
3번은 가지셔야 합니다.아침에 일어나서, 그
다음에는 회사가 되었든 지하철이 되었든 여러분을 관찰하다 잠이 들어도 좋아요.그 때가 여러분이 가장
편안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기 전에. 3번 만큼은 눈, 귀, 코, 입 등 모든
감각기관에 끄달려서 세상에 달려가던 나를 잠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나는 정말 소중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두 팔, 두 다리가 있네. 무엇이든 해야 되겠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 위해 뭐든지 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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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2월 23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19-02-23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諸法이 從因生이요(제법종인생) 제법은 인연으로부터 나고諸法이從因滅이로다(제법종인멸) 제법은 인연으로부터 소멸한다.如是滅與生을(여시멸여생) 이와같은 소멸과 생성을 沙門이說如是로다(사문설여시) 사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불본행집경 제48권)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사실상을 깨달으셨는데요, 나고 죽는 진실상이 어떤 것이냐. 제법이 종인생이라(諸法從因生), 태어날 때도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고, 죽을 때도 인연으로 말미암아 죽는다. 인연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번역한 말인데, <얽어맨다>는 뜻이에요. <말미암는다>. 인자는 말미암는다는 뜻이고, 연자는 두 조각을 한데 붙인다, 꿰맬 연자, 두 조각을 꿰매서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니까 말미암아서, 이쪽 천이 있고 저쪽 천이 있는데 이 두 조각이 하나로 꿰매어져서 옷이 되듯이, 태어나는 것도 말미암아서 태어나고 죽는 것도 말미암아서 죽는다. 이걸 깨달으신 거예요. 제법이 종인생이요, 제법이 생사인데, 생사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종인멸이다(諸法從因滅), 생사가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이렇게 여시멸여생(如是滅與生)을,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사라지는 이런 생사생멸을, 사문설여시(沙門이說如是)라, 부처님이라는 말도 통용이 되기 전에, 보통 수행자를 인도에서 사문이라고 불렀거든요. 사문수행자. 사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초기에 하신 설법인데, 이 설법을 듣고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아주 유명한 사리불이라고 있는데-, 사리불이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됐어요. 이 법문을 다른 제자한테 전해 듣고. 인류역사상, 문화발전상 엄청난 이야기예요. 인연법을 깨달아서 인연법을 말했다는 게 엄청난 일이예요. 뭐, ‘천지에 의해서 태어난다, 아니면 절대자에 의해서 태어난다’ 등 이런 거를 믿던 때인데, 천지 이치, 절대자 능력 이런 걸 믿고 있을 때인데, 석가모니는 독특하게 인연법을 깨달았다. 생기는 것은 모두 다 말미암아서 생기고, 모든 사라지는 것도 다 말미암아서 사라진다, 이 말은 사라지고 생기는 것에 자체 본질 구조가 없다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자성, 자체 성격이라고 하는데, 자체 본질 구조가 없다. 이것을 무아생사(無我)라고 해요. 무아생사. 아라고 하는 것은 자체본질구조고, 죽고 사는 데는 인연이지 자아가 없다. 인연뿐이다. 이게 무아거든요. 그러면 인연법을 깨달은 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인연법을 깨달으면서, 생각으로 살아가다가 인연법을 깨달은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인연법을 누가 아느냐. 깨달음을 보는 사람이거든요. 깨달음이 없으면 인연법이 있는 줄 모르거든요. 인연법이 계속해서 있었는데, 인연법을 깨닫기 전에는 인연법을 몰랐다 그 말이죠. 인연법을 안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할 때,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 해요. 전환할 때 전자, 인식 식자. 인식구조가 전환이 돼서, 성립할 성자, 지혜 지자, 지혜로 성립이 되었다. 전식성지. 그런데 그 지혜는 생각으로는 모르고, 생각이 맑아져야 안다. 이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과학이 아니라 생각을 맑히는 노력이에요. 그걸 수행이라고 해요. 과학하고 전혀 틀려요. 과학은 생각으로서 실험해서 증거를 찾아내는 게 과학인데, 불교는 생각자체를 맑혀야 불교예요. 이 방법이 굉장히 중요한 방법이에요. 생각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관찰을 하고 증거를 획득하는 방법은 과학인데, 불교는 그 생각 자체를 맑혀요. 이 방법이 있어요. 이걸 어려운 말로 도 닦는다, 수행한다 그러는데, 핵심은 생각을 맑히는 것이 도를 닦는 거고, 생각을 맑히는 것이 수행을 하는 거예요. 생각을 가지고는 인연법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눈에 뭐가 이렇게 가려있으면 정확하게 보이질 않듯이, 생각이 끼어있으면 죽으나 사나 생각의 굴레에서 머물게 된다는 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인연법을 깨달으려면 생각을 맑혀야 된다, 그러면 생각이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거죠. 그러면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 생각은 아집이고,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 인연법을 깨달으면서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이 지혜로 바뀐다.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해탈했을 때 얻어지는 지혜를 해탈지견(解脫知見) 이라고 하는데, 해탈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인연법을 알아서 해탈을 이룬 지혜가 있어서 해탈을 못 얻고 인연법을 안 거죠. 