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동지기도]12월 22일 동지기도 회향 법문 2022-12-22

 

           안녕하십니까. 임인년 동짓날 진관사 법문(冬至法門)입니다.

        동지송(冬至頌)을 하나 지어봤는데요. 동지송.

 

冬至頌 동지송

陽氣始生日

양기시생일 따슨 햇살 처음 오르는 날

又見新年開

우견신년개 새해 열림을 또 한 번 본다.

赤豆白米粥

적두백미죽 붉은 팥 흰쌀의 팥죽 나눔은

希求多福來

희구다복래라 오는 해 많은 복 염원함이다.

 

 

        양기시생일(陽氣始生日) 우견신년개(又見新年開) 적두백미죽(赤豆白米粥) 희구다복래(希求多福來). 따슨 햇살 처음 오르는 날, 새해 열림을 또 한 번 본다. 붉은 팥 흰쌀의 팥죽 나눔은 오는 해 많은 복 염원함이다. 이런 내용인데요.

           동지라는 게, 동아시아 경천사상(敬天思想), 동아시아에서는 하늘을 공경하는 사상이 있어요. 경천.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걸 양기, 음기라고 그러는데, 하늘은 음양으로 움직인다. 하지에서 동지가 되면 음극양생일(陰極陽生)이라, 음이 다 해가지고 양이 생기는 날이다, 이렇게 믿어요. 음극양생일. 그런데 이 양이라는 것은 햇빛으로 느껴지는데, 음이라는 것은 달빛으로 느껴지고. 동짓날이 되면 새로운 햇빛 양기가 처음으로 올라오는 날이다, 이렇게 믿는 거예요. 그래서 몸을 깊이 수련해보면 동짓날 아침에 햇빛 양기가 올라오는 기운을 몸이 느낀다는 거예요. 그걸 몸 체자, 인식할 인자, 체인(體認)이라고 그래요. 체인. 하지가 되면 그 더울 때도 그 서늘한 음기가 올라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이게 천명(天命)인데, 하늘의 명령인데, 이 천명을 잘 따르면 순천(順天) 생존을 하고, 이런 음양순환 천명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역천(逆天)인데 멸망한다, 이렇게 가르쳐요. 순천은 생존하고 역천은 멸망한다.

            그리고 하늘의 이치가 음양 24절기로 표현이 되는데, 일월은 영측하고(日月盈昃), 해와 달은 둥글면 기울어서 줄어들고, 한래는 서왕이라(寒來暑往), 추운 것이 오면 더운 것은 간다. 이 일월영측 한래서왕, 이거를 잘 따르는 게 이게 순천 생존이에요. 순천하면 생존한다, 역천하면 멸망한다 이거죠.

             그런데 이 공자 같은 사람은 철저히 천명 존중을 믿었거든요. 천명을 존중해야 된다. 나이 들어서, 어디 가서 기도해 보자고, 더 오래 살 수 있는지. 그러니까 기도할 데가 있느냐?” 물었어요. 니구산이라고, 우리가 태산이라고 알고 있는 산이 있잖아요, 유명한 산이 있잖아요. “니구산에 가서 기도해보자.”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무소도야(無所禱也)니라, 하늘의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늙으면 죽는 게 하늘의 이치인데, 하늘의 이치를 거역하고 더 오래 살려고 하는 거는 하늘의 이치에 거스르는 거다. 이게 순천 생존이거든요. 순천하면 생존한다. 그러니까 이 추위가 올 때는 추위를 잘 막아서 몸을 보호해야 돼요. 더위가 올 때는 더위를 잘 식혀서 몸을 보호해야 돼요.

             이렇게 돼서 순천을 계속 잘 해가지고, 나중에는 이을 승자, 하늘 천자, 승천을 해요. 하늘의 이치를 몸으로 이어. 주자라는 사람이 대학 서문을 지으면서 계천입극(繼天立極)이란 말을 썼어요. 하늘을 이어서 이렇게 법을 세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그 지극히 선한 경계에 딱 멈춰야 된다. 지선에 멈춰야 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인데, 이런 게 동아시아 경천사상이거든요. 하늘을 공경하는 사상. 처음에는 순천하고, 그 다음에는 하늘을 이어 승천을 하고, 그 다음에는 계천입극을 하고, 하늘을 이어서 법을 세워서, 지어지선하고, 그 하늘의 이치에 그쳐야 된다는 거예요. 이탈하지 말고 그쳐라.

