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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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 27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5-27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12 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 12--無量遠劫卽一念(11)--次四句 約世時 示攝法分齊----무량원겁즉일념(11)--차사구 약세시 시섭법분제--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열두 번째 시간이고, 또 의상조사 법성게 30구 중에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제 11구를 보는 시간입니다. 무량원겁즉일념 10번을 독송을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즉일념 이 법성게 30구는요, 삼세제불 정각세계. 삼세,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걸 정각(正覺)세계라고 하거든요. 바른 깨달음. 정각세계를 말씀하신 내용이 법성게 30구고요. 그러면 삼세제불이 정각을 하시고 어디에 머무시느냐. 해인삼매에 머무시는데, 그 해인삼매는 뭐를 말하는가. 법성이 원융한 것이 해인삼매다. 법성원융 해인삼매. 그럼 법성원융이라는 건 뭐냐.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하나와 모든 것은 무장무애하다. 장애가 없다. 또 평등무이하다, 평등해서 둘이 없다. 이게 법성원융이거든요. 그 법성원융에 항상 머물러 계시는 것을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법성게는 삼세제불이 깨달음을 얻으신 정각 세계고 삼세제불이 항상 머물러 계시는 해인삼매다. 그런데 이제 그걸 설명하는 와중에 법성원융무이상에서부터 네 구절이 있는데,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無名無相絶一切 證智小知非如境), 이제 거기까지는 그 정각세계 해인삼매를 직접 말씀하신 거라 그걸 증분이라 그래요. 삼세제불이 증득한 내용이다. 이제 그다음부터 진성심심미묘법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이제 거기서부터는 교분이라고 그래서, 그 법성원융무이상을 중생들에게 가르치는 그 설명하는 부분이에요. 근데 그 설명 중에 이 법성은 심심하다. 심히 깊다. 미묘하다. 미묘,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기는 하는데 항상 활동한다. 그걸 미묘라고 그래요. 또 불수자성수연성이라. 한 모양을 지키지 않고 하늘에서는 하늘이 되고, 땅에서는 땅이 되고, 사람에서는 사람이 되고, 바다에서는 물이 되고, 이렇게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불수자성수연성. 이제 그다음부터는 하나를 가지고 설명을 해요. 하나를 가지고. 일중에 일체가 있다. 하나 속의 일체다. 이게 해인삼매의 경지예요. 다중의 일이다. 많은 속에 많은 것이 곧 하나다. 하나가 곧 많은 것이다. 미진이 시방이다. 한 가는 티끌이 시방세계다. 일미진중함시방. 또 일체진중역여시, 티끌 하나하나에 다 시방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평등무이하다. 평등해서 둘이 없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로 우주법계를 설명하는 것이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거기까지가 하나의 가는 티끌에 우주법계가 다 있다. 이렇게 법성원융을 설명해요. 이제 오늘서부터는 무량원겁즉일념. 무량원겁이라고 그러면 한량없는 세월을 무량원겁이라고 그러거든요. 일념이라고 그러면 시간 중에 제일 짧은 시간, 1찰나, 1찰나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는 한 일자, 생각 염자. 일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일념은 생각도 되지만 찰나에요, 찰나. 그래서 무량원겁이 곧 1찰나다. 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일찰나가 곧 무량겁이다. 그다음에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이 시간 시간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있다. 또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함께 있긴 함께 있는데 둘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열이 되고 그게 아니라, 하나는 하나대로 둘은 둘대로 섞여서 어지럽지 않다는 거예요. 이렇게 돼서 이제 오늘서부터는 이 시간을 가지고 법성원융, 해인삼매를 설명하는 부분이에요. 지금까지는 티끌을 가지고 법성원융 해인삼매를 설명했어요. 約世時者 所謂九世者 過去過去 過去現在 過去未來 現在過去 약세시자 소위구세자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현재과거現在現在 現在未來 未來過去 未來現在 未來未來也현재현재 현재미래 미래과거 미래현재 미래미래야 三世相即及與相入 成其一念 摠別合明故爲十世 一念者 約事念說也삼세상즉급여상입 성기일념 총별합명고위십세 일념자 약사념설야(法界圖記原文. 叢髓錄卷下之一)(법계도기원문.총수록권하지일) 그런데 의상 스님께서 직접 저술을 하시기를, 약세시자(約世時者)는 세시, 삼세, 시간, 이걸 우리가 그냥 시간이라고 하거든요. 세는 삼세고, 시는 시간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거는 이 동아시아 중국식으로는 시간을 인식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한문을 보면 시간이 없어요. 예를 들면 <안녕> 그러면 “안녕하셨습니까?” 과거의 형인지, “안녕하십니까?” 현재 형인지, “안녕히 계십시오.” 미래형인지 구분이 없어요. 그런데 인도는 꼭 설명하려면 과거 조상부터 설명해요. 이렇게 삼세가 분명한 게 인도식이에요. 그래서 이제 시간은 인도식이기 때문에. 중국 한문을 보면 시간이 없다. 한자가 다 그래요. 삼세 표시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이제 사람들이 생각이 어느 쪽으로 발전하는가 이거는 다른데, 그걸 요즘 말로 하면 문화라고 그래요. 문화. 그 생각이 각자 다르게 발전했다 이거거든요. 세시를 근거한다면 소위 구세자(所謂九世者)는 구세가 있는데 삼세를 늘리면 구세예요. 왜 그러냐면 과거에도 과거가 있고, 과거에도 현재가 있고, 또 과거에도 미래가 있고, 이게 이제 과거의 삼세라는 거야. 과거 과거, 과거 현재, 과거 미래(過去過去 過去現在 過去未來). 또 현재에도 과거가 있고, 현재에도 현재가 있고, 현재에도 미래가 있고 이게 현재 삼세고요. 미래에도 과거가 있고, 미래에도 현재가 있고, 미래에도 미래가 있다. 이렇게 돼서 삼세에 각각 삼세가 있으니까 구세다 이런 말씀이죠. 그런데 삼세가 상즉(三世相即)해서, 삼세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과거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미래가 되고, 서로 붙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중요한 건데, 예를 들면 내가 어릴 때, 태어날 때, 얼마나 작았겠어요. 근데 지금 이 모양이 되먹었잖아요. 그런데 그 어릴 때 그게 없어졌느냐? 안 없어졌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과거가 현재다. 근데 이 모양이 또 이제 앞으로 숨도 못 쉬게 될 때는 지금하고 또 다를 거 아니에요. 그럼 지금 모양이 없어지느냐?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미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삼세가 상즉한다. 곧 즉자니까. 그것이 곧 그것이다, 이 말이죠. 현재가 곧 그거 과거고 현재가 곧 그거 미래다. 그러니까 이 화엄경 공부를 하다 보면 그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알면 아주 편해요. 그것이 그것이다. 죽음이 곧 삶이다. 삶이 곧 죽음이다. 과거가 곧 현재다. 현재가 곧 미래다. 그러니까 과거 그것이 곧 지금 이것이다 이런 식으로요. 이렇게 돼서 삼세가 상즉하고, 또 삼세가 상입(相入)해서 과거는 현재 속으로 들어가고, 현재는 미래 속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또 미래는 어디로 들어갈까요? 과거 속으로 또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게 법을 가만히 알면, 미래라는 게 우리 어릴 때 모습하고 다름이 없어요. 지금 이제 택도 없이 뭐 100년 후에는 어찌 될까. 그거 철 모르는 소리여. 100년 후에도 생로병사가 있고 우비고뇌가 있고 희로애락이 있어요. 100년 후에도.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는 거예요. 비행기 타고 다니나 걸어 다니나 똑같이 근심 걱정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법성원융, 원융, 원융이라는 거는 다 통한다, 이 말이잖아요. 원융에서 보면 미래가 곧 과거인 거예요. 그러니까 뭐 어릴 때는 어른 됐으면 좋겠다 그러는데, 어른 되면 차라리 어릴 때가 낫죠. 그러니까 뭐 다를 바가 없는 거, 그게 해인삼매요. 딱 보면 억만 년이 지나가도 지금 이 눈앞의 일과 다름이 없다. 눈앞의 일이 억 만년 일이다. 이걸 보는 거예요. 지금 이 죽는 것이 사는 거와 다름이 없다. 그것이 곧 그것이다. 이제 이렇게 돼야 그게 철든 거예요. 그게 철 들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 돼서 삼세라는 게 이제 이런 건데, 삼세가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들어가서, 결국은 삼세가 다 뭐가 되느냐고 그러면, 현재 1찰나를 이룬다 이거죠. 현재 1찰나의 과거 과거, 현재 현재, 미래 미래가 다 들었다는 거지. 그래서 그걸 현재일념이라 그래요. 과거, 구세, 삼세 확장, 구세가 현재의 1찰나가 된다. 그래서 현재의 1찰나하고 과거 현재 미래 구세를 합치면 그걸 10세라고 그러거든요. 10세, 구세에다가 현재 1세 1찰나를 합치니까 그걸 10세라고 하거든요. 그래가지고 뭐가 되냐. 성기일념(成其一念)이라. 곧 일찰나를 이룬다. 그래서 총별을 합명고(摠別合明故)로, 총과 별, 이제 총이라고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 또 과거 삼세, 현재 삼세, 미래 삼세, 구세 이게 별이잖아요. 따로따로 떨어진 것들. 이게 전부 합친 현재 1찰나 이게 총이잖아요. 전체 그래서 총별을 합쳐서 부르기 때문에 10세라고 한다. 이게 이제 시간을 얘기하는 거죠. 일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거, 현재 한순간, 현재 한 생각, 드러난 것을 말한다. 안 드러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한순간 느낄 때 그게 일념이고, 그게 일찰나다 이거죠. 근데 이거는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냥 일찰나 현재예요. 그걸 말한다. 이렇게 의상 스님께서 가르쳐 놨고요. 佛子菩薩摩訶薩 有十種知三世 何等爲十 所謂 불자보살마하살 유십종지삼세 하등위십 소위①知諸安立 ②知諸言語 ③知諸談議 ④知諸軌則 ⑤知諸稱謂 ①지제안립 ②지제언어 ③지제담의 ④지제궤칙 ⑤지제칭위⑥知諸制令 ⑦知其假名 ⑧知其無盡 ⑨知其寂滅 ➉知一切空 ⑥지제제령 ⑦지기가명 ⑧지기무진 ⑨지기적멸 ➉지일체공是爲十菩薩以此 普知一切三世諸法 시위십보살이차 보지일체삼세제법(80華嚴經卷제53.離世間品)(80화엄경권제53.이세간품) 또 화엄경 이세간편을 보면, 이 도대체가 이게, 시간이라는 게 뭐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는 삼세 고금인데, 과거 현재 미래, 옛날과 지금, 삼세 고금인데, 이 삼세 고금이 시간으로만 존재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뭘로 존재하냐. 이 시방 공간, 시방이 있잖아요. 동서남북에다가 사이사이 간방을 합하면 8방이잖아요. 또 상방 하방을 합하면 시방이란 말이에요. 이 삼세 고금은 시방 공간하고 항상 함께 있어요. 그래서 이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요.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요. 그래서 이 삼세라고 하는 세자와 공간이라고 하는 간자를 합쳐서 세간(世間)이라 그래요. 세간. 이 세간이라는 말이 이게 불교 용어예요. 또 인간이라는 말도 불교 용어인데, 인간이라는 건 뭐냐 하면, 중생 세계가 여섯 군데가 있는데, 지옥, 아귀, 축생이 있고, 인간이 모여 사는 인간 세상이 있고, 세계가 있고, 천신이 있는 천궁이 있고, 그 중간에 또 아수라 세간이 있는데, 인간 세상 이 말이에요. 육도 중에. 그런데 이것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으로 바뀌어졌어요. 이 인간도 불교 용어고, 세간도 불교 용어고,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삼세라는 거와 법계라는 말을 합치면 세계가 되는데 이게 전부 불교 용어인데 세속화돼서 대중 용어로 쓰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그러면 인간이라는 거는 본래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킨 게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인간이라고 그랬어요. 천상 인간 아수라 이렇게. 근데 요즘엔 사람 하나하나를 또 인간이라고도 하거든요. 근데 인간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욕할 때 인간이라고 그래요. “그 인간 나쁜 인간이야” 이렇지, 그 인간 좋은 인간이야 그렇게 안 해요. 그런데 좋게 말하려면 꼭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우리 한자 유통 과정을 보면 한자로 쓰면 욕을 해도 좋게 보이는데, 오직 이 인간만은 한자로 쓰면 욕이 되고, 한자를 안 쓰면 좋게 돼요. 특이하게 발전된 게 하나 있어요. 이게 한자로 갖다 붙이면 아무리 나쁜 소리도 좋게 들려요. 그런데 오직 인간만은 사람한테 격이 떨어진다. 사람 그럴 때는 다 격이 높고, 인간 그럴 때는 나쁜 인간, 이렇게 특이하게 그렇게 돼 있어요. 아주 이상해요. 괜한 소리를 했고요. 근데 이게 이제 세간이다, 시간이다, 공간이다, 이런 것이 전부 불교에서는 다 세간이라고 그러는데, 이 세간을 화엄경 이세간품에서는 어떻게 이해했냐. 10가지로 이해를 하는데요. 첫째는 세간은 지제안립(知諸安立)이라. 세간이라고 하는 건 무조건 안립이다. 뭘 안치하고 건립하고 뭘 만드는 게 세간이에요. 뭘 안치를 해요. 여기다 이걸 안치하고, 저기다 저걸 안치하고, 여기다 이걸 건립하고, 저기다 저걸 건립하고, 그래서 안립이라고 세간을 이해를 했어요. 뭘 세우지 않고 이리저리 배치를 안 하고, 나열을 안 하면 세간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세간은 안치하고 건립하는 게 세간이다. 뭘 자꾸 만들어요, 세간에서는. 그리고 두 번째는 지제언어(知諸言語)라.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임을 알았다. 언어인 줄을 안다. 세간에는 말이 많아요. 언어. 말 없는 세간은 없어요. 어디든지 말이 있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담의(知諸談議)인 줄을 안다. 말하고 의논을 해요. 의논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다가 의미를 붙인다는 거예요. 의논할 의자, 말씀 담자. 그냥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거기다가 생각을 붙여요. 그래서 말은 담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 한 사람 말만 들으면 절대로 안 돼요. 왜냐하면 말은 말하는 사람 생각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며느리 말 들으면 며느리가 옳고, 그다음 뭐가 들어갔죠? 시어머니 말 들으면 시어머니가 옳다. 왜 그러냐면 말은 말인데 거기에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세간이라는 거는 말과 생각이다. 이렇게 이해를 했고요. 그다음에 네 번째는 지제궤칙(知諸軌則)이라. 모든 궤칙이라고 이해를 했다. 법칙이 있어요, 세간에는. 그래서 세간에서는 꼭 “그러면 안 돼, 그래야 해”, 이런 말이 있어요. 이게 법칙이에요. 법칙을 강조하는 세간은 없어요. 희한하지. 또 다섯 번째는 지제칭위(知諸稱謂)라. 명칭이 있음을 알았다. 세간에서는 명칭이 굉장히 중요해요. 명칭. 그래가지고 충청도는 그러는데 머리가 허연 분 보고도 새언니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본래 태어난 집에서 태어난 언니가 있고, 밖에서 들어온 언니가 있잖아요. 시집 온 언니. 시집 온 언니는 머리가 허예서 노인이 돼도 언니야 이래 안 하고, 새언니 이래요. 참 이게 명칭이에요. 그냥 언니 안 한다고요. 야 그거 희한하더라고. 그러고 고모부가 있잖아요. 고모한테 장가 온 그런 사람은 경상도에 오니까 꼭 새 아재 이러더라고 새 아재. 그러니까 아저씨가 있는데, 그냥 뭐 당숙도 아니고 뭐 이런 게 아니고, 새로 들어온 아저씨라. 그러니까 새 아재, 새 아재 그래. 노인 보고 왜 새자를 붙이나. 노 아재 이러면 뭐. 노 아재 이러면 기분 나쁘겠죠. 그러니까 이게 명칭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살려면 그 사람에게 적합한 명칭부터 찾아내야 돼요. 저 사람에게 뭘로 불러줄 때 저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고 좋아할까. 그냥 막 덮어놓고 아무 말이나 막 갖다 붙이면 원수져요, 원수져. 이게 세간이에요. 그래서 명칭이라고 세간을 이해를 했고. 그다음에는 제도와 법령(知諸制令)이라고 이해를 했어요. 세간에는 반드시 제도와 법령이 있어요. 그래서 이 제도와 법령이라는 것은 뭐 글자로만 된 게 아니라 엄마한테도 그러면 안 돼 이러고 있거든요. 이게 제도와 법령이에요. 꼭 이게 세간이에요. 되고 안 되는 게 있어요. 그리고 또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 가자, 이름 명자. 전부 거짓 이름이다, 이렇게 이해를 했어요. 전부 가명(知其假名)이다. 세간은 전부 가명이에요. 실제가 하나도 없어요. 이 소리를 하니까 반응이 없네요. 실제 그래요. 전부가 가명이에요. 이렇게 이해를 했고. 그다음에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이다. 나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적멸(知其寂滅)로 이해를 했고. 세간이라고 하는 건 일체가 공이다(知一切空) 모든 것이 인연법이다, 이렇게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이것이 불보살이 세간을 이해하는 기준이에요. 세간이라는 인연법이고, 생멸도 없고, 거짓 이름이고, 전부 이거 말뿐이고, 생각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한 거예요. 一塵十方 十方一塵 一念遠劫 遠劫一念 일진시방 시방일진 일념원겁 원겁일념唯是一心 常放光明 塵塵物物 毘盧現現유시일심 상방광명 진진물물 비로현현三世諸佛 成就正覺 通何境界 住何境界삼세제불 성취정각 통하경계 주하경계了達空寂 通證心光 舊來不動 常住法界 名爲諸佛요달공적 통증심광 구래부동 상주법계 명위제불 이렇게 돼서 이제 불보살이 이걸 보고 세간에 머물러서는 생로병사 우비고뇌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첫째가. 