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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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10월 19일 국행수륙재 회향 법문
성파종정예하 2024-10-19
이곳 진관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49일 전부터 시작해서 오늘이 회향하는 날인데, 국행수륙대재라 하면 나라 국가 차원에서 이 수륙대재를 하는 거기 때문에, 우리나라 절에서는 물론이고 전통 무형 문화 차원에서도 세계적인 그런 무형문화재입니다. 그래서 49일 전부터 계호 스님, 법해 스님, 여러 대중 스님들께서 지극 정성으로 모든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해서 국행수륙대재를 오늘까지 해 왔습니다. 그동안에 여러분들이 참여하셔가지고 저쪽에 계시는 저런 분들도 국행이기 때문에 저런 복장을 하고 다 나왔거든요. 그래서 나라에서 하는 그런 행사이고, 또 절에서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든 이 장엄이나 모든 것을 이렇게 원만히 잘 갖춰가지고, 이 시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행사가 잘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그런 행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잘 해왔기 때문에 오늘 법문은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해서 결론을 내놨기 때문에, 결론 이거 맞나 안 맞나 그것만 증명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여러분들이 다 합심해서 굉장히 잘했기 때문에, <잘 됐다, 잘했다.> 이거로써 법문은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행사한 그 자체가 다 법문이라. 그래서 다른 건 할 거 없고, 또 왔으니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게 뭐냐, 사족이라고 하거든. 사족. 여기까지 왔으니까 사족을 붙여서 조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우주를 시방세계라고 그러거든요. 시방세계. 시방세계는 무엇 때문에 시방세계냐. 동서남북 중앙, 오방이거든. 오방에서 상하를 합해가지고 시방이라고 그러거든. 그러니까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시방세계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시방세계 부처님 전에, 시방세계 불보살님 전에, 시방세계의 유주무주 고혼들을 다 불러서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하는 그런 행사이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한 행사냐 이거. 옛날에 우리가 이걸 전통적으로 했다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시대도 그렇고 이보다 더한 다음 시대라도 이러한 것은 정말로 인류사회에서 더 할 수 없는 그런 훌륭한 행사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렇게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류가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는 전쟁을 하고, 사람이 많이 죽고, 또 전쟁으로 인해서 그런 거, 또 천재 지변으로 인해서 그런 거, 여러 가지 질병으로도 그렇고, 이래가지고 비명 객사한 사람들도 많고 그 사람들이 다 지금 우주의 시방세계에 무주 고혼으로 다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런 시방세계의 모든 유주 무주의 애혼들을 갖다가 다 이 자리에 불러모아서, 49일 전부터 오늘날까지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고구정녕하게 법문을 읽히고, 갖은 또 수단이라 하면 수단일 수가 있습니다, 음악을 들려주고 법문을 하고 여러 가지 장엄을 하고 이래서 그 고혼들을 달래는 그런 행사를 이때까지 해왔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쯤 되면 어떤 지옥고에 떨어져 있는 고혼도 다 이고득락할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지요? 그래서 지금 굉장히 좀 강조돼야 할 문제가 뭐냐 하면, 너무 인륜의, 인륜을 갖다가 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조상이나 고국이나 고향이나, 우리가 어디서 왔느냐 이거라요. 그래서 온 곳에 대한 그 애정이라 할까 그런 것을 우리가 늘 생각해야 되는데, 너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해 가지고 사고들이 많이 나요. 사고들이 많이 나는데, 왜 사고가 나느냐. 너무 바깥만 쳐다보고 가다 보니까, 발 밑에 웅덩이가 있는지 뭐가 있는지 돌이 있는지 모르고 자빠지는 거라. 그래서 조고각하(照顧脚下)라. 다리 밑을 잘 보고 다녀라 이카거든. 먼 산만 보고 다니다가는 헛다리 짚는다 카잖아요. 헛다리 짚어가 다치거든. 그래서 우리가 먼 산을 보지 않는 거는 뭐냐. 자기가 첫째는 자기 몸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자기 가정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이웃을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사회를 돌아봐야 되고, 그다음에 자기 국가를 돌아봐야 되고, 이것이 선결문제라. 그런 선결문제를 놔두고 근자를 불친이오니(近者不親) 불감구원(不敢求遠)이리오. 가까운 것도 보지 못하거니 어찌 먼 데 걸 말하겠나, 이거거든요.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내가 두말하면 안 될 정도로 여러분들은 다 알고 다 시행하는 분들이라고 나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우리가 역대로 무주 고혼을 갖다가 천도하기도 하고, 또 자기 조상을 천도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가 절에서는 시왕을 모셔놓고 거기에다가 이제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우리가 무슨 범죄를 저질러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으면 49일 동안 미결수, 미결수 한 가지라. 그래서 49일 동안 미결수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49일 동안 자꾸 재를 지내고, 그 영가도 달래고 이래가지고 이고득락하도록 우리가 기도를 해주고 하는데, 거기 도산지옥이 있고, 화탕지옥이 있고, 여러 가지 지옥을 다 해놨어요. 해놨는데 거기 가면 안 되잖아요. 누가 도산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노. 그래서 그런 걸 다 해놔 놓고 이거 보라 이거라. 그러면 영가에게만 그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 그걸 보고 이런 짓을 하면은 독사지옥을 가는구나, 이런 짓을 하면 화탕지옥에 가는구나 하는 것을 미리 알리는 거라. 미리 미리 예고거든. 예고는 뭐 때문에 필요하냐. 예방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법도 그래요. 법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 잡아들이는 것만 능사가 아니거든요. 그래 못 하도록 사전에 교육시키고, 사전에 알려주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이거라. 병도 그래요. 여기병후능복약(與其病後能服藥)으론 불약병전능자방(不若病前能自防)이라. 병 난 다음에 약을 먹는 것보다는 병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낫다 이거거든요. 그러면은 어디든지 해당하거든. 해당하기 때문에 우리 여기 모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이 필요 없겠지만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좀 듣도록 해야 돼. 방송국에서 듣도록 합니까? 네. 그래서 자신을 먼저 돌보고 이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가지고 선행을 베풀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보살행입니다. 그래서 진관사는 우리나라에 여러 사찰이 많이 있지만은, 아주 모범적으로 그런 행사도 많이 하고, 그렇게 모범적으로 잘, 범죄 같으면 예방, 또 병 같으면 미리 병 안 나도록 하는 거, 전 사회의 그런 것을 진관사에서는 솔선해서 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옛날도 그렇지만, 지금도 요구하는 것이 뭐겠습니까? 요새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 마약을 하는 사람, 술을 많이 먹고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뭐 먹을 게 없어서 그렇습니까? 배가 고파서 그렇습니까? 정신이 비뚤어져서 그렇거든요. 정신이. 정신이 비뚤어져서 그런데, 우리가 날씨가 여름에 되게 가물 때 저수지에 물이 다 빠지고 저수지 바닥이 엉거름이라 하는데, 금이 쭉쭉쭉 갈라져 있거든. 그러니까 TV에도 한 번씩 나오는데 보면 물이 말라 갈라져 있다 이거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만물이 자생하는 데 있어가지고 수분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정신이 가물어가지고 땅이 갈라지듯이 정신이 메마르면 그런 사고가 난다 이거예요. 그래서 엉뚱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 그래 그런 거라. 그래서 그런 것을 우리 불교계에서는 예방하는 그런 행을 해야 되기 때문에 거기서 진관사가 아주 솔선적으로 잘한다 이렇게 이제 봅니다. 이런 것을 다 왜 모르느냐 이거라요. 공지끽식 이위기장호대 부지 학법이 개치심(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 學法而 改癡心)이라. 배가 고프면 밥 먹어 갖고 배 채울 줄은 누구나 다 알아요. 근데 이 불법을 잘 배워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개선해야 된다, 그거는 지금 잘 모르는 거라. 그래서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되는 거와 같이 그거는 누구나 다 알아. 아는데 불법을 잘 닦아서 마음을 고쳐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고치는 줄은 알지 못한다. 이게 그래서 이제 옛날에 조사 스님들이 다 그런 걸 안타깝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부지 학법이 개치심이라, 법을 배워가지고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된다 하는 걸 알지 못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 스님들은 잘 알아.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다. 그도 잘 알 거야 아마. 그래서 세혹진제무일물 대원경이임우유(細惑盡除無一物 大圓鏡裏任優遊)로다나 나무아미타불 세혹진제무일물, 세세한 조만한 의혹도 다 없애버리면 한 물건도 없어. 대원경상에 임우유로다. 대원경, 큰 거울 앞에 마음껏 놀아라. 그런 이제 법문이 있거든요. 그래서 법문은 이쯤 하고 그다음에 시간도 없지만은, 농담을 좀 해야 되는데, 아까 시방세계를 다 이야기했잖아요. 그 시방세계가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뭐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기준을 잡을 데가 없어요. 그런데 불교가 여러 나라에 다 있지만은 우리나라의 불교는 정말 우리 선사들께서 너무 잘했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탑이 다른 나라에는 그냥 높이 쌓아올리는 게 탑이라. 근데 우리나라에는 3층 석탑, 5층탑, 7층탑, 9층탑 이래 있거든요. 3층 탑은 뭐 때문에 3층 탑입니까? 저쪽에 아는 사람 없습니까? 3층 탑. 주지스님처럼 이렇게 앉아 있는 게 3층 탑이라. 여기 1층, 몸통 2층, 머리 3층, 3층 탑이거든. 그럼 5층 탑은 어이 되나. 일어서면 5층탑이라. 7층 탑은 어이 되나. 이(손들고) 서면 7층이다. 9층 탑은 이 손가락까지 하면 9층 탑이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 나라에 탑이 있는데 우리나라 탑은 딱 사람의 형상 그대로라.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런데, 육신이 없으면 뭐를 가지고 육신을 표현하느냐 이거라. 탑을 가지고 육신을 표현했어요. 그래서 그 탑을 모시고 그 안에 사리를 모시거든요. 그래서 세계 불교에서 우리나라 불교가 가장 모범되고 표준적인 불교라. 그래서 그런 것도 여러분들은 좀 아까 농담이라 했지만, 이거 농담 아닙니다. 3층, 5층, 7층, 9층 탑이라. 그래서 생전에는 살아있을 때는 9층탑이 움직이고, 사후에는 돌탑으로 해가지고 움직이지 않는 탑이라. 그래서 그게 있고. 그다음에 이제 구룡이라는 말을 많이 쓰거든. 그래서 이제 유교에서도 홍범구주라고 말하고, 불교에서도 구룡이라고 많이 하고 통도사에도 구룡지라고 그러고, 다 구룡을 많이 쓰는데 그 구층탑을 보면 구룡이잖아요. 그래서 그보다 더 한 것이 뭐냐. 하나 둘 세아려 보소. 하나(오른눈) 둘(왼눈) 서이(오른귀) 너이(왼쪽귀) 다섯(오른쪽 콧구멍) 여섯(왼쪽 콧구멍) 일곱(입) 북두칠성이라. 그래서 상칠하이(上七下二)라고 그러거든. 위에는 북두칠성이 있잖아요. 밑에 안 보이는 데는 두 개라. 안 보이는데 알겠지요. 그래서 합하면 이자 9개거든. 9개라서 그걸 이제 구중궁궐이라고 하기도 하고, 구룡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거든. 그러면 사람이 돌아다니면 구룡이 돌아다니는 거라. 구룡이 앉았다 섰다 하는 거고, 구룡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구룡이다. 구룡 아닌 사람 없어요. 그래서 여기뿐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삼라만상이 다 있는데, 그중에서 사람 몸 가진 거는 흑인이고, 백인이고, 한인이고 간에 전부 다 구룡이라. 다 똑같아요. 그래서 구룡을 잘 알아서 잘 다스려야, 자기 자신도 사고가 안 나고, 또 이 사회도 질서가 잘 유지된다 이거래요. 너무 알기 쉬운 걸 말했죠. 구룡 알았습니까? 전에 알았습니까? 이제 알았습니까? 이제 알았지요. 그래서 구룡은 보통 영험한 게 아니라. 그래서 용득 여의주(龍得如意) 연후에 승천이라 용이 여의주를 얻은 연후에 승천한다 그러죠. 여의주를 못 얻으면 개천에서 엎드려 있어야 돼. 그래서 용은 용인데 개천에 엎드려 가 있는 용을 할 거냐, 구만리 장천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용을 할 거냐. 여러분 말해보세요. 개천에 엎드린 용으로 하기 싫지요? 그래서 여의주를 얻어서 호풍환우(呼風喚雨)를 하는 거라. 바람도 불고 비도 오게 하는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는. 여러분들 오늘 진관사에 와서 이 국행수륙대재에 참석한 사람은 용이 돼가 가는 그런 큰 선물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박수도 안 나오나. 전부 조금 적다. 그래서 이 국행수륙대재에 참여하고, 무주 유주 고혼들을 다 천도하고, 그것만 천도를 한 게 아니라 나도 무슨 천도가 있어야 되지 않나 이거라. 그래서 아직 죽지도 안 했는데 천도라 하면 뭐 하고, 오늘 구룡으로 화하는 거, 구룡으로 변하는 이것이. 오늘 잘 왔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 될 거라고 봅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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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기도]]대웅전 관음천일기도 회향 법문
종범 큰스님 2024-10-11
