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백중기도] 7월5일 백중기도 입재 법문 2021-07-05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느 때보다도, 올해 백중은 입재를 맞이하면서 다른 해보다도 좀 더 진중해진다고 해야 하나요, 마음이 좀 무겁게 입재를 임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솔한 마음으로 백중 입재를 하고, 우리가 회향할 때쯤 되면 코로나가 진정으로 집단 방역이 와서 누구나 다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가 있는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 코로나라고 하는 이런 전염성 바이러스는 전 인류가 다 같이 잘해야 돼요. 이 바이러스가 진화를 해요. 변이라고 하는데, 변이바이러스, 환경에 맞춰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진화해요. 마치 우리의 마음이 욕망을 따라가면 그 욕망에 좀 더 좀 더 물들어서 커지듯이 바이러스도 그런 거 같아요.

 

      백중 입재를 맞이해서, 백중이란 말은 불교 말로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 합니다. 우란분이란 말은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말이에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거꾸로 매달려있다>라는 것은 목련존자의 이야기입니다. 목련경에서 유래된 이야기인데, 목련존자의 어머니에서 유래된 이야기이지요. 근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은 한 번도 거꾸로 매달려 본 적이 없잖아요. 거꾸로 매달리면 안 됩니다.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있어요. 혹시라도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운동기구 중에 거꾸리라는 게 있어요, 발을 걸쳐 머리가 땅으로 가는 거. 그거 5분만 하고 계셔 보세요. 피가 몰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되지요. 그런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5, 10분이 아니라 계속 반복이 된다면 그 고통은 끝이 없겠죠. 무간(無間)의 고통이에요. 정말 사이가 없는, 정말 쉴 사이 없이 고통을 받는 과보인데, 혹여라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런 어려운 인연에 닿아 있는 부모님이 계시다면은 이 백중을 맞이해서 그것을 해원(解冤)하는, 맺힌 마음을 풀어내는 그런 의미 있는 불교의 5대 명절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 워낙 자리를 잡아서,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 날 가장 많이 절에 오지만, 우리가 농경사회, 1970년대에는 이런 백중이나 동지나 입춘, 이때 절에 많이 왔어요. 그때보다는 지금 신도들이 좀 더 불교적이고 좀 더 세련된 거지요. 뭔가 아는 불자들인 거죠. 옛날에는 민속신앙과 결합이 되면서 백중이란 걸 굉장히 크게 봤습니다. 본래 백중은 음력으로 715일인데, 오늘이 입재니까요, 음력 715일인 822, 일요일 오전에 우리 진관사는 회향을 하는데, 백중은 백종(白踵)이라고도 불렀어요, 백종, 흰 백자에 발뒤꿈치 종자를 써서 발뒤꿈치가 하얘진다’, 이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더 이상 논에 들어갈 일이 없다.’ 옛날에는 농사를 다 지었으니까. 발뒤꿈치에 논 흙이 묻을 일이 없는 거예요. 이제 백중이 지나게 되면 모든 자라던, 성장하던 나무나 풀들이, 위로 오르던 물들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결실을 맺는 거예요. 열매가 단단해지기 시작해요. 벼도 익고 과실도 익고 그래요. 논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까 발뒤꿈치가 하얘진다고 해서 백종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불교적으로 와 가지고는 백중(百衆)이 되었죠. 백 명의 대중을 모시고 부모님의 무문(無門)갈래에 가시기를 염원하는 거잖아요. 또는 백 가지 음식을 차려 가지고 백 명의 스님을 모시고. 그래서 백중은 다른 말로는 스님들에게 수행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공양을 내는 날이기도 해요. 요즘에는 백중 회향을 승보 공양의 날이다, 그래서 삼보 중에 스님들에게 공양 내는 날이다, 이렇게 또 새로운 신행 문화가 움트기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찰에서 그렇게 행사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 백중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목련존자로부터 출발했다 말이에요. 목련존자가 견성을 하고 삼매에 들어보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어머니였어요. 