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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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3월 29일 음력 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3-29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10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 10--一微塵中含十方, 即事法 明攝法分齊----일미진중함시방, 즉사법 명섭법분제-- 안녕하세요. 을사년 3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에, 의상조사 법성게 게송 30송 중에서 아홉 번째, 아홉 번째,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그 게송에 대한 오늘 법문이거든요. 자, 10번을 우선 읽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일미진중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이 글을 읽는데요. 읽는 방법이 첫째는 송독(誦讀). 송독. 외울 송자, 읽을 독자 송독. 이렇게 외우는 걸 중심으로 하다 보면 이 말하는 대로 가게 돼요. 말 따라서 가게 돼요. 그리고 뜻을 보는 걸 중심으로 읽는 것을 볼 관자, 읽을 독자, 관독(觀讀)이라 그래요. 관독. 그럼 이제 송독을 할 때는 일미진, 일미, 일미로 붙게 돼요. 일미 진중. 근데 관독을 할 때는 일하고 떼어서 미진중 이렇게 읽었거든요. 미진이라는 게 그게 하나의 용어고, 일이라는 게 또 독립된 용어잖아요. 그래서 뜻을 가만히 보고 읽을 때는, 자연스럽게 일/ 미진중/ 함/ 시방 이렇게 읽고, 외울 때는 외우기 편한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일미/ 진중/ 함시방, 일미진중함시방. 그런데 이 게송이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는 아주 중생에게 기억하기 좋은 게송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미진이라는 거는 이 보이는 물체 중에 작은 것 중에 제일 작은 것을 미진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것도 많은 미진이 아니라 일미진, 한 가는 티끌. 그리고 시방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 전체를 시방이라고 하니까 큰 것 중에 이거보다 더 큰 게 없는 게 시방이잖아요. 십방. 근데 깨닫고 보니까 ‘아주 작고 작은 가는 티끌이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들이더라’ 이 뜻이에요. 함자는 머금을 함잔데, 머금을 함자가 거둘 섭자, 들어갈 입자, 모두 거두어서 입 안으로 다 들인다, 이걸 함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함자는 받을 수자, 받을 수자, 함수(含受)라고 그래요. 함수 모든 걸 다 거두어서 받을 수자는 옥편에 뭐라고 나왔느냐 하면 담을 수, 담는다. 그릇에다 물건을 담듯이 이렇게 거두어 담는다, 이런 뜻이에요. 함수, 함, 섭, 거둘 섭자가 있기 때문에. 이게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경지냐. ‘한 가는 티끌 속에 크고도 큰 시방세계를 거두어서 다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고요. ‘가는 티끌 속에 넓고 넓은 시방 세계를 함수, 다 들어가게 해서 담는다. 그릇에다 담아’ 뭐 이런 뜻이에요. 微塵者 虚隙日光塵, 法界摠相塵미진자 허극일광진, 법계총상진 이런 뜻인데, 이거를 미진이라고 할 때, <사물 미진>. 이 물건상에서 보이는 가는 티끌. 또 <법성 미진>, 법성원융무이상 하는 그 법성의 미진. 둘로 의상 법성게 주석서에는 설명을 했는데, 사물 미진이라고 하는 것은 허극일광미진(虚隙日光塵)이라. 허극이라고 하는 건 빌 허자, 틈 극자가 있는데, 이 벽이나 이런 데 구멍이 딱 하나 뚫려 있으면 이게 허극이에요. 근데 거기에 햇빛이 딱 들어오면 그게 일광이에요. 그 빈틈 햇빛 속에 가는 티끌이 보여요. 아른 아른 아른 아른하게. 막 움직이는 가는 티끌이 보이거든요. 그걸 작은 것 중에 제일 작아서 인간이 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작다. 그래서 그걸 허극일광진이라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리고 법성 미진은 하나의 미진이 법계총상진(法界摠相塵)이라. 법계는 우주 법계 시방 세계인데. 우주 법계 시방 세계의 전체를 이루는 미진이다. 이거 해서, 이거를 총상이라고 하는 모두 총자, 형상 상자 총상인데, 하나의 미진이 법계의 전체상을 이룬다. 전체의 내용을 이룬다. 이게 이제 법성 미진이에요. 재미있네요. 하나의 미진을 허극일광진, 법계총상진. 그게 이제 법성을 딱 깨닫고 보니까, 이 가는 티끌 하나가 우주 시방의 전부라는 거예요. 총상이라는 거예요. 그걸 깨달은 거예요. 미진이 법계총상이라, 그걸 깨달으면 그게 깨달음이에요. 근데 범부는 의식으로 형상을 구분하고 살기 때문에, 법성을 보지 못하고 법계의 모양만 눈으로 좇아간다. 그래서 상만 봐요. 성을 못 봐. 그런데 법성은 시방세계가 일미진이고, 일미진이 시방 세계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보이지도 않는 티끌 하나가 시방 세계의 전부다. 시방 세계가 보이지도 않는 티끌 하나다. 이걸 표현한 게 일미진중함시방 이렇게 된 거예요. 大記云 ··· 含受十方世界 無㝵自在 此是事法 最細之初位대기운 ··· 함수시방세계 무애자재 차시사법 최세지초위 그러면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뜻이 사상으로 설명한 것이 있고, 법성으로 설명한 것이 있는데, 사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냐. 한 개인이 발심을 해서, 불성, 마음을 믿고 닦으면 반드시 된다고 하는 인과를 믿고, 마음 믿고 인과 믿고, 닦고 닦고 닦아서 마음이 점점 밝아지고 밝아지면, 그 마음이 넓어지고 넓어져서 시방세계를 다 끌어서 자기 마음속에 담아, 마음이 밝아지고 넓어지면 온 우주법계 시방세계를 자기 마음에 다 담아버린다. 이게 이제 의상 스님 제자의 해석이에요. 함수시방세계(含受十方世界)라. 범부는 그게 왜 안 되냐. 범부는 마음이 자기 몸 안에 있어요. 몸 안에 있기 때문에 그거 할 수가 없어요. 근데 마음이 밝아지고 밝아지면 마음은 몸과 몸 밖에 없는 데가 없어요. 진시방삼세(盡十方三世), 온 시방삼세에 항상 하는 마음이다. 그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 마음은 우리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몸 밖의 것을 어떻게 마음속에 담을 수 없잖아요. 근데 마음이 밝아지고 넓어지면 마음이 없는 데가 없이 넓어지고 밝아져서 모든 걸 다 마음 안에다가 담아버린다. 그게 함수시방삼세, 함수시방세계 이래 되요. 끌어당겨서 담는다. 그래서 무애자재(無㝵自在)해요. 무애자재라는 것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뭐 걸림이 없다. 무애자재 해가지고 일이 이루어지는데, 차시사법 최세지초위(此是事法 最細之初位)라. 이것이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미세한 지위다. 이렇게 이제 주석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眞定德云 事融現理門者 約塵含十方之道理云耳 非謂一塵 진정덕운 사융현리문자 약진함시방지도리운이 비위일진泯融 同理也 (叢髓錄卷一)민융 동리야 (총수록권일) 그리고 의상 스님 제자 중에 진정 스님(眞定)이 있는데, 참 진자, 선정이라는 정자, 진정 스님이 이 법성게는 사융현리문(事融現理門者)이 있다, 이렇게 설명했어요. 사융, 사는 일 사자인데, 이 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 세계, 보이고 들리는 색성향미촉법이에요. 이게 다 하나로 녹아서, 모든 사물이 하나로 녹아서, 뭐를 드러내느냐. 법성의 이치를 드러낸다. 하나하나 사물이 전부 하나로 녹아가지고 법성의 위치를 드러낸다. 이런 가르침을 줬거든요, 진정 스님이. 그래서 이것은 진함시방세계시방지도리(約塵含十方之道理)라. 진함시방이라. 미진이 시방을 다 거두어들이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한 티끌이 일진이 민용(非謂一塵泯融)하여 없어져서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다. 미진 그대로 있으면서, 그 미진 하나가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 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 이 미진의 형상이 없어져 가지고 진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주고 있네요. 진함시방지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눈으로 보면 형상인데, 이 형상을 법성 삼매에 딱 들어서 보면 이 형상이 우주 만법계의 형상과 다르지 않아서 원융무애하다. 이거야 원융해가지고 장애가 없어. 그래서 하나의 미진이 온갖 진리를 다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없어져서 진리가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네요. 있는 그대로 이것이 모든 것을 다 거두어서 들인다. 그래서 이것 자체가 법의 본성이다. 이게 없어져서 진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신라 시대에 이런 공부를 했다는 게 참 놀라워요. 보통 놀라운 게 아니에요. 道身章云 相和尙日 一微塵中 含十方世界者 同是無住故爾 도신장운 상화상왈 일미진중 함시방세계자 동시무주고이 그리고 또 거기 도신장(道身章)이라고 하는 주석서가 있는데, 거기서 보면은, 상화상(相和尙) 왈, 상화상은 의상 스님을 말해요. 의상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미진중에 함시방세계자(一微塵中 含十方世界者)는, 한 가는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거두어 들인다 하는 것은, 동시무주고로 이라(同是無住故爾). 무주라는 말을 여기 썼는데, 없을 무, 머물 주. 법성은 무주다. 법의 본성은 머물지 않는다. 머무는 데가 없다. 이렇게 머무름이 없는 법성은 원융무애라. 무주법성 원융무애. 무주법성 원융무애. 이걸 가르치고 있는데, 한 미진 중에 시방세계를 어떻게 다 거두어들이느냐. 이거는 미진이나 시방세계나 동시 무주고로, 머묾이 없는 고로 이니라, 그러하니라. 이렇게 설명했는데 미진도 머묾이 없고 시방세계도 머묾이 없다. 이게 뭔 말이냐. 미진은 미진으로 딱 머물러서 미진 밖에는 다른 게 될 수 없고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진은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는 시방세계에 딱 머물러서 시방세계 밖에는 다른 게 될 수 없다. 이게 아니다. 뭔 소린지 잠 오기 직전이다, 이거야. 잠 와, 잠 와. 안 들어보던 얘기 들으니까 이거 잠 올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사상과 법성이 있는데, 사상으로 보면 미진은 작고 시방세계는 커. 이게 일의 모습이에요. 물건의 모습. 그런데 법성으로 보면 법성은 머무는 데가 없어서, 미진이라고 해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라고 해도 시방세계에 머물지 않으니까, 미진 법성이 시방세계 법성보다 작질 않아. 요거 아주 요거 몰랐지. 시방세계 법성이 미진 법성보다 크질 않아요. 이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미진도 미진에 머물지 않고, 시방세계도 시방세계에 머물지 않아서 원융무애하다. 원융에 다 통해요. 원융이라는 건 둥글게 통한다. 이게 융은 통이라는 말이거든요. 통한다. 융통. 둥글게 다 통해서 미진 법성이 시방세계 법성하고 통하고, 시방 세계 법성이 미진 법성하고 통해서, 일미진 중에 시방세계를 다 거두어 들일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근데 이거를 떡 깨달으면, 우리 생신인데, 태어난 몸인데, 이 태어난 몸의 법성이나 우주 법계의 법성이나, 이 태어난 몸의 법성이 태어난 몸의 법성에 머물질 않고, 우주 법계 법성이 우주 법계 법성에 머물지 않으니까, 우리 몸이 시방세계를 다 거둬들이고 시방세계가 우리 몸을 다 거둬들여서 원융원통해서 무장무애하다 이걸 말하는 거예요. 법성은 법의 본성은 원융하고 원통해. 억울한 원통이 아니라, 통하지 않는 데가 없는 원통. 원융하고 원통해서 무장무애하다.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다. 그래서 이제 우리 몸을 딱 봐서 이 법성을 다 보면 그걸 해인삼매라고 그러는데요. 해인삼매는 자기 몸에서 자기 법성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법성을 내가 딱 보면 나의 몸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와 있어. 또 내 몸이 시방세계에 다 들어 있어. 이게 원융원통 무장무애요. 이 몸이 시방세계에 들어 있고 시방세계가 내 몸에 들어 있어서 원융하고 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걸 말하는 게 일미진중함시방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이제 법성에 대한 게송이거든요. 元師問云 微塵無住 小 十方世界無住 大耶 答 一量也 問 원사문운 미진무주 소 시방세계무주 대야 답 일량야 문若爾 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 答 微塵與十方世界 各無自性 약이 하언진소시방세계대야 답 미진여시방세계 각무자성唯無住耳 所言塵小世界大者 是須處須耳 非是 小故云小 大 유무주이 소언미소세계대자 시수처수이 비시 소고운소 대故云大 所謂不知塵小世界大機中 令知塵小世界大故 且說塵고운대 소위부지진소시계대기중 영지진소세계대고 차설진小世界大耳 非是一向塵小自性 世界大自性 亦得云塵大 소세계대이 비시일향진소자성 세계대자성 역득운진대世界小 道理齊一 無住實相也 세계소 도리제일 무주실상야(叢錄卷上, 한불전6, 780下)(총록권상, 한불전6, 780하) 그러니까 원사가 물어 이르되, 원사는 상원 스님이라고 하는 의상 스님 제자가 있었는데, 의상이라는 상자하고 근원 원자하고 상원 스님이요. 아주 법이 높은 스님으로 기록이 돼 있어요. 상원 스님이 묻기를, 미진무주와, 미진이 머물지 않는 법성과, 또 시방세계 무주에 있는데, 시방 세계가 머물지 않는 법성이 있는데, 미진 무주 법성은 작고 시방세계의 무주 법성은 큽니까?(微塵無住 小 十方世界無住 大耶) 이렇게 물었어요. 질문 대단하죠. 그러니까 요 법성이 있는데 이게 이 법성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거거든요. 시방세계의 법성이 있는데 시방세계 법성에 안 머문다고 그랬는데, 그렇지만 그러면 미진이 머물지 않는 법성하고 시방세계가 머물지 않는 법성하고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미진 법성은 작고 시방세계 법성은 큽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의상 스님이 답을 하되, 한 일자, 헤아릴 양자, 일량이다(一量也) 이랬어요. 일량. 일량이라는 건 양은 수량인데, 그 수량이 하나다. 크고 작은 게 아니다. 일량이다. 참 기가 막히네요. 어째서 그게 일량인고. 그러니까 상원 스님이 또 묻기를 약이(若爾)면, 그러하면, 하언진소시방세계대야(何言塵小十方世界大耶), 어찌 티끌은 작다고 하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합니까? 이렇게 질문했어요. 법성이 똑같다면 어째서 티끌은 작다고 하고 시방 세계는 크다고 합니까? 일량인데, 미진과 법계가 일량인데 왜 티끌은 작고 법계는 크냐. 그러니까 답하되 미진여시방세계(微塵與十方世界)는 각무자성(各無自性)하야, 미진은 미진에게 고정불변한 자체 본성이 없고, 각무자성이라는 게 그거예요. 미진의 변하지 않는 자기 성격이 없다. 또 시방세계도 시방세계의 고정불변해서 달라지지 않는 자기체성이 없다. 이게 또 이제 법무자성이라는 게 법성 무주라는 말하고 아주 중요하게 설명되는 말이에요. 법은 자성이 없다. 법성은 머묾이 없다. 법무자성 법성무주. 미진은 미진의 자성이 없고, 시방세계는 시방 세계의 자기 체성이 없다. 자기 본체, 자기 성질이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아 없다. 유무주(唯無住)라. 오직 머묾이 없을 뿐이다. 미진도 무주요, 머묾이 없고 시방세계도 무주다. 그 무주라는 말은 무자성이다. 자성이 없다. 자체 체성이 딱 있으면 그게 머묾이 있는 거거든요. 근데 자체 체상이 없으면 머묾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진의 자성도 머묾이 없는 법무자성이고, 법에는 자성이 없는 거고, 또 세계의 자성도 법무자성으로 머묾이 없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일 수밖에 없다. 이래가지고 이제 우리 범부들이 자나 깨나 고생하는 거는 이 몸을 나로 삼기 때문에 4대 육신을 자기라고 한다. 근데 깨달은 분은 우주 법계에 가득한 불성을 나로 삼아요. 못 깨달으면 이 육신이 난데 깨달으면 불성이 나요. 육신은 금방 생겼다 금방 사라지지만 불성은 시작이 없어요. 언제 시작됐는지, 끝이 없어. 또 우주에 변만해. 장소가 없어. 그러니까 이 생로병사라는 게 허공에 구름 한 점과 같아. 이 육신의 생로병사가. 그게 이제 못 깨달은 범부하고 깨달은 제불하고 차이점이에요. 제불은 불성이 난데, 못 깨달은 범부는 이 육신이 나다. 근데 불성은 허공과 같고 육신은 구름과 같아서, 뭐 뜬구름은 언제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아까 눈이 그렇게 많이 오더니 이제 말짱하네요. 