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백중기도] 8월 8일 음력7월 신중기도 및 백중기도 5재 법문 2021-08-08

      안녕하세요. 오늘 202188, 신축년 7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부처님의 깨달음>,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如來菩提·如來法身·如來境界

여래보리·여래법신·여래경계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리말 표현이고, 한자로는 여래보리, 또 여래법신, 여래경계(如來菩提·如來法身·如來境界). 경계라는 말은 세계라는 말과 지위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요. 불경계(佛境界)라고 부처님이 머문 세계, 부처님이 계신 지위는 어떤 것인가. 경전에서 항상 이야기하고 있어요, 불경계. 그러면 모든 경전에서 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야길 하는데, 경전도 수행을 강조하는 경전이 있고, 불경계를 설명하는 경전이 있어요. 대승경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수행을 강조하는 경전이 금강경이고, 불경계를 설명한 경전이 화엄경이에요. 경전의 특징이 좀 달라요. 그래서 오늘 법문은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불보리(佛菩提), 법화경에서 말씀하신 불보리, 화엄경에서 말씀하신 불보리,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金剛經 法門

금강경 법문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如理實見分5)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여리실견분 제5)

離一切諸相 卽名諸佛(離相寂滅分14)

이일체제상 즉명제불(이상적멸분 제14)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어떻게 법문을 하고 계시는가. 부처님은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이게 부처님의 깨달음이에요. 하늘이 형상인데 하늘이 하늘이 아니고, 땅이 형상인데 땅이 땅이 아니고, 사람이 형상인데 사람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형상을 제상(諸相)이라고 하는데요, 제상. 그러면 제상이 비상임을 보면(若見諸相非相),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닌 것을 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바로 여래를 본다. 여래의 깨달음을 보고, 여래가 깨달음으로 얻은 몸, 법신을 보고, 여래가 머무는 세계, 불경계를 본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핵심이 상에서 상이 아닌 걸 보는 게 깨달음이다. 이게 금강경 깨달음이에요. 그럼 범부가 왜 고생을 하느냐. 상에서 상이 아닌 걸 보지 못하고, 상에 매이고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모든 고통은 상에 매이는 데서 온다. 상에 매이지 않는 게 해탈인데, 상에 매이면 생사다. 아주 간단해요. 상에서 상이 아닌 걸 보면 그게 깨달음이다, 이거죠. 왜냐. 상에 상이 없어요. 그럼 상이 왜 생겼냐. 인연으로 생긴 거예요, 인연으로. 인연이란 건 모인다는 뜻인데, 모여서 생긴 거예요. 앞에 시계가 있는데, 시계가 어떻게 생겼는가. 이것저것 모여서 생겼어요. 그래서 시계 자체 상이 없어요. 인연상만 있는 거예요. 이 시계라고 하는 건 눈앞에 보고 있는데 이건 인연상이다. 인연으로 모인 상이다 그거죠. 우리 몸도 부모소생신(父母所生身)이라고, 부모가 낳은 몸이에요. 부모 인연 없으면 못 나와. 그래서 몸에 몸이 없는 거예요.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 곧 여래를 보느니라. 여래의 깨달음을 보고, 여래법신을 보고, 불경계를 본다. 이 법문은 여리실견분 제5(如理實見分5)에서 말씀하신 법문이고.

      금강경 이상적멸분 제14(離相寂滅分14)에서는 이일체제상(離一切諸相)하면, 일체제상을 여의면, 모든 상을 여의면, 여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상에 상이 없는 걸 알고,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태어나는 것도 형상이고, 죽는 것도 형상인데, 태어나는 것도 인연으로 태어나서 태어나는 게 없고, 죽는 것도 인연으로 죽어서 죽는 게 없다. 그래서 모든 형상에 형상이 없음을 알고, 형상에 전혀 집착을 아니 하면, 그게 이일체제상인데, 일체제상을 여의면, 뭐라 그랬냐.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 곧 제불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부처님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다른 게 아니라 일체제상을 여읜 분들이다 이 말이죠. 제상에 매이면 부처가 아니에요. 제상을 여의면 부처예요. 이게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法華經 法門

법화경 법문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시법주법위 세간상상주

於道場知已 導師方便說 (方便品2)

