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백중 기도라. 백중 기도라. 백중 기도는 선망조상(先亡祖上), 또 생존 후손, 선망조상과 생존 후손이 모두 생사해탈(生死解脫), 생사에서 해탈해서 극락왕생(極樂往生), 극락왕생을 이루는 것이 백중 기도입니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실유불성(悉有佛性)하니 묘체원명(妙體圓明)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여. 수신생령(受身生靈)이오, 이신혼령(離身魂靈)이나 수연불변(隨緣不變)의 신령불성(神靈佛性)이여. 근진(根塵)에 무애(無礙)하고 묘용(妙用)이 자재(自在)하니 보방금색(普放金色)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이여. 수광(壽光)이 무량(無量)하고 수처(隨處)에 현신(現身)하니 상방광명(常放光明)의 아미타불이여.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이 뭘 깨달았느냐, 부처님이 뭘 깨달았느냐, 이렇게 입술에 딱 붙이면 되는 거야. 부처님이 도대체 뭘 깨달았나?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생사는 없다, 나고 죽는 것은 없다, 이거 깨달았어요. 생사가 없다, 생사본무(生死本無), 나고 죽는 건 본래 없다, 이거 깨닫고. 그다음에는 불성원명(佛性圓明), 불성은 둥글고 밝다, 둥글 원(圓) 자, 밝을 명(明) 자, 그걸 깨달은 거예요. 생사는 본무하고 불성은 원명하다, 둥글고 밝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알았는데 다만 범부(凡夫) 중생들은 모를 뿐이라는 거지, 모를 뿐이다. 몰라도 생사가 두 배로 있는 게 아니라 없어요, 없는 걸 느낄 뿐이에요. 그러면 부처님에게는 생사가 없는데 미혹한 범부들에게는 생사가 있다. 그래서 생사는 부처님에게만 없지, 범부에게는 생사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사해탈이라 그래요. 생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럼 그게 뭐와 같으냐. 꿈에서 깬 사람은 꿈이 없는데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어요. 그 차이뿐이에요.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이 있고, 꿈 깬 사람에게는 꿈이 없다. 그러니까 생사가 있다는 말도 맞아요, 생사가 없다는 말도 더 맞아요. 그래서 생사 없는 불성 법문, 생사 없는 불성 법문, 꿈이 없는 본래 사람, 꿈에서 벗어나려면 잠에서 깨면 돼요. 잠이 없으면 꿈은 본래 없어요. 그래가지고 생사 없는 불성 법문을 계속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꿈꾸는 사람마다 꿈이 없는 본래 사람이 있어요. 꿈으로 그걸 모를 뿐이야. 그래서 꿈꾸기 이전에 본래 사람을 불성(佛性)이라 그러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 무명(無明)이라 그래요. 꿈이 없는 것을 밝게 보지 못한다, 밝음이 없다, 무명. 그래가지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실유불성(悉有佛性)하니. 일체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 그러니 불성은 뭐냐, 묘체(妙體)가 원명하다. 이 불성은 묘체요, 묘체. 안이비설신의처럼 이렇게 보이고 들리는 게 아니고요, 생로병사(生老病死)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허공의 메아리처럼 보려고 하면 없는데 항상 그 속에 있다. 허공처럼 허공은 붙잡으려면 없는데 도망갈 수가 없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게 허공인 것처럼 불성(佛性)도 붙들려고 하면 안 붙들리는데 불성은 도망갈 수가 없다. 그래서 묘체(妙體)가 원명(圓明)하니 그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그런다.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은 생멸(生滅)이 없다, 이걸 진여라 그래요. 나고 죽는 게 없는 걸 참 그대로 항상 한다, 참 진(眞) 자, 같을 여(如) 자. 참 그대로 항상 한다.
