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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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7일 국행수륙재 3재 법문
본각스님 2026-10-01
네, 진관사 수륙대재 함께해 주신 사부대중, 모든 스님, 불자님들께 축하의 말씀 올리고, 또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편안한 마음, 편안한 그러한 자세로 이 법사의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행사를 아침부터 일찍 봉행해서, 또 우리 거룩하신 어산어장(魚山魚丈) 스님을 경하(慶賀)해 드리는 그런 의식이 이어지고, 또 도량청(道場請)·삼보청(三寶請), 모든 의식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사가 말씀을 드릴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수륙재 봉행에서 저에게 법문 주제를 주셨습니다. 굉장히 특별한 주제셔요. “큰 사람은 작게 하고, 작은 사람은 크게 하는 법” 뭔가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신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제 주지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무엇을 담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주지 스님이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이제 저는 인지를 해서, 주지 스님이 담고자 하시는 그 뜻에 더 많은 걸 오늘 담아드려야 이 법사가 이 거룩한 법회에 온 그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한 2주를 제가 이 주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괜찮으시죠? 2주 동안을, 2주면 거의 보름인데, 진관사 수륙대재를 생각하고 앉으나 서나 ‘어떻게 크게 하지, 어떻게 적게 하지’ 그러고 다녔으면 그 자체라도 거룩하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여기 많은 어르신도 계시고, 이 비구니 중에 제가 좀 어른같이 대접을 받는데, 가장 중심은 우리 비구니 회장 스님이세요. 그래서 비구니 회장 스님이시고, 또 우리 진관사로 보면 회주스님이 다 제일 높으시고 — 또 네, 회주스님이 높으시다니까 웃으셔요, 그렇게 그렇게 인기가 있으신가 봐요. 그럼 우리 주지 스님도 가볼까요? 우리 회주스님, 주지 스님 박수 쳐주세요. 그리고 오늘 이제 대만 어른 스님을 모시고 왔어요. 우연이면 우연입니다. 그래 그랬더니, 제가 "역시 진관사는 진관사다." 우리가 뭐 무슨 행사에 가면 영어 나오는 것쯤은 그냥 우리 한국 보통이잖아요. 근데 오늘 중국어까지 막 나와요. 그래서 ‘역시 우리 진관사는 국제적인 사찰이다’ 그런 감동, 감사의 마음을 가졌고요. 그래서 정말 이러한 거룩한 아까 처음 시작하실 때, 저는 잠시 ‘여기가 천상이로구나’ 그런 생각해 보셨어요? 우리 얼마나 일이 많으셔요, 특히 수험생을 둔 우리 부모님 지금 어떻게 사셔요? 근데 오늘부터, 우리 아이가 뭐 점수가 모자랄 거다, 어디 탁탁 집어 치우세요. 치우실 수 있죠, 걔는 자기 길을 갈 거고, 잘 할 거고. 이 세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지 않으면 전부 근심 덩어리예요. 내가 부처님께 이렇게 이 거룩한 자리에서 육법공양(六法供養)을 올렸는데 뭐 "붙을 거다, 떨어질 거다" 이거 아니에요. 걔가 자기 길을 갈 거다. 이 세상에서 자기 길을 가는 것처럼 거룩한 게 없습니다. 얼른 보면 뭐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멀리 보면 — 우리 어장스님 5살, 제가 3살 때 이렇게 거룩한 사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우리 부모님과 그 지도자는 멀리 보시는 거, 이것이 이제 굉장히 거룩한 일입니다. 아셨죠? 큰 사람 — 마음이 큰 사람 자, 질문에 들어갑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 모두가 “아, 난 커” 지금 크죠? 뭐가 크세요? “마음이” 마음 크신 분 손 들어보시라니까 막 손을 드셔요. 역시 우리 진관사 불자, 여기 이제 막 여러 사찰 불자님이 섞였어요. 사실 금륜사 불자님들은 지금 좀 속은 기분이실 거예요. 오늘 공개적으로 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은 그냥 또 대만 손님도 모시고 가는데, 내 손님들까지 모시고 가면 내가 뭔가 밥만 축낼까 봐 우리 주지 스님이나 진관사는 그렇지 않지만, 괜히 그냥 좀 죄송스러워서 그래서 그냥 살짝 왔으니, 지금 이제 대타가, 대타가 이제 지금 진땀 빼고 계실 건데 어쨌든 뭐 이것도 불사고 저것도 불사고, 여기에 우리 마음이 크다고 다 손을 드시니까 역시 진관사 불자님, 또 우리 불자님들은 참 마음이 거룩하시구나. 근데 진짜 마음이 크세요? 그다음에 그냥 마음 큰 줄 알았어요. 그다음에 뭐가 클까요? 뭐가 크세요? 근데 여기서 다 답을 못합니다. 우리 주지 스님이 11시까지 하라고 하셨나 모르겠어요. 저는 왜 밤낮 이렇게 시간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이 클까’ 화두를 드립니다. 생각해 보실 수 있죠. 그래서 스님이, 좋은 것이 크면 얼마나 좋을까. 스님이 보니까 우리 수험생 부모님들은 번뇌 망상, 자녀 걱정하는 망상이 클 것 같고, 뒤에 계신 분은 남하고 비교해 갖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마음이) 크실 것 같고, 그 뒤에 계신 분은 연세가 좀 계신 것 같은데 뭐 서서 계셔서 빨리 끝내야 되겠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아파, 왜 나만 이래’ 그런 게 크실 것 같고, 그게 다 부정적인 근거지요. 그다음에 정말 지금 말씀한 대로 ‘나는 마음이 커’ 오늘 손 드신 거사님도 계셔요. 마음 좁게 쓰면 제가 쫓아다니면서, 그 거룩한 법당에서 “마음 크다” 고 손 들어 놓으시고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제가 그러고 다닐지 몰라요. 그래서 내가 정말 마음이 참 크다 하면은, 오늘부터 크게 쓰셔야 돼요. 그렇게 하실 수 있겠죠. 우리가 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이들 걱정, 그 걱정을 다 내려놓고, 오늘 이후로는 "우리 아이는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거기에 우리 부모는, 어머니 아버지는 잘 걸어가도록 오직 기도할 뿐이다. 그래 제가 아까 오면서도, 여기 나한전이 계셔요. 대웅전에 서서 삼배하고 나한전에 가서 꼭 기도를 할 때는 거기서 세 살 때부터 절해 온 절을, 일생을, “나는 네가 잘 되기를 나한전에서 기도했다.” 이게 우리 은사 스님 말씀이에요. 그래서 제가 일생, 나한전에 제가 큰절도 거기 가서 — 나한전이 있으셔요. 16나한이 계신 나한전을 제가 그냥 못 지나가요. 그 어른의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고, 그래서 너가 뭐 법사가 되라, 뭐가 되라가 아니라 너가 잘 되기를 일생을 기도했다. 부모님은 그 자리이셔요. 일생 자기 길을 잘 걸어가도록. 뒤에 계신 분들이 다 부모님이세요. 아셨죠? 우리 스님들은 모든 중생의 어머니이시고 아버지셔요. 오늘 진관사는 정말 비구니 스님이 그냥 왕초처럼 다 모여 앉아 계셔요. 아까 들어오는데 우리 비구 스님 한 분이 거룩하게 밖에 계셔요. 그래서 ‘오늘은 비구니들한테 자리를 다 양보해 주셨구나.’ 그래서 우리 비구 스님이 밖에 계시겠죠, 또 마음이 크신 거예요. 비구 스님이 왕인데, 오늘은 자리 비켜놓고 저기서 "어서 들어가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크고 넓은 것은 내 마음부터 넓고 크게 하고 — 그 마음에 까딱 잘못하면 미움과 욕심이 채워져요. 6.25와 절 마당 — 상이군인 이야기 제가 축사에서도 말씀드렸지만, 6.25 동란 지나고 무엇이 대한민국에 남았냐. 저희가 어렸을 때, 저래 있으면 상이군인(傷痍軍人)아시나, 요즘 그런 단어도 없어졌어요. 전장에 가서 몸이 잘리고 다치고, 국가가 그걸 보호하지 못하니까 그냥 지팡이 짚고 다니면서 “어디 가야 밥을 주냐” 하면, 그때는 절에 가야 먹을 게 있었어요. 그나마 모두가 가난한데 어디 가서 밥을 먹겠어요? 불자들은 그때 안 살아보셨을지 모르지만, 저희는 그 현장을 봤습니다. 그러면은 절에 가면 또 거지 되시는 분도, 몸이 상한 상이군인도, 갈 데는 절밖에 없어. 그다음에 이제 우리나라가 이제 점차 잘 돼 가면서 복지도 되고, 학교도 생기고, 병원도 됐지만, 그런 거 다 만들어지기 전에는 절 마당밖에 없었어요.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그게 저기 6.25 지나고 60년대 초반, 그게 절이에요. 그리고 저희, 제가 일생 잘 되기를 기도하시는 은사 스님은, 아침이면 죽을 끓이셔, 밥은 다 줄 수 없으니까 그러면 대문을 열어놓고, 이건 뭐 그대로 현실이에요. 그 사제 스님이 저한테 말씀했어요. “본각 스님, 좀 뻑뻑한 죽 좀 먹자”고. “스님, 이제 그만 문 닫고 뻑뻑한 죽 하시죠” 하면 들은 척도 안 하시네. “또 문 열어봐라.” 또 이제 문을 열어서, 닫아놓으면 이제 그만 오게 하려고. “문 열어놔라” 그러면 또 가서, 그래서 한 8시쯤 되면 이제 사람들이 안 오면, 그래서 보고서는 “오늘 여기 밥 많이 하셨어요?” 모자라면 큰일이잖아, 그러면 그때 스님이 “모자랄 것 같으면 물을 착착” (더 부으라고 하셨어요). 그럼 거기에 뭐가 들었냐 하면은, 우거지 우거지가 거룩한 음식입니다. 이제 우거지가 특별 음식이 되죠. 우거지하고 소금. 어렵게, 그땐 소금도 없었대요. 그거 하고 인천에 다꽝(단무지) 공장이 폭탄을 맞아서 다꽝이 튀어다녔대요. 그러면 다꽝 공장이 폭탄을 맞았고 다 도망갔으니까, 이런 다꽝만 우리 요즘은 단무지라고 그러죠. 그것만 있으니까 매일 가서 그걸 주워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썰어가지고 그 간이 맞는 거예요. 그리고 죽은 그냥 물만 더 부으면 돼. 그래서 그 마당에, 그 마당에 오신 분이 아무도 배고프지 않고 갔다. 이게 우리 대한민국의 그 60년대 정말 아픈 역사. 그리고 그 상이군인들이 아무도 국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니까, “뭐 달라, 뭐 달라” 하다 뜻대로 안 되면 화풀이를 스님들한테 하는 거예요. 그 화풀이를 다 받아준 것도 절집 마당이에요.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쓰여 있지 않는 역사를 그리고 그 무너진 절 기둥, 누가 다 고쳤어요? 우리 동희어장스님이 바로 세우셨어요. 국가가 그걸 세웠겠어요, 지금은 문화재청이 있어서 다 문화재 돈이 나오지만, 그때 뭐가 있었겠어요? 저희들이, 스승과 제자가 기둥을 세우고, 방바닥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재우고 이것이 50년대 말 60년대 한국. 그 은혜를 모르고 우리가 살아요.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역사를 알아주셔야 돼요. 그래서 오늘날 이 번영이 있구나. 그 우리 크다고 하신 분, 마음에 그러한 세월을 다 지나서, 오늘 우리가 그러면 종교를 떠나서, 국경을 떠나서 우리 대한민국의 불자님들은 큰 마음을 가지세요. 그 마음은 바다처럼, 바다처럼 더 넓게 가지세요. 반대로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 차느냐, 욕심 채우면 안 돼. 미움 채우면 안 되고, 원망하는 사람이 제일 못난 사람이에요. 그것도 부모님한테 “나 왜 낳아줬어?” 이러면 이건 갖다 버려야 돼요. 부모님처럼 은혜로운 존재가 없잖아요. 그래서 원망도, 거기에 드러나는 인색함도 치워버리고 그래서 우리 오늘 수륙대재에 참석하신 모든 불자님은 그 첫 답이 "마음이 크고 넓다" 하시니까 얼마나 정답인지 몰라. 거기다 까딱 잘못해서 엉뚱한 거 거기다 채우면은 우리는 망한다. 그래서 오늘 법사 스님 말씀대로, 정말 고귀한 것들 그럼 다 채우자. 그래서 그런 것이 큰 사람은 원래 크니까 더 키우면 돼요. 작은 사람 — 원력(願力) 그것이 작은 사람은 어떻게 해요? 여기 작은 분 손 들어보라 하실까 그러시면은 작은 분은 ‘아, 키워야 되겠구나.’ 그럼 반대로 작은 사람은 크게 하라 이랬는데, 지금 뭐가 적으세요? 여기 계신 분들 맞죠? 주제가‘작은 사람은 크게 하는데’, 뭐가 적으세요? 다 크세요, 크기만 하세요. 저는 이렇게 세상을 살면서 원력(願力)이라는 단어 아시나요? 내가 감당하기 어렵지만 ‘해야지, 해야지, 오늘 진관사에 가야지, 오늘 내가 이런 일을 해야지’ 참 그 원력을, 우리 젊은 스님들도 마찬가지 되세요. 편하게 살려면 아까 우리 저를 맞이한 스님께 “소임이 뭡니까?” 그러니까 “평민(平民)입니다.” 그러신 것 같아요.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아, 여기 평민도 계시군요.” “온 지 3개월밖에 안 돼서, 거룩한 소임을 하나도 얻지 못하고 그냥 평민입니다.” 그래서 그 “평민”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평민부터 시작하시면 돼요. 평민을 차별하는 곳도 아니고, 뭐 높은 분을 대접하는 곳도 아니에요. 여기는 천상세계 부처님 도량이니까 모두를 존중해요. 그래서 나는 그 평민 스님을 이름도 성도 몰라요. 평민 스님이 ‘먼 훗날 저와 같이 법사가 되어지이다.’ 이런 원력을 세웠어요. 우리 불자님들이 다 그런 원력으로 사시면, 작은 것을 크게 하는 건 원력밖에 없어요. 우리 불자님들 다 부자 되고 싶으시잖아요. 사실 돈이 좀 없지 않으세요? 돈이 없을 때 “내가 가난하다, 가난하다” 막 화풀이하고 원망하면 자꾸자꾸 가난해져. 딱 가난함을 딱 알아차리는 거야. “내가 가난하구나.” 저도 요즘 입버릇처럼 제가 가난해졌어요. 누가 저를 믿겠어요, 내가 가난하다는 걸.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할 짓은 다 하고 돌아다녀요. 그건 사실 가난한 것도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좀 가난한 이유가 다 있어요. 이래서 그래 다 있지만, 법문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그걸 밝혀요(밝히지 못해요). 아마 그거 다 밝히면 저 막 돈 주고 싶으실 거예요. 그런데 그건 이제 이렇게 또 법회에 와가지고 웃기만 해서 큰일 났네요. 그래서 내가 가난하다 그러면,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께 ‘부처님, 제가 이래이래 해서 가난해서 이런 걸 못해요’ 부처님께는 정확하게 말씀을 드려야 돼요. 괜히 그냥 돈 좀 있으면 어디 가서 엉뚱한 거 사면, 부처님이 ‘너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안 도와주지. 부처님은 또 그냥 눈감아주실지 모르지만, 신중작법(神衆作法) 하실 때는 이 불법을 지키는 화엄성중(華嚴聖衆)이 계시잖아요. 여기는 어디 계신가, 저기 아니신가. 화엄성중한테 이제 잘못 보이면 이거 큰일 납니다. 그러고 다 살펴요.‘너, 욕심 부리려고 돈이 없다 하는구나’ 이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우리 불자들은 아주 맑은 마음으로, ‘저는 돈이 있으면 이런 걸 하고 싶습니다. 가족도 좀 더 편안히, 아이들도 더 거룩하게, 우리 불사하시는 범패(梵唄) 스님께도 더 갖다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죠?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작은 것을 키워가는 것, 그건 원력이에요. 그래서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이 주제를 주실 때, ‘이거 법문하라고 이 주제를 준 건가, 도대체 뭘 하라고’ 그러고 다른 큰스님은 다 거룩해요, 저만 이런 거예요. 그래서 ‘나 평민이라고 차별하시나’ 많이 웃으세요. 근데 거기다 이런 우리 정답이 “저희들이 마음이 큽니다.” 이래서 너무 감사하고, 우리가 원력이 적으면 저는 스님은 이 불교가 참 거룩한 종교예요. 불교는 모든 종교의 근본 한 두 달 전부터, “불교는 모든 종교의 근본입니다.” 제가 그래요. AI가 대장경 다 읽고, AI가 성경 다 읽으니까 거의 말이 비슷하대요. 그러면은 불교가 시대별로 앞서잖아요, 우리가 근본인 거예요. 그래서 자신 있게, “불교가 근본입니다.” 우리 스님들도, 불교의 말씀이 불교의 근본이 뭐예요? 욕심 그리고 전쟁 지금 전쟁하고 있잖아요. 21세기에 이 지혜로운 인간이 전쟁을 하다니, 몇십만 명을 의도적으로 죽이다니, 이게 어디 인간이 할 짓이야. 불교는 그 전쟁이 없어요. 불교는 끝없는 자비심, 끝없는 지혜예요. 근데 그걸 못하는 거는 불교는 아니다. ‘누구, 어느 종교다’ 하면 큰일 나잖아요, 남 비판하면. 우리는 비판을 안 해. ‘불교는 아니다.’ 그리고 불교가 그 모든 종교의 근본이다. 그런 자부심 가지셔야죠. 자부심만 갖고 아무 실천이 없으면 그것도 또 허당인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허접하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 허접하게 살지 않는 게 뭐예요? 원력을 딱 세우고, 그 길로 ‘불교는 모든 종교의 근본이다’ 앞서 있고 그리고 전쟁, 이 대한민국이 지금 전쟁이 터지면 우리 그냥 다 깨져버려, 다시 시작해야,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에 지혜로워라, 자비로워라, 서로를 차별하지 말아라, 이게 부처님 말씀이에요. 그리고 나의 욕심과 모든 걸 자꾸 내려놓아라. 제가 요즘 다니면서 제일 잘하는 것이 ‘100년을 사실 겁니까, 천년을 사실 겁니까?’ 우리 진관사 불자님들은 한 150년 사세요. 요즘 100세 시대라 하니까, 근데 제대로 살지 못하면 벌써 힘들어요. 그러니까 150년을 사시려면 지금부터 잘 정신 차려서 건강도 지키고, 마음도 내 주위도 잘 정리해서, 지혜롭고 자비롭지 않으면 100년 사는 것도 그것도 볼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불자님들이 100년을 한정하고 ‘100년을 잘 살자’ 하는 원력을 세우시는 거예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힘은 나의 원력에서 시작이 된다, 아셨죠? 