세간은 전부 거짓 이름이고, 인연법이고, 이런 건데, 여기에 집착을 해서 여기에 기대고 머물러서는 생로병사가 없어질 리가 없고, 우비고뇌 근심 걱정이 없을 리가 없다. 이런데 이제 범부들은 이 세간법에만, 세간법에만 의지해서 오래 살기를 바래요. 이 몸을 가지고, 건강하기를 바라고요. 자기를 또 믿어주길 바래요. 자기를 존경해 주기를 바라고. 세간법에는 이게 이루어지질 않아요. 절대 안 이루어져요. 그리고 부모들이 제일 착각하는 게, 자식한테 많이 해주면 부모의 공을 이해할 줄 알아요. 전부 불효자 놈이 많이 받은 놈이에요. 자식이라는 건요. 주면 줄수록 더 받으려고 하지, 주면 줄수록 부모의 은공을 아는 게 아니에요. 썰렁한가 이 말은.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이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준다고 은혜가 돌아오는 게 아니다. 또 적게 준다고 내가 부자 되는 게 아니다. 이게 세간이에요. 그래서 이런 걸 가만히 보고 이 세간 말고 뭐가 있을 거다. 이래서 깨달은 게 이 법성원융 해인삼매인 거예요. 그냥 이게 깨달은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제 법성원용 해인삼매를 떡 보면 세간이라는 게 한 티끌이 시방 세계야. 시방 세계를 가도 가도 한 티끌뿐이야. 이게 이제 일미진중함시방이거든요. 일진이 시방이다. 또 시방이 일진이다. 시방 세계가 한 티끌뿐이다. 이러니까 이쪽 방소나 저쪽 방소나 그 방소에 붙어 있어 가지고는 생로병사 우비고뇌 근심 걱정을 면할 수가 없어요. 그 방소 없는 데 머물러야 돼요. 그게 법성원융 해인삼매예요. 뭔 소리인지 진짜 이게 참 기가 막히네. 또 일념이 원겁이요. 원겁이 일념이라 무량원겁이라고 그랬잖아요. 먼 세월 이게 원겁이고 일념은 일찰나 이게 순간이잖아요. 굉장히 뭐 천년 만년 그러면 이게 긴 것 같고, 1찰나 그러면 짧은 것 같은데, 1찰나가 천년 만년 세월과 하나다, 하나 없는 일찰나는 없다 이거지. 또 원겁이 일념이라.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한 티끌이고, 시방 세계고, 일찰나고, 무량원겁이고 오직 한 마음뿐이다 이걸 안 거예요. 한 마음이 없으면 시방세계도 없고 한마음이 없으면 일찰나나 무량겁도 없다. 그래서 화엄경은 한마음으로 돌아가요. 일체가 유심이에요. 일체가 오직 마음이다. 그래서 이제 보살이 되면 유심삼매, 오직 일체는 삼천 대천세계의 일체 중생은 다 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마음뿐이다. 여기에 딱 들어가면 이게 팔지보살이에요. 그래서 이제 마음으로 모든 걸 해결하지, 다른 걸로 해결하지 않아요. 오래 살아서 해결하지 않고, 부자 돼서 해결하지 않고, 삼매에 들어서 해결을 해요. 그게 팔지 보살 이상인 거예요.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떻게 되냐. 과거 현재가 없이 상방광명(常放光明)이요. 항상 광명을 뿜어낸단 말이에요. 과거 현재가 없어요, 마음은. 상방광명. 그래가지고 이 유심삼매에 떡 들면 진진물물(塵塵物物)이, 티끌티끌 물건 물건이 그게 자체적으로 뭐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심 광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티끌티끌 물건 물건이. 그래서 이걸 생각으로 보면 이게 이제 물건이고 티끌인데, 이걸 유심삼매에 들어보면 이것 자체는 없고 마음 광명이 나타난 것이다. 아득하고 아득하죠. 그래서 깨닫기 전에는 물건뿐인데, 깨달은 후에는 마음 광명뿐이에요. 저 하늘을 봐도 하늘을 보는 마음광명이 있어. 사람을 봐도 사람 보는 마음광명이 있어요. 일심 광명. 내 몸을 봐도 내 몸을 보는 일심 광명이 있어요. 근데 깨닫기 전에는 몸만 있지 내 몸을 보는 마음은 없어요. 그래서 이제 보살이 공부할 때 첫 번째 딱 느끼는 과정은 잠시동안이라도 내 몸에서 생각이 이렇게 벗어나서 내 생각으로 내 몸을 쳐다보는 공부가 있어요. 이놈이 어디서 요렇게 태어나서, 어머니 아버지 요렇게 만나서 지금 요 모양으로 살고 있는데, 조금 지나면 다 사라질 놈이다. 이걸 보는 공부 과정이 있다니까요. 내 마음이 내 몸을 나와서 몸을 쳐다보는 공부예요, 그게. 이런 거는 안 가르쳐줘야 되는데 이거.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 잘 몰라요. 내 마음이 내 몸을 바라본다 이거예요. 내 마음, 내 몸 바라보는 마음 공부. 그런데 이제 여기서 공부가 더 깊으면 자기 마음이 온 우주에 가득한 거예요. 온 우주에. 우주에 가득한 자기 마음을 가지고 자기 현재의 몸을 바라볼 때, 이거는 저 허공에 구름 한 점만도 못 하고, 그 많은 백사장의 모래 한 점만도 못한 게 내 몸이에요. 그래서 해인삼매로 자기 몸을 바라보는 그런 마음 공부가 있고, 처음에는 내 마음이 내 몸을 나와서 내 몸을 바라보는 마음 공부가 있는데, 이게 보살이 공부해 나가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중생은 내 몸이 전부인 거예요. 그래서 내 몸은 있는데, 내 몸 바라보는 마음은 없어요. 있는데 모르는 거죠, 이제. 이런 거예요, 이게. 이렇게 돼 가지고 이제 해인삼매를 깨달으면 유시일심(唯是一心)이니, 오직 한 마음이니, 상방 광명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진진물물이 티끌티끌 물건 물건이 비로현현(毘盧現現)이라. 비로자나불은 마음 광명을 말하는데, 비로자나불 마음광명이 나타난 곳이다. 그래서 저 기와 집을 봐도 저게 마음 광명이 나타난 것이고, 사람을 봐도 마음 광명이 나타난 것이고, 하늘을 봐도 마음 광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보살도 사람을 볼 때는 사람만 봐요. 그래서 조금 ‘아차 저게 마음 광명이지’ 이렇게 깨닫는 수가 있어요. 사람 죽은 걸 봐도 사람 죽었다 이렇게 보다 ‘아차 저 사람 죽은 게 아니라 마음 광명이 나타난 것이지’. 그게 이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어린애가 처음에 걸음 걷는 거 연습할 때, 처음에 한 걸음 걷다가 또 쓰러지고, 한 걸음 걷다 쓰러지고 그러지만, 나중엔 잘 걷잖아요. 그거하고 똑같아요. 공부도 그런 게 있어요. 이렇게 해 가지고 삼세제불은 성취정각(三世諸佛 成就正覺)인데, 무엇을 통달했고 어디에 머무는가(通何境界 住何境界). 첫 번째 삼세제불은 제일 하는 일이 요달공적(了達空寂)이라, 시간도 물질도 공적함을 먼저 알아요. 이게 자성이 없고, 인연 따라 나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 이걸 요달공적이라 그래요. 요달이라는 건 안다 소리예요. 알 요자 통달할 달자. 이제 그다음에는 통증심광(通證心光)이라 모든 것이 마음광명임을 알아요. 이걸 심광을 통할 통자인데 전체라는 소리에요, 전체로 다 안다. 그래서 이제 팔지 이상 되면 뭘 봐도 마음 광명뿐인 거예요. 뭐든지 마음 광명이요. 처음에는 뭘 봐도 이건 공적한 거야, 자체가 없는 거야. 잠 와요? 이게 잠 올 수밖에 없어요. 이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라. 보통 모르는 소리 하면 잠 오거든요. 아는 소리 하면 막 눈이 그냥 생기가 나요. 그렇게 돼 가지고 이제 그래 되면, 이 모든 게 마음광명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다음은 구래부동(舊來不動)인데 옛부터 생사를 받은 일이 없어요. 이걸 부동이라 그래요. 의상 스님이 꼭 이걸 강조한 게 구래부동명위불 그랬잖아요. 구래라는 건 옛부터 이 말이에요. 옛 구자 올 래자. 옛부터 오면서 생사 죽고 산 일이 없다. 이게 이게 구래부동인데, 이게 뭐와 같으냐 하면 의상 선생님이 늘 강조를 했는데, 꿈에서 꿈을 깨기 전에는 꿈이 있었는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이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후에는 중생이 없었던 거예요. 이게 구래부동이라고 그래요. 꿈 깨고 나면 꿈이 없었던 거와 똑같다. 근데 꿈을 꿀 때는 반드시 꿈이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법계 상주라, 상주법계(常住法界)라, 그냥 법계에 항상 상방 광명인 거예요. 그냥 항상 광명을 일으키는 거예요. 이걸 정각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의 정각 세계. 그다음에 오늘 조금 일찍 왔는데, 내 평소보다 일찍 왔는데 내가 늦었거든. 그거 참 묘하지. 내가 더 일찍 왔는데 늦었어. 막 그런 줄만 아세요. 근데 이제 이쯤 되면 마쳐야 되는데, 내가 일찍 왔으니까 조금 더 하고요. 心不妄取過去法 亦不貪著未來事 심불망취과거법 역부탐저미래사不於現在有所住 了達三世悉空寂 불어현재우소주 요달삼세실공적(80華嚴經卷 제28. 十迴向品)(80화엄경권 제28. 십회향품) 窮證法性 海印三昧 圓滿具足 無障無礙 궁증법성 해인삼매 원만구족 무장무애不動一毛 已到所在 念念遠劫 塵塵全開부동일모 이도소재 염념원겁 진진전개 그러면 이제 이게 보살이 이 경지에 들어갈 때, 해인삼매에 어떻게 하면 들어가냐. 해인삼매는 비유고, 실제 들어가는 건 이 삼세 시방 공간을 보는 게 아니라 삼세 속에 들어가면 삼세가 없고, 시방 속에 들어가면 시방이 없다. 그 없는 게 뭐냐. 그게 법성이다 이래요. 산에 산이 없고, 물에 물이 없고, 사람에게 사람이 없는 것이, 그게 이제 법은 산이고 물이고 사람인데, 그 진실로 들어가니까 산에 산이 없어. 법에 법이 없어. 사람에게 사람이 없어. 그걸 법성이라고 그러거든요. 그 법성을 딱 접해 보니까 그건 원융무이해. 원융해서 둘이 없어. 이제 그거를 눈앞에서 항상 보고 있는 게 이게 해인삼매예요. 해인이라고 하는 건 비유인데, 바다에 온갖 달도 있고 별도 있고 해도 있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물뿐이에요. 물뿐. 그래서 모양은 보이는데 사실은 법성뿐이다. 그래서 법계는 법성이다. 법계는 우주 법계잖아요. 근데 우주 법계는 법성뿐이다. 법성은 뭐냐. 바다에 많은 그림자가 보이지만 물뿐인 거와 같다 이런 거죠. 법계는 바다 그림자와 같고, 법성은 바닷물과 같다. 그래서 이게 궁증법성(窮證法性), 법성을 궁극적으로 남김없이 다 깨달아 보니 해인삼매다. 여기에는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圓滿具足 無障無礙)하다. 여기에는 법성은 하나의 티끌 티끌에 모든 게 다 있어요. 이걸 원만구족이라고 그래요. 하나의 풀끝 하나에도 모든 게 다 들어 있고, 원만구족하고, 또 하나의 모래알 하나에도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원만구족해. 이것과 저것에 장애가 하나도 없고, 그거 하나하나가 없어진 들 생긴들 아무 장애가 없어요. 이게 무장무애에요. 법성원융 원만구족 무장무애 이런 거예요.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다. 그래서 부동일모(不動一毛)하고, 한 털끝도 움직이지 않고, 이도소재(已到所在)라, 이미 있는 곳에 도달했다. 이미 있는 곳이라고 하는 건 뭐냐 그러면, 있어야 할 곳, 도달해야 할 곳, 도달해야 할 곳이 있는 곳. 우리가 절에 가고 이렇게 할 때 보면 적멸보궁이라는 말이 있어요. 적멸보궁. 적멸이라는 건 생사 없다, 이거에요. 보궁이라는 말은 생사 없는 세계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보배 궁전이다, 이거예요. 그럼 우리가 이 적멸보궁에 가는 게 우리가 갈 곳인데, 이 해인삼매에 들면 한 티끌도 움직이지 않고 적멸보궁에 이미 도달한다, 이 소리요. 그리고 우리가 극락세계 간다고 그러잖아요. 극락세계라는 건 뭔 말이냐 하면은, 고통은 하나도 없고 즐거움으로만 가득하다. 이걸 극락이라 그래요. 무유중고(無有衆苦)하고 단수제락(但受諸樂)이라. 다만 즐거움만 받을 뿐이다. 무유중고라. 많은 고통은 하나도 없다. 이걸 극락세계인데, 이 해인삼매에 들면 이 극락세계가 있는 곳에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이미 거기에 도달한다, 이 소리예요. 야 참 기가 막히네. 그래서 염념이 원겁(念念遠劫)이오, 찰나 찰나가 무량 원급이오. 진진이 전개라(塵塵全開), 티끌티끌이 온전하게 펼쳐지는 거다. 이런 세계를 알려주는 것이 법성게 30구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걸 다 알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외우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요. 법성원융무이상. 그러면 거기 이미 내 음성은 간 거예요. 내 음성은. 제법부동본래적, 제법은 생멸이 없어서 본래 적멸이다. 이게 이제 제불경계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처음부터 어떻게 알아 이걸. 생각이 아닌데. 그러니까 이걸 처음부터 알 수는 없고 외우기만 해도 한없는 업장이 다 소멸되고, 한없는 공덕이 성취되니까, 법성원융무이상, 이게 참 얼마나 좋아. 지금까지 한 거 어디까지 했죠? 오늘 무량원급즉일념 거기까지 한번 외워볼까요? 시작.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일중일체다중일 일중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무량원겁즉일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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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 28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4-28
義相祖師法性偈 이야기 11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11--一切塵中亦如是 (10).即事法 明攝法分齊-- -- 일체진중역여시(10).즉사법 명섭법분제-- 안녕하십니까? 을사년 4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39 게송 가운데에 열 번째 게송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일체진중역여시, 그 게송에 관한 법문입니다. 먼저 10번을 외우고 그다음에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일체진중역여시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부처님이 깨달음의 세계를 얻으셨는데, 깨달음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 무법유심(無法唯心)이라. 없을 무, 법 법, 오직 유, 마음 심, 무법,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거예요.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럼 법이 왜 있냐. 의식 사량(意識 思量)으로 법이 있다. 뜻 의, 알 식,의식, 생각 사, 헤아릴 양, 의식으로 생각하고 헤아릴 때 법이 나타나고, 지광명조(智光明照), 지혜광명이 밝게 비칠 때는, 지광이 명조할 때는 일체가 유심이다.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다. 그래서 깨달은 분은 지광명조로, 지혜광명이 밝게 비추는 걸로 계시는데, 그걸 불주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머무르는 세계다. 지광명조는 불주 세계다. 지혜 광명이 밝게 비추는 세계는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다. 그 중생은 의식 사량을 가지고 사니까, 의식 사량으로 종종집착이라. 생각으로, 생각을 해서 가지가지로 집착을 하는 것이 그게 범부거든요. 그래서 이런 내용을, 의상 스님께서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이런 내용을 의상 스님께서 7언 39, 일곱 자로 된 39 게송으로 지으신 것이 법성게인데요. 거기에 아홉 번째 게송, 열 번째 게송이 일미진중의 함시방이라.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가 다 들어간다, 이 소리예요. 함시방. 그러면 어떤 한 티끌만 그런 게 아니라, 일체진중에, 모든 티끌티끌마다 시방 세계가 다 들어간다, 역여시,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미진중함시방하니,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다 거두어 삼키고 있으니, 일체진중역여시라. 모든 티끌 속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마찬가지다. 이제 이 얘기인데, 그게 우리 의식 사량으로 보기에, 생각으로 이렇게 눈 뜨고 보고 귀로 들을 때, 미진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티끌이고, 시방세계라고 하는 것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큰 세계인데, 이렇게 큰 세계가 이렇게 작은 세계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게 이제, 가장 작은 세계로 가장 큰 세계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것이 의식 사량의 세계거든요. 근데 지광명조에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의식 사량으로는 안 되고. 지혜 광명이 밝게 비출 때는 그렇게 되는데, 그 지광명조의 세계를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지광명조는 해인삼매다. 一微塵中 十方世界 各無自性 同是無住 일미진중 시방세계 각무자성 동시무주塵小界大 須處須耳 法性無二 無住實相진소계대 수처수이 법성무이 무주실상 그러면 지광명조 해인삼매는 어째서 그렇게 되냐 그러면, 일미진중에, 일미진중에, 일미진중과, 하나의 작은 티끌속과 시방세계가 시방의 어마어마한 큰 세계가 각무자성(各無自性)하야, 각각 자체 본성이 없다. 이걸 보는 게 지광명조예요. 미진의 자체 본성이나 시방세계의 자체 본성이나 각무자성이라, 각각 자체의 본성이 없다. 티끌의 본성과 세계의 본성이 티끌에도 티끌에 자기 본성이 없고 세계에도 세계의 자기 본성이 없다. 그래서 동시무주(同是無住)다. 똑같이 미진이나 세계나 머무는 데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세계도 세계에 머물지 않고, 미진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미진에는 미진의 자성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의 자성이 없어서, 티끌에는 티끌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가 없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깨달은 지혜 광명으로 딱 밝혀 보면 그게 환히 보인다. 그게 해인삼매죠. 왜 해인삼매라고 그러느냐? 바다에는 물뿐인데, 물뿐인데, 그 바닷물 속에 온갖 삼라만상의 모양들이 다 비춰져요. 근데 그 바닷물 속에 비춰지는 모양은 없는 거예요. 물뿐이에요. 그러면 티끌도 보이고, 세계도 보이고, 삼천대천세계도 보이고, 무량수 일체 법의 세계가 보이는데, 그 세계는 티끌에는 티끌에 자성이 없고, 세계에는 세계의 자성이 없어서, 그걸 딱 비추어 보는 지혜 광명뿐이다. 아 이거, 막 속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잠이 와야 되는 내용인데요. 속 뒤집어지든지 잠 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돼. 바다에 가서 보면 그림자가 보이는데, 그 그림자 하나하나가 바닷물이에요. 그 그림자 자체가 그 바닷물에 없어요. 그래서 지혜광명으로 딱 비추어 볼 때, 그 지혜 광명 속에 삼천 대천세계 일체중생 삼라만상이 환하게 비추는데, 삼천 대천세계에 삼천 대천세계 자성이 없고, 삼라만상에 삼라만상의 자성이 없고, 일체 중생에게 일체 중생의 자성이 없어서, 이게 전부 자성 없는 법성이다. 