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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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6월 15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6-15
260615 신중기도 법문 - 종범큰스님1. 일 시 : 2026년 6월 15일 (병오년 5월 1일) (진관사)2. 주 제 : 義相祖師 法性偈 이야기 22 - 우보익생만허공 안녕하세요. 오늘이 병오년(丙午年) 5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에 법성게(法性偈) 중에 스물한 번째 게송, 법성게30구 중에서 스물한 번째,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그 게송입니다. 10번을 독송하겠습니다. 시작.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우보익생만허공 법성게는 화엄경 내용도 되지만 선지식이 깨달은 내용이에요. 선지식이 깨달은 내용. 그러면 선지식이 뭘 깨달았는가? 일체 중생에게 있는 법성본신(法性本身)이 있다. 그걸 깨달은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인연 생신인데, 인연으로 생신, 날 생(生) 자, 태어난 몸이다. 인연 생신이 뭐냐, 첫째 부모가 계셨어야 태어났잖아요. 지금까지 먹고 입고 자고 그런 거가 있기 때문에 산 거거든요. 부모와 여러 인연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그걸 태어나는 것도 인연이고, 살아온 것도 인연이다. 그래서 그걸 어려운 말로 연생신(緣生身)이라고 그래.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몸이다. 인연에 의해서 살아가는 몸이다. 연생신. 그런데 천하 선지식들이 뭘 깨달았는가. 인연이 있기 전도 있었고, 인연이 있은 지금도 있고, 지금 인연이 사라진 뒤에까지 있는 법성의 몸이 있다. 만법의 본성의 몸이 있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연생신에서 법성신을 깨달았다.그래서 이 연생신에서 어떻게 하면 빨리 법성신이 될 수가 있는가. 그래가지고 천수경에서 원아조동법성신(願我同法性身), 그거 기억나세요? 원아조동법성신. 이 말은 뭔 말이냐면, 나는 빨리 법성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원아조동법성신이에요. 법성신, 이게 법성신은 이 몸이 있기 전에도 있고, 이 몸이 있는 중에도 있고, 이 몸이 사라진 뒤에도 있는데, 그 법성신을 깨닫고, 이제 그다음에 법성신과 연생신이 둘이 아닌 것을 가르쳐요. 그게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에요. 그래서 이제 법성게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을 그 법성신을 깨달은 내용이다. 그래가지고 그걸 증분사구(證分四句)라고 그래요. 증(證)이라는 건 깨달았단 말이거든요. 증명할 증(證) 자, 증명한 내용의 사구다. 증분사구. 그다음에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에서부터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그 앞에 게송이 뭐죠?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그 십불보현대인경까지가 14구예요. 14구. 그 14구를 교분(敎分) 14구라고 그래가지고, 가르칠 교(敎) 자, 나눌 분(分) 자, 가르치는 내용의 14구가 있어서, 이걸 합치면 18구예요. 증분 사구, 조금 전에 뭐라고 그랬죠? 교분14구. 그러면 18구죠. 여기까지가 이제 선지식이 깨닫고 가르친 내용이에요. 그런데 깨닫고 뭘 가르치느냐,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건데, 그 중생들에게 이익 주는 부분을 이타분사구(利他分四句)라고 그래. 이타분, 이로울 이(利) 자, 다를 타(他) 자, 나눌 분(分) 자, 다른 이에게 이익을 주는 내용 사구다. 그게 이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이 사구가 이타분이다.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증분사구, 교분14구, 이타분사구. 그렇게 가르치는데, 오늘은 이타분사구 중에서 제3구, 제1구가 능인해인삼매중, 제2구가 번출여의부사의, 제3구가 우보익생만허공, 제4구가 중생수기득이익. 이렇게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우보익생만허공, 여기에 대한 설명이에요. 근데 깨닫고 나서 중생들에게 이 법성신을 가르치는데, 법성신을 가르치는 그 가르치는 마음이 해인삼매인 거예요. 해인삼매. 해인삼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일부러 하는 게 없어요. 그 깊은 골짜기에 가서 소리를 내면, 일부러 노력을 안 해도 메아리가 저절로 울려요. 또 거울 앞에 딱 서면, 내가 일부러 거울 속에 그림자를 집어넣으려고 안 해도 자기 모습이 거울에 그냥 비춰요. 그걸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내가 물가에 가서 물을 쳐다보면, 내가 물속에 안 들어가도 물속에 내가 있어요. 그걸 이제 비유로 해서, 억지로 하는 걸 강위(强爲)라고 그러는데, 강할 강(强) 자, 할 위(爲) 자, 억지로 하지 않아도 본유자성(本有自性)이라, 본래 있는 것이 스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강위, 본유, 이런 따위의 말을 불교 공부할 때 배워요. 그냥 거울에 딱 가면 그대로 자기 모습이 보이고, 물가에 딱 서면 그대로 자기 모습이 보이는 걸 본유라고 그래요. 본래 있는 거다. 그리고 이제 억지로 하는 거를 강위라 그래요. 억지로 한다. 강할 강(强) 자, 할 위(爲) 자. 강위가 뭐냐, 허공은 본래 있는데, 땅을 파서 허공을 만들어요. 이걸 강위라 그래. 땅 한 삽 뜨면 허공 한 삽만큼 나오잖아요. 굴을 파면 막 허공이 나오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게 강위가 아니고 본래 있는 거다. 그러니까 해인삼매인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중생 제도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처럼 막 365일 계획을 짜고, 순서를 정하고, 막 사람 인력을 배치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거울 앞에서 자기 몸 보듯이, 물가에서 자기 그림자 보듯이, 또 달이 뜨면 저절로 물속에 달이 비치듯이, 이제 이런 거를 해인삼매라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 해인삼매가 번출여의가 부사의라, 중생에게 딱 필요한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그래서 이게 참 문제인데, 억지로 하는 건 감흥이 없어요. 억지로 하면, 그냥 본래대로 하면 그게 감흥이 있어요. 이게 뭔 소리인지, 억지로 잘하려고 하면 그거는 감흥이 없어요. 꽃으로 말하면 시든 꽃과 같아요. 거기가 뭐가 하나 섞였거든. 그냥 본래대로 하면 그게 그렇게 감흥이 크단 말이야. 번출여의가 계속 나오는데, 생각할 수 없어요. 그게 부사의예요. 생각으로 되는 게 아니다. 그래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무진장한 중생의 이익이 허공에 가득하다. 이게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라, 비 우(雨) 자인데, 비는 하늘에서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보물을 내려보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허공에 가득하다. 이게 우보익생만허공이에요. 法記云雨寶益生滿虛空者。虛空無邊故。世界無邊。世界無邊故。법기운우보익생만허공자。허공무변고。세계무변。세계무변고。衆生無邊。於此無邊衆生。如是之敎。無所不被故也중생무변。어차무변중생。여시지교。무소불피고야 그러면 우보익생만허공을 의상 스님 제자 법기(法記)라고 하는 기록에서는, 허공이 무변고(無邊故)로, 허공은 끝이 없다. 허공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무변하고, 또 세계가 끝이 없고, 허공 안에 세계가 가득하니까, 세계가 무변고로, 세계가 또 끝이 없는 고로, 중생이 무변하다. 그러니까 허공이 끝이 없으니까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끝이 없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차무변중생(於此無邊衆生)에, 이 끝없는 중생에, 여시지교(如是之敎)를, 여시지교라고 하는 거는 화엄의 가르침을, 이 말인데, 화엄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게 뭐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인데, 법성원융무이상이 뭐냐, 범부들이 아는 몸은 연생신, 인연으로 나서 인연으로 살아가는 그 몸만 아는데, 선지식이 깨달은 몸은 법성신, 법의 본성의 몸이다. 그런데 이 선지식이 깨달은 분상에서 보면, 중생의 인연으로 나서 인연으로 살아가는 몸하고, 법성의 몸하고 둘이 없다. 이걸 원융무이(圓融無二)라고 그래요. 둘이 없다. 이게 화엄의 가르침이에요. 이게 원융무이, 이게 뭔 말이냐. 못 깨달았을 때는 법성신을 모르니까 이 몸은 죽고 사는 것밖에 없는데, 깨달았을 때는 법성신이 죽고 사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몸에, 못 깨달았을 때는 죽는 몸밖에 없는데, 깨달았을 때는 죽음이 없는 몸이 있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깨닫지 못한 거는 몸이 죽는 것만 아는데, 깨달았을 때는 죽음이 없는 걸 알아요. 이거 사람 미쳐요. 왜 그걸 또 안 가르쳐 주냐, 알면 가르쳐 주지. 죽음이 없는 몸을. 그 누가 가르쳐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만 아는 그 생각에게 죽음이 없는 몸이 들어가질 않아. 이게 아주 문제거든. 아이고, 부처님이 자비롭다는데 왜 그걸 안 가르쳐줘, 자비가 어디 갔어? 근데 그거는 꿈꾸는 사람에게 꿈 깬 내용을 못 가르쳐줘요. 그럼 꿈 깬 내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꿈에서 깨어나야 알아요. 꿈에서 깨어나야 알아. 그래가지고 이 법성신하고 연생신하고는, 법성신은 꿈에서 깼을 때 몸과 같고, 연생신은 꿈속에서 꿈꿀 때 몸과 같은데, 꿈을 꿀 때는 완전히 다른데, 꿈을 깨고 나면 같아요. 그래서 꿈 깨고 나면, 지금 저 꿈꾸고 있는 사람이나 꿈 깬 나나 다름이 없어요. 뭔 소리를 제가 뭔 소리를 지금 하고 있는지, 참 이게 헛소리하는 것도 같고, 알쏭달쏭한 소리 하는 것도 같고. 꿈 깰 때는 꿈 꾼 거와 다름이 없어요. 근데 꿈을 꿀 때는 꿈 깬 거하고 달라요. 그래서 못 깨달았을 때는 죽음만 있는데, 깨달았을 때는 죽음이 없는 것이 몸에 있어. 그래서 그 죽는 몸하고 죽지 않는 몸하고 둘이 없다. 둘이 없는 걸 가르치는 게 화엄이에요. 무이(無二). 그래서 그걸 법성은 원융하야, 원융이라는 건 통하지 않는 데가 없어서, 무이상(無二相)이라, 두 가지 내용이 없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근데 그거를 자세히 또 가르치려고 하니까, 진성은 심심하야 극미묘하다. 불수자성하야 수연성이다. 이래가지고 14구가 펼쳐지거든요. 그래가지고 14구 마지막이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이다. 그러고 나서 뭐 하자는 거냐, 이제 중생에게 가르침을 펼치는 것이 이렇게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고,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다, 이거죠. 그래가지고 중생이 이렇게 무변한데, 이 둘이 없는 가르침을, 무소불피(無所不被)라, 어떤 중생에게든지 전해지지 아니함이 없다. 이래가지고 만허공이라고 한다고, 의상 선생님 제자는 여기서 기록에 써놨어요. 둘이 없는 가르침, 둘이 없는 가르침이라는 건 법성원융무이상인데, 죽음만 아는 이 몸하고 죽음이 없는 이 몸하고, 깨닫기 전에는 죽음만 아는데, 깨달은 후에는 죽음이 없는 몸을 안다. 죽음이 없는 몸을 알고 나면, 죽음만 아는 이 인연으로 태어난 그 몸이 법성신하고 둘이 없다는 거예요. 참 묘하지 이게. 내가 뭐 잘 할 때는요, 잘 못하는 사람이나 잘하는 나나 똑같아요. 근데 내가 잘하지 못할 때는 잘하는 사람하고 잘못하는 나하고 달라요. 뭐든지 자기가 해보고 나면 안 한 거와 다름이 없어요. 그래서 깨달은 범부나 깨달은 부처님이나 똑같다고 그러거든요. 똑같다는 건 뭐냐, 부처님이 됐을 때 똑같은 거예요. 부처님 되기 전에, 깨닫기 전에는 달라요. 그거를 이제 의상 선생님이 항상 강조했거든요. 꿈을 꿀 때는 꿈 깬 거하고 다르다.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을 꾸는 사람이나 꿈을 깬 사람이나 둘이 없다. 이상하긴 이상하네. 좀 이상해요. 이거를 지금 바로 알으라고 막 주먹다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를 거 내가 뻔히 아니까. 그런데 이 얘기를 들으면 알게 돼요. 그래서 이것이 우보익생만허공이야. 누구든지 이 화엄에 둘이 없는 가르침을, 중생이 무소불피하고, 그걸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가르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다. 眞記云 雨寶者。約敎云寶也。又是衆生受用種種寶物也。滿虛空者。 진기운 우보자。약교운보야。우시중생수용종종보물야。만허공자。 衆生蒙不思議敎。則知其不動凡心。與法性虛空。只是一物。本自圓滿故也 중생몽부사의교。즉지기부동범심。여법성허공。지시일물。본자원만고야 또 의상 선생님 제자 중에 진기(眞記)라고 하는, 참 진(眞) 자, 기록할 기(記) 자, 진기는, 우보(雨寶)라고 하는 것은, 보배를 내려준다고 하는 것은, 약교운보(約敎云寶)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배라고 한다. 보(寶)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이 왜 보배냐, 그 보배를 통해서 죽음이 없는 법성신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이익 중에 죽음이 없는 자기 본래 몸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이익이다. 그래서 그걸 보배라고 한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가르침을. 또 중생이 수용하는 종종 보물이다. 중생이 수용하고 있는, 받아 쓰고 있는, 가지가지 보물도, 이게 다 법성에서 출현한 것이다. 법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거죠. 만허공자(滿虛空者)는, 허공에 가득하다고 하는 것은, 중생이 몽부사의교(蒙不思議敎), 이 죽음이 없는 놈이나 죽음을 느끼고 있는 놈이 둘이 없다고 하는 이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입게 되면, 불가사의한 가르침을 내가 받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부동범심(不動凡心)이, 중생에게는 한량없는 생각이 있는데, 그걸 찰진신념(刹塵信念)이라고 그래요. 중생에게 있는 무한한 생각들, 팔진, 찰(刹) 자가 그게 국토 찰 자거든요. 온 국토의 티끌과 같이 많은 생각이다. 그걸 찰진신념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생각이에요. 생각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그런 찰진신념을 범부심이라고 그러는데, 깨닫고 나면, 그 많은 중생의 생각이,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이건 또 뭔 소린가. 꿈에서 깨고 나면, 꿈에 있는 생각이, 있었던 생각이, 이 꿈을 깼을 때 생각하고 다름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중생에게는 한량없는 생각이 있지만은, 깨달은 다음에는 그 한량없는 생각이 없었던 거다. 이게 참, 이런 거는 이걸 법성게를 연구할 때도 조금 힘들어요. 이걸 부동범심이라고 그러는데,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 말이 있잖아요. 부동이라는 건, 동(動) 자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이걸 동이라 그래요. 생멸. 생멸을 움직인다고 동이라고 그러는데, 그 마음을 깨닫고 나면,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아무리 많은 생각이 사라져도, 하나도 안 일어나는 거고 하나도 안 사라진다는 거예요. 그걸 부동심이라고 그래요. 부동심, 일어나는 마음도 없고 사라지는 마음도 없다. 이게 참 무슨 소리인지, 오묘한 것 같기는 같은데, 생각으로 알기는 어려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들을 했잖아요. 근데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그 생각이 다 어디 갔어요? 하나도 안 일어나고 하나도 안 사라진 거예요. 그걸 부동심이라고 하거든요. 수많은 꿈을 꿨는데 꿈 깨고 나면 없어요. 꿈에 일어났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거와 똑같다. 이걸 부동심이라고 그래요. 부동. 그 부동의 범심이, 계속 일어나도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는, 그 범부의 마음이, 어제도 많은 생각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들이 간 곳이 없어요. 안 일어나는 거와 똑같아요.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걸 가지고 움직이면 큰일 나요. 생각대로 움직이면 큰코다쳐요. 그 생각을 조용히 맑혀야 돼요. 누가 밉다고 해서 쫓아가서 복수를 하면, 그게 생각이거든요. 그것이 큰 화를 불러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미운 생각을 조용히 맑혀야 돼요. 그러면 복수 안 해도 내가 편안히 행복해져요. 복수하면 괴로워지고요. 맑히면 행복해요. 오케이? 박수. 그러면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미운 생각이 일어났을 때, 맑히는 방법은 뭐냐, 돌아보는 거예요. 요놈의 요 미워하는 생각이 어디에 있는고, 이 미운 생각이 어디에 있는고, 이걸 가만히 돌아보면 자취가 없어요. 그냥 깨끗해져요. 이 미워요, 그냥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거 꼭 내가 가만히 안 두겠다, 이래가지고 계획을 세워서 막 일을 벌이면, 그것이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미운 생각이 일어났을 때 계획을 세워서 복수하지 말고, 그 생각을 가만히 맑히되, 어떻게 맑히냐, 이 미워하는 생각이 지금 어디에 있는고, 하면 없어요. 그럼 그게 한 번으로 없어지냐, 또 일어나요. 그러면 또 돌아봐요. 이 미워한 생각이 어디 있는고. 하여튼 10번만 해보면, 그다음에는 미워하는 생각이 자꾸 줄어들어서, 나중에는 씨앗도 없고 뿌리도 없이 사라지면, 그걸 깨끗한 마음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해결하는 거예요. 이 복수를 하면 반드시 이게 괴로워져요. 복수를 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맑히면 반드시 행복해져요. 이런 거 그냥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 근데 우리가 이걸 잘 못해서 늘 괴롭거든요. 늘 괴로워. 이게 참 문제야. 문제. 