그러고 우리가 살면은, 그래서 우리는 다 원력이 작아, 그걸 자꾸자꾸 크게 하고 진관사 불자님들은 마음은 이미 커, 거기다 무엇을 채울까를 하시면 되겠죠. 화엄경 이세간품 — 열 가지 유희(遊戱) 그래서 이런 부탁을 드리면서요, 저는 화엄의 대가인 줄 아세요? 왜 안 웃으실까 하하, 화엄경을 한 40년 읽었어요. 그래서 뭐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제가 온 게 아니라, 화엄경에서 ‘무엇을 크게 하고 무엇을 작게 할까’ 말씀이 있을까 이렇게 찾으니까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잘 정신 차려 들어주세요. 제가 10분을 넘으면 쫓겨날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래요. 그러니까 시간은 더 안 주시니까, 11시 10분을 지나치면 쫓겨날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3월부터 지난 9월, 9월 초까지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을 새벽마다 방송으로 쭉 공부를 같이 해 드렸어요. 뭐 다시듣기 하시면 이제 또 제가 어쨌든 나타납니다. 해서 말씀드리는데, 거기에 이세간품이라는 건 우리가 쭉 앞에부터 화엄경을 해서, 이제 이 혼탁한 세상을 떠나서 저 입법계(入法界),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겠다, 이런 과정이에요. 세간을 떠나서 법계에 들어간다. 그럼 이 세간을 떠나려면 어떻게 해야 떠날 수 있느냐, 모든 부처님 말씀을 실천해야 돼요. 그래서 화엄경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거든요. 오늘부터 믿으시잖아요. 내가 이러한 큰 마음으로 작은 원력을 키우고, 불교는 모든 종교의 근본이고, 그 싸움을 그치는 것은 우리 모두 평민이야. 평민의 힘으로 지혜롭고 자비로우면 싸우지 않는다, 이 믿음. 아셨죠? 이 믿음이 흔들리면 불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건 누가 하느냐, 내 마음에서부터 한다 하는 믿음, 그게 신(信)이에요. 그리고 해(解)는 잘 아는 거예요. 우리 역사도 알고, 세계 역사도 알고, 요즘은 손바닥 안에서 다 공부하실 수 있잖아요. 엉뚱한 거 뒤다보고 다니시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딱 필요한 것을 보고 정확히 아는 거. 요즘은 거짓도 많고, 그래서 내가 지혜롭지 않으면 엉뚱한 거에 휘말려요. 그러니까 꼭 바른 것을 정확히 이렇게 아는 것 이거 아주 간절히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게 해(解)예요, 해석한다 해(解)자. 그다음에 세 번째가 행(行). 아무리 좋은 걸 알아도, 내가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무엇에 쓰겠느냐. 어제 그랬어요. 오늘 불자로서 한순간을 착하고 바르게 살지 않으면 미래에 뭘 기대할 거냐, 내가 오늘도 제대로 못 사는데 미래에 뭘 기대하실 거예요? 이게 정확한 행(行)이에요. 우리 불자님들은 그냥 막연하게 다음 생에 천당 가려나 천당 가봐도 집이 꽉 차서 별로 들어갈 데 없어요. 차라리 극락정토에 가면, 가서 집을 지으면 돼요. 요즘 뭐 완성된 집을 몇천이면 사더라고요. 제가 주지 스님도 저를, 여기 건물을 잘 짓지만, 저도 12달, 1년 12개월에 두 채를 지었어요. 그래서 뿌듯해가지고 왔더니, 여긴 다섯 채를 지어놨더라고. 아, 나는 세 채만 보였어요. 뒤에 극락전에서, ‘아, 나 두 채인데’ 알고 보니 세 채를 더 지으신 거예요. 그래서 ‘아, 내가 졌다.’ 그래서 극락정토는 국토(國土)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가서, 뭐 어느 회사 두 군데 세 군데서 저는 집 짓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지어놓은 집 중에 제일 제가 좋아하는 집이 컨테이너 집이에요. 그거 하나 갖다 떡 놓고 살면 되잖아요. 근데 요즘은 더 좋게 그러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가서 집 갖고 싸울 거 없이, 그냥 가서 주문하면 돼. 여기다 턱, 극락 자리 턱 붙잡고 그러고선 집 배달하라고, 그런 여유를 배우고 사는 것이 우리 불교예요. 그렇게 정확히 스님이 큰소리만 치고 집 한 채 안 사주고 이러면 이제 저도 할 말이 없는데, 어쨌든 그런 마음 그래서 오늘을 제대로 살아야 내일이 희망이 있다, 이게 행(行)이에요, 아셨죠?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한테 큰소리를 하시려면 잘 사시는 거예요. 모범으로 사시고, 아이들 힘든데 자꾸 소리만 지르면 어떻게 해요. 아이들이 너무 힘들면 가서 손 꼭 잡고, 맛있는 게 요즘 얼마나 많아요, 인스턴트만 사다 주지 말고 정말 몸에 좋은 거, ‘이게 몸에 좋다 카더라’ 이러고 부모님의 그 진실한 모습, 저는 제자 스님을 키울 때도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존중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말로 갖고 존중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노력해요. 이렇게 보이고, 이렇게 보이고, 그러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세간품에 이 세간이 혼탁하고, 이걸 딱 떠나려면 어떻게, 모든 바른 실천이 바로 서야 된다, 이 말씀, 이건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화엄경의 이세간품에 200가지 질문을 해요,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기 보현보살이 2천 가지로 답을 해줘. 하나의 질문에 10가지씩, 그래서 2천 행문(行門)이에요. 그러니까 난 그 경전을 읽으면서 너무 힘겨웠어요. 제대로 살려면 이 2천 가지를 실천하면 제대로 사는 거야. 거기 보면은 93번째 질문에 “어떤 것이 즐겁게 사는 겁니까?” 유희(遊戱)라는 단어가 나와요. 아이들 유희하죠, 뭐 하게 하고 유희는 한문인데, 그냥 즐겁게 노는 거, 오늘 우리 즐겁게 노는 거 아닐까요? 이 맑은 곳에 이 좋은 자리, 즐겁게 놀고 있어요, 그게 유희예요. 그래서 그 십종유희(十種遊戱)를 보여주시는데, 제가 그걸 다 오늘 법문 주제에 담고 싶었어요. 그래, 그게 뭐냐 하면은 아주 즐겁게 뭐든지, 우리 스님들 범패(梵唄)하고 어산(魚山)하고, 매일 즐겁게 노는 건데, 부처님, 우리 부처님 계시죠? 부처님이 계시고, 그 밑에 보살이 계시고, 성문·연각(聲聞·緣覺)아시나, 이제 공부 많이 하셔야 돼요. 저기 너무 우리, 학부형 아니 저 수험생 부모님이 얼마나 아직 젊으셔요, 여기만 자꾸 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그 유희는 즐겁게 노는 건데 부처님이 계시고, 그 밑에 보살이 계시고, 그 밑에 소승 성문·연각이 계셔요. 그러니까 부처님 몸에 성문·연각의 모습을 나타낸 게 유희예요. 우리가 어른들이 놀면서 아이 노릇하시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우리 건강하면서도 아픈 척 연극하시잖아요, 그게 유희인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처럼 거룩한 몸에 그냥 아이처럼, 저 아주 그냥, 아직 초등학교도 못 들어간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다, 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더 예를 들면은, 나는 돈이 많은데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어요. 거기서 나 돈 많다고 뽀득뽀득하면 안 되지. 아까 평민 스님 앞에서 “내가 난 큰 스님이야” 이러면 되겠어요? 나도 평민 스님처럼, “아, 평민 스님, 그거 참 좋네. 저기 진관사에는 평민 스님도 있구나” 이런 거예요, 같이 맞춰주는 게. 알아들으셨죠? 여래의 몸에 저 아래 수준인 성문·연각을 나타내는 것 이게 진정으로 즐겁게 사는 유희다, 아셨죠? 그다음에 이제 네 가지인데, 오늘은 10분이 넘어가 버렸어요. 그러면 5분만 더 쓰겠어요. 그다음에는 부처님이 다 깨달으셨어. 그래 성정각신(成正覺身)이 부처님이 6년 고행(苦行)에 더 깨달으신 거기에, 보살이 몸을 나타내는 거. 보살은 누구세요? 우리가 다 보살이에요. 보살은 보디사트바(bodhisattva), 위로는 부처님이 되려고 노력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편안하게 도우려고 하는 게 보살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미 이루셨지만, 부처님이 하시는 행(行)은 보살의 행을 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 주지 스님 뵈면, 그래 누구한테든지 겸손하고 주지 스님이 뭐가 부족하겠어요, 소리 꽉 치면 되는데 우리 불자님도 힘(?) 소리 안 치셔요? 나한테 와서도 그냥 그러시고, 모두에게, 그리고 어려운 일 다 하려고 노력. 주지 스님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 진관사 평민 스님까지 오늘 “평민” 소리를 평민 스님이 기가차겠네, 저렇게 평민을 잘 써먹을 줄 몰라. 평민 스님까지 다 공손한 거예요. 알아들으셨죠? 그게 정말 이 세상을 즐겁게 잘 사는 것이다. 괜히 그냥 으스대고 뻐기고 막 이게 유희가 아니에요. 부처님의 자리에서 가장 평민처럼 행동하는 것. 가장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마음에 자존심 상하지 않게 잘 도와줄 수 있는 것. 또 반대로 ‘난 지금 가진 거 없지만은 원력을 가지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저런 부처님이 되어야지’ 이런 것이 유희인 거야. 즐겁게 이 세상을 사는 거, 알아들으셨죠? 제가 이거를 알아듣게 하시려면 1시간은 더 해야 돼요. 하심(下心) — 경계 없는 세상 근데 이제 그렇게 안 되니까는 그래서 딱 두 가지, ‘아, 우리는 부처님이 됐어.’ 그렇지만 거기에 정체되거나 고정되지 않고, 부처님이 될수록 더 낮은 대로, 강물이 흘러서 바다에 가듯이 더 겸손하고 하심(下心)하고 근데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렇지만 부처님을 보니까 너무 거룩해, 오늘부터 난 부처님 되어야지, 부처님 되어야지’ 그러면은 큰 것과 작은 것의 경계가 무너져요. 불교는 경계가 무너져서 평등한 종교예요. 다 각자 잘났고, 잘났다는 게 나쁜 게 아니에요. 각자 자기의 자존, 자긍 이런 걸 갖고 계실 수 있죠. 내가 갖고 있는 그대로, 그렇다고 잘났다고 할 거 없잖아. 모든 사람에게 다 겸손하고 마음을 낮추는 걸 하심(下心)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무슨 싸움이 있고, 무슨 원망이 있고, 뭐가 불편이 있겠어요? 우리 오늘 스님도 불자님도 다 같이 경계를 무너뜨리고 대립의 세계잖아, 높고 낮고, 크고 작고, 있고 없고 이걸 다 평탄하게 하는 것이 누구 스님이에요? 평민 스님이에요. 오늘 우리 모두 진관사 평민 스님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하면 되겠죠?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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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0일 국행수륙재 2재 법문
종범스님 2026-09-20
津寬寺 丙午年國行水陸齋無遮大會 信心同參 先亡靈駕
진관사 병오년국행수륙재무차대비 신심동참 선망영가
現存生靈 菩薩行者 同證佛性壽命 同往佛刹淨土 祝願祝願
현존생령 보살행자 동증불성수명 동황불찰정토 축원축원
진관사 병오년 국행수륙재 무차대회에 진심으로 동참하시는 선망 영가(先亡靈駕)와 현존 생령(現存生靈), 함령(含靈)들, 일체 중생들, 또 보살행자가 동증불성수명(同證佛性壽命)하고 — 함께
불성의 수명을 증득하고 — 동왕불찰정토(同往佛刹淨土)하여 함께 불찰 정토에 가시기를 축원하고 축원하옵니다.
동증불성수명, 동왕불찰정토. 이것이 아주 궁극적인 발원이고 근본적인 발원이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많은 염원들은 다 여기에 포함돼요.
三世諸佛이 轉識成智하니 遠離二邊하고 住於中道로다
삼세제불이 전식성지하니 원리이변하고 주어중도로다
微塵十方이오 刹那遠劫이니 箇箇圓成이오 念念長照로다
미진십방이오 찰나원겁이니 개개원성이오 염념장조로다
오늘 법문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있고 일체 중생이 있는데, 삼세제불은 어째서 삼세제불이며 일체 중생은 어째서 일체 중생인가, 그
내용입니다.
일체 중생이 경험하는 것 중에 꿈속에서 알고 있는 몽식(夢識) — 꿈에서 보고 꿈에서 느끼는, 꿈 몽(夢) 자, 인식이라는 식(識) 자, 몽식이 있어요. 그런데 그 몽식은 꿈에서 딱 깨면 없어져요. 그럼 어디로 오느냐, 의식(意識)으로 돌아와요. 그래서 꿈꿀 때는 몽식, 꿈에서 깼을 때는 의식, 그게 중생이에요. 의식과 몽식으로 사는 게 중생이다.
그럼 삼세제불은 깨달았는데 뭘 깨달았느냐, 불성(佛性)을 깨달았어요. 아는
본성 — 그거는 마음이라고도 하고 지혜라고도 하는데 — 아는
본성 불성, 그 불성을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의식과 몽식이
각지(覺智)로 바뀌어요. 깨달은
지혜로 바뀐다고. 꿈에서 깨어나면 몽식이 의식이 되듯이, 의식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의식이 깨달은 지혜로 바뀌어요. 이걸 전식성지(轉識成智)라, 이렇게 얘기해요. 의식이
바뀌어서 — 바뀔 전(轉)
자 — 지혜를 이루었다, 전식성지.
그러니까 삼세제불은 각지로 살고 일체 중생은 의식으로 사는데, 의식으로 살면 일체 중생이고, 의식이 변해서 각지를 이루면 삼세제불이다. 그 법문이에요.
그러면 삼세제불이 지혜를 이루면 어떻게 되느냐, 원리이변(遠離二邊)하고 — 이변을
멀리 여의고. 이변은 두 이(二) 자, 가 변(邊) 자인데, 두 가지 분야, 두
분야. 변이라는 건 변방이라는 말인데 분야라는 소리야, 부분. 두 가지 부분을 멀리 여의어 버리고, 주어중도(住於中道)라, 중도에 머문다. 가운데 중(中) 자, 길 도(道) 자.
그러면 이변은 뭐고 중도는 뭐냐. 이변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生滅)이에요. 났다 죽고 죽었다 나고, 생변(生邊)·멸변(滅邊), 그게 이변이에요. 중도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게 그게 중도예요. 그래서 삼세제불은 생멸을 멀리 여의고 불생불멸에 머문다, 중도에 머문다.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불성 중도, 법성 중도, 진성 중도, 이거거든요.
비유로 말하면 이변·생멸은 파도와 같고
중도는 물과 같다. 파도가 아무리 생겼다 사라져도 항상 물이다. 거기에
머문다, 이 말이에요.
거기 중도에 머물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미진(微塵)이 시방(十方)이요. 중도에서 보면 가느다란 티끌이 세계가… 요 앞에 계신 분들 재미있으세요? 미진이 뭔지 아시겠어요? 한자로 가늘 미(微), 티끌
진(塵).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을 미진이라 그래요. 이 미진이 시방세계다. 이게 중도 세계예요. 생멸 세계에서 보면 미진은 아주 작은 거고 시방은 큰 거죠. 이거는
생멸 세계고, 중도 세계에서 보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는 티끌이 온 시방세계다. 이게 깨달은 경지예요.
또 그다음에 찰나(刹那)가 원겁(遠劫)이다. 아주 순간인 일찰나가 무량원겁이라, 한량없는 먼 세월이다. 생멸 세계에서 보면 찰나는 짧고 원겁은 아주 한없이 긴데, 중도에서
보면 찰나가 원겁이다, 원겁이 찰나다, 미진이 시방이다, 시방이 미진이다. 부처님이 여기에 머문다는 거예요. 무슨 소리인지… 이게 참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고 다 좋아요.
그래서 개개(箇箇)가 원성(圓成)이라. 생멸 세계에서 볼 때는 전체가 하나 있으면 거기에 부분적인 게 많이 속해서 전체와 부분이 다른데, 이 중도 세계에서 볼 때는 하나하나가 다 완전히 이룬 것이다. 개개가
원성이라, 둥글 원(圓) 자
이룰 성(成) 자. 이
둥글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뜻이에요. 작은 건 작은 것대로 완전하고, 큰
건 큰 것대로 완전하고, 보이는 건 보이는 것대로 완전하고,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것대로 완전해서, 개개가 다 원성이여.
전체적으로 보면 한 모임에 천 명이 모였다, 만
명이 모였다 하면 나는 천분의 일밖에 안 되고 만분의 일밖에 안 되는데, 이 중도에서 보면 그 하나하나가
전부 온갖 대중이요. 그래서 중도는 부분이 없고 변방이 없다. 그걸
눈으로 보는 게 깨달음이에요. 부분·변방이 없어요, 전부 온전한 것뿐이요.
이런 얘기는 모르고 들어도 다 약이 돼요. 그전에
큰스님 법문하실 때, "이 보약은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다."
이해됐어요? 그 보약 성분을 어떻게 다 알고 먹어요? 그런데
안 먹으면 몸에 안 좋지만, 먹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 법문을 듣는 게 중요한 거예요. 듣는 게 중요하지 아는 건 상관없어요. 듣기만 하면 다 지혜가 돼요.
그러니까 이 중도에서는 낱낱이 다 온전하게 이루어진 거다, 개개가 원성이다, 원만히 다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나도 원만하고 너도 원만하고 일체의 티끌 티끌이 다 원만하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라는 생각은 깨닫기 전에 의식으로 하는 생각이다. 지혜로 돌아가면 부분이 전체다.