무성 법성. 자성 없는 법성이다. 그래서 이게 전부가 무주실상(無住實相)이다. 머무는 데가 없는 진실상이다. 중생도 중생에 머무는 자성이 없고, 하늘도 하늘에 머무는 자성이 없고, 세계도 세계에 머무는 자성이 없어서 전부가 지혜의 광명 속에 비추어지는 삼라만상이다. 이거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다 포함하고 또 티끌티끌마다 다 그러하다. 그러는 거는 지광명조 해인삼매에 딱 들면, 세계는 전부 자성이 없는 무이법성(無二法性), 자성이 없어서 어떤 세계든지 둘이 없고 원융무이한 무이법성이다. 그래서 지광명조로 둘 없는 법성을 딱 보면 일미진중과 이 시방 세계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전부 이 둘 없는 법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둘 없는 법성을 딱 보면 명조자재, 밝게 비추어 보면서 자재를 해요. 자유자재를 해요. 불취불사(不取不捨). 뭐 시방세계라고 취하지도 않고, 함미진중이라고 버리지도 않고, 의식 사량으로 보면 작은 게 있고 큰 게 있어서 버릴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는데, 지광명조로 딱 보면 큰 거나 작은 거나 똑같이 자성이 없어서 취하고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참 이게. 아득히 먼 옛날얘기 같아요. 근데 이게 이제 사실인 거예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춰 본다. 그러면 지혜광명은 그 특성이 형태에 미혹하는 게 아니라 그 본성을 꿰뚫어 봐요. 형태에 미혹하는 게 아니라 본성을 꿰뚫어 봐. 그러면 형태는 뭐와 같으냐. 예를 들면 구름이 있고, 비내림이 있고, 이슬이 있고, 얼음이 있고, 이게 형태인데, 이 형태를 형태만 보고 쫓아가는 게 의식사량 종종집착이에요. 생각으로 저게 뭐다 생각을 해서 가지가지로 집착하는 게 그게 범부의 세계란 말이야. 그런데 이 지광명조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것은, 비가 내리든 구름이 껴 있든 뭐 얼음이 얼었든 뭐든지 전부 그 본질이 수분이라는 거예요. 물기운. 그래서 구름 버리고 이슬 취하고, 뭐 얼음 버리고 무슨 다른 거 취하고, 그걸 안 해요. 그래서 명조자재, 밝게 비추어서 그냥 자재할 뿐이에요. 명조자재 불취불사,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밝게 비추어서 자유자재한다. 그 세계를 불주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라고. 근데 이거를 생각으로 이렇게 듣고 생각으로 이걸 알아보겠다고 하면 답답해요. 까, 까 밖에 안 나와요. 그럴까, 정말일까, 가능할까, 요따위 소리를 하고 앉았거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생각으로 헤아리니까. 근데 의상 스님이 말씀하셨듯이 일미진중과 시방세계가 각무자성하여 각각 자성이 없어서 동시무주라, 똑같이 같을 동, 이 시. 무주, 머무는 데가 없다. 하늘이 하늘에 머무는 데가 없고, 땅이 땅에 머무는 데가 없고, 자성이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진소와 세대가, 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塵小界大) 그러는 것은, 왜 티끌을 작게 보고 세계를 크게 볼 수밖에 없느냐면 수처수이(須處須耳)라, 생각하는 곳에서 생각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 생각으로, 예를 들면 집을 하나 짓는데 조그마한 티끌은 작단 말이야. 근데 집 짓는 데는 벽도 필요하고 터도 필요하고 이건 크단 말이야. 그러면 그 집 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티끌 하나 붙잡고 있으면 안 돼요. 그 큰 거를 취해야 돼요. 그래서 사람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크다고 생각하고 작다고 생각할 뿐이지, 큰 것에 큰 것이 없다. 작은 것에 작은 것이 없다. 이게 무주예요. 머묾이 없다. 그래서 이걸 생각에서 지혜로 딱 들어가면, 그 크고 작은 형상을 보고, 형상을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 법성을 보고 법성에 자재한다. 이래가지고 법성은 무이라. 없을 무자 두 이자. 이 둘이 없는 세계를 보는 게 법성을 보는 거예요. 이 생각은 항상 둘을 보게 돼 있어요. 이것 아니면 저거, 하나 아니면 둘. 그런데 이 지혜광명은 항상 둘 없는 법성을 늘 보고 있어요. 무이. 그래서 이 우주만상에서 둘 없는 세계를 보면 그건 법성을 보는 거예요. 죽음에 죽음의 자성이 없고, 태어남에 태어남의 자성이 없으니까 죽고 사는 게 둘이 없는 거예요. 이게 지광명조예요.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거란 말이에요. 근데 이 생각으로 보면 태어남과 죽는 건 달라요. 엄연히 다르거든. 그리고 죽음이라는 게 뭐냐. 그 종범이 보기에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숨 못 쉬는 게 죽는 거예요. 죽는 게 뭐냐. 숨 못 쉬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다 하지 말고, 숨 쉬나 그러면 살은 거고, 숨 못 쉰다 그러면 아 죽었구나. 그러니까 엄격히 말하면 숨 못 쉰다 하는 게 맞는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다 언젠가 숨 못 쉴 날이 오거든요. 그러면 태어나서 숨 쉰 거 하고, 숨 못 쉬는 거 하고 무슨 차이가 있나. 지혜로 보면 차이가 없어요. 무이법성이에요. 이게 둘이 없는 법성이다. 그럼 생각으로 보면 생과 사는 다르다. 그게 이제 현상차별이에요. 현상 하나하나를 다르게 보고, 종종 집착하면, 그게 생각으로 살아가는 범부의 삶이고, 둘이 없는 법성을 딱 지혜로 밝게 봐서 불취불사하고 이걸 취하고 저걸 버리고 그렇지 아니하고, 항상 자유자재하면 그것이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죽음을 무조건 싫어할 게 아니라, 죽음의 자성이 뭐냐. 자체 본성이 뭐냐. 오래 삶을 무조건 좋아할 게 아니라 이 오래 사는 자체 본성이 뭐냐. 없어요. 자체 본성이 없어. 그래서 삶에 삶의 본성이 없고, 죽음에 죽음의 본성이 없는 것을 무이법성이라고 그래요. 둘이 없는 법성이다. 이걸 깨달은 세계라고 그래요. 무이법성. 오증세계, 깨달아서 증득한 세계다. 이게 뭔 소리야. 도대체. 지금 돈을 얼마나 벌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이게 지금 뭐 앞길에 훤히 열렸는데, 둘이 없는 법성이다. 어떻다 하면 이게 이게 죽자는 소리여, 살자는 소리여. 지금 이게 이런 걸 답답하다고 하는 거거든요. 답답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런 거는 옛날에 큰스님들도 다 지적을 했어요. 이런 법문 하는 거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법사다 이랬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법사다. 왜 그러냐면 이 가지가지 집착을 하면 괴로움이 따르고, 집착을 안 하면 괴로움이 없다라고 보통 법사가 그런 법문 하는데, 그 법사는 어지간히도 어리석은 법사다. 왜 그러냐. 집착을 안 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힘들다. 뭐 되는 소리를 해야지.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집착을 안 할 수 없는 소리를 왜 하고 있나. 그렇게 말한 큰 스님도 있어요. 집착을 안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불가능한 소리를 왜 하고 있냐. 그런데 되고 안 되는 건 개인의 문제고, 법이 그러한 건 법의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법사는 법이 그러하면 그러한 법을 말해야지, 안 된다고 말 안 하고, 된다고 말하고 그러면 또 안 돼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구름하고 비하고 이게 다 다르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구름하고 비하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러면 그걸 뭐 하려고 그런 소리를 하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법이 그러니까, 진실이 그러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이 알든 모르든 이거는 현재 각자 중생의 문제고, 법의 진실상은 법의 진실상으로 알려주고, 그렇게 가게 하는 것이 법이다 이거죠. 그래서 의상 스님께서 이런 법성게를 지으신 거예요. 그래 가지고 둘이 없는 것은 법성이요, 머묾이 없는 것은 실상이다. 법성은 둘이 없고, 머물지 않는 것은, 머묾이 없는 것은 진실상이다. 그러니까 이 물질을 보고 물질에 들어가서 그 뭐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저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물속에 들어가서 달을 건져내려고 하는 거나 똑같아요. 그래서 중생이 하는 짓이 괴롭게 돼 있어, 가만히 보니까 안 괴로울 수가 없어. 왜 그러냐 하면, 보이는 거를 자꾸 구하니까. 보이는 건 자성이 없어서 구해 봤자 하루만 지나면 또 쓸 데가 없어요. 그게 뭔 소리인가. 좋게 보이던 것도 하루쯤 지나면 딴 걸 또 찾아요. 그건 떠나서. 그러니까 누가 뭐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그 바보에요. 왜냐하면 해줘 봤자 내일 되면 또 딴 거 해달라고 할 테니까. 아 진짜요. 내일 되면 또 딴 거 해달라고 그래요. 그다음에 또 딴 거 해달라고 그래요. 해주다 죽지 그러면, 어떻게 살아요. 그게 의식 사량의 세계예요. 의식으로 사량하는 건 그와 같다. 如於一微塵 여어일미진 일 미진에서와 같이一切塵亦然 일체진역연 일체진중에서도 또한 그러하다.世界悉入中 세계실입중 세계가 다 일미진으로 들어가니 如是不思議 여시불사의 이와 같은 법은 불가사의하다. 그리고 이 일체진중역여시, 일체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다 머금고 있다. 이 세계를 화엄경 보현행품 게송에서 여러 게송으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여어일미진(如於一微塵)하야, 하나의 작은 티끌과 같아서, 일체진도 역연(一切塵亦然)이라, 일체의 모든 티끌에도 그와 같다. 세계가 실입중(世界悉入中)하되, 세계가 다 하나의 티끌 속에 들어가니, 여시는 불사의(如是不思議)라, 이런 거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는 없다. 지광으로 명조해야 된다.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어야 된다 이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보이지 않는 가는 티끌과 이 우주 세계가 다름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우주가 뭘까, 내 몸이 뭘까, 알고 보면 하나의 작은 티끌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리가 뭐냐, 인생이 뭐냐, 삶이 뭐냐, 죽음이 뭐냐, 아주 간단해요. 어떤 선지식은 요 옷에서 먼지 하나 이렇게 잡아서 이렇게 보여줬어요. 이게 인생이다. 이게 삶이다. 이게 죽음이다. 이거예요. 이 티끌 하나 속에 우주만상의 그 실상이 다 들어 있어요. 근데 이거를 생각으로 놓치기 때문에 맨날 눈 뜨고 보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답답하네. 진짜 이거 답답 답답해. 一一塵中有 일일진중유 일일의 미진 속에十方三世法 시방삼세법 시방삼세의 법이 있고趣刹皆無量 취찰개무량 중생세계와 찰토세계가 다 무량하나悉能分別知 실능분별지 모두 분별하여 안다. 그래서 또 일일진중에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삼세법이 있으니, 하나하나 티끌 속에 시방 삼세법(十方三世法)이 다 있다. 시방은 온 우주 아니여, 3세는 오랜 시간 아니에요. 이 하나하나 티끌 속에 오랜 시간과 온 우주가 다 있다, 있으니, 그다음 뭐예요? 취찰이 개무량(趣刹皆無量)하고, 그 하나 하나 티끌 속에 중생이 사는 육취(六趣), 지옥 · 아귀 · 축생 · 인간 · 천상 · 아수라, 이런 육취의 세계가 다 있고, 또 시방 불찰, 시방 찰토, 시방의 국토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나, 실능분별지(悉能分別知)라. 이 지혜광명으로 그 많고 많고 넓고 넓은 세계를 끊임없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그게 지혜광명으로 밝게 비추는 거다. 그러니까 이 시방삼세가 길고 넓다 하나, 이 지혜광명으로 보면 이 손바닥에 무슨 티끌 하나 보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거지. 이 지혜 광명은 시방으로도 헤아릴 수가 없고, 삼세로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시방 삼세를 보는 게 지혜광명으로 보면 손바닥에 가는 티끌 하나 보는 거와 다름이 없다 이거예요. 이게 화엄경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생각으로 헤아리면, 이게 물건인데, 물건인데, 이거는 필요하면 내가 취하고 필요 없으면 버려야 되잖아요. 그래서 맨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하고, 맨날 이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기도 하잖아요. 그게 우리 생활이에요. 사오고 버리고, 사오고 버리고. 요새는 보면요. 멀쩡한 물건도 길바닥에 많이 버려요. 그렇거든. 그 왜 버리냐. 쓸모가 없어서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장에 가면 물건 산다고 난리야. 그냥 누가 사갈까 봐, 먼저 사려고 막 돌아다니고 그러더라고. 그 희한하데 그게. 전쟁터 같아요. 그 뭐 좋다 싶으면 그냥 막 줄을 서고, 막 미리 뛰어가고 막 이래요. 그런데 이 지혜 광명을 보면 이게 마음이에요. 마음이에요. 마음. 이게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시방 삼세가 유시일심(有是一心)이라, 오직 한 마음이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이 물건이 나한테 보이기 위해서는 이 물건을 보는 놈이 뭐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거 뻔한 건데 그거 이상하게 생각된다고. 이 물건을 보는 놈이 없으면 이 물건을 어떻게 이걸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냐고. 그러니까 물건을 밖에 가서 사오는 것도 그 물건을 보는 놈이 있기 때문에 사 오고, 이 물건을 버리는 것도 이 물건을 보는 놈이 있으니까 버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든 게 마음이다. 저 하늘을 떡 보는데 하늘이 저기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늘이 있는 걸 보는 놈이 있어요. 사람이 저기 있다. 그러면 사람이 있는 걸 보는 놈이 있어. 그거는 얼마나 크고 얼마나 오래 가는지 이 시방 삼세로도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걸 지광명조라고 그래요. 지혜광명이 밝게 비춘다고. 그놈 하나 찾으면 문제될 거 하나도 없는 거에요. 하늘을 볼 때 하늘을 보는 마음이 있고, 땅을 볼 때 땅을 보는 마음이 있고, 사람을 볼 때 사람 보는 마음이 있고, 물건을 볼 때 물건 보는 마음이 있다. 그렇다고 마음이 하늘이냐? 하늘도 아니야. 마음이 땅이냐? 땅도 아니에요. 마음이 사람이냐?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물속에 많은 걸 갖다 대면, 사람이 가면 사람이 나타나고, 물건을 대면 물건이 나타나고, 뭐 나무를 대면 나무가 나타나는데, 나타나기는 나타나지만, 물은 나무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거든. 그걸 지광명조라고 그래요. 지혜광명이 밝게 비춘다고. 이런 소리를 해서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 같더라고, 가만히 보니까. 이게 뭔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니까,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어려운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내가 생각으로 집착하니까 어렵지, 지혜로 돌아가 보면 너무너무 쉽고 너무너무 당연한 거예요. 너무 당연한 거예요.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쉬운 거예요. 그러니까 어렵다, 쉽다 말하면 안 맞는 말이고, 내가 아느냐 모르느냐. 다 내가 모르는 건 어렵다고 그래요. 내가 아는 건 쉽다고 그래요. 그래서 어렵고 쉬운 게 나한테 있는 거지. 불교가 어려운 거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지혜로 보면 일체가 마음이고, 생각으로 보면 일체가 물건이다. 그럴까 진짜? 진짜일까? 이게 그럴까. 一一塵中有 일일진중유 일일의 미진 속에無量種佛刹 무량종불찰 무량종의 불찰이 있고種種皆無量 종종개무량 종종마다 모두 불찰이 무량하나於一無不知 어일무부지 하나에서 알지 못함이 없다. 그다음 또 게송도 있는데 일일진중에 하나하나 티끌 속에, 무량종종찰하니, 하나하나 티끌 속에 한량없는 가지가지 세계가 있다. 가지가지 세계가 있다. 그러면 가지가지 세계에도 자성이 없고, 하나의 티끌도 자성이 없어서 무이법성이다. 둘이 없는 법성이다 이거지. 그래서 종종이 개무량(種種皆無量)하나, 가지가지가 다 한량이 없으나, 어일무부지(於一無不知)라, 가지가지가 한량이 없으나, 하나에서 한 티끌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하나만 보면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 이거죠. 어일무부지라, 하나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누가 법을 모르면 필요 없어요. 이런 거 하나(안경을 들어보이시며) 이렇게 보여주면 돼요. 여기에서 알지 못할 건 하나도 없어요. 어일에 무부지라, 하나에서 알지 못할 건 없다. 그거 뭐 이리저리 설명해야 억만년을 설명을 해도 생각이 변하지 아니하면 몰라요. 그러니까 요즘 뭐 대화와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대화한다고 소통 안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왜, 왜 안 되냐. 각자 살아온 길이 달라서 안 돼요. 안 돼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해봐라. 니가 해봐라. 물어봐야 안 된다. 물어봐야 나는 내 말 할 것이고, 너는 네 소견으로 들을 것이고, 듣는 소견이 말하는 사람 소견하고 달라서 안 통해요. 그거는 생각 안 하고 뭐 가르쳐 달라고 그러는데 말한다고 안 돼요. 그러니까 이런 거(안경) 하나 떡 하니 어일무부지니까, 하나에서 알지 못할 건 없으니까, 이거 기가 차네. 이게 기가 차. 了知非一二 요지비일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非染亦非淨 비염역비정 물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며亦復無雜亂 역부무잡란 또한 섞여서 어지러운 것도 아니니皆從自想起 개종자상기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났음을 안다.