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⑦(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
--不守自性隨緣成, 指緣起體 --
(불수자성수연성, 지연기체)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10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그 게송입니다. 전번처럼 손뼉을 한 번 딱 치고 10번을 외워요. 같이 시작. (짝)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불수자성수연성 (짝)
불수자성수연성이라. 뭐가 그러냐. 우주의 본성이 법성이고, 중생의 본성이 진성인데, 이 법성, 진성은 불변이에요. 변하지 않아요. 허공이 변하지 않듯이. 법성, 진성은 불변 진성이다. 변하지 않는데 그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키질 않아요. 자성을 안 지켜. 그럼 어찌 되냐. 수연성이에요. 인연 따라서 이루어져요. 그래서 이걸 변하지 않으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변하지 않으면서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이걸 불수자성수연성인데, 줄여서 말하면 불변수연이다. 변하지 아니하면서 인연을 따른다, 이래요. 그래서 이것이 이 법계 인연, 온 우주 만상의 인연의 근본 본체다 이래서, 연기체라고 설명을 하거든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소린가. 일체 중생의 근본 자성을 가리키는 거예요. 중생의 자체 성질. 그걸 자성이라 그러는데, 나의 자성, 나의 자체 성질. 성질이라 그러면 성격 고약한 성질머리가 아니고요. 본성, 본질. 나의 본성, 본질은 뭐냐. 그것은 우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법성이고, 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진성이다. 그거는 불변이다. 그런데 그 불변의 진성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사람도 되고 또 온갖 것이 다 된다 이거에요. 그런데 그 진성은 불변이다. 그런데 그 불변의 진성이 인연 따라서 다 이루어진다. 이것이 불변수연의 자기 자성이에요. 나의 자성은 불변수연이다.
수연은 뭐냐?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태아고, 태어나면 영아고, 그다음에는 소년이고, 청년이고, 노년이고, 사라지고, 또 태어나고, 보이고, 안 보이고 이게 다 인연을 따르는 건데, 여기에는 불변의 진성이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지혜의 삼매를 딱 닦으면 그 불변 진성을 보는데, 그걸 견성이라 그래요. 불변 진성을 본다고. 근데 이 견성은 눈으로는 안 돼요. 지혜로만 돼요. 왜 눈으로 안 되냐. 이 중생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눈 자체가 보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보냐? 배운 대로 봐요. 그래서 어릴 때는 열심히 배워야 돼요. 걔들이 다 살려고 그러는 거예요.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그 배우지 않은 거는 봐도 몰라요. 그래서 걔들이 평생 살 준비를 어릴 때 다 하는 거예요.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배울 거 다 배웠으면 이제 엄마가 필요 없어요. 그때 이제 엄마로부터 독립하는 거예요. 엄마 말 안 들을 때 그때는 이제 평생 살 것 다 봤다. 이거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안 배워요. 그다음에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이제 친구를 찾아서 자기 좋은 걸 찾아서 가요. 자기 좋은 거는 까까인데, 엄마는 필요 없고, 이제 까까. 저거 까까, 이거 까까. 이렇게 처음에는 엄마, 그다음에 까까. 그다음에 내 좋은 거, 이렇게 변해요, 자꾸. 이게 수연성이에요. 그런데 그 뭔지는 몰라도 그 보는 힘이 있는데 그게 진성이에요. 이거, 이거 뭔지 모르지만 이걸 보잖아요. 그건 알기 전에 진성이 나타난 거예요. 이렇게 하면 처음에는 모르죠. 저건 뭐야? 손이야. 그러면 엄마한테 배우잖아요. 그러면 손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 이렇게 나타난 걸 눈으로 봐요. 그런데 뭔지는 몰라. 근데 손이라고 배운 거예요. 귀도 마찬가지예요. 뭐 들으면 배운 대로 듣지, 그냥 듣기만 하지 뭔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성이라는 거는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기 전부터 있던 거라, 그 성을 보려면 지금까지 사람이다. 뭐 태어난다, 죽는다, 이런 배우는 생각을 가지고는 모르고, 배우기 전부터 아는 그 지혜로 돌아가야 알아요. 그게 견성이에요. 근데 사람들은 눈으로 보려고 그래요. 지금 당장. 귀로 들으려고 그래요. 그걸 하려면 할수록 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배운 거, 익힌 거, 딱 가라앉혀서, 배우기 전으로 돌아가고 익히기 전으로 딱 돌아가면 한없이 한없이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만, 언제나 언제나 변함이 없는 진성이 나타나는데, 다른 걸로 보는 게 아니에요. 역시 눈으로 봐요. 그 눈이 배운 걸 보는 게 아니라 배우기 전의 걸 본다.
