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국행수륙재]9월11일 국행수륙재 3재 법문 2022-09-11

 

시방삼세 부처님께 향 올리고 그 가피력에 기대어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옵니다.

 

부처님의 본원력으로 철위산간 지옥중생들이 정토에 왕생하게 하소서.

 

사나운 아귀와 축생들이 아픈 고통 벗어던지고

천상, 인간, 아수라 중생들도 삼재팔난 고통 벗어나 정토에 왕생하여 지이다.”

 

        지금 법문하기 전에, 정말 장엄스러운 의식을 제가 참여하면서, 늘 경전을 보다 보면 부처님의 세계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무수한 불가사의의 삼매와 불가사의한 방광, 불가사의한 신통한 환희심 나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허공으로 비천상님들이 날아다니면서 굉장히 찬탄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회가 시작되기 전에 모인 대중, 늘 부처님을 따라다니던 상수중 보살들과 또 부처님의 법문이 시작된다고 하면 사방에서 모여드는 래집중(來集衆), 올 래자, 와서 모여드는 대중, 그래서 상수중 대중과 래집중 보살들에게, 맨 처음에 자리에 앉으셔서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고 양미간으로, 미간 백호상으로 광명을 나투시기도 하고, 또 정수리로부터 그런 광명을 놓으시기도 하고, 그 광명을 사방으로 놓아서 모인 대중까지 광명에 휩싸이는 그러한 상황이 늘 경전마다 나옵니다. 그런 내용에는 반드시 광명을 놓으신 의미가 있고, 또 그 의미로서 중생들에게 깨치시려고 했던 부처님의 깊은 그런 의도를, 저희는 중생이기 때문에 어리석고 앞이 막혀 있고 집착에 갇혀 있고 애착에 묶여 있고, 이러니까 현실에 묶여서 그러한 부처님 세계를 감히 볼 수도 없는 저희는, 경전을 통해서 보는 데도 굉장히 그때 그때마다 정말 그 부처님 세계에 대해서 환희심이 나지만 그 환희심의 갈래를 알 수가 없어서 굉장히 답답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그러한 세계에 대해서 집중하고 마음을 모을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범망경(梵網經)의 노사나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그 내용에도 보면, 노사나불께서 <본원성불 상주법신삼매>, 그 앞에 또 글자가 더 많아요, <허공광체성 본원성불 상주법신삼매(虛空光體性 本原成佛 常住法身三昧)>, 삼매를 나타내어서 모든 대중에게 보이시고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마음을 깨달아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해서 그것을 심지도라고 하는데, 그 과정을 닦아 들어가려면 어떠한 계행을 지켜야 되나. 그래서 그 하권에서는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輕戒)를 설해 놓으신 내용이 있어요. 그 내용은 처음에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석가모니불께서, 노사나불께서 예전에 설하셨던, 심지법문품(心地法門品)을 설하시는데, 그 설하시는 장면에서 지혜 광명이 몸에서 나타나서 연화대장세계를 비추고, 그때 모였던 수많은 보살과 수많은 수행자, 일체중생들이 다 모여서 그 빛을 보는 거예요. -이 진관사에서도 큰 불, 아마 제가 여쭤는 안 봤지만 여기에서도 그런 불가사의한 그런 방광의 사례가 많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지금 회주스님이나 주지스님을 비롯해서 우수하게 기도를 많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요. 그것을 낱낱이 다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요. 그럴 때 모두 함께 보는 이들이 있어요. 같은 장소에 있었어도 그것을 미처 못 보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급해서 집으로 빨리 가느라고 못 보기도 하고 그런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제 그러한 광명이 이렇게 나투시니까, 온 전체, 모든 거기에 모인 대중들이 의아해 하는 거예요. 마음이 기쁘고. ‘도대체 이 광명은 어떤 인연으로부터 이렇게 비추는 것일까?’ 하고 모두 의아해했어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모여 있는 대중 가운데 한 보살이, 그 보살 이름은 현통화광왕보살이에요. 화광왕보살이 광명의 삼매로부터 일어나, -원래 그 광명 삼매 속에서 정진을 하고 고요하게 있던 그 보살이 일어나- 백운색, 하얀색 그러한 광명을 놓아서 비추니까 그 의아했던 온 대중이 또 놀라서 이 광명은 어떤 사상이 담겨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런 광명을 놓으시는가?’ 