그런데 일과 맨날 생각을 구조화하고, 생각을 체계화하고 생각을 전해주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조상이 생활 속에서 얻어진 경험을 후대에게 잘 전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또 생활 속에서 지식을 얻는데, 이 지식이라는 게 왜 중요하냐하면 고난과 역경을 해결한 경험이에요. 아버지가 ‘뭘 해보니 이런 게 있는데 난 이렇게 해결했다,’ 이것을 자식에게 계속 전해주려고 하는데, 자식은 ‘아버지, 거기에서 무슨 성과를 얻었는데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했던 아버지의 경험체계는 무시하고 결과만 따지는 게 자식들의 심리입니다. 또 성공한 자식은 ‘아버지가 내 성공에 해준 게 뭐가 있는데요.’, 해준 것만 따지는 게 자식이에요. 자식은 낳을 게 못 되요. 안 낳는 게 남는 장사예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는 배 아픈 경험도 해결하고, 배 고픈 경험도 해결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어려운 것도 해결하고, 그 경험이 있어요. 이걸 잘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려고 하면 ‘아버지 그래가지고 뭘 이뤘어요.’ 이룬 게 많은 아버지한테는 ‘아버지가 이룬 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요.’ 이렇게 따지니까 제일해서는 안 되는 게 자식 낳아서 키우는 거더라고요, 내가 보니까. 그렇게 불확실한 사업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재를 지낸다는 건 엄청난 거예요. 재 안 지내도 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재를 지낸다는 것은 자식 중에 아주 모범적인 자식이에요. 대단한 자식이에요. 이게 전부 생멸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을 가지고. 그런데 이 생각이 영원히 생각이에요. 그래서 생각 속에는 고통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무서움이 있고, 절망이 있고. 즐거움도 있는데, 즐거움이 오래 안 가거든요. 거기서 해탈하는 게 인연법을 깨닫는 것이고, 인연법을 깨달으면 해탈로 보고, 해탈로 아는 해탈지견이 있는데, 생각에서 벗어나서 알고 보는 걸 지혜라고 한다. 지혜는 해탈지견이다. 그러면 해탈지견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唯有一物(유유일물)이 오직 ‘한 무엇’이圓成圓融(원성원융)이로다 원만히 이루어졌고 원만히 융통한다.長靈長靈(장령장령)하야 길이 신령하고 길이 신령하여常放光明(상방광명)하나니 항상 광명을 비추니今日靈駕(금일영가)의 금일 영가의本來面目(본래면목)이로다 본래면목이다. 나무아미타불 그 해탈지견은 뭐라고 규정을 하고 해석을 하면 생각이니까, 이 생각이라는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무기인데 구분하는 거예요. ‘아, 저거 무서운 거다, 안 무서운 거다.’ 이래가지고 선택을 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별로 힘도 없는 인간 종이 이렇게 온갖 사물을 다 쥐고 있거든요. 생각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사자, 호랑이, 여우한테 절대 안 되요. 쟤들은 생각 기능이 모자라서 저 모양이 된 거예요. 억울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사자, 호랑이에게 어림이나 있었겠어요. 그런데 인간은 구분을 할 줄 아니까, 무서우면 어떻게 해야 되고, 저건 안 무서우니까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항상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다가 죽어요. 그래서 맨날 구하다 죽고, 맨날 찾다 죽고, 맨날 헤매다 죽는 게 인생이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쳐요. 그게 고해라고 그래요. 구하다 죽는다, 찾다 죽는다, 헤매다 죽는다, 그럼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인생은 고해라는 거지요. 찾다 죽는다는 소리예요.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인생일생이라는 것이 참 기가 막혀, 맨날 찾다 죽어요. 찾는 게 삶과 죽음을 구별하는 거니까. 죽음을 멀리하고 삶을 가까이 하는 거. 구분하는 거예요. 이 구분이 없으면 생각이 아니에요. 이걸 불교에서는 분별이라고 해요. 나눠서 구별한다고. 분별, 생각이거든요. 영원히 생각 속에서 분별하고, 취사, 취하고 버리다가 끝나는 게 인생이거든. 근데 그 생각이 딱 지혜로 바뀌니까 생각에서 해탈해 가지고 알고, 해탈해 가지고 보니까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생각은 보고 이름붙이고, 남자다, 여자다, 저건 나무다, 바위다, 보고 이름 붙이는 거, 굉장히 번개보다 빠르게 하거든요. 근데 그건 생각이 붙여놓은 거지, 나무가 나무가 아니고 사람이 사람이 아닌 건데 그건 모르거든요. 나무가 나무가 아니라는 건 생각이 아니라 지혜에요. 그래서 ‘저건 나무다.’라는 생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해요. 이건 불교학 강의 시간에 하는 말인데, 재 지내는 의식하고는 조금 안 맞거든요. 근데 이런 걸 아셔야 극락세계에 가시기 때문에, ‘생각의 속박에 머물지 마시고 해탈지견, 극락세계로 가셔라.’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생각에서 벗어난 진실지견, 해탈지견을 ‘한 것(一物, 한 일자, 물건 물자. 물건 물자를 물건이라고도 하는데, 그냥 ’무엇‘이라고도 해요.)이라고 해요. 오직 한 무엇이 있다. 그런데 그 무엇은,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아는 그것은 개념도 없을 뿐 아니라 규격도 없어요. 그래서 오직 지혜로서 깨닫는 것이, 생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라. 과학시대에 과학과 다른 것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할 때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그런데 과학만 해가지고는 결과가 찾다 죽는 거거든요. 해탈은 할 수가 없어요. 생각을 맑게 해 해탈하는데, 생각을 체계화하면 찾다 죽어요. 아, 이거 참, 고민이에요. 생각에서 벗어난 세계는 뭐냐. 원성(圓成,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하게 이루는 거예요. 뭘 지었다 부수고 지었다 부수는 게 아니고, 원성이다. 여기 다 하나 더 덧붙이면 본자원성(本自圓成),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거죠. 