어머니의 지중함은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지극한 거거든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좀 일찍 여의었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 여의었는데, 올해가 40년 됐어요. 그래서 40년째 뭘 해드리면 좋을까 하다가 이만하게 그림을 그려 가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 사진이 바래면 못 쓰니까 이만하게 진영을 하나 그려 가지고- 법당에 모셔놨어요. 40년 기념으로. 잘 했지요. 딱 모셔놓으니까 뭔가 그래도 생전에, 내가 어렸을 때 못 했던 은혜 갚음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스스로가 들더라고요. 물론 학인 때는 못 했지만, 소임 살면서는 제가 늘 어머니 기제사를 모셨고, 백중 때도 늘 동참해서 모셨어요. 그렇게 부모님에 대한 마음은 승속을 떠납니다. ‘스님들은 출가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없겠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역대의 큰스님들도, 진묵스님이나 우리가 잘 아는 경허스님도 견성을 하고 어머님을 모셔다가 같이 생활을 했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부모님, 선망부모에 대한 지극한 마음은 출가자나 출가자 아닌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 무게는 똑같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목련존자도 이렇게 마음이 열리고 나서 어머니가 어디 계신가 보니까 어머님이 나쁜 갈래에, 춥고 어둡고 그런데 가 계신 거예요. 보니까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그때 마침 막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어머님이 살아생전에 불교의 인과나 윤회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었어요, 다른 믿음을. 그래서 다른 수행자라든지 다른 마음 닦는 사람들을 잘 대우하지 않고 좀 심술을 부린 거 같아요. 놀부 심보가 있었다고. 탁발을 하러 오면, 공양을 얻으러 오면 흔연하게 주는 게 아니라 좀 괴롭히기도 하고. 마음이 우란분이었던 거 같아요. 거꾸로 되어있었던 거 같아. 우리도 가끔 심술 날 때 있잖아요. 사촌이 땅을 산다든가 옆집이 아파트를 넓혀서 이사를 간다든가 좋은 차를 산다든가 하면 약간 좀 거시기하잖아요? 어머니도 그렇다 보니까 나쁜 갈래에 빠져있는데 어머님이 거미줄을 잡고 막 올라오는 거예요.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니까 살아생전에 길을 가다가, 급하게 길을 가다가 딱 멈춰가지고 거미를 밟을 뻔했던 거예요. 근데 그걸 잘 발견해 가지고 거미를 밟지 않고 잘 지나친 거예요. 그냥 지나쳤는데 거미를 살려주려고 지나친 게 아니라 신발에 묻을까 봐. 차이가 있어요. ‘거미를 살려줘야 되겠다,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이게 아니라 , 거미를 밟으면 내 신발이 지저분해지는데하면서 안 밟은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거 자체가 공덕이 돼서 거미를 살려준 공덕으로 거미줄이 내려온 거예요. 그래서 그걸 타고 올라오는 거예요. ‘, 어머니는 이제 조금 나쁜 갈래에서 벗어나는구나.’ 하고 있는데 밑에, 나쁜 갈래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 거미줄을 잡고 막 같이 올라오는 거예요. 거미줄이 끊어지겠어요? 안 끊어지겠어요? 그건 몰라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땐 끊어질 거 같지만 모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어머니 마음에 불안한 거예요, 끊어질까봐. 그래서 냅다 올라오는 사람을 발로 찼어요. 옆으로 떨어질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떨어지면서 그 반동으로 거미줄이 똑 떨어져 버렸네. 그래서 올라오다가 다시 나쁜 갈래로 떨어져 버린 거예요. 그때 목련존자가 , 나의 공력으로는, 나의 힘으로는 어머니를 무문 갈래로 인도할 수가 없겠구나.’ 해서 어머니를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좋은 갈래로 가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가서 우리 어머님이 좋은 갈래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게 되지요. 그러면서 우란분경이 형성이 되고, 그게 유래가 돼서 우란분재, 백중이 우리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겁니다. 그만큼 목련존자는, 어떻게 보면 신통제일, 10대 제자 중에 신통제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효행제일인거 같아요, 효행제일.