또 염념(念念)이 장조(長照)라. 생각으로 보면 지금 생각은 지금 생각하고 조금 있으면 없어지고, 다음
생각은 그때 생각하고 또 없어지고 그러는데, 이 중도에서 보면 생각 생각 하나하나가 전부 다 무량겁으로
길이길이 비추는 생각이다. 한순간 생각을 떠나서 무량겁을 비추는 생각이 없다. 무량겁을 비추는 생각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생각이다. 그래서 염념이, 생각 생각이 — 길 장(長) 자, 비칠 조(照) 자 — 염념이 장조라. 이게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佛事何事오 諸佛行事이니 行行事事가 圓成圓滿이로다
불사하사오 제불행사이니 행행사사가 원성원만이로다
行行本處요 至至發處이니 塵塵物物이 實實明明이로다
행행본처요 지지발처이니 진진물물이 실실명명이로다
절에서는 불사(佛事)를 많이 하는데, 기도 불사도 하고 가람 불사도 하고 부처님 불사도
하고, 부처님 일을 불사라고 그러는데, 오늘은 여기 국행수륙재
불사, 온갖 불사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불사는 뭐냐, 제불행사(諸佛行事)다. 모든 부처님이
행하는 사업이다. 부처님이 하는 사업을 불사라고 한다, 이거요. 부처님은 사업을 하는데 불사를 해요. 그게 부처님 사업이에요. 그럼 부처님 사업은, 이 의식을 가진 중생들을 전부 깨달은 지혜로
바꾸는 사업이다.
그럼 그 사업의 성격이 뭐냐, 행행사사(行行事事)가 — 행동 하나하나
하는 것마다, 또 일 일마다, 그 하나하나가 다 원성원만(圓成圓滿)이라. 북 하나
딱 치면 거기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그게 원성이여. '나무' 하면 거기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어. 그게 원만이야. 걸음 한 걸음 뚝 내디디면 그게 원성원만이에요. 거기에 원만히 이루어지고, 그게 원만히 이루어진 거다. 원성원만이다. 이게 부처님 일이에요.
미진이 시방이요 찰나가 원겁이라, 이대로
하는 불사가 부처님 사업이거든요. 그러니까 절 한 번 딱 할 때 그게 원성·원만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게 원성이고 그게 원만이다. 오직 생각으로 모를 뿐이오. 생각으로 모를 뿐이오.
꿈을 꿀 때, 꿈꾸기 전 자기 본래 모습을
알 수가 없죠. 모른다고 본래 모습이 없는 거 아니에요. 꿈꿀
때 오직 모를 뿐이지. 그럼 꿈을 깨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본래 모습이 없던 게 생긴 게
아니에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에요. 몰랐을 때도 줄어든 게 없고, 알았을 때도 늘어난 게 없다. 그게 깨달음이에요. 부증불감.
그래서 행행(行行)이 본처(本處)요. 생각으로 움직이면 여기서 출발하면 출발지가 다르고 어디에 도달하면 목적지가 다른데, 이 깨달은 지혜로 중도에서 딱 움직이면 가는 곳마다, 어디를 가든지
본처라, 본래 처소에 있는 거다. 행행이 본처라. 또 지지(至至)가 발처(發處)라, 이르는 데마다
출발한 곳이다. 미진이 시방이니, 가는 티끌이 시방세계니, 가도 가도 본래의 처소요 이르러도 이르러도 출발한 곳이다.
그러니까 이게 생로병사로 근심 걱정하는 것은 다 꿈속의 일이에요. 꿈에서야 뭐, 꿈 다 꾸잖아요. 그러니
꿈 깨고 나면 없어. 지금 이 순간이, 전부 깨닫고 나면
꿈이여. 그런데 깨닫기 전에는 모르지, 꿈인 줄. 꿈꾸는 동안에는 절대 꿈인 줄 모르죠. 꿈을 깼을 때 꿈인 줄 알아요. 오직 모를 뿐이지, 꿈꾸기 전의 본래 사람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 진진물물(塵塵物物)이 실실명명(實實明明)이라. 티끌 티끌 물건 물건이 진실하고 진실하고 분명하고 분명하다. 이것도
개개 원성의 중도 실상이요, 낱낱이 다 원만히 이루어진 중도 실상이다.
저것도 개개 원성 중도 실상이고, 나도 개개 원성 중도 실상이요, 너도 개개 원성 중도 실상이다. 하나도 덜어낼 것도 없고 하나도
더 보탤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근심 걱정을 하느냐. 오직 못
깨달아서, 없어서 하는 게 아니라 몰라서 한다. 그래서 불교는
알게 하는 거예요. 깨닫게 하는 것, 그 알게 하는 게 불사요.
見相觀空으로 到彼岸하니 觀色觀空하야 觀自在로다
견상관공으로 도피안하니 관색관공하야 관자재로다
寂照光明이 常遍滿하니 隨緣隱現이 無限涯로다
적조광명이 상변만하니 수연은현이 무한애로다
이게 삼세제불이 어떻게 깨달았느냐, 깨닫는
과정을 말하는데, 첫 번째 깨닫기 전에 견상관공(見相觀空)을 해요. 볼 견(見), 형상 상(相). 형상을
딱 보는데, 견상을 하는데, 일체 중생은 견상집상(見相執相)을 해요. 상을
보면 상에 집착해요.
그런데 상은 그림자와 같아서 잡아보면 없어. 허망하고
무상해서 사라져 버려. 그런데 일체 중생은 허망하고 무상해서 사라지고 사라져도 또 잡고 또 잡고, 항상 잡는 걸로 능사를 삼아요. 무엇을 구해도 구해보면 사라져요. 젊을 때는 모르지, 그거 구하다 죽지. 나이 들어서 이제 안 구하려고 해도 젊을 때 구하던 습관이 몸에 꽉 배서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게 인생이요. 구하면 사라지는데 계속 구해, 그러다 죽어.
그래서 사람은 구하다 죽고 새는 날다 죽는다. 계속
날아도 날아도 허공인데, 얘들이 보면 계속 날더라고요. 새가
안 나는 때가 없어.
그래서 견상집상은 일체 범부요, 견상관공은
일체 보살이다. 보살은 상을 보고 상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상에서 상이 공(空)함을 봐요. 이렇게
물건을 보면, 이 물건을 보는 게 견상이란 말이야, 상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보살은 이 물건이 나되 난 것도 없고 가되 간 것도 없다, 불생불멸 공적(空寂) 실상을
보는 거예요. 이게 견상관공이에요. 불생불멸 공적 실상, 공공(空空)하고 적적(寂寂)한 진실상을 여기서 본다. 상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견상관공으로 뭘 하느냐,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도달한다. 이게
중도 피안이라고요. 불성 피안, 법성 피안, 진성 피안. 견상관공으로 피안에 도달하지, 견상집상을 하면 항상 중생계에 윤회하는 거요.
그러면 견상관공으로 피안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느냐,
관색관공(觀色觀空)하여 관자재(觀自在)라. 그때는 피안에서
죽고 사는 생멸법도 보고 불생불멸 진실법도 봐서 양쪽을 다 봐. 이게 관자재예요. 관색관공을 한다, 색도 보고 공도 본다. 공은 불생불멸 진실법이고, 색은 생주이멸(生住異滅) 생멸 세간법이란 말이에요.
이제 성불을 하게 되면 중생이 보는 생멸 세간법도 항상 보고, 즉 깨달은 지혜에서 보면 불생불멸 진실법도 항상 보니까, 관색관공
관자재라, 관(觀)이
자재해요. 그런데 범부는 생멸만 보지 그 실상법을 못 봐. 그래서
의상 스님은 그걸 단용무체(但用無體)라, 오직 용(用)뿐이고 움직이는
것뿐이고 체(體)가 없다
— 그 체는 실상체거든요.
관색관공 관자재, 그게 깨달은 분이 살아가는
법이다. 물건을 딱 보면 이거는 생겼다 없어지는 색법이란 말이에요, 관색을
해요.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불생불멸 실상법을 봐. 이건
생겨도 생긴 게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게 아니라는 진실 실상 중도, 이걸로 본단 말이에요. 그게 관자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이냐, 적조광명(寂照光明)이 상변만(常遍滿)이라. 그렇게 되면 일부러 보려고 해서 색을 보고 일부러 보려고 해서
공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적조광명이, 고요한 그냥… 눈 뜨면 일부러 보지 않아도 눈에 다 보이듯이, 적조라, 고요하게 비춘다. 거울을 걸어놓으면 거울이 용을 써서 비추는 게
아니라 저절로 거울에 나타나는 대로 다 비추는 것처럼, 이게 부처님의 지혜란 말이죠. 적적히 조조(照照)한다. 조조하되 적적하다. 비추고 비춰도 고요하고 고요하고, 고요하고 고요해도 비추고 비춘다.
이 적조광명이 부처님 지혜인데, 이 부처님
지혜가 상변만이라, 항상 두루 가득해. 가는 데가 따로 있고
못 가는 데가 따로 있고, 그게 아니에요.
그래서 수연은현(隨緣隱現)이, 인연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숨을 은(隱),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날 현(現),
나타난다. 그 인연 따라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것이 무한애(無限涯)라. 한할 한(限) 자, 물가 애(涯) 자는 끝
애 자란 말이에요. 한과 끝이 없다, 무한애라. 거울이 있으면 그게 보이고 안 보이고, 안 보이고 보이는 것이 끝이
없다, 이거죠.
그게 깨달음의 지혜예요. 그래서 수륙재를
하면 일체의 영가와 일체 중생과 일체의 보살들이 다 불성을 깨달아서, 모두가 그 실상 중도 불찰정토에
가고 거기서 머물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죠.
오늘은 노래를 하나 들려드려야 되는데요. 노래를
하나 만들었는데, 노래 제목은 「호흡몸 불성몸」, 호흡하는
몸·숨 쉬는 몸, 불성 몸.
그리고 가사는 종범인 제가 지었고요, 노래는 AI가
불렀어요.
지난 초하루법회에 일부를 들려드렸는데, 그
후에 2부를 더 합해서 오늘 합쳐서 다 들려드리는데, 전에는 1분 18초였는데 이번에는 2분 52초 분량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들려드릴 테니까 보세요. 이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야 돼요. 이 장삼이 하도 이게 널리
덮여가지고 잘 안 꺼내지죠. 그럼 이제 이 휴대폰 꺼냈거든요. 거기
가만히 앉아 계시오, 이거 내가 다 할 테니까.
(노래 재생)
노래제목: 호흡몸 불성몸
작사: 성암종범 / 노래: AI
인생을 오로지 핸폰에 맡기고 세상을 향해서 떠돌고 떠돌 때
몸에는 뜻밖에 흰머리 와있네 숨쉼이 멈추면 무엇이 남을까??
숨쉼이 멈추면 무엇이 남을까??
숨쉬는 이몸은 꿈같이 떠나니 참몸을 찾아서 힘차게 살으리
참몸은 불성몸 눈앞에 늘있네 눈떠서 만나면 언제나 기뻐라!!
눈떠서 만나면 언제나 기뻐라!!
불성은 태허공 생사는 뜬구름 태허공 볼때에 구름도 태허공
불성에 눈뜨면 생사는 꿈속일 억겁을 지내도 불성은 한불성!!
억겁을 지내도 불성은 한불성!!
불성을 보는일 쉽고도 쉬워라 볼때도 눈뜨고 듣는때 눈뜨면
세상은 불성뿐 끝없는 불성뿐 힘차고 힘차서 기쁘고 기뻐라!!
힘차고 힘차서 기쁘고 기뻐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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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13일 국행수륙재 초재 법문
혜국스님 2026-09-13
지심발언 대자대비 불보살님 이 진관사에 내려오셔서 국행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들, 전쟁터에서 외로이 죽어간 모든 영혼과 네팔 사태의 땅속에 묻혀 있는 모든 영가들과 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모든 영령들, 선망부모, 모든 조상, 인연이 있는 영가, 유주무주 모든 영가들을 위하여 증명하여 주옵소서. 마음 연기 공성,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지은 환영 따라
생사윤회를 하옵는 바 국행수륙재 이러한 공덕으로 모든 죄업은 소멸하고 필경성불 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여러분들이 나무아미타불같이 따라할 때 바로 온 세상이 한 가족입니다.
진관사 올 때마다 나는 법문을 하러 오는 게 아니라 진관사 와서 사시는 스님들이나
염불을 하는 스님들을 이리 뵙다 보면 내 13살 어릴 때 신심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고 마치 불교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서 저는 오히려 보리심을 발하려고 이 자리를 오게 됩니다.
진관사 스님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도님들, 진관사를
이끌어가는 모든 분들께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고마움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네팔에서 땅속에 파묻혀 가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수천 명이 그런 목숨이나, 아까 주지 스님이
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죽어가는 숫자만 해도 50만 명이 넘는답니다.
그 하나하나가 이런 수륙재를 올릴 때 그분들이 시간과 공간이 없는 관계로. 왜 시간과 공간이
없느냐 하면 양자역학에서 중첩 현상이 있죠. 얽힘 현상, 시간과
공간이 없는 연고로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수륙재를 올릴 때 그분들이 위안을 받고 그분들이 마음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는 걸 보면 국행수륙재란 세계 평화를 위함이구나.
이 나라에서도 이러한 고마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때 우리는 물질문명보다 정신문명이
앞서가게 되는데 그런 게 다 못 받쳐지는 게 때로는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저에게 주어진 제목은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다. 그럼 죽어 있는 건 행복하지 말라는 말이오. 그 말은 죽음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엄청난 제목이거든요. 이거 내가 정한 게 아니라
우리 주지 스님이 정해놓고 날 보고 꼭 이대로 하라는 거예요. 나 이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죽음이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네팔에 죽어간 모든 영가요, 전쟁터에서 죽어간 모든 영가요. 우리나라의 모든 영령들이요. 죽음이란 모양 있는 것만 죽지, 모양 없는 공성(空性)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진관사 스님들이 이 함월당을 이렇게 잘 지어놓았지만 천 년 이천 년 가면 이 집은
결국 죽어 없어지지만, 우리가 앉아 있는 요 허공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럼 죽음이란 모양 있는 것만 죽는다. 그럼 모양 있는 거라는 모양은 업을 말한다. 그럼 업까지도 연기법에서
볼 때는 모든 업까지도 모양까지도 연기에 의해서 생하기 때문에 마음 하나일 뿐이니, 결국 마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업을 따라가게 되고, 업이 죽지 참 생명은 죽지를 않는다. 이거 엄청난 세계거든요. 그걸 금강경에서는 뭐라 그럽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라고 그랬죠.
대답하기 싫으면 말아. 하지 마. 내 혼자 나 나 혼자 잘 죽거리는 사람이야.
금강경에서 분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에 보이는 모든 모양,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오늘 아침 제가 예불 모시러 딱 나오니까
풀벌레 소리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우는지, 풀벌레 소리가 귀를 맑히는 때가 되면 아 가을이다 하는 글이
생각나던데. 그런 아름다운 소리까지도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은 상(相)이라 그럽니다. 모양이라 그래요. 물리학에서나 양자역학에서는 안 그렇지만은 모든
다른 종교에서는 모양 있는 것만 모양이라 그러는데, 우리 부처님 법에서는 귀에 들리는 소리, 내가 한 번 일어나는 생각까지도 전부 다 상이다. 그러면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라 하는, 만약 이 경우에 모든 모양에서 모양 아닌 둘이 아님을 중도를 깨달으면 부처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 했지만, 말은 그랬지만 그거 아니라도 부처라 이 말이야. 그거 아니라도. 그러면 그 세계로 한번 들어가 보자는 얘기요.
큰 파도가 작은 파도 보고 야 작은 파도야, 넌
꼭 혜국 스님 닮아서 왜 그리 작냐? 그럼 그거 맞는 말이오 안 맞는 말이오. 큰 파도가 금방 작은 파도가 되고 작은 파도가 큰 파도가 되는데, 파도라는
건 뭡니까? 본질이, 참생명이, 바닷물이죠. 파도 그대로 바닷물이죠. 파도 그대로, 작은 파도든 큰 파도든 바닷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모양만, 상으로 파도란 상으로 변한 것은 참생명인 바닷물이
변한 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가지고 모양만 변한 것이지 바닷물에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말이야.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볼 땐 바닷물은 잔잔하고 파도는 일렁일렁하니까. 그럼 파도는 왜 생기는 겁니까? 부처에서 왜 중생이 생겼냐 이거죠.
본래 청정한데, 운하홀생 산하대지 (云何忽生
山河大地)냐. 모든 영가들이요, 모든 영혼들이요. 본래 청정한데,
본래 바닷물인데 어찌하여 운하홀생 파도가 일어났단 말이냐. 이거 기가 막힌 질문이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한번 보십시오. 어린애도 알잖아. 정말 마음 아픈 일이라 울잖아. 저렇게 그거 모르는 게 그렇게 울음이
나와야 된다 이 말이여. 그러면 파도가 왜 일어나죠? 바람
때문 아니야? 바람만 없어 봐요. 바람만 없으면 파도는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 내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좌절하는 마음, 죽고
싶다는 마음. 요즘 즉흥적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즉흥적으로
아무나 가서 흉기를 휘두르고 하는, 이게 수륙재 사상이 약해져서 그렇거든요. 수륙재가 뭡니까? 내 눈에 보이는 형제들만이 아니라 뭍에 사는 모든
생명이나 물에 사는 모든 생명이나 온 생명은 한 허공에 살고 있는, 저이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저이가 없는 한 생명이다. 그럼 그까지는 가지 맙시다.
복잡하니까 여러분 가족만 딱 놓고 보면, 전생
전생 몇 백생 전부터 부부가 되고 아들 딸이 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해서, 약속할 때는 내가 당신 만날
땐 당신이 그렇게 모자란 그거는 내가 고쳐주고, 내가 모자란 건 당신이 고쳐주고, 이 업을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만나놓고는, 딱 만나가지고
한 1년 정도는 괜찮은지 몰라도 몇 년만 지나면 내가 어쩌다가 저런 쪼다 같은 남편을 만나가지고, 이 신세가 이 모양인가, 내가 어쩌다 저런 부인을 만나가지고, 이 신세가 이 모양인가. 내가 안 만날 사람은 만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만나서 거쳐야 할 일일진대는 저 모양에 속지 말고,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는 건데, 저 모양은 저 사람이 익힌 습관이 저렇게 다를 뿐이지 나하고 똑같은 참생명은 한
생명이니 한 허공이니, 저거 고쳐주는 게 내 할 일이다.
