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특강] 8월 11일 백중 6재 특강 2024-08-11

 

  

<역사에서 길을 찾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좀 키높이라서 제가 앉아서 할게요. 이렇게 오늘 진관사에서, 또 이렇게 많은 신도님들 함께, 제가 갖고 있는 지식,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돼서 매우 영광이고요. 저는 물론 아까 말씀대로 기독교 신자, 이대는 기독교 신자만이 총장이 됩니다. 또 제가 이화여중, 이화여고, 이화여대 나오면서 그때부터, 중학교 때부터 신앙을 가졌는데, 우리 할머니는 엄청 불교 신자셨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이제 경국사 많이 갔었고, 진관사도 또 따라왔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공부하는 게, 제가 유불선을 다 넘나든다 하는 게, 불교 천년의 역사, 유교 600년의 역사에서, 제가 세계유산 유네스코 유산을 사찰 7개를 만들었고, 서원 9개를 세계유산으로 만들고, 지금은 한지, 우리 종이, 불교에서 제일 많이 보존해온 전통 한지 또 유네스코 유산 만드는 작업을 하고, 그리고 이제 진관사 수륙재를, 아마 수륙재 때마다 제가 축사를 했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다 무형유산이죠,- 지금 작업을 하면서, 진관사를 자주 오면 일단 우리가 마음의 평온을 찾아요. 마음의 정원이라고 하시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 보물이 여러 보물이 있는 중에 여기가 음식, 사찰 음식이 세계적이잖아요. 문화 도량이고 또 수륙재나 천년의 역사의 도량이고, 그리고 또 계율의 도량이에요. 회주 스님이 지난 6월달에 삼귀오계를 받으시고 계율의 도량이 되셔서, 저는 보물이 지금 우리 계호 회주 스님하고, 또 우리 법해 주지 스님이 엄청 똑똑하세요. 그러니까 스님으로도 훌륭하시지만, 아주 모든 지식이 해박하셔서, 제가 아주 함께, 지금까지 모든 일을 함께 하는데, 저도 응원하고 서로 응원하면서, 세상이 좀 지금 각박해지잖아요, 또 너무 도덕적인 게 없어지잖아요, 또 너무 마음이 편안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우리가 정말 그 슬픔, 상처받지 않는 그런 세상을 좀 만드는 일을 지금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런데 이제 또 11시 반부터는 또 다른 행사가 있다 그래서 실제로 시간이 많지 않아요. 우리 교수들은 조금 시간을 많이 줘야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데, 시간을 딱 40, 50분 하니까 제한이 되지만, 오늘 시간 되는 대로 이제 여러분들하고 좀 우리가 생각해야 될 역사 그리고 미래, 이거를 좀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다 여러분들도 역사가 있고, 고향이 있고, 부모가 있고, 또 진관사도 역사가 있고, 또 흘러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원하고 용서하고 배려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 다 제 이름이라 그래요. 제가 이배용인데,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자. 그래서 제가 아마 진관사하고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들을 우리가 함께 하기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맨날 미래를 걱정해요. AI 디지털, 또 요즘에 제가 국가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너무 학교가 황폐화돼 가요. 폭력이 난무하고, 아이들이 안전하지 않고, 또 선생님들은 존경받지 못하는 그런 풍토에서, 저는 학교는 정말 선생님이 존경받고, 학생은 사랑받고, 그러면서 학부모들이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그런 터전을 만들어줘야 돼요. 교육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럴 때 우리가 아무리 디지털 AI 시대라도 제일 찾아야 되는 게 인성이거든요. 인성이고 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성장하는 걸 바라지, 불행하기를 바라는 학부모나 지도자는 없다는 거죠. 그런 면에서 우리가 걱정만 하지 말고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서, 마음을 모아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이제 불교의 영역에서도 하지만, 또 종교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포용하고 감싸주면서, 우리의 내일의 길을, 우리의 선한 마음으로 영향력을 좀 미쳤으면 좋겠다. 착한 사람은 그래도 나중에 뭔가 보람을 얻게 됩니다. 착한 일. 제가 전통 유산을 사랑하는 거는 악하게 만든 건 다 없어져요, 어느 순간에. 사람들이 감동을 못하니까. 그러나 선한 마음으로 창조한 거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 뜻을 기려서 계속 지금도 전국을 다니면서 우리 문화유산을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길을 지금 놓고 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또 진관사도 함께 하시는 거죠. 우선 우리가 오래된 미래라고, 이제 리더들이 앞장서서 우선은 잘해야 돼요. 그러니까 진관사가 이렇게 지금 많은 분들이 찾아오고, 또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거는 우선 리더들이 잘하신 거죠. 백초월 스님이나 진관 스님이나 또 계호 회주 스님이나 우리 법해 주지 스님의 이 리더십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터전이 있어도 앞으로 이끌어 갈 수도 없고 그 뜻을 새길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부터 저는 많은 강연을 하면서, 크고 작은 곳에 리더는 있어요, 동아리조차도 회장이 있잖아요, 그럴 때 저는 제일 먼저는 시대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된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어느 현상이 있어도 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그런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있어요. 지금도 진관사, 오늘만 보면 안 되고, 얼마나 많은 그런 우리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국행 수륙재를 하신 곳이잖아요. 국가가 여기를 선양하신 곳이라. 그리고 역사를 알면 오늘날 우리가 세계화 시대에, 저는 이게 유엔 정신에 딱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미래는 어떻게 함께 풀어가야하나. 그런 시대적 통찰력이 있어야한다. 제가 역사에서 제일 높게 평가하는 분이 선덕여왕하고, 신라의 27대 선덕여왕하고, 조선왕조 4대 세종대왕을 보면 정말 이분들은 특출한 리더들이에요. 그런데 이 리더들이 제일 잘하는 건 사람 볼 줄 아는 거예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혜안이 있고, 많은 후계자들을, 후배들 또 차세대들을 육성하신 분들이에요. 좀 이따가 이제 선덕여왕, 세종대왕 얘기를 집중적으로 하겠지만. 그런 시대적 통찰력은 우리가 오늘만을 사는 게 아니다, 내일에 우리가 디딤돌을 놔야 돼요. 아무리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씨를 뿌리고 가꾸는 마음을 우리가 잊으면 안 돼요. 그래서 역사는 긍정의 힘으로. 저는 삐딱한 사람 제일 싫어해요. 긍정하는 사람, 비가 와도 좋고, 해가 나도 좋고,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이런 것이 과거를 보면 감사하고 긍정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는 승리를 했더라고요.

