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2월 12일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4-02-12

 

- 주제 : 自己自體佛(자기자체불) -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정초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갑진년 정월 초사흘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有三種因果 유삼종인과

六道善惡因果 三乘單敎因果 一乘圓教因果

육도선악인과 삼승단교인과 일승원교인과

因該果海 果徹因源 相入相卽 法界因果

인해과해 과철인원 상입상즉 법계인과

一一塵中 即見法界 三世自身 卽見佛身

일일진중 즉견법계 삼세자신 즉견불신

 

        불교는 <인과와 깨달음>, 인과와 깨달음인데요. <인간은 신행이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심원이라>, 마음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몸으로는 인과를 행하고, 마음으로는 깨달음을 원하는 것이 불자다. <신행, 심, 인과, 성불>, 그게 이제 불자인데, 인과가 뭐냐. 세 가지로 가르쳐요. 첫째는 육도선악인과(六道善惡因果). 육도는 중생 세계거든요. 거기는 선인과가 있고, 악인과가 있는데, 그것이 육도 세계라고 가르치고.

        그다음에는 깨달음의 인과인데, 삼승단교인과(三乘單敎因果). 삼승은 보살승, 또 연각승, 성문승 그런데, 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정진하는 분들이 삼승이거든요. 근데 이 삼승은 단교라고 해서, 홑 단자, 단일이라는 단자, 따로따로 해요. 성문이 닦는 길이 따로 있고, 연각이 닦는 길이 따로 있고, 보살이 닦는 길이 따로 있어서 이걸 단교라 그래요. 단교. 그래서 삼승단교인과가 있고.

        그다음에 삼승이 더 깊어지면 일승이 되는데, 일승은 불승이라 그래서 부처님의 세계를 말해요. 그래서 삼승, 일승. 삼승은 불제자, 일승은 부처님 세계. 그래서 일승인데, 삼승은 단교인데 일승은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一乘圓教)라고 하거든요. 원교. 일승원교. 일승원교는 법계인과를 가르쳐요. 법계, 온 법계의 인과를 말하는 게 일승원교인데, 그래서 오늘 법문은 <법계인과와 구래성불>.

        그럼 성불은 이제 뭐냐. 다겁성불을 또 가르쳐요. 중생 근기에 따라서 오랫동안 다겁(多劫)을 통해서 닦아야 성불한다. 이게 다겁성불이고요. 또 구경성불(究竟成佛), 불자는 끝에 가면 끝끝내 다 성불한다. 이게 구경성불이에요. 다겁성불, 구경성불, 또 찰나성불을 가르쳐요. 찰나에 성불한다. 찰나성불.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구래성불(舊來成佛). 구래가 뭐냐. 옛 구자, 올 래자인데 옛날부터 이미 성불했다. 이게 구래성불이에요. 구래성불, 옛날부터 성불했다 이거지. 그리고 이 구래라는 말을 본래라고도 써요. 본래 성불했다. 원래라는 말도 써요. 원래 성불했다. 그래서 구래성불, 원래성불, 본래성불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일승원교인데, 일승원교는 법계인과(法界因果)이기 때문에 그래요.

