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9월26일 음력9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2-09-26

 

       임인년 9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지송축원, 지송(持誦)이라는 것은 경전을 가질 지, 외울 송, 잘 받아서 간직해서 독송하고, 서사하고, 쓰고 해설하는 수지, 독송, 해설, 서사, 그게 경전의 수행인데, 그걸 지송이라고 하고, 그 지송을 할 때는 항상 축원문이에요, 지송이. 축원(祝願). 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 가호를 청원한다, 청해서 원하는 걸 축이라고 하고, 원이라는 것은 지심발원, 자기의 지극한 마음으로 스스로 발원하는 걸 원이라 그래요. 그래서 가피를 청원하고, 자기의 의지를 발원하는 것을 합해서 축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지송축원을 하게 되면 그것이 무량공덕이라, 대공덕행(大功德行)이라. 대공덕이라는 건 뭐냐 하면, 불교가 아주 근본이고 궁극이, 근본 궁극이 성불과 중생 제도인데, 이 지송축원는 자기 성불과 중생 제도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그것을 성불하고 중생 제도가 함께 이루어지는 공덕을 대공덕행이라 이렇게 얘기를 해요. 오늘 법문 주제는 <지송축원 대공덕행> 이런 제목인데요.

 

成佛度生 諸佛大業 大業達成 一道行門

성불도생 제불대업 대업달성 일도행문

經教持誦 如說修行 如理證得 願力行化

경교지송 여설수행 여리증득 원력행화

 

       그 제목 부제를 설명을 해보면, 성불도생(成佛度生)은 성불해서 중생 제도하는 것은 제불대업(諸佛大業)이라, 모든 부처님의 온전한 업이다. 큰 대자, 업이라는 업자는 다른 건 없고 하는 일이 그것뿐이다라고 할 때 대업이라고 하거든요. 대업달성을 하는데, 대업달성에 일도행문(大業達成 一道行門), 그 대업을 달성하는데 한 길로 행하는 문은, 일도행문, 첫 번째가 경교지송(經教持誦)이라, 경전에서 가르친 것을 수지독송하는 것이다. 두 번째가 여설수행(如說修行)이라, 경전에서 교설한 대로 따라서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세 번째가 여리증득(如理證得)이라, 이치와 같이, 이치는 뭐냐. 진실상. 가령 부처님이 깨달음을 말했다고 하면 그 깨달음의 진실상과 같이 깨달음으로, 부처님이 극락세계를 말했으면 부처님이 말한 극락세계의 진실상과 같이 왕생하는 거, 부처님이 해탈을 말하셨으면 부처님이 말한 해탈의 진실상과 같이 자기가 성취하는 거, 그걸 이치와 같이 증득한다 이래서 여리증득이라고 하고요. 그다음에 원력행화(願力行化), 원력으로, 원하는 힘으로, 실력과 원력이 있는데, 실력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익힌 대로 자기가 학습한 대로 힘을 나타내는 게 실력이고, 원력은 자기가 원하는 발원하는 걸 위해서 힘을 얻는 것을 원력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불하는 건 원력으로 되는 거지, 지금까지 익혔던 중생업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원력이라고 그래요, 원력. 그래서 원력으로 행화를 한다. 실행할 행자, 교화 화자,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진다.

       그 고통은 알겠는데, 건지는 건 뭐냐. 그건 깨달음이에요.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고통에서 건질 수가 없어요. 비유해서 말하면, 꿈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온갖 환경을 지금 맞이해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꿈에서 괴로워하는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길은 딱 하나뿐이에요. 그 꿈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고 상담을 받는데 상담에 답이 없어요. 인생 문제, 사회 문제, 생활 문제, 여러 가지 문제를 들고 가서 자기 고뇌를 이야기를 하면 마지막은 답이 없어요. 근데 그 답은 오직 하나뿐이요. 깨달아야 돼요. 그게 성불이에요. 성불. 깨달아야 된다. 깨닫는 게 답이여. 깨닫지 못하고서는 모든 문제가 그냥 있어요. 그래서 인생의 해답은 깨닫는 거다. 그걸 해탈이라고 하고 그걸 성불이라고 하고 그래요. 그럼 깨달았으면 중생을 깨우치는 거죠. 그걸 제도라고 그래요. 그게 건지는 거예요. 나를 깨닫게 해야 내가 나를 제도하는 거지, 내가 나를 깨닫게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제도할 수가 있냐.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뭘 해서 이루면 해결될 줄 아는데, 전혀 무엇을 해도, 무엇을 이루어도 인생의 고통이 해결이 안 돼요. 못 가진 걸 가져오면 해결될까. 모르던 걸 알아보면 해결될까. 이루지 못한 걸 이뤄보면 해결될까. 전혀 안 돼요. 박사학위 하나 더 받아봤댔자 괴로움만 더 생겨요. 더 작은 부자가 큰 부자 돼 봐야 고통이 더 생겨요. 나이가 들면 좋은 줄 알고 어릴 때 막 나이를 올려서 속이고 그러는데, 나이 많아지면 좋은 것 같아요? 천만에. 나이 많으면 괴로움이 더 많아. 그러니까 인생 문제는 깨닫지 못하고는 항상 고통의 성격만 변할 뿐이지 근본은 그대로 있다. 그래서 중생제도라고 하고 성불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불 해탈, 중생제도.