그래서 그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고 하는, 그 범부의 마음이, 이 법성과 허공으로 더불어 지시일물(只是一物)이라, 중생의 마음과 법성과 허공이 오직 하나다. 하나를 한 일(一) 자, 물건 물(物) 자, 일물이라고 그래요. 이게 화엄이에요. 중생신과 법성과 허공이 하나예요. 일물, 하나다. 근데 그 하나인 마음이, 하나인 법성이, 본자원만(本自圓滿)이라, 본래 스스로 원만하다. 본자원만이 또 화엄경인데요. 이 법성은 본래 원만하다. 원만이라는 건 뭐냐,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고 남는 게 하나도 없고, 이걸 다른 말로 구족(具足)이라고도 쓰거든요. 갖출 구(具) 자, 만족할 족(足) 자. 그래서 원만 구족이요, 구족은 원만이다. 복덕구족, 이런 말을 쓰잖아요. 갖추어졌다. 이걸 합쳐서 원만구족이라. 뭐가 원만구족이냐, 우리 법성본신이 원만구족하다. 법성본신이 원만구족하다. 그리고 이 법성본신이 누구에게 있느냐, 중생에게 다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행하지 않고 늘 행복하려면 그 원만구족한 법성본신을 깨닫는 건데, 그걸 왜 가르쳐 주면 됐지, 왜 스스로 깨달으라고 그러냐. 이게 이제 생각으로는 이걸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가르칠 수가 없고, 그 원만구족한 법성본신으로 들어가게 인도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 역시 마찬가지야. 많은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다 거두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것이 지금 어디에 있는고, 이렇게 하다 보면요. 무엇인고, 무엇이라고 생각으로 규정할 수가 없어요. 밝은 거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좋은 거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나쁜 거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그냥 원만일물이라, 원만한 한 물건이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 있는 데가 없는데 우주에 꽉 찼어요. 답답하다. 있는 데가 없어요. 그래서 이거 있는 데가 없다고 그래가지고 무주(無住)라고 그래요. 머무는 데가 없다고, 없을 무(無), 머물 주(住) 자, 무주. 그런데 또 없는 데가 없어. 그래서 원만이라고 그래요. 무주원만이라.그래서 이거는 삼매에 들어야 이걸 알아요. 밖으로 구하면 몰라요. 삼매에 드는 게 뭐냐, 이거 이제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래서 나중에는 이것이 하는 그 생각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로 들어가는데, 나중에는 무엇인가라고 하는 생각도 넘어서서, 오로지 그것과 완전하게 만나게 돼요. 이것에서 무엇인가에서, 그다음에 무주원만, 머무는 데 없이 온 우주에 가득한 그 세계로 내가 들어가게 돼요. 안 믿는 것 같아요. 별로 안 믿는 것 같아. 이거는 꿈꾸는 사람에게 꿈 깬 얘기를 하는 거라 그렇게 실감이 날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자기 그 죽음이 없는 법성신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되거든. 그래서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알려고 한 거 아니고요. 이 자리에서는 몰라도 이런 얘기 들어놓으면 반드시 그걸 알게 돼요. 이걸 인연법이라고 하거든요. 인연법. 그래가지고 본자원만이라, 부모가 낳기 전서부터 본래 스스로 원만한 나의 법성본신이 있다. 법성본신. 그렇게 되는데, 이것도 대기(大記)라고 하는 또 가르침에서는, 화엄경에서 오중해인(五重海印)이라고, 신라 불교에서만 전해지는 내용이 있는데, 해인은 5가지로, 그래서 중복할 중(重) 자가 있어요. 거듭 중복한다고, 이 5가지를 거듭해서 가르치는 해인이다. 이게 오중해인인데, 이거는 이제 의상 스님이 중국에 가셨을 때 지엄조사한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지엄조사가 오중해인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중국에는 안 전해져요. 그게 이제 신라에만 전해져요. 그래서 의상 스님이 일찍이 지엄조사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의상 스님에게만 말씀하고, 의상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 그 법장 스님에게는 전하지 못한 게 아닌가, 이렇게 되는데. 大記云。約此第四重四句。更以五重海印分配 대기운。약차제사중사구。갱이오중해인분배①能仁海印三昧中句 第一 忘像海印 능인해인삼매중구 제일 망상해인②繁出如意不思議句 第二 現像海印 번출여의부사의구 제이 현상해인③雨寶益生滿虛空句 第三 佛外餉海印 우보익생만허공구 제삼 불외향해인④衆生隨器得利益句 第四 普賢入定 觀照海印 중생수기득이익구 제사 보현입정 관조해인 第五 普賢出定 語言海印 제오 보현출정 어언해인海印者。淨藏定也。雨寶益生滿虛空者。雨十普法。於正爲中。해인자。정장정야。우보익생만허공자。우십보법。어정위중。全全而應。謂一道朱印 圓滿現現也(叢髓錄 卷一)전전이응。위일도주인 원만현현야 (총수록 권일) 이게 화엄경 오중해인, 화엄경에서 말하는 다섯 번 가르치는 해인이다. 첫째가 이제 제1중, 제1 망상해인(亡相海印)인데, 잃을 망(亡) 자, 형상 상(相) 자, 해인은 바다에 비치는 물건이잖아요. 근데 그 바다가 어느 때는 아무 그림자가 없는 때가 있어요. 그걸 망상해인이라 그래요. 늘 그림자가 비춰지는 그 바닥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하나도 안 비춰지는 게 있어요. 그걸 망상해인이라, 형상이 없는 바다의 그림자다. 이게 첫 번째 해인이고. 두 번째 제2는 현상해인(現相海印)이라, 나타날 현(現) 자, 모양 상(相) 자, 모양이 훤히 나타나는 그런 바다 그림자가 있어요. 현상해인. 이제 세 번째는 제3 불외향해인(佛外向海印)이라, 부처님이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하시듯이, 때로는 환히 밖으로 향해서 중생을 살피고, 법계 차별상을 다 살피는 걸 불외향해인이라고 그래요. 밖으로 향하는 해인이다. 이게 이제 세 번째고. 그다음에 네 번째는 보현입정관조해인(普賢入定觀照海印)이다. 보현보살이 정에 들어서 우주만상, 중생 심리를 환히 봐요. 이걸 관조라고 그러는데, 볼 관(觀) 자, 볼 조(照) 자, 이건 정에 들어야 돼요. 보살은. 부처님은 해인삼매인데, 보살은 입정삼매예요. 삼매는 다르게 본다는 건데, 정관. 부처님은 해인삼매이기 때문에, 바다가 정에 들고 안 들고 그런 게 없잖아요. 항상 비치잖아요. 그런데 이제 보살은 중생의 관습이 남아 있어서, 정이 안 되면 이렇게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입정삼매, 보현입정관조삼매, 이게 보현입정관조해인이다. 이렇게 하고 이제 다섯 번째는, 정에 들었다가 정에서 나오면, 그걸 출정이라고 그래요. 보현 출정. 출정을 해서 뭐 하느냐, 중생을 위해서 말을 해요. 그걸 출정어언삼매라고, 어언해인(語言海印)이라고, 말씀 어(語) 자, 말씀 언(言) 자, 이렇게 오중해인을 지엄조사가 가르쳤다. 그것을 의상 스님이 신라에 전하셨단 말이야. 그래서 지엄조사 오중해인, 이거는 이런 데서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이 화엄학이에요. 이거는 화엄학, 지엄조사 오중해인에 대해서 써라, 이러면 이거는 이제 논문이 돼야 될 판이에요. 이런 게. 그러니까 해인을 부처님의 아주 근본 깨달음이라고, 깨달음을 비유한 거라고 보고. 그럼 부처님의 근본 깨달음을 오중해인으로 지엄조사는 설명했다. 첫 번째는 망상해인, 두 번째는 현상해인, 세 번째는 불외향해인, 네 번째는 보현입정관조해인, 다섯 번째는 보현출정어언해인. 이렇게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런데 대개에서는,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한 구절을 망상해인으로 본 거예요. 능인해인삼매중 하는 거는 망상해인이다. 해인 중에 아무 모양이 비추어지지 아니하는 그런 해인이다. 법이라는 거는 전부 모양이 나타나는 것만 법이 아니거든요. 모양이 안 나타나는 것도 법이에요. 그다음에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이 구절은 두 번째 현상해인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은 세 번째 불외향해인이다, 이렇게 가르치고요. 다음에 나올 거,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은 보현입정, 보현출정, 네 번째 다섯 번째 해인이다. 이래요. 이게 도대체 뭔 소리냐, 이거 알면 알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더 모르니. 그러니까 내가 마음으로 들어가서 마음이 점점 밝아지면 의심이 없어져요. 또 보이는 게 분명해져요. 첫째 이 마음 공부의 특징은, 첫째는 의심이 없어지고, 보이는 게 점점 더 밝아져요. 이게 마음 공부예요. 의심이 자꾸 생기면 이게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런데 그건 의심이 왜 생기느냐 그러면, 마음이 뭐가 자꾸 끼어 있어서 그래요. 마음이 가려서. 이래가지고 해인이라고 하는 것은 정장정(淨藏定)이다. 정장(淨藏), 깨끗할 정(淨) 자, 쌓일 장(藏) 자, 창고라고 하는 창고가 있거든요. 저장소. 마음이 청정해서 모든 것이 다 저장된 그런 삼매다. 그래서 이걸 해인삼매는 정장정이라. 우리가 마음을 조용하고 깨끗하게 쓰면, 의심은 하나도 없고, 그 깨끗한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가득해요. 이걸 정장이라 그래요. 근데 마음이 불안하고 마음이 혼탁하면, 한두 가지만 보이고 전체를 안 보여. 마음이 밝아지면 전체가 보여요.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그게 좋다는 거지. 전체가 다 보일 때 좋다는 거야. 한두 가지만 보일 때, 그때 이제 괴로움이 생긴다는 거예요. 마음이 전체를 다 볼 때 그때가 건강한 정신이에요. 근데 한두 가지만 보이는 것은, 그거는 지금 괴로운 정신이다, 이거예요. 그래가지고 이 해인정이 나타날 때는 특징이 전전이응(全全而應)이라. 온전히, 온전히 다 응한다. 이 말은 뭐, 하나를 하면 전체가 다 이루어져요. 그래서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다 이루어진다. 우리가 말할 때가 있어요. 이것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이래서 이런 말을 하거든요. 이날만을 기다렸다. 그게 이제 건강치 못한 거예요. 원래 법은 이거 하나 할 때도 전체가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전체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모든 것이지, 모든 것은 그 하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건 없다. 이게 화엄이에요. 완전 쉽잖아요. 좋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하나 하는 것도, 평생 자기의 성과가 이거 간단한 거 하나 하는 데 다 들어 있다. 이게 화엄인 거예요. 일중일체(一中一切)라는 게 이거예요. 하나 속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이게 화엄이에요. 근데 중생들은 그 이루어야 할 하나의 목표밖에 없고, 나머지는 오직 그것을 위해서만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건 화엄이 아니에요. 일중일체가 아니거든.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이거 전전이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뭐 하는 것도 평생 이룰 목표를 이루는 거고, 내일 뭐 하는 것도 평생 이룰 목표를 이루는 거고. 예를 들면100일 기도를 한다 그러면, 하나하나가 그게 100일인 거예요. 하루가 없으면100일 없잖아요. 근데 오직 최종 100일만을 위해서 한다, 그건 아니에요. 오늘 하루 하면 100일이 되는 거고, 내일 하면 그것도 100일이 되는 거고, 모레 하면 그것도 100일이 돼. 그래서 하나가 100일이지, 하나 없는 100일은 없다. 이게 화엄인 거예요. 아이고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그래서 어쩌자는 거여.많은 시간을 더 쓸 수는 없고. 우선 물을 좀 마시고. 이 화엄하고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언어하고 한번 생각을 해 볼게요. 보통 어떤 사람들이 왜 사느냐, 이런 질문해요. 왜 사느냐. 그러면 반대로 왜 죽느냐, 이런 질문해 봐. 왜 죽어. 그럼 뭐라고 하겠어요? 왜 살아, 이런 말을 해도, 왜 죽어, 이런 말은 안 하더라고. 또 그러니까 희한하대. 왜 사느냐, 이런 말은 예사로 많이 해요. 근데 왜 죽어, 이런 말은 안 해. 근데요, 죽느냐 사느냐, 이게 왜 죽느냐, 왜 사느냐, 왜 자 빼고 그러면, 사는 게 뭐고 죽는 게 뭐냐, 그게 중요해요. 사는 게 뭐고 죽는 게 뭐냐. 왜는 그다음 일이고. 사는 거는요, 아주 간단해요. 코로 숨 쉬는 게 사는 거예요. 처음에 세상에 나와서 숨이 열릴 때, 그게 삶이 시작되는 거거든요. 그럼 죽는 건 뭐냐, 죽는 게 뭘까요? 코에서 숨이 꺼지는 게, 그게 죽는 거예요. 살고 죽는 거 이렇게 말하지 말고, 숨이 열린다, 숨이 꺼진다. 숨 열리면 숨 쉬는 건 사는 거고, 숨 꺼져서 숨 못 쉬는 건 죽는 거예요. 그렇게 간단하게 봐야 돼요. 그러면은 숨을 왜 쉬나, 그건 왜 사나, 이 말이죠. 숨을 왜 쉬어요? 살려고 하는 거는 굉장히, 그건 철학적이고 목적이 있는 거고, 숨 안 쉬면 괴로워요. 힘들고. 그러니까 이거는 숨이 열린 뒤에는 안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쉴 수가 없어요. 그러면 숨을 왜 안 쉬나, 숨을 쉴 수가 없어요. 힘이 없어서. 이런 거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면 못 견뎌서 하는 거고, 내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할 수가 없어서 안 하는 거다. 이런 걸 인연법이라고 그래요. 인연법. 그럼 파도가 왜 생기냐, 왜 생겨요? 파도가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생기는 거지, 바람 없는 파도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생긴다. 이게 인연법이거든요. 그런 것을 이제 연생이라고 그래요.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거다. 그래서 이게 살고 죽는 건, 인연에 의해서 숨을 쉬고, 인연에 의해서 숨을 못 쉰다. 그걸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하고 왜 사나 한다. 그런데 법성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과 상관없이, 인연으로 몸이 태어날 때도 법성신이고, 또 인연으로 숨이 졌을 때도 법성신이고, 항상 법성신이에요. 연생연멸(緣生緣滅)은, 인연으로 태어나고 인연으로 죽는 것은, 본무자성(本無自性)이다. 원래 자기 체성이 없어요. 자성이라는 건 자기 체성인데, 이 몸이라는 게 전부 인연에 의해서 된 거거든요. 자기 체성이 없어요. 그런데 법성본신이, 법성의 그 본래 몸이, 본자원만(本自圓滿)이라, 이 몸 낳기 전부터 본래 원만히 이루어졌고, 이 몸이 죽은 뒤에도 원만하다. 그러니까 이 몸에서 죽음이 없는 몸을 딱 알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요. 이 몸에 죽음이 없는 몸이 있다. 그게 법성신이고, 죽고 사는 것이, 그게 아까 뭐라고 그랬죠? 연생신이다. 이름 참 까다롭다는. 인연 연(緣) 자, 날 생(生) 자, 연생신. 연생신, 법성신. 그렇게 돼요. 그래가지고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 알 수가 없어. 그럼 법성을 깨달은 분들이 뭐라고 말하냐면, 법성은 무타(無他)라, 없을 무(無) 자, 다를 타(他) 자, 다른 것이 없어요. 그것뿐이야. 무타일물(無他一物)이라, 다른 것이 없는 한 물건이다. 이 무타일물은 생각으로는 안 보이고,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서 밝은 마음으로 보면, 그게 삼매인데, 그 삼매에 들어서야 보여요. 그러니까 마음이 괴로울 때 다른 걸로 해결하면 해결이 안 되고, 이 괴로운 마음이 뭔고, 그걸 해결해야 돼요. 근데 이게 다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크게 실패한 게 하나 있는데, 80년대 초에 저기 팔공산 어느 암자에 내가 잠시 있었거든요. 근데 어떤 젊은, 대학생인 것 같아요. 청년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왜 왔냐 그랬더니, 애인하고 며칠 전에 헤어졌는데, 너무 괴로워서 왔다는 거예요. 그거 어떻게 하면 되겠냐고. 그래서 내가 지금과 같은 걸 말했어요. 이 괴로운 마음이 무엇인고, 그걸 들여다봐라. 그러니까 화를 벌컥 내요. 괴로워 죽겠는데 그것만 들여다보면 어쩌자는 거냐고. 그래서 그냥 헤어지고 말았어요. 안녕히 가시오 하고. 누구나 다 되는 건 아니에요. 괴로운 마음이 무엇인고, 이걸 할 정도면 굉장히 생각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워낙 이게 깊어지면요, 그걸 할 수가 없어요. 막 화를 내더라니까요. 괴로워 죽겠는데, 거기다가 그것까지 보라고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고. 아 그렇겠다고 하고 빠이빠이 하고 말았거든요. 근데 이 법성일물은 무타일물이야. 다른 것이 없는 한 물건이에요. 그래서 무이(無二). 둘이 없어. 다른 것이 없는 한 물건이고 둘이 없다. 그 둘이 없는 걸 알면 괴로움이 없어요. 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은 이 둘이라고 하는, 다른 것이 있다고 하는 데서 괴로움이 나와요. 그래서 이 법성은 본자원만이고, 본래 스스로 원만하고, 본자원성(本自圓成)이라.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다. 이런데 내가 눈이 열리면서부터 둘을 보기 시작한 거예요. 나와 다른 사람이 있네. 그래서 내가 높은가, 다른 사람이 높은가, 내가 잘 났나, 다른 사람이 잘 났나, 이렇게 비교하는 순간에 괴로움이 생겨요. 근데 본자원만이라, 본래 스스로 다 원만하다. 풀은 풀대로 우주 법계의 진실상이요, 나무는 나무대로 우주 법계의 진실상이에요. 허공은 허공대로 우주 법계의 진실상이고, 바다는 바다대로 우주 법계의 진실상이라. 무타일물이라, 다른 것이 없는 한 물건이다. 본자원상이라,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다. 이걸 알면은 사나 죽으나 전혀 둘이 없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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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 17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5-17