             그래서 이 공자라는 사람은 70이 되니까 아무리 행동을 해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더라. 여기에서 이제 멈추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천명 천리에 어긋나지 않아. 공자도 별 수 없어요. 처음에는 이걸 배웠어요. 그다음에 여기 뜻을 뒀어요. 그다음에는 이걸 할까 말까 움직이질 않아요. 40이 되면 부동이에요. 이제 50이 되니까 지천명(知天命)이라, 하늘의 명령이 틀림없이 있구나, 이걸 50대 안 거예요. 변수가 없는 거예요. 60이 되면 어떤 말을 들어도 거슬리지 않아요. 그걸 이순(耳順)이라 그래요. 70이 되면 이제 어떻게 행동을 해도 천명에 벗어나질 않아요.

            그러니까 그런 문화가 불교 오기 전부터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동짓날 되면 새로운 양기가 시작되니까 새로운 한 해를 또 맞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추위를 잘 막고, 천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욕불경심(人慾不敬心), 사람의 욕심으로 하늘을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멀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인욕으로 불경을 하게 되고. 천리에 순응하는 것을 도심이라고 그러는데 서양에서는, 도의 마음은 경천을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불경한다, 공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천명을 거스리는 인간 욕심의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붉은 팥죽의 음식을 먹어요. 그 붉은 거는 인간의 재앙을 물리치는 거거든요. 재앙은 천명을 불경하는 데서 온다. 그러면 그 흰쌀은 뭐냐. 재앙을 물리치면 천명을 이어받아서 지선에 머물게 된다는 거예요. 지극한 선행도에 머물게 된다. 이래서 흰 쌀로 죽을 쒀서, 또 오래오래 살라고 옹심이를 만들고. 팔십 세 된 사람은 옹심이 팔십 개를 먹어요. 100세 된 사람은 옹심이를 100개 먹고. 흰쌀 덩어리 하나가 한 살로 보면 그렇고요. 그거를 10살로 보면 한 덩어리에 10살씩이다. 그러면 100세 되신 분들도 10개만 드시면 되고. 그건 수명이라고, 덩어리는 수명이거든요. 쌀은 순천 생존이에요. 하늘의 명령에 잘 따라서 길이길이 생존한다, 이런 거거든요. 

             근데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동아시아는 또 사계절이 분명해서 계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근데 이거는 결국 하늘의 명령에 잘 순응하니까, 우리처럼 그런 해탈이나 극락이나 성불이나 이런 건 없습니다. 해탈 극락 성불은 불교에서. 하늘의 명령에 잘 순천해서 생존하고 지극한 선법에 늘 머물러서 하늘을 받드는 이런 거는 현세에 살아가기에 참 좋은 가르침이거든요.

             그리고 조상도 사당에 위패를 모시는데 한 5대가 지나가면 그 조상이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고 믿어요. 혼은 날아가고 몸은 흩어진다고. 그래서 사당에 보면 위패를 이렇게 덮개를 씌우는데 평소에 절대 안 열어놔요. 혼이 흩어진다고. 제사 지낼 때만 열어놓고, 보통 때는 알묘(謁廟)라고 그러는데, 뵈일 알자, 사당 묘자, 알묘라고 그래서 옆에 딱 들고 있다가 절하자마자 탁 닫아요. 그래서 5대 가면 이제 그 위패를 치워요. 위패를 묻어요. 그래서 하나하나 선대 조상은 물러가라. 5대까지만 이렇게 딱 하고 그러거든요. 그게 이제 다 순천사상이예요. 하늘에 순종하는 거. 이게 기운인데, 천지 기운인데, 5대 조상의 기운은 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혼은 날아가고 몸은 흩어진다. 이제 모든 몸이라는 거는 혼비백산을 한다 이거거든요. 

