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자비도량참법기도] 2월10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2023-01-31

 

- 祈禱實行成就(기도의 실행과 성취) -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의 법문은 <기도의 실행과 성취>, 기도의 실행과 성취,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 祈禱實行(기도실행) 

一念精進 隨順淨心

일념정진 수순정심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실질적으로 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아무것도 없냐. 일념정진(一念精進), 한 생각으로 계속하는 게 기도거든요. 일념정진. 경을 계속 읽어도 그게 일념정진이고, 부처님의 명호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게 한 생각으로 계속하는 거예요. 그게 기도의 핵심이거든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거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고 그게 아니에요. 생각이 하나로 계속되면 그걸 기도라 그래요. 생각이 여러 가지로 왔다 갔다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니거든요. 산란이에요. 산란. 기도는 산란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게 기도예요.

 

        그러면 그런 실현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느냐. 첫째로 청정심으로 돌아가요. 이 돌아간다는 걸 수순(隨順)이라고 하는데, 따를 수, 따를 순. 따라간다. 어디로. 청정심으로. 그러면 청정심이 뭐냐. 마음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중생심, 둘째는 제불심, 제불의 마음, 근본적으로 청정심. 그래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있는데, 마음의 본래 자성. 그 마음의 본래 자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 본래 자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번뇌망상을 일으키면 그걸 중생이라 그래요. 번뇌망상. 번뇌망상을 전혀 일으키지 않고 지혜광명을 일으키면 그걸 제불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 자성은 번뇌망상을 일으켰을 때도 자성청정심은 전혀 물든 데도 없고 달라진 게 없어요. 또 지혜 광명을 일으킬 때도 전혀 뭐 불어난 것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고. 그래서 불가사의 자성 청정심, 생각할 수 없는 자성청정심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번뇌망상 중생심, 지혜광명 제불심, 자성청정 본원심, 본원, 본래 근원. 기도를 하면 이 번뇌망상 심이 자성청정 본원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수순이에요. 수순. 정심으로 수순한다.

 

        그럼 정심수순이 무슨 의미가 있냐. 자성청정 본원심에는 본자구족(本自具足) 본자원만, 본래 수순으로 다 갖춰져 있어요. 그걸 본자구족이라고 그래요. 본래 스스로 구족하다. 또 본래 스스로 다 원만해요.

        그리 돌아가는 게 기도예요. 기도는 불시조작이라, 조작을 하는 게 아니에요. 기도는 불시조작. 그럼 뭐냐 수순정심(隨順淨心)이라,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게 기도거든요. 기도는 뭘 만들어내고 그게 아니라, 수순정심이라,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도다.

 

 

        그럼 이 자성청정 본원정심에는 무엇이 있나. 본자원성(本自圓成) 본자구족. 본래 스스로 원만히 다 이루어져 있고 본래 스스로 원만히 다 갖춰져 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물이 꽉 차 있는 데서 그냥 물을 뜨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기도는 물이 어마어마하게 끊임없이 연결돼 있는 수도를 그냥 트는 거예요. 수도꼭지 딱 틀면 물이 나오는 거는, 그 트는 데서 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물이 거기 있었던 거예요. 물이 거기 없었으면 아무리 꼭지를 틀어도 안 나와요. 전기도 마찬가지. 전기가 여기 와 있기 때문에 작동을 딱 하면 불이 오지, 전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여기 와 있는 전기를 그냥 쓰는 거예요.