        법계인과는 뭐냐. 일체중생, 또 제불보살, 산하대지, 이걸 삼종세관(三種世間)이라고 그러는데, 삼종세간이 전부 이게 일법계예요. 삼종세간이 한 법계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아주 짧은 한순간이 일 찰나인데, 이 법계인과에서는 일 찰라가 무량겁이에요. 이건 선악인과나 삼승단교인과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법계인과만 통하는 거에요. 온 법계가 하나기 때문에 원일무이다. 원래 하나고 둘이 없다 이거예요. 이게 해인삼매 화엄세계거든요. 원일무이. 그래서 아주 찰나가 무량겁이고, 한량없는 세월이고, 일진이 만법계라, 한 조그마한 티끌이 온 법계에 다 해당되는 게, 이게 법계인 거예요. 그러니까 또 시작이 바로 끝이다. 발심이 바로 성불이다. 그래서 삼승단교인과는 시작과 끝이 다른데, 법계인과는 시작과 끝이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거를, 다르지 않은 걸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상입상즉(相入相卽)이라고, 서로 상자, 들어갈 입자 시작에서 결과로 들어가고, 결과에서 시작으로 들어가고, 상입상즉 법계인과라, 그래서 시작 없는 결과는 없고, 결과 없는 시작은 없다. 그래가지고 이걸 비유로 가르친 게 10전법인데, 동전 10. 동전 10개를 가만히 보면 동전 하나하나로 이루어졌어요. 1전이 없으면 10전도 없다. 10전은 전부 1전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1전이 10이 되고 또 10전은 1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화엄경 성불 세계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하나가 많은 것이고 많은 것이 하나다. 이거를 <화엄경 법계 연기 불신 세계>라고 그래요. 부처님 몸의 세계다. 그래서 법계 연기 가르침은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 몸 안에 들어있어요.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 몸 안에 들어있고, 또 부처님이 중생의 몸 안에 들어있어요. 이게 상입상즉이에요. “아따 이게, 복 받으려 할 기도인데 이게 성불 얘기만 자꾸 합니까?” 이게 근데 성불 없는 복이 없어요. 그게 법계인과예요. 또 복 없는 성불이 없고, 복이라는 거는 너무너무 좋은 건데 생겼다 없어져요. 그게 문제예요. 복은 한 복이 오래오래 가는 게 아니라 생겼다 없어져. 그래서 이걸 생멸 세계라고 하거든요. 나고 죽는 세계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상주해요. 항상 머무는 거예요. 광명이요. 늘 빛나는 거예요. 그래서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이게 깨달음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이 법계인과는 <화엄성중>하면 이미 성불 한 거예요. 일즉다에요, 그게. 여기 화엄성중 정근하는 거 맞아요? 옳게 말했네. 같이 해보실래요. “시작. <화음성중>. .” 이미 다 된 거예요. 이게 일즉다에요. 하나가 곧 많은 것이다. 1전이 바로 10전이에요. 10전이 바로 1전이고. 그래서 법이 가득하다. 법원만이라고 하는 걸 가르치는데, 법원만은 시작법도 원만하고, 마지막 성취법도 원만하고, 그래서 초발심이 시작인데, 초발심법과 이 구경각(究竟覺) 법문이 똑같다. 이게 상입상즉이다. 초발심이 구경각으로 들어가고, 구경각이 또 초발심으로 들어가서, 서로 들어가고 서로 하나가 된다. 이게 불승세계, 일승세계라 그러거든요. 불승세계 일승세계를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화엄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정근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이미 다 성취가 된 거예요. 일전 일전이 없으면 10전은 없다. 이게 하나가 없으면 많은 것도 없다. 이게 법계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닦아서 나중에 이룬다 이거는 삼승 단교, 하나하나 가르치는 단교인과고, 하나가 모든 것이다 그러면 이거는 일승원교인과라는 말이죠. 둥글 원자, 원교인과. 성불을 딱 하고 보면 지금 성불 한 게 아니라 옛날에 이미 성불했다. 이걸 아는 게 이게 구래성불이에요. 할 때는 몰랐는데 하고 나니까 옛날에 성불을 했더라. 이걸 알게 돼요. 이거 참 묘하네. 진짜.

 

一乘圓敎舊來成佛

일승원교구래성불

問 具縛有情 未斷煩惱 福智未成 以何義故 舊來成佛耶

문 구박유정 미단번뇌 복지미성 이하의고 구래성불야

答 煩惱未斷 不名成佛 煩惱斷盡 福智成竟 自此已去

답 번뇌미단 불명성불 번뇌단진 복지성경 자차이거

名為舊來成佛 (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韓佛全6,829)

명의구래성불 (법계도기총수록권하지이.한불전6,829)

 

 