이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불성을 딱 보면 이 몸이 오고 가는 것은 허공에 뜬 구름이 왔다 갔다 하는 거라, 아무 장애가 없단 말이죠. 그걸 여기서 말해요. 그게 일미진중함시방, 이 이치를 설명하는 거다 이런 말이죠. 이렇게 어려운 말 하는데 왜 잠을 안 자요? 희한하네. 이런 소리를 언제 뭐 듣기가 어려운데 못 들어본 얘기를 하면 꼭 잠 오게 돼 있거든요. 이 생각이라고 하는 거는 아는 걸 받아들여요. 모르는 걸 못 받아들여요. 과거 들었던 경험이 있을 때 그걸 듣지, 경험이 없으면 그걸 못 들어요. 똑같아요. 근데 잠속에서라도 이런 소리를 들어보셨는가 봐. 그러니까 잠을 안 자지.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잖아요. 그렇게 돼 가지고 각무자성하야 유무주이라. 각각 자성이 없어서 오직 머묾이 없을 뿐이다. 그래가지고 반대로 미진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각각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 일미진이라고 하는 것을 크다라고 인식을 하면 그게 큰 거예요. 법이라는 것은 각각 자성이 없어서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대로 달라지는 거예요. 크다고 내가 알면 커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큰 자성이 없으니까. 작다고 알면 작아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작은 자성이 없으니까. 아 잘생겼네. 그러면 그 잘생긴 거예요. 왜냐하면 잘생긴 자성이 없거든. 자기 체성이 없단 말이야. 잘못 생겼네. 그러면 잘못 생긴 거에요. 왜냐 잘못 생긴 자체 체성이 없어. 그러니까 잘생겼다고 해도 그 사람이 마음이 잘생긴 거다. 못생겼다 그러면 그래요. 니 마음이 못생겼다 이래요. 내가 못 생긴 게 아니라 보는 사람 마음이 못생긴 거다. 왜냐하면 보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는 게 이게 무장무애 해탈법문이요. 이거 이거 어려운데, 이런 말 듣기. 보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는 것이 무장무애 해탈 법문이다. 그러니까 이 맛 없네. 그러면 그 마음이 맛없는 거예요. 맛 좋으네. 그 마음이 좋은 거예요. 정해진 게 없어요. 그래서 입맛을 바꿔야지. 그냥 맛있는 거 막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면 애쓰다가 죽어. 왜냐하면 맛있는 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끝이 없어요. 이거 가장 아주 궁극적인 맛을 낸다고 변하지 않는 맛을 낸다고 설치다 다 죽었어요. 그 맛을 낸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정해진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세상 만물을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세상 만물을 보는 내 마음 하나를 딱 맑히면 그 담장이 널리 처져 있는데 그 담을 다 허물지 않고 거기 들어가는 열쇠 하나를 탁 열면 그냥 들어가는 거 하고 똑같아요. 만물은 담장과 같고 마음은 열쇠와 같단 말이야. 그 담 부실 거 없어요. 열쇠 하나 열면 그냥 들어가거든.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내 마음을 다 맑혀. 그러면 세상은 다 내가 보는 대로 보이는 거예요. 생각하는 대로 나타나요. 아 이거 참 이렇게 오묘한 이치가 있는데 그걸 모르고 맨날 고생을 하다니. 이거 참 문제예요, 문제요. 그래서 말을 하기를 진대세계소(塵大世界小), 진, 티끌은 크고 세계는 작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얻을 수가 있다.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런데 도리는 제일(道理齊一)이니 모든 크고 작은 이치는 하나니, 무주실상(無住實相也)이라 머묾이 없는 진실상이다. 무주실상. 진실상이 있는데, 진실상은 무주라는 거예요. 무주는 뭐냐. 하나하나의 자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큰 것도 큰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적은 것과 다르지 않고, 적은 것도 적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큰 것과 다르지 않아서, 이 대소가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이거 딱 보면 무주 법성에 들어가요. 머묾이 없는 법성에 딱 들어가. 근데 그 법성을 딱 보면 거기에 크고 작고 있고 없고, 없는 게 없어요. 근데 없는 게 없는 게 그게 다 하나여. 원융원통해요. 그래서 그거를 큰 거울을 딱 갖다 놓고 이렇게 비춰보면 거울 안에 산도 있고 나무도 있고 집도 있고 다 있는데, 그 거울 안에 그게 있다고 거울 부수면 없어, 그게. 그러니까 그 거울 빛깔 안에 그게 비추어진 거라. 그러니까 큰 걸 비추어도 거울빛이고, 작은 게 비추어져도 거울빛이지, 거울에는 큰 거 작은 것이 없다. 그냥 오직 비춰져 있을 뿐이다. 이거지. 그래서 이 세상 만물이 이렇게 드러났지만, 하나하나가 불변의 자성으로 각자 지위에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각자 자성이 없어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들어가고,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돼서 원융원통하고 무장무애하다. 이게 이제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법성원융이에요. 법성은 원융하다. 법의 본성은 다 통한다. 그래서 이 법성삼매에 떡 들면 바다에 무한한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비춰져도 그게 하나의 바닷물일 뿐이지, 비추어진 그림자가 자성이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법성을 딱 보면 죽고 살고 모든 일이 자기 그 법성을 보는 불성자성, 불성을 아는 성격이거든요. 그 아는 성격, 불성 자성 그것이다. 다른 게 없다 이렇게 돼 있어요. 微塵不是小 十方不是大 미진불시소 시방불시대法性本平等 隨須卽眼對법성본평등 수수즉안대 無住實相境 入觀成正觀무주실상경 입관성정관凡夫生老死 圓融法性身범부생노사 원융법성신 無住實相 圓融法性 무주실상 원융법성不動諸法 無生而生부동제법 무생이생 그래서 이제 밑에 거는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말한 몇 개 이제 송을 지은 게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미진이 불시소(微塵不是小)하고, 가는 티끌이 적은 것이 아니고, 시방이 불시대(十方不是大)라 시방 세계가 큰 것이 아니다. 법성은 원융하니까 그렇단 말이에요. 법성원융. 법성은 본평등(法性本平等)하야, 법성은 본래 평등해. 큰 것과 작은 것이 다르지 않단 말이여. 그래서 수수즉안대(隨須卽眼對)라. 구함을 따라서, 자기가 큰 것을 구하면 큰 것으로 보이고, 작은 것으로, 작은 것을 구하면 작은 것으로 보인다. 구함을 따라서 즉 안대 곧 눈으로 상대하게 된다. 눈으로 보게 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이는 거는 내가 구해서 보이는 거예요. 죽는다고 보면 죽는 거고요. 산다고 보면 사는 거고, 이거 망했다고 보면 망한 거예요. 좋아졌다고 보면 좋아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내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게 내 생각이지, 사물이 아니다. 이거 이제 일체유심조,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는 도리거든요. 유심소현이라. 천지만물은 유심소현이라. 천지만물은 오직 마음이 나타난 바다. 이게 이제 법성원융을 깨닫고 사물의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부리는 그 원리예요. 신통묘용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심소현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게 어떻게 사물에 장애가 없냐. 법성원융이기 때문에. 법성은 원융해서 사물의 장애가 없고 유심소현, 오직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신통이 자재하다. 삼세제불은 신통자재인데 신통자재일 수밖에 없는 게 법이 정해진 게 없어서 그래요. 가까운 것이 먼 것과 다르지 않고 먼 것이 가까운 것과 다르지 않아서 아무리 먼 것도 마음으로 딱 관찰하면 바로 눈앞의 일이요. 이게 신통이거든요. 막 달리기 위해서 쫓아가야 거기가 아니라, 저쪽에 있는 것과 이쪽에 있는 게 법성이 원융하기 때문에 가고 오는 게 장애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이거 공부하고 나서는 여행을 안 가, 내가. 여행을 안 가. 그쪽 법성이나 이쪽 법성이 다름이 없는데, 거기 가서 뭐 보고 와. 거기 가서 뭘. 그쪽의 물건이나 이쪽의 물건이 다를 게 없는데 그래서 사진은 왜 찍어 가지고 와. 그래서 여행 가기 싫어요. 그전엔 더러 갔거든, 모르고. 이제 법성 알고부터는 안 가. 안 가요 안 가. 그거 참 희한해. 그래서 무주실상경(無住實相境)에, 머묾이 없는 진실상의 그 세계의 경계에, 그게 법성이니까, 입관(入觀)해서, 관에 딱, 무주실상경을 내가 봐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그 관에 들어가 입관, 들어갈 입자, 볼 관자, 성정관(成正觀)하면, 바른 관의 힘을 이루면, 무주실상경 법성원융경계의 관법에 딱 들어가서 그 바른 관법을 이루어서 힘이 생기면, 범부생노사(凡夫生老死)가 범부의 났다, 늙어서 죽는 거, 이게 범부의 일생사거든요. 생노사가 원융법성신(圓融法性身)이라. 다 제불과 통하고 진실과 통하고 우주 그냥 무량억만겁에 통하는 원융한 법성의 몸이다. 이 몸 그대로 앉아서 딱 법성삼매에 들면 이 몸 그대로가 법성의 몸이다 이거죠. 이게 화엄경 공부예요. 이 몸 그대로 법성의 몸을 보는 게 화엄경 공부예요. 그리고 무주실상(無住實相)이 무주실상의 원융법성(圓融法性)이요. 머묾이 없는 진실상, 원융무애한 법의 본성이요. 부동의 제법(不動諸法)이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랬잖아요. 그게 뭐냐면 법성을 말하는데, 제법은 생멸이 없어. 생의 법성과 멸의 법성이 다르지 않아서, 생에 머묾이 없고 사라짐에 머묾이 없다. 생무주 멸무주. 그래서 이게 생도 멸도 아닌 거를 생멸을 움직인다고 보고, 움직일 동자, 생멸 아닌 걸 부동이라 그래요. 그래서 의상대사 이 화엄학에서는 모든 걸 부동의 사물이라고 그런 거예요. 부동의 사물. 이 몸도 생도 아니고 사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늙는 것도 아닌 이 몸이다. 그래서 이걸 부동오신(不動吾身), 부동의 내 몸. 부동은 뭐예요? 생로병사인데요. 동원 생로병사인데, 법성에 들어가서 딱 보면 생로병사의, 생로병사의 자성이 없어서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다 이거예요. 이거 영어로 이걸 다짐할 때 오케이 이러거든요. 생로병사는 동이고 생로병사가 없는 건 부동이여. 그래서 중생이 보는 이 생로병사가 이 부동의 생로병사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생멸이 없는 생로병사다. 왜냐면 법성은 원융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의상 화엄학에서 공부할 때 보면 꼭 부동오신이 이런 말을 써요. 법성 나의 몸이다 이 말이지. 부동오신. 부동오신 이 말이야. 그래가지고 이 부동의 제법이, 생멸이 없는 제법, 모든 법, 생에는 생의 자성이 없고 멸에는 멸의 자성이 없어서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다. 이게 이제 제법부동본래적 이 뜻이거든요. 제법부동본래적. 그래서 제법부동본래적의 이 제법이, 이게 이 몸도 제법부동본래적이고, 저 산도 제법부동본래적이고, 일체만물이 제법부동본래적이라. 그래서 그걸 줄이면 부동제법이라. 아직도 안 조시는 거에요? 이거 알면 다 해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졸 수밖에 없는데 안 조네. 참 기가 막히네요. 기가 막혀 전생에서부터 많이 닦은 거예요. 그러니까. 닦은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나거든. 안 닦은 소리 들으면 내가 잠이 와요. 많이 닦아서 지금 안 자고 있는 거예요. 이 부동제법이라, 생로병사 없는 무주법성 이걸 말하거든요. 부동의 제법이 무생이생(無生而生)이라, 나는 것이 없이 난 것이다. 이 말을 여기 썼어요. 이게 종범이 게송으로 이걸 지은 건데, 부동의 제법이 무생이생이라, 이것이 났는데 법성에는 난 것이 없어. 왜냐하면 난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지는데, 법성에는 사라지는 게 없어. 왜냐하면 사라지는 자체 체성이 없어, 법무자성이거든요. 법에는 자성이 없다. 법은 그럼 일체만법 일체사물이란 말이죠. 일체사물 일체만법이라고. 일체사물 일체만법이 무생이생이라, 없을 무, 날 생, 말 이을 리, 날 생. 남이 없이 난 것이다. 난데 자성이 없고 죽는데 자성이 없으니까, 부동의 제법이니까, 일체만법이 남이 없이 난 것이다. 우리 몸이 지금 났는데 난 자성이 없이 그냥 인연 따라 난 거예요. 허공에 구름이 일 듯이. 이걸 무생이생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몸 자체가 법성원융 무장무애 법계해탈이여. 오케이 박수. 그러니까 이게 제법부동본래적, 또 일미진중함시방 이런 게 전부가 이렇게 무생이생을 얘기한 거예요. 남이 없이 난 거. 난 속에서 남이 없이 난 거, 그걸 떡 보면 그게 법성원융을 본 건데, 그것은 바다에 천지만물이 다 그림자를 비추지만, 바닷속에는 그림자 비춘 내용이 없고 오직 물뿐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정하면 모든 일체 만물이 내 마음이 다 감싸고 있다. 그래서 일미진중함시방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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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2월 28일 음력2월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5-02-28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 ⑨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⑨-- 一即一切多即一 · 約緣起陀羅尼理用 辨攝法分齊 ---- 일즉일체다즉일 · 약연기다라니이용 변섭법분제 -- 안녕하십니까. 진관사 2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은 법성게 일즉일체다즉일, 그 게송이거든요. 일즉일체다즉일. 손바닥 딱 치는 거 생략하고 그냥 10번을 외우고 마치겠습니다. 시작.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일즉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 이 법성게는요. 화엄경 80권 내용을 7언(言) 30구(句), 7자씩 쓴 게송 서른 구를 만들어서 표현한 거거든요. 화엄경 80권을 7언 30구 게송으로 표현한 건데요. 一乘圓敎 大華嚴經 一乘法界 圓融圓通 일승원교 대화엄경 일승법계 원융원통無障無礙 相卽相成 聽聞半偈 成就最上무장무애 상즉상성 청문반게 성취최상 그럼 화엄경은 뭐냐.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 깨달음으로 가는 세계가 아니라 깨달은 세계. 그 깨달은 세계를 불승(佛乘)이라고 해요. 불, 불은 부처님이라는 말이고, 승은 문이라는 뜻도 있고요. 문. 또 길이라는 뜻도 있고, 또 머문다라는 뜻도 있어요. 승자가. 그래서 부처님이 가는 길, 부처님이 오고 가는 문, 또 부처님이 머무는 세계, 그런 거를 어려운 말로 불승 그러거든요. 이제 불은 하나다 이래서, 불승을 일승(一乘) 그래요. 일승. 또 일자와 불자를 같이 표현해서 일불승 그렇게도 표현해요. 일불승. 그런데 불승이고 일승이거든요. 그 불승이고 일승인데, 그 부처님의 세계, 깨달은 분이 머무는 세계, 이걸 불주(佛住)라고 해요. 부처님이 머문다. 그러면 깨달은 분은 어디에 머물까. 서울특별시에 머물까, 아니면은 어느 다른 곳에 머물까. 이제 그런 걸 깨달은 분은 어떤가. 이게 이제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법성게에서 여덟 번째 구절에 부처님이 머무는 곳은 일즉일체다즉일이다. 그럼 일이라는 건 뭐냐.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일체라는 거는 많다 소리거든요. 하나가 곧 많은 것이고, 다즉일, 많은 것이 곧 하나다, 여기에 머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화엄경은 하나는 모든 것이 만들어내고, 모든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하나에는 하나 자성이 없고, 자성이라는 거는 자기 체성(體性)이라는 말인데, 자기 체성, 하나에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고, 많은 것은 많은 것의 자기 체성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많은 것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하나는 많은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거를 화엄 연기라고 해요. 