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국행수륙재] 9월 8일 국행수륙재 초재 법문 2024-09-08

 

 

        반갑습니다. 진관사 수륙재 개건 626주년, 지난 91일날 이제 입재하시고, 오늘은 초재, 큰 주제가 <우리 모두를 위해> 이렇게 타이틀이 되어 있죠. 오늘 법문 초재 주제는 뭡니까? <우리 모두 힘내자.> <우리 모두 힘내자.>입니다.

        이렇게 수륙재라고 하는, 부처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중생을 건지는 큰 보배 그물을 널리 펼쳐서, 수륙공계에 또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전부 모든 일체중생 모두 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뤄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뜻으로 수륙재를 행하면서, 지난 입재때는 혜국큰스님 모시고, <나라의 별이 되신 분들을 위한 갑진년> 법문을 이제 해오셨고, 오늘은 <우리 모두 힘내자>.

        제가 지금 부산에서 새벽같이 달려왔더니, 힘이 쭉 빠져 있어요. 힘을 내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박수 치고, 웃고, 이렇게 힘이 척척 나잖아요. 그죠. 질질 짜고 이러면 있던 힘도 쭉 빠져버리잖아요. 어쨌든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소선언(前笑先言)>. 같이 해보실까요? <전소, 먼저 웃어준다. 선언, 말을 먼저 건넨다.> 마음에 안 들면 우리가 전화번호도 차단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조금 마음에 부대끼고, 또 어설프고, 좀 밉상스럽다 하더라도, 항상 전소선언이라. 이것이 모든 업장이 소멸되면서, 즐기면서, 홀가분하고, 편안하고, 천연스럽고, 그렇게 인생을 힘내는 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짜증나면 있던 힘도 쭉쭉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 힘내자>, 이것은 불교의 칠불통계처럼, 언제나 그게 우리 불교의 주제죠. 그래서 오늘도, 염불할 때 매번 반복이 됩니다. <원컨대 공법계제중생>,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누구든지 다 아는 구절이죠. 원컨대 공법계, 이 말법 시대에 동생상계, 함께 인류로 태어나 가지고 처지가 어떻게 됐든지, 이 말법시대에 우리 함께 같이 태어난 이 사람들끼리, 뭐 축생들까지 다 합쳐 가지고, 식물 동물 할 것까지 없이, 나하고 사상에 맞든지 안 맞든지 상관없이, 이 원공법계제중생이라, 모든 중생들이 동입(同入), 이 수륙대재하는 의의가 어디 있습니까? 동입, 우리 모두 다 함께 들어가자. 어디로 동입미타대원해(同入彌陀大願海), 아미타불의 원력의 바닷속으로 다 함께 들어가야 된다. 압록강은 서쪽으로 흐르고,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낙동강은 남쪽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바다로 들어가면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은 다 자기 이름을 버리고, 강의 이름을 버리고, 다 뭐가 되죠? 태평양이 된다. 바다가 된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 같은 마음을, 똥물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맑은 물도 있을 것이고, 모두 모두 흘러서 우리는 부처님의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를 왜 바다라고 하죠?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는 한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다. 부처님의 넉넉한 품이 되잖아. 오죽했으면 부처님은 당신을 독살하고, 악독하게 출가하기 전부터, 출가한 뒤로 계속 스토킹하면서 따라다니던 데바닷다, 부처님한테 하도 많이 데받아(되받아) 가지고 이름이 데바닷다, 그 데바닷다가, 법화경에 데바닷다품을 보면 그렇죠. “내가 전생에 그 왕으로 있을 때 불법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때 아시타 선인이 계셨다. 그분이 법문를 하실 때 내가 엎드려서 걸상이 되고 법상이 됐다. 신위상좌변삼천(身爲床座福三千). 그때 나에게 법의 공부를 일러 주시던 분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 못된 데바닷다다. 데바닷다가 있어서 내가 성불할 수 있었다. 데바닷다 너무 미워하지 마라.” 데바닷다가 성불해야 부처님의 원력이 완성되죠.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또 데바닷다도 딱 빠져버리면 퍼즐이 하나 이제 빠지는 거예요, 한 조각이. 그래 뭐 이것은 불교를 떠나가지고, 기독교로 보더라도 유다가 빠져버리면, 예수로서 포용을 못 하면은 예수가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쨌든지 뭐 데바닷다는 부처님한테 그렇게 되받아가지고 달려들다가 지옥 가서는 이름을 바꿨어요. 개명을 했어. 죄받았다(제바달다).

 

        자 어쨌든지 이게 아미타불의 원력의 바다에 동시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모두 다 함께 힘내서 가기 위해 가지고, 오늘 초재 법문도 이렇게 청해서 같이 듣고 있습니다마는, <진미래제도중생(盡未來際度衆生)>이라, 미래제가 다 할 때까지 허공이 녹아 없어지고. 이렇게 능엄경 같은데 보면 이런 구절 있죠. <순야다성(舜若多性)이 가소무(可消無)언정 삭가라심(爍迦囉心)은 무동전(無動轉)이라>. 저 허공이, 없는 허공이 녹을지언정, 철석같은 바다같은 삭가라심,-우리가 왜 방생 가면 사가라 용왕, 사가라 용왕 하잖아요. 그죠. 사가라 용왕, 대해 용왕, 대해 용왕, 큰 바다 용왕.- 삭가라심은 무동전이라, 이런 컵이나 이렇게 기울어지고 쏟아지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이렇게 하지 바닷물이 엎어지는 법은 없잖아요. 허공이 녹을지언정 철석같은 이 마음은 변함이 없다. 순야다성은 가소무언정 삭가라심은 무동전이라.
         여러분들 너무 인제 저는 역할이, 이제 큰 선생님들 많이 오시니까, 그분들한테는 큰 마음의 위로라든지 이런 걸 좀 봐주시고, 그죠. 저는 인제 강의, 법문 이런 것이 아니고, 공연하듯이, 그러면서 어찌 보면 이렇게 법석이 조금 이제 가벼워질 수도 있고 그러는데, 그것도 좀 편한 마음으로 하시는 게 안 좋겠습니까? 저는 뭐 법도 없고, 뭐 생긴 거는 이래도, 피부가 그것도 백옥 같고 뽀얘서. 아니 원래 그래요. 제가 좀 새카맣게 느껴지는 분들은 업장이 두꺼워.

