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백중기도] 7월 21일 백중 3재 법문 2024-07-21

 

         예, 안녕하십니까. 이 우중에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이제 백중 3재인데, 우리가 이제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복이죠. 그래서 복의 씨앗을 뿌리는 곳, 그러한 그 복의 씨앗을 뿌리는 복전을 불교에서는 여러 방면으로 제시를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부분에 복을 짓는 게 뭐냐 하면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과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 두 가지가 복을 짓는 그 분량 중에 가장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해마다 이렇게 백중에 기도에 동참을 하시고, 또 사찰에서 기도를 한다라고 하면, 기도에 또 참석을 하시고, 그러한 여러분들의 그 마음의 저변에는, ‘내가 이렇게 기도에 참석하고, 백중 기도에 동참을 하고 그러면 복도 받을 수 있고, 앞으로 좋은 일이 많아지겠지.’ 이런 생각이 아마 여러분들 마음 저변에 깔려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하고 동참을 하고 하면 복을 받는다 또는 좋은 일이 생긴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어디에 근거를 해서 이런 것들이 성립이 되고 또 이루어지느냐 할 것 같으면은, 모두 인과의 도리에 의해서 성립이 되고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 인과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배나무에 배가 열리고,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여러분들이 배추씨를 심으면 배추 싹이 나오고, 무씨를 심으면 무 싹이 나옵니다. 그것이 인과예요. 그런데 이제 더 깊이 들어가면 인과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인과가 성립이 되고, 또 사람의 정신과 육체 사이에도 인과가 성립이 될 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사람의 내면이든 외면이든 전부 다 인과가 성립이 되고, 또 일체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다 이 인과율이 적용이 되고 성립이 되기 때문에, 보편적인 원칙이다, 보편적인 원리다라고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이 인과율을 우리는 진리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생각이 요즘 세대의 사람들은 너무 이 인과에 대한 것을 생각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건망증이 심해서 위험한 지수에 이르지 않았나 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보아집니다. 그래서 산업사회 이전까지는 그래도 좀 덜했는데, 이 과학문명에 의존하는 세대에 와서는 더 심해져서, 그야말로 인과는 전혀 무시를 하고, 심지어는 미신이다라고까지 치부해버리는 이러한 결과가 발생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과를 무시하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해도 관계가 없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이 되기 때문에, 자기한테 이롭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이 인과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그런 부분인데, 이 인과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정확하냐 하면은, 숫자라든가 기호라든가 이런 것을 사용하지 않아도 아주 분명한 그러한 수학이고, 실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명백한 과학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봉숭아 나무에 봉숭아 꽃이 피고, 복숭아 나무에 복숭아가 열리는 거 이것은 미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느끼는 실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인과는 없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거꾸로 된 그러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제 옛날에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이 인과를 굉장히 믿어요.그러니까 어머니가 자식에게 말하기를 뭐라고 그랬냐 하면은 아가야, 인과는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믿지 마라. 만약에 인과로 인해서 니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로 인해서 너한테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그걸 대신 다 받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애가 잘못하다가 칼에 손을 베었어요. 그러니까 애가 아이고, 엄마 아파, 아파그러면서 손가락에 피를 흘리면서 엄마 아픈데, 이 아픈 거를 엄마가 대신 아파주면 안 되느냐고 조금만 아파주면 지가 덜 아플 텐데, 이거 너무 아프다는 거죠. 그럼 대신 아파줄 수 없겠느냐 하니까, 이 엄마가 대신 아파줄 수가 없잖아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해도 별 볼 일이 없어. 그래서 그 조그마한 칼에 베인 그 아픔도 대신해 줄 수가 없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길흉화복이라든가 생사윤회에서 일어나는 인과응보를 어떻게 대신해 줄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한 행동은, 자기가 한 행동은 자기가 반드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고, 인과응보 역시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여러분이 살고 있는 자기 인생, 자기 인생은 내가 과거 전생에 일으켰던 생각의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를 통해서 그 그림자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그 행동으로 옮겨서 생긴 업을 통해서 지금 현재 나의 지금 생활이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생활은 나의 인생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준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구를 원망한다? ‘나는 부모가 나한테 재산을 안 줘서 이렇게 힘들다, 나는 누구 때문에 힘들다이런 말을 한다면은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천금 만금을 물려줘도 그것을 지킬 지혜와 복이 없으면 1년도 안 돼서, 3년도 안 돼서 다 까먹고 거지가 됩니다. 부모가 한 푼도 안 물려줘도 본인이 지혜가 있고, 부지런하고 하다면 없는 재산을 일으켜서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얼마만큼 지혜를 개발하고 얼마만큼 열심히 잘 사는가에 따라서, 자기의 삶은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본질은 하나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것을 이해를 잘못하고 남의 생명을 함부로 하는 그러한 경우가 더러 있죠.

