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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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월24일 음력 1월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1-24
계묘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계묘년 정월 초3일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소원을 이루는 행위이다. 소원을 이루는 행위가 기도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불교에서 소원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교에요. 그래서 불교의 소원은 깨달음이죠. 깨달음. 깨달음이란 있는 걸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왜 깨달음을 얘기하는가. 인간의 모든 문제가 깨닫지 못한 데서 생겼다, 이렇게 가르치고, 깨달음을 이루는 동시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근데 그럼 깨달음을 어떻게 이루느냐. 범부라고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가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 그걸 어려운 말로 보리행이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보리는 깨달음이고, 행은 행위고, 범부보리행(凡夫菩提行). 이제 보살들이 깨달아가는 행위가 있어요. 그걸 보살보리행(菩薩菩提行). 그리고 이미 깨달음을 이루신 제불, 과거, 현재, 미래, 삼세제불께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를 하는가. 그걸 이제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 凡夫菩提行 범부보리행念佛行 : 염불행 :六法供養 獻供念佛 隨時禮敬 禮敬念佛 육법공양 헌공염불 수시예경 예경염불如來名號 稱名念佛 輕典讀誦 持誦念佛여래명호 칭명염불 경전독송 지송염불 禮懺行 예참행 ①罪業懺悔죄업참회 :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종신두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②六情懺悔육정참회 : 内立六情 依而生識 外作六塵 執爲實有 내립육정 의이생식 외작육진 집위식유 不知皆是 自心所作 起諸煩惱 自以纏縛 부지개시 자심소작 기제번뇌 자이전박 (大乘六情懺悔,元曉撰)(대승육전참회, 원효찬) 誓願行 : 普賢菩薩 十種大願(普賢行願品)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범부가 이 깨달음을 이루는 기도 행위는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거든요, 범부들은. 작법(作法), 법을 만들어요. 지을 작자, 법 법자. 또 법을 세우는 형식을 가지고 한단 말이에요. 이걸 의식이라 그래요. 법 세우는 형식. 그래서 절을 어떻게 한다, 공양을 어떻게 올린다, 이게 전부 작법 의식이거든요. 이게 범부들이 하는 기도 행위예요. 그러면 범부들이 하는 첫 번째 기도가 염불행(念佛行) 기도인데요. 염불. 생각할 염자, 부처님 불자. 부처님을 생각하는 행위의 기도인데, 왜 부처님을 생각하는가.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티끌 세간 경계예요. 육진(六震) 세간(世間)이라고 그러는데, 티끌 세간 경계, 눈에 보이는 티끌, 귀에 들리는 티끌 이런 거, 몸에 부딪히는 티끌, 티끌 경계만, 티끌 경계만, 꿈에서도 이걸 어려운 말로 진경(塵境)이라고 그러거든요. 티끌 진짜, 경계 경자. 이 세간 진경만, 진경만 생각하는 게 범부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모든 기억 속에, 생각 속에 남아 있는 게 사람 생각, 물질 생각, 자기 몸 생각, 과거 생각, 미래 생각, 그것뿐이에요. 인간이란 다 똑같아요. 말을 안 해도 그거 생각하고, 말을 해도 사람 생각, 물질 생각, 몸 생각, 과거 생각, 현재 생각, 미래 생각, 삼세 육진, 이거 빼면 없어요. 삼세 육진 빼면. 근데 그 삼세 육진이라는 게 전부 다 허망하고 무상해서 그냥 흘러가 버려요. 그래서 아무리 내 몸이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이거 얼마 못 가거든요. 그러면 몸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게 공허해요. 그거 몸 만든다고 요새 많이들 노력하는데, 그 만든 몸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사라져 갈 때 공허해요. 사람을 얻는다고 많이 노력하는데, 사람 얻는 것도 내 몸이 약해지면 사람도 다 떠나가요. 사람을 많이 얻은 것도 공허해. 공허라는 건 텅 비었다 이 말이죠. 물질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데 소유하던 내가 사라지면 내가 소유한 물질도 다 사라져요. 공허해요. 그런데 범부들은 그걸 모르고 이 삼세 육진만 추구할 수도 있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구하던 것이 그거니까 안 구할 수가 없어요. 모르고 하고, 알면서 구하다가 마지막에 공허하다, 가슴이 텅 비었다. 이게 나중에는 이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옛날 말로 ‘때는 늦으리.’ 때가 늦었다는 거에요, 어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부처님이 제시한 게, <뭘 구해도 구하는 건 공하다. 깨달아라. 깨닫는 것만이 진실하다.> 그래서 삼세 육진을 구하는 거와 전혀 다른 것이 염불이에요.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거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몸 생각, 사람 생각, 물질 생각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거든요. 그럼 염불을 어떻게 하느냐. 작법 의식 염불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염불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공양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육법공양(六法供養) 헌공염불(獻供念佛), 공양을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공양물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염불이에요. 공양물을 잘 씻어서 불단에 올리는 것 자체가 다 염불이고 그렇거든요. 또 수시예경(隨時禮敬) 예경염불(禮敬念佛), 불전에 가서 수시로 때에 따라서 절을 딱 올리면 절하는 게 그게 염불이에요. 그래서 공양물도 올리고 절도 하고 여래명호(如來名號) 칭명염불(稱名念佛), 여래의 여러 명호를, 이름을 칭명한다, 부를 칭자. 이름 명자. 자꾸 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칭명염불이라고. 경전독송(輕典讀誦) 지송염불(持誦念佛).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잘 독송하면 그 경전독송 하나하나가 전부 염불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질 지자, 외울 송자, 항상 간직해서 외운다고 지송이라고 하거든요. 소지한다는 지자가 있어요. 외운다고 하는 송자. 지송염불.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혼자 해도 되지만 여럿이 할 때 작법 의식이 깊어지고 강해져요. 여럿이 하게 되면.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건 그게 아주 재미있어요. 누가 옆에 있으면 자기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성격이 있어요. 근데 혼자 있으면 편한 모습을 보여요. 인간이란 묘한 동물이에요. 그래서 혼자 들어가 있으면, ‘뻔하구나. 저 편케 있으라고 하는구나.’ 틀림없어요. 혼자 있으면 이제 편하게 지내려고 그러고, 옆에 누가 있으면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아주 본능적인 그런 습관이 나와요.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같은 동성끼리 같이 있는 거보다 남녀 이성이 같이 있으면 더 강한 걸 보이려고 더 애를 써요. 그거 참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남녀가 한 법당에서 동참을 해서, 대중을 형성해가지고, 이렇게 경전을 읽고, 공양을 올리고, 예경을 올리고 하면, 나에게 있던 그동안 그 감춰져 있던 능력들이 막 솟아나요. 그리고 지금까지 구했던 삼세 육진을 쫓아다니던 그런 습관들이 사라져요. 그래서 이거를 어려운 말로 <죄업은 소멸하고 선업은 증장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죄업이라는 건 나에게 괴로움이 되는 삼세 육진을 구하던 그런 것이 다 죄업이에요. 그래서 죄업은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해서 소멸을 하고, 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선업, 좋은 업은 증장을 한다. 더욱더 성장한다 이 말이죠, 증장이라는 말은. 그거를 이제 기도라고 그래요. 그리고 예참(禮懺)기도가 있는데,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참회를 하는 걸 예참이라고 그러는데, 예참은 죄업을 참회한다, 첫 번째가. 천수경에 보면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지금 옛적부터 지금까지 지은 악업인데, 악업이라는 건 뭐냐. 첫째는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는 게 악업이에요. 자해해타. 근데 나타날 때는 남 해치는 걸로 나타나요. 그런데 해타를 하면 그게 자해가 돼요. 자기를 해치는 게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자기가 이로와요. 지금까지 많은 복덕과 이익을 성취한 사람들은 다 남을 해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타(利他) 를 하면 자리(自利)가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나를 이롭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들은 우선 탐욕이 앞서니까 남 해치는 일을 하게 돼요. 또 탐하는 대로 안 되면 분노가 일어나요. 그 탐욕과 분노가 전부 자기 어리석음에서 나왔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이거 알려면 굉장히 마음공부를 깊게 해야 돼요.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났다, 이렇게 알고 있거든요. 근데 진실은 내가 저 사람에게 욕심을 부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난데, 자식이 청소를 안 하고 산다고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가 있어요. 아니, 자식이 청소를 안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청소하고 살기를 바라는 내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청소 안 하고 사는 자식은 편안하고 좋은데, 왜 어머니가 난리예요. 남편이 내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난다. 남편이 왜 부인 말을 들어야 돼요. 남편은 남편, 나는 나, 그게 현실이잖아요. 남편이 자기 멋대로 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남편은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자기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자기 욕심은 어리석어서 욕심을 내는 거고 이게 탐진치거든요. 이거 알려고 마음공부를 조용히 해보면, ‘나의 분노가 나의 욕심이구나, 나의 욕심은 나의 어리석음이구나.’ 이걸 알게 돼요. 그래서 그런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죄업들을 전부 참회한다. 이것은 다 신구의 삼업에서 나왔다. 생각과 말과 행동, 의가 왜 중요하냐면 범부들은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생각이 없으면 말할 수도 없고요. 생각이 없으면 뭐를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저거 딱 보면 저것들은 생각이 일어나야 그걸 알지, 생각이 안 일어나면 몰라요. 그래서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게 나의 말도 건강하게 하는 거고, 나의 행동도 건강하게 하는 거라, 생각이 없으면 전혀 말도 못하고 행동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숨도 쉬고 맥박도 뛰는데 의식이 정지가 되면 식물인간이라고 그래요. 사람이라고 안 해요. 사람은 생각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일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생각은 사람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거지요. 그래서 신구의 삼업이니까,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차별해서 생각을 좋게 하고, 말을 좋게 하고, 행동을 좋게 하고, 이게 이제 죄업 참회거든요. 그다음에 육정참회(六情懺悔)라는 게 있어요. 제 생각인데,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 하나하나 감정이 실려가지고 육근이 감정이 거기에 묻어서 감정대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저게 좋은 게 아닌데, 자기 감정으로 좋게 봐요. 이 자기 감정에 속아서 고생하는 거 참 많아요. 쉬운 말로는 이제 콩깍지 씌었다 이러는데, 그 콩깍지라는 게 자기 감정의 콩깍지거든요. 콩깍지만 씌운 게 아니에요. 자기 감정에 속아서 분노를 해요. 분노한 건 말이 없더라고요. 뭔 딱지에 분노한 거. 좋게 씌운 건 콩깍지고, 나쁜 감정이 눈을 가린 건 뭐라 그러죠? 충청도 말로는 소가지 피운다 이랬는데. 소가지. 자기 소가지에 속는 거예요. 막 분노가 일어나는 거를 속인데, 충정도 사람들은 거기다 가지라는 말을 쓰더라고, 싸가지, 소가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지라는 게 이런 게 이게 이제 싹 아자, 가지 지자, 처음에 일어나는 걸 말하거든요. 잘 안 보이지만 일어나는 거. 자기 분노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자기 탐애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그런 거는 다 참회하는 게 그게 육정참회에요. 그런데 이 원효 선사가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는 저술을 지었는데, 아주 중요한 저술이에요. 그래서 이게 좋고 나쁜 게 개시자심소작(皆是自心所作)이라, 다 자기 마음이 지은 바다. 그걸 모른다라는 거예요, 범부들은. 좋고 나쁜 거, 이게 슬프고 괴로운 게, 전부 자기 마음이 지은 거라는 거에요. 자심소작이라는 거에요, 자심소작. 죽음이라는 게 과연 나쁜 거냐. 또 태어난다는 게 좋은 거냐. 그거 아니에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게 과연 좋은 거냐.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빨리 죽는 게 좋은 거냐. 그것도 아니에요. 전부가 좋고 나쁘게 생각하는 건 자심소작이에요. 자심소작. 그래서 그 자심소작인 걸 모르고 기제에 번뇌(起諸煩惱)하야, 모든 번뇌를 일으켜서, 번뇌는 망상이거든요. 쓸데없는 생각. 번뇌 망상.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서, 자이전박(自以纏縛)이라, 스스로 묶일 전자가 있고, 묶길 박자가 있는데, 스스로 자기 생각에, 자기 어리석음에 스스로 묶인다 이거예요. 자승자박이라는 말은 있어요. 자기 줄에 자기가 묶인다. 그럼 자기 줄이 뭐냐. 자기 어리석음이다라고 하는 거죠. 자기감정. 그래서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감정을 편안하게 맑히면 되요. 내 문제는 내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기 문제예요. 남편 문제가 아니고, 아내 문제가 아니고, 자식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야, 내 문제. 내가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하면, ‘너는 너, 나는 나, 내가 당신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당신이 내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어쩌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 당신은, 당신은 나였나.’ 죽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죽음이 없어요. 또 삶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삶이 없어요. 이게 지혜거든요. 