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5월12일 음력 4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1-05-12

 

  안녕하십니까. 오늘 진관사 4월 초하루 법문은 <마음 법문 이야기>, 마음 법문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문 중에 인과 법문과 마음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큰스님들 법문을 계속 들어보면 인과 법문이 제일 많고요, 인과 법문하고 똑같이 많은 법문이 마음 법문이에요. 대승불교 이전의 가르침은 인과의 가르침이고, 대승불교에서 이후는 마음의 가르침이거든요. 대승불교는 마음을 말하는 불교다.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법문의 명칭

 

心地法門 唯心法門

심지법문 유심법문

一念子法門 一卷經法門

일념자법문 일권경법문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

(雲水壇頌)

(운수단송)

 

      이 마음 법문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제일 많이 부르는 명칭이 심지법문(心地法門)이에요. 마음 심자, 땅 지자. 마음은 땅과 같아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 말이거든요. 땅은 비유고 마음은 당체인데, 해당되는 몸, 그 당체와 비유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심지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절에 와서 심지법문한다고 해서 심지법문이, -저 시골 산중에서 호롱불을 켰는데, 그 호롱불 불붙는 게 심지거든요,- 그 호롱불 심지 얘기를 하나 그랬는데 전혀 아니더라고. 마음 얘기에요. 마음은 땅과 같다. 그래서 마음과 비유를 동시에 얘기할 때 심지다. 이렇게 얘길 하고요.

      마음 법문을 유심 법문(唯心法門)이라고 해요. 오직 유자, 마음 심자. 오직은 그것뿐이다 이 말이거든요. 마음뿐이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유심불교다. 이렇게 말해요. 유심 법문이라고 그러고.

      마음 법문을 일념자법문(一念子法門)이라고 그러는데, 하나라는 일자, 생각 념자, 아들 자자인데, 이 생각이라는 것은 찰나염도 있고, 일념도 있는데, 찰나염이라는 것은 보면 보는 대로 생각이 일어나고, 들으면 듣는 대로 일어나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일어나고 이게 찰나염이에요. 찰나 찰나, 순간 순간 생겼다 사라지는 그 염이 찰나염이에요. 일념이라는 것은 모든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항상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온갖 생각이 일어났었는데, 항상 일어나요. 그러면 그 항상한 생각은 일어나되 일어남이 없는 생각이에요. 사라지되 사라짐이 없는 생각, 그걸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요. 즐거웠던 마음은 금방 사라지는데, 그냥 또 생각이 그 밑에 바탕으로 있어요. 괴로웠던 마음도 사라지는데 사라지면서 그 바탕 속에 생각이 남아 있어요. 그 한 생각, 일념, 그 일념과 찰나염. 그래서 한 생각 법문이다. 한 생각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한 생각은 그냥 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걸 성품 성자, 마음 심자를 써서 성심(性心)이라고 해요. 일념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일념자법문. ()자는 남자, 여자하는 것처럼 어조사에요, 어조사. 모자, 탁자 이런 식으로. 그래 일념이건데, 거기다 어조사 자자를 붙여서 일념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일권경(一卷經)이라고, 한 권의 경이 있다. 그러면 한 권의 경은 뭐냐. 보통 세간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되어있는데, 지묵(紙墨), 묵자, 이게 세간경이거든요. 근데 일권경은 종이와 먹과 글자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일권경이 어디 있느냐. 나에게 있다, 이거에요, 나에게. 일체중생에게. 그래서 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하니,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종이와 먹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래서 전개는 무일자(展開無一字), 펼쳐서 설명하는 것은 한 글자도 없다. 그런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뿜어낸다. 서산스님 운수단게송(雲水壇頌)인데, 서산스님 이후에 법회 청법할 때마다 이걸 계속했어요.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고, 법문이라는 게 이런 거다. 일권경 법문이에요. 글자도 없고, 종이도 없고, 먹도 없는데 항상 대광명을 뿜어내고 있다. 이런 말씀이에요. 이게 마음 법문이지요.

