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8월 27일 음력8월 초하루 신중기도 법문 2022-08-27

 

-日常禮(일상례)持誦發願(지송발원)-

 

       안녕하십니까. 임인년 8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일상예경(日常禮)지송발원(持誦發願)>. 일상예경, 매일같이 항상, 지송, 수지독송, 늘 읽고 외우는 속에서 발원이 항상 들어 있다. 무엇을 외우든지 그 속에는 늘 발원이 들어있어요.

       천수경도 보면 전부 발원이에요. 원을 일으킨다. 그 원을 일으키는 게 왜 중요하냐. 원은 종자를 심는 거와 같은 최초 인연이라. 성불이 구경 인연,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인연이고, 발원이 최초 인연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최초 발원이 없으면 구경 성불도 없다. 구경 성불은 최초 발원에서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경에도 발원이 있고, 예불문에도 발원이 있고, 여러 의식을 봉행하는 데도 전부 발원으로 구성이 돼 있어요.

 

四弘誓願 (사홍서원)

衆生無邊誓願度 = 依苦諦立云 衆生無邊誓願度

중생무변서원도 = 의고제립운 중생무변서원도

煩惱無盡誓願斷 = 依集諦立云 煩惱無盡誓願斷

번뇌무진서원단 = 의집제립운 번뇌무진서원단

法門無量誓願學 = 依道諦立云 法門無量誓願學

법문무량서원학 = 의도제립운 법문무량서원학

佛道無上誓願成 = 依滅諦立云 佛道無上誓願成

불도무상서원성 = 의멸제립운 불도무상서원성

(千手眼大悲心呪行法, 四明知禮集, 大正藏46)

(천수안대비심주행법, 사명지례집, 대정장46)

 

 

       그럼 그 대표적인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이 있는데, 사홍서원, 네 가지 큰 서원이라. 이 네 가지 큰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불교 전체의 서원을 전부 종합한 것이다 그런 뜻이죠. 전체 불교 서원을 종합한 서원이 <사홍, 네 가지 넓은 서원> 그렇게 되는데, 그게 이 번역이 참 잘 됐는데, 한문으로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이렇게 나오는데, 한글로 하면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너무 번역이 잘 됐어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한문으로 하면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그런데 한글로 하면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그다음에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그렇게 되는데,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그러는데,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한문보다도 훨씬 더 좋은 내용이고, 읽기도 좋고요. 번역은 보통 잘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중생이라는 건 뭐냐. 중생이라는 것은 고통이 없으면 중생이라고 안 해요. 중생에게는 고통이 있고. 고통과 근심, 걱정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 고뇌라 그러는데 고뇌. 그러면 이 고통이 뭐냐. 죽고 살고, 되고 안 되고. 보통 고통을 얘기할 때 생로병사를 얘기하고, 애별리고(愛別離苦)를 얘기해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거. 또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거. 원증회고(怨憎會苦), 만나기 싫은 사람하고 만나는 거. 오온성고(五蘊盛苦), 몸과 생각이 너무 왕성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거. 이런 걸 이제 고통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이 생로병사라든지 이런 고통이 어디서 왔느냐. 이걸 설명하는 게 집()인데 고집, 이 집이라는 거는 여러 가지가 모여서 왔다. 여러 가지 모인 게 뭐냐. 거기에는 딱 한 가지예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거. 생로병사도 내가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는 거거든요. 거기에 주체가 나요. 그다음에 뭐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나고, , 이게 이제 번뇌인데, 나라고 하는 것은 불교 용어로는 혹업(惑業)이라고 그래요. 미혹할 혹자, 움직일 업자, 직업이라는 업자, 혹업. 혹업은 행위인데, 미혹한 행위이다. 미혹에서 온다. 뭐가 미혹이냐. 이 몸이 난 게 아닌데 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이 난 것이 없다>라는 걸 아는 거예요. 이거 참.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 몸이 난 것이 없다. 난 것이 없다는 것을 없을 무자, 날 생자, 무생(無生)이라고 그러고, 또 죽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적멸(寂滅)이라고 그래요. 고요할 적자, 없어질 멸자, 적멸. 그걸 열반이라고 그래요. 무생, 적멸, 열반, 그걸 깨닫는 거예요. 이 몸은 난 것이 없다. 무생. 이 몸은 죽는 것이 없다. 적멸. 이 몸은 죽고 사는 게 없다. 열반. 그런데 그걸 모르고 이 몸이 났다. 난 건 누구냐. 나다. 이 생멸과 아상에 매여서 살아요. 나고 죽는다, 나라는 생각에 매여서 사는데 그걸 혹업이라 그래요. 그런 혹업에 의해서 온갖 고통이 나온다. 그래서 번뇌라는 것은 난 것이 없는 데서 났다라고 잘못 생각해서, 나를 위해서 온갖 행위를 해서, 그 행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괴로움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이게 고집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어떡하면 되냐. 어떡하면 이 난 것이 없는 걸 깨닫느냐. 그게 깨닫는 방법이 이제 법문을 배우는 건데, 법문을 배운다라는 것은 다른 거 아무 것도 없고, 그 혹업, 난 것이 없는 나에게 났다, 나다, 내가 태어났다, 나다, 이렇게 생각하고 얽매이는 것을 닦아내는 거예요, 그 혹업을. 그게 법문을 배우는 거지요.