그러면 배워서 보는 걸 모양이라고 하는데, 상이라고. 배우기 전을 뭐라고 그러냐. 이 모양을 이루고 있는 본질, 본래 성질, 그런데 이걸 어려운 말로 모양을 물상이라고 하고요. 물건의 모양. 물상. 이 물건의 본질을 물골이라 그래요. 물건의 뼈. 이걸 딱 보면 이제 익힌 눈으로 보면 물건인데, 지혜 눈으로 보면 물건의 뼈예요. 뼈. 그 뼈는 불변이다. 이 물건의 모양은 수연이다.
이렇게 돼서 이걸 왜 가르치느냐. 이 몸은 아무리 인연 따라 변한다 해도 그 진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변하는 것에 근심하지 말아라 이거예요. 너의 진성은 불변이다. 너의 진성은 불변이다. 그런데 다만 변하는 것에만 익힌 대로 보고, 배운 대로 듣기 때문에, 그 진성을 모르고, 배우고 익힌 것에 헤매고 있다. 뭔 소린지, 진짜 참. 진짜 심오하고, 진짜 알기 어렵고, 진짜 짜증 나요, 짜증 나. 그거 좀 쉽게 좀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아. 근데 쉽게 가르쳐주면 어떻게 되냐. 배운 대로 가르치는 거예요. 배운 대로.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재미가 뭐냐 그러면은, 아는 걸 듣는 걸 재미있다고 그래요. 특히 저만 아는 걸 들려줄 때 되게 재미있어요. 저만 아는 거. 근데 모르는 걸 얘기하면 재미없다 그러고, 어렵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거 진성은 한 번도 본 일도 없고, 익힌 일도 없는데, 이걸 말하니까, 얼마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불교는 인과인데, 항상 불교는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해도 원인과 결과가 그거예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결과 없는 원인은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르치는 게 결과는 생각하지 말고 원인만 갖춰라 이거예요. 염불만 하면 극락세계 가는 결과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중생들은 염불은 안 하고 극락만 가려고 한다. 이걸 하지 말라는 거예요. 원인을 중요시하지 결과만 바라지 말아라, 이거예요. 그런데 인과가 세 가지를 가르쳐요. 육도윤회 인과라고, 지옥 아귀 축생서부터 천상까지 육도윤회 인과인데, 이거는 고락인 거예요. 고통과 즐거움,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뭐 이런 말을 하던데, 고락, 괴로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이게 이제 육도인과거든요. 지옥에 떨어지면 괴롭고, 천당에 올라가면 즐겁고. 그러면 천당에서 천당에 올라가기 전에 공덕을 다 소모하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이게 윤회거든요. 이걸 고락인과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중에서 이 복을 받던 고통을 받던 이 고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을 하고 싶다. 그러면 이제 해탈을 하려고 도를 닦아요. 사성제를 닦으면 성문이고 12연기를 닦으면 연각이고, 육바라밀을 닦으면 보살이고, 이거는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복을 받고 또 고통을 받고 그게 아니라,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도를 닦는 것을 해탈 인과라고 그래요, 해탈 생사에서 해탈하기 위한 인과다.