       두 번째는 균형과 조화와 화합의 지혜예요. 리더는 강한 것도 약한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헤아리고 아우를 줄 알아야 돼요. 다 다르잖아요. 지금 여러분들도 함께 오셨지만, 사정은 다 다르잖아요. 이런 데서 다 아우를 수 있는. 그래서 저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바이올린도 첼로도 플룻도 다 함께 그 아름다운 선율로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그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거죠. 그래서 균형과 조화와 화합의 지혜.

       그다음에 세 번째로는 도덕심입니다. 정직해야 되고. 요즘에 너무 내로남불. 도덕심이 땅에 떨어졌다는 그런 건 종교가 가르쳐줘야 돼요.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는 도덕성을 가장 중요하게. 이따가 삼귀오계도 얘기하겠지만, 거짓말하지 말고 이거 제일 중요한 것이잖아요. 정직하고. 그래서 리더는 도덕심이 있어야 존경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나는 개차반같이 하고, 남 보고 존경을 해라 그건 아닌 거죠. 그런 데서 도덕심.

        그리고 이제 네 번째는 애국심이, 요즘에 너무 우리가 나라에 감사, 나라를 지켜야 된다는 이런 것들이 너무 지금 약해지고 있는 거죠. 그런 데서 안 가르치니까. 애국가 4, 아마 여기 진관사에 오신 신도님들은 애국가 4절은 외우리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행사 때마다 애국가 4절을 많이 함께 하자 그러면 다 당황해요. 다 못 외운다는 거예요. 일 절만 외지. 근데 우리가 어렸을 때 많이 불러서 그걸 부르는 거 하고, 그냥 애국가가 뭔지도 모르는 거 하고 다르잖아요. 이번에 올림픽 보세요. 금메달 따니까 막 태극기 올라가고, 애국가 하니까 얼마나 가슴이 울컥하고 정말 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이 있잖아요. 애국심이 바로 애민 의식, 우리 지금 국민이라고, 만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마음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섯 번째는 관용의 리더. 리더는 냉정하면 안 돼요. 냉정함은 아무것도 안 봐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지. 그러나 따뜻하고 포용하고 관용하면 다 사정이 보이게 돼 있어요. 그래서 관용,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된다. 연민, 사랑, 이게 제일 중요해요. 그래야 우는 아이도 보이지. 세종대왕께서 실록에, 제일 먼저 제가 감동을 한 게, “길 잃은 아이 부모 찾아줘라.” 그러니까 바쁘신 분한테도 길 잃은 아이가 보이고 우는 아이가 보여요. 우리가 그걸 찾아야 돼요. 우는 아이들을 우리가 잘 보듬고 키워줘야 돼요. 이게 저출생을 극복할 수 있는, 낳은 아이더라도 우리가 잘 키워서 감싸줘야 되는 리더의 다섯 가지 덕목입니다.

 