 

 
      그다음에 불도를 이룬다는 것은 이 몸은 난 것이 아니다, 이 몸은 죽는 것이 아니다. 나고 죽음이 없는 적멸 세계가 있다. 이걸 깨닫는 게 이제 불도를 이루는 건데, 이걸 어떻게, 불도를 이루면 어떻게 되냐. 무생구족, 생멸은 없는데 모든 게 다 구족해요. 갖출 구자, 넉넉할 족자.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걸 열반이라고 해요. 무생구족.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구족한 세계에 들어가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걸 성불이라고 하고. 그러면 이 무생구족을 초기불교에서는 별로 설명을 안 하는데, 이제 대승불교에서는 이 무생을 성()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성품이라는 성자, 그런데 중생들은 상을 보는데 성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늘 가르치는 걸 성을 가르쳐요. 상이라고 하는 것은 구름도 상이요, 이슬도 상이요, 바다도 상이요, 안개도 상이요, 상인데, 성이라고 하는 거는 그 축축한 습기, 습성, 그게 성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구름 모양이나, 안개 모양이나, 흐르는 물 모양이나, 얼음 모양이나, 이건 전부 모양에 불과하고, 내용은 바로 그 축축한 습기 그것이다. 그것이 여러 가지 나고 죽는 속에, 나고 죽음이 없는 성이다. 그래서 상에서 성으로 돌아가면 거기는 구족하다. 다 갖춰져 있다 이거죠. 상성.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항상 온갖 천지 만법에 본성이 있다. 그래가지고 그걸 만법 본성이라고 그래서 법성이라고 하거든요. 법성, 턱 보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일체제불에게 본성이 있다. 그걸 불성이라 그래요. 또 이 허망하고 무상하게 헛되고 거짓된 속에 헛되지도 않고 거짓되지도 않은 참성이 있다. 이래서 이걸 진성이라 그래요. 다 헛된 건데 거기에 아주 참 본성이 있다해가지고 진성이다 그러거든요. 나는 이게 몸인데 내 몸, 내 얼굴, 이렇게 내 몸을 말하는데, 이 내 몸에 나의 본성이 있다. 이걸 자성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자성. 이렇게 법성, 불성, 진성, 자성, 이걸 딱 보는 걸 견성(見性)이라고 그러고. 성을 본다. 이걸 믿는 거를 신성이라고 그러는데, 믿을 신자. 가르침에 의해서 쭉 따라가는 게 이제 신성인데, 자기가 눈앞에서 봐요, 이걸 견성이라 그래요. 현견불성, 눈앞에서 불성을 본다. 현견자성, 바로 눈앞에서 자성을 본다. 그러면 이걸(물컵) 떡 이렇게 보이면, 여기서 이 모양을 보는 게 아니라 법성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에서 태어난 몸을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자성을 봐요. 그러면 거기에는 무생구족이라, 생멸이 없고 다 갖추어져서 무생구족. 그냥 놀면 돼요. 할 일은 없어. 인간이 바쁘고 할 일이 많고 힘들고 어려운 건 전부 번뇌망상으로 시작된 거예요. 할 일 없어요. 할 일 많은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해서 뭐 할 건데. 다 쓰잘데기 없어요. 전부 그것은 상 놀음이다. 상 보이는 모습이다. 그 성 놀음이 아니에요. 그걸 현상, 진성 이렇게 설명해요. 전부 현상 놀음입니다. 나타난 모양, 나타난 모양에 얽매여서 하니까 바쁜 거예요. 참된 본성에 들어가면 없어. 그냥 무생구족이에요. 생멸 없는 구족한 것이다 이거죠. 그게 불도예요.