어도량지이 도사방편설 (방편품 제2)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이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제법이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생사 없는 진여실상이라, 생사 없는 진여실상, 깨달아야 생사가 없는 게 아니라 본래부터 생사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생사는 인연으로 생긴 거기 때문에 생겨도 생긴 게 아니다 그거죠. 집이 하나 이렇게 생겼는데, 이 집이 인연으로 생겨서 기둥과 벽과 지붕을 걷어내면 집이란 게 없어요. 모든 게 인연으로 생긴 거예요. 그래서 본래부터 진여실상이다. ‘생사 없는 진여실상이다이거예요. 생이 생이 아니니까 불생이고, 멸이 멸이 아니니까 불멸이다. 본래부터 불생불멸 진여실상이다. 본래해탈이에요, 이게. 본래해탈. 본래열반이고. 본래적멸이다. 그래서 불자가 행도이하면(佛子行道已), 불자가 이런 도를 닦으면, 본래 생사가 없고, 본래 적멸이니까, 생멸에 생멸이 없으니까 생멸이 적멸이다. 생멸 없는 걸 적멸이라고 하거든요. 생멸이 적멸임을 안 것이 부처님이다 이거죠. 생멸이 적멸임을 안다. 생멸이 적멸인 데 범부는 모를 뿐이고, 부처님은 알았다 이거에요. 태어난 게 태어난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게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이말이죠. 그래서 불자들도 그렇게 알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된다.

      법화경 28품이 있는데, 방편품 제2의 게송이고요, 역시 방편품 제2에 많이 독송 되는 게송이 있는데, 시법이 주법위하야(是法住法位), 세간상이 상주라(世間相常住). 시법이, 이 법이 주법위, 법위에 머물러서, 시법은 무슨 법이냐, 이 시자 법 법자, 이 법은 무슨 법이냐. 일체제상법, 일체제법법, 모든 법을 다 말해요. 세간법, 출세간법, 범부법, 성현법, 모든 일체제법이 주법위라, 법위에 머문다. 법위는 무슨 법위냐. 진여실상법, 항상 일체세간법이 진여실상법에 머문다. (안경을 들어 보이시며) 이런 게 일체세간법인데요. 이건 자성은 없고, 이 법이 머무는 건 진여실상이다, 이 말이에요. 일체세간법이 진여실상법에 머문다. 그러니까 천지만물이 전부 불생불멸 진여실상법이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제법공상(諸法空相)이다. 이거죠. 마치 꿈과 같아서, 꿈속에서 보이기는 보이는데 없는 거예요, 그게. 그게 없는 거예요. 장자에 보면 장자가 꿈에 나비를 봤다고 그러는데, 그 나비 본 걸 대단하게 기록을 해놨거든요. 그 무식하기 짝이 없어요. 나비가 없다는 것을 장자가 꿈에도 몰랐어요. 꿈에 본 나비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째서 봤냐. 평소 생각이 있어서 나비를 본 거예요. 그래서 나비는 평소 생각이고, 나비의 존재 실상은 없는 거다, 이걸 장자가 꿈에도 몰랐거든. 그러니까 이게 안다는 게 다 허망한 거예요.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는데, 죽음이 없는 걸 모르거든. ‘나는 살아야된다.’고 애쓰는데 삶이 없는 걸 몰라. 그럼 뭐만 있냐. 진여실상법만 있다, 불생불멸 진여실상. 그걸 깨달으면 여래고, 깨닫지 못하면 상에 집착하는 범부다. 이게 불교이 가르침이에요. 그럼 모든 법이 법자체가 없고 그것이 불생불멸 진여실상이다. 자체법은 진여실상이다. 목전현상은, 나타난 현상은 인연현상이다 이거죠. 인연현상이란 잠들어서 잠결에 뭐 보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건 잠들었기 때문에 보는 거고, 평소의 생각이 모였기 때문에 나타난 건데, 잠에서 깨면 꿈에 본건 없어지고, 또 잠이 들었다 하더라도 깊은 잠에, 꿈도 없이 자면 없는 거지요. 그래서 시법이 주법위하야, 어떻게 되냐. 세간상이 상주이니라. 세간상하면 일체 생멸법인데, 나고 죽는 생멸법인데, 이 생멸법이 상주진여법이다. 항상 머무는 진여법이다 이거죠. 그래서 삼세제불은 진여제불이라고 상주제불이라고 그래요. 항상 머무는 부처님이라고. 그래서 세간상이 상주라. 항상 머무는 법이다. 이게 불생불멸 진여실상법이다, 이 말이죠. 어도량에 지이하고(於道場知已), 석가모니께서 보리도량, 깨달은 장소를 보리도량이라고 하는데, 보리도량에서 뭘 깨달았나, 이걸 깨닫고, 알고, -이자는 어조사니까 안 새기고,- 도량에서 알고, 도사가, 도사는 부처님인데, 방편설하시니라, 방편으로 말씀하셨느니라(導師方便說). 이 생멸법이 진여법인 걸 알고, 부처님이 그걸 알게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폈는데, 그 가르침은 방편으로 가르쳤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는 아이대로 실천할 수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실천할 수 있고, 옛날 사람은 옛날 사람대로,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대로 다 실천할 수 있는 게 방편이거든요. 요즘 말로 하면 접근성이라고 그래요, 접근성. 접근할 수 있어요. 접근할 수 있는 걸 방편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불교는 이 나고 죽는 법이 나고 죽음이 없는 걸 깨우치는 건데, 그걸 깨우치는 방법은 방편으로 깨우친다. 이게 불교죠. 법화경 방편품 제2에서 가르친 내용이에요.