        근데 왜 기도가 필요하냐. 평소에는 그 전기를 쓸 줄 몰라요. 그래서 맨날 어둡다고 하면서, 그 틀 줄 몰라. 그런데 어둠이라는 건 없고, 밝음만 나타나면 어둠은 없다. 그거죠. 물은 항상 차 있다. 꼭지만 열면 물은 내려온다. 이런 거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꿈을 깨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꿈 깨는 것 같은데, 꿈을 꾸다가 어떡하면 꿈과 다른, 꿈은 망상의 세계인데, 꿈에서 깨는 건 실상의 세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꿈에서 꿈을 만드는 건 기도가 아니다. 꿈을 깨는 게 기도다 이 말이지요. 꿈에서 꿈꾸면 그건 망상에 망상을 더 하는 거예요. 그래서 꿈을 딱 깨버리면 그게 기도인 거예요. 그럼 꿈을 깨면 그 새로운 세계를 꿈속에서 만들었느냐. 그게 아니고 있는 세계를 그냥 본 거예요. 있는 세계를. 꿈 깨가지고 뭐 그걸 지금 꿈 깨서 본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고 그게 아니라, 그냥 있는 세계를 꿈을 깨는 걸 통해서 그냥 본 거죠. 이제 그런 논리가 기도는 일념 정진이요, 수순정심이다.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거다 이거죠.

 

 

        근데 이게 우리가 왜 모자라는 게 있느냐. 있는 거를 망상으로 가려서 보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망상 없이 본래 갖추어진 본성 세계를 설명하는 게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에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티클 속에도 시방이 다 있어요. 또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 이 한 찰나 순간에도 무량겁이 다 있는 게 그게 원융원통(圓融圓通)이라.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 전체가 다 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집이 있는데, 저 기둥 하나하나가 자리를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저 기둥 하나하나가 전체 집이 되는 거예요.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하나가 전체가 되는 거 그걸 원융이라고 그래요. 그 티끌 하나가 움직이지 않고 전체가 다 되는 게 그게 원융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본성에서 돌아가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게 원통이거든요. 원융원통. 그래서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번뇌망상이 눈을 가려서 이루어졌다 안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기도를 하게 되면 청정심으로 돌아가서 본래 갖추어지던 걸 하나하나 보게 돼요. 또 본 대로 쓰게 돼요. 이걸 수분 수용이라고 그럽니다. 분에 따라서, 나눌 수, 나눌 분. 분에 따라서 수용한다, 받아 쓴다, 그런 거거든요.
        근데 막상 기도를 해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아주 해괴망칙한 일이 벌어져요, 기도를 하다 보면. 과거에는 생각나지 않던 게 전부 생각이 기어 올라와요. 또 지루하기가 그렇게 지루하고, 답답하기가 그렇게 답답하고, 재미라고 하는 건 티끌만큼도 없고. 그게 기도입니다. 왜 그러냐. 그게 온갖 번뇌망상과 온갖 생활 습관이 온몸에 꽉 잡혔는데, 그거 하나도 보이지도 않고 하나도 잡을 수도 없는데 꽉 찬 거예요. 그게 번뇌망상이거든요. 마음이란 그런 거예요. 하나도 없는데 꽉 차 있는 게 마음이거든요. 근데 그 번뇌망상의 티끌들이 평소에는 어디에 박혀있는지 어디에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걸 이제 절을 한다. 그럼 다른 거 안 하고 절만 하니까 막 기어 올라오는 거에요, 이게 그냥. 부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 그러면 다 막 그렇게 기어 올라오고. 그거 뭐 같으냐 하면 평소엔 먼지도 없고 뭐가 없었는데, 대청소를 하려고 들면 온갖 치울 것도 많고 먼지가 투성이로 많이 나오거든요. 그거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그 지루하고 생각이 막 기어 올라오고 복잡하고 답답하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거 하나 신경 쓰시면 안 돼요. 그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생각이 올라오면 그걸 환영한다든지, 응대를 하지 말아야 돼요. 생각이 올라오는 거 절대 그거 인식도 하지 말고, 응대도 하지 말고, 환영하지 말아야 돼요. 그냥 하던 일만 계속하면 그게 일념정진이에요. 일념이라는 건 다른 생각이 안 올라와서 일념이 아니라, 하던 걸 계속하는 게 한 생각이거든요. 무슨 생각이 올라와도 이 녀석이 또 왔네’, 응대할 거 없어요. ‘빨리 가’, 내쫓을 것도 없어요. 그건 허락 안 받고 올라온 거기 때문에, 응대 안 하면 허락 없이 또 나가요. 언제 왔다가 언제 사라지고, 언제 왔다가 언제 사라지고, 그러는 게 그게 번뇌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계속해요. 그게 일념이에요.