 

      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전원일기 아시죠? 2021이라는 전원일기 프로그램을 했어요. 거기에서 너무 오랜만에, 우리 어렸을 때 전원일기 안 보고 자란 사람 없을 거예요. 그 전원일기를 올 해 출연진들을, 최불암씨, 김혜자씨 등 다 출현을 시켜서 다시 하는데, 제가 보다가 눈물샘이 터져 가지고 펑펑 울었어요. 어떤 장면에서 제가 눈물이 터졌냐 하면, 김회장 댁에, 최불암씨가 김회장이잖아요, 전화기를 새로 놓은 거예요. 옛날엔 전화 처음 놓으면 얼마나 희안합니까. 며느리들도 막 와서 자기 친정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는 거에요, 며느리들이. 반가워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전화기를 딱 놓고 머리맡에, -옛날엔 안방에 전화기를 놨어요, 왜냐하면 밖에 놓으면 쓰니까 못 쓰게 하려고,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머리맡에 전화기를 딱 놓고 자는데, 김혜자씨가 자다가 일어난 거예요. 일어나서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그리고는 전화기를 듭니다, 누운 상태로. 전화기를 들어서 거기 우리 엄마 좀 바꿔주세요. 우리 엄마는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우리 엄마는 이런 옷을 입고 있고...’ 이렇게 혼자 이야기를 해요. ‘우리 엄마한테 시집간 딸이 잘살고 있다고 꼭 좀 전해주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최불암씨가 옆에서 깼어요, 중얼중얼하니까. 최불암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잠꼬대하냐고 그래요. 잠꼬대가 아니라 진짜 엄마가 보고 싶은 거죠. 이제는 나이도 들고 자식들도 다 결혼하고 나니까 어머님이 더더욱 생각이 나고, 본인도 나이가 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어머니, 시집올 때의 어머니가 생각이 나 가지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막 울어요. 전화기를 놓고는 김혜자씨가 뭐라고 하냐 하면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바라는 거는 우리 엄마가 추운데 안 계셨으면 좋겠다.’ 추운 데가 뭐예요? 나쁜 갈래거든요. 추운 거만큼 힘든 게 없잖아요. 배고프고 추운 거만큼 견디기 힘든 건 없어요. 추위는 어떻게 피할 데가 없어요. 더위는 그늘이나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좀 피할 수 있지요. 근데 추위는 정말로, 배고프고 추운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 지극한 마음에 동화가 돼 가지고, 동기화가 되어 전염이 되어 나도 모르게 TV를 보면서 늦깎은 비구가 휴지를 가지고 눈물을 닦으면서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디 가서 이 얘기를 한 번 더 했는데, 신도들이 막 울더라고요. ‘왜 우느냐?’고 그러니까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 누구나 다 가슴에는 그런 그리움들이 있는데, 그리움들을 잘 해원해야 하는데, 그리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미운 그리움도 있고, 진짜 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거든요. 지금 어머님의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하더라도 그 부모님과 관계가 정말 좋은 부모 자식간이 있는가 하면은, 부모님과 관계가 영 좋지 않은 자식도 있거든요. 백중이라고 하는 것은 선망부모, 돌아가신 분도 천도를 해야되지만, 지금 내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살아계신 부모님과도 이 49일 동안에, 혹여나 관계가 좀 소원하다면 그 소원한 관계를 해원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된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에 해원하고 헤어져야 돼요. 우리가 재를 지내거나 내지는 기념일이 되어 제사를 모실 때 정말 매해, 제가 절에서 기제사를 지내다 보면은, 매해 제사 때마다 우는 분들이 계세요. 특히 딸들이 좀 그래요. 물론 정이 많고 속정이 깊으니까 그렇겠지만. 그런데 그 우는 딸들을 보면 뭔가 아쉬워. 뭔가 남아있어요. 좀 더 잘해드릴걸. 좀 더 내 마음을 표현할걸. 이런 생각들이 있단 말이에요. 돌아가시고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살아있을 때 해야 되는데, 백중이라는 것은 그런 1차적인 의미가 있는 거고요.