 

華嚴經 法門

화엄경 법문

爾時世尊 處于此座 於一切法 成最正覺

이시세존 처우차좌 어일체법 성최정각

智入三世 悉皆平等 其身充滿 一切世間

지입삼세 실개평등 기신충만 일체세간

身遍十方 而無來往 智入諸相 了法空寂

신변시방 이무래왕 지입제상 요법공적

(世主妙嚴品1)

(세주묘엄품 제1)

 

      화엄경에서는, 화엄경은 구회 설법인데요, 9번 법회를 열어서 법을 설해요. 초회 설법, 제일 처음 설법한 내용이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인데, 화엄경 80권 제일 처음 첫 권을 딱 펴면 뭔 말부터 나오냐 하면, 부처님의 깨달음 설명부터 나와요. 그게 화엄경이에요. 다른 경전은 절대 그렇질 않아요. 부처님 깨달음을 제일 먼저 딱 가르쳐 주는 게 화엄경이에요. 여래의 깨달은 세계를 설명하는 게 화엄경이거든요. <대방광불(大方廣佛)>을 이야기하는 게 화엄경이에요, 대방광불. 어떻게 돼 있냐. 이시에 세존이(爾時世尊), 이때에 세존 부처님께서 처우차좌하야(處于此座), 보리좌, 깨달은 좌석, 보리좌에 머물러서, 어일체법(於一切法)에 성최정각하시니(成最正覺), 일체법에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니, 이렇게 되는 거죠. 깨달음을 딱 얻고 나니까 뭐가 생겼냐 하면 지혜가 생겨요. 깨닫기 전에는 망상인데, 망상, 깨달은 후는 지혜예요. 그래서 망상이 변해서 지혜가 되는 걸 깨달음이라고 그런다. 범부는 망상으로 살아가고 여래는 지혜로 살아가고. 그게 미혹과 정각의 차이점이에요. 미혹은 범부인데 망상으로 살아가요, 망상. 뭔 망상이냐. 늙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늙은 거 걱정하고, 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죽는 거 걱정하고. 전부 망상이에요. 며느리 얻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며느리 잘못 들어오면 어쩌나 그런 거 걱정하고, 결혼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결혼해서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해서 결혼도 못 해요. 전부 망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깨달음을 딱 얻은 순간에 지혜가 생겼는데, 지혜는 어떻게 된 거냐. 삼세에 들어가서, 지입삼세하야(智入三世), 실개평등(悉皆平等)하고, 지혜는 현재 눈앞의 것만 아는 게 아니라, 과거 것도 알고, 현재 것도 알고, 미래 것도 알고, 다 아는 게 지혜예요. 근데 지입삼세하야 다 평등해요. 과거를 아는 지혜나 현재를 아는 지혜나 미래를 아는 지혜가 다 평등해요. 그다음에 기신이 충만 일체세간이라(其身充滿 一切世間). 깨달은 몸이 법신인데, 그 법신이 일체세간에 가득했더라. 그러면 깨닫기 전에는 사대육신인데 깨닫고 나니까 그건 청정법신이다. 깨달음을 다 얻는 순간에 내 몸은 사대육신 몸이 아니라 청정법신이 내 몸이 됐다 이거죠. 그래서 이 사대육신에서 청정법신을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깨닫기 전에는 이 몸이 사대육신인데, 지수화풍, 근육의 몸인데 이걸 내 몸이라고 그래요. 