불성인데 불성은 ‘불(佛)’은 각(覺)이라, 느낀다. 느끼는데 눈으로 느끼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느끼는데, 불성은 대상이 있거나 없거나 항상 느껴요. 그걸 느끼는 본성이다, 이래 가지고 불성이라 그래요. 불은 느낀단 말이고, 성은 대상 없이도 항상 느낀다. 이게 뭔 말이냐, 우리 귀가 있는데 이 귀는 항상 느껴요. 어떻게 항상 느끼냐, 소리가 날 때는 소리를 느끼고, 소리가 안 날 때는 그 소리 안 나는 조용한 걸 느껴요. “아무것도 안 들리네” 하는데,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걸 누가 아냐? 들어서 아는 거거든요. 항상 느껴요. 그래서 느끼는 본성이다, 그걸 불성이라고 그래요. 느끼는 본성. 진여불성인데 이 진여불성이 수신(受身)에는 생령이요, 몸을 받아서 이렇게 살아갈 때는 살아 있는 영이다. 살아 있는 영, 그래서 그걸 생령이라고 그러는데.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작용을 일으켜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산 사람에게는 누구나 똑같은 게 있는데, “뭐 하고 살았냐?” 아주 기본적으로 똑같은 게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이거는 벗어날 수가 없어요. 첫째, 숨 쉬고 살았다. 사는 게 뭐냐 이런 말 묻는데 아주 이상한 소리예요. 사는 건 숨 쉬는 거예요. 그건 물어볼 것도 없어요. “지금까지 뭐 했어?” 숨 쉬었어, 끝이지. 그다음에는 옷 입는 거예요. “뭐 했어?” 옷 입었어. 호흡하고, 착의하고, 그다음에 뭐 했어? 밥 먹었어. 그다음에 뭐 했어? 자. 숨 쉬고, 옷 입고, 밥 먹고, 그다음에 똑같이 한 게 있는데 뭘까요? 잠자고, 수면. 잠잤지. 그다음에 또 똑같이 하는 게 있어요. 뭘까요? 맞아, 그걸 어려운 말로 변리(便利)라 그래요. 변리, 변을 보면 몸에 이롭거든. 그래서 변(便) 자, 이(利) 자, 변리라고. 대소변리하고, 대변리, 소변리. 이거는 이 몸을 가진 중생들에게 누구나 똑같이 겪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을 가진 후로는 불성이 이걸 엄청나게 잘해요. 살아 있을 때는 살아 있는 대로 공덕 작용을 잘 일으켜요. 그다음에 이신(離身)을 할 때, 몸을 떠나서는 불성이 생령이라고 안 하고 그걸 혼령(魂靈)이라고 그래요. 혼령. 혼으로만 움직여요. 몸으로 숨 쉬고 밥 먹고 이렇게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혼령이 가만히 못 있고 어딘가 계속 가려고 그래요. 혼령은 움직여. 그런데 생령(生靈)으로 있으나 혼령으로 있으나 인연을 계속 따라서 움직이지만, 불성은 불변(不變)이에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라, 인연을 따르지만 변하지 않는다. 그래가지고 이걸 아무리 오래오래 태어나고 여러 번 죽어도 불성은 변하는 법이 없어요.
인연을 아무리 많이 따라도 불변(不變)이라. 그래서 이걸 신령불성(神靈佛性)이다. 신통(神通)이라는 신(神) 자, 신령하다는 령(靈) 자, 신령한 불성이라고 그런다. 생멸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신령스러운 신령불성. 이걸 사람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귀로 들을 줄 알고, 눈으로 볼 줄 알고, 밥 먹을 줄 알고, 잠잘 줄 알고, 움직일 줄 알고, 이게 신령불성이요. 아무리 이걸 해도 불성은 변하는 법이 없어요. 그게 수연불변(隨緣不變)이요.
