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9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지송축원, 지송(持誦)이라는 것은 경전을 가질 지, 외울 송, 잘 받아서 간직해서 독송하고, 서사하고, 쓰고 해설하는 수지, 독송, 해설, 서사, 그게 경전의 수행인데, 그걸 지송이라고 하고, 그 지송을 할 때는 항상 축원문이에요, 지송이. 축원(祝願). 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 가호를 청원한다, 청해서 원하는 걸 축이라고 하고, 원이라는 것은 지심발원, 자기의 지극한 마음으로 스스로 발원하는 걸 원이라 그래요. 그래서 가피를 청원하고, 자기의 의지를 발원하는 것을 합해서 축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지송축원을 하게 되면 그것이 무량공덕이라, 대공덕행(大功德行)이라. 대공덕이라는 건 뭐냐 하면, 불교가 아주 근본이고 궁극이, 근본 궁극이 성불과 중생 제도인데, 이 지송축원는 자기 성불과 중생 제도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그것을 성불하고 중생 제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덕을 대공덕행이라 이렇게 얘기를 해요. 오늘 법문 주제는 <지송축원 대공덕행> 이런 제목인데요.
成佛度生 諸佛大業 大業達成 一道行門
성불도생 제불대업 대업달성 일도행문
經教持誦 如說修行 如理證得 願力行化
경교지송 여설수행 여리증득 원력행화
그 고통은 알겠는데, 건지는 건 뭐냐. 그건 깨달음이에요.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고통에서 건질 수가 없어요. 비유해서 말하면, 꿈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온갖 환경을 지금 맞이해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꿈에서 괴로워하는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길은 딱 하나뿐이에요. 그 꿈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고 상담을 받는데 상담에 답이 없어요. 인생 문제, 사회 문제, 생활 문제, 여러 가지 문제를 들고 가서 자기 고뇌를 이야기를 하면 마지막은 답이 없어요. 근데 그 답은 오직 하나뿐이요. 깨달아야 돼요. 그게 성불이에요. 성불. 깨달아야 된다. 깨닫는 게 답이여. 깨닫지 못하고서는 모든 문제가 그냥 있어요. 그래서 인생의 해답은 깨닫는 거다. 그걸 해탈이라고 하고 그걸 성불이라고 하고 그래요. 그럼 깨달았으면 중생을 깨우치는 거죠. 그걸 제도라고 그래요. 그게 건지는 거예요. 나를 깨닫게 해야 내가 나를 제도하는 거지, 내가 나를 깨닫게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제도할 수가 있냐.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뭘 해서 이루면 해결될 줄 아는데, 전혀 무엇을 해도, 무엇을 이루어도 인생의 고통이 해결이 안 돼요. 못 가진 걸 가져오면 해결될까. 모르던 걸 알아보면 해결될까. 이루지 못한 걸 이뤄보면 해결될까. 전혀 안 돼요. 박사학위 하나 더 받아봤댔자 괴로움만 더 생겨요. 더 작은 부자가 큰 부자 돼 봐야 고통이 더 생겨요. 나이가 들면 좋은 줄 알고 어릴 때 막 나이를 올려서 속이고 그러는데, 나이 많아지면 좋은 것 같아요? 천만에. 나이 많으면 괴로움이 더 많아. 그러니까 인생 문제는 깨닫지 못하고는 항상 고통의 성격만 변할 뿐이지 근본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 중생제도라고 하고 성불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불 해탈, 중생제도.
근데 그 성불해탈하는 방법이 경전을 외우는 거, 이게 아주 근본이다 이거죠. 경전을 외우는 게 그게 왜 근본이냐 그러면, 아무리 땅이 좋아도 거기에 좋은 종자를 심지 않으면 그 땅이 힘을 못 써요. 그래서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에다가 근심 걱정만 자꾸 채우면 근심 걱정만 성장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거기다가 깨달음의 종자를 하나 턱 심어 놓으면, 그 깨달음의 종자가 그 좋은 내 마음 땅에서 자라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그건 종자가 자라는데 옆에 잡초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데, 그 잡초는 뽑아요. 종자는 길러요. 그렇게 되면 성불을 하게 되고 자연히 중생 제도를 하게 된다.