그거를 고쳐주면서 나에게도 잘못 이끌란 지적해 달라고 차라도 한 잔 딱 주고받으면서
하면 그걸 마음 농사라 그러고. 거기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야 우리가 습관 익힌 것이 과연 무엇이냐, 습관이라는 게 뭐냐, 습관이 뭐예요? 습관을 업이라 그러죠. 아 참 대답 안하기로 했지. 습관을 업이라 그래요. 예를 들어가지고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사람이 게임을 익혀서 게임을 습관 들이면 게임이 업이 돼서 게임 안 하면 못 살고, 도박을 익혀가지고
도박이 습관이 되면 도박이 업이 되면 집안 망하는 줄 모르고 그거하는 게 다 익힌 습관이거든요.
습관이 한번 봅시다. 부처님은 습관을 수륙재에서
뭐라고 했느냐, 수륙재의 소중함을 바로 알게 되는 말인데, 눈은
들길을 걷는 나그네요. 눈이 하얗게 쌓인 길을 걸어보면 반듯반듯 걸은 사람은 발자국이 반듯반듯 찍히고
삐딱삐딱 걸은 사람은 삐딱삐딱 찍히는데, 오늘 와서 딱 돌아보면 삐딱삐딱 찍힌 거를 돌아가서 고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제로 못 돌아가요.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로 못 들어가요. 한 번 딱 보는 게 일기 일회(一期 一回)요. 그걸 현재라
그래요. 어떤 것도 한 번밖에 못 봐요. 제가 오늘 충주에서
올라오면서 한강을 건너왔는데, 내려가다 보면 그 한강이 없어요. 있는데요, 아침에 내가 본 강은 벌써 바다로 흘러가 버려서 내 평생만이 아니라 다음 생도 못 봐요. 강물만 그런 게 아니라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일기 일회입니다.
그럼 여기 와서 딱 서서 돌아보면 여러분들 삐딱삐딱 찍힌 발자국을 뭐라 그래요? 그걸 죄업이라 그럽니다. 죄업. 그러면
다른 종교에서는 오늘까지 삐딱삐딱한 죄 때문에 넌 지옥이다. 그럼 거기 다른 종교에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한 번 지옥 가면 언제까지 거기 있어야 됩니까? 그것도 대답 안 하겠지. 영원히요. 영원히. 한번
성경을 보세요. 영원입니다, 영원히. 그런데 수륙재에서는 뭐라고 했느냐면, 야야 니가 걸어온 발자국 보니
죄덩어리, 삐딱삐딱 한 것이 싫으냐? 예 싫습니다. 싫다는 마음 내는 걸 참회라 그래요. 수륙재의 모든 내용이 그겁니다. 그러면 과거를 보지 말고 니가 잘못됐다 싶으면 오늘부터 반듯반듯 걸어버려라.
한참 가고 나면 삐딱삐딱한 거는 점점 멀어지고 반듯반듯한 인생만 너에게 남았으니.
불교의 수륙재라는 건 어제까지 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해서 나는 죽었다 이렇게 생각했던
영가가, 몸뚱이라는 건 잠깐 빌려 쓰는 것이다. 이건 누구나
죽어야 되니까 삶이 아름다웠다면 죽음은 보다 더 아름다워야 된다. 삶이 아름다웠다면 죽음도 아름다우려면
이 몸뚱이는 잠깐 빌려 쓰는 자동차요. 이건 뭐와 같아요? 구름과
같아요.
구름. 오늘 한국의 가을을 저는 워낙 좋아하는데
한국의 가을 하늘 보면 뭉게 구름이 나와가지고 저건 양떼구름, 저건 토끼 그림. 그러는데 그 양떼 구름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금일 영가 등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요? 있던데. 오늘 아침 보니까. 아 연기법이란 이런 거구나. 수증기가 바다에서 증발해서 땅에서 수증기가 올라가서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온도를 만나면 이런 구름을 만들었다가, 약간 움직여져서 온도가 달라지면 없어졌다가, 어떤 것을 만나는 인연에
따라서 구름 모양이 나타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고 생사가 되는 것이니, 생사란 다 연기법에 불과하구나. 우리 몸뚱이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안 죽은 사람이 어디 있냐 이 말이오.
모든 영가 등이며 죽음을 받아들이소서. 죽음이란
인간을 해롭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고요. 평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로 받아들일 때 이 몸뚱이라는 거는 구름과 같이 연기에 의해서 어머니 태 속에 들어가서
아버지 정자와 어머니 난자가 만나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 정자와 어머니 난자가 만날 때 아버지
정자가 몇 개 나온다 그랬습니까? 약 2억 개 나온다 그랬죠. 약 2억 개가 나온답니다. 요즘은
컴퓨터라든지 손에 들고 다니는 조그마한 전화기 휴대폰, 같은 전자파 때문에 1억 6천까지 줄어들고 있다는데 보통 일이 아니야 아주. 그러면 2억 마리 정자가 나와서 몇 마리가 어머니 탯속으로 들어갑니까? 한 마리가 들어가요. 그럼 여러분들은 몇 대 몇이 시험을 뚫고 나오신
분들이에요. 이 세상에 2억 대 1 시험은 없어요. 그거 보면 죽을 일이 없습니다. 아 나는 2억 대 1이
경쟁률을 뚫고 인간으로 나온 사람이다. 정말 인간은 소중해요. 인간
되었을 때 마음 못 닦고 수륙재 한번 제대로 못 지내본다면 그건 정말 한 맺힌 일일 거예요.
그렇다면은 여러분들이 한 2억 대 1 경쟁률을 뚫고 어머니 탯속에 가서 누가 이 몸뚱이를 만들었어요. 아버지
정자와 어머니 난자가 집을 만들어줄 때 내 영혼은 내 아버지, 내 어머니 아니면 1100억이 있어도 다른 부모 집에는 못 들어갑니다. 나에게는 오직
이 부모 하나뿐이에요. 여러분들에게도 이번 모시고 하는 부모님 딱 그분 아니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 못
와요. 그분이 아니면 못 온다는 건 그 위로 몇십억 년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 중에 한 명만 빼먹어도
우리는 이 세상 못 오니 온 세상이 한 가족이구나. 이거 참 아름다운 말이오.
그러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뭐로 이걸 만들어요?
영원히 어머님이 음식을 자시면 음식은 흙에서 나온 거니까 흙 기운 빌려다 요 살을 만들고, 어머님이
물을 자시면 물 기운 빌려다 눈물, 콧물, 오줌물 만들고, 어머니가 태양 열 에너지에서 열량을 섭취하면 그 열량을 빌어다 따뜻한 체온을 만들고, 또 하나 뭐 남았어? 바람, 공기를
들이마시면 들숨 날숨. 내 생명을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우주 생명을 빌려다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내
생명을 내가 만들어 쓰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 풀 한 뿌리가 만들어 놓은 공기를 호흡을 통해서
빌려다 쓰고 있고, 떠다니던 구름이 물이 되면 물을 얻어 마시고 내 생명을 만들고 있고, 지수화풍(地水火風) 4가지
원소가 잠깐 만나서 이 몸뚱이라는 구름이 만들어졌지만, 온도가 다르고 기운이 다라서 인연이 다르면 홀연히
없어지는 것이니, 죽음이란 모양 있는 것만 죽을 수 있지 모양 없는 연기법 자체 공성 중도는 죽음이
없다고 하는 사실. 그거를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다. 모든
모양은 인연에 의해서 변해나가는 과정일 뿐 실체는 단 하나도 없다.
실체가 없다는 걸 믿으면 내가 억울하다는 거. 여러분들
초등학교 때 나는 아주 못됐던가 봐. 그 면도칼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보통 위험한 게 아니거든요. 그걸 숨겨가지고 여학생들 고무줄 놀이 하는 거 그걸 끊으려고 면도칼을 그리 숨기고 다녔어요. 이거 면도칼로 끊으면 저 새끼 막 욕을 욕을 하고 하는데, 그러면
그땐 저놈의 새끼 나쁜 놈이라는데, 그 여학생들 불러다가 그게 지금도 남아 있느냐, 아름다운 추억이 돼버렸습니다. 모든 감정은 지나가는 과정이다. 몸뚱이만 지나가는 과정 연기법이 아니라 내 안에 일어나는 생각도 일어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멸하고, 일어나고 과정으로써 있는 것이지 실체가 아니구나.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환영에서 파도에서 본질 바닷물이라는 걸 바로 봐버리면 일어난
파도 자체로 부처라는 걸 알게 될 거다. 이것이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행복할 수밖에. 깨어 있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깨어 있는가 죽어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돼. 깨어 있는다는 건 정말 아름다워요. 깨어
있는다는 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오늘 이런 수륙재를 왔다 갔으면,
이 수륙재는 정말 나와 연관된 국가와 조상과 모든 부모님들을 모셔놓고, 내가 깨어 있으면
부모님이 깨어 있고 조상이 깨어 있고 모든 영령들이 깨어 있고, 내가 잠들어 있으면 또한 영가들도 잠들게
된다. 왜냐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면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가지고 스승을 한번 찾아가 보자는 거예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절집에는요 다 스승들이 기라성 같은 스승들이 많이 다녀가셨어요.
저는 한국 땅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게 첫째 한국의 어머님들이 너무 훌륭하고, 한국의 어머님들은 가족을 위해서, 요즘 아들은 그렇지도 않다고 그러는데, 우리 부모님들 정말 훌륭했거든요. 어머님이 훌륭해서 한국에 태어났으면
싶고, 둘째는 한국의 스승들이 인구 비례로 따져서 정말 대단한 스승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스승을 찾아가는데 대조해 스님을 찾아가서, 스승님
저는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그래도 자꾸 감정이 일어나면 또 끌려다니고 끌려다니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영원한 평화, 수륙재가 돼서 고요, 바로 모든 감정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
말은 여하히 어떻게 하면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스승은 아무 힘도 안 들이고, 생사업만 짓지 마라. 생사업만 안 지으면 바로 열반이요. 생사업이 뭐예요? 구하는 마음이야.
구하는 마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날 진달래를
여자 꽃이라 그러고 개나리를 남자 꽃이라고 그러는데, 왜 진달래를 여자 꽃이냐면 진짜를 달래, 진달래. 목걸이 해주면 귀걸이, 귀걸이
해주면 물방울 다이아몬드, 샤넬. 하여간 자꾸 진짜를 달래
또 달래 또 달래 또 달래,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 그래서
여자 꽃이라는 거예요. 남자는 뭣도 아닌 게 하도 나대고 흉내만 내니까, 개나리를 하는 거야. 또 그러면 그게 바로 농담 같지만은 구하는
마음이거든요.
나는 어떤 구하는 마음에 끌려다니고 있는가? 내가
석종사 와서 신도들이 스님 뵈러 왔습니다. 나 100번 보는
것보다 당신 마음 한 번 돌아보는 게 부처님은 훨씬 기뻐할 거예요. 날 보지 말고 마음을, 오늘 내가 어떤 감정에 끌려다니고 있는가, 어떤 생각이 나를 끌고
가고 있는가. 그러면 생사업을 짓지 말아라 하니까, 그 제자가
묻기를, 옛날 제자들 보통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은
생사업만 안 지으면 되겠구나 한데, 그 제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사업을 안 짓는 겁니까?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야. 오늘 진관사에 모여 있는 모든 수륙재에
동참한 영가 등이요. 잘 들으십시오.
당신이 죽었다는 생각은 벗어나야 됩니다. 죽은
거는 잠깐 구름이 생겼다 없어진 거지, 허공이 없어진 일도 없고 그 기운이 없어진 일도 없고 당신 참
생명은.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주는 그 염불도 말이에요. 지금
앞에 안 계시지만 아까 와서 내가 절을 하면서 염불을 들어보니까, 저분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렇게
소리가 맑을까? 나는 나이 80의 목이 갔어. 지금 나만 억울하네. 이게 나도 저렇게 목이 안 갔으면 좋겠다는데.
진관사 수륙재는 다른 데 수륙재하고 좀 다릅니다. 정말
정성을 다해요. 지금 딱 일주일 며칠 있다 끝나면 그날부터 내년 할 걸 시작을 해야 이 정도 돼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건 영화 제목이나 나오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야.
낮에 밤새 영산재, 그거 쭉 보면요, 그 내용 한 마디 한마디가 영광독로(靈光獨露) 체로진상(體露眞常)이라 하는 걸 쭉 나가다 보면 내가 염불할 때 봐도 어떨 때는 들썩들썩할 때가 있어요. 너무 좋아서. 그럼 영가들이는 분 오죽하겠냐 이 말이오. 영가들이 알아듣습니까?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귀신같이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 귀신같이 알아듣는다니까. 귀신같이. 왜냐하면 유식하게 나오는 말이여. 영가가 되면 70배가 맑아져. 업이
아주 지중한 영가 빼고는.
그러면 딱 여기서 청하면은 우리가 비행기 타고 미국 유엔 본부 가려면 10시간 넘어가야 되고, 여기서 부산 가려면 한 서너 시간 가야 되고
하는데, 마음으로 가면 미국도 1초도 안 걸리고, 인도도 부다가야 1초도 안 걸리고,
부산도 1초 똑같아. 시간과 공간이 없다 이
말이요. 영가들에겐 문 꽉 잠가놔도 먼저 와가지고, 여러분들
조상들이 먼저 와서 지금 춤을 추고 있거든. 문이 없다 이 말이야. 없어.
금일 영가들이여, 내가 태어날 때 이 세상이
같이 생겨났으며, 내가 죽어갈 때 이 세상도 같이 사라지더라. 내가
봐줄 때 산이지, 산이 있어서 보는 게 아니다. 금일 영가들이여, 고로 어떤 것이 생사업을 짓지 않는 겁니까? 하니까. 선이라는 생각도 놓아버리고, 악이라는 생각도 놓아버리고, 일체 일어나는 생각은 모두가 한 감정 일어난 다음뿐이니, 이 뭣고? 모를 뿐인 고요. 모를 뿐인 그 자리. 그걸 영원한 현재라고 한다.
寂寂本故鄕(적적본고향) 惺惺是我家(성성시아가)라
現前古佛路
(현전고불로)인댄
不昧是何物(불매시하물)이냐 나무아미타불
금일 영가 등이여, 나하고 같이 가봅시다. 시간과 공간이 없는 이 자리니까. 적적 본고향이요. 당신들 지금까지 고향 못 가고 허공 중천을 떠돌아다닌 이유는 뭐예요? 나는
억울하게 죽었다, 전쟁터에서 죽었다. 어디에서 죽었던지 죽음은
꼭 같습니다. 죽음이란 이 몸뚱이가 나라고 할 때는 죽었다, 억울하다.
하지만, 고요한 이것이 내 고향이라고 알면
죽는 그 순간에 업만 안 따라가고, 참생명, 오늘도 안 죽고
이렇게 법문 들을 줄 아는 나, 이 뭐 없고 나에 의지하는 거예요. 바로
부처님을 품에 안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 내 이
걱정 저 걱정 바깥으로 바깥으로 노숙자로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뭐와 같은 거예요? 루미의 여인숙이라는
시에 보면 이 몸은 여인숙, 날마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때로는
기쁨, 때로는 슬픔, 때로는 절망, 그 모두를 정중하게 맞아드리라.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게 뭐, 생사업을 짓지 않는 즐거움이오. 바깥으로 바깥으로 나가던 근심 걱정이
내 안으로 쏙, 부처의 품에 안겨서, 이 모를 뿐인, 안다 모른다가 아니라, 모를 뿐인,
이 뭣고, 적적하니 즐겁고, 즐거운 게 넘어서면
조선쟁이라, 바로 고요로 들어가니, 이게 금일 영가 고향
아니고 무엇이더냐. 거기에서 머물지 말고 성성(惺惺) 쉬어가라. 깨어 있고 깨어 있어 가지고 살아있는 자는 모두 행복하여라.
내가 불행한 거는 내가 감정을 따라가고 업을 따라가 가지고 내가 깨어 있지 못한 탓이었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모든 건 내 하기 탓이다. 내가 한 번 화를 내고 불평하고 남을 미워하면 영혼에서는 까만 색깔이 나오면 그걸 암흑 세계라 그러고, 종교 용어로는 지옥이라 그러고. 수륙재를 지내주는 진관사 모든 스님들, 신도님들, 법사 스님들, 동참하여
이런 도량을 빛내주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그보다 더 고마운 건 뭐예요? 우주 진리 자체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할 때 금일 영가들, 까만 색깔 지옥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맑은 광명, 그냥 검은 색깔이 지옥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광명으로 변했으니,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그걸 나무아미타불이라 그래. 그러면 광명은 누가 만들고 검은 색깔 누가 만들었어? 본인의 한
생각이에요. 지옥이니 극락이니 다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가느냐, 내 하기 탓이구나. 이것이 믿어지면 생사업을 안 짓는 일이라. 성성 시약(惺惺 始覺)하라
이 말이오.
깨어 있고 깨어 있으니 영원한 내 집이라 이 말이오.
성성과 적적이 둘이 아닌 누리를 알면 선을 넘어서고 악을 넘어서니 이걸 중도라고 이름하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부처님 나오는 곳이더라.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더라. 이것이
오늘 수륙재 법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수륙재가 이어진다는 자체를 마음으로부터 저는 정말 마음으로부터
고마워하거든요. 정말 고마워합니다. 아주 이건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러한 인연이 얼마나 나라의 운을 더 늘려주고 좋아지고. 그래서 그걸 국행(國行)이라
그래. 나라에서 그걸 했다고요. 옛날에는. 지금은 이런 건 안 하더라도 제발 비방하고 싸움이나 안 했으면 좋겠어. 아주
제발. 아니 이 소중한 시기에 자기들끼리 싸울 때냐 이 말이여. 싸울
때냐 이 말이여. 아이고 진짜 더 이상 하면 위험해. 이거
말하지 말아야지.
그러면 여러분들만이라도. 그러면 나부터도. 그분들은 어쩔 수 없다. 그분들이 날 보고 오라고 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내가 이런 시대에 이런 걸 짊어지고 가겠다고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한 평생 사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 단 내 신심 안 떨어지고 내가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없다면 그건 내가 악도로 가고 생사 윤회니, 이거야말로 억울하다. 나는 결코 진심을 놓치지 않으리라.