            그래서 동짓날이 추운 날인데도 어떻게 되냐. 새로운 한 해의 햇살 기운이 솟아나는 날이니까 두 가지를 다 해야 돼요. 새해맞이 준비도 해야 되고, 또 추위를 잘 막아서 건강 보호하는 일도 해야 되고. 그래 가지고 따스한 햇살이 처음에 올라오는 날인데, 이거는 새해의 열림을 또 한 번 보는 날이다. 그래서 동지 되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하는 게 이런 뜻이거든요. 붉은 팥죽, 흰쌀이라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려고 하는 욕심의 재앙을 물리치고, 하늘을 따라서 복을 받는 근거를 키우고 오래오래 장수하려고 흰쌀 덩어리를 만들어서 먹고, 이런단 말이에요. 팥죽을 나누는 것은 오는 해에 많은 복을 염원한다.

            근데 불교는 뭘 믿느냐. 인연법을 믿어요. 불교에서 독특하게 가르치는 게 인연법이에요. 인연법이라는 건 불교밖에 없어요. 모든 것은 말미암아에서 일어난다. 인연법. 하늘에 의해서, 하늘에 맡겨서 되는 걸 석가모니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연에 의해서 되니까 인연을 잘 지으면 된다.

            이런데 여기서 이제 문제는 항상 생기는 거예요. 금생에는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냐. 그래가지고 삼생 인연으로 이제 얘기를 해요. 삼생,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 과거생부터 인연법이 있어서 그렇다. 

그럼 유가에서는 금년에는 천명을 어긴 일이 없는데 왜 재앙이 나오냐. 그걸 무망지화(無妄之禍)라고 그래요. 무망, 없을 무, 허망할 망, 허물 망자라고 그러는데, 허망할 망자를 허물 망자라고, 무망지화, 나에게는 허물이 없었는데 화를 입는 수가 있어요. 그게 전쟁통에 사망을 한다든지, 어디 지나가다가 산사태가 나서 죽었다든지, 갑자기 홍수가 나서 몸을 잃었다든지, 이건 무망지화예요. 자기 허물없이 받는 화는 성인도 불면(不免)이라고 했어요. 이거는 성인도 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무망지화와 역천 재앙을 혼동하면 안 돼요. 스스로 역천해서 재앙을 받는 거는 자기 책임이지만, 조심을 다 해서 순천을 했는데 화를 당하는 것은 무망지화라, 허물없는 화라, 그걸 허물 물으면 안 돼요. 근데 홍수 났는데도 천벌 받았다. 이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이건 유학 전혀 모르는 소리고, 인간 도리에도 안 맞는 거예요. 홍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망지화거든요. 허물없는 화라. 근데 홍수 났는데 천벌 받았다. 이런 소리는 아주 무식한 소리고 악담이에요. 이건 절대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갑자기 불이 나서 집이 없어졌는데 천벌 받았다. 그러면 안 돼요. 불을 내면 그거는 자기 허물이지만, 갑자기 불이 나서 없어진 거는 그건 무망지화예요.

            불교로 말하면 그건 전생부터 있었던 거지 금생 일로 된 게 아니다. 그래서 저쪽에는 무망지화를 얘기를 하고, 불교는 삼생 인연을 얘기를 해요. 전생 인연도 있고, 금생 인연도 있고, 내생 인연도 있다. 불교는 전부 인연법이에요. 그래서 원력수공이 그렇게 중요해요. 원을 세워서 공덕을 닦는 거. 이게 이제 불교거든요. 인연법을 얘기하고. 