         미래제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한다. 말이 쉽지, 참 지난한 길이죠. 어렵고도 어렵고. 그래서 <자타일시성불도>.

 

        그래서 인제 다음 2재가 되면은 뭡니까? <아기와 어린이의 행복> 다음 주는 그렇고, 그 다음에는 인제 쪼매 더 자라는가 봐요. 그죠. <청소년을 위한 정말 팔팔한 덕담>. 박사 학위도 이만큼 많은 스님이 오시니까 얼마나 좋겠노. 인물도 좋고. 참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그죠. 4재 때는 종자범자 큰 스님께서도 <청년과 사회 초년생을 위해 다 잘되는 덕담>. 제목만 읽어도 그저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참 기획을 참 잘하신 것 같아요. 또 본각스님께서 <기성세대를 위한 아주> 신묘장구대다라니 하시는가 봐요. 신묘한. 예 아주 신기하고 묘하죠. , 이름을 잘 지으시더라구요. 이 묘, 신묘하다고 하는 것이 엄마와 아빠를 위한 기성세대를 위한, 신묘하게 해야 돼요. 신묘하다고 하는 거는 이 묘하다고 하는 것은, 화엄에 이르기를 신묘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 하잖아요. 그죠. 그거는 진흙탕 같은 이제 뻘밭 같은 탁한 똥물 같은 세상에, 또 활활 타는 불꽃 속에도 시들거나, 타지 않고,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것을 신묘하다 이렇게 표현해요. , 위로 잘 됐어요. 엄마, 아빠 얼마나 고생 많겠어요, 그죠. 자식 키우면서, 그래도 세상에, 고통에 빠지지 않는다. 아까 저는 오늘 여기 와서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아가지고, 1장 가져갈라고 주지스님한테 1장 얻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을 위한 환희로운 법문>, 참 노년에 그 모든 미련이 떨어지고, 모든 애착이 떨어지고,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고, 꽃이 떨어질 때 떨어지고, 열매가 떨어진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역할을 다 했다고 하는 거죠. 그죠. 그런 노년이 인제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제목이 너무 좋아요. 시인이 하신 것 같아, 시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종정스님께서는 <백년을 잘 사는 법문>. 죽는 거보다는 잘 사는 게 낫겠죠. 100년을 잘 산다 해서, 옛 어른 스님들은 이제 혹시 누구든지 결혼하시게 되는 분들 글을 써주실 때, 백년화락(百年和樂)이라고 이렇게 써주죠. 100년 동안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극락처럼 백년해로해라, 이렇게 백년화락이라고 많이 써주셨어요.
        어쨌든 오늘 이제 국행수륙재 목적은, <원이차공덕으로>, 이 수륙재의 공덕으로 인해서, <보급어일체라>,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공히 어떤 경전이든지 마찬가지지만은, <우리 모두 다 함께 성불하자.> 이것이 인제 거의 뭐 불교의 큰 테마고, 영원한 천년만년 가는 테마잖아요. 그래서 마음에 기대있기 때문에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그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는 없고. 두 구절은 이렇게 살짝 집어넣어 놨지요, 양념상. 근데 그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를 중간에 넣어 놓으니까 더 내용은 확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이차 공덕으로 일체의 모든 중생들이, 우리 모든 중생들이, 아등여중생이, 개공성불도, 요게 인제 법화경 화성품에 나오는 구절이죠. 개공성불도, 모두, , 함께 불도를 이루자. 어쨌든 우리가 모두 힘을 내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낼라면 탁마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데, 상생을 그렇게 도모를 하셔야 되는데, 그 상생이 될라면 소통이 돼야 되고, 소통을 할려면 일단은 화목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종정 스님께서 마지막에 이제 보면 또 오시겠지만은, 종정 스님이 주석하시는 통도사 일주문에 가면 기둥이, 양기둥이 돌기둥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아버지가 써놓은 글이 <영축산 통도사>라고 써놨는데, 그 옆에 인제 돌기둥에다 뭐라고 써놨냐 하면은,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 가사 입고 머리 깎은 사람들은 부처님 계율대로 부처님처럼 살아갈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각기 인연이 다르고, 태생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그렇게 심보가 다른 사람들끼리 살아가면 얼마나 티격태격 싸우는 일이 많겠는가. 그래서 그 옆에 구절이 이성동거(異姓同居), 갖가지 성받이끼리 살아가자면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출가해서 같이 살자면은, <이성동거에는 필수화목(必須和睦)이다>. 반드시 화목해야 된다. 이것이 인제 우리 모두 힘내는 길이잖아요. 그죠. 그래서 저번에 와서 법문할 때 뭐라 했습니까? 