여러분들도 불자가 됐다면 불자가 됐다는 건 뭐죠? 살아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다. 살아 있는 길로 가는 것이다. 오늘까지의
발자국이 잘못됐으면 오늘부터 반듯반듯 걸어버리면 내 운명은 하루아침에 개척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내는 걸어다닐 줄 알고 돌아다닐 줄 아는 거는 이 몸뚱이가 아니고 참 생명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온 세상이 한 가족인 불성(佛性)이라. 내가 바로 부처다.
진관사에서 내가 몇 년 전에 왔을 때요. 주지
스님이 요만한 표구를 조그마한 거 하나 줘 가지고 보니까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보는 순간 얼마나 좋던지, 나 글씨 잘 안 거는데 내가 걸어놨어. 그거를.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펴주시고 이렇게 잘 사는 사람을
가지고 뒤에서 뭐라고 하는 방송이나 그런 거, 그거 다 뚱딴지같은 소리. 아주, 진관사만큼만 열심히 사신다면요. 나라가 달라져요. 나라가, 종단이
달라져요.
여러분들 다 같이 우리도 조금씩 조금씩 손에 손 잡고 결국 불국토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려면 불국토란 내가 부처일 때, 서로 부처가 부처의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돌아가는 영원한 부처의 길이니, 라라리라라라라리라라. 태평가를
한번 불러보자 하는 말을 가지고 부디 가정에서도 살아있는, 깨어 있는,
업에 끌려가지 않는 불자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원컨대는 이 법문 들은 공덕, 진관사 국행수륙재
공덕으로 온 세계에서 죽어간 모든 영가들이 깨어 있는 마음, 마음, 이
마음을 깨달아서 왕생극락하여지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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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9월 11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9-11
260911 신중기도 종범스님 법문
주제 : 義相祖師 法性偈 이야기 25
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25
-- 叵息妄想必不得 (24) -- 次八句 行者
修行方便 及得利益 --
-- 파식망상필부득 (24) -- 차팔구 행자
수행방편 급득이익 --
안녕하세요. 오늘 병오년(丙午年) 8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에,
법성게(法性偈) 중에 파식망상 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그 구절입니다.
10번을 봉독하겠습니다. 시작.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파식망상필부득
이게 30구 법성게 중에 제24구거든요. 제24구인데, 이게 시고행자 환본제 파식망상 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이 구절을 합쳐서 읽어야 이해가 빨라요.
이제 '행자'라고 하면 화엄행자(華嚴行者), 화엄경을
배우고 실천하는 화엄행자. 그 화엄행자 중에 제일 드러난 행자가 선재동자(善財童子)예요. 선재동자는
일생성불(一生成佛)이에요.
그래서 선재동자가 있고, 선재동자 밑으로는 삼승(三乘) 화엄행자가 있는데, 성문승 화엄행자·연각승 화엄행자·보살승 화엄행자, 그런
화엄행자도 다 성불해요.
그리고 화엄행자 선재동자가 돌아가는 곳이 보현보살(普賢菩薩)이거든요. 보현보살이 되면 뭐 덜어내는 게 없어요. 또 구하는 게 없어요. 그냥 나타날 뿐이에요. 그래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이 다하더라도
중생을 위해서 보현행원(普賢行願)을 닦겠다" — 그게 보현보살이에요.
환본제(還本際)라는 게 뭐냐 하면, 선재동자가 안으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이루어요. 해인삼매는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들어 있고, 한순간에 영원이 들어 있고 영원에
한순간이 들어 있고,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그 선재동자는
선정(禪定)에 들면 해인삼매에 들어요.
그리고 평소에 뭘 아느냐 하면, 선재동자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비로자나불이다 — 이걸 알아요. 지자신심
즉사나체(知自身心 卽舍那體), 내 몸 내 마음이 곧 사나(舍那)의 몸이다, 비로자나불의
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자기가 비로자나불임을 분명히 알고, 선정에
들면 해인삼매에 들고. 그걸 환본제라고 해요.
환본제 — 본제(本際)의 '제(際)'라는 건 세계라는 말이거든요.
본래 세계에 들어간다. 본래 세계는 해인삼매고 비로자나불이다, 이 말이죠. 자신이 비로자나임을 알고 자신이 해인삼매에 들고, 이게 환본제예요.
① 本際則內訂海印也(法記云)
① 본제즉내정해인야(법기운)
② 知自身心 卽舍那體故 云還本際也(大記云)
② 지자신심 즉사나체고 운환본제야(대기운)
그 본제에 돌아가려면, 해인삼매에 들고
비로자나불인 줄을 알려면 망상을 끊어야 된다. 그래서 파식망상이면 필부득(叵息妄想 必不得)이라.
'파(叵)'라는 거는 불가(不可)라는 두 자를 한 자로 만든 게 이 '파(叵)' 자예요. 본래는 '아닐 불(不), 옳을 가(可)' 불가인데, 이걸 한 자로 쓰면 이 '파'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가하다 하면 안 한다 이거죠, 가하다
하면 한다 이거죠.
식망상(息妄想) — 망상을 쉬지 않으면. '쉰다'라는
건 뭐냐, 이게 그치는 거예요. 쉬는 건 그치는 거예요. 쉬어라 그러면 하다 안 하는 거예요. 그리고 끊는 거하고 똑같아요. 끊는다, 그럼 그치는 거예요. 끊는다·쉰다, 이게 다 그친다는 거예요. 술
끊는다 그러면 술 먹다가 술 먹는 행위를 그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끊기보다 더 쉬운 게 없어요. 하다
안 하면 그만인데. 담배를 끊는다, 담배 피우다 안 피우면
그치는 거잖아요. 그게 쉬는 거고 그렇게 끊는 거고.
근데 어떤 분이 시를 쓸 때, "끊으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끊는 건 죽기보다 더 힘든 것을 그는 몰랐다" — 참, 하다 안 하면 되는데 뭐가 죽기보다 힘들어요. 그거 우습잖아요. 망상을 쉬면, 망상을
그치면, 망상을 끊으면 — 담배 피우다 담배 안 피우면 그게
끊고 쉬는 건데, 그거 얼마나 쉬워. 하는 게 어렵지 안
하는 게 왜 어려워요? 그러니까 어려우려 들면 어려운 거예요. 그게
순전히 생각이라는 거지, 생각.
그래서 망상을 그치지 않으면 해인삼매에 못 들어간다.
망상을 그치지 않으면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비로자나불임을 모른다, 이 소리예요. 파식망상이면 필부득이라.
그럼 망상이라는 건 뭐냐. 여기 의상 스님
제자분 중에 법기(法記)라고 하는 분이 얘기를 했는데, 망상이라고 하는 건 아집(我執)이다. 나라는 집착이다. 아집은 두 가지가 있다. 인아집(人我執)·법아집(法我執)이래요. 사람 인(人) 자 인아집, 법 법(法) 자 법아집.
法記云。叵息妄想必不得者。以二我執。爲妄想也。如上內訂海印之際。無我之人。乃能得至。若存我則。必不得至故也。
법기운。파식망상필부득자。이이아집。위망상야。여상내정해인지제。무아지인。내능득지。약존아즉。필부득지고야。
그러면 인아집·법아집이라는 게 뭐냐. '인아(人我)'라는 건
내가 사람이다라고 집착하는 건데, 사람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 육근(六根), 자기 몸의 육근을 말해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자기 눈, 자기
귀, 코, 입, 혀, 이게 육근이에요. 이 육근을 나라고 딱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내 눈, 나죠. 내 귀, 내 머리, 내 옷 — 이게
인아집이에요.
그리고 법아집이라는 거는 눈으로 보는 대상. 자기가
눈으로 보면 "아, 저거 내가 본다" 그게 자기인 거예요. 귀로 들으면 "이거 내가 귀로 듣는다." 그래서 이걸 육근에다가
각각 상대되는 대상을 붙여서 육진(六塵)이라 그래요. 여섯 육(六) 자, 티끌 진(塵) 자. 그 육진은 법아(法我)이고
육근은 인아(人我)인 거예요.
그래서 육근·육진, 근진제법(根塵諸法). 육근은
인아, 육진은 법아니까, 내가 보는 거 그게 난 거야. 아주 그거 건드리면 안 돼요. "내 집, 내 집" 지으려고 막 그러잖아요. "내 사람" — 그게 전부 법아집인 거야. 내 눈으로 보는 대상, 내 귀로 듣는 대상, 내 몸으로 집착하는 대상, 이런 게 전부 법아집인데. 그 법아집이 있기 때문에 자기 땅 사려고, 저 땅이 내 땅이다 이거예요. 그게 법아집이에요.
내 아들 만들려고, 내 남편 만들려고. 근데 이 남편이 내 남편이었는데 딴짓하면 "왜 내 남편이
딴짓하냐." 그럼 다른 남자가 딴짓하면 어떠냐? 관심
없어. 그게 법아집인 거예요. 나 외의 대상, 그걸 법아집이라고 그래요. 법(法)은 물질이다, 티끌이다, 대상이다
이런 소리거든요.
그래서 이 아집·법집에 그냥 집착을 하니까, 이 몸이 건강하고 오래 살고 멋있고 이거에 평생 매여 사는 거예요.
"아, 젊어 보이네요" — 이게
전부 인아집이거든. "멋있어 보인다", 젊은
거 멋있잖아요. "건강해 보이네요", 그것도
전부 인아집이에요. 또 "부자 됐네요" — 재산 많은 게 부자잖아요, 그건 법아집이에요.
어떤 사람은 정원 하나를 꾸민다고 평생을 가꿨다고 하더라고. 그 정원이 뭔데. 나무하고 돌하고 물하고 그것뿐인데 그걸 왜 만들어요?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까 "내 정원이다" 이거지. 내 정원 만든다, 그게 법아집인 거예요.
그래서 내 몸, 내 물건 이것을 지킨다고
다른 건 생각도 못해요. 그런데 죽는 순간에 내 몸 지킨 것도 헛되고 내 물건 지킨 것도 헛되다. 전부 다 헛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 헛된 생각을 망상(妄想)이라 그래요. 그걸
인도말로는 번뇌라고 그러고, 번뇌망상 합쳐서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이게 몸에 집착하고 내 물건에 집착하면 해인삼매에 못 들어간다. 내가 바로 비로자나불이라는 걸 모른다, 이 소리예요.
그 몸 가꾸고 몸 관리한다고, 언제 해인삼매에
들 수가 있어요. "해인삼매 들라"면 "오늘 얼마나 일이 많은데, 이 일 하기도 바쁜데 언제 그걸
들어요?" 이거 당연한 거예요.
그전에 통도사 선방에서, 울산에서 온 어떤
사람이 3일 동안 참선을 하고 있는데, 아침에 참선하다 보니까
그 사람이 혼잣말로 뭐라 그래요? "고추 못 심으면 외 심지."
경상도 말로 "고추 안 되면 외 심지."
그게 뭔 소리냐 하니, 지금 집에 가서 고추 심고 오이 심어야 되는데 여기서 참선하다 보니까
걱정이 되는데, "아, 고추 못 심으면 나중에 오이
심으면 된다." 그게 전부 이 몸을 위하고 자기 물질을 위한 것이 그냥 몸속에 켜켜이 박혀가지고
벗어나질 못해요. 그러니까 못 깨닫는 거예요.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선방에 있는데 뭘 자꾸 세요. 그래서 뭘 세나 했더니, 내일 부산 가야 되는데 차비가 되나 안
되나 지금 셈을 본다고. 참선하다가. 아, 그것도 사실 걱정되잖아요. 내일 가긴 가야 되는데 차비가 제대로
있나 없나. 그러니까 그 차비 세고 앉았는데, 언제 이 도(道)가 되겠느냐고요.
그래서 망상을 쉬지 아니하면 해인삼매를 못 얻는다.
망상을 쉬지 아니하면 자신이 비로자나불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소리거든요.
그럼 망상을 쉬려면 어떻게 돼야 되냐. 첫째로
이 몸이 오래 못 간다는 걸 알아야 돼요. 이 몸을 아무리 건강하게 잘 관리했어도 죽는 순간에는 쓸
데가 없다. 근데 죽기 전에는 전혀 모르거든요. 죽을 때는
두려워해요. 죽을 때 두려워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위대한 거는 죽기 전에 죽음을 알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안 죽었거든, 지금. 근데
죽기 전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고, 그럼 죽은 다음에는 죽기 전에 이루어 놓고 만들어 놓은 것이 허무하다는
걸 안 거예요. 그것이 "인생은 무상하고 세상은
허망하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거예요. 죽음이
온다, 이게 인생무상이고. 만들어 놓은 것이 죽는 순간에
허망하다, 이게 세상 허망이라는 거거든요. 그걸 죽기 전에
안 거예요.
그러니까 석가모니도 참 이상한 분은 이상한 분이에요.
그걸 왜 알아. 그냥 열심히 살다가 죽는 순간에 후회하고 죽으면 되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그 부모는 왕을 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왕도 안 하고. 그러니까 부모가 볼 때 얼마나 당황하겠어요. 석가모니를
보면 역시 석가모니도 부모한테 효도를 못 했거든, 부모 말을 안 들었잖아요.
그런데 부모 말 듣고 부모 사는 그대로 사는 사람이 그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부모는 아이가 무슨 뜻을 이루는 것보다도 아이의 건강을 먼저 생각해요. 그래서
맨날 하는 얘기가 "몸은 괜찮니? 밥은 먹었니?" 이거 물어요. 이 몸은 자기가 낳았으니까, 그 자식이 병나고 밥도 못 먹으면 그게 제일 안타깝고. 그 아들딸이
무슨 뜻을 이루고 무슨 성공을 하고 무슨 일을 열심히 하고, 그건 뒷전이에요. 우선 "몸은 괜찮냐, 밥은
먹었냐." 그 부모 말만 듣고 평생 살아가지고 되겠어요.
그래, 뜻을 이루다 죽어야지. 맨날 몸이나 살피고 밥이나 먹고 일하다 죽으면 그게 사람이냐고요. 그러니까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사는 사람은 그게 보통 이하의 사람이야. 보통 사람이 그래 살지, 특이한 사람들은요, 자기 목적을 위해서 몸을 버려요. 히말라야 그 사고도 많은데 왜 올라가냐. 그 올라가고 싶거든요. 그 올라가고 싶은 목적을 위해서 거기서 죽는지 사는지 이건 돌아보지 않아요.
막 가는 거예요.
그게 본인의 입장에서는 뜻을 이루는 게 더 중요하지,
이 몸을 보존하는 거는 그다음이다. 근데 부모는 몸을 보존하는 게 첫째고, 뜻을 이루는 건 자식들이 스스로 이루어서 알아서 하는 거다,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신이 좀 투철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 말 듣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온 힘을 다하는 게 그게 맞는 거예요.
그렇게 석가모니가 산 거예요. 석가모니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저 밖에서 요령 짤랑짤랑 흔드는 소리도 듣잖아요. 안 그러면 어찌 듣겠어요?
그러니까 망상이라는 거는 이 몸을 위해서 사는 거,
또 물질을 위해서 사는 거. 물질이 없으면 몸을 보호를 못하니까, 사실은 법아집이라는 것도 이 몸을 확장시키는 연장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을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기 때문에 성불을 못하는 거예요.
노인들도 그렇대요. 참 기가 막힌 게, 뭐 건강에 좋다면 굳이 그걸 사 먹더라고. 뭐 먹어서 안 늙는 거
없어요. 속지 마세요. 옛날에도 노병에는 무약(老病無藥)이라고 그랬어요. 늙는
병에는 약이 없다. 뭘 먹어도, 약을 먹거나 식품을 먹거나
먹어도 이게 젊어지는 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그
죽고 살고 하는 걸 알아가는 그 마음이 뭐냐, 이걸로 돌아가야 돼요.
몸을 연장시키려고 하면 그거는 안 되는 거예요.
아집이라는 게 간단하게 설명하면 육근·육진이
아집이고, 육근은 인아(人我)이고 육진은 법아(法我)이다. 근데 이 육근·육진을 관리하는 게 있는데 그걸 팔식(八識)이라 그래요. 그
팔식이 역시 아집·법집이에요. 팔식이 이 모든 걸 관리하는
게, 내 몸과 내 물건을 관리하는 게 팔식이거든요.
如是意識 人法二我。由彼末那及黎耶海 身而還起。何者。黎耶本識。是我之根。其末那識。是我之莖。六及前五。皆是二我出入之門故也
여시의식 인법이아。유피말나급려야해 신이환기。하자。려야본식。시아지근。기말나식。시아지경。육급전오。개시이아출입지문고야
(法界圖記叢髓錄 卷第一. 한불전6-787上)
그래서 팔식 인법(人法) 집착, 팔식 근진(根塵) 집착 — 육근과 육진에 대한 집착이다. 기본은 팔식이고, 집착하는 내용은 몸의 육근과 몸이 상대하는 육진. 팔식 근진 집착, 그걸 망상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 몸이 말이에요, 이걸 벗어날 수는
없는데 끝까지 가보면 없어져. 이게 아주 문제예요. 뭐 어떻게
벗어나요? 근데 끝까지 살아보면 이게 없어진다고. 그럼 어떤
결과가 오느냐. 이 없어질 몸을 위해서 평생 산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아들딸 낳고 손자 손녀 낳았다고 좋아하는데, 그 아들딸도 마지막엔 죽어요. 그 손자 손녀도 죽어요. 근데 죽을 자손을 그렇게 기다리는 거예요. 죽을 자손을 왜 기다려.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서 망상은 첫 번째가 근진망상(根塵妄想), 육근·육진에 대해서 계속 집착하는 망상. 그걸 어떻게 집착하느냐, 팔식으로 집착을 한다.
팔식을 여기서 뭐라고 설명해야 되냐면, 팔식은
첫 번째가 뢰야 본식(黎耶本識)이다. 아뢰야식의 본식이 있다. 그다음에 말나식(末那識), 제7식이 있다. 그다음에는 제6식이 있다. 그다음에는
전5식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그랬느냐. 말나식과
아뢰야식으로 말미암아 이 몸이 일어난다. 왜 그러냐. 아뢰야
본식은 시아지근(是我之根)이라, 내 몸을 이루는 근본이다, 뿌리다.
또 말나식 제7식은 시아지경(是我之莖)이라, 나무로 말하면 줄기와 같다.
아뢰야 본식은 나무로 말하면 뿌리와 같고, 말나식은 나무로 말하면 줄기와 같다.