        그래서 여기서 이제 혼란이 와가지고, 의상스님 저술에 보면 그게 나와요. 구박유정(具縛有情), 구박이라고 하는 것은 갖출 구, 얽힐 박자인데, 번뇌망상이 많이 다 얽혀 있다 이 말이에요, 중생이란 말이죠, 유정은. 미단번뇌(未斷煩惱)하고, 번뇌를 끊지 못하고, 복지미성(福智未成)이어늘, 복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이하의고(以何義故), 어떠한 뜻이 있어서, 구래성불야(舊來成佛耶), 옛부터 이미 성불 했느냐. 이렇게 질문하는 게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대답을 하기를, 번뇌미단(煩惱未斷)이면,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불명성불(不名成佛)이라, 성불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번뇌를 못 끊었으면 성불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거지. 그럼 뭐냐. 번뇌를 다 끊고, 번뇌단진(煩惱斷盡)하고, 복지성경(福智成竟)이라야, 복과 지혜를 다 이루어야 자차이거(自此已去), 이때부터, 번뇌를 다 끊고 복을 다 이루어야만 그때부터, 그다음으로 명위구래성불(名為舊來成佛)이라, 이름을 옛부터 성불했다고 한다. 번뇌를 끊은 다음에라야 구래성불을 알아요. 번뇌를 끊기 전에는 옛부터 성불한 줄을 모른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걸 비유로 말하기를 꿈에서 깨어야만 꿈이 없었다는 걸 안다. 꿈을 꿀 때는 꿈이 없었다는 걸 모른다. 이렇게 가르쳐요. 무슨 소린지 참. 아니 꿈꿀 때는 몰라요. 자기가 꿈이 없었던 줄 몰라요. 꿈 분명히 있죠. 근데 꿈 깨고 나면 꿈은 없는 거야. 꿈은 없는 거예요. 꿈은 없는데 뭐냐. 평소에 의식이 이 눈을 통하지 않고 몸을 통하지 않고 저 홀로 일어나는 걸 꿈이라고 그래요. 이걸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그래요. 홀로 독, 머리 두. 홀로. 머리는 어조사고. 의식이 홀로 일어나는 걸 꿈이라고 하거든요. 평소에는 이 의식이 눈을 통해서 일어나고, 귀를 통해서 듣고, 몸을 통해서 움직이고 그러잖아요. 근데 꿈에서는 이 몸은 그대로 놔두고 의식만 이놈들이 따로 움직여요. 홀로. 그걸 꿈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평소에 생각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꿈은 별로 신경 쓸 거 없어요. 해몽하러 쫓아다닐 것도 없고요. 꿈이 뭐 어떻다고 속상할 것도 없고 그냥 꿈은 없는 거예요. 생각이 저 홀로 일어난 게 꿈이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생각이 저 홀로 뭐가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꿈을 어떻게 다스릴 수는 없어요. 지 홀로 일어났다, 지 홀로 또 사라져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니까 구래성불도 꿈과 같아서 꿈을 깼을 때 꿈이 없다는 걸 알듯이, 번뇌를 다 끊었을 때, <번뇌가 옛날부터 없었구나> 하는 걸 안다 이거지.

 

起此問意 若約十佛則 法界諸法 無非是佛 然此今日我等 盲冥凡夫

기차문의 약약십불즉 법계제법 무비시불 연차금일아등 맹명범부

何能卽是十佛耶 如是難也

하능즉시십불야 여시난야

答意則 超情之法 友情卽是 若反情見 法界圓明 一切衆生 煩惱斷盡

답의즉 초정지법 반정즉시 약반정견 법계원명 일체중생 번뇌단진

福智成竟 豈非佛耶 如是答也

복지성경 기비불야 여시답야

(叢髓錄 大記文. 韓佛全6,837)(총수록 대기문. 한불전6,837)

 

 

        근데 의상스님의 훌륭한 제자분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후에 의상 스님 제자 중에서 대기라고 하는 기록을 남긴 분이 있는데, 그분이 여기에 대한 해석을 했어요.

      기차문의(起此問意), 이 질문을 일으킨 뜻은 무슨 뜻이냐. 왜 번뇌가 있는데 옛부터 성불했다고 하느냐, 이런 질문이었죠. 그러니까 약약식불즉(若約十佛則), 만약 부처님의 10불 세계, 부처님의 10가지 불신 세계가 있는데, 10불 세계를 근거로 하면, 법계제법(法界諸法) 무비시불(無非是佛)이라, 부처님의 십불에서 딱 보면 이 법계 온갖 일체 현상들이 부처님 아닌 게 없다.