내 눈에 눈물 내면은 그대 눈에는. 어떻게 하지? 무자비한 분들이 그리 안 웃어요. 니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도록 하겠다. 내 가슴에 못을 박으면은 니 가슴에 100만 송이 꽃을 안겨주겠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게 서로 같이 힘내는 게 좋아. 내 눈에 눈물 내서 니는 그냥 영 향 냄새 맡게 해주겠다든지, 그렇게 모진 소리 하면 안 되죠. 태생이 다르지만 여러 사람이 잘 어울려서 살라면은 자존심 있어야 됩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존경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을 자존심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존심을 착각을 해 가지고, 자만심을 가지고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된다고. 가만 쳐다보면 그건 자만심이죠. 자만심이면 자기 자신을 형편없이 업신여기면서 부처 같은 자기를 거지 같은 자기로 만드는 수가 있죠. 그래서 참 불쌍하다 하는 생각이. 우리가 절에 와 가지고 같이 힘내고 같이 어울려서 인제 잘 지내려고 하면은 자꾸 이렇게 며칠 살다 보면 삐끄러지고 찌그락거리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저희들은 한 보름에 1번씩 해인사 같은 데는 포살을 합니다. 포살이라고 아시죠. 포살을 어떻게 하냐면 첫째, 묻습니다. 포살법사가 대중은 뭐죠? ?” 큰소리로 하이소. . 그래 대중은 화목한가.” 화목이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만스러운 사람들한테는 어떤 법문을 해도 법문이 귀에 들어가질 않고, 포살도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성간은 화합이고 화목이 제일 먼저, 대중은 일단 화목하는 거. 그래서 수행을, 가만히 점차별로 이렇게 경험적으로 보면, 신심 있는 사람이 결국은 도덕적으로 완성돼서 계율을 잘 지키고, 그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 체면을 잘 챙기고, 남부끄러운 줄도 알고, 그렇게 참회를 한 사람이, 참제업장이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법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악독한 사람들은 아무리 법문해도 법문이 귀에 들어가질 않아요. 혹시 법문이 잘 안 들리고, 관심이 없고, 잠이 온다든지, 이런 분들은 아주 악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업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 아니에요, 진짜예요. 그 법문이 딱 들리는 순간에 법문이 내 걸로 되면은 그때부터는 사람이 남에게 베풀어 주기 시작합니다. 잘 베풀어주는 사람, 유심하게, 보시한 사람들 쳐다보면은 아주 방편과 지혜가 날렵합니다. 솜씨가 아주 좋아요.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이 즐기기 때문에, 즐긴 사람은 굉장히 솜씨가 깊이 들어갈 수 있어요. 깊이 들어가서 이해한 사람은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치가, 안쪽에서 충분히 내가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설계도를 다 그려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죠. 그래서 지혜 방편을 갖춘 사람은 기억력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또렷합니다. 절대 안 까먹습니다. 죽을 때까지, 관짝이 덮여서 칠성판이 덮힐 때까지 안 까먹습니다. 어 정말. 치매가 걸려도 안 까먹습니다. 정확합니다. “저분은 치매 걸렸는데 잘 모르실 건데요.” 아니거든. 정확하게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솜씨가 무르익어서 또렷하게 명심한 사람들은 그것이 골수까지, 뼛속까지, 핏속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솜씨가 무르익어서 사람 자체가 그냥, 추사 김정희 같은 건 손으로 쓰든 발로 쓰든 눈으로 쓰든 그냥 추사체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꿈까지도 그렇게 되어있어요. 축구선수, 축구 잘하는 사람들은 꿈속에서도 축구 잘합니다. 중노릇도 마찬가지예요. 중노릇 잘하는 사람은 꿈속에서 만나봐도 허튼짓 안 합니다. 남 안 봐도. 꿈은 지 밖에 안 보는데도 거기서도 허튼짓 안 합니다. 그렇게 완전히 골수까지 인제 스며든 사람이 나중에 부처님처럼 어떠냐.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조건이든지 말로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다. 이렇게 전제조건으로 수행하는 순찰하는 경계를 쫙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 좀 딱딱하죠. 딱딱한 것 같은데. 좀 웃기는 아재 개그를 금방 생각나는 거 하고 가겠어요. 아재 개그. 조금 있으면 겨울이 되면 우리가 난로 때잖아요. 난로, 난로 중에 어떤 난로가 제일 좋아요. 전기난로? 가스난로? 에 손난로. 석유난로. 제가 볼 때는 오늘의 주제 뭐죠? 화목난로다. 제일 중요한 건 화목난로 있죠. 장작.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말이 그게 맞든지 안 맞든지 화목하면 따뜻해질 거 아니에요. 그쵸.