        근데 그 성불해탈하는 방법이 경전을 외우는 거, 이게 아주 근본이다 이거죠. 경전을 외우는 게 그게 왜 근본이냐 그러면, 아무리 땅이 좋아도 거기에 좋은 종자를 심지 않으면 그 땅이 힘을 못 써요. 그래서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에다가 근심 걱정만 자꾸 채우면 근심 걱정만 성장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거기다가 깨달음의 종자를 하나 턱 심어 놓으면, 그 깨달음의 종자가 그 좋은 내 마음 땅에서 자라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그건 종자가 자라는데 옆에 잡초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데, 그 잡초는 뽑아요. 종자는 길러요. 그렇게 되면 성불을 하게 되고 자연히 중생 제도를 하게 된다.

        근데 그렇게 종자를 심어서 기르고 잡초를 뽑아내는 그 행위가 첫째로 경교지송이라. 경교지송하는 거 이것만 계속해도 나머지가 다 이루어지고 여설수행이라, 그 말과 같이 수행만 계속해도 다른 것이 다 이루어지고. 또 중생교화만 계속 하는 게 있어요. 중생교화를 통해서 성불이 완성이 되고, 성불 완성을 통해서 중생교화가 완성되고. 보살행 중에도 관세음보살하고 지장 보살은 중생교화만 해요. 그러면 중생교화 하는 가운데 자기 성불은 다 이루어져요. 문수보살은 자기 성불에다 중점을 둬요. 자기 성불이 완성하게 되면 중생교화도 다 완성하게 되고 보현보살은 이걸 합치는 거예요. 자기성불 문수보살 수행, 중생교화 관세음보살 수행, 지장보살 수행, 합쳐서 하는 것이 보현보살 수행이거든요.

       그러니까 경전을 자꾸 이렇게 수지독송하면 내 마음에서 불종자는 하루하루 자라고, 번뇌망상 하루하루 없어져서, 거기서 온몸이 공덕의 몸이 되고 온몸이 지혜의 몸이 된다, 이거거든요.

 

朝禮鍾頌(晨鍾頌) 조례종송(신종송)