260517 신중기도 법문 - 종범큰스님1. 일 시 : 2026년 5월 17일 (병오년 4월 1일) (진관사)2. 주 제 : 義相祖師 法性偈 이야기 21 - 번출여의부사의 안녕하세요. 오늘은 병오년(丙午年) 4월 초하루, 법성게(法性偈) 30구 가운데에 스무 번째,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그 게송입니다. 10번을 독송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번출여의부사의 지난번하고 이번하고 그다음하고, 이 네 게송이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는 거다, 그랬거든요. 이제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이게 깨달은 내용이에요. 부처님이 깨달으면 뭐가 나타나나. 시간이 없어요. 지입삼세(智入三世)라, 지혜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다 들어간다. 그래서 삼세가 평등한 거예요. 그게 첫 번째 깨달은 내용이에요. 그 시간이 없어요. 예를 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가 한 방에 있는데, 할아버지는 과거, 아버지는 현재, 손자는 미래인데, 이 똑같아요. 할아버지 과거나 아버지 현재나 손자 미래나 똑같은 거예요. 그럼 똑같은 걸 뭐가 아느냐? 지혜가 아는 거예요. 지혜가. 그래서 깨달으면 시간이 없다. 그리고 깨달으면 이 존재가 없는 거예요. 존재를 법이라고 그러는데, 하늘에 하늘이 없고, 땅에 땅이 없고, 사람에 사람이 없다. 이걸 없는 거를 공적(空寂)이라고 그래요. 빌 공(空) 자, 고요한 적(寂) 자. 그래서 시간은 자체가 없고, 법은 공적하다. 그 공적이라고 하는 게 뭔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설명을 해요. 생겼지만 생긴 게 없다. 왜 그러냐, 풀잎의 이슬과 허공의 구름이 생겼는데, 생긴 게 아니에요. 또 허공에 구름이 생겼는데, 생긴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모든 현상은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아서 근본이 공적하다. 난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니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법이 공적하고 시간이 평등하다. 할아버지 시간이나 아버지 시간이나 손자 시간이나 평등해. 그래서 이제 그걸 다 깨달았는데, 그 깨달은 마음을 지혜라고 하거든요. 온전한 지혜라고 그래서 큰 대(大) 자, 지혜 지(智) 자, 대지(大智)라고 그래요. 그 대지가 항상 비춘다고 그래서 대지광명(大智光明)이다. 대지광명, 깨달은 마음은 대지광명이다. 온전한 지혜 광명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럼 대지광명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가. 그건 오직 들어가 봐야 하는 경지인데, 비유로 말하자면 해인(海印)이다. 해인이라는 말은 바다 도장이라는 말인데, 바다에 도장을 딱 찍었다. 그런데 백지에 도장 찍으면 모양이 있잖아요. 이 바다에 찍으면 어떻게 돼요? 저 물속으로 싹 들어가서 물속에 비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다에 해 도장을 찍었다, 그럼 바닷속에 해 그림자가 있는 거죠. 바다에 산 도장을 찍었다, 그럼 바닷속에 산이 있는 거예요. 바다에 달 도장을 찍었다, 그러면 바닷속에 달이 있어요. 바다에 비추어진 모든 형상을 해인이라 그래요. 바다 도장이라고. 그래서 깨달은 마음이 바다 도장 같다는 거예요. 그걸 해인이라고 왜 그러냐? 바다는 물인데, 그 물은 가만히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청정하다고 그래요. 그걸 담담하다고 그래요. 담담해,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에 해도 없고 산도 없고 달도 없고. 그런데 그 바다에 해도 비춰지고, 달도 비춰지고, 산도 비춰지고, 또 해가 뜨면 밝음이 비춰지고, 해가 지면 어두움이 비춰지는데, 그 바닷물에는 밝음도, 어두움도, 산도, 달도, 해도 없어요. 그게 깨달은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능인해인이라는 거죠. 능인은 부처님이란 말이고,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이 바다와 같다. 그러면 그 바다는 아무것도 없는데, 담담 청정한데, 수시로 밤도 비춰지고, 낮도 비춰지고, 산도 비추어지고, 천지만물이 다 비추어지는데, 바닷물은 그냥 담담하고 그냥 청정해요. 그 청정하게 비춰진다고 그래서 해인이라 그러고. 근데 이 담담하고 맑은 물이, 언제 검은 모습이 비춰지냐, 깜깜하게 어두운 거, 언제 밝은 모습이 비춰지냐, 언제 사람이 모습이 비춰지냐, 언제 산 모습이 비춰지냐,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번출(繁出)이라고 그래요. 번(繁)이라는 건 번거로울 번 자인데, 끊임없이 나온다. 번출. 뭐 이게, 언제 햇빛이 비추든지, 달빛이 언제 비추든지, 또 달빛이 언제 사라지는지, 달빛이 뭐 언제 또 비춰지는지, 없이 그냥 끊임없이 항상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번출이라고 그래요. 근데 번출을 하는데,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이 나타나는 것마다 다 맞아요. 사람 사람에게 다 맞고, 우주 진리에 다 맞고, 깨달은 부처님 마음에 다 맞고. 그걸 여의(如意)라고 그래요. 뜻에 똑같이 맞는다. 뜻과 같다. 그 말은 못 깨달은 중생의 뜻과도 같고, 깨달은 부처님의 뜻과도 같다. 안 맞는 데가 하나도 없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번출여의(繁出如意)라, 뜻과 같음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근데 그게 숫자로도 셀 수도 없고, 방향으로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 부사의(不思議)라,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 마음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의 본성은 바다의 물과 같아요. 바닷물은 거기에 산이 있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해가 있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밤이 있고 낮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산도 나타나고, 해도 나타나고, 사람도 나타나고, 나타나. 나타나는데, 나타나는 것마다 바닷물은 변함이 없어요. 바닷물은. 그래서 해인을 여래(如來) 정각심(正覺心)이라, 여래가 정각을 이룬 마음이다. 그럼 여래 정각심은 뭐냐, 대지광명인데, 이제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은 번뇌 망상이고, 여래의 마음은 대지광명인데, 그 본래 마음에는 대지광명이나 번뇌 망상이나 하나도 차별이 없는 거예요. 어둠이 오면 바닷물이 어둡게 비춰지고, 밝음이 오면 바닷물이 밝게 비춰지듯이, 깨달으면 대지광명이 되고, 못 깨달으면 번뇌 망상이 되는데, 그 마음의 근본 바탕은 변화가 없어요. 물에 온갖 것이 비춰져도 물은 변화가 없듯이. 그래서 인생살이가 참 괴롭고 힘든데, 그건 번뇌 망상, 어두움이 비춰진 물과 같아요. 그런데 이 지혜를 닦으면 밝음이 비춰진 물과 같아서, 그 어두움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이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은 물에 비추어진 어두움과 같다. 그래서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 어두운 그 번뇌 망상에서 도망가려고 하면 안 돼요. 괴로움에서 도망가려고 하지 말아라. 그럼 어떻게 하면 되냐. 이 괴로움이라는, 이 실체가 뭐냐, 이 괴로움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괴로움이 없어요. 물에 달 그림자가 비춰졌다. 그러면 달 그림자가 비춰졌으니까 여기 있으면 안 되네, 하고 다른 데로 도망가면 안 되고요. 달 그림자가 비춰져 있을 때도, 이 달 그림자가 이게 뭐냐고, 이걸 가만히 보면 달은 없고 물뿐이에요. 또 물에 이게 어두움이 비춰졌다, 그래서 어둠을 도망가려고 막 헤엄쳐서 돌아다녀봐야 어두움 도망 못 가요. 그럼 어떻게 돼? 어두움이 뭐냐, 가만히 보면 물뿐이지 어두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이 이걸 몰라가지고 괴로운 거예요. 괴로운 게 있으면 그걸 도망가고, 또 좋은 거 있으면 쫓아가고, 도망가다 죽고, 쫓아가다 죽고. 이놈한테 도망가서 저놈한테 갔는데, 그놈 더 나쁜 놈이야. 그래서 그놈한테 또 도망가야 돼. 끝없이 도망가야 돼요. 그러면 영원히 그 근심 걱정에서 못 벗어나고. 지금 내가 이 괴로운데, 이렇게 괴로움이라는 게 이게 뭔가, 이걸 가만히 지켜보면 마음뿐이지 괴로움은 없어요. 또 즐거움이라는 것도 가만히 지켜보면 즐거움도 마음뿐이지 즐거움은 없어. 즐겁고 괴로운 것은 바닷물에 비추어진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거다. 그걸 가르친 것이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에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라,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이거를 중국에서 가르친 화엄하고 신라에서 가르친 화엄이 약간 다른 게 있는데, 이제 스승은 한 스승인데, 지엄법사(智儼法師)라고, 이 지엄법사가 의상에게도 가르치고, 현수법장(賢首法藏)에게도 가르쳤는데, 의상은 배웠는데, 현수법장은 못 배웠을 수가 있어요. 나이가 다르니까. 그래서 이 해인에 대해서,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을 해인으로 비유했는데, 해인에 대해서 의상 스님 스승 지엄법사가 다섯 차례로 가르쳤거든요. 그래서 첫째, 깨달은 마음이 망상해인(亡相海印)이라고 그래가지고, 바다에 아무것도 형상이 없는 그런 바닷물. 그래서 우리 깨달은 마음은 아무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고, 있는 것도 없고, 낮도 없고, 밤도 없고, 그런 순수한 바닷물과 같은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걸 해인으로 말하면 망상(亡相), 없을 망(亡) 자, 형상 상(相) 자, 형상 없는 바다 도장이다. 그래서 우리가 삼매에 딱 들면요, 해인삼매에 우리가 딱 들면, 근심 걱정, 번뇌 망상, 뭐 희로애락 없어요. 시간도 없고,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오직 그 마음 하나뿐이에요. 이걸 망상해인이라 그래요. 형상 없는 해인. 그다음에 현상해인(現相海印)인데, 현상이라는 건 모든 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해인이에요. 거기에는 햇빛도 있고, 달빛도 있고, 산빛도 있고, 사람 빛도 있고, 여러 가지 상이 나타난 바닷물이란 말이죠. 이걸 현상해인이라 그래.그리고 이 깨달은 지혜 광명이 이 중생세계, 아니면 국토 세계, 깨달음 세계로 나타나는, 그런 지혜 광명을 불외향해인(佛外向海印)이라고, 부처님 지혜가 밖으로 향하는 해인이다. 이게 세 번째거든요. 근데 이런 불외향해인을 누가 아느냐, 보현보살이 삼매에 들어요. 삼매에 들면 보현보살은 입정정관(入定淨觀)을 해요. 정에 딱 들어가서. 정에 든다는 얘기는 이 견문각지(見聞覺知), 시청 의식을 딱 중지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입정이라고 그래요. 이 시청각 감각을 딱 거두어서 안으로 들어가, 이걸 입정이라고 그러는데, 입정에서 뭘 하느냐, 깨끗할 정(淨) 자, 볼 관(觀) 자, 청정하게 보는 거예요. 이걸 보현, 입정, 정관 해인, 보현이 입정에서 청정하게 딱 본다. 그럼 무엇과 만나느냐, 제불, 외향해인하고 만나는 거예요. 제불은 밖으로 향하고, 또 보현은 입정정관을 하고. 그래서 보현 입정은 제불의 지혜 광명이고, 또 제불의 지혜 광명이 밖으로 나오면은 보현 공덕행이다. 그래서 보현 공양하고 제불의 지혜광명이, 부처님 광명이 밖으로 나오면 그거는 보현이고, 보현의 공덕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거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불외향(佛外向) 보현, 보현 내향(普賢內向), 십불(十佛), 이렇게 가르쳐요. 이게 이제 네 번째가 보현보살 입정정관 해인, 삼매에 딱 들어서 이 우주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보면, 부처님이 느낀 해인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입정정관해인이에요. 그럼 정관하면 이제 보현보살이 계속 정에만 있는 게 아니고, 출정(出定)을 하거든요. 정에서 나와. 출정을 하면 보현 출정 뭔 일을 하느냐, 그 정에 들어가서 본 세계를 말을 해요. 그걸 보현 출정 언해인(言海印), 말씀 언(言) 자, 말씀 언(言) 자, 말로 하는 해인이다. 그러면 이 법성게에서는 게송 구절로 보면 30구, 글자로 보면 210자예요. 210자 법성게. 210자가 보현 출정 언해인이다. 보현이 출정해서 말로 한 해인삼매다. 이렇게 돼가지고 신라에서는 해인을 다섯 가지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게 의상의 스승한테서 배운 거다, 이거죠. 첫째는 망상해인,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현상해인, 온갖 모습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또 불지외향해인, 부처님 지혜가 밖으로 향하는 해인이 있단 말이야. 근데 이걸 누가 만나느냐, 보현내향해인, 보현이 이제 안으로 향하는 해인인데, 이거는 이제 보현의 입정정관이다. 입정을 해서 청정할 정(淨) 자, 볼 관(觀) 자, 청정하게 보는 해인삼매다. 그래. 그다음에 이제 마지막으로 보현 출정, 조금 아까 뭐라고 그랬죠? 제가 말하면 기억날 텐데. 물 마시려고 물어본 거예요. 언해인이라고, 말씀 언(言) 자, 말씀 언(言) 자, 말하는 해인이라고. 이래서 이거를 해인을 다섯 체계로 설명한다고 그래가지고 오중해인(五重海印)이라 그래요. 1중, 2중, 3중, 4중, 5중, 거듭 중(重) 자인데, 하나에 하나를 더하고, 더하고, 더하고, 이거거든요. 오중해인이 중국에는 이런 기록이 없어요. 근데 의상 스님이 이제 신라에 오셔서 가르쳐서, 오중해인이 중국의 지엄 조사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해인은 뭐냐, 본래 바닷물은 아무것도 없는데 온갖 것이 비춰지듯이, 우리 본래 마음은 근심 걱정이 없어요. 희로애락이 없고, 번뇌 망상이 없어요. 그래서 그 마음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딱 거둬서 본래 마음으로 딱 들어가면, 거기 남자 여자도 없고요. 삶과 죽음도 없고, 일체가 없이 그냥 오로지 한 마음뿐이에요. 안 믿는 것 같아, 안 믿어, 안 믿어도 뭐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오로지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던 한 마음, 천지가 사라진 뒤에까지 있는 한 마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한 마음, 한 마음뿐이에요. 그럼 우리가 지금 뭐 나고 죽고, 뭐 이렇게 되고 안 되고 하는 건 뭐냐, 그건 바닷물에 비친 해인 영상이다. 바다 도장에 찍힌 그림자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그림자에 속아서 맨날 이거 버리고 저것 쫓고, 저것 쫓고 이거 버리고, 그러다가 사는 거예요. 무슨 소리인지 참 희한한 소리다. 그래서 이게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를 이제 의상 선생님 제자 법기(法記)라고 하는 분이 기록에 남긴 게 있는데, 이거 이제 뭐라고 설명했느냐면은, 섭입삼세간법(攝入三世間法)은 자리(自利)여 해인삼매 수행을 할 때 국토세간(國土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불보살세간(佛菩薩世間), 온갖 세간을 거둘 섭(攝) 자, 들일 입(入) 자, 딱 거둬들이면 오직 바닷물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데 들어가거든요. 그게 자기를 이롭게 하는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조용한 시간에 생각을 다 걷어들이고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면 근심 걱정 없어요. 거기에 안 돌아가서 맨날 괴로운 거예요. 그다음에 현현삼세간법(現現三世間法)은 이타(利他)라. 또 삼세간법을 나타내요. 현현(現現)을 해, 나타낼 현(現) 자, 나타낼 현(現) 자, 현대라는 현자인데, 두 번 써가지고, 이걸 다 거둬들이면 한 물건도 없고, 이걸 나타내면 삼라만상 우주 만법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걸 펼치는 것은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거고, 이걸 거둬들이는 것은 자기를 이롭게 하는 거다. 그런데 이 화엄의 도리에서는 이타(利他)가 없다.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게 없다. 왜 없느냐, 일체 밖으로 있는 중생이 그냥 중생이 아니라, 자기 해인삼매에서부터 나타난 중생이다. 해인삼매가 없으면 중생도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게, 해인삼매로부터 나타난 중생이니까,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니다. 이타는 없다. 이게 뭔 말이냐면요. 지혜가 높아지면 남의 일이 없어요. 지혜가 높아지면 남의 일이 없어요. 전부 내 일이에요. 근데 지혜가 좁으면 내가 왜 이 일을 하지, 이거 하고 나하고 뭔 상관이 있는데,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지혜가 낮을수록 전부 남의 일뿐이고, 지혜가 높을수록 전부 내 일뿐이에요. 꼬마들이 집안일 하고도 엄마 보고 내가 노력한 품삯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맨날 일하면서 누구한테 품삯을 받아요.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은 전부 내 일이, 그게 보현보살이에요. 내가 일을 하면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일한 공덕이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은 몸으로 노력하는 거는 힘들어하고, 공짜로 받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전부 부모한테 얻으려고 그러고, 시장에 가서 이익 보려고 하고, 전부 뭘 밖에서 얻으려고 그래요. 근데 밖에서 얻은 건 몸의 공덕으로 남질 않아요. 내 이름으로 억만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거는 나하고 상관없는 숫자일 뿐이에요. 나한테 있는 거는 내가 무엇을 해 봤냐, 내가 무엇을 이루어 봤냐, 내가 무엇을 실천해 봤냐, 그 공덕만 내 몸에 있는 거예요. 내가 움직이지 아니한 건 내 몸에 없어요. 은행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 하더라도 나하곤 상관없어. 그거는 은행에 있는 숫자일 뿐이야. 무슨 소린지 참 희한한 소리가 다 있다. 진짜. 그래서 불보살은 오직 몸으로 실천할 뿐이지, 공짜로 얻으려고 안 해요. 공짜로 얻는 건 나하고 상관이 없어요. 근데 중생들은 하지는 않고 얻으려고 해요. 부모도,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왕 나한테 줄 거 죽기 전에 지금 달라고, 이게 이제 자식이 아니라, 이건 원수인 거예요. 원수, 도둑이야. 도둑. 그게 어리석어서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 보살은 남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보는 중생이 내 마음에 비추어진 중생이다, 이거야. 내 마음에 비추어진 중생. 내가 보는 저 하늘이 내 마음에 비추어진 하늘이다. 