        여러분들이 오늘 이제 <우리 다 함께 잘 되자>. 그래서 잘되는 길은 식상한 소리 같지만 공덕을 지어야 된다, 이런 말씀드릴 수가 있겠어요. 통도사 같은 데도, 얼마나 서로 화목 안 하면, 돌기둥에 새겨놨겠어요. 이성, 갖가지 성, 다른 성이 동거해 함께 살아가면 필수, 반드시 요구된다, 필수 반드시 수요가 있다, 요구된다, 뭐가? 화목. 그러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뭐 임전무퇴 결사항전이 우리에게 종식을 갖다 투쟁 경고의 시대예요. 필수 화목인데. 범어사에 가면은 어산교라고 하는 자그마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자그마한 다리. 어산교, 범어사 금정산 다리다, 조그마한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사람 이름이 하나 있고, 옆으로 45, 25, 35, 저 정도 요렇게 새겨져 있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범어사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선근 공덕을 지어야 된다. 김선근. 바위에 딱 새겨져 있어요. 김선근. 그래 그 옆에서 한 3발짝 딱 가면 김선근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사람 이름이에요. 근데 사람 이름이 얼마나 좋으면, 거 써도 개똥이처럼 써놓으면 안돼. 이 절은 뭐하는 곳이에요? 선근을 심는 자리인데, 사람 자체가 김선근이야. 저는 이제 다시 큰 절에 들어와서 이렇게 살다 보니까, 제가 이름이 용학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 학인 스님들은 방학도 나가고, 또 신도님들도 방학도 하시고 그래 하잖아요. 그죠. 저는 신도님들 방학하시고 나서, 우리 그다음에 학인들을 계속 가르쳐야 되고, 학인들 방학하고 나면 신도님들 또 개학해요. 그래서 저는 방학이 없으니까, 이름 자체를 용학이라 안 하고, 앞으로 방학이라 하려고. 이래저래 방학 없는데 뭐 이름이라도 방학이라고. 그래서 이분이 얼마나 좋으면 이름 자체가 김선근.

        자, 오늘 이제 수륙재라고 오셨는데, 열반경에 선근(善根)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선근이라면 좋은 착한 뿌리잖아요. 그죠. 착한 뿌리를 심고, 심고, 심는데, 최고의 선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최고의 선근은 무엇이겠습니까? 경전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착한 일이 많지요, 그쵸. 뭐 요거 아시는 분은 제가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경전에 나와요, 경전에. 선근, 선근, 막연한 선근 말고. 그죠. 진짜 선근을 몰라.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은 불교에서는 수미산, 수미산이다. 그죠. 경전에 고대로 나와요. 발자국 중에서 제일 큰 발자국은 코끼리, . 어우, 코끼리 발자국. 광명 중에 제일 밝은 것은 태양. . 태양, 일광이 제일 밝다. 이렇게 왕 중에서 제일 높은 왕은 전륜성왕. 여러분들 뭐 거의 천재, 모르시는 게 없습니다. 다 아세요. 전륜성왕이다. 선근 중에 제일 훌륭한 선근은 뭘까요? 한번 큰소리로 해 보십시오. 보시, 잘 보시오. . 이 세상에 산이 제일 높은 것이 수미산이고, 저 밝은 태양이 광명 중엔 제일 밝다. 태양이 한번 떠버리고 나면 서울 시내 가로등, 부산, 대구, 대전할 것 없이 온 가로등 다 붙여놔도 태양 하나에 따라갈 수 없고, 저 하늘에 총총한 그 밤에 많던 별도 별 볼 일 없어져 버립니다. 태양 빛 하나에 모든 것이 다 가려져 버립니다. 부처님도 턱 앉으면은 천만 대중이 전체가 형색이 무색해져 버리잖아요. 그쵸. 그렇게 하듯이 선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선근이 뭐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방일(不放逸)>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불방일이 선근 중에서 가장 큰 선근이다. 불방일이 뭐죠? 게으리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는 거예요. 불방일은 어떤 선근이냐. 어떤 뿌리냐.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선근이다. 그래서 삼세제불이 불방일 선근으로 인해서 다 성불을 하셨다.

 

        제가 우리 어른 스님을 표현할 때, 불교 방송에서 급하게 인터뷰 하다 보면 그래요, “스님, 화엄경 완간하시고 난 다음에 스님이 시자로서 수십 년 스님 모시고 계신데, 스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어른 스님 표현하기는 좀 뭐하고 그렇습니다마는, 우리 어른 스님은 제가 이렇게 모셔보면, 태양이 휴가 안 갑니다. 매일 하십니다, 매일. 오늘 아침도 아마, 8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유튜버 화엄경 강의하셨을 겁니다. , 정말 불방일. 요번에 올림픽 가서 뭐 사격, 펜싱, , 금메달 많이 땄잖아요. 그죠. 그 사람들이 뭘 심었다? 불방일 선근으로 인해서 그것이 금메달로 치환된 거죠. 바뀌어진 거죠. 안 그렇습니까? 불방일이라고 하는 거는 다른 말로 인제 쉽게 하면 <정진바라밀>이라 볼 수 있는데요. 게으른 사람들은 아주 악업장이 많고, 핑계가 많고, 핑계가 많은 사람들은 탐심이 많습니다. 탐심이 많아. 탐심이 많아서, 탐심이 막 욕심, 눈에도 가득하고, 입에도 가득하고, 욕심이 많이 있어 이래 쳐다보면 가득 하거든. 여긴 안 계시네. 그런데 욕심이, 눈 뭐 욕심이 가득하다잖아요. 우리, 그죠. 욕심이 바늘로 폭 찔러 터져버리고 나면은 밀가루가 바람결에 날리듯이 주체가 안 됩니다. 욕심 안 터지도록 좀 줄어야 돼요. 욕심을 줄이는 방법이 불방일로, 매일토록, 자기가 그러니까 난전을 펴놓고 10년만 그 자리에서 열심히만 하면은 다 성공한다는 얘기가, 옛말이 그게 허튼 게 아니에요.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선행의 근본이 뭐다? 불방일이다.
        그러니까 불방일하고, 저기 큰, 진관사 올라오다 보면은 소나무가 굉장히 좋습니다. 시원하게, 북한산 소나무답게, 그죠. 저 큰 소나무는 이제 많이 크면 더 안 자라잖아요. 그죠? 아니요. 아니요. 이 아름드리 소나무가 매일, 오늘 또 자라고, 내일 또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랍니다. 범어사 가면 600년 되는 은행나무가 한 열 아름이나 되는 게 있습니다. 큰 거. 열 아름은 거짓말이고, 한 다섯 아름쯤 되나. 600년 된 은행나무가 굉장히 크죠. 그 은행나무를 삽으로 뽑으면 뽑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콩나물만큼 뭐 실오라기만큼 약한 묘목 쪼만한 씨앗 하나가 발아해 가지고, 작은 싹이 자라고 자라서, 600년을 자라서 불방일한 결과로, 오늘날 그 은행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다.