       1939년에 인도의 영혼이라는 간디가 그 시절에도 사회가 굉장히 무질서하고 나라가 망할 징조가 보이니까 7가지 해소해야 될 폐단을 얘기했어요. 첫 번째는 원칙 없는 정치. 그러니까 작년에 다르고, 또 올해 한 말 다르면, 누가 믿고 따를 수 있겠어요? 원칙 없는 정치. 이게 사회를 망하게 한다 이거예요. 두 번째는 노력 없는 부. 우리가 땀 흘려서 일해서 결실한 거와 공짜로 얻은 거는 쓰임새가 달라지는 거예요. 공짜로 얻은 건 귀한 줄을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거는 귀해서 거기서 나눔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노력 없는 부. 그다음에 세 번째는 양심 없는 쾌락. 노는 것도 적당히 놀아야죠. 어저께 놀고, 또 내일 쉬고, 모레 쉬고, 이러면 누가 생산을 해요. 그런 징조가 보이니까 이게 나라 망하게 생겼다, 그래서 이걸 선포하신 거죠. 그래서 양심 없는 쾌락. 그러니까 오늘도 이렇게 일요일 날, 정말 여러 가지 행사에도 참여하시고, 또 강의도 들으시는데 여기 조는 분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 데서 제가 여기는 정말 내 이야기 보따리를 마음껏 풀어놔야 되겠다.’는 그런 또 신뢰가 생기는 거란 말이죠. 그다음에 네 번째는, -요즘에 제가 국가교육위원장으로 이제 여러 국무회의에도 참여하면서, 또 여러 가지 사회에 이루어지는 현상에서 우리가 진짜 제일 갖춰야 될 건 인성이다,- 인성 없는 지성. 그런 데서 지식도 중요하죠. 당연히 배워야 힘이죠. 아는 것이. 그러나 그 속에는 그 마음속에 바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인성. 그래서 간디도 그 얘기했어요. 인성 없는 지성이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는 인간성 없는 과학이다. 과학은 발달해야 돼요. 저도 비행기 탈 때마다 저는 인문학자라 이 비행기 만든 사람 참 위대하다,’ 막 뜨니까. 그런데 그러나 절제가 있어야 된다. 지금 유전자 복제, 게놈 프로젝트에서 하는데, 인간이 뭐 몇백 년 살고, 또 돼지 복제를 지나서 이제는 사람도 복제. 저는 우주 가고 이런 건 좋아해요. 편리하게 하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가 너무 절제 없이 사람 복제하면 안 돼요. 사람을 복제하면 이배용이 못하면 복제한 인간이 오면 그건 가짜잖아요. 이런 데서 우리가 절제 있는 과학의 발달이 필요하다. AI도 필요해요. 그러나 윤리 있는 AI를 만들어야 돼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과학의 시대에 꼭 우리가 기본 가치는 지켜야 될 것,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그다음에 이제 여섯 번째는 윤리 없는 상업. 우리가 뭐 이렇게 신용이 제일, 저도 브랜드 위원장을 할 때 제일 브랜드의 최고는 신용이에요. 신용. 그래야 그 국가가 평가를 높이 받아요. 아무리 잘 살아도 평가 안 합니다, 신용이 없으면. 그러니까 우리가 옷 잘 입는다고 존경받는 거 아니잖아요. 돈 많다고 존경받는 거 아니잖아요. 그런 데서 제일 중요한 건 언행일치의 신용, 모든 것에. 그래서 상업도 우리가 이거 뭐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니야뭐 이러면서 불신을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 데서 윤리 없는 상업, 이거는 해소해야 된다. 일곱 번째는 희생 없는 신앙. 이 종교라는 건 이타행이고, 정말 인간의 세속적인 걸 승화시켜야 돼요. 너무 탐욕스러운 걸 승화시키면 청정하게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도 필요하고, 이타행도 필요하고 한데, 우리 요즘에 너무 기복 신앙으로 가지 않는가. 요즘에 그래도 백중 기도하시면서 부모님한테 감사, 나라의 조상들한테 감사, 이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간디는 7가지 했는데, 내가 또 하나 덧붙일 거는, 하나는 역사 잊은 민족. 역사를 보면 시작과 결말이 다 끝난 거. 제가 그래서 사극도 많이 자문해주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다 역사를 보면 해답이 있는데. 그래서 류성룡선생이 징비록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걸 반성하는 거 쓰셨잖아요. 근데 마지막에 앞에 가는 수레바퀴가 넘어지는 걸 보고 내 수레바퀴를 못 고치면 또 넘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에 다 해답이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아무리 시작이 거창해도 무너지는 거. 그러나 작은 시작도 잘 진정있게 갖고 오면 성공하는 거. 역사에 다 해답이 있는데 그냥 찰라적인 욕망과 욕심 때문에 무너지는 거. 우리 너무너무 많이 봤잖아요. 절제관. 그게 이제 종교가 필요한 거죠.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뭔가 의지하면서 당당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거다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하나 제가 9번째로 하는 거, 준비 없는 미래. 맨날 미래가 중요하다고 촐싹대면서, 준비를 해가야죠. 우리가. 우리가 무슨 국가적 난제가 있거나 사회적 난제가 있다면 진정성을 가지고 그 실마리를 풀어가야 돼요. 그래야지 미래가, 좋은 미래가, 밝은 미래가 다가오지, 그냥 가만히 놀다가 미래가 오면 달라지겠지,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열 번째는 애국심 없는 정치예요. 정말 이 나라 어떻게 지켜왔어요? 정말 마지막 끝에 있는 이 반도를 우리 조상들이 그 우여곡절로 해서 어떻게 지켜왔어요?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 일제에 다 망한 줄 알았는데 35년 만에 찾았잖아요. 내년이 광복 80주년입니다. 바로 그런 데서 우리가 다 애국심으로 찾은 나라예요. “아 그냥 뭐 이제 어쩔 수 없지, 그냥 노예같이 살지이러면 이 나라 찾았겠어요? 그래서 내년 80주년 광복을 기해서 저는 진관사가 중심에, 수륙재 자체도 애국심의 도량인 거죠. 그런 것을 우리가 더 힘을 모아서 지켜드리자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이제 당태종 때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아주 그게 가장 당태종이 금과 옥조, -이세민이죠.- 옥조로 삼았는데, 제일 많이 쓰는 게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 그렇잖아요. 민심의 바다가 따를 때도 있고, 잘못하면 뒤집어 엎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군주는 배이고, 우리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어, 그러니까 겸허하자 이거죠. 역사 앞에 겸허하고 하늘을 볼 때 경건하게 봐요. 두려워할 줄 알아야 돼. 사람은 다 못 봐도 하늘은 다 보잖아요. 앞과 뒤와 속을 다 볼 수 있잖아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리더가 더 겸손하면서 포용적으로 갈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서 또 뭐라 하냐면 군주가 넘어지려 할 때 부축하는 신하가 있느냐. 그 얘기는 진정으로 직언해서 지켜줄 수 있는 신하가 있느냐. 그러니까 여하튼 우리가 혼자는 못 합니다. 여기 법해 주지스님 계시죠. 선우 총무스님, 다 이렇게 또 신도님들이 다 받쳐드려서 진관사가 세계적인 으뜸 도량, 모범 도량으로 갈 수 있는 것이지, 혼자는 못하는 거잖아요. 그런 데서 좋은 사람이 많이 있어야 돼요. 이걸 알아볼 줄 아는 리더가 성공하는 거. 그래서 이거 빨리 이제 넘어가는데 시간이. 그러니까 이런 신하들을 둬야 되는 거죠. 충성하는 신하, 허물을 잡아주는 신하, 지혜로운 신하, 잘 법을 지키는 올곧은 신하, 직언하는 신하. 그러니까 내 얼굴에 때가 있는 거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가르쳐줄 수 있는 그런 신하가 필요하다 하는 거죠. 좋은 소리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렇다고 또 나쁜 소리만 하면 그 힘이 없어요, 되게. 잘한 거는 잘했다고 받쳐드리고, 뭔가 조금 삐뚤어 갈 때는 그래도 조심스럽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그래서 선덕여왕하고 세종대왕이 성공한 리더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거기에 정관에 보면 머릿수만 채운 신하, 아첨하는 신하, 마음속은 간사하고 참언, 이간을 일삼는, 전횡하는 사악한 요런 것들은 두지 말라는 거지. 이런 데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잖아요.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힘을 합하느냐가 성공의 가늠길이 된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죠.
       그래서 저는 역사를 전공했고, 한국사를 전공했고, 정말 많은, -우리 시대는 대학원생 몇 명 안 돌아올 시대니까,- 아주 최고의 역사학자 선생님들한테 그냥 진짜 몇 명이 과외하듯이 굉장히 천착하면서 해서, 제가 삼국유사 이런 거 그때 다 외어요. 그래서 제가 공부로 불교를 많이 보고, 또 그때 제가 1969년에 대학원에, 이대인데, 이제 선생님이 이대에는 안 계셔가지고, 서강대학에 아주 제일 고매한 역사학자, -그러니까 서강대학이 경제학파고, 역사학파가 가장 훌륭한 곳인데,- 이기백 선생님이라고 불교의(께 배웠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는 고전은 다 불교가 중심이었잖아요. 그래서 많이 지방에, 그 시대는 여행 관광 이런 거 없을 때 많이 다녔어요. 그런 마음이 지금 우리 역사를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고, 아니까, 나는 이거를 세계로 선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제가 지금도 끊임없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만들어서 세계인들이 우리에게 오는 길을 놓아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우리가 이제 주로 법고창신(法古創新). 너무 우리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배우질 못해서, 다 그냥 옆에 있으니까 아는데, 실제로 하나, 지하철 2호선에 선릉역이 있어요. 그렇죠, 그리고 봉은사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럼 선릉에 누가 잠들어계시죠? 이 능이잖아요. 우리 2009년에 조선왕릉 40개가 세계유산으로 됐어요. 서울에 8개 있고, 경기도에 31, 저 영월의 장릉 한 개. 거긴 단종이 쫓겨가서 죽은 곳이라, 돌아간 곳이라. 그러면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은 다 알아. 그럼 누가 계시죠? 근데 선릉역도 또 아니야. 사실 선정릉이에요. 선정릉. 선릉은 조선왕조 제9대 성종 임금하고 부인인 정현왕후가 이렇게 동원이강으로 묻히신 곳이고, 바로 등성이 넘으면 정릉이라고, 지금 정릉에 있는 신덕왕후릉이 아니고, 선릉이라는 그 테두리 울타리 속에 중종릉이 있는 거예요. 조선왕조 11대 그래서 선정릉에. 그러니까 다 리더들이 지금 묻혀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 옆에 있는 학교도 별로 관심 없으니까 이렇게 되면 아까 얘기했듯이 역사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동네라도 좀 한번 우리 역사 유적을 한번 살펴보시면, 창의성, 상상력, 자긍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저는 항상 법고창신, 새로운 시대로 창의적으로 열어가기는 꼭 그렇게 해야 되지만, 옛날을 모범으로 잘된 걸 모범으로 삼아야지, 그것도 모르고 그냥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그럼 얼마나 소모가 되고, 거기에 많은 지혜를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사실 옛날에는 전인교육을 했어요. 전인교육이라는 건, 우리가 과학을 하면 과학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지덕체 해가지고 많은 걸 함께 가리키니까, 굉장히 지금 이제 와서 융합하는데, 이미 우리 선조들은 융합 교육을 시킨 거예요. 도덕 교육, 지식 교육, 그러면서 실천 교육, 다 시킨 거란 말이야. 이를테면 요즘에는 이게 시험이, 제가 이제 제일 이걸 고쳐야 되는데 채점 때문에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그 수능을 봐요. 오지 선다형이잖아요. 그렇잖아요? 5개에서 하나만 찍으면 돼. 애들은 찍는 거에 능하지, 논술하고 이렇게 쓰는 거에는, 글씨도 잘 못 써요. 요즘 애들이 저는 사학과 교수니까 한 번도 ox 오지선다 내본 적이 없어, 다 논술로 써서 채점하기가 매우 어렵죠. 거기다가 수능하면 또 공정성의 문제가 있으니까 지금 실행을 선뜻 못하고. 그렇게 가야 돼요. 옛날에 선비들은 학지지서(學之之序)라 그래서 첫 번째는 박학이에요. 요즘에는 애들이 책을 안 읽어요. 아마 여기는 좀 다르실 거라고 보지만, 독서를 많이 해서 지식을 넓혀야 돼요. 그게 박학(博學)이에요. 첫 번째 단계가. 그다음에 두 번째는 옛날에는 뭐 질문도 안 하고 외우기만, 그거 아니에요. 심문(審問)이라고 그래서 깊이 질문을 해야 돼. 알아야 질문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박학 다음엔 심문, 깊이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질문할 수 있게 되는 거. 이게 이건 어떻게? 이런 질문이 알아야 나오는 거지, 모르는 애는 질문도 없는 거죠. 모르니까. 그다음에 세 번째는 신사(愼思), 신사라는 건 신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질문을 통해서 얻은 해답을 가지고 신중하게. 그러니까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는 거야. 요즘 교육이 그게 없어요. 그저 그냥 주입식으로 찍는 거를. 생각을 해주는 거야. 그다음에 네 번째가 명변(明辯). 명변이라는 건 그런 과정을 통하면 명석한 논리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글을 쓸래도 논리가 있어야 되는 거죠. 명석한 논리가 생기는 거. 그다음에 이제 다섯 번째는 독행(篤行), 알면 실행하라.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좋은 것은 실천해야 되는 거죠. 이런 과정을 거치고 옛날엔 염치없는 인간을 제일, 그야말로 배워 먹지 못하고 사람같이 안 보는 거죠.

