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⑤
(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안녕하십니까? 전에처럼 오늘 시작하는 법성게 증지소지비여경 게송을 시작할 때 시작하는 박수 한번, 아니 그런 박수 아니고, 마칠 때 마치는 박수 한번. 10번을 읽을 거거든요. 증지소지비여경 그렇게.
(박수1번) 증지소지비여경 증지소지비여경 증지소지비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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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지소지비여경 증지소지비여경 증지소지비여경 (박수1번)
그래 가지고 연구를 했는데, 이 증지소지비여경을 제자가 한마디로 한 것은 증지소지비여경자는 유불여불이 내가능지라(證智所知非餘境者 唯佛與佛 乃可能知故也(叢髓錄 眞記. 韓佛全6-776下).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들께서 알 수 있는 세계다. 이렇게 해석을 해놨어요. 부처님과 부처님들께서 알 수 있는 세계다. 그럼 부처님들은 누구냐. 깨달은 분이라는 거지. 뭘 깨달았느냐. 법성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법성을.
文有七言三十句 此中大分有三
문유칠언삼십구 차중대분유삼
初十八句 約自利行
초십팔구 약자리행
次四句 明利他行
차사구 명이타행
次八句 辨行者修行方便 及得利益
차팔구 변행자수행방편 급득이익
就初門中有二 初四句 現示訂分
취초문중유이 초사구 현시정분
二次十四句 現緣起分
이차십사구 현연기분
(叢髓錄卷下之一. 韓佛全6-810中)
(총수록권하지일. 한불전6-810중)
그런데 의상 스님이 직접 저술을 하면서 이 법성게를 설명한 내용이 있는데, 어떻게 설명했냐. 법성게는 문에 유 칠언 삼십구하니(文有七言三十句), 이 법성게 문에, 글에 7언 30구가 있다. 7자 말로 된 게송이 30구가 있다. 7언 30구. 7언 1구, 7언 2구, 7언 3구, 이래 가지고 7언 30구라는 거죠. 그러면 7언으로 된 게송이 30구면 3·7은 21, 210자예요. 7언 30구 210자. 그래서 반야심경하고 비슷해요. 반야심경은 270자거든요. 근데 210자예요. 이 한 구절 한 구절이 전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성을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다음에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서부터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까지는 교분(敎分)사구래요. 교분. 가르칠 교자, 나눌 분자. 이게 다른 사람에게 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증분과 교분. 법문에서는 이런 거 하면 재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게 말이라는 게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뭐 내용을 설명하다 보면 재미가 끼어들지를 못해요. 증분, 교분. 교분이라는 건 뭘 가르치는 내용인데, 가르치려면 뭔가 아는 게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부처님이 가르친 건 뭐냐. 법성원융무이상 그걸 가르쳤다 이거예요. 어떻게 가르쳤냐.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고, 초발심이 변정각이고, 변정각이 초발심이고. 이렇게 구세십세가 호상즉이고, 잉불잡란격별성이고, 무량원겁이 즉일념이고, 한량없이 많은 세월이 일 찰나고, 일 찰나가 바로 무량원급이다. 뭐 이런 식이다. 그 법성원융무이상 깨달은 내용을 가르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가면 궁좌실제중도상하면, 실제 진실의 세계, 중도의 경지에 딱 올라가면 그게 바로 법성원융무이상인데, 그러면 깨닫고 보니까 내가 태어난 적이 하나도 없다. 이게 구래부동이에요. 깨닫고 보니까 내가 태어난 일이 없어. 그 태어난 일 없는 걸 아는 게 명위불이라.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아이구. 우리가 만날 태어나고 만날 죽는데 구래부동이란 게 말이 되냐. 옛부터 동(動)자는 태어난단 소리예요. 부동이라는 건 태어남이 없다는 소리예요. 옛부터 태어남이 없는 것이 그것을 안 것을 부처라고 한다.
이거 지금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는 건 뭐냐. 다 꿈속에서 태어났다가 꿈속에서 죽는 거다 이거죠. 왜냐 법성을 모르고 태어나고, 법성을 모르고 죽기 때문에. 그러니까 세세생생을 몽중사로 사는 거예요. 꿈속 일로 사는 거예요.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지난 일을 돌아보면 다 꿈 같아요. 그런데 현재는 꿈이 아니에요. 근데 지금도 조금 지나가 보면, 지금 이 순간도 꿈이에요. 그런데 법성은 일념즉시무량겁이기 때문에, 일 찰나가 무량한 겁이기 때문에, 꿈에서 억만 겁을 꿈을 꿔도 깨고 나면 1초도 안 돼요. 야, 이게 참. 그거를 여기서 설명하는 거예요. 꿈에서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는데, 딱 깨고 나면 자기 잠자리에 누워 있거든. 그게 이 법성의 의미예요.