근데 깨달음을 딱 얻은 순간에 청정법신이 내 몸이고, 이 몸은 인연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부모소생신이지 청정법신은 아니다. 진여청정신, 부모소생신. 이 몸은 부모소생신이에요. 여기서 깨달음을 못 얻으면 이 몸을 내 몸이라고 집착하면서 살아요. 그런데 진여청정신을 안 순간에 이 몸이 있든지 없던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진여청정신은 일체세간에 충만하기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꽃은 피고 지고 장소가 있지만은 봄은 장소가 없어요. 그냥 온 누리에 충만한 거예요. 그래서 이 몸은 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에 불과하다, 그거죠. 신변시방하야 이무래왕하되(身遍十方 而無來往), 진여청정신은 시방에 두루 해서 오고 가는 게 없어요. 그냥 상주해요, 상주, 상주법계. 그래서 왕래, 내왕이 없어요. -한자에서는 왕래라고 안하고 내왕이라고 많이 해요. 오고 간다, 올 래자를 먼저 쓰고, 갈 왕자를 다음에 쓰고. 보통 구어체 말에서는 왕래라고 하는데, 재밌어요. 내왕, 왕래, 말을 다 돼요. 재밌는 거예요.- 몸이 시방에 두루 해서 내왕, 오고 가는 것이 없으되, 지입제상(智入諸相)하야, 거기에, 청정법신에 광명지혜, 지혜광명이 있어요. 오고 가는 몸이 없는데 거기에 지혜광명이 있는 게 깨달은 보답으로 얻은 지혜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지(四智)를 원성, 네 가지 지혜를 원성한다. 이게 정각공덕이에요.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사지를 원성한다, 네 가지 지혜를 이룬다. 그래서 이 지혜를 깨달은 보답으로 얻었다고 해서 보신이라고 해요, 보신. 깨달은 보답으로 얻은 몸이 사지, 네 가지 지혜예요. 지입제상하야, 지혜가 모든 상에 다 들어가서, 형상마다 지혜가 보면 다 알아요. 제상에 다 들어가서, 요법공적이라(了法空寂), 법이 공적함을 안다. (종이를 들어 보이시며) 세간법으로 보면 종이인데, 지혜법으로 보면 이게 공적이요. 근데 범부는 종이라는 것밖에 몰라. 이게 공적함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집착하는 거예요. 우리 몸이 세간법으로 보면 사대육신인데 지혜로 보면 이게 공적이여, 공적. 그래서 청정법신은 오고 가는 게 없는데, 지혜가 모든 형상에 다 들어가서 일체 형상이 공적함을 안다. 이렇게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게 부처님의 깨달음이거든요.

 

爾時世尊 在摩竭提國阿蘭若 法菩提場中

이시세존 재마갈제국아란약 법보리장중

始成正覺 於普光明殿 坐蓮華藏師子之座

시성정각 어보광명전 좌연화장사자지좌

妙悟皆滿 二行永絶 達無相法 住於佛住

묘오개만 이행영절 달무상법 주어불주

得佛平等 到無障處 所行無礙 普見三世

득불평등 도무장처 소행무애 보견삼세

(如來名號品7)

(여래명호품 제7)

 