 

      그러면 이 마음 법문을 할 때 항상 외우는 경전 내용이 있는데요. 법문이라는 게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경전(經典)설법이에요. 경전설법. 경에 증거가 있는 설법이다. 그 경이라는 것이 표준이기 때문에, 법문을 할 때는 경전이나, 조사어록이나 증거를 가지고 해요. 어록증거, 조사어록의 증거. 경전증거. 이게 경증, ()증인데, 록에 증거가 있느냐. 이런 거죠. 그런데 이 마음 법문 할 때는 항상 증거로 표준을 삼는 내용이 대승기신론에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謂衆生心)>. 맨날 하는 거예요. 소언이라는 것은 말하는 바, 법이라는 것은, 위 말하자면, 중생심이다. 소언법자 위중생심.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이 되는데. 법이라는 것은 뭐냐. 법은 법계인데, 법의 세계. 십법계가 있다고 가르쳐요. 십법계. 십법계는 뭐냐. 육도중생법계. 중생대계가 육도라고. 육도중생이 있고. 사위현성법계, 현성, 성은 불보살이고, 현은 불보살 이전에 신심수행불자, 신행불자를 말하는데, 사위는 성문, 연각, 보살, , 이렇게 사위현성에다가, 육도중생을 합하면 십법계거든요. 이 십법계가 중생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소언법자는 위중생심이니, 중생심을 말하는 것이니, 이렇게 시작하는 게 대승기신론이에요. 이게 딱 경전 증거죠. 경증. 이걸 유식한 말로 하면 전증(典證)이라고 해야 하는데, 경전이라는 책 전자하고 짊어질 증자, 전은 불전이라. 불전이란 불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전정을 불전이라고 하거든요. 불전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게 법문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제일 많이 얘기하는 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법문은 화엄경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 게송인데, 일체라고 하면 역시 십법계를 얘기해요. 유심은 오직 마음. 조는 만들었다. 십법계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 이게 일체유심조거든.

      그다음에는 잘 안 말하는데, 화엄경 십지품 제6 현전지에 무슨 말씀이 있냐하면 삼계소유가, 욕계, 색계, 무색계 이건 중생세계를 말하는데, 온갖 중생세계에 있는 것이, 있는 바가 단지 일심이다. 다만, 다만이라는 것은 오직이란 말인데, 오직 한 마음이다. 일체 중생의 세계가 오직 한 마음이란 거예요. 삼계소유가 단시일심(三界所有但是一心)이라. 다만이라는 말이나 오직이라는 말이나 그것밖에 없다, 하나다라는 소리에요. 오직 한 마음이다. 이게 경증이지요. 유심법문. 경증.

      그리고 또 많이 말하는 경전 증거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무일중생도 이불구유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如來智慧). 단이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但以妄想執着 而不證得)>. 항상 외우는 대목인데, 무일중생, 없을 무, 한 일, 중생, 이불구유, 말 이을 , 아니 불, 갖출 구, 있을 유. 여래지혜, 여래지혜를 한 중생도 갖추어 있지 아니함이 없으나, 중생중생마다 다 여래지혜를 갖추고 있다. 여래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한 중생도 없다. 그런 의미에요. 그런데 왜 모르느냐. 단이망상집착으로, 단지 망상집착으로 이불증득이라, 알지 못한다. 증득이란 안다는 말이죠. 알지 못한다. 이런 걸 큰 스님들이 보통 때 다 해요. 항상 읽고 항상 하고 그래요.

      그러면 마음이라는 게 여래지혜도 있고, 망상집착도 있다 이 말인데, 여래는 화엄경에서 십신(十身)여래를 말하거든요. 열 십자, 몸 신자. 열 가지 여래가 있다. 거기에는 진여여래, 법성여래, 지혜여래, 신통여래, 자비여래, 복덕여래, 선정여래, 자성여래, 이 전체를 말하면 십신여래예요. 십불세계. 그게 여래인데, 그 여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혜를 다 여래지혜라고 해요. 중생중생마다 여래지혜를 다 가지고 있는데, 망상집착으로 모른다 말이에요. 이런 법문을 늘 하는 것이 마음 법문이에요.

 

마음의 緣起연기

無明六道衆生

무명육도중생

無明緣行 行緣識 識緣名色 名色緣六入 六入緣觸 觸

무명연행 행연식 식연명색 명색연륙입 육입연촉 촉

緣受 受緣愛 愛緣取 取緣有 有緣生 生緣老死憂悲苦惱

연수 수연애 애연취 취연유 유연생 생연노사우비고뇌

 