그리고 육급전오(六及前五) — 제6식과 전5식. 전5식은 뭐냐,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이게 전5식이거든요. 눈·귀·코·혀·몸, 이게 다 인식이
있잖아요. 그리고 제6식은 생각이에요. 이게 전부 자기 집착을 위한 출입문이다(皆是二我出入之門).
눈도 다 자기 보호를 위해서 있고요, 귀도
자기 보호를 위해서 있고요, 혀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이게
전부 자기 보호를 위해서 들고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보호를 위해서 좋은 생각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나쁜 생각도
자기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거짓말하면 내가 편하거든.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과거에 안 좋은 기억이 일어나도 그거 원망할 거 없어요. 이 아뢰야식이 나를 위해서 그랬었는데, 그게 아뢰야식의 기능이다. 자기를 위한 기능. 자기를 위하려고 나쁜 짓도 하지, 나쁜 짓도 자기 일을 떠나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전부 팔식아집(八識我執)이란 말이지. 아뢰야식·말나식·제6식 이게 삼식(後三識)이잖아요. 그리고 안이비설신 오식(前五識)이잖아요. 그 전5식하고
후3식하고, 팔식이 계속 몸에 집착하고 내 몸에 집착해서
살아가는데, 그게 전부가 — 물질도 허망하고 내 몸도 허망한데 — 허망한 것을 위해서 조금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그걸 망상이라고
그래요. 허망한 생각이라고. 그 망상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 팔식에 의해서 몸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걸 근진아(根塵我)라 하고 팔식아(八識我)라고 그런다.
(根塵我 · 八識我 · 執我 · 存我 · 淨我 · 靈我)
(근진아 · 팔식아 · 집아 · 존아 · 정아 · 영아)
그래서 범부들은 나에 집착을 하고(집아
執我), 보살들도 상당한 제7지(七地)까지 가기 전에는 "내가
이런 걸 한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걸 존아(存我)라 그래요. 나를
가진다, 있을 존(存) 자
나 아(我) 자.
근데 제8지가 넘어가서는 그냥 닦지 나라는
생각이 없어요. 나라는 생각이 청정해졌어. 그걸 정아(淨我)라고, 깨끗할 정(淨) 자 나 아(我) 자.
그다음에 성불을 하게 되면 영아(靈我), 신령 영(靈) 자 나
아(我) 자. 신령스러운
나가 됐다. 근진아(根塵我)에서
영아(靈我)가 됐어. 이게
성불이에요. 이 영아에 대해서는 계속 설명이 될 거고요.
이 화엄행자들은 보살도 닦는 거하고 일승(一乘) 화엄행하고 다른 걸 말하는데, 보살도는 하나하나 나쁜 거는 쉬고
좋은 건 만들고,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심(自淨其心)하고, 이게 보살행이거든요. 악은 안 짓고 선은 짓고 나쁜 생각을 맑히고.
그런데 이 화엄행자는요, 일즉일체(一卽一切)라. 한 번 마음
딱 내면 그게 바로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뭔 소리인지 이상한... 그러니까
비 한 방울이 온 우주의 물인 거예요. 하나를 이루면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그래서 그냥 갈 뿐이지 나쁜 걸 끊고 좋은 걸 만들고 그게 아니에요. 이
화엄행이라는 거는 하나를 이룰 때 다 이룬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그러니까 이 화엄행은요, 법성게 법문 딱
듣는 순간에 이미 성불을 한 거예요. 근데 왜 성불한 줄 모르냐. 해인삼매에
안 들어가서 모르는 거예요. 해인삼매에 딱 들면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라, 바로 성불인 거예요. 그런데 이 중생의 망상으로 계산하니까 아니거든. 그래서 중생의 망상으로 성불한 줄을 모를 뿐이지, 본래 이 화엄
해인삼매는 하나가 일체인 거예요. 일체가 하나인 거예요. 일념(一念)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념인 거예요. 그게 화엄행이에요.
보살행은 나쁜 거는 없애고 좋은 건 만들고 이게 보살행인데, 화엄행은 하나 이룰 때 모든 걸 다 이루고 모든 걸 이룰 때 그게 하나야. 이게
화엄행이에요.
그래서 화엄행자는 단망망상(斷妄妄想)이 없다. '망(妄)', 허망한 걸 끊는다고 하는 그것을 망상으로 봐요. 허망한 것이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데,
자성이 없으면 실체가 없다는 얘기잖아요. 자성이 없으면 끊을 게 없잖아요.
근데 보살까지는 나쁜 건 기어코 버리려고 그래요. 나쁜
걸 기어코 버리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를 이루면 모든 걸 다 이룬다"고 하는 그 해인삼매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망(妄)을 끊겠다고 하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망망상(斷妄妄想) — 처음에는 나에 집착하는 망상이 있었는데, 그다음에는 단망망상이
있다. 망을 끊겠다는 망상이다. 무슨 소리인지 참 어렵긴
어렵지. 끊을 단(斷), 허망할
망(妄), 허망함을 끊겠다고 하는 것이 화엄행자에게는 망상이다, 이 말이에요. 나쁜 걸 끊으려고 하는 게, "하나를 이루면 모든 걸 이룬다"고 하는 해인삼매에
방해가 돼요.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렇게 돼요.
是故若入一乘。要息三乘 謂斷妄想之心。若不息其謂斷妄想之妄想。則以不息妄想故。必不得入也。然則斷妄想之心。斷除不起。是名此中息妄想也
시고약입일승。요식삼승 위단망상지심。약불식기위단망상지망상。즉이불식망상고。필부득입야。연즉단망상지심。단제불기。시명차중식망상야
(法界圖記叢髓錄 卷第一. 한불전6-787上)
그래서 "하나를 이루면 일체를
이룬다, 일체가 하나다" 이런 거를 왜 모르냐. 그 아집을 바로 무명(無明)으로
보거든요. 하나를 이루면 일체를 이룬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무명,
어리석음.
그래서 이 어리석음이 뭐냐. 이 '나'라고 하는 건 비로자나불이고 해인삼매인데, 해인삼매가 나인데, 이 자기 몸으로 나를 삼는다. 그게 어리석음이라고 원각경(圓覺經)
문수장(文殊章)에서 말하거든요.
云何無明고 妄認四大하야 爲自身相하고 六塵을 緣하는 影으로 爲自心相이니라 … 由此하야 妄有輪轉生死하니 故名無明이니라(圓覺經 文殊章)
운하무명고 망인사대하야 위자신상하고 육진을 연하는 영으로 위자심상이니라 … 유차하야 망유윤전생사하니 고명무명이니라(원각경 문수장)
망인사대(妄認四大)하야 — 사대(四大)는 자기 몸, 지수화풍 사대거든. 몸을
잘못 알아가지고 위자신상(爲自身相), 자기 몸을 삼고. 이 몸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몸인데, 이걸 내 몸으로
딱 집착을 한단 말이지.
그리고 육진(六塵)을 반연하는 그림자, 이 생각이라고 하는 건 그림자와 같은 건데. 그림자가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몸이 멈추면 멈추고, 그거 아니에요? 근데 우리 생각도 뭐가 있으면 있는 거 보고 없으면 없는 거 보고, 이
환경 그대로 쫓아가는 것이 그림자가 몸 쫓아가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중생의 생각을 그림자라 그래요.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게 전부 그 경계·환경을 쫓아가는 그림자였는데, 가만히
있어도 과거에 봤던 거, 앞으로 뭐 할 거, 지금 경험한
거 — 물질뿐이에요, 생각 속에는. 근데 그 물질에 따라서 생각이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각은
그림자와 같다, 물질은 몸과 같다.
그래서 그림자와 같은 생각을 자기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고, 이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 따라 움직이는 건데 그걸 자기 몸이라고 집착하고 있어서, 이로 말미암아 망유윤전생사(妄有輪轉生死)라, 나고 죽음이 계속되는 것이 허망하게 있다. 그래서 그것을 어리석음(無明)이라고
한다 이거든요.
그래서 어리석음은 딱 간단해요. 이 몸이
영원한 몸이고 하나밖에 없는 몸이라고 집착하는 거, 자기 생각을 자기 본래 마음이라고 집착하는 거. 그게 아집이고 그게 어리석음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 생각 속에 지혜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나예요. 생각은 그림자고 지혜가 나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을 나라고 집착한다. 그래서 생각은 도둑과 같고 지혜는 주인과 같은데, 도둑을 주인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걸 인적위자(認賊爲子)라고, 도둑을
오인해서 자식을 삼았다.
그거 가만히 보세요. 지금 생각이 움직이는
거 있죠. 그게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 생각 따라갔다가 절단 나는 수가 있어요. 그게 생각에 속는 거예요. 내 생각에 내가 속고, 내 몸에 내가 속고.
내 몸에 내가 속는다는 건 뭐냐. 나 자신도
속았는데, 몸이라는 게 늘 건강한 줄로 내가 착각하고 있었어요. 젊을
때 뭐 나는 잘 하는데 노스님들 잘 못하시거든. "아 왜 스님, 그것도 못 하셔" 그러면
"너도 나이 먹어 봐라" 이러더라고. 그냥
기분 나쁘고, 나이 안 먹어봤으니 할 말이 없잖아요. 근데
이 몸이라는 게 늙어 보니까 이렇게 뭘 못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몸이 늘 건강하고 자라는 걸로 젊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몸에 속는 거예요. 이 생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고
허망한데, 그 자기 생각이 옳은 걸로 또 믿고 살아가요. 생각에
속아요. 그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 생각을 딱 멈추면, 생각 속에는
지혜가 있어요. 그 지혜가 나예요. 그래서 이 생각은 파도와
같고 지혜는 물과 같은 거예요. 파도는 움직이는 거잖아요. 움직이는
것을 물이라고 착각하는 거와 똑같고요. 생각은 구름과 같고 허공은 지혜와 같은 거예요. 근데 허공을 못 봤을 때는 구름을 허공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구름에서 허공을 아는 거고, 파도에서 물을 아는 거고, 그게 깨달음이에요.
이 깨달음의 과정을 보면, 첫 번째가 견상관공(見相觀空)이라고, 볼 견(見) 자 형상 상(相) 자, 이 형상을 딱 보는 거예요.
형상을 보고 형상을 쫓아가는 거는 육도 범부(凡夫)고, 보살은 반야 공관(般若 空觀)을
하는데. 반야 공관이라는 건 뭐냐, 이 물질을 가만히 보면
물질 자체가 없어요. 이걸 관공(觀空)이라고 그래요. 물질 자체가 없는 걸 본다, 볼 관(觀) 자 빌 공(空) 자. 이게 견상관공을
해요.
견상(見相)하고 집착을 하면 범부고, 견상하고 관공을 하면 보살이에요. 이거 뭐든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형상은 있고 무게는 있는데 자체가 없어. 이
자체가 없음을 보는 걸 관공이라고 그래요. 또 눈으로 이 형상을 보는 걸 견상이라 그래요. 이게 첫 번째 수행이에요.
견상관공. 산을 봐도 산의 자체가 없어, 다 이게 불생불멸이야, 그게 공이거든요. 그런 사람하고 등산하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요. 산에 올라갔는데 "야 경치 좋네" 그러는데 "산이 다 공한 거야, 불생불멸이야" 이러는데. 근데 여기서부터 해탈이 되는 거예요.
견상관공을 하면 이제 어떻게 되냐. 멸진합각(滅塵合覺)을 하는데, 이
상(相)이라고 하는 이 티끌은 없어요. 이게 멸진(滅塵)이에요, 없어질 멸(滅) 자 티끌
진(塵) 자. 상은
없고 이 상을 바라보는 마음만 있는 거예요. 이걸 합각(合覺)이라고 그래요, 합할 합(合) 자 깨달을 각(覺) 자.
견상관공은 상을 보고 상에서 집착하지 않고 공을 보는 것이고, 이 상을 보는 것이 바로 자기 마음이야. 그래서 이 상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보면 견상관공 다음에는 멸진합각인데, 티끌티끌마다
형상형상마다 형상은 없고 마음만 있는 거야. 이게 멸진합각이라.
예를 들면 연못에 가서 연못 안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자기의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림자가. 그러면 그게 상(相)을 보는 거예요. 근데 모습을 가만히 보면 물에 자기 모습이 없어, 이것을 공(空)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에 뭐냐, 무슨 모습이 물속에서 보이든지
전부 물뿐이야. 이게 멸진합각이에요. 그림자는 없고 물만
있다.
이게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멸진합각이
돼요. 수행이 깊으면 물질은 없어요, 마음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각광(覺光)이 적조(寂照)하야 — 그 마음의 광명이 그림자 없이 늘 비춰요. 해도 그림자가 있고
달도 그림자가 있고 촛불도 그림자가 있는데, 이 깨달은 광명의 빛은 그림자가 없어요. 또 어디 장소가 따로 없어요, 어디나 다 있어. 그래서 이걸 그림자 없이 비춘다고 해서 고요 적(寂) 자 비칠 조(照) 자, 적조라고 그래요. 고요히 비춘다.
그래서 상자원명(常自圓明)이라, 항상 스스로 둥글고 밝아. 둥글다는
얘기는 없는 데 없이 다 밝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물질에
집착하고 몸에 집착해서 근심 걱정하는 것은 이건 그림자와 같은 거지, 본래 자기 지혜가 아니다. 자기 지혜는 적조원명이다. 그림자 없이 비추고 둥글고 밝다.
그다음에 식변몽생(識變夢生)하고 — 생각이 변하면 꿈이 돼요.
또 몽성환식(夢醒還識)이니 — 꿈에서 깨어나면 도로 생각이니. 식멸지현(識滅智現)하면 — 이 생각이
사라지고 지혜가 나타나면. 지혜가 조금씩 드러나면 생각이 줄어들어요.
지혜가 점점 밝아질수록 생각은 더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없어져 버려.
그래서 생각이 없어지면 근심은 없어. 근심은
전부 생각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뭐 걱정하고 뭐 걱정하고, 그런데
그거 전부 자기 생각이에요. 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고요. 그래서
무슨 괴로운 일이 생긴다든지 근심되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을 딱 거둬 잡으면 끝나요. "그 사람한테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는데 어떨까" 그래서
그 사람 찾아가서 사과해봐야 소용없어요. 그 기억을 딱 멈추면 그게 바로 지혜요. 지혜가 나타나면 걱정은 없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 원명(圓明)하고, 식멸지현하면 지광(智光)이 영명(靈明)이로다. 지혜 광명이 신령스럽고 밝다. 신령스럽다면 그림자도 없고 주소도
없고, 그런데 늘 밝아.
어떤 사람은 이 마음이 눈에 있느냐 귀에 있느냐 가슴에 있느냐 손에 있느냐 — 겁이 나면 손이 떨리니까 이게 손에 있을 것도 같다. 없어요. 주소가 없어요. 마음은 그럼 없느냐? 있어요. 늘 알아차려요. 주소
없이 알아차리는 게 마음이에요. 이걸 원명(圓明)이라고 그래요, 둥글고 밝다고.
모르는 것도 같은데 또 듣기는 잘 하네요, 아는
것도 같아요. 지광이 영명이라, 신령스럽구만. 신령스럽다는 말은 있는 데가 없다는 거고, 또 밝다는 말은 항상
알아차리고 항상 움직인다 그러고요.
각광지광(覺光智光)이 광명변조(光明遍照)하고 — 그 깨달은 광명, 지혜 광명이 온 우주를 다 비추고. 무구정광(無垢淨光)이
영명소소(靈明昭昭)라 — 무구(無垢)라는 건 때가 없단 말인데, 때라는
건 변하는 거지요. 변함없는 청정 광명이 신령스러운 밝음으로 밝고 밝다. 뭐든지 다 알아채고 뭐든지 다 본다.
이걸 비로자나불이라고 그래요. 이거를 가르치는
게 이 "시고행자 환본제 파식망상 필부득" 그런
거거든요.
根塵相對에 識生其中하니 背覺하고 合塵으로 生死流轉이로다
근진상대에 식생기중하니 배각하고 합진으로 생사유전이로다
見相호대 觀空하야 滅塵하고 合覺하면 覺光寂照하야 常自圓明이로다
견상호대 관공하야 멸진하고 합각하면 각광적조하야 상자원명이로다
識變夢生하고 夢醒還識이니 識滅智現하면 智光이 靈明이로다
식변몽생하고 몽성환식이니 식멸지현하면 지광이 영명이로다
覺光智光이 光明遍照하고 無垢淨光이 靈明昭昭하도다
각광지광이 광명변조하고 무구정광이 영명소소하도다
八識我 = 聰明 說明 神明
팔식아 = 총명 설명 신명
智光我 = 靈明 圓明 常明
지광아 = 영명 원명 상명
아, 이제 게송은 이렇게 설명을 했고, 오늘은 좀 특별 법문을 하나 들려드리려고 그러는데. 특별 법문이
뭐냐, 한번 들어보세요.
(특별 법문 하려면 주머니에서 꺼내야 되는데… 장삼이 하도 커서, 주머니까지 손이 들어가려면 잘 안 나오니 이걸 꺼내야 돼요. 켜야
돼. 네. 너무 가까이하면 안 돼, 이거… 머리가 움직여서 그래. 이거
왜 어디로 갔어? 응, 거기 거기 앉아 계셔. 오지 마요, 오지 마요. 왜
혼자 할 때 잘 됐는데 왜 안 돼? 원래 그래.)
인생을 오로지 핸드폰에 맡기고 세상을 향해서 떠돌고 떠돌 때 몸에는 뜻밖의 흰머리
와 있네 숨 쉼이 멈추면 무엇이 남을까 숨 쉼이 멈추면 무엇이 남을까 숨 쉬는 이 몸은 꿈같이 떠나리 참 몸을 찾아서 힘차게 살으리 참 몸은 불성몸
눈앞에 늘 있네 눈 떠서 만나면 언제나 기뻐라 눈 떠서 만나면 언제나 기뻐라
이게요, 이 가사는 제가 만들었고요. 이거는 AI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AI로 (곡을) 만든 거예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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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6일 국행수륙재 입재 법문
법산스님 2026-09-06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이고, 이 천동(天童)·천녀(天女)들이 삼성(三聖) — 서방
삼성에 외호(外護)를 해가지고 —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대세지보살, 큰 회상 삼성의 안내를 받아서 환영(歡迎), 부처님의 도량에 왕림을 하시는데, 우리 천동 천녀가 같이 다 함께
이 자리에 오신 것 같습니다. 아주 반갑습니다.