 

        그 일념을 잘못 생각하면 망상도 하나도 안 일어나고, 기억도 하나도 안 일어나고, 꿈도 하나도 안 꾸고. 그런 건 없어요. 아무리 허공이 맑아도 먼지 없는 허공은 없다. 먼지가 아무리 있어도 그냥 청정 허공이에요. 번뇌망상이 아무리 일어나도 자성 청정심은 그대로 자성 청정심인 거예요. 평소에는 그 망상심에 계속 끌려다녔는데, 기도를 할 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한 생각으로 계속 나아가는 게 기도다 이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망상은 다 사라져요. 자성 청정심이 그대로 드러나요. 그러면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도 모든 것이 다 구족하고, 또 많이 있는 가운데에도 장애가 하나도 없고. 그래서 무장무애 원만성취라는 게 그런 거에요.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그 많은 것에 서로 걸림이 없어, 장애가 없어, 그게 무장무애거든요. 그게 이제 원만성취라.

 

2. 祈禱 成就(기도성취)

 

加被成就(가피성취)

一切罪障 皆得清淨 一切衆苦 悉得解脫

일체제장 개득청정 일체중고 실득해탈

一切煩惱 皆得斷除 隨念往生 諸佛淨土

일체번뇌 개득단제 수념왕생 제불정토

(慈悲道場懺法卷六.1474년 간행)

(자비도량참법권6. 1474년 간행)

 

        그런데 이 성취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요. 첫 번째는 가피 성취(加被成就)라고, 가피를 입게 되는데, 겁이 많았는데 기도를 하다 보면 그 무섭고 겁나는 게 싹 없어져요. 그게 가피에요. 그리고 기도를 하다 보면 자기가 늘 불렀던 것이 꿈에 나타날 수가 있어요. 내가 늘 바라보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꿈에 그 관세음보살이 나한테 왔어. 그런 게 또 일종의 가피거든요. 자기가 기도했을 때 바라본 그 부처님 모습이 걸어와요. 그게 이제 첫 번째 느끼는 가피 현상이에요. 그리고 어디를 갔는데, 가기 전 밤에 꿈을 꿔서 보았던 부처님이 가보니 그 법당에 떡 앉아 계셔. 신기해요, 보면. 이 가피는 앉아있던 부처님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그게 이게 가피 성취예요.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마음이 굉장히 좋아요. 기뻐. 아주 쾌활해. 그리고 원한심이라든지 공포감이라든지 이런 게 사라지는 거예요. 공포감이라든지. 그리고 그날에는 몰랐는데 조금씩 조금씩 자족감이 생기기 시작해요. 자족감. 그게 뭐 두려움이 있고, 부족함이 많고, 원망이 많고, 물론 그게 다 내가 스스로 자성청정심을 멀리 등지고, 번뇌망상심에 지금 계속 따라가는 현상이거든요. 자성청정심에서 딱 보면 만나고 헤어지고 죽고 살고 하는 게 그게 다 자성청정심 수연상이에요. 자성청정심 인연을 따르는 모습이다. 있고 없고, 만나고 헤어지는데 거기 뭐 생각을 두고 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자성청정심 수연 현상인데, 인연 따르는 현상인데, 이제 번뇌망상으로 그걸 취하고 버리고 집착을 하니까, 어리석은 결과물이 고통이에요. 고통은 다 어리석은 결과물이다. 어리석지 않은 고통은 없거든요. 죽음을 딱 보면 죽음이 없어요, 자성청정심으로. 꿈속에서 보던 건 꿈 깨면 없어요. 그러니까 기도는 뭘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본래 있던 걸 찾는 거다. 두려움이 본래 없거든요. 근데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거예요. 근데 왜 두렵냐. 망상심으로 두려운 거예요. 원망이 그게 없는 건데, 원망이라는 건 남한테서 생기는 거잖아요. 그럼 내가 남을 어쩔 수 없는데, 어쩔 수 없는 걸 내가 바랬기 때문에 원망이 생겨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원망 안 하는 거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걸 내 감정대로 바란단 말이에요. 기대를 해요. 거기서부터 고통의 싹이 심어지는 거예요. 싹이 심어지는 게 아니라, 씨앗이 심어져서 고통의 싹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그 원망, 공포, 불안, 죽음이 없는데, 불안이 어디 있어요. 죽음이라는 건 이 형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미혹한 감정이거든요. 형상이라는 죽음만 딱 보고, 죽음이 없다는 걸 몰라. 그러니까 할머니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참 속 터지는 소리에요. 속 터지는 소리. 그럼 꿈 깨면 어디로 가느냐?” 물어봐요. 꿈 깨면 어디로 가느냐. 꿈꾸던 사람이 꿈 깨면 어디로 가는 거예요? 꿈이라는 자체가 본래 없었던 거기 때문에, 오고 가는 게 없죠. 없는 데서 있는 걸 만드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그냥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그게 죽음이지, 삶과 죽음이 본래 다른 게 아니다. 이런 것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자비도량참법 의식문을 보면, 가피성취가, 일체제장이 개득 청정(一切罪障 皆得清淨)하고, 일체 모든 죄업과 장애가 다 청정해진다. 이게 가피거든요. 그다음에 일체중고를 실득해탈(一切衆苦 悉得解脫)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다 벗어나요. 그리고 일체 번뇌를 개득단제(一切煩惱 皆得斷除)하고, 온갖 번뇌 망상을 다 끊는다, 이게 가피 성취예요. 그리고 수념왕생 제불정토(隨念往生 諸佛淨土), 생각에 따라서 극락세계, 도솔세계, 무슨 동방약사여래세계, 어느 불찰이든지 다 생각해서 다 간다. 이게 기도 가피로 이루어지는 성취거든요.