근데 이제 화엄경에 오면 법계인과를 가르치는데, 법계인과라고 하는 것은 평등인과인데 평등해요. 또 원융인과예요. 개별 인과가 아니라, 원융인과, 평등인과인데, 원융인과라는 건 뭐냐.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다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고정불변은 하나가 없기 때문에. 하나 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오고, 하나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온다. 또 하나는 모든 것으로 다 들어간다. 이게 철학에서도 맨날 이게 어려운 문제인데, 모든 것은 하나로 들어온다. 하나는 모든 것으로 들어간다. 이걸 원융인과라 그래요. 하나와 모든 것은 원융하다. 원융이라고 하는 건 다 통한다 이 말이거든요. 하나는 고정불변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이 들어와서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고정불변은 하나는 없다. 또 이 하나는 고정불변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으로 다 들어간다. 이걸 법성게에서는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 이게 원융이에요. 아침부터 이런 얘기하려니까 좀 이상하네. 다 아는 얘기, 재미있는 얘기하고 가면 참 편할 텐데.
그래서 이 개별과 원융이라는 게 있는데, 이 원융을 알기가 어려운데, 이 원융만 알면 화엄을 알아요. 화엄은 원융이에요. 그리고 이 법계인과는 평등 인과라 그래요. 인이 먼저 있고 과가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인과 과가 평등하다. 평등인과, 원융인과. 그러면 이 원융인과라고 하는 건 뭐냐. 하나에는 하나가 없어요. 하나에는 하나의 자성이 없다. 그럼 어째서 하나가 있냐. 인연으로 하나가 된 거예요. 여기 물건이 딱 있는데, 물건이 하나만 있을 때는 그냥 물건이에요. 그럼 여기 둘이 있을 때는 이거를 세기 위해서, 이거 하나를 짚는 거예요. 이 숫자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뭔가 셀 대상이 있을 때 숫자가 필요해요. 그러면 그냥 보면 그냥 하는 거예요. 하는데 이 하나가 없어요. 하나가. 왜 없냐. 자세히 보면 이건(컵) 흙이에요. 또 이거 물감이에요. 그리고 이걸 설계한 설계자가 있어요. 이걸 만드는 시공자가 있어요. 그래서 이 재료와 설계와 시공 빼놓으면 이거 없는 거예요. 이게 다 이렇다는 거예요. 이걸 법계 인과라고 그래요. 법계가 만나서 평등하게 이루어진다. 법계인과가 그런 거예요. 그러면 법계인과는 이게 있는 동시에 이게 원인도 되고 결과가 된다. 인과 동시다. 인과 선후가 아니다. 그러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가서 1km를 갔다 하면 첫 발짝 띤 때서부터 이미 간 거다. 왜냐하면 첫 발짝을 안 뗐으면 목적지에 못 가니까. 초발심(初發心)이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고 처음 발심할 때가 성불한 거라고 한 게 평등 인과 때문에 그래요. 시작과 끝이 평등하다. 시작 없는 끝도 없고 끝없는 시작이 없다. 근데 한 걸음 딱 띠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러면 모르잖아요. 근데 사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목적지에 도달한 거지, 마지막 한 걸음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기도를 했다 그러면 이미 이룬 거예요. 그게 인과 동시고 인과 평등이에요. 왜냐하면 오늘 한 그게 모여서 모여서 마지막을 이루는데, 그게 필경 성취인데, 마지막에 이룬 성취인데, 이 필경 성취는 출발과 낱낱 행위 모여서 하나하나가 그때 이미 이루어진 거다. 출발할 때 이미 마지막이 들어있고, 하나하나 중간중간에 이미 마지막이 들어있다. 이래서 일중일체다중일이다. 많은 것은 하나 속에 있다. 이걸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의 법계인과거든요. 그러니까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그러면 우리 몸은 하나거든요. 근데 이게 법계인 거예요. 온 우주법계인 거예요. 우리 몸이 또 우주법계는 난 거예요.