願此鍾聲遍法界 鐵圍幽暗悉皆明

원차종성변법계 청위유암실개명

三途離苦破刀山 一切衆生成正覺

삼도이고파도산 일체중생성정각

南無 昆盧教主 華藏慈尊

나무 비로교주 화장자존

演 寶偈之金文 布 琅函之玉軸 塵塵混入 刹刹圓融

연 보게지금문 포 낭함지옥축 진진혼입 찰찰원융

一乘圓教 大方廣佛華嚴經 第一偈

일승원교 대방광불화엄경 제1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그런데 이제 절에서 하는 걸 보면, 아침에 종을 확 치면서 시작하는 것을 종송(鍾頌)이라고 그러는데, 보통 종성한다 이러는데, 소리 성자가 아니고, 종을 치면서 외우는 게송이에요. 종송. 조례종송(朝禮鍾頌)이라 이러는데, 이 조례종송이라고 하는 것은 -1935년에 간행이 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라고 합니다, 100년이 다 돼가는데,- 석문의범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자세히 되어 있고, 그보다 한 200, 300년 전에 간행된 불교의식문에는 그냥 신종송(晨鍾頌)이라고만 되어있어요. 새벽 신자, 종이라는 종자, 게송이라는 송자, 신종송. 그런데 신종송 원 게송은 이 칠언사구 게송뿐이에요. 옛날 의식문에는 참 기가 막혀요. 대종을 한번 쾅 치면서 원~한단 말이에요. (). 원한다, 발원하고 축원한다. 차종성(此鍾聲), 이 종소리가, 변법계(遍法界)하여, 온 법계에 두루 퍼져서, 이렇게 출발해요. 철위유암이 실개명(鐵圍幽暗悉皆明)하고, 쇠같이 두껍고 둘러싸이고 깊고 어두운 지옥들이 다 환하게 밝아지고, 그 둘러싸고 깊고 어두운 지옥들이 다 밝아지고, 철위유암실개명, 삼도는 이고하고(三途離苦), 파도산하고(破刀山), 삼도는 삼악도인데,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에서는 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온갖 고통이 극심한 지옥이 도산지옥인데, 칼 도자, 뫼 산자, 도산지옥은 또 다 없어지고, 일체중생은 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이라, 일체중생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를 원, 원하옵니다.
       이게 한바탕 또 뻥 치면, 이 소리가 생각으로 들으면 소리인데, 지혜로 들으면 그대로 지혜본신이에요. 지혜 본래 몸이다. 이걸 이렇게 이제 보이는데, 의식과 지혜가 있는데, 이걸 의식으로 딱 보면은 그릇인데, 이게 지혜로 보면 나의 본래 몸이다, 이 말이에요. 이걸 청정법신이라고 그러고, 본래 신명이라고, 본래 몸이요 본래 목숨이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생각으로 보면 고통인데, 지혜로 보면 그 자기 본래 신명이다. 본래 신명. 근데 이걸 깨닫지 않고서는, 생각으로는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고통에서 고통을 또 만들기 때문에, 답답하네. 고통에서 고통을 또 만들어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부자 되면 행복할 것 같지, 천만에요. 부자는 부자의 고통이 있어요. 아들 나면 행복할 것 같지, 천만에, 아들 나면 아들 난 고통이 있어요. 경봉스님 법문, 어머니 시집 와서 고생하는 거 보면서도 저도 시집 가면 좋을 줄 알고 시집 가서 어머니하고 똑같이 고생한다고, 아버지 장가 가서 고생하는 거 보면서 저도 장가 가서 아버지보다 고생 더 한다고. 그러니까 이 말은 인생살이 세상살이가 뭘 해서 이루어 가지고는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다. 자기 본래 마음, 자기 본래 몸, 자기 본래 광명을 깨달을 때 그때 모든 세상사는 한바탕 꿈이었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불교다 이거죠. 그러니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지송축원이에요.

 

       1935년에 간행한 석문의범에서는 밑에 거를 전부 더 추가를 해서 엄청나게 좋은 말씀을 여기 했는데, 나무 비로교주 화장자존(南無 昆盧教主 華藏慈尊), 비로교주 화장자존, 비로자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연 보게지금문(演 寶偈之金文)하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보게금문을 연설하시고, 보배게송, 금의 문장 게송하시고, 포 낭함지옥축(布 琅函之玉軸)하야, 낭함이라는 거는 옥 궤짝에 담은, 옥 궤짝을 말하는데, 옥 궤짝에는 보통 물건을 넣는 게 아니라 책 중에 제일 좋은 책을 집어넣는 그 궤짝 함이 낭함이에요. 옥축은 옥으로 만든 두루마리를 말하는데, 그중에 제일 훌륭한 글을 두루마리 하는 가운데 나무를 옥축이라고 한다 했거든요. 그래서 화엄경은 낭함옥축이다. 낭함옥축을 펼친다. 이거를 한자가 요새 다 어려워서, 읽을 때 <> 띄어 읽어야 돼요. <> 띄어 읽어야지, 이거 안 띄면 큰일 나요. 연보 게지금문 그러면 말이 안 돼요. 연보 게집으로 안 돼요. 연 보게집, , 펼칠 포자, 낭함지옥축, 이게 한문이에요. 포낭 그러면 지옥이 되는데 포낭 지옥, 지옥출 그러면 안 돼요. .. 이게 보게금문이요, 낭함옥축이라.