모두 의아했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 여러 중생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거죠. ‘의아해하고, 환희심 나고 이것이 무엇일까, 이건 무슨 의도가 있으며, 이 속에 어떠한 깊은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의심을 하고 있으니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신력으로 한 손으로 하나 가득 그 중생을 모두 한아름에 바짝 들어서, -그 경에 그렇게 표현이 됩니다. 한꺼번에 이거 불가사의한 일이죠.- 그 많은 중생을 한꺼번에, 한아름에 모두 안아서 노사나 부처님께서 광명에 쌓여 있는 그 자금강광명에, 광명에 휩싸여 앉아 계신 그 앞에다가 그 중생을 모두 그대로 갖다 놨어요. 그러고 나서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모든 보살님과 다 같이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게 됩니다. 다 같이 예경을 하고 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중을 대신해서 노사나불께 질문을 합니다. “이 세계의 일체중생은 어떤 인연에 의해서 수행을 하여야지만 불보살님께서 성취하신 십지도(十地道), - 심지도죠, 십지도이기도 하고 심지도이기도 합니다.- 심지도를 다 성취할 수 있으며, 또 성취했을 때 그 과보는, 그 불과(佛果)를 이루는 그 상태는 어떤 모습을 얻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중을 대신해서. 그러니까 노사나불께서 굉장히 기뻐하셔요. 기뻐서 법신 삼매를 나타내어서 모든 대중에게 그 삼매의 상황을 비추시면서. 그래서 저희는 이런 글을 보면 비추는 모습을 상상을 해봅니다. ‘그 비추는 상태가 어떨까?’ 이제 이렇게 상상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고 나서 이제 노사나불께서 설법를 어떻게 하시느냐면 나는 이미 백아승지겁 동안에 그 심지법이라는 실천행을 다 받고, 그 심지법 수행함으로 인해서 출리심을 일으켜서 사바세계에서 , 이 사바세계는 견고한 것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서 범부라는, 그동안 범부로 살아왔던 그 범부의 입장을 버리고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서 노사나(盧舍那)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은 어디에 거하느냐? 연화대장세계에 거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 연화대장세계라고 하는 곳은 큰 꽃이 있다고 그래요. 연화로 된 꽃이 있는데 그 중앙이 이렇게 대가 있어요. 어느 꽃이든지, 연꽃 한송이에도 그 가운데 연자가 맺히는 곳이 있는데, 그 위에 노사나불이 계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쭉 설명을 했기 때문에 그려야 돼요. 어떻게 그려야 되느냐 하면, 노사나불께서 천 명의 석가와 천 백 억명의 석가가 질문한 심지법문품을 자세히 답변하시는데, “모든 불자들아,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고 수행하라. 나는 이미 백 아승지겁 동안 심지를 닦고 연화대장세계에 머물러서, 연하대 둘레에 천 장에 꽃잎이 있는데, 천 장에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이 낱낱이 다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천 장에 다 계시니까 한 잎사귀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천 부처님이시죠. 그런데 그 속에 한 석가모니불 계시는 곳마다 백억 개의 국토가 있고, 백억 개의 수미산이 있고, 백억 개의 해와 달이 있고, 백억 개의 남선부주가 있고, 백억 개의 보살 석가가 있고, 백억 그루의 보리수가 있고, 그래서 그것을 다 합쳐서 보면 그 보리수 밑에 앉아 있는 그 부처님들이 일시에 그 연화대 위에 앉아서 천백억 화신의 석가모니불이 일시에 다 성불을 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천 백억 명의 석가불이 성불을 하시고, 각각 티끌처럼 많은 대중을 접인해서 감로문이 환하게 열렸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심지도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절차를 얻어서 들어가는가. 가장 처음은 십발취심이에요. 십발취심. 두 번째는 십장양심(十長養心), 열 가지 장양심, 세 번째는 십금강심(十金剛心), 네 번째는 십지(十地). 그래서 등각,묘각, 52위를 설명을 해놨거든요.