        그래서 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청나라 때에 어떤 사람이 성은 후씨고 이름은 사육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굉장히 특별한 재주가 있었어요. 전생에 좀 선업을 지어서 그런지 몰라도. 근데 이제 그 특별한 재능이 어떤 쪽으로 재능이 있었느냐 하면, 원예, 이제 꽃이나 이런 채소나 또는 나무나 이런 것을 가꾸는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그쪽으로는 아주 재주가 대단했거든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이제 그 재주를 인정해줘서 아주 돈도 많이 벌고 이제 잘 살아서 나이 30이 되었을 때 장씨 가문의 아주 예쁜 처녀, 인물도 예쁘고 단정하고 아주 이름이 높은 그 처녀에게 청혼을 해서 청혼이 성사돼서 이제 결혼을 얼마 앞두고 있는 거예요. 이제 한 한두 달 앞에 결혼을 하도록 아마 다 정해져 있는데, 그러기 전에, 이 사람이 원예 작업을 하다가 개미집을 발견했어요. 했는데 그 개미집을 보니까 굉장히 개미집이 크고, 그 굴도 넓고, 굉장히 큰 개미집을 봤는데, 이 사람이 뜨거운 물을 펄펄 끓여가지고 그 개미집에다 부었습니다. 붓고는 그 개미들이 뜨거워서 몸부림을 치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쾌락을 느꼈다 이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결혼을 한두 달 앞둔 어느 날 꽃밭을 가꾸는데 뭐가 따끔해요. 그래서 보니까 뭐가 부르키고, 그러더니 옆에 또 부르키고, 부르키고, 삽시간에 온몸이 다 그렇게 부르켜서 물집이 잡히면서, 물집이 터지면서, 터지는데 그 물집이 터지면서 개미가 한 마리씩 나오더라는 거지. 그래 갖고 따갑고 쏟는 느낌, 쏟는다 그러죠. 따갑기만 한 게 아니라 막 피부가 이렇게 찌르고 솟구치는 것 같은 느낌. 여러분이 벌에 쏘여 보면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탁탁탁 쏘는 것 같이 막 열이 나고 하는 거, 그런 느낌이 들면서 온몸이 계속 그렇게 돼서 결국 결혼을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이제 그 개미를 죽인 그 업으로 이런 일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 개미를 죽인 것이 인이고, 이렇게 참 좋은 결혼을 앞두고 죽게 된 것이 바로 결과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살생을 하되 어쩌다가 실수로나, 아니면 뭐 한두 마리나 이렇게 생명을 해친 것은 금생에 바로 오지를 않아요. 다음 생에 받든, 그다음 그다음 생에 받든 하지만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생명을 해쳤을 때는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이 금생에 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가지는 <아버지를 만 달러에 팝니다>라는 광고가 미국 어느 신문에 실렸어요. 자기 아버지를 만 달러에 판답니다. 왜 파느냐고 하니까, 그 판다고 광고를 낸 그 글에 뭐라고 돼 있냐면은, 10년 전부터 아버지가 중풍과 치매에 걸려서 음식도 제대로 못 드시고, 치매가 걸렸으니까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하니까, 대소변도 받아내야 되고, 그렇게 모시는데 10년 동안 모시다 보니까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도저히 못 모시게 생겨서 아버지를 만 달러에 판다는 거예요. 그런 광고가 났는데 어느 날 어느 젊은이가 전화가 왔어요. 그 아버지를 사겠다는 거지. 그래서 그 판다는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서 아니 환자를 사가지고 가면 굉장히 힘들 텐데, 소대변도 받아내야 되고, 음식도 제대로 못 드시기 때문에 먹여드려야 되고, 그런데도 사가지고 가겠느냐그랬더니 사가지고 가겠대요. “왜 사 가지고 가려 그러느냐, 그게 힘들 텐데.” 그러니까, 그 전화를 한 사람이 말하는 게, “자기네는 지금 이제 결혼을 해서 두 부부가 아이도 둘이 있고 같이 사는데, 두 사람이 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부모라는 명자도 모르고, 형제라는 이름도 모르고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네 생각은 항상 아버지라고 불러보고, 어머니라고 불러보는 대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늘 마음에 그게 소원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결혼해서 그렇게 부자로 살지는 않지만 먹고 살 만은 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아버지를 사다가 모시고 시봉을 하면, ‘아이들한테도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부를 대상이 있어서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를 사 가지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판다는 사람이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한 일주일 더 생각해 보고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만 달러를 가지고 와서 사가지고 가라”, 그러고는 주소를 일러줬어요. 