그런데 불교에서 해탈법을 쭉 실천하는데, 첫째는 지옥아귀축생 삼악도에서 해탈하는 거. 그러면 그걸 인도에 환생하고, 극락에 왕생하는데, 인도 환생, 천상 왕생, 이게 이제 복 받은 거거든요. 이게 삼도 해탈이에요. 지옥아귀축생 삼악도에서부터 인간으로 돌아오면 해탈하고, 천상으로 올라가면 또 해탈이거든요. 그다음 해탈은 생사 해탈이에요. 생사, 나고 죽는 이걸 고해라고 그러는데, 나고 죽는 이 생사 상속, 생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에서부터 해탈하는 거를, 벗어나는 것은 생사해탈이라고 해요. 그다음에 이 해탈도 그걸 딱 지키려고 보니까 그것도 뭔가 구속됨이 있어요. 그래서 해탈 해탈이라고 그래요. 이걸 해탈해서 해탈하는 거. 그러면 어떻게 되냐. 본래 열반 생사가 본래 없었던 본래 생사 없는 안락 세계, 그걸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 생사 없는 안락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이 이제 수성해탈에서, 닦아서 이룬 해탈에서, 본래 해탈로 돌아가는 거지요. 근데 본래 해탈은 해탈이라고 안 하고 열반이라고 그래요.

            근데 그 후에 용수 마명이 딱 나와서 보니까, 해탈이나 열반이나 생사나 극락이나, 그걸 아는 놈이 있더라는 거예요. 아는 놈. 극락인 줄 알고, 열반인 줄 알고, 생사인 줄 알고, 그런 놈이 하나 있더라는 거지요. 근데 석가모니는 해탈하라, 열반에 들어라만 얘기를 했지, 그것까지는 말을 잘 안 했어요. 너무 깊은 얘기에요. 열반에 들면 저절로 알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걸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그러는데, 열반도 열반지견이 있어요, 열반을 알고 보는 거. 또 해탈을 알고 보는 거, 해탈지견, 열반지견, 그게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이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와서는 그거를 가르치기 시작을 했어요. 해탈도 알고, 열반도 알고, 그걸 깨달은 분들을 조사라 그래요. 조사. 근데 그거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극락을 얘기하고, 해탈을 얘기하고, 열반을 얘기하는 것이 아주 큰 법당 근본 불사일이고, 그것까지 아는 것은 잘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법당 뒤에, 옆에 조그맣게 조사당을 지어놨어요. 조사당이 법당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거는 일체중생을 다 인도할 만한 게 못 돼요. 그거는 최상승(最上乘)이라고 그래요. 대승도 더 올라가서, 최상승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마음 땅 법문을 하는 거예요. 심지법문. 큰 절을 가면 대웅전 크게 있는데,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가르치는 곳이고, 뒤쪽에 가면 조사당이 하나 있는데 그거는 마음 땅을 가르치는 데예요. 조사당.

            그럼 그 마음 땅이라는 것을 뭐라고 보냐. 우리 몸이 있는데, 이 몸을 감고 있는, 이 몸인 줄 아는, 또 이 몸을 보호하는 마음 하나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이 몸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이 몸의 본래 면목이다. 본래 면목. 이 몸은 생겼다 사라지는데, 이 몸이 생기기 전부터 있고, 이 몸속에 있고, 이 몸이 없어진 뒤에까지 있는 본래 면목이 있다. 또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그 본래 면목은 아버지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지위가 없어요, 무위. 그러니까 참사람이야. 참사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그래서 그것을 그냥 한 생각이라고 그래요. 이 한 생각에 해탈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생사의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이건 전부 몸으로 말하면 알몸이 아니고, 적나라한 알몸이 아니라, 몸에 입혀진 옷이다, 껍데기다, 이거에요. 그래서 생사도 껍데기고, 남녀도 껍데기고, 극락도 껍데기고, 열반도 껍데기고, 그 본래면목, 무위진인, 영명일념(靈明一念), 신령스럽게 밝은 한 생각, 신령 령자, 밝은 명자, 이 영명일념이 있어서 극락인 줄도 알고, 나고 죽는 것도 알고, 안다 말이에요. 죽는 줄도 알고 사는 줄도 알고, 그 영명일념, 본래면목, 무위지인, 그런 걸 딱 알아가지고 바로 고놈을 지적을 한단 말이죠. 본래면목을 바로 지적을 해. 그걸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그래요. 곧을 직자, 가르칠 지자, 곧게 가르친다, 바로 가르친다, 사람의 마음을. 해탈도 알고 극락도 알고 생사도 알고 좋은 것도 알고 나쁜 것도 아는 그 마음을 바로 가르쳐 버려요. 경전도 안 가르쳐요. 교외 별전이라고. 불교 밖에 따로 전해준다 이거지요. 