 

 

         그런데 그 심지도 수행위(心地道修行位)의 십발취심이라는 것은 굉장한 높은 지위 같지만, 그것을 낱낱이 다 들여다보면은, 어떠한 경우에 우리가 이 십발취심에 들어가느냐.

         처음에 불교를 한 개도 몰랐어요. 불교의 내용을 몰랐는데 어쩌다가 인연이 되어서 이렇게 진관사라는 이런 사찰에 와서 이러한 법식을 보고, 환희심을 내고, 큰스님 오실 때마다 그 법문을 다 듣고, 또 여기에 계시는 스님들이 가끔 법문 하시면 그 법문 속에서 어떤 때는 그냥 나도 모르게 늘 와서 부처님 무엇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무엇을 어떻게 하게 해주십시오.’ 막 그렇게 개인적인 그런 소망을 하다가, 문득 생각을 하면은 이거는 아닌데싶을 때가 또 있어요. 그리고 불현듯이 절에, 부처님께 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언제는 마음이 확 뜨거워지면서 내가 왜 이렇게 중생 세계에서 참 허망한 세월을 사는가해서 뜨거운 눈물이 속에서부터 일어나면서, ‘이 사바세계가 다 물질의 세계고, 이것은 다 연기의 법이고, 이래서 정말 이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가 이렇게 절에 다니면서 진실로 부처님께 나아가서 아주 올바른 정법을 배워야 되겠다.’ 이렇게 발심하는 그게 발취심의 첫발이에요. 그 발심, 별 게 아니에요. 어쩌다가 지나가다가 한 소리를 듣고, 지나가다가 큰 스님의 법문 한마디, 우리가 마음에 발심을 한다는 것은 한순간에 그렇게 발심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게 십발취심이에요.

         근데 그 발취심의 첫 번째가 뭐냐 하면은 사심입니다. 사심(捨心). 버릴 사자, 사심. 그것이 이제 버린다 하는 것은 버린다라는 말만 그렇지, 일단 내가 남에게 보시를 하려면 나에게 있는 것을 이쪽으로 내놔야 돼요. 내 쪽에서 보면 버리는 것이 되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을 받게 되고, 도움을 받게 되고, 그래서 처음에 십발취심에서는 보시로 시작을 합니다. 보시로 시작을 해서, 그다음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육바라밀 수행을 첫 번 발취심에서 해가고, 또 방편 원력 지혜까지 참 잘 닦아요.

 

 

         그렇게 해서 일단 일차적으로 닦고 나서, 두 번째는 십장양심이에요. 금방 우리가 발심을 했다고 해서 그게 단박에 내 것이 되질 않아요. 발심도 또 발심을 해야 되고, 발심 위에 또 해야 되고. 보시를 해도 내가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보시를 해야 되고, 또 보시를 해도 자꾸 재발심을 해서 해야 되는 거거든요. 계행도 우리가 계행을 지킨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또 계를 범했으니까 자꾸 내면으로 참회를 하고, 그래서 자꾸 자기를 맑혀서 견고하게 그것을 장려해서 더 단단하게 해야 해요. 지금까지 육도 윤회로 돌아다녔던, 참 우리가 돌아다녔으면 얼마나 많은 세상을 돌아다녔겠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지옥 아귀 축생을 다 돌아다녔을 거예요. 그렇듯이 그러한 세상에 돌아다녔지만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지금 이렇게 보시로부터 시작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열 가지를 잘 닦고 나면, 십장양심이 있어서 그것은 내가 닦은 그 수행을 더욱 잘 다듬는 거예요. 정말 수준 있고 고품격으로. 그래서 옛날에는 사사로운 걸 보시를 했으면, 그다음에는 마음으로부터 보시를 하는 거예요. 깊은 속 내면으로부터 보시를 하고, 또 인욕을 하고, 정진을 하고, 이게 십장양심으로 들어가요.