        자, 우리 모두 힘내는 길은 뭡니까? 불방일로 죽으나 사나, 그냥 자나 깨나, 오나 가나, 뭘 해야 되겠어요? 정진하고, 정진하고, 정진하고. 뭘 정진합니까? 화목하게, 화목하게, 화목하게. 좋게 보면 전부 꽃이고, 제가 알라고 달려 들게 되면 전부 다 잡초잖아요. 그래서 불방일 하면은 이 게으르지 않는 것도 이렇게 증장이 되지만은, 다른 것도 따라서 같이 자라나게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뭐 이런 수륙대재를 통해 가지고, 뭐 짐승 중의 사자처럼, 나는 새 중에는 금시조처럼, 전륜성왕처럼, 우리도 인제 선근 중에서 불방일을 제일 우선시해서, 정진하고 정진하다 보면은, 깊고 견고해져서 쉽게 뽑아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제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33천 중에 저기 도리천에 올라가면은, 그 도리천에 이제 천자, 소유제천자(所有諸天子). 그게 왕자들이 밥을 먹는데 공동일기식(共同一器食)이라. 화엄경에는 공동일기식이라고 나오는데, 유마경에서는 더 찬란하게 써놨죠. 공동보기식(寶器食)이라. 모두 함께 보배 그릇에 밥을 먹는다. 근데 소식은 각부동(所食各不同)이라. 각자 먹는 음식이 다르다. 똑같은 한 그릇 밥에다가, 밥 한 그릇을 똑같이, 한 그릇 밥을 가지고 몇십 명이, 몇백 명이 모여서 먹는데, 어떤 사람은 짜장면 먹고, 어떤 사람은 볶음밥 먹고, 어떤 사람은 국수 먹고, 냉면 먹고, 또 어떤 사람 뜨뜻한 거 먹고, 어떤 사람은 찬 거 먹고. 그쵸. 다 달라. 오늘 이렇게 수륙대재라고 한다고 이렇게 모여서 왔는데, 우리가 어때요? 각기 <우보일생만허공이나 중생수기득이익이라>. 자기 그릇만큼 알아듣고, 듣기 싫은 사람도 있고, 듣기 좋은 사람도 있고,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캄캄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마는, 이렇게 수륙대재라든지 이런 법회를 통해 가지고, 또 우리가 이 말법시대에 같이 태어나 가지고, 같이 인류로 살아가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이렇게 될라면은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되요. 믿음이. 이 선근을 인제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돼요. 믿음을 먼저 키워야 되는데, 믿음이 잘 돋아나지가 않아. 믿음이 잘 돋아나지가 않아요. 그 믿음을 잘 돋아나게하려면은 절에 오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이라> 그래요. 악한 사람하고 자꾸 만난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천친보살께서 딱 정의해 놓기를 신귀덕업(信貴德業)이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덕업, 공덕을 짓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일을 믿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제 <신위도원 공덕모(信為道元功德母)>. 화엄경에도 그렇게 얘기해요. 많이 들어보셨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을 짓는 어머니다. 그리고 믿음이, , 뿌리가 되는데 그걸 믿음을 갖추면 되겠구나. 내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내가 신용불량자는 아닌가, 다른 사람들한테 믿음을 갖추는가, 안 갖추는가.’ 그러면 가만히 생각하면은, 그럼 믿음이 어떻게 하면 돋아날까. 첫째, 능엄경 같은 데서 가르칠 때 믿음이 안 돋아나는 사람들은 아주 오신채 탁한 걸 많이 먹어서 그렇대. 그걸 조기제인이라. 1번이 그거야. 그 도와주는 음식을 가려라. 제기조인(除其助因)이라. 고기정성(刳其正性)이라. 안쪽에서 탐진치를 뽑아내라. 현실에서 이렇게 부딪칠 때, 또 이렇게 내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또 내 유리한 대로 아만과 교만을 부릴 때, “내 수준이 와 이런 데는 없고, 외면하고, 거기에 시시비비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라. 근데 말려 들어가면은 밀가루 속에다가 기름 1방울 통 들어가 가지고 또르르 말려들어가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는 거와 같다. ‘내가 똥파리처럼 살아서 되겠나.’ 여 인제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이 딱 갖춰진 사람들은 부지런한 게 이제 따라붙어요. 부지런해야 이 정진 다음에. 저 정진은 불방일의 초보예요. 초보. 병아리야. 병아리. 정진이 자라고, 자라고, 자라다 보면, 나중에 어미 닭이 됐을 때는 불방일이라 그래요.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다음에 오는 현상에 가만히 쳐다보고,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공덕을 짓고 이런 분들이 이래 보면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저는 꼭 버릇이 지각을 잘했어요, 어릴 때. 학교 다닐 때도 지각하고, 절에 와서 지각하고, 뭐 계속 지각을 자주 하더라구요. 그리고 왜 스님이 자꾸 지각합니까?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고. 지각하던 사람이 안 하면 이상하죠. 계속 지각. 여러분들도 이렇게 모임이 있으면, 늦는 사람 계속 늦지요. 또 빨리 오는 사람도 너무 빨리 와가지고 좀 별나죠. 빨리 오는 사람은 좀 별납니다. 빨리 오시는 분들은 자기가 잘하기 때문에 남 모자라는 거 (못 봐요.) 그냥 빨리 오면 빨리 온 대로, 또 늦게 오면 늦게 온 대로 이렇게 다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인제 오늘 같은 날 한번 다시 짚어보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부지런해지게 되면 사람이 자기 안쪽으로 또 바깥쪽으로 참회를 하게 되죠. 참회를 하는데, 참회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참회를 하지 않으면 법문이 안 들려요. 여기서 진관사도 자비도량참법을 시작했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믿음이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자비도량 참법을 해서, 참법을 반드시 해야 법문이 쑥하고, 밭에다가 돌을 갖다가 인제 걷어내고, 돌자갈을 걷어내야 곡식을 심을 때 곡식이 좀 잘 자랄 수가 있겠죠. 그래서 이 참회를 한 사람들은 그다음에 오는 현상이 탐심이 많이 쪼그라듭니다. 그다음에 화닥질이, 자 화닥질이라 해야 되나, 화가 잘 안 나요. 화내는 사람은 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입니다. 저는 화를 한 번도 내본 적이 없습니다. , 정말로. 저는 이제까지 태어나가지고 이제까지 화를 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강의를 해도 꼭 저는 수요일날 합니다. 수요일. 화목의 중간에. 물처럼 유연하게. 정말로 수요일날 강의를 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오늘 수요일이죠. 금방 뽀록나 버리네.