       그래서 사단칠정(四端七情)하면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이게 인의 마음이에요. . 자비롭고 그야말로 사랑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그다음에 수호지심(羞惡之心). 이거는 이제 부끄러워, 이게 염치야, 부끄러워 지는 이게 의, 옳을 의, 정의, 의리. 저는 의리 없는 인간을 제일 싫어하는데, 우리가 인연을 맺었으면 의리를 지켜야 되요. 한결같은. 그게 의, 정의로움, 의리. 그다음에 세 번째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 아마 여기 자리를 잡으실 때도 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양보하시고, 이렇게 우리가 무재칠시(無財七施)도 있잖아요. 좌석 양보하는 게 돈보다도 좀 좋은 보시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다음에 이제 우리가 또 하나 꼭 가야 될 게, 그건 이제 예고, 사양지심은 예고, 인의예. 그다음에 시비지심(是非之心). 거기서 이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옳은 건 하고 그른 건 버려야지. 시비지심, 이게 지혜. 그러면서 그걸 포괄하는 게 믿을 신인 거예요. 이 땅같이 굳건하게 버텨주는 믿을 신(仁義禮智信)이에요. 오늘도 아마 진관사에 대한 믿음으로, 저도 또 진관사에 대한 믿음으로 오늘 함께 모여서 제가 말씀드리고 듣고 이런 하나의 시간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진관사가 또 하나는 계율의 도량이잖아요. 삼귀오계(三歸五戒), 이 거룩한 부처에 귀의하고, 또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에 귀의하고, 거룩한 승려의 말씀에 귀의하면서, 오계, 일종의 십계명 같은 거죠. 이걸 계율을 지켜라 하는 거. 지지난달에 수계를 받으셨잖아요. 첫 번째는 살인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살인하지말라. 두 번째는 도둑질하지 마라. 세 번째는 음란한 짓 하지 마라, 음란한 짓. 그리고 네 번째는 악담하지 마라, 험담마라. 우리가 덕담을 해야지, 요즘에 너무 말이 세잖아요. 이거 안 해야 돼요. 그거 다 기본이 있는 거죠. 그리고 다섯 번째가 술 먹지 말라. 왜냐하면 좀 풀어지니까. 이런 것들이 그야말로 바로 기본적인 도덕 행위의 실천이다 이거죠.
       이제 이런 것들을 우리가 잘 지켜가면서, 이제 선덕여왕 얘기로 들어가는데 최고의 리더입니다. 제가 사찰 유산, 또 지금 종정예하로 계신 통도사의 성파 종정예하하고 제가 한 15년 이상 인연을 맺어서, 제가 사찰 유산할 때도 제일 먼저 의논드린 분이 종정예하로, “아니 어떻게 이화대학, 기독교 대학의 총장이 어떻게 이렇게 불교를, 우리 스님들도 생각하지 못한 불교를 세계유산하실 그런 뜻을 세우냐고 너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셨어요. 그러면서 이제 많이 협력해 주시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 성파 스님이 그러셨어요. “아니 영국의 여왕은 지금 여왕인데, 우리나라는 그보다 1200년 전에 여왕을 낸 나라다. 그렇게 앞서가는 나라다.” 바로 통도사가 선덕여왕이 자장율사를 통해서 세운 사찰이에요. 우리 사람들이 너무 외국 거에만 그냥 가서 귀를 기울인다는 얘기예요. -근데 이제 제가 불교 얘기하려면 그것도 한두 시간 더 걸려야 되지만, 오늘은, 이제 많아요, 많은데, 이제 시간을 나한테 조금 주셔가지고, 그냥 세종 얘기까지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신라가 통일을 했잖아요. 그쵸. 근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신라는 제일 동남단에 있어서 후진이었어요. 문물이라는 건 그때는 대륙을 통해서 들어오니까, 이제 인도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올 때 고구려가 제일 먼저 받아들였잖아요. 372년에. 소수림왕 때. 그러고 이제 백제가 384년에 마라난타가 전해서 받았잖아요. 근데 신라는, 언제 받아요? 법흥왕 때 528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서야 받아서, 제일 늦게 받아요. 그 시절의 불교는 선진 문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후진이라고, 그것이 가장 항상 후진이냐.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구려는 받았는데 중국에 변화하는 게 금방 들아와. 그러니까 문화라는 건 전래되면 좀 씹고 영양으로 해서 그게 수용이 돼서 토착화돼야 돼. 영양분이 돼야 되는데. 고구려는 계속 뭐가 들어오면 또 나가고, 또 계속 지금 고구려-중국이 국경지라 계속 전쟁을 해야 되니까, 이거를 삭힐 새가 없었던 거예요. 처음에 숭신하면 복을 받는다 해서 불교는 받아들였는데, 이거를 잘 삭일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또 백제는 실제로 그 주몽의 부인인 소선호가 비류, 온조를 데려와서 이제 남쪽 나라 와서 세웠는데, 그래도 선진문화가 돌아와서 마한 토착민을 다스리려니까 별로 그렇게 힘이 안 들었어요. 그러니까 보통은 우리가 왕즉불 사상으로 불교를 통해서 어떤 지휘 체계가 확고해지고, 많은 것을 감화시킬 수 있었는데도, 백제는 그렇게 불교가 그렇게 아주 같이 깊숙이 들어가질 않았어요. 25대 무령왕릉이 1970년에 장마 때 발견이 됐는데, 불교의 흔적이 없을 만큼 불교는 공인 선포했으면서도 별로 왕실에서도 하질 않아. 그래서 백제는 475년에는 공주로 밀려갔죠. 공주시대, 웅진시대, 그다음에 538년에는 부여로 밀려가 사비시대. 그래서 밀려갈 때 그때야 성왕, 26대 성왕 때 반성을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자꾸 밀려가고 나라가 쇠퇴하느냐. 두 가지 진단을 했는데 하나는 불교를 두고 우리가 너무 소홀히 했다. 불교가 하나의 일즉불 사상이 되는 거잖아요. 이런 거를 우리가 소홀히 했다. 두 번째는 마한 토착민을 우리가 너무 하대했다. 그래서 불교를 다시 흥행시키고, 마한 토착민을 다시 이제 관직에도 줬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는 거에요.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신라는 늦게 돌아왔는데, 그것도 엄청 귀족들의 반대로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서야 이제 불교가 공인이 되니까, 그야말로 비 온 뒤에 땅이 굳고, 한참을 굳으면서 이게 소화가 되고 자기 영양분이 된 거죠. 그래서 불교의 힘이 통일의 기본을 쌓게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하나는 여기 세속오계가 있는데, 신라가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거는 화랑도라는 차세대를 키웠어요. 화랑도가 불교 단체고, 애국단체고, 교육단체고, 전사 단체잖아요. 차세대를 키웠다는 미륵 신앙의 전사들이에요. 이런 데서 엘리트 정말 전사들이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 섬기고, 충성, 효도(사친이효事親以孝), 어버이를 효도하고, 믿음으로 벗을 사귀고(교우이신交友以信), 싸움,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물러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이 살생유택(殺生有擇), 그러니까 전쟁에 나갔을 때 어떻게 살생을 안 할 수가 있어요? 전쟁인데. 그러나 여기서 원광법사께서 주신 가르침은, 그러나 아무리 어쩔 수 없어 살생을 하더라도 가려서 해라. 어쩔 수 없는 살생을 가려서 하라는 그런 마음가짐을 심어준 것이 세속오계입니다.