허공은 누가 부술 수도 없지만 뭔가 보탤 수도 없잖아요. 또 원융(圓融). 원만하게 다 통한다, 융통.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다 통해서 어디도 안 통하는 데가 없다. 이게 해탈지견이에요. 원성원융. 살아있는 생명체에도 통하고, 나무한태도 통하고, 바위한테도 통하고, 삶에도 통하고 죽음에도 통하고 이게 원융이거든요. 이게 깨달음에 대한 말씀이에요. 그래서 장령장령(長靈長靈)하야, 긴 장자, 신령스러운 령자, 길이길이 신령스럽고, 이게 수명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장령, 장구하게 신령해. 또 장구하게 신령해서,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런데 그게 누구냐. 오늘 영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본래모습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은 부모님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 모습이고, 인연실체고, 본래실체가 있는데, 본래면목, 면목은 얼굴인데 몸이란 소리잖아요. 그래서 이게 장영실체, 길이길이 신령스러운 몸, 본래면목. 극락세계는 장령실체,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면 그게 극락세계예요. 먼 곳도 아니고 가기 어려운 곳도 절대 아니거든요. 다만 생각이, 구분하고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는 그 생각의 장애를 입어서 못가요. 한 생각 딱 내려놓고 한 생각을 딱 닫으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거든요. 불교의 가르침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게 이게 너무 어려워서, 믿는 사람에게는 들어갈 수 있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못 들어가요.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요. 해보겠다고 절에 와서 스님이 되어 공부할 때도 맨날 싸워요.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해탈한 지혜를 가르치는데, 배우는 사람은 생각으로 공격하고 들이대거든요. ʻ극락세계 가봤냐’고. 간다, 못 간다는 구분하고 판단하는 생각이거든요. 저도 어릴 때 그랬어요. 강사선생님이 못 가봤다고 그러더라고요. ‘못 가본 걸 왜 가르치냐’고 하니까 ‘나 가보고 나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경전을 믿고, 그 경전대로 가르친다.’ 그 때 손들었어요. 믿고 가르친다는데 할 말 없잖아요. 다시는 그런 얘기 안했어요. 극락세계라는 것은 그 극락세계를 믿고 느끼는 사람이 없으면 극락세계를 말 할 수 없어요. 느끼는 분을 아미타불이라고 해요.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라는 거거든요. 수명 수, 목숨 수. 계량할 수 없는 수명을 가진 아는 분이란 뜻이에요. 무량수불이다. 아미타불이라고 해요. 극락세계엔 아미타불이 있어요. 극락세계엔 모든 것에서 해탈을 했기 때문에 고통이 없어요. 판단하고 구분할 때 고통이 생기는데, 판단, 구분에서 다 벗어났기 때문에 고통이 없어요. 모든 건 인연법이라. 자체가 없다. 촛불도 인연으로 생겨서 자체가 없고, 하늘도 인연으로 생겨서 자체가 없고, 그런데 생각으로 그것을 구분해서 스스로 고통을 느꼈을 뿐인데, 자체가 없는 것은 자체가 없는 것으로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알면 그게 해탈이거든요. 그러면 수명은 없는 거예요. 인연은 수명이 있는데, 해탈에는 수명이 없다. 극락세계 아미타불께 나무아미타불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얼릴 때 절 밑에서 자랐는데요, 스님들이 지나가시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쫓아가면서 놀렸어요. 제가 40년대 출생인데, 50년대, 60년대까지 그랬어요. 60년대 초반에 제가 절에 왔거든요. 절에 온지가 50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래서 불교가 어렵다 해서 과학으로 가는데, 과학은 생각의 체계인데, 생각의 체계를 녹여야만 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한 번 들어가 놓으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건데 그걸 못해서, 생각을 놓지 못해서 헤매다 죽는구나, 찾다 죽는구나. 長靈長靈(장령장령)하야 常放光明(상방광명)이라, 나무에도 허공이 있고, 하늘에도 허공이 있고, 일체에 허공이 없는 곳이 없듯이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것이 오늘 ‘영가의 본래면목이다’라는 거죠. 본래의 진실모습이다. 근데 우리는 지금까지 인연모습만 알고 살은 거예요. 진실모습은 찾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나의 진실모습은 뭔가. 한자로 본래면목이라고 그래요. 진실한 내 모습이거든요. 나 어릴 때 저 친구(어린아이)와 같이 어린 모습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저렇게 예쁜 모습이 이 속에 있나, 아니면 달아났나. 저런 친구도 한 60년 지나면 저 모습이 아닐 텐데, 60이 되면 저 모습이 어디로 달아나서 없나, 그 속에 있나. 이런 걸 몰라요. 어릴 때 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내 속에 숨어있을까, 어디로 도망갔을까. 모르는 거예요. 이건 다 인연모습이기 때문에 숨은 것도 아니고 달아난 것도 아니고, 저 모습도 인연모습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연모습이기 때문에 하나가 계속 상존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가 사라지고 하나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진실모습이 반드시 있는데, 그 진실모습은 왜 모르느냐. 생각으로 구분해서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참 문제예요. 근데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으로 무서운 동물세계에서 살아남았는데 생각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서 신심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요.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용기가 있어야 된다. 그걸 석가모니를 들거든요. 