그런데 신령불성이 잘 인연을 지으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돼요. 아미타불은 수명이 무량하고 광명이 무량하다, 이 수광무량(壽光無量)을 아미타불이라 그래요. 그럼 아미타불은 어떻게 되냐. 근진(根塵)의 무애(無礙)하고, 몸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 있는데 또 육근에는 하나하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대상 티끌이 있어요. 그런데 이 신령불성은 몸의 육근이나 대상 육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아요. 이걸 근진의 무애라 그래요. 보는 데 구애를 받지 않고, 듣는 데 구애를 받지 않고, 근진의 무애하고. 또 묘용이 자재하니 그냥 보려면 보고, 안 보려면 안 보고, 가려면 가고, 오라면 오고, 묘한 작용이 자재하니 보방금색(普放金色)이다. 금색은 광명인데 금빛. 널리 널리 광명을 비추는 아미타불이다. 또 수광이 무량하고, 수명과 광명이 한량없고 처처에 현신하니, 곳곳에 몸을 나타내니 상방광명(常放光明) 아미타불이라. 항상 광명을 비추는 아미타불이다. 그래서 이 불성이 아미타불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신령불성하고 아미타불하고 진여불성하고 아미타불하고 어떤 관계가 있나. 비유로 말하자면,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요만한 씨앗이 하나 있는데 그 씨앗을 땅에 심었을 때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그래요. 아미타불(阿彌陀佛)은 그 씨앗이 흙 속에서 뿌리가 나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나고 이파리가 나고 꽃이 피어서 마지막에 열매가 맺어서 영글어서 다 익은 그 열매를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그래요. 그런데 이게 종과(種果)가 일체(一體)라. 종(種)이라는 거는 종자인데, 땅에 심은 걸 말하고, 과(果)라고 하는 건 과일인데, 나무 꼭대기에서 열리는 걸 말해요. 그런데 종자 심어서 가꿔 가지고 나무 꼭대기에서 열매를 거두면 본래 심었던 종자와 똑같다, 하나도 다름이 없다 이 말이다. 그래서 범부(凡夫)로 있을 때는 불성(佛性)인데 성불(成佛)하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에요.
그래서 조상을 천도(薦度)하고 후손을 천도(薦度)하고 생사(生死) 해탈에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고 하는 게 전부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그 불성을 가지고 생사는 없고 불성은 둥글고 밝다. 이걸 하나 탁 보는 순간에 다 해결되는 거예요. 그걸 기도라고 그래요. 생사는 없다, 생사는 본무(本無)하다, 불성은 둥글고 밝다. 둥글다는 건 없는 데가 없다. 밝다는 건 항상 빛난다. 세월이 없어요. 세월이.
생시일진청풍기(生時一陣淸風起)요. 멸거징담월영침(滅去澄潭月影沈)이니 생멸거래무괘애(生滅去來無罣礙)라 진신면목(眞身面目)을 갱하심(更何尋)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그 전에 큰스님, 선지식, 도인들께서 제사를 지낼 때 “생사는 없고 불성은 둥글고 밝다” 이런 말씀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게 어떤 내용이냐 하면 불성을 떡 깨닫고 보면 생시에는 태어날 때는 생시에는, 태어날 때는 일진청풍기(一陣淸風起)요. 한 무더기 바람이, 일진이라면 한 무더기거든. 한 무더기 맑은 바람이 싹 불어서 일어나는 거와 같고. 또 멸거징담월영침(滅去澄潭月影沈)이라 이제 생명이 다해서 몸이 흩어져서 돌아가는 것은, 멸거는, 징담에, 맑은 징(澄) 자가 있고 연못 담(潭) 자가 있는데, 맑은 연못에 월영(月影), 달 그림자가 이렇게 비췄다가 그림자가 사라지는 거와 같다, 잠길 침(沈) 자. 태어나는 건 맑은 바람이 한 번 쒸익 일어나는 거와 같고, 죽는다는 것은 연못 속에 달 그림자가 비춰지다가 사라지는 거와 같다.
생사 없다는 얘기죠. 없어. 불성만 항상 한다는 얘기지. 그래가지고 생멸거래무괘애(生滅去來無罣礙)라. 나고 죽고 오고 가고 하는데 아무 장애가 없다. 바람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달빛이 비치든 안 비치든 아무 장애가 없다. 그러니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거, 그걸 싹 보면 그게 바로 불성이지, 생사를 떠나서 따로 불성을 찾을 필요가 뭐가 있나. 생사를 똑바로 봐라. 생사를 똑바로 보면 생사는 없고 불성만 밝다, 이렇게 제사를 지내요.
그래서 유가법(儒家法)으로 하면 제사는 추모(追慕)요, 추모. 부모님을 돌이켜서 생각하는 게 제사인데. 불교 제사는 천도(薦度)요. 불성을 깨우쳐서 생사에서 벗어나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도록 하는 게 불교의 제사인데, 그걸 시식(施食)이라고 하고, 음식을 베푼다고, 천도(薦度)라고 그래요. 영혼을 인도한다고. 천도.