화엄은 공덕 장엄의 연꽃인데, 공덕 장엄의 연꽃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이 우주 법계인데, 이 우주 법계는 하나는 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요. 그럼 뭐냐. 여러 개가 하나를 만들어요. 또 여러 개는 여러 개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하나가 여러 개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제 이런 거를 법계 연기다. 법계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또 모든 것이 하나기 때문에, 모든 것도 모든 것에 있어도 아무 불편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거를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럽니다. 장애가 전혀 없다. 또 그런 거를 상즉상성(相卽相成)이라고 그래요. 상이라는 건 서로라는 말인데, 상즉이라는 건 뭐냐. 이것이 곧 저것을 만들고, 저것이 곧 이것을 만든다. 1 찰나가 아주 간단한 시간이죠, 무량한 겁을 만들고 무량한 겁이 1 찰나를 만든다. 그래서 이 모양만 보고 모양에 딱 얽매이면, 작은 건 작고 큰 건 크고 그런데, 작은 것은 큰 것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큰 것은 작은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일즉일체다즉일, 이 속으로 딱 들어가면 그게 해인삼매인데, 하나라고 해도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또 여러 개라고 해도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걸 원융원통(圓融圓通)이라 그래요. 끝없이 오고 가고 끝없이 통한다. 이래서 하나는 많은 것을 만들고, 많은 것은 하나를 만든다. 하나와 많은 것은 장애가 없다. 하나와 많은 것은 서로 이룬다. 하나는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은 하나를 이룬다. 부처님은 여기에 사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 다닐 필요도 없고요. 하나가 여러 곳이니까 이사 안 다녀요, 부처님은. 이사 안 다니면 좀 재미는 없나. 그러니까 뭐 부족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남아서 귀찮을 필요가 없어요. 남는 건 귀찮거든요. 또 부족하면 아주 걱정되잖아요. 그런 게 전혀 없어. 이런 거를 법계 해탈이라고 그래요. 법계 해탈. 모든 법 자체가 하나하나가 무장무애하고, 원융원통해서 남는 것도 없고 모자라는 것도 없다, 뭐 이런데. ① 次(一卽一切多卽一)一句 德用自在門 謂此即(成)彼 彼即(成)此 ① 차(일즉일체다즉일)일구 덕용자재문 위차즉(성)피 피즉(성)차 無㝵無側 故云德用自在門 及位動門也 무애무측 고운덕용자재문 급위동문야 (法界圖記叢髓錄 卷上之一)(법계도기총수록 권상지일) 이제 이런 거를, 의상 스님의 제자들은 이걸 그냥 얼마나 보고 연구를 하고 가르침을 줬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것은 의상 스님의 제자들이 연구한 결과, 덕용자재(德用自在)라고 쓰세요. 일즉일체다즉일 이 덕용이 자재하다. 덕용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하나 이렇게 생기면 이것이 이거 가만히 있어도 영향을 줘요, 다른 데. 이거 스스로가 다른 데 영향을 주는 걸 덕용이라고 그래요. 덕용. 덕용이 자재한 것이 일즉일체라고 하는 구절이다, 이렇게 연구를 했어요. 그게 뭔 소리냐 하면은, 집을 짓는데 기둥이 하나 떡 이렇게 생기면 기둥이 저절로 주춧돌을 거기 오게 해요. 기둥은 가만히 있는데 그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춧돌이 거기 생겨요. 그게 기둥의 덕용이에요, 주춧돌이 놓이게 하는 것이. 또 그 위에는 또 기둥 위에 또 나무가 얹어지잖아요. 그런데 기둥은 기둥일 뿐이에요. 근데 주춧돌 또 놓이게 하고 나무도 얹어지게 하고 이런 게 전부 덕용이라고요. 그래서 일즉일체다. 하나가 있으면 그 하나가 여러 곳에 무한한 그 공덕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걸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 주고 있어요. ② 道身章云 問 西風波 非東風波 東風波 非西風波 但約二 ② 도신장운 문 서풍파 비동풍파 동풍파 비서풍파 단약이波之水體 不二義 得言即門 則約二波 不得即門 若爾 但約 파지수체 불이의 득언즉문 즉약이파 부득즉문 약이 단약此事彼事 理體無二 得言即門 何得二事不除 論相即門耶答차사피사 이체무이 득언즉문 하득이사부제 논상즉문야답若放(至)二風 水無二波 旣無二波 以何即何乎 旣以此即彼 약방(지)이풍 수무이파 기무이파 이하즉하호 기이차즉피故 可知不除二波 論相即耳 非約理體 論相即矣고 가지부제이파 논상즉이 비약이체 논상즉의 그리고 그다음에는 도신장(道身章)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즉일체를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망망대해에, 그 넓고 넓은 넓은 바다에, 바람이 동쪽에서 슬 불어오면 그 바다가 동풍파(東風波)를 일으켜요. 동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를 일으키는 거예요. 또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은 이걸 또 서쪽 물결을 일으키는데 이걸 서풍파(西風波)라고 그래요. 서풍파. 서쪽에서 바람이 실 불어오면은 그 바다의 물결이 서풍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럼 남쪽에서 오는 것도 마찬가지죠. 남풍은 남풍파를 일으키고, 또 북풍은 북풍파를 일으키는데, 그런데 이게 서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의 파도나, 동쪽에서 불어오는 동쪽의 파도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파도나 모두 한 물에서 일어나는 거라는 거예요. 한 물에서. 그래서 물은 하나인데 파도가 많다. 이것이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파도가 아무리 여러 곳에서 와서 여러 파도를 일으켜도 물은 하나다. 설명이 되나요? 나 이분들이 애만 썼지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은데. 아무리 여러 바람에 의해서 여러 파도가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일이 곧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곧 일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요. ③ 此中 此波之水 與彼波之水 水體是一故 波雖無盡 體言即 차중 차파지수 여피파지수 수체시일고 파수무진 체언즉一者三乘義耳 若非此波 即無彼波 若非彼波 卽無此波 是中일자삼승의이 약비차파 즉무피파 약비피파 즉무차파 시중門 此波非自性故 在於彼波 彼波非自性故 在於此波 是即門문 차파비자성고 재어피파 피파비자성고 재어차파 시즉문者 一乘也 자 일승야又古人云 中門 如燈光相入故 但諸燈用相入耳 即門 如우고인운 중문 여등광상입고 단제등용상입이 즉문 여波水相收故 波體水體無二 相即耳파수상수고 파체수체무이 상즉이(法界圖記叢髓錄卷一)(법계도기총수록권일) 그다음에는 뭔 말을 하느냐. 차파지수와 여피파지수라(此波之水 與彼波之水). 수체가 시일고(水體是一故)로 또 이쪽 남쪽에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나 북쪽에서 일으키는 파도의 물이 파도는 다르지만 물은 하나인 고로, 아무리 파도가 많이 일어나도 물은 하나다. 그래서 파파가 무진(波波無盡)이나, 물결 물결이 끝없이 많지만 또 체언즉(體言即)이라, 그 물에 본체를 말하면 하나다. 파도가 아무리 많아도 파도의 본체는 물인데, 그 물은 하나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많은 것 같지만, 하나에 다 있다는 거예요. 파도가 아무리 많은 것 같지만은 물 하나뿐이다라는 거지. 그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별거 없거든요. 하나인 거예요. 하나. 그래서 그 하나의 인생을 다 바라보면 거기에 답이 있지, 헤매는데 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인생은. 돌아보는 데 답이 있다. 쫓아다니는데 답이 없어요. 근데 그 원리를 모르고 살면 쫓아다니고 쫓아다니고 쫓아다녀도 만날 마음이 부족해요. 인간은 고약한 것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채워도 채워도 만날 비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채워도 채워도 비어 있어.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거 참.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아들 낳으면 마음이 그득할 것 같지요. 천만에. 며칠 못 가요. 또 부자 되면 그득할 것 같죠. 그거 며칠 못 가요. 여행 한 번 갔다 오면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 이런 말하거든.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답답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를 하고 뭐를 이루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그게 왜 그러냐. 그게 번뇌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데, 번뇌는 하염없이 헤매고 쫓아다니거든요. 그래서 그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 하지 말고, 우리는 번뇌의 마음에 종살이를 하면서 평생 살거든요. 그 본래 주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돼요. 본래 주인, 그게 청정심인데, 주인의 마음으로 딱 돌아가면, 일체가 유심조라, 그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든 거예요. 그 본래 마음. 생각 마음은 고단하고 본래 마음은 편안하거든요. 그래서 그 본래 마음 하나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편안한데, 그 번뇌 마음, 생각 마음으로 휘둘려 살기 때문에 그렇게 힘이 들어요. 이게 나의 번뇌가 나를 힘들게 한다. 번뇌는 뭐냐?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다. 이 글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 글 이렇게 많이 보면 모르는 거 없을 것 같죠. 책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모르는 게 그냥 가득한 거예요. 그러니까 박사 학위를 받으면 그때부터 모르는 게 생겨요. 그러니까 모르는 게 박사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모르는 거 없어요. 다 알아요. 공부, 책 안 볼 때는 다 알았는데, 책 보기 시작하면서 다 모른다. 이게 원리예요. 나는 아는 게 많다. 이런 사람은 책 안 본 사람이여. 책 본 사람은 봐도 봐도 끝이 없는 게 이 책 보는 번뇌 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로 돌아가면 파수무진(波雖無盡)이나, 물결은 비록 끝이 없으나, 체언즉일(體言即一)이라. 체로, 본체로 말하면 곧 하나다. 또 그러고 이 화엄에서는 약비차파(若非此波)면, 만약 동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피파(即無彼波)하고. 서쪽에 있는 물결이 있을 수가 없다. 이게 동쪽에 있는 물하고 서쪽에 있는 물하고 서로 균형을 이루어서 같이 공존하지, 서쪽에 물이 없다면 동쪽의 물도 다 빠져나가서 없다. 그래서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도 없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작은 것이 없으면 큰 것도 없으니까 작은 것을 싫다고 하는 것은 채워지지 않는 번뇌의 마음이고, 작은 것에 편안할 줄 알면 그것이 주인의 마음이다.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 본문에는 그런 게 없어요. 이건 내가 해석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약비피파(若非彼波)면, 만약 서쪽에 있는 물결이 아니라면 즉무차파(卽無此波)하고, 곧 이 동쪽에 있는 물건이 없다. 그래서 시중문(是中門)자는, 이 가운데 일즉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저것에 있고, 차는 재어피파(在於彼波)하고, 피파는 비자성고(彼波非自性故)로 재어차파(在於此波)라. 저쪽의 물결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되고, 이쪽의 물결은 역시 또 자성이 없어서 저쪽의 물결에 의해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동해가 없으면 서해도 없고, 서해가 없으면 동해도 없다, 이거예요.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고, 많은 것이 없으면 하나가 없고, 하나가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많은 것은 하나가 만들어낸다, 뭐 이런 얘기고요.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게송이 앞에 나오고, 그다음에 일즉일체다즉일이라는 말이 이제 나왔는데,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이게 일중일체인데요. 이걸 화엄학에서는 그 중에 있다, 가운데 있다라는 뜻에서 중문(中門)화엄교설이라고 그래요. 중이라는 중자, 문 문자, 중문 화엄 교설. 중문. 그리고 일즉일체다즉일이라고 할 때 이 즉자를 써서 즉문(即門) 화엄 교설이라고 그래요. 즉문. 그래서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다 하면 중문이고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라고 하면 즉문이요. 이건 화엄학을 할 때 이게 이제 하나의 용어로 그렇게 쓰는 거예요. 중문화엄, 즉문화엄. 그러면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러면, 중문이고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 그러면 즉문이거든요. 곧 즉자. 그러면 일중일체다중일 이 언구는 뭐를 말하느냐. 사물에는 용이 있는데, 용이라는 건 뭐냐. 계속 변화하는 거예요. 변화하는 건 용이에요. 변화하는 게 뭐냐. 아이가 처음에 딱 출생을 하면 출생한 거 그대로 아이가 되고, 출생한 거 그대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계속 올라가는데, 이걸 유력문이라고 그래, 힘이 있다. 그 어른이 될 때까지는 계속 힘 있게 올라가요. 힘 있게. 이게 유력인데, 근데 언젠가부터 슬슬 빠지기 시작해요. 근데 빠질 때도 그 모습 그대로 빠지는 거예요. 자꾸 줄어들고, 줄어들고, 어릴 때 태어날 때 모습 없어진 게 아니에요. 마지막까지 올라가면 슬슬 빠져 이걸 무력문이라고 그래요. 유력 작용, 무력 작용. 이거 어려운 말인데 아주 재미있어요. 유력용, 무력용. 어릴 때부터 계속 성장할 때는 힘이 있어요. 이게 유력 작용이에요. 근데 올라갈 만큼 다 올라가서 점점 줄어들 때는 힘이 없어 무력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걸 숫자로 표현할 때 하나에서 둘 되고, 둘에서 셋 되고. 하나가 둘 됐다고 그래서 하나가 없어진 거 아니에요. 하나 그대로 둘이 되는 거예요. 둘에서 하나 빼면 그냥 하나죠. 이렇게 표현했어요. 숫자로 유력 무력을. 하나에서 둘 되면 하나 그대로 둘이 되고요. 하나가 셋으로 가면 하나 그대로 셋 돼요. 이게 이제 힘이 있는 거예요. 하나 그대로 넷 돼요. 이제 하나 그대로 열 되요. 그러면 열은 이제 만 수인데, 가득한 숫자 만 수가 돼가지고 내려와. 하나가 열이 9되요. 아홉이 8되요. 이래가지고 하나까지 되면 이걸 무력이라고 그래요. 무력. 유력으로 올라갔다가 만수로 갔다가 다시 본래 수로 내려오는 거를 유력문 무력문. 이런 것을 용문이라고 그래요. 일중일체다중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법계 인연법 중에 작용의 세계를 말하는 거다. 용, 쓸 용자, 문 문자. 이게 전부 이 세상 법칙이 다 이런 법칙이에요. 계속 발전할 때는 유력문이고, 쇠퇴할 때는 무력문이에요. 이렇게 돼요. 그래서 이것은 중문은 여등광상입고(如燈光相入故)로 등불이 있는데, 등불이 이 등불 등불빛이 저 등불에 들어가고, 저 등불 등불빛이 이 등불에 들어간다. 그래서 등광이 상입이라. 서로 들어간다. 여기 있는데 등불 빛은 서로 서로 들어가요. 하나가 둘 되고, 하나가 셋 되고, 뭐 이런 식으로 등광이 상입고로, 단제등용이상입이(但諸燈用相入耳)라. 이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갈 뿐이다. 등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용이라고. 등불 빛만 이 등 불빛이 저 등불로 가고, 저 등불 빛이 이 등불로 간다. 이걸 그래가지고 등용이 상입이라. 등용, 등의 작용만 서로 들어간다. 이렇게 주석을 달았고요. 즉문(即門)은 하나가 곧 일체니까, 작용이 아니라 본체다. 하나가 곧 일체니까. 즉문은 뭐와 같으냐. 파수상수(波水相收)다. 파수, 물결과 물이 서로 거둔다. 물은 물결을 만들어내지만, 물결이 바로 물이고, 물결이 바로 물인데, 물은 바로 물결이고. 