相和尙曰 惑者 但用無體 (證者) 智具體用
상화상왈 혹자 단용무체 (증자) 지구체용
問 無體何得有用 答 體是無住實相
문 무체하득유용 답 체시무주실상
迷用爲惑 迷用息耳 無體可斷...
미용위혹 미용식이 무체가단
(叢髓錄卷上之一.韓佛全6-789中)
(총수록권상지일,한불전6-789중)
그럼 작용이라는 건 뭐냐. 한 생각이 인제 법성을 모르고 딱 일어나요. 그걸 근본무명이라고 그래요. 그다음에 업상(業相), 전상(轉相), 현상(現相), 미세한 무명이 있어요. 그다음에 지상(智相), 상속(相續), 집취(執取), 계명(計名), 조업(造業), 수보(受報), 막 세상을 향해서 구하고 탐하고 쫓아다니는 그런 거칠은 번뇌가 있어요. 이게 전부 작용뿐이에요. 근본 무명, 미세 무명, 그 육추 무명이 전부 이게 작용으로 구성돼서,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냐. 생로병사 우비고뇌 계속 나가는 거예요. 이게 생로병사 우비고뇌를 느끼는 것은 미혹한 작용 때문에 느낀다 이거죠. 미혹 작용이 없으면 생로병사 우비고뇌를 안 느껴요. 왜냐하면 이 살고 죽는 게 전부 법성원융무이상이니까. 아, 이거 참. 기도 안 차네요. 기도 안 차. 생로병사가 법성원융무이상이다. 이런 말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요. 그게 순전히 밖으로 탐해서 구하기만 하다가 또 끝나고, 밖으로 탐해서 구하다 끝나고, 구하다 끝나고, 이게 작용만 있다는 거예요. 그걸 한자로 아주 줄여서 설명하면, 미혹할 미자고 작용할 용자, 미용(迷用)이라 그래요. 미용. 미한 작용만 있다. 그래 가지고 본체가 없다. 그런데 증자(證者)는 법성을 증득한 것은 지구체용(智具體用)이라. 그 증득한 지혜가 본체와 작용을 다 갖추고 있다. 이거 의상 스님 말씀이에요. 미혹한 사람은 작용뿐이고, 작용은 뭐냐.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그거예요. 계속돼요, 그게. 근데 증득한 깨달은 분은 체와 용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는가. 태어난 속에 태어나지 아니함을 훤히 봐요. 이게 인제 삼매라는 거예요. 삼매. 또 죽는 속에 죽지 아니함을 훤히 봐요. 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거예요. 불생불멸, 아무리 죽어도 거기 죽지 아니하는 놈이 있어요. 그게 체여. 아무리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는 놈이 있어요. 그게 체예요. 그래서 나고 죽음이 없는 본체를 훤히 알고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면, 그 생사 자체가 해탈이에요. 생사를 떠나서 해탈이 있는 게 아니라, 나고 죽는 속에 나고 죽음이 없는 법성 본체, 법성 본체를 훤히 알고 나고 죽으면, 나고 죽는 것 자체가 해탈이다. 그게 극락세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부처님의 세계예요. 재밌어요? 재미없는 거 같아, 내가 볼 때는. 뭔 소린이지. 저 소리가 뭔 소리여, 이렇게 생각하는 거 같고. 그러니까 죽는 속에 죽지 아니하는 놈이 있어요. 그게 법성이에요. 태어난 속에 태어나지 않는 놈이 있어요. 그게 법성이에요. 법성을 안 증득한 지혜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체도 알고,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용도 알아서, 체와 용이 다 갖추어져서 일체가 법성 아닌 게 없고, 해탈 아닌 게 없다. 이게 부처님의 세계라는 거죠. 부처님의 세계는 이 세계라는 거죠.