일념망시명료료(一念亡時明了了)하면 미타부재별가향(彌陀不在別家鄕)이로다. 통신좌와(通身座臥)가 연화국(蓮華國)이니 처처(處處)가 무비극락당(無非極樂堂)이로다.
이 법문은 고려시대에 나옹(懶翁) 스님이라고 큰 도인 스님이 계셨는데, 그 나옹 스님 법문인데, 한 생각, 한 생각은 성심일념(性心一念) 연심일념(緣心一念). 성심(性心)은 본래, 본래 있는 마음. 너무 좋아가지고 이제 그냥 목이 다 막히고 그냥. 불성 얘기가 얼마나 좋으면 목이 다 막히겠어요. 한 생각은 성심일념이 있다. 본성 그대로 항상한 한 생각이 있다. 또 연심일념이 있다. 눈으로 보면 그 보이는 거를 분별하고, 보이는 것을 관찰하는 한 생각이 있다. 이거는 반연하는 마음이라고, 연(緣)은 쫓아간다, 쫓아가는 마음이라고 해서 인연 연(緣) 자, 마음 심(心) 자, 연심일념이라 그래요. 근데 이 생사는 연심에서 오는 거예요. 쫓아가는 마음에서 생겨. 쫓아가는 마음이 본래 마음으로 싹 돌아가면 본래 바람이 뭐냐, 바람은 없고 공기뿐이거든. 그래서 바람이 공기로 돌아가면 바람은 없어요, 공기뿐이야.
그래서 이 꿈을 꾸는데, 잠자서 헛것 안 보면 꿈이 없어요. 그러니까 한 생각이 잊을 망(忘) 자, 때 시(時) 자, 다른 잡념 망상이 다 없을 때, 잊었다, 없다 이거야. 이거 뭐 생각을 끊는다 그러는데 끊는다는 건 톱으로 뭘 끊고 칼로 뭘 끊고 그런 걸 끊는다고 그러는데, 그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은 그냥 생각 안 하면 돼요. 톱 안 가져도 되고 칼 안 가져도 되고, 그냥 생각 안 해버리면 돼요. 그걸 잊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이 전혀 없을 때, 그냥 본래 생각만 환히 비추면 그게 둥글고 밝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인데, 한 생각이 다른 잡념이 없을 때, 그럼 여기서 또 다른 잡념은 없는데, 꾸벅꾸벅 존다.
그러면 그것도 시원찮아. 없을 때 명료료(明了了) 하면, 아주 밝고 밝으면. 밝을 명(明) 자가 있고, 밝을 료(了) 자가 있는데, 명료료라. 료료하면 미타부재별가향(彌陀不在別家鄕)이라, 아미타불이 별가향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별(別) 자, 집 가(家) 자, 고향 향(鄕) 자인데, 집 가 자는 어조사고, 고향 향 자는 장소라는 말인데, 아미타불이 다른 장소에 있는 게 아니다. 한 생각이 딱 잡념이 없어져서 밝고 밝으면 아미타불이 다른 장소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어디 있냐? 우리 몸에도 있고, 보이는 데도 있고, 들리는 데도 있고,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온 천지에 아미타불뿐이다. 이게 나옹(懶翁) 스님 법문이에요.
미타부재별가향이라 그러면 어떻게 되냐. 통신좌와(通身座臥)가 연화국(蓮華國)이니, 통신이라는 건 온몸, 좌와는 앉고 눕고, 온몸이 앉고 눕고 하는 이 움직이는 것이 연화국(蓮華國)이라는 것은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이지. 다 극락세계다. 그러니까 처처무비극락당(處處無非極樂堂)이라, 처처에 극락당 아닌 곳이 없다. 이게 이제 나옹 스님 법문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불성이 맑아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밝아져서 아미타불이 떡 되면, 우리 몸도 극락세계고, 눈으로 보이는 것도 극락세계고, 귀로 들리는 것도 극락세계다. 이 법문을 이제 나옹 스님이 하신 거예요. 이 법문이 워낙 좋으면 잠자리까지 들어와서, 잠자리까지 들어와서 법문 듣는다고. 아, 기가 막히네, 기가 막히네. 불성이 청정하면 아미타불이에요.