그래서 이제 일주일 후에 그 사겠다는 젊은이가 주소로 찾아서 그 판다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가니까 미국에서도 그야말로 잘 사는 부자 동네, 아주 큰 부자 동네에, 집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그런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 보니까 그런 집이라. 이 젊은 부부가 너무 가난하고 부모를 모시기가 힘들어서 판다, 그런 줄 알았는데, 너무 잘 사는 동네에 집도 너무 크고 좋고 그래 잘못 찾아왔나 싶어서 확인을 해보니까, 명패하고 주소하고 틀림이 없어. 그래서 이제 벨을 누르니까 일하는 분이 나와서 이제 문을 열어주고 이제 같이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집도 으리으리하고, 마당에 수영장이 있고, 집 안에 들어가 보니까 호텔처럼 잘 꾸며놨고, 그렇게 잘 사는 집이라. 근데 그 이제 집에 아주 점잖은 노신사분이 한 분 앉아 계신 거예요. 그래서 그 노신사분이 이 젊은이한테 진짜로 아직 생각이 안 바뀌었냐그러니까, 이 젊은이들이 자기네들이 생각할 때는 아주 가난해서 아버지를 못 모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어서 어리둥절해서 서 있으니까, 그 이제 노신사가 아직도 생각이 안 바뀌고 그 아버지를 사갈 마음이 있느냐그러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노신사가 하는 말이 사실은 내가 광고를 낸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재산은 많은데, 자식이 없어. 그래서 착하고 선한 자식을 만나고 싶어서, 이런 거짓 광고를 냈으니까 자기를 사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제 젊은이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노인이 하는 말이, “너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이제 아들이야, 지금부터. 그러니까 내가 가진 이 집과 재산 모두를 너희에게 주겠노라.”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변호사를 불러서 어서 가서 너희 집에 있는 손자 손녀 다 데리고 여기 와서 나하고 같이 살자.” 그래서 이 사람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확 부자가 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마음을 어떻게 잘 쓰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그냥 그야말로 횡재를, 로또 당첨처럼 된 것보다 더 더 큰 횡재죠. 이런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은 정말 사랑,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정신, 모든 사람을 거두고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 그 치매에 걸리고 그 중풍에 걸린 그런 환자라도 아버지로 모시고 봉양하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한 마음, 이러한 넉넉한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정말 하늘이 복을 내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효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내가 나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신 분, 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은혜를 입은 분에게 그 감사한 것을 다시 그분들에게 되돌려드리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효도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이 우주의 섭리하고 부합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가난한 효자가, 효자가 가난하다면은 부자가 되고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절로 됩니다. 되어서 모든 것이 척척척척 이루어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내 편안함만 생각하고 ,모든 그 의리나 이런 것은 전부 다 무시하고 정말 그 이기주의적인 그러한 사람은 되는 게 없습니다, 사실.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이런 원리를 다시 한 번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 어떤 참 효도의 마음을 가진 며느리가 있었어요. 근데 시아버지가 홀시아버지라,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시아버지를 모시는데, 참 지극정성 잘 모셨습니다. 근데 이제 어느 날 시아버지가 장날에 장에 이제 바람 쐬러 간다고 가셨어요. 갔는데 해가 저물었는데도 안 돌아오셔. 그래서 이제 남편은 아버지 찾으러 간다고 먼저 나가고, 이 부인이 아기를 업고 문앞에 서서 남편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오나 안 오나 하고 왔다 갔다 서성거리다가, 한참을 그래도 아무도 안 나타나. 그래서 자기 집에서 그 장을 가려면 언덕 고개를 하나 넘어가야 돼. 그래서 천천히 그 고개를 이제 오르면서 두 분이 오시면 이제 마중하는 겸, 그 문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것보다 올라가서 마중을 해 와야 되겠다 하고 천천히 올라가다 보니까,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시퍼런 불 두 개가 보여요. 