근데 그렇게 종자를 심어서 기르고 잡초를 뽑아내는 그 행위가 첫째로 경교지송이라. 경교지송하는 거 이것만 계속해도 나머지가 다 이루어지고 여설수행이라, 그 말과 같이 수행만 계속해도 다른 것이 다 이루어지고. 또 중생교화만 계속 하는 게 있어요. 중생교화를 통해서 성불이 완성이 되고, 성불 완성을 통해서 중생교화가 완성되고. 보살행 중에도 관세음보살하고 지장 보살은 중생교화만 해요. 그러면 중생교화 하는 가운데 자기 성불은 다 이루어져요. 문수보살은 자기 성불에다 중점을 둬요. 자기 성불이 완성하게 되면 중생교화도 다 완성하게 되고 보현보살은 이걸 합치는 거예요. 자기성불 문수보살 수행, 중생교화 관세음보살 수행, 지장보살 수행, 합쳐서 하는 것이 보현보살 수행이거든요.
그러니까 경전을 자꾸 이렇게 수지독송하면 내 마음에서 불종자는 하루하루 자라고, 번뇌망상 하루하루 없어져서, 거기서 온몸이 공덕의 몸이 되고 온몸이 지혜의 몸이 된다, 이거거든요.
① 朝禮鍾頌(晨鍾頌) 조례종송(신종송)
願此鍾聲遍法界 鐵圍幽暗悉皆明
원차종성변법계 청위유암실개명
三途離苦破刀山 一切衆生成正覺
삼도이고파도산 일체중생성정각
南無 昆盧教主 華藏慈尊
나무 비로교주 화장자존
演 寶偈之金文 布 琅函之玉軸 塵塵混入 刹刹圓融
연 보게지금문 포 낭함지옥축 진진혼입 찰찰원융
一乘圓教 大方廣佛華嚴經 第一偈
일승원교 대방광불화엄경 제1게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그리고 어째서 그러냐. 진진이 혼입(塵塵混入)하고, 찰찰이 원융刹刹圓融이라. 이게 화엄경 원융무애 교설인데요. 원융무애 교설. 원융이라는 것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요. 또 하나하나가 모든 것 속에 다 들어가, 이걸 원융무애라고 그래요. 하나가 모든 것 속에 다 들어가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다 들어가고, 이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화엄삼매에 들어야 돼요. 진진이 혼입하고, 티끌티끌이 모든 우주 만물에 다 들어가요. 그거는 비유로 말하면, 하나라는 숫자가 있는데, 이 하나라는 숫자가 둘에도 들어가고, 셋에도 들어가고, 열에도 들어가고, 억만에도 들어가고. 아무리 많은 숫자도 거기서 하나 빼면 안 돼요. 하나가 모든 숫자가 되고, 모든 숫자가 하나가 된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은 하나를 봐도 하나에 만족해요. 열을 봐도 열에 만족해요. 이게 원융무애라고,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근데 마지막에는 뭐냐. 마음이다. 그래서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일체불을 알려고 하면은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법계의 모든 진실성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가 다 오직 마음으로 만들었음을 알아라. 그러니까 이 말은 눈에 보이는 저 바깥 대상은 쫓아갈 일이 없고,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오직 모든 것을 관찰하는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일체유심조 게송을 화엄경 제일게(第一偈)라. 제일가는 게송이다. 이걸 떡 집어넣어서 아침종송에 이걸 만들었어요.
