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자비도량참법기도] 2월 18일-21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2021-02-21

       반갑습니다. 코로나가 참 질기긴 해요. 벌써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넘어가는 거 같아요. 본격적으로 코로나가 시작된 건 작년 2월인데, 지금 2월이니까 1년이 된 거죠. 일상이 되어버린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게 참 위대하다.’라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신행적인 측면에서 늘 많은 불자가 함께하던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 지금은 몇 분의 신도분들과 함께, 또 유튜브로 -아마 지금 제 모습을 보고 계실 거라고 아는데요,- 시청하시는 분들도 반갑습니다. 진관사 유튜브 채널이 있더라고요. 지금 유튜브 채널을 보시는 분들은, -요즘 유튜브를 보면 그러더라고요, <좋아요>를 눌러야 된다고, 좋아요. 구독도 눌러야 되지만,- <좋아요>를 눌러야 된답니다. 제가 이렇게 회향 덕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좋아요>가 많으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없지요. 그래서 <좋아요>를 꼭 눌러주시고. 유튜브 환경이 됐어요. 그게 영상으로, 유튜브로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이 되어서 멀리서도 함께 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이것도 코로나로 인한 변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대응으로 각국의 좋은 평가들을 받고 있죠. 전문가들은 눈 떠보니 선진국이더라.”라는 표현도 합니다. 그만큼 방역도 잘하고 또 우리 시민들의 <참여 방역>이라는 차원에서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의 그런 자주적인, 주체적인 그런 방역을 잘하고 있죠. 우리 불자들은 더더욱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안 와, 절에 안 와요. 딴 데는 너무 와서 난리인데, 우리는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우리 의식들이 그만큼 선진화돼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새롭게 이야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서로 믿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신뢰자본>이라는 말로 씁니다. 국가나 정부, 그리고 시민사회단체가 이 신뢰라는 게 그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자본이다.”라는 거예요, 자본. 우리나라는 그 신뢰자본이 알고 보니까 우리 일상에서 많이 작동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신뢰라는 게. 자본이란 말은 말 그대로 재산이잖아요. 그런데 신뢰라는 것이 재산이 될 수 있다는 거. 그런데 그 재산이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그 작동이 우리 서민들의 삶 속에서만 작동을 해요. 서민들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신뢰자본을 사회전반으로, 아주 잘 사는 1%부터 중산층인 99%까지 전부 작동을 해야만 그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작동하는 그런 사회로 평가받을 수가 있고,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갈 수 있는 거거든요. 신뢰자본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전문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기차 타러 가서 서울역에 가보면 개찰구에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또 우리나라는 커피숍에 가면, 요즘 젊은이들이 노트북을 가지고 다녀요. 그런데 노트북을 놓고 화장실을 가요. 이건 외국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외국 여행을 다녀보면 다 없어집니다, 노트북. 또 한 예로는 택배 같은 거. 택배기사가 집 앞에 놓고 가요.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신뢰라고 하는 게 그만큼 자본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신뢰자본이라는 게 서민들의 삶 속에서만 작동을 해요. 이게 올라가서 조금 많이 배우고 조금 많이 갖고 많은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똑같이 작동을 해야 된다, 앞으로는.

       그런데 이것이 신뢰자본이라는 문제를 개인의 삶 속으로, 우리 불자들의 삶 속으로 가져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게 자본이 된다는 거잖아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내 삶에 재산이 된다는 거죠. 내가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고,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고, 부처님 말씀을 증득하는 게 재산이 된다는 거예요, 신뢰자본 측면에서 보면. 근데 그게 잘 안 느껴져요. 신뢰자본이라고 하는 사회자본도 지금 얘기하니까 그런 게 있구나 하지,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체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신뢰라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얼마큼 넉넉하게, 얼마큼 잘 살게 하는지 그러한 이야기를 조금 할까 합니다.

 

       오늘은 자비도량참법 회향 날이죠. 신뢰라고 하는 것, 믿음이라고 하는 것, 믿음 자본, 믿음자산이라고 하는 것, 믿음자산은 자비도량과 직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비도량참법 회향 법문을 말씀을 하셔서 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려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특히 진관사에 나오는 불자분들은 삶을 되게 열심히 살아요. 다른 절에 가도 똑같은 얘길 합니다마는, 그래도 진관사 불자분들은 굉장히 열심히 살고, 스님들의 이야기도 잘 따라 하고, 또 부처님 말씀도 잘 믿고, 그래서 열심히 살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하죠. 살다 보면 장애가 생기거든요. 장애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왜 장애가 생길까. 그 장애라는 것을 조금 덜어내기 위해서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거든요. 자비도량참법은 더 쉬운 말로 하면 내 삶에서 장애 덜어내기입니다. 쉬운 말로 장애 지우기”, 이렇게 표현해도 되겠죠.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장애가 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장애란 걸림이란 건데, 내가 얼마 전 읽었던 책 중에 재미난 비유가 하나 있더라고요.