우리 주지스님이 나보고 여기 와서 오늘 입재 법문을 해달라 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되나 해가지고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진관사에는
국행수륙대재(國行水陸大齋)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서,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국가와 민족과 전 국민의 평화를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재(齋)를 올리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고, 그래서 우리 모든 생명은 다 함께 더불어서 — 과거를 존중하고 과거를
이어서 계승하지 못하면 오늘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면서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조상과 현재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들과 미래의 자손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그 정토(淨土)의 세계를 만들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국행수륙대재라는 것은 국가가 정하고 안 정하고 할 것 없이 우리 스님들은
옛날부터, 불교가 시작될 때부터,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입될
때부터, 신라·고려·조선시대를
이어서, 다만 전쟁의 환란 속에서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 여러 가지 부침(浮沈)은 있었지만, 그러나
몇백 년이 그 생명을 유지하고 오늘날 다시 이렇게 지정을 받고 또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참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가지고 49일 동안
우리는 증진(增進)하는 정진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가 다 하는데, 제가
어려서도 이제 전에 와가지고 염불(念佛)을 배웠는데, 그 천도재를 하고 할 때 보니까 옹호게(擁護偈)를 먼저 하더라고요.
擁護聖衆滿虛空 都在毫光一道中 信受佛語常擁護 奉行經典永流通
옹호성중만허공 도재호광일도중 신수불어상옹호 봉행경전영류통
그래가지고 옹호게를 저 하게 멋지게 열어가지고 팔부신장(八部神將)님들, 옹호신장(擁護神將)님들의 도량이 안정돼야 되거든요. 그게 뭐냐, 우리 모든 생명들이 자리에 함께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야
돼요.
그래서 천수경을 할 때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을 하는 것도 바로 옹호게를 하는 거와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회에 참석하고 함께하는 대중들이 모두가 다 한마음이 되고 편안하고 기분
좋고 즐겁게, 법회를 쭉 진행을 하고 마지막에 가서 삼회향(三回向)을 하거든요. 회향을 해서 멋지게 잘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그래서
공연을 잘 해가지고, 대중이 집에 돌아가면 그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 지혜로운 그 광명이 가정에 가서
일을 해도 눈이 밝아서 척척 보이고, 귀가 밝아서 뭐든지 척척 들리고,
그래서 마음이 밝아가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경영을 해나가면서 모든 생명과 더불어 스트레스 전혀 없고,
일일이 낱낱이 잘 통해서 잘 되는, 이게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가 다 그렇게 함께 즐겁게 살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게 불교, 부처님 사상이야. 그 부처님 사상이 얼마나 좋아요, 참 좋아. 그런데 여 진관사에는 염불을 하는 신도님들이 어떻게 염불을 잘하는지, 참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내가요, 내가 통도사 염불원장이요. 염불원장이 되고 싶어서 염불원장이 된 게 아니고, 내가 이제 어려서
전에 한 14살 때 와가지고 우리 스님 따라서 북도 짊어지고, 꽹과리도
짊어지고, 징도 짊어지고, 그래가지고 사람 돌아가신 데 가면은
가서 2박 3일 동안 하니까, 밤새고 두 밤 자면서 내내 염불을 해요. 그래가지고 뭐 또 하다가
또 쉬다가 쉬고, 쉬다가 또 하다가, 그래 이제 다 장례
치러지고 돌아오고 그러거든요. 그래 이제 따라다니다가 보니까 이제 옆에서 이제 서당개 3년에 뭐 한다고, 나도 이제 읽고 그러는데, 어쨌든 저래 해서 내가 학교 다니려고 하다가 가지도 못하고, 절에
가서 공부한다 카더라 싶어서 그래서 내가 사실 왔거든요. 왔더니 스님이 공부를 가르쳐 주는데,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굉장히 기분이 좋더라고. 그래가지고 염불도
막 적적히 외우고, 백팔참회게(百八懺悔偈)도 해신고, 그런 것도 해가지고 —
"슬프고 슬프도다, 이 어이 슬프던고"
— 하면서 할매들 오면 해주니까 뭐 할매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래 이거 뭐 사탕도 사다
주고 뭐 해 다 사다 줘요. 양말도 사다 주고. 그래 또
할머니들 며칠 쉬면서 이래 딱지 치고 놀고 하면은, "물 떠 놔라" 하면 "예"
하면서 또 물 떠다 드리고, 밥도 해드리고, 뭐
다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할머니들이 "니는 크면
큰 스님 되라" 하는 게 딱 마음에 박히는 거야. 그
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니까요. 큰 스님이 되는데 어떻게 큰 스님이 되는가 싶어가지고, 막 그래가지고 꾸준히 살다가 보니까 내가 교수가 되고, 그래가지고
그 동네 이사장도 하고 또 법계위원장도 하고 했는데, 통도사 이제 정년퇴직하고 통도사 또 가가지고 저
선방에 다니다가, 통도사 갔더니요, 그래 이제 염불원이 생겼어요. 총림(叢林)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염불하는 신도님들이 다 해요.
그런데 또 나도 모르던 게 또 알게 된 것이, 내가
여기 옛날에 송암 스님, 봉원사 근데 법문하러 가면은 송암 스님이 와서 염불을 하시는데, 그 스님이 그렇게 염불을 잘하시더라고요. 노인네가 참 깔끔한 노인이
염불을 잘하시는데, 참 겸손하고 참 청(聲)도 좋고 참 좋으시더라고. 내가 참 그 스님 존경하고, 그래서 내가 대만도 한번 모시고 가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이제 그
염불이 제일인 줄 알고 그렇게 살고 했었는데, 어쨌든 내가 어려서 스님한테 따라다니면서 배운 덕택에
절에서 부전(副殿) 살이나 하고, 알바는 잘했어요. 그래가지고 그래서 실제로 학부 등이고 석사 과정
박사 과정 그 덕택에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어려서 우리 덕자 산자, 덕산
스님이 내 은사 스님인데, 그 스님한테 내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그 스님이 염불을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따라서 하다가 보니까 이렇게 된 건데,
어쨌든 고맙잖아요. 그래서 내가 은사를 절대 안 바꿉니다.
그래서 통도사 내 경자 봉자 스님한테 법사(法嗣)를 선방에 있으면서 하고 해서, 총무원에 직원들이 "스님, 다른 사람은 은사 바꾸는데 스님은 왜 안 바꿉니까?" 나는 그 스님한테 염불도 배우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배우고, 절에서
유가하는 것도 배우고, 그 꽃 만드는 거 좋아하는 거, 그거
가시개(가위) 가지고 오리 가지고 눌러가지고 이 실 감아가지고
하는 거요, 손에 피가 나도록 그거 다 배웠죠. 또 고추장
담그는 거, 된장 담그는 거, 그거 뭐 다 그런 거 다 배웠지요. 그런데요, 그때 싫다는 생각 없이 배운 것이 지금 와서 딱 보니까
그게 바로 부처님 공부야. 총체적인 위의(威儀)를 지니는 것, 총체적인 불교는 그게 총체적인 불교라.
그래서 배추김치 담그는 것도 그게 불교다. 배추가요, 그게 밭에서 씨앗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밭에 거름을 먹고 자라가지고요, 거기에 포기가 탁 잘 앉았을 때 확 싹둑 잘리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놈을 잘라가지고서는, 앞에 겉잎을
떼보고 그거 해보고서는 소금을 흩쳐가지고요, 배추를 해가지고 막 죽살이(절임)를 만들잖아요. 소금을
뿌려가지고, 소금을 뿌려가지고 하니 배추가 아주 그냥 소금에 절여가지고 그냥 침이 팍 죽어가지고 맥을
못 추네. 그래서 숨이 푹 죽은 놈을 해가지고 물에다 헹궈 가지고, 거기에다가
또 고추장 생강 고춧가루 해가지고 온갖 거 다 집어넣어가지고서는, 그거 집어넣잖아, 그래 해봤지, 스님들 다 하잖아요.
특히 우리 주지스님 잘 하잖아요, 회주스님 잘해. 그래가지고서는
그 배추를 딱 이래 오므려가지고 단지에다가 집어넣어 가지고, 언저리 꼭꼭 눌러 눌러가지고서 위에다가
돌멩이까지 눌러가지고 꼼짝 못하게 매는 기라. 아, 그러니까
그놈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거기에서 자기 공부를 하는 거는 그게 참선이라, 그게 염불이여, 그게 정진이여. 거기에서
자기대로의 정진을 해가지고, 성질 어리석은 거 전부 다 — 특히
성질을 갖다가 안 죽을 수가 없죠.
팍 죽어보는 거라. 그러니까 발효가 돼서
푹 익어지니까, 그래 익은 김치는 맛이 있거든요. 김치가
익어야 맛있지. 그러니까 배추가, 생배추는 성질이 있어가지고
텁텁한 것도 있고 별로 안 좋은데, 그게 쑥 그 김치로 해가지고 삭아가지고 푹 그 성질이 죽어버리고
나면은, 배추를 먹으면은 독성도 없고 아삭아삭아삭해가지고 얼마나 맛있어. 아이고 참 관세음보살. 그래가지고 배추김치도 그렇게 익어야 맛이
나듯이, 모든 생명도 익어야 되는 거야.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익기 위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불교를 믿습니다.
불교, 여 질문에 들어오죠. 일주문에 들어오면은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라. 이 문 안에 들어오면은 모든 문 밖에서의 분별 의식, 차별 의식, 이런 거 다 버리고 들어와라, 이 말이야.
시집갈 때 우리 보살들, 요새는 가마 타고
시집 안 갔지만은, 옛날에는 시집갈 때 떠억 내려가지고 가마 이래가지고, 가마꾼 우리 어려서 보면 회주스님 봤죠, 들어가잖아요. 그렇죠. 보기는 봤잖아요.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가지고 하면은
옛말이 뭐냐 하면은 시집가서 문 앞에 들어가면 대문 앞에 들어갈 때 봉사 3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3년을 봐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말하고 싶어도 참아야 된다. 그래가지고 요래
눈도 가리고 귀도 가리고 그래가지고, 3년, 3년을 잘 지나야, 그래야 그 집 식구가 된다. 그게 이제 수행하는 과정입니다. 살아 있는 과정입니다. 어디든지 무엇을 하든 간에, 무엇을 하든 간에 우리가 처음부터 잘 되는 거 없습니다. 우리가
일주문에 들어오는 것도 그런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다 버리고 들어오면은, 어쨌든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래서 수행이 되면은 한강 물이 정수기를 통해서 나갈 때 그
물을 마셔도 괜찮아. 이거 수돗물은요, 정수기를 거친 거거든요. 정수기를 안 거치면 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정수기를 거쳐 들어오듯이, 불교의
모든 수행은 바로 정수기를 거치는 순간 우리는 달라집니다. 확실히 달라집니다.
부처님 앞에 와서, 부처님 말 안 합니다. 가만 탁자에 앉아서 가만히 계셔요. 눈도 깜짝 안 해요. 부처님, 부처님헤도 들은 둥 만 둥, 눈을 이래 가지고 봐도 본 둥 만 둥, 표정이 없거든요. 그런데 저마다 제 표정에 따라서 "아이고, 부처님이 나를 갖다가 불쌍하게 보네." 그렇게 다 알거든요, 스스로 그렇거든요. 그럼 부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어디 있느냐, 내 마음에 있어. 내 마음에 있는 대상이 이 탁자에 있는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디 있느냐,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KBS에 가서 사회교육방송 교육을
한 5년 했는데, 그때 무슨 제목이냐 하면은 "공산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는 대북방송이라요. 그 방송을 내가 5년을 했습니다.
했는데, 하면서 뭐라 하면 안 될까 싶어
혹시 무슨 위험할까 싶어가지고 "공산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법산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추석날인데, 오늘 송편을 빚어 먹는 날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명절을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아주 한가위, 아주 즐거운 명절, 이 명절에 여러분이 빚어
만든 송편의 맛이나, 우리 남한에 있는 모든 국민들이 빚어서 만든 송편의 맛이나 그 안에 깨가 들어가면
깨 맛이 나고, 콩이 들어가면 콩 맛이 나고, 밤을 까가지고
넣으면 밤맛이 나고, 그래서 우리가 빚은 대로 만든 대로 맛이 각각 느껴지는데, 평양의 맛이 다르고 서울의 맛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송편을 먹으면서
같은 한 맛이 되어서, 그 맛으로 우리는 미래에 영원히 영원히 이 맛을 전승하고 보존해서, 언젠가는 서로 한 상에 앉아서 송편도 빚고 같이 나누어 먹는 그런 날을 기대해 봅시다" 하면서 그런 얘기만 하거든요.
그런 얘기는 안 걸리잖아요. 그래 가지고
했더니, 나중에 어떤 탈북한 사람들이 와가지고 "이법산
선생님, 내가 방송 들었습니다요" 하고,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어가지고 인사하는 거 봤거든요. 근데 그 사람도
국민 배우여. 그래서 나중에 보니까 또 똑같이 또 방송도 타고 그랬거든요.
그랬는데 방송 녹음하고 오는데, 거기 교회가
큰 게 있잖아요, 무슨 교회고, 그 큰 교회 있잖아요. 그 교회 앞에 버스가 딱 서면, 오는 어떤 아줌마가 딱 차를 타면서
내가 스님이 앉아 있는 거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는 거라. "아이야, 뭐가 갑자기 내 앞에 타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카네" 그
아줌마한테는 사탄이 된 거여.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가만히 있어.
근데 서울역에서 또 다른 차 타는데,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이래 가는데, 아기가 "엄마 엄마, 부처님이다, 부처님" 그러는
거야.
그런데 어떤 마음에는 사탄으로 보이고, 어떤
마음에는 부처님으로 보이고. 그러니까 그 애기는 항상 우리 어린이 애기가 바로 부처님이거든요. 그 마음에는 어린이들 마음, 태어나서부터 부처님을 새겨줬기 때문에
스님들을 보면은 부처님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스님들 보고 교회에서
"이것은 사탄의 옷이오, 이것은 사탄의 모습이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읍시다, 아멘" 하고
그런 사람한테는 사탄으로 비치는 거예요. 그래 나는 이런 거 가만히 보면, 내가 부흥회 목사가 됐으면 돈 좀 벌었을 거다 싶어.
어쨌든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우리는요, 이 머리 컴퓨터가요, 대단히
좋은 겁니다. 본래 이 컴퓨터는 아주 맑고 밝고 깨끗해서,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변함이 없는 겁니다.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건 불변의 컴퓨터입니다. 이것은요, 흉내 낼 수도 없습니다. 요새
AI한테 교육을 시켜가지고 뭐 해쌓는데, AI 그거 전부 거짓말이야, 흉내 내는 거라요. 그건 믿으면 안 됩니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습니다. 그거는 하지 말고, 자꾸 그거 뭐 조금 검색해 가지고 그거 보고 흉내 내고 하는데, 전혀
나는 그거는 아니다, 그건 아니다고. 그래서 우리는 인간적이
돼야 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적인 맛을 가져. 이제 쭉 들어오면은
법당이 들어오잖아요. 법당이 쭉 들어오는데, 오늘 내가 진짜
해주려고 하던 게 있는데, 엉뚱한 데로 자꾸 저기 옹호게를 하는데, 금강문(金剛門)을 하면 사천왕이 있거든요.
사천왕이 금강같이 무섭죠. 눈도 부라리고, 칼도
뽑고, 야차(夜叉)도
밟고 있고 그러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 그 역사(力士)를 보고
어떤 스님이 시(詩)를 지어 읊었는데, 그게 이제 그 의식문에도 나오는 겁니다.
金剛寶劍最威雄 一喝能摧外道心 變改乾坤皆失色 須彌倒卓半空中
금강보검최위웅 일할능최외도심 변개건곤개실색 수미도탁반공중
이런 게송이 있는데, 이걸 내가 쭉 해주고
나무아미타불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 조금 시간이 지나고 있어가지고 시원치 않았어, 내가 보니. 그런데 금강보검(金剛寶劍)은 가장 위엄 있고 웅장한데, 금강역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보검을
가지고 있는데, 보배의 칼인데 굉장히 위험스럽죠. 그 위엄이
당당한 거라. 그래서 일할능최외도심(一喝能摧外道心)이라, 한번 팍 소리를 치면은 외도(外道)들의 마음이 그냥 혼비백산해가 싹 바뀌는 거라. 그게 스님들 법문하면서
한 번씩 이렇게 소리를 질러줘야 된단 말이야. 소리를 질러줘야 돼.
그래 옛날에 우리 경봉 노스님이 "이리
오너라, 손금 좀 보자" 해가지고 손을 이렇게 보이면
손을 더 보고 부산서 서울서 대구서 보살들이 많이 오거든요. 도인이라고 한마디 들을까 싶어가지고. 그래 손을 이래 해가지고 손을 이렇게 쓰다듬다가 손바닥을 탁 치고, 손바닥을
탁 치면 이제 소리가 제대로 났다, 그래놓고 깜짝 놀랄 거 아닙니까?
깜짝 놀라면은 "이 소리가 니 손바닥에서 났나,
내 손바닥에서 났나. 니 손바닥에서 나면 소리 내놔라."
니 손바닥도 아니고 내 손바닥도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거라. 우리는 모든 인연이 화합해가지고 어떤 상황을 변화시킨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불교는요, 인식이요, 시시때때로 바뀌어집니다. 시시때때로 지금 시간이 계속 멈춤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고 있는
그 순간순간도 없어,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 변하는데 물질도
계속 이 컵도 변하고 있고, 우리 얼굴도 변하고 있고, 늙고
있는 거. 내가 이리 거울을 가만히 보니까, 내가 16, 15, 20살 제일 고왔을 때가 19살 20살, 이럴 때는 고왔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는 스님들이, 사람들이 보고 "아이고 저리 예쁜 색시가 왜 저래 왔는가" 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거든. 근데 나를 여자로 보는 거라. 나를
갖다가 멀리서 보고서는 왜 그러는가 싶었더니, 내가 속눈썹이 길거든요.