저게 뭔가 싶어서 천천히 다가가 보니까 큰 호랑이가 앉아 있는데, 바로 그 앞에 자기 시아버지가 술에 취해가지고 오다가 아마 그 돌에 의지하고 잠이 들었어. 근데 마침 이 호랑이가 그 시아버지를 덮치려고 하는 순간 이 며느리가 안 돼소리를 지르면서 호랑이 앞을 딱 막아섰습니다. 막아서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도 모르게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서 호랑이 앞에 내려놓으면서 호랑이님 제가 이 아이를 드릴 테니까 우리 아버지는 살려주십시오하고는 그 시아버지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뛰어서 자기 집에 왔어요.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아이는 벌써 호랑이한테 줬고, 시아버지는 모시고 왔어요. 자기도 자기 정신이 아니라. 그러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니 여자가 어떻게 시아버지를 업고 내려왔을까,’ 무겁다 안 무겁다 이런 분별할 시간이 없어. 그러니까 무조건 업고 그냥 집에까지 달려오는데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집에 와서 보니까 신발은 벗겨졌고 온몸은 상처가 났고 막 엉망진창이지만, 아이는 또 이제 호랑이한테 주고 왔고. 그래서 이제 시아버지를 이렇게 다시 이제 주무시도록 해드리고 밤새 마음이 아팠겠죠. 그래서 날이 샜는데 날이 새니까 이제 시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내가 어젯밤에 어떻게 왔지 온 기억이 없는데그러시더니 좀 있으니까 우리 손자 어디 갔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며느리가 어저께 있었던 일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니까 이 시아버지가 막 깜짝 놀라면서, 이 늙은이가 정신없이 그냥 술을 너무 마셔가지고, 친구를 만나서 뭐 한 잔 두 잔 먹다 보니까 그래 됐다고 막 놀래갖고, 도대체 애를 어디다 두고 왔냐고, 두고 온 데 가보자고 막 언덕을 뛰어 올라가니까, 이 며느리가 따라 올라갔어요. 따라 올라가서 그 자리에 가보니까 호랑이도 없고, 애도 없고, 아무도 없어. 그래갖고 두 사람이 이제 기운이 빠져서 내려오면서, 며느리도 울고 이제 시아버지도 울고 내려오다 보니까, 동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왜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나 싶어서 그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보니까, 그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집이 있는데 그 잘 사는 집 노적가리 위에 아이가 하나 있다는 거야. 그 아이가 어째서 저 노적가리 위에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동네 사람들이 지금 모여서 다 그러고 모였다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막 정신없이 쫓아가서 보니까, 그 노적가리 위에 있는 아이가 자기네 아이야. 그래서 우리 아이라고 막 가서 아기를 안고 그러니까, 그 노적가리 그 부잣집 주인이 어떻게 애가 여기 와 있냐물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노적가리 주인이 너무 감동을 해서 뭐라고 말했냐면은, “이 노적가리는 저 아이의 몫이다. 그러니까 노적가리를 아이한테 주겠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노적가리를 전부 다 옮겼는데 그것이 100섬이나 돼, 100. 그래서 이 사람들이 그거를 팔아서 논도 사고 밭도 사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근데 이런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은 들으면,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 지금 무슨 그런 일이 있어? 이거 현실하고 전혀 동떨어져서, 있을 수도 없어.’ 아예 이쪽 귀로 듣고 이쪽 귀로 흘려버리지, 자기 자신이 그러한 마음의 100분의 1이라도 내가 한번 부모에게 잘해봐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분은 진정으로 공덕을 받을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백중을 기해서 여러분도 그동안에 부모에게 좀 무심했다면은, 이 기회를 통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해서 복을 지을 수 있는, 복을 짓는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세계라는 것은 장벽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 마음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가 우리 마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에, 무량한 삼천대천세계를 한 생각에 품을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러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은 신비하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 우리 한마음이 우주의 삼천대천세계를 우리 한마음에 다 품을 수 있다라는 거예요. 그만큼 우리 마음은 정말 대단한 능력도 가지고 있지만은, 신비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그러한 존재가 우리 마음입니다.