      그럼 이 마음 법문을 이렇게 할 때 마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마음의 세간연기, 마음의 불보살연기,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 이 마음이 망상집착으로 나타날 때는 육도중생이 되는 거예요. 이걸 세간연기라고 해요. 그러면 세간연기에 근본 마음은 뭐냐. 무명심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세간은 무명소현(無明所現)이다. 무명이 나타난 것이 세간법이다. 마음에는 망상 집착이 있어요. 망상집착을 간단히 말하면 무명이에요. 밝은 게 없다. 밝은 게 없다는 말은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는 얘기죠. 못 보는 건 아니에요. 보긴 보는데 진실하고 다르게 보는 거예요. 진실하고 어떻게 다르게 보냐. 불그스름한 재료를 가지고 밧줄을 만들어서 마당에 놨는데, 어두컴컴할 때 어떤 사람이 불그스름하고 거무스름한 자료로 만든 밧줄을 보고 뱀으로 본 거예요, 뱀으로. 이것을 사승미혹(蛇繩迷惑)이라고 하는데, 뱀 사자, 줄 승자. 이 줄을,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거다. 밧줄은 거기 있어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밧줄을 밧줄로 본 게 아니라 뱀이 서려 있는 걸로 봤다 이거예요. 그런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못 보는 게 아니라 잘못 본다 이거죠. 무명. 그래서 무명이 있으면 생로병사우비고뇌가 전부 무명에서 나와요. 꿈을 꾸면 꿈속에서 온갖 일이 다 펼쳐지듯이, 무명이 나타나면 무명으로부터 온갖 생로병사와 근심걱정이 생겨요. 그걸 무명연기라고 그럽니다. 연기는 인연으로 일어난다 이 말이죠. 무명연기.

      그런데 신심을 일으켜서 청정함을 닦고 지혜를 점점 넓혀가면 무명연기에서 광명을 이뤄요, 광명. 그래서 제불은 광명이고 중생은 무명이다. 육도중생은 무명이요, 삼세제불은 광명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마음이 펼쳐지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이 무명에서 광명으로 나아갈 때 핵심이 뭐냐, 그게 신심인데. 신심이라는 것은 뭐냐. 이 망상집착, 무명, 또 업력, 호법자, 협력자, 망상, 집착과 무명, 업이 되풀이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 근본마음이 있고, 광명마음이 있다. 이걸 들으면 이걸 딱 믿고 그리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그리 돌아가면 그게 무명연기가 아니라 청정연기라고 해요.

      그럼 청정연기는 어떻게 되냐. 그 한마음으로 돌아가는데, 그 돌아가는 걸 간단히 말하면, 돌이킬 반자가 있고, 비춰볼 조자가 있는데, 반조(返照)라고 하거든요, 반조. 반조가 있고. 돌아갈 귀자가 있고, 근원이라는 원자가 있는데 귀원(歸源)이라고 해요. 무명연기에서 청정연기로 돌아가는 분기점을 반조, 귀원. 귀원을 해야 돼요, 귀원. 돌아가야 돼요. 돌아가야 된다. 또 반조는 돌이켜봐야 돼요. 맨날 좋아하고 싫어하고 근심걱정하고 여기에서 이런 마음이 나온 것이 뭔가, 그 나온 것을 되돌려서 뒤로 돌아본다, 이게 반조거든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어떤 분은 의상본계론 그런 게 있는데, 돌이킬 귀자와 반자, 감정이란 정자를 써서 반정(返情)이라고 해요. 능엄경에서는 돌이킬 반자, 들을 문자, 반문(反聞)이라고 해요. 반문이란 뭐냐 하면, 소리를 듣는 그놈을 듣는 거예요. 됩되듣는다, 다시 듣는다, 됩되들어. 내가 귀로 소리를 듣잖아요. 그러면 보통 세간으로 듣는 것은 저 소리에 따라서 듣는데, 이걸 돌아가면서 듣는 것은 이 듣는 놈을 들어요. 이 듣는 놈이 소리가 있나 없나, 듣는 놈한테는 무슨 소리가 있나. 듣는 놈을 자꾸 듣는 거예요. 밖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듣는 놈을 돌이켜 듣는다. 이런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무명의 망상집착이 없어요. 그래서 망에는 근원이 없다. 그냥 허망하게 들었을 뿐이에요. 그 밧줄을 뱀으로 봤는데, 뱀은 나온 데가 없어요. 허망하게 잘못 봤을 뿐이에요. 근원이 없어. 그런데 밧줄은 근원이 있거든. 그래서 듣는 놈은 근원이 있고, 밖으로 듣고 망상집착을 한 놈은 근원이 없다.