내가 보는 저 나무가 내 마음에 비추어진 나무다. 그래서 내 마음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 전부 내 일이지 남의 일은 없다. 이게 이제 해인삼매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해인삼매에서는 일념이 전섭법계(一念全攝法界)라, 한 생각이 이 우주만상을 온전히 다 거둬들여, 이걸 전섭법계라고 그래. 전섭, 온전할 전(全) 자, 거둘 섭(攝) 자, 한 생각이 전체를 다 거둬들이는 거예요. 이게 해인삼매에요. 내가 이제 뭐 딱 하면, 그 보는 그 사이에 우주 만물이 다 들어 있어. 그래서 못 걷어들이는 건 없다. 못 걷어들이는 건 없다, 이거예요. 한 생각에 모든 걸 다 거둬들이고, 한 생각에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건 없다. 이게 이제 해인삼매데, 그놈이 이제 뭐 같으냐 하면, 이런 물에 이렇게 보면, 이 안에 그림자가 비춰지는데, 이 작은 물이라도 온갖 것이 여기 다 비춰져요. 온갖 것이. 이것이 한 생각에 모든 것이 다 비춰진다. 한 생각에 담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게 해인삼매의 공덕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을 부사의라고 한다,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거죠. 이래가지고 이 해인삼매, 바닷물은 가만히 있는데 온갖 것이 다 드러나는 거, 이런 것처럼 해인삼매에서 온갖 것이 다 드러난다. 이런 걸 맨날 부처님한테 공양 올릴 때 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거를 제불통청유치(諸佛通請由致)라고, 제불을 다 한꺼번에 청하는 걸 통청이라고 그러거든요. 유치는 시작한다는 말이야. 제불을 한꺼번에 청하는, 시작하는 말. 유(由) 자는 말미암을 유 자인데, 그건 시작이라는 소리예요. 치(致)는 시작을 한다, 할 치 자예요. 통청유치, 그거 아셨어요? 제불통청유치. 從眞淨界 興大悲雲 非身現身 布身雲於三千世界 無法說法 灑法雨於八萬塵勞 開種種方便之門 導茫茫沙界之衆 有求皆遂 如空谷之傳聲 無願不從 若澄潭之印月 (諸佛通請 由致. 釋門儀範下)종진정계 흥대비운 비신현신 포신운어삼천세계 무법설법 쇄법우어팔만진로 개종종방편지문 도망망사계지중 유구개수 여공곡지전성 무원불종 약징담지인월 (제불통청 유치. 석문의범하) 從眞淨界者 法性眞性 眞如佛性 無終無始 常放光明종진정계자 법성진성 진여불성 무종무시 상방광명 근데 거기에 보면, 종진정계(從眞淨界), 진정계로부터, 참되고 깨끗한 세계로부터, 이게 해인삼매를 말하는 거지. 흥대비운(興大悲雲), 대비의 구름을 일으키고. 비신현신(非身現身)이라, 몸이 아닌 데서 몸을 나타낸다. 바닷물이 모양이 없는 데서 그 모양을 나타내는 거잖아요. 이게 전부 마음인 거예요.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데, 사람도 보고, 산도 보고, 보는 것마다 전부 마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인고, 마음이에요. 저것이 무엇인고, 마음이에요. 전부 이게 마음의 물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자식이 무엇인고, 내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가 자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내 마음에 비춰진 걸 모르고, 자식이 처음에는 막 금지옥엽이라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동양 고전에서 자식을 뭘로 설명했느냐 하면 쑥으로 설명했어요. 쑥, 먹는 쑥 알죠? 왜 자식이 쑥이냐, 이 쑥이라는 놈이 말이에요, 어릴 때는 참 뭘로 다 해 먹는데, 이게 쇠 빠지면 아무 짝도 쓸 데가 없어요. 그래서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지, 나이 들면 소용없다. 그래서 자식은 쑥이다. 그 쑥, 처음에 나올 때 그 얼마나 좋아요, 뭐 국도 끓여 먹고, 뭐도 하고, 보들보들하고 향기도 좋고. 근데 한 길로 자라면 아무 쓸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은 크면 무용지물이다. 자식은 크면 원수다. 자식은 크면 도둑이다. 자식은 어릴 때는 금지옥엽이다. 금과 옥과 같은 거요. 그런데 그게 전부 내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인 거예요. 내 마음 없으면 어린 자식이 어디 있고, 원수 같은 자식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자식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식하고 싸우면 안 돼요. 소용없어. 자기 마음을 다 돌아보면 거기서 해답이 있는 거예요. 종진정계 흥대비운 비신현신 포신운어삼천세계(布身雲於三千世界), 몸을 3천 세계에 다 펼치고. 또 뭐냐, 무법설법(無法說法), 쇄법우어팔만진로(灑法雨於八萬塵勞)라, 법이 없는데 법을 설해서 법의 비로 팔만 번뇌를 다 없앤다. 이 번뇌라는 말을 한문으로 할 때 망상이라고 번역을 해요. 망상,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할 망(妄) 자, 생각 상(想) 자, 망상. 번뇌는 인도 말을 그대로 번역한 말인데, 번거롭고 걱정스럽다, 이 말이거든요. 번뇌가. 근데 이걸 한자로 하면 망상이야. 번뇌는 망상, 허망한 생각. 그런데 그다음에 또 번뇌를 뭐라고 말을 하느냐 그러면, 티끌 진(塵) 자, 수고로울 로(勞) 자, 피로할 로 자, 이 티끌에 피로한 것이 번뇌다. 티끌에 피로하다는 말은, 티끌은 물질인데, 물질에 항상 피곤하다. 노곤하다. 물질에 노곤한 거예요. 그 무슨, 뭐 사람도 물질이고, 재산도 물질이고, 보이는 것도 물질이고, 전부 근심 걱정은 다 사람과 물질과 내 몸에서 생겨요. 몸 없는 근심 걱정이 없고, 사람 없는 근심 걱정이 없고, 물질 없는 근심 걱정이 없거든요. 이걸 진로(塵勞)라고 그래요. 티끌에 노곤하다. 티끌에 빠지지 아니하면 걱정이 없어요. 이 말, 빠진다는 말은 뭔가, 내가 사람 때문에 괴롭고, 몸 때문에 괴롭고, 물질 때문에 괴롭고. 그래서 그걸 진로, 망상, 진로 망상, 망상 진로. 묘한 말이여. 내가 근심하는 데는 거기에 내 몸이 들어 있어. 내가 아는 사람이 들어 있어. 내가 가진 물질이 들어 있어. 내가 가지려고 하는 물질이 들어 있어. 그게 진로요. 진로. 이런 진로 망상을 다 설법으로 씻어준다. 무원불종(無願不從)하니, 약징담지인월(若澄潭之印月)이라.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지니, 그 이루어지는 것이 뭐냐, 맑은 연못에 달빛이 비추어지는 것 같다. 또 참, 또 유구개수(有求皆遂)하니, 여공곡지전성(如空谷之傳聲)이라. 구함이 있는 곳은 다 이루어지니, 공곡에, 빈 골짜기에 소리를 전하는 거와 같다. 이 공곡전성이라는 게, 골짜기 메아리인데, 이 골짜기에 가서 소리를 질러보면, 그건 뭐 전화선을 설치한 것도 아니고, 그거 뭐 뭘 시설한 것도 아닌데, 소리를 크게 지르면 메아리가 크고, 작게 지르면 메아리가 작고, 저절로 되는 거예요. 이게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라. 무슨 소리지, 이거 참 그럴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이렇네. 그래서 이제 부처님의 그 해인삼매의 모든 공덕을 크게 세 가지로 예경을 올리고 축원을 하고 하거든요. 그럼 첫째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이렇게 얘기를 해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께 예경하고 공양을 올립니다. 그 공양을 왜 올리냐, 내가 비로자나불이 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남은 없어요. 내가 비로자나불이 되는 길은 비로자나불께 예경을 하고 공양을 올리는 거다. 그럼 비로자나불은 어떤 분이냐? 상주본유(常住本有), 항상 상(常) 자, 머물 주(住) 자, 상주, 항상 머물렀어. 본래 있어, 근본 본(本) 자, 있을 유(有) 자, 상주본유. 해인삼매와 같은, 그 바닷물과 같은 마음이 항상 있고, 본래 있는 거예요. 그게 누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석가모니불이 설법했지, 석가모니불이 우리 마음을 만든 분이 아니에요. 석가모니불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만들어요? 그건 상주본유라, 항상 머무는 것이고 본래 있는 것이다. 상주본유 법성진성(法性眞性), 법성게에서 처음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랬잖아요. 만법의 본성이다. 그걸 법성이라 그래요. 아주 진실한 본성이다. 이걸 진성이라 그래요. 그다음에 이제 다섯 번째에 가서 뭐,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이랬잖아요. 첫 번째 구절에 법성원융무이상, 다섯 번째에 가서 진성심심극미묘, 틀림없죠. 아니라고 하면 모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법성진성, 이 상주본유의 법성진성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여. 그다음에 정각공덕(正覺功德)의 대지원명(大智圓明)은, 법성진성이 늘 있는데, 이걸 깨닫기 전에는 몰라. 깨닫기 전에 몰라. 그래서 정각공덕으로,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번뇌 망상의 생각이 대지원명이 돼서, 큰 지혜가 둥글고 밝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이게요, 이 깨달음을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광석과 같다. 광석이 뭐냐, 금을 머금고 있는 돌을 광석이라고 하거든요. 금. 유여금광석(猶如金鑛石), 소금광. 근데 금을 머금고 있는데, 금은 분명히 그 돌 속에 있어요. 그런데 이걸 녹이지 아니하면 금이 안 나타나. 우리 몸속에 법성이 있고, 진성이 있고, 비로자나불이 있는데, 이걸 번뇌 망상을 녹이지 아니하면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금비소구유라. 그렇다고 해서 이 녹였기 때문에 금이 생긴 건 아니에요. 녹이지 아니하면 금이 안 나타났는데, 금이 없는 맨돌을 가지고 녹이면 금이 나오느냐, 그건 아니잖아요. 녹였기 때문에 나온 게 아니라, 금은 본래부터 금이었다. 그런데 녹이지 않으면 안 나타났다, 이거예요. 본래부터 우리가 비로자나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데, 그림자 속에 물이 있듯이 있는데, 이걸 깨닫기 전에는 안 나타났어. 근데 깨달음을 통해서, 정각공덕으로 대지가 원명이라, 큰 지혜가 둥글고 밝았다. 그거를 정각공덕으로 대지원명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보답이 원만해요. 그래서 그걸 노사나불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자비광대(慈悲廣大), 응화무진(應化無盡)은, 자비가 광대하야, 응화가 무진이니라, 다 적응해서 변화하는 자비가 끝이 없어. 그거를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이라고 한다. 이렇게 맨날 예경을 하는 거예요. 常住本有 法性眞性 淸淨法身 毘盧遮那佛상주본유 법성진성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正覺功德 大智圓明 圓滿報身 盧舍那佛정각공덕 대지원명 원만보신 노사나불慈悲廣大 應化無盡 千百億化身 釋迦牟尼佛자비광대 응화무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그러니까 이제 성불이라는 건 이런 거다. 상주본유 법성진성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정각공덕 대지원명 원만보신 노사나불, 자비광대 응화무진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근데 이게 부처님의 공덕으로 말하면 이렇게 여러 가지지만, 거기 들어가는 법은 딱 하나여. 집이 아주 큰데, 그 들어가는 문은 하나거든, 아무리 큰 집이라도 문 하나 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문이 뭐냐, 우리 생각이에요. 한 생각. 한 생각을 딱 거둬들이면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인데, 한 생각이 막 쫓아가고 도망가고, 한쪽에서 도망가고 한쪽에서 쫓아가고, 구하고 버리고, 이렇게 하는 걸 육도범부(六道凡夫)라고 그래요. 육도가 뭔지 아시죠?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상, 아수라, 여섯 세계의 범부들이다. 육도범부는 쫓아가고 도망가다 죽는 거고. 이제 삼세제불(三世諸佛)은 펼치면 우주고, 안으로 들이면 한 물건도 없다. 그래서 평상시에 앉아 있을 때는 한 물건도 없는 세계에 딱 들어가는 거예요. 그 이제 펼치면, 하늘을 보면 하늘도 나의 마음광명이오, 땅도 나의 마음광명이요. 그래서 이 보이는 게 그거예요. 이렇게 이게 뭐냐 그러면, 육도범부는 이거, 뭐 유리로 생긴 기구인데요, 이거는 쫓아가고 도망가는, 마음 밖에 물질이 있다고 하는, 어리석은 범부가 판단하는 거거든요. 이게 뭐냐, 이건 나의 마음입니다. 이거 물질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거예요. 나의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예요. 이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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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 17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4-17
260417 신중기도 법문 - 종범큰스님1. 일 시 : 2026년 4월 17일 (병오년 3월 1일) (진관사) 2. 주 제 : 義相祖師 法性偈 이야기 19 - 능인해인삼매중안녕하세요. 오늘 병오년(丙午年) 3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인데요. 법성게(法性偈) 중에 19번째 구절, 법성게가 30구가 있는데, 그중에 제 19구절, 19번째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하는 데가 있어요. 10번을 독송을 하겠습니다. 시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능인해인삼매중 이 능인이라고 하는 거는 옛날 목판본에 따라서 능할 능(能) 자, 들어갈 입(入) 자, 능입이라고 한 데가 있어요. 그리고 능할 능(能) 자, 사람 인(人) 자, 능인이라고 하는 데가 있고요. 또 능할 능(能) 자, 어질 인(仁) 자, 능인이라고 한 데가 있는데, 이 사람 인(人) 자나 어질 인(仁) 자는 같은 뜻이에요. 사람을 칭할 때도 인자요 이렇게 하는 수가 있어요. 어질 인 자 쓰고, 사람 자 자, 인자, 그래요. 그리고 사람 인(人) 자는 그냥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 인(人) 자와 어질 인(仁) 자는 같은 말이고. 능입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해인삼매 중에 능이 들어가면 이런 뜻이라, 그러니까 해인삼매에 들면,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는 해인삼매를 이루는 과정을 설명한 거라, 든다는 말이, 그러니까 들어가는 과정을 말할 때 능입이라 이랬고, 능인해인삼매중 어질 인 자를 쓰면, 능인이라는 것은 능각인, 능화인, 능이 깨달은 사람, 능각인(能覺人)이라 그러고요. 능화인(能化人), 능이 교화하는 사람. 그러니까 능이 깨달은 사람이 해인삼매중에 이 말이거든요. 능인해인삼매중 하면 해인삼매를 이룬 사람의 경계, 이 말이고, 능입해인삼매중 하면 해인삼매 중에 들어가는 일이다, 이 뜻이에요. 그러니까 다 그게 의미가 있죠. 그러면 해인삼매(海印三昧)가 뭐냐. 능인해인이든지 능입해인이든지 골자는 해인삼매거든요. 해인삼매는 비유인데, 무슨 비유냐, 깨달음을 이룬 비유예요. 해인삼매가 깨달음을 이룬 비유가 뭐냐 하면, 시성정각(始成正覺)하니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루니, 정각은 깨달음이잖아요,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중생의 생각이 대지혜(大智慧)로 바뀐 거예요. 생각이 지혜가 된 거예요. 그 깨달음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게 깨달음이다. 무슨 소린가, 지혜가 있고 생각이 있는데, 깨닫기 전에는 생각이고, 깨달은 후는 지혜고. 그래서 깨달음이 뭐냐,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게 깨달음이다. 그럼 지혜로 바뀌면 어떻게 되냐, 그거를 비유로 설명한 것이 해인이에요. 지혜를 비유로 설명한 게 해인이거든요. 그럼 해인이라는 건 뭐냐, 해(海)는 바다 해 자고, 인(印)이라는 것은 바닷물에 도장 찍히듯이 많이 비춰진 그림자예요. 그 바다에 보면 산 그림자도 있고, 달 그림자, 해 그림자, 별 그림자, 뭐 온갖 그림자가 바다에 비춰졌거든요. 그것이 백지장에 도장 찍히듯이, 바닷물은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에 온갖 그림자가 비춰져 있는 상태를 해인이라고 한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이 해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특징이 있어요. 바다는 옛날 바다나 지금 바다나 그냥 바다다. 해가 비춰도 해 따라 바다가 안 움직이고, 달이 비춰도 달 따라 안 움직이고, 산이 비춰져도 바다가 산으로 올라가질 않아요. 그래서 첫째로 바다는 부동(不動), 움직이지 않는다. 제자리에 있다. 그래서 그 부동을 뜻해요. 안 움직여. 그리고 바다는 항상 안정돼 있다. 그래서 대정(大定)이라 그래요. 큰 대(大) 자, 선정이라고 하는 안정될 정(定) 자, 대정. 그래서 삼매는 인도 말인데, 한자로 하면 해인 대정, 이렇게 해요. 해인 대정. 부동, 상정, 항상 안정돼 있어. 부동이고 항상 안정돼 있는 게 바다다. 근데 부동인데 바다는 움직이지 않아요. 근데 어떤 때는 해가 비치고, 어떤 때는 달이 비치고, 산이 비치고, 사람이 비치고, 모든 게 바다에 비추는 동시에 바다에서 비춰지는 거예요. 막 비춰요. 비치고 비추고, 바다에서 막 비춰져 올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거를 대명(大明), 항상 비춘다. 그래서 큰 대(大) 자, 밝을 명(明) 자, 대명. 대명이라는 건 항상 밝게 비춘다, 이 소리야. 그래가지고 절에 가면 대웅전(大雄殿), 대광명전(大光明殿) 이런 게 있거든요. 그게 해인삼매요. 크게 웅장하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항상 비춘다. 그래서 항상 비추는 것을 대광명이라고 하거든요. 그럼 뭐냐, 그게 깨달은 지혜가 대광명인 거예요.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을 때, 그 생각이 바뀐 지혜가 대웅이고, 크게 웅장한 거고, 생각이 지혜로 바뀐 그 지혜가 항상 밝다. 대명이다. 그래서 해인삼매라고 하는 것은 해인 대정, 또 해인 부동, 바다는 안 움직인다. 바다는 항상 안정돼 있다. 그런데 바다는 항상 비춘다. 또 이 비춘다고 하는 밝을 명(明) 자를 써서 대명이라고 그러는데, 대명이라는 것은 항상 비춘다는 거예요. 이게 어두움이 오면 바닷물이 또 어둠을 비춰요. 공기는 어두운데 바닷물은 안 어둡고, 그게 아니에요. 밤이 오면 바닷물이 밤 색깔이 돼요. 사람이 거기에 나타나면 바닷물에 사람이 있어요. 이게 대명이에요. 밤에 올 때는 밤을 비추고, 낮에 올 때는 낮을 비추고, 그러니까 상명(常明)이다. 항상 밝다. 그리고 이거는 비추고, 안 비추고 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끊임없이 다 비춘다. 이래서 둥글 원(圓) 자, 밝을 명(明) 자를 써서 원명(圓明)이라고 그래요. 