근데 자기 감정이 삶을 보고 죽음을 봐서 거기에 어떤 건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니까, 이게 전부 자기 감정이 자기 눈을 가려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내 감정에 속는 이런 감정을 참회합니다. 그리고 서원행(誓願行) 기도가 있어요. 서원행. 원을 크게 세우고 원을 깊게 세우면 그 원이 나를 인도해요. 나의 서원이 나를 인도한다. 이게 원이 없으면 내가 갈 방향이 없어서 뭐 제대로 못해요. 그래서 내가 의지를 딱 가지고 자기 의지가 정해지면, 의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데, 언제 이루어지냐. 언제든지 이루어져요. 이렇게 의지가 없으면 이루어질 게 없어. 그래서 이 서원행 기도라는 거는 서원을 딱 세우면 그 서원이 나를 인도하기 때문에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기본적인 서원은 사홍서원이고요. 아주 위대한 서원은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라는 게 있어요. 보현보살 십종 대원(普賢菩薩 十種大願)이라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걸 이렇게 외우기만 해도, 다 안 외우고 제목만 외워도, 십종 대원, 그게 나를 이끌고 가는 등불이 돼요. 또 나를 인도하는 방향이 돼요. 그래서 이제 이런 것이 불교 기도의 작법 의식 기도의 내용이에요. 염불행 기도, 예참행 기도, 서원행 기도. 이제 범부들은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게 돼요. 菩薩菩提行 보살보리행世間人生 生老病死 剎那不住 生滅不息세간인생 생로병사 찰나부주 생멸불식一念妙體 勿形段者 惺惺寂寂 寂寂惺惺일심묘체 물형단자 성성적적 적적성성六波羅密 菩提行 육바라밀 보리행布施 持戒 忍辱 : 修福菩提行, 般若 : 修慧菩提行보시 기계 인욕 : 수복보리행, 반야 : 수혜보리행精進 禪定 : 福慧雙修菩提行정진 선정 : 복혜쌍수보리행 그런데 이제 보살은 감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반야로 사는데, 보살들은 다 보는데 두 가지를 봐요. 첫째는 인생을 봐요, 인생. 그다음에 마음을 봐요.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 속에 사는데, 세월과 공간 속에 사는 게 인생이란 말이죠. 세간인생(世間人生)은 가만히 보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어. 생로병사. 그래서 이 생로병사를 또 가만히 보니까 찰나부주(剎那不住)라. 한순간도 머물질 않아요. 우리가 한참 있다보면 달라진 것 같지만, 그게 순간순간 달라져서 지금까지 달라진 거지, 가만히 있다가 달라진 게 아니거든요.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 70년 후에 내 모습이라. 그러면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은 70년 후에 어디로 갔나. 태어났을 때 이 모습이 변해서 지금 모습이 된 거지, 두 놈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언제 변했나? 순간순간 변하는 거예요. 순간순간. 그래서 젊은이들이 상대편이 뭐 예쁘다, 잘생겼다 그러는데, 지금 예쁘고 잘생긴 모습이 얼마 안 가요. 지금 노인은 옛날 청춘이 없었나. 지금 청춘은 그럼 앞으로 노인이 없나. 이게 이제 찰나부주라는 거예요.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걸 보는 거예요, 보살은. 세상만 보는 게 아니라 인생을 본다. 근데 보통 사람들은 인생을 못 봐요. 그냥 세상만 보고 쫓아가다가 늙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허무와 통곡이라고 해요. 인생은 허무하구나. 그 허무한 감정이 너무 슬퍼서 통곡을 한다, 그래요. 찰나부주에서 생멸불식(生滅不息)이라. 나고 죽는 일이 멈추지를 않는다. 쉬지 않는다. 그런데 그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까? 가만히 보니까 마음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일념(一念)이라고 그랬어요. 한 일자, 생각 념자. 일념, 한 생각. 왜 한 생각이라는 말을 쓰냐 하면은, 이 생각은 들으면 듣는 생각이 일어나고, 보면 보는 생각이 일어나는데, 보고 듣고 맨날 해도 늘 들을 때도 그대로 있고, 듣지 않을 때도 그대로 있는 한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산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물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슬픔을 아는 것도 그대로 있고, 또 즐거움을 알 때도 그대로 있고, 늘 한 생명이라는 게 있더라 말이지요. 그걸 일념이다. 그걸 마음이라고 한다는데 마음은 일념이에요. 그래서 일념은 그러면 어디에 있냐. 형체가 없어. 그래서 묘할 묘자, 몸 체자, 묘체라고 하거든요.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네. 일념묘체(一念妙體), 눈으로 보이는 몸이 아니에요. 귀로 들리는 몸이 아니에요. 근데 있기는 있는 거예요. 한 생각 묘체는 물형단자(勿形段者)라, 형상 덩어리가 아니다. 형단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한 생각 묘체를 찾아보려고 온 몸을 해부를 하고, 해체를 해봐도 그거 안 보여요. 그런 데 있는 거예요. 그거를 확실히 지혜로 얻을 때, 그 한 생각을 얻을 때 증득(證得)이라고 그래요. 증명할 증자, 얻을 득자. 보이는 걸 얻으면 수득이에요. 받을 수자, 얻을 득자. 그냥 받아서 얻는 거예요. 근데 이건 한 생각을 내 지혜로 얻으니까, 이건 손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는 것도 아니고, 증득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받아서 얻는 게 아니라 내 지혜로 얻는 거다. 지혜로 얻는다는 게 이게 얼마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맨날 이거 손으로 받고만 얻었는데. 이 물형단자인데, 이거는 항상 아는데 항상 고요해, 이걸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그러거든요. 깨 성자가 있어요. 마음심 심방 변에, 별 성한 거. 항상 깨어 있어. 항상 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는데, 찾아보면 실체가 없어. 물형이라. 물형. 명명물형이라, 밝고 밝게 다 아는데 형상이 없어. 아닐 물자, 형상 형자, 형상은 아니야. 그럼 이거 어떻게 아냐. 내 지혜로 아는 거예요. 보아서 아는 게 아니라 지혜로 아는 거예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고요하고 고요한데 항상 고요한데, 항상 알아. 근데 이 세상에 있는데 안 보이는 게 너무 많거든요. 예를 들면 이 법당이 지금 있잖아요. 법당이 보면 불상도 모셔져 있고 벽도 있고 이런 것도 다 있는데, 여기에 하나 안 보이는 게 있어요. 뭐가 안 보이냐. 이 법당을 처음에 설계한 마음이 있는데, 설계자의 마음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걸 여기다 배치할 때 이 배치하는 사람의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 배치된 상만 보이지 배치한 사람의 마음은 안 보이거든요. 근데 여기 이렇게 놓여 있는 거는 그 놓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놓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걸 가만히 보면 바둑알이 왔다 갔다 하고, 장기 알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면 왔다 갔다 하는 장기알은 보이는데, 그걸 옮기는 사람의 손도 보이죠. 근데 그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 그 생각은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장기알이 왔다 갔다 해서 뭘 잡히고 잡고 그게 아니라, 순전히 생각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보면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이상하냐. 누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를 하는데 그게 음란화라고 전시 못한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아주 성화라고 아주 존중시해야 된다고 그래요. 근데 가만히 그걸 보면 그림이라는 게 전부 물감이거든요. 그 물감이 음란이 어디 있고 신성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다만 그 그린 사람의 생각일 뿐이에요. 화가의 생각. 화가가 이렇게 ‘이거는 코다’라고 생각을 표현한 거지, 이게 물감이지, 무슨 코예요. ‘요건 입이다’라고 그러면 그 화가가 입이라고 표현해서 그렇게 물감을 칠한 거지, 그게 입은 무슨 입이에요. 이게 마음이거든요. 그러니까 딱 보면 이건 그림이다. 화가의 생각을 표현한 거다. 그렇게 알아야지, ‘저 그림이 예쁘네.’ 예쁘긴 뭐가 예뻐요, 물감인데. 흑판에다가 이렇게 이제 산을 그린다든지 세계 지도를 그리거든요. 그러면 흑판에다가 분필를 가지고 그린다. 여기는 유럽이고, 여기는 아시아, 그 무슨 아시아고 유럽이에요. 그냥 흑판이지. 그런데 뭐가 있냐. ‘여기는 아시아, 이 구역은 유럽이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은 항상 있는 거예요. 항상 있는데 눈으로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거를 지혜로 깨닫는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게 기도에요. 그래서 이 보살들은 일상 정진으로 기도를 해요. 일상 정진, 항상 기도를 해요.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려고 노력을 해요. 그게 일상정진기도거든요. 그렇게 돼서 바라밀행을 닦는데, 바라밀행 대표적인 걸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보시 지계 인욕(布施 持戒 忍辱) 이렇게 하는데, 이거는 복을 닦는 일상 기도예요. 보시 지계 인욕을 하면 복이 생겨요. 그다음에 반야(般若)라고 했는데, 이 반야는 지혜를 닦는 일상기도예요. 반야를 닦으면 지혜가 불어나거든요. 이게 중간에 정진 선정(精進 禪定)이 있는데, 정진 선정은 복과 지혜를 쌍으로 함께 닦아요. 정진을 계속하고 선정을 닦으면 거기에 지혜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지혜도 생겨 이걸 쌍수(福慧雙修)라고 그래요. 이래가지고 복을 닦는 거를 수복(修福)이라고 그러고, 수복기도, 수복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반야를 수행하는 거는 수혜(修慧), 닦을 수, 지혜 혜, 지혜를 닦는 일상 정신 기도. 그다음에 정진과 선정을 항상 닦는 것은 복혜쌍수, 복과 혜를 쌍으로 닦는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보살은 스스로 항상 자기 지혜를 가지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하지 않고도 일상이 항상 기도인 거예요. 일상이. 그럼 보살은 전혀 작법 의식을 안 하느냐? 해요. 여럿이 모일 때는 함께 하면 좋아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편하게만 있느냐. 아니에요. 늘 일상 정진 기도를 한단 말이에요. 諸佛菩提行 제불보리행一念妙體 常住寂照 三世諸佛 同證同悟일념묘체 상주적조 삼세제불 동증동오 圓融圓通 無障無礙 不可思議 解脫境界원융원통 무장무애 불가사의 해탈경계 그러면 이제 제불은 어떻게 하냐.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은 어떻게 하냐. 제불은요, 일념묘체(一念妙體)뿐이에요. 보고 듣는 게 다 한 생각 미묘한 몸이 보는 세계예요. 저건 집이 아니라 한 생각이 보는 세계다. 소리가 좋고 나쁜 게 있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이 듣는 세계예요. 이게 접촉되는 게 좋고 나쁜 게 아니라 한 생각이 이게 접촉하는 세계예요. 그래서 대상은 없고 한 생각만 있는 거예요. 범부는 한 생각은 없고 대상만 있어요. 그래서 이걸 전도망상이라고 하거든요. 자기는 없고 대상만 쫓아간다고. 그런데 이제 제불이 되면 일념묘체가 항상 있어서 보는 것도 저게 일념묘체의 세계다, 듣는 것도 일념묘체의 세계다. 이제 물에다가 비유하는데, 연못에 가서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연못 물 속에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저 물속에 있는 사람 만난다고 물에 들어가면 사람이 있냐? 어떻게 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연못 속에 보이는 사람 만난다고 물속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물속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없어요) 그게 무슨 원리인고 하니, 그 물속에 보이는 사람이 그대로 물인 거예요. 사람이 아니고 물인 거예요. 그러니까 물속에 뭐가 비춰져도 다 물이듯이, 산을 봐도 그게 한 생각인 거예요.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예요. 하늘을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죽음을 의식해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아, 이거 말 안 해야 되는데. 무서운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좋은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이게 깨달은 경지예요. 대상은 없고 마음뿐이다. 범부는 마음은 없고 대상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중간에 보살은 이제 범부도 느끼고, 그 마음도 느끼고 늘 그쪽으로 가는 게 보살이고, 그래서 일념묘체가 상주적조(常住寂照)를 해요. 항상 그대로 고요히 비춰. 그래가지고 이걸 삼세제불이 동증동어(三世諸佛 同證同悟)라. 삼세제불이 다 똑같이 증득하고 똑같이 깨달았어. 그래가지고 원융원통(圓融圓通)이요, 이 한 생각이 원융원통해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또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이 한 생각이 모두 나타나는 경지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 이래가지고 이 경지를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라고 한다.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경계다 이거지요. 아무데도 매이지 않고. 그래서 이 경지를 부처님의 경우에는 원성원만, 원만원성 또 원성원융,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수용한다. 둥글 원자가 있죠. 이룰 성자, 원성(圓成). 원만히 이루어. 이건 시작이 결과고, 결과가 시작이고, 이걸 원성이라고 그래요. 또 원융, 원만히 수용을 해. 받아서 쓴다. 원성원융. 또 이걸 수수즉득이라고 표현하는데, 의상스님 같은 경우에는. 불보살의 기도는 따를 수, 필요할 수, 필수품이라는 수자가 있거든요. 바랄 수자인데,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바람을 따라서, 이게 수수예요. 즉득이라, 곧 얻는다. 이게 부처님 기도예요. 근데 부처님은 좋은 걸 딱 생각하면 좋아져요. 참 좋지요. 있는 거 생각하면 있어요. 없는 거 생각하면 그냥 없는 거예요. 이게 원성원융 수수즉득. -아이, 이런 거 말하다가 시간 다가고 참. 뭘 알면 아는 거 얘기하고 싶은 게 또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냥 평범한 말로 하면 양이 안 차서 그래요.- 부처님 기도는 원성원융 수수즉득. 필요한 대로 바라는 대로 바로 얻어. 또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받아. 수용. 기도는 다 하는데 방식만 다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맞춰서, 이렇게 의식 작법으로 기도를 하는 게 맞아요. 염불기도, 예참기도, 서원기도 쭉 하면 거기에 온갖 중생의 죄업은 다 소멸되고, 좋은 업이 성장해서 결국은 다 깨달음으로 가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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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장구대다라니천독기도]1월 8일 신묘장구대다라니천독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3-01-08