             그래서 일념자(一念子), 한 일자, 생각 념자, 아들 자자인데, -아들 자자는 어조사고, 모자, 탁자 하는 식으로 어조사고,- 일념, 한 생각, 다 한 생각인데, 이 한 생각에 대한 송도 하나 지었는데요. 일념송(一念頌)이라고.

 

一念頌 일념송

圓明一念子

원명일념자 둥글고 밝은 한생각

無始無終極

무시무종극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和應一切法

화응일체법 모든 것과 함께 하지만

諸相悉不得

제상실부득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원명일념자(圓明一念子)가 둥글어서 끝이 없는데 밝다 이거에요. 찾아보면 몸이 없는데 밝아. 이걸 밝아서 아니까 몸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묘체(妙體)라고 그래요. 묘할 묘자, 몸 체자, 묘체가 있는데, 그 묘체가 둥글다. 그게 항상 밝다. 그래서 묘체가 원명하다. 마음은 찾아보면 없어요. 근데 항상 알거든요. 그랬더니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무시무종극(無始無終極)이라. 언제 시작이 됐는지 시작도 없고, 언제 끝나는지, 마칠 종, 다할 극, 끝나서 다 없어지는 종극이 없어요. 이게 나인 거예요. 이놈을 하나 딱 알고 나면 모든 게 이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예요. 이 몸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인데, 전도몽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모르고,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에 계속 매달리니까 그걸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전도라고 하는 건 뒤바뀌었다. 뭐냐.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걸 전도몽상이라고 하거든요. 뭐가 무너지는 걸 본다. 그러면 무너지는 걸 볼 줄 아는 원명한 한 생각, 그것이 나인 거예요. 그런데 그 무너지는 대상만 쫓아가서 막 괴로워하는 거예요. 이게 전도 몽상이에요.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하늘이 무너져도 항상 둥글고 밝고, 몸이 없어져도 항상 둥글고 밝고, 무가애(無罣礙) 무가애고, 걸릴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하루를 지나가는 것들은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춰진 그림자다. 그게 난 거예요. 깨닫는다는 건 그걸 깨닫는다는 거에요. 이 몸의 나에서 원명일념의 나로 바뀌는 거예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의 나로 바뀐다. 그러면 인생 일평생이 일장춘몽이에요. 그 둥글고 밝은 나를 알면 인생 일생이 일장춘몽이다. 한바탕 봄 꿈 꾸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뭘 자꾸 입으려고 그러는데, 이 몸 없어지면 내가 이루어놓은 거 다 소용없어요. 그런데 왜 이루다 죽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집 안을 계속 청소하는데, 그 집 나중에 포크레인 와서 다 뜯을 때는 여름에 청소한 거 아무 소용 없어요. 이 몸 건강하려고 애를 얼마나 썼는데 화장막에 딱 들어가면 몸으로 챙겨 먹고 보살피고 한 거 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또 검을 때는 검은 거 알고, 없어질 때는 없어지는 거 아는 거,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은 무시요 무종극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걸 깨닫는 게 자기 본래 면목을 찾는다. 지위에 없는 참사람을 만난다. 자성청정심을 안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게 어려운 게 아니라 안 해서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게 보이고 들리는 밖으로만 밖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그걸 찾을 생각도 안 하고, 돌아볼 생각도 안 하고, 눈에 보이는 거 우선 가지려고 그러고, 귀에 들리는 거 쫓아가려고 하지 그걸 돌아보지 않아요. 