       삼국유사 보면 참 재밌어요. 근데 그중에 <노힐부득 달달박박>이라는 얘기가 있어요. 이 노힐부득 달달박박이 친구인데, 지금 창원에 백월산 밑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때는 다 불교 나라니까 뭔가 이렇게 그냥 평화롭기는 하는데 뭔가 허전해. 그래서 둘이서, “우리 저 산에 들어가서 부처가 되고자 우리 불도를 닦아보자.” 그래서 이제 둘이서 백월산으로 들어가서 달달박박은 북쪽에다가 암자를 하고, 이제 노힐부득은 이름도 이상하잖아요, 근데 재밌는 이름에, 남쪽에다 암자를 했는데, 어느 날 비가 축축이 내리는 저녁에 웬 여성이, 아리따운 여성이 우선은 달달박박의 암자에 찾아왔어요. 날은 저물고 비는 촉촉이 내리고 갈 곳 없는 여인을 좀 하룻밤만 재워달라 하니까 이 달달박박은 나는 불도를 닦는 수도승인데 어떻게 여인을 방에 들이느냐 해서 거절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다시 노힐부득의 암자로 가. 그랬더니 노힐부득은 고민을 하는 거예요. 물론 불도를 닦는 데서 여인을 받을 수는 없지만, 저 불쌍한 여인을 구원 안 해주는 것도 이게 불교의 도리에 어긋난다 해서 그냥 방 한 칸에 저 구석에 가서 자리를 만들어줘요. 그러면서 이제 계속 불공을 하다 왔는데, 새벽에 이 여인이 내가 산기가 있다. 지금 애를 낳아야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목욕물을 좀 받아 달라 그래요. 그것도 좀 이상하지만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가 그 목욕물에 들어갔는데, 당신도 들어오라 그래요. 이상하지만 시키는 대로 했어요. 여하튼 무언가가 좀 특이하고 기이한. 그랬더니 그게 금빛물로 변하면서 여인은 떠났는데 관음보살인 거야. 부처로 인도하는 그런 관음보살이야. 그래가지고 어느 순간에 금빛 물에서 대좌에 올라갔는데 이 노힐부득은 미륵불이 된 거예요. 금빛 찬란한 미륵불의 대좌에 앉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이 달달박박이 새벽에 일어나가지고 얘는 어떻게 됐나. 나는 그걸 단호히 거절했는데 친구는 어떤가갔더니, 그 대좌에 금빛 빛을 발하는 미륵불이 딱 앉아 있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성불을 했냐했더니 어저께 그 찾아온 여인이 부처로 인도하는 관음보살이었더라.” “근데 나는 그럼 어떡하면 되겠냐.” 그랬더니, “아까 그 목욕물이 좀 남았으니 너도 그 물에 좀 들어가 보라.” 그랬어요.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진짜 또 자기가 원하는 미타불이 된 거예요. 근데 금빛물이 조금 반만 남아서 반쪽만 빛나는 그런 미타불이 된 거예요. 