신묘장구대다라니 천독을 회향을 하는 날인데, 다 하셨죠, 천독? 천독이라고 하는 게 쉽지 않은 건데 능히 이렇게 잘 해내셨다는 자체가 신묘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 신묘한 제가 예언을 가끔씩 하는데, 이게 딱 딱 들어맞는 예언만 제가 하거든요. 우리 신도들은, 우리 절의 신도들은 깜짝깜짝 놀랍니다. 지나고 나면 딱 들어맞거든요. 제가 여름에, 한참 더운 백중기도 때 어떤 예언을 했냐 하면, “동지 때가 되면 날이 제일 짧아지고 제일 추울 거다”고 그랬어요. 요번에 또 제가 동짓날 가서 제가 예언을 또 했잖아요. “3월이 되면 살랑살랑 푸근한 바람이 불고 꽃이 필 거다, 개나리부터 제일 먼저 필 거다.” 이런 예언을 했거든요. 딱 맞은 예언이지요. 중요한 거는 끝말에 제가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동참한 사람들이 그 노란 꽃, 개나리 꽃을 다 볼 거다.” 이렇게 예언했어요. 그런데 그 무거움을 잘 모르더라고요. ‘우리 스님은 농담을, 조크를 잘 하셔.’ 이렇게 하시는데 그게 아니고 어마어마한 축원이 거기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요즘은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 사회라고 그러잖아요.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그런 불안 사회라고 하는데, 이럴 때 스님이 “내년 이제 겨울이, 삼동 겨울이 가면 개나리 꽃 필 때 다 같이 개나리 보고, 또 벚꽃 보고 할 거다.” 이거는 다 건강하게 잘 날 거라는 얘기잖아요. 그런 이제 간절한 축원이 있고, 그런 간절한 축원은 아마도 우리 진관사 신도들이 간절하게 했던 다라니 소원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해 토끼해잖아요. 토끼가 꾀가 많은데, 교토삼굴( 狡兎三窟)이라는 옛말이 있어요. 그래 이 토끼는 굴을 세 개 꼭 판대요. 나가는데, 들어가는데, 또 맹수가 왔을 때 유인하는데. 유인하는 데 제일 많이 자기의 채취를 붙여 놓는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제 교자가 교환하다 이런 뜻인데, 교환하다 보다는 약간 좀 꾀가 많다, 이렇게 좀 봐야 되겠죠. 우리도 이제 토끼처럼 꾀가 많게, 올해는 굴을 세 가지로 파자. 들어갈 데, 나갈 데 말고, 자기가 이렇게 피해 있을 굴 하나 또 파자. 저는 이 교토삼굴의 세 가지 굴 중에 중생이 파는 굴이 세 가지가 있고, 또 대승보살이 파는 굴이 세 가지가 있다고 봐요. 여러분은 지금까지는 요 중생심에서 늘 이 굴 세 개를 파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이런 다라니 기도라든지 또 진관사의 마음이 정원의 경험을 통해 가지고, 이 대승보살의 세 가지 굴로 전환되고 있는 거예요. 전환. 바뀌고 있는 과정이라고 봐요. 보살도를 통해서. 그래서 중생심으로 파는 세 가지, 그게 뭐냐 그러면, 뭐겠어요? 탐진치잖아요. 탐진치. 탐 내고, 화내고 또 어리석은 건데, 그 굴을 끊임없이 자기의 근기대로 파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그 굴에서 머물다 가는 사람도 있고, 시절인연이 좋아가지고,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가지고, 이생에 와가지고 그 굴에 있다가고. 그 굴만이 아니라 또 다른 대승보살이 그러한 또 다른 굴 세개를 파는데, 그건 계정혜라고 하는 굴이에요. 계정혜 삼학.우리가 올해는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전환되는 그런 경험들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드리는데, 탐진치는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에 잘 몰라요. 욕심이 나고 화를 내고 있죠. 그리고 어리석다고 얘기하는데, 그 어리석다는 말은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면 빠져든다고 표현합니다. 빠져드는 현상. 화가 나는데 화로 빠져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욕심이 나는데, 욕심이 욕심으로 빠져들고 있는 그 상태 그거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리석음이라는 게 더 광의적으로는, 큰 뜻으로는 무지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더 현실적으로는 빠져들고 있는 상태예요. 물들고 있는 상태. 그거를 어리석다고 얘기를 하죠. 그런데 내가 화내고 있는 거, 내가 욕심이 나고 있는 걸 아는 것도 그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이제는 계정혜 삼학으로 좀 우리가 옮겨야 되겠는데, 계정혜 삼학이라는 굴을 파야 되는데, 왜 그래야 되느냐. 이거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위해서예요. 여기 앉아계신 분들 얼굴을 뵈니까 연령대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에요, 이제. 이미 늦은 분도 계셔요. 지금 나를 위해서 기도해요. 우리 불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다 남편 위해, 자식 위해 합니다. 물론 이제 간절한 서원이 있으면 해야 되겠지만, 저는 올해 첫 천독 다라이를 끝내고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라 .”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를 잘 안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내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살피는 시간들을 가져라.’는 거지요. 그게 지금 현재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가는 것도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은, 요약하자면, 남을 위해서 법문하신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나의 변화를 위해서 한 거거든요. 제가 출가를 했는데 제가 출가를 왜 했겠어요. 큰 뜻은 당위적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출가했겠지만, 첫째로는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거예요. 출가라고 하는 게 변화거든요. 근데 그걸 이제 다른 말로 하면 관점이 바뀌는 거고 시점이 바뀌는 거예요. 관점이라고 하면 보는 궤적이 바뀌는 거잖아요. 시점도 마찬가지고. 보는 게 바뀌는 거거든요. 보는 게 바뀐다는 얘기는 생각이 바뀐다는 얘기고, 생각이 바뀐다는 얘기는 행동이 바뀐다는 얘기잖아요. 연결이 쭉 되는 거니까. 자, 그러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내가 변하는 걸 원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르벨라로 많은 제자들에게 전법을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 안락과 행복과 이익을 요즘 말로 바꾸면 뭐예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말이에요. 저는 경전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늘 얼마나 간곡하게 말씀하시냐면, “제발 행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제발 건강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이 두 가지 외에는 다른 것들은 다 군더더기에요. 우리가 중생의 몸으로 이생에 와서 인연을 맺고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는데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는 간절한 말씀은 제발 행복하라는, 제발 건강하라는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 간절한 가르침을 우리가 받고 있는데, 늘 행복하지 못해요. 다른 말로 불안해요. 또 하나는 늘 아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면 행복해야 되고, 또 건강해야 되는데, 누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되느냐. 누가요? 내가.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주위가 다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어요. 제 스스로가 이렇게 돌이켜보면, 제가 출가해서 얻은 가장 큰 복은 마음이 늘 만족하다는 거 하나하고, 또 몸이 건강하다는 거예요. 물론 이제 감기도 걸리고 때로는 무릎도 까지고 합니다.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병이 걸려 가지고 늘 불안증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원망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행복할 수가 없죠.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행복한 방법, 또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말씀하시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요? 행복하지 않은 요소들을 내 삶 속에서 제거해 나가면 돼요. 아주 간단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건강하게 사는 원인을 분석해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되요. 그게 이제 욕심을 덜어내는 거잖아요, 쉽게 말하면. 근데 행복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마음이 불안해. 쫓기고 있단 말이에요. 뭔가 늘 만족하지 못해서 뭘 맨날 허덕이고 있단 말이에요. 그거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건강하라고 했는데 건강한 행동을 안 해. 맨날 뭔지 아시죠, 이거 맨날 마셔. 그리고 맨날 먹어. 탄수화물을 줄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빵을 끊지를 못해. 그리고 살 뺀다고 맨날 고생을 해요. 다이어트를 작심을 하는데, 항상 내일부터야. 오늘 저녁까지는 실컷 먹고.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잖아요. 움직여야 되잖아요. 근데 그것도 규칙적으로 해야 돼요. 규칙적으로. 그냥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요 행복과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꾸준하게 해야 돼요. 이번에 월드컵이 있었잖아요. 지난 얘기지만 월드컵 때 우리나라에서 응원 구호가 있었어요. 중꺽마, 요즘 젊은 사람들 말대로 줄여서 중꺽마, 이렇게 표현하는데, ‘중요한 거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이런 이제 응원 구호가 있었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저거는 누군가 불교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 카피를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다라니를 천독을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꺾이지 않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야 회향할 수 있잖아요.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고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행복과 건강을 하나하나 회복해 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지금 얘기했듯이 행복하고 건강하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돼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마음의 작용을 하고 있고, 어떤 언어적 습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위적인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여러분은 이제 우리 불교에서 얘기할 때, 물론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윤회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우리 한국에서는 윤회를 불교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죠. 출발점은 물론 그게 아닌데, 윤회라고 하는데 이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살림살이를 다 정리해 보면 요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냐가 달라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다시 그대로 태어난다면은 그대로 태어날 사람? 나는 태어나겠다. 태어나가지고 지금의 남편과 지금의 부인과, -지금 벌써 눈 돌리는 사람이 있어, 벌써 이미 돌아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지금의 자식들을 만나가지고 그대로 또 한 생을 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죠. 여러분은 어떠세요? 한 번 그대로 한번 또 살아볼까요? 아니에요. 왜 아니에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데. 윤회라는 것이, 이제 우리가 윤회사상을 왜 믿냐면, 지금 내 살림살이를 그대로 물려받는다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느냐. 이거는 노후한 사람들은 뭐냐면 많이 힘든 거예요. 힘든 거. 힘들었던 거 힘들어 왔거나 현재 힘든 거죠. 근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종자가 언젠가 싹을 틔워요. 그러니까 나를 위한 기도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이 지금의 인연들을 그대로 내가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능히 그걸 물려받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똑같이 물려받는데 나 정말 힘들어, 나 못할 것 같아, 이렇게 마음이 혹시라도 드는 사람은 그 마음을 전환시켜야 돼요. 그래야 소멸됩니다. 지겨워서 못살겠어, 아주 그냥. 지긋지긋해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마음 챙김을 해야해요. 그 마음 종자를 그냥 두고, 다라니를 천독을 하는 건 어떤 거냐면, 좋은 옷을 내가 오늘 사 입는 것 같은 거예요. 그러면은 옷이 이쁘니까 달라지죠, 달라 보이죠, 사람이. 근데 그 옷이 해지고 낡아지고 때가 묻으면 어떻게 돼요. 그때로 돌아가는 거지. 그 마음을 정리를 해야 돼요. 그래서 다라니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거는 나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를 해야 돼요.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그 전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 되요, 자비한 마음을.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되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연들에 대해서 내가 찬탄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 세 가지가 자기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에요. 다라니 기도를 막 했는데 열심히 했어요. 다라니 기도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법열로 가득 찼는데, 마치고 집에 돌아가 면상을 보는 순간 마음에서 부글부글 올라와. 자기도 몰래 한숨이 나와. 이러면 비싼 옷 사 입고 구정물에 들어가는 꼴이 되는 거예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마음을 바꿔야 해요. 자비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찬탄의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자비한 마음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자비는 항상 따뜻하고 온화하게 보는 거예요. 긍정적인 마음이에요. 쉽게 말하면 긍정적인 마음. 불안하고 힘들고 죽을 맛이고 이런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인연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자비심이에요. 다른 말로 감사한 마음일 수 있는데, 중요한 건 뭐냐면, 찬탄의 마음이라는 거죠. 여러분이 지금 여기 앞에 다라니가 있잖아요. 다라니를 해석해보면, 우리가 해석하고 있지 않지만, 해석해보면 관세음보살의 덕성을 찬탄하는 거예요. 이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해서 훌륭하시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 이래서 내가 귀의를 하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은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귀의할 수밖에 없고.. 찬탄 구조에요. 우리가 왜 찬탄을 하겠어요. 관세음을 찬탄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찬탄하라는 얘깁니다. 관세음보살이니까 찬탄하는 거예요. 스님, 우리 집안 우리 집에 있는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봐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또 그렇게 왔다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찬탄을 해야 됩니다. 찬탄을 해야 돼요. 