 

熏習成就(훈습성취)

掬水月在手 弄花香滿衣

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

(法演禪師語錄卷中)(법연선사어록권중)

 

 

        그다음에는 기도를 통해서 훈습성취(熏習成就)가 있는데, 연기 쏘일 훈자, 익힐 습자. 대승기신론이라는 편에서 번뇌훈습, 진여훈습(眞如薰習). 청정 자성을 자꾸 익히면 그게 진여훈습이고, 참 진자. 번뇌망상을 계속 일으키면 그게 번뇌훈습이에요. 익히는 거예요. 익히는 게 중요해요. 이 몸은 익힌 대로 반응해요. 몸은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이게 몸인데, 이게 생각을 익혀서 생각을 저장해 놓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행동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하고 행동하는 건 그 사람이 생각이 지금 나오는 거지, 생각 없으면 절대로 말도 못하고요. 그냥 어버버라는 말이 있잖아요. 왜 어버버 하냐. 그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거예요. 왜 아무 행동도 못하냐.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거다. 왜 그러냐. 저장된 게 없어요. 그래서 저장은 어떻게 되냐. 이 훈습을 통해서, 훈자도 익힌다는 말이고, 연기를 쏘이다 보면 그 연기가 점점 물체한테 들어가잖아요. 그걸 기신론에서는 옷으로 비유했는데, 옷이 있는데 그 옷에 다 향을 피워서 향기를 자꾸 피우면, 그 옷에 향기가 배잖아요. 그런 걸 훈습이라고 해요. 익힐 훈, 익힐 습. 기도하다 보면 내 몸에 청정한 기운이 다 훈습이 돼서, 몸에 청정한 그걸 역()이라고 하는데, , 청정력, 청정한 힘이 훈습이 돼서, 생겨가지고 뭐를 보든지 청정력이 나타나게 돼요. 청정력이 훈습이 돼 있으면 청정력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 몸에 습관을 익히면 습관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습관이 안 익혀지면 절대 안 나타나요. 그래서 왜 아이들이 집안일을 안 하냐.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그런 훈습이 전혀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일할 것이 앞에 있는데, 어머니가 볼 때는 있지만, 애들이 볼 때는 없는 거예요. 있다고 다 보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그걸 볼 수 있는 훈습이 있어야 봐요.