근데 이것은 수연성에서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해가지고, 불수자성수연성이에요. 자성을 안 지키고 인연 따라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도 나고, 법계니까, 태어나기 전도 법계 나고, 자신이고, 태어나서도 법계 나고, 젊어서도 법계의 나고, 늙어서도 법계의 나고, 죽어서도 법계의 나고, 나나 안 나나, 젊으나 늙으나, 법계 자신이 나니까, 다중의 일이니까, 많은 것 속에 하나니까, 근심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근데 왜 근심 걱정을 하느냐. 내가 바로 법계인 것을 일즉다, 하나가 많은 것임을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그걸 모르는 걸 미했다고 하거든요. 미해도 보통 미한 게 아니라 아주 꽉 미했다 이래요. 자신이 법계라. 나나 안 나나, 죽으나 사나 모두 법계이기 때문에 근심 걱정은 할 일이 없는데, 법계를 내 몸으로 집착한다. 이건 법계지, 내 몸이 아니여. 인연 따라 이루어진 법계단 말이예요. 근데 법계를 모르고 내 몸으로 집착을 하니까, 그 내 몸 집착에 의해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거예요. 이거 늙었어 그래. 법계 현상. 죽었어, 법계 현상. 태어났어, 법계 현상.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내 몸이다 하면 아이 내 몸이 늙으면 안 되잖아요. 근데 이거는 가르침이고, 실제 늙어보면 신경질은 나요. 왜 신경질은 나느냐. 뻔히 보이는데 마음대로 안 돼요. 뻔히 보이는데. 뭘 지나가다가 그냥 곧바로 씩씩하게 못 지나가고, 뭐 발로 물건을 툭툭 차더라고. 그리고 금방 한 것도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신경질 나는데 그게 법계 현상인 거예요. 내 몸으로 집착하고 절망하고, 내 몸으로 집착하고 괴로워하고. 그거는 미혹한 작용이에요. 미혹작용이라는 게 뭐냐. 컴컴할 때 어디를 지나가는데 귀신이 딱 나타났어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그래서 막 도망가다가 어두울 때 도망가니까 막 넘어지고 막 넘어지니까 다치고. 다치니까 아프고 이러잖아요. 근데 그 이튿날 귀신 본 데를 가만히 가서 보니까, 오래된 나무둥치였다고. 그게. 나무 둥치. 그 나무 둥치를 나무둥치로 봤으면 놀라지 않았을 거고, 안 놀라면 안 도망갔을 거고, 안 도망가면 안 넘어졌죠. 근데 이제 문제는 나무 둥치를 귀신으로 보는 순간, 그 귀신으로 봤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이 몸은 법계인데, 법계는 나무 둥치단 말이에요. 근데 이걸 내 몸으로 봤다. 이건 귀신으로 잘못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 하나 때문에 온갖 근심 걱정이 다 생겨요. 얼마 아니면 이 법계 현상이 사라질 건데, 그냥 그 좋게 보이려고 온갖 짓 다 하고, 참 신비해요. 신비. 옛날에는 젊은 사람 머리가 검고, 노인들은 머리가 희었는데, 요새 노인도 머리 흰 노인 별로 없어요. 다 새카맣게 해요. 새카맣게 관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리고 또 젊은 사람도 머리가 허옇게 하고 다녀요. 하얀 염색을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거 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냐고. 근데 아무리 그래 해봐야 이 법계 현상은 불수자성이라, 자성을 안 지키고 사라져요. 사라진다고.