(80화엄경 보현행품 게송) 그래가지고 마지막에 또 무슨 게송이 있느냐면, 이 법성 실상은 법성의 진실상은 비일이(了知非一二)다. 하나냐, 하나에도 자성이 없고, 하나에도 머묾이 없으니까 하나도 아니다. 둘이냐, 둘도 아니다. 둘에도 자성이 없고 둘에도 머물지 아니하니까 둘도 아니다. 그러면 물들어서 더러운 거냐. 더러운데도 자성이 없으니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거냐, 깨끗한데도 자성이 없으니까 깨끗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게 막 뒤섞여서 막 어지러운 거냐.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냐. 하나다 둘이다, 물들었다, 깨끗하다, 섞였다, 어지럽다는 것은 개종자상기(皆從自想起)다.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일체 만물은 무이법성이고 무주 실상인데, 둘 없는 법의 본성이고 머묾이 없는 진실상인데, 중생이 이 의식 사량으로 좋다는 생각도 일으키고, 나쁘다는 생각도 일으키고, 하나라는 생각, 둘이라는 생각, 물들었다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뒤섞였다, 혼란스럽다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런 거는 다 자기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거지, 법성에는 없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무법 유심이라. 법은 없고 오직 마음이다. 그러니까 깨달은 분은 마음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마음이니까. 이것도 마음이고, 몸도 마음이고, 하늘도 마음이고, 태어난 것도 마음이고, 죽는 것도 마음이고, 전부 마음이다. 삼계소유가, 삼계에 있는 바가 유시 일심이라, 오직 유자, 이 시자, 일심, 한 마음이다(三界所有 唯是一心). 이게 화엄경이거든요. 화엄경 십지품의 말씀인데, 그래서 어두운 걸 보고 두려워할 때 어두운 걸 보는 놈이 있단 말이여. 밝은 걸 보고 좋아할 때 밝은 걸 보는 놈이 있어요. 그 보는 놈은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여. 시방도 아니고 삼세도 아니에요. 그런데 모든 걸 다 거두어 삼키고도 남아요. 그래서 그걸 해인삼매라고 그래요. 그래서 모두가 다 지혜광명 속에서 이게 보이는 거지, 이것 자체에 자성이 없다. 그런데 이걸 생각으로 집착을 하면 집착하는 대로 이게 다 달라져 보이는 건 사실이에요. 물속에 있는 달인데, 이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도 밝다. 무슨 둥근 달이다. 초생달이다. 얼마든지 이걸 물속에 있는 달을 보고 소설을 한 권 쓸 수도 있거든요. 이게 생각이에요. 바다를 떡 보고 그 바다가 자기 마음인데, 그걸 자기 밖에 바다가 있는 줄 알고 바다를 떡 보고 “망망대해라. 넓고 넓은 큰 바다다. 파도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이런 소리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자기 마음 밖에 바다가 있다라고 지금 눈앞에 보이거든. 근데 바다는 자체가 없고, 그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 법문을 듣고 되게 기분도 나쁘고 아주 억울했었는데, 한 번은 여름인데 선요를 배우다가 안신입명(安身立命)이라는 말이 나와, 몸을 편안히 하고 명을 세운다. 몸 편안히 하고 명 세운다라는 게 이게 맹자에 있는 말인데, 여기 또 나와 있어요.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그래서 내가 더운데 점심 먹고 바로 땀을 흘리면서 그 극락암을 올라가서 경봉 큰스님을 뵙고 물어본다고, 그 온갖 힘을 다 들여가지고 땀 흘려 올라갔는데, 그 뒷마루에 그때 시원한데 거기 계시더라고.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하나 여쭙겠다”고, “뭐냐”고, “선요에 편안할 안, 몸 신, 세울 입, 생명 명, 안신입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안신입명이 뭡니까?” 이래 물었거든. 그런데 기가 차게 억울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거기에 대해서는 선요에 대해서는 설명도 없고, 그 낱말에 대해서는 전혀 말씀이 없고, “너 지금 안신입명이라 하고 묻고 있는데, 그 안신입명이라고 묻는 그놈이 뭐냐”, 이래요. 내가 모르지. 몰라. 그러니까 아주 모르긴 모르는데, 너무 그냥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조금 있더니 이제 깨어났어. 앞이 캄캄한 데서 깨어났어. 내가 이 말 들으러 여기 온 게 아닌데, “안신입명에 대해서 무슨 설명해 주고, 해설을 듣기 위해서 왔지. 안신입명이라고 묻는 그놈이 뭐냐, 그 말 들으라고 온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아주 속이 상해서 그냥 며칠 동안 아주 억울했어요. 나 왜 갔나, 거기. 그 말 들으러 간 게 아닌데. 그런데 설명을 억만년을 해봐도 설명은 설명이에요. “뭐 다른 뜻이 없습니까?” 또 이리 나오거든. “스님께서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이래 나오고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 안 할 건데요.” 이래 나오고. 한없이 설명해도 듣는 사람이 안 받아들이면 끝이에요. 그러니까 이 가르침 중에 이 가르침이 최고예요. 최고. 대답을 하려고 하지 말고, 묻는 그놈을 알게 하라. 질문에 대답하지 말고, 질문하는 그 자체를 알게 하라 이거예요. “저게 뭡니까?” 하고 물으면 저게 뭐 이름은 뭐고 어쩌고 그거 하지 말고, “저게 뭡니까 하고 묻는- 조금 전에 뭐라고 그랬죠?- 묻는 그놈이 뭐냐” 그거예요. 그러니까 저게 뭡니까? 이게 뭡니까? 그럼 이게 뭐라고 대답하지 마라. 이게 뭡니까 하고 묻는 그놈이 뭐냐.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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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 29일 음력 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3-29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10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 10--一微塵中含十方, 即事法 明攝法分齊----일미진중함시방, 즉사법 명섭법분제-- 안녕하세요. 을사년 3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에, 의상조사 법성게 게송 30송 중에서 아홉 번째, 아홉 번째,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그 게송에 대한 오늘 법문이거든요. 자, 10번을 우선 읽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이 글을 읽는데요. 읽는 방법이 첫째는 송독(誦讀). 송독. 외울 송자, 읽을 독자 송독. 이렇게 외우는 걸 중심으로 하다 보면 이 말하는 대로 가게 돼요. 말 따라서 가게 돼요. 그리고 뜻을 보는 걸 중심으로 읽는 것을 볼 관자, 읽을 독자, 관독(觀讀)이라 그래요. 관독. 그럼 이제 송독을 할 때는 일미진, 일미, 일미로 붙게 돼요. 일미 진중. 근데 관독을 할 때는 일하고 떼어서 미진중 이렇게 읽었거든요. 미진이라는 게 그게 하나의 용어고, 일이라는 게 또 독립된 용어잖아요. 그래서 뜻을 가만히 보고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일/ 미진중/ 함/ 시방 이렇게 읽고, 외울 때는 외우기 편한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일미/ 진중/ 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그런데 이 게송이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는 아주 중생에게 기억하기 좋은 게송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미진이라는 거는 이 보이는 물체 중에 작은 것 중에 제일 작은 것을 미진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것도 많은 미진이 아니라 일미진, 한 가는 티끌. 그리고 시방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전체를 시방이라고 하니까 큰 것 중에 이거보다 더 큰 게 없는 게 시방이잖아요. 십방. 근데 깨닫고 보니까 ‘아주 작고 작은 가는 티끌이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들이더라’ 이 뜻이에요. 함자는 머금을 함잔데, 머금을 함자가 거둘 섭자, 들어갈 입자, 모두 거두어서 입 안으로 다 들인다, 이걸 함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함자는 받을 수자, 받을 수자, 함수(含受)라고 그래요. 함수 모든 걸 다 거두어서 받을 수자는 옥편에 뭐라고 나왔느냐 하면 담을 수, 담는다. 그릇에다 물건을 담듯이 이렇게 거두어 담는다, 이런 뜻이에요. 함수, 함, 섭, 거둘 섭자가 있기 때문에. 이게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경지냐. ‘한 가는 티끌 속에 크고도 큰 시방세계를 거두어서 다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고요. ‘가는 티끌 속에 넓고 넓은 시방 세계를 함수, 다 들어가게 해서 담는다. 그릇에다 담아’ 뭐 이런 뜻이에요. 微塵者 虚隙日光塵, 法界摠相塵미진자 허극일광진, 법계총상진 이런 뜻인데, 이거를 미진이라고 할 때, <사물 미진>. 이 물건상에서 보이는 가는 티끌. 또 <법성 미진>, 법성원융무이상 하는 그 법성의 미진. 둘로 의상 법성게 주석서에는 설명을 했는데, 사물 미진이라고 하는 것은 허극일광미진(虚隙日光塵)이라. 허극이라고 하는 건 빌 허자, 틈 극자가 있는데, 이 벽이나 이런 데 구멍이 딱 하나 뚫려 있으면 이게 허극이에요. 근데 거기에 햇빛이 딱 들어오면 그게 일광이에요. 그 빈틈 햇빛 속에 가는 티끌이 보여요. 아른 아른 아른 아른하게. 막 움직이는 가는 티끌이 보이거든요. 그걸 작은 것 중에 제일 작아서 인간이 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작다. 그래서 그걸 허극일광진이라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리고 법성 미진은 하나의 미진이 법계총상진(法界摠相塵)이라. 법계는 우주 법계 시방 세계인데. 우주 법계 시방 세계의 전체를 이루는 미진이다. 이거 해서, 이거를 총상이라고 하는 모두 총자, 형상 상자 총상인데, 하나의 미진이 법계의 전체상을 이룬다. 전체의 내용을 이룬다. 이게 이제 법성 미진이에요. 재미있네요. 하나의 미진을 허극일광진, 법계총상진. 그게 이제 법성을 딱 깨닫고 보니까, 이 가는 티끌 하나가 우주 시방의 전부라는 거예요. 총상이라는 거예요. 그걸 깨달은 거예요. 미진이 법계총상이라, 그걸 깨달으면 그게 깨달음이에요. 근데 범부는 의식으로 형상을 구분하고 살기 때문에, 법성을 보지 못하고 법계의 모양만 눈으로 좇아간다. 그래서 상만 봐요. 성을 못 봐. 그런데 법성은 시방세계가 일미진이고, 일미진이 시방 세계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지도 않는 티끌 하나가 시방 세계의 전부다. 시방 세계가 보이지도 않는 티끌 하나다. 이걸 표현한 게 일미진중함시방 이렇게 된 거예요. 大記云 ··· 含受十方世界 無㝵自在 此是事法 最細之初位대기운 ··· 함수시방세계 무애자재 차시사법 최세지초위 그러면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뜻이 사상으로 설명한 것이 있고, 법성으로 설명한 것이 있는데, 사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냐. 한 개인이 발심을 해서, 불성, 마음을 믿고 닦으면 반드시 된다고 하는 인과를 믿고, 마음 믿고 인과 믿고, 닦고 닦고 닦아서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면, 그 마음이 넓어지고 넓어져서 시방세계를 다 끌어서 자기 마음속에 담아, 마음이 밝아지고 넓어지면 온 우주법계 시방세계를 자기 마음에 다 담아버린다. 이게 이제 의상 스님 제자의 해석이에요. 함수시방세계(含受十方世界)라. 범부는 그게 왜 안 되냐. 범부는 마음이 자기 몸 안에 있어요. 몸 안에 있기 때문에 그거 할 수가 없어요. 근데 마음이 밝아지고 밝아지면 마음은 몸과 몸 밖에 없는 데가 없어요. 진시방삼세(盡十方三世), 온 시방삼세에 항상 하는 마음이다. 그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은 우리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몸 밖의 것을 어떻게 마음속에 담을 수 없잖아요. 근데 마음이 밝아지고 넓어지면 마음이 없는 데가 없이 넓어지고 밝아져서 모든 걸 다 마음 안에다가 담아버린다. 그게 함수시방삼세, 함수시방세계 이래 되요. 끌어당겨서 담는다. 그래서 무애자재(無㝵自在)해요. 무애자재라는 것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뭐 걸림이 없다. 무애자재 해가지고 일이 이루어지는데, 차시사법 최세지초위(此是事法 最細之初位)라. 이것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미세한 지위다. 이렇게 이제 주석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眞定德云 事融現理門者 約塵含十方之道理云耳 非謂一塵 진정덕운 사융현리문자 약진함시방지도리운이 비위일진泯融 同理也 (叢髓錄卷一)민융 동리야 (총수록권일) 그리고 의상 스님 제자 중에 진정 스님(眞定)이 있는데, 참 진자, 선정이라는 정자, 진정 스님이 이 법성게는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者)이 있다, 이렇게 설명했어요. 사융, 사는 일 사자인데, 이 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 세계, 보이고 들리는 색성향미촉법이에요. 이게 다 하나로 녹아서, 모든 사물이 하나로 녹아서, 뭐를 드러내느냐. 법성의 이치를 드러낸다. 하나하나 사물이 전부 하나로 녹아가지고 법성의 위치를 드러낸다. 이런 가르침을 줬거든요, 진정 스님이. 그래서 이것은 진함시방세계시방지도리(約塵含十方之道理)라. 진함시방이라. 미진이 시방을 다 거두어들이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한 티끌이 일진이 민용(非謂一塵泯融)하여 없어져서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다. 미진 그대로 있으면서, 그 미진 하나가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 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 이 미진의 형상이 없어져 가지고 진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주고 있네요. 진함시방지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눈으로 보면 형상인데, 이 형상을 법성 삼매에 딱 들어서 보면 이 형상이 우주 만법계의 형상과 다르지 않아서 원융무애하다. 이거야 원융해가지고 장애가 없어. 그래서 하나의 미진이 온갖 진리를 다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없어져서 진리가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네요. 있는 그대로 이것이 모든 것을 다 거두어서 들인다. 그래서 이것 자체가 법의 본성이다. 이게 없어져서 진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신라 시대에 이런 공부를 했다는 게 참 놀라워요. 보통 놀라운 게 아니에요. 道身章云 相和尙日 一微塵中 含十方世界者 同是無住故爾 도신장운 상화상왈 일미진중 함시방세계자 동시무주고이 그리고 또 거기 도신장(道身章)이라고 하는 주석서가 있는데, 거기서 보면은, 상화상(相和尙) 왈, 상화상은 의상 스님을 말해요. 의상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미진중에 함시방세계자(一微塵中 含十方世界者)는, 한 가는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거두어 들인다 하는 것은, 동시무주고로 이라(同是無住故爾). 무주라는 말을 여기 썼는데, 없을 무, 머물 주. 법성은 무주다. 법의 본성은 머물지 않는다. 머무는 데가 없다. 이렇게 머무름이 없는 법성은 원융무애라. 무주법성 원융무애. 무주법성 원융무애. 이걸 가르치고 있는데, 한 미진 중에 시방세계를 어떻게 다 거두어들이느냐. 이거는 미진이나 시방세계나 동시 무주고로, 머묾이 없는 고로 이니라, 그러하니라. 이렇게 설명했는데 미진도 머묾이 없고 시방세계도 머묾이 없다. 이게 뭔 말이냐. 미진은 미진으로 딱 머물러서 미진 밖에는 다른 게 될 수 없고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진은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는 시방세계에 딱 머물러서 시방세계 밖에는 다른 게 될 수 없다. 이게 아니다. 뭔 소린지 잠 오기 직전이다, 이거야. 잠 와, 잠 와. 안 들어보던 얘기 들으니까 이거 잠 올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사상과 법성이 있는데, 사상으로 보면 미진은 작고 시방세계는 커. 이게 일의 모습이에요. 물건의 모습. 그런데 법성으로 보면 법성은 머무는 데가 없어서, 미진이라고 해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라고 해도 시방세계에 머물지 않으니까, 미진 법성이 시방세계 법성보다 작질 않아. 요거 아주 요거 몰랐지. 시방세계 법성이 미진 법성보다 크질 않아요.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진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도 시방세계에 머물지 않아서 원융무애하다. 원융에 다 통해요. 원융이라는 건 둥글게 통한다. 이게 융은 통이라는 말이거든요. 통한다. 융통. 둥글게 다 통해서 미진 법성이 시방세계 법성하고 통하고, 시방 세계 법성이 미진 법성하고 통해서, 일미진 중에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 들일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근데 이거를 떡 깨달으면, 우리 생신인데, 태어난 몸인데, 이 태어난 몸의 법성이나 우주 법계의 법성이나, 이 태어난 몸의 법성이 태어난 몸의 법성에 머물질 않고, 우주 법계 법성이 우주 법계 법성에 머물지 않으니까, 우리 몸이 시방세계를 다 거둬들이고 시방세계가 우리 몸을 다 거둬들여서 원융원통해서 무장무애하다 이걸 말하는 거예요. 법성은 법의 본성은 원융하고 원통해. 억울한 원통이 아니라, 통하지 않는 데가 없는 원통. 원융하고 원통해서 무장무애하다.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몸을 딱 봐서 이 법성을 다 보면 그걸 해인삼매라고 그러는데요. 해인삼매는 자기 몸에서 자기 법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법성을 내가 딱 보면 나의 몸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와 있어. 또 내 몸이 시방세계에 다 들어 있어. 이게 원융원통 무장무애요. 