 

      두 번째, 백중을 지내야 되는 의미는, 작년에도 지냈잖아요, 여기서 절을 10년간 다닌 분은 10번째 지낼 거고, 20년 다니신 분은 스무 번째 지낼 거고, 그죠, 30년 된 분은 30번째 지낼 거란 말이에요. 매년 지낸단 말이에요. 똑같은 백중을 매년 지낼 필요가 있느냐. 단순히 부모님을 모셔 가지고 7번을 제사를 지내드리고 음식을 베풀어드리고 하는 의미로다가 한다면 1번이면 끝나요. 그런데 매년 지내드리는 의미가 뭐냐. 백중은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예요. 법음이라는 거예요. 법음, 법의 음성. 선망부모님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거고, 부처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는 법석을 마련하는 자리에요. 부모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거예요. 혹여라도 부모님이 서운한 게 있고, 아쉬운 게 있고, 또 부족한 게 있다면, 내지는 나쁜 갈래에 가 있다면, 나쁜 갈래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춥고 배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고 마음이 어두운 거예요.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리석음.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탐진치를 보통 얘기하잖아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는 치암(癡闇)이에요, 어리석을 치에 어두울 암자, 치암. 어리석음은 캄캄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구분이 안돼.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암만 이야길 하고 설득한다고 해도 믿질 않아요. 믿지 않으니까 행동을 안하게 되죠. 절에 와서 기도하고 성취하는 사람을 보면요, 지나가는 스님이 하시는 말씀도 따라하는 사람은 성취를 해요. 앉혀놓고, 여기 총무스님께서 길게 얘기하면서 차도 따라주고 먹을 것도 주고 선물도 주고 해도 안 해요. ? 맘이 어두워서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은 기도성취를 못 합니다. 근데 스님이 지나가다가 ‘108배나 하고 가.’ 그런데 그 말이 확 꽂혔어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열심히 하고 간 사람은 뭔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마음이 밝기 때문에 그래요. 어리석음은 첫 번째로 표현한 게 어떤 부처님 말씀이나 어떤 우리에게 득이 되는 얘기를 했을 때 귀에 안 들어와요. 어둡기때문에. 안 보이는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어리석음은 치혹(癡惑)이라고 해요. 치혹. 혹은 의혹. 미혹할 때, 의심한단 얘기에요. 어리석음은 두 번째 의심하는 거예요. 진짜로? 그렇다고? 마음에서, 또 하나는, 계속 갈등하는 거예요. 이렇게 할까, 이렇게 할까. 이 절이 좋을까, 저 절이 좋을까. 저 스님이 잘할까, 이 스님이 나을까. 스님 찾아 삼만리, 도량찾아 삼만리. 이러다가 시간을 다 보내요. 우리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그런 분들은 없는 거 같아요, 보니까. 이렇게 암하거나 혹한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이에요, 암혹. 암혹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암혹. 이게 나쁜갈래거든요. 마음의 나쁜 갈래는 암혹이에요. 마음이 어둡고 뭔가 천지구분을 못하는 상태가 되거든요. 이게 나쁜 갈래에요. 다른 게 나쁜 갈래가 아니고.

 

      목련존자가 어머님께 지극함을 유래로 백중이 시작되었단 말이에요. 어머니가 나쁜 갈래에 빠져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이야기를 하니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가려면 첫 번째로는, 우리 종단에서 만든 불교성전에 보면 565페이지인가에 나와요. 거기에 보면 목련존자 얘기가 나오면서 부모님께 삼보를 믿게 하는 게 효도요, 부모님께 계행을 지키게 하는 게 효도요, 부처님께 선행을 하게 되는게 효도요, 부처님께 공덕을 짓게 하는 것이 효를 갚는 일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중에 첫 번째는 부모님을 모셔서 부모님이 혹시라도 이렇게 거꾸로 되어있는 마음들을 돌리게끔 하는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하는. 그러니 입재해 놓고 1,3,5,7만 와야합니까? 1,2,3,4,5,6,7 다 와야 합니까? 다 와야 해요. 왜냐. 여러분이 법을 여는 법의 주최자입니다. 잔치를 여는 주최자예요. 근데 손님을 모셔놓고 이렇게 단을 장엄스럽게 다 모셔놓고 법을 여는, 여기 위패를 모셨으면 여러분들 한분 한분이 다 복위(伏爲)란 말이에요. 복위, 복위자, 엎드려서 받드는 거란 거죠. 근대 엎드려서 해놓고는 이름만 걸어놓고 안 오면 안된다 말이죠. 둘째는 백중을 해야 되는 이유가 내 마음을 밝히는 것.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그런 말이 있어요. 잘못되면 조상탓이라고. 그런데 조상이 잘못되면 누구탓이다? 내탓이다 이거에요. 내 마음을 밝혀야지만이 조상의 마음이 편하겠지요. 이거는 뭐 유치원 애들도 아는 얘기에요. 우리 가정이 편안해야 우리 부모님이 편안하지 맨날 지지고 볶고 남편하고 싸우고 부인하고 싸우고 애들하고 싸우면 편안하게 생겼습니까.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을 참회해야 되요.