 

        그다음에 이제 십금강심은 장양을 했으면 불퇴전에 오른, 다시는 그 자리에서 퇴타하지를 말아야 돼요. 우리가 잠시 조금 안 된다 해서 마음이 퇴타해선 안되거든요. 우리 수행도 똑같아요. 십발취심에서 십장양심으로, 십금강심은 아주 견고해서 이 신심이라는 것은 열길 스무길을 파도 뿌리를 볼 수 없는 그런 신심이어야 하거든요. 신심. 그래서 그 신심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견고하게 돼서 다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퇴전하지 않는 이제 그런 지위가 십금강심에, 그 다음에 십지에 올라가면 그때부터 성태에 들어요. 성인으로 되는 모든 자격이 갖춰져서, 그래서 이미 그 성태에 들면 다시는 중생세계로 가지 않는 그 자리가 십지행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그 모든 불보살님께서 십지행록에서도 굉장한 수행을 하셨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소소한 물건을 보시하고 또 인욕을 하고 나에게 있는 물건을 남에게 베풀기도 하고 그렇게 했지만, 점점 그 베푸는 강도가 더 커져서 그때는 나에게 가지고 있는 내 몸의 것도 남에게 주는, 눈을 달라면 눈을 주고, 팔을 달라면 팔을 주고, 내가 갖고 있는 논밭을 달라면 논밭을 주고, 그렇게 하면서 그 십지행을 견고히 해서 부처님 되시는 그 과정을 낱낱이 밟지 않은 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팔십종호,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 이야기하잖아요. 그 상호 상호마다 반드시 그만한 수행이 있었기 때문에 삼십이상의 한 상호 하나 하나가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게 그냥 하나를 했다고 해서 한꺼번에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낱낱이 그 부분에도 열심히 마음을 쓰고, 열심히 보시를 하고.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십발취심, 십장양심, 십금강심, 십지가 그 속에 낱낱이 또 들어있어요. 거기에도 굉장히 많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그 전생에 수행을 했을 때, ‘나는 금생에는 보시행을 열심히 해서 내가 하나의 보시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커다란 불과를 이루리라하고, 보시행을 한다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고 계셨어요. 하루는 어떤 걸인이 와서 물어요.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이냐.” “보시행을 하려고 합니다.” “! 보시를 하려고 하느냐.” 이러니까 그렇다고. “그러면 나는 사실 당신의 눈이 필요하다.” 사리불 존자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눈이라는 것은 내 눈에 있을 때,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생명이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소용이 있는거지, 저 사람한테 빼줘도 소용이 없다 싶어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 눈 달래는 사람이 일단 보시를 한다고 했으면 주면 그만이지, 그 사람이 쓰든 안 쓰든 그걸 뭘 생각하느냐.”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그렇다고 생각하고, 피를 흘리면서 왼쪽 눈을 싹 뽑아서 딱 줬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한참 들여다 보더니 ! 이거는 아니네. 내가 필요한 건 오른쪽 눈이 필요해.” 그래도 하나가 있어야 내가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오른쪽 눈 못 준다.” 이러니까 그것도 못 주면서 무슨 보시행을 한다고 하느냐.” 이렇게 또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냐면 일단은 내가 필요하다는데 보시로서 깃발을 걸고 보시행을 한다는 사람이 그 눈 하나 아까워서 못 주느냐.” 이렇게 말해요. 그래 할 수 없이 눈을 빼서 줬어요. 오른쪽 눈마저 빼서 주니까, 그 사람이 한참 들여다보면서 냄새를 푹푹 맡더니 아휴. 썩은 내가 나네.” 그러더니 탁 땅에 던지고 침을 한 번 탁 뱉고 발로 쓱쓱 문대버리는 거예요. 그래 사리불 존자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 내가 정말 수 없는 세월을 참 보시 바라밀을 행하면서 내가 불과를 이루려고 원력을 세웠는데, 도대체 저런 중생을 어떻게 내가 제도를 하겠나. 그냥 대승 보살행을 닦지 말고 내 수행이나 잘하자.” 이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냐 하면, “그 대승의 마음을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 하나의 일로서 대승을 버릴 수 있느냐.” 우리도 그렇잖아요. 누구한테 잘하다가 그 사람이 신심 없게 하면, 하다가 말아버리는 일, 수도 없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보시를 하는 것도 끝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누구에게라도 보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서 보시를 행할 수 있어야 되고, 그것이 한계가 있어서는 또 안 되고요. 지금 여기 법회가 무슨 법회입니까? 무차법회잖아요. 막음이 없는 법회. 그래서 차별 없이 보시가 이루어져야 된다.