그렇게 돼서,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 저술 속에, 본체가 없으면 작용이 어떻게 있느냐(問 無體何得有用), 이런 질문을 하면서 저술이 나와요. 그러니까 법성 본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무주실상이다(體是無住實相). 없을 무, 머물 주, 머묾이 없는, 진실할 실, 모양상, 실상이다. 진실상. 머무는 데가 없는 진실상이다. 그게 법성 본체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뭔 말인지 진짜 어렵긴 어렵다. 어렵긴 어려워. 미용이 위혹(迷用爲惑)이요. 미한 작용이 그게 미혹한 것이다. 미한 작용이 미혹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고 삶이 없는 걸 모르고, 만날 생로병사 우비고뇌, 생로병사 우비고뇌만 하는 게 그게 미혹이다. 그럼 깨달음이라는 건 뭐냐. 그 생로병사 우비고뇌 미혹한 작용이 그칠 뿐이다(迷用息耳). 그리고 쉴 식자를 썼는데, 쉰다는 건 하다 안 하는 게 쉬는 거거든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노는 거하고 쉬는 거 하고, 이게 놀라면 돈 든다고 하더라구요. 그건 노는 게 아니고 일하는 거예요. 그럼 뭐가 노는 거냐. 아무것도 안 하고, 하늘도 바라보고, 땅도 바라보고, 앉아있기도 하고, 누워 자기도 하고, 그게 노는 거예요. 근데 왜 노는 데 돈이 들어요. 돈 든다는 건 뭘 해서 소비하는 게 있다는 거 아니에요? 놀 줄을 몰라요, 요새 사람들이. 놀 줄 몰라. 할 줄만 알아. 그래서 하는 걸 노는 걸로 알더라고. 근데 사람이 놀 줄을 알아야 돼요. 어떻게 노냐. 저 하늘도 이렇게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물소리도 듣고, 또 편하니 앉았기도 하고, 누워 자기도 하고, 그게 노는 거예요. 그건 쉬는 거고, 그건 그치는 거예요. 맨날 근심걱정만 하다가 생각을 푹 쉰다고 아무 걱정도 안 하고, 근심도 안 하고, 원망도 안 하고 그냥 푹 쉬어. 그러면 잠시만 해도 몸이 가벼워져요. 머리가 시원해지고. 그래 쉴 줄을 몰라. 놀 줄 모르고. 그래서 놀 줄도 알고 쉴 줄도 알면 그건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에요. 놀라고 맨날 걱정만 하고 맨날 일만 하다 죽냐. 잠시라도 좀 쉬기도 하고, 잠시라도 좀 놀기도 하라. 잘 모르겠고요. 정말로 그런가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미용이 쉬는 거다. 미한 작용이 쉬는 거, 그게 깨달음이다. 생로병사 우비고뇌, 그 근심걱정이 다 없어지는 게 깨달음이라고 설명하는 거예요. 미용이 식이라. 미용이 위혹이라. 미한 작용이 혹이 된다. 그래서 미용이 식이라. 미한 작용이 쉴 뿐이다. 그 미한 작용이 다 쉬어버리면 그게 해탈이고, 그게 법성원융무이상으로 들어간 경지예요. 미한 작용이 쉬면. 근심 걱정하고 이게 생로병사하고 우비고뇌하고 원망 질투하는 건 전부 미한 작용이에요. 그건 뭘 미했냐. 법성원융무이상을 몰라서 그렇다. 둘이 없어, 법성원융무이상. 둘이 없는 법성을 모를 때 삶에 매달리고, 죽음에 두려워하고, 이게 전부 미한 작용이란 말이죠. 미용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다. 그래서 법성에는 뭘 끊어낼 게 없다. 무체가단(無體可斷)이라. 법성에는 끊어낼 게 없고, 다만 미한 작용만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 이렇게 가르쳤으니 참 보통이 아니지. 보통이 아냐.
그러면 법성은 무주실상이라 그랬는데 머묾이 없는 진실상이라고 그랬는데, 머묾이 없다는 건 뭐냐. 산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물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태어남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무주예요. 무주. 근데 그게 진실상이야.