 

        탐심은 어떤 것이냐. 집착이 탐심을 만드는 거죠. 진심은 어떻냐. (嗔心)심은 이절(離絕)로 위선(爲善)이라. 진심이 안 나는 사람은 이렇게 화를 금방금방 잘라내거든요. 그래서 탐심이 사라지고 나면은 화내는 마음이 인제 많이 이렇게 잦아들게 되고, 또 화내는 마음이 많이 잦아들게 되면은 판단력이 정확해지죠.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을 옆에서 이렇게 쳐다보세요, 한번. 골내고 싸우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죠. 옆에서 한번 가만히 관찰해보면은 자기 말이 자기가 들리질 않아요. 자기 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뭐가 잘 보이지가 않아요. 눈이 디벼졌다 합니다. 그쵸. 확 돌았다고 그러잖아요. 그쵸. 그렇게 잘 안보여요. 그래서 이게 탐진치가 사그라들고 이렇게 되면은, 그 다음부터 탐심과 진심과 이렇게 못된 그런 삿된 소갈딱지가 싹 사라지면은, 오는 현상이 몸도 마음도 홀가분한, 편안하다고 그래요. 이 편안한 상태가 오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게 뭡니까? 불방일. 그 다음에 오는 게 불방일이야. 몸도 무겁고 힘들고 귀찮아 죽겠고 정신적으로 또 버겁고 지치고 뻑뻑하고 이런 데다가 부지런할라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어떤 난관에 있더라도 홀가분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불방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용맹정진을 하죠. ‘와 저렇게 되게 아픈데도 정진하고 노력하는가봐.’ 이럴 정도로 옆에서 보면 달라도 뭔가 다르시구나.’ 이렇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은 불방일이라 하는 사람들한테, 부지런한 사람들한테 오는 특징이 뭐냐 그러면, 친소를 잘 가리지 않아요.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안 그래. 소인배는, 맹자에 보면, 작당한대요. 여기 소인배들은 우리 당, 우리 당 해가지고 작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보살심으로 넓어진 사람들은 사념이 청정해서 베푸는 마음이 <대원경상에는 절친소라(大圓鏡上 絶親疎)>. 부처님께서는 아까 뭐 했죠. 데바닷다도 아껴야 되고, 관세음보살도 아껴야 되는 게 부처님의 입장이에요. 선택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래 마음에는 선악이 없잖아요. 생각에는 선악이 있지만은, 본래 마음에는 선악이 없어요. 본래 마음에는 진공이기 때문에 선악이 붙을 자리가 없어요. 선하다 악하다 해버리고 전부 다 우리가 선근, 선근 하지만, 부처님의 불방일 선근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없는 선이에요. . 악은 말할 것도 없고. 집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소가 다 친하다 안 친하다 이렇게 끊어지면, 우리가 거기서 우리 입으로 감히 말할 수 있는 게 <자타일시성불도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진미래제도중생 자타일시성불도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이렇게 인제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내가 친하고 친하지 않은 것이 끊어진 사람한테 오는 현상은 뭐냐. 절대 남을 해꼬지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11가지가 믿음에서 정진으로,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체면을 차리고, 이렇게 쭉 흘러가 나가는 것이 탐심이 없고, 진심이 없고, 치심이 없고, 그리고 홀가분한 정신 상태가 되면서 불방일를 가지고 친소를 떠나서, 남북을 떠나서, 그저 동서를 떠나서, 고금을 떠나서, 빈부귀천을 다 떠나서, 일일이 평등하게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니까 해코지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잘 안 한다. . 고런 것들이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데, 어쨌든지 뭐 이렇게 목동 눈에는 소 꼴만 보이고, 사냥꾼 눈에는 사냥감만 보이지만, 평생 산에 살아도 의사가 한의사가 비로소 산을 올랐을 때 뭐가 보입니까? 낙조.