이거는 모르겠는데 속눈썹이 길어가지고요, 나도 몰랐는데,
어느 날 자꾸 그래 말해서 내가 또 보니까 속눈썹이 길기는 길어. 이래이래 좀 엄지손가락
이리 앉아서 이 위로 위로 이리 됐어요. 그래가지고 내가 거울을 딱 보고서 요 눈썹 여기다가 성냥 개비를
이렇게 얹어보니까 얹히는 거라. 그래도 하나 더 얹었거든요. 하나
더 얹으니까 이 속눈썹에 얹혀. 그래서 "내가 눈썹이
이렇게 올라갔구나" 했더니, 나중에 여자분들 보니까
눈썹을 이렇게 해가지고 예쁘게 해서 잠자리(속눈썹 뷰러) 이런
걸로 올려놨더라고, 이거. 그래서 그렇구나 싶어서요. 그래서 내가 별로 이쁘다는 거는 모르는데, 어쨌든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이제 얘기하는데, 그때 어쨌든 젊어서는 조금 좀 고왔던 것 같아.
근데, 근데 지금은요. 다 늙어 빠졌어 해가지고 더덕더덕하고 별로 시원치 않아.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라도, 아직까지는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거든요. 이
세포가 계속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지 않는, 변화하지 않는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컵이 안 변하는 것 같지만은 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 컵이 원래는 흙이거든요, 먼지거든요. 흙 먼지인데 뭉쳐가지고 유약을 해서 그릇을 만들어 놓으니까 이 그릇이 됐지,
결국은 이 그릇도 언젠가는 깨어지고 녹아서 본래 흙으로 돌아갈 거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본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물질은 하나도 없고, 다만 우리 마음은 계속 변화하면서 업(業)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
업이 상향으로 지어가느냐 하향으로 지어가느냐에 따라서, 상향으로 지어가면은 선인선과(善因善果) 나쁘게 지어가면은 악인악과(惡因惡果)가 되고,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기쁘게 살면 항상 기쁨이 오고, 조금 버릇 안 좋은 사람을 상대를 하고 안
좋은 짓을 하면은요, 꼭 그렇게 안 좋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중선봉행(衆善奉行)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그래야 돼. 보기 싫은 건 안 봐야 돼요. 그리고 뭐라 싸우면은
살짝 피해버리면 돼요,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래서 저도요, 평생 오늘날까지 해주신 살면서 가마히 싫어하는 사람 혹시 있거든요. 왜,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은, 혹시 상대가 되어가지고 자기 자리에
앉을까 싶어가지고 시기하는 사람, 탐욕이 조금 있는 사람한테는 그게 걸리더라고. 그게 걸리는 게 없으면은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해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주 좋은 거야.
그런데 어쨌든 그래서 마음이 금강역사가 할! 하는
순간에 "변개건곤개실색(變改乾坤皆失色)"이라, 이 온 세상의 하늘과 땅의 일체가 다 빛을 잃게
되는 거라. 빛을 잃게 된다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수미도탁반공중(須彌倒卓半空中)"이라, 수미산도
일갈에 확 무너져서 공중에 둥둥 뜨게 된다 하는, 그런 이거 엄청난,
이건 선사들이 하는 시(詩) 같아요.
시라, 나도 요새 시를 하나씩 써가지고
시인이 되어가지고 시집도 만들고 그랬는데, 시를 하면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요, 어쨌든 간에 이 사천왕문을 딱 들어서면은요, 마음이
바뀌어야 됩니다. 그리고 떡하니 할배가 있잖아요, 포대화상(布袋和尙) 할배. 중국에는
가면은 사천왕문 들어서면 그다음에 포대화상 할배가 배를 뚝 내밀고 있거든. 그거 보면은 뭐 즐겁지 않을
수가 없어. 그래가지고 그게 행복을 주는 신(神)이거든요. 포대화상이 그 자루를 턱 짊어지고 와서 "하나 니도 하나 가져가라" 이 산타 할아버지의
원류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 건데, 그래서 이제 우리가 불교를
잘 믿고 하면은 되는데, 이제 불법은 전부 6조 단경(六祖壇經)에 있는 말입니다. 불법재세간(佛法在世間)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이라. 불법은 세간에 있어서,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이 없다.
그래서 만약 세간을 떠나서 보리(菩提)를 찾으려고, 깨달음을 찾으려고 하면은 흡여구토각(恰如求兎角)이라, 마치
토끼의 뿔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토끼는 뿔이 없거든요.
껍질만 있지 뿔이 없잖아요. 그렇듯이 우리는요, 헛된
생각을 안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살면서, 그냥
그대로, 그냥 이대로, 그게 제일 좋다 하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저기 살아가면서 이렇게 보니까, 내가
대만에서 6년 살았는데, 대만 스님들이 참 잘 살더라고요. 참 편안해. 이 사람 봉사도 잘하고, 스님들이 얼마나 잘 살아. 그러니까 불교가요, 참 잘 돼요. 근데 어떻게 해서 스님들이 그리 잘 됐느냐 했더니, 신도님들이 스님들을 잘 모셔. 신도님들이 신도님들이 잘 모셔가지고, 어디 가면은 "스님, 여기
오면 안 됩니다. 스님 여기 잡수실 게 없습니다." 뭘
사려 하면은 "스님한테는 그거 팔면은 죄가 됩니다."
안 팔아요. 그런데 무슨 돈이 있어서 쓸 데가 있나, 못
사는 거요. 어디 가면은 이발소도 내가 어디 머리를 어디 깎았느냐 하니까 그냥 깎아야 했던데 "이발소 가면 안 됩니다."
스님들 이발소도 못 가지, 목욕탕에도 못
가지, 운동장에도 못 가지, 저기 뭐 어디 가는 데가 없어. 그래 어디 가라 하면 "스님, 여기 오면 잡수실 게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됩니까? "저리 가면 채식집이 있으니까 거기 가세요." "아니, 여기서 뭐 채소만 골라 먹으면 되죠." "그것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돼지기름과 볶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꼼짝없이, 시민들의 그게
우리 불교 신도들이요, 신도님들의 교육에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만의 스님들은 훌륭하게 수행자로서 본분사(本分事)를 잘 지키고 있다, 난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신도님들이 스님들 잘 모시세요. 말만 가지고 가지 말고
실제로 잘 모셔야 돼. 그리고 스님들 공양을 잘 해야 돼.
스님들을 어쨌든, 우리 교수님이 아까 주지스님한테도
얘기했지만은, 여기 이제 홍윤식 교수님이 나하고 맨날 통화를 하면서
"관세음보살"이라고 그랬거든요. 전화하면은 "관세음보살" 하면은 어떤 때는 깜빡해가지고 "여보세요" 하면은 "관세음보살, 어디 갔어요?"
그런다고. 그 할머니, 노모가 계셨는데, 노모가 계셨는데, 내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니까 "애비야, 관세음보살 전화 왔다" 그러거든요. 그 소리는 듣는 거라요. 다른 사람 소리는 못 알아듣는대요. 그런 그건 할머니 노모 모친이, 법산 스님한테 전화 오면은 "애비야, 관세음보살 전화 왔더라" 그러고 얘기했다더라고요.
그래 이제 그럴 정도로 홍윤식 교수님하고 전화를 많이 하고 그런데, 가버리니까 섭섭하고, 또 조명기 교수도 가버리니까 섭섭하고, 우리 주지스님이 지금도 잘 모셔준다니까 아주 고맙고, 참 내가 우리
회주스님 주지스님 너무너무 고마워요. 여기 오면은 내가 여기 안 있어도 저 남쪽에 있어도 생각만 하면
고맙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산청을 지나면서 시를 하나 썼거든요, 산청
휴게소를 지나가면서. 그래가지고 송 교수한테다가 또 보내줬더니, 송
교수가 보고 와서 감회가 새롭더라고, 그 산청이 고향이 산청 아닙니까.
홍윤식 교수님 고향이 산청이거든요. 그런 산청 휴게소만 지나면은 생각이 나는 거라. 그랬고 했고 그랬는데, 어쨌든 우리가 좋은 인연을 가지고 살면 세상이
아주 편안하고.
心中若無憎愛心
심중약무증애심
身上豈有苦樂事
신상기유고락사
平等性中無彼此
평등성중무피차
大圓鏡上絶親疎
대원경상절친소
그래서 이제 6조 혜능 스님의 게송에도
전부 그런 이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그런 말이 있고, 평상심이 도라는 것은 이거 내가
진짜 해주고 싶은 말을 하나 써가지고 왔는데 우리 회주스님 이, 우리 자경문(自警文)에, 내 요새 초발심자경문을
자꾸 읽습니다. 요새 스님들이 초발심자경문을 새로 읽어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그래서 하는데, "심중약무증애심(心中若無憎愛心)이면 신상기유고락사(身上豈有苦樂事)리오" 하는 그런 말이 있죠.
마음 가운데 만약에 미워하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몸에 어찌 괴롭고 즐거운 그런 일이 있으리오. 평등성중무피차(平等性中無彼此) 대원경상절친소(大圓鏡上絶親疎) 우리 많이 쓰는 말이잖아요. 평등한 성품 속에는요, 피차(彼此)가 없습니다. 니 게 없고 내 게 없고, 니 편이 없고 내 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파 큰스님이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이 오니까 "평등성중무피차"라 하고 글을 써주셨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걸
가지고 가서, "성파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성파 큰스님께서 이런 글을 쓰셨다" 해가지고 하니까, 진짜 평등한, 모든 국민의 마음속에는 네 편 내 편, 좌다 우다 하는 것이 없거든요. 그걸 내놓고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대통령도 이 편 저 편
들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그래가지고 민주당 탈당하세요 해봤단 말이야. 그래가지고 막 이번에 잘렸다
카더라고요.
잘렸대. 그래가지고 제 편 들어야 되는데
안 들었다고, 아이고 어디 났더라고 보도해 났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제 성파 큰스님한테 "스님, 그런 글씨 써
주셔가지고요, 그 사람이 바른 말" "그
사람 괜찮은데" 했더니 "그랬는데요. 어제, 그저께 날아가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이 뭐냐 하면은, "평등성중무피차요" 어디 갔노, 내가 맨날 그거 하는데 "대원경상절친소"라, 그렇죠, 대원경(大圓鏡), 원만한 거울 속에서는 친소(親疎)가
없다. 우리는 친소가 있어가지고 차별이 생기거든요. 차별이
생기는데, 친소가 없으면 차별이 생길 게 없습니다.
세상에 맛없는 밥이 없습니다. 꽁보리밥도
요새 꽁보리밥이 좀 인기가 있잖아요. 나는요, 꽁보리밥을
얼마나 얼마나 먹었던지요, 보리밥만 보면은 이 보리가 눈을 부릅뜨고 다 쳐다보는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동네 어떤 애는 하나가 보리밥을 주니까 "엄마, 보리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네." 꽁보리밥이라고 이래 눈
부릅뜨고 쳐다보네. 그러니까 이제 가운데 쌀을 조그맣게 놨다가 어른들 걷어주고, 그다음에 애들은 꽁보리밥만 주니까 그런 거라. 그래 나도 꽁보리밥을
오지게 먹었거든요.
그리고 뭐고, 고구마 고구마하고 빼대기
삶아가지고 먹고, 그것도 하나 얻어먹을 거라고 얼마나 얼마나 늘어놓으면 그거 해가지고 먹고 그랬는데, 요새요,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던데요.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줄은 어떻게 생각했겠어? 주지스님 참
너무너무 좋아. 그래 나는요, 대단히 행복하게 생각하고 삽니다. 이게 부처님 덕택인가 보다. 내가 절에 와가지고 부처님 법을 믿어가지고
공부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그래 일타 스님이 해인사에서
법문을 하시면서 법상에서 "중 잘 됐다, 중 잘
됐다" 하고, "중 잘됐다." 내가 그 녹음 들었거든요. 들었더니 아이고 그게 내 소리
같아요. 그래 내가 어디 가서, 나도 자다가도 이래 무릎을
쳤는데, 내가 참 중이 잘 됐지.
우리 엄마가 내가 10살 때 돌아가셔서
그 덕택에 내가 절에 오기는 했지만, 정말로 내가 절에 잘왔다 안 그랬으면 내가 시골에서 소 먹이고
동네 마을에 새마을 지도자는 했을지 모르고, 마을 이장은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나이 많아도 다 하니까 아니, 어떻게 내가 동국대학 교수가
될 줄 꿈이나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다가 보니까 밀려가지고요, "이사장
안 한다고, 말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더라고요. "아니 스님, 내가 좀 시원찮아서요" 하면 안 됩니다. 그랬더니 "아야, 가만히 있으라고,
안 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우리 자광 스님 내일모레 자광 스님 법문하러 오시죠 자광 스님 대를 이어서 내가 이사장이 됐거든요.
동국대학교 이사장이 딱 되고서는, 자광
스님이 쓰시던 책상, 물컵, 오디오, 비서 뭐 하는 거 하나도 안 건드리고, 나는 전임자가 하시던 모든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그 전임자의 훌륭한 그런 모습들을 잘 계승을 해서, 앞으로 후임자들에게 전임자 욕하지 말고 후임자 무시하지 말고 그렇게 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금과 뒤에가 모두가 다 하나로 계승되면서, 이 국행수륙대재가 잘
계승되듯이 그렇게 나가야 된다, 그래야지 안 그러면요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고 해서 이제 그런데 이제 "삼도출몰정애소전(三途出沒情愛所纏)이오." 욕계
색계 무섭게 들고 나고 죽고 살고 하는 것은 정(情)에 미워하고
좋아하는 데서 거기 걸려 있고, "육도승침친소지격(六道昇沈親疎之隔)"이라, 육도(六道)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면서 고생 죽어라 하는 것은 친소(親疎)의 격(隔)이라, 친하고 안 친하고 하는 데서 그 격이 막혀가지고 그렇게 과보를 받아 그런다,
이 말이에요.
될 수 있는 대로 남을 욕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요거
하려면 요기 미리 준비돼 있다가 그래가 욕이 나오지, 준비된 욕이 없으면 절대 욕 안 나오거든요. 절대 안 나오는 거예요. 부처님 생각이 딱 돼 있으면은, 연꽃을 생각하고 있으면 연꽃 같은 향기가 나오고, 그렇지 독한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은 꼭 독한 말을 하게 되거든, 꼭 그래요. 불자건
불자 아니건 누구든지 그러합니다.
그리고 계심평등하면 본무취사(契心平等 本無取捨) 마음이 평등하게 딱 되면은 본무 버리고 가질 것이 없으니 약무취사(若無取捨)인데, 만약에 버리고 가질 것이 없다면은, 생사가 하유(何有)요, 생사가 어찌 있으리오, 그래 걸릴 게 없어요. 얼씨구 좋다 하고 착 가는 거야. 시방삼세(十方三世)요, 환영합니다. 다 환영해 줍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적어 온 거는 다 해줘야지. 그럼 "평상심시도"라.
그래서 우리 아까 총론으로 해가지고 평상심시도랍니다.
"평상심시도"라 이건 남전보원(南泉普願) 스님께서 한 말이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오는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 스님께서 한 건데, 우리가요, 항상 변화하는 속에서요,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여자성(眞如自性)은 절대 안 변합니다. 그거는 대원경상에서도 척 보이면 다 보입니다.
그래 내가 금강경 얘기가 나온다고 아까 내가 금강경 하다가 얘기했는데, 금강경 10만 독 발원을 해가지고 지금 8만 3천 독, 어제 그제
했습니다. 8만 3천 번 했는데, 금강경을 이제 10만 독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시작하다가
보니까 10만 독이 됐어. 그러면 보조국사(普照國師) 논문을 쓰다가 보니까, 보조국사가
송광사에서 소위 경전으로 금강경을 해라 그러니 내가 금강경을 해야 되겠다. 그래 금강경을 매일 하루
한 번씩 하다 보니까 좀 부족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10만
독 발원을 해가지고 금강경 독송회 하는 사람들 보니까 하루 7번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나도 10만 독을 발원하고, 하루 3번도 하고 4번도
하고 5번도 하고 10번도 하고, 그 시간 되는 대로 그래 하자 해가지고 내가 10만 독 발원을 한
겁니다. 그런데 언제 10만 독 가느냐 하고 첫날 얘기를
했더니 우리 학생들이 하는 게 "스님, 하루 한
번 하면 300년 해야 되는데, 300년 살 겁니까?" 그래요. 그래 이거
300년이야 뭐, 눈 깜짝하면은 300년이겠지
하다가 보면은, 내가 뭐 10년 살다가 갈지 내일 갈지도
모르지만, 오늘 열심히 하다가 내일 가면은 린포체가 되는 수도 있지 않느냐, 린포체.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14번째
환생해가지고 스님이 되었고, 린포체는 22번을 환생을 해가지고
스님이 되어서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 있는데 "다시 돌아오지" 하는 생각 없이 하다가 보면, 못한 게 있으니까 올 게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한다 해가지고 했는데, 하다 보니 학교에 있을 때는 걱정도 되고 강의도 하고 원고도 써야 되고 회의도 해야 되고, 많이 못해요.
그래서 내가 정년 가까이 와가지고 선방에 가서 8시간
참선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금강경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백장사 백장암 지리산 선방에 가가지고 하루 8시간 참선하고, 금강경을 10번씩
내가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하니까 쑥쑥 올라가는 거라. 그럼
나중에는요, 삭목일에는 하루 20번 했어요. 잘 되는 거라. 그래가지고 이제 해서 지금 왔는데, 『금강경지험록(金剛經持驗錄)』이라고
명나라 때 명준 스님이 쓴 글을 보니까, 명준 스님이 금강경을 하다가 염라대왕이 불러서 갔단 말이야. 그러니까 염라대왕이 "니 뭐 하다가 왔느냐" "예, 금강경 하다가 왔습니다." "금강경 몇 번이나 하고 왔느냐." "금강경 10만 독 하려고 하다가요, 불러서 빨리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가라. 돌아가서 금강경 10만 독 하고,
그러고 나한테 올 거 없다" 그러시더래요.
그래가지고 그 스님이, 명준 스님이 금강경 10만 독 하고, 염라대왕한테 안 가고 바로 어디로 갔답니다. 어디로 갔겠습니까? 아미타불 부처님 계신 그 극락세계로 갔겠죠. 극락세계에 가면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 팔공덕수(八功德水)의
물이 흐르고, 연꽃이 한겨울에도 피고, 극락조가 짹짹짹짹
하면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그렇게 좋은 극락세계에 우리는 이 수륙대재를 통해서 과거에 오신 모든
우리 조상들, 호국영령들, 모든 생명들이 다 이 염불에 힘을
실어서 극락세계로 가시고, 우리도 함께 그 극락세계 연화대(蓮花臺)에 가서 함께 임운 등등 등등 임운 태평가를 부를 그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니까,
우리 그런 서원(誓願)을 세우고, 오늘 법문 이만 마치겠습니다.
성불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