그래야지 내가 편안해져요.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나부터 시작됐다는 거, 나부터 끝납니다. 뒤집어 볶고 많은 사연들이 있어도, 내가 사대 육신이 흩어져 버리면 끝나는 거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다라니도 할 수가 없고, 다라니를 통해서 자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과 찬탄의 마음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인연 있을 때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인연들에 대해서 변화해야 됩니다. 그게 다라니기도의 최후의 목적지가 돼요. 그래야지만이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고 자기 자신이 건강해질 수가 있어요. 그러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여러분은 다라니를 읽으면서, 앞으로는 다라니를 쭉 읽을 때 이렇게 눈을 지그시 감고, 천독할 때 단 한 독이라도, 999독은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또 나와 함께 인연을 위해서 하고, 999독 외에 한독은 나를 위해서 하십시오. 눈을 지그시 감고, 자기 마음을 향해서 다라니를 하세요. 만약에 그게 진심으로 맞닥뜨린다면 여러분은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 뜨거운 환희가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왜? 내가 이생에 와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빚진 게 많거든요. 나한테 저질렀던 그 많은 인권 침해 사례들이 막 올라올 거예요. 내가 내자신에서 제일 많이 인권 침해하거든요. 인권이 뭔지 아시죠, 인권. 사람이 가져야 되는 천부의 권리에요. 그걸 인권이라고 하는데, 자기 인권을 잘 챙기지 않고 살아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제일 괴롭히고 살거든요. 근데 저 다라니 천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딱 비춰보면,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자기가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흠집을 냈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것이 메꿔지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은 하면 좋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 안 된다면 한 번이라도 집에 가셔가지고 혼자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반조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우리가 그동안에는 계속 밖을 향해서 보던 시각, 버릇들이 있어요. 다라니 할 때도 보면은 생각이 여기 가 있어요. 제가 경험해봐서 알아요. 저 다라니 천독 기도를 해보면 입에서는 다라니가 자동으로 나오는데 이제 자동으로 되잖아요. 그죠. 오토가 돼. 오토. 목탁 치면서 하다 보면 목탁도 오토에요. 목탁 오토로 가는데 다라니도 오토야. 근데 가끔씩 내가 깜짝 놀란 게 뭐냐면,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어요. 불사 생각을 한다든가, 저번에 왔던 그 보살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줘야 되나 그런 생각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깜짝깜짝 놀라죠. 그때마다 당겨 오는데, 그 당겨오는 마음을 다른 말로 반조라고 해요. 반조. 반조 이러는데 집에서 이렇게 해보셔야 되고, 또 법당에 와서도 그런 시간들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이렇게 시각을 관점을 자기 자신을 보고 이렇게 돌리는 연습을 해야 되는데, 이걸 열심히 하면은 이런 말할 때도 자기 자신을 보면서 말을 하게 되요. 이걸 일여라고 그래요, 한결 같다. 그런 힘이 생겨요. 빠져들지 않죠. 어떤 상황이라도 놀라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두렵지 않고 겁나지 않고 걱정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전도될 생각이 올라오지 않는 거에요. 그런 과정인데, 그런 거 잘 안 된다 그러면은 이렇게 손을 엑스자로 이렇게 가슴에 놓고, 아니면 다라니를 할 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집중이 안되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숙여요. 왼쪽으로 숙이면 안 돼요. 오른쪽으로 이렇게 잘 숙여보세요. 그리고 생각하기에는 어머니의 품에 들어있다. 어머니 품이라는 거는 관세음보살님의 품에 안겨 있다. 살짝 안겨 있는 게 아니라 폭 안겨있다 생각하고, 그리고 그 다라니를 자신을 위해서 딱 일독만 하세요. 그렇게 한번 딱 하고 나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을 아끼게 돼요. 이 사랑하고 아끼라는 말은 자기에게 집착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집착과 별개의 색깔이에요. 결이 달라요. 자기를 정말 아껴야, 소중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지만이, 타인을 안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왜 남편이나 자식이나 내지는 가까운 이웃에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과 내지는 여러 가지 그런 서로간에 지청구를 하냐면 내 꿈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이 우리한테 야단치는 거 보셨습니까. 부처님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야단치신 적이 없죠. 왜? 늘 저렇게 앉아 계시니까. 늘 밝은 미소로 저기 앉아 계시니까 야단치지 않잖아요. 그 얘기는 그 부처님의 품이, 관세음보살님의 품이 광대무변하기 때문이에요. 어떠한 꼬라지를 봐도 그 꼬라지 다 봐주고 이해하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꼬라지를 못 보잖아요. 꼬라지 좀 낮춘 말인가요. 꼴을 보려고 꼴이 이 얼굴이잖아요. 얼굴이라는 말은 얼의 꼴, 이렇게 변형된 말이라고 그래요. 그 꼴을 좀 보고 살려면 내 자신의 품이 넓어야 되요. 내 자신의 품이 넓으려면은 내가 변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계묘년에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자. 그리고 아까 들으니까 6월에 천독 기도가 또 있다고 그러죠. 그러면 저랑 약속 하시는 거예요. 약속해줘. 약속해줘 해야 돼요. 999독은 가족을 위해서, 인연들을 위해서 하고, 그 한독은 누구를 위해서 한다? 나를 위해서 한다. 하다가 집중하려면 어떻게 한다. 이렇게 한다(가슴에 엑스자로 품고). 기도를 해가지고 올해는 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늘 최고로 여기는 명품 자아를 찾기를 바라면서, 제가 말 서두에 예언을 하나 했잖아요. ‘3월이면 꽃이 필 거다’, 이건 뭐 틀림없는 얘길 거예요. 안 맞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안 맞으면은 이게 지구가 이상해지는 거야. 꼭 맞아야 되는 건데요. 지금 올라오면서 보니까 우리 진관사 계곡 골짜기의 바람이 매서워요. 그렇죠. 차갑죠. 그런데 그 차가운 바람 사이로 봄 내음이 있어요. 혹시라도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법회 끝나고 나가서 골짜기에 서서 가슴을 열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세요. 그럼 냉기가 확 들어올 거에요. 그런데 그 냉기 안에 봄 향기가 있다. 봄 내음이 있다. 이걸 잊으면 안 돼요.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 힘들고 어렵고 벅차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지만, 그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오고 있다. 마치 이 엄동설한에 칼바람 사이에 봄 향기가 있듯이,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 그런 마음들이 중요하다. 올해는 계묘년에는 어느 해 보다도 나를 위한 그런 마음으로 지금 현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 안에 풋풋한 봄 내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늘 자비하고 감사하고 찬탄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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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기도]12월 22일 동지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2-12-22
안녕하십니까. 임인년 동짓날 진관사 법문(冬至法門)입니다. 동지송(冬至頌)을 하나 지어봤는데요. 동지송. 冬至頌 동지송陽氣始生日양기시생일 따슨 햇살 처음 오르는 날又見新年開우견신년개 새해 열림을 또 한 번 본다.赤豆白米粥적두백미죽 붉은 팥 흰쌀의 팥죽 나눔은希求多福來희구다복래라 오는 해 많은 복 염원함이다. 양기시생일(陽氣始生日) 우견신년개(又見新年開) 적두백미죽(赤豆白米粥) 희구다복래(希求多福來)라. 따슨 햇살 처음 오르는 날, 새해 열림을 또 한 번 본다. 붉은 팥 흰쌀의 팥죽 나눔은 오는 해 많은 복 염원함이다. 이런 내용인데요. 동지라는 게, 동아시아 경천사상(敬天思想),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을 공경하는 사상이 있어요. 경천.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걸 양기, 음기라고 그러는데, 하늘은 음양으로 움직인다. 하지에서 동지가 되면 음극양생일(陰極陽生日)이라, 음이 다 해가지고 양이 생기는 날이다, 이렇게 믿어요. 음극양생일. 그런데 이 양이라는 것은 햇빛으로 느껴지는데, 음이라는 것은 달빛으로 느껴지고. 동짓날이 되면 새로운 햇빛 양기가 처음으로 올라오는 날이다, 이렇게 믿는 거예요. 그래서 몸을 깊이 수련해보면 동짓날 아침에 햇빛 양기가 올라오는 기운을 몸이 느낀다는 거예요. 그걸 몸 체자, 인식할 인자, 체인(體認)이라고 그래요. 체인. 하지가 되면 그 더울 때도 그 서늘한 음기가 올라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이게 천명(天命)인데, 하늘의 명령인데, 이 천명을 잘 따르면 순천(順天) 생존을 하고, 이런 음양순환 천명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역천(逆天)인데 멸망한다, 이렇게 가르쳐요. 순천은 생존하고 역천은 멸망한다. 그리고 하늘의 이치가 음양 24절기로 표현이 되는데, 일월은 영측하고(日月盈昃), 해와 달은 둥글면 기울어서 줄어들고, 한래는 서왕이라(寒來暑往), 추운 것이 오면 더운 것은 간다. 이 일월영측 한래서왕, 이거를 잘 따르는 게 이게 순천 생존이에요. 순천하면 생존한다, 역천하면 멸망한다 이거죠. 그런데 이 공자 같은 사람은 철저히 천명 존중을 믿었거든요. 천명을 존중해야 된다. 나이 들어서, 어디 가서 기도해 보자고, 더 오래 살 수 있는지. 그러니까 “기도할 데가 있느냐?” 물었어요. 니구산이라고, 우리가 태산이라고 알고 있는 산이 있잖아요, 유명한 산이 있잖아요. “니구산에 가서 기도해보자.”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무소도야(無所禱也)니라, 하늘의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늙으면 죽는 게 하늘의 이치인데, 하늘의 이치를 거역하고 더 오래 살려고 하는 거는 하늘의 이치에 거스르는 거다. 이게 순천 생존이거든요. 순천하면 생존한다. 그러니까 이 추위가 올 때는 추위를 잘 막아서 몸을 보호해야 돼요. 더위가 올 때는 더위를 잘 식혀서 몸을 보호해야 돼요. 이렇게 돼서 순천을 계속 잘 해가지고, 나중에는 이을 승자, 하늘 천자, 승천을 해요. 하늘의 이치를 몸으로 이어. 주자라는 사람이 대학 서문을 지으면서 계천입극(繼天立極)이란 말을 썼어요. 하늘을 이어서 이렇게 법을 세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그 지극히 선한 경계에 딱 멈춰야 된다. 지선에 멈춰야 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인데, 이런 게 동아시아 경천사상이거든요. 하늘을 공경하는 사상. 처음에는 순천하고, 그 다음에는 하늘을 이어 승천을 하고, 그 다음에는 계천입극을 하고, 하늘을 이어서 법을 세워서, 지어지선하고, 그 하늘의 이치에 그쳐야 된다는 거예요. 이탈하지 말고 그쳐라. 그래서 이 공자라는 사람은 70이 되니까 아무리 행동을 해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더라. 여기에서 이제 멈추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천명 천리에 어긋나지 않아. 공자도 별 수 없어요. 처음에는 이걸 배웠어요. 그다음에 여기 뜻을 뒀어요. 그다음에는 이걸 할까 말까 움직이질 않아요. 40이 되면 부동이에요. 이제 50이 되니까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늘의 명령이 틀림없이 있구나, 이걸 50대 안 거예요. 변수가 없는 거예요. 60이 되면 어떤 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아요. 그걸 이순(耳順)이라 그래요. 70이 되면 이제 어떻게 행동을 해도 천명에 벗어나질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문화가 불교 오기 전부터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동짓날 되면 새로운 양기가 시작되니까 새로운 한 해를 또 맞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추위를 잘 막고, 천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욕불경심(人慾不敬心), 사람의 욕심으로 하늘을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멀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욕으로 불경을 하게 되고. 천리에 순응하는 것을 도심이라고 그러는데 서양에서는, 도의 마음은 경천을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불경한다, 공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천명을 거스리는 인간 욕심의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붉은 팥죽의 음식을 먹어요. 그 붉은 거는 인간의 재앙을 물리치는 거거든요. 재앙은 천명을 불경하는 데서 온다. 그러면 그 흰쌀은 뭐냐. 재앙을 물리치면 천명을 이어받아서 지선에 머물게 된다는 거예요. 지극한 선행도에 머물게 된다. 이래서 흰 쌀로 죽을 쒀서, 또 오래오래 살라고 옹심이를 만들고. 팔십 세 된 사람은 옹심이 팔십 개를 먹어요. 100세 된 사람은 옹심이를 100개 먹고. 흰쌀 덩어리 하나가 한 살로 보면 그렇고요. 그거를 10살로 보면 한 덩어리에 10살씩이다. 그러면 100세 되신 분들도 10개만 드시면 되고. 그건 수명이라고, 덩어리는 수명이거든요. 쌀은 순천 생존이에요. 하늘의 명령에 잘 따라서 길이길이 생존한다, 이런 거거든요. 근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동아시아는 또 사계절이 분명해서 계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근데 이거는 결국 하늘의 명령에 잘 순응하니까, 우리처럼 그런 해탈이나 극락이나 성불이나 이런 건 없습니다. 해탈 극락 성불은 불교에서. 하늘의 명령에 잘 순천해서 생존하고 지극한 선법에 늘 머물러서 하늘을 받드는 이런 거는 현세에 살아가기에 참 좋은 가르침이거든요. 그리고 조상도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데 한 5대가 지나가면 그 조상이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고 믿어요. 혼은 날아가고 몸은 흩어진다고. 그래서 사당에 보면 위패를 이렇게 덮개를 씌우는데 평소에 절대 안 열어놔요. 혼이 흩어진다고. 제사 지낼 때만 열어놓고, 보통 때는 알묘(謁廟)라고 그러는데, 뵈일 알자, 사당 묘자, 알묘라고 그래서 옆에 딱 들고 있다가 절하자마자 탁 닫아요. 그래서 5대 가면 이제 그 위패를 치워요. 위패를 묻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선대 조상은 물러가라. 5대까지만 이렇게 딱 하고 그러거든요. 그게 이제 다 순천사상이예요. 하늘에 순종하는 거. 이게 기운인데, 천지 기운인데, 5대 조상의 기운은 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혼은 날아가고 몸은 흩어진다. 이제 모든 몸이라는 거는 혼비백산을 한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동짓날이 추운 날인데도 어떻게 되냐. 새로운 한 해의 햇살 기운이 솟아나는 날이니까 두 가지를 다 해야 돼요. 새해맞이 준비도 해야 되고, 또 추위를 잘 막아서 건강 보호하는 일도 해야 되고. 그래 가지고 따스한 햇살이 처음에 올라오는 날인데, 이거는 새해의 열림을 또 한 번 보는 날이다. 