원명. 그래서 이제 대명, 그다음 무슨 명 말했죠. 조금 전에. 아니 그 원명 전에 상명, 대명, 근데 이게 대정과 대명이 같이 있는 거예요. 크게 안정돼 있을 때는 크게 밝고, 크게 밝을 때는 크게 안정돼 있고. 그래서 깨달은 지혜는 적조상명(寂照常明)이라고 하거든요. 고요하면서, 고요할 적(寂) 자, 이건 부동, 대정 이런 거와 같은 거죠. 깨달은 지혜는 바쁘질 않아요. 생각이 바쁘지, 지혜는 안 바빠요. 이게 뭔 소리인지. 생각이 많다는 거는 구하는 게 많다는 소리고요. 구하는 게 많다는 소리는 이 천지만물의 평등 진리, 천지만물에는 평등한 진리가 있는데, 그 평등한 진리를 모른다는 소리예요. 그래서 바쁜 사람은 욕심이 많고 어리석음이 많다, 이렇게 보면 틀림없어요. 그 바쁜 거는 고통만 당하지. 나중에 죽을 때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신세 망치는 거예요. 바빠서 신세 망친다. 병만 들어요. 바쁘다가. 그게 구하는 게 많아서. 그런데 세상에서 구한 건 죽을 때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요. 그래가지고 지혜는 늘 그냥 부동이고, 크게 안정돼 있는데, 항상 밝고, 온전히 밝고, 두루이 밝다. 그래서 대명, 원명, 상명,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건 전부 깨달은 지혜를 해인으로 비유했는데, 이 비유가 너무 좋아서 항상 입에 올렸어요. 그래서 정각은 해인이요. 대각은 해인이요.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그게 정각, 대각인데, 해인이다. 그리고 이제 그 깨달음을 둥글 원(圓) 자, 깨달을 각(覺) 자를 써서 원각(圓覺)이라고도 하거든요. 그래서 절 이름을 보면 원각사(圓覺寺)가 있고요. 네, 정각사(正覺寺)도 있고요. 대각사(大覺寺)도 있거든요. 그게 다 깨달음을, 그 깨달음 과정을 말한 건데, 그 깨달은 실상을 말할 때는 그걸 해인이라 그래요. 정각, 대각, 원각은 깨닫는 과정이고, 깨달은 실상,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 그게 해인이다. 바다는 항상 고요하고, 바다는 항상 움직이지 않고, 항상 안정돼 있는데, 바다는 항상 비추고, 아주 둥글게 비추고, 온전히 크게 비춘다. 그래서 이제 삼매 그러면 동시에 해인 대정, 해인 대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대정이면 대명이고, 이제 대명이면 대정이고. 그래서 이 동아시아에서는 인도에서 말하는 초기 불교 선정처럼 이제 정이 있는데, 제1정, 제2정, 제3정, 이렇게 차제선정(次第禪定)이 아니에요. 동시 선정이에요. 대정이면 대명이다. 대명이면 대정이다. 그래서 그걸 수행할 때도 명은 지혜로 보고, 이제 정은 선정으로 보는데,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그래요. 정과 혜를 함께 닦는 거예요. 차례차례 닦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차제선과 정혜쌍수의 삼매선이 전혀 달라요. 그래서 이제 인도 불교가 이 아시아에 와 가지고는 완전히 아시아의 식으로 재구성된 거예요. 정혜쌍수, 해인삼매, 이것이 아시아의 선이에요. 근데 인도선은 제1선, 제2선, 제3선, 이렇게 선정이 차례차례로 올라가게 돼 있어요. 근데 여기서는 함께 닦아, 딱 볼 때는 벌써 멈춰 있고, 멈춰 있으면 보고, 이걸 정혜쌍수라고 하거든요. 이 어려운 말이고요. 기도하러, 복 받으러 왔는데, 정혜쌍수 얘기나 제끼고 이러면, 이게, 근데 해인삼매 속에 그게 다 들어 있거든요. 일체중생의 복덕 광명이 다 들어 있어요. 정각대지(正覺大智)가, 정각을 하면 대지가 나타난다. 이걸 정각대지라고 그래요. 바르게 깨달은 큰 지혜가, 큰 지혜라는 말은 온전한 지혜가, 뭐 알고 뭐 모르고 그게 아니에요. 뭐 모른다는 얘기는 의심을 한다는 얘기인데, 모르는 건 의심이에요. 그러니까 뭐 알아, 뭐 몰라, 그러면은, 아이 그거는 막 의심이 돼가지고, 관심이 없다, 소리여, 몰라. 크게 할 때는 관심 없다, 이 소리여. 근데 거기에 대해서 뭐 의심이 항상 있다는 소리죠. 그래서 생각을 가지고 살면 의심을 끊을 수가 없어요. 이거 알면 또 저게 의심스럽고, 저거 알면 이게 의심스러워서, 의심해서 의심으로 살아가는 게 생각이에요. 그런데 이게 정각은 의심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그걸 대명이라고 하고, 원명이라고 하고, 상명이라고 그런다. 딱 보면 거울에 물체가 환히 보이듯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정각대지가 역역(歷歷)원명하니, 분명하고 분명하고, 저 의심 없어요. 뭐냐, 저 바다에 물건이 비춘 것처럼, 이 바다가 전부 이게 깨달은 지혜 세계인데, 지혜 세계에 나타난 천지만물의 그림자가 이 우주 만물인 거예요. 지혜 거울에 그림자가 천지만물이다. 이거 어려운데, 이게 눈에 보이고 하는 게, 그게 나의 지혜 거울인 거예요. 우리 몸도 이게 지혜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예요. 이걸 가르치고, 이걸 깨닫는 게, 이게 깨달음이에요. 이거 딱 보잖아요. 그러면 이제 범부들은 이 모양을 보고, 모양에 집착해서, 모양이 나타날 때는 좋아하는데, 깨질 때는 싫어해요. 이게 생로병사, 우비고뇌(憂悲苦惱)거든요. 근심 걱정은 전부 깨닫지 못한 생각에서 오는 거예요. 그냥 걱정하지 마라, 택도 없어요. 내가 이게 의심이 되고 불안한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그런데 이게 지혜를 딱 밝히고 나면, 우주 전체가 지혜 거울이에요. 그래서 이걸 대원경(大圓鏡)이라고 합니다. 큰 대(大) 자, 둥그런 원(圓) 자, 거울 경(鏡) 자, 대원경지. 우주 전체를 감싸는 큰 거울이 있는데, 거기에는 내 몸도 그림자로 비춘다. 저 달 그림자가 바다에 비추듯이, 일체 중생도 그림자로 비춘다. 천지만물도 그림자로 비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해인삼매를 딱 읊고 나면, 이거 하나하나가 전부 나의 지혜 거울인데, 지혜 거울에 비추어진 모든 그림자다. 해인물(海印物)이다, 이거죠. 바다에 비춰진 물건이다. 바다는 뭐냐, 내 지혜다. 그러니까 이게 지혜는 마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내 마음에 비추어진 모양이다. 저 사람 예쁘네. 그러니까 예쁘다고 쫓아갔는데 도망가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싸우고, 이게 범부들이 하는 일이거든요. 근데 예쁘게 보이는 것도 내 지혜 거울, 마음 거울에 비춘 그림자고, 나쁘게 보이는 것도 내 마음 거울에 비춘 그림자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마음 거울에 비춘 그림자다, 이 말을 간단하게 말하면, 뭐가 보인다, 그건 니 마음이야,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저게 뭐야? 그거 니 마음이야. 저게 뭐야? 니 마음이야. 그러니까 의심이 날 수가 없는 거죠. 전부 내 마음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니까. 이게 참 무서운 소리네. 이게, 이게, 이게 진짜 맞기는 하나, 이거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게 뭐야? 그럼 산이 아니라 네 마음이야. 저거 뭐야? 촛불이 아니야? 그 촛불이 아니라 네 마음이야. 내 몸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 니 마음이야.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그러니까 무유공포(無有恐怖), 두려움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공포가 없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그걸 전도몽상이라는 거,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고, 이게 취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버리는 것도 내 마음인데, 그게 뒤바뀌었다는 거예요. 꿈 같은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는 게 그 깨달음의 지혜를 설명하는 거고요. 깨달음의 지혜의 비유가 해인이에요. 삼매는 늘 안정돼 있고, 늘 밝다는 말이고, 그래서 대정, 대명이라 그런다. 또 정각대지가 영역 고명(高明)하니, 부동의 불신(佛身)이, 움직이지 않는, 깨달은 몸이, 깨달은 몸이라는 게, 깨달은 광명의 몸, 깨달은 지혜의 몸, 깨달은 분명분명한 몸, 그런 깨달은 몸이. 깨닫고 나서는 깨달은 지혜로 내 몸을 삼지, 깨달은 지혜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로 내 몸을 삼지 않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 몸은 그림자인데, 그림자는 사라지거든요. 근데 이 몸에 계속 매달려 사니까, 하루하루 몸이 늙어가고, 하루하루 죽어가는데, 맨날 건강하냐고 물어요. 사람 미치겠어요. 하루하루 늙어가는 몸을 보고 하루하루 건강하냐고 물으니, 건강 안 하다고 할 수도 없고. 아이 생각해 보면 작년하고 올해하고 다른데, 어떻게 맨날 건강하다고, 건강하다고 대답하자니 나도 거짓말하는 것 같고. 아주 미치겠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몸은 사라져요. 그러니까 이 몸 사라지는 데 희망을 걸면 눈물밖에 없어요. 그래서 죽는 사람이 대략 마지막 죽을 때 눈물을 흘려요. 내가 뭘 위해서 살았던고. 이 몸을 위해서 살았는데 몸이 지금 없어지고 있구나. 그러니까 몸이 몸을 알고, 몸 눈이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천하의 아주 영리하고 못된 사람들이 있거든요. 세상에서 구하는 걸 구하지 않고, 내가 보고 내가 듣는 이게 뭔가, 그거를 이제 의심을 해가지고, 그걸 찾으니까, 생각이 지혜로 확 바뀌어서, 모든 것이 지혜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내 마음이다. 이걸 안 거예요. 깨닫기 전에는 내 마음 밖에 물질이 있었는데, 깨닫고 나니까 모든 물질이 내 마음에 있다. 내 마음이다, 내 마음 안에 있다. 뭐 이건 똑같은데요. 보통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저 앞산의 바위가 내 마음 안에 있느냐, 내 마음 밖에 있느냐,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거든요. 근데 이제 생각해 보니 내 마음 안에 있는 것도 같거든. 그러니까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무거워서 어떻게 들고 다니냐, 이래 되는 거예요. 이거, 이거, 마음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게 아니라요. 마음은 대원경인데, 크고 둥근 거울인데, 그 거울 안에 돌멩이도 비추어지고, 태산도 비추어지고, 하늘도 비추어지고, 내 몸도 비추어지는 거예요. 근데 그게 전부 내 마음 거울에 비추어진 거지, 그 마음이 그거 밖에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이제 깨달음이거든요. 그래가지고 부동의 불신(佛身)이, 움직임이 없는, 나고 죽음이 없는, 그 지혜의 몸이 무고상광(無古常光)이라. 무고(無古)라는 건 없을 무(無) 자, 옛 고(古) 자인데, 옛 고(古) 자는 변해간다는 거예요. 변해감이 없이. 저거 옛날 거네, 그러면은 변했다는 소리 아니에요. 지금 새것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옛 사람이라고 그러면 늙었다는 소리야. 근데 새 사람이라 그러면 새로 출생했다는 소리 아니에요. 근데 이 지혜광명은 그게 없다는 거야. 늙어감이 없이, 옛날로 돌아감이 없이, 상광(常光)이라, 항상 빛난다. 이게 지혜예요. 항상 빛난다. 정각소득(正覺所得)의 대지행경(大智行境)이, 정각으로 얻어진 바 대지(大智)에 움직이는 행로가, 움직이는 길이, 이제 해인삼매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원융무애(圓融無礙)라고 표현하는데, 원융, 원융(圓融)이라는 건 모두 통해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이루지 않는 곳이 없다. 이걸 원융이라고 그래요. 또 무애(無礙)라고 하는 것은 없을 무(無) 자, 장애 애(礙) 자인데, 이 작은 그릇이 큰 우주와 장애가 없어요. 이 작은 게 온 우주를 감싸고, 우주가 이 작은 걸 감싸고, 무량겁(無量劫)이 일찰나(一刹那)고. 이게 뭐예요? 한량없는 세월이 똑딱하는 한순간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무애는 무이(無二) 실상이라 그래요. 둘이 없는 진실상이다. 뭔 소리인지 참 걱정된다, 이거 걱정. 재미없으면 잠 오는데, 아직까지 잠 오는 분이 없네요. 무애는 뭐냐, 무이(無二), 둘이 없는 실상, 진실상이다. 이건 지혜로만 알 수 있어요. 생각으로는 무이(無二)가 없어요. 생각으로는 이건 크네, 이건 작으네, 이건 가까우네, 이건 머네, 이게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지혜는 이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게 둘이 없는 걸 아는 능력이 지혜예요. 그리고 일찰나와 무량겁이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지혜거든요. 그러니까 이 지혜를 얻으면, 시작이다 끝이다, 크다 작다, 있다 없다, 이런 게 아무 소용이 없이 그냥 평등해요. 평등해. 그래서 무이(無二)의 평등을 아는 것이 지혜예요. 둘이 없이 평등함을 아는 거, 둘이 없이 평등한 것이 무애라고 그래요. 무애, 걸림이 없다. 원융하다. 모든 것이 다 통한다. 둘이 없이 평등하다. 이거를 원융무애라고 그러는데, 이 원융무애가 해인삼매 진실상이다. 해인삼매 진실상은 원융무애다. 그래서 원융무애하니, 이것이 해인 대명이다. 해인이 항상 크게 밝은 것이다. 이래 돼가지고 설명하는데, 신라 시대의 이 얘기는, 내 몸이 전부 해인삼매에 비추어진 거울이다. 이게 의상 스님 제자 중에 이런 해석을 했어요. 내 몸이 해인삼매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그래서 이제 그림자는 바로 해인삼매 실체다. 진실체다. 그러니까 이 몸은 가고 진실체는 안 가고, 그게 아니라, 이 몸이 갈 때 그게 해인삼매 진실체고, 또 진실체가 바로 몸의 그림자다. 그러니까 이제 이게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몸이 그냥 대지혜, 해인삼매인 거예요. 왜 그러냐면,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잖아요. 그럼 바다에 산이 비췄다고 할 때, 그 비추어진 산과 바닷물과 다르지 않아요. 산이 비춰져도 바닷물이고, 산이 비춰지지 않아도 바닷물이고. 그러니까 이게 해인삼매 대지에 더 들어가면, 이 몸이 보여도 내 마음이고, 이 몸이 안 보여도 내 마음이고, 죽고 사는 게 전부 내 마음이다. 그래서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바로 그냥 그대로 극락세계에 있는 거고, 살아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항상 극락세계에 있는 거다. 이것이 해인삼매로 그렇게 주석을 달아놨어요. 의상 스님 제자들이. 진짜 갈수록 태산이네. 이거 진짜. 그리고 화엄경(華嚴經)에 입법계품(入法界品)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화엄경은 39품인데, 제39품이 이 입법계품이에요. 법계라는 건 여기서 해인삼매를 말해요. 그래서 입(入)이라는 건 해인삼매에 든다는 소리야. 그럼 누가 드느냐, 거기서는 주인공이 선재동자(善財童子)예요. 선재동자가 이 해인삼매의 원융무애한 해인삼매, 그러니까 깨달음이 뭐냐,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거다. 생각이 지혜로 바뀌면 어떻게 되냐, 원융무애다. 그게 정답이에요. 정답, 원융무애. 과정,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거. 그 원융무애가 생각으로는 도저히, 원융도 없고 무애도 없어요. 원융이라는 건 이것 속에 저것이 다 들어 있고, 저것 속에 이것이 다 들어 있는 게 원융인데, 생각으로 볼 때 그게 어디 있어요? 그리고 이제 무애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다르지 않고, 저것과 이것이 다르지 않아서, 가는 티끌이 우주 법계와 다르지 않고, 우주 법계가 가는 티끌과 다르지 않고, 이게 무애인데, 생각으로 볼 때 이게 어디 있냐고요. 이 원융무애는 해인삼매 정각 대지를 이루면 그대로 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그걸 어떻게 이루어요? 또 이따구 소리 해요. 근데 우리 생각하고 너무 다르니까, 그러니까 겁을 먹는 것도 당연해요. 근데 선재동자 같은 사람은 딱 이뤘잖아요. 그게 선재동자예요. 그래서 선재동자가 어떤 분이냐, 일생(一生)에 능원 광겁지과(能圓 廣劫之果)의 선재동자다. 일생, 이 몸 죽기 전에, 광겁지과, 광겁이라는 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광겁지과라고 하거든요. 이걸 능히 원만하게 다 했어. 광겁지과를 일생에 능히 원만하게 다 이루었어. 그런 선재동자가 증입법계(證入法界)하니, 이 원융무애의 법계에 딱 들어가니, 어떻게 됐냐. 일신이 충만 일체세계(一身充滿一切世界)하며, 자기 그 원융무애의 지혜 몸이 일체 세계에 다 꽉 찼더라는 거예요. 생각의 몸은 여기 이렇게 머물러 있는데, 이 지혜의 몸은 일체 세계에 그냥 충만하더라고, 가득히 찼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늙고 병든 거를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나의 지혜를 밝히지 못한 생각의 근심이지, 본래 우리 지혜에는 죽음이, 그게 지혜의 그림자예요. 인연 따라 비춰지기도 하고, 인연 따라 사라지기도 하는 그림자예요. 그러니까 그림자를 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그림자를 보고 슬퍼하는 걸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그래요. 전도라는 건 뭐냐, 맨 땅에 머리 박는다는 거죠. 맨 땅에. 몽상(夢想)이라는 건 뭐냐, 자기 집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다는 거예요. 꿈을 꾸면 자기 집이 없어지거든요. 그걸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그래가지고 선재동자가 증입법계(證入法界)하니, 어떻게 되냐, 일신이 충만 일체세계(一身充滿一切世界)하며, 일체 세계에 자기 지혜 몸이 꽉 차 있어. 그리고 해탈자재(解脫自在)가 실개동등(悉皆同等)하니라.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는 것이, 과거 불이나 현재 불이나 미래 불이나 다 동등하다. 해탈자재가 실개동등이라. 다라는 실(悉) 자가 있고, 다라는 개(皆) 자가 있거든요. 다 실, 다 개, 다, 다 동등해. 석가모니 해탈과 내 해탈이 동등하고, 아미타불 해탈과 내 해탈이 동등하고, 비로자나불 해탈과 내 해탈이 동등하고. 그래서 이 동등함을 보는 게 지혜인데, 동등함을 보면 욕심이 없어져요. 욕심은 동등함을 보지 못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거예요. 근데 이 욕심이라는 게 구하는 마음인데, 이 구하는 마음은 무슨 특징이 있느냐 그러면, 만족을 몰라요. 구하는 마음은 만족을 몰라요. 만족할 줄 모르는 게 구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구하면 구할수록 구할 것이 더 많아져요. 그래서 구해서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멈춰서 행복한 사람은 약간 있어요. 구하는 마음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별로 구할 것이 없어. 그런데 마지막에 두려움은 있어요. 이 몸이 사라질 때 공포가 있거든요. 