 

      두 번째는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첫 번째는 어머님의, 선망부모님의 마음을 밝혀드리는 일,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이고, 그건 지금 입재했으니까 7번 잘 참석하면 되는 거고, 두 번째 내 마음을 밝히는 건데, 내 마음을 밝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참회다.

      첫 번째 참회는 어떤 참회가 있는가 하면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육정참회(六情懺悔). 여섯가지의 정, 정은 다른 말로는 근()이라고도 해요. 육근, 안이비설신의, 들어보셨죠? 육근. 그걸 다른 말로는 정이에요. 그놈의 정 때문에, 정 때문에 아시죠? 우리 정 때문에 그렇게 살은 거예요. 사랑 때문에 사시는구나. 다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정이 굉장히 무서운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중생을 다른 말로 유정(有情)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육정참회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참회하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러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안이비설신의는, 우리 선망부모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다 욕망에, 집착에, 감각에 매여있어요. 감정에 매여 있거든요. 우리 마음에 감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감정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감정.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부처님 빼고, 부처님만 빼고 뭐라고 막 비방을 하면 모두 화를 내죠.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이 감정인데, 이 감정은 25천만 년 전에,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들이잖아요, 진화론에서 보니까 우리가 산소농도가 이렇게 대기 중에 24%였다가 15%로 내려갈 때가 있었어요. 화산 폭발하고. 그래서 숨을 안 쉬어야 하니까 이 갈빗대가 원래는 척추까지 있었는데 이게 진화하면서 올라오게 된 거예요. 폐가 커진 거예요. 그리고 더 나가서는 뼈도, 뼈 안에도 이렇게 공기주머니가 있어요. 닭을 보면 닭 뼈가 안이 비어있지요. 겉은 단단한데 안은 비어있어요. 그 닭이 그때 진화하면서 그 뼛속에다 공기를 채우려고 뼈가 그렇게 생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갈빗대가 위로 올라오면서 폐가 커지면서 진화를 하는데 새끼를 지금까지는 밖에 낳아두면 알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그걸로 끝났는데, 젖을 물리는 포유류들이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몸속에 잉태하기 시작한 거예요. 잉태하기 시작해. 그러면서 갈빗대가 위로 올라옵니다. 진화할 때. 그러면서 폐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서 아기를 낳죠. 자기의 젖을 물려서 키우기 시작해.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식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식을 낳아 본 사람하고 안 낳아 본 사람하고 집착의 크기가 달라요. 달라, 스님들은 안 낳아 봐 가지고 평생 애들이야. 철이 없어요.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옛날 어른스님들이 제가 뭐 할 때 스님들은 나이 먹어도 철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기분 나빴어요. 제가 조금 아까 얘기했죠. 저 욕하면 싫어한다고. 스님들이 도 닦으러 온 사람들인데 철이 없어. 그런데 살아보니까 철이 없어. 뭐 이렇게 집착이 별로 없어요. 스님들이 보면은. 끝에 가면 결국은 웃는 힘들이 있어. 그게 조금씩 조금씩 몇억 년 동안에 이어오던 인간이 갖는 감정, 집착 이런 것들이 안하다 보니까 조금씩 주는 것 같아요. 이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아기를 낳고 양육하고 아기를 기르는 것은 이것보다 위대한 일은 없어요. 다만 감정의 출발이 어디냐, 이걸 말씀드리다가 여기까지 온건데, 그 감정이라는 것은 몇억 년 동안에 이렇게 우리의 DNA속에 쌓였다. 감정이란 그렇게 생긴거다. 감정은 원래 있던 게 아니란 거예요. 감정이 내가 이생에 생명을 타고 나면서 쌓이고 만들어졌던 거다. 그래서 이 육정이라는 것은 그 감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고, 빠지기 쉽고, 홀리기 쉽고, 속기 쉬워요, 쉬운 말로. 쉬운 말로 사기당하기 쉬워요. 좀더 좋은 거, 좀더 편안한 거, 좀더 좋은 소리, 좀더 안락한 거, 이런 거 보면 그쪽으로 가게 돼있어요. 이때 그 마음을 탁 알아차려서 잡는 게 육정 참회에요. 그렇게 해야 마음이 밝아진다. 육정참회를 하고 나면, 육정참회는 자비도량참법이나, 거기에 보면 열 가지의 참회가 나오는데, 열 가지를 기준 삼아서 참회하는 게 나오는데, 거기에 육정참회가 나와요. 안근에 대한 참회, 비근에 대한 참회 등 자비도량참법 해보시면 거기 나온단 말이에요, 그 얘기고. 그리고 나서는, 자기마음을, 어리석음을 밝히면, 아까 암혹이라고 했죠, 암혹, 암혹한 마음을 밝혀서 밝게 하면 내 마음이 밝은 만큼 부모님도 밝아진다.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내 마음이 지글지글 뽀글뽀글 갈등과 대립과 맨날 불만으로 산만함으로 가득가득한데 어찌 부모님을 좋은 갈래로 인도할 힘이 있겠느냐는 거예요. 마음이 밝혀. 마음이. 육정참회를 통해서.