그래서 동지 되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하는 게 이런 뜻이거든요. 붉은 팥죽, 흰쌀이라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려고 하는 욕심의 재앙을 물리치고, 하늘을 따라서 복을 받는 근거를 키우고 오래오래 장수하려고 흰쌀 덩어리를 만들어서 먹고, 이런단 말이에요. 팥죽을 나누는 것은 오는 해에 많은 복을 염원한다. 근데 불교는 뭘 믿느냐. 인연법을 믿어요. 불교에서 독특하게 가르치는 게 인연법이에요. 인연법이라는 건 불교밖에 없어요. 모든 것은 말미암아에서 일어난다. 인연법. 하늘에 의해서, 하늘에 맡겨서 되는 걸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되니까 인연을 잘 지으면 된다. 이런데 여기서 이제 문제는 항상 생기는 거예요. 금생에는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냐. 그래가지고 삼생 인연으로 이제 얘기를 해요. 삼생,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 과거생부터 인연법이 있어서 그렇다. 그럼 유가에서는 금년에는 천명을 어긴 일이 없는데 왜 재앙이 나오냐. 그걸 무망지화(無妄之禍)라고 그래요. 무망, 없을 무, 허망할 망, 허물 망자라고 그러는데, 허망할 망자를 허물 망자라고, 무망지화, 나에게는 허물이 없었는데 화를 입는 수가 있어요. 그게 전쟁통에 사망을 한다든지, 어디 지나가다가 산사태가 나서 죽었다든지, 갑자기 홍수가 나서 몸을 잃었다든지, 이건 무망지화예요. 자기 허물없이 받는 화는 성인도 불면(不免)이라고 했어요. 이거는 성인도 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무망지화와 역천 재앙을 혼동하면 안 돼요. 스스로 역천해서 재앙을 받는 거는 자기 책임이지만, 조심을 다 해서 순천을 했는데 화를 당하는 것은 무망지화라, 허물없는 화라, 그걸 허물 물으면 안 돼요. 근데 홍수 났는데도 천벌 받았다. 이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이건 유학 전혀 모르는 소리고, 인간 도리에도 안 맞는 거예요. 홍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망지화거든요. 허물없는 화라. 근데 홍수 났는데 천벌 받았다. 이런 소리는 아주 무식한 소리고 악담이에요. 이건 절대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갑자기 불이 나서 집이 없어졌는데 천벌 받았다. 그러면 안 돼요. 불을 내면 그거는 자기 허물이지만, 갑자기 불이 나서 없어진 거는 그건 무망지화예요. 불교로 말하면 그건 전생부터 있었던 거지 금생 일로 된 게 아니다. 그래서 저쪽에는 무망지화를 얘기를 하고, 불교는 삼생 인연을 얘기를 해요. 전생 인연도 있고, 금생 인연도 있고, 내생 인연도 있다. 불교는 전부 인연법이에요. 그래서 원력수공이 그렇게 중요해요. 원을 세워서 공덕을 닦는 거. 이게 이제 불교거든요. 인연법을 얘기하고. 그런데 불교에서 해탈법을 쭉 실천하는데, 첫째는 지옥아귀축생 삼악도에서 해탈하는 거. 그러면 그걸 인도에 환생하고, 극락에 왕생하는데, 인도 환생, 천상 왕생, 이게 이제 복 받은 거거든요. 이게 삼도 해탈이에요. 지옥아귀축생 삼악도에서부터 인간으로 돌아오면 해탈하고, 천상으로 올라가면 또 해탈이거든요. 그다음 해탈은 생사 해탈이에요. 생사, 나고 죽는 이걸 고해라고 그러는데, 나고 죽는 이 생사 상속, 생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서부터 해탈하는 거를, 벗어나는 것은 생사해탈이라고 해요. 그다음에 이 해탈도 그걸 딱 지키려고 보니까 그것도 뭔가 구속됨이 있어요. 그래서 해탈 해탈이라고 그래요. 이걸 해탈해서 해탈하는 거. 그러면 어떻게 되냐. 본래 열반 생사가 본래 없었던 본래 생사 없는 안락 세계, 그걸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 생사 없는 안락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이 이제 수성해탈에서, 닦아서 이룬 해탈에서, 본래 해탈로 돌아가는 거지요. 근데 본래 해탈은 해탈이라고 안 하고 열반이라고 그래요. 근데 그 후에 용수 마명이 딱 나와서 보니까, 해탈이나 열반이나 생사나 극락이나, 그걸 아는 놈이 있더라는 거예요. 아는 놈. 극락인 줄 알고, 열반인 줄 알고, 생사인 줄 알고, 그런 놈이 하나 있더라는 거지요. 근데 석가모니는 ‘해탈하라, 열반에 들어라’만 얘기를 했지, 그것까지는 말을 잘 안 했어요. 너무 깊은 얘기에요. 열반에 들면 저절로 알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걸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그러는데, 열반도 열반지견이 있어요, 열반을 알고 보는 거. 또 해탈을 알고 보는 거, 해탈지견, 열반지견, 그게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이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와서는 그거를 가르치기 시작을 했어요. 해탈도 알고, 열반도 알고, 그걸 깨달은 분들을 조사라 그래요. 조사. 근데 그거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을 얘기하고, 해탈을 얘기하고, 열반을 얘기하는 것이 아주 큰 법당 근본 불사일이고, 그것까지 아는 것은 잘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법당 뒤에, 옆에 조그맣게 조사당을 지어놨어요. 조사당이 법당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거는 일체중생을 다 인도할 만한 게 못 돼요. 그거는 최상승(最上乘)이라고 그래요. 대승도 더 올라가서, 최상승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마음 땅 법문을 하는 거예요. 심지법문. 큰 절을 가면 대웅전 크게 있는데,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가르치는 곳이고, 뒤쪽에 가면 조사당이 하나 있는데 그거는 마음 땅을 가르치는 데예요. 조사당. 그럼 그 마음 땅이라는 것을 뭐라고 보냐. 우리 몸이 있는데, 이 몸을 감고 있는, 이 몸인 줄 아는, 또 이 몸을 보호하는 마음 하나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이 몸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이 몸의 본래 면목이다. 본래 면목. 이 몸은 생겼다 사라지는데, 이 몸이 생기기 전부터 있고, 이 몸속에 있고, 이 몸이 없어진 뒤에까지 있는 본래 면목이 있다. 또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그 본래 면목은 아버지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지위가 없어요, 무위. 그러니까 참사람이야. 참사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그래서 그것을 그냥 한 생각이라고 그래요. 이 한 생각에 해탈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생사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이건 전부 몸으로 말하면 알몸이 아니고, 적나라한 알몸이 아니라, 몸에 입혀진 옷이다, 껍데기다, 이거에요. 그래서 생사도 껍데기고, 남녀도 껍데기고, 극락도 껍데기고, 열반도 껍데기고, 그 본래면목, 무위진인, 영명일념(靈明一念), 신령스럽게 밝은 한 생각, 신령 령자, 밝은 명자, 이 영명일념이 있어서 극락인 줄도 알고, 나고 죽는 것도 알고, 안다 말이에요. 죽는 줄도 알고 사는 줄도 알고, 그 영명일념, 본래면목, 무위지인, 그런 걸 딱 알아가지고 바로 고놈을 지적을 한단 말이죠. 본래면목을 바로 지적을 해. 그걸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그래요. 곧을 직자, 가르칠 지자, 곧게 가르친다, 바로 가르친다, 사람의 마음을. 해탈도 알고 극락도 알고 생사도 알고 좋은 것도 알고 나쁜 것도 아는 그 마음을 바로 가르쳐 버려요. 경전도 안 가르쳐요. 교외 별전이라고. 불교 밖에 따로 전해준다 이거지요. 그래서 일념자(一念子), 한 일자, 생각 념자, 아들 자자인데, -아들 자자는 어조사고, 모자, 탁자 하는 식으로 어조사고,- 일념, 한 생각, 다 한 생각인데, 이 한 생각에 대한 송도 하나 지었는데요. 일념송(一念頌)이라고. 一念頌 일념송圓明一念子 원명일념자 둥글고 밝은 한생각無始無終極무시무종극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和應一切法화응일체법 모든 것과 함께 하지만諸相悉不得제상실부득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원명일념자(圓明一念子)가 둥글어서 끝이 없는데 밝다 이거에요. 찾아보면 몸이 없는데 밝아. 이걸 밝아서 아니까 몸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묘체(妙體)라고 그래요. 묘할 묘자, 몸 체자, 묘체가 있는데, 그 묘체가 둥글다. 그게 항상 밝다. 그래서 묘체가 원명하다. 마음은 찾아보면 없어요. 근데 항상 알거든요. 그랬더니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무시무종극(無始無終極)이라. 언제 시작이 됐는지 시작도 없고, 언제 끝나는지, 마칠 종, 다할 극, 끝나서 다 없어지는 종극이 없어요. 이게 나인 거예요. 이놈을 하나 딱 알고 나면 모든 게 이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예요. 이 몸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인데, 전도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모르고,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에 계속 매달리니까 그걸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전도라고 하는 건 뒤바뀌었다. 뭐냐.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걸 전도몽상이라고 하거든요. 뭐가 무너지는 걸 본다. 그러면 무너지는 걸 볼 줄 아는 원명한 한 생각, 그것이 나인 거예요. 그런데 그 무너지는 대상만 쫓아가서 막 괴로워하는 거예요. 이게 전도 몽상이에요.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하늘이 무너져도 항상 둥글고 밝고, 몸이 없어져도 항상 둥글고 밝고, 무가애(無罣礙) 무가애고, 걸릴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루를 지나가는 것들은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다. 그게 난 거예요. 깨닫는다는 건 그걸 깨닫는다는 거에요. 이 몸의 나에서 원명일념의 나로 바뀌는 거예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의 나로 바뀐다. 그러면 인생 일평생이 일장춘몽이에요. 그 둥글고 밝은 나를 알면 인생 일생이 일장춘몽이다. 한바탕 봄 꿈 꾸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뭘 자꾸 입으려고 그러는데, 이 몸 없어지면 내가 이루어놓은 거 다 소용없어요. 그런데 왜 이루다 죽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집 안을 계속 청소하는데, 그 집 나중에 포크레인 와서 다 뜯을 때는 여름에 청소한 거 아무 소용 없어요. 이 몸 건강하려고 애를 얼마나 썼는데 화장막에 딱 들어가면 몸으로 챙겨 먹고 보살피고 한 거 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또 검을 때는 검은 거 알고, 없어질 때는 없어지는 거 아는 거,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무시요 무종극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걸 깨닫는 게 자기 본래 면목을 찾는다. 지위에 없는 참사람을 만난다. 자성청정심을 안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게 어려운 게 아니라 안 해서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게 보이고 들리는 밖으로만 밖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그걸 찾을 생각도 안 하고, 돌아볼 생각도 안 하고, 눈에 보이는 거 우선 가지려고 그러고, 귀에 들리는 거 쫓아가려고 하지 그걸 돌아보지 않아요. 근데 그런 말을 듣고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을 딱 찾아보려고 하면 저절로 저 대상이 없어요. 대상이 텅 비어서 보이질 않아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을 딱 돌아보면 저절로 온갖 번뇌 망상 근심 걱정이 싹 없어져 버려요. 대상도 없어지고 근심도 없어지고. 그게 두 번째 단계예요. 세 번째 단계는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그런 둥글고 밝은 생각을 환히 보게 돼요. 그게 세 번째 단계에요. 그러면 네 번째 단계는 뭘 봐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니까 거기에 쫓아가지도 않고 그걸 물리치려고도 않고 그냥 자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둥글고 밝은 것이 뭐냐. 여공일념이라, 허공과 같은 한 생각이다. 또 여경(如鏡)일념이라, 거울과 같은 한 생각이다. 일념은 여공이요 일념은 여경이다. 여공일념이라고 그러는데 허공과 같다, 비유인데.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해도 있고 달도 있고 지구도 있고 사람도 있고 다 있는데 진짜 허공에는 해가 허공이 아니에요. 달이 허공이 아니고 사람이 허공이 아닌 거예요. 여공일념이 허공과 같은 한 생각이라고. 여경 일념이라는 건 거울을 보면 거울을 비치는 데는 다 거울의 그림자가 보이는데요. 그 거울 자체는 거기엔 뭘 갖다 대도 비춰지는 거 하나도 없어요. 거울에 환히 비춘다고 해서 거울 뒤에 가서 만져보면 하나도 걸리는 게 없어요. 그거와 같다. 이런 깨달음으로서 근본적인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 거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아주 아주 심각한 가르침이고 아주 진실한 가르침이거든요. 이게 어려운 게 아닌데 믿지를 못하고 하지를 않아서 그래요. 마음 챙겨보는 거 너무 쉬워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뭔가. 자연히 경계가 없다는 걸 알아요. 이걸 경공(境空)이라고 그래요. 경공. 경계가 공했다. 저게 있어서가 아니고, 아무리 보이는 거라도 저걸 부숴보면, 먼지가 돼서 다 날아가고 흔적이 없어요. 보이는 게 그냥 형태로 보일 뿐이지 본질이 없다. 이걸 색공(色空)이라고 그래요. 색이 공이다. 그러면 이 색이 공한데 색이 공한 것을 스스로 자꾸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하는 것은 생각인데, 이 생각을 또 돌아보면 생각도 자체가 없어요. 이걸 염공(念空)이라고 해요. 염공. 생각이나 마음 심자나 같이 쓰니까 심공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색공 염공에 딱 들어가면 자취는 없는데 항상 밝은 원명, 둥글고 밝은 그것뿐이에요. 그걸 철저히 증득하면 얻는단 말이죠. 그럼 뭘 봐도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이걸 알게 돼요. 이 몸도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고, 하늘 속에 떠다니는 물체처럼 그림자다. 그래서 그걸 어떤 큰스님은 신령스럽고 밝다고 그래서 영명일념(靈明一念)이라고 했어요. 영명일념. 본성 그대로 안다고 그래서 성각일념(性覺一念)이라고 그래요. 본성 성자, 알 각자, 감각이라는 각자 있잖아요. 깨달을 각. 성각일념, 영명일념. 그리고 많이 쓰는 게 제사 지낼 때나 언제나 쓰는 게 원명이라는 말은 많이 써요. 둥글고 밝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일념송인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화응일체법(和應一切法)이라. 일체법에 다 응해요. 하늘이 나타나면 하늘을 알고, 땅이 나타나면 땅 알고,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 알고. 화응을 해요. 화할 화, 응할 응. 일체법과 함께 한단 말이죠. 일체법과 모든 것과 함께 하지만 제상실부득(諸相悉不得)이라, 어느 것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없어요, 그냥 둥글어, 묘체예요. 그냥 밝아. 근데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걸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증명해 낼 수가 없어요. 이건 오직 체험할 뿐이에요. 그래서 이 과학 불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과학 불교. 깨달은 불교가 되고 과학 불교는 안 된다. 그런데 과학 불교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이 불교 역사를 알고 불교 경전을 아는 데는 필요하지만, 실제로 둥글고 밝은 걸 체험하는 데는 학문도 역사도 문자도 다 떠나서 그런 걸 돌아봐야 돼요. 이게 불교가 과학이지만, 과학을 초월해야 불교지, 과학에 끝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거예요. 과학은 생사업이고, 죽고 사는 업이다 이 말이지요. 이 불교는 반야업이에요. 