      그다음에 화엄경 제2회 설법이 있는데, 이회 설법이 어떻게 시작되냐. 이시에 세존이(爾時世尊) 재마갈제국아란약(在摩竭提國阿蘭若) 법보리장중하사(法菩提場中), 마갈제국 아란약 법보리장중에 계시면서,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고,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고, 어보광명전(於普光明殿)에서, 보광명전이라고 하는 도량에서,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師子之座)하시니, 연화장 사자의 자리에 앉으시니, 이렇게 시작을 해요. 이게 이회 설법 화엄경 시작이에요. 그럼 어떻더냐. 묘오가 개만하시니(妙悟皆滿), 묘한 깨달음이, -묘오란 건 묘할 묘자, 깨달을 오자인데, 바를 정자, 깨달은 각자, 정각(正覺)이라고도 하고, 묘할 묘자, 깨달을 각자, 묘각(妙覺)이라고도 하는데, 착할 선자, 깨달을 각자, 선각이라고도 하고, 묘할 묘자, 깨달을 오자, 묘오라고 하는데, 묘각, 정각, 선각, 묘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명칭화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묘오라고 했어요.- 묘하게 깨달음이 개만하니, 다 원만하니, 못 깨달은 부분이 하나도 없이 묘한 깨달음이 다 원만하니,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행이 영절하며(二行永絶), 두 이자, 행할 행자, 여기서 행이라는 것은 생각인데, 두 가지 생각이 영원히 끊어졌어요. 보인다, 안 보인다, 좋다, 나쁘다, 죽는다, 산다, 이런 망상분별, 번뇌망상, 이게 두 가지 생각인데, 번뇌망상 두 가지 생각이 영원히 끊어졌어요. 이행이 영절이여. 번뇌망상이 영원히 끊어졌어요. 그러면 중생 고뇌가 전부 번뇌망상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번뇌망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수 없어요. 이거 참 문제에요. 우리나라 세종 때 정치가 제일 좋았는데, 그때도 번뇌망상이 많은 사람은 절대 행복하지 않았어요. 세종대왕 때라고 국민들이 전부 다 행복했을 거 같아요? 부모 잘 만났다고 다 행복한 거 아니에요. 마음의 번뇌망상이 깨끗해져야해요. 옛날 어른들은 번뇌망상을 뭐라고 말했냐 하면 하잖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하잖은 생각. 이게 뭔소린가. 보잘 것 없는 생각. 쓸데없는 생각을 하잖다, 하는 것 같지 않다, 하는 것 같지 않게 하는 걸 하잖다고 하는데, 쓸데 없는 생각이다 이말이에요. 쓸데없는 생각을 어렵게 표현하면 망상이에요. 망상을 더 어렵게 표현하면 번뇌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잖은 생각이 없어야 된다. 하는 것 같지 않은 생각, 쓸데없는 생각, 번뇌망상이 영원히 끊어지고. 달무상법(達無相法)하며, 무상법을 통달해서, 통달은 안다는 말이고, 상에 상이 없는 걸 알았어요. 제상에서 비상을 본다고 했듯이, 여기서도 상에 상이 없는 걸 알았다. 이게 달무상법이에요. 이게 묘하게 깨달음이 다 원만하다는 거 하나하나 설명하는 거거든요. 두 가지 생각이 영원히 끊어지고, 형상없는 법을 알고, 달무상법하며, 주어불주(住於佛住)하며, 두루히 머무르며 머물며, 깨달음을 얻고나면 두루히 머무르며 머무는데, 불은 진여불, 법성불, 청정불, 진여법성청정법에 머문다. 번뇌망상, 생로병사에 머물질 않아요. 그런데 이게 걱정이 될 때, 진여청정 삼매에 들어가면 그만이에요. 진여청정 삼매. 무서울 때, 진여청정 삼매에 들어가면 그만이에요. 주어불주여. 불주에 머문다말예요. 진여불, 청정불, 법성불, 거기에 머물며, 득불평등(得佛平等)하며, 진여, 청정, 법성에 평등을 얻으며, 깨달음은 평등해요. 억울하고 분한 거 없어요. 억울하고 분한 게 왜 생기냐. 평등을 몰라서 생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열 살도 못 살고 죽고, 어떤 사람은 100세를 넘게 살고, 10살에 죽으나 100살에 죽으나 살아보면 별거 아니에요, 그게 그거여. 산다고 애만 먹었지, 죽을 때 남는 거 씨알머리도 없어요. 내가 70년 이상 살아보니까 남는 거 하나도 없어요. 인생이 춘몽이여. 봄날에 꿈꾸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게 10살이나 100살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아는 게 평등이거든요. 