 

        그런데 이 기도를 통해서 그 좋은 청정한 힘을 자꾸 익히게 되니까, 그것이 훈습성취다. 한 시간 기도를 한 사람하고, 한 시간 기도 안 한 사람하고는 몸에 익힌 게 전혀 달라요. 한 시간 싸움을 한 사람하고, 한 시간 가만히 그냥 집에 앉았던 사람하고, 한 시간 기도한 사람하고는 익힌 바가 전혀 달라요. 그 몸에 익혀지면 그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주는 게 부모예요. 익혀주지 않으면 행동을 못해요. 근데 크면 하겠지. 천만에 말씀. 안 해본 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못합니다. 정말 신기해요. 내가 알던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부부가 다 의사거든요. 근데 이제 학술 토론해 보면 남녀가 똑같고 뭐 인권이 어떻고, 행복이 어떻고 하는데, 얘기 들어보면 그 남자 의사는 집에 가면 아무것도 안 해요. 똑같다는 건 말뿐이에요. 그래서 그 부인이 토론장에 있다가도 나가기에, ‘왜 나가냐고 하면, ‘우리 영감 밥 차려줘야 된다.’고 꾸역꾸역 나가고 있어요. 그럼 왜 그렇게 남자들은 집안일을 못하냐. 몸에 안 익혀서 그래요. 몸에 안 익힌 거예요. 그러고 뭐 평소에는 무슨 사랑이 어떻고, 상대편을 이해를 해주고 어쩌고 그러는데, 그 자녀들 말 들어보면 사랑할 줄 전혀 모른대요. 말 한마디 안 한대요, 집에 오면. 왜 이렇게 학문하고 생활하고 다르냐. 몸에 익힌 게 없어요. 학문은 책 보고 논문 쓰고 발표하고 토론하고 그런 것만 익혔기 때문에 그런 건 잘하죠, 아주. 안 익힌 건 못해요. 그래서 이 몸에 익히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이게 훈습이다. 훈습. 그래서 기신론에서 훈습을 얼마나 자세히 설명했는지, 염불을 쭉 하다 보면 그게 진여 훈습인데,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훈습이다 말이에요. 그런게 있어요. 그거 흡습에 대해서 오조법연선사(法演禪師)라고 하는 분의 어록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익힌 건 작게 익혔는데 얻은 건 많이 얻는다.> 뭐 이런 얘긴데, 국수에 물 뜰 국자가 있거든요. 물을 뜨면 뜨기는 물만 떴는데, 월계수하고 달이 자기 손에 있다. 국수에 월계수(掬水月在手). 물을 한 바가지 떴어. 근데 뜨기를 물을 떴어요. 그런데 물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안에 달이 들어 있어. 참 기가 막힌 거잖아요. 그래서 부르기는 뭐 부처님 이름 몇 번 불렀는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공덕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농화에 향만의(弄花香滿衣). 희롱할 롱자인데, 희롱이라는 건 가까이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 꽃을. 농화. 꽃을 좋아하고 꽃을 가까이 했을 뿐인데, 내 옷을 이렇게 보니까 옷에 향기가 가득해. 이게 농화향만의라고. 옷에 향기 배는 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냥 꽃이 좋아서 꽃을 쳐다보고 꽃을 가까이 하고 했는데, 옷에 향기가 가득했더라. 달 보는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물을 한 바가지 떴는데 그 물속에 달이 환하게 들어있다. 그게 이 훈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거든요.

        그래서 기도라는 거는 몸에 좋은 습관을 익히는 거예요. 몸에 좋은 습관뭔가 공덕의 습관, 인욕의 습관, 지혜의 습관. 근데 막상 하려면 재미 어지간히 없어요. 그러니까 재미없어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는 게 이게 일념이다. 산란심으로 빠져서 이게 망념으로 돌아가면 기도는 안 된다 이거에요. 망념에 흔들리지 말고 일념으로 나아가라.