 

어떤 나무꾼이 땔감이 다 돼서 땔감을 구하려고 산을 갔대요. 그래서 봄이 이제 오니까 겨울에 쓰러진 나무도 있고, 잔가지도 많고 그러니까 이것저것 나무를 다 베어서 단을 묶어서 끌고 내려오는데, 여기에 걸리고 저 가지에 걸리고 저 나무에 걸리고 하는 거예요. 왜 걸리겠어요? 맘껏 품에 한 아름 안고 내려오니까 걸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어느 수행자가 지켜보고 있다가, “왜 이렇게 진땀을 흘리면서 고생을 하나?” 하면서 나무꾼한테 가지치기를 해라. 그러면 이 나무를 가지고 내려가는데 크게 어렵지 않을 테니 가지치기를 하고 내려가라.”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나무꾼이 돌아보니까 나뭇가지가 많아가지고 여기저기 걸려 있는 거예요. 근데 보니까 그 나뭇가지도 부러질뿐더러, 억지로 힘으로 끌고 내려오니까 나무 잔가지도 다 훼손될뿐더러 잘 자라고 있는 나무도 다 생채기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수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뭇가지를 다 정리해 가지고, 굵은 것 토막을 내서 정리해서 내려오니까 아주 수월하게 내려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절에 오면 늘 힘들다고 얘길 해요. 편해서, 축하할 일로, 기쁜 일로 절에 오는 것보다는 힘들어서 많이 와요. ‘왜 힘든가얘길 들어보면, 그 나무꾼이에요. 이생에 와서 열심히 산다는 게 그 나무꾼이 좋은 땔감을 구하려고 이것저것 품 안에 끌어안은 것처럼 끌어안고 있어요. 그러니 내려가면서 -인생은 내리막길이니까- 내려가면서 힘든 거예요. 힘든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요. 그렇게 삶을 살고 있거든요. ‘이제는 마음을 가지치기를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게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얻어지는 거예요. 저도 소싯적에는 늘 자비도량참법을 했어요. 1년을 열어가면서, 열 때는. 근데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하고 나면 확실히 덜어집니다. 마음이 정리가 돼요. 봄이 되면 새싹들이 다 올라오지요. 그러면 과수농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농사를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세요? 과수 농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지치기입니다. 웃자란 가지나 겨울 묵은 가지를 다 잘라요. 그래서 처음에는 볼품이 없어요. 나무가 앙상해지죠. 근데 왜 가지치기를 하느냐. 좀 더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해서예요. 또 농번기가 되면, 4월이 되면, 한 달 뒤 정도 되면, 3월 말이나 4월 초가 되면 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합니다. 여기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다 경험하셨을 거예요. 갈아엎어요. 밭도 갈아엎고 논도 갈아엎고. 왜 갈아엎어요? 풍년을 기약하기 위해서. 갈아엎어야 땅 힘이 좋아지거든요. 자비도량참법기도라는 것은 내 마음의 잔가지를 치는 것이고,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한 잔가지를 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풍년을 기약하기 위해서 마음을 갈아엎는 시도가 자비도량참법기도입니다. 농부가 가지를 치지 않고, 논을 갈아엎지 않고 맛 좋은 과실과 풍년을 기약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정초에 자비도량참법기도를 하면서 잔가지도 칠뿐더러 용기 있는 분들은 마음밭을 확 갈아엎어 버려요. 열장으로 되어있는 자비도량참법이 앞의 1,2,3장은 가지치기라고 보면, 6,7,8장은 다 갈아엎는 거예요. 그러면 9,10장 회향이 나오죠. 내가 느끼는 육근에 대한 것, 인식에 대한 것, 전생에 대한 것, 현생에 대한 것, 다 갈아엎는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이란.