         그래서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사람은 심리학자예요. 이 칼 구스타프는 초등학교 학생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융은 인류의 복합적 연구를, 복합적인 심리 상태 무의식 상태를 연구를 하면서, 인류의 공통적인 꿈을 조사를 했어요. 그렇게 조사를 해서 이제 사람이 살아가는데 꿈이 인간에게 어떤 관계와 어떤 영향을 미친다라는 것을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우리의 현실과 정신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또 이 꿈이라는 것은 저승과 이성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라고 본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 꿈에,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보면, 나타나면 그날 재수가 있는 그런 분도 계시고, 또 부모님을 보면 그날은 뭐 되는 일이 없는 이런 분도 계시고, 또 가끔 가끔 부모님이 나타나셔서 뭐를 일러주기도 하고, 그런 걸 지금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도 더러더러 경험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죽음 너머에 저승에 계신 이런 영가님들과 우리와의 소통의 통로가 바로 이 꿈이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지닌 모두 영체들입니다. 그래서 저승의 영가들과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항상 이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꿈을 통해서 이러한 영가들과의 소통을 할 수가 있는데, 만약에 꿈에 나타난 그 부모님이나 조상님들의 모습이 괴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거나 그런 모습이라면, 저승에 계시면서 고통을 받는 그러한 모습이고, 편안해 보인다면 저승에서도 편안하게 잘 계신다라고 보면 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장보살본원경에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 세상의 중생들이 만약에 꿈에 조상이라든가 또는 조상이 아니라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그런 어떤 영가들이 나타나서 괴로운 모습, 힘들어하는 모습, 또는 운다든가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전생 내지 10생 전, 백생 전, 천생 전에 부모거나 형제거나 이런 나하고 인연 깊은 영가들이 고통 속에서 헤매면서 살아있는 육친, 골육들에게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정성을 다해서 지장경을 읽는다든가 지장 기도를 정성스럽게 해준다면, 그 영가들이 다 천도를 받고 절대로 꿈에 나타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근데 이 지장보살님은 그 원력이 대단하십니다. “일체중생, 지옥 중생을 다 성불시키지 않으면 당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라는 큰 원력을 세우신 분이고, 그분의 그 가피력과 원력과 공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영가와 죽은 영가를 동시에 다 천도하고 제도할 수 있는 가피력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고, 그분이 가지신 그러한 특별한 힘은 어두움을 없애주는, 어둠을 없애고 광명을 주는 그러한 능력을 갖고 계세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백중을 맞아서 기도를 할 때에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서 기도를 한다면, 정말 이제 여러분의 다생 부모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향상을 꿈꿀 수 있다. 그래서 지장보살님의 신통력과 가피력으로 영가와 여러분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백중을 기해서 천도를 올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돌아가신 그분들의 마음을 깨우쳐서 정말 그분들의 삶이 달라지도록 하는 데 우리가 이 기도하는 근본 목적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영가님들이 생각을 만약 바꾸게 되면 얼마든지 좋은 곳으로 환생할 수 있는 그러한 길도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여러분이 기도한 공덕을 영가에게 회향을 해주게 되면, 그 회향 공덕을 입어서 올바른 곳으로 갈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그러한 문제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우리의 그 한 생각이, 한 생각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여러분들이 잘 파악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 선업으로 바뀌게 되면, 그 선업으로 바뀐 우리 마음의 파장이 돌아가신 영가에게도 미친다는 겁니다. 