이건 생사의 공포예요. 이제 그것까지 없어지려면 깨달아야 돼요. 깨닫기 전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질 않아요. 이 몸이 어떻게 되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들이 크게 잘못하는 게, 애들한테 뭘 주면 애들이 행복할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받은 놈이 항상 더 받으려고 그래요. 왜 그러냐면, 받아도 받아도 더 받으려고 한다. 구해도 구해도 더 구한다. 그래서 욕심에는 욕심으로 채울 수가 없다. 욕심에는 지혜를 이루었을 때 욕심이 안 일어난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물질을 많이 모으면 만족할 줄 알고, 평생 물질만 모으다 죽는 사람이 있어요. 나이가 들어도 돈 한 푼 안 줘. 근데 자기가 죽는 순간에 그 물질 다 허공에 뜬 구름이에요. 필요 없어요. 그리고 자식한테 많이 주면 자식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많이 받은 놈이 더 괴로워요. 더 큰 데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고, 그런 거 많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의 그 생각의 욕망과 지혜의 광명을 딱 알아서, 지혜는 광명이고, 생각은 욕망이다. 그러니까 이 생각의 욕망은 채울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 우리가 이제 수행을 할 때는 도솔천에서 만납시다, 이러고, 발원을 할 때는 극락세계에서 극락세계에 갑시다, 이러거든요. 극락세계라고 하는 것은 수복(壽福)이 충만해서, 수명과 복덕이 충만해서, 부처님의 가피로 늘 광명을 받는 곳이니까, 그건 불국토예요. 불국토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영접을 받아야 가요. 그래서 극락세계는 그냥 못 가고, 아미타불을 열 마디라도 불러야 가요. 그게 극락세계의 특징이에요. 그게 십념왕생(十念往生)이거든요. 나무아미타불을 열 마디라도 부르면, 그 아미타 부처님이 와서 인도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늘 있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도솔천에서 만납시다, 이러는 거는, 도솔천은 인도 없이 가요. 도솔천. 그거는 왜 그러냐면, 도솔(兜率)은 만족을 안다는 소리요. 알 지(知) 자, 만족할 족(足) 자. 그래서 절 이름을 보면 도솔암도 있고, 지족암(知足庵)이 있어요. 지족암, 알 지, 만족할 족. 그래서 지혜를 딱 닦아 보면 무구자족(無求自足) 경지가 있어요. 구함이 없이 항상 만족한 경지. 그 무구자족이 도솔천이에요. 구함이 없어. 그런데 항상 만족해. 항상 스스로 만족해. 그래서 도를 조금 닦다가, 도가 좀 깊어지면, 늘 구함 없이 만족해요. 무구자족이야, 구함 없이 스스로 만족해요. 그러니까 우리 도닦아 가서, 도솔천에서 만납시다. 그러니까 너도 무구자족 세계에 가고, 나도 무구자족 세계에 가서, 거기서 함께 만나자. 그 좋은 말이잖아요. 아주. 무구면 자족이요, 자족이면 무구야. 그러니까 구하는 거 보면 쓸데없는 걸 그렇게 많이 구해요. 구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가 요새 본 건데, 사진을 그렇게 찍어재끼더라고, 사진을. 아니 날 만나도 사진 찍자고 그래. 아이, 지금 사진 찍어서 뭐 할 거야. 조금 있으면 이제 지금 모습이 사라지는데. 아, 그거 찍어놓으면, 자기 눈이 없어지는데, 안광이 낙지(眼光落地)라, 눈 광명이 땅에 떨어지는 걸 죽는다고 하거든. 자기 볼 눈이 없는데, 자기 볼 눈도 없는데 돌아가는데, 왜 사진을 찍어서 그걸 남겨놓냐고요. 그래서 내가 기가 막혀서, 아이, 선생님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이 몸은 금방 사라지고, 찍어놔도 나중에 찍어놓은 사람이 늙어서 볼 눈도 없어지는데, 그걸 찍어서 뭐 하냐. 그럼 뭘 해야 되냐. 구함이 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그 지혜를 얻어야지. 그게 도솔천이여. 그래가지고 선재동자 같은 분은 뭐 오래 닦아서 되는 게 아니고, 바로 됐다. 일생에 능원(一生能圓) 광겁지과(廣劫之果), 선재동자가 증입법계(證入法界)하니, 일신이 충만 일체세계(一身充滿一切世界)하며, 자기 지혜 몸이 일체 세계에 가득하며, 해탈자재(解脫自在)가 실개동등(悉皆同等)이라, 부처님하고 다 똑같이 됐다. 차별은 없다. 그러니까 근심 걱정할 거 하나 없다는 거죠. 마치겠습니다. https://youtu.be/kdTFif8Rp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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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 19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3-19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1oldrnrx0iY 260119 신중기도 법문 - 종범큰스님1. 일 시 : 2026년 3월 19일 (병오년 2월 1일) (진관사) 2. 주 제 : 義相祖師 法性偈 이야기 18 - 십불보현대인경 안녕하세요. 오늘 진관사 병오년 2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법성게 중에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그 법문이에요. 10번을 독송을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십불보현대인경. 법성게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7언 30구로 나타내셨는데, 그중에 첫 부분이 초18구, 처음 열여덟구는 부처님 성불 교화의 내용을 말한 거예요. 성불을 증득할 증(證)자, 나눌 분(分)자, 증분(證分)이라고 하거든요. 증분. 그래서, 증분이라고 그러고, 교화를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여기서부터 오늘 읽은 십불보현대인경까지를 교분(敎分)이라고 그래요. 가르치는 내용이다. 교분. 증득은 성불한 거고, 교분은 교화한다는 말이거든요. 그 교분의 총정리한 뜻이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부처님이 뭘 깨달았는가? 이사명연무분별이라, 그게 부처님 깨달은 거예요. 그럼, 이사(理事)는 뭐냐? 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깊고 깊어서 나눌 수가 없다. 명연(冥然)이란 말은 깊다는 말이에요. 이사라는 것은, 이(理)는 안 보이는 거고 사(事)는 보이는 거고, 보이는 속에 보이지 않는 게 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게 있어서 깊고 깊어. 그래서 분별은 나누는 건데, 무분별은 못 나눈다. 그럼, 이사명연무분별의 경지, 머무는 세계가 누구냐? 십불과 보현이 있는데, 그분들은 깨달음을 얻은 대인경이다! 대인경이라, 대인이라는 말은, 태어난 때가 없다, 대인이라는 말은 돌아가시는 때가 없다. 범부는 태어나는 게 있고 돌아가시는 게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것이 시작이 아니고 우리가 죽는 것이 끝이 아닌데, 그걸 시작과 끝으로 보고 사는 것을 ‘정식소견’이라 그래요. 감정 인식으로 보는 바다. 정식소견(情識所見). 이 정식소견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음이라는 게 뭘 깨달았느냐? 법성원용무이상이라, 이걸 깨달은 거예요. 법성은 원융해서 둘이 없다. 둘은 어디서 나오느냐? 감정 인식에서 나오고 둘이 없는 건 어디서 나오느냐?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둘을 가지고 살면 못 깨달은 범부고 둘이 없는 세계에서 살면 깨달은 분인데, 그 깨달은 분을 십불대인, 보현대인, 그렇게 설명을 해요. 깨달은 분을 십불대인이라고 하고 보현대인이라고 한다. 그러면, 십불대인은 어디에 머무느냐? 그게 이제 정각 세계인데, 바르게 깨달은 세계인데, 정각을 비유로 말하면, 해인이라 그래. 해인(海印), 바다 해(海)자 도장 인(印)자, 해인. 정각은 비유로 말하면 해인이다. 그럼, 해인이 뭐냐? 바다는 물인데 물은 그대로 물이에요. 근데, 그 물에 산도 비추고 달도 비추고 하늘도 비추고 사람도 비추고 다 비춰요. 그것이 흰 종이에 도장 찍은 것처럼 비춘다고 그래가지고, 바다 해(海)자 도장 인(印)자, 해인이라 그래요. 비유인데,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보니까 해인과 같더라. 그럼, 해인이는 뭐냐? 오직 한마음이다! 우주 만물 인생 생애가 오직 한 마음이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아무 반응이 없네. 이게 뭐냐? 이거 종이 아니에요? 그럼, 종이인 거를 누가 아냐? 이게 마음에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물질도 마음에 나타나고 꿈도 마음에 나타나고 생각도 마음에 나타나고 시간도 마음에 나타나고 그래서 마음이 없으면 시간도 없고 물질도 없고 살고 죽는 곳이 어디냐? 전부 생사가 현어 심원(現於心源)이라, 생사는 다 마음 근원에 나타난다. 그래서, 일체가 유심이다.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비유로 하면, 바닷물은 하나인데, 거기에는 산도 있고 달도 있고 모든 것이 있는데, 모든 것이 다 바닷물이라는 거죠. 바닷물이 말라버리면 산도 달도 모든 거 안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 몸이 뭐냐? 이게 마음인 거예요. 그 마음의 바닷물 속에 이 몸이라고 하는 그림자가 지금 보이고 있는데, 그거를 못 깨달은 사람은 그냥 몸으로만 알지 그게 마음인 걸 몰라. 그래서, 바다를 볼 때 바닷물에 뭐가 비치면 그 그림자만 보지 그 그림자가 바닷물인 거를 모르는 거와 똑같다 이거예요. 그래서, 십불대인경은 해인삼매(海印三昧)다. 그러면, 이 해인삼매를 의상 스님이 어떻게 설명했느냐면, 궁증법성(窮證法性)이라, 이 법의 본성, 법성은 각지(覺知) 본심인데, 깨달을 각(覺)자 알 지(知)자, ‘아는 본심’이다. 아는 본심, 각지 본심인데, 그 각지 본심이 바로 모든 법의 본성이다. 그래서, 본심과 이 법성이 똑같다. 그래가지고 모든 법의 본성, 모든 생각의 본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얻었어. 그래서 법성 · 본성을 남김없이 아는 것을 궁증(窮證)이라고 그래요. 궁이라고 하죠. 궁극이라는 궁(窮)자 증득할 증(證)자, 궁증법성을 하니까 이 법성은 무유원적(無有源寂)이라, 시작과 끝이 없어요. 그래서, 시작과 끝은 다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에요. 이거 참, 다 나이 따지고 역사 따지고 이렇게 따지면서 사는 게 우리 생각인데, 이 법성에는 마음의 본성에는 시작과 끝이 없어요. 무유원적, 근원 밑바닥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구경청정(究竟淸淨)하야, 구경에, 언제까지나, 청정이라는 거는 다른 게 없다는 소리예요. 그거 외에 다른 게 없다. 구경청정을 해 가지고 가면 명백(明白)하야, 담담히 그림자도 없고 메아리도 없고 다른 이물질도 없고 그러고 밝고 깨끗해. 명백해. 그래서, 어떻게 되냐? 삼종세간이 오중현연하니, 삼종세간(三鐘世間)이라는 것은, 생각이 이해하는 국토세간, 중생세간, 불보살세간, 이걸 삼종세간이라고 그러는데, 이 불보살과 중생과 국토가 이 한마음에 다 나타나는 거예요. 오중현연이라, 그래서 한 마음은 물과 같고, 나타나는 그림자는 불보살, 또 중생, 국토다. 그래서, 명왈해인(名曰海印)이라, 그렇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로되, ‘해인’이라고 한다. 이게 이제 의상 스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거든요. 그게 뭘 깨달았느냐? 일체가 마음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이거 뭐냐? 이거 뭐예요? 그 마음이라고 지금 말한 게 누구예요? 그래서, 이걸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또 마음이 마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이에요. 이게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이게 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산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죽는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이걸 궁증법성이라고 그래요. 법성을 아주 남김없이 알았다. 그러니까 남김없이 알면 어떻게 되냐? 삼종세간이, 모든 것이, 오중현연이라, 그 법성 한마음속에 다 나타난다. 이 몸이 이게 마음속에 나타난 그림자요. 그래서, 이 마음은 물과 같고 몸은 그 물속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그걸 깨달은 거거든요. 부처님이 깨달은 게 바로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무유공포(無有恐怖), 죽는 것도 마음이고 사는 것도 마음이니까 두려움이 없어요, 무유공포요. 또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걱정 근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마음은 생사가 없고 마음은 시작과 끝이 없으니까. 바닷물이 그게 그림자 없어진다고 그래서 바닷물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그림자가 생겼다 해서 바닷물이 생긴 게 아닐까. 그걸 십불대인경계라고 한다 이거죠. 십불 대인, 그러면 십불은, 부처님만을 중심으로 할 때는 삼불을 말하는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 원만보신 노사나불 ·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삼불을 말하는데, 이제 화엄경에서는 십불을 말해요. 그 십불은 뭐냐 하면 모든 부처님이 다 한마음에서 나왔다 이걸 말해요. 그래서, 한 마음이 일심이 십불이고 십불이 일심이다. 부처님과 중생과 국토가 한마음이다 이거요. 그걸 깨닫는 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이 법문 할 때 이렇게 보이잖아요. 그 마음을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십불을 화엄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냐? 첫 번째 부처님을 성정각불이라고 그래요. 이룰 성(成)자 정각이라는 정각(正覺), 또 불(佛), 성정각불(成正覺佛), 정각을 이룬 부처님, 이렇게 나와요. 그 마지막 부처님을, 따를 수(隨)자 즐거울 락(樂)자 부처 불(佛)자, 수락불(隨樂佛)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정각을 딱 이루고 보니까 공포가 하나도 없고 걱정이 하나도 전도몽상이 하나도 없으니까 인연 따라서 모든 곳에 응해요. 그걸 응화라고 하거든요, 응화(應化). 그리고 즐거움을 줘. 그래서 따라서 즐거워한다. 이게 따를 수(隨)자 즐거울 락(樂)자, 응화수락(應化隨樂)이란 말이에요. 공포와 이게 망상이 없으면 걱정 근심이 없어요. 걱정 근심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짜증 낼 일이 사실 없거든요. 근데, 왜 짜증 내냐? 자기가 걱정되거든. 그러니까 짜증 낼 수밖에 없지. 속으로 막 걱정되는데 짜증 내지 마라? 그건 안 되는 거예요. 짜증 내고 싶으면 짜증 내야 이게 풀리지, 화내지 마 그러면 안 돼요. 화날 때 화내야 그게 풀리지, 안 내면 어떻게 돼? 속이 터진다고 그러잖아요. 속 터지면 어떻게 돼요? 죽잖아. 우리가 말은 다 하고 있어요. 속 터져 그럼 짜증이 폭발해서 몸이 없어지겠다는 소리거든요. 그러니까 성정각불인데, 화엄경에서는 성정각불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면 그런 거예요. 삼세간이, 삼종세간이, 국토세간 · 중생세간 · 불보살세간이 전부 일체 중생의 마음이다. 삼종 세간이 이제 마음이기 때문에 그게 이제 안주 세간이다. 세간에 편안히 머문다. 이게 화엄경이에요. 뭐 이걸 버리고 저걸 취하는 게 아니라 몸도 편안히 몸에서 머물고 물질에서도 편안히 머물고 어디서든지 일체가 마음이라 편안히 머문다. 뭐 버리는 게 없어요, 화엄경은. 그런데 편안히 머문대. 그럼, 세간에 안주하는 거 하고 정각을 이룬 거 하고는 무슨 차이가 있냐? 세간에 안주만 하고 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정각을 이뤄요. 정각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이 세간 만물이 전부 자기 마음인 것을 다 아는데, 거기서 정각을 이루면 뭘 하느냐? 중생 번뇌에 물들지 않아요. 세간에 머물되, 중생이 걱정하는 탐욕에 물들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고 걱정 근심에 물들지 않고 시작과 끝에 물들지 않아. 그래서, 세간에 있으면서 세간 중생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니까 그걸 정각이라고 한다. 이 세간이 다 보이고 접하는데, 그게 마음인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이 세간에 물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깨달은 분들은 처세간을 해요. 세간에 머물러. 처세간(處世間). 세간에 물들지 않으니까 세간을 벗어난다고 그래서 이세간(離世間)이라 그래요. 떠날 이(離) 자. 그러면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 그러면 예를 들면, 아들을 키운다, 아들 귀엽잖아요? 안아주고 이게 처세간이요, 그 아들과 함께 하는 거예요. 근데, 이세간이라는 거는 아들한테 욕심을 내지 않아요.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커줘야 된다, 이거 없어요. 네가 알아서 커라, 인마. 아들한테 집착을 하지 않아. 욕심을 하지 않아. 자기 희망대로 아이가 돼 주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게 이세간이에요. 처세간 이세간, 세간에 머물면서 세간을 떠나. 그걸 또 여래를 선서(善逝)라고 그래요. 착할 선(善)자 갈 서(逝)자, 선서(善逝). 잘 세상에 머무는데 세상에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 잘 세상에서 떠났어. 그러니까 이게 세간에 머물러서 세간을 떠나지 못해서 근심 걱정이 생기고 모든 공포와 집착이 생기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래는 항상 처세간 이세간, 세간에 머물면서, 정각을 이루어가지고 세간을 떠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떠나지 않을 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다 허망하고 무상해서 조금 있으면 다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날 보고 누가 어디 여행 가자고 그러면 가서 봐봐야 금방 없어져 그러고 안 가 안 가 그러고. 어떤 사람은 이래요. 그 사람이 내 이상형이라 그래요. 그래 20년 후에 봐, 지금 모습이 있나. 집착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집착 안 하는 걸 이세간이라 그래요. 세간과 함께하는 걸 처세간이라고 그래요. 오케이. 처세간 이세간 그래서 이게 안주세간성정각이에요. 세간에 안주하면서 정각을 이루었다. 