有時非有還同無 無時非無還同有 是無住觀
유시비유환동무 무시비무환동유 시무주관
諸法本來不移動 能觀之心亦不起 是實相觀
제법본래불이동 능관지심역불기 시실상관
(叢髓錄卷上之一.韓佛全6-775中~下)
(총수록권항지일.한불전6-775중~하)
근데 이 무주를, 또 실상을 의상 스님 제자들이 어떻게 설명했냐면, 유시에 비유하니(有時非有), 뭐가 이렇게 나타나 있을 때 거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컵) 이렇게 지금 나타났잖아요. 이걸 자세히 보면 이게 여기에 이게 나타나 있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유시에 비유라. 있을 때에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환동무라(還同無). 도리어 없는 거와 같다. 아 이거 참. 스러니까 집이 억만 채가 지금 올라가서 지어졌는데, 그걸 가만히 보면 집을 안 지었을 때와 똑같애요. 그게 무주법성이에요. 법성은 과거 집이 없을 때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지금 집을 지었을 때 그 하나하나 집 꼭대기에 머물지도 않고, 있을 때 없는 것 같고, 없을 때 있는 거와 같다. 그러니까 이 몸이 이렇게 태어났어도 태어나지 않을 때와 똑같은 걸 보는 게 그게 법성을 보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건 태어난 것만 알지 다른 건 모른다는 얘기거든요. 누가 태어나라고 했나. 지가 태어나 놓고. 하소연은 남한테 해요. 결혼은 지가 해 놓고, 원망은 부모한테 하고. 이런 참. 부모가 무슨 죄지었나. 맨날 요구받고 원망 듣는 게 부모 팔자여. 그러니까 미리 그걸 알면 누가 자식을 낳겠어요. 모르고 낳는 거예요. 그거. 내가 왜 이런 말을 자꾸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이런 심정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러냐면 이 부모들이 가는 길이 그걸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는 얘기예요. 한번 부모가 되면 부모 길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니까 생각없이 부모되지 마라고, 그래서 하는 거예요. 생각 없이 부모 됐다가는 우울증 안 걸리면 큰일 나요. 부모 될라믄 아주 각오해라. 계속 요구만 받고 원망만 들을 각오로 하고 부모가 돼야지, 생각 없이 됐다가는 안 된다는 거죠. 또 무시에 비무하니 환동유라(無時非無還同有). 뭐가 없어질 때 없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도리어 있을 때가 없을 때와 같다. 또 없을 때가 있을 때와 같다. 유시에 비유하니, 있을 때에 있는 것이 없으니, 도리어 없는 거와 같고, 무시에 비무하니 없을 때에 없는 것이 없으니 도리어 있는 거와 같다. 법성으로 보면 아무리 다 없어진다 해도 없어진 게 하나도 없다. 이걸 보는 게 법성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무주관(無住觀)이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보는 걸. 없는 데서 있는 거를 보고, 있는 데서 없는 거를 보는 게 이게 무주관이다.
또 제법이 본래 불이동이니(諸法本來不移動), 제법은 태어난다고 해서 뭐가 어디서 옮겨온 게 아니다. 그래서 능관지심도 역불기라(能觀之心亦不起). 지금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고, 일어난 생각, 우리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얼마나 많은 생각이 없어지는데, 그 한없이 일어나는 생각이 일어남이 없는 거고, 한없이 없어지는 생각이 없어지는 게 없는 거다. 이걸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5초 후에 내 머릿속에 뭔 생각이 일어날지 지금 모르거든요. 또 오늘 저녁에 뭔 꿈꿀지 몰라요. 그럼 생각이 일어나면 없어져요, 또. 또 꿈은 꾸면 또 없어져요. 근데 이 법성에서 또 그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을 돌아보면, 생각이 아무리 생겼어도 생긴 게 없고, 생각이 아무리 없어져도 없어진 게 없다. 이걸 실상이라고 그래요. ‘내 생각은 그게 아니다’ 그러는데요. 그 생각 자체가 일어난 게 없는 거예요. 일어난 게 없으니까 금방 또 소멸해버려. ‘나는 절대로 안 변한다.’ 그 말 들으면 큰일 나요. 생각은 다 없어지게 돼 있어요. 어떤 사람이 사귀는 남자가 평생 손에 물 1방울을 안 묻히고 살게 해 주겠다고 그래서 그 말 믿고 결혼했거든요. 근데 결혼하자마자 설거지를 해야 되는데, 금방 손에 물 넣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 내가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준다고 그랬지. 그거 내가 다 준비해 놨다고.” 뭐냐니까, 고무장갑 딱 내줬어요. 이거 물 안 묻지 않냐. 이런 말을 내가 왜 하지. 이거를 개그도 아니고 잡담도 아니고 이상한 건데. 그러니 이건 그런 말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은 변한다. 생각은 일어나면 사라진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에 머물지 마라. 자기 생각에 안 머무는 게 뭐냐. 그러면 믿고 원하는 거예요. 그걸 신심과 원력이라고 그래요. 생각에 따라가지 말고 신심과 원력을 세워라. 그게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인 동시에 자기 앞길을 개척하는 길이거든요. 신심과 원력이. 그래서 이 무주관, 실상관(實相觀)을 딱 하면, 거기에 법성이 보인다. 무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때에 없는 거와 같고, 없을 때에 있는 거와 같다. 또 실상관이라는 것은 일어날 때에 안 일어난 거와 같고, 안 일어날 때 일어난 거와 같다. 그러니까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있고 없든, 생로병사 우비고뇌, 근심 걱정할 까닭이 없는 게 이게 해인삼매고, 법성원융이거든요. 그래서 이 법성을 더 돌아보면 근심걱정은 어젯밤 꿈속의 일이여. 어젯밤에 꿈을 많이 꿨는데 오늘 아침 되면 다 없어졌거든요. 이 법성에 들어가는 순간에 세상의 근심걱정은 어젯밤 꿈속의 일이다.