--現在佛慈悲와 當來出現佛----현재불자비와 당래출현불--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무슨 법회에요? 천일기도 회향법회. 천일기도 회향을 축하드립니다. 100일 기도하기도 힘든데, 천일을 기도를 하시고, 참 대단한 인연이에요. 오늘 천일기도 회향 법문은 현재불자비(現在佛慈悲), 현재불자비, 당래불, 당래출현불(當來出現佛), 현재불자비와, 당래라고 하면 미래를 말하는 거에요, 당래출현불,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於諸病苦 爲作良醫 於失道者 示其正路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於闇夜中 爲作光明 於貧窮者 令得伏藏 (普賢行願品)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보현행원품) 이게 뭔 말이냐 하면, 부처님의 자비를 말씀하는 건데요. 자비가 뭐냐. 모든 병고에는, 질병과 고뇌에는 좋은 의원이 되어 주시고, 어실도자(於失道者), 길을 잃은 자에게는 그 바른길을 보여주시고, 어암야중 위작광명(於闇夜中 爲作光明)이라, 깜깜한 어두운 밤에는 광명이 되어 주시고, 어빈궁자 영득복장(於貧窮者 令得伏藏)이라,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쓸 수 있는 그런 금은 창고, 그 금은 창고를 얻게 해주신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다. 이렇게 공양 올릴 때마다 염불하는 그런 내용이고, 보현행원품에서 말씀하신 그런 내용이에요. 그러면 병고라고 그랬는데 병고가 뭐냐. 병은 몸이 없으면 병이 없거든요. 병은 몸에서 오는데, 몸은 중생이 느끼는 이 사대육신, 지수화풍 사대, 근육으로 된 이 육신이 있고요. 이제 제불보살이 가지고 있는 몸은 여여무주 진여불성. 여여(如如)해요. 하늘이 무너져도 달라짐이 없어요. 여여해. 같아, 같아. 땅이 무너져도 여여해. 이 몸이 죽어도 여야해. 근데 이 몸은 여여이 변만법계 하는데,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법계에 가득한데, 또 시방무주예요. 시방에 머무는 데가 없어. 무주(無住). 봄이 모든 꽃을 피우지만, 봄은 어느 꽃에도 머물지 않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몸을 여여신이라, 무주신이라, 여여한 몸이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그런 몸이다. 그런 몸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참 아는 몸이다. 불성이다. 이게 이제 불보살의 몸인데, 범부의 몸은 이 사대육신으로 몸을 삼기 때문에 병이 많아요. 병이 많아. 병 중에 제일 많은 병이 배고픈 병인데, 이 배고픈 병은 염치도 없고, 숫자도 없어서, 먹고 조금 있으면 배고파요. 그래서 이 배고픈 병 다 고치는 날은 이 몸이 숨지는 날이에요. 이 몸이 숨지기 전에는 배고픈 병은 못 고친다. 그런 병도 있고, 아픈 병도 있고, 뭐 힘이 빠지는 병도 있고, 늙는 병도 있고, 몸에는 그렇게 병고가 많아요. 그런데 그 병고를 어떻게 가르치냐. 죽지 않는 몸, 여여신, 진여신, 무주신, 이런 몸을 떡 얻는 순간에 몸의 병고는 없어요. 그래서 모든 병고에서 훌륭한 의원이 돼 주신다, 그 말이고요. 어실도자 시기정로(於失道者 示其正路)라. 길이라는 게 뭐냐. 불성의 길이 있고, 진여의 길이 있고, 열반의 길이 있는데, 이 몸을 내 몸으로 딱 집착하는 순간에 불성, 진여, 열반, 다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그 여여의 길로 돌아가도록, 불성의 길로 돌아가도록, 그 바른길을 보여주신다. 어암야중 위작광명(於闇夜中 爲作光明)이라. 어두운 밤이라, 어두운 밤이 뭐냐. 이 해가 져서 어두운 건 어두운 게 아니에요. 그건 자성이 없어서, 해를 등진 인연으로 나타나는 거기 때문에, 해를 등지지 아니하면 어두움은 없어져요. 또 이 밝음도 밝음이 아니라, 밝음도 자성이 없어서, 이 해를 등져버리면 밝음은 또 없어져 버려요. 인연으로 생긴 것은 없는 거다. 그래서 밝으면 밝음이 없고, 어두우면 어둠이 없어서, 이 육안을 몸에 있는 눈으로 본 어두움은 어두움이 아니다. 그럼 뭐가 어둠이냐. 불성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 무명(無明), 무명의 어두움이다. 불성이 그게 난데, 불성이 내 몸인데, 그 내 몸을 내가 보지 못하는 어둠이 그게 어두움이다, 그거죠. 그래서 어두운 밤에는 광명이 되어 주신다, 그거고요. 어빈궁자에겐 영득복장(於貧窮者 令得伏藏)이라. 빈궁이라는 게 뭔가. 이 육신의 몸을 자기 몸으로 삼다 보니까 항상 가난해요. 왜냐. 이 몸을 위해서 모든 게 필요해요. 그래서 눈이 가난하고, 귀가 가난하고, 코가 가난하고, 입이 가난하고, 손이 가난하고. 그래가지고 눈, 귀가 다 가난해. 그래서 어찌 되냐. 눈은 이 몸을 위해서 뭐 좋은 게 없나 항상 살펴요. 이건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똑같아. 나이 많다고 뭐 안 보냐. 뭐 그거 아니에요. 절대 다 봐요, 나이 많아도. 다만 속도가 좀 느릴 뿐이여. 왜 보냐. 이게 이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게 많아. 그래서 눈은 항상 뭐를 얻으려고, 뭘 구하려고 계속 봐요. 항상 빈털터리로, 가진 거 하나도 없는 상태로, 계속 보는 거예요. 그래서 눈이 가난하다. 귀가 가난하다. 뭐 좋은 소리 없나 싶어서 계속 들으려고 그래요. 이거 노인인데도 더 들으려고 그래요. 노인은 잘 안 들리니까, 더 들으려고 용을 쓰고. 들어서 뭐 할래. 이 몸에 필요하니까 그래요. 안 들어놓으면 이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또 코도 그렇지. 계속 냄새를 맡아서 이 몸이 좋은 거는 계속 구하고, 안 좋은 거는 안 구하고 이러려고. 혀도 그렇고 계속 맛보죠. 손도 좋지 않은 먼지는 계속 닦아내야 되고, 좋은 건 계속 맞아들여야 되고. 닦아내고 맞이하고, 닦아내고 맞이하고 하는 게, 이게 손이 평생 하는 일이에요. 이러니까 범부는 눈, 귀, 코, 입, 손, 발, 온몸이 가난해요. 온몸이 가난해, 한낮에도 가만히 있는 걸 두려워해요. 어디 가서 뭔 소리 들어야 되는데. 어디 가서 뭐 봐야 되는데. 빈궁자예요. 그러면 그 불성의 보배를 다 알게 되면 가난 없어요. 또 배고프고 허직나는 것도 없어. 영절기허(永絕飢虛)라. 영절기허. 배고픈 거 허증나는 거 영원히 끊어진다. 그게 이제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부처님인데 그걸 부처님의 자비라고 한다. 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 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부처님의 자비. 참 좋다. 좋아. 부처님의 자비, 정말 좋다. 이게 이제 현재불자비예요. 현재 세상에 출연한 부처님의 자비다. 근데 경전에 유마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그 유마경의 골자가 유마와 문수가 대화를 하는 것이 유마경의 핵심인데, 유마는 뭔 사람이냐 그러면, 유마라는 게 한문으로 번역하면, 깨끗할 정자, 이름 명자, 정명(淨名)이라 그래요. 정명. 정명이라는 게 뭐냐. 세상에는 이름이 있는데, 모든 이름에 물들지 않고, 모든 이름은 허명이라는 걸 알아. 일체의 명칭은 허명이다, 이걸 알아요.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몰라요. 무슨 가요에 그런 게 있다고. <살아서는 얻지 못하는 이름 하나 때문에> 뭐 이런 거 있더라. 이름은 다 허명이에요. 무슨 이름이든지. 헛된 거예요. 그걸 알아서 이름에 절대 물들지 않는 게 유마에요. 그래서 이름 자체가 정명이에요. 정명. 그럼 문수는 누구냐? 문수는 일체의 상이 상이 없다는 걸 알아. 상에서 무상을 안다. 모두 형상이잖아요. 형상. 형상은 다 헛되다. 그래서 형상은 다 상이 없다. 이걸 알아요. 그래서 이 두 분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는 이름이 다 헛되다는 걸 아는 유마, 하나는 모든 형상이 다 헛되다는 걸 아는 문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그게 유마경의 핵심이에요. 다 상에 집착하고, 상에 어리석고, 상에 매달려 산다고요. 그런데 이 불성으로 들어가려면 제상이 비상(諸相非相)임을 봐야 돼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봐야 그 죽음이 없는 불성의 세계로 들어가요.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다. 상에 속으면 못 들어가. 한 번 누구를 만났는데 아침마다 저 동방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고 그래요. 기도 안 차더라고. 내가. “범소유상이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는 거 모르나.” “아이 그래도 보면 좋아요.” 이래. 조금 나이가 들면요, 뭘 가르쳐줘도 듣지도 않아요. 안 들어, 안 들어. 이제 끝난 거예요. 저 해라는 게 저게, 인연으로 생겼다가 인연으로 사라지는 거, 헛된 건데, 상은 다 헛된 거예요. 몸이라는 형상도 헛된 거고, 지구라는 형상도 헛된 거고, 눈에 보이는 거 다 헛된 거고, 귀에 들리는 거 다 헛된 거고, 그 상은 허상이다. 이걸 알아서, 상에서 항상 무상을 보고 있는 게 문수지혜거든요. 이름에서 항상 이름이 없는 걸 보는 게 유마의 지혜고. 그 두 사람이 만났어.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묻는 건 문수고, 대답하는 건 유마에요. ①又問身 孰爲本 答曰欲貪 爲本 又問欲貪 孰爲本 答曰虛妄分別 우문신 숙위본 답왈욕탐 위본 우문욕탐 숙위본 답왈허망분별爲本 又問虚妄分別 孰爲本 答曰轉倒想 爲本 又問轉倒想 위본 우문허망분별 숙위본 답왈전도상 위본 우문전도상孰爲本 答曰 無住 爲本 又問無住 孰爲本 答曰無住 숙위본 답왈 무주 위본 우문무주 숙위본 답왕무주則無本 文殊師利 從無住本 立一切法 (維摩經 觀衆生品)즉무본 문수사리 종무주본 입일체법 (유마경 관중생품) “몸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하니까 유마가 대답을 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욕망이라는 욕자, 탐할 탐자, 욕탐(欲貪)이 근본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이 몸은 욕탐의 산물이에요. 이건 내 몸이다라는 욕심과 탐욕이 없으면 이 몸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뭐 오래 살았다고 축하하는데, 그거 절대 축하받을 일이 아니에요. 100년을 살았으면 100년을 이 몸을 위해서 욕탐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30년을 살았으면, 30년을 이 몸을 위해서 욕탐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이 몸을 위해서 먹어야죠. 몸을 위해서 입어야죠. 몸을 위해서 잠재워야죠. 이 기가 막힌 말이에요. 그러면 “욕탐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하니까 “허망분별(虛妄分別)이 근본이다.” 이 우주법계는 여여무주인데, 여여이 머무는 데가 없는 건데, 이거는 좋은 거고, 이거는 나쁜 거고, 이건 내 몸이고, 이건 내 몸이 아니고, 이렇게 허망하게 나눈단 말이에요. 분별은 나눠. 그래서 둘로 보는 것이 있으면 범부고, 둘로 보는 것이 없으면 불보살이다. 불보살은 둘로 보질 않아요. 둘로 보면 다 범부여. 그걸 둘로 본다는 얘기를 불교에서는 분별이라고 그래요. 일반 세속에서는 상식이라 그래요. 무분별하게 그러면, 상식 없이 이러잖아요. 불교에서는 나누는 걸 분별이라고 그래요. 나눠. 다르게 나눈다. 그다음에 “허망분별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 “전도상(轉倒想)이 근본이다.” 뒤바뀐 생각. 이 우주만상이 다 자기 몸인데, 요 자기 육신만을 위해서 탐욕을 느끼고, 집착을 하니까, 하나를 둘로 나누는 전도상. 이미 자기 집에 있는데 다시 자기 집을 찾는,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거와 같은, 이미 머리가 위에 있는데, 머리를 땅에 박는 거와 같은 전도상이 그것이 근본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또 전도상은 무엇이 근본입니까?” 그러니까 “전도상은 무주(無住)가 근본이다.” 본래 머무는 데가 없는 여여무분별 그게 근본이다. 그러면 또 “무주는 무엇이 근본입니까?” 그러니까 “무주는 무본(無本)이다.” 근본이 없다. 근본이 없다는 얘기는 지말(枝末)도 없다. 이 근본과 지말을 나누는 건 무명이고, 이게 근본, 이게 턱 이래보면 이것이 근본이 따로 있느냐, 지말이 따로 있느냐, 그냥 이게 여여상일 뿐이에요. 이게 여여상. 여여일상을 근본상, 지말상 이렇게 분별을 하면 그거는 허망분별이다. 전도상이다. 그래서 언제 사람이 평화로울 수 있느냐 하면, 자기 생각 속에서 두 가지가 사라졌을 때, 무이에 들어갔을 때, 둘이 없는데 들어갔을 때. 그럼 내 생각이 지금 둘이 없는데 들어갔나. 택도 없어요. 딱 생각하면 멀고 가까운 거 생각하고, 보이고 안 보이는 생각하고, 오고 가는 거 생각하고 전부 둘이여. 그러면 이 둘이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딱 본래 눈을 떴을 때 개안, 이 진여불성의 눈을 딱 떴을 때 그때 둘이 없어요. 참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면 늘 둘 속에서 살아요. 옳은 거 아니면 그른 거, 죽는 거 아니면 사는 거. 무주는 무본이라, 근본이 없어. 근본이 없는데 입일체법(立一切法)이라. 모든 걸 다 세운다. 근본이 하나도 없지만, 일체법을 다 세운다. 일체법을 다 세우지만 거기에는 머무는 것이 없다. -이게 이제 우주 밖에 통신삼매, 우주 밖에가 아니라 우주법계인데, 나이 들면 이래요. 입술이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우주법계 통신삼매, 통신이라는 거는 온몸이라는 소리예요. 온몸. 우주법계가 온몸, 그냥 자기 몸이에요. 그 삼매에 들기 전에는 둘이 없어지질 않아요. 우주법계가 전체로 통째로 내 몸이다. 딱 들면 둘이 없어요. 그렇기 전에는 전부 둘로 봐서 가난해. 그래가지고 그 가난을 어디서 면해야 되는가. 요 복장(伏藏)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복이라는 거는 숨겨졌다 이 말이에요. 엎드릴 복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데 진금장(眞金藏), 진금으로 가득한 창고가 있다. 이걸 복장이라고 그러는데. ②善男子 我者 即是如來藏義 一切衆生 悉有佛性 即是我義 선남자 아자 즉시여래장의 일체중생 실유불성 즉시아의如是我義 從本已來 常爲無量煩惱所覆 是故衆生 不能得見여시아의 종본이래 상위무량번뇌소복 시고중생 불능득견善男子 如貧女人舍內 多有真金之藏(涅槃經 如來性品)선남자 여빈여인사내 다유진금지장(열반경 여래성품) 선남자(善男子)야, 아자(我者)는 나라.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사대육신이 아니라 진여불성이 나다. 이 사대육신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놈을 나라고 막 계속 욕탐을 내서 하염없이 집착을 하니, 이 녀석이 자기가 집착한다고 가만히 있나. 이 몸은 사정이 없어요. 이 몸은 어머니도 없고요. 아버지도 없고요. 아들도 없고요. 부모도 없어요. 이 몸은 그냥 갈 때 가는 거예요. 어머니 몸이라고 뭐 안 가고, 무슨 몸이라고 가고, 그런 거 절대 없어요. 근데 나라고 하는 것은 곧 진여불성이다. 일체중생이 다 진여불성이 있다. 근데 이 진여불성이 말이여. 종본이래(從本已來)로, 근본으로부터 오면서, 위무량 번뇌소복(常爲無量煩惱所覆)이라, 한량없는 번뇌에 이게 뒤덮여 있어. 이제 근심 걱정하는 거, 둘러보는 거 좋고, 나쁘고 생각하는 거. 근데 이 진정 불성은 그냥 거기 있어요. 번뇌 속에. 아무리 번뇌가 끼어들어도 진여불성은 물드는 법이 없어. 그건 마치 월인천강이라. 달이 천 가지 만 가지 강의 그림자를 들여오면, 달이 아무리 그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물속에 달이 없어요. 아무리 달이 많이 비춰도 물속엔 달이 없어. 그거와 같이 번뇌가 아무리 진여불성에 꼬여들어도 진여불성은 번뇌에 물드는 법이 없다. 그러면 나의 번뇌심, 나의 청정심, 나의 청정심은 내가 근심 걱정할 때 어디 있었나? 그럼 나의 그 진여불성 청정심은 근심 걱정하는 그 속에 있어요. 근심 걱정하는 마음 따로고, 청정한 마음 따로 그게 아니라, 그 속에 그냥 있어요. 물 다르고 달빛 다른 게 아니라, 달빛 속에 물이 있고 그냥 있는 거예요. 근데 아무리 달이 비쳐도 그 물이 달에 물들질 않아요. 그래서 그걸 묘하다고 하는 거예요. 미묘심이라, 미묘. 아무리 번뇌를 수억 만 년을 일으켜도 진여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야 참 기가 막힌 거에요. 그래가지고 중생이 불능득견(不能得見)이라, 보지 못한다. 마치 빈녀인사내(如貧女人舍內)에, 가난한 여인의 집안에, 다유진금지장(多有真金之藏)이라. 진금으로 저장된 것이 많이 있는 거와 같다. 그러면 빈인사내, 가난한 집에, 가난한 집인데 그 집 안에 땅을 파보니까 거기에는 그저 진금 보배가 가득히 쌓여 있어요. 가난한 집안에. 근데 그 진금보배가 거기 쌓여 있는 줄 모르고 계속 가난을 걱정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집 땅속에 진금의 창고가 가득한 걸 알고 여기 파보면 진금이 들어있다. 안 믿어. 안 믿어요. 정말 있느냐? 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해가지고 팠어. 파니까 금방 나와. 그래서 그 가난한 집에서 진금을 한 번 얻은 다음에는, 눈으로 보고 뭘 구할 것도 없고, 귀로 듣고 구할 것도 없고, 손으로 구할 것도 없고, 그 진금 하나만 가지고도 뭐 수억 만 년을 쓰고도 남는다 이런 비유예요. 이 눈코귀, 안이비설신의가 저 색성향미촉법을 대할 때, 좋다 나쁘다, 멀다 가깝다 계속 구하는데, 구해도 구해도 만족하질 않아요. 사람이라는 요 근본을 아는 게 굉장히 필요해요.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고요. 얻어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에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줬는데 그런 소리를 하냐. 그건 사람을 모르고 하는 소리여. 받으면 받을수록 더 받으려고 하는 게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대로 살려면 아예 안 줘야 돼. 처음부터. 그냥 왜냐하면 줘도 불만이니까, 안 줘도 불만이 있고, 그러니까 뭐 부모가 자식한테 좀 잘해주면 자식이 행복할 것 같죠. 절대 아니에요. 잘해줄수록 원망이 더 많아. 왜 이것밖에 안 해주느냐 그러고. 그게 인간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좋은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예요. 