起而不起 法界緣起 不起而起 法性性起
기이불기 법계연기 불기이기 법성성기
法界緣起 起起無起 法性性起 起起法性
법계연기 기기무기 법성성기 기기법성
불수자성수연성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극미묘라는 거는 어디에 처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변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거를 이제 화엄학에서 어떻게 정리를 하느냐. 법계 연기, 법성성기 둘로 정리를 하거든요. 온갖 모양이 이게 법계 현상이다. 법계 연기라고 하는 건 뭐냐. 하나하나가 인연 따라 다 이루어진 거지,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건 없다. 그 인연으로 이루어진 걸 연기라고 그래요. 인연 연자, 일어날 기자. 연기. 그러면 이 몸은 법계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이거예요. 이걸 그 법계 연기라고 그래요. 법계 연기. 법계 연기는 어떻게 됐냐. 기이불기(起而不起)라.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이게 핵심이에요. 법계의 모든 인연으로 이루어진 법계 연기는,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기이불기다.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게 아니다.
그럼 뭔 얘기냐. 다시 이걸로 돌아가서 얘기를 해보죠. 이게 일어났어요. 이게 법계연기인 거예요. 일어났는데 이거에 자성이 없어요. 흙뿐이에요. 그릇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설계자 설계한 내용뿐이에요. 그릇이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재료, 물감, 이걸 만든 사람 솜씨 요것뿐이지 이것 하나하나 걷어내면 이것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법계 연기는 기이불기다. 법계의 인연으로 일어난 것은 기이, 일어날 기자 말 이을 이자, 일어났으되 일어난 게 없다. 우리 몸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몸이 태어났는데 이걸 가만히 보니까 물하고 흙하고 불하고 바람하고 재료는 그런 거고, 만들기는 어머니 아버지가 만들었고 그렇잖아요. 그래가지고 태어났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지수화풍과 부모가 없으면 못 태어나요. 그런데 태어났어도 여기서 흙의 부분 뼈처럼 딴딴한 거 또 혈액, 물 부분, 체온 부분, 불, 숨쉬는 거, 바람 부분, 빼버리고, 어머니의 인연, 아버지의 인연 빼버리면 자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법계연기는 기이불기다.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색즉시공이라고 그래요. 색은 일어난 거고 공은 안 일어난 거예요.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이 몸을 위해서 근심하기 전에 이 몸 자체를 먼저 알아라. 귀신을 무서워서 도망가기 전에, 저 귀신이라는 작자가 진짜 있는 건가 그걸 먼저 보면, 나무통뿐이니까 두려울 거 하나도 없죠. 이러니까 진짜 굉장히 깊은 것 같아요. 이 깊은 속에 직접 들어가는 거를 법계 삼매라 그래요. 법계는 내 몸인데 이 깊게 깊게 눈으로 보지 않고, 지혜로 보는 것을 법계삼매라고 그러거든요.
근데 성기는 뭐냐? 법성 성기. 법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우주 만법이 있는데 만 가지 있는데 거기에 평등무위자성이 있어요. 평등해서 둘이 없는 자체 성격. 그 평등무위자성이 아무리 아무리 여러 가지로 변하고 이루어져도 그 평등무위 자성은 그대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일어난 것은 그 평등무위자성이 일어난 거다. 이걸 성기라 그래요. 그래서 연기 성기. 연기라고 하는 건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이 없다는 게 연기고, 성기는 모든 일어난 게 법성 자체가 일어난 거다. 이걸 성기라 그래요. 이게 법성이다. 평등 무위한 자성이다.
그래서 우주의 절대적 진리가 뭐냐. 이게 딱 주먹하나 해. 이게 평등무위자성이다. 어떤 분은 손가락 하나 딱. 이게 일어났는데 이게 자체가 없고, 평등무위한 자성이 일어난 거다. 근데 죽는 사람한테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그러면 눈을 이렇게 감고 그냥 쓰러져. 이 쓰러지는 게 바로 평등무위자성이 쓰러지는 거다. 지금 몸 죽는 것 외에 딴 데 가서 찾으면 그거는 중생의 고락인 거고, 또 수행자의 해탈인 거예요. 법계인과는 죽는 것 그 자체가 구경의 진리다 이렇게. 죽는 것 자체가 평등무위 법성의 나타남이지, 현상을 떠나서 법성이 없다. 이게 법성성기예요. 진리를 찾느냐 이걸 봐라. 그거 이제 그런 게 많아요.