        그러니까 이게 한마음으로 우주를 다 보면, 우주가 한 마음 아닌 게 없다. 이거 이제 여기서 속아요. 이 눈으로 온갖 걸 보니까, 이 온갖 게 따로 있는 줄 알아요. 근데 여기에는 마음이 있어요. 마음이 없으면 볼 수가 없어. 그러면 저 보이는 세계는 색즉시공이고, 이것도 어렵네, 색이 공한 거예요. 이 보는 마음만 중간 법문한다고 해. 중간 법문. 신지 광명이 상주 법계라. 그 마음의 몸, 마음의 지혜의 광명이 법계에 항상 머문다. 그래서 그 마음은 물과 같고, 이 삼천대천 우주법계는 물속에 비추어진 그림자와 같다. 그래가지고 이 불교는 온갖 세상을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고 하거든요. 물 수자, 달 월자. <이 우주만법계가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럼 달은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모양들이고, 마음은 물이란 말이에요. 이게 요것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물속에 비추어진 그림자가 이 손 모양이고, 이 몸 모양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원숭이는 물은 못 보고 물속에 비춰진 그림자만 보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미혹한 범부는 자기 마음 물은 못 보고, 마음에 비추어진 달 그림자만 본다. 그래서 달 건지려고 원숭이가 연못에 들어가서 빠지기만 하고, 달은 없어. 그래서 세상에 뭐가 있는 줄 알고 평생 구해봤댔자 죽는 순간에는 다 한낱 티끌뿐이고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맨날 이런 소리하니까 그 소리 좀 하지 마라고 그러는데, 죽는 순간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물속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 며느리도 남는 게 없고, 내 몸도 남는 게 없고, 이게 원숭이가 달 건지려고 물에 들어갔지만 달은 안 건져져. 몸만 다 그냥 고생이단 말이죠. 그래서 세상 거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몸만 늙어서 죽지 세상 건 뭐 얻어봤댔자 티끌이야. 그럼 어쩌란 말이냐뭐 이렇게 이제 하는데, 그러니까 너무 욕심내지 말고 건강하게 살다 건강하게 죽어라. 건강하게 죽는다는 건 뭐냐.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어라. 건강하게 죽어라 그러잖아요. 그럼 건강하게 죽는 게 어떤 거야?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어. 그건 뭔 소리냐. 달이 물속에 없어져도 물은 영원하다. 죽음이 없는 거 보고 죽는 거지. 또 뭔 소린가 싶어가지고. 죽음이 없는 걸 보고 죽고, 삶이 없는 걸 보고 살고, 그러면 그걸 해인삼매(海印三昧)라 그래요. 바다에 비친 그림자를 보듯이 인생을 본다 이거죠. 그래서 삶이라는 건 이게 마음의 그림자인데, 삶이 없는 걸 보고 딱 살면 삶이 힘들지 않아요. 죽음이 없는 걸 보고 딱 죽으면 죽음이 괴롭지 않아. 그거 하라는 거죠. 그래가지고 이제 이 의상스님 제자가 법계 제법이 무비시불이라, 부처 아닌 게 없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해인삼매. 근데 이제 범부들은 연이나 차 금일 아등(然此今日我等)은 우리들은 맹명본부(盲冥凡夫)라 그래. 이 참 이게 독특한 말을 썼는데, 맹명범부, 눈멀 맹자, 어두울 명자. 이 해인삼매, 자기 마음을 보는 데는 깜깜해가지고 그냥 맹인과 같이 어두운 중생들이다 이 말이죠. 맹명범부는 뭐냐. 하능즉시십불야(何能卽是十佛耶), 어찌 능이 십불을 감당하겠는가. 여시난야(如是難也), 이와 같이 질문을 했다. 

        그리고 밑에 것도 의상 스님이 대답한 말도 있는데 대답한 건 뭐냐. 번뇌를 끊지 아니하면은 옛부터 성불했다고 안 한다 이런 걸 이제 말했잖아요.