누구한테 받으면 계속 더 받으려고 그래요. 자기 스스로 좋은 체험을 한 거는 그건 억만 재산보다 낫고 억만 상속보다 나아요. 자기 체험은 안 없어져요. 어디를 가든지 겁이 안 나, 좋은 체험을 하면. 그러니까 100일 기도를 하고 천일기도를 하고 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몸이 그게 부처님이거든요. 기도하는 순간에는 몸이 나쁜 짓 전혀 안 하고, 그냥 서든지 앉았든지 한 자리로 가잖아. 이게 부처님이지 완전히. 또 눈으로 경보고 눈으로 부처님 보고 입으로 부처님 이름 외우고 생각으로 부처님 생각하고 그 기도하는 순간에는 신구의 삼업이 전부 부처님이요.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 또 100일이 지나고, 천일이 지나면, 그보다 더 좋은 체험은 없죠. 그렇게 좋은 체험을 하면 그것이 어떤 경우가 와도 두려움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체험이 없으면 늘 받아서 하려고 그러고, 얻어서 하려고 그러고, 주워서 하려고 그러니까 두려움이 많아. 그래서 부모가 뭘 많이 주면 아이들에게 겁을 많이 내게 한다. 근데 지가 체험을 해서 잘 살면 겁나는 거 하나도 없어요. 그 어릴 때부터 먹을 게 없어가지고, 주는 대로 먹고 산 사람이 60년대까지는 많았거든요. 나 뭐 먹을래. 어림도 없어요. 어떻게 주문해서 먹어요? 풀뿌리 먹고, 나무 껍데기 먹고 하는 판에. 그러니까 뭐든지 주면 좋은 거라. 그냥 주는 대로 먹어.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요. 뭐가 와도 겁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어릴 때 주는 대로 먹었기 때문에. 뭘 먹어도 몸에 좋다는 거 알거든요. 안 먹는 것보다 낫다는 거. 그냥 먹는 거 해탈했어. 그냥. 그리고 몸이 좀 고생한 사람은 어디 가도 겁나질 않아요. 모기가 물어도 얼마든지 잘 수 있고. 참 이거는 나도 경험해서 아는 거예요. 그냥 책 보고 아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성불을 한다는 거는 몸 성불, 말 성불, 생각 성불, 신구의 삼업이 같이 성불하는 거예요. 인간의 몸이라는 게 아주 영리하거든요. 몸이 먼저 알아요. 좋은지 나쁜지. 눈으로 볼 때는 저 사람이 좋을지 나쁠지 잘 판단이 안 서는데, 몸이 딱 느끼면 바로 알아. 그거 틀림없어요. 그만큼 이 몸이 아주 대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 체험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몸 체험. 어느 골짜기 가면 그 골짜기 다 안 들어가 봐도 입구에서 몸이 벌써 알아요. “여기 쎄하다.” 틀림없이 가면 안 좋아요. “아 여기 어디 느낌이 좋다.” 그럼 가면 틀림없이 좋아요. 그러니까 깊은 경지에 들어가려면은 이 몸의 체험이 깊어져야 된다, 이거죠. ③兒子作宰相 身爲國夫人 未足爲貴 糞掃堆頭 收得無價之寶 아자작재상 신위국부인 미족위귀 분소퇴두 수득무가지보 百劫千生 受用不盡 方始爲眞貴耳(大慧書狀 答秦國太 夫人文) 백겁천생 수용부진 방시위진귀이(대혜서장 답진국태 부인문) 그리고 강당에서 늘 가르치는 서장이라는 책이 있는데, 서장은 편지라는 거예요. 대혜 선사가 여러 사람에게 한 편지가 그게 서장인데, 거기에 이제 진국 태부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태부인이라는 건 지위가 아주 높다, 자식의 지위가 재상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를 태부인이라고 그러는데, 이 태부인이 경을 계속 읽다가 자기 불성을 봤어. 견성을 했어요. 이 눈으로 물질을 본 게 아니라 눈으로 자기 불성을 보았다. 그걸 견성이라 그래요. 견색은 맨날 하잖아요. 색을 본다. 이거 근데 자기 눈으로 자기 불성을 봐. 그래서 그걸 대혜 제자를 통해서 들었어. 근데 처음에는 대혜가 안 믿었어요. 그 진국 태부인이 불성을 보았는지 안 믿었는데, 그 제자가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니까 믿게 됐거든. 그러고 이제 편지를 쓴 거예요. 편지에 무슨 말이 있냐면, 아자는 작재상(兒子作宰相)하고. 아자라는 건 그 아들을 말해요. 아이 아자, 아들 자자. 아들은 재상이 되고, 신위국부인(身爲國夫人)은 자기 자신이 국부인이 된 것은 미족위기(未足爲貴)나, 귀할 것이 못 되나, 분소퇴두(糞掃堆頭)에, 분소라는 거는 인분 분자, 쓸 소자인데,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거 온갖 거 쓸어 모아놓은 그 쓰레기 무더기를 말해요. 쓰레기 무더기. 그 쓰레기 무더기 퇴자. 머리 두자. 머리도 두자는 어조사. 쓰레기 무더기에서 수득무가지보(收得無價之寶)하야, 이게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보배를 그 쓰레기 무더기 속에서 얻었다. 그게 견성이에요. 견성하지 못하고 그냥 죽으면 그냥 태우면 쓰레기 뿐이죠. 근데 거기서 견성을 하면 그 쓰레기 무더기에서 무가지보,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보배를 얻은 거와 같다. 이게 또 아주 중요한 법문이라. 중요한 법문 할 때면 졸음이 약간 오거든요. 졸음이 약간 오면 이거 중요한 법문인 거예요. 졸음이 안 올 때는 그건 중요한 법문 아니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법문 하려면 계속 졸아야 돼요. 왜냐하면 졸음이 온다는 건 평소에 못 듣던 얘기니까, 처음에는 눈이 번쩍 뜨이다가 잘 이해가 안 되니까 이제 몸이 벌써 알고 졸아. 이건 내가 조는 게 아니야. 몸이 조는 거예요. 몸이 벌써 알아요. 몸이 살~ 좋단 말이에요. 몸이 안 졸면 중요한 법문 아니지. 지금 중요한 법문에서 잠시 멈추니까 조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쓰레기 더미에서 무가지보를 얻어서 백겁천생(百劫千生)토록, 백겁이 지나고 천생이 지나도록 수용부진(受用不盡)이라야, 그걸 쓰고 쓰고 써도 다 쓰지 못하고 남는 것이라야, 방시위진귀이(方始爲眞貴耳)니라. 바야흐로 비로소 참되게 귀한 것이 되나니라. 이런 법문을 편지로 써서 보냈어요. 그러니까 이 몸 가지고 이 눈으로 자기 불성을 보는 것은 쓰레기 무더기에서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좋은 보배를 얻어가지고 백겁을 쓰고 천겁을 써도 다 쓰지 못하는 그런 걸 얻었을 때 그게 견성이다, 이런 법문이에요. 참 기가 막힌 법문이에요. 기가 막혀. ④凡諸佛 爲衆生 說佛德 意爲欲令衆生 自亦得彼果 故令修行 범제불 위중생 설불덕 의위욕령중생 자역득피과 고영수행 是故衆生 望自當來 所得之果德 爲欲得彼 不惜身命修行 시고중생 망자당래 소득지과덕 위욕득피 부석신명수행 不爲得 他佛果修行 是故 正令吾 發心修行佛 但吾當果(佛) 불위득 타불과수행 시고 정령오 발심수행불 단오당과(불) 已成佛 非他佛也(錐穴問答, 法界圖記錄卷下之二) 이성불 비타불야(추혈문답, 법계도기록권하지이) 그리고 지금부터 할 얘기는 제 자신도 잘 모르던 얘긴데, 자기가 지금 예경 공양 올리는 부처님이 자기 미래불이다. 딱 얘기가 그거예요. 내가 법당에서 예경하고 공양 올리면 그게 자기 미래불이다. 딱 이게 핵심이에요. 내가 법당에 가서 다 절을 올리잖아요. 그러면 지금 내가 절하고 있는 그 부처님이 미래의 자기불이다 이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요런 믿음이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이거 다른 데는 잘 없어요. 경에 있다고 그러는데, 그 경을 봤을 리도 없고, 근데 의상 스님이 제자를 데리고 그 추동이라는 데 가서 화엄법문을 석 달 동안을 했다라고 그러는데, 그 기록이 있는데 전해지지 않는 것도 많은데, 고려 말에 그 의상 스님 제자들이 주석해놓은 책을 전부 모아서 책을 낸 게 법계도기총수록인데, 그 총수록 네 번째 권에 그 추동 법문 이거에 대해서 간략히 수록을 해놨어요. 그걸 보고 나도 처음 봤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법문인지 몰라요. 내가 어느 법당에 가서 지금 절을 떡 올리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 미래의 자기 불이다. 내가 절하는 부처님보다 그게 미래의 자기 불인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인과법이고, 부처님의 자비법이고 부처님의 영험법이거든. 근데 그게 뭐냐 하면 그런 거예요. 범제불 위중생(凡諸佛 爲衆生)하야,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서, 설불덕(說佛德)은, 부처님의 공덕을 자꾸 얘기하는 것은 그 이유가 뭐냐. 의위(意爲), 뜻으로 생각하기를, 욕령중생(欲令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자역득피과(自亦得彼果)라,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들도 그들의 성불을 얻기를 바래서 중생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중생이 성불하라고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했지, 이미 부처된 당신에게 자기를 칭찬하라고 부처님의 공덕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이게 너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고로 영수행(故令修行)하나니라. 그러니까 중생들이 스스로 성불하라고 수행을 하도록 하나니라. 그리고 그러므로 중생이 망(望) 당래(當來) 소득지과덕(所得之果德)하야, 자기가 당래에, 앞으로 자기 얻을 과덕을, 내가 어떤 부처님이 돼야 되겠다, 내가 성불해야 되겠다, 이런 결과의 공덕을 딱 생각하고 바라고, 위욕득피(爲欲得彼)하야, 그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서원하는 그 부처님의 세계를 얻기 위해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면, 그것이 요게 굉장히 중요한데,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했는데, 결과는 자기가 성불을 한 거예요. 가르쳐준 부처님 성불을 한 게 아니라 자기 성불을 한 거예요. 이게 이제 핵심이에요. 처음에 따라 할 때는 부처님을 따라 했는데, 이룬 거는 자기가 이뤘어. 모든 교육에 이게 똑같이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타불가(他佛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타불가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고(是故)로 정령오 발심수행불(正令吾 發心修行佛)은, 나로 하여금 발심해서 수행하게 하는 분은, 단오당과불(但吾當果)이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를 위해서 발심수계 하게 하는 것은 석가모니불이 나의 당래불이다 이거예요. 나의 당래불. 그러니까 자기가 절했던 분만큼 자기가 성불을 해요. 이런 가르침이 잘 없어요. 이렇게 아주 대놓고 그냥 딱 그냥 알맹이 까보이는 가르침이 별로 없다고. 그래서 이성불(已成佛)은 이미 부처를 이룬 분은 비타불(非他佛也)이다. 다른 부처님이 아니라 내가 성불할 나의 미래불이다. 며칠 전에 가까운 산에 갔는데 거기가 유명한 옛날 무슨 누각터고 그런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지. 그런데 어느 분들이 와서 그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서 체조를 열심히 배우더라고요. 근데 지금 배울 때는 가르치는 대로 배우니까 그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 같지. 근데 배우고 배우고 나면 전부 그게 나를 위해서 한 거예요. 배울 때는 다른 사람을 따라 했는데 이룬 건 내가 이루었어. 그 가르친 사람을 이룬 게 아니에요. 이거 이제 스승들이 하는 얘기인데 “내가 다 너 잘 되라고 한다.” 그런데 근데 그 말도 들으면 안 돼요. 사람이 이 몸에 집착하는 한, 다 저 좋게 가르쳐요. 이 몸에 집착이 없는 부처님은 그게 되는데. 몸에 집착이 있으면요, 부모는 부모 좋게 자식을 가르쳐. 이게 몸의 한계예요. 자식은 또 자식 좋게 부모에게 요구를 해. 그러니까 자식 하자는 대로 하면 그 부모 망해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왜 그러냐면 근본적으로 몸이 숨을 쉬고 있는 한, 인간의 생각은 몸을 위해서 생각하게 돼 있어요. 부모도 마찬가지요. 몸이 있는 한 자식들을 뭐라고 뭐라고 할 때 자기 좋게 하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이 돼 있어요. 생겨먹기를.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부모한테 속아서도 안 되고 자식한테 속아서도 안 돼요. 스님들도 마찬가지여. 은사 스님도 성불하기 전에는 상좌들을 전부 자기 좋게 가르친다고. 그러니까 은사 이제 말 듣고 했다가는 잘못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나는 아예 안 가르치고 “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처음부터 그냥 미련을 딱 끊으니까 그렇게 편하더라고. 그냥 오든지 말든지. 근데 그냥은 안 오고 꼭 뭘 배우러 와 참. 그것도 기분 나쁘더라고 참. 와서 뭘 꼭 배우려고 해요. 그러니까 저 좋게 하는 거 아니고 다 그게 좋다 이거예요. 근데 배우면 처음에는 내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 같지. 그게 전부 저들 게 되는 거예요. 내 거 안 돼요.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이나 다 중생을 위해서 가르쳤잖아요. 그럼 그대로 따로 하면 내가 비로자나불이 되고 내가 석가모니불이 되는 거지. 석가모니불 되라고 중생을 가르친 게 아니고, 비로자나불 되라고 중생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러니까 자기가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면 그 예불 드린 부처님과 같이 미래에 자기가 성불한다. 요 얘기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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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10월 6일 국행수륙재 5재 법문
본각스님 2024-10-06
오늘 오재, 국행수륙대재 5재를 봉행하시는 거룩한 자리에 제가 법사로서 초대를 받았습니다. 먼저 찬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침 일찍 삼각산 진관사 도량에 들어오니, 날씨도 참 오묘합니다. 좋아요. 해가 뜨거나 비가 오거나 둘 중의 하난데, 오늘은 참 오묘하다. 또 그윽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천년 고찰 좋은 도량에 우리 회주스님 이하 모든 불자님들께서, 오늘은 각 사찰에서 진관사 불자님뿐만 아니라 많이 모이셨습니다. 또 그 가운데 꽃처럼 피어 계시는 우리 어장스님 이하 제자분들의 그 화음, 범음은 천상의 소리라고 합니다. 범천이죠. 오늘따라 더욱더 ‘아, 정말 이것이 천상의 소리로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장 스님 이하 모든 스님들께서, 회주스님, 주지스님 이하 이렇게 애를 쓰시는구나, 거기에 불자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도량을 지켜주시는구나, 천년을 이어온 국행수륙대재를 이렇게 봉행하고 계시는구나. 여기서 기도를 하면 소원 성취 못 할 게 무엇이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이 법사도 크게 소원 성취하고 싶은 게 요즘 있답니다. 그래서 지극히 기도를 했어요.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도 우리가 소원이 성취돼야 행복하거든요. 오늘 행복하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먼저 전통을 이어가고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 진관사는 이렇게 이어가고 계시는구나. 그리고 제자 스님들이 다 크셔서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참 화음을 이루고 계시는구나, 범천의 소리이구나.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붙이면 조금 전에 염불하실 때 저희는 그 염불 뜻을 아니까, 불자님들도 계속 법요집이나 이런 국행수륙대재에 오셔서 자꾸 공부를 하시면 저처럼 잘 알아지십니다. 잘 아는 것 같으죠. 네. 그래서 하나 알고, 둘 알고, 셋 알고, 다 알아지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장스님, 우리 바라지 스님이 하시는 그 말씀이, 그 중에 무차대회 그랬어요. 차별이 없는 대회예요. 누구나 올 수 있는. 불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시 긍정적으로 하면 평등대회, 무차평등대회, 들으셨죠? 이 부처님 도량에는 차별받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평등한 이 법회에, 오늘은 큰 스님들, 비구 큰 스님들이 다 안 오셨죠? 우리 다행히 거사님들이 그 자리를 지켜주시는데, 회주스님도 비구니, 주지스님도 비구니, 어장스님도 비구니, 법사스님도 비구니, 함께하신 모든 스님도 비구니. 부처님께서 부처님 생존 시에 대애도 마하파사파제 비구니 어머니를 비구니로 받으셔서, 그 역사가 3천 년에 이릅니다. 여성의 출가는 인도에서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에요. 