석가모니 용기 대단하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가르치는 게 지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심, 흔들리는 것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지식만 있어서는 흔들리거든요. 신심은 결정심이기 때문에 한번 딱 결정하는 게 신심이거든요. 해탈하면 찾고 헤매는 일이 전혀 없다. 부족한 게 전혀 없다. 무량수 극락세계. 그것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생각을 맑히면 된다. 금일 영가의 본래면목이니까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말고, 나의 진실모습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 그리 돌아가십시오. 거기에는 무한한 공덕이 있다. 무한한 복락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봄을 딱 아는 순간에, 그게 춘기인데, 봄기운을 딱 아는 순간에 춘색춘향이 무궁무진해요. 봄빛과 봄향기가 끝도 없이 많다. 그걸 무궁무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봄을 몰랐을 때는 그냥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풀이 있다, 이것만 아는데, 봄기운을 딱 알고 나니까 풀도 봄기운이고, 나뭇잎도 봄기운이고 꽃도 봄기운이고 바람도 봄기운이고 전부가 봄기운이에요. 나의 진실모습을 딱 알고 나니까 그 진실세계에는 복락과 즐거운 행복, 평화와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거예요. 그걸 화장세계라고 그러는데, 꽃 하나를 보면 꽃잎들이 쫙 박혔잖아요. 꽃잎들이 저장되어있다고 해서 화장(華藏)이라고 해요. 화장세계가 불교용어예요. 엄청나게 많이 저장되어 있어서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쪽으로 가시면 되요. 達無相法(달무상법) 무상법을 통달하여到無障處(도무장처) 무장처에 이르니華藏莊嚴(화장장엄) 헤아릴 수 없는 장엄이圓滿具足(원만구족) 원만구족하다. 無盡佛刹(무진불찰) 끝없는 불찰의華藏刹海(화장찰해)여 화장찰해여!安樂常樂(안락 상락) 안락, 상락의極樂淨土(극락정토) 극락정토!今日靈駕(금일영가)께서는 금일 영가께서는速得往生(속득왕생)하소서 속히 왕생하소서!나무아미타불 불교에서 세계를 가르칠 때, 세계에는 세계를 관찰하는 지식세계를 중생세계라고 하고, 세계를 관찰하는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의식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세계는 중생세계이고, 지혜로 관찰하는 세계는 불세계라고 해요. 인도말로 <차트라>라는 말이 있는데, 그걸 찰해라고 해요. 해탈지견으로 보는 세계를 불찰이라고 해요. 중생계, 불찰. 이 無盡佛刹(무진불찰), 끝없는 해탈세계, 그 세계가 바다와 같이 넓고 많다. 그 세계가 안락상락(安樂常樂)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두려움이라는 것은 형상에 매이면 두려워요. 몸을 유지하는 게 형상인데, 이것을 유지하려면 항상 두려움이 생겨요. 병날까 두렵고, 사고날까 두렵고, 몸이라는 게 기쁨을 느끼는 바탕도 되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바탕도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쁨을 느끼는 바탕뿐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는 바탕도 사라진 거예요. 어느 쪽으로 보냐는 거예요. ‘나는 고통을 느끼는 바탕이 사라졌으니까 좋다.’라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 사람도 솔직히 있었어요. 중국에 장자라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어요, 좋은 날이라고. 딴 사람들은 모르고 ‘재혼하려는가보다.’ 라고 했대요. 가서 물어봤어요.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았는데, 오늘로 그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고분통(鼓盆之痛)>이라고 해요. 물동이를 두드리고 노래 부르는, 남편으로서 떠나보내는 애통함이 속에 있다는 거지요. ‘부부가 같이 사느냐’를 유식하게 물어보려면 ‘고분통을 겪지 않았나’, 부인이 여지까지 살아있냐는 말도 되요. 그러니까 불찰이라는 게 깨달은 세계로 보는 세계, 깨달은 지혜로 보는 세계에는 안락과 상락이 한이 없고, 또 거기에는 극락정토다. 극락이라는 것은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것을 극락이라고 해요. 안락, 상락, 극락. 안락은 편안하고 즐겁다는 말이고, 상락은 항상 즐겁다는 말이고, 극락은 괴로움없이 즐겁다는 말이에요. 오늘 영가께서는 속득왕생(速得往生)이라. 빠를 속, 얻을 득자. 얻을 득자는 별 의미가 없고 조사고. 속히 왕생하소서. 안락, 상락, 극락세계로 왕생, 가서 나소서. 진실실체, 본래면목, 극락세계로 속히 가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오늘 법문을 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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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참법도량기도} 2월 14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종범 큰스님 2019-02-14
안녕하십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기도에 참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와 회향>, 기도와 회향이라는 요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말씀인데요, 기도공덕 수승수승 祈禱功德 殊勝殊勝복업혜업 근수근수 福業慧業 勤修勤修불생이해 필득구족 不生異解 必得具足시위성취 시위해탈 是爲成就 是爲解脫 어려운 말 아니고요, 기도공덕이 수승하다, 수승(殊勝), 다를 수, 이길 승. 신비하고 훌륭하고 불가사의하다, 이런 뜻을 수승하다고 해요. 수승, 기도공덕이 신비하고 기도공덕이 훌륭하고, 기도공덕이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다, 이런 말씀이죠.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형식은 어떠튼지간에 전부 하나로 통하는데, 그것은 복업과 혜업을 닦는 것이다. 기도공덕은 선세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게 기도예요. 선세, 과거세상의 업장을 소멸하고, 선세제업(先世諸業)을 소멸하고, 업장, 제업을 다 소멸하는 것이 기도고, 복업과 혜업을 닦는 것이 기도다. 