근데 그런 말을 듣고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을 딱 찾아보려고 하면 저절로 저 대상이 없어요. 대상이 텅 비어서 보이질 않아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을 딱 돌아보면 저절로 온갖 번뇌 망상 근심 걱정이 싹 없어져 버려요. 대상도 없어지고 근심도 없어지고. 그게 두 번째 단계예요. 세 번째 단계는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그런 둥글고 밝은 생각을 환히 보게 돼요. 그게 세 번째 단계에요. 그러면 네 번째 단계는 뭘 봐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니까 거기에 쫓아가지도 않고 그걸 물리치려고도 않고 그냥 자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둥글고 밝은 것이 뭐냐. 여공일념이라, 허공과 같은 한 생각이다. 또 여경(如鏡)일념이라, 거울과 같은 한 생각이다. 일념은 여공이요 일념은 여경이다. 여공일념이라고 그러는데 허공과 같다, 비유인데.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왜 해도 있고 달도 있고 지구도 있고 사람도 있고 다 있는데 진짜 허공에는 해가 허공이 아니에요. 달이 허공이 아니고 사람이 허공이 아닌 거예요. 여공일념이 허공과 같은 한 생각이라고. 여경 일념이라는 건 거울을 보면 거울을 비치는 데는 다 거울의 그림자가 보이는데요. 그 거울 자체는 거기엔 뭘 갖다 대도 비춰지는 거 하나도 없어요. 거울에 환히 비춘다고 해서 거울 뒤에 가서 만져보면 하나도 걸리는 게 없어요. 그거와 같다. 이런 깨달음으로서 근본적인 인간 문제를 해결하는 거는 불교에서 가르치는 아주 아주 심각한 가르침이고 아주 진실한 가르침이거든요. 이게 어려운 게 아닌데 믿지를 못하고 하지를 않아서 그래요. 마음 챙겨보는 거 너무 쉬워요.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뭔가. 자연히 경계가 없다는 걸 알아요. 이걸 경공(境空)이라고 그래요. 경공. 경계가 공했다. 저게 있어서가 아니고, 아무리 보이는 거라도 저걸 부숴보면, 먼지가 돼서 다 날아가고 흔적이 없어요. 보이는 게 그냥 형태로 보일 뿐이지 본질이 없다. 이걸 색공(色空)이라고 그래요. 색이 공이다. 그러면 이 색이 공한데 색이 공한 것을 스스로 자꾸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하는 것은 생각인데, 이 생각을 또 돌아보면 생각도 자체가 없어요. 이걸 염공(念空)이라고 해요. 염공. 생각이나 마음 심자나 같이 쓰니까 심공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색공 염공에 딱 들어가면 자취는 없는데 항상 밝은 원명, 둥글고 밝은 그것뿐이에요. 그걸 철저히 증득하면 얻는단 말이죠. 그럼 뭘 봐도 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이걸 알게 돼요. 이 몸도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 비추어진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고, 하늘 속에 떠다니는 물체처럼 그림자다. 그래서 그걸 어떤 큰스님은 신령스럽고 밝다고 그래서 영명일념(靈明一念)이라고 했어요. 영명일념. 본성 그대로 안다고 그래서 성각일념(性覺一念)이라고 그래요. 본성 성자, 알 각자, 감각이라는 각자 있잖아요. 깨달을 각. 성각일념, 영명일념. 그리고 많이 쓰는 게 제사 지낼 때나 언제나 쓰는 게 원명이라는 말은 많이 써요. 둥글고 밝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일념송인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화응일체법(和應一切法)이라. 일체법에 다 응해요. 하늘이 나타나면 하늘을 알고, 땅이 나타나면 땅 알고,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 알고. 화응을 해요. 화할 화, 응할 응. 일체법과 함께 한단 말이죠. 일체법과 모든 것과 함께 하지만 제상실부득(諸相悉不得)이라, 어느 것도 그 둥글고 밝은 한 생각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없어요, 그냥 둥글어, 묘체예요. 그냥 밝아.