그 남존여비, 조선시대보다도 더한, 지금도 인도는 그렇습니다. 거기에서 오직 불교만이, 여성의 출가는 여성에게 대자유를 허락한 거예요. 그래서 그 비구니 게송에 보면은 “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모든 억압으로 벗어났다.” 별별 비구니에 그 소해가 다 담겨 있는 것이 비구니게, 비구니 테리가타, 비구니들의 노래가 지금도 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평등하게 남성이 계시고, 여성이 있고. 네. 오늘 모두 이렇게 찬탄해서 참 좋은 국행수륙대재다, 이렇게 말씀을 올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차별받지 않는, 오늘은 비구니들의, 정말 우리 어장스님이 국보십니다. 아마 우리 한국불교 1,700년에 비구니가 어장이 돼서 이 법회를 인도하시는 건 여기 진관사뿐이에요. 그분이 한 분이시니까. 그래서 너무 오늘은 더 비구니의 한 사람으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양성평등을 석가모니는 당시에 허락하셨어요. 그래서 그리스에서 이제 인도의 역사를 보면은 정말 불교는 대단하다. 여성의 평등을 출가로서 허락했다. 이런 게 이제 그리스의 기록에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로 국행수륙대재 진관사는 남녀가 차별이 없고, 노소가 차별이 없고, 빈부가 차별이 없는 평등 무차대회로구나 이렇게 찬탄해 올립니다. 오늘 주지스님께서 회주스님과 의논하셨겠지만, 와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주제를 정해주셨어요. 전 이렇게 엄중한 주제를 받고 법사로 와보기도 처음입니다. 그래서 접때 제가 그랬어요. “젊은 엄마, 아빠가 없으면 나 그날 법문 안 하고 올 거야.” 그래서 아까부터 점검을 했어요. 근데 들어오는데도 젊은 엄마, 아빠가 -여기도 많이 젊으시죠?- 와 계시더라고요. 아기도 와 있고. 그래서 법문하고 가야 되겠다. 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잘 기억하셨다가 젊은 엄마, 아빠한테 전해주세요. 그러시면 되겠죠. 거기에 이제 더 어려운 게 <신묘한>이 들어가 있어요. 신묘하다, 그러한 그 덕담을 오늘 이 국행수륙대재에 오신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려라. 그렇게 이제 명령이 내려지셨어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우리 삶 속에 무엇이 신묘할까. 무엇이 신묘할까. 천수경을 읽으시면요. <우리 몸은 광명장이고, 우리 마음은 신통장>이라고 나와요. 이제 그렇게 사셔야 돼요. 모습이 다 여기 계신 분들이 광명장이세요. 장은 갈무리하고 있다 그런 뜻이죠. 막 얼굴 찡그리면 광명 아니죠? 좀 속상한 일이 있으셔도 천수경을 읽을 때는 내 얼굴은 광명이다 그러시면, 누구에게도 빛을 나눌 수 있고, 누구에게도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오늘 행복하신 거 맞죠? 근데 그 얼굴과 몸이 광명장이세요. 근데 얼굴만 그렇게 잘 예쁘고 광명이면, 속이 텅 비면 큰일이잖아요. 속은 신통장이다. 오묘한 기운을 마음속에 갖고 계시는 게 이게 신통장이에요. 그래서 이 마음 하나로 우리 화엄경에 그렇잖아요. 일체유심조라. 마음 하나로 온 우주 법계가 다 만들어진다. 그래서 불교만큼 이 마음 마음 마음 이 오묘한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 오늘 아주 참 저도 신묘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노력을 하지만, 들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신묘하게 받아주셔야 돼요. 아시겠죠? 그걸 축착합착(築着蛤着)이라 그래요. 소리가 딱 나도록 서로 마음이 맞아야 돼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만, 신묘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이제 젊은 층을, 젊은 층이에요. 그리고 이제 그 엄마, 아빠의 세대를 향해서 한 말씀 주십시오. 이 세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 불교는 삼세인과를 설해요. 삼세인과 많이 들으셔서, 이 수륙대재 몇 년 다니시면 이제 다 알아들으시고, 다 도통하신 그런 불자님들이 계실 거다, 그렇게 믿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삼세예요. 불교는 현재가 굉장히 중요해서, 현재에, 다 모든 기운과 정성과 마음을 다 현재에 머무르고,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는 종교가 삼세인과를 보는 종교예요. 지나온 거 보셔야 되잖아요. 가끔씩. 나 어제 뭐 했지? 또 내일 가서 뭐 할 건가? 지금 여기 있어 뭘 배워갈 것인가. 이게 시간을 그래서 원융법계라고 그래요. 직선이 아니고. 시작이 있었고, 태초가 있었고, 종말이 있으면 그건 불교적이지 않아요. 불교는 시간이라는 건 끝없이 이어져 가는, 무구한 그 긴 세월을 지금도 이어져 가는 그것을 원륭법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간도 마찬가지. 지금 저희는 찬탄해 올린 이 거룩한 진관사에 지금 다 머무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내가 가면 동서남북 사방팔방 시방으로 내가 오고갑니다. 그래서 삼세시방이에요. 향하면은 동쪽으로 향하고, 서쪽으로 향하고, 그리고 사이사이,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 엘리베이터 타시면 왔다 갔다 하시잖아요. 그래서 공간도 시간도 한 점에 머무르지 않고, 한 점을 시작을 해서 온 시간 공간을. 그래서 이제 젊은 아빠, 엄마를 제가 상대로 합니다만, 그분조차도 삼세인과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 이 말씀이에요. 삼세. 아기가 있고 젊은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것만도 삼세예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그래서 저의 오늘 법문은 삼세 인과를 근본으로 해서, 아기와 젊은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 최소한 조상님까지 올라가면 뭐 끝없이 이어지죠. 불교에서 조상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의 효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생명의 근거가 부모님께 있고, 조상에게 올라가 그것이 이어져서 미래에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쭉 가요. 그래서 젊은 엄마, 아빠들은 바쁘기도 하고, 세상의 경쟁 속에서 끝없이 어렵게 살아가시니까, 대강은 그 젊은 엄마, 아빠의 부모님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의 다 해주세요. 특히 재밌는 게 “기도도 내가 해주마”, 그거 해주고, “보시도 내가 해주마.” 그래서 요즘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도 이제 많이 연세 들어가니까. 그전에 제가 어느 비구니 수행관 거기에 있는데, 부처님 오신 날, 젊은 청년이 자전거에다, 그날이 휴일인데도, 자기는 출근을 해야 된대요. 뭔 자루를 하나 싣고 왔어요.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4월 초파일이 되면 꼭 스님께 소금을 갖다 공양해라. 옛날엔 소금이 귀했습니다. 산중 절은 참 귀했거든요. 그래서 이 청년이 출근하면서 자전거에다가 소금자루를 하나 실어 가지고 그냥 절 찾다가 지나가는 길에 절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전 그걸 지금도 못 잊어요. 못 잊으면서 이제 나이 많이 들었겠죠. 한 30년 전 이야기니까.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이름도 성도 몰라요. 그냥 소금자루 갖다 내려놓고, 그래서 부모님이 유언을 해주시고, 그 자손이 이렇게 지키면 그 집이 부자로, 저 이름도 모르고 이제 얼굴도 다 잊어버렸는데, 지금도 4월 초파일 되면 소금 자루 청년, 그땐 ‘청년 부자 되라’ 제가 이렇게 합장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우리가 그 현재 잘하는 것도 좋지만, 좋은 것을 유언처럼 남기셔서 우리 불교가 정말 3대에 이어지고, 10대에 이어지는 그러한 것이 참 신묘합니다. 그래 이제 첫째 우리 젊은 분들 밖에도 계시고, 또 잘 들어주시면 좋겠는데, 한 10여 년 전이죠. 벌써 20년 전에, 생명이라고 하는 건 어떻게 탄생하나. 그래서 막 창조설도 있고, 불교의 인연 연기설도 있고, 그러다 복제 돌리, 그냥 체세포 하나 있으면 그냥 생명이 탄생해요. 그래서 굉장히 불교는 환희로웠어요. 우리가 조건을 만들어주면 생명도 만들어지는구나. 이거는 어떤 한 절대자가 창조가 아니라 모든 노력을 하면 어디에서든지, 그래서 이제 굉장히 그런 일이 있는데, 창조든, 인연 연기든, 복제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젊은 분들께는 만남이 중요함을 오늘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말 이 많은 사람 중에 우리가 부부로서 만났구나, 그 인연 연기예요. 다 공감하시죠? 만난 거예요? 어떻게들 만나셨어요? 만나신 거예요. 박수를 쳐드려야 해요. 네. 저도 이게 진관사가 여기 “은평구에서 진관사는 보석 같은 절이다.” 그러시더라. 정말 보석도 다이아몬드 그 이상, 여의주 같은 절이라고. 저, 여의주 아시죠? 소원을 빌면 다 뭐든지 되는 오늘 우리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여의주 같은 그러한 절인데, 거기에 와서 우리가 이제 이 중요한 법문을 더 배우는 것은 정말 그 만남. 오늘 다 만나셨어요? 저도 요 가까이 있어요. 한 30분이면 와서. 이웃을 저는 너무 잘 둔 거예요. 이렇게 잘 둘 수가. 우리 주지스님이 뭐든지 도와주셔요. 뭐든지. 그냥 외국 손님이 또 언제 오나, 내가 일 못해 미안하다. 우리 회주스님이 유명해서 저 분을 만나러 오고 싶다는데, 왜 나한테 청을 넣습니까? 내가 좀 센 줄 아나 봐. 우리 회주스님한테. 그래서 내가 또 주지스님한테 말씀드려, 주지스님한테 국궁 재배하고 했더니 “그럼 해주겠다.” 이렇게 이제 이웃이 여의주 같은 이 진관사가. 그런 걸, 이제 이 만남이에요. 이 만남이 저 사람 잘못 만났다, 아니에요. 어떠한 만남도, 우리 불자들은 그 순간부터 부부로 만났든, 친구로 누구를 만났든, 그 만남을 굉장히 감사하면 돼요. 남 탓하거든요. 우리 불교에는 남 탓이 없어요. 그냥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상대방을 향해서 헌신하면은 다 좋아져요. 그래서 오늘 부부가 젊은 부부든 연세 든 부부든, 조금 서로 마음이 삐딱하면 여기 계신 분이 먼저 가서 손을 잡고 “우리가 만났군요.” 이러시면 되겠죠. 그리고 지금부터 인생이 100년, 요즘 100년, 내가 100년도 못 사는데 그랬더니, 종로구청장님이 “아닙니다. 스님 100세 시대입니다. 말씀 고치셔야 됩니다.” 법문하다가도 말씀 고치려는 사람이 다 있구나. 여러 가지를 당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제 하여튼 100세 시대래요. 그래봤자 100세를 살아본들 우리가 이 100년을 사는 중에 정말 가까이 있는 사람, 만난 사람을 부처님이라 생각하고 존중 예경해야 되겠다. 오늘부터 이렇게 해보세요. 그럼 이제 다 행복해져요. 그래서 첫째 젊은 엄마, 아빠한테 만남의 소중함을 꼭 서로 이야기해 주십사.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 연기다. 이건 뭐 이래도 저래도 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 이어져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구나. 그렇게 만남의 소중함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런 가운데 살다 보면 저 아기 엄마 아빠예요. 엄마, 아빠, 저희들이 잘 모릅니다만 모르는 주제를 주셔서 더 이제 어렵긴 한데, 절에 있으니까 젊은 엄마, 아빠를 많이 만나요. 지금도 이제 제가 이름을 지어준, 경빈이 엄마라고 지금도 기억해요. 커리어 우먼으로서 막 활동하다가 좋은 사람하고 결혼을 딱 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거예요. 경빈이가 태어나서 이제 저한테 오지도 않아요. 요즘. 그러니까 마음대로 말해도 돼요. 바빠서 안 오는 거 이해해 주면 돼요. 근데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인터넷을 찾아서 또 시어머니 49재 지내러 왔어요. 그래 잘 해드렸어. 또 안 와. 그래서 괜찮은데,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 하면은, 그렇게 능력 있는 여성이 갑자기 아기를 낳으니까 발이 묶인 거예요. 이거는 정말 아빠도 발이 묶이지만, 여자가 발이 묶인 건 이거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시죠. 자기 직장생활 다 놓고, 어딜 가려 하면 우유병서부터 들고. 그래갖고 그냥 정신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고 쌓였어요.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고민하다, 이제 저한테 와서 “우리 며느리를 어떻게 해야 편안하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 경민이 엄마 손을 이렇게 잡고 “이래서 엄마가 거룩하다. 이렇게 힘들어서.” 우리 법구경에 보면은요. “어머니가 있으면 세상에 제일 부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아버지가 있는 것은 세상에 제일 부자이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부모가 계시면 우리는 세상에 제일 부자, 재벌이 부럽지 않은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가 그만큼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며느님 경빈이 엄마 손을 잡고, 그래서 엄마가 정말 살신성인이잖아요. 우리 논어의 살신성인처럼 내 몸이 다 부서져 갖고. 그래서 부모십중대은이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거기서 묵묵히 묵묵히 그걸 지켜보고 어머니는 온 몸으로 그걸 다 해서, 인, 인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최고의 가치인데, 저희 불교는 생명이에요. 어머니가 살신성생, 몸을 다 부숴가지고 생명을 탄생한다. 그리고 생명을 기르고 그 생명이 성공하도록 하는 거, 이게 부모의 자리에요. 그래서 그 부모가 계시면은 정말 부자인 거에요. 그래서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재를 지내러 오시면 제가 이 말을 꼭 해요. “살신성생하신, 살신성인한, 인을 성취한, 생명을 성취한 그 부모님이 가셨다.” 그분이 계시면 정말 부자인데 지금 아주 탈탈 거지가 됐다 이 말이에요. 부모님이 가셔서 우리 거지가 된 거야. 그래서 49일 동안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지극히 기도를 해서 공덕을 쌓는 거, 그 공덕이 공유가 되죠. 돌아간 분께도 공덕이 되고, 살아있는 자손에게도 공덕이 되고. 그래서 이 불교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사는 거예요. 지금 세상이 다 바뀌고 막 정신을 못 차리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 진관사는 천년, 3천년을 지켜가고, 저희 역시 그 가치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님들께서는 이런 국행수륙대재에 와서 불교가 소중히 하는 거, 세상이 다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그 가치가 생명이고, 우리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부모가 생명의 근본이에요. 우리 젊은 아빠, 엄마 잘 들어주세요. 젊은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도 지금 스님이 말씀드리는 것처럼 살신성생하신 분이다. 자기를 다 희생해서. 그래서 지금 뭐 옛날처럼 효도해라 이게 아니에요. 화엄경전에 지은보은(知恩報恩)하라는 말씀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보답하라. 이 말씀이 경전을 읽으면은 정말 좋은 말씀이 많아요. 은혜를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거예요? 그래서 보면은 그 대성심지관경 참 거룩한 경전인데요. 화엄경에서는 지은보은해라, 모든 은혜를 알고 은혜를 보답해라. 대성본생심지관경에서는 세 가지 은혜를 들어요. 첫째 아버지는 자은(慈恩)이에요. 자비 자자. 오늘 아버지들도 많이 와 계신데, 아무 말 없이 감싸고 울타리셔요. 그러시죠. 안 그러신 분은 오늘 그러더라 좀 그렇게 대답을 하시면 돼요. 똑똑히 듣고 전하시면 돼요. 그리고 막 이렇게 손 이러면(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서 하시면 안 돼요. 합장하고. 우리가 나 자신을 낮추면은 시빗거리가 없어져요. 제가 가까운 절에 있는데 한 9년을 공부한다고 외국에 나가 있었고, 26년을 스님들 교육시킨다고 나가 있었고, 비구니 회장한다고 4년을 나가 있었고, 그 30~40년을 아무 역할도 못했어요. 그리고 이제 본사에 70이 넘어서 이제 돌아온 거예요. 