물과 물결이 모양은 다르지만, 물에서 물결을 거두어들이고, 물결에서 물을 거둬들여서, 파수가 상수라. 물결과 물이 서로서로 거둔다. 그래서 파체수체가 무이(波體水體無二)다. 물의 그 본체와 또 파도의 본체가 둘이 없다. 그래서 이거를 상즉이(相即耳)라고 한다. 서로 작용이 오고 가는 것은 일중일체다중일 중문이고, 본체가 둘이 없는 것은 일즉일체다즉일 즉문이다. 이렇게 주를 달아놨는데, 이런 거 보고 있으려고 그러면 참 보기도 힘들고, 보고 나면 또 정말 그런가 이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록을 봐도 자기 마음이 힘들이지 아니한 것은 만족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에 힘들인 것만이 만족이 있어요. 공짜로 그냥 얻어 듣는 거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 하고 끝내도 되는데, 역시 나도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이 안 없어져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허수아비 이야기예요. 허수아비. 옛날에 농촌에서 농사지을 때 가을이 되면 새들을 쫓는다고 허수아비를 밭마다 많이 세웠거든요. 근데 그 허수아비가 곡식을 다 거둬들인 다음에 초겨울이 되면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그 허수아비가 혼자 서 있는데 어떤 스님이 입을 게 없으니까 그 허수아비를 보고 허수아비를 만든 옷을 벗겼어요. 자기가 벗겨서 가져가서 입으려고. 그러니까 누가 지나가다가 얘기를 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이랬어요. 그런가 이게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 이런 생각도 들고, 미안한 생각도 들고,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뭘 입고 삽니까?” 대답이 잘 안 나왔어. 그래서 그냥 후닥닥 벗겨서 싸가지고 갔죠. 그런데 다른 데 또 가니까 똑같이 어떤 스님이 허수아비 옷을 벗기고 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또 물었어. “그 허수아비 옷을 벗기면 허수아비는 무엇을 입고 삽니까?” 그러니까 이 양반은 도인이야, 도인. 확실히 일즉일체다즉일 일중일체다중일 이 도리를 아는 분이란 말이에요. 이거 딱 자세를 바로 하더니, “옷을 입지 않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옷 입는 허수아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이거요. 그럼 이게 이제 뭐냐 그러면, 하나하나의 자기 체성이 없어서, 이것은 저것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저것은 이것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허수아비가 자기 체성이 없이 나무하고 옷하고 거기 단단히 매는 끈하고 그것뿐이잖아요. 그러면 허수아비 자기 체성에서 옷이 허수아비이고, 나무가 허수아비이고, 그 나무와 나무를 잡으면 끈이 허수아비인거라. 그 이 세상의 모든 게, 하나는 하나의 자기 실체가 없고, 많은 것이 있을 때 하나가 있지, 많은 것 없는데 하나가 없거든. 그러니까 하나는 많은 것이 허수아비고, 많은 것은 또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이 없어요. 더 많은 것은 하나의 허수아비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허수아비만 자기 체성이 없이 그냥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 안 입고 있는 이 천지 만물이 전부 허수아비와 같이 자기 체성이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옷 입는 허수아비만 보지 말고, 옷 안 입는 허수아비도 보십시오.> 썰렁합니다. 아주 썰렁해요. 아주 썰렁해. 그러니까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요. 인연법으로 다 이루어졌어. 인연법으로. 그러니까 허수아비예요. 허수아비만 자성이 없는 게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자성이 없어. 자기 체성이 없어. 다 이것저것이 모여서 됐기 때문에 법무자성(法無自性)하야 이타위성(以他僞性)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이게 화엄경 경책인데 이게 화엄경이에요. 이 화엄경의 자체 자기 체성이 없어. 종이하고, 화엄경 경문 내용하고, 요 실하고, 먹하고, 이런 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허수아비인 거예요. 이게 자기 체성이 없는 허수아비. 그러니까 이 세상에 마음 밖에서 볼 건 하나도 없어요. 다 허수아비라. 자기 체성이 없어서. 오직 하나는 많은 것에 이루어지고, 많은 것은 하나에 이루어진다. 이걸 아는 그 마음만 밝히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좋다. 하나는 자성이 없어서 많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것은 자성이 없어서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거는 법의 자성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 말인데, 인연법이란 말이죠. 자성이 없다라는 건 인연법이란 말이에요. 그 인연으로 생긴 건 인연으로 사라지니까 자성이 없지. 근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는 거예요. 뭐냐. 그걸 아는 놈이 있단 말이에요. 하나는 여럿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여럿은 하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건 법이고, 그 법을 아는 놈이 있다 이 말이죠. 그게 불성이에요. 그래서 법은 있고, 불성은 광명이다. 그래서 이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밝힐 때 모든 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불성광명을 밝히지 못하면, 법에 매달려. 법은 허수아비와 같은 건데 법에 미혹하고 법에 매달려서 그냥 그 속박이 많아요. 이제 자기 몸에 매달리니까 몸에 속박, 물질에 매달리니까 물질의 속박, 사람에 매달리니까 사람의 속박, 이것을 구박범부(具縛凡夫)라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갖출 구, 얽힐 박, 그냥 그 얽힘이 부족함이 하나도 없이 다 구체적으로 다 갖춰져서 얽혔다. 이게 구박범부에요. 몸이 허수아비인데 자성이 없는데 몸에 얽히죠. 사람도 허수아비인데 사람에 얽히죠. 물질도 허수아비인데 물질에 얽히죠. 이걸 구박범부라 그래요. 얽힌 것이 끝도 한도 없다. 그런데 마음을 하나 딱 밝히고 나면 물질은 없고 일심은 광명이다. 물질은 없고 한마음은 광명이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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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기도] 대웅전 관음천일기도 입재 법문
주지 법해스님 2025-02-09
저도 92년도 요맘때 시작을 했어요, 천일기도를. 저도 정월달에 기도를 시작해가지고 94년도에 기도를 마쳤습니다. 제 나름대로 오늘 우리 법능 스님께도 기도 잘하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 함께 기도한 보살님들도 여기 계십니다. 근데 진짜 저는 그때 그저 오로지 도인이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만, 다른 시간은 진짜 1도 안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음악도 듣지 않고, 누구하고 얘기하는 것도 싫고, 그저 법당에 와서 기도만, 기도만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나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는 100일, 100일마다 철야정진을 했습니다. 철야정진을 하고, 철야정진을 하면 저희 도반들이 쫙 와 가지고 그냥 같이 이렇게 목탁을 치고 정진을 하고, 그때는 뭐 신심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희 은사 스님이 기도하는데 너무 외호를 그렇게 해 주셨고, 그것도 제 복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 천일 회향할 때는 7일 7야를 했습니다. 7일 7야 하면서 기도, 참 많은 그 가피를 저는 받았습니다. 이제 뭐 도인는 아직 못 됐는데, 나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험하고, 또 느끼고,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자 하는 그런 원력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마음이 생기면서 쭉 이래 와서, 참 부처님께 제가 많은 은혜를 받은 스님인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저를 보면 아마 주지 스님은 참 복이 많다 이런 생각해요? 안 해요? 하죠. 그거는 천일 기도한 그 복력으로 아마 제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 그거를 사람들에게 같이 나눠줄까, 그런 자비로운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을 나눠주려고 제가 노력을 했던 거가 아마 공덕으로, 이렇게 여러분들같이 신심 있는 불자님들을 만나고, 능력 있는, 원력 있는 우리 스님들과 함께 진관사에서 이렇게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요즘은 마음의 정원을 넘어서 극락 정원이 되는 것 같아요. 극락이라는 것은 깨끗하다 그랬죠. 극히 즐거운 세계, 그게 극락입니다. 그런데 극락은 깨끗하다. 여러분들이 좋다, 참 깨끗하다, 청아하다 느낀다면 지금 극락을 맛보고 있는 거예요. 오늘 그렇지 않았어요, 그죠? 진관사 일주문에 들어오면 여기가 다른 어느 장소보다 아주 청아하고 깨끗한 그런 서기가 느껴지죠. 안 느껴지면 더 마음을 정성을 기울여 보세요. 내 마음이 아직까지 깨끗하지 않아서 못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마음의 정원 진관사가 극락 정원으로 거듭났습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기도 하고, 실천의 종교이기도 하고, 수행의 종교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한 발 한 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게 되면은, 감정도 습관도 행동도 부처님처럼 하게 돼 있어요. 부처님은 어떤 분이 부처님이냐면 지혜롭고, -지혜롭다는 것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아 우물쭈물이 없는 게 지혜예요. 내가 실천해서 내가 느껴 나오는 것이 그런 마음이 느껴져지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자비로워요. 그저 푸근한 마음이 그저 드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그런 마음이 드러날 때는 “아 나 지금 가피를 받고 있구나, 내 부처님처럼 지금 행동하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를 보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겠어요. 그죠. 보살님이 크게 대답하셨네요. 그래서 내 마음에서 나쁜 기억은 안 하는 거예요. 나쁜 기억은 할 필요가 없어. 그거는 과거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에, 나쁜 기억은 1도, 0.1도, 0.001도 나쁜 기억은 하지 말고, 그저 부처님처럼 행하다가 보면은, 내 몸이 기억하고 내 마음이 기억하고, 또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풍요롭고 그렇게 된다는 걸 제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이건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 좋아요. 아침에도 어떤 우리 신도님 자녀분이 자부랑 왔는데 제가 그랬어요. 3일 수심은, 3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연의 보배가 된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 모아놓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될 수가 있다 이거에요. 권력과 재산, 그렇다고 재산이 없으면 안 돼요. 열심히 하되 함께 나누고 함께 했을 때 그게 너무 빛이 나지, 그 재산이 무기가 되고, 재산이 고통이 되고, 재산이 분노가 되고, 이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물건은 절대 있다가 없을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 거를 여러분이 꼭 기억 하시고, 매일 감정 또 습관 또 부처님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서도 안 돼요. 제가 맨날 얘기하지만 요가 매트만 사다 놓고 한 번도 매트 위에 올라가 안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죠? 예. 그래서 노는 입에 염불하고 그것도 습관입니다. 항상 불자는 염주,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주는 자기 책상머리에, 손목에, 침대에 있어야 돼요. 보는 순간 본인이 하는 염불을. 지금은 이제 관음 기도하는데 저는 나무아미타불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제가 하고 있는 것은 나무아미타불 또 광명진언, 불설소재길상다라니. 이제 그거를 이렇게 하나 만들어 드릴 건데 제가 하는 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는 뭐를 하냐면 반야심경, 매일 불자는 반야심경은 무조건 해야 돼요. 무조건 매일. 반야심경이 얼마나 좋으면 매번 저쪽에 대고 모든 행사에 반야심경을 하잖아요. 공덕이 무량하기 때문에 반야심경을 하는 거예요. 반야심경을 하면, 내가 아플 때도 반야심경을 하고 있으면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이 감사해 하면서 새로운, 다시 말하면 치유의 그런 에너지가 나오게 되고, 내가 어리석다가도 반야심경을 하게 되면 지혜로운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복된 생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진관사 불자님들은 한글 반야심경은 진짜 필수에요. 제사 지낼 때도 반야심경을 한 편 읽으면 그 영가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집에서. 여기 절에 와서 제사를 안 지내도. 그리고 가족이 함께 생일 파티 할 때도 반야심경 딱 한 편하고 케이크 잘라 잡수면 그 가족들이 얼마나 좋은지. 그거를 생활화해야 돼요. 알았죠.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근데 본인이 지금 괴롭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좀 전까지도 나쁜 습관을 내가 익혀가지고, 그 업의 덩어리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보통 얘기를, 내가 나쁜 습관을 내 몸에 익혀 그게 습관이 된 게 있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제 천일기도 시작했으니까 지금서부터는 부처님 기도하고 마음 닦고 수행하는 이 마음을 익혀가면은 좀 시간이 지나다 보면 내 마음이 그냥 확 가슴에 아무것도 걸림이 없어. 그래서 불교는 해탈의 종교, 한 개도 걸림없는 지금 창공처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가 있고. 그리고 또 이제 우리가 절에를 오시고, 천일기도 이제 입재를 하신다고 이 추운 데 오셨는데, 천일기도의 목적이 뭐냐. 내가 행복한 거예요. 우선 부처님 되는 건 두 번째 치고, 내가 행복해야 돼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행복해야 된대요. 근데 그 행복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내가 주어진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 그거에 달려 있어요. 부처님처럼 하면 돼요. 그래서 저희 은사 스님이시죠. 우리 회주 스님, 돌아가신 회주 스님이 제 노트에다가 준 걸 보세요. 다 같이 크게 한번.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할 수 있냐. 첫 단계가 절에 와서 그 행동을 익히는 겁니다. 그 행동을 어떻게 익혀야 되는가 보면은 <마음의 정원 진관사 불자님들에 대한 청규>, 청규라는 것은 규칙이라는 말입니다. 규칙. 그 규칙은 1. 참배하는 법. 절에 왔는데 절이란 말은 절을 많이 하는 데서 절이라는 이름이 불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번뇌가 막 일어날 때, 제일 빨리 괴로울 때 그거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절입니다. 염불도 막 열불 나면 염불도 잘 안 돼요. 