복업은 좋은 건데 이루는 거예요. 이루는 게 복업이고, 그걸 수성(修成)이라고 합니다. 닦을 수, 이룰 성, 복은 닦아서 이루는 게 복이고, 지혜는 덜어내는 게 지혜에요. 덜어내는 거, 遣除라. 보낼 견, 제거할 제. 덜어내는 게 혜업, 지혜인데, 어떻게 덜어내느냐. 일체 번뇌망상을 다 덜어내는 게 그게 지혜예요. 번뇌, 망상, 쓸데없는 생각, 그걸 보통 진로망상이라고 하는데, 진로 술 말고, 티끌 진, 피로할 로(塵勞). 정신이 항상 물질과 사람에게 빠져있어요. 그래서 맨날 사람생각, 물질생각, 그걸 진로라고 해요. 사람이라는 티끌, 물질이라는 티끌에 항상 빠져서 피로해요. 그래서 온갖 허망한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서 진로망상, 진로망상을 싹 제거해서, 보내버리면 거기서 지혜광명이 나온다. 구름이 싹 흩어지면 햇빛이 환히 밝는 거와 같은 이치다, 이런 말씀이죠. 그게 혜업이에요. 이런 복업과 혜업을 근수근수(勤修勤修)하고, 부지런할 근,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라고 천수경에 나오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끊임없이’란 말이에요. 끊임없이 계속 닦고 또 닦고, 때때로 닦고, 중단 없이 닦고, 끊임없이 닦으면 그게 기도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고, 근수근수하고. 불생이해(不生異解)하면, 아니 불, 날 생, 다를 이, 견해 해, 다른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다른 견해라는 것이 번뇌고 망상인데, ‘이걸 꼭 해야 되나, 하면 뭐 좋은 게 있나,’ 이런 게 다른 견해거든요. 법문을 하고 더러 사석에서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미치겠어, 미치겠어.) “법문을 들었는데, 그 법문대로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요런 소리를 해요.(웃음) “법문대로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요런 소리를 해요. 그런 것을 이해라고 해요, 다른 견해. 그리고 조상천도를 한다고 아미타불을 한참 불렀는데, 다 부르고 나서 “극락세계가 정말 있는 겁니까?” 요딴 소리를 한단 말이에요. ‘그게 쉬운 일이냐, 정말 있느냐’, 이런 게 전부 다른 견해에요. 다른 견해를 내게 한다. 일단신심이라, 한 덩어리, 한 일자, 조각 단자(一團)가 있는데, 한 덩어리 신심으로 하는 게 불생이해, 다른 견해를 안 내는 거거든요. 그러면 필득구족이라, 반드시 구족, 갖출 구, 만족할 족, 다 갖추고 다 만족한 그런 결과를 얻는다. 이게 기도거든요. 닦고 닦고 다른 생각 없이 계속 닦으면 반드시 구족함을 얻어 복도 구족하고, 지혜도 구족하고, 복혜가 구족해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모르는 거 하나도 없고, 그게 복혜구족이거든요. 시의성취다. 이것이 성취다, 이것이 기도 성취란 거예요. 이것이 기도에서 이루는 것이고, 시의해탈이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해요. 생존문제라든지, 인생문제라든지, 사회문제라든지, 이 모든 걸 해결하는 게 해탈이라고 해요. 복업과 혜업이 구족하면 그게 바로 해탈이다. 또 그것이 바로 원만이라고 해요. 구족이라는 말이나 원만이라는 말은 같은 개념이에요. 원만(圓滿), 둥글 원, 가득할 만, 모자라는 거 없이, 끊임없이. 원이란 변곡이 없다는 소리에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변제, 변곡, 원이란 한계가 없는 거예요. 한량없이 가득히 찬 것을 원만이라고 해요. 원만구족이고 구족원만이고, 이렇게 까지 되는 게 기도회향이에요. 기도를 하면, 우리가 축원을 할 때도 회향을 하는데요, 회향은 돌리는 건데, 그 기도를 해서 얻어진 공덕을 어디다 쓰느냐. 이거거든요. 돈 벌어서 어디 쓸래 하듯이. 어린아이들은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 쓰는 것도 잘 가르쳐야해요. 그걸, 돈 쓰는 걸 출구라고 하거든요. 돈 버는 것을 입구라고 하고. 들어가면 나와야 되요. 그렇지 않아요?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어야 하는데, 돈 벌면 써야 되거든요. 안 쓰고 놔두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 없는 물건이라 천해빠져서 못써요. 재물은 안 쓰고 죽으면 쌍디귿 된다고 그래요. 쌍디귿에 오하고 이응하면.(웃음) 돈은 생전에 이룬 사람이 다 쓰고 죽어야지, 안 쓰고 죽으면 주인 없는 재물, 주인 없는 금전이라 쌍디귿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 어디다 쓸래, 그게 딱 정해져야 되요. 돈 쓰는 걸 소비라고 하는데, 소비가 그 사람의 행복이고,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의 희망이거든요, 소비하는 걸 딱 보면. 아주 중요해요. 소비를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불교에서는 목적소비를 가르쳐요. 목적소비.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게 다 소비인데, 왜 밥을 먹고 옷을 입느냐, 위성도업(爲成道業),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 이것이 목적소비거든요. 뭘 하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중국의 연변지역에 갔더니, 그 사람이 캐나다 교포인데, 가끔 만난 사람이에요, 먹는 것도 제일 허름한 걸 먹고, 숙소도 아주 급이 낮은 싼데서 자고, 갈 때마다 그래요.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수소문해서 물어보니, 1년에 한 10억씩을 북한에 쓴대요. 무슨 공장을 지원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먹는 것도 형편없게 먹고, 숙소도 아주 싼데서 자고, 이런다고. 그 사람이 하던 소비는 북한의 공장운영해서 북쪽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그게 목적이에요. 목적소비. 또 만족소비가 있어요. 나는 요걸로 만족한다 하면 그만이에요. 자기만족을 하면 끝인 거예요. 명품소비가 있어요. 값 비싼 거, 명품을 소지를 해야 내 인격이 높아지고, 소비는 인격이라고 하거든요, 소비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소비 안 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어떤 생각으로 소비를 하느냐. 집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자동차를 어떻게 소비하느냐, 옷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집과 승용차와 옷과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을 자기 인격으로 보는 명품소비가 있어요. 