       그리고 어째서 그러냐. 진진이 혼입(塵塵混入)하고, 찰찰이 원융刹刹圓融이라. 이게 화엄경 원융무애 교설인데요. 원융무애 교설. 원융이라는 것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요. 또 하나하나가 모든 것 속에 다 들어가, 이걸 원융무애라고 그래요. 하나가 모든 것 속에 다 들어가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다 들어가고, 이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화엄삼매에 들어야 돼요. 진진이 혼입하고, 티끌티끌이 모든 우주 만물에 다 들어가요. 그거는 비유로 말하면, 하나라는 숫자가 있는데, 이 하나라는 숫자가 둘에도 들어가고, 셋에도 들어가고, 열에도 들어가고, 억만에도 들어가고. 아무리 많은 숫자도 거기서 하나 빼면 안 돼요. 하나가 모든 숫자가 되고, 모든 숫자가 하나가 된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은 하나를 봐도 하나에 만족해요. 열을 봐도 열에 만족해요. 이게 원융무애라고,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근데 마지막에는 뭐냐. 마음이다. 그래서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일체불을 알려고 하면은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법계의 모든 진실성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가 다 오직 마음으로 만들었음을 알아라. 그러니까 이 말은 눈에 보이는 저 바깥 대상은 쫓아갈 일이 없고, 하나가 모든 것이기 때문에, 오직 모든 것을 관찰하는 그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일체유심조 게송을 화엄경 제일게(第一偈). 제일가는 게송이다. 이걸 떡 집어넣어서 아침종송에 이걸 만들었어요.

 

夕禮鍾頌(昏鍾頌) 석례종송(혼종송)

聞鐘聲 煩惱斷 智慧長 菩提生

문종성 번뇌단 지혜장 보리생

離地獄 出三界 願成佛 度衆生(釋門儀範,1935)

이지옥 출삼계 원성불 도중생(석문의범,1935)

 

       그리고 석례종송(夕禮鍾頌), 옛날에는 이걸 어두울 혼자를 써가지고 혼종송(昏鍾頌)이라 그랬어요. 어두울 때 하는 종 치는 게송이라고. 근데 석문에 보면은 석례종송, 저녁 석, 예불 예, 종 종, 게송 송, 저녁예불에 종을 치면서 하는 게송이다. 문종성(聞鐘聲), 종소리를 들을 때, 번뇌단(煩惱斷)하고, 번뇌는 다 끊어지고. 그럼 번뇌가 뭐냐. 나에게 고통을 주는 생각이 번뇌예요. 고통이 다 내 생각에서 일어난 거에요. 이게 참. 모든 고통이 내 생각이 만들어낸 거예요. 내 생각이 조용하면 고통도 조용해. 내 생각이 맑으면 내 행복이 맑아져요. 아니 이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근데 그 당시에는 그걸 몰라요.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이라는 거를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에는 몰라요. 꿈꿀 때는 절대 꿈인 줄을 모른다 이거거든요. 지혜는 자라고(智慧長), 보리는 생겨나고(菩提生), 지옥은 멀리 떠나가고(離地獄), 삼계의 선을 벗어나고(出三界), 성불해서 중생 제도하기를 원합니다(願成佛 度衆生). 이런 걸 이제 저녁 종 치면서 외워요.

 

       그러면 이걸 하루하루 외우다 보면 여기서 깨달음의 종자가 심어져 가지고, 점점 자라고 번뇌는 점점 없어져서, 이 몸이 지혜 몸이 되고, 이 몸이 공덕의 몸이 된다 이 말이죠.

行禪祝願 (행선축원)

願我世世生生處 常於般若不退轉 如彼本師勇猛志

원아세세생생처 상어반야불퇴전 여피본사용맹지

如彼舍那大覺果 如是教化恒沙劫 畢竟無佛及衆生

여치사나대각과 여시교화항사겁 필경무불급중생

(懶翁發願文, 懶翁歌頌集)(나옹발원문, 나옹가송집)

 

        그 다음에 행선축원(行禪祝願)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행선이라는 거는 행할 행, 참선 선자인데, 여기서 참선이라는 것도 행한다는 소리고 실천한다는 소리, 행할 행자도 실천한다는 건데, 예불하면서 기도하면서 그냥 하는 축원이에요. 절에 처음 와서 보면 예불하고 이 축원하고 반야심경하고 그러는데, 어느 절에는 이걸 잘 써서 보면서 하고, 어느 절에는 안 보면서 하는데, 나는 안 보면서 하는 게 더 좋은 건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다 외우는데 그걸 왜 보면서 하라고 하나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보면서 하는 게 그게 더 훨씬 격이 높더라고요. 표구를 해서 딱 펼쳐서 보면서 하니까, 그게 훨씬 더 깊이 오고. 행선축원이야 이거는 그냥 수행하는 축원이다. 선도 수행이고 행도 수행인데 그냥 예불하면서 하는 축원이고.