그럴 때는 와가지고 몸으로 나를 자꾸 내려 앉히는, 절을 자꾸 하면은, 뭐 절까지 오기도 어려우면은 방석 하나 딱 펴놓고 맑은 햇볕이 들어오는 곳에 그쪽을 향해서, 햇볕은 광명이고 지혜이고 자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햇볕이 들어오는 곳에 딱 해놓고 방석 내려놓고 절을 해보세요. 괜히 막 아이들한테 소리 벅벅 지르지 말고, 남편한테 소리 질러 봤자 그거 다 기억하고 있어요. 절대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소리는 안 질러야 돼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차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남편을 바꿀 수도 없고 아이를 바꿀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불자님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래서 그럴 때는 말을 꾹 참고 일인이 장락이야(一忍長樂), 한 번 참는 그 마음이 길이길이 낙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말은 열불 나도 그냥 딱 참고 방석을 펴놓고 절을 하면 제일 빨리 치유가 됩니다. 그러니까 절이란 말은 절을 많이 하는 데서 절이라고 이름 불러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절에서는 절을 많이 하게 됩니다. 절을 많이 하면 할수록 여러 생 동안에 누적되어 온 자신의 업을 그만큼 소멸하게 되고, 아울러 업이 소멸되어 가는 그 바탕 위에 새로운 공덕의 싹을 터나게 하는 기름진 토양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을 늘 챙기면 그는 반드시 불보살림의 가피력을 입게 됩니다. 이게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또 스님이 평생 수행을 해보시고 불자들에게 어떻게 이거를, 이 부처님처럼 이렇게 수행을 하게 할까 하시다가, 막 고민하시다가 이걸 왜 제 노트에 적어놨는지 저도 그건 의문이에요. '이걸 내가 죽고 나면 니가 이걸 써먹어라' 이러려고 적어놨는지, 제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업이라는 말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내가 잘못 익힌 습관이 내가 되어서 있는 것을 업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잘못 보고, 트집 잡고, 비방하고, 화내고, 욕심 내고, 분노를 일으키고 이런 것들이 자기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이거를 녹일 수 있는 것이 절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모르게 보는 대로 다 찬탄하고, 보는 대로 고마워하고, 보는 대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그게 가피거든요. 그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불보살의 가피가 가득하다. 두 번째 절에서의 몸가짐. 도량 내에서는 엄숙히 합니다. 우리가 보면은, 제가 제 방에서 들어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요. 아마 이 부처님이 지금 다 여기 도량에 가득한데, 와서 부처님이 있든지 말든지, 막 부처님이 지금 가피하고 있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그냥 소란을 피우는 거예요. 도량에는 모든 선사스님들과 불보살님들께서 고요히 선정(定)에 들어 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거를 정착시키려고 늘 저도 생각만 하고 있어요. 저기 극락교 일주문부터 이렇게 마음을 점점 닦아와가지고 여기에는 선정에 들 수 있도록,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고 할까, ‘지금 그냥 마음을, 나를 쳐다보라’ 그럴까, 어떻게 하면 이 진관사가 가지고 있는 가피의 힘을 느끼게 해줄까 이거거든요. 여기에는 많은 스님들이 정진을 했던 그런 힘이 진관사에 와이파이가 터져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느끼려면 내가 마음이 고요해야 된다는 거. 그래서 절에 와서는 꼭 소란스럽지 않게 하고, 발꿈치도 들고, 걸을 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걸으세요. 걸을 때 그렇게 걷게 되면은 발꿈치를 들고 누가 보아도 자신의 몸가짐에서 불자의 품위가 풍겨나게 하십시오. 도량 내에서는 스님들이나 같은 신도님들을 보게 되면 공손히 합장하고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렇게 인사를, 여러분들이 그게 몸에 배여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죠. 네. 그리고 절이란, 자신의 절이라는 것은, 내가 업덩어리가 아니고 나는 부처님의 법향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주지스님 보면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좋죠. 막 좋아가지고 손도 잡아달라 그러고 막 난리예요. 그러는데 그렇게 여러분들 누구를, 도반을 만나도, 그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일어나야 돼요. 주지스님 또 혹시 인기 떨어질까 봐 나름 인기 관리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법향이 떨어지면은 절대 그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염불하고, 시간 나는 대로 명상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저도 막 불철주야 정진을 하고 있어요. 너무 시간이 아까워서. 진짜 시간이 아까워 경 읽고 명상하고 책 보고 또 그냥 어떻게 계획서 짜고, 막 이렇게 나름 주지스님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 마찬가지예요. 늙어간다고 한탄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불자다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진짜 부처님답게 이 시간을 아끼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여러분들이 하셔야 돼요. 주지스님 그냥 맹탕 놀지를 않거든요. 그러면 금방 주지스님 복진타락(福盡墮落)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세속으로 가 바뀌기는 금방 바뀌어지는 거예요. 그 사람들 보면 추해 보여. 저 스님 이렇게 보면은 보기 싫어지는 거예요. 자연적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주지스님도 열심히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진짜 저는 막 시간이 아까운 거예요. 밥 먹으면서도 뭐를 해요. 밥 먹으면서도. 어떻게 이 진관사가 마음의 정원이 극락 정원으로 바뀔까, 어떻게 하면 우리 보살님들 한 분 한 분을 극락을 느끼게 할까. 막 그래 갖고 이제 저만 하는 게 아니라, 스님들도 막 괴롭혀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하고 같이 하면은 더 빨리 돼요. 팀이라는 거야. 실이 한 올을 가졌을 때와 실이 여러 올을 가졌을 때 큰 동아줄이 된다라는 거, 여러분들과 함께 함께 이 깨달음의 숲을 이루자는 거가 제 발원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제 오만심을 내려놓는다. 절대 잘난 척하면 안 돼요. 이 잘난 척하는 거는 복이 막 그냥 쑥쑥쑥 빠져. 그릇이 깨지는 거하고 똑같아요.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아무 소용이. 우리 진관사 신도님들, 진관사 스님들은 잘난 척하고, 화내고, 욕심 내고, 이런 거는 이 도량이 거부해요. 왜냐하면 진관사 도량이 워낙 청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신도님들을, 턱 저기서 오는 신도님을 보면, 그냥 부처님이 오시듯 그냥 이렇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이 주지스님 저기서 보면 막 좋아가지고 막 그러더라고. 아기들이 엄마를 만나는 것처럼 제가 주지스님 오신다고 막. 옛날에는 제가 저 사람이 오네 이쪽으로 막 피해 갔어요. 사람들 안 만나려고. 요즘은 제가 누구든지 보면은 <아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도 맞이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맞이를 하는 거예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절로 절로 저절로. 아는 건 다 해도 돼. 부처님 마음 내 마음, 이렇게 하면서. 그게 인기 관리하는 거예요. 알았죠? 그리고 세 번째, 공양 예절. 공양은 대중과 함께 하십시오. 개인적으로 후원이나 조금 자기가 이제 불사금도 좀 많이 냈고, 이 절에 좀 오래 다녔다고 그냥 특별 대우를 받으려면 그거는 사실 복을 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이제 제가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공동으로 밥 먹는 시간을 지키게 하고, 또 공양을 평등하게 나누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것도 이제 진관사 시스템 속에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후원이나 찬간 또는 아직 상을 차리는 도중에 한두 분이 먼저 공양을 하게 되면 후원이 더욱 분주해지고 그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공중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본인들은 질서를 파괴한 지중한 업을 짓게 되오니 반드시 여러 대중과 함께 정숙히 앉아서 합시다. 노스님께서 이거를 또 우리 신도님들께 당부를 하셨습니다. 근데 요즘 이제 진관사가 신도님들이 날로 증가를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공양간이 조금 좁아요. 또 사람들이 특히 추울 때나 아주 더울 때 제가 죄송스러운데, 그것도 어떻게든 불편함이 없도록 시설을 갖추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옷차림. 절에 나갈 때는 화려한 옷이나 화려한 몸단장을 피하십시오. 특히 절에 올 때 밍크코트 막 턱턱 걸쳐가지고 그게 다 뭐예요? 짐승의 털들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밍크코트 입고 오는 건 조금 절에 안 맞아요. 지금 보살님이 “아유” 이러는데 추울 때, 추울 때는 할 수 없죠. 그죠. 그러는데 조금 그러고. 막 절에 오는데 저는 향수 잘 모르기는 하는데, 향수를 너무 발라가지고 도대체가 냄새나 죽겠어요. 특히 남자분들 향수 발라 오는 우리 거사님들, 남자 불자님들이 그렇게 너무 발라오는 거, 또 보살님들도 화장품을 너무 세게 발라가지고 제가 저녁에 되면 내 방문을 아무리 추워도 한 30분 열어놔요. 아주 방에 그냥 사람들이 왔다가 가면, 냄새가 너무 배어 있어 가지고. 그런 건 상대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래서 절에 오는데 너무 그냥 요란스럽게 오시는 거는 안 맞다. 그리고 또 이제 어쨌든 이런 공중질서를 잘 가지자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언행. 성스러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 우리가 남 흉 볼 때 너무 신나더라고요. 왜냐하면 그것만 익혀 가지고. 내가 그것만 익혀갖고 익힌 걸 하니까 쉽잖아요. 그래서 신나는 거야. 오면은 어떤 보살님은 앉았다 하면 그 보살이 어쩌고, 접수를 받는데 어떻게 했고, 막 주지스님께 일러주는 게 너무 많아. 그러는데 그거 안 맞아요. 절대로 절에 와가지고는 남의 흉을 본다든지, 욕을 한다든지 이런 거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데. 스님이 너무 표현을 잘해놓으셨어요. 성스러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 결코 남을 헐뜯거나 비방 등에 듣기에 거북스러운 말 등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십시오. 욕설과 악담으로 한 번 더러워진 입으로는 결코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염불을 해서도 아니 된다. 부처님을 모시는데 말이야. 그렇죠. 내가 나쁜 말을 하고 부처님을 모시면 되겠어요? 그죠. 그리고 나쁜 말을 하는 거 참 더 어렵다고 제가 늘 말을 하는데,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내 가슴이 더 아프더라고. 저는 상좌들한테 나쁜 말을 좀 많이 했는데, 그 상좌들이 하도 안 고치니까. 그렇게 나쁜 말을 하고 나면 내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진짜 면도칼로 찢는 것 같이 아파. 그래서 제가 이제 그 방법을 좀 바꿨어요. 내가 아주 기분 좋을 때, 기분 좋을 때, 내 마음이 자비가 가득 찼을 때, 그 상좌들을 고치기는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안목도 늘려줘야 되고, 본인의 원력도 키워줘야 되고, 이랬을 때 제가 얘기해요. 기분 좋게 얘기하는데도 아프죠. 진실은 불편하니까. 그렇게 상좌를 키워보고 알았어요. 그전까지는 뭐 내하고 별로 관여 없으니까 좋게 좋게 얘기를 많이 했는데, 이 상좌는 제가 이 사람을 훌륭하게, 훌륭한 지도자로 키워야 되기 때문에, 그게 제 의무거든요. 그래서 저희 스님도 저를 엄청 힘들게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여기서, 대웅전에서 야단 맞는 건 보통이었어요. 우리 재인행 보살님도 있지만, 쥐어박히는 건 보통이고 그랬어요. 저희 스님이 저를 예뻐도 했지만, 쥐어박히는 거 말도 못하고, 멱살 잡히는 거 말도 못했어요. 이 뒤꼭지 딱 잡혀가지고 그냥 이렇게 하는 거, 등짝 두드려 맞은 거, 말도 못하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해도 제가 안 고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가리키려니까. 그렇게 했는데 우리가 절대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입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또 욕설과 악담으로 한 번 더러워진 입으로는 결코 부처님 명호를 부르거나 염불를 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랬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해가지고는 입을 깨끗이 해야 돼요. 입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우리 더러운 입에 맑은 물을 부어주어서 입을 헹궈내는 거거든요. 그냥 수리수리, 길상이여 길상이여 대길상이요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참회, 잘못했습니다가 아니,고 부처님의 그런 길상스러운 주문을 읽으면서, 진언을 읽으면서 나를 정화한 다음에 부처님 명호를 불러라 그거고, 그리고 만일 자신의 입이 거짓과 저주와 욕설 등으로 더러워졌다면, 반드시 먼저 참회하여 씻은 연후에. 참회에도 정구업진언도 되고 참회진언도 됩니다. 참회진언은 뭐예요?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뜻이에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참회진언이라는 말이 해석을 하면,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마음을, 자꾸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나에게 그거를 씻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또 설사 다른 이에게 들은 말일지라도 자신의 입으로 더럽히지 않고 청정히 보존하려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건네지 않습니다. 이거는 노스님이 참 강조했던 부분이에요. 누구한테 듣잖아요. 저도 좀 그런 게 가끔씩 보이더라고요. 지금 막 소식을, 노란 신문에 나는 거 있잖아요. 정식 신문에 못 나는 거. 그런 게 딱 왔다 그러면 누구한테 이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막 그렇죠. 그랬을 때 자기를 쳐다보는 거야. ‘아니야 얘기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고 자기를 딱 쳐다보고는 이건 내가 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이 내게 얘기를 했지만 내 선에서 멈춰버려야 돼. 그런데 우리는 절대 말하면 안 돼. 그럼 지도 말 안 해야지, 그죠. “이거 너만 들어, 절대 말하면 안 돼.” 하면서 꼭 말을 한다고요. 그거 패착이에요. 그거는 진짜 어리석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진관사 불자님들. 이거 노스님께서 가장 많이 저에게 해준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 하면, 나쁜 말은 절대로 듣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라. 나쁜 말을 했을 때는 결국 니가 그 말을 그 사람한테 하면, 또 너와 그 사람이 친한 사람에게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이러다 보면 나중에 그 말이 네게 구름처럼 크게 번져가지고 너를 괴롭힌다 그랬어요. 그래서 이 말을 엄청 엄청 발우 시간마다 강조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이 천일동안, 이거 참 작은 일인 것 같은데 이렇게만 여러분들이 실천을 하신다면, 마음의 정원에 극락 정원을 가꾸는 우리 큰 멋진 도반들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명심하시죠. 그래서 우리 참 부처님처럼 부처님의 지혜를, 매일 여기 이제 습관이 안 되면 매일 읽어보는 거, 노스님을 아시는 분들은 노스님을 생각하면서 읽어보시면 좋아요. 이건 노스님이 말씀하신 거니까. 그죠. 그래서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일러줄 수 있어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오늘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우리 법능 스님 축하합니다. 기도 아니 뭐 시작이 좋은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까 노스님이 뻔히 보고 계시네요. 그래서 멋지게 제가 이렇게 행복한 것처럼, 여러분들도 아마 행복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음의 정원 진관사를 만나서 우리는 진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참 행운인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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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량참법기도] 2월 8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5-02-08