 

        보시에도 흡족한 보시가 있고, 뛰어난 보시가 있고, 굉장히 수승한 보시가 있고, 청정한 보시가 있고 그렇거든요. 정말 알게 모르게 하는 숨어서 하는 그런 보시가 있고. 큰 바램이 없는 그러한 보시도 있고, 여러 종류의 보시가 있어요.

        경을 들여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성불을 하시자마자, 부처님 당시때부터, 가장 먼저 시행된 것이 보시에요. 보시. 부처님 성불 하시니까 그 재가불자가 앞다퉈서, 부처님 계실 곳이 없으니까 큰 정사를 보시하고, 급고독장자가, 기수급고독장자가 그 <외로운 이 돕는 절> 이래서 큰 정사를 보시를 하고. 또 녹자모강당, 부처님 제자가 많이 모이니까 또 강당을 헌사하고, 또 웃가(웃가세에나) 장자가 스님들에게 청정한 공양을 보시하고. 그래서 <보시라는 것은 가장 수승한, 가장 선행적인 것으로, 가장 으뜸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어요.

 

 

        그러면 왜 보시를 그렇게 중요시하느냐. 기본적으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을, 불가에서 우리 스님들께서는 다 아시지만, 전체로 보면 세 마디예요.

 

         제행무상(諸行無常), 이 세상은 정말 무상하기 짝이 없어요. 무상하기 짝이 없어서 정말 하나도 견고한 것이라고는 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삼라만상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하고 있죠. 계속 진행 중이에요. 이루어졌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변형돼서 또 무너지고 새로 생기고. 우리 마음도 그렇죠.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생각으로 바뀌고 또 없어지고. 우리도 태어나서 생로병사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거, 하다 못해 내 몸까지도 무상하기 짝이 없다.

 

       두 번째는 이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제법무아(諸法無我). 어떤 것도 독보적인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모든 물질들이 연기법에 의해서 다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다.

        세 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예요. 여러분들 삶, 어려서는 세상 모르고 사는데 살다 보니까 고 아닌 것이 없어요. 연세 드신 분 하루가 가면 갈수록, 저도 나이가 들어보니까, 눈도 가고 귀도 가고 막 이래요. 몸도 비틀거리고 그러니까 다 고라는 거죠.

그래서 마음 하나 빼놓고는 정말 그 견고한 것,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요. 그러한 원리를 알고 있어야지만 우리가 이 마음에서 남에게 보시하고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보시라는 것은 금강경에서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보시를 해야 하고,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보시를 해야 되고, 또 보시를 했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남아있지 않는 그런 보시를 하고, 상에 집착이 없어야 해요. ‘내가 이만큼 절에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이런 마음도 늘 일어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제 보시를 할 때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고, 이것은 부처님께 나아가는 최상의 어떤 선행적인 실천을 해야 할 그런 일이기 때문에, 이제 보시로서 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 수행의 지름길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보시의 공덕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공덕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은데, 사경공덕, 지계공덕 등 여러 가지 그런 공덕이 많잖아요. 그러한 공덕들이 우리가 복덕이다, 복덕이라는 말도 많이 하거든요. ‘참 복이 많아.’ ‘저 사람은 공덕이 많아.’ 그걸 제가 따로따로 찾아보니까 복덕은 어떻게 보면 물질적인 것을 복덕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 그런 것을 복덕이라고 한다면, 공덕의 세계는 무량하게 많아요. 그래서 뭐든지 좋은 일에는 그것이 공덕이 되고 부처님의 씨앗이 되고 성불하는 과정이 되고, 그 공덕이라는 것은 세속적이지 않은 출세간적인 그래서 그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깨달음으로 가는, 직결돼 있는 그러한 행을 했을 때에 그것이 공덕이 되고 결국은 그 길로 갑니다.

        모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