 

        근데 그거는 원아(願我), 원자가 하나밖에 없는 내용인데, 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 세상세상 태어날 때마다,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 반야에서 물러가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이게 중생에게는 의식과 반야가 있는데, 의식은 대상을 쫓아가는 행위고, 대상을 쫓아가다 보면 대상은 없어져요. 뭘 쫓아가도 없어져요. 쫓아가는 건 다 없어진다. 등산할 때 상봉을 향해서 열심히 뛰어 올라갔는데, 올라가고 나면 바라보는 건 저 밑에 자기가 올라온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거 너무 허망해. 아니 올라가는 거는 온 힘을 다해서 올라가는데, 올라가서 바라볼 때는 자기가 올라온 곳을 바라보고 있어. 그리고 또 얼마나 머무냐. 5분도 안 머물러요. 그냥 내려와 버려. 그래서 어디든지 쫓아가면 사라진다. 그래서 이 의식은 바쁘기만 바쁘지, 남는 건 하나도 없는 게 의식의 종말이에요. 의식의 종말은 바쁘기만 하지 남는 건 없다. 근데 반야는 대상이 대상이 아닌 진실을 보는 게 반야에요. 그릇은 그릇이 아니다. 이건 바로 진실상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산의 진실상이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진실상이다. 그래서 그 진실상을 보지, 그 형태 껍데기를 절대로 쫓아가지 않는 게 반야거든요. 그 반야를 실행하는 걸 수행이라고 그래요. 생각을 쫓아가는 걸 윤회라 그러고. 윤회. 되풀이한다는 거죠. 쫓아가고 또 쫓아가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필경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이라, 필경에 궁극적으로는 불과 중생이 없는 진실상에 도달하는 것을 원한다. 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일광진실, 한 광명 진실상에 도달한 게 깨달음이에요. 무불무중생 일광명 진실상 이런 거에 대해서 외우는 게 축원이죠.

頂戴頌(정대송)

假使頂戴經塵劫 身爲床坐遍三千

가사정대경진겁 신위상좌변삼천

若不傳法度衆生 畢竟無能報佛恩 (報恩者,釋門儀範)

약불전법도중생 필경무능보불은 (보은자, 석문의범)

(諸般儀式文.1694)(제반의식문,1694)

 

       그다음에 우리가 늘 하는 게송 중에 정대송(頂戴頌)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부처님은 자기가 깨닫고 중생을 깨우친 분이 부처님인데, 그 중생을 깨우친 은혜가, 다른 사람은 다 물질을 준다든지, 일을 도와준다든지 이런 건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줬다. 깨달음으로 인도한 은혜가 부처님 은혜인데, 그 깨달음으로 인도한 은혜는 무엇으로서 갚을 길이 없고 딱 한 길이 있다. 이걸 가르치고 있거든요. 가사, 설사, 정대(假使頂戴)를 하고, 정수리에 이고, 경진겁(經塵劫), 티끌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며, 신위상좌변삼천(身爲床坐遍三千)하더라도, 몸이 앉는 자리가 돼서, 앉는 평상이 돼 가지고,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차도록 두릇이 펼쳐놓는다 할지라도,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하면,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머리에 부처님을 이고, 또 내 몸이 평상이 돼서 온갖 곳에 다 펼쳐가지고 앉게 하고 하더라도, 전법도생, 부처님의 그 깨닫는 법을 전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면, 필경무능보불은(畢竟無能報佛恩)이라, 필경에,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는 무능, 없다. 옛날 제반의식문이라고, 1694년에 간행한 의식문에는 필경무능보불은이렇게 되어 있는데, 1935년에 간행한 석문의범에서는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라 이렇게 돼 있어요. 은혜를 보답할 일은 없다. 보은자도 틀린 건 아닌데 그 주어가 생략이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부처님인데요, 주어가.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에게 평상이 되어 드려도, 전법도생, 법을 전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는 없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뜻으로 보면 보불은이 맞는데, 필경무능보은자 이렇게 너무 익어져가지고 갑자기 바꾸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뜻은 거기 목적 주어가 불은이에요. 목적어 주어가. 그런 게 좀 있어요.

       그래서 이게 깨닫는 문제는 내가 나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일이고, 또 깨달음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는 결국 중생들을 깨우치는 일로만이 보답할 수 있지, 다른 것으로는 보답할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을 여기서 말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일은 내가 나를 깨우치는 일이고, 또 이렇게 독송하게 하는 것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대공덕을 이루는 길이다> 하는 것이 오늘 법문의 내용이었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