제가 뭘 못하겠어요. 젊은 스님들이 힘들어하는 거 내가 다 하려고 작심을 했어요. 그냥 제일 저기하는 게 강아지 밥 주는 것보다 거기에 버리고 가는 강아지. “내가 할게.” 또 안 떠나고 돌아온 고양이, “내가 밥 줄게” 뭘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저가 그러고 있으니까 우리 연세 드신 불자님도 다리가 움직여지면, 젊은 사람들 바쁘거든요, “왜 니가 안하고.” 따지지 마세요. “내가 할게, 내가 할게” 한번 해보세요. 내가 할게. 내가 하겠습니다. 좋은 일은 다 내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꾹 움켜쥐고 있으면 욕심쟁이예요. 공덕은 돌려드리는 회향이에요. 내가 지은 모든 공덕을 다 돌려드리면 이게 부처님의 세계에요.자꾸 이쪽에 많이 앉아 계셔서 이쪽을 쳐다봐서 죄송해요. 이게 차별이야. 그러다가 이쪽도 뵈야 된다 하면 여기보다 여기가 많아. 밖에는 아직 잘 안 보이니까 창문 너머로 문 틈으로 밖에 계신 분들도 뵙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면서 아버지는 자은이라 하더라. 자은은 자기 자자 아시죠? 그냥 계시면 훈훈한 거예요. 말씀 안 해도. 그러면 잘 받들어드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면 싸울 일도 없고, 시비도 없고. 그래 부처님께서 탐진치 삼독을 내려놓으면 일체 시비가 끊어진다, 그 말씀이에요. 그다음에 어머니는 잘 기억하세요. 어머니는 슬플 비자, 비은(悲恩)이에요. 슬픈 거예요. 어머니는. 몸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다 경험하셨잖아요. 어머니들. 그리고 누가 아이가 잘못되면 같이 돌아가세요. 같이. 아버지는 그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없으시고. 그래서 첫째가 건강이셔요. 그래서 제가 군대 가는 아드님한테 “건강해서 와라. 너희 부모님한테 너가 보물단지다. 건강해서 와라.” 우리 다른 욕심 없어요. 가족이 건강하게 잘 함께 밥을 먹으면 그것이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애간장이 녹아서 비은이에요. 항상 슬픈. 아주 정말 대성본생심지관경에 그랬어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은혜가 있어요. 그건 중생은(衆生恩)이에요. 뭇 생명의 은혜. 쌀 한 톨을 지어도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죠. 오늘 새벽 예불을 하는데 새카만 벌레가 다 이렇게 꼬부라져서 가사 자락에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집어갖고 거기에 탁자 위에다 놓고 죽었나 살았나 봤더니 천수 치고 나니까 쫙 오그라들었던 게 쫙 펴졌어요. 살았구나. 그래 살아있으면 얘를 어떻게 해야 되나 그래서 얼른 축하 난화분이 있길래 난화분 위에다 올려줬어요. 그랬더니 우리 젊은 스님 뭐 했냐고 설명했죠. 가사 자락에 애벌레, 애벌레가 꼬부려져 있길래 죽었나 봤더니 한참 있다가 쫙 퍼져서 살아 있구나를 확인하고 난화분에 올려줬다. 이것이 생명이다. 우리 불자님들은 어떠한 생명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노력을 해도 내가 살다 보면 생명이 손상이 돼요. 그러시죠?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남을 이겨야 되고, 남보다 잘나야 되고, 모든 게 이 세상은 생명을 손상하게 되요. 근데 그 생명을 살리는 분이 우리 또 부모님이신 거. 그래서 욕심이 과하면은, 내 아이, 내 아이 하다 보면 다른 생명을 손해 끼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진치 삼독, 어리석음, 성냄, 탐욕을 내려놓고, 모든 생명, 나의 생명과 내 가족의 생명, 모든 생명, 그것이 담겨 있는 것이 중생의 은혜다. 이 세상에 은혜롭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거 하나 깨치고 가시면 좋겠어요. 오늘 물도 내고 바람도 내고 구름도 내고 산천초목이 은혜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거 우리가 그 자연을 다 망가뜨리고 잘 살아본다고. 그래서 반세기를 우리가 발전하고 개발하고 다 망가뜨리고. 다 풍요롭고 지금 대한민국 이 금수강산이 쓰레기 산더미가. 제가 얼마 전에 이제 요즘은 데이터로 나오니까 한 300개의 쓰레기 산더미, 이제 점점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 국가도 그렇고 모두가 어떡하면 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그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살려면 우리가 1차로 각자의 욕심을 줄이는 거예요. 소박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거. 그게 잘 안 되지만 안 된다고 던져버리시면 안 돼요. 해보자. 굉장히 긍정적인, 해보자, 내가. 그래서 우리 젊은 엄마 아빠들은 굉장히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계셔요. 지금 60대 넘으신 부모님들 전쟁 다 겪었고 다 아셔요. 새삼 법사가 뭐 이러시오 저러시 할 거 없어요. 오늘 주제가 젊은 분들을 향하니까 그분들은 다 풍요롭게 좋은 시대를 살아오셨기 때문에 무엇을 내가 갈무리해야 되고, 무엇을 절약해야 되고, 어떻게 검소해야 되고, 어떻게 남하고 대응할 때 지혜를 다 잘 모르셔요. 그래서 앞으로는 부처님 경전에 8만 대장경 경전에, 8만 대장경 경을 하루아침에 아시겠습니까? 오실 때마다 공부하시면 돼요. 진관사가 모범 사찰이잖아요. 멀고 먼, 그거는 금생만의 공부가 아니라 다음 생애로 이어지고 다음 생으로. 저는 이제 지금 원을 세워요. 다음 생애는 좀 더 말도 좀 잘하면 좋겠고, 키도 좀 더 크면 좋겠고, 또 그리고 좀 더 똑똑하면 좋겠고. 접때 우리 승가대 나오신 비구 교수님이 제가 막 고생도 아닌데 그렇게 보였던가 봐요. 절 보고 ”스님 같은 분이 저 산 중에 좋은 사찰을 가지셨으면 얼마나 멋있고 잘 계실 텐데 꼴이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로 들렸어요. 그래서 내가 정색을 하면서 “나같이 잘 배운 사람이, 이만큼 누린 사람이 산중 좋은 절에 가 앉으면 내가 뭘 하겠느냐” 정말 불자님들 이렇게 오실 때, 또 진관사는 이렇게 오라고하니까 고마우시잖아요. 함부로 안 청하신대요. 근데 저도 뽑힌 것 같아요. 이렇게 가까이에 저기 여의주 같은 진관사가 있어서 이렇게 뽑아주시니까 달려올 수 있잖아요. 뭘 못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정색을 하면서 “나는 여기가 좋다. 뭐든지 몇 백 년을 살 것도 아닌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래서 오늘 우리 불자님들이 전부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최고의 가치가 불교는 생명이에요. 그래서 제일계가 불살생인 거 아시잖아요. 근데 오늘 그 벌레 아마 게는 아마 저기 이고득락 고통을 여의고 이 좋은 날 스님 가사 자락에 앉았다 능엄주 치는 거 다 듣고 그래 이제 갔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생명이 크고 작은 걸 차별하시지 말아라 이 말이에요. 내가 얘를 무시하고 죽이고 이건 내 몫이고, 그것을 잘 살리고 보호하는 거 역시 내 몫이다. 그래서 불교는 공덕을 지어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은이고 어머니는 비은이고 모든 생명은 우리를 살리는 중생의 은혜다. 이 은혜.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지은보은해라. 모든 거에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보답해라. 그래서 자손을 아기를 키우실 때 은혜를 갚는, 은혜를 아는 아이로 키우시면 그 부모는 성공하신 거예요. 1차가 부모의 은혜를 알으니, 부모를 속상하게 할 일이 없고 내 주위의 모든 은혜를 알게 키우니까 모두가 행복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은혜를 꼭 기억해 주십사. 그리고 이제 마지막에 마지막 말씀이 기도하는 삶을 젊은 불자님들께 부탁하고 싶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도도 대신 해주셨어. 너무 잘해주신 거야. 기도할 줄 몰라요. 젊은이들이 와서 어머니는 기도 부탁하면 젊은 부부가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있어요. 그냥 다른 세상인 거예요. 어머니가 기도 부탁하는 동안에 자기네들은 놀고 있어요. 직접 봤어요. 그래서 오늘부터 몇백 년을 지켜주시지 못할 거니까 우리 젊은 엄마, 아빠는 항상 기도해라.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거룩한 성인이 안 계셔요. 불자님들이 그걸 먼저 아셔야 돼요. 그래서 제가 그러죠. 불교는 권력도 없고, 엊그제 우리 신도님이 돌아가셔서 여기 가까운 은평 카톨릭 거기 장례식장에 갔더니 대기업이더라고요. 정말 거기서 편리함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그 재력을 쌓아갈까 그러면서 부럽다. 그래서 아주 당당하게 가서 이제 모시고 이제 왔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돈도 없어 권력도 없어 조직도 없어요. 이웃 종교의 그 조직이라 하는 건 무섭잖아요. 그래도 우리 진관사는 최모범 사찰이에요. 다 오시라 하면 오시는 것 같아. 벙거지도 다 쓰고 앉아 계세요. 아마 주지스님이 쓰시라고 명령해서 오늘 봉사자신 거. 이 정도로 잘 하시면 모범 사찰이에요. 이게 조직이에요. 저 있는 절에는 그래도 한 50명이 따라오셨어요. 50명이 스님 일로 오늘 일요법회로 따라오셨더라고. 그래갖고 아무리 진관사가 부자지만은 50명이나 가서 밥을 먹으면 너무 죄송한데, 그래서 아까 영전에 올리는데 금륜사 신도 공양비, 너무 적지만 너무 염치가 없잖아요. 하여튼 저희는 저희 절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이제 조직을 우리가 진관사가 굉장히 모범 사찰이셔요. 딱 조직. 그래서 아무것도 없지만 불교는 1700년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그건 뭐냐면 원력이에요. 이 국행수륙대재를 지켜가는 우리 스님들과 불자 원력이에요. 정말 아까 염불에 전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 한문 한문 하나, 모든 슬픈 영가들, 인간을 도우기 위해서 희생된 모든 동물 가축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영가들, 떠도는 영가들. 대만에 가서 그 수륙재 하는 걸 들었더니 뭐가 나오냐 하면은요. 제가 그 원문은 외우지 못했는 저기 지금 기억이 없는데, 과거 급제하러 갔다가 가족들이 얼마나 큰소리치고 갔겠어요. 떨어졌어요. 집으로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천을 떠도는 영가도 여기 와라, 그런 염불이 있더라고요. 우리는 그건 못 들었는데 대만 저기 불광산사에서 수륙재 하실 때 제가 갔더니 뜻이 그래. 과거 시험 보러 갔다가 떨어져서 집으로 못 가고 산천을 떠도는 외로운 영가도 수륙재에는 와라. 그래 무차대회예요. 그러니까 이 수륙대재 이걸 지켜간다는 것은, 내가 우리 여기 진관사에 어떻게 저걸 저렇게 해마다 하실까. 그래서 오늘 다 우리가 소원 성취하겠죠. 그 소원 성취하는 가운데 은혜를 아는 거 이것이 큰 공덕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은혜를 알게 보답해라. 지식은 쌓아가게 되어 있어요. 최고 학벌해봐도 별로 의미가 없어. 이제는. 자기 길을 정확하게 지혜롭게 걸어가고 그 걸어가는 중에 정말 소중함을 지켜가는 아이들. 제일계가 부모에 대한 소중함을, 가족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나를 살려준 뭇생명에 대한 소중함 그게 자은 비은 중생은이에요. 그것을 지켜가는 그러한 사람으로 키워 그게 그냥 되느냐 기도하는 거예요. 저도 기도하고 우리 불자님 기도하고 젊은 세대가 기도하고. 그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부처님이 나를 존중해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체의 모든 것이 은혜 속에 있다. 그 은혜를 존중하고 그 가치에 감사드려라. 이게 기도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력이. 원력 다 있으시잖아요. 원할 원자 힘이에요. 저도 원력이 있고, 우리 스님들도 원력이 있고, 불자님들은 “아우 나는 가난해 난 되는 게 없어.” 절대 그런 말 하시면 안 돼. 나는 되게 해야지 나는 지금 가난하지만 부자로 향해야지. 그 원력을 가지시는 거에요. 그래 부처님이 내가 부족하다 하면 공덕을 지어라. 복을 지어라, 지으시면 돼. 지금 지으러 다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해서 우리가 10년 20년 저는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요. 차례대로 죽자 그러면, 우리 회주스님하고 저하고 아마 회주스님이 나이가 더 많으시면 너무 죄송한 말이 돼버렸는데, 저희 절에 90 노인이 있으시고 팔십넷 노인이 있으신데 부탁이 차례대로 죽자 90노인 알았어요. 차례대로 죽을 테니까 걱정마세요. 여기 계신 분들 다 차례대로. 그건 또 일본의 일휴 선사, 유명한 근세 일휴 선사가 계신데, 아주 재밌는 행을 하시는 분인데 어느 경축하러 갔어요. 가 가지고서는 “경축 축하 글을 써주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툭 해갖고 <조사 부사 손사> 조부가 죽고, 저기 아버지가 죽고, 손주가 죽고. 그래서 그거는 아니 스님 이 경축하는 일에게 왜 죽는 걸 써주시냐. 그럼 거꾸로 해줄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손주 먼저 죽으면 큰일이잖아요.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것이 조사, 조부가 먼저 죽고, 부사, 부모 대가 죽고 손주는 알아서, 그걸 그게 제일 경축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너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딱 차례를 지켜서 언제 떠나더라도 내 할 일을 다 하고, 하심, 자기를 낮추고, 공덕을 짓고 내가 지은 것을 다 회향해서 은혜를 갚는.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에게 지금까지는 부모님의 기도로 이만큼 살았으면, 오늘부터는 그대가 기도를 해라.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기도하는 삶을 가르쳐라.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나도 앞으로 하겠지만 “이제 너가 기도해라, 보시도 너가 해라. 착한 일도 너가 하고, 아이들에게 은혜를 갚는 그러한 삶을 꼭 가르쳐라.” 하실 수 있죠. 그러면 우리가 그리고 이제 시간이 다 됐어요. 법화경 도량이셔요. 그리고 많은 큰스님이 오셔서 다 법화경을 설하셨는데, 법화경 방편품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로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라.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 이게 방편품 게송이에요. 몇 분이 하셨으니까 오늘 또 꼭 외우세요. 제법종본래. 요즘은 검색의 시대에요. 사유는 없어지고 검색만 나와 있다고 그랬는데 검색하고 사유하시면 돼요. 이 모든 현상이 원래원래 종본래 원래 원래 적멸 고요하다. 우리의 그 내면에 충실한 것이 적멸이에요. 열반의 경지예요. 남 탓하실 것도 부족하다고 아우성칠 것도 내가 갖고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게 적멸의 세계예요. 이 모든 것은 원래 고요하다. 불자행도이, 우리 모두 불자시죠. 불자가 긍지를 가지셔야 돼요. 그 난리 치더니 된 게 뭐 있냐. 한쪽에서는 저 처절한 전쟁이 그냥 이어지고, 사람이 죽어가고, 아직도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부자는 부자고. 뭐가 됐느냐 이 말이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이 돼야 되겠다. 나의 본 모습은 정말 고요하고 진리 그 자체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런 모든 은혜에 다 은혜가 부자라면 불자행도리 불자들이 이러한 위치를 매 순간 실천하며 내세득작불, 미래에 우리가 다 부처님 아니냐 이 말이에요. 우리 부처님 되려고 이러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부처님이 되지, 살지 않고 무슨 부처님 되길 바라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진관사에 모이신 모든 분이 저희 스님들과 함께 잘 고요한 적멸의 세계에 충만하시고 모든 거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가 부처님 되어지이다. 그런 마음 가져주십시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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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0월 3일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10-03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⑥ 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⑥-- 眞性甚深極微妙 · 指緣起體 --진성심심극미묘 · 지연기체 갑진년 9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그 내용인데요. 