그것도 소비하는 형태예요. 그래서 무조건 값나가는 것, 좋은 것을 해야 내가 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돈 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돈을 어디다 쓸까, 좋은 거 사서, 좋은 거 쓰는데 쓸까, 그거는 그냥 배워지는 게 아니라 부모 하는 대로 영향을 받을 수 있거든요. 반대로 나갈 수도 있는데 똑같이 따라갈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술을 평생을 먹어서 진저리가 나서 술을 안 먹을 수도 있지만, 같이 술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돈 버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난 내가 정서적으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아니다, 나는 좋은 거 써야 된다, 이렇게 향락소비하는 거죠. 명품으로 자기 즐거움을 누리는 거예요. 명품소비는 향락소비거든요. 아니면 목적소비, 나는 다 필요 없고, 이것만 이루면 된다. 이게 보살이 하는 소비거든요. 보살은 꼭 목적소비해요. 그래서 복을 많이 짓는데, 보살은 불수복덕(不受福德)을 해요. 복덕을 받질 않아요. 불수복덕. 또 불응탐착(不應貪着)을 해요. 자기 복덕을 탐하고 집착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 다 회향을 해요. 그게 회향이에요. 다 돌리는 거예요. 그럼 회향은 축원할 때 보면 삼처회향(三處回向)이라고 하거든요. 세 곳에 돌린다. 삼처는 화엄경의 십회향품이 있는데, 십회향품을 요약하면 삼회향이 되요. 회향중생처, 일체 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중생처에 다 회향을 하는 거예요. 회향보리처, 보리(菩提)는 깨달음이잖아요, 내가 성불할 때까지 성불하는 쪽으로 다 회향을 해요.회향실제처, 진여, 불성, 청정, 법신, 그쪽으로 회향을 해요. 천수경의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법성, 법의 본성의 몸이 내가 될 때까지 그 쪽으로 회향하는 것을 실제라고 해요. 진실할 실, 국제의 제, 경계 제, 實際. 이렇게 중생회향, 보리회향, 실제회향, 내가 청정법신이 될 때까지 청정법신 쪽으로 다 회향을 해요, 청정법신은 덜어야 해요, 지혜를 닦고, 지혜를 회향하고. 보리와 중생은 이뤄야 하는 거거든요. 이루는 쪽으로 회향. 그게 기도입니다. 복을 닦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복을 내가 받질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돌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목적소비를 몸에 익히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모든 사건과 사고가 향락소비에서 생겨요. 향락소비에 물들면 여러 가지 죄업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소비가 건전하면 절대로 죄를 짓질 않아요. 작은 것 하나를 가지고 만족하는 만족소비를 하면 무슨 죄가 거기서 생겨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쪽으로 돌리는 데 무슨 죄가 생겨요. 더 좋은 거 갖고, 좋은 거 더 쓰고, 좋은 거 더 만들고, 여기서 죄업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돈 많이 벌어라, 잘 살아라, 부자 되라.’ 이런 것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돈 많이 벌어야죠. 그리고 나서 ‘어디다 쓸래?’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근데 부모들이 잘 못해요. 왜 못하냐하면, 자식이 예쁘니까, 예쁜데 어떻게 이래요? 어떤 사람이, 택시 기사하는 분인데, 아들과 딸이 있어요, 아들이 군대 갔다 와서 취직을 안 한대요. 그럼 뭘 하느냐. 가끔씩 시간제 노동으로 다니더래요. 시급노동 보통 아르바이트라고 하는데, 그것도 며칠하고 안하고, ‘왜 그러냐?’했더니, ‘아버지, 나는 내 용돈 벌이만 하면 되요. 밥벌이는 안 해요. 아버지 돈이 많은데, 용돈 벌이만 하고 살다보면 아버지 것이 다 내거 아니에요.‘ 미치겠대요. 그리고 결혼한 딸이 있는데, 집에 들어와서 산대요. 처음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더니, 엄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자기 일 나가고 없을 때 들어왔다가, 있을 때쯤에는 나갔다가, 또 없을 때는 들어왔다가, 그러다 나중에 차츰차츰 대놓고 산대요. 그런데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 하니 ‘지금 생활비 딱 아끼고 그 돈 가지고 얼마 있다 집 사려고 들어와 산다.’고 하는 거예요. 또 작은 딸이 하나 있는데, 이 딸은 독립하라고 했더니, 겨우 바로 옆집 어디다가 원룸인가 하나 얻고, 꼭 저녁은 집에 와서 먹고, 갈 때는 휴지며 있는 것 다 가지고 간대요. 휴지 가져가면서 ‘이건 나중에 사올게.’하고 간대요. 사오기 뭘 사와. 자기도 심하게는 못하고, 엄마는 더군다나 못하고. 왜 못 하냐, 그래도 예쁜데 어떡하냐. 예쁜 게 마약인데, 예쁘니까 그게 옳지 않은 길이란 걸 알면서도 못 잡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순간순간 자세를 제때제때 고쳐주지 않으면 못 고쳐요. 예쁜데 어떻게 고쳐. 휴지 가져가는 것도 예쁜 거라. 집에 들어오는 것도 예쁘고, 용돈벌이만 하고 사는 것도 예쁜 거예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망치거든요. 그래서 회향이라는 게 본인이 쓰면 회향이 안 되거든요. 돌려야 돼요. 돌린다는 것은 목적소비를 한다는 말이에요, 향락소비가 아니라.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아무리 적게 써도 만족하는 거죠. 그게 회향이에요. 그게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많이 벌어서 적게 쓰고 돌린다, 중생처로 돌리고, 깨달음으로 돌리고, 법성 진여 실상으로 돌린다. 이것이 회향삼처실원만(回向三處實圓滿) 기도예요. 소수공덕을 닦으면 됩니다. 이건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불수복덕하고, 복덕을 받지 않고, 회향삼처, 삼처에 회향해서 다 원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게 기도거든요. 왜 그렇게 회향을 하는가? 불교는 가장 신봉하고 예경하고 존중하는 대상이 일체제불, 일체보살, 역대조사, 대선지식 이렇게 하거든요. 조사, 선지식, 보살, 제불, 이것이 불교가 신봉하고 예경하고 존중하는 대상인데요. 