이게 이제 마지막에는 수락불인데, 이게 이 마음이라는 게 주면 줄수록 더 생기고 쓰면 쓸수록 더 생기는 게 이게 마음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이러더라고. 고양이한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고양이한테 줄 사랑이 어디 있어 이래요. 그거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안 주면 없지, 그 주면 줄수록 더 생겨. 그래서 자기 뜻대로 다 거기에 함께 하고 베풀고 즐거워하는 거를 여의(如意)라고 하거든요. 뜻과 같이 한다, 같을 여(如)자, 뜻 의(意)자. 자기가 물 주고 싶으면 물 주는 게 그게 여의예요. 뭐 누가 난초가 물을 달랬나, 자기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 아니에요. 그 자기가 주고 싶어서 주면 그건 처세간이거든요. 근데, 내가 너한테 물을 얼마나 줬는데 너는 어째 은혜를 모르냐, 이렇게 집착하고 원망하면 그거는 번뇌 망상이여. 근데, 물은 주되 즐거워하기만 하고 난초에게 집착하고 원망하지 않는다, 그게 이세간이거든요. 사랑이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사랑하면서 원망하거든. 그 못 깨달은 중생의 번뇌다. 이제 깨달은 불보살은 함께 하면서 집착하지 않아요. 그게 처세간 이세간이다. 그래가지고 항상 즐거워. 이건 이렇게 해서 즐겁고 저건 저렇게 해서 즐겁고 즐거운 것밖에 다른 건 없다. 이게 ‘따라서’ 즐거워한다 이건데, 이 중간에 마음불도 있고 업보불도 있고 전부가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공덕 작용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화엄경은 삼매불도 있는데, 성불이라는 게 삼매를 닦으면 나중에 성불하는 게 아니라 삼매 닦는 그 자체가 부처되는 거다, 그걸 삼매불이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잖아요. 그러니까 시작이 끝이지 시작 없는 끝은 없다. 이게 화엄경이에요. 이것은 이제 앞에서 배운 일중일체(一中一切), 하나 속의 일체고, 일즉다(一卽多), 하나가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시작이 끝이고 지금 행동이 성취고, 그럼 여기서 이제 법문 들은 사람은 다 성불한 거예요. 오케이 박수! 삼매를 닦으면 나중에 성불하는 게 아니라 삼매가 바로 성불이다. 그걸 삼매불이라고 그러고. 심불, 마음으로 보면 전부 마음이고 물질로 보면 전부 물질인데 물질로 보는 것도 마음이에요.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란 말이에요. 죽는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산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고 전부 마음인데, 오직 그걸 모르고 하나하나에 미혹하고 집착할 뿐이다 그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한마음이 부처로 나타나는 걸 그냥 줄여서 ‘십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십불대인경이라, 그래서 이거는 부처님이 성불한 내용인데, 그럼 이 성불한 내용이 중생 세계로 나타나는 것을 보현대인이라고 그래요. 십불대인, 보현대인, 그래서 십불대인은 해인삼매고 보현대인은 보일 시(示) 나타낼 현(現), 시현(示現). 또 넓을 보(普) 몸 신(身), 보신(普身)이라는 것은 온갖 몸 온갖 것을 다 말할 때 보신이라고 그래요. 넓은 몸이라고. 그러면 시현 보신이라, 온갖 몸으로 다 나타내 보인다. 이거를 이제 보현대인이라고 하거든요. 이제 화엄경에서, 보현신상(普賢身相)이 여허공(如虛空)하니, 보현의 몸의 모습이 허공과 같으니, 의진이주(依眞而住)하고 비국토(非國土)라, 진(眞)에 의지해서 머물고 국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진(眞)이라는 건 뭐냐? 일심법성에 머문다 이거예요. 이 우주 만물은 한마음 법의 본성뿐이다. 거기 머물러. 중생은 어디에 머무느냐? 몸에 머물러요. 그래서 만나면 몸 인사요, 건강하시죠? 뭘 건강해? 다 늙었어. 근데, 건강하시죠? 그 말이 또 듣기가 좋아요. 왜 그러냐면 얼굴 보니 이제 죽을 때 다 됐네요 이러면 기분 나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고 기분 나쁜 것도 마음이고 이게 전부 마음 놀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뭔 말을 들어도 그거 모든 게 마음이다. 좋아하는 것도 마음이고 이게 일심삼매예요. 삼매(三昧)라는 건 늘 본다는 거거든요. 늘 마음이라는 걸 본다. 그리고 기분 나쁠 거 없어요. 누가 약속을 안 지켜도 인연 따라서 안 지키는 거, 그 약속 지키는 데서 굉장한 기대를 갖고 굉장한 희망을 가진다면 그게 무너지니까 자기 희망으로 자기가 화나는 거예요. 내가 오래 살 궁리를 딱 하고 있는데 오늘 죽는다 그러면 기분 나쁘죠. 삶과 죽음에 전혀 집착이 없이 처세간 이세간, 세상에 머물되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살았다면 죽는 게 기분 나쁠 게 뭐 있어요? 그 모든 화나는 건 자기 희망이 무너지니까 화난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저녁 굶은 시어머니는 얼굴이 이상하다. 그러니까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 희망이 딱 있었는데 그걸 못 먹으니까 얼굴이 이상할 수밖에 더 있어요. 근데, 그 저녁에 대한 희망이 뭐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좋고 이러면 안 먹어도 뭐 얼굴이 이상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현은 일심에 머문다. 모든 건 한마음이다. 보현은 법성에 머문다. 모든 한마음 법의 본성이다. 거기에 머물러요. 이 몸에 머물러서 이 몸이 안 죽으려고 애를 쓰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겨. 그럼, 어떻게 거기서 자비를 베풀어? 자비는 누가 베푸냐? 깨닫지 못하고 베풀 때는 신심과 원력으로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신심과 원력으로만. 그러니까 신심이 뭐냐? 옛날에 어떤 큰스님이 대중이 맨날 지게를 지고 일을 하고 그러는데 이거 아무리 스님들이라고 하더라도 맨날 일하는 게 뭐가 그리 좋겠어요? 막 짜증도 내고 힘도 들고 그러면 그 스님이 법문하기를, 그 지게 지는 걸 원망하지 마라. 지게를 짐으로 해서 나의 두려움과 나의 업장이 다 녹아지니까 지게가 그게 지게가 아니고 해탈복이다. 해탈복! 그 법문 들으니 또 마음이 실~ 풀려요. 그게 또 마음이에요. 짜증도 내지만 짜증이 풀리는 것도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뭐 힘든 일 할 때 누가 좋아요? 근데, 이 힘든 일이 나의 지혜를 이루고 나의 복덕을 이루고 나의 건강을 이루면 이 힘든 일이 나의 공덕이다. 이 공덕으로 믿고 하면 하는데, 아 이거 왜 이렇게 힘만 들어 그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안 하는 것도 마음이고 하는 것도 마음이니까 어떤 마음을 일으키느냐 그걸 인연이라고 하거든요. 그걸 또 업보라고 하고. 전부 화엄경 십불은 이런 거예요. 물질로 보면 전부 물질이고 마음으로 보면 전부 마음이다! 이렇게 되어가지고 보현은 그 일심법성에 머물고 이 중생세간, 국토세간, 지장극세간, 세간에 머물지 않는다. 이래가지고 근데, 오직 하는 일은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수제중생심소욕(隨諸衆生心所欲)하여, 중생들이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오직 중생을 향해서 나타나는 걸 보현이라고 그래요. 시현보신등일체(示現普身等一切)라, 여러 중생의 몸과 같은 몸을 나타내 보여서, 등일체(等一切), 모든 것과 똑같이 다 나타낸다.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아이가 있을 때는 아이가, 어른이 있을 때는 어른이, 죽음이 있을 때는 죽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게 일체와 똑같이 나타내는 것을 보현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부처님은 일체가 마음인데, 보현은 중생들이 희망하는 대로 나타내는 것을 보현이라 그래요. 뭔 말인지 이게 의심스럽네. 이거는 이해가 이게 좀 어려운 거거든요. 십불은, 십불대인경은, 일체가 마음이다 이거를 안게 십불이고, 보현은 중생의 희망대로 나타나는 것, 나타내는 것을 보현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이 십불대인경과 보현대인경의 차이가 뭐냐? 십불은 내정십불이라고 해가지고, 안으로 일체의 만물이 오직 마음이다, 이걸 딱 얻었어요. 그래서 안으로 일체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얻은 걸 십불이라고 하고 또 외향이 보현이다. 밖으로 향하는 것이 보현이다. 내십불 외보현, 내십불 외보현. 그래가지고 안으로 십불을 증득하면 밖으로는 중생의 희망에 따라서 온갖 몸을 나타내는 보현행으로 나온다. 그래서, 이 십불과 보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안으로는 십불, 밖으로는 보현, 내십불 외보현, 이게 무슨 경계냐 그러면, 이게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경계다. 법성이 원융해서 둘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면 안으로는 십불이 되고 밖으로는 보현이 된다. 여기까지가 1차 성불 교화 과정이에요. 끝!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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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 19일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6-02-19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Ll6r_j6A05g 250219 신중기도 종범스님 법문 주제 : 丙午年 正初 法門 – 新年·佛性 이야기 병오년 정초 법문 – 신년·불성 이야기 안녕하세요. 진관사 병오년 정초 신중기도 입재날에 뭐 하러 왔냐. 새해 법문하러 왔습니다. 새해 맞이 행사를 세시풍속이라고 하는데요. 세시라는 것은 세월이라는 세(歲)자, 시간이라는 시(時) 자, 세시인데 매년 해마다 그때가 되면 언제나 하는 행사를 세시풍속이라 그래요. 그럼 우리나라 정초 세시풍속은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떡국이에요. 떡국으로 차례를 올리고, 떡국으로 밥을 먹고, 떡국으로 손님을 대접하고. 그게 언제부터 이 떡국이 이렇게 보편화됐냐 하면 조선시대 후기쯤이라고 하는데, 그건 뭐 중요하지 않고요. 왜 떡국을 이렇게 새해 맞이 행사로 받아들였을까. 요새 인터넷에도 많은 기록이 올라오고 하던데. 떡국은 색깔이 있고요, 길이가 있고요, 모양이 있어요. 색깔이 희거든요. 그래서 흰 게 그게 뭐냐. 흰 거는 깨끗함을 의미해요. 흰색은 정색(淨色)이다. 깨끗할 정 자. 깨끗해요. 깨끗하다는 거는 일체 다른 잡귀, 이물질, 다른 장애가 없다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깨끗한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이 흰색은 아주 순수해요. 변하질 않아. 그래서 변하지 않는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이 흰색은 초색(初色)이에요. 초색, 처음 나오는 색깔은 다 하얘요. 씨앗을 심어서 이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뿌리가 내리는 거거든요. 뿌리가 제일 먼저 내려요. 그 어떤 뿌리든지 뿌리 색깔은 하얘요. 그거 잘 아셨어요? 뿌리가 하얗다는 거. 파뿌리만 하얀 게 아니라 모든 곡식이 뿌리를 내릴 때는 하얀 색깔로 시작을 해요. 그래서 처음 색깔이다. 그래가지고 이 설날이라고 하는 것은 새날이라는 의미가 있죠. 새날. 또 그다음에 살날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살날은 햇살, 햇살이 밝아오는 날이다.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그리고 또 새롭게 일어난다는 의미로 일어서, 설, 일어서라, 서는 날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을 해요. 그래서 떡국은 첫째 색깔이 희다. 그러고 떡국은 가래떡이 길어요. 그래서 길게 수명을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이거를 썰면 한쪽 한쪽이 동전 같아요. 그래서 이게 한 쪽 먹으면 돈 하나 더 생기고 한쪽 먹으면 돈 하나 더 생기고 떡국 많이 먹을수록 돈이 많이 생겨서 부자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의미를 담아서 세시풍속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잘은 몰라요. 누가 이걸 알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죠. 또 이제 세배가 있는데 세배는 이제 조상님께 세배하는 게 다례잖아요. 그래서 조상님이 우리를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연장자에게 세배인데 이 어려운 세상에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고맙다. 그게 세배예요. 이거 젊은 사람이 볼 때 나이 한 살 더 먹은 게 우습게 보일지 모르는데 그 1년을 산다는 게 쉬운 건 아니에요. 그때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큰 사고 없이 살아주셔서 고맙다 뭐 이런 뜻이 세배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배하는 게 현재 살아계신 분의 수명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나도 그런 수명을 누리겠다고 하는 염원도 있고 그런 것이 세시풍속이 돼서 떡국 끓이고 차례 지내고 손님 대접하고 세배하고 이렇게 된 거예요. 근데 절에 와 보니까 절에서는 어떻게 하냐. 사찰에서도 세배라는 걸 하는데 그걸 세알(歲謁)이라 그래요. 해 세 자, 뵐 알 자, 뵙는다. 옛날 알현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임금님에게 가서 뵙는 거. 세알이라고 그러는데 시방삼세 부처님께, 보살님께, 여러분에게, 또 같이 수행하는 도반들에게 이렇게 세배를 올리는 거예요. 한 자리에서. 그걸 세알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정초에 기도를 하더라고요. 초하룻날부터 통사 같은 경우는 계속해요. 섣달그믐서부터 밤새워서 하는 분도 있어요. 정초 기도를 하는데 기도는 다른 게 아니고, 정초 기도하고 일반 기도하고 다른 건 아니더라고. 축원이 똑같아요. 現當喜福 · 當生淨刹 · 畢竟成佛, 現當壽福配願의 所伸情願현당희복 · 당생정찰 · 필경성불, 현당수복배원의 소신정원日日有 千祥之慶 時時無 百害之災 六根淸淨 四大强健일일유 천상지경 시시무 백해지재 육근청정 사대강건身無一切病苦厄難 心無一切貪戀迷惑 三障頓除 五福增崇신무일체병고액난 심무일체탐련미혹 삼장돈제 오복증숭 불교의 축원은 첫째가 무슨 뭐 축원이든지, 현증수복(現增壽福)이에요. 현세에는 수명과 복덕을 키워가겠습니다. 증(增)이라는 건 키운다, 늘린다 이런 소리거든요. 당생정찰(當生淨刹), 내세에는 극락세계 왕생하겠습니다. 또 필경성불(畢竟成佛), 끝내는 성불하겠습니다. 이게 상단 축원에 보면 전부 이 세 가지 서원으로 구성이 돼 있어요. 그래서 보체 이래요. 보체축원 현증수복(普體祝願 現增福壽)이고, 복우에 이이는게 왕생응당(往生應當)이고, 그리고 연후원(然後願) 이래가지고 항사법계(恒沙法界) 무량불자등(無量佛子等) 구성정거 가야지이다. 이런 건데, 이제 정초 신중 기도에는 현증수복, 현세의 수명과 복덕을 축원하는 중심으로 구성이 돼 있어요. 이게 이제 신중 기도의 의미가 그래요. 그러면 신중 기도할 때 그 축원이 뭐냐. 축원문에 보면 소신정원(所伸情願) 이런 말이 있어요. 정원이라는 거는 뜻 정 자, 원할 원 자,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고, 소신이라는 것은 바 소 자, 펼 신 자인데 소신을 펼쳐서 말씀을 해 올리자면, 이게 이제 소신 정원이에요. 그럼 뭐냐. 아주 평범하고 간절한 소리야. 일일유 천상지경(日日有 千祥之慶)하고, 나날이 천 가지 상서의 복덕이 있고, 시시무 백해지재(時時無百害之災)라. 때때로는 100가지 해로운 재앙이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말이 그렇지 재앙이 하나도 없는 날이 어디 있어요? 근데 이렇게 염원을 하는 거예요. 육근이 청정(六根淸淨)하고 사대가 강건(四大强健)하야 육근은 우리 몸이거든요. 안이비설신의 육군이 청정하고, 사대도 우리 몸이에요.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해서 신무일체병고액난(身無一切病苦厄難)하고, 몸에는 병고와 액난이 일체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심무일체탐연미혹(心無一切貪戀迷惑)하야 마음에는 일체 탐연과 미혹. 탐연이라는 건 뭐냐, 탐내고 매달리는 건데, 이게 아주 무서운 병인데, 자기 능력에 비해서 과한 걸 하고자 하는 걸 탐이라고 그래요. 뭐 80 노인이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든지, 이건 탐(貪)이에요. 그리고 젊은 사람처럼 안 된다고 계속 잠도 안 자고 거기에 매달린다고, 이건 연(戀)이여. 미련을 가지고 매달린다는 소리야. 옛날에는 자기 분수를 알아야 행복하다고 그래서 자기 분수에 어긋나는 게 탐연이거든요. 탐내고 매달리고, 이게 노인이 되면요. 젊은 사람 따라가려고 하면 안 돼요. 젊은 사람이 하지 못하는 걸 가지고 딱 하니 주인 노릇을 해야 돼요. 젊은 사람이 복싱한다고 같이 복싱 대결했다가는 안 돼요.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딱 만족을 얻어야 그게 탐연미혹이 없는 거예요. 마음에는 탐연과 미혹이 일체 없어져서 삼장을 돈제하고, 삼장이라고 하는 거는 혹,업,고 삼장이라고 그러는데 번뇌장, 업장, 고통장, 이게 이제 번뇌의 장애가 없어지고, 그 쓸데없는 죄업을 지은 이런 장애가 없어지고, 또 그 번뇌와 죄업으로 그 고통을 느끼는 그런 고통장이 없어져서, 혹 업고 삼장이 그냥 일시에 소멸하고, 그게 삼장돈제예요. 또 오복을 증숭하야지다. 이제 오복은 불교 들어오기 전부터 동아시아 서경에 나오는 건데 간단해요. 수복, 부복, 또 강녕, 강녕복, 유호덕, 호덕복, 고종명보.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거예요. 요새 오래 산다고 그러는데 이 건강이 안 좋아서 80 넘으면 빨리 죽어야 된다 이런 말이 있거든요. 근데 그런 말 듣지 말아요. 그 환갑 넘기기가 어려웠던 서산스님도 85세를 살았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100세 이상 산 거예요. 근데 문제는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 건강이라는 게 딴 게 아니에요. 자기 몸을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거, 이거예요. 그래서 이게 숨만 쉬고 산다고 그게 오래 산 게 아니고 자기 몸을 자기가 움직일 수 있게 오래 사는 거, 그게 중요해요. 자기 생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이렇게 이제 수명이라는 게 같은 100년을 살아도 건강하게 사냐, 이제 총명이 있고 또 몸을 움직이는 기력이 있고, 총명도 없고 기력도 없으면 그건 이미 산 게 아니에요. 총명이라는 게 뭐예요? 이게 귀로 듣는 게 총이고 눈으로 보는 게 명이거든요. 그래서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기력이라는 게 뭐예요? 