이 몸이 시방세계에 들어 있고 시방세계가 내 몸에 들어 있어서 원융하고 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걸 말하는 게 일미진중함시방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이제 법성에 대한 게송이거든요. 元師問云 微塵無住 小 十方世界無住 大耶 答 一量也 問 원사문운 미진무주 소 시방세계무주 대야 답 일량야 문若爾 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 答 微塵與十方世界 各無自性 약이 하언진소시방세계대야 답 미진여시방세계 각무자성唯無住耳 所言塵小世界大者 是須處須耳 非是 小故云小 大 유무주이 소언미소세계대자 시수처수이 비시 소고운소 대故云大 所謂不知塵小世界大機中 令知塵小世界大故 且說塵고운대 소위부지진소시계대기중 영지진소세계대고 차설진小世界大耳 非是一向塵小自性 世界大自性 亦得云塵大 소세계대이 비시일향진소자성 세계대자성 역득운진대世界小 道理齊一 無住實相也 세계소 도리제일 무주실상야(叢錄卷上, 한불전6, 780下)(총록권상, 한불전6, 780하) 그러니까 원사가 물어 이르되, 원사는 상원 스님이라고 하는 의상 스님 제자가 있었는데, 의상이라는 상자하고 근원 원자하고 상원 스님이요. 아주 법이 높은 스님으로 기록이 돼 있어요. 상원 스님이 묻기를, 미진무주와, 미진이 머물지 않는 법성과, 또 시방세계 무주에 있는데, 시방 세계가 머물지 않는 법성이 있는데, 미진 무주 법성은 작고 시방세계의 무주 법성은 큽니까?(微塵無住 小 十方世界無住 大耶) 이렇게 물었어요. 질문 대단하죠. 그러니까 요 법성이 있는데 이게 이 법성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시방세계의 법성이 있는데 시방세계 법성에 안 머문다고 그랬는데, 그렇지만 그러면 미진이 머물지 않는 법성하고 시방세계가 머물지 않는 법성하고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미진 법성은 작고 시방세계 법성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의상 스님이 답을 하되, 한 일자, 헤아릴 양자, 일량이다(一量也) 이랬어요. 일량. 일량이라는 건 양은 수량인데, 그 수량이 하나다. 크고 작은 게 아니다. 일량이다. 참 기가 막히네요. 어째서 그게 일량인고. 그러니까 상원 스님이 또 묻기를 약이(若爾)면, 그러하면, 하언진소시방세계대야(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 어찌 티끌은 작다고 하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합니까? 이렇게 질문했어요. 법성이 똑같다면 어째서 티끌은 작다고 하고 시방 세계는 크다고 합니까? 일량인데, 미진과 법계가 일량인데 왜 티끌은 작고 법계는 크냐. 그러니까 답하되 미진여시방세계(微塵與十方世界)는 각무자성(各無自性)하야, 미진은 미진에게 고정불변한 자체 본성이 없고, 각무자성이라는 게 그거예요. 미진의 변하지 않는 자기 성격이 없다. 또 시방세계도 시방세계의 고정불변해서 달라지지 않는 자기체성이 없다. 이게 또 이제 법무자성이라는 게 법성 무주라는 말하고 아주 중요하게 설명되는 말이에요. 법은 자성이 없다. 법성은 머묾이 없다. 법무자성 법성무주. 미진은 미진의 자성이 없고, 시방세계는 시방 세계의 자기 체성이 없다. 자기 본체, 자기 성질이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아 없다. 유무주(唯無住)라. 오직 머묾이 없을 뿐이다. 미진도 무주요, 머묾이 없고 시방세계도 무주다. 그 무주라는 말은 무자성이다. 자성이 없다. 자체 체성이 딱 있으면 그게 머묾이 있는 거거든요. 근데 자체 체상이 없으면 머묾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진의 자성도 머묾이 없는 법무자성이고, 법에는 자성이 없는 거고, 또 세계의 자성도 법무자성으로 머묾이 없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일 수밖에 없다. 이래가지고 이제 우리 범부들이 자나 깨나 고생하는 거는 이 몸을 나로 삼기 때문에 4대 육신을 자기라고 한다. 근데 깨달은 분은 우주 법계에 가득한 불성을 나로 삼아요. 못 깨달으면 이 육신이 난데 깨달으면 불성이 나요. 육신은 금방 생겼다 금방 사라지지만 불성은 시작이 없어요. 언제 시작됐는지, 끝이 없어. 또 우주에 변만해. 장소가 없어. 그러니까 이 생로병사라는 게 허공에 구름 한 점과 같아. 이 육신의 생로병사가. 그게 이제 못 깨달은 범부하고 깨달은 제불하고 차이점이에요. 제불은 불성이 난데, 못 깨달은 범부는 이 육신이 나다. 근데 불성은 허공과 같고 육신은 구름과 같아서, 뭐 뜬구름은 언제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아까 눈이 그렇게 많이 오더니 이제 말짱하네요. 이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불성을 딱 보면 이 몸이 오고 가는 것은 허공에 뜬 구름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아무 장애가 없단 말이죠. 그걸 여기서 말해요. 그게 일미진중함시방, 이 이치를 설명하는 거다 이런 말이죠. 이렇게 어려운 말 하는데 왜 잠을 안 자요? 희한하네. 이런 소리를 언제 뭐 듣기가 어려운데 못 들어본 얘기를 하면 꼭 잠 오게 돼 있거든요. 이 생각이라고 하는 거는 아는 걸 받아들여요. 모르는 걸 못 받아들여요. 과거 들었던 경험이 있을 때 그걸 듣지, 경험이 없으면 그걸 못 들어요. 똑같아요. 근데 잠속에서라도 이런 소리를 들어보셨는가 봐. 그러니까 잠을 안 자지.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잖아요. 그렇게 돼 가지고 각무자성하야 유무주이라. 각각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묾이 없을 뿐이다. 그래가지고 반대로 미진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각각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 일미진이라고 하는 것을 크다라고 인식을 하면 그게 큰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각각 자성이 없어서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대로 달라지는 거예요. 크다고 내가 알면 커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큰 자성이 없으니까. 작다고 알면 작아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작은 자성이 없으니까. 아 잘생겼네. 그러면 그 잘생긴 거예요. 왜냐하면 잘생긴 자성이 없거든. 자기 체성이 없단 말이야. 잘못 생겼네. 그러면 잘못 생긴 거에요. 왜냐 잘못 생긴 자체 체성이 없어. 그러니까 잘생겼다고 해도 그 사람이 마음이 잘생긴 거다. 못생겼다 그러면 그래요. 니 마음이 못생겼다 이래요. 내가 못 생긴 게 아니라 보는 사람 마음이 못생긴 거다. 왜냐하면 보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는 게 이게 무장무애 해탈법문이요. 이거 이거 어려운데, 이런 말 듣기. 보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는 것이 무장무애 해탈 법문이다. 그러니까 이 맛 없네. 그러면 그 마음이 맛없는 거예요. 맛 좋으네. 그 마음이 좋은 거예요. 정해진 게 없어요. 그래서 입맛을 바꿔야지. 그냥 맛있는 거 막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면 애쓰다가 죽어. 왜냐하면 맛있는 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없어요. 이거 가장 아주 궁극적인 맛을 낸다고 변하지 않는 맛을 낸다고 설치다 다 죽었어요. 그 맛을 낸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세상 만물을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세상 만물을 보는 내 마음 하나를 딱 맑히면 그 담장이 널리 처져 있는데 그 담을 다 허물지 않고 거기 들어가는 열쇠 하나를 탁 열면 그냥 들어가는 거 하고 똑같아요. 만물은 담장과 같고 마음은 열쇠와 같단 말이야. 그 담 부실 거 없어요. 열쇠 하나 열면 그냥 들어가거든.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내 마음을 다 맑혀. 그러면 세상은 다 내가 보는 대로 보이는 거예요.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요. 아 이거 참 이렇게 오묘한 이치가 있는데 그걸 모르고 맨날 고생을 하다니. 이거 참 문제예요, 문제요. 그래서 말을 하기를 진대세계소(塵大世界小), 진,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얻을 수가 있다.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런데 도리는 제일(道理齊一)이니 모든 크고 작은 이치는 하나니, 무주실상(無住實相也)이라 머묾이 없는 진실상이다. 무주실상. 진실상이 있는데, 진실상은 무주라는 거예요. 무주는 뭐냐. 하나하나의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큰 것도 큰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적은 것과 다르지 않고, 적은 것도 적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큰 것과 다르지 않아서, 이 대소가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이거 딱 보면 무주 법성에 들어가요. 머묾이 없는 법성에 딱 들어가. 근데 그 법성을 딱 보면 거기에 크고 작고 있고 없고, 없는 게 없어요. 근데 없는 게 없는 게 그게 다 하나여. 원융원통해요. 그래서 그거를 큰 거울을 딱 갖다 놓고 이렇게 비춰보면 거울 안에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다 있는데, 그 거울 안에 그게 있다고 거울 부수면 없어, 그게. 그러니까 그 거울 빛깔 안에 그게 비추어진 거라. 그러니까 큰 걸 비추어도 거울빛이고, 작은 게 비추어져도 거울빛이지, 거울에는 큰 거 작은 것이 없다. 그냥 오직 비춰져 있을 뿐이다. 이거지. 그래서 이 세상 만물이 이렇게 드러났지만, 하나하나가 불변의 자성으로 각자 지위에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각자 자성이 없어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들어가고,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돼서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게 이제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법성원융이에요. 법성은 원융하다. 법의 본성은 다 통한다. 그래서 이 법성삼매에 떡 들면 바다에 무한한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비춰져도 그게 하나의 바닷물일 뿐이지, 비추어진 그림자가 자성이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법성을 딱 보면 죽고 살고 모든 일이 자기 그 법성을 보는 불성자성, 불성을 아는 성격이거든요. 그 아는 성격, 불성 자성 그것이다. 다른 게 없다 이렇게 돼 있어요. 微塵不是小 十方不是大 미진불시소 시방불시대法性本平等 隨須卽眼對법성본평등 수수즉안대 無住實相境 入觀成正觀무주실상경 입관성정관凡夫生老死 圓融法性身범부생노사 원융법성신 無住實相 圓融法性 무주실상 원융법성不動諸法 無生而生부동제법 무생이생 그래서 이제 밑에 거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말한 몇 개 이제 송을 지은 게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미진이 불시소(微塵不是小)하고, 가는 티끌이 적은 것이 아니고, 시방이 불시대(十方不是大)라 시방 세계가 큰 것이 아니다. 법성은 원융하니까 그렇단 말이에요. 법성원융. 법성은 본평등(法性本平等)하야, 법성은 본래 평등해. 큰 것과 작은 것이 다르지 않단 말이여. 그래서 수수즉안대(隨須卽眼對)라. 구함을 따라서, 자기가 큰 것을 구하면 큰 것으로 보이고, 작은 것으로, 작은 것을 구하면 작은 것으로 보인다. 구함을 따라서 즉 안대 곧 눈으로 상대하게 된다. 눈으로 보게 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이는 거는 내가 구해서 보이는 거예요. 죽는다고 보면 죽는 거고요. 산다고 보면 사는 거고, 이거 망했다고 보면 망한 거예요. 좋아졌다고 보면 좋아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게 내 생각이지, 사물이 아니다. 이거 이제 일체유심조,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는 도리거든요. 유심소현이라. 천지만물은 유심소현이라. 천지만물은 오직 마음이 나타난 바다. 이게 이제 법성원융을 깨닫고 사물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부리는 그 원리예요. 신통묘용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심소현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게 어떻게 사물에 장애가 없냐. 법성원융이기 때문에. 법성은 원융해서 사물의 장애가 없고 유심소현, 오직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신통이 자재하다. 삼세제불은 신통자재인데 신통자재일 수밖에 없는 게 법이 정해진 게 없어서 그래요. 가까운 것이 먼 것과 다르지 않고 먼 것이 가까운 것과 다르지 않아서 아무리 먼 것도 마음으로 딱 관찰하면 바로 눈앞의 일이요. 이게 신통이거든요. 막 달리기 위해서 쫓아가야 거기가 아니라, 저쪽에 있는 것과 이쪽에 있는 게 법성이 원융하기 때문에 가고 오는 게 장애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이거 공부하고 나서는 여행을 안 가, 내가. 여행을 안 가. 그쪽 법성이나 이쪽 법성이 다름이 없는데, 거기 가서 뭐 보고 와. 거기 가서 뭘. 그쪽의 물건이나 이쪽의 물건이 다를 게 없는데 그래서 사진은 왜 찍어 가지고 와. 그래서 여행 가기 싫어요. 그전엔 더러 갔거든, 모르고. 이제 법성 알고부터는 안 가. 안 가요 안 가. 그거 참 희한해. 그래서 무주실상경(無住實相境)에, 머묾이 없는 진실상의 그 세계의 경계에, 그게 법성이니까, 입관(入觀)해서, 관에 딱, 무주실상경을 내가 봐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그 관에 들어가 입관, 들어갈 입자, 볼 관자, 성정관(成正觀)하면, 바른 관의 힘을 이루면, 무주실상경 법성원융경계의 관법에 딱 들어가서 그 바른 관법을 이루어서 힘이 생기면, 범부생노사(凡夫生老死)가 범부의 났다, 늙어서 죽는 거, 이게 범부의 일생사거든요. 생노사가 원융법성신(圓融法性身)이라. 다 제불과 통하고 진실과 통하고 우주 그냥 무량억만겁에 통하는 원융한 법성의 몸이다. 이 몸 그대로 앉아서 딱 법성삼매에 들면 이 몸 그대로가 법성의 몸이다 이거죠. 이게 화엄경 공부예요. 이 몸 그대로 법성의 몸을 보는 게 화엄경 공부예요. 그리고 무주실상(無住實相)이 무주실상의 원융법성(圓融法性)이요. 머묾이 없는 진실상, 원융무애한 법의 본성이요. 부동의 제법(不動諸法)이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랬잖아요. 그게 뭐냐면 법성을 말하는데, 제법은 생멸이 없어. 생의 법성과 멸의 법성이 다르지 않아서, 생에 머묾이 없고 사라짐에 머묾이 없다. 생무주 멸무주. 그래서 이게 생도 멸도 아닌 거를 생멸을 움직인다고 보고, 움직일 동자, 생멸 아닌 걸 부동이라 그래요. 그래서 의상대사 이 화엄학에서는 모든 걸 부동의 사물이라고 그런 거예요. 부동의 사물. 이 몸도 생도 아니고 사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늙는 것도 아닌 이 몸이다. 그래서 이걸 부동오신(不動吾身), 부동의 내 몸. 부동은 뭐예요? 생로병사인데요. 동원 생로병사인데, 법성에 들어가서 딱 보면 생로병사의, 생로병사의 자성이 없어서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다 이거예요. 이거 영어로 이걸 다짐할 때 오케이 이러거든요. 생로병사는 동이고 생로병사가 없는 건 부동이여. 그래서 중생이 보는 이 생로병사가 이 부동의 생로병사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생멸이 없는 생로병사다. 왜냐면 법성은 원융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의상 화엄학에서 공부할 때 보면 꼭 부동오신이 이런 말을 써요. 법성 나의 몸이다 이 말이지. 부동오신. 부동오신 이 말이야. 그래가지고 이 부동의 제법이, 생멸이 없는 제법, 모든 법, 생에는 생의 자성이 없고 멸에는 멸의 자성이 없어서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다. 이게 이제 제법부동본래적 이 뜻이거든요. 제법부동본래적. 그래서 제법부동본래적의 이 제법이, 이게 이 몸도 제법부동본래적이고, 저 산도 제법부동본래적이고, 일체만물이 제법부동본래적이라. 그래서 그걸 줄이면 부동제법이라. 아직도 안 조시는 거에요? 이거 알면 다 해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졸 수밖에 없는데 안 조네. 참 기가 막히네요. 기가 막혀 전생에서부터 많이 닦은 거예요. 그러니까. 닦은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나거든. 안 닦은 소리 들으면 내가 잠이 와요. 많이 닦아서 지금 안 자고 있는 거예요. 이 부동제법이라, 생로병사 없는 무주법성 이걸 말하거든요. 부동의 제법이 무생이생(無生而生)이라, 나는 것이 없이 난 것이다. 이 말을 여기 썼어요. 이게 종범이 게송으로 이걸 지은 건데, 부동의 제법이 무생이생이라, 이것이 났는데 법성에는 난 것이 없어. 왜냐하면 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지는데, 법성에는 사라지는 게 없어. 왜냐하면 사라지는 자체 체성이 없어, 법무자성이거든요. 법에는 자성이 없다. 법은 그럼 일체만법 일체사물이란 말이죠. 일체사물 일체만법이라고. 일체사물 일체만법이 무생이생이라, 없을 무, 날 생, 말 이을 리, 날 생. 남이 없이 난 것이다. 난데 자성이 없고 죽는데 자성이 없으니까, 부동의 제법이니까, 일체만법이 남이 없이 난 것이다. 우리 몸이 지금 났는데 난 자성이 없이 그냥 인연 따라 난 거예요. 허공에 구름이 일 듯이. 이걸 무생이생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몸 자체가 법성원융 무장무애 법계해탈이여. 오케이 박수. 그러니까 이게 제법부동본래적, 또 일미진중함시방 이런 게 전부가 이렇게 무생이생을 얘기한 거예요. 남이 없이 난 거. 난 속에서 남이 없이 난 거, 그걸 떡 보면 그게 법성원융을 본 건데, 그것은 바다에 천지만물이 다 그림자를 비추지만, 바닷속에는 그림자 비춘 내용이 없고 오직 물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일체 만물이 내 마음이 다 감싸고 있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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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 28일 음력2월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2-28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⑨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⑨-- 一即一切多即一 · 約緣起陀羅尼理用 辨攝法分齊 ---- 일즉일체다즉일 · 약연기다라니이용 변섭법분제 -- 안녕하십니까. 진관사 2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은 법성게 일즉일체다즉일, 그 게송이거든요. 일즉일체다즉일. 손바닥 딱 치는 거 생략하고 그냥 10번을 외우고 마치겠습니다. 시작.