         그러면 번뇌를 끊어서 성불하는 거는 뭐와 같으냐. 이거 복 짓기도 어렵고 참 복 받기도 어려우네. 이게 전부 복 짓고 복 받는 건데 지금 이 순간이. 그러면 번뇌를 끊고 바로 옛부터 성불했다는 걸 아는 방법은 뭐냐. 그거에 대해서 이 대기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뭐냐 이게. 답의즉(答意則), 대답한 뜻인즉, 초정지법(超情之法)이라고 했죠, 이 해인삼매는. 법계인과는 초정지법이라. 뛰어날 초, 감정 정. 감정은 생각인데, 이 감정 생각을 뛰어넘는 법이다. 감정 생각에서 벗어난 법이다. 근데 이걸 감정 생각으로 알려니까 어려운 거예요. 초정지법이라는 말을 썼어요. 감정과 생각을 다른 말로 하면 정식이라고 쓰는데, 감정 정, 의식 식, 이 정식을 초월한 법이다. 근데 이거는 어떻게 하면 그 정식을 초월한 법에 갈 수가 있느냐. 반정즉시(友情卽是), 정식을 돌이키면 바로 그거다. 반정. 반정이라고 옛날 임금 반대하는 데모를 반정 데모라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고, 돌이킬 반 감정 정. 그 감정을 돌이키면 바로 그게 초정지법이다. 감정을 초월하는 법이다. 그래서 모든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반정이에요. 반정. 그럼 미혹함이라고 하는 건 뭐냐. 순정이요. 그 감정을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갈 순자 감정 정자. 감정을 따라가면 미혹이고, 감정을 돌이키면, 반정을 하면 그게 깨달음이에요. 반정즉시라. 감정을 돌이키면 바로 그것이다. 약 반정하야 견하면(若反情見), 만약 정식을 돌이켜서 딱 보면, 그다음 말이 법계가 원명(法界圓明)하야. 이 마음 본성이 둥글고 밝아서 우주에 그대로 꽉 차 있다. 이걸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이라고 그러거든요. 일체중생의 본래 마음이 우주법계에 둥글고 꽉 찼어, 둥글고 밝아. 그래가지고 일체중생이 번뇌는 하나도 없고, 번뇌를 다 끊었고, 복지를 성경(福智成竟)이라, 복과 지혜를 다 이루었다. 기비불야(豈非佛耶), 어찌 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 생각 하나 딱 돌이키면 옛날부터 자기가 부처였다는 걸 알아요. 근데 생각이, 원숭이가 물에 있는 달 건지듯이, 밖으로 밖으로 계속 따라가는 순간에 계속 이 육도에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상스님 가르침 중에 반정성불이라, 반정하면 성불이요. 반정하면 깨달음을 이룬다. 감정을 하나 돌이키면. 

         그럼 반정하는 방법은 뭐냐. 기도하는 거지. <화엄성중> 하면 그 화음성중에 집중해서 감정이 다 안으로 돌아가게 돼요. 그래서 업장은 다 소멸이 되고, 거기서 지혜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깨달음이 멀리 있나. 고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발심이 성불이기 때문에. 시작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게 이제 일승원교인데,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에 따라서 정말로 그럴까요?” 이럴 수가 있어요. 이걸 까까중생이라 그래요. 까까중생. 그 말하면 그게 그럴까요? 그게 그럴까요?” 이거 한도 없어. 그래서 이걸 의심하면 방법이 없어요. 뭐 인간 소통이라고 그러지, 소통은 믿어야 소통이 되지 몇 시간을 설명해도 그건 아니고요. 이러면 몇 시간 설명한 게 무용지물이요. 그러니까 이거 뭐 반정이 바로 성불이다. 순정이 바로 미혹이다 해 봤대자, “그게 그럴까요?” 하면 이건 다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다음을. 그러니까 이게 <화엄성중>해서 기도를 한 순간에 끊을 거 다 끊고 이룰 거 다 이뤘는데, 구래성불인데, 이거를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그냥 자기가 다 끊고 다 이룬 걸 모르는 상태로 그냥 하는 거예요. 하긴 한 거예요. 몰라도 한 거예요. 그래서 그전에 큰 스님들이 법문을 들어도, 다 알아야 듣는 게 아니다, 모르고 들어도 그게 법문이다. 비유로 말하면, 그전에는 한약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좋은 약을 모르고 먹어도 몸에 좋다. 이거 참. 어떻게 이게 한의사도 아닌데 약이 좋은 걸 어떻게 먹는 사람이 다 아냐. 근데 그 약을 알아서 먹는 건 아니에요. 몰라도 먹는 거예요. 먹고 나면 몸이 좋거든. 그러니까 이 법문을 들을 때 잘 이해가 안 돼도 까까 소리만 하지 말고, 그럴까, 안 그럴까, 그런 소리만 하지 말고 훌륭한 법문이다, 이렇게 의심을 내지 말고 불생의심하고 신수봉행(信受奉行)하라. 믿어 받아서 봉행을 하면 되는 거예요. 다 알 수는 없어도 신수봉행하는 가운데 그게 복이 되고 지혜가 되고, 이 복과 지혜가 이제 이루어져서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옛날부터 부처였다는 걸 그때 안다. 번뇌를 끊지 못했을 때는 옛날부터 부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게 의상스님의 가르침이에요. 꿈에서 깨어나야 꿈이 없는 줄 알지, 꿈을 꾸는 순간에는 꿈이 없는 줄 모르는 거와 같다. 