        그래서 불도를 대승불교에서는 원융무애라고 설명을 해요. 원융무애. 원융하다. 어떻게 원융하냐. 원이라는 거는 두루, 융이라고 하는 것은 융통한다. 융자는 통한다 소리요. 두루 다 통한다. 그 뭐와 같으냐. 이 습기가 있는데, 습기는 빗물하고도 통하고, 안개하고도 통하고, 얼음하고도 통하고, 다 통한다는 거죠. 그리고 비나 얼음이나 걸리지 않아, 이걸 무예라고 그래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일념은 일 찰나인데 무량겁은 한량없는 세월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 진성으로 돌아가면 일 찰나 진성이나 무량겁 진성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이게 원융무애예요. 이렇게 이 경지에 들어가는 거를 이제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그러고요. 불도라는 것은 원융무애, 구족자재 다 갖춰져 있고, 한 티끌이나 시방세계가 다 원융무애에서 구족자재하거든요, 다 갖춰져 있고 자재하고. 그렇게 되면 저절로, 거울이 밝으면 모든 게 다 비추듯이, 저절로 자비가 나와요.

 

       아집이 있을 때는 탐욕이 나오는데 모든 욕심은 자기 집착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 저렇게 구하는 게 많냐. 그거 몰라서 물어요. 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전부 자식 생각뿐이다. 그게 누구 자식인데요? 내 자식이지. 나는 오직 남편 뒷바라지만 한다. 그게 누구 남편인데? 뭐 딴 동네 남편을 위해서 하는건가요? 그 모든 탐욕에는 나라는 게 들어있는 거예요.

       근데 나라는 게 없어지고 그 자성, 진성에 머물면 어떻게 되냐. 그 탐욕이 아니라 자비가 나온다. 자비는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 하는 원력이 나오는데, 이걸 불사라고 그래요, 부처님의 일이다 말이에요. 부처님의 일은 자기 원력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여러 문에 보이고 나타난다. 이걸 불도라고 하거든요. 원융무애 구족자재 자비원력 보문시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성제 법문이 있는데, 고에서 중생무변서원도 하는 이 발원이 나왔고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인간은 고통이 있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를 원을 세우기를, 거기에 근거해서, 그걸 땅바닥으로 딱 서서 원을 세우기를 중생무변서원도,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이런 원을 세웠고, 또 번뇌는 다 끊어오리다 이런 거를 갖다가 번뇌무진서원단, 이건 이제 고집, 고통은 집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그 집에 의해서 번뇌무진서원단 원력이 나왔고. 또 법문무량서원학은 고집멸도라는 게 있거든요. 그 도제에 의해서 이제 법문을 다 배우리라가 나온 거고, 불도무상서원성 이거는 이제 고집멸, 멸제에 의해서 불도무상서원성 이런 원력이 나온 거예요. 초기불교는 고집멸도 사성제인데 대승불교는 사홍서원이다. 이렇게 이제 가르치는 게 이게 대승불교예요. 이거는 천수안대비심주행법(千手眼大悲心呪行法)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관세음보살 천수안이죠. 대비심주 천수다라니인데 그 다라니를 어떻게 봉행하고 어떻게 예경할 것이냐 그 행법이 있는데, 그 행법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自性衆生誓願度 自性煩惱誓願斷

자성중생서원도 자성번뇌서원단

自性法門誓願學 自性佛道誓願成

자성법문서원학 자성불도서원성

自心衆生無邊誓願度 自心煩惱無邊誓願斷

자심중생무변서원도 자심번뇌무변서원단

自性法門無盡誓願學 自性佛道無上誓願成

자성법문무진서원학 자성불도무상서원성

自心衆生度 : 自心中 煩惱衆生 般若智自度 名爲眞度

자심중생도 : 자심중 번뇌중생 반야지자도 명위진도

自心煩惱斷 : 將自性般若智 除却虚妄心 是也

자심번뇌단 : 장자성반야지 제각허망심 시야

自性法門學 : 須自見性 常行正法 是名眞學

자성법문학 : 수자견성 상행정법 시명진학

自性佛道成 : 常行般若 除眞除妄 即見佛性 即成佛道

자성불도성 : 상행반야 제진제망 즉견불성 즉성불도

(六祖壇經 傳香懺悔5)(육조단경 전향참회제5)