 

       이런 가정들, 정말 이 삼국유사는 이렇게 감성으로 자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신라의 26대 진평왕이 굉장히 체구가 커요. 선덕여왕의 아버지가. 삼국사기는 진평왕은 골격이 웅장하였다, 웅대하였다 이랬어요. 근데 삼국유사는 진평왕은 계단을 내려갈 때 계단이 뻐그러졌다. 그러니까 얼마나 육중하면 뻐그러져. 이렇게 감성으로, 상상력으로, 이게 그래서 삼국유사가 재미있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제 오늘 좀 효행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효선쌍미(孝善雙美)라고, 삼국유사 마지막 편이 효선쌍미라고, 효와 선이 함께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들이 다섯 편이 있는데, 거기에 <진정법사 이야기>가 있어요. 의상대사가 이제 문도를 구하러 다니는데, 이 진정 법사 집은 너무나 가난해. 그래도 가난해도 홀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어느 스님이 와서 좀 시주를 하라 그래요. 그럴 때 솥단지 하나밖에 없는 것도 다 보시를 하고, 그런 미덕을 했는데, 그러면 진정 법사는 아 솥단지 없으면 그냥 질그릇에 하면 된다.’ 이런 마음인데, 의상대사가 지나가면서 문도를 구할 때, 그때 따라가야 되잖아요. 근데 망설이니까 어머니가 니가 아마 나를 봉양하는 것 때문에 니가 마음을 꺼리는 것 같은데, 진정한 효는 나한테 따뜻한 밥 먹이는 것보다, 니가 의상대사를 따라가서, 나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것이, 네가 부처 되려고 하는 극락으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효다.” 이게 이제 효선이라고 효와 신앙이 함께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던 사례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이런 마음과 마음이 전하는 전도를 한 거예요,신라는. 그러니까 그게 아예 토착화될 수 있는 가장, -그야말로 진관사가 마음의 정원이지만,- 불교로 마음의 정원과 희망을 얻게 된 거예요. 그런 속에서 제27대 신라의 여왕이 세 분인데,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 이렇게 세 분의 여왕이 탄생을 하세요. 선덕여왕, 제가 여성사, 제가 조선시대사, 개화사도 하면서도, 지금 여성사를, -남자들이 안 하니까,- 할 때, 제가 이화대학에 교수로 있을 때 좀 여성사를 정리해라 해서 할 때, 맨 삼국통일이 김춘추, 김유신만을 얘기해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김춘추, 김유신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한들, 그 최고 지도자가 안 뽑아주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선덕여왕의 지도력의 혜안이 김춘추, 김유신의 훌륭한 점을 보고 발탁해서 밀어주고, 신라의 통일의 역군으로 쓴 거잖아요. 그런 데 김춘추, 김유신은 선덕여왕이 안 계셨으면 뽑힐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 김유신은 가야 사람이에요. 또 김춘추는 라이벌 집안이에요. 근데 선덕여왕이 그들의 애국심, 책임감, 또 투지력을 읽고 화랑도를 통솔하는 역군으로 키워준 거죠.

 