네. 반갑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죠. 그런데도 많이 나오셨네요. 날씨가 왜 이렇게 추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이렇게 추운 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조금 전에 새해라고 세배를 했는데, 세 번 절해서 세배인가요? 새로운 마음으로 절한다면 세배인가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올해도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해서 회향을 하는데, 뵈니까 신수들이 훤하시네요. 기도가 잘 된 모양입니다. 신수가 훤해요. 보니까. 신수 얘기 나오니까, 정월달에 되면은 신수 한 번씩 봐야 되잖아요. 여기 주지스님은 신수 안 봐주시죠. 법문만 해주시잖아요, 기도하고. 제가 신수를 잘 보는데. 제가 오기 전에 옛날 토정비결 보던 책을 우연찮게 봤어요. 어렸을 때 생각이 났던 게, 그 토정비결이라는 게, 토정비결, 옛날에는 시골에는 정초 되면 신수 보러 이제 절에 와요. 그러니까 스님이 이제 안 봐준단 말이에요. 근데 토정비결 보는 게 이제 그 방법이 있거든요. 자기 생년월일 맞춰가지고 숫자를 이렇게 대입해서 보는 게 있는데, 그걸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익혔어요. 그래가지고 스님이 안 계시는 날, 그걸 살짝 가져와, 스님 방에 가져와가지고 노보살님 신수를 봐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럼 좋은 게 뭐가 있냐 그러면 복채가 생깁니다. 복채가 생기면은 이제 그걸 가지고 뭐 하냐 그러면은, 그걸 딱 들고 동네를 가요. 산 넘으면 동네가 이제 한 10가구가 있었어요. 여기 절이 있고 10가구가 있었는데, 10가구에 있는 또래들 다 데리고 나와가지고, 거기서 한 6킬로 걸어가면 주막집이 있어요. 주막집 주막거리라고, 거기 옛날에 아주 그 동네에 그 무슨 상회라고 하는데, 거기 양곡인데 거기가 양곡상회라고 가면은 군것질거리가 많잖아요. 그러면 그날 이제 아이들 데리고 와가지고 다 풍족하게 먹게끔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정월을 보냈던. 그러니까 인기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내가 동네에 뜨면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이제 큰 49재가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이제 옛날에만 해도 지금은 흔하지만 옛날만 해도 바나나를 시골에서는 구경할 수가 없어요. 큰 재가 들어와야 바나나를 올린단 말이에요. 바나나를, 이제 49재가 있는 날 그 다음 날 바나나 하나 가지고 학교를 가면은, 저는 미국에서 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 기억,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옥춘이라는 게 있어요. 옥춘. 빨간 사탕 그거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가지고 몇 개씩 가지고 다녀요. 가지고 다니다가 학교 가면은 좀 험악하게 생긴 애들 있잖아요. 힘도 세고. 저는 이제 어렸을 때는 겁이 많아 가지고, 겁 많게 생겼잖아요. 그죠? 생긴 건 이래도 굉장히 사슴처럼 여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좀 힘이 센 애들을 잘 사귀어야 됩니다. 어떻게 하냐면 그 옥춘을 하나씩 찔러주는 거예요. 이렇게 미리미리. 그러면 애들이 그걸 얻어먹으려고, 옛날 그 옥춘이 엄청 귀한 사탕이에요. 군것질거리가 없을 때는. 하교를 하면은 애들이 쭉 따라오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방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기 미루나무까지 가방 들어준 사람 옥춘 한 개, 그 미루나무에서 절까지 들어준 사람 옥춘 한 개, 이렇게 해가지고 당번을 정해가지고. 근데 절에 사니까 이제 어렸을 때, 바로 위의 형은 절에 산다고 옛날에는 많이 놀렸어요. 지금은 스님들을 많이 존중하지만, 저희 70년대만 해도. 그러니까 내 대략 나이가 나오네. 70년대만 해도 절에 살면은 놀림거리가 됐어요. 그런 때였어요. 그러니까 이제 바로 위 형은 학교에 가면 늘 싸워요. 싸우는데 먹는 게 부실하니까 맨날 지는 거예요. 맞고 지고, 지고 맞고. 저는 이제 그 옥춘을 이용해 가지고 한 번도 맞거나 싸운 적이 없습니다. 그때 이제 어렸을 때 그런 이제 신수 보던 생각이 나서. 근데 그 신수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장애가 있을 건지, 아니면은 혹시라도 어떤 사고가 있을 건지를 미리 점치는 거잖아요. 토정비결이라는 게. 좋은 일은 있으면 더 좋게 하고 나쁜 일이 방지하는 건데, 자비도량참법이라고 하는 이 기도의 원래의 핵심이 신수를 좋게 하는 거란 말이에요. 신수. 그래서 그 신수라는 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업장을 녹여서 좀 더 나은 삶으로 안내하는 에너지를 안게 하는, 품게 하는 그런 힘이 있는 것이 자비도량참법이기 때문에, 정초에 많은 사찰에서 이 독송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비도량참법을 하게 되면은 신수가 좋아진다. 신수가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업을 녹여내야 된다, 밝혀야 된다라는 거예요. 근데 이제 자비도량참법을 기도할 때, “스님들이 이제 기도하자.” 그러니까 그동안에는 입재해가지고 같이 했단 말이에요. 근데 오늘은 내가 자비도량참법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해보자라는 거예요. 좋은 질문들을 하는 사람이 좋은 삶을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한테 질문을 잘 안 합니다. 자기 자신한테 질문들을 자꾸 해야 돼요. 질문들. ‘내가 왜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해야 되는 거지?’ 누가 하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기도를 왜 해야 되는 거지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한 다음에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이제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사회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지만,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엄청난 많은 곤란, 혼란, 대립, 갈등이 있는 겁니다. 질문이 아주 자유로운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거든요. 그 삶도 마찬가지예요. 왜 질문이 중요하냐 그러면, 그 질문들을 통해서 내가 향상되는 거거든요. 강화되는 거거든요. 좋은 쪽으로 강화되는 거란 말이에요. 질문들이. 우리가 이제 어렸을 때 엄마 품에 자란 아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게 뭐예요? “엄마 왜 그래? 왜? 이건 뭐야?” 이런 질문들을 많이 하죠. 그 질문들을 통해서 그 아이가 그 사회에 맞는, 그 사회 문화에 맞는 아이로 성장하는 것이 그 질문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무턱대고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질문들을 나 스스로에게 해야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들도 있죠. 우리 이제 선가에서 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이죠. <시심마(是甚麽)>라고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처럼, 자비도량참법을 내가 왜 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것을 원론적인 질문들을 우리가 스스로 해야 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가 답을 찾기 위해서 기도에 집중해야 되는 거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자비도량참법은, 작년에 와서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자비도량참법을 4자로 딱 축약해 가지고, 자비도량참법을 만약에 이제 체에다가 걸러 가지고 이렇게 내린다면 딱 네 글자만 남는다고 그랬어요, 제가. 기억이 까마득하죠. 까마득해, 지금. 얼굴도 보니까. 해원석결(解寃釋結)이에요. 자비도량참법 6권에 나옵니다. 해원석결. 해원석결이 뭐예요? 원망하는 마음을 풀고, 그죠, 해결하고, 그다음에 석결은 맺혀 있는 걸 푸는 거예요. 가만히 우리 삶을 보면은 연식이 많이 될수록이요. 여기 연식이 많이 됐다고 하는 얘기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연식이 많이 될 수 있다. 연세가 많이 들수록 이 해원석결이 많아요. 알게 모르게 미워하는 것도 더 많아지고, 또 가슴에 맺힌 것도 많아요. 그러니까 풀어야 되는 거죠. 그 해원석결이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목적이에요. 마음에서 그러한 미움을 풀고, 맺혀 있는 걸 풀어내는 것, 녹여내는 것, 이것이 자비도량참법의 원래 취지다. 그러면 이 자비도량참법이 해원석결하면 뭐가 되느냐면 그게 우리가 늘 듣던 말대로 업장을 소멸하는 게 되는 거예요. 업장소멸은, 이 업장 할 때 업은, 여기서 말하는 업은 좋지 않은 습관, 태도 이런 걸 얘기하는 겁니다. 선업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악업인 거죠, 일종의. 근데 악업이라고 이제 얘기를 하는데, 악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불선업이라고 표현합니다. 경전에서는 불선업. 좋지 않은 업인 거예요. 우리 불교는 선악이다, 뭐 그다음에 천당 지옥이다, 이런 이제 단어는 있지만,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불교는. 그래서 선악 이렇게 하지 않고, 이건 서양 철학적인 이야기고, 불교에서는 선, 불선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 불선은. 그래서 악이 선으로 바뀌는 거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불선이 선으로 바뀌는 거는 불자만 떼내면 되죠. 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 불선업 이렇게 얘기합니다. 선업, 불선업. 그래서 이 업을, 업장을 녹이는 건데, 그 업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업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진행형이다. 항상 진행형인 거예요. 그래서 업을 얘기할 때는 녹여내야 되기 때문에, 뭔가 옛날에 옛날부터 내려오던 업도 있지만, 여기서 말한 업은 지금 내 이 순간에 말하고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바를 말하는 거예요. 거기에 집중한다는 거예요. 이게 업장을 녹여야 되는 것이 바로 자비도량참법인데, 그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 업장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느냐. 경전에 보면은 뭐라고 되어 있냐면은 업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행위를 의미하잖아요. 행위. 까르마(karma) 이렇게 얘기합니다. 까르마. 근데 행위라고 하는 것은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을 의미하죠. 의지. 우리 생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몸과 마음의 활동, 이게 업이에요. 쉽게 풀이하면. 근데 그 업이 악업이 되는 과정이 어떻게 되냐면, 원래는 이것이 청정한 본성이었는데, 청정한 본성, 원래는 아주 맑은 본성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또 마음을 쓰면서 이것이 욕망하고 결합이 되면서 어기게 돼요, 본성을. 그래서 이제 본성이라고 하는 거는 본래의 성품인데, 그 본래의 성품은 무량 공덕에 그런 찬란한 빛이 있다는 거예요. 원래의 성품이, 그런데 본래 자기의 어떤 그런 무량공덕의 생명의 원래의 그런 근본재가 있는데, 이것이 욕망으로 오면서 때가 끼면서, 거기에 이렇게 지금 때가 끼어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이제 업이 악업으로 되는 거죠. 악업으로 돼가는 과정인데. 문제는 뭐냐 그러면, 이거는 상대와 경계를 보고 생각하여 활동하는 그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제 이 악업이 되는, 업이 쌓이는 것은 그냥 스스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경계를 보고 생각하며 활동하는 과정에 생긴다. 그리고 본성을 어겨 경계를 보고, 또 상대에 떨어져 상대적인 그런 대립 갈등으로 대립 과정이, 대립 관계가 있게 되므로, 업의 결과는 진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대립 경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업이라고 하는 것이, 악업이 이루어지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계망을 맺으면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악업은. 불선업은. 근데 선업은 어떻게 되느냐. 그 관계를 이어서 이루어지기 전에 내 스스로 내 마음으로 출발하는 게 선업이에요. 선업. 그러니까 내 마음부터 밝혀야 되는 거죠. 그러한 것이 이제 악업이 되는 과정인데, 그러면은 이러한 악업, 업장이 쌓여 있는 그 업장을, 그렇게 이제 쌓여 있으면 그걸로 인해가지고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거나 어떠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장애가 생기는 거예요. 장애. 장애라는 건 다름이 아니라 마음의 힘듦이에요. 마음의 힘듦. 요즘에 마음이 참 힘들죠. 안 힘든 사람 손 들어보세요. 너무 힘들어요. 왜 힘드느냐. 상대가 하는 행위로 인해 내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이제 악업을 정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 번째로는 미혹에서 벗어나 청정 본심을 깨달아야 된다라는 건데 미혹이라고 하는 거는 어떤 것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미혹은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에요. 오해. 그걸 미혹이라고, 미혹이라고 그러죠. 다른 말로 무명이라고 그러죠. 무명. 무명이라고 하는 건 이제 밝지 않은 건데, 그래서 이 미혹에 빠지지 않고, 미혹은 무명이란 말이에요. 밝지 않은 거란 말이야. 그러면은 이 업장을 녹이는 첫 번째 단계가 뭐냐 그러면은 본래의 청정한 그걸 회복해야 된다 그랬잖아요. 내 마음속에 본래 청정한 찬란한 빛이 있다라고 하는, 본래 광명이 있다라고 하는 거 내 스스로가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걸 무량공덕 생명이라고 얘기를 해요. 무량 공덕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첫 번째의 업장을 녹이는 가장 큰 전환점이 됩니다. 