어떤 사람이 출가해서 암자에서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하는데 불교를 한마디도 안 가르쳐줘요. 그래서 “아, 이제 답답해 못 살겠다”고, “난 딴 데로 가겠다”고 그러니까, “어디 갈래?” “나 불교 가르쳐주는 대로 가겠다”고. “그래 나한테도 불교가 조금 있는데.” “그건 뭐예요?” 이 옷에서 먼지 하나를 이렇게 들어서 휘 불어요. 이걸 포말이라 그래요. 이 베 포자, 벼라는 포목이라는 포자하고, 가루 말자가 있어요. 벼가루 포목가루. 이걸 딱 보이니까 그걸 보고 딱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 모두 보이는 거는 평등무위자성이구나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문자로 가르치고 무슨 말로 가르치는 것은 세속적인 방편이지, 실제로는 말 하나하나가 평등무위자성인 거예요. 그래서 이걸 성기라고 그래요. 자성이 다 일어난 거다. 자체는 없다. 근데 이거를 자체 자신으로 보고 이 모양을 자꾸 관리를 해요. 그러니까 관리하면 할수록 점점 불안해져 나무 토막을 귀신으로 보고 도망가면 갈수록 점점 무서워져요. 나무 토막 자체가 귀신이 없다는 걸 딱 아는 순간에 도망갈 일은 없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불기이기는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것은 이게 물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게 자성이 일어난 거다.
그래서 이게 물건은 일어남이 없다는 거죠. 불기이기. 일어남이 없이 일어난 것은 법성성기고, 일어났으되 일어남이 없는 것은 법계 연기다. 이게 화엄학의 핵심이에요. 화엄학은 이걸 공부하고 이걸 가르치고 이걸 깨닫는 거예요. 화엄경이 엄청나게 많지만 딱 이거예요. 법계연기 법성성기. 법계 연기는 일어났는데 일어남이 없다는 거예요. 일어난 속에서 가르치는 거고, 법성성기는 일어남이 하나도 없어, 그냥 법성뿐이야. 그 법성이 일어난 거지, 다른 거 일어난 게 없다. 그래가지고 의상조사 법성계 시작이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법성은 다 통해서 둘이 없다. 일어난 것도 법성이고, 안 일어난 것도 법성이고. 내 몸도 법성이고 다른 몸도 법성이고. 그래서 모든 게 일어난 게 법성이다. 둘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게송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에요. 옛부터 일어난 게 없다. 그 동자는 기는 동이라. 동은 기하라. 움직일 동자나 일어날 기자가 같아요. 옛부터 일어난 거 없는 것이 그게 바로 법성인데, 그걸 알면 중생이라고 안 하고, 부처라고 한다. 그걸 모르면 중생이다, 이렇게 돼요. 간단해요. 그러니까 이게 간단한 게 뭐냐. 이 몸이 모두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게 없다. 이러면 법계 연기고. 이 몸이 법성이다. 평등한 법성이다. 둘이 없는 법성이다. 그래서 몸이 일어난 게 아니라 이 법성이 일어난 거다. 이러면 법성성기예요. 그거 알면 끝나는 거예요. 그럼 근심 걱정할 일이 없어요. 이 법성이 일어나서 법성이 활동하고 법성이 늙고 법성이 아프고 법성이 죽는데, 무엇을 가까이하고 무엇을 멀리 하리오. 그냥 먹고 놀면 돼요. 이 몸이 법성신인데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내가 빠르게 법성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냥 법성신인데, 내가 이 몸이 법성신인 것을 몰랐을 뿐이에요. 법성신을 법성삼매에 딱 들어서 지혜로 깨달으면 그게 법성신이 된 거예요. 이걸 배운 대로 익힌 대로 내 몸은 내 몸이고 늙으면 안 되고 죽으면 안 되고 영원히 젊어져야 되고. 이게 진짜 웃기는 소리요. 법성의 모양이 한 모양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근데 인간의 욕심은 한 모양으로 고정되기를 바래요. 