일체제불이라고 하면 청정법신이에요. 청정법신은 적멸무주(寂滅無住), 이게 생멸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고 적멸해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 생멸이고요, 단멸이란 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 끊어질 단, 없어질 멸, 斷滅,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단멸이라고 해요. 그런데 적멸은 단멸도 아니고 생멸도 아니고, 실상, 진실상인데 무주, 머무는 데가 없어요. 생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단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햇빛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늘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고, 실상무주, 적멸무주라고 하거든요. 이게 부처님의 본성인데, 우리 중생의 본성이에요. 몸이 생겼다고 해서 거기에 머무는 게 아니에요. 죽었다고 해서 없는데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죽고 사는 거 걱정하는 건 전부 진로망상인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이 걱정하는 건 전부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에요. 본래 죽고 사는 게 없는데, 죽는 거 걱정하고 사는 거 걱정하는 거니까 그게 전부 다 쓸데없는 걱정이거든요. 이런 소리하면 꼭 그래요. ‘걱정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걱정 안한다는 게 그렇게 쉽습니까.’ 안 쉬우니까 기도하는 거지 쉬운 거면 뭐 하러 기도해요. 부산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하여튼 제가 법문하는 걸 한 30년 따라다니며 들었어요. 그런데 한번은 그래요. “스님 법문 가만히 들어보면 세상에 구할 것이 하나도 없네요. 근데 사람이 어떻게 구하지 않고 삽니까.” 그러더니 얼마 안 있다 죽었더라고요. 구하려고 애를 썼는데 얼마 있다 보니 죽었어. 세상에서 구하는 것은 다 세상 거예요. 나한테 돌아오는 게 없어요. 자식에게 가면 부모에게 안 돌아옵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자식한테는 한번 가면 절대 안 돌아와요. 그걸 어떻게 아냐. 스님이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날 보면 알거든요. 부모한테 받은 건 많지만, 해주기 싫어요, 안 했어, 처음엔. 근데 벌써 가셨더라고. 지금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은 노인빈곤, 노인파산, 어려운 말인데, 옛날로 말하면 맨 몸, 빈털터리, 빈곤이니 파산이니 재미없는 말 쓸 게 아니라, 맨 몸, 빈털터리. 그걸 빈곤, 파산이라고 그래요. 쓸 데는 많은 데 충당이 안 되는 걸 파산이라고 하거든요. 일본은 노인 중에 그런 파산이 20%래요. 근데 우리나라는 46%래요. 반이 노인빈곤이에요. 그런 것이 왜 생겼냐. 원인을 알고 보면 젊을 때 돈 안 번 게 아니에요. 열심히 벌어서 그걸 자식들에게 전부 다 준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맨 몸, 빈털터리가 된 거예요. 옛날식으로 자식을 교육시키고, 자식을 양육시키면 자식이 부모 봉양하는 건 당연한 거라. 추호도 의심도 안하고 다 쏟아 부었거든요. 다 쏟아 부었는데 돌아오는 건 한 푼도 없어, 맨 몸, 빈털터리밖에 더 되요. 그러니까 그걸 노인파산이라고 하고, 노인빈곤이라고 하고 그런 거예요. 한번 가면 안 돌아오는구나. 휴지 가져가고 사올게, 사오긴 뭘 사와요. 안사와요, 절대 안사와요. 그래가지고 중생들은 이렇게 망상 속에서 살아가거든요. 죽음이 없는 건데 맨날 죽을까봐 걱정하면서 살아요. 죽을까봐 걱정이 되니까 모두 소유하려고 하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소유가 필요가 없어요. 소유는 생존이다. 죽음자체가 없는 청정법신을 알면 생존이 필요가 없는데, 소유가 왜 필요가 있냐, 그걸 해탈이라고 해요. 이게 제불이에요. 제불은 적멸무주, 지혜광명. 적멸무주는 화엄경에서 설명하기를 허공과 같다고 하고, 지혜광명은 태양과 같다고 설명을 해요. 대자대비 광대서원을 이야기 하는데, 구름과 같다고 해요. 구름이 끼어 비가 내려야 산천초목이 자랄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리 설명해요, 그게 부처님의 세계고요. 일체보살은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만 해요, 다른 건 구하질 않아요. 부처님과 같은 지혜만 구하고, 또 아래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만 하지 다른 건 안 해요. 다른 건 다 생멸이라 무상하고 허망해서 구해봤자 다 사라져요. 그런데 사라지는 걸 알면서 구하는 걸 번뇌라고 해요. 거 이상하다말예요. 해봐야 오래 가는 거 아니다, 없어지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요. 그걸 번뇌라고 해요. 번뇌가 뭐냐.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그게 번뇌예요. 안 되는 거 알아요. 옛날에 보면 <난 알아요!>란 노래가 있어요. 모르는 거 아녜요. 아는 소리를 자꾸 하니까 잔소리라고 하는 거예요. ‘엄아, 나 알거든.’ 그 다음에 하는 건 다 잔소리거든요. 그게 애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다 그런 거 해요. 안 되는 거 알면서 다 한다고요. 안하면 보살이게요. 근데 보살은 그것만 해. 없어질 거 구하지 않고, 그냥 오로지 상구보리, 위로는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구하고, 하와중생,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요것만 하는 게 보살이거든. 또 역대조사는 늘 평상심을 가지고 있어요. 평상심이란 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에 본심, 본래면목, 자성청정심이라고 하는데, 남자 여자가 갈라지기 이전의 본심, 그게 평상심이에요. 중생과 부처가 갈라지기 이전의 마음, 그 평상심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한다,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 대선지식은 뭐냐. 좌미진이(坐微塵裏)하야, 가는 티끌 속에 앉아서, 중생 속에서 아무 표시가 없는 거예요. 표시 없이 똑같이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작대법우作大法友라, 대법우가 된다. 법의 벗이 된다 이거예요. 