         그런데 제자들이 역시 그때도 마찬가지예요. 하나가 모든 것이라면, 일즉 다라고 하면, 이 중생신하고 제불신하고 상입상즉이니까 서로 들어가고서 서로 들어가니까, 이 몸이 제불신으로 들어가고 제불의 몸이 이 중생신으로 들어오고 하니까, 이 중생신이 바로 비로자나 십신불인데 비로자나 십신불이 바로 나의 몸이다. 그런데 이게, 그걸 알기가 참 어렵다 이 말이죠. 믿기는 믿는데 알기는 어려워. 이 몸이 바로 부처님 몸하고 같다. 중생신이 제불신이다.

 

表訓眞定等十餘德 從和尙所 學此印時 問云 不動吾身 卽是法

표훈진정등십여덕 종화상소 학차인시 문운 부동오신 즉시법

身自體之義 云何得見 於是和尙 卽以四句偈子 而答之云

신자체지의 운하득견 어시화상 즉이사구게자 이답지운

諸根本我 一切法源心 語言大要宗 眞實善知識

제근본아 일체법원심 어언대요종 진실선지식

仍云汝等 當善用心耳

잉운여등 당선용심이

表訓德 作五觀釋 一實相觀 五因緣觀 說頌曰

표훈덕 작오관석 일실상관 오인연관 설송왈

我是諸緣所成法 諸緣以我得成緣 是因緣觀

아시제연소송법 제연이아득성연 시인연관

諸法本來不移動 能觀之心亦不起 是實相觀

제법본래불이동 능관지심역불기 시실상관

作此五觀 以呈和尙 和尙曰 是也

작차오관 이정화상 화상왈 시야

(叢髓錄卷上之一.韓佛全6,775中下)

(총수록권상지일.한불전6,775중하)

 

       그래서 이제 그 상수 제자 표훈스님, 진정스님 등 한 10(表訓眞定等十餘德) 종화상소(從和尙所)하야, 화상의 처소에 쫓아가서, 학차인시(學此印時), 이제 법계도인(法界圖印)이라고 법성계에 보면 그걸 그림으로, 이렇게 도장 형태로 돼 있어요. 그거 하나 가지고 의상스님은 이 법계인과를 가르쳤거든요. 그래서 그 법계도인을 배울 때에 문운(問云), 물어서 말하기를, 부동오신(不動吾身), 제법은 부동하야 본래적이라. 이게 이제 화엄경 가르침인데 일체만법이 이게 눈에 다 보이지만, 그 진실을 보고 나면 이게 생긴 것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이걸 보는 것이 해인삼매다. 이걸 부동이라고 그래요.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이 몸이 생겨났는데, 이걸 반정으로 견하면 감정을 돌이켜서 보면, 생이 불생이라. 파도가 일어났는데 파도만 보지 않고 물을 보면 파도가 일어난 것도 역시 물이기 때문에 일어난 게 없다. 이게 해인삼매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에서 이 몸이 나지 아니한 것을 딱 보는 게 그게 화엄 관찰이에요. 화엄경에서는 여러 가지 관법이 있는데, 모든 관법의 근원이 해인삼매예요. 그래가지고 몸을 부동의 오신이라 그래요. 움직이지 아니한 나의 몸이다. 그 움직인 건 생긴 건데, 이 몸이 생기지 아니한 내 몸이다. 이걸 무생오신. 이걸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바다의 파도와 같아서 생기지 아니한 나의 몸이다. 그래서 이 부동오신이, 남이 없는 이 나의 몸이 즉시법신자체의(卽是法身自體之義), 법신 자체, 법의 몸 그 자체, 지금 내 몸이 법의 몸, 청정법신, 그 법신 자체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뭐라 그랬냐. 운화득견(云何得見),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옛날도 마찬가지예요. 옛날 사람들이라고 다 법문 듣는 대로 척척 알아챈 사람이 그렇게 많이 없어요. 한 둘이 있지. 한둘이 있는 거지. 그래서 이 몸 자체가 그 법신 자체라고 하는 의미를 어떻게 아냐이래 의상스님한테 물었어요. 그러니까 어시화상(於是和尙), 의상 스님이 이 사구게자(四句偈子) 답지운하되(而答之云), 네 가지 게송을 지어서 제자들한테 줬어요. 그 네 가지 게송이 뭐냐 하면, 이 의상 스님은 법성게 외에는 게송이 잘 보이질 않아요. 법성게는 이제 39 게송인데 법성게 외에는 게송이 안 보여. 근데 여기 보이는데 네 가지를 딱 줬어요.