         그래서 이제 수륙재 이렇게 뭐 오늘 법문 재미없습니다마는, 재미있어라고 하는 법문는 아니니까, 그렇게 조금 염두에 두고 좀 정진했으면 좋겠다는 말씀 때문에 드리는 건데. 범어사에 가면은 어산교을 지나면 누가 있다? 김선근이가 있다. 김선근 옆에 또 이렇게 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어요. 김사철이라. 밟을 철자. 전철을 밟아간다잖아요. 그죠. 사유할 사자. 부처님이 가신 길을 잘 사유하고 거기로 따라가라. 그러다 이제 왼쪽으로 이렇게 한 3미터 쪽에 돌아보면은 김영덕이가 있어요. 영원히 공덕을, 신심공덕을 짓고 살아라. , 그러니까 범어사 오는데도, 평생 30, 50년 다녀도 까막눈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들 혹시나 부산 범어사 가시게 되면 김선근이네 한번 보고 착한 일 하나 하고, 김사철이네, 계속 착한 일하고, 일불이불삼사오불(一佛二佛三四五佛)이종선근이어무량천만불소종(而種善根已於無量千萬佛所種). 그리고 언제까지 또 공덕을 지어야 되겠어요? 김영덕. 그래서 가만히 쳐다보면 우리 다 함께 힘내자 하는데 남하고 똑같을 필요는 없어요. 채소를 보더라도 뿌리 먹는 거, 도라지, 더덕, 또 뭐 있나요? . 당근, 또 무, 감자, 땅콩. 그렇다고 뭐 뿌리는 뿌리대로 훌륭하고, 잎사구는, 잎사구가 아니고, 뭐 제가 이게 서울말을 할라고 임플란트를 서울에서 했는데 안 되네요. 그게 아이 참. 이파리, 잎사구, 또 잎사구라, 잎 먹는 상추, 배추, 양배추, 뭐 이런 게 있잖아요. 그죠. 또 열매 맺는 채소도 있지만 열매 먹는 거, 채소로 보면 뭐가 있어요. 옥수수, 강낭콩, ? 토메이토. 그리고 어떤 것도 껍질 먹는 거도 있고, 그죠. 계피 같은 것도 있고, 껍질 먹는 것도 있고, 알맹이 먹는 것도 있고, 그렇게 어떤 거는 즙을 짜가지고 먹는 것도 있고. 안 그렇습니까? 이런 것을 우리는 다 어울려서 살아내서 세주묘엄(世主妙嚴)이다. 이렇게 늘 얘기를 해요. 세주묘엄. 그래서 인인이 다 잘났다 해서 다 우리 힘내자. 이것이 각득기소(各得其所). 각기 지 역할이 있다. 모난 놈은 모난 대로, 아니 저기 호랑이한테 뿔 달리면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소는 뿔 있는데, 호랑이는 뿔이 없어. 그죠. 고양이는 발톱이 있는데, 개는 발톱이 있긴 해도 시원찮잖아요. 그래서 어떤 거는 물에도 살고, 어떤 거는 숲에도 살고, 허공에도 살고, 땅에도 산다. 그 모든 중생들, 수륙이란 말이 그 모든 중생들, 태난습화 모든 중생들, 구류중생들이, 구류중생 일법계라. 그 구류 중생이 함께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眞珠) 구류 중생이 일법계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데 우리가 조금 뭐 돈 많이 가진 사람, 인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학벌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이런 걸 다 떠나가지고 전부 다 같이 잘 살자 이런 뜻이 있잖아요.

왜 요번에 올림픽을 이렇게 보면은, 그게 경기할 때 가만히 쳐다보면, ‘아유 저건 축생경기다, 저거는 지옥경기다, 저거는 인간경기다, 저거는 신선경기다’, 이런 게 있잖아요. 왜 그거 활 쏠때는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쏘잖아요. ‘와 신선 같다 신선.’ 근데 100미터 달리기 하든지 저기 수영하고 이런 거는 남 해코지 안 하고 어떻게 지 기록만 하잖아요. ‘아 우리 정말 인간 같네’, 그리고 구기종목 같은 걸 하잖아요. 그죠. 축구 같은 거 이런 거 하고. 그리고 아마 치고받고 하고 왔다갔다 하면 좀 인간인데 조금 모자라는 아이들 같다.’ 조금 수준 높은 인간은 네트 딱 달아놓고 배드민턴도 치고 테니스도 하고 하잖아요. 저걸 서로 엉겨 붙어 싸우지 않으면서 게임을 잘도 한다. 그래도 조금 넘어가서 복싱이나 유도 오면 눈탱이 째지고 레슬링해서 지옥이다. 지옥. 100미터 딱 달리기 할 때 보면 준비 땅 10초 만에 끝내서 금메달 하나 딴 사람 있죠. 그죠. 저건 돈오돈수인데. 2시간동안 쎄빠지게 뛰어가지고, 메달 겨우 하나, 그 마라톤 있잖아요. 똑같은 메달 한 개인데 왜 저리 많이 뛰노. 저건 돈오점수다. 가만 보면 별별개 다 있어요. 탁구공은 가볍고, 탁구공 가벼워야 그렇게 배트가 이렇게 치고 해야지 볼링공은 어때요? 볼링공으로 탁구 치면 탁구대가 다 빠그라져.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볼링공처럼 무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업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죠. 거기에서 볼링공을 잘 굴려야 될 것이고. 탁구공 같은 인생은 탁구공처럼 내 인연을 순응하고 살아야 되고. 야구공을 가지고 축구할 수는 없잖아요. 또 럭비공은 또 얼마나 모났어요. 모난 놈들이 럭비 하는 것 같애. 사각으로 그죠. 어디 튈지 몰라. ‘아 이렇게 모난 사람은 저건 어디 튈지 모르겠다그렇게 이해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야 공 하나만 보더라도 자 던져놓고 참 별 게 다 희한하게 살아간다 이런 생각이 있어요. 어쩌든지 우리가 크든지, 작든지, 길든지, 짧든지, 무겁든지, 가볍든지, 껄끄럽거나 미끄럽다, 이런 것은 전부 인연법이고, 생멸이 멸이(滅已)하여 불생불멸로 가는 길. 이것이 인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 이런 뜻이에요.