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이 법성게는요. 화엄경 80권 내용을 7언(言) 30구(句), 7자씩 쓴 게송 서른 구를 만들어서 표현한 거거든요. 화엄경 80권을 7언 30구 게송으로 표현한 건데요. 一乘圓敎 大華嚴經 一乘法界 圓融圓通 일승원교 대화엄경 일승법계 원융원통無障無礙 相卽相成 聽聞半偈 成就最上무장무애 상즉상성 청문반게 성취최상 그럼 화엄경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 깨달음으로 가는 세계가 아니라 깨달은 세계. 그 깨달은 세계를 불승(佛乘)이라고 해요. 불, 불은 부처님이라는 말이고, 승은 문이라는 뜻도 있고요. 문. 또 길이라는 뜻도 있고, 또 머문다라는 뜻도 있어요. 승자가. 그래서 부처님이 가는 길, 부처님이 오고 가는 문, 또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 그런 거를 어려운 말로 불승 그러거든요. 이제 불은 하나다 이래서, 불승을 일승(一乘) 그래요. 일승. 또 일자와 불자를 같이 표현해서 일불승 그렇게도 표현해요. 일불승. 그런데 불승이고 일승이거든요. 그 불승이고 일승인데, 그 부처님의 세계, 깨달은 분이 머무는 세계, 이걸 불주(佛住)라고 해요. 부처님이 머문다. 그러면 깨달은 분은 어디에 머물까. 서울특별시에 머물까, 아니면은 어느 다른 곳에 머물까. 이제 그런 걸 깨달은 분은 어떤가. 이게 이제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법성게에서 여덟 번째 구절에 부처님이 머무는 곳은 일즉일체다즉일이다. 그럼 일이라는 건 뭐냐.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일체라는 거는 많다 소리거든요.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다즉일, 많은 것이 곧 하나다, 여기에 머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화엄경은 하나는 모든 것이 만들어내고, 모든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하나에는 하나 자성이 없고, 자성이라는 거는 자기 체성(體性)이라는 말인데, 자기 체성, 하나에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고, 많은 것은 많은 것의 자기 체성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많은 것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는 많은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거를 화엄 연기라고 해요. 화엄은 공덕 장엄의 연꽃인데, 공덕 장엄의 연꽃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이 우주 법계인데, 이 우주 법계는 하나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요. 그럼 뭐냐. 여러 개가 하나를 만들어요. 또 여러 개는 여러 개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하나가 여러 개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제 이런 거를 법계 연기다. 법계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또 모든 것이 하나기 때문에, 모든 것도 모든 것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거를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럽니다. 장애가 전혀 없다. 또 그런 거를 상즉상성(相卽相成)이라고 그래요. 상이라는 건 서로라는 말인데, 상즉이라는 건 뭐냐. 이것이 곧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곧 이것을 만든다. 1 찰나가 아주 간단한 시간이죠, 무량한 겁을 만들고 무량한 겁이 1 찰나를 만든다. 그래서 이 모양만 보고 모양에 딱 얽매이면, 작은 건 작고 큰 건 크고 그런데, 작은 것은 큰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큰 것은 작은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일즉일체다즉일, 이 속으로 딱 들어가면 그게 해인삼매인데, 하나라고 해도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또 여러 개라고 해도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걸 원융원통(圓融圓通)이라 그래요. 끝없이 오고 가고 끝없이 통한다. 이래서 하나는 많은 것을 만들고, 많은 것은 하나를 만든다. 하나와 많은 것은 장애가 없다. 하나와 많은 것은 서로 이룬다. 하나는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은 하나를 이룬다. 부처님은 여기에 사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 다닐 필요도 없고요. 하나가 여러 곳이니까 이사 안 다녀요, 부처님은. 이사 안 다니면 좀 재미는 없나. 그러니까 뭐 부족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남아서 귀찮을 필요가 없어요. 남는 건 귀찮거든요. 또 부족하면 아주 걱정되잖아요. 그런 게 전혀 없어. 이런 거를 법계 해탈이라고 그래요. 법계 해탈. 모든 법 자체가 하나하나가 무장무애하고, 원융원통해서 남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도 없다, 뭐 이런데. ① 次(一卽一切多卽一)一句 德用自在門 謂此即(成)彼 彼即(成)此 ① 차(일즉일체다즉일)일구 덕용자재문 위차즉(성)피 피즉(성)차 無㝵無側 故云德用自在門 及位動門也 무애무측 고운덕용자재문 급위동문야 (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一)(법계도기총수록 권상지일) 이제 이런 거를, 의상 스님의 제자들은 이걸 그냥 얼마나 보고 연구를 하고 가르침을 줬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것은 의상 스님의 제자들이 연구한 결과, 덕용자재(德用自在)라고 쓰세요. 일즉일체다즉일 이 덕용이 자재하다. 덕용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하나 이렇게 생기면 이것이 이거 가만히 있어도 영향을 줘요, 다른 데. 이거 스스로가 다른 데 영향을 주는 걸 덕용이라고 그래요. 덕용. 덕용이 자재한 것이 일즉일체라고 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연구를 했어요. 그게 뭔 소리냐 하면은, 집을 짓는데 기둥이 하나 떡 이렇게 생기면 기둥이 저절로 주춧돌을 거기 오게 해요. 기둥은 가만히 있는데 그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 거기 생겨요. 그게 기둥의 덕용이에요, 주춧돌이 놓이게 하는 것이. 또 그 위에는 또 기둥 위에 또 나무가 얹어지잖아요. 그런데 기둥은 기둥일 뿐이에요. 근데 주춧돌 또 놓이게 하고 나무도 얹어지게 하고 이런 게 전부 덕용이라고요. 그래서 일즉일체다. 하나가 있으면 그 하나가 여러 곳에 무한한 그 공덕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걸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 주고 있어요. ② 道身章云 問 西風波 非東風波 東風波 非西風波 但約二 ② 도신장운 문 서풍파 비동풍파 동풍파 비서풍파 단약이波之水體 不二義 得言即門 則約二波 不得即門 若爾 但約 파지수체 불이의 득언즉문 즉약이파 부득즉문 약이 단약此事彼事 理體無二 得言即門 何得二事不除 論相即門耶答차사피사 이체무이 득언즉문 하득이사부제 논상즉문야답若放(至)二風 水無二波 旣無二波 以何即何乎 旣以此即彼 약방(지)이풍 수무이파 기무이파 이하즉하호 기이차즉피故 可知不除二波 論相即耳 非約理體 論相即矣고 가지부제이파 논상즉이 비약이체 논상즉의 그리고 그다음에는 도신장(道身章)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즉일체를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망망대해에, 그 넓고 넓은 넓은 바다에, 바람이 동쪽에서 슬 불어오면 그 바다가 동풍파(東風波)를 일으켜요. 동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를 일으키는 거예요. 또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은 이걸 또 서쪽 물결을 일으키는데 이걸 서풍파(西風波)라고 그래요. 서풍파. 서쪽에서 바람이 실 불어오면은 그 바다의 물결이 서풍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럼 남쪽에서 오는 것도 마찬가지죠. 남풍은 남풍파를 일으키고, 또 북풍은 북풍파를 일으키는데, 그런데 이게 서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파도나, 동쪽에서 불어오는 동쪽의 파도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모두 한 물에서 일어나는 거라는 거예요. 한 물에서. 그래서 물은 하나인데 파도가 많다. 이것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파도가 아무리 여러 곳에서 와서 여러 파도를 일으켜도 물은 하나다. 설명이 되나요? 나 이분들이 애만 썼지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여러 바람에 의해서 여러 파도가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일이 곧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곧 일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요. ③ 此中 此波之水 與彼波之水 水體是一故 波雖無盡 體言即 차중 차파지수 여피파지수 수체시일고 파수무진 체언즉一者三乘義耳 若非此波 即無彼波 若非彼波 卽無此波 是中일자삼승의이 약비차파 즉무피파 약비피파 즉무차파 시중門 此波非自性故 在於彼波 彼波非自性故 在於此波 是即門문 차파비자성고 재어피파 피파비자성고 재어차파 시즉문者 一乘也 자 일승야又古人云 中門 如燈光相入故 但諸燈用相入耳 即門 如우고인운 중문 여등광상입고 단제등용상입이 즉문 여波水相收故 波體水體無二 相即耳파수상수고 파체수체무이 상즉이(法界圖記叢髓錄卷一)(법계도기총수록권일) 그다음에는 뭔 말을 하느냐. 차파지수와 여피파지수라(此波之水 與彼波之水). 수체가 시일고(水體是一故)로 또 이쪽 남쪽에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나 북쪽에서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 파도는 다르지만 물은 하나인 고로, 아무리 파도가 많이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래서 파파가 무진(波波無盡)이나, 물결 물결이 끝없이 많지만 또 체언즉(體言即)이라, 그 물에 본체를 말하면 하나다. 파도가 아무리 많아도 파도의 본체는 물인데, 그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많은 것 같지만, 하나에 다 있다는 거예요. 파도가 아무리 많은 것 같지만은 물 하나뿐이다라는 거지. 그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별거 없거든요. 하나인 거예요. 하나. 그래서 그 하나의 인생을 다 바라보면 거기에 답이 있지, 헤매는데 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생은. 돌아보는 데 답이 있다. 쫓아다니는데 답이 없어요. 근데 그 원리를 모르고 살면 쫓아다니고 쫓아다니고 쫓아다녀도 만날 마음이 부족해요. 인간은 고약한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채워도 채워도 만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채워도 채워도 비어 있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거 참.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아들 낳으면 마음이 그득할 것 같지요. 천만에. 며칠 못 가요. 또 부자 되면 그득할 것 같죠. 그거 며칠 못 가요. 여행 한 번 갔다 오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이런 말하거든.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답답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를 하고 뭐를 이루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그게 번뇌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데, 번뇌는 하염없이 헤매고 쫓아다니거든요. 그래서 그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 하지 말고, 우리는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를 하면서 평생 살거든요. 그 본래 주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본래 주인, 그게 청정심인데, 주인의 마음으로 딱 돌아가면, 일체가 유심조라, 그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든 거예요. 그 본래 마음. 생각 마음은 고단하고 본래 마음은 편안하거든요. 그래서 그 본래 마음 하나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편안한데, 그 번뇌 마음, 생각 마음으로 휘둘려 살기 때문에 그렇게 힘이 들어요. 이게 나의 번뇌가 나를 힘들게 한다. 번뇌는 뭐냐?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다. 이 글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 글 이렇게 많이 보면 모르는 거 없을 것 같죠. 책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모르는 게 그냥 가득한 거예요. 그러니까 박사 학위를 받으면 그때부터 모르는 게 생겨요. 그러니까 모르는 게 박사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모르는 거 없어요. 다 알아요. 공부, 책 안 볼 때는 다 알았는데, 책 보기 시작하면서 다 모른다. 이게 원리예요. 나는 아는 게 많다. 이런 사람은 책 안 본 사람이여. 책 본 사람은 봐도 봐도 끝이 없는 게 이 책 보는 번뇌 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로 돌아가면 파수무진(波雖無盡)이나, 물결은 비록 끝이 없으나, 체언즉일(體言即一)이라. 체로, 본체로 말하면 곧 하나다. 또 그러고 이 화엄에서는 약비차파(若非此波)면, 만약 동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피파(即無彼波)하고. 서쪽에 있는 물결이 있을 수가 없다. 이게 동쪽에 있는 물하고 서쪽에 있는 물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어서 같이 공존하지, 서쪽에 물이 없다면 동쪽의 물도 다 빠져나가서 없다. 그래서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도 없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작은 것이 없으면 큰 것도 없으니까 작은 것을 싫다고 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번뇌의 마음이고, 작은 것에 편안할 줄 알면 그것이 주인의 마음이다.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본문에는 그런 게 없어요. 이건 내가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약비피파(若非彼波)면, 만약 서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차파(卽無此波)하고, 곧 이 동쪽에 있는 물건이 없다. 그래서 시중문(是中門)자는, 이 가운데 일즉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저것에 있고, 차는 재어피파(在於彼波)하고, 피파는 비자성고(彼波非自性故)로 재어차파(在於此波)라. 저쪽의 물결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되고, 이쪽의 물결은 역시 또 자성이 없어서 저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동해가 없으면 서해도 없고, 서해가 없으면 동해도 없다, 이거예요.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고, 많은 것이 없으면 하나가 없고, 하나가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많은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뭐 이런 얘기고요.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게송이 앞에 나오고, 그다음에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말이 이제 나왔는데,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이게 일중일체인데요. 이걸 화엄학에서는 그 중에 있다, 가운데 있다라는 뜻에서 중문(中門)화엄교설이라고 그래요. 중이라는 중자, 문 문자, 중문 화엄 교설. 중문. 그리고 일즉일체다즉일이라고 할 때 이 즉자를 써서 즉문(即門) 화엄 교설이라고 그래요. 즉문. 그래서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다 하면 중문이고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라고 하면 즉문이요. 이건 화엄학을 할 때 이게 이제 하나의 용어로 그렇게 쓰는 거예요. 중문화엄, 즉문화엄. 그러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러면, 중문이고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 그러면 즉문이거든요. 곧 즉자.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 이 언구는 뭐를 말하느냐. 사물에는 용이 있는데, 용이라는 건 뭐냐. 계속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하는 건 용이에요. 변화하는 게 뭐냐. 아이가 처음에 딱 출생을 하면 출생한 거 그대로 아이가 되고, 출생한 거 그대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계속 올라가는데, 이걸 유력문이라고 그래, 힘이 있다. 그 어른이 될 때까지는 계속 힘 있게 올라가요. 힘 있게. 이게 유력인데, 근데 언젠가부터 슬슬 빠지기 시작해요. 근데 빠질 때도 그 모습 그대로 빠지는 거예요. 자꾸 줄어들고, 줄어들고, 어릴 때 태어날 때 모습 없어진 게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올라가면 슬슬 빠져 이걸 무력문이라고 그래요. 유력 작용, 무력 작용. 이거 어려운 말인데 아주 재미있어요. 유력용, 무력용. 어릴 때부터 계속 성장할 때는 힘이 있어요. 이게 유력 작용이에요. 근데 올라갈 만큼 다 올라가서 점점 줄어들 때는 힘이 없어 무력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걸 숫자로 표현할 때 하나에서 둘 되고, 둘에서 셋 되고. 하나가 둘 됐다고 그래서 하나가 없어진 거 아니에요. 하나 그대로 둘이 되는 거예요. 둘에서 하나 빼면 그냥 하나죠. 이렇게 표현했어요. 숫자로 유력 무력을. 하나에서 둘 되면 하나 그대로 둘이 되고요. 하나가 셋으로 가면 하나 그대로 셋 돼요. 이게 이제 힘이 있는 거예요. 하나 그대로 넷 돼요. 이제 하나 그대로 열 되요. 