       그다음에 또 선덕여왕이 잘한 거는, 모든 게 무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데서 정신적인 지주로, 자장율사를 통해서 통도사를 세우고, 또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고, 또 원효대사 이런 좋은 승려들이 정신적 지주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선덕여왕은 전쟁기에는 적의 정보를 알아야 되죠.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해서, 많은 유학생도 당나라에 보내고, 고구려에는 김춘추를 스파이로도 보내면서, 그러면서 적의 정보를 아니까 이길 수 있는데, 제일 선덕여왕이 강조한 거는 무기보다 무서운 건 분열이다. 단합만이 우리가 통일의 기본이다 해서, 그것도 뭐 단합하자 하고 집집이 댕겨서 될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선덕여왕을 훌륭한 리더라고 하는 거는 단합의 힘을 강조할 뿐 아니라 문화로 넘어갔어요. 문화로 단합의 힘을 설득을 한 거죠. 마음을 얻은 거예요. 첨성대, 민생의 탑이에요. 황룡사 구층 목탑, 안보의 탑이에요. 저 첨성대는 신라 시내에 있잖아요. 경주의 시내에. 그래서 9.1m예요. 남쪽으로 창이 났어요. 이게 뭐냐? 동양 최초의 천문 관측 기구예요. 농민들이니까 농사의 때를 가르쳐줘야 수확량이 오르잖아요. 그러니까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잡초 걷을 때 거두고, 수확할 때 가르쳐주니까, 이게 천문. 그러니까 남쪽으로 이렇게 해가 들어오고 지금은 속까지 돌아 이제 춘분 지나고 동지로 추분 지나면 이제 나가는 거죠. 그래서 밑에 12단 위가 12단 그래서 11224절기. 그래서 이걸 다 세보면 361.5. 음력으로 1년의 날짜를 전돌로 다 쌓은 거예요.
       그래서 올라가서 보면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해와 달, 구름, 별자리가 다 파악되는 거야. 농사의 때를 가르쳐줘요. 민생의 탑. 그러니까 지도자가 민생을 챙겨주니까. 굶어 죽이는 지도자를 누가 따르겠어요? 선덕여왕때 수확량이 많이 늘어나고, 구휼 빈민 구제를 많이 합니다. 여왕이. 그래서 믿고 따르는 거고. 그다음에 황룡사 9층 목탑은 80m입니다. 지금은 몽고가 고려시대 쳐들어와서 불태워버려서, 목탑이라, 지금은 터만 남았어요. 지난 7월달에 제가 법해 주지 스님하고 선우 총무스님이 같이 갔어요. 그 중심에 거기에 이 심주가 있어. 엄청 커요. 몇 사람이 달라붙어야 끌어요. 바로 선덕여왕의 체취가 나요. 경주에 가시면 분황사 앞에 황룡사 9층 목탑터를 가보시고, 그 바위를 끌어안아보세요. 선덕여왕의 체취가 날 거에요. 그래서 저도 얼굴이 지금 빛나지 않아요? 또 우리 스님들도 반짝반짝 빛나지 않아요. 한번 가보세요. 선덕여왕의 애국심, 애민의식, 그리고 어떻게해서든지 이 나라를 평화로 만드는 그래서 이걸 올려요. 그래가지고 높으니까, 백성들이 이 선덕여왕이 올린 꿈을 보는 거야. 우리가 뭉치면 신라를 쳐들어오는 구족을 물리칠 수 있다. 그래서 이거를 층층이 쌓은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복속을 받자. 이기면, 승리하면 평화를 이루고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 이 땅에 이제 미륵 부처가 이제 부처가 되실 것이다. 그래서 불국토 사상을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오월, 응유, 탁라, 여진, 예맥, 말갈, 거란, 9층을 쌓아 그래가지고 탑돌이 하는 거예요. 이렇게 탑돌이, 그래서 마음을 모아. 그러면서 신라가 통일의 주도권을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기술, 무기 이런 것도 있겠지만, 이 마음에 이런 평화를 염원하는 진정한 염원, 이것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원동력이 됐어요. 그래서 경주에 가면 이 얼굴무늬 수막새가 천년의 미소라고 있어요. 천년의 미소. 근데 우리는 이렇게 은근하고 따뜻하고 이 어머니 같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잖아요. 이런 우리의 진짜 천년의 미소가 있는데, 우리는 맨날 모나리자의 미소, 이게 암상스럽게 생겼잖아요. 좀 암상스럽잖아요. 우리 미소가 가장 이렇게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내 안에 보석이 있는지 모르고, 우리 것은 그냥 그래서 생각해요. 퇴계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이거 갖고 얘기한 건 아닌데. <가까이 있는 단 배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신 돌배 찾으러 온 산천을 헤맸다.> 우리 걸 알아야 보석같이 가꿀 수 있죠. 알아야 돼요. 우리 문화를 우리 정신을 알아야 되잖아요. 이런 것이 저는 이 선덕여왕이 세운 영묘사에 나오는 이 수막새, 이게 얼굴이 다 수막새가 미소의 수막새인 거야. 그러니까 그 집은 웃는 집이 된 거예요.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지혜, 마음, 누구냐? 바로 우리 선덕여왕의 어떤 자비심이 그걸 만들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최고의 우리나라의 리더, 진관사도 이 한글 창제의 비밀 연구소였잖아요. 무관하지 않아요. 한글창제.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 임금. 정말 천년 만년의 미래를 열어주신 임금이에요. 이분이 22살에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이 되셨어요. 이분이 1450년에 세상을 떠나서 32년을 재위하셨는데, 재위기간도 오래지만 엄청난 일을 많이 하셔서 실록이 엄청 두꺼워요. 그걸 제가 5명의 학자하고, 10년을 아주 찬찬히 읽었어요. 감동의, 감동의 연속. 근데 이게 많은 업적을 낸 감동이 아니고 이분에게는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이 있구나.’ 이게 저한테 큰 감동으로 이거를 끊을 수가 없었던 거야. 바빠도. 1426년에 이분이 무슨 말씀을 직접 신하들한테 하세요. “내가 보니까, 노비가 아무리 노비래도 그렇지, 애 낳자마자 일 시키는 거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냐. 노비도 하늘이 낸 사람인데, 어찌 애 낳자마자 일을 시키냐.” 그래서 100일의 휴가를 주라 그래요. 그랬더니 신하들이 반대해요. 애만 낳으면 112달 다 노냐고. 그래가지고 반대하지만 간곡하게 설득을 해서 출산 휴가 100일을 줘요. 요즘에 저출생하고 아주 가장 근사한 역사적인 사례인데. 그래서 그래도 세종이 그 착한 마음이 실행을 보게 된 거예요. 근데 또 1430년에, 4년 후에 또 무슨 말씀을 하냐 하면, “내가 능행을 하기 위해서, 조상 능 참배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갔는데 밭에서 만삭이 된 여성을 봤다. 내 걱정이 갑자기 밭에서 산기가 일어나서 밭에서 애를 낳으면 태어난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지 않겠니. 그러니 자기 날 달은 알 테니 산전 휴가 한 달을 주자.” 해서 산전 산후 130일의 휴가가 1430년에 내려져요. 그때도 반대를 해도 그래도 사람이 있지 않냐 이렇게 호소하는 거예요. 근데 이것도 또 모자라서, 4년에, 바쁘시니까 이 문제는 4년마다 생각이 나셨는지, 1434년에 또 무슨 말씀하셨느냐 하면, “노비의 남편은 구경만 하니, 좀 애 낳은 여정을 좀 도와줘야 되지 않겠니”, 산후 조력, 애보육 그래서 남편에게도 한 달의 휴가를 줘라 해서 부부 합산 160일에, 그 산전 산후 부부 합산 160일의 휴가가 내려져요, 동서고금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따뜻한 복지의 실행입니다. 그러니까 노비들이 임금이 이렇게 직접 챙겨주니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리더는 신바람 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주게 해야 돼요. 정말 기뻐하면서 춤추면서 자기 일을 보람 있게 해줘야 되는. 그 세종의 마음이에요. 이분은 인간 사랑이 지극해요. 이 사업만 아니에요.

        또 두 번째는 이분은 우리 것 사랑이 진정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농사직설, 우리 농기구, 지금도 호미가 유명하잖아요. 옛날에 우리나라 용어가 중국 것만 번역한 게 호미, 쇠스랑, , 다 지금 나오잖아요. 그다음에 향약집성방, 동의보감의 전신이죠. 우리 약재로 우리의 풍토에서 난 병은. 그래서 우리 것 찾기 운동을 하신 분이에요. 그거에 대표적인 게 한글 창제잖아요. 귀족들이 반대할 때 세종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옥에 갇힌 죄수가 자기 판결문이 자기한테 유리한지 불리한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이 억울함을 나는 없애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문자의 힘을 쥐여주는 거다. 그걸 알아야 유리한, 그다음에 아무리 방을 붙여도 혜택을 못 받는 글을 몰라서 지나치는 이 가여운 백성을, 나는 그들에게 자기 몫을 찾게 하기 위한 문자의 힘을 쥐여주는 거다.” 그래서 한글은 배려의 문자고, 그리고 화합의 문자고 사랑의 문자입니다.