자성미타(自性彌陀) 하처재(何處在)요, 시시염념불소망(時時念念不須忘)이로다.
막연일일여망억(驀然一日如忘憶)하면 물물두두불부장(物物頭頭不覆藏)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 법문은 조선시대 서산 스님 법문인데, 자성미타(自性彌陀)라는 우리 불성 아미타불. 이 땅에 심어진 종자 열매, 이 종자를 가꾸면 열매를 따는데, 그 따고 보면 심었던 종자 그대로다. 그게 우리 불성 아미타불이다. 그걸 자성미타라고 그래요. 불성 아미타불이 하처재(何處在), 어느 곳에 있는고. 시시염념불소망(時時念念不須忘)이라, 때때로 생각 생각 모름지기 잊어버리지를 마라. 이 불성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고.
정근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 부처님 명호 한 번 부를 때, 그 소리에 집중을 하게 되면 거기에 아미타불이 나타나요. 근데 이제 나타날 때는 사람마다 다 다른데, 눈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눈이 번쩍 뜨일 때가 있어요. 그거 이상해요. 번쩍 뜨일 때는 눈에서 불이 확 나는 거라. 그러면 지금까지 보던 건데 전혀 다른 걸 보게 돼요. 지금까지 그릇을 봤는데, 눈에서 불이 확 나면서 보여질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여져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전부 물건을 쫓아가서 봤는데, 눈에서 불이 나서 볼 때는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이 나타나서 본다. 그 차이예요. 쫓아가서 보는 건 생사(生死)고, 나타나서 보는 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에요. 이제 나타나서 보면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인데, 그걸 비유로 말하면 어떻게 되냐. 늘 나그네 생활만 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고향 산천을 본 거예요. 그러면 고향 산천 뒷동산 넓기도 하구나. 그걸 느끼는 거와 같은 거예요.
기도는 그 방향으로 다 끌고 가는 거예요. 연심(緣心) 생사에서 성심(性心) 고향으로 인도해 가는데, 그게 극락세계(極樂世界)고 그 고향을 보는 것이 아미타불이에요. 그걸 백중기도(百中祈禱)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알든지 모르든지 기도 열심히 하면 다 그리 가요. 알아도 가고, 몰라도 가고. 그전에 큰스님 법문하면 참 재밌는 법문 많이 했는데. “아주 좋은 보약은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다.” 보약은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다. 그 보약의 성분을 어떻게 다 알고 먹을 거여. 그럼 왜 먹냐, 이거 먹으면 몸에 좋다고 하니까 그거 믿고 먹는 거지, 알고 먹을 수는 없어요. 의사도 그 보약 성분을 다 알 수가 있나. 의사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 알아. 믿고 먹으면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한다는 게, 모르고 해도 믿고 하면 몸이 먼저 성불을 한다니까, 몸이 먼저 알아채요. 그래서 몸이 이상해져요. 가벼운 것도 같고, 흔들리는 것도 같고, 바람이 슬 일어나는 것도 같고, 반응이 몸부터 와요. 희한한 게 몸이에요.
그래가지고 고향 산천을 보기 전에, 눈에서 불부터 나. 이 몸 반응하는 거지. 그러면 그 보는 게 아미타불이고, 그 아미타불이 계신 곳이 전부가 그게 극락세계다. 이게 이런 법문이에요.
응심(凝心)하야 일몰(日沒) 사사바(謝娑婆)에, 십육관경청석가(十六觀經聽釋迦)로다. 무한성색(無限聲色)이 청이목(淸耳目)하니, 허다천지일미타(許多天地一彌陀)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마음을 한 군데 딱 모으는 걸, 이걸 엉킬 응(凝) 자, 마음 심(心) 자, 응심이라고 그러는데. 마음을 모으면 생사(生死)는 없어요. 마음만 딱 모으고 있으면 공포가 없어, 두려움이 없어요. 마음이 움직이니까 두려움이 있는 거예요. 응심을 해서 마음을 딱 모아서 일몰(日沒)하고. 이 일몰이라는 건 해가 지는 건데, 이 목숨이 다하고 이 말이죠, 해 진다는 말은. 사사바(謝娑婆)에, 이 몸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하직할 적에, 이 세상은 이제 몸이 흩어져서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십육관경(十六觀經)으로 청석가(聽釋迦), 십육관법에 의해서 석가모니(釋迦牟尼) 설법을 듣는다.