      육정참회를 하다보면은 그다음에 마지막 실상참회입니다. 실상참회는 뭐냐. 말 그대로 실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참회를 하면 할수록. 이 실상참회의 키워드는 그건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건 죽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어야 해요. <제상은 비상이다(諸相非相)>. 입으로 따라 해야 되요. 제상은 비상이다. 제상은 비상이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란 거예요. 아시죠. 금강경에 나오죠.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런 얘기가 나온다 말에요. 비상, 모든 상이 아니라고 보는 게 여래를 보는 거예요. 여래를 봐야지 마음이 밝아지죠. 우리 맨날 진관사에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여래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래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진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당체요, 여러분은 부처님이요, 여러분은 연기적 존재요, 여러분은 모든 상이 비상이다. 마음이 확 밝아져야하는데, 이 얘길 들으면. 번뇌가 싹 녹아내리고 밝아져야 하는데, 눈빛들이 아리송해. 아리송해. 모든 상은 비상이에요. 여기에 뚜껑이 있어요. 이걸 정말 강한 불로 태우면 뭐만 남아요? 허공만 남아요. 허공. 허공은 타지 않아요. 허공의 다른 말은 비상이에요. 허공, 그게 반야에요. 허공이, 이 컵이 허공을 의지해서 타고, 불이 허공을 의지해서 이 컵을 태우지만 결국은 이 컵도 사라지고 불도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하나가 허공이에요. 허공은 그대로 있는 거예요. 허공같은 게 뭐냐, 바로 반야다. 내가 부처님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게 허공이에요. 그 에너지는 무한한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여래다, 나는 진리다, 나는 부처님이다, 나는 비상이다, 모든 상이 아니다, , 나는 허공과 같은 존재다. 비어있다는 게 아니에요. 허공은 꽉 차있는 겁니다. 그런데 허공은 텅텅 비어있어요. 아시겠지요? 다 알아듣는 눈빛이네요.

 

      백중은 이렇게 내 조상의 마음을 밝히는 기간으로, 순간으로, 법석으로 만들고, 말미암아 내 마음도 늘 그렇게 실상반야로 늘 부처님의 마음으로 함께 해서 늘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늘 승리하는, 번뇌에 지지않고 늘 승리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