안 죽고 싶고, 그래서 제일 허풍 떠는 말이 “무병장수하소서.” 법성에는 이게 병도 법성인데 병이 있으면 어때요? 건강한 것만 법성이 아니에요. 불수자성이니까. “만수무강하소서.” 이런 참 근데 그 소리 들으면 또 좋더라고 또. 그게 그게 문제예요. 문제예요. “살 만큼 사셨으니 오늘 가시지요.” 그래 봐. 신경 그거. 아주 신경질 날 거예요. 그런데 “무병장수 하소서. 만수무강하소서.” 그러면 그게 뻔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좋아. 그러니까 사람하고 친해지려면 절대 옳은 소리하면 안 돼요. 무조건 그 사람 좋아하는 말을 해야 돼요. 옳은 소리 하면 큰일 나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대 얼굴이 아주 잘난 건 아니잖아.” 이따우 소리 했다가는 큰일 나요. 아주 큰일 나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그대 얼굴이 최고 이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얼굴이야. 이런 소리를 좋아하니까 사랑을 하려면 그런 것부터 배워야 돼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말만 해야지. 옳은 소리는 절대 하지 마라. 근데 나이가 든 부부들 보면 전부 옳은 소리만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문제가 되는 옳은 소리하면 안 돼요. 그냥 좋아하는 말만 해야 돼요. 이게 이제 중생의 집착하고 법성의 원리하고 틀린 거예요. 법성의 원리는 모든 게 법성성기니까 하나도 다른 게 없어요.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그래가지고 법성은 성기니 법성은 성이 일어난 것이니 법성 외에는 없다. 그러니까 기기가 법성이다. 일어나고 일어난 것이 전부 법성뿐이다. 이거 법계 연기는 기기가 무기다. 법계 연기는 일어난 것마다 일어난 것이 없다. 이봐요. 이게 법상이잖아요. 이 법상이 일어났는데 이게 뭐예요? 이게 나무뿐이지, 나무. 칠 뿐이고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는 거예요. 근데 법성성기는 이것 자체가 법성이 일어난 거다. 그거 얼마나 쉬워. 이 몸이 일어났지만 일어난 게 없는 거다. 그럼 법계연기고. 이 몸 자체가 법성원융무이상, 그 법성이 일어난 거다. 늙는 것도 법성이다. 죽는 것도 법성이다. 참 이게 기가 막히네. 이게 아주, 아주 기가 막혀요. 그래서 이게 이런 거를 이제 선지식들이 비유로 계속 가르치고 있는데, 향나무를 가지고, 향기가 진동하는 향나무를 가지고 조각을 해요. 그 향을 전단향이라고 하거든요. 전단. 전단. 향나무 이름을 전단이라고도 해요. 전단목으로,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하는데, 중생 모습도 조각을 해요. 또 여래 모습도 조각을 해요. 또 보살 모습도 조각을 하고, 전단목고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 그런데, 했는데 모양은 다 조각된 모양이 중생상, 여래상, 보살상 다 틀리잖아요. 이제 이게 일어난 거예요. 이게 일어났는데 그 조각한 자료를 보면 중생의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요. 여래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요. 보살 모습을 조각한 것도 향나무예요. 그래서 그 향나무를 법성으로 보는 거예요. 법성. 그리고 일어난 거를 그 모양 모양으로 봐요. 그 모양 모양이 일어났는데 그 모양 하나하나가 다 향나무이기 때문에, 전부 일어난 것마다 향나무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것마다 법성원융무이상 그 법성이 나타난 거다. 그러니까 견성을 해라. 그 법성을 봐라. 이거거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