그러면 열은 이제 만 수인데, 가득한 숫자 만 수가 돼가지고 내려와. 하나가 열이 9되요. 아홉이 8되요. 이래가지고 하나까지 되면 이걸 무력이라고 그래요. 무력. 유력으로 올라갔다가 만수로 갔다가 다시 본래 수로 내려오는 거를 유력문 무력문. 이런 것을 용문이라고 그래요.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법계 인연법 중에 작용의 세계를 말하는 거다. 용, 쓸 용자, 문 문자. 이게 전부 이 세상 법칙이 다 이런 법칙이에요. 계속 발전할 때는 유력문이고, 쇠퇴할 때는 무력문이에요. 이렇게 돼요. 그래서 이것은 중문은 여등광상입고(如燈光相入故)로 등불이 있는데, 등불이 이 등불 등불빛이 저 등불에 들어가고, 저 등불 등불빛이 이 등불에 들어간다. 그래서 등광이 상입이라. 서로 들어간다. 여기 있는데 등불 빛은 서로 서로 들어가요. 하나가 둘 되고, 하나가 셋 되고, 뭐 이런 식으로 등광이 상입고로, 단제등용이상입이(但諸燈用相入耳)라. 이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갈 뿐이다. 등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용이라고. 등불 빛만 이 등 불빛이 저 등불로 가고, 저 등불 빛이 이 등불로 간다. 이걸 그래가지고 등용이 상입이라. 등용,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간다. 이렇게 주석을 달았고요. 즉문(即門)은 하나가 곧 일체니까, 작용이 아니라 본체다. 하나가 곧 일체니까. 즉문은 뭐와 같으냐. 파수상수(波水相收)다. 파수, 물결과 물이 서로 거둔다. 물은 물결을 만들어내지만, 물결이 바로 물이고, 물결이 바로 물인데, 물은 바로 물결이고. 물과 물결이 모양은 다르지만, 물에서 물결을 거두어들이고, 물결에서 물을 거둬들여서, 파수가 상수라. 물결과 물이 서로서로 거둔다. 그래서 파체수체가 무이(波體水體無二)다. 물의 그 본체와 또 파도의 본체가 둘이 없다. 그래서 이거를 상즉이(相即耳)라고 한다. 서로 작용이 오고 가는 것은 일중일체다중일 중문이고, 본체가 둘이 없는 것은 일즉일체다즉일 즉문이다. 이렇게 주를 달아놨는데, 이런 거 보고 있으려고 그러면 참 보기도 힘들고, 보고 나면 또 정말 그런가 이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록을 봐도 자기 마음이 힘들이지 아니한 것은 만족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에 힘들인 것만이 만족이 있어요. 공짜로 그냥 얻어 듣는 거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 하고 끝내도 되는데, 역시 나도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이 안 없어져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허수아비 이야기예요. 허수아비. 옛날에 농촌에서 농사지을 때 가을이 되면 새들을 쫓는다고 허수아비를 밭마다 많이 세웠거든요. 근데 그 허수아비가 곡식을 다 거둬들인 다음에 초겨울이 되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그 허수아비가 혼자 서 있는데 어떤 스님이 입을 게 없으니까 그 허수아비를 보고 허수아비를 만든 옷을 벗겼어요. 자기가 벗겨서 가져가서 입으려고. 그러니까 누가 지나가다가 얘기를 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이랬어요. 그런가 이게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이런 생각도 들고, 미안한 생각도 들고,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 대답이 잘 안 나왔어. 그래서 그냥 후닥닥 벗겨서 싸가지고 갔죠. 그런데 다른 데 또 가니까 똑같이 어떤 스님이 허수아비 옷을 벗기고 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또 물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무엇을 입고 삽니까?” 그러니까 이 양반은 도인이야, 도인. 확실히 일즉일체다즉일 일중일체다중일 이 도리를 아는 분이란 말이에요. 이거 딱 자세를 바로 하더니, “옷을 입지 않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옷 입는 허수아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거요. 그럼 이게 이제 뭐냐 그러면, 하나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이것은 저것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저것은 이것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허수아비가 자기 체성이 없이 나무하고 옷하고 거기 단단히 매는 끈하고 그것뿐이잖아요. 그러면 허수아비 자기 체성에서 옷이 허수아비이고, 나무가 허수아비이고, 그 나무와 나무를 잡으면 끈이 허수아비인거라. 그 이 세상의 모든 게, 하나는 하나의 자기 실체가 없고, 많은 것이 있을 때 하나가 있지, 많은 것 없는데 하나가 없거든. 그러니까 하나는 많은 것이 허수아비고, 많은 것은 또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어요. 더 많은 것은 하나의 허수아비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허수아비만 자기 체성이 없이 그냥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 안 입고 있는 이 천지 만물이 전부 허수아비와 같이 자기 체성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옷 입는 허수아비만 보지 말고,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썰렁합니다. 아주 썰렁해요. 아주 썰렁해. 그러니까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요. 인연법으로 다 이루어졌어. 인연법으로. 그러니까 허수아비예요. 허수아비만 자성이 없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 자기 체성이 없어. 다 이것저것이 모여서 됐기 때문에 법무자성(法無自性)하야 이타위성(以他僞性)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게 화엄경 경책인데 이게 화엄경이에요. 이 화엄경의 자체 자기 체성이 없어. 종이하고, 화엄경 경문 내용하고, 요 실하고, 먹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허수아비인 거예요. 이게 자기 체성이 없는 허수아비. 그러니까 이 세상에 마음 밖에서 볼 건 하나도 없어요. 다 허수아비라. 자기 체성이 없어서. 오직 하나는 많은 것에 이루어지고, 많은 것은 하나에 이루어진다. 이걸 아는 그 마음만 밝히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다. 하나는 자성이 없어서 많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것은 자성이 없어서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거는 법의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 말인데, 인연법이란 말이죠. 자성이 없다라는 건 인연법이란 말이에요. 그 인연으로 생긴 건 인연으로 사라지니까 자성이 없지. 근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는 거예요. 뭐냐. 그걸 아는 놈이 있단 말이에요. 하나는 여럿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여럿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건 법이고, 그 법을 아는 놈이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법은 있고, 불성은 광명이다. 그래서 이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밝힐 때 모든 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불성광명을 밝히지 못하면, 법에 매달려. 법은 허수아비와 같은 건데 법에 미혹하고 법에 매달려서 그냥 그 속박이 많아요. 이제 자기 몸에 매달리니까 몸에 속박, 물질에 매달리니까 물질의 속박, 사람에 매달리니까 사람의 속박, 이것을 구박범부(具縛凡夫)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갖출 구, 얽힐 박, 그냥 그 얽힘이 부족함이 하나도 없이 다 구체적으로 다 갖춰져서 얽혔다. 이게 구박범부에요. 몸이 허수아비인데 자성이 없는데 몸에 얽히죠. 사람도 허수아비인데 사람에 얽히죠. 물질도 허수아비인데 물질에 얽히죠. 이걸 구박범부라 그래요. 얽힌 것이 끝도 한도 없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 딱 밝히고 나면 물질은 없고 일심은 광명이다. 물질은 없고 한마음은 광명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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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기도] 대웅전 관음천일기도 입재 법문
주지 법해스님 2025-02-09
저도 92년도 요맘때 시작을 했어요, 천일기도를. 저도 정월달에 기도를 시작해가지고 94년도에 기도를 마쳤습니다. 제 나름대로 오늘 우리 법능 스님께도 기도 잘하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 함께 기도한 보살님들도 여기 계십니다. 근데 진짜 저는 그때 그저 오로지 도인이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만, 다른 시간은 진짜 1도 안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음악도 듣지 않고, 누구하고 얘기하는 것도 싫고, 그저 법당에 와서 기도만, 기도만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나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100일, 100일마다 철야정진을 했습니다. 철야정진을 하고, 철야정진을 하면 저희 도반들이 쫙 와 가지고 그냥 같이 이렇게 목탁을 치고 정진을 하고, 그때는 뭐 신심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 은사 스님이 기도하는데 너무 외호를 그렇게 해 주셨고, 그것도 제 복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 천일 회향할 때는 7일 7야를 했습니다. 7일 7야 하면서 기도, 참 많은 그 가피를 저는 받았습니다. 이제 뭐 도인는 아직 못 됐는데, 나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험하고, 또 느끼고,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 하는 그런 원력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마음이 생기면서 쭉 이래 와서, 참 부처님께 제가 많은 은혜를 받은 스님인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 아마 주지 스님은 참 복이 많다 이런 생각해요? 안 해요? 하죠. 그거는 천일 기도한 그 복력으로 아마 제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 그거를 사람들에게 같이 나눠줄까, 그런 자비로운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을 나눠주려고 제가 노력을 했던 거가 아마 공덕으로, 이렇게 여러분들같이 신심 있는 불자님들을 만나고, 능력 있는, 원력 있는 우리 스님들과 함께 진관사에서 이렇게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요즘은 마음의 정원을 넘어서 극락 정원이 되는 것 같아요. 극락이라는 것은 깨끗하다 그랬죠. 극히 즐거운 세계, 그게 극락입니다. 그런데 극락은 깨끗하다. 여러분들이 좋다, 참 깨끗하다, 청아하다 느낀다면 지금 극락을 맛보고 있는 거예요. 오늘 그렇지 않았어요, 그죠? 진관사 일주문에 들어오면 여기가 다른 어느 장소보다 아주 청아하고 깨끗한 그런 서기가 느껴지죠. 안 느껴지면 더 마음을 정성을 기울여 보세요. 내 마음이 아직까지 깨끗하지 않아서 못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마음의 정원 진관사가 극락 정원으로 거듭났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기도 하고, 실천의 종교이기도 하고, 수행의 종교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한 발 한 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게 되면은, 감정도 습관도 행동도 부처님처럼 하게 돼 있어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 부처님이냐면 지혜롭고, -지혜롭다는 것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아 우물쭈물이 없는 게 지혜예요. 내가 실천해서 내가 느껴 나오는 것이 그런 마음이 느껴져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자비로워요. 그저 푸근한 마음이 그저 드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그런 마음이 드러날 때는 “아 나 지금 가피를 받고 있구나, 내 부처님처럼 지금 행동하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보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겠어요. 그죠. 보살님이 크게 대답하셨네요. 그래서 내 마음에서 나쁜 기억은 안 하는 거예요. 나쁜 기억은 할 필요가 없어. 그거는 과거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에, 나쁜 기억은 1도, 0.1도, 0.001도 나쁜 기억은 하지 말고, 그저 부처님처럼 행하다가 보면은, 내 몸이 기억하고 내 마음이 기억하고, 또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풍요롭고 그렇게 된다는 걸 제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건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 좋아요. 아침에도 어떤 우리 신도님 자녀분이 자부랑 왔는데 제가 그랬어요. 3일 수심은, 3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연의 보배가 된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 모아놓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될 수가 있다 이거에요. 권력과 재산, 그렇다고 재산이 없으면 안 돼요. 열심히 하되 함께 나누고 함께 했을 때 그게 너무 빛이 나지, 그 재산이 무기가 되고, 재산이 고통이 되고, 재산이 분노가 되고, 이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물건은 절대 있다가 없을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 거를 여러분이 꼭 기억 하시고, 매일 감정 또 습관 또 부처님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서도 안 돼요. 제가 맨날 얘기하지만 요가 매트만 사다 놓고 한 번도 매트 위에 올라가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죠? 예. 그래서 노는 입에 염불하고 그것도 습관입니다. 항상 불자는 염주,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주는 자기 책상머리에, 손목에, 침대에 있어야 돼요. 보는 순간 본인이 하는 염불을. 지금은 이제 관음 기도하는데 저는 나무아미타불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제가 하고 있는 것은 나무아미타불 또 광명진언, 불설소재길상다라니. 이제 그거를 이렇게 하나 만들어 드릴 건데 제가 하는 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는 뭐를 하냐면 반야심경, 매일 불자는 반야심경은 무조건 해야 돼요. 무조건 매일. 반야심경이 얼마나 좋으면 매번 저쪽에 대고 모든 행사에 반야심경을 하잖아요. 공덕이 무량하기 때문에 반야심경을 하는 거예요. 반야심경을 하면, 내가 아플 때도 반야심경을 하고 있으면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감사해 하면서 새로운, 다시 말하면 치유의 그런 에너지가 나오게 되고, 내가 어리석다가도 반야심경을 하게 되면 지혜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복된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진관사 불자님들은 한글 반야심경은 진짜 필수에요. 제사 지낼 때도 반야심경을 한 편 읽으면 그 영가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집에서. 여기 절에 와서 제사를 안 지내도. 그리고 가족이 함께 생일 파티 할 때도 반야심경 딱 한 편하고 케이크 잘라 잡수면 그 가족들이 얼마나 좋은지. 그거를 생활화해야 돼요. 알았죠.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근데 본인이 지금 괴롭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좀 전까지도 나쁜 습관을 내가 익혀가지고, 그 업의 덩어리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보통 얘기를, 내가 나쁜 습관을 내 몸에 익혀 그게 습관이 된 게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제 천일기도 시작했으니까 지금서부터는 부처님 기도하고 마음 닦고 수행하는 이 마음을 익혀가면은 좀 시간이 지나다 보면 내 마음이 그냥 확 가슴에 아무것도 걸림이 없어. 그래서 불교는 해탈의 종교, 한 개도 걸림없는 지금 창공처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가 있고. 그리고 또 이제 우리가 절에를 오시고, 천일기도 이제 입재를 하신다고 이 추운 데 오셨는데, 천일기도의 목적이 뭐냐. 내가 행복한 거예요. 우선 부처님 되는 건 두 번째 치고, 내가 행복해야 돼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행복해야 된대요. 근데 그 행복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내가 주어진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 그거에 달려 있어요. 부처님처럼 하면 돼요. 그래서 저희 은사 스님이시죠. 우리 회주 스님, 돌아가신 회주 스님이 제 노트에다가 준 걸 보세요. 다 같이 크게 한번.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할 수 있냐. 첫 단계가 절에 와서 그 행동을 익히는 겁니다. 그 행동을 어떻게 익혀야 되는가 보면은 <마음의 정원 진관사 불자님들에 대한 청규>, 청규라는 것은 규칙이라는 말입니다. 규칙. 그 규칙은 1. 참배하는 법. 절에 왔는데 절이란 말은 절을 많이 하는 데서 절이라는 이름이 불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번뇌가 막 일어날 때, 제일 빨리 괴로울 때 그거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절입니다. 염불도 막 열불 나면 염불도 잘 안 돼요. 