        제가 통도사 얘기를 했고, 범어사 말씀도 드렸고, 그쵸. , 그럼 제 출가 본사 해인사 가면 이런 게 있어요. <원각도량이 하처냐(圓覺道場何處)>. 우리의 진정한 극락세계, 원만한 부처님의 세상이 어디에 있더냐.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 지금 오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순간에, 모든 집착만 내려놓으면 좋겠다. 그 집착이 내려놔지나. 안 내려놔지지. 중생은 집착하며 살아야 되는 것 같애요.

 

        어쨌든지 오늘 이제 수륙대재 초재 법문하면서 에 조금 생색을 안 낼라면은,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내 고집스러운 이름도 다 포기하고, 뭐 포기 안 해도 낙동강 들어가는 순간에 저 낙동강 이름이 지워지게 돼 있어요. 우리가 부처님 마음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나면은, 내가 족벌이나, 학벌이나, 뭐 재물이나 이런 걸 따지지 않게 돼요. 그 계급 없는 그쪽으로 되니까. 뭐 그걸 잘 명심하시고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 하늘의 태양이 콩도 익어가고, 뭐 영양 고추도 익어가고, 또 참외도 익어가고, 수박도 익어가고, 다 익어가지만은, 그게 다른 태양이 아니라 태양은 하나다. 우리 마음은 전부 하나다. 업연이 다를 뿐이다. 업연이 이제 다르다, 요런 걸 갖다가 조금 명심을 하다 보면 공부가 잘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태양은 높은 산을 먼저 비추고, 낮은 산 늦게 비추고, 평지는 나중에 비추고, 뭐 계곡은 더 늦게 비춰버리지만, 태양이 내가 이걸 먼저 비쳤다, 늦게 비쳤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가 높은 데 있다보니까 먼저 비춰지고, 낮은 데 있다 보니까 낮게 비춰졌다, 이럴 거 같애요.
        우리가 여기서 뭐 어쨌든지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욕궁천리목인 데는 갱상일층루라(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한층 더 이렇게 올라갈라 하면은 이런 게 있습니다. 요즘 한참 나는 게 사과도 나고, 배도 나고, 감도 나오죠. 그죠. 근데 제가 요즘 가만히 요즘 잡꽃 피는 시절인데 꽃이 이제 따뜻할 때 피는 꽃도 있고, 싸늘할 때 차꽃도 피고 국화도 피고 이렇게 하는데, 여기 대들보가 이렇게 볼만합니다. 어떻습니까? 웅장합니까? 여러분들 우리 앞에 계신 청년 분들이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저 기둥도 이렇게 볼만 합니다. 그죠. 저 서까래도 엔간합니다. 그죠. 뭔 나무겠습니까? (소나무) 금강송이면 더 좋고, 그죠. 그러나 감나무나 사과나무나 대나무 정도 가지고는 기둥을 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은, 사과나무 가지고 여기 기둥이나 대들보를 쓸 수는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소나무가 이렇게 대들보가 됐습니까? 여러분들 부디 수륙재 진관사 같은 데서 대들보처럼 잘 이케 자라셔야 되고, 인생을 향하셔야 되는데, 소나무는 왜 대들보가 됐습니까? 결코 인생 살아가면서 달콤한 열매를 맺지 않았다. 여러분들 인생에 쓰고 달고 한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고랑에 빠지지 않고 그저 송진을 품고 달빛하고 교감하면서 송월교감이라, 달빛을 벗 삼아 가지고 이렇게 살면은 소나무 같은 기둥이 안 되겠어요. 그렇죠. 진관사 자체가 한국 불교의 기둥 같습니다. 대들보 같고, 참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이 도량을 여러분들께서 오래오래 신심 있게 잘 지켜주셔야 이 말법시대에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은 설중송백은 유청청이라(雪中松柏兪靑靑), 눈이 내릴 때 소나무, 잣나무가 더 푸르러 보이죠. 힘든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가 수행 정진하고 불방일 한다면은 더 아름다운 거야. <설중송백은 유청청이요. 월하임중에 미인래(美人來)>. 그 솔밭에 달빛이 쏟아지는데 거기에 미인이 걸어오고 있더라. 그 미인 다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고, 우리 모두 힘내서 잘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그리고 여기 나눠준 유인물은 집에 가서 잘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