이 둥글고 밝은 걸 지혜로 봐서 구경해탈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이 마음은 하나도 없는데 전체를 다 봐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諸惡莫作 衆善奉行제악막작 중선봉행自淨其心 是諸佛教(法句經)자정기심 시제불교(법구경)諸惡莫作 名爲戒 衆善奉行 名爲慧제악막작 명위계 중선봉행 명위혜自淨其心 名爲定 (六祖壇經)자정기심 명위정(육조단경)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心 淨心益深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심 정심익심正覺因緣 大智出現 菩見三世 寂光常照정각인연 대지출현 보견삼세 적광상조 그러면 이게 사람마다 이제 다 틀리니까 크게 세 가지를 가르치는데, 첫 번째는 그런 걸 깨달으려면 여러 가지 장애가 있으면 안 되니까 제악을 막작하라(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마라. 이 악의, 제악의 장애가 이게 엄청나요. 그다음에 중선을 봉행하라(衆善奉行). 온갖 선을 받들어라. 그러면 이 장애는 없어지고 복덕이 깊어져서 이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리고 자정기심하라(自淨其心). 그 마음을 맑혀라. 이 세 가지가 해탈도예요. 해탈로 들어가는 길이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고 마음을 맑히고 이게 해탈도 거든요. 가르치는 거는 인연법과 요 일념 한 생각이에요. 인연법을 가르치고 한 생각을 가르치는 게 여기 가르치는 내용이고, 또 실천하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고 자정기심, 그 자기 마음을 맑혀라.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에 있는데, 비바시불부터 석가모니불까지, 칠불이 다 가르쳤다고 그래서 제불교(諸佛教)라고 해요. 제불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마음이 점점 맑아지면, 정심이 익심(淨心益深)하면 딱 밝아져요. 청정한 마음이 점점 깊어지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확 떠져요. 눈이 떠진다는 거는 경계는 하나도 없고 생각도 하나도 없고 오로지 둥글고 밝은 것이 온 천지를 다 덮어요. 그게 대웅이라고 그래요. 크게 웅장하다고. 모든 일체만법이 둥글고 밝은 그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지, 실체가 없어요. 이거 부서봐야 실체가 없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상태도 실체가 없어요. 그래가지고 대지가 출현(大智出現)한다. 깨달은 인연으로 대지가 다 출현하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시방법계를 다 보고, 과거 현재 미래에 삼세 업겁을 다 봐요. 이걸 보견삼세(菩見三世)라고 그러는데, 그래가지고 적광이 상조(寂光常照)라. 둥글고 밝은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치는 거예요. 항상 비춰요. 무소분별(無所分別)하고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둥글고 밝은 한 생각뿐이고, 경계는 하늘도 하늘이 아니고 땅도 땅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분별하는 바가 없어요. 이걸 전부 갈라보고 없애봐야 없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상태로 그냥 없는 걸 다 안다. 이걸 무소분별, 분별하는 바가 없다. 마음으로. 이걸 쪼개보고 시비하고 이렇게 분석하는 바가 없다. 이걸 무소분별이라고 하거든요. 분별하는 바가 없어요. 부처님한테. 그래서 눈을 크게 뜰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눈을 이렇게(지긋이) 뜨고 있어요. 이거 분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눈을 지긋이 떴고 달마는 아예 벽 보고 앉아버렸어요. 이제 볼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볼 게 하나도 없고, 생각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분들이죠, 말하자면. 그래서 적광이 상조야.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추는 거지,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고, 있고 없고가 아니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그러니까 팥죽 잘 드시고 기도 잘해서, 악은 점점 줄이고 선을 점점 키우고, 줄이고 키우고 마음을 점점 맑히는 이렇게 한 생각을 깨달아서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추는 세계로 가는 겁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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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1월24일 음력 11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11-24
-영단의식(靈壇儀式)의 신묘인연(神妙因緣)이야기-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임인년 동짓달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영단의식, 영단의식의 신묘한 인연, 영단의식 신묘한 인연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불교는 만다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만다라, 만다라는 만남이라는 뜻이에요. 만난다. 그럼 어떻게 만나느냐. 그 만다라를 한문으로 번역을 할 때, 단상이라는 단(壇)으로도 번역을 하고, 단, 그래서 단에서 만난다. 또 도량으로도 번역을 해요. 도량. 그래서 이제 도량은 구역을 정해서 불보살님 모두 모시고 일체 호법신장을 다 모시고 그 도량에서 모두 만난다. 그래서 만나는 데는 그 만나는 형식이 필요한데, 부처님을 만날 때는 불단, 그리고 신중님을 만날 때는 신중단, 일체중생의 혼령, 영혼을 만날 때는 영단, 이렇게 단을 설치를 해요. 그래서 꼭 삼단에서 만남을 구현을 하는데, 부처님은 어떻게 됐냐. 상주정토(常住淨土), 항상 정토에 머물러요, 부처님은. 그리고 보살님은 처염상정(處染常淨), 머물러 있기는, 머무를 처, 물들 염, 그 물 들었다는 건 중생세계인데, 중생세계에 머물러 있는데, 그 정신세계는 늘 부처님 세계에 계시고, 그래서 처염상정이라 그래요. 그다음에 일체 범부들은 어떻게 되냐. 그 고해 생사(苦海生死), 고통바다, 고통바다에서 나고 죽으며 머물러요. 그래서 그 고해생사에서 나고 죽음에 머무르는 그런 분들을 일단 모신다. 그렇게 그 모심으로 이루어지는 그 만다라 단상이 영단이에요. 영단. 그러면 이 영단에서는 어떻게 신묘한 일이 벌어지는가. 아주 신묘해요. 가끔 택시 타면 “스님, 절에 간 지 오래됐어요?” 그렇게 물어요. “조금 됐는데요.” 그러면 “극락세계 정말 있어요?” “있죠.” “근데 왜 우리한테는 안 보이는데요?” “눈 감아서 안 보여요.” “눈을 어떻게 감는데요?” 이 세속의 티끌이 눈에 탁 가려 가지고 극락세계가 안 보여요. 그 세속 티끌을 어려운 말로 속진(俗塵)이라고 그러는데, 세속 속, 티끌 진. 속진. 그 속진이라는 건 뭐냐. 번뇌인데, 번뇌가 뭐냐. 이 몸 하나 때문에 걱정하는 게 번뇌에요. 그래서 무서운 말이 “너 죽을래.” 그러는 거예요. 걱정 근심이 이 몸 하나예요. 몸 하나. 그게 이 몸 하나 걱정 때문에 극락세계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속이라는 거는 전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전부 세속이에요. 아버지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 근데 이 아버지가 얼마 못 가요. 어머니 이름 얼마 못 가요. 어린이라는 이름 이것도 얼마 못 가요. 청년이라는 이름 이것도 얼마 못 가고, 노인이라는 이름이 가장 오래 가는데, 한 50년도 가고, 노인 이것도 얼마 못 가요. 이름 다 없어지고, 모양 다 없어지고, 이게 세속의 티끌이거든요. 근데 그 세속 티끌이 그냥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서 못 보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영’이라고 하는 이름을 쓰는데, <본래 신령스럽다> 할 때 본영(本靈)이라고 그래요. 본영. 근본 본, 신령 영. 그 본영을 모른다. 그리고 이 세속에서 살아도, 늙고 움직이고 해도, <항상 그 신령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할 때 그걸 혼령(魂靈)이라고 그래요. 혼. 혼이라는 혼자. 신령스럽다는 신령 령자. 혼령, 혼은 움직인다는 거예요. 움직이지 않으면 혼이 아니에요. 태어나고 죽고 살고 해도 신령스러운 게 늘 있어요. 그리고 또 온갖 생각을 하고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하는데, 그 속에도 신령스러움이 있어요. 그걸 마음 심자, 신령 령자, 심령(心靈)이라고 그래요. 심령. 근데 이 신령스러움은 항상 있다. 그래서 그걸 그냥 신령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신령. 그런데 그 신령을 이 몸 걱정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몸을 내려놔야 돼요. 몸 안 내려놓으면 도 못 닦아요. 그래서 몸 걱정만 하면 그건 불교가 아니고, 몸교가 되는 거예요. 몸교. 몸교는 다 믿어요. 몸교 안 믿는 사람이 없어요. ‘건강하세요. 뭐 어쩌고. 항상 그대로네요.’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어린이, 청년, 노인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데 어떻게 항상 그대로예요. 이게 전부 몸교거든요. 근데 이 영단에서 부를 때 그 신령스러운 걸 부르지, 여자였던 세속 몸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 혼령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령스러움을 부르지, 남자였던 그거 안 부르고, 아버지였던 그거 안 부르고, 청년이었던 그거 안 부르고, 늙은 노인이었던 그거 안 부르고, 그냥 본래 신령스럽고, 혼 속에서 신령스럽고, 마음속에서 신령스러운 그 영을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영가(靈駕) 이러지, 아무개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에요. 영가라는 건 가자는 수레 가자인데, 임금이 타는 수레는 높았다, 이걸 어가라고 그러고, 그리고 시렁 가자하고 같은 뜻인데 시렁은 높은 데 걸려 있다, 이래서 <높다>라는 존칭어예요, 가자가, 수레 가자가. 영, 높은 영. 그래서 영가를 이제 부르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요. 그래서 그걸 맞이할 영자, 혼이라는 혼자, 영혼이라고도 하고, 또 대령(對靈)이라고 그래요. 그 영을 대한다, 맞이해서 모신다 이거죠. 대령. 근데 이런 대령들을 그냥 보신소청(普伸召請)이라, 널리 불러, 영만 부르는 거예요. 그 사람으로 있을 때 그 사람 그런 거 안 불러요. “누구세요?” 그러면 “택배인데요.” 그런 택배 같은 거 안 불러요. 택배를 부르는 게 아니에요. 그 영을 부르는 거예요. 택배 기사의 영을. 근데 세속에서는 그 영을 한 번도 불려본 적이 없어요. 사람이 붙여준 이름, 그거 이름 그거 죽으면 없어져요. 그래서 이름 부르고 뭐 한다고 부르고. “우체국인데요.” 이래 부르고. 이게 전부가 허망한 이름이고, 거기서 영을 잃어버린 거예요. 신령 심령 혼령. 그래서 영단에서는 혼령을 불러요. 그래가지고 혼령을 널리 소청이라고, 부를 소, 청할 청, 그래가지고 소청인데, 한두 사람만 부르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와도 영단이 모자라지 않아요. 이게 신령의 세계예요. 그러니까 세속의 세계와 신령의 세계가 있다. 세속의 세계는 넓고 좁은 데가 있지만, 신령의 세계는 넓고 좁은 게 없어요. 티끌 하나에도 시방세계가 다 모이는 게 신령의 세계에요. 이게 또 뭔 소리인지. 이게 이 세속을 가지고 신령을 측량하면 측량이 안 돼요. 이 티끌 하나에 시방세계가 다 모여도 비좁지 않은 것이 신령의 세계다. 魂靈著語혼령착어生來一陣清風起 滅去澄潭月影沈생래일진청풍기 멸거징담월령침生滅去來無罣礙 眞身面目更何尋(勸供諸般文.1574) 생멸거래무괘애 진신면목갱하심(권공제반문.1574)靈明性覺 清淨心光 能凡能聖 本自圓明영명성각 청정심광 능범능성 본자원명 그래서 신령의 세계를 영단에 모시고, 신령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요. 이게 혼령착어(魂靈著語)라는 거예요. 부칠 착, 말씀 어. 신령의 세계는 이런 거다. 신령의 세계는 영명성각(靈明性覺)인데, 신령 령, 밝을 명.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이 아는 건데, 태어나서 아는 게 아니고 본성이 아는 거, 그 각자는 안다는 소리예요, 이걸 영명성각이라고.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의 마음. 각이나 식자나 안다는 같은 의미에요. 영명성각은 청정심광(清淨心光)이라. 청정해. 청정하단 말은 모양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 그리고 무엇이 거기 붙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걸 청정이라고 그래요. 다른 것이 없다. 그 마음광명이다, 이거예요. 근데 그게 허공과 같아서, 이게 세속의 인연을 점점 줄이면 신중, 보살, 부처님 이렇게 성위에 올라가요. 그리고 이 세속의 인연을 점점 더 많이 만들면 생사범부에 내려가. 이게 그래서 능범능성(能凡能聖)이라고, 범부해도 되고, 능자는 된다 이 소리죠, 범부도 가능하고 성인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범부가 돼 있어도 그 신령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세속으로 눈을 감아서 신령을 못 볼 뿐이지. 그래가지고 본자원명(本自圓明)이라, 신령의 세계는 본래 스스로 둥글고 밝다. 둥글다는 말은 끝이 없다. 밝다는 항상 보고 듣고 느낀다는 거지. 본자원명이라. 그렇게 딱 그 신령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침으로 인도를 해요. 영단에서 하는 일이 그거예요. 그리고 신령의 세계에서 죽고 사는 생사를 보면 생래는, 태어나는 것은 일진청풍기(生來一陣清風起)라, 한 차례, 일진이라는 건, 한 차례, 청풍은, 맑은 바람이 휙 일어나는 거와 같다. 이게 태어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 몸 위에서만 살다가 죽을 때 되면 허망하기 그지없어요. 재산도 전부 몸에 따라붙은 거고, 명예도 몸에 따라붙은 거라, 사랑도 몸에 따라붙은 건데, 이 몸 하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사랑도,-아이고 유행가 이름 같네,- 사랑도 명예도 재산도 뭣도 다 날아가는 거예요. 그게 우리 인생살이에요. 아, 이거 기가 막혀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런 게 신령의 세계에서 볼 때 태어나는 것은 일진청풍기라. 한 차례 맑은 바람이 휙 일어나는 것 같다. 또 멸거, 죽어서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징담월령침(滅去澄潭月影沈)이라. 징담이라는 건 맑을 징, 연못 담인데 가을 연못이 꼭 그와 같아요. 맑은 연못에 달빛이 환하게 비쳤다가 그 달빛이 없어지는 것 같다. 잠길 침. 그런데 달빛이 그 연못에 비쳤지만, 저 허공 달은, 담월은 없어. 그렇지. 찾지 못했지. 못 찾은 거 맞아요. 없어진 달을 어떻게 찾아. 그 달빛이 연못 안에 분명히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버렸어요. 근데 그게 달빛이 연못에 비쳤어도 달은 그대로고, 없어졌어도 달은 그대로고, 바람이 일어났어도 공기는 그대로고, 바람이 사라졌어도 공기는 그대로고. 그게 본래 신령스럽고 혼이 신령스럽고 마음이 신령스럽다, 이런 거죠. 生本無生 滅本無滅 生滅本虛 實相常住생본무생 멸본무멸 생멸본허 실상상주還會得 無生滅底一句麼 俯仰隱玄玄 視聽明歷歷 若也會得환회득 무생멸저일구마 부앙은현현 시청명력력 약약회득頓證法身 永滅飢虛돈증법신 영멸기허 그래서 이런 영을 턱 불러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내 영혼을 내가 부르는 수행이 있는데, 그걸 자기 주인공이라고 그래요. 주인공아. 주인공아. 이렇게. 근데 이건 혼령이라는 말인데 혼에 신령이 있다. 그러면 혼령이여, 혼령이여, 나의 혼령이여.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의 혼령을 안 보니까 나라도 불러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하늘보다 높고 땅속보다 깊은 나의 혼령이여, 나의 혼령이여. 여기는 뭐 시어머니, 며느리도 없고, 아버지, 아들도 없고, 가난하고 부자도 없고, 그냥 신령한 것만 있는 거예요. 그걸 불러라. 그래가지고 명상을 해요. 자기 신령 명상. 떡하니 명상을 하고. 그러면 그거는 살아서 자기가 자기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거거든요. 살아서. 그 혼령이 극락세계에 가는 거지, 세속에서 어린이 청년 엄마 아버지가 가는 게 아니에요. 그 엄마 아버지는 이 몸 흩어질 때 다 흩어져 버리거든요. 그래서 그 혼령을 일깨워서 혼령을 근심 걱정 없는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그것이 영단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런 말씀이지요. 영단에 보면 대령 의식이라는 게 있어요. 영을 모시는 의식. 영을 먼저 일깨워서 모시면 벌써 천도가 다 된 거요. 그래가지고 영에서 보면 태어나도 본래 태어난 게 없고, 바람 한번 일어나는 것 같아서 죽어도 본래 죽는 게 없다. 