古記云 大海非是毒藥所壞 大空非是利劒所傷
고기운 대해비시독약소괴 대공비시이검소상
緣起三毒亘三際 直得無分別耳 非更息滅 方爲斷也
연기삼독긍삼제 직득무분별이 비경식멸 방위단야
(叢髓錄卷上之一.韓佛全6-789中)
(총수록권상지일.한불전6-789중)
그리고 또 하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였는데, 이 책 안에는 의상 스님 제자들이 연구한 분야도 있고, 또 고기라 그래 가지고, 옛 고자, 기록할 기자, 고기라 그래서, 신라시대의 쭉 내려오는 기록들이 있어요. 그 내려오는 기록을 여기에 수록해 놓은 것이 고기인데, 그 고기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 대해는 비시 독약소괴요(大海非是毒藥所壞). 태평양 바다 이런 큰 바다는 세상에 아무리 독한 독약으로도 그 대해를 독에 중독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 바다에 독을 풀어봐요, 바다가 중독이 되나. 그게 아무리 독한 독약이라도 대해가 독에 물들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게 안 되는 게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대공은 비시이검소상이라(大空非是利劒所傷). 큰 태허공을 대공이라 그러는데, 큰 대자, 허공 공자, 이 대공이라고 그러는데, 이 큰 허공은 아무리 잘 드는 칼로도 허공을 벨 수가 없다. 사실이잖아요. 칼이 아무리 날쌘들 허공을 벨 수 있겠어요? 독약이 아무리 독한들 대해를 중독되게 만들 수 있겠어요? 그것처럼 연기삼독(緣起三毒)이, 인연 따라 일어난 탐진치 삼독이, 이게 하도 무섭고 강해서 과거에 현재에 미래에 다 이게 이어진다 이거예요. 과거에 한번 싸웠던 건 평생 가요, 그게. 지금 또 기억이 또 앞으로도 계속 갈 수가 있고요. 어릴 때 어떤 기억도 평생 가지고 사는 기억이 있어요. 그게 인간의 감정이에요. 그놈의 감정이 왜 안 없어지냐면 이 법성에 못 들어가서 그래요. 법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자기 감정에 끌려서 살아요. 그러니까 자기감정에 끌리지 않으려면 법성원융무이상, 둘이 없는 법성에 떡 들어가면 희로애락 생로병사 우비고뇌는 다 어젯밤 꿈이다. 어젯밤에는 있었는데, 깨고 나니까 없다. 그런 거죠. 이런 그 삼독번뇌는 직득무분별이라(直得無分別耳). 바로 무분별을 얻는다. 무분별은 다름이 없다. 탐진치가 일어난 거나 안 일어난 거나 전혀 다름이 없다. 이렇게 왜 그러냐면, 이 법성이라는 거는 큰 바다와 같고, 법성이라는 건 큰 대해와 같고 그런데, 탐진치삼독이라는 건 독약과 같고, 탐진치삼독이라는 거는 잘 드는 칼과 같은데, 독약이 다른 건 다 독에 멍들게 할 수 있고, 칼이 다른 거는 다 베일 수 있어도, 독약이 큰 바다는 이 독이 되도록 못하고, 허공은 독이 되도록 못 하듯이, 탐진치 삼독이 법성 삼매 드는 한 바로 그건 없다. 본래 없는 거다. 구래부동명위불이라. 옛부터 움직이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이 이름이 부처다. 그걸 설명하고 있어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