하기 전에 박수 한번 딱 치고, 10번을 외우고 또 마지막 한 번 딱 치고 시작합니다. 시작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박수) 잘 됐어요 아주. 아주 잘 됐어요. 대승불교에서 삼종 인과를 가르치고 있는데요. 세 가지 인과, 삼종 인과. 첫째는 육도인과. 육도인과는 범부가 생사를 거듭하는 내용이죠. 육도윤회, 육도생사, 육도인과 그걸 가르치고 있고. 둘째는 삼승인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 삼승인데, 삼승인과는 해탈인데, 해탈인과인데, 이 삼승들은 삼승이 각별이다. 성문승 해탈, 연각승 해탈, 보살승 해탈도가 각각각 다를 별, 각각 다른 인과다. 그래서 삼승 각별인과라 그래요. 그다음에는 법계인과. 온 우주 법계의 인과인데, 이 우주 법계 인과는 화엄경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화엄 인과라고도 하고, 화엄경은 원교를 말한다고 그래서, 원교,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그래서 화엄종을 원종이라고 하고, 화엄경의 가르침을 원교라고 하고 그래요. 그래서 원교인과라고도 하고. 또 화엄경은 하나의 길을 말한다라고 해서 일승인과라고도 그래요. 일승. 삼승이 아니고 일승인과다. 그런데 화엄인과나 원교인과나 일승인과나 다 법계인과를 말한다. 그래서 법계인과라고 하거든요. 그럼 법계인과라고 하는 게 뭐냐. 육도인과와 삼승인과는 순서가 있는데 이 법계인과는 순서가 없어요. 시작이 바로 결과예요. 결과가 바로 시작이고요. 또 미래가 현재예요. 또 과거가 현재고. 이래서 원융(圓融)이라 그래요. 원융. 순서가 없이 하나로 통하는 것은 원융이다. 그래서 화엄인과는 법계인관데, 법계인과는 원융인과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法無自性 以他爲性 塵塵混入 剎剎圓融 법무자성 이타위성 진진혼입 찰찰원융眞性甚深 眞極微妙 法不相知 法不相離진성심심 진극미묘 법불상지 법불상리 그럼 오늘 육도인과, 삼승인과, 법계인과 중에서 오늘 말씀이 법계인과를 말하는 내용이에요. 그럼 법계인과가 뭐냐? 화엄경에서는 하나하나 법에 자체 성격이 없다. 그래서 이걸 법무자성(法無自性)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컵뚜껑을 가르치며) 이것의 자체 성질, 자체의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무자성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다. 그럼 이게 어떻게 이루어졌냐. 이타위성(以他爲性)이라, 다른 것으로서 자체의 성격을 삼고 있다. 이걸 이타위성이라 그래요. 다른 것으로 자체 성격을 삼고 있다. 그래서 진진혼입(塵塵混入)이라. 티끌 티끌이, 우주 법계가 다 티끌로 이루어졌는데, 티끌 티끌에 모든 티끌이 다 들어가요. 하나의 티끌에 우주 전체 티끌이 다 들어오고, 또 지금 이 티끌도 우주 전체 티끌에 다 들어가고, 티끌 티끌마다 우주 법계가 다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다 혼자(混)가 있는데, 다 혼자, 다 들어간다. 진진에 혼입이라. 뭔 소리인지, 이게 어려워서 죽겠네, 이거. 진진혼입. 스님들은 많이 들어본 말인데. 찰찰원융(剎剎圓融)이라, 찰은 세계인데, 국토, 국토, 세계, 세계마다, 국토, 국토마다, 이 세계에 다른 것이 다 들어와 있고, 이것이 또 다른 데 다 들어가 있고, 이걸 원융이라고 하거든요.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갔고, 모든 것이 하나에 다 들어가고, 이걸 원융이라 그래. 그런 건데 오늘은 이 진성이 심심(眞性甚深)하다. 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원융무애의 지난번에 한 법성을 말하는데, 원융무애는 법의 성격이다. 법의 자성이다. 이래서 법성인데, 법성은 여기서 진짜가 거짓을 상대해서 진이 아니라, 전체가 진이다. 생멸을 상대한 진을 말하는 건 기신론인데, 화엄경은 생멸 상대 진이 아니라 전체가 온전하게 진이다, 이게. 여기서 진성은. 진성밖에 없다. 다른 건 없다. 그래서 그 진성이 심심해요. 심히 깊어. 그 깊단 말은 끝이 없어요. 심히 깊어. 그러고 진극이 미묘 미묘(眞極微妙)라. 그 진성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다고 그래서 진극이라고 하거든요. 다 이룰 극자. 진극이 미묘하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그러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고, 이것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가 있고요. 또 저것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가 있어. 그래서 이걸 진극이라 그래요. 참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안다. 참뿐이다. 그래서 이 화엄은 원융이기 때문에 제이는 없어요. 제이, 둘째는 없고, 또 주변은 없다. 주변이라는 말을 의상 스님은 측면이라는 측자를 써서 무측(無側)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무측. 측면. 옛날에는 다섯 손가락 외에 한 손가락이 더 있는 분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는 성형 기술이 없어서 그냥 들고 살았거든요. 그런 것 같은 걸 측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 화엄에서는 하나하나가 다 중심이에요. 주변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이 진극은 다 미묘한 주체가 돼서, 티끌에 우주만상이 다 들어가고, 또 티끌이 우주만상 속에 다 들어가서, 전부가 진성으로 모든 것을 다 뒤덮지, 거기에 측면이나 주변이나 없어도 될 쓸데없는 거는 없다. 이걸 미묘하다 그래요. 미묘해. 그래가지고 법불상지(法不相知)라. 그런데 원융하고 심심하고 미묘한데, 이 법법이 서로 몰라요. 이걸 불상지라 그래요. 아니 불자, 서로 상자, 알 지자. 서로 알지 못한다. 어떤 법이든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여기 이제 법당에 기둥이 있는데, 저 왼쪽 기둥이 오른쪽 기둥을 몰라요. 오른쪽 기둥이 왼쪽 기둥을 몰라요. 이게 불상지여. 서로 알지 못해. 그런데 왼쪽 기둥 혼자 법당이 될 수가 없어요. 오른쪽 기둥 혼자 법당이 될 수가 없어. 이걸 불상리(不相離)라고 그래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법불상지, 법은 서로 알지 못한다. 법불상리, 어떤 법이든지 법은 서로 떨어진 것이 없다. 이게 이제 화엄이거든요. 이걸 법계인과라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몸도 발은 머리를 알지 못하고 머리는 발을 알지 못하는데 이게 불상지죠. 근데 발이 머리를 떠나 있지 않고, 머리가 발을 떠나 있지 않고 그런 거예요. 지금 전화하는 사람도 모르고, 전화 받는 사람도 모르는데, 서로 모르죠. 근데 전화 거는 사람하고, 받는 사람하고 서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한 사람이 모든 사람하고 다 연결돼 있어요. 이게 불상리여.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근데 서로 몰라요,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불상지예요. 이제 이런 식으로 화엄경에서는 법계인과를 가르쳐요. 그래서 화엄은 발심이 성불이다, 이걸 가르쳐요. 언제 성불을 하냐. ‘성불을 해야 되겠다.’ 마음을 내는 순간에 바로 성불하는 거예요. 이게 법계인과예요. 그리고 불상리라. 그런데 성불했을 때 언제 발심했는지 몰라요. 불상지여. 그런데 발심과 성불이 그대로 다 연결돼 있어요. 이래가지고 성불 떡 하고 보니까, 언제 성불했느냐. 발심했을 때 성불했더라. 그런데 성불하기 전에는 언제 발심했는지도 몰라요. 근데 하고 보니까 성불이 발심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에 모든 세계가 다 들어가고, 또 모든 세계가 하나의 티끌로 다 들어가고, 그래서 이걸 원융무이라고 하거든요. 원융해서 둘이 없다. 참. 그러니까 법이 뭐냐. 일체중생의 오온 신상이라. 오온 수상행식이라고 가르쳤잖아요. 오온 신상이 법인데, 이 법이 그대로 우주 만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의 티끌이 온 우주 법계에 다 들어가듯이, 그러니까 이 화엄 법계 인과를 턱 알아서 믿게 되면, 이 한몸이 우주 법계에 다 들어가니까 이 몸이 우주 법계요, 법계가 이 몸이요. 근심 걱정 없어요. 전혀 없어요. 법무자성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다. 이타위성이라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 진진혼입이라, 티끌티끌마다 우주 법계가 다 들어간다. 찰찰원융이라, 국토 국토마다 다 연결돼 있다. 진성심심이라, 모든 것이 깊고 깊다. 또 모든 것이 참된 것으로 다 이루어져서 미묘하다. 그래서 법은 서로 알지 못하지만, 법은 서로 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돼요. 그 나머지는 이제 이 법성게를 의상스님 제자들이 주석을 쭉 달아놨는데 그 주석들 중심으로 말씀을 드려야 돼요. 아무리 종범이 공부를 깊이한다고 해도 의상 스님 제자분들처럼 깊을 수는 없거든요. 法記云。①上訂分中 指其身心 直示法性 由無名相 機難得入故 법기운。①상증분중 지기신심 직시법성 유무명상 기난득입고以法性 轉名眞性 令其習也 ··· 如是訂分 絕一切故 唯訂所知 이법성 전명진성 영기습야 여시증분 절일체고 유증소지然以八識妄心 而欲訂入 故於此人 不能直指 訂分之處 乃下一 연이팔식망심 이욕증입 고어차인 불능직지 증분지처 내하일步 假作眞性之名 以示之也。②甚深者 入眞性之門 謂花藏世界 보 가작진성지명 이시지야。②심심자 입진성지문 위화장세계之甚深 與彌勒樓閣之甚深也 花藏世界甚深者 以一一塵中 見法지심심 여미륵누각지심심야 화장세계심심자 이일일진중 견법界故 是故約一微塵 求其内外 並不可得 ··· ③極微妙者 中道也 계고 시고약일미진 구기내외 병불가 ③극미묘자 중도야 非謂離二邊故 以爲中道 即約諸邊 云中道也(叢髓錄)비위이이변고 이위중도 즉약제변 운중도야(총수록) 그러면 의상 선생님 제자분들 중에 법기(法記)라고 하는 주석을 남긴 주석이 있는데, 그 법기에서는 무슨 말로 해석을 했는가. 위 증분 중(上訂分中)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부터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까지를 증득한 내용, 깨달은 내용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단 말이에요. 증분 중에서 지기신심(指其身心)이, 중생의 그 몸과 마음이 직시법성(直示法性) 마음이 바로 법성이라는 걸 가르쳤다는 거예요. 법성. 법의 본성임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 법의 본성이 무명무상(由無名相)해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깊은 해인삼매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해인삼매를 얻지 못해가지고, 기난득입(機難得入故)이라, 하근기 · 중근기 · 상근기까지도 들어가기가 어려워. 그럼 뭐냐. 아주 상근대지가 들어갈 수 있는데, 상근대지는 만나기가 어려우니까, 근기들이 난득입이라, 들어감을 얻기가 어려운 고로, 이 법성으로(以法性), 법성이라는 말을 전명진성(轉名眞性)이라, 이름을 바꿔서 진성이라고 했다. 이제 중근기 · 하근기들이 거기에 법성이라는 데 체험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법성이라는 말을 진성이라는 말로 바꿔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소리예요. 이게 의상스님 제자가 이 진성에 대한 이름을 주석한 거예요. 참, 이런 주석이 있으니까 이게 공부를 하지, 이거 없으면 더 막막할 거 아니에요. 참. 법성이라고 하면 이 중생의 신상이 법성이기 때문에, 바로 그냥 법성인 걸 알고 그냥 해탈이고, 자재고 원만구족이고 무장무애라. 되는데 그게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중하근기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못 들어가는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법성이라는 말을 진성이라는 말로 바꿔서 가르치고 있다, 이런 설명이에요. 참 기가 막히네. 이와 같이 법성을 깨달은 증분은 절일체고(絕一切故)로, 일체가 다 끊어져서 유증소지(唯訂所知)라, 오직 증득한 지혜로만 그 법성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러나 일체 중생들은 팔식망심(然以八識妄心)으로, 생각으로, 망상으로, 이걸 팔식망심이라고 그러는데, 팔식 허망된 마음으로 이욕증입(而欲訂入)이라, 그 법성에 증득하고자 한다. 증지로 들어갈 수 있는데 망령된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이게 꿈을 꿀 때, 꿈꾸기 전에 본래 이 낮의 경지는 꿈을 깨서만이 알 수 있는데, 꿈을 깨지 않고 꿈속에서 이 꿈 깬 세계를 알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거 안 되거든요. 이 꿈 깬 세계는 꿈을 깨기 전에는 알 수가 없어요. 꿈속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꿈 깬 세계를 몰라. 그래가지고 어차인(於此人)에, 이 법성을 모르는 사람에게 불능직지 증분지처(不能直指 訂分之處)일세. 바로 법성의 세계를 바로 가리킬 수가 없기 때문에 내하일보(乃下一步)하야, 이에 한 걸음을 옮겨서, 가작진성지명(假作眞性之名)하야, 시지야(示之也)니라.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어가지고 중생들에게 보인다. 이렇게 주를 달았어요. 심심자(甚深者)는 심심이라고 하는 것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니, 입진성지문(入眞性之門)이니, 위, 그 심심이 어떤 거냐. 화장세계 심심(花藏世界之甚深)도 있고, 미륵누각심심(彌勒樓閣之甚深)도 있는데, 화장세계 심심이라고 하는 것은 화장세계품에서 일일진중에서(以一一塵中), 하나하나 티끌에서, 견 법계라(見法界故), 우주 법계를 다 본다. 왜냐하면 우주법계가 하나의 티끌로 이루어진 거예요. 하나의 티끌이 없으면, 둘 티끌도 없고, 둘이 없으면 셋도 없고, 넷도 없고, 그래서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 법계가 다 들어 있는데, 이제 사람들은 그 티끌 모양만 보지, 티끌의 근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티끌만 보는 거예요. 그걸 망심이라 그래요. 망심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만 보는 게 망심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근본을 보는 것이 지혜다. 망상은 식심이라고 하고, 그 지혜를 반야라고 하는데, 이 망상은 생사업이고 반야는 보리업이에요. 깨닫는 업이라. 그래서 이 반야라고 하는 것은 식심을 먼저 그쳐야 돼요. 식심은 뭐냐. 좋다 나쁘다, 간다 온다, 너다 나다, 이거 생각하는 게 의식의 마음이다 이래가지고, 식심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거를 가만히 보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싫어하는 걸 보면 싫은 게 아니에요. 그냥 생각으로 싫어하고 생각으로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식심으로 법계에 들어갈 수가 없고, 이제 그 보이고 들리는 거를 가만히 관찰을 하면, 보이고 들리는 속에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다 들어 있고, 이것이 보여요. 그걸 삼매라고 그래요. 삼매. 그 삼매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삼매는 반야다. 그래서 이 삼매 반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중생들은 망상으로 들어가려고 하기때문에, 이런 말이죠. 이렇게 이제 가르치는데 그것은 하나 티끌 티끌 가운데 법계를 보는 거로 약일미진(約一微塵)하여, 하나의 티끌을 잡아서, 구기내외(求其内外)하되 병불가득(並不可得)이라. 이 하나의 티끌에 안이 어디고 밖이 어디고, 언제 시작했고 언제 사라지고, 이걸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몸이라는 것도 몸 밖이 뭐고, 몸 안이 뭐고, 몸이 언제 생기고, 또 몸이 언제 사라지고. 그 내가 이거 사람들이 죽는다는 말을 쓰는데 죽는다는 게 뭔가. 죽는 건 없더라고 보니까. 없는 게 뭐냐 하니까 임종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요, 죽었다 살았다 그 경계선이 없어요. 영화에 보면 뭐 몸이 턱 떨어지는 거 나오는데, 그거 전부 가짜거든요. 그거. 죽은 사람이 몸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여. 움직이는 걸 딱 연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건 아니고 마지막으로 언제 돌아가시는가 가만히 보는데, 마지막 숨 떨어지는 거를 거의 모르겠더라고. 