이건 깨달아야 평등이 있지, 상에 집착하고 상에 미혹하면 평등이 없어요. 차별뿐이요. 부처님은 이렇게 진여법성에 평등을 얻었다. 평등을 얻으며, 도무장처(到無障處)하며, 장애 없는 곳에 도달했어요. 장애가 하나도 없어. 왜 그러냐. 되고 안 되고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평등하기 때문에.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차이가 없어요. 다만 생각으로 된다고 좋아하고, 안 된다고 싫어하고. 오직 생각일 뿐이에요. 생각이란 말을 정신치료에서는 자기문제라고 그래요, 자기문제. 왜 화를 내느냐. 자기문제에요. 화 낼 일이 없어요. 옛날에 왜 시어머니 이마에 줄이 생겼나?’ ‘저녁을 굶어서 그렇다.’ 이마에 줄 생긴 게 시어머니 자기 문제에요. 자기문제. 왜 웃냐. 자기문제에요. 자기 감정으로 웃는 거예요. 왜 우냐. 자기문제에요. 자기 감정으로 우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장애는 번뇌망상에서 온다. 근심걱정은 자기문제다. 근심걱정이 싹 사라지면 장애는 없어요. 이렇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명했거든요. 그리고 소행이 무애(所行無礙)하며, 하는 바가 아무 장애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화성에 가고 싶으면 화성에 가고, 별에 가고 싶으면 별에 가고, 달에 가고 싶으면 달에 가고. 이게 신통자재에요, 신통자재. 이게 깨달음의 세계다 이 말이죠. 요새 화성에 간다고 난리인데, 내가 볼 때는 우스워. 거기 가야 뭐 없어요. 화성이 공했어. 거기 가 봐야 먼지만 풀풀 날리고, 먼지 하나하나가 다 자성이 없이 인연 허상인데 거기 왜 쫓아가냐 이 말이에요, 내가 볼 땐. 여기서도 망상분별이 많아서 행복하지않은데, 화성에 간다고 망상분별 그대로 가지고 행복할 거 같아요? 천만에 말씀이에요. 답답해. 근데 내가 이런 말 하면 내말 듣나. 안 들을 줄 아니까 말 안해요. 말 안 들어요. 그래서 소행이 무애하며, 보견삼세(普見三世)하며,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널리 다 본다. 100만년 후에가 어떻고, 천만년 후에가 어떻고, 천만년 전이 어떻고, 지금 현재가 어떻고. 널리 삼세를 봐요.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러면 이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중생도 가지고 있는데, 망상분별에만 계속 쫓아가며 살아서 깨달을 생각을 안해요. 그래서 망상에만 의지하고,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옛날 선지식들은 담마기금(擔麻棄金)이라고, 삼 덩어리를 짊어지고 금덩어리를 버린다, 그렇게 설명했어요. 옛날 삼이라는 게 옷도 해입고 하는 삼 껍질이 있는데, 누래요. 담은 짊어질 담자에요. 길 가던 나그네가 삼 덩어리를 짊어지고 내려가는데, 황금 덩어리가 하나 있는 거예요, 옆에. 그런데 황금이 좋아보이기는 하는데,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게 너무 아까워서 그 삼덩어리는 계속 지고 가고, 그 금덩어리는 안 돌아봐요. 이걸 버릴 기자, 금이라는 금자, 기금이에요, 기금. 그러니까 이런 깨달음을 얘길해도 지금까지 망상번뇌에 의지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걸 버리지 못해요. 그래서 삼덩어리 짊어지고 가는 나그네가 금덩어리를 보더라도 그대로 삼덩어리를 짊어지고 금덩어리를 버린다. 그래서 이 가운데서 정말로 보리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구해서 닦는 분은 금방 깨달아요. 발심이 얼마나 크고 진실하냐에 따라서 금방 깨달아요. 발심이 크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잘 못 깨달아요. 깨달음은 발심에 있는 거지 세월에 있는 게 아니에요. 발심이 진정하고, 발심이 용맹하면, 진정발심, 용맹발심, 금방 깨달아요. 왜냐. 지가 저를 아는 거기 때문에 어딜 갈 것도 없고, 순서도 없고, 그래서 그렇다 그거죠. 그건 마치 길 가는 나그네가 먼 길을 고생고생해서 짊어지고 온 삼 덩어리라 하더라도 금을 딱 보면 , 이거 좋네.’하고 삼덩어리를 가차없이, 미련없이 탁 버리고 금덩어리 지고 가는 것과 같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