       갈아엎는데 왜 갈아엎느냐. 왜 잔가지를 치고, 왜 내 마음을 갈아엎어야 되느냐. 왜냐하면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에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부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이웃을 위해서, 더 광의적으론 그렇게 하는 거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은 자비도량을 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건립하겠어요? 내 마음. 우리 마음 도량에, 우리 마음 정원이라고 그러잖아요? 마음정원 그러는데, 마음 정원을 다른 말로 하면 도량이잖아요. 내 마음에다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예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아만심(我慢心)이나 그런 걸로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를 사랑하게 돼요. 우리는 진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거든요. 안으로는 나를 생각할 때, 아까 믿음 얘기했습니다마는, 안으로는 우리는, 제가 늘 법문 때마다 얘기하는 것 중에 법의 생명이란 말을 많이 하거든요, 법의 생명. 법의 생명을 새롭게 부처님을 만나면서 법의 생명이 태어났다. 법장(法藏)이라고 해요. 우리는 안에 법장, 법의 생명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분들이 안에 법장이 있어요. 법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예요, . 그래서 우리가 천수경할 때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도 하지 않습니까. 그 법장을 다른 말로 하면 여래장(如來藏)이거든요. 여래를 우리가 간직하고 있어요. 여래의 성품을. 그래서 진관사에서도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얘기하죠. 여러분은 법장, 법의 존재고, 여래장, 여래의 존재다. 우리말로 하면 <본래 붓다>. 여러분은 본래 붓다예요. 안으로는 이미 간직, 가지고 있는 거죠.

       바깥으로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여러분은 정말 특별한 존재예요. 각별한 존재.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안으로 밖으로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삽니다. 이미 나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예요. 근데 그걸 자꾸 확인하려고 해요. 받아내려고 하죠. 그래서 어떤 노래, 이웃 종교의 노래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도 있어요. 그건 우리 불교 노래 아니거든요. 그 노래에서 사랑받기 위해, 우리는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이전에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런데 그걸 확인하지 못하니까 누군가에게 확인받기를 원해요. 사랑받기를 원해요. 안되면 어떻게 얘기해요? 변했다고 하고, 짜증 내고 그러는 거예요. 남편한테, 부인한테,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자식한테도 이미 나는 특별한 존재이거든요. 근데 이걸 확인을 하니까 멀어지는 거예요. 이제는 받으려 하지 말자. 내가 이미 특별한 존재이고, 이미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임을 믿고 나 스스로가 확인하고 느끼자. 진관사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분들, 초파일에 한 번 오는 신도들, 정초에 한 번 오는 신도들. 진관사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신도들은 진관사에 특별한 신도들이잖아요. VIP잖아요. 아니 VVIP. 여러분이 왔을 때 부처님이 싫다고 합니까, 짜증을 냅니까, 인상을 씁니까. 또 오면 스님들이 많이 계시니까 인연된 모든 분들이 다 차를 드리든지, 선물을 드리든지, 안되면 공양간에서 밥 한 끼라도 대접을 하잖아요. 여러분이 이미 진관사의 VIP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특별한 존재라는 것.

       <안으로는 본래 붓다이며 또 밖으로는 특별한 존재다.>라는 것을 알아가는 게 자비도량참법이에요.