근데 그 오래된 경험 있는 분이 이제 돌아가셨다 선언을 하니까, 그때 돌아가신 걸로 인정을 하는 거지, 죽음이라는 건 없다. 표시는 숨쉬다 숨 안 쉬는 것뿐인데, 어느 시각에 숨을 안 쉬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임종 맞이할 때 한번 보세요. 마지막 숨 떨어지는 요 시각이 언젠가 몰라요, 그게. 그런데 숨은 졌어도 몸은 따뜻한데 뭐. 한참 동안 따뜻해요. 또 따뜻하지 않아도 몸은 있잖아요. 이것이 불에 들어가든지 어디든지 이게 또 남아 있어. 이게 다 없어지면 그냥 어디로 들어간 거지. 사실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죽는 게 없으면 태어난 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고 산다는 건 순전히 생각 망상이 만들어내서, 생각 망상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뿐이지, 없어요.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고, 우주가 한 티끌 속에 들어가고 그거예요. 이걸 법계인과라고 그래요. 하 참. 그래서 극미묘자(極微妙者)는 중도라(中道也). 중도라는 건 뭐냐. 불생불멸을 중도라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뭐라고 가르쳤느냐 하면, 비위이이변(非謂離二邊)이라. 이 두 끝을 벗어났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뭐냐. 모든 이 경계가. 경계가 여기서 끝나고. 저기서 끝나고.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게 전부 중도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시작이 그게 시작이 아니오. 서로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끝이 그게 끝이 아니오. 서로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 하나 하나 생긴 게 여기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저기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전부 다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나하나 개별 개별이 다 중심을 이루는 길이라는 뜻에서 중도라고 그래요. 변방이 없다는 뜻에서 무변방을 중도라고 그러지, 뭐 두 끝을 버렸다고 중도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거지. 화엄경에서는.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하는 거 그거 얘기인데요. 실제중도상이라는 거는 하나하나 모양 모양이 전부 변방이 아니다. 이거요, 주변이 아니고 중심이다. 그래서 변방은 없고 중심으로 가득한 그 세계, 중심을 이루는 모든 세계를 중도라고 한다. 이 기도하러 와 가지고 이런 법문만 들어보니 참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요. 이걸로(컵뚜껑) 보면요. 변방은 요 오른쪽 변방, 왼쪽 변방이 변방이고, 이 중간이 중도잖아요. 화엄경 중도는 그게 아니다. 이것도 중심이고 이것도 중심이고 저것도 중심이니까 모든 게 다 중도다 이거지. 그걸 화엄경에서는 실제 중도라고 그래요. 이변을 여읜 중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걸 가르켜서 진성은 심심하다. 심히 깊다. 이걸 이제 전체가 중도다. 그래서 심히 깊다라고 했는데. 華藏世界所有塵 一一塵中見法界화장세계소유진 일일진중견법계寶光現佛如雲集 此是如來刹自在(華嚴經卷8. 華藏世界品)보광현불여운집 차시어래찰자재(화엄경권8. 화장세계품) 그 화장세계품에서 무슨 말을 했냐면, 화장세계에 있는 모든 티끌이 하나하나 티끌 속에서 견법계라. 이 티끌 하나하나에서 우주 법계를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화엄경 화엄 삼매를 닦으면 여기저기 여행 다닐 필요가 없어요. 요만한 티끌에서 우주를 다 보는데 가긴 어딜 가 그렇잖아요. 일일진중에서 견법계라(一一塵中見法界). 기가 막혀요. 하나하나 티끌에서 온 우주 법계를 다 본다. 돌아다닐 필요 없이, 가만히 이렇게 멈춰서 보면, 이게 시작이 없고, 끝이 없고, 보이는 게 없고, 보이지 않는 게 없고, 이걸 실제 중도라고 하거든요. 진실 경지 그 중도. 보광이 현불이 여운집(寶光現佛如雲集)하니 이 보배 광명 속에서 부처님 몸이 막 나타나. 그래가지고 구름같이 모여드니 차시여래찰자재(此是如來刹自在)라. 이것이 여래는 국토의 구애를 받질 않아요. 국토에. 이 지구에서 하늘에 올라가는 것도 구애가 없고, 이쪽에서 저쪽에 가는 것도 구애가 없고, 사람은 자기 집 담 안에서만 살아야 되는데, 새들은 휘휘 날아다니면 뭐 어느 집이든지 아무 필요가 없잖아요. 근데 새들처럼 구애 안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저 세계에 가는 도리가 이게 찰자재예요. 그러니까 오른쪽 기둥을 떠나지 않고, 왼쪽 기둥과 만나는 거예요. 이거 참. 좌이부동(坐而不動)하고, 자기 위치에서 떠나지 않고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 서로 만나고 서로 들어간다. 이쪽에서 떠나지 않고 저쪽으로 들어가고, 저쪽에서 떠나지 않고 이쪽으로 들어가고, 이걸 상즉상입이라 그래요. 서로 상자, 들어갈 입자, 서로 상자, 만날 즉자. 떠나서 만나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고 만나요. 떠나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고 들어가요. 이걸 법성원융이라고 하고요. 진진혼입이라고 해요. 법성원융, 진진혼입. 眞記云 問 眞性 與上法性 何別 答 有云別也 謂法性則 通眞妄 진기운 문 진성 여상법성 하별 답 유운별야 위법성즉 통진망取圓融 又通情非情也 此則唯是眞 而又唯是有情門 以下釋眞性취원융 우통정비정야 차즉유시진 이우유시유정문 이하택진성段 約衆生十二支故也 然而今約實云 眞性即是法性也 所謂眞性단 약중생십이지고야 연이금약실운 진성즉시법성야 소위진성之體甚深微妙者 但以不存自性 攬諸緣成故也(韓佛全6-777中)지체심심미묘자 단이부존자성 남제연성고야(한불전6-777중) 그게 진기라는 분이 또 말을 하기를, 법성과 진성은 어떠냐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기를, 법성은 진망(眞妄)에 다 통하고, 진실과 거짓에 통하는 게 법성이고, 또 유정과 무정, 정과 비정, 생명이 있는 생명체하고 생명이 없는 거 하고 다 통하는 게 법성이고, 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중생만을 지적해서 진성이라고 한다라고도 얘기를 하는데, 연이나 약실이 운(然而今約實云)임은, 진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면, 진성즉시법성(眞性即是法性也)이라, 진성은 바로 법성이다.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진기라고 하는 분이 기록으로 해석을 하고 있어요. 이름은 달라도 진성과 법성이 다를 바가 없다. 소위 진성지체(所謂眞性之體)가, 진성의 그 본체가, 심심미묘자(甚深微妙者)는 단이부존자성(但以不存自性)하고, 어떤 것도 자기 자체의 성질을 딱 보존해서 지키지 않고. 이 나무가 있는데 책상이 된다. 그러면 나무가 나무의 자체 모양, 자체의 성질을 지키지 않고 책상도 돼요. 이걸 진성이라고 한다 이거죠. 물이 얼음도 돼요. 이것이 진성이다. 또 물이 구름도 된다. 뭔 소리인지. 진짜 삼매에 들어가서 이걸 딱 보면, 이 삼매에 들어갈 수 있고, 이 삼매에 들어가 보면 우리 몸이 죽고, 살고, 오고, 가고 하는 게 전부 법의 인과가 펼쳐지는 거다. 법계 인과가 펼쳐지는 거다. 그래서 이걸 법계 연기라고 그러고요. 이게 법계 인과다. 근데 이걸 법이라고 보지 않고 내 몸이라고 딱 보니까, 멀쩡한 자기 집에서 몸이라는 꿈을 꿔 가지고, 생로병사 우비고뇌의 고통을 계속 받고 있다.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이걸 내 몸이라고 알고 있는 한 생로병사 근심 걱정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근데 이거는 우주의 법이다. 우주 법계다. 우주 법계의 근본지다. 이렇게 알고 나면, 이게 태어날 적에도 저 티끌 티끌이 모여서 태어났고, 죽을 때도 이 몸이 티끌 티끌이 저 우주 밖으로 돌아가서 서로 상입상즉하는 거예요.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죽는다라고 하지 말고, 이 몸이 우주 법계와 만난다. 물도 돌아가서 다른 거와 만나고, 공기도 돌아가서 만나고, 이게 이제 화엄경에서는 법성원융 상입상즉,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난다. 근데 이걸 몸에 딱 집착해서 근심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아무리 해봐야 한참 들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지만, 듣고 나면 어디 갔어, 들은 기억도 없어, 어디 갔냐고요. 이게. 그래서 증지소지라는 거예요. 증득한 지혜로 알 바다. 팔식 망심으로는 불가지라. 팔식 망심으로는 모른다는 거죠. 이래가지고 이 진성이라는 거는 부존자성(不存自性)하고, 자체 성격을 탁 보존하지 않고, 남제연성고로(攬諸緣成故也), 여러 가지 인연을 잡아서 이루어진다. 이게 책상은 나무로, 나무가 이루어지려면 여기 이제 목수도 있어야 되고, 설계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이러잖아요. 또 집도 되고, 뭣도 되고, 여러 가지 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자체 성격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성은 심심하고 진성은 극미묘라.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다. 이렇게 이제 저술을 하는 거죠. 大記云 ··· 又何者吾身 虚空是也 何者虚空 吾身是也 以無側故대기운 우하자오신 허공시야 하자허공 오신시야 이무측고又六道即是虛空 虛空即是六道也。頌曰。우육도즉시허공 허공즉시육도야。소왈。虛空法界爲身心 行住坐臥念相續허공법계위신심 행주좌와염상속所見諸物亦身心 念念相續無絶已 (叢髓錄.韓佛全6-779中)소견제물역신심 염념상속무절이 (총수록,한불전6-779중) 그리고 대기(大記)라고 하는 분이 뭐라고 했냐 하면, 하자가 오신고(何者吾身), 어떤 것이 내 몸이냐 이렇게 해. 내 몸이라는 게 이게 뭐냐. 허공이 시야(虚空是也)라. 허공이 내 몸이다. 이렇게 했던 거예요. 내 몸은 허공이다. 허공은 죽고 사는 게 없는데, 또 변방이 없는데 저거는, 서로 중앙에 모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허공이 내 몸이면. 오래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잖아. 허공이 내 몸이면. 이게 법계 인과라고 하는 거지. 그러면 하자가 허공고(何者虚空). 무엇이 허공이냐. 이러니까 오신이 시야라(吾身是也), 내 몸이 허공이다. 내 몸이 허공이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이 속이 텅 비었더라고, 사람 몸도. 허공이에요. 허공. 또 물질 하나하나도 그게 다 허공이에요. 그러니까 저 보이는 허공만 허공이 아니라, 내 몸도 허공인 거예요. 그래서 허공삼매에 딱 들어도 근심 걱정 없어져요. 삼매라는 것은 바로 보는 게 삼매인데, 이 몸을 허공이라고 딱 바라보고 있으면, 몸이 없는데 어떻게 걱정이 있어요? 모든 걱정은 몸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이무측고라(以無側故). 주변이 없기 때문이다. 허공에는 주변이 없잖아요. 이 몸도 주변이 없어, 그냥 중심이야. 또 육도가 즉시 허공이니(又六道即是虛空), 지옥 · 아귀 · 축생 · 인도 · 천도 · 아수라가 허공이니, 허공이 즉시 육도라. 그래서 게송을 하기를 허공법계로 위신심(虛空法界爲身心)하고, 허공 우주 법계로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을 삼고. 쳐다보긴 열심히 쳐다보고. 열심히 쳐다봐요. 내 마음 내 몸이라는 건 우주 법계다. 허공 법계다. 그리고 또 행주좌와의 염상속(行住坐臥念相續)이라. 행주좌와, 가고 오고 움직이는데, 생각 생각이 계속 상속하는 게 이게 전부 허공법계다. 생각하는 것도 허공이고 앉는 것도 허공이고 오고 가는 것도 허공이고. 그러니까 이게 의상 스님 제자들은 이래서 다 성인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성인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의상스님이 훌륭한 거는 제자가 이 경지까지 올라가도록 지도를 했고, 본인은 저술도 안 했어요. 교육에만 종사했어. 그러면 요즘 학생들하고 토론해보면 어떻게 저술을 안 하고 살 수가 있어요, 이런 말해요. 근데 의상 스님은 이것밖에 안 했어요. 법성게밖에, 해인도(海印圖) 밖에. 그리고 제자들이 그 경지에 올라갈 수 있도록 이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이런 제자들이 나온 거예요. 허공이 돌아다니고, 허공이 앉고, 눕고, 허공이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그다음에 소견제물도 역신심(所見諸物亦身心)이니, 내가 지금 볼 수 있는 모든 물건도 바로 내 몸이다. 내가 저 물건 속에 들어가고, 저 물건이 내 몸 속에 들어가고, 요것만 내 몸이 아니라 이것도 내 몸이고, 저 물건도 내 몸이고, 이것도 내 몸이고, 소견제물도 역신심이라, 또한 몸과 마음이다. 그러니까 누가 이게 내 몸이다 그러면, 이게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도 나를 모르고, 나도 이것도 모르고 불상지지. 그런데 이 허공 삼매에 딱 들어보면 이것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몸속에 들어오고, 내가 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것 속에 들어가고 이러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화엄삼매인 거예요. 이것이 상입상즉이여.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난다. 염념상속무절이(念念相續無絶已)라. 이 허공이 내 몸이 돼서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서 끝남이 없다. 그래서 과거가 옛날이고, 현재가 지금이고, 미래가 앞으로가 아니라, 과거 · 현재 · 미래가 한순간이다. 가(주변)가 없어요. 중심뿐이에요. 또 티끌티끌이 주변이 없고 바로 중심뿐이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이 법계를 이루고, 법계가 하나의 티끌을 이룬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법계 인과라 하고 가르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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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9일 국행수륙재 4재 법문
종범스님 2024-09-29