 

 

       그런데 이제 사홍서원 경전의 가르침이고, 천수경에 보면 자성중생 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이 말이 있어요. 자성.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이거는 경전에 의한 서원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의한 서원이에요. 이 많은 공덕과 지혜를 이루는데 멀리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중생이 있다. 그래서 내 마음속 중생을 제거하는 걸 자성중생서원도라고 그래요. 그 내 마음속 중생이 뭐냐. 이 법문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하는데 나와요. 육조단경에 보면, 자성중생을 제도하라. 그러면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조사선법 자성법문이거든요.

 

       그러면 자성중생이 뭐냐. 자성중생은 자기 마음속에 번뇌중생인데,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구할 것이 없는데 구하려고 하는 거, 죽음이 없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는 거, 이걸 전도몽상이라고 그래요. 왜 죽음이 없냐. 왜 남이 없냐.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떡 떠오르는데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태어난 건 아니다. 저녁에 이제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는데 안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죽는 게 아니다. 상으로는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만, 진성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은 전부 나고 죽는 데서 나와요. 그러니까 그걸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죽음이 없는데 죽는 거 걱정하는 거, 이거 참, 사람 미칠 노릇이에요. 죽는 건 아예 없어요. 이 물을 이걸 사람이 마셔도 이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물은 또 땅에 버려도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물 없어질까 봐 온갖 걱정 다 하면 그걸 번뇌라고 하는 거거든요. 번뇌는 전도몽상이라고, 전도라는 거는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되지도 않는 생각이다 이 말이에요.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말도 안 된다고 그러잖아요. 말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진가. 전부 되지도 않는 생각이죠. 그걸 전도몽상이라고. 어려운 말로 전도 몽상. 그래서 자성 중생이라는 건 내 마음속에 그 쓸데없는 생각을 다 맑혀요. 그것이 뭐냐 그러면, 반야 지혜로 내 자성중생을 스스로 제거하는 것이 자성중생서원도다 그 말이죠.

 

        자성번뇌서원단 그러면 이 반야지혜를 가지고 허망한 생각을 다 없애는 게 그게 자성번뇌를 없애는 거고, 자성법문서원학 그러면 견성을 해서 내가 스스로 나의 자성을 봐가지고 상행정법(常行正法)이라. 항상 바른 법을 행한다. 그 바른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법에 머물지 않고 법성법, 불성법, 자성법, 진성법에 다 머물러서 그 진성법을 실행한다 이 말이죠. 상에 머물면 근심 걱정이 있는데, 성에 머물면 근심 걱정이 없어요. 저 멀리서 새가 깍깍하는데, 여기서는 사홍서원 설명한다고 마이크 대고 막 떠들고 그러면, 상으로 보면 새 소리나 마이크 소리가 다른데, 성으로 보면 원융무애, 다 원융하게 통하고 걸림이 없어요. 그다음에 자성불도서원성은 항상 성에 머무는 것이 반야인데, 상에 머물면 번뇌고 성에 머물면 반야란 말이에요. 지혜. 그게 항상 그 반야지(般若智)로서 좋고 나쁜 건 다 없애는 거예요. 진실, 허망이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진실하다는 생각과 허망하다는 생각 다 없어요. 내 법이라는 생각과 타인법이라고 하는 생각 없어요. 그래가지고 상견불성, 상성불도, 항상 눈앞에서 법성, 진성을 보는 거예요. 근데 상으로 보면 전부 다 이게 물질인데, 성으로 보면 전부 진성이에요. 이걸 이렇게 드러내도 이게 진성이고, 하늘을 봐도 진성이고, 땅을 봐도 진성이고, 사람이 죽을 때도 진성이고, 태어날 때도 진성이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전도몽상을 일으킬 때 죽는다 산다, 보인다 안 보인다 하는 거거든요. 그래가지고 늘 불성을 보고 항상 불도를 이루는 거예요. 그냥 여기서 있을 때는 여기서 불도를 이루고, 저기서는 저기서 불도를 이루고, 항상 불성을 보는 거예요. 이걸 자성불도서원성이라고 한다 이렇게 가르쳐요. 이거 이제 선불교, 아까 사홍서원은 전체 대승불교이고, 이 조사선법 선불교 가르칠 때는 이걸 자성사홍서원이라 그런다 이거죠. 근데 천수경에는 이게 다 있어요. 그게 우리나라 불교에.