 

 

圓滿成就(원만성취)

掘地得天 漸增歡喜

굴지득천 점증환희

擧首見天 本來在天

거수견천 본래재천

 

 

        그러면 원만 성취(圓滿成就)가 있어요, 기도에. 아주 원만히 성취하는. 그런 원만 성취인데 원만 성취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는 게, 또 이 장애가 하나도 없는 게, 부족한 것도 없고 장애도 없고, 그게 원만구족 무장무애 이런 거거든요.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하다. 그런데 원만구족 무장무애를 비유로 설명한 게 있는데, 원만 성취되기 전에는, 비유로 말하자면, 굴지득천(掘地得天)이라, 팔 굴자가 있고, 땅 지자가 있으니까, 굴지를 해요. 굴착기로 땅을 파. 그러면 뭐가 나오냐. 거기서 하늘이 나와요. 땅을 한 삽 파면 한 삽 크기만큼 하늘이 나와. 두 삽을 파면 두 삽 크기만큼 하늘이 나와. 이걸 굴지득천이라고 해요. 땅을 파서 하늘을 얻는다. 그럼 평생 굴을 파면 어떻게 되냐. 그 땅에서 판 굴 공간만큼 하늘을 얻는 거예요. 그게 전부 굴지득천이에요. 그럼 기도하기 전에는 이제 땅 파서 하늘 얻는 식으로, 요거 조금 해서 요거 조금 얻고, 요거 조금 해서 요거 조금 얻고, 이 모양으로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 원만 성취라는 것은 뭐냐. 거수견천(擧首見天)하니, 땅 파서 공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거에 아주 점증환희(漸增歡喜), 점점 기쁨을 느꼈는데, 그러다가 머리를 딱 들어서, 밑으로 내려다보고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머리를 들어서 딱 보니 전체가 하늘이더란 말이에요. 이게 거수견천이에요. 땅 파다가 머리를 딱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이 뭐 그냥 없는 데가 없다. 그러고 가만히 보니 본래재천(本來在天)이라, 본래 내가 하늘에 있었어. 그러고 보니까 하늘 없는 데가 없다 그 얘기에요. 그릇 속에도 하늘이 있고, 물건 속에도 하늘이 있고, 내 몸속에도 하늘이 있고, 산속에도 하늘이 있고. 그래서 뭐든지 부숴보면 하늘이 나오는데, 부숴야 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하늘이다. 그런 거를 이제 원만 성취라고 그래요. 기가 막히지. 깨닫기 전에 사는 거는 땅 파서 거기서 나오는 하늘 보고, 조금씩 조금씩 즐거워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머리 딱 들어서 하늘을 전체를 쳐다보니까 그냥 본래가 전체가 하늘이고, 본래가 내가 하늘 속에 있었고, 나도 하늘이고, 나 아닌 것도 하늘이고. 이런 거를 이제 원만구족 원만성취 무장무애 해탈경계 이렇게 얘기를 해요. 원만구족 원만성취 무장무애 해탈경계. 이곳으로 이제 가는 행위를 기도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뭘 바랬는데 왜 안 이루어지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주 고통일 수가 있어요. 이루어지는 게. 어떤 사람은 머리가 너무 좋아서 고통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너무 잘해서 고통이 생겨. 그래서 이게, 해서 얻는 걸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데, 유위법, 함이 있는 걸 통해서 얻어진다. 근데 이거는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지면 더 좋은 거예요. 이게 기도로서 세간을 보는 안목이에요. 어떤 사람이 아들이 감옥에 갔는데 그때 전쟁이 났어. 근데 감옥 안 가는 사람들은 전쟁에 죽었는데 감옥 간 사람은 전쟁 통에 안 죽었어. 그러니까 이게 이루어진 게 더 나쁠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진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현상적으로 뭐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그건 망상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 사라지든 관계하지 말 듯이, 되고 안 되는데 전혀 관계를 하지 말아야 그게 기도가 돼요. 되고 안 되는데 생각을 하는 건 그게 망상이에요. 망상.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든 생각에 안 쫓아가야 하듯이, 되든지 안 되든지 거기에 쫓아가지 않아야 기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좋은 게 내일 나쁠 수도 있고요. 그런 거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좋은 것이 나빠지지, 나쁜 건 더 나빠지지 않아요. 근데 사람은 좋은 거 찾다 나쁜 거 만나거든요. 좋은 거 안 찾으면 나쁜 거 안 만나요. 그게 인생이에요. 좋은 거 찾다가 나빠져가지고 나중에는 운다. 그게 인생은 구하다 죽는 거다. 인생은 통곡하며 죽는 거다. 통곡을 해요. 그런데 통곡을 왜 하냐. 자기 스스로 엉뚱한 걸 구했기 때문에. 이 몸 오래 살아봐야 좋은 거 없는데, ‘오늘 죽어라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이상하죠. 삶이 고통이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오늘 죽어라그러면 아 싫어해요. 그래서 극락세계가 좋다고 하는데도, 오늘 극락 가라고 그러면 안 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둘이 있을 때도 자기가 먼저 안 가려고 그러고, 자기는 뒤에 간다고 그래요. ‘당신은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고, 나는 뒤에서 나무아미타불’. 이런 게 있거든요. 그게 이제 중생심이에요. 인간은 바라다가 그랬는데 죽으면서는 통곡을 한다. 그 통곡이 어디서 나왔느냐. 쓸데없는 걸 구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거 안 구하면 통곡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그거 얻어봐야 쓸 데가 없는데, 자꾸 얻으려고 그래요. 얻어봐야 아무 쓸 데가 없어. 그런데 쓸데없는 걸 자꾸 얻으려고 그런단 말이야.