 

        제가 이게 큰일 났네. 이거는 좀 얘기를 해야 되는데. 제가 한국학중앙연구원장 할 때, 우리 법해 주지스님도 함께 요즘에 다시 가셨는데, 장서각이라는 왕실 도서관이 17만 권의 왕실 도서가 있어요. 제가 2016년 원장할 때, 한글이 17만 권 중에서 한글이 많아요. 왕실에도 쓰고, 그래서 그걸 끌어서 그때가 한글 반포 570돌이 되는 해야. 그래서 그때 이제 끌어내서 할 때 엄청 감동의 도가니였어요. 이 한글은 임금도 쓰고, 양반도 쓰고, 여성은 말할 것도 없이, 노비도 써요. 이게 계속 전시가 될 때 많은 분들이 감동의 도가니. 이건 임금이 쓴 거야. 효종 임금이 딸이, 숙명공주가 아들이 죽었어. 밥을 안 먹어. 노심초사. ‘기운이 나냐, 무사하냐, 밥 먹고 기운 차려라. 애가 그렇게 된 거는 우리 어른들이 복이 없어서 그러니 어쩌겠니? 그래도 기운 차려.’ 이 부정의 편지, 아버지의 직접 쓰신 거예요. 효종이. 이런 거 많아요. 또 학봉 김성일 선생은 임진왜란 때 진주의 전쟁터에 나갔어요. 근데 세모가 다가오니까 그래도 집이 그리웠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도 한글로 써요. 당모 올려요, 어른이라. ‘장모님 잘 모시고 과세 잘 지내라 하는데, 그리지 말라. 언제 만날 기약이 없다. 전쟁이니.’ 그러고 두 달 만에 전사하셨어요. 그래서 이 편지 봉투인데 이게 아내의 눈물의 봉투예요. 저도 이 봉투를 만지니까 진짜 울컥. 근데 한글이 있으니까 마음이 소통이 된 거잖아요. 그다음에 이제 이 부분은 신천강씨 친정 어머니가 시집 간 딸인 순천 김씨에게 보낸 편지인데, 청주 비행장 공사하다가 이 무덤 이장을 하는데, 이 순천 김씨의 무덤을 팠는데, 거기에서 관에 128통의 한글 편지가 나왔어요. 그게 누구 편지냐 하면 친정 어머니 편지. 이 친정 어머니가 속상할 때마다 어디다 하소연할지는 모르고, 딸이 그래도 제일 만만하잖아요. 자기의 심정을 알아주니까 계속 붙인 거야. 또 글은 쓸 줄 알게 됐잖아. 한글이 그 마음의 억울함 하소연을 다 딸에게 했는데 여기 이런 것도 있어요. ‘니네 아버지가 늙고 돈도 없는데 친구들이 첩을 둔다고 자기도 좀 보게 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해서 마지못하게 뒀더니 고게 들어와가지고 나를 매일매일 못 살게 구는데 내가 살아갈 힘이 없다.’ 이런 애절한 편지 이런 것도 다 한글이 있기 때문에 소통과 표현이, 진짜 스트레스 해소가 한글로 다 되는 거예요. 또 이거는 광산김씨 할머니, 끝낼까요? 어떡 할머니의 상언인데, 상언, 임금에게 올린 거야. 이게 영조 임금 때 손자가 억울한 음모로 사형 직전으로 간 거야. 이 할머니가 이 손자까지 죽으면 대가 끊기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임금에게 반듯반듯하게 논리적으로 써가지고 억울함을 잘 전했어요. 그래서 이 편지 한 장으로 손자의 목숨을 구한 거예요. 제가 아무리 박사를 해도, 뭐 해도, 이 할머니를 못 따라갑니다. 이 글씨체나 논리나. 이렇게 한글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희망을 주는 거예요. 그다음에 이건 한산이씨인데, 17세기에 나온 건데, 회갑이 됐어. 지나온 세월을 회고해 보니까 고생고생, 그래서 고행록이라고 썼어요. 자기 회고록. 근데 6m를 썼어요. 이거 되겠어요. 6m. 이게 한글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야. 마음의 토로야. 노비들도 상조계, 누가 뭉치 아버지가 돌아갈 때 그 막둥이가 얼마를 내고 이거 다 한글이 있기 때문에 상부성례가 된 거예요.
       이런 여러 가지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우리 역사 스토리에 우리의 감성을 그야말로 함께 따뜻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하는 데서, 제가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보여드릴게요. 요 다음 얘기는 또 다음 시간을 기다리면서. 지금 요즘에 올림픽으로 아마 오늘 이제 내일 막을 내리는 것 같고, 금메달을 예상외로 우리한테 많이 안겨줘서, 덥고 짜증 나도 금메달 때문에 그래도 청량제가 됐잖아요. 나라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나라 있으니까. 애국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 올라가잖아요.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손기정, 동메달은 남승룡, 두 사람이 1936년에 금메달 동메달을 땄어요. 근데 어느 독일인이 이 사진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을 한 게, “아니 이러한 환희의 동메달 금메달을 딴 선수의 모습이 왜 이렇게 환희롭지 못하고 풀죽은 고개 숙인 모습을 하는지, 너무 의아해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식민지의 청년이었더라.” 식민지의 울분, 답답함, 억울함을 달림으로써 해소하려 했는데, 막상 메달을 따니까 달려야 될 태극기 대신에 일장기가 달리고, 올라가야 될 태극기 대신에 일장기가 올라가는 데서 슬픈, 고개 숙인 이 비극의 마라토너를 보고 역사의 절망을 느꼈다는. 근데 1992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이제는 노인이 된 손기정 옹에게 갖다 바치는 모습을 보고 다시 역사의 희망을 찾았다는 거. 이제 가슴에 당당히 태극기가 달리고,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는 황영조 선수의 모습은 어느 세계인도 연출하지 못한 한국인들의 책임감, 애국심 그리고 자긍심, 이런 책임감과 애국심으로 얽혀준 가장 역사의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나라 있음에 우리가 있고, 또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목숨 바쳐 찾아준 이 나라 어떻게 찾은 이 나라인데, 우리가 지키고 더 크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더 크고 아름다운 바톤을 만들어서 우리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넘겨줘야 될 사명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