 

        첫 번째가 제연 근본은 나다(諸根本我).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다. 제연의 근본은 아라. 이 글도 참 깔끄러워, 의상스님은. 원효성사는 글이 훤출하거든요. 근데 의상스님은 아주 깔끄러워서, 잘 새겨야지 잘못하면 헛새겨요. 그래서 한문도 웬만하면 하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했다면 고생해요. 했다면 고생해요. 이걸. 나도 옛날에 이렇게 못 새기고 달리 새겼어요. 고생하죠, 나도. 고생 안 할 수가 있나. 모든 인연의 근본은 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체를 떠나서 십신은 없다, 이 얘기거든요. 제연의 근본은 나다. 제연의 근본은 아요, 일체의 법원은 마음이다(一切法源心). 또 일체법의 근원, 근원이라고 하는 거는 발원지와 같고, 일체법이라고 하는 건 바다와 같은데, 이 바다도 그렇게 물이 많이 있지만, 그 근원을 보면 아주 최초 발원지 이런 건 물 한 방울 내려놓는데요, 그게.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의 근원이다. 원천수처럼. 그런 거고 어언은 대요정(語言大要宗)이라. , 중생의 이 어언, 말은 모든 일의 근본이고, 줄기다. 요종이라고 그러거든요. 중요할 요자, 종교란 종자. 종은 근본이라는 말이고 요는 줄기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말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을 딱 하면 하기 싫은 사람은 말을 안 되도록 해요. 공부 안 할 사람은 말부터 안 하려고 해요. 공부가 그래 되나. 안 되긴 왜 안 돼. 말만 고치면 공부가 이제 되거든. 내가 한다. 근데 거짓말로 말하면 또 안 돼요. 안 할 생각하고 말로만 그러면 안 되고, 아주 일심으로 그러니까 뭐 안 하는 사람은 말부터 안 해요. 안 하려고 해요. 하는 사람은 말부터 해요. 그래서 어언은 근본이고 줄기다. 그래서 진실선지식(眞實善知識)이다. 선지식은 삼세제불인데. 그래서 이제 인연의 근본은 나고, 일체법의 근원은 또 마음이고, 말은 모든 근본이고 줄기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진실선지식이다. 진실선지식은 삼세제불을 말하는 것이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다. 이런 게송을 딱 지어줬어요.