진관사국행천지명양수륙무차평등대재 普召請 普咸集 一切孤魂哀魂 列位列名靈駕 同生信心 同往西方淨土 보소청 보함집 일체고혼애혼 열위열명영가 동생신심 동왕서방정토極樂世界 無窮受福 法界受生 一切含靈 同悟無生 同登彼岸 念願念願극락세계 무궁수복하시고 법계수생의 일체함령이 동오무생 동등피안을 염원염원이옵니다나무아미타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진관사 금년 수륙재에 늘 염불작법으로 보소청(普召請) 영가들이 있거든요. 빠짐없이 빠짐없이 두루두루 알려서 여기 오시라고 청했다. 그게 소청이에요. 그래서 보함집(普咸集)하셨다. 여러 영가들이 알고, 함께 널리널리 이곳에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영가분들께서 동생신심(同生信心)하시고, 함께 불성을 깨달으면 불성밖에 없다. 불성을 깨달으면 불성밖에 없다. 이런 신심을 내라는 거예요, 동생신심이라는 건. 그래서 동왕서방정토(同往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하시고, 여기에 참가한 모든 혼령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함께 가시고, 또 법계수생(法界受生), 온 법계에서 생을 받은 일체 생령, 살아있는 영혼, 일체함령(一切含靈), 일체 불성을 품고 있는 중생들은 동오무생(同悟無生)하여, 나고 죽는 게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성의 표현이다. 생사가 생사가 아니고 불성현현(佛性顯現)이다. 태어나는 것도 불성의 나타남이요, 죽는 것도 불성의 나타남이다. 그래서 생사는 없고 불성의 나타남이 있다. 그걸 깨닫는 게 무생법을 깨닫는다 이래요. 생사 없는 불성법. 그래가지고 동등피안(同登彼岸)이라, 함께 저 생사 없는 피안에 오르기를 염원하고 염원합니다. 이건 불성법문이기 때문에 누구를 위한 팔팔한 주제, 이런 건 다 여기에 포함돼 있어요. 이것밖에 팔팔한 주제는 다시 없어요. 내가 뭐 본래 팔팔하지도 않는데, 팔팔한 주제라고 그랬는데, 이 불성은 일체 중생에게 다 해당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누구에게만 국한될 수가 없어요. 그런 내용입니다. 一切群生 無明行識 憂悲苦惱 不絕相續 일체군생은 무명행식으로 우비고뇌가 부절상속하고 一切諸佛 圓成正覺 萬德莊嚴 窮劫無盡 일체제불은 원성정각하야 만덕장엄이 궁겁무진이로다群生諸佛 本乎一心 物物諸法 唯心所現 군생제불이 본호일심하니 물물제법이 유심소현이요十方三世 四生六道 生死出沒 悉是一念시방삼세와 사생육도의 생사출몰이 실시일념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체군생(一切群生)은, 일체중생은 무명행식(無明行識)이 있다. 무명이라는 게 뭐냐. 모든 물건(컵 뚜껑을 들어보이시며)이 한마음인데, 일심인데, 일심을 보지 못하고 마음 밖에 있는 물건으로 본다. 이게 무명이에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 밖에 있는 물건으로 본다. 이게 무명이에요. 이게 뭐냐 그러면, 그릇이다 그러면, 여기엔 자기 마음이 없는 거거든요. 그릇뿐이고. 그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근데 여기에 마음이 있어. 근데 이 마음은 미묘하다. 특징이 미묘해. 미묘하다는 건 있는데, 생각의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있는데 육안에 안 보여. 육안은 생각의 눈인데, 그럼 있는 게 안 보이는 게 뭐냐.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모양과 그림의 재료 물감은 보이는데, 그 화가의 생각은 안 보여요. 근데 그 그림의 배치와 형태가 전부 그림 그리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왔거든요. 물감을 쓰는 것도 그렇고, 배치하는 것도 그렇고, 구성하는 것도 그렇고. 근데 그림 형태만 보이지, 그린 사람의 생각은 안 보여요. 근데 알고 보면 그 물감 구성 하나하나가 전부 화가의 생각이에요. 이 집을 지은 것도 여기 집 자체만 보이지만, 이 집 지은 사람의 생각은 안 보여. 근데 이게 하나하나가 전부 집 지은 사람의 생각이 이게 이루어진 거거든요. 그걸 미묘하다고 그래요. 미묘하다. 묘하다. 그래가지고 이 한 생각이 미해서, 미한다는 말은 잘못 봐서, 마음을 물질로 봤다 이거지. 그래서 우비고뇌가 부절상속(憂悲苦惱 不絕相續)하고, 근심 걱정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물질이 떠나면 내가 괴롭고, 물질이 오면 또 오는 대로 또 괴롭고. 근데 일체제불은 원성정각(一切諸佛 圓成正覺)하야, 일체제불은 마음밖에 한 물건도 없다. 전부가 마음이다. 이걸 그냥 남김없이 온전하게 깨달았어요. 그걸 정각을 원만히 이루었다. 죽는 것도 마음이고, 사는 것도 마음이고, 미워하는 거 좋아하는 거가 일체가 마음인데, 그걸 온전하게 깨달은 걸 원성이라고 그래요. 원만히 이루었다고. 원성정각하야, 만덕장엄이 궁겁무진(萬德莊嚴 窮劫無盡)이라, 온갖 좋은 것들이 이 세월이 다 하도록 끝이 없다. 그런데 이 군생이나 제불이나 어디서 나왔냐. 군생제불(群生諸佛)이 본호일심(本乎一心)하니, 여러 일체중생과 삼세제불이 본래 한 마음에서 근원하여 나왔으니, 물물제법(物物諸法)이 물건, 물건 모든 것들이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바다. 시방삼세와 사생육도(十方三世 四生六道)의 생사출몰(生死出沒)이 시방 삼세도 마음이 나타난 바고, 사생육도, 생사 오르고 내리는 게 실시일념(悉是一念)이다. 다 한 생각이다. 그래서 이걸 일심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일념이라고도 하고, 이건 다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 근본 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불성, 일심, 한 생각이. 一心妙體 圓明靈明 無名無相 獨露常露 일심묘체는 원명영명하여 무명무상하되 독로상로로다靈明無古 冥通三際 圓明無住 洞徹十方 영명은 무고하니 명통삼제하고 원명은 무주하니 통철시방이로다不隨生生 不隨滅滅 大包沙界 小入微塵 불수생생이요 불수멸멸하니 대포사계하고 소입미진이로다.圓滿具足 無障無礙 開眼合眼 本無他物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하야 개안합안에 본무타물이로다나무아미타불 에 좋다 좋아. 좋아요. 좋아요. 뭐가 좋냐. 일심묘체(一心妙體)는 원명하고 영명(圓明靈明)하다. 둥글고 밝고 신령스럽게 밝다. 원명이라는 거는 둥글 원자인데, 끝없이 밝아요. 또 신령스럽게 밝아. 끝없다는 말은 전체에 다 포함되고, 신령스럽다는 건 하나하나를 또 분명히 안다 이거죠. 전체도 알고 하나하나도 알고. 그래서 무명무상(無名無相)하되,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으되, 독로상로(獨露常露)라, 홀로 드러나고 항상 드러난다. 영명은 무고(靈明無古)하니, 신령스럽게 밝은 것은 세월이 없어. 아무리 오래 가도 옛날 되는 게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무고라 그래요. 옛날 되는 게 없어. 그래서 명통삼제(冥通三際)하고, 그윽이 과거·현재·미래에 다 통하고, 원명은 무주(圓明無住)하니, 둥글고 밝은 것은 머무는 데가 없으니, 통철시방(洞徹十方)이라, 시방에 밝게 다 통한다. 이것은 불수생생(不隨生生)이요. 이 몸이 태어날 때 태어남을 따라서 처음으로 생긴 게 아니고,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태어난 생일날 태어난 게 아니고, 이 소리예요. 이 몸은 생일날이 있는데, 마음은 생일날 없어요. 또 몸은 제삿날 있는데 마음은 제삿날 없어. 그래서 허공에 물질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허공은 생기는 거 없고 없어지는 거 없어요. 불수생생이라. 생을 따라서 생기는 게 아니다. 불수멸멸(不隨滅滅)이라, 없어짐을 따라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게 하도 미묘해가지고 대포사계(大包沙界)하고, 크기로 말하면 항하사 모래알 숫자와 같은 3천대천세계를 다 포함하고도 남아요. 소입미진(小入微塵)이라. 작기로 말하면 가느다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에 들어가도 오히려 티끌이 남는다. 참 이게 이게 이게 뭐여 이게. 깨닫는다는 건 이런 걸 깨닫는다는 거야. 이런 거 아는 거를. 깨달음이 뭐냐. 이 마음이라는 거는 우주를 감싸고도 남고, 마음이라는 거는 티끌에 들어가도 오히려 티끌이 더 넓이가 비어 있는 그런 거를 눈에 보고,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깔고 앉는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는 남녀노소 어린이, 청소년, 노년층 없어요. 다 한마음에 넉넉함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다 채워져서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장애가 하나도 없다. 개안합안(開眼合眼)에, 눈을 뜰 때나 눈을 감을 때나 본무타물(本無他物)이라. 본래 마음 밖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다. (저쪽에도 가득 찬 거 보니까 많이 오셨네요. 저 밖에도 계시던데. 저쪽 앞쪽에도 계시고, 여기 안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떻게 이렇게 경쟁을 해서 이긴 거예요? 어떻게 해서 안에까지 들어오신 거예요? 와.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 법문을 듣고 이런 법문을 믿기만 해도 근심 걱정 없어요. 근심 걱정 없어. 終日圓覺 而未嘗圓覺者 凡夫也 欲證圓覺 而未極圓覺者 菩薩也 종일원각 이미상원각자는 범부야요 욕증원각 이미극원각자는 보살야요具足圓覺 而住持圓覺者 如來也 離圓覺 無六道 捨圓覺 無三乘 구족원각하야 이주지원각자는 여래이니 이원각하면 무육도하고 사원각하면 무삼승하고非圓覺 無如來 泯圓覺 無眞法 其實 皆一道也 (圓覺經 表休序文) 비원각이면 무여래하니 민원각하면 무진법이니라 기실은 개일도야니라 (원각경 표휴서문)나무아미타불 이 일심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일심인데, 이걸 깨달았을 때는 정각이라고 하고, 보리, 깨달았을 땐 보리라 그래요. 보리는 깨닫기 전엔 보리라고 안 해요. 그냥 일심이라 그래요. 그냥 불성이라고 하고, 그냥 한 생각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걸 깨달으면 보리라고 그런다. 보리를 삼보리라고 이제 적는데, 그걸 우리 말로 하면 정각이라고 적어요, 삼보리를. 삼보리, 정각. 근데 그걸 원만히 둥근 내용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각이라 그러고. 이거 그것밖에는 없다, 그래서 대각이라 그래요. 정각, 원각, 대각. 거기 대각밖에 없는데, 중생은 그 대각 속에서 물건을 마음 밖에 있는 걸로 알고 평생 물건 구하다가 죽는 거예요. 구하다 죽어요. 새는 날다 죽고, 사람은 구하다 죽는다. 80 먹어도 떨린다 그래요. 80 먹어서 뭐 연애를 할 것도 아닌데, 왜 떨리나. 구하는 것이 습관이 돼가지고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구해요. 구하다 보니까 떨리는 거예요. 안 구하면 안 떨려. 구하면 떨리고, 안 구하면 안 떨린다. 이 구하는 게 아주 버릇이 됐어요. 그래서 아이도 떨고, 어른도 떨고, 노인도 떨고, 다 떤다. 그게 요즘 말로 하면은 노이로제 스트레스예요. 구하면서 떠는 게 그게 노이로제고, 스트레스거든. 저 사람 구하면서 떤다. 근데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원각을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범부들은 종일 토록 원각 속에 있는데, 미상원각(未嘗圓覺)이라 한순간도 원각을 느끼질 못했어요. 한순간도, 잠깐도 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범부고. 욕증원각 미극 원각자(欲證圓覺 而未極圓覺者)는 원각을 얻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원각을 다 얻지 못한 건 보살이고, 구족원각(具足圓覺)하야, 원각을 다 갖추어서 주지원각자(住持圓覺者)는 원각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여래다. 그러니까 원각을 떠나면 사생육도도 없고, 원각을 떠나면 성문, 연각, 보살, 삼승도 없고, 원각이 아니면 여래도 없고, 원각이 없으면 참법도 없으니 기실은 다 하나다. 원각이란 말이죠. 원각은 일심이여. 모두가 일체중생도 한마음이고, 삼세 제불도 한마음이고, 일체보살도 다 한마음이다. 이걸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원각경 서문에 있는 말인데 아주 유명한 서문이에요. 그래서 강당에서 글을 가르치는데, 4종 서문만 외우면 강당에서 가르치는 전부 다 안 배워도 도에 들어간다. 4종 서문이라는 게 금강경오가해 일물서(一物序), 일물,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일물로 시작하거든요. 그다음에 혈기서(血氣序). 지금 말한 이게 이제 원각경 서문, <부혈기지속(夫血氣之屬)>이, 몸에 혈기가 도는 모든 생명들이, 이렇게 시작한다고 그래서 혈기서라 그래요. 이 혈기서하고, 또 원각경 본문을 저술한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이렇게 출발한다고 그래서 원형서(元亨序)이래. 또 화엄경에 <왕복이 무제나(往復無際)> 이렇게 시작한다고 그래서 왕복서(往復序), 이게 4종 서문이거든요. 일물서, 혈기서, 원형서, 왕복서 그러는데, 일물서하고 혈기서하고 원형서는 뒤에 다 읽을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경전 해석하는 경의 설명이 쭉 있으니까 그 앞부분만 딱 읽으면 그냥 그대로 일심묘체를 보이는 내용이거든요. 근데 왕복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돼요. 그거는 끝까지 다 중요한 내용을 말씀했기 때문에. 그럼 뭐 강원에 입방을 해서 전체 다 안 배워도 4종서만 딱 외워서, 마음 딱 챙기면 바로 성불하지요. 그럼 불교를 믿으면 첫째 좋은 게 수복이 구족해요. 수복. 수명과 복덕이 구족하다. 그리고 사후에 극락왕생해요. 그것이 이게 이 세상에서 이제 누릴 수 있는 좋은 복덕이고, 그리고 불교를 믿는 최종 목적, 근본 이유는 딱 네 가지예요. 첫째는 보리, 깨달음, 보리. 둘째는 왕생, 셋째는 해탈, 넷째는 열반. 그럼 보리는 뭐냐. 이 무명의 잠을 자다가, 무명 혼침(惛沈)의 잠을 계속 자다가, 이 불성의 눈을 딱 뜨는 거예요. 그래서 보리는 개안(開眼)이라. 눈을 뜨는 걸 열 개자하고, 눈 안자 하고 개안이라 그래요. 개안광명진언 뭐 이런 것도 있어요. 눈을 탁 뜬다. 이제 이런 얘기하다 보니까 눈 뜨는 건 고사하고, 지금 눈 감기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 나는 눈 뜨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눈 감기는 사람이 더러 있네. 아 이거 참. 이런 얘기하면 본래 눈 감겨요. 개안 보리, 눈을 딱 뜨는 순간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오직 마음만 있는 거, 그걸 보리라 그래요. 이제 극락 왕생하는 거, 극락세계 간다고 왕생이라고 그러는데, 왕생은 어떻게 하냐. 왕생은 가피 왕생이요. 가피.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 가는 거예요. 그래 왕생은 가피요, 보리는 개안이요. 그다음에 해탈은 뭐냐. 해탈은 이장(離障)이라고, 여읠 리, 장애 장자.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온갖 마음의 장애, 온갖 몸의 장애, 온갖 세상의 장애를 다 벗어나. 그래서 여일 리자를 써가지고 버린다. 장애를 다 버린다. 장애를 여읜다. 그래서 그걸 해탈이라고 그러거든요. 이장해탈. 그다음에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본구(本具)열반, 본래 갖추어진 것이 열반이다. 이제 해탈을 딱 하고 보니까 열반이 본래가 갖추어졌어. 거기가 본래 불생불멸이고, 본래 상락아정이고, 본래 원만구족하다. 그래서 열반은 새롭게 얻는 게 아니고, 본래 갖추어진 걸 열반이라 그래요. 오늘 법문 참 여러 가지 많이 말을 하네. 많은 걸 말을 해요. 눈 딱 뜨면 깨닫는 거고, 부처님 가피 잘 입으면 극락 가는 거고, 모든 장애를 다 여의면 해탈하는 거고, 해탈해보면 거기에는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게 열반에 드는 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제 재를 이렇게 떡 지내니까, 다 극락 가라고 지금 하는 거거든요. 修齋之功則不無 往生之路是什麼수재지공은 즉불무나 왕생지로는 시십마오自法性身明了了 自金剛身常不昧 자법성신에 명료료하고 자금강신에 상불매하면見色聞聲超然行 不離當處到蓮臺견색문성의 초연행으로 불이당처도연대로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수륙재를 주욱 지내는 거는 재를 지금 올리고 있는 거거든요. 이 재를 올리고 있는 공은 있어. 그런데 왕생하는 길은 어떤 것이냐. 왕생은 어떠한 길로 가느냐. 첫째 왕생이 있는데, 첫째 왕생은 띄을 초, 그러할 연, 초연(超然)왕생이에요. 초연 왕생. 그럼 초연 왕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자성, 자법성신(自法性身), 자기 법성신, 자기 본래 죽음이 없는 본성 몸, 자법성신에 항상 밝아 있고, 명료료(明了了)하고, 또 자금강신(自金剛身), 이 몸이 아무리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그 금강신이 있는데, 그 금강신에 상불매(常不昧) 하면 견색문성(見色聞聲)에 눈으로 뭘 본다든지 귀로 듣는다든지 전혀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초연행(超然行)이라고 그래요. 보아도 마음이요, 들어도 마음이요, 앉아도 마음이요, 서도 마음이요. 이상하고 뭐 별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걸 초연이라고 그래. 초연. 견색문성의 초연행으로 불이의당처(不離當處)하고, 본래 자기가 지금 머물러 있는 곳, 지금 여기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곳에서, 서 있으면 서 있는 곳에서, 도연대(到蓮臺)라. 구품연대에 바로 도달한다. 뭔 소린지 참 내. 참 좋기는 좋은데 좋아요.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냥 선 자리에서 극락세계에 도달하고, 앉은 자리에서 도달하고, 누우면 누울 때 도달하고, 서면 설 때 도달하고, 이걸 초연왕생이라고 그래요. 其或未然 承佛神力 十念念佛 往生極樂기혹미연 승불신력 십념념불 왕생극락 기혹미연(其或未然)이면, 그 후 그렇지 못하면 승불실력(承佛神力)하여, 부처님의 신통력을 이어받아서, 십념념불(十念念佛)로, 십념, 아미타불 10번 부르는 염불로 왕생극락(往生極樂)이라, 극락세계 왕생한다. 이걸 십념왕생이라 그래요. 십념. 아미타불 10번 부르면 극락 가요. 이 소리 하면 어떤 분은 ‘그럴까?’ 하고 눈 크게 뜨고 쳐다보고, 어떤 분은 ‘뭘 가’ 이렇게 못 믿게 쳐다보는데, 벌써 극락에 와 있는데 모르기 때문에, 극락에 와 있는데 모르기 때문에, 이게 불가사의법이거든요. 이제 십념염불로 오늘 모든 참석한 일체영가 대중들에게 극락세계 가시라고 하는 걸로 마칩니다. 이제 십념염불을 어떻게 하냐. 이제 전염불, 후염불, 십념염불, 이제 십념염불 하기 전에 앞에 하는 염불이 있어요. 또 그다음에, 십념염불 그다음에 뒤에 또 하는 염불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이제 그대로 제 손 쳐다보고 극락 가는 거예요. 十念往生願 십념왕생원 나무아미타불往生極樂願 왕생극락원 나무아미타불上品上生願 상품상생원 나무아미타불廣度衆生願 광도중생원 나무아미타불제일염불 나무아미타불제이염불 나무아미타불제삼염불 나무아미타불제사염불 나무아미타불제오염불 나무아미타불제육염불 나무아미타불제칠염불 나무아미타불제팔염불 나무아미타불제구염불 나무아미타불제십염불 나무아미타불願共法界諸衆生 원공법계제중생 나무아미타불同入彌陀大願海동입미타대원해 나무아미타불盡未來際度衆生 진미래제도중생 나무아미타불自他一時成佛道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오늘 법문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