       자비도량참법은 말 그대로 참회하는 거잖아요. 참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것으로써 내가 그러한 붓다의 존재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지, ‘내가 참회합니다.’라는 것으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거예요. 참회를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건 이웃 종교에 가깝지, 우리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참회는 잘못했습니다.’ 인정하면서 그 중생의 때를 하나씩 벗겨가면서 드러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본래 붓다라는 거죠. 그리고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 그게 불교의 원래 참회의 의미에요. 우리는 하면 할수록,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할수록 더 영롱하게, 더 찬란하게 자기 자신이 빛나겠죠. 자비도량참법에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저는 하나 더 얹어서 부탁을 드린다면, 건강해야 돼요. 건강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오래 얼굴 보면서 건강하게 사는 게 제일 복 많은 거예요. 요즘에는 그렇지 못해요. 오래는 사는 데 병들이 많아요. 다병시대에요. 제가 여기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건강관리를 잘하셔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현상적인 거에 매여서 안으로 쌓는 것만 하다 보니까 건강들이 급격하게 나빠져요. 요즘 30대에 심장정지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30대 심정지로 제가 49재를 세 건을 지냈습니다. 30. 30대 때는 진짜 건강할 때잖아요. 뭔가 의욕을 갖고 열심히 뭔가를 해낼 때 요즘 사람들이 비실거려요. 왜 그러느냐.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건강하지 못 하느냐 하면, 장이 안 좋아. 그리고 머리가 안 좋아. 뇌가 안 좋아요.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거든요. 장청뇌청(腸淸腦淸)이란 말이 있더라고요. 뇌과학이란 책을 읽다 보니까 장이 청정해야 뇌가 청정하다고 해요. 잘 비워야 뇌가 청정해지는데, 뇌가 청정해지는 거 자체가 요즘 기억력 상실이나 우울증이나 치매가 빨리 오잖아요. 그게 좀 늦게 오게 하려면 뭘 해야 하냐면 유산소운동을 하라고 해요. 걷는 것, 많이 걷는 것. 오늘도 보니까 등산가는 분이 많던데 잘 걸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등산 갔다 내려와서 막걸리에 파전에, 나아가 23차 이렇게 가버리면 안 걷느니만 못한 거예요. 잘 걷고 청정하게 쉬어야 합니다. 근데 운동하라니까 산에 간다고 그래. 지금 이야기 듣는 사람들 중에 양심에 찔리는 사람 많을 거예요. 산에 올라간다 해놓고 잘 가요. 잘 올라갔다 내려와서 땀을 쫙 빼고 몸이 청정해졌어요. 맑아졌어요. 기운이 돌아가. 기운이 돌아가 좀 살만하니까, 맑아지니까 그다음에 막걸리를 마셔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이게 계속 반복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진짜 운동을 하라는 거예요. 근데 그 운동 중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 유산소 운동 중 제일 좋은 게 뭐예요? 절이에요. 절 하는 거. 근데 자비도량참법에는 절이 굉장히 많죠. 1,080배를 하는 거잖아요. 각 장마다 지심정례하면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잖아요. 그게 부처님 명호 밑에 3, 7, 21번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절을 하잖아요. 그게 제일 좋은 유산소 운동입니다. 그렇게 자비도량참법처럼 절을 하게 되면 유산소운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 장이 청정해지죠. 장이 청정해지면 어떻게 되냐 하면 뇌가 청정해져요. 우리 기억을 관장하는 게 뇌에 해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기억력은 연결해 주는 거거든요. 근데 여기서 아픈 곳에 치유하는 줄기세포를 만들어내요. 그래서 절을 많이 하고 몸이 건강해지면 자기치유력이 생기는 거예요. 물론 관절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 억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정말로 관절이 안 좋은 분들은 의사에게 가야 되고 약사에게 약을 처방해 드셔야 합니다. 근데 스님이 얘기했다고 죽어라 해 가지고 그나마 있는 관절도 망가져 버리면 그건 책임을 질 수가 없어요. 보험도 안 돼요. 그러니까 무릎이 안 좋은 분들은 앉으신 상태에서 지심 정례만 하면 됩니다. 건강까지 하나 더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본래 붓다라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나는 특별한 존재야, 해서 건강을 잘 챙기는, 그게 자비도량참법을 잘 하게 되면 종합적으로 얻어지는 세트예요. 종합선물세트처럼 알게 모르게 자기가 취득되는 건데, 그래도 자꾸 어려움이 생겨요. 장애가 생겨, 힘들어. 왜 힘드냐하면 다른 게 없어요. 3가지에요. 하나는 남들과 비교를 해요. 비교를 하다 보니까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빠지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비교를 많이 하고 사느냐. 물론 그 비교라는 거 자체를 통해서 문화가 발전하기도 하고, 어떤 집단이나 단체가 성장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그 비교를 꼭 나보다 난 사람들에게 하잖아요. 특히 자녀들에게 이 비교를 많이 합니다. “누구는 어떻던데.” 이거 하지 말아야 해요. 비교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힘들어 하고, 우월감에 빠져 자기가 조금 가졌다고, 조금 낫다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상처를 주고 하는 것들이 비교 때문에, 잘못된 비교 때문에. 두 번째 우리가 힘든 것 중의 하나는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에요. 사실은 우리가 삶에서 그 불안 때문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건데, 정말 용기 있게 뭔가를 할 때 주저주저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가 지나간 과거로 인한 후회잖아요. 후회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고 하는 건데, 결국은 이 세 가지, 비교하지 않기, 또 후회하지 않기, 걱정하지 않기, 이 세 가지만 잘 관리해도 삶이 굉장히 편안해질 수 있어요.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또 이런 비교로 인해 가지고 자기 삶을 자꾸 갉아 먹어요.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제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몰라요. 그러한 마음들을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생깁니다. 정말로 생겨요. 자비도량참법을 하면 그 공덕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알게 모르게 물들었던 그런 마음들을 잘라내고 갈아엎고 하는 힘이 생기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런 삶 자체가 보살의 삶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 보살을 그냥 보살이 아니라 불교식으로 말하면 시민보살이에요. 많이 들어보셨어요? 서울시민이시잖아요. 시민. 서울시민인데 이제 내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그 마음을 나누고 살아가는 사람을 시민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비도량참법을 죽 하면, 열심히 하면 본래 붓다인 것을 확인해서 시민보살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자비도량참법의 힘이다라는 거예요. <난 본래 붓다이며 시민 보살이다.><나는 본래 붓다이며 시민보살로 살아가겠습니다.>고 하는 게 자비도량참법의 공덕이다.

       아무쪼록 진관사에 오시는 모든 사부대중, 남녀노소, 또 우바새, 우바이들이 진관사와 함께, 진관사 부처님과 함께 늘 행복하고 건강한 그러한 불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올리면서 오늘 법문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