 

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차신불염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

(釋門儀範上,莊嚴念佛)(석문의범상, 장엄염불)

 

        그래서 빨리 기도를 잘해서 깨달아가지고 이 몸을 제도하라그런 가르침이 있는데, 시식할 때마다 맨날 장엄염불로 하는 가르침인데,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이라. 삼계라고 하는 것은 나고 죽는 그런 일이 삼계인데, 나면 죽고, 죽으면 나고, 나면 죽고 하는 것이 급정륜이라고 그러는데, 옛날에 수도 시설이 없을 때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떠내는 바가지가 있어요. 그걸 나는 충청도에서 타레박이라고 그랬는데, 국어사전에는 두레박이라고 돼 있더라고. 충청도는 타레박이라고 했어. 타레박에다 물을 준다. 국어사전에는 두레박이라고. 그 두레박이 둥그렇거든요. 물 뜨는 둥그런 두레박, 그게 우리 인생이다. 그래서 푹 집어넣어서 물이 떠지면 올라오잖아요. 또 비면 또 내려가잖아요. 또 올라오잖아요. 이렇게 죽었다, 살았다. 우물의 물들은 두레박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게 삼계유여급정륜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이라. 백천만겁, 그 진흙 티끌과 같은 겁수를 지나도 끝이 없다. 났다 죽었다 하는 일이 끝이 없다는 거죠. 차신불염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이 몸을 금생, 이 몸 죽기 전에 제도를 해서 그 청정심 원만구족한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이 몸을 그 원만구족한 청정세계로 가게 할 것인가. 그런 가르침이 있는데 만날 하는 거예요. 만날. 근데 이 번뇌 망상이 계속 습관화돼 있어서, 습관은 이게 본다고 듣는다고 바꿔지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새롭게 익혀졌을 때 그게 없어져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조심해야 되는 게, 책 공부시킨다고 인생 공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인생 공부는 몸으로 익히는 거예요. 책 공부는 머리로 익히는 거잖아요. 그 머리로 알아도 몸이 안 움직여. 그러니까 기도하면 좋다는 말은 들어도 안 돼.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서 이렇게 순서를 정해가지고 하는 건 아주 중요한 거죠. 그러나 재미는 없어. 그렇지만 재미없는 걸 할 때 거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익이 있으니까, 안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이 없어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