        그러니까 그 제자들이 그걸 보고 그냥 해석한 게 아니라, 다섯 가지 관으로서 해석을 했는데, 이게 작오관석(作五觀釋)인데, 다섯 가지 관으로 해석을 지었어. 그런데 이제 오늘 다 못할 줄 알고, 5가지 다 안 적어오고, 첫 번째 하고 마지막 거 하고 세 가지는 생략하고 둘만 적어왔거든요. 공부 더 많이 할 분들은 그 책 소개가 여기 돼 있고 하니까 그거 찾아보면 되고 하니까. 참 좋은 건데. 이게 근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이 몸을 딱 보면, 이 몸은 인연으로 돼 있다. 인연을 깨달으면 아집이 사라져요. 아집 없이 죽으면 죽음이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아요. 죽음이 두려운 건 아집 때문에 그래요. 풀잎이 생겼다 없어질 때, 나뭇잎이 피었다 떨어질 때, 걔들이 발버둥 치지 않거든요. 걔들은 나라는 집착을 안 가지고 있어. 그래서 필 때나 질 때나 다름이 없어요. 근데 범부는 이걸 인연법인데, 이걸 나라고 집착을 해요. 나는 없고 인연은 있다. 늙는 것도 인연이고, 태어나는 것도 인연이에요. 여러 가지가 뭉쳐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죽을 때도 인연이니까 인연법을 딱 보면 이렇게 하나하나가 가는구나, 그거 얼마나 좋아. 그래서 죽을 때 뭐 빨리 죽으려고 할 것도 없고요. 자는 잠에 죽는다고 그거 할 거 없어. 왜 자는 잠에 죽어, 억울하게. 죽는 거 딱 하나하나 보고 죽어야지. 그러니까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자세히 관찰을 하라. 그럼 이게 전부 인연법이기 때문에, 몸이 죽는 게 아니라 인연이 지금 나타나는 거다. 죽는 인연, 사는 인연 그런 거예요. 인연관이라는 게 있는데 인연관이 뭐냐. 아시제연소송법(我是諸緣所成法)이라, 나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연, 인연이란 뭐냐. 여기 혈액도 있고, 체온도 있고, 호흡도 있고, 뼈마디도 있고, 그러는 게 이게 전부 지수화풍이라고 하거든요. 지수 화풍이 모여서 내 몸을 이루었다 이거죠. 지수화풍. 나는 지수화풍이 소송법, 이룬 것이다. 지수화풍이 모였다가 지수화풍이 흩어지니까 그 인연법만 딱 관찰하면 공포감 없어요. 이것이 바로 무아현상이라는 거죠. 인연은 무아다. 그냥 니가 없다 그러면 이게 통할 수가 있나. 그 인연법을 관찰하면 인연만 있고, 나는 없다는 걸 저절로 알게 되죠. 그리고 제연은 이아로 득성연(諸緣以我得成緣)이라, 모든 인연은 나로서 인연을 이룬다 그랬어요. 인연을 어떻게 이루냐. 물은 내 몸에 들어와서 피가 되고요, 물은. 또 따뜻한 공기는 내 몸에 들어와서 체온이 되요. 그리고 저 흙 같은 것은 내 몸에 들어와서 근골이 되요. 뼈가 된단 말이죠. 이렇게 제연은 이아로 득성연이라, 모든 인연은 나로서 인연을 이룸을 얻는다. 그러니까 이거 인연관을 딱 봐, 이 게송 넷을 인연관으로 해석을 했다, 이거예요.

        그다음에 이제 제일 먼저 나온 게 이제 실상관(實相觀)인데, 실상관이라는 건 이제 뭐냐. 제법은 본래로 불이동(諸法本來不移動)이라, 제법은 이거 인연이니까 인연은 그 특징이 자성이 없어요. 자체성이 없어, 인연은 특징이. 전부 이타위성이에요. 다른 것으로서 자기를 삼는 게 인연이에요. 물도 자체가 없고, 나무도 자체가 없고, 흙도 자체가 없고, 이 몸도 자체가 없고. 그래서 제법은 본래로 인연인데, 인연은 연성은 무성이라. 인연의 성격은 본래 자성이 없다. 그래서 연생은 무생이라, 인연으로 난 건 남이 없다. 제법은 본래로 불이동(諸法本來不移動)이라. 이동이라는 건 난단 말인데, 또 사라진단 말인데, 인연은 본래 나고 죽는 게 아니고, 나도 난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이거란 말이죠. 진짜 이 이건 강원에서도 잘 안 하는 법문인데 정월 초에 이거 복 비는 법문을 이렇게 하고 있네. 왜냐하면 이런 엄청난 법이 화엄성중 그 한마디에 다 이루어지는 묘법이란 말이에요. 이게. 무량법이 일성묘법이라. 한 소리의 묘한 법이다. 이게 법계인과라는 거예요. 문자를 쓰니까 이걸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량대법 일성묘법, 무량대의 큰 법이 한 소리의 오묘한 법이다. 그래가지고 능관지심도 역불기(能觀之心亦不起), 능관지심도, 지금 이 이건 마음이고 뭐 인연은 어떤 거고 뭐를 듣고 보고 하는 게 이게 능히 보는 마음인데, 이 보는 마음도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난 게 아니다. 마음도 일어난 게 아니고 물질도 일어난 게 아니다. 이게 실상이란 말이에요. 그 실상관(實相觀)을 딱 하면 의상스님의 사구게의 가르침을 환히 통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해가지고 작차오관(作此五觀)하야, 이 오관을 지어서 이정화상(以呈和尙)하니, 그것으로 의상스님께 바치니, 화상왈(和尙曰), 의상 스님이 가로되, 시야(是也), 옳다 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