 

如來十大發願文

여래십대발원문

願我永離三惡道 願我速斷貪瞋癡 願我常聞佛法僧

원아영리삼악도 원아속단탐진치 원아상문불법승

願我勤修戒定慧 願我恒隨諸佛學 願我不退菩提心

원아근수계정혜 원아항수제불학 원아불퇴보리심

願我決定生安養 願我速見阿彌陀 願我分身遍塵剎

원아결정생안양 원아속견아미타 원아분신변진찰

願我速度諸衆生(往生淨土十願文, 樂邦文類2. 大正藏47)

원아속도제중생(왕생정토십원문, 낙방문류2, 대정장47)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사홍서원과 자성사홍서원 그 중간에, 일체중생이 꼭 머물게 하는 극락세계를 얘기하는 게 여래십대발원문이에요. 그거는 극락세계 가는 건데, 왕생정토십원문(往生淨土十願文)이라고 하는 법문에 있는 내용이에요. 왕생정토, 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10가지 원이다, 이게 십원문이거든요. 거기는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이렇게 나와요. 이게 자성하고 틀려요. 내 안에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게 자성중생 서원도인데, 이거는 삼악도, 일체 법계에 있는 삼악도를 멀리 여의기를 원한다. 이렇게 돼가지고 마지막에는 원아속도제중생(願我速度諸衆生), 일체제중생을 다 제도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자성이나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이건 부처님의 원력과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신통을 내가 힘입어서, 승불원력(乘佛願力)하고, 내 힘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우리가 차 타고 가면 빠르듯이, 탈 승자, 승불원력,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간다. 이게 이제 여래십대발원문이에요.

 

       그래서 사홍서원과 왕생발원과 자성발원이 다 있는데, 이런 거를 맨날 외울 때 이렇게 발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성불하면 사홍서원이고, 내 자성 속에서 성불하면 자성사홍서원이고, 부처님의 원력을 힘입어서 극락세계에 가면 그것은 왕생정토 승불원력으로 시행되는 거다 이거죠. 이런 거를 만들어 외워요. 만날 외우는데 이제 문제가 요즘 이게 한글 세대인데 이 한문으로 이렇게 하면 이게 너무 답답하지 않나 그러는데, 그 옛날에 60년대 뭘 경험했냐고 그러면 내가, 할머니들, 그 당시 절에 오시는, 대부분 한글 모르세요. 한글도 모르는 할머니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금방 외우는데, 이 대학생 애들은 말이야, 이게 한 달이 되도 못 외우고 1년이 되도 못 외우고 그래요. 그래서 아 이거 쉽게 만들 필요가 없다. 이건 마음 문제지, 이게 뭐 능력 문제가 아니다.’ 능력 아무리 있어도 마음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쉽게 만들어놔 봐야 관심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은 쉽게 만들 생각은 안 해요.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만들어 놔도 안 먹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배고프면 다 먹어. 그래서 배고플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저 애들 양육하는 어머니들 답답해요. 쫓아다니면서 먹으라고 그래요. 그거 미쳤어. 굶겨요. 굶겨. 그러고 잠재운다고 그래요. 그 잘못된 생각에 잠재우려고 하지 말고 애들 데리고 막 돌아다녀요. 그러면 그냥 쓰러져 자요. 애들이. 밥 안 먹을 때는 굶기고, 잠 안 잘 때는 막 그냥 뛰게 하고, 같이 뛰어요. 운동을 시켜요. 그러면 다 하는데 왜 그걸 그리 해요.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가 잠 안 잔다고 그러는데, 할아버지는 기운이 없어서 맨날 애를 방에만 데리고 있거든요. 그러면 잠 안 자죠. 근데 아버지가 데리고 나가서 운동장에서 그냥 몇 시간을 같이 뛰었어요. 그러니까 그날 저녁에 저녁 되자마자 그냥 쓰러져 자요. 그러니까 이걸 뭘 쉽게 만들고 어렵게 만들고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문제는 마음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