미쳐서 돌아가신 영가가 천도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마음 자세에 따라서, 그 영향이 돌아가신 저 죽음 너머에까지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하는 마음, 정말 착한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 공덕이 여러분의 조상들도 저들에게도 영향이 되고, 조상뿐만 아니라 수없이 우리가 오며 가며 스친 모든 인연들, 이런 인연들까지 다 함께 도움을 주고, 공덕을 주는 이제 이러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게 실제 이야기인데, 이제 어느 분이 이웃의 노인 한 분이 계셨는데 혼자 계시다가 고독사 비슷하게 돌아가셨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꿈에 그분이 나타나서, 자기를 재를 지내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꿈을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아무 연관도 없는 노인인데 재를 지내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그 꿈에 와서 부탁까지 했는데 또 그냥 지나기가 마음이 찜찜한 거예요. 그래서 정성을 다해서 재를 지내드렸답니다. 그랬더니 재가 끝나고 나서 다음에 이제 꿈에 와서 너무 감사하다고. 자기가 이제 좋은 곳으로 간다고. 자기 자식들은 전부 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믿어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부탁을 했노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이제 가셨는데, 그러고 나서 이 집이 사업이 너무 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재를 지내드려서 그렇게 잘 되는구나, 이렇게 참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불자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자세를, 마음 자세를 가져야 되느냐 하면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목표가,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데 목표를 둬야 돼요. 백중 기도를 하든, 48일 기도를 하든, 아니면 정월 기도를 하든, 그 어떤 기도나 동참을 하더라도 여러분의 근본 목표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데 근본 목표를 두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말씀드리면 아이고 스님들이야 뭐 완전히 모든 걸 다 놓고 수행을 하시니까 생사윤회를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우리들이야 마을에서 살림하고 뭐 하고 하는데, 언제 생사윤회를 벗어납니까? 그냥 복이나 받고, 명이나 길고 막 그러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런가요? 생사윤회 벗어나겠다는 생각 좀 안 해보셨죠? 그런데 생사윤회를 벗어난다라는 큰 목표를 가지면, 그 목표 속에 명 받고 복 받는 거는 그 속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큰 목표를 딱 세워서 기도하고 영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는 모든 공덕과 모든 것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는 보리의 자리로 회향을 한다면은 여러분들은 평소에 그냥 복 주시오, 명주시오 하던 그 공덕보다 배나 큰 공덕과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제 이렇게 점점점점 기도하고 수행하고 닦아나가다가 보면, 무구무원의 경지에 이르면, 무구무원의 경지라는 것은 아무것도 구함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는 경지, 그 경지에 들어가면 여러분이 생각만 일으키면 그 자리에서 다 현실화가 돼요. 그러니까 그것이 더 여러분이 이익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물론 무구무원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목표를 그렇게 크게 세우고, 정말 내가 사찰에 다니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이 목표는 <내가 진정으로 생사해탈을 해서 무한한 자유의 세계에 내가 1인자가 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도 하고, 염불도 하고, 그런 마음으로 하면, 나 아닌 조상 영가라든가 나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축원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공덕이 부처님, 우리 손자 서울대학에 합격하게 해주세요.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요런 사소한 공덕에 비하면, 여러분이 큰 마음을 먹고 생각을 바꿔서 목표를 세우게 되면, 그 공덕이 더 3, 4, 10배 큰 공덕을 얻게 되고, 여러분의 정신과 육체가 그렇게 향상이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여러분이 진관사에 와서 봉사활동을 할 때도 힘이 나고, 정말 활기가 차고, 이러한 자기 마음에 에너지를 충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의 근본을 삼고 기도에 임하시고, 또 열심히 기도 정진하셔서 조상님들도 천도하시고 여러분 자신도 제도하는 그러한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