            근데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이걸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증명해 낼 수가 없어요. 이건 오직 체험할 뿐이에요. 그래서 이 과학 불교가 안 된다는 거예요. 과학 불교. 깨달은 불교가 되고 과학 불교는 안 된다. 그런데 과학 불교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이 불교 역사를 알고 불교 경전을 아는 데는 필요하지만, 실제로 둥글고 밝은 걸 체험하는 데는 학문도 역사도 문자도 다 떠나서 그런 걸 돌아봐야 돼요. 이게 불교가 과학이지만, 과학을 초월해야 불교지, 과학에 끝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거예요. 과학은 생사업이고, 죽고 사는 업이다 이 말이지요. 이 불교는 반야업이에요. 이 둥글고 밝은 걸 지혜로 봐서 구경해탈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이 마음은 하나도 없는데 전체를 다 봐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諸惡莫作 衆善奉行

제악막작 중선봉행

自淨其心 是諸佛教(法句經)

자정기심 시제불교(법구경)

諸惡莫作 名爲戒 衆善奉行 名爲慧

제악막작 명위계 중선봉행 명위혜

自淨其心 名爲定 (六祖壇經)

자정기심 명위정(육조단경)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心 淨心益深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심 정심익심

正覺因緣 大智出現 菩見三世 寂光常照

정각인연 대지출현 보견삼세 적광상조

 

            그러면 이게 사람마다 이제 다 틀리니까 크게 세 가지를 가르치는데, 첫 번째는 그런 걸 깨달으려면 여러 가지 장애가 있으면 안 되니까 제악을 막작하라(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마라. 이 악의, 제악의 장애가 이게 엄청나요. 그다음에 중선을 봉행하라(衆善奉行). 온갖 선을 받들어라. 그러면 이 장애는 없어지고 복덕이 깊어져서 이 지혜의 문으로 들어가게 돼요. 그리고 자정기심하라(自淨其心). 그 마음을 맑혀라. 이 세 가지가 해탈도예요. 해탈로 들어가는 길이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고 마음을 맑히고 이게 해탈도 거든요. 가르치는 거는 인연법과 요 일념 한 생각이에요. 인연법을 가르치고 한 생각을 가르치는 게 여기 가르치는 내용이고, 또 실천하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고 자정기심, 그 자기 마음을 맑혀라.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칠불에 있는데, 비바시불부터 석가모니불까지, 칠불이 다 가르쳤다고 그래서 제불교(諸佛教)라고 해요. 제불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마음이 점점 맑아지면, 정심이 익심(淨心益深)하면 딱 밝아져요. 청정한 마음이 점점 깊어지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확 떠져요. 눈이 떠진다는 거는 경계는 하나도 없고 생각도 하나도 없고 오로지 둥글고 밝은 것이 온 천지를 다 덮어요. 그게 대웅이라고 그래요. 크게 웅장하다고. 모든 일체만법이 둥글고 밝은 그 한 생각에 비추어진 그림자지, 실체가 없어요. 이거 부서봐야 실체가 없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상태도 실체가 없어요. 그래가지고 대지가 출현(大智出現)한다. 깨달은 인연으로 대지가 다 출현하면 둥글고 밝은 한 생각이 시방법계를 다 보고, 과거 현재 미래에 삼세 업겁을 다 봐요. 이걸 보견삼세(菩見三世)라고 그러는데, 그래가지고 적광이 상조(寂光常照). 둥글고 밝은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치는 거예요. 항상 비춰요. 무소분별(無所分別)하고 무소부지(無所不知)하고, 둥글고 밝은 한 생각뿐이고, 경계는 하늘도 하늘이 아니고 땅도 땅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분별하는 바가 없어요. 이걸 전부 갈라보고 없애봐야 없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상태로 그냥 없는 걸 다 안다. 이걸 무소분별, 분별하는 바가 없다. 마음으로. 이걸 쪼개보고 시비하고 이렇게 분석하는 바가 없다. 이걸 무소분별이라고 하거든요. 분별하는 바가 없어요. 부처님한테. 그래서 눈을 크게 뜰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눈을 이렇게(지긋이) 뜨고 있어요. 이거 분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눈을 지긋이 떴고 달마는 아예 벽 보고 앉아버렸어요. 이제 볼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볼 게 하나도 없고, 생각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분들이죠, 말하자면. 그래서 적광이 상조야.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추는 거지,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고, 있고 없고가 아니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그러니까 팥죽 잘 드시고 기도 잘해서, 악은 점점 줄이고 선을 점점 키우고, 줄이고 키우고 마음을 점점 맑히는 이렇게 한 생각을 깨달아서 고요한 광명이 항상 비추는 세계로 가는 겁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