그러면 응심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전부 마음이 나타나는 거기 때문에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 마음 밖에 물건이 없다. 그런데 유물생념(由物生念)이라, 물건에 의해서 생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물건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이걸 가지고 사는데, 이 물질과 생각은 다 기본 성심(性心)에서 나온 거다. 되게 어렵네요. 진짜 어려워요.
물질이 있고, 그 물질을 판단하고 기억하고 처리하는 생각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 물질과 생각은 기본 성심(性心)에서 다 나온 거다. 이걸 성심, 물질, 생각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 물질과 생각은 다 성심에서 나온 거다. 성심이 없으면 물질이 없어요. 못 봐. 물질을 못 보면 생각이 안 일어나. “저 사람 뭔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는데, 그 궁금할 거 하나 없어요. 사람 생각, 아니면 물질 생각, 아니면 자기 몸 생각 이 세 가지뿐이에요. 그거 궁금할 거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생각이 머무는 곳은 전부 밖의 것에 머물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거 가르쳐주면 안 되는데, 이게. 아들 생각, 가족 생각, 이게 전부 사람 생각 아니에요. 그 생각은 밖으로 안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본 마음에 의해서 물질이 일어나고, 물질에 의해서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물질과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럼 이 기본 성심이 생각을 딱 멈추고 있으면, 물질에 안 쫓아가니까 생각이 움직이질 않아요. 물질에 쫓아갔을 때 생각이 움직이고, 생각이 움직였을 때 두려움이 생겨요. 생각을 거둬버리면 두려움 없어요. 이런 것도 말해주면 안 되는데, 이거예요.
그러니까 “아, 저거 무섭다” 그래서 저 보이는 걸 쫓아가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섭다”하는 생각을 딱 걷어버려요. 그러면 두려운 거 없어요. 이걸 그래서 응심(凝心)이라 그래요, 응심. 마음을 거둬서 뭉친다고. 뭉칠 응(凝) 자가 있어요. 그러면 이 몸이 죽을 때, 이 몸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떠날 때, 다 이게 관법(觀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설법을 듣게 된다.
그러면 무한성색(無限聲色)이, 무한히 눈으로 보이는 거나 귀에 들리는 거나,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자기 고향 산천이요. 이거를 이런 물질을요, 이걸 생각으로 분별하면 이게 이제 물질이고 티끌인데, 생각으로 분별하지 않고 자기 본래 마음으로 딱 보면, 이것이 자기 고향 산천이다. 이걸 깨달아서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선지식(善知識)들이. “산하대지(山河大地), 우주만물(宇宙萬物)이 자기 고향 산천이다.
그런데 이걸 쫓아가면 내가 나그네가 돼가지고 거기 헤매고 다녀요. 이걸 생사윤회(生死輪廻)라고 한단 말이죠. 그래서 무한성세계(無限聲世界), 눈으로 볼 때마다 자기 고향 산천이니까 자기 눈이 맑아져, 또 귀로 들을 때마다 자기 고향 산천이니까 자기 귀가 맑아져. 그걸 청이목(淸耳目)이라 그래요. 이목을 맑힌다. 그러니까 허다천지(許多天地)가 일미타(一彌陀)라, 허다한 하늘과 땅이 한 아미타불뿐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허다천지일미타, 아미타. 허다(許多)라는 건 많고 많다 이 말이죠, 허다라는 건. 천지(天地), 하늘과 땅, 많고 많은 하늘, 많고 많은 땅이 전부 한 아미타불뿐이다. 이 법문은 조선시대 서산 스님이 하신 법문이에요. 모든 도인들이 “생사는 없고 불성은 둥글고 밝으니, 이 둥글고 밝은 불성에 딱 마음을 모아서 들어가면, 허다한 하늘 허다한 땅이 전부 아미타불 극락세계뿐이다” 박수와 함께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