앉았다 일어나고 걸음 걷고 움직이고, 이게 기력이잖아요. 이렇게 오래 사는 게 그게 건강이에요. 그게 오래 사는 거예요. 수(壽), 부(富), 부자, 부자 되는 거 다 좋아하잖아요. 근데 부자가 이게 뭐냐. 자기가 쓸 만큼 있으면 그게 부자예요. 자기가 쓸 만큼 있으면. 강녕(康寧), 이제 신체가 강녕한 거, 건강하고 안녕하고. 유호덕(裕好德)이라, 좋은 덕이 넉넉하다. 성격이 좋아야 돼요. 이게 호덕이에요. 유호덕. 넉넉한 유 자가 있어요. 좋을 호 자, 덕이라는 덕 자 이 성격 좋은 게 이게 오복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 오복을 알고 보면 다 내가 만들 수 있어요. 수명도 내가 만들 수 있고, 또 부자도 내가 만들 수 있고, 강령도 내가 만들 수 있고, 유호덕, 이 덕도 성격인데, 성격도 내가 만들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복이라는 건 내가 짓는 거예요. 그다음에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게 있는데 죽을 고 자인데, 죽을 때는 자기 명을 다한다. 옛날에는 무슨 사고가 많았냐면 호랑이한테 물려가는 사고가 많았거든요. 요즘으로 말하면 교통사고요. 그래서 자기 명을 스스로 다 살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하고 여러 가지 고통 액사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 거 없는 걸 보게 하라는 뜻이요. 자기 병을 끝까지, 죽을 때 명을 명으로 마친다. 그건 불교 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염원했던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도 삼장은 돈제하고, 몰록 다 없어지고, 오복은 증숭하기를 원합니다. 더 불어나고 더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게 기도하는 축원문이에요. 그건 정초 기도나 일상 기도나 다를 바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 복을 왜 이루어야 하는가. 복이 왜 필요하죠? 복을 이루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에요. 그럼 복이 왜 필요하냐? 행복하기 위해서 복이 필요한 거예요. 행복. 그래서 오복이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목적이에요. 오복을 갖췄어도 행복하지 않으면 그게 의미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 중에는 오복을 이루기 전에 행복부터 먼저 이룬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오복 없어도 괜찮잖아요.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돈 많이 버는 데만 열중하지 행복은 온데간데없어요.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단 말이여. 그럼 그게 뭐 하는 짓이여. 하루도 행복해 보지 못하고 가는데. 그런 거를 일장몽객이다. 한바탕 꿈꾸는 나그네다. 일장몽객이에요. 일생이라는 게 그냥 한바탕이요. 꿈을 꿨다. 재산을 모으는 꿈, 뭐 구하다가 죽는 게 구하는 꿈을 꿨다. 그런데 임종시에 보니까 자기가 평소에 구했던 게 아무 소용이 없어. 숨 한 번 딱 지는 순간에 자기가 구해놓은 거,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꿈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한바탕 꿈꾸는 나그네였다. 그거를 안 거예요. 어떤 사람은 알아서 복을 구하지 말고 바로 행복하자. 아주 이게 생뚱맞게 산 사람들인데, 보통 사람 다 복을 구하는데, 이 사람은 행복해 버렸어. 이제 그게 기록에 나오는 사례가 있는데 삼국사기 50권인데, 제48권에 신라의 백결선생이라는 기록이 나와요. 백결, 백결이라는 게 뭐냐 하면. 좋아요. 저런 소리도 다 좋아요. 백결이라는 게 100이라는 백 자하고, 이 옷 기울 결 자, 옷을 기워 입는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옷이 하도 없어서 옷 한 벌을 계속 기워 입었어요. 그래서 한없이 기워 입었다. 여러 번 기워 입었다라는 뜻으로 백결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계속 기워서 입은 옷을 입고 나가면 그 메추리새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 그래서 이거를 현순(懸鶉)이라고 메추리 새 순 자가 있거든요. 매달릴 현 자. 이러고 입고 나가면 새들이 막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여, 하도 옷이 없어서. 그런데 뭘 했냐 하면 평생 거문고를 가지고 살았는데 백결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전부 거문고로 표현했다고 그래요. 그걸로 그냥 평생 살았어. 그런데 하루는 섣달그믐날이 됐는데 그분의 부인이 혼잣말로 얘기를 했어요. 다른 집에는 다 설을 쇠기 위해서, 옛날에는 이제 기계가 없기 때문에 절구방아를 찧어서 곡식을 만들었거든요. 그 곡식을 찧는 절구방아 소리가 나는데 우리 집에는 찧을 곡식이 없다, 이렇게 한숨을 짓고 있었어요. 그걸 백결선생이 들었어. 듣고 나서 아주 엉뚱한 소리를 했는데 뭔 소리를 했느냐. 사생은 유명이요(死生有命), 죽고 사는 건 타고난 병에 있고, 구하지 않는 거예요. 오래 살려고도 안 하고 빨리 죽으려고도 안 하고 그냥 명에 맡긴다. 명대로 산다. 이런 소리 들으면 천불 나잖아요. 실제로 이제 부인이 이런 분하고 같이 사니까 얼마나 천불이 났겠어. 근데 이렇게 구하지 말고 바로 행복한 사람하고, 구해서 마음을 채우는 사람하고 전혀 틀린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은 사생은 유명이라 죽고 사는 건 타고난 명에 있다. 또 그다음에 부귀는 재천이라(富貴在天), 부하고 귀한 것은 저 자연, 하늘에 있다. 하늘의 운수에 있다 이거죠. 부귀는 재천하고, 사생은 유명이라 명에 있다. 그다음에 기래야불가거(其來也不可拒)하고, 그 장수라든지 부귀가 올 때 불가거라 그것을 막을 수가 없고, 장수와 부위가 갈 때, 기왕야 불가추(其往也不可追)라, 가서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뭐 오래 살든지 부자로 살든지 귀하게 살든지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놔두라는 거예요. 그냥 언제나 만족하고 행복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 복을 구했는데 평생 행복하지 않았다. 일장몽객이 됐다. 한바탕 꿈꾸는 사람이 됐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바로 행복해 버려야 돼. 복 구하지 말고 바로.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까요. 실제로 그래 가지고 자기는 그러하지만 이 자기 부인이 너무 방아 찍을 곡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안타깝게 여기니까 그 마음을 위로한다고 거문고로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를 해 줬어요. 뭐 뭐 이렇게 연주했겠지, 따따. 그러니까 그 부인 입장에서 곡식은 못 벌어 오지만 그 마음이라도 거문고로 위로를 해주니 멋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위로가 됐을 거 아니에요. 그건 외면도 하지 않고, 그게 세상에 전해질 때 그 방아타령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한자로는 방아 찧을 대(碓) 자가 있고 음악 악(樂) 자가 있는데 대악(碓樂)이라고 그러는데, 어려운 말로. 우리 말로 백결선생의 방아타령이다. 그거는 사람은 다 행복하려고 돈 벌다가 행복은 온데간데없고 죽어버리는데, 그게 일장꿈꾸는 나그네가 됐는데, 이 사람은 돈 벌기 전에 행복해 버렸어. 근데 옆에서 돈 없이 행복한 걸 몰라서 괴로워하니까 그걸 위로하기 위해서 방아 찧는 소리를 거문고로 내줬다. 그게 이제 방아타령이다. 이런 인생관도 있어요. 그런데 불교는 그거보다 더 다른 게 있는데. 高峯分歲는 雖則百孔千瘡이나 也要將無作有라 細切鎭頭雲하고고봉분세는 수즉백공천창이나 야요장무작유라 세절령두운하고薄批潭底月하야 尖新堆餠하고 出格安排하니 要使 簡簡로박비담저월하야 첨신퇴병하고 출격안배하니 요사 간간로 盈腸塞腹하고 人人으로 永絶飢虛니라 (“禪要”, 除夜小參)영장색복하고 인인으로 영절기허니라 (“선요”, 제야소참) 강원에서 배우는 선요(禪要)라는 책이 있는데요. 선에 대한 본문인데 거기에 제야소참(除夜小參)이라는 게 있어. 제야소참. 제야라는 건 섣달그믐인데 소참이라는 건 간단한 본문을 소참이라고 그래요. 적을 소 자, 참여할 참 자. 제야 소참에 무슨 본문이 나오냐 하면, 그 선요 저자가 고봉 스님인데, 고봉의 분세(分歲)는, 제야를 분세라고도 해요. 나눌 분 자, 해 세 자. 고봉의 섣달그믐은 수즉백공천창(雖則百孔千瘡)이나, 백공천창이라는 구멍이 백 가지고 창난 게 천 가지다. 그래, 천 종류다. 그래가지고 그냥 구멍이 다 뚫려서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그런 걸 백공천창이라고 그래요. 가난 중에 최대의 가난을 백공천창이라고 그래요. 가난하고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으나 야요장무작유(也要將無作有)라. 내가 아무것도 없는 걸 가지고, 장무라는 거는 없는 걸 가지고, 작유라는 거는 많은, 있는 것을 만들고자 한다. 이게 불교의 새해맞이 지혜법이에요. 없는 걸 가지고 있는 걸 만들고자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하냐? 세절령두운(細切嶺頭雲)하고. 영두운이라는 건 저 산마루 위에서 구름이 있는데 산마루에 올라가서 구름을 세절, 작을 세 자, 끊을 절 자, 조금 끊어와요. 사람 미치겠네. 이게 불교 새해 맞이 아주 미쳐요. 저기 북한산 이제 올라가서 구름을 많이도 안 끊어오고 세절이라, 가늘 세 자, 끊을 절 자니까 조금 떼어와요. 또 박비담저월(薄批潭底月)하야. 담저월이라는 건 연못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연못 속에 달이 들어 있어. 그걸 연못 밑바닥에 있는 달이다, 그래가지고 연못 담, 밑 저, 달 월, 담저월이라 그래요. 이제 허공에 있는 건 허공 월이고, 허공은 높으니까 연못에 이렇게 들어가서 박비(薄批)라는 거는 아주 얇을 박자, 역시 베일 비 자인데, 조그만 베어와. 연못 속에 가서 달 조금 베어오고, 산꼭대기 올라가서 구름 조금 떼다가 담저월하야 어떻게 하냐. 첨신 퇴병(尖新堆餠)하고. 첨신이라는 건 수북이 아름답게 그릇에 담아. 그걸 가지고 그릇에 하여서 어떻게 하냐. 출격안배(出格安排)하니. 격식이 없이 잘 차려. 상을 잘, 격식 없이 차려. 출격을 안배하니. 그걸 가지고 뭐 하자는 거냐. 요사 간간(要使 簡簡)으로,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영장색복(盈腸塞腹)하고. 영장이라는 거는 천자문에 보면 찰 영, 기울 측 하는 영 자가 있거든요. 채운다는 소리에요. 창자를. 일체 중생의 속을 다 채워 허기짐이 없이. 색복이라는 건 역시 가득하게 만들 색 자하고 배 복 자인데, 배를 가득하게 만들어. 그 자기가 차려놓은 걸 가지고. 또 인인(人人)으로,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뭐 어떻게 하자는 거냐. 영절기허(永絶飢虛)라. 배고프고 허기진 것을 영원히 없게 하겠다. 이게 도로서 신년을 맞는 행사예요. 도로서 신년을 맞는 행사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영절기허라는 게 일체 중생은 가져도 가져도 허기와 이 굶주림이 계속 있어서 갖는 게 소용이 없어요. 행복하질 않아요.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려고 그러고, 먹어도 먹어도 더 먹으려고 그러고, 채워도 채워도 더 채우려고 그래요. 이게 굶주리고 허기짐 때문에 그렇거든요. 근데 이거를 기허를 영원히 없앤다. 영절이라, 끊을 절 자인데 영원히 끊어지게 한다. 그래서 이 도라는 건 한 번 보면 기허가 다 없어지는 거예요. 굶주리고 허기짐이 다 없어져. 그래서 구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구할 게 없는 게 이게 도를 얻는 거거든요. 이 도라는 것을 이제 다른 말로 하면 일념, 한 생각, 또 불성, 부처의 본성. 일념불성을 한 번 얻게 되면 배가 그득하고 창자가 가득해서 아무것도 구할 생각이 없어요.근데 이제 세속적으로 부모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부모의 아주 본능적인 착각인데, 자식한테 많이 주면 자식이 만족할 줄 알아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받은 놈일수록 계속 하늘만큼 받아도 만족 못 해, 더 달라고 그래요. 아이 이제 언성이 높아지네. 안 받아본 놈은 안 달라고 그래요. 받아본 놈이 계속 더 달라고 그래서 부모의 목숨이 끊어져야 그때서 그만둬요. 그러니까 주어서는 자식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가 없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 거예요. 이거를 본능이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구생번뇌(俱生煩惱)라고 그러는데, 함께 구, 날 생, 낳을 때부터 그런 번뇌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게 구생번뇌예요. 나면서부터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밖에서 얻어서는 뭘 얻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자기 한 생각, 자기 불성을 찾았을 때 그때서야 이제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고 언제나 굶주림이 없고 허기짐이 없다. 이걸로써 나는 신년을 맞이한다. 이게 이제 그 선요의 제야소참에 나오는 신년 맞이 법문이에요. 그거 참 희한하잖아요. 산마루에 올라가서 구름 조금 떼고, 연못 속에 가서 달빛 조금 떼서, 수북이 잘 형식 없이 잘 차려서, 수북이 담아가지고 형식 없이 잘 차려서, 사람 사람으로 배가 가득하게 하고 허기짐이 영원히 끊어지게 하겠다. 야 멋있어. 박수 한 번 쳐요. 無處無時 一念卽是 念無自相 空寂靈知무처무시 일념즉시 념무자상 공적령지無障無礙 圓滿具足 同時相應 隨須卽得무장무애 원만구족 동시상응 수수즉득 그게 이제 마음을 깨달아서 행복한 사람. 중생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려고 하다가 못하고 가고, 저 백결선생 같은 사람은 모든 건 하늘에 맡기고 빨리 죽어도 슬프지 않고 오래 살아도 기쁘지 않고 자기 분수대로 언제나 행복하게 살다 간다. 이런 걸로 이제 행복을 느끼고 불교는 한 생각 불성을 더 깨달아서 영원히 모자람이 없이 사는 것이 내가 신년을 맞이하는 거다. 이런 것도 있어요. 그래서 이 한 생각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선지식들이 다 가르치는 건데, 한 생각뿐이다. 한 생각을 알고 나면 무처무시(無處無時)다. 처소도 없고 시간도 없다. 한 생각은 처소가 없어요. 어떤 장소에 가도 거기에 한 생각이 있어. 이 물건을 봐도 이 물건만 보고 집착하는 거는 이제 한 생각을 모르는 범부의 행위이고, 이게 한 생각이에요. 이걸 보는 게 한 생각이에요. 이걸 좋아하는 게 한 생각이야. 이걸 싫어하는 게 한 생각이야. 죽음을 인식하는 것도 한 생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한 생각이고, 한 생각뿐이다. 이 말이에요. 무처무시라고 처소도 없고 시간도 없다. 그럼 뭐냐. 일념이 즉시(一念卽是)라. 한 생각이 곧 처소고 곧 시간이다. 뭔 소린지 참 기가 막히네요. 저 산을 봐도 저게 한 생각이라고. 나이를 계산하는 것도 한 생각이라고. 늙음을 인식하는 것도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없으면 늙음이 존재하질 않아요. 그래가지고 념무자상(念無自相)이라. 한 생각은 정해진 자기 모습이 없어요. 자상이 없어. 그래서 무량겁도 한 생각에 들어가고, 삼천대천세계도 한 생각에 들어가고, 이게 자상이 없기때문에 그래요. 그래가지고 공적영지(空寂靈知)라. 아무것도 자상이 없어서 공적한데, 이게 말이에요. 신령 영 자, 알 지 자, 신령스럽게 아는 신통이 있어요. 그걸 공적영지라고 그래요. 이렇게 가르쳐요. 한 생각은 자체 모양이 없어서 공적한데, 공적하기 때문에 무량겁도 들어갈 수 있고, 삼천대천세계도 들어갈 수 있고, 일 찰나도 들어가고, 100년도 들어가고, 일체 중생이 다 들어간단 말이에요. 공적해서. 근데 그 공적한 속에 신령스럽게 아는 놈이 있어요. 그래서 100년을 아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고, 천 년을 아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고, 뭐 요새 화성 탐지한다고 난리인데 그 화성,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게 한 생각이 공적영지라고 그래. 그래서 그 공적영지를 하나 더 자기가 밝혀놓으면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굶주리는 거 하나도 없고, 허기진 거 절대 없다. 구할 거 전혀 없다. 바로 일이 들어간단 말이야. 근데 사람들이 잘 안 해요. 왜냐하면 믿을 수가 없거든. 정말로 그럴까.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 어떤 사람이 잘못되면 어쩌는데요 이래. 해보지도 않고 잘못될 걱정하더라고. 그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자동차 타지도 않고 사고부터 걱정해서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하다가 때로는 실성한 사람도 있거든요. 그거는 자동차 운전하다가 사고 나는 수도 있다는 얘기여. 근데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공부 잘하면 절대 잘못될 수가 없어요. 그거 왜 그러냐면 나한테 있는 거 내가 갖는 거니까. 다른 데 가서 찾는 게 아니고 나한테 있는 것을 내가 그냥 갖는 거여. 찾을 것도 없고 그냥 갖는 거예요. 내한테 있는 건 내가 갖는데 그 무슨 잘못될 일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이 한 생각을 역대 선지식들이 종합적으로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면은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다. 아무 걸리는 게 없다는 거예요. 이 일념 불성은 무장무애하고 또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원만이 다 갖춰져 있어. 이 일념불성에. 무장무애하고 원만구족하고. 또 동시상응이라(同時相應). 동시에 다 함께 만나. 천 년 전 걸 생각하면 천년과 만나고, 만 년 전 걸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만 년과 만나고, 하나를 생각하면 하나와 만나고, 열을 생각하면 열을 만나고, 무량 억만 개를 생각하면 무량 억만 개를 그냥 만나. 이걸 동시상응이라고 그래요. 서로 상 자, 응할 응 자. 동시상응하여 수수즉득(隨須卽得)이라. 따를 수, 구할 수, 구함을 따라서 즉득, 곧 즉, 얻을 득, 바로 얻는다. 내가 100년을 구한다하면 100년 바로 되고, 만년을 구한다면 만년 바로 되고, 내가 저 화성을 원한다면 화성 바로 나타나고, 극락세계를 원한다, 극락세계가 바로 나타나고. 이걸 수수즉득이라고. 이거 말 참 어렵다. 이거 의상 스님이 쓰는 말인데, 수수, 필수적으로 구함을 따라서 즉시 얻는다. 즉득. 이게 한 생각이거든요. 근데 이게 어려우냐. 어려운 게 아니에요. 왜 안 해서 모르는 거예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