예를 들면은 내가 중생이라고 하는 사고,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업은 끊어지지가 않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내 안에 무량 공덕 생명이 있다, 나는 원래 본래 청정한 당체다 라고 하는 걸 내가 알아차려야지만이, 그걸 알아차리려고 스님들은 수행을 하는 거고, 여러분은 기도를 하는 거고, 정진하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걸 알아차려야 이게 그다음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출발점에는 이제 업의 소멸인데, 업장 소멸인데, 그 업장 소멸하기 위해서 자비도량참법을 하잖아요. 그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거는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이 다섯 가지의 마음을 갖춰야지만이 성취가 돼요. 아까 이제 오다 보니까 주지스님께서 가피를 받아라 말씀하시더라고요. 가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이제 자비도량을 하는 거니까 그게 중요하죠. 근데 이 가피를 받으려면 이 5가지 인연을 갖춰야지만이 가피를 온전하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러면, 첫 번째로는 마음에 항상 삼귀의례,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이거는 불자라면 당연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여기에 아주 얼어 있는 차가운 물이 있는데, 물을 끓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불을 지펴야 되겠죠. 불을 지피려면 그거를 삼발이에 올려놔야 되잖아요. 그렇죠. 어디에 올려놓고 끓여야 되잖아요. 우리를 건강하게 지탱할 수 있는 세 가지 삼발이 역할을 하는 게 삼보예요. 삼보. 불법승 삼보. 그리고 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마음은 끊어지지 않아야 돼, 항상. 첫 번째가 이제 삼귀의례가 있고. 두 번째로 제일 중요한데 인과를, 인과에 대한, 인과에 대한 의심이 끊어져야 됩니다. 근데 우리가 인과를 믿는 것 같지만,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가 인과를 믿지 않는 말과 행동과 마음을 많이 씁니다. 불교의 핵심은 뭐예요? 인과법이에요, 인과법.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연기법이잖아요. 연기법, 인연법, 인과법이란 말이에요. 세 가지란 말이에요. 세 가지. 근데 왜 인과법에는 안에는 연기법이나 인연법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근데 부처님께서 왜 그러면 연기법을 얘기하고, 인연법을 얘기하고, 인과법을 얘기했느냐.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른 건 다 좋지만, 이 세 가지만큼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있어요. 그걸 삼종 외도(三種外道)라고 그래, 삼종 외도, 이런 믿음은 외도다. 나의 가르침 밖에 있는 길이다라고 하는 말씀이 있어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존우론(尊祐論)인데, 이 세상은 절대자가 역사했다, 만들었다는 믿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기법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하나가 뭐냐면 이 세상은 모든 게 사주팔자로 정해져 있다라고 믿는 거예요. 운명 믿는 거예요. 너무 운명에 매몰돼 있는 사람. 그래서 인과법을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불의가 뭐냐 하면, 세상 그런 게 없어, 다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거야라고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인연법을 말씀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절대로 글자대로 하면 안 되는 거죠. 이 세계에 누가 절대적인 사람이 나의 삶을 만들었다, 역사한다. 이게 잘못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것이 사주팔자에 의해가지고 이루어진다. 사주팔자 얘기 나와서 얘기지만 제가 스무 살 때 사주를 배웠습니다. 스무 살 때 우리나라 아주 유명한, 우리나라에서 역학책을 제일 많이 쓴 분한테 사주를 배웠어요. 사주팔자를. 사주를 잘 볼까요? 못 볼까요? 잘 보겠죠. 그렇다고 연락하지 마세요. 아니 가끔 농담 이렇게 하니까, 진짜 연락하는 분 있어요. 사주 봐달라고. 절대 안 봐줍니다. 왜? 그러면 그렇게 자꾸 봐주면은 다음 세상에 점쟁이 될까 봐. 스님들한테 그걸 물으면 안 돼. 왜 스님한테 그러면 다음 스님 점쟁이 되세요 하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부처님께서 제일 경계하는 것이 점치는 거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인도 사회에 그게 굉장히 팽배해 있었거든. 인도 사회에. 그렇기 때문에 점치는 걸 이제 경계하셨는데, 근데 제가 이걸 배웠지만 이게 아니구나라는 걸 내가 왜 느꼈냐면 주역이라고 그래요. 주역(周易). 이 역자가요. 바뀐다는 뜻이에요. 바뀐다, 바뀐다. 이게 쉬울 이자도 되지만 역자가 이 바뀔 역자예요. 그래서 이 바뀌는데 어떻게 바뀌느냐 그러면, 자기의 마음씀에 따라 바뀌는 거예요. 기본 틀은 다 있죠. 사람마다. 성격이라는 게. 근데 그 성격에 어떤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가지고, 어떻게 용심, 최상용(最相用) 중에, 화엄경에 나온 최상용 중에 어떤 용심을 쓰느냐에 따라 가지고 그 사람의 삶은 바뀌는 겁니다. 사주가 다 100% 맞는 게 아니에요. 거기에 빠져드는 순간 부처님 법은 점점 멀어져요. 우리가 이제 마음이 약해지거나 내지는 삶을 살 때 장애가 생길 때, 여기에 빠져들면 잘 기도하다가도 여기에 의지하게 돼, 결국은, 종국에는. 그래서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인과를 확실하게 믿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비도량참법을하는 이유는 바로 인과를 내가 아주 철저하게, 아주 내 골수에 맺히도록 믿기 위해서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겁니다. 자비도량참법 해보시면은 계속 인과에 대한 말씀이 나와요. 인과에 대한 말씀이. 그 인과는 뭐냐 하면, 내가 현재 받는 여러 가지 장애나 고통과 어려움과 슬픔과 분노와 미움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인과에 의한 결과물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냐면, 내가 풀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내가 주인공이라는 거잖아요. 아까 얘기했듯이 해원석결의 1차적인 사람은 전 거예요. 저. 맺혀 있는 사람은. 이 자비도량참법은 중요한 것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즉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의 남편이나 부인이나 자녀나 며느리나 손자, 손녀나 그런 해원 석결을 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자비도량참법은. 자비도량참법의 핵심은 뭐냐 하면 내가 맺혀 있는 애원과 내가 맺혀 있는 그런 업장을 녹여내기 위해 자비도량참법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아주 철저한 겁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말씀드리는데, 혹여라도 그런 구원 기도를 하려면 다른 기도하시는 게 좋아. 이 자비도량참법하면서 ‘뭐를 성취해 주세요’ 이런 기도가 아닙니다. 이거는 이거 잘못된 길로 가는 거예요. 지금. 그러니까 우리가 자비도량참법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자비도량참법하는 이유, 질문들을 나한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과를 철저히 믿기 위한 건데. 그 인과는 나의 인과다 이 말이에요. 나의 인과. 나의 인과를 믿기 위한 거다. 그다음에는 참회를 해야 돼요. 참회. 인과를 믿고 참회. 그러니까 이제 삼귀의, 인과, 참회입니다. 이거 다 이제 기록해 놓으세요. 머릿속에다가 자비도량참법하면 요 세 가지, 두 가지가 더 남았는데 이 세 가지는 이제 기억하시는 거예요. 삼귀의, 인과, 참회, 참회하기 위한 거죠. 자비도량참법이니까. 참법이니까 참회라는 거죠. 참회는 저번 시간, 저번 법문 나왔을 때 참회진언을 한번 했죠.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했죠. 근데 기억이 안 나죠. 뭐라고 했는지. 이게 참회인데, 참회를 번역하면은 일체의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살바는 일체라는 뜻이에요. 못자 붓다, 모디 보디, 모디 사다가 보살이라는 뜻이고 야는 들이에요. 들 부처님들, 보살님들 복수, 복수. 그러니까 참회진언은 일체의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에요. 참회라고 하는 거는 중요한 것은 원죄에 대해서 참회하는 게 아니에요. 불교는. 참회를 통해서 자기한테 채찍질하려고 참회하는 게 아닙니다. 참회진언은 함을 통해가지고 자기한테서 생체기를 내려고 참회하는 게 아니에요. 참회진언을 하는 이유는 <참회진언을 통해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무량공덕 생명인 부처님의 찬란한 빛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회할 때 부끄러운 마음은 있어야 되겠죠. 내가 그 어떠한 불선업을 지은 거에 대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야 되지만, 도리어 참회진언을 하면서 환희의 눈물이 아니라, 그 한이 맺힌 눈물도 흘리는 분이 있어요. 한이 맺힌. 그 한이 맺힌 눈물 흘리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하면서 이제 그러면 ‘내가 살아온 거를 책으로 쓰면 10권이 더 나와.’ 이렇게 하면서 이제 막 한탄하면서 하는 건 참회가 아닙니다. 그거는 그냥 한탄인 거지, 그거는. 참회는 참회진언 할수록 마음에서 찬란한 빛이 영롱하게 빛나야지만이 참된 참회가 되는 거예요. 눈물은 그 생체기 나 있던 것들을 씻어내는 것으로서 족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참회진언을 하면서 자꾸 한탄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거는 이제는 안녕 해야 된다, 빠이빠이 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참회진언을 하면 절대로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자기를 원망하거나 자책하거나 자기한테 생체기 주는 마음을 가지고 참회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참회까지 했으면 그다음에는 내 마음을 다 찬란하게 이제 빛나게 했으니까, 거기에 뭐가 올라오냐면, 그 참회진언을 통해가지고 녹아 있는 마음에 올라오는 게 뭐냐면, 보리심이에요. 그걸 발보리심이라고 그러죠. 발보리심. 보리는 지혜라는 말이에요.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보리는 반야라는 뜻이에요. 지혜, 지혜는 뭐라고 그랬어요? 지혜는 맑고 밝은 마음이에요. 지혜는 맑고 밝은 마음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이 맑고 밝으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밝고 맑은 마음이 쭉 지속되는 것, 그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리고 마음이 늘 따뜻하고 온화한 게 쭉 이어지는 그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인 거예요. 늘 맑고 밝게 따뜻하고 온화하게 마음이 쭉 유지된 사람이 누구예요? 부처님이에요. 그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깨달은 사람이 무슨 도통을 해가지고, 막 벽으로 걸어 다니고 하늘 날아다니고 막 이런 게 아니에요. 모르는 내일을 예측해 주고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뭐 스님이 막 그 신도 앉혀놓고 전생 봐준다고 하고 요즘에 그런 게 유행이라면서요. 전생. 전생은 그렇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남의 전생을 내가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식이 맑다해서, 기도를 열심히 했다고 그래가지고 남의 전생을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99.9%입니다. 또 수행자가 전생을 이야기하면 안 돼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어떻게 쓸 거냐, 내 마음을 얼마큼 찬란한 빛으로 빛나게 해서 지금 힘들고 어려운 나의 삶을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어줄 거냐라고 하는 걸 안내하는 것이 수행자지, 전생을 맞춰주고 내일을 예측해 주고 하는 것이 수행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어떤 분인 거예요? 깨달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에요? 마음이 밝고 맑고 따뜻하고 온화한 사람. 그게 지속되면. 근데 여러분이 그런 마음인가요? 비상시에 그게 유지가 되나요? 쭉 유지가 되면 좋죠. 그러면은 그건 깨달은 사람이죠.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보리심을 발휘해야 되는 거예요. 항상 보리심을 발하는 마음. 제가 옛날에, 아주 옛날에 종범 큰스님을 한번 모셔가지고, 제가 주지할 때 아주 옛날에요. 한 20년 전에. 아주 까마득하죠. 옛날에 모셔가지고 법문을 초청한 적이 있는데, 법문하고 공양을 하는데 저한테 물으시는 거예요. “수행자한테 제일 중요한, 수행자뿐만 아니라 불자들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뭐를 대답을 해야 될까. 그때만 해도 내가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딱 물으시는데 말문이 탁 막히더라고요. 너무 많이 생각나잖아요. 많은 생각이 나잖아요. 대답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지금. 그래서 말문이 딱 막혀 있는데 딱 하시는 말씀이 “보리심이다. 한순간도 보리심을, 보리심을 발하는 거를 잊지 않아야 된다. 수행자는.” 그러면 다 해결된다는 거예요. 보리심. 그걸 발보리심이라고 그러잖아요. 오늘 몇 분까지 해야 되는 거죠? 너무 긴 거 아니에요? 지금 괜찮아요? 5분 남았다고요. 발보리심인데, 제가 발보리심에 대해서 제가 추려온 게 하나 있습니다. 합장들 해보시죠. 법문이 너무 기니까 주지스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발보리심까지만 하고. 예. 제가 게송을 한 번 읽을 건데요. 발보리심. 오늘부터 오직 대승의 마음과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는 마음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려는 마음을 밝히리니, 원하옵건대 시방의 한없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대보살과 일체 성인께서는 본원력으로 저희를 위하여 증명하시며 자비력으로 가피하여 섭수하사 오늘 발심하고는 세세생생에 견고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소서. 만일 삼악도에 떨어지거나 삼계중에서 갖가지 몸으로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견디기 어렵고 참기 어렵더라도 괴로움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매 오늘 세운 큰마음을 잃지 않겠사오며, 차라리 무간지옥에 들어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서 갖가지 고통을 받더라도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오늘 세운 마음을 잃지 않겠사오니, 이 마음과 이 서원을 부처님의 마음과 같고 부처님의 서원과 같게 하옵소서. 네. 이렇게 이제 우리가 이제 보리심을 발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여기 나와 있듯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고통이 오더라도 오늘 세운 자비도량참법을 하면서 내 스스로 나에게 갖는 인과에 대한 인과를 녹이고 인과를 녹임으로 인해서 업장을 녹이는 이러한 대보리심을 발하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아야 된다. 그렇게 되면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무량공덕 생명인 부처님이 기꺼이 나와 함께 하는 그런 삶으로 가피가 넘쳐나는, 가피가 충만한, 그리고 늘 괴로움과 갈등과 대립에서 끌려가거나 지는 삶이 아니라, 늘 괴로움에서 승리하는 삶으로, 또 늘 부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빛나는 삶으로 살 수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까 다섯 가지 말씀드렸잖아요. 근데 회향시까지는 제가 네 가지 얘기했죠. 마지막 하나가 있는데, 하나가 회향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거는 내년도 자비도량참법 회향 때 하는 것으로 남겨 놓고, 오늘 법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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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기도]2월 3일 입춘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5-02-03