이게 오나가나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모습으로 깨우침을 주는 게 법우거든요. 그게 선지식이거든요. 이런 분들은 구한다. 선지식을 만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진짜로 중요해요. 제 경우가 그런데, 강당에서 공부할 때 가끔 극락암에서 경봉스님께서 내려오시면 무서워서 가질 못했어요. 난 무서울 게 뭐 있어요. 평상에 앉아 계신데 쫓아가서 “한마디 묻겠습니다.” “뭐냐?” “기신론에 보면 진여(眞如)라는 말이 있는데,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강주스님께 물어봤더니, 그건 말로 안 되는 거래요. 근데 이 양반은 도인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대답하나 보려고 질문했지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거든요. 다 그래요, 학생들이라는 게. 물을 때는 자기가 아는 내용 묻거든요. 모르는 내용 절대 안 물어요. 그 때 기를 꽉 꺾어야 제자가 되는 거예요. 그 때 어버버하면 제자고 뭐고 다 날아가요. 근데 이 양반이 뭐라고 하냐면, “야야, 말 배우는 사람 되지 마라.” 그게 첫 번째 선지식에게 걸려든 거예요. 세상 못 듣던 말이에요. ‘말 배우는 사람 되지 마라.’ 처음 듣는 얘기에요. 그 다음에 또 물었더니, 두 번째는 “무는 근원이 뭐냐?” 이게 도대체가 접근이 불가능하네. 세 번째 내가 깨달았다고 한시를 지어갔어요. 그리고 보여드렸죠. “야야, 아니다, 아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왜 아닌지 몰랐어요. 그 다음에 한참 있다가 30년이 지나서 알았어요. 생각이 붙어있는 건 깨달음이 아니거든요. 깨달았다는 게송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붙어있으면 안되거든요. 그건 내 생각이지 청정법신에 들어간 게 아니거든요. 그 당시엔 모르는 거거든요. 알 수가 없어요. 모르는 걸 깨우쳐 주는 게 선지식이거든요. 그걸 대선지식이라고 해요. 이런 분들은 존중하고 예경하고 흠모하고 있으니까 이게 그쪽으로 회향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면, 노후준비를 해야 된다, 건강관리를 해야 된다, 전부 준비, 관리.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 조심해야한다고 하고, 오래 살라고 하고. 그래서 요새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웃음) ‘건강하세요, 오래 사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이게 전부, 건강관리, 노후준비, 전부가 삶의 문제인데요, 살아서 뭐 할 거예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건강을 관리하고, 무엇을 위해서 노후준비를 하는 거예요. 뭐 해봐야 100세 정도라고 한다면은 100세 살고 나서 남는 게 뭔데요. 왜 100년을 아쉬움 없이 살아야 하는데. 답이 없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건강관리나 노후준비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마음관리를 가르쳤어요.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건강은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노후를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죽음을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마음이 건강도 알고 생활도 알고 죽음도 아는데, 마음이 어둡다든지, 뭔가 잘못 되었다면, 전체가 다 잘못된 거예요. 비유로, <물로 청소를 하는데, 그 물이 더러우면 청소하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 마음이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마음이 혼탁하면 모든 것이 혼탁해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관리를 이야기하지 건강관리라든지 노후준비라든지 이런 걸 말을 안 하는 게 불교에요. 왜냐하면 그건 하지 말래도 더 잘하니까. 그래요. 그럼 마음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첫째는 자정기심(自淨其心), 그 마음을 맑혀라. 이것이 첫 번째 같아요. 마음을 자정을 해야 한다. 자정기심, 그 기자 마음 심자인데, <그>라는 것은 자기라는 뜻이에요. 자기 심, 자기마음을 스스로 맑혀라.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멈추고 환하게 비춰라. 조명하라. 멈추고 비춰라. 그냥 딱 환하게 비추기만 비추고 생각을 멈추는 거예요. 똑같아요, 이 마음 공부하는 방법이. 비추고 멈춰라. 눈을 감는 게 아니라 눈을 딱 뜨고 저 나무를 보되 저 나무에 대한 생각은 안 해요, 멈춰. 그리고 마음 있는 그대로 환하게 비춰. 이것을 명명이라고 해요, 밝을 명자 2번 쓰는 明明, 명명히 하고, 멈춘다. 불생이해(不生異解), 다른 견해는 전혀 내지 않는다. 그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요, 자정기심이에요. 그 마음을 자정, 스스로 자자, 맑힐 정자, 스스로 맑힌다. 금강경에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야기해요. 자기 마음을 항복시켜라. 무슨 마음을 항복시키느냐. 쓸데없이 근심걱정하는 것을 쏵 항복시켜라, 없애버려라, 항복시키는 건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화엄경에서는 선용기심(善用起心)이라고 자기 청성심을 잘 써라 는 거예요. 그걸 보살이라고 해요. 마음 잘 쓰면 보살이에요. 지혜롭게 쓰고 복되게 쓰고. 번뇌망상을 쏵 항복시키면 보살이에요. 또 자기의 혼탁한 마음을 쏵 맑히면 그게 불자입니다. 이렇게 마음관리를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데, 요즘 건강관리 등 관리가 그렇게 많아요. 사회관리, 요즘은 애인이 많아 애인관리도 한다고. 1주일에 한번 전화할 사람, 한 달에 한번 할 사람, 매일 해야 할 사람, 이거 하다가 세상 다가는 거예요. 꿈같이 지나가버리는 거지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마음관리인데 이걸 우리가 못하잖아. 마음이 잘 못 되면 친구가 어디 있고, 죽음이 어디 있고, 다 잘못되는 거예요. 자정기심하라, 항복기심하라, 선용기심하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자기마음을 스스로 맑혀라. 쓸데없는 번뇌망상을 스스로 항복시켜라. 청정심을 잘 써라. 그러면 그게 기도고, 그게 성취고, 그게 해탈이고, 그게 성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