연못에 달빛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생멸은 본래 이게 허망한 거고 그 신령스러운 진실상은 항상 하는 거다. 이렇게 법문을 해요. 실상은 상주라. 생멸은 본허(實相常住 生滅本虛)다. 그러면 이거 하나, 이 신령일구(一句), 이걸 신령을 조금 풀어서 쓰면 무생멸(無生滅)이라는데, 생멸 없는 한 구절. 신령일언구(一言句), 무생멸일언구. 무슨 소리인지, 진짜. 무생멸일언구가 있다. “아무게야” 하면 그 소리는 사라지는데, 생멸 없는 일언구는 안 사라져요. 봐요. 소리는 사라지잖아요. 근데 그 소리를 내는 신령은 안 사라지는 거예요. 이걸 무생멸일언구라고 그러거든요. 한 일자, 말씀 언자, 구절 구자. 부르는 소리는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 부르는 신령한 한 언구 그 본체는 안 사라져요. 그래서 그거를 알면 어떻게 되냐. 자기 본래 몸을 안다. 그걸 법신(法身)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지금 움직이는 걸 생신(生身), 태어난 몸이라고 그러고, 법신, 생신, 법 법자, 몸 신자. 그러면은 기허(飢虛)라, 모자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져요. 이게 세속의 티끌로 모자람이 있는 거예요. 신령한 데 돌아가면 신령 한 데는 모자람이 없어. 그러면 그 신령한 게 어디 멀리 있느냐. 아니에요. 부앙에 은현현(俯仰隱玄玄)하고, 앉고 일어날 때 그냥 그대로 다 있고, 보고 들을 때 그대로 다 있다, 이렇게 해요. 普伸召請보신소청以此振鈴伸召請 今日靈駕普聞知 이차진령신소청 금일영가보문지願承三寶力加持 今日今時來赴會원승삼보력가지 금일금시래부회因緣聚散 今古如然 虛徹廣大靈通 往來自在無礙 인연취산 금고여연 허철광대영통 왕래자재무애今日靈駕 承佛神力 仗法加持 來詣香壇 受沾法供금일영가 승불신력 장법가지 내예향단 수첨법공 그래가지고 다 이제 불러서 모시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인연취산(因緣聚散)은 금고여연(今古如然)이나, 인연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가 만나서 내가 태어나고, 이 몸이 늙어서 사라지는 그런 것인데,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허철하고 광대하고 영통한(虛徹廣大靈通) 이 신령은, 허철 광대 영통이라고 그래요. 신령은 텅 비어서 못 가는 데가 없어요. 철이라는 건 사무칠 철자인데 다다른다는 소리예요. 다 거기에 다다라요. 텅 비어서 못 다다르는 데가 없어요. 또 광대해요. 넓고 커. 영통해요. 신령스럽게 다 통한다. 이게 우리의 본신이고 우리의 법신이에요. 이것만이 나지, 지금 있는 거 다 사라져요. 그런데 근심 걱정은 지금 보는 이 몸 하나 때문에 근심 걱정 다 하다 죽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나는 별 사람인 것처럼 떠드는데 미안하긴 해요 좀. 똑같아요. 그래서 알면서 매달리는 게 몸이에요. 이거 몸 죽을 줄 누가 몰라요. 그런데 몸만 위해서 살지, 다른 걸 위해서 살 줄은 모르는 거예요. 죽을 줄 알면서 매달리는 거, 참 안타까운 거지요. 허철 광대 영통해서 왕래가 자재무애(往來自在無礙)다.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자재하고 걸림이 없다. 금일 영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서 이 향단(香壇), 향을 늘 피운다고 향단이라고도 하거든요, 영단을. 향단에 와서 이 법의 공양을 잘 받아라. 이렇게 의식을 봉행하는 것이 영단 의식이거든요. 證入樂鄉증입약향一從違背本心王 幾入三途歷四生일종위배본심왕 기입삼도역사생今日滌除煩惱染 隨緣依舊自還鄉 (入室偈)금일척제번뇌염 수연의구자환향 (입실게) 그리고 영단의식에서는 이 신령스러운 마음이 한 번 세속에 물듦으로 인해서, 이게 이제 신령스러운 마음을 본심왕(本心王)이라고도 하는데, 근본 본, 마음 심, 임금 왕, 본심왕, 신령스러운 마음이 세속에도 능하고, 청정에도 능하기 때문에 그냥 세속적인데 물들었어요. 근데 세속적인데 물듦으로부터 삼도 사생(三途歷四生)에 들어갔다 나왔다. 삼도는 지옥 아귀 축생, 사생은 태생 난생 습생 화생, 태로 나고 변화로 나고. 이런 여기에 이제 늘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금일 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만이 오늘 이 영단에 떡 모셔서 그 세속에 물든 번뇌를 싹 다 버리니까 오직 그 신령한 혼령으로만 돌아간다. 그러니까 수련의구(隨緣依舊), 그저 마음대로 옛날처럼, 환향(還鄉)이라고 쓰는데 신령한 본바탕, 그걸 돌아갈 환, 고향 향, 환향이라고 신령한 나의 세계로 돌아간다. 我今以此香湯水 灌浴孤魂及有情아금이차향탕수 관욕고혼급유정身心滌除令清淨 證入眞空常樂鄉 (灌浴偈)신심세척영청정 증입진공상락향 (관욕게) 그러면 이게 신령 삼매에 들어야 이 세속 원한이 싹 없어져요. 신령 삼매에 들지 못하면 세속 의식으로는 세속 원한을 풀 수가 없어요. 세속 생각을 가지고는 세속에 한 되는 거, 원 되는 거, 불평불만을 풀 수 없어요.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신령 삼매로 탁 들어가면 이 세속적인 거 모든 게 허공에 뜬구름과 같아서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릴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돼요. 그때 이제 모든 세속적인 그런 마음의 한들이 다 녹아 버려요. 흔적도 없이 녹아버려요. 그래가지고 이걸 환향이라고 그래요. 고향으로 돌아간다. 신령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또 모든 세속적인 걸 다 씻어서 상락향으로 돌아간다. 여기는 환자를 안 쓰고 증입(證入)이라고 쓰는데, 증명할 증자, 들어갈 입자, 내 마음 그대로 깨달음으로 들어간다. 이거예요. 마음 깨달음을 증명할 증자를 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이건 뭔 말이냐. 마음 눈으로 본다. 마음 눈으로. 이 얼굴 눈은 익힌 대로 봐요. 그래서 안 익힌 건 못 봐. 눈으로 본다고 그러는데 그거 아니에요. 익힌 대로 보는 거예요. 익힌 게 보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한 번도 안 본 거는 봐도 몰라요. 이상해요. 그래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한 번도 안 본 거 있잖아요. 그거 모르고, 한 번도 안 들어본 얘기는 몰라요. 내가 절에 처음 와 가지고 심지법문한다고 그래서, 심지법문이 마음 심, 땅 지. 땅 지는 비유고, 마음 법문을 심지법문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심지는 그 산촌 시골에서 호롱불 심지 그거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호롱불 얘기를 왜 하지.’ 그렇다고. 그러니까 익힌 게 없으면 들어도 모르고, 익힌 게 없으면 봐도 몰라요. 근데 이 영혼이라는 거는 그냥 알아, 그냥 알아요. 이걸 증입이라고 그래요. 스스로 그걸 깨달아서 알지 들어서 아는 게 아니다. 그래서 상락향에 들어간다고 그래요. 상락향. 항상 즐거운 고향에 돌아간다. 그런 인연을 이루는 것이 영단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대령을 해서, 이렇게 영가를 깨끗하게 해가지고, 그다음에는 시식을 해요. 그다음에 극락세계로 다 보내드리고. 이런 일이 이루어지거든요. 그래서 오늘 법문은 영단의식의 신령한 인연 이야기였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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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1월 7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11-07
지심제청 지심제수 世身無住 生滅無定세신무주 생멸무정 猶如露電 夢幻泡影유여로전 몽환포영 本身靈明 寂照含空본신영명 적조함공却觀世間 相似昨夢각관세간 상사작몽나무아미타불 오늘 천혼 당령, 천도하는 혼령에, 해당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진관사에서 대법회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영가께서 극락세계에 가는데 극락세계는 어떻게 가는가. 세신(世身)은, 세상 세자, 몸 신자, 세신은 부모에게서 받고, 세상에서 자랐는데, 부모 떠나고 세상 떠나면 없는 몸이다. 그걸 세상 몸이라고, 세신이라고 하죠. 이 세상 몸이라는 것은 부모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고, 또 세상에 있는 공기, 세상 음식, 세상 의복, 이 세상 물질 떠나서 이 몸은 없다. 그런데 이 세신은 머묾이 없다. 무주(無住)하여, 없을 무, 머물 주, 머묾이 없어서, 생멸이 무정이니, 이 나고 죽는 것이 정해진 게 없다. 생멸이 무정(生滅無定)이라. 태어나서 언제 이 몸을 마칠지, 어떻게 마칠지 전혀 정해진 게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몸이 나고 죽음이 정해진 거 없는 것이, 마치 비유로 들자면,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고,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猶如露電 夢幻泡影), 이런 말씀인데요. 이슬이라는 건 뭐냐. 이 몸이라는 게 가만히 보면 신여조로(身如朝露)라. 아침 이슬이다. 아침 이슬이 처음 생길 때는 아주 영롱한데, 해가 뜨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게 아침 이슬인데, 인생이라는 게 초로(草露)와 같다.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 이제 이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또 이 세상 몸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어떻게 빨리 지나가는지 번개와 같다. 한평생이 번개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사람은 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데, 과거가 꿈과 같다. 내 개인의 과거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내 생각 속에만 있는 게 내 과거인데, 나의 과거에 좋았던 일이나 힘들었던 일이 전부 꿈과 같다. 그리고 세상사가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문화라든지 형식이라든지 역사가 다 환과 같다. 환이라고 하는 것은 허깨비를 말하는데 허깨비가 뭐냐. 사람 인형을 만들어서 그 뒤에서 다른 사람이 그 인형을 조종할 때, 뒤에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그 인형을 환이라고 그래요. 허깨비라고. 그래서 이제 성 위에 인형을 올려놓고 그 성 뒤쪽에서 줄을 올렸다 내렸다 해서 그 성 담 위에 있는 인형을 움직이는데 그걸 보고 환이라 그러고, 그 뒤에서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이거죠. 그러면 이 세상 만물이라는 게 사람들이 다 만드는 대로 만들어지는 거다. 그래서 세상 만물을 환이라고 그래요. 허깨비라고. 정해진 게 없고. 사람들이 만드는 대로 초가집을 만들면 세상 만물에 초가집이 수북하고, 기와집을 만들면 기와집, 고층 빌딩을 만들면 고층 빌딩, 나무를 잘 가꾸면 살림이 울창한데 이걸 전부 베어내 버리면 그냥 민둥산만 보이고, 세상 만물은 전부 인간이 만들어내는 허깨비다, 이렇게 가르치고. 물거품이라는 게 있는데 물거품이라는 건 뭐냐. 인간의 감각이다. 사람은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감각이 견문각지(見聞覺知)라고 가르쳐요. 눈으로 보고 견, 귀로 듣고 문, 코로 입으로 몸으로 느끼고 각 의식으로 알고, 판단하고, 이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그냥 물거품처럼, 이게 영원한 게 아니고 사라져요. 이게 뭔 소리냐면, 태어났을 때 감각하고, 또 아동 시대의 감각하고, 소년 청년 시대의 감각하고, 노년 시대 감각하고, 이 감각이 다 틀려요. 그래서 그전에 전혀 나도 몰랐는데, 칠십이 넘어보니까, 우선 이 보이는 감각이 틀려요. 옛날엔 딱 보면 그냥 확 다 들어왔는데, 요새는 옆에 있는 것도 안 보여요. 눈앞에 가까운 것만 보이고,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 봐요, 늙으면.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맨날 없다고 그래요, “야 없다. 없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가면 바로 있거든요. 그게 감각이 틀려서 그래요. 나 그거 옛날에 몰랐어요. 맨날 없는 게 그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못 봐요. 그리고 기억도 어릴 때는 기억을 하는데 어제 한 거 기억 못해요. 그래서 이 감각이라는 게 영원한 게 아니고, 이게 물방울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건데, 그걸 모르면 그게 기억이 허망함을 모르게 된다. 다 틀리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감각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이 몸이 있는데 이 몸을 감각을 일으키는 뿌리라고 그래요. 근, 뿌리 근자. 감각을 일으키는 뿌리라고. 그럼 이 감각을 느끼려면 대상이 있어야 된단 말이죠. 보는 대상, 듣는 대상. 그래서 근이, 대상은 불교에서 경계 경자를 쓰는데, 경계, 근경(根境), 그래서 이 몸과, 몸과 다른 대상 경계에 딱 마주치면, 이걸 촉경(觸境)이라고 하는데, 어려운 말로, 몸이 경계에 접촉한다, 촉경. 그러면 이 몸에서 의식이 발동을 해요. 이걸 발식(發識)이라고 그래요. 촉경하면 발식을 하는 게 이게 근인데, 이 근이 노화된다든지, 근이 기능이 떨어지면, 발식 자체가 둔해요. 눈이 또 뭘 보는 게 그게 촉경인데, 촉경하면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거기서 의식이 일어나야 돼요. 발식을 해야 보지 발식을 못하고 이 몸이 그냥 시신이 됐다든지 하면 못 보는 거예요. 근데 이 몸이 숨 떨어지기 전에도, 이 몸의 이 뿌리 상태가 쇠약하니까, 보는 감각이나 듣는 감각이나, 그래서 나이 들면 옛날에 맨날 물어요, ‘뭐라고? 뭐라고?’ 그래서 다 싫어해요. 두 번 물으면 다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늙으면 숨지기 전에 이미 감각이 많이 3분의 2 이상이 죽어서 살았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세상의 몸이다. 그리고 그림자라는 게 있는데 노전몽환포(露電 夢幻泡). 포는 물결, 감각을 말하고, 그림자는 의식 자체를 말하는데, 뭐를 사람이라고 하느냐. 첫째는 숨을 쉬어야 사람이고, 그래서 숨 쉬나 이걸 꼭 확인하거든요. 두 번째는 의식이 있어야 사람이에요. 의식이 있나. 사람 알아보나. 이걸 묻는다고. 근데 이 의식이라는 게 전부 세상에서 익힌 걸 의식이라 그래요. 세상 의식. 그래서 이 의식을 불교에서 어떻게 깨달았느냐 하면은 현행(現行)의식, 나타날 현자하고, 행할 행자하고, 현행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밖으로 움직이는 의식인데요, 외현(外現)인데, 이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의식이고, 들을 수 있는 거 의식이고, 행동하는 거 의식이고, 이게 다 현행 의식인데, 보통 사람은 이제 이것만 알아요. 그런데 그 현행 의식이 한 번 경험이 되면 이게 전부 쌓여요.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고. 이걸 함장식(含藏識)이라 그래요. 포함할 함자, 저장할 장자. 내가 뭘 봤던 건 그냥 그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함장이 돼, 포함해서 저장이 돼요. 들었던 것도 저장이 되고, 이걸 줄여서 장식이라고도 하고, 안다 이 말이죠. 의식이라는 식자 포함해서 저장됐다 이 소리죠. 그리고 이게 어느 순간 되면 다시 나와요. 나오는 건 현행이고, 저장되는 건 장식인데, 그래서 나오는 그 기능을 종자라고 한단 말이죠. 장식은 또 종자식(種子識). 그래서 함장식, 종자식이 딱 속에 있어요. 다 함장 종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뭐 오늘 진관사에 다녀왔다.” 그러면 이게 다 함장이 되고 그게 종자가 돼서, 진관사라는 말만 들어도 오늘 다녀왔던 게 튀어나와, ‘그랬다. 그래서 진관사는 어떤 거다.’ 다 그 기억하는 대로 행동을 하게 돼요. 그래서 이거를 현행식, 종자식. 이 종자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봐도 몰라요. 내가 이런 걸 보면, 이거는 어릴 때부터 이거는 종이다, 이거는 글씨다, 종자가 딱 만들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이거 보면 ‘아, 이거 종이지, 글씨지’ 딱 알아요. 근데 이걸 전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 이거 내놓으면 이거 몰라요. 근데 이 종자식이 전부 행동하는 데서 생기고, 행동하는 것이 저장돼서 다시 또 현행으로 나오고, 현행이 다시 종자가 되고, 종자가 다시 현행이 되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해요. 이걸 세간 몸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그림자라는 건 뭐냐 하면은, 내가 물에 들어가서 물을 딱 보면 그 물 안에 내 모습이 있는데, 내가 그 물속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그 물속에 지금 그림자로 비춰진거다 이 소리잖아요. 