그럴 때는 와가지고 몸으로 나를 자꾸 내려 앉히는, 절을 자꾸 하면은, 뭐 절까지 오기도 어려우면은 방석 하나 딱 펴놓고 맑은 햇볕이 들어오는 곳에 그쪽을 향해서, 햇볕은 광명이고 지혜이고 자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햇볕이 들어오는 곳에 딱 해놓고 방석 내려놓고 절을 해보세요. 괜히 막 아이들한테 소리 벅벅 지르지 말고, 남편한테 소리 질러 봤자 그거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절대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소리는 안 질러야 돼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차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바꿀 수도 없고 아이를 바꿀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불자님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래서 그럴 때는 말을 꾹 참고 일인이 장락이야(一忍長樂), 한 번 참는 그 마음이 길이길이 낙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말은 열불 나도 그냥 딱 참고 방석을 펴놓고 절을 하면 제일 빨리 치유가 됩니다. 그러니까 절이란 말은 절을 많이 하는 데서 절이라고 이름 불러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절에서는 절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절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여러 생 동안에 누적되어 온 자신의 업을 그만큼 소멸하게 되고, 아울러 업이 소멸되어 가는 그 바탕 위에 새로운 공덕의 싹을 터나게 하는 기름진 토양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을 늘 챙기면 그는 반드시 불보살림의 가피력을 입게 됩니다. 이게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또 스님이 평생 수행을 해보시고 불자들에게 어떻게 이거를, 이 부처님처럼 이렇게 수행을 하게 할까 하시다가, 막 고민하시다가 이걸 왜 제 노트에 적어놨는지 저도 그건 의문이에요. '이걸 내가 죽고 나면 니가 이걸 써먹어라' 이러려고 적어놨는지, 제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업이라는 말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내가 잘못 익힌 습관이 내가 되어서 있는 것을 업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잘못 보고, 트집 잡고, 비방하고, 화내고, 욕심 내고, 분노를 일으키고 이런 것들이 자기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이거를 녹일 수 있는 것이 절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모르게 보는 대로 다 찬탄하고, 보는 대로 고마워하고, 보는 대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그게 가피거든요. 그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불보살의 가피가 가득하다. 두 번째 절에서의 몸가짐. 도량 내에서는 엄숙히 합니다. 우리가 보면은, 제가 제 방에서 들어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요. 아마 이 부처님이 지금 다 여기 도량에 가득한데, 와서 부처님이 있든지 말든지, 막 부처님이 지금 가피하고 있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그냥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 도량에는 모든 선사스님들과 불보살님들께서 고요히 선정(定)에 들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거를 정착시키려고 늘 저도 생각만 하고 있어요. 저기 극락교 일주문부터 이렇게 마음을 점점 닦아와가지고 여기에는 선정에 들 수 있도록,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할까, ‘지금 그냥 마음을, 나를 쳐다보라’ 그럴까, 어떻게 하면 이 진관사가 가지고 있는 가피의 힘을 느끼게 해줄까 이거거든요. 여기에는 많은 스님들이 정진을 했던 그런 힘이 진관사에 와이파이가 터져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느끼려면 내가 마음이 고요해야 된다는 거. 그래서 절에 와서는 꼭 소란스럽지 않게 하고, 발꿈치도 들고, 걸을 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걸으세요. 걸을 때 그렇게 걷게 되면은 발꿈치를 들고 누가 보아도 자신의 몸가짐에서 불자의 품위가 풍겨나게 하십시오. 도량 내에서는 스님들이나 같은 신도님들을 보게 되면 공손히 합장하고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렇게 인사를, 여러분들이 그게 몸에 배여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죠. 네. 그리고 절이란, 자신의 절이라는 것은, 내가 업덩어리가 아니고 나는 부처님의 법향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주지스님 보면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좋죠. 막 좋아가지고 손도 잡아달라 그러고 막 난리예요. 그러는데 그렇게 여러분들 누구를, 도반을 만나도, 그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돼요. 주지스님 또 혹시 인기 떨어질까 봐 나름 인기 관리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법향이 떨어지면은 절대 그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염불하고, 시간 나는 대로 명상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저도 막 불철주야 정진을 하고 있어요. 너무 시간이 아까워서. 진짜 시간이 아까워 경 읽고 명상하고 책 보고 또 그냥 어떻게 계획서 짜고, 막 이렇게 나름 주지스님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마찬가지예요. 늙어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불자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짜 부처님답게 이 시간을 아끼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셔야 돼요. 주지스님 그냥 맹탕 놀지를 않거든요. 그러면 금방 주지스님 복진타락(福盡墮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세속으로 가 바뀌기는 금방 바뀌어지는 거예요. 그 사람들 보면 추해 보여. 저 스님 이렇게 보면은 보기 싫어지는 거예요. 자연적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주지스님도 열심히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진짜 저는 막 시간이 아까운 거예요. 밥 먹으면서도 뭐를 해요. 밥 먹으면서도. 어떻게 이 진관사가 마음의 정원이 극락 정원으로 바뀔까, 어떻게 하면 우리 보살님들 한 분 한 분을 극락을 느끼게 할까. 막 그래 갖고 이제 저만 하는 게 아니라, 스님들도 막 괴롭혀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하고 같이 하면은 더 빨리 돼요. 팀이라는 거야. 실이 한 올을 가졌을 때와 실이 여러 올을 가졌을 때 큰 동아줄이 된다라는 거, 여러분들과 함께 함께 이 깨달음의 숲을 이루자는 거가 제 발원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제 오만심을 내려놓는다. 절대 잘난 척하면 안 돼요. 이 잘난 척하는 거는 복이 막 그냥 쑥쑥쑥 빠져. 그릇이 깨지는 거하고 똑같아요.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 소용이. 우리 진관사 신도님들, 진관사 스님들은 잘난 척하고, 화내고, 욕심 내고, 이런 거는 이 도량이 거부해요. 왜냐하면 진관사 도량이 워낙 청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신도님들을, 턱 저기서 오는 신도님을 보면, 그냥 부처님이 오시듯 그냥 이렇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주지스님 저기서 보면 막 좋아가지고 막 그러더라고. 아기들이 엄마를 만나는 것처럼 제가 주지스님 오신다고 막. 옛날에는 제가 저 사람이 오네 이쪽으로 막 피해 갔어요. 사람들 안 만나려고. 요즘은 제가 누구든지 보면은 <아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도 맞이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맞이를 하는 거예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절로 절로 저절로. 아는 건 다 해도 돼. 부처님 마음 내 마음, 이렇게 하면서. 그게 인기 관리하는 거예요. 알았죠? 그리고 세 번째, 공양 예절. 공양은 대중과 함께 하십시오. 개인적으로 후원이나 조금 자기가 이제 불사금도 좀 많이 냈고, 이 절에 좀 오래 다녔다고 그냥 특별 대우를 받으려면 그거는 사실 복을 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이제 제가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공동으로 밥 먹는 시간을 지키게 하고, 또 공양을 평등하게 나누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것도 이제 진관사 시스템 속에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후원이나 찬간 또는 아직 상을 차리는 도중에 한두 분이 먼저 공양을 하게 되면 후원이 더욱 분주해지고 그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공중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본인들은 질서를 파괴한 지중한 업을 짓게 되오니 반드시 여러 대중과 함께 정숙히 앉아서 합시다. 노스님께서 이거를 또 우리 신도님들께 당부를 하셨습니다. 근데 요즘 이제 진관사가 신도님들이 날로 증가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공양간이 조금 좁아요. 또 사람들이 특히 추울 때나 아주 더울 때 제가 죄송스러운데, 그것도 어떻게든 불편함이 없도록 시설을 갖추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옷차림. 절에 나갈 때는 화려한 옷이나 화려한 몸단장을 피하십시오. 특히 절에 올 때 밍크코트 막 턱턱 걸쳐가지고 그게 다 뭐예요? 짐승의 털들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밍크코트 입고 오는 건 조금 절에 안 맞아요. 지금 보살님이 “아유” 이러는데 추울 때, 추울 때는 할 수 없죠. 그죠. 그러는데 조금 그러고. 막 절에 오는데 저는 향수 잘 모르기는 하는데, 향수를 너무 발라가지고 도대체가 냄새나 죽겠어요. 특히 남자분들 향수 발라 오는 우리 거사님들, 남자 불자님들이 그렇게 너무 발라오는 거, 또 보살님들도 화장품을 너무 세게 발라가지고 제가 저녁에 되면 내 방문을 아무리 추워도 한 30분 열어놔요. 아주 방에 그냥 사람들이 왔다가 가면, 냄새가 너무 배어 있어 가지고. 그런 건 상대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래서 절에 오는데 너무 그냥 요란스럽게 오시는 거는 안 맞다. 그리고 또 이제 어쨌든 이런 공중질서를 잘 가지자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언행. 성스러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 우리가 남 흉 볼 때 너무 신나더라고요. 왜냐하면 그것만 익혀 가지고. 내가 그것만 익혀갖고 익힌 걸 하니까 쉽잖아요. 그래서 신나는 거야. 오면은 어떤 보살님은 앉았다 하면 그 보살이 어쩌고, 접수를 받는데 어떻게 했고, 막 주지스님께 일러주는 게 너무 많아. 그러는데 그거 안 맞아요. 절대로 절에 와가지고는 남의 흉을 본다든지, 욕을 한다든지 이런 거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데. 스님이 너무 표현을 잘해놓으셨어요. 성스러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 결코 남을 헐뜯거나 비방 등에 듣기에 거북스러운 말 등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십시오. 욕설과 악담으로 한 번 더러워진 입으로는 결코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염불을 해서도 아니 된다. 부처님을 모시는데 말이야. 그렇죠. 내가 나쁜 말을 하고 부처님을 모시면 되겠어요? 그죠. 그리고 나쁜 말을 하는 거 참 더 어렵다고 제가 늘 말을 하는데,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내 가슴이 더 아프더라고. 저는 상좌들한테 나쁜 말을 좀 많이 했는데, 그 상좌들이 하도 안 고치니까. 그렇게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내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진짜 면도칼로 찢는 것 같이 아파. 그래서 제가 이제 그 방법을 좀 바꿨어요. 내가 아주 기분 좋을 때, 기분 좋을 때, 내 마음이 자비가 가득 찼을 때, 그 상좌들을 고치기는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안목도 늘려줘야 되고, 본인의 원력도 키워줘야 되고, 이랬을 때 제가 얘기해요. 기분 좋게 얘기하는데도 아프죠. 진실은 불편하니까. 그렇게 상좌를 키워보고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뭐 내하고 별로 관여 없으니까 좋게 좋게 얘기를 많이 했는데, 이 상좌는 제가 이 사람을 훌륭하게, 훌륭한 지도자로 키워야 되기 때문에, 그게 제 의무거든요. 그래서 저희 스님도 저를 엄청 힘들게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여기서, 대웅전에서 야단 맞는 건 보통이었어요. 우리 재인행 보살님도 있지만, 쥐어박히는 건 보통이고 그랬어요. 저희 스님이 저를 예뻐도 했지만, 쥐어박히는 거 말도 못하고, 멱살 잡히는 거 말도 못했어요. 이 뒤꼭지 딱 잡혀가지고 그냥 이렇게 하는 거, 등짝 두드려 맞은 거, 말도 못하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해도 제가 안 고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가리키려니까. 그렇게 했는데 우리가 절대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또 욕설과 악담으로 한 번 더러워진 입으로는 결코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염불를 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랬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해가지고는 입을 깨끗이 해야 돼요. 입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우리 더러운 입에 맑은 물을 부어주어서 입을 헹궈내는 거거든요. 그냥 수리수리, 길상이여 길상이여 대길상이요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참회, 잘못했습니다가 아니,고 부처님의 그런 길상스러운 주문을 읽으면서, 진언을 읽으면서 나를 정화한 다음에 부처님 명호를 불러라 그거고, 그리고 만일 자신의 입이 거짓과 저주와 욕설 등으로 더러워졌다면, 반드시 먼저 참회하여 씻은 연후에. 참회에도 정구업진언도 되고 참회진언도 됩니다. 참회진언은 뭐예요?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참회진언이라는 말이 해석을 하면,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마음을, 자꾸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나에게 그거를 씻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또 설사 다른 이에게 들은 말일지라도 자신의 입으로 더럽히지 않고 청정히 보존하려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건네지 않습니다. 이거는 노스님이 참 강조했던 부분이에요. 누구한테 듣잖아요. 저도 좀 그런 게 가끔씩 보이더라고요. 지금 막 소식을, 노란 신문에 나는 거 있잖아요. 정식 신문에 못 나는 거. 그런 게 딱 왔다 그러면 누구한테 이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막 그렇죠. 그랬을 때 자기를 쳐다보는 거야. ‘아니야 얘기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고 자기를 딱 쳐다보고는 이건 내가 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내게 얘기를 했지만 내 선에서 멈춰버려야 돼. 그런데 우리는 절대 말하면 안 돼. 그럼 지도 말 안 해야지, 그죠. “이거 너만 들어, 절대 말하면 안 돼.” 하면서 꼭 말을 한다고요. 그거 패착이에요. 그거는 진짜 어리석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진관사 불자님들. 이거 노스님께서 가장 많이 저에게 해준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나쁜 말은 절대로 듣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라. 나쁜 말을 했을 때는 결국 니가 그 말을 그 사람한테 하면, 또 너와 그 사람이 친한 사람에게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이러다 보면 나중에 그 말이 네게 구름처럼 크게 번져가지고 너를 괴롭힌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말을 엄청 엄청 발우 시간마다 강조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이 천일동안, 이거 참 작은 일인 것 같은데 이렇게만 여러분들이 실천을 하신다면, 마음의 정원에 극락 정원을 가꾸는 우리 큰 멋진 도반들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명심하시죠. 그래서 우리 참 부처님처럼 부처님의 지혜를, 매일 여기 이제 습관이 안 되면 매일 읽어보는 거, 노스님을 아시는 분들은 노스님을 생각하면서 읽어보시면 좋아요. 이건 노스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그죠. 그래서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일러줄 수 있어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오늘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우리 법능 스님 축하합니다. 기도 아니 뭐 시작이 좋은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까 노스님이 뻔히 보고 계시네요. 그래서 멋지게 제가 이렇게 행복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아마 행복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음의 정원 진관사를 만나서 우리는 진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참 행운인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