② 夕禮鍾頌(昏鍾頌) 석례종송(혼종송)
聞鐘聲 煩惱斷 智慧長 菩提生
문종성 번뇌단 지혜장 보리생
離地獄 出三界 願成佛 度衆生(釋門儀範,1935)
이지옥 출삼계 원성불 도중생(석문의범,1935)
③ 行禪祝願 (행선축원)
願我世世生生處 常於般若不退轉 如彼本師勇猛志
원아세세생생처 상어반야불퇴전 여피본사용맹지
如彼舍那大覺果 如是教化恒沙劫 畢竟無佛及衆生
여치사나대각과 여시교화항사겁 필경무불급중생
(懶翁發願文, 懶翁歌頌集)(나옹발원문, 나옹가송집)
근데 그거는 원아(願我), 원자가 하나밖에 없는 내용인데, 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에, 세상세상 태어날 때마다,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 반야에서 물러가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이게 중생에게는 의식과 반야가 있는데, 의식은 대상을 쫓아가는 행위고, 대상을 쫓아가다 보면 대상은 없어져요. 뭘 쫓아가도 없어져요. 쫓아가는 건 다 없어진다. 등산할 때 상봉을 향해서 열심히 뛰어 올라갔는데, 올라가고 나면 바라보는 건 저 밑에 자기가 올라온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거 너무 허망해. 아니 올라가는 거는 온 힘을 다해서 올라가는데, 올라가서 바라볼 때는 자기가 올라온 곳을 바라보고 있어. 그리고 또 얼마나 머무냐. 5분도 안 머물러요. 그냥 내려와 버려. 그래서 어디든지 쫓아가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의식은 바쁘기만 바쁘지, 남는 건 하나도 없는 게 의식의 종말이에요. 의식의 종말은 바쁘기만 하지 남는 건 없다. 근데 반야는 대상이 대상이 아닌 진실을 보는 게 반야에요. 그릇은 그릇이 아니다. 이건 바로 진실상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의 진실상이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진실상이다. 그래서 그 진실상을 보지, 그 형태 껍데기를 절대로 쫓아가지 않는 게 반야거든요. 그 반야를 실행하는 걸 수행이라고 그래요. 생각을 쫓아가는 걸 윤회라 그러고. 윤회. 되풀이한다는 거죠. 쫓아가고 또 쫓아가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필경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이라, 필경에 궁극적으로는 불과 중생이 없는 진실상에 도달하는 것을 원한다. 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일광진실, 한 광명 진실상에 도달한 게 깨달음이에요. 무불무중생 일광명 진실상 이런 거에 대해서 외우는 게 축원이죠.
④ 頂戴頌(정대송)
假使頂戴經塵劫 身爲床坐遍三千
가사정대경진겁 신위상좌변삼천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佛恩 (報恩者,釋門儀範)
약불전법도중생 필경무능보불은 (보은자, 석문의범)
(諸般儀式文.1694)(제반의식문,1694)
그다음에 우리가 늘 하는 게송 중에 정대송(頂戴頌)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부처님은 자기가 깨닫고 중생을 깨우친 분이 부처님인데, 그 중생을 깨우친 은혜가, 다른 사람은 다 물질을 준다든지, 일을 도와준다든지 이런 건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줬다. 깨달음으로 인도한 은혜가 부처님 은혜인데, 그 깨달음으로 인도한 은혜는 무엇으로서 갚을 길이 없고 딱 한 길이 있다. 이걸 가르치고 있거든요. 가사, 설사, 정대(假使頂戴)를 하고, 정수리에 이고, 경진겁(經塵劫)한, 티끌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며, 신위상좌변삼천(身爲床坐遍三千)하더라도, 몸이 앉는 자리가 돼서, 앉는 평상이 돼 가지고,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차도록 두릇이 펼쳐놓는다 할지라도,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하면,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머리에 부처님을 이고, 또 내 몸이 평상이 돼서 온갖 곳에 다 펼쳐가지고 앉게 하고 하더라도, 전법도생, 부처님의 그 깨닫는 법을 전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필경무능보불은(畢竟無能報佛恩)이라, 필경에,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는 무능, 없다. 옛날 제반의식문이라고, 1694년에 간행한 의식문에는 ‘필경무능보불은’ 이렇게 되어 있는데, 1935년에 간행한 석문의범에서는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은혜를 보답할 일은 없다. 보은자도 틀린 건 아닌데 그 주어가 생략이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부처님인데요, 주어가.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에게 평상이 되어 드려도, 전법도생,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는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뜻으로 보면 보불은이 맞는데, 필경무능보은자 이렇게 너무 익어져가지고 갑자기 바꾸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뜻은 거기 목적 주어가 불은이에요. 목적어 주어가. 그런 게 좀 있어요.
그래서 이게 깨닫는 문제는 내가 나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일이고, 또 깨달음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는 결국 중생들을 깨우치는 일로만이 보답할 수 있지, 다른 것으로는 보답할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을 여기서 말하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