거울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내가 뭘 보든지 자기 종자 의식으로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보는 건 자기 다 의식의 그림자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참 중요한 가르침이에요, 이 가르침이. 내가 사람을 봐도 ‘어떤 사람은 어떻다.’라고 속에 다 저장된 종자 의식에 따라서 지금 그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 저장된 종자대로 본다. 그러니까 이 앞에 있는 사람은 자기 종자 의식의 그림자라는 거죠. 그래서 그림자라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이제 요즘 심리학이나 다른 정신의학에서는 무의식이라는 말을 써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근데 불교에서는 무의식이라고 안 하고 종자식이라고 그래요. 그게 무의식보다 종자식이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소리예요. 무의식은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면서 행동하는 걸 무의식이라고 그러는데,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걸 의식이라 그러고, 여러 사람이 똑같이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는 걸 집단 무의식이라고 그러고, 또 개별 개별 행동하는 걸 개별 무의식이라고 그러는데, 불교에서 가르치는 거는 현행식, 종자식. 현재 움직이는 거는 현행식인데, 그 움직이는 바탕이 종자가 저장돼 있어서 그 종자에 의해서 현재 행동을 나타낸다는 거예요. 이게 현행이에요. 그러니까 한평생 산다는 게 전부 생각으로 살고, 몸으로 살고, 이렇게 허깨비로 살고, 번개같이, 살고 꿈같이 살고, 이슬같이 산다. 불교의 이 한 평생 사는 의미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종자 의식 속에는 뭐가 있나. 그거는 세신이라고 안 하고, 근본 본자, 몸 신자, 본신(本身)이라고 그래요. 본래 몸. 그럼 극락세계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없어지는 그 몸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몸도 생각도 세상 건 세상에서 사라져요. 근데 안 사라지는 게 있는데 그건 본래 몸이다. 본신이 있다. 그래서 이 본신이 뭐냐 하면, 의식이 아니고 성각(性覺)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본성이라는 성자, 깨달을 각자. 각은 안다는 말인데, 세상에서 익히고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본성이 안다. 그래서 이걸 성각이라고 그러고, 의식은 생각이 안다, 생각 의, 알 식. 그래서 이제 마음이라고 그럴 때 그 본성이라는 본성심이 있고, 세상에서 익혀서 세상대로 아는 의식심이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의식은 세상대로 보는 거고, 그 본성이 아는 거는 본래 마음이 아는 거다. 이거 성각. 의식. 극락세계는 성각이 가는 거예요. 의식이 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성각으로 돌아가서 딱 보면, 의식으로 볼 때는 좋고 나쁜 게 있는데,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쁘냐. 내 몸에 필요한 건 다 좋아요. 근데 내 몸에 필요치 않은 건 다 나빠요. 순전히 이 세상 몸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내 몸을 위해서 살아요. 나이가 드나 똑같아요. 나이 든 사람이라고 나은 거 하나도 없어요. 노인도 보면 순전히 자기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몸에 필요한 대로 말을 해요. 그러니까 인간을 믿으면 곤란해요. 그럼 누구를 믿어야 되냐. 그 본래 본성의 마음에 가까운 사람 말은 믿어도 돼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아버지 좋은 대로만 하게 돼요.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식 좋은 대로만 하게 돼요. 절대 그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볼 때는 이 몸에 필요 없는 건 다 원하질 않아요. 그런데 이 본성의 마음으로 보면 다 좋은 거예요. 나쁜 거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이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전부가 극락세계예요. 그래서 의식심에서 성각 본성이 아는 마음으로만 돌아가면 자기 엉덩이를 움직이지도 않고 극락세계에 간다. 그러니까 이게 의식심으로 보면 이게 괴로운 건데, 본성심으로 돌아가면 괴로움이 없어요. 전부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석가모니와 그 석가모니 대단한 제자들이 이걸 깨달은 거예요. 본성으로 돌아가면 모든 세계가 다 극락세계다. 의식으로 판단하면 내 몸에 좋은 건 좋다고 하고, 내 몸에 안 좋은 건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좋고 나쁜 게 있는 거를 사바세계라고 그러는데요. 사바세계라는 말은 고와 낙이 있다는 소리예요.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다는 소리인데, 극락세계라는 말은 괴로운 거 없다는 소리예요. 지극히 즐겁다. 그러니까 괴로운 건 하나도 없고 즐거운 것만 있다. 그거 왜 그러냐. 이 몸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본래 아는 지혜로 보니까, 하늘을 봐도 하늘이 즐겁기만 하고, 고통이 없고, 땅을 봐도 땅이 즐겁기만 하고 고통이 없어서 무유중고(無有衆苦)하고, 많은 고통은 하나도 없고, 단수제락(但受諸樂)이라, 다만 모든 즐거움만 받는다. 근데 어째서 그러냐. 의식심으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있는데, 성각심으로 보면 나쁜 건 없다. 나쁜 거 없는 걸 극락세계라고 하고, 법계실상(法界實相)이라고 그러는데, 법계는 온 우주인데, 우주의 진실상이다. 법계실상. 그럼 부처님은 거기에 갔어요. 근데 오늘 영가는 그런 업을 많이 못 익혔기 때문에 의식심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의식심으로 돌아가신 분이 성각심으로 머무는 극락세계에 어떻게 갈 수가 있느냐. 그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간다. 그걸 가피(加被)라고 그래요. 인도 받아서 가는 걸 가피로 간다. 가피라고 하는 건 더할 가, 증가할 가자, 입혀줄 피자. 자기 힘으로는 못 가도 이제 인도를 받으면 간다 이거거든요. 어린아이가 어른 따라가면 가듯이. 그래서 부처님의 가피로서 이 오늘 영가가 극락세계에 가시기를 발원하고 예경하는 것을 재를 올린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고요. 그러면 이런 공덕으로 오늘 영가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극락세계에 가시게 된다. 그러면 세신은 여섯 가지 비유로, 노 이슬, 전 번개, 몽 꿈, 환 껍데기, 포 물거품, 영 그림자, 이렇게 여섯 가지 비유로 세상의 몸을 설명하는데, 그럼 본래 몸은 어떤 거냐. 본신은 영명하다(本身靈明), 신령 령자, 밝을 명자, 신령스럽고 밝다. 신령스럽다는 말은 이 본신은 주소가 없어요. 이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산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이 몸을 움직이지만 몸에도 안 머물러요. 몸에도 몸 조사해 보면 그 신령스러운 성각의 마음이 안 보여요. 그래서 옛날 한자를 보면 그 마음 심자를 심장 모양으로 만들었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이 마음이 심장에 있는 걸로 알았는가 봐요. 그래서 마음 심자를 심장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그 심장 열어봐도 마음 안 보여요. 몸 열어봐도 마음 안 보여요. 그래서 이걸 영명성각(靈明性覺)이라고 그래요. 신령스럽게 밝은 본성의 마음이다. 영명성각은, 적조(寂照)가 적이라는 건 고요할 적잔데, 그림자가 없어요. 모양이 없어요. 그런데 항상 비추어 비출 조자. 적조가 얼마나 오래 많은 곳을 비추냐. 시간도 끝이 없고 공간도 끝이 없어요. 이걸 함공(含空)이라고 그래요. 머금을, 삼킬 함, 허공 공자. 허공을 다 삼켜버려, 끝이 없어요. 그래서 이 본신은 영명하여 적조가 함공(寂照含空)하니, 고요히 비치는 것이 허공을 다 삼켜버리니, 이게 우리 본래 몸이에요. 그래서 그 본래 몸을 떡 깨닫고 각관세간(却觀世間)하니, 다시 세상에서 받은 몸을 이렇게 보니, 본래 몸의 상태에서 세상 몸을 보니, 상사작몽(相似昨夢)이라, 상사라는 건 같다 이 말인데요. 작몽은 어제저녁에 꾼 꿈을 어제 작, 꿈 몽, 작몽이라고 그래요. 어제저녁에 꿈을 꿨는데, 오늘 아침 보면 꿈이 간데 없거든요. ‘다 엊저녁 꿈의 일이야.’ 이런 말이 있어요. 꿈꿀 때는 분명히 확실하게 있었는데, 꿈 깨고 나면 없어. 그래서 한 평생 이 몸 가지고 살 때는 너무 분명하고, 너무 아주 심각했는데, 한 목숨 딱 지고 나면 간 곳이 없어요. 남는 건 본래 마음뿐인데, 그 본래 마음은 아직 못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겨우 찾는다는 것이 또 세상 몸을 다시 찾아요. 이걸 윤회라 그래요. 극락세계에 못 가고 세상 몸을 다시 찾는다. 근데 극락세계에 가게 되면 이제 부처님 나라로 가는 거예요. 이걸 왕생이라 그러거든요. 가서 난다. 극락왕생. 극락왕생을 이제 안 하면 생사 윤회하는 거예요. 죽고 사는 걸 되풀이 하는 거지. 그래가지고 생사윤회냐 극락왕생이냐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생사윤회 극락왕생. 엊저녁에 꿈과 같아서 이게 내 본래 몸으로 세상 몸 보니까 이거 그냥 완전히 한바탕 꿈이었다. 그래서 도 닦는 사람이 이 의식의 마음을, 보고 듣고 하는 이 견문각지의 마음을 잠시 다 처음에는 모으고, 그 다음에는 살피고, 그 다음에는 맑혀서, 이 마음을 맑히는 건 아무것도 안 하면 저절로 맑혀져요. 하면 안 맑혀져요. 마음은 물과 같아서 이 더러워진 물을 맑히는 거는 그냥 가만 놔두면 맑혀져요. 근데 이걸 젓는다든지 막 움직이면 안 맑혀져요. 그래서 우리 혼란한 마음, 어지러운 마음을 맑히는 방법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요. 그럼 마음이 점점 조용해지고 점점 맑아져요. 마음이 어느 정도 맑아지면 잠시 잠시라도 이 세상 몸에서 본래 몸을 보는 때가 있어요. 그거를 뭐라고 하냐면 내가 이 몸을 벗어나 보는 체험을 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내가 이 몸이 있는데 이 몸에서 잠시 나와 보는 체험을 했다. 이 본래 몸을 경험했다, 이 소리예요. 내가 이 몸을 벗어나 봤다. 진짜냐. 모르죠, 다른 사람은. 근데 그게 사실이에요. 이 몸이 있는 상태로 그냥 본래 몸을 딱 본 거예요. 그리고 본 순간만은 이 세상 몸에서 벗어나 본 거거든요. 그러면 점점 그 생각을 맑히는 노력이 깊어지면 그 본래 몸에 딱 바탕을 두고, 이 세상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살아서 해탈하면 좋고, 그 다음 좋은 건 죽어서 극락 가는 거예요. 그다음 이제는 다시 죽고 사는 대로 되풀이 하는 거고. 그걸 가르치는 게 불교거든요. 그러니까 그걸 믿고 지금 이렇게 49재를 다 지내고 있는 거지요. 衆生廣大無有邊이나 如來一切皆護念이로다중생광대무유변 여래일체개호념 轉正法輪하야靡不至하니 昆盧遮那의境界力이로다 전정법륜 미부지 비로자나 경계력(華嚴經 世界成就品)(화엄경 세계성취품)나무아미타불 그러면 이 신령스럽고 밝은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장애가 전혀 없어요. 이게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게 없어요. 그래서 중생이 광대하다(衆生廣大), 넓고 크다 그러면 끝이 없다는 말이죠. 중생이 많고 많고, 무유변(無有邊), 그 끝이 없으나, 여래가 일체를 개혼념(如來一切皆護念)이라. 그 본성을 깨달은 부처님들은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을, 다 보살필 보호할 호, 생각 념, 다 보호해서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사람 눈으로 생각하면 몇 사람 못해요. 근데 이 본성의 마음으로 살피면, 멀고 가까운 걸 다 살필 수가 있다, 이런 얘기죠. 그래가지고 전정법륜(轉正法輪)의 법륜을 가르치는데, 바른 가르침을 펼쳐서, 바른 가르침이라는 게, 이 의식의 마음은 항상 몸을 의지해서 세상 것만 따라가니까 그거는 생사윤회밖에 안 되고 해탈이 안 된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본성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극락세계에도 가고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 자유를 느낀다. 이렇게 말하는 게 바른 가르침을 펼치는 거거든요. 바른 가르침을 펼쳐서 미부지(靡不至)하니, 이르지 않는 데가 없다. 구석구석에 다 이르는 게 이 본성으로 보살피는 노력이다, 이거예요. 이거는 비로자나 경계력(昆盧遮那 境界力)이라. 이 본성의 광명을 비로자나라고 하는데 비로자라는 건 대광명이란 소리예요. 대광명이라는 건 그늘 없는 광명, 그늘이 없어요. 또 시종 없는 광명, 처음과 끝이 없는 광명을 대광명이라고 그러는데, 그 대광명을 비로자나라 그래요. 비로자나 경계력이라, 비로자나께서 펼치는 힘이다. 그래가지고 이 깨달은 분이 머무는 세계가 극락세계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머무는 세계가 사바세계요. 사바세계는 괴로움이 있는 게 왜 괴로우냐. 이 몸을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몸에 안 좋으면 괴로운 거예요. 몸에 좋으면 즐거운 거고. 그래서 사바세계는 고락이 있고 극락세계는 고락이 없다. 이래가지고 비로자나 경계력인데, 오늘 영가께서 이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극락세계에 가서 왕생하십시오, 이 말씀이거든요. 지심제청 지심제수 西方淨土 極樂世界 壽光無量 極樂世界 서방정토 극락세계 수광무량 극락세계昆盧遮那 佛利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 비로자나 불찰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華藏剎海 莊嚴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화장찰해 장엄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 眞如實相 具足淨土 壽光無量 極樂世界에진여실상 구족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一念往生하고 一超往生하시어 無盡福樂 無盡受用하십시오일념왕생 일초왕행 무진복락 무진수용 서방정토 극락세계라(西方淨土 極樂世界), 서방은 백방(白方)인데, 동서남북을 할 때 서쪽을 백에다가 비유를 해요. 백방은 본성 세계다, 이 소리예요, 서방은. 본성 세계는 더러운 건 없고 깨끗한 것만 있다. 그래서 서방정토 백방정토 이 말이죠. 본성정토. 그게 본성 정토가 서방정토에요. 극락세계다. 근데 극락세계는 수광무량(壽光無量)이요,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어요. 무량수 무량광 이러거든요. 그걸 아미타불이라고 그래요. 무량수 무량광.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한 걸 아미타라고 그러는데, 나무란 말은 공경, 기원 공경하고, 그쪽 근원으로 돌아간다. 공경 기원을 나무라고 그래요. 그러면 무량수 무량광의 세계에 공경심으로 돌아간다. 공경심이라는 말은 다른 생각 없는 걸 공경이라고 그러거든요. 잡념이라고 하는 거는 공경이라고 안 하고, 그냥 한 마음으로 일심을 공경이라고 그래요. 어떤 사람이 뭐 하다가 ‘이거 해서 될까?’ 그러면 공경이 아니에요. 그냥 되는 걸로 한 마음으로 하는 걸 그걸 공경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수광무량 극락세계. 비로자나 불찰정토(昆盧遮那 佛利淨土). 이 비로자나불의 찰이라는 건 이 진토 티끌 흙덩어리를 찰이라고 그러는데, 그 비로자나불이 머무는 국토, 진토 세계, 불찰 정토, 거기가 수광 무량 극락 세계다. 또 화장찰해 장엄정토(華藏剎海 莊嚴淨土), 화는 공덕인데 많은 공덕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바다, 바다도 많다는 소리고. 그 불찰의 많은 세계에 온갖 좋은 걸로 꾸며져 있는데, 나쁜 거 하나도 없이 좋은 걸로만 꾸며져 있는데 그걸 장엄이라고 하거든요. 장엄이라는 건 좋은 걸로만 가득하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그렇게 좋은 걸로만 가득한 정토, 수광이 무량한 극락 세계. 진여실상 구족정토(眞如實相 具足淨土). 참 그대로 본성, 참 그대로 진실상에 온갖 것이 없는 거 없이 좋은 건 다 있다. 그걸 구족이라고 하거든요. 구족, 갖추어졌다. 그 정토 수광무량 극락세계에 오늘 영가께서 일념왕생(一念往生)하시고, 한 생각으로 가서, 한 일자, 생각 념자. 가면 될까 안될까 이 두 생각 갖지 말고, 한 생각으로 왕생, 가서 나시고, 일초왕생(一超往生), 한 번 딱 떼서, 한 걸음에, 한 일자, 뛸 초자, 한 걸음 딱 옮겨서 바로 가서 나셔서, 왕생하셔서, 무진복락(無盡福樂)을, 끝없는 복과 즐거움을 무진수용(無盡受用)하소서, 끝없이 받고 쓰소서. 이런 법문으로 오늘 법문을 다 마쳤습니다. 49재 잘 모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