立春節 · 好時節(입춘절 · 호시절) 안녕하십니까? 을사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입춘 법문하러 왔는데요. 譬如闇中寶 無燈不可見비여암중보 무등불가견佛法無人說 雖慧莫能了 (華嚴經, 須彌頂上偈品)불법무인설 수혜막능료 (화엄경, 수미정상게품) 입춘에 앞서서 법문이 뭔가. 무엇이 법문인가. 이 법문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제가 절에 와서 제일 많이 들은 법문 내용이 비여암중보(譬如闇中寶)는, 비유하건데 어둠 속에 꽉 묻혀 있는 보배는, 어둠 속에 묻혀 있어요, 보배가. 무등불가견(無燈不可見)이라,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보배가 있기는 있는데 어둠 속에 있어서 등불이 없으면 못 본다. 불법도 무인설(佛法無人說)하면, 부처님 법도 사람이 말하지 아니하면, 수혜막능료(雖慧莫能了)라.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이건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에 게송이 있는데, 이 게송이 법문에 대한 의미와 필요성을 알려주는데 계속 봉송이 되고 있어요. 그러면 어둠 속은 뭐고, 보배는 뭐고, 등불은 뭐냐 이거죠.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번뇌 망상이에요. 번뇌 망상. 이 중생의 생각이라는 것이 항상 이어지기는 하는데, 별로 중요한 생각이 없어요. 그걸 경상도에서는 ‘하자는 생각을 하지 말라.’ 하자는 생각. 하자는 게 뭔지, 나는 고향이 충청도라 그쪽 말 잘 모르는 거 많아요. 하자는 생각, 그게 뭐냐 하면 쓰잘데 없는 생각, 이 말이여. 쉽게 말하면. 우리 중생들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으로 밤을 새고 날을 보내고 살아가요. 그래서 그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라. 그 쓸데없는 생각이 번뇌 망상이거든요. 그게 어둠이에요. 그런데 보배는 뭐냐. 그 번뇌 망상 속에 청정 불성이 있다. 불성. 이 불성은 중생의 자성이고, 또 중생의 본래 광명인데, 그게 생각 속에 묻혀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있어요. 자성 본래 광명이. 그런데 그거를 누가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번뇌 망상 속에 들어있는 청정 불성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법문이 꼭 필요하다. 이제 이런 말씀이거든요. 그건 그렇고. 乙巳年 立春節 을사년 입춘절今日立春 迎春迎福 念佛念法 精進勝緣 금일입춘 영춘영복 염불염법 정진승연四大强健 心無迷惑 千災雪消 萬福雲興사대강건 심무미혹 천재설소 만복운흥 오늘은 을사년 입춘절(乙巳年 立春節)이라 이렇게 돼서 입춘 법회를 지금 하고 있어요. 을사년 입춘절이다. 입춘이라는 얘기는 봄이 온다는 얘기거든요. 저 앞산에 보니까 눈이 허옇게 보이는데, 그래도 눈 위로 봄이 오고 있어요. 또 봄이 왔거든요. 그러면 부처님 법으로 볼 때 봄만 온다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요. 우리 마음이 어떻게 봄맞이를 하느냐 그게 중요해요. 봄맞이를 할 때 봄이 의미가 있지, 봄을 전혀 맞이하지 않고 보내면 의미가 없어요. 그럼 봄을 맞이하는 내용은 뭔가. 금일은 입춘(今日立春)이라. 영춘영복(迎春迎福)이라. 봄도 맞이하고 복도 맞이한다. 복을 맞이하는 노력을 하고, 복을 맞이하는 준비를 할 때 그 봄이 복과 함께 오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 불자가 봄을 맞이해서 복을 맞이할 것인가. 기도하고, 축원하고, 염불하고, 부처님 법을 생각하고, 정진하고, 공부하고, 마음을 잘 닦아가면 그것을 훌륭한 인연이라고 한다. 훌륭한 인연을 어려운 말로 이길 승자하고 인연 연자하고 승연(勝緣)이라고 그래요. 승연. 아주 인연 중에 가장 훌륭한 인연을. 승리라고 하는 승자가 있거든요. 승리. 그걸 승연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승연 공덕으로 사대가 강건(四大强健)하고 마음이 건강하고, 축원에서는 심무미혹(心無迷惑)이라고 그러는데, 이 마음이 건강해야 행복해요. 이제 부모들이 실력만 키워주면 자녀가 행복할 줄 아는데, 실력은 기본이고 마음이 건강해야 돼요. 집을 잘 지어놨어도 공기가 탁하면 못 살아요, 그 집에. 건강하고 재능이 있어도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멀건 대낮이 고통을 만들고 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에 쓸데없는 생각이 발동하면 그렇게 돼요.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누가 나에게 고통을 주는가. 누굴 것 같아요? 답을 다 알고 계시네. 어떤 애들은 그래요. 살다 살다 부모 잘못 만나면 평생 재수 없다 이래요. 그 말 맞잖아요. 평생 재수 없다. 물건 잘못 사면 몇 년 재수 없고. 그런데 그거 다 쓸데없는 소리예요. 쓸데없는 소리. 자기 마음이 건강하면 항상 좋은 일이 생겨요. 그래서 이게 아무리 집을 지어서 새집이라 하더라도, 공기가 맑아야 되는데, 공기가 안 좋으면 전부 병이 와. 그래서 이 마음 건강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딱 이 보고 듣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잠깐씩만 돌아봐도 거기에 깊은 평화가 올라와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마음이란 그런 거거든요.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보는 데 있고, 듣는 데 있고, 생각하는 데 있고, 움직이는 데 있고. 그래서 이 이 몸을 가지고 몸으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데, 이 마음이 이놈이 무엇인가. 처음에는 10초만을 생각해도 거기서 무엇을 느낄 수가 있어요. 30초를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 엄청난 거고요. 24시간 동안에 1분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 마음이 무엇인가, 한번 시작해서 1분만 지나가도 엄청난 거기 기쁨이 있고, 가벼움이 있고, 심오함이 있어요. 그게 마음공부예요. 그렇게 되면은 마음이 건강해진다. 심무미혹이라, 마음에 미혹함이 없다. 아무것도 아닌 거 그거 구하려고 목숨도 잃고, 아무것도 아닌 거 그거 구하려고 근심도 생기고 이러거든요. 기차 타고 오다 보면요. 두 노인네 부부, 노인네 옆에 가면 그날 아주 괴로워요. 그 할머니가 계속 잔소리를 하더라고. 지금부터 준비해야 된다고, 준비해야 된다고. 아 내릴 때 준비하든 말든 알아서 내리겠지. 계속 잔소리를. 그게 전부 다가 하자는 생각이야. 쓸데없는 생각. 할 때 되면 뚝 하고, 안 할 때 되면 안 하고, 계속 뭐라고 그래, 계속 뭐라고 그래. 내가 할머니들 그런 줄 처음 알았어요. 처음 알았어. ‘아이고 저렇게 사는구나. 저 할아버지 참 대단하다. 대단해.’ 그렇단 말이에요. 그게 이게 전부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는 거거든요. 마음이. 한 생각을 딱 차분하게 가지면, 아니 내릴 때 되면 턱 내리고, 앉을 때 되면 턱 앉고. ‘아 지금 빨리 가야 되는데 왜 이렇게 늦어’ 내가 이러면서 막 뭐라고 그러고.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에요. 그게 마음이 건강하면 안 그렇게 된다 이거죠. 그럼 사대가 강건하고 마음이 건강하면 천재는 설소(千災雪消)하고, 모든 재앙은 봄에 눈 녹듯이 다 녹아지고, 만복은 운흥(萬福雲興)이라, 여러 가지 복덕은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듯이 일어난다. 그게 입춘절을 맞이하는 봄맞이 복맞이다. 복도 맞이하고 봄도 맞이하는 거다, 이런 얘기죠. 그건 그렇고. 그 부처님이 되면 봄을 어디서 맞이하는가. 봄을 달력에서 맞이하는가. 달력보면 입춘인 거 알잖아요. 그러면 그 달력에 봄이 있어요? 봄을 달력에서 맞이하는가. 아니면 봄을 저 산골짜기에서 맞이하는가. 또 아니면 봄을 아주 일찍이 피는 무슨 매화꽃이나 동백꽃에서 봄을 맞이하는가. 그게 아니에요. 春外春 好時節 춘외춘 호시절春有百花秋有月 夏有涼風冬有雪춘유백화추유월 하유량풍동유설若無閒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약무한사괘심두 변시인간호시절 이 부처님들은 춘외춘(春外春)이라고, 봄 춘자, 바깥 외자, 봄 춘자. 봄밖에 봄에서 산다. 봄은 세월이거든요. 근데 세월 밖에 있는 세월이 있어요. 그걸 이제 불교에서 어려운 말로 <겁외춘>이라고도 해요. 겁, 일겁, 이겁, 세월을 말하는데, 그 겁 밖의 봄이다. 겁 밖의 봄이다. 겁외춘. 춘외춘. 그거 이제 뭐냐 하면, 춘외춘은 춘하추동이 없이 맨날 좋은 시절이에요. 그걸 호시절(好時節)이라 그래요. 좋을 호자 호시절. 봄만 좋고 뭐 겨울은 안 좋고가 아니라, 춘하추동 사시절이 나날이 좋은 시절이에요. 그게 부처님 세계예요. 춘외춘 호시절이라. 그전에 통도사 그 손님들 맞이하는 객실에 글이 여러 가지가 붙어 있었는데, 그 글이 너무 좋아서 그때부터 계속 외우던 게송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춘유백화하고 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하고, 봄에는 온갖 꽃들이 있고, 가을에는 빛나는 달이 있고, 하유량풍동유설(夏有涼風冬有雪)이라, 여름에 그 더운 때도 가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 여름에 서늘한 바람이 그렇게 좋더라.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閒事掛心頭)라면, 만약에 쓸데없는 일이 쓸데없는 생각이 마음속에 걸려 있지 아니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라, 이것이 인간 호시절이다. 마음에 쓸데없는 생각이 걸려 있지 아니하면, 봄은 봄대로 호시절이요, 여름은 여름대로 호시절이오, 춘하추동이 좋은 시절 아닌 때가 없다, 이런 법문이에요. 그때 이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인간호시절이 있다. 그럼 인간호시절은 달력에 있는 거 아니고, 햇빛에 있는 거 아니고, 저 꽃송이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이 아주 넓어지고, 내 마음이 건강해지고, 내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면 항상 좋은 시절이라 이 말이죠. 一念起念 妄想執著 苦海出沒 怖畏不息 일념기념 망상집착 고해출몰 포외불식一念正念 照見空寂 寂而常照 盡力安樂일념정념 조견공적 적이상조 진력안락 法無自性 一念寂光 법무자성 일념적광常用一念 法法圓明상용일념 법법원명 그래서 이 세상에 문제가 많은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은 뭐겠어요? 아까는 답이 금방 나오더니.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 마음이죠. 마음. 마음 하나가 조용해지면 이 삼천 대천세계가 조용해져요. 마음이 조용해지면 그 할머니가 짜증 내는 영감님도 좋아. 근데 마음이 걱정이 일어나니까, 옆에 있는 그 할아버지가 불안한 거야. 그래서 이게 자기 마음에 걱정이 일어나서 불안한 줄을 꿈에도 몰라요. 그래서 자꾸 할아버지 탓만 하더라고. 그 내가 옆에 가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참 보고 있자니 딱하고 그래. 할머니 마음이 걱정이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불안한 거지, 할머니 마음이 조용해지면 할아버지 가만히 있어요. 싸움도 안 그러고.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니고 그래요.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마음에 있다 그거거든요. 그래가지고 이 마음 하나를 딱 맑히고 밝히면 어느 나날이 좋은 시절 아닌 때가 없다. 이게 이제 부처님 가르침이에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거 아주 하찮은 것 때문에 목숨도 잃고 화를 당하고 이거 전부가 이렇거든요. 그래서 이 정신치료를 하는 정신의학회에 이제 참석해 보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의 감정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행복할 수 있느냐, 불행할 수 있느냐는 건 내 감정을 내가 얼마나 조절할 수 있느냐, 자기감정 하나 조절 못 해서 어마어마한 근심 걱정을 당하는 게 너무 많아요. 어떤 사람이 자기 오빠가 결혼해서 며느리가 새로 들어왔는데, 자기 엄마가 이 새 며느리한테만 온갖 편의를 다 제공하고, 막 사랑을 베풀고, 편애를 막 계속해서 화가 나서 마음에 들지도 않고 잘 모르는 사람하고 덥석 결혼을 해서 가버렸어요. 가 가지고 3일 있으니까 말도 없이 시아버니가 가방 딱 들고 오더래. 근데 그때까지만 해도 시아버지 모셔야 된다는 말은 꿈에도 안 했대요. 앞이 캄캄하더래. 그냥. 그뿐 아니라 맨날 울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순전히 그 자기 오빠의 부인에 대한 미움 때문에 후닥닥 결정해서 평생을 괴롭게 산다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이게 감정 조절이 얼마나 중요하냐. 지나놓고 보면 화낼 일도 아니고, 걱정할 일도 아닌데, 쓸데없이 감정을 크게 일으켜 가지고 인생사를 길이길이 힘들게 한다 이거예요. 그럼 감정 조절이 잘 되나. 기도를 많이 하면 감정에 힘이 생겨요. 웬만한 건 뭐 끄떡도 안 해. 그래서 통도사에 가면 천자각이라고 하는 대중방이 있는데, 거기에 <백전영웅은 지불법(百戰英雄知佛法)이라> 이런 말이 있어요. 백전, 100번 이상 싸움터에 나가서 전쟁을 한 영웅은 부처님 법을 안다, 지불법이라 이런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요. 백전 영웅이 되면 어디서 전쟁터에서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별로 동요를 안 해요. 그 뭔 말 하냐. 머리만 끄떡끄떡. 또 어디에서 크게 패배를 해서 지금 힘들게 됐다고 하는 보고를 해도, 그냥 끄떡끄떡해요. 그게 백전 영웅이에요. 그러니까 이 감정을 좀 깊이 다스리면 그 즐겁고 괴로운 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자기감정으로 즐겁고 자기감정으로 괴로운 거예요. 이거를 모르는 거예요. 우리 중생이. 좋고 나쁜 것은 자기 감정이다. 이러니까 입춘 법문이 재미가 슬슬 없어져 가지고 이제 졸라고 그래, 졸라고. 아니 이렇게 힘들게 얘기를 하는데 졸면 되겠어요. 그래서 자기 감정이라는 거, 이거 아주 핵심이에요. 자기 감정이다. 그래서 이걸 전문적인 용어로는 자기 문제라고 그래요. 내가 괴로워하고 내가 즐거워하는 건 내 문제예요. 내 문제. 내 문제. 그 좋은 게 근본적으로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근본적으로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좋아할 뿐이고 내가 나빠할 뿐이다. 내 문제다. 아이고 이거 참. 그러니까 입춘날 기도 잘하면 이 내 문제가 해결이 돼요. 내 문제가. 그래서 항상 좋은 시절이지, 나쁜 시절은 나로부터 일어난 거기 때문에 문제가 전혀 안 된다. 眞佛如如佛 日日是好日 진불여여불 일일시호일 花果及寒暑 時時好時節 화과극한서 시시호시절 그래가지고 부처님들은 진불은 여여불(眞佛如如佛)이니, 참 부처님은 언제나 부처님이 여여하다. 똑같다. 낮에도 부처님이요. 밤에도 부처님이요. 눈을 떠도 부처님이요. 눈을 감아도 부처님이오. 가도 부처님, 와도 부처님, 이걸 어려운 말로 여여불이라고 그래요. 여여불. 같을 여자 두 번 써서. 참 부처는 여여불이다. 죽어도 부처님이요. 살아도 부처님이요. 여여불. 근데 이 여여불은 일일이 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나날이 좋은 날이다. 진불은 여여불이니, 일일이 시호일이라, 맨날 좋은 날이다. 이 말이죠. 이게 마음의 평화가 오면 이렇게 돼요. 마음의 평화가 오면 세계의 평화를 이루어요. 근데 마음의 평화를 못 이루면, 이 환경에서 평화를 못 이루어. 이렇게 이제 간단한 건데 이걸 실천을 못해요. 내 마음이 평화가 이루어지면 모든 곳에서 평화가 이루어진다. 아주 너무너무 간단한 거예요. 근데 이거 소용없어요. 이 말 30분 동안 듣고 갔어도 딱 돌아서면 왜 그랬어, 이게 왜 그랬어? 이렇게 책임을 상대방에게 지우거든요. 그랬으면 어때요? 내 마음이 평화가 딱 이루어지면 누가 어떻게 했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래가 진불은 여여불이니, 참 부처님은 항상 변함없는 부처님이니, 일일이 시호일이라, 나날이 좋은 날이다. 화과극한서(花果及寒暑)에 꽃이 피는 세월이나 열매가 맺는 세월이나, 추운 세월이나 더운 세월이나 시시호시절이라 때때로 좋은 시절이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