      또 법문을 할 때 맨날 하시는 법문이 암실과 명등인데, 암실은, 깜깜한 방을 암실이라고 그러죠. 명등은 밝은 등불이란 말예요. 깜깜해서 보이는 게 없으니까 무섭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그랬는데, 등불을 딱 켜니까 어두움은 근원이 없어, 어두움은 등불을 켜는 순간에 싹 없어졌어요. 그리고 본래 그 방의 모습만 확 드러났다. 그래서 방의 모습이 확 드러나는 건 광명이고 어둠이 싹 없는 건 그건 무명이다. 그래서 망상집착을 걱정하지 말고 한마음을 돌아봐서 잘 챙기면 망상집착은 근원이 없어서 일시에 사라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삼세제불 광명심입니다. 일체중생은 무명심으로 살아가고 삼세제불은 광명심으로 나타난다. 무명에서 광명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게 그게 청정연기라고 그래요, 정연기.

 

光明諸佛出現

광명제불출현

煩惱盡時 生死卽絶 生滅滅已

번뇌진시 생사즉절 생멸멸이

寂照現前 應用無窮 名之爲佛

적조현전 응용무궁 명지위불

(節要收錄 荷澤法語)

(절요수록 하택법어)

 

     법문이 많은 법문 중에, 번뇌가 다 하는데, 망상집착이 다 없어지는 때에 생사는 없다. 생사는 즉절하나니, 생사가 없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게 가장 문제인데, 죽고 사는 걸 번뇌소연으로 보는 게 불교에요. 죽고 사는 건 번뇌로 나타나는 거다. 이게 불교에요. 번뇌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 죽고 사는 것은 무명 미혹으로, -미혹도 역시 잘못 본다,- 느껴지는 거다. 왜 그러냐. 이 모든 중생과 사물이 생기는 거나 없어지는 거나 똑같은 하나의 진실법이에요. 생기는 것도 진실법이고 없어지는 것도 진실법이에요. 봄에 피는 저런 잎새도 계절이고, 가을에 지는 단풍도 계절이지. 봄에 피는 나뭇잎새만 진실이고 가을 단풍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진실이고 사라지는 것도 진실인데, 이걸 망상집착으로 태어나는 건 좋아하고 사라지는 건 싫어해요. 아무것도 안 사라지면 그런 법계가 어디 있나. 그런 건 없어요. 안 사라지면 큰일이에요. 그거참, 사라져야 새로워진다. 새로워짐이 있으면 사라짐이 있다. 이게 당연한 건데, 나고 죽는 걸 똑같이 즐거워하지 않고, 어떤 건 즐거워하고 어떤 건 괴로워해요. 이거는 무명이다. 잘못 보는 거다, 이거죠. 이 세상에 좋아하고 싫어할 거 없어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자기 어리석은 욕심이에요. 그러참,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게.

      그래서 번뇌진시(煩惱盡時), 번뇌가 다할 때에, 생사가 즉절(生死卽絶)하나니, 생사가 곧 끊어지나니, 생멸이 멸이하고(生滅滅已), 나고 죽는 것이 다 없어지고, 나고 죽는 것이 하나의 진실법만 있고, 나고 죽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적조가 현전하면(寂照現前), 마음의 근본 바탕이 적조라고 그러는데, 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고 막 찾아보면 그림자도 하나 없고, 티끌도 하나 없고 모습도 하나 없고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걸 적, 고요할 적자, 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마음이 큰 것이 오면 큰 걸 보고, 작은 것이 오면 작은 걸 보고,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있는 것도 보고, 없는 것도 보고, 모든 걸 다 봐요. 이걸 조, 비칠 조자, 라고 해요. 그래서 무명은 사라지고 적조가 현전이라현전이란 나타난다는 이 말인데, 나타날 현자, 앞 전자, 전자는 어조사고. 그냥 나타나요. 적적하고 명명한, 밝고 밝고, 적적명명, 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밝고 밝은 마음이 나타나면 이게 광명인데, 거기서 응용이 무궁(應用無窮)해요. 응용무궁. 거기서 무한 공덕이 나와요. 이 적조심에서. 그걸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명지위불이라(名之爲佛). 이건 강원에서 늘 배우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절요에 수록한 하택 신회선사 법어예요. 적조가 현전하면 응용이 무궁이니 명지위불이라. 적적하고 맑고 맑은 마음이 나타나면 응용이 끝이 없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한다. 이런 게 마음이에요.

 

如來證涅槃 永斷於生死

여래증열반 영단어생사

若有至心聽 常得無量樂

약유지심청 상득무량락

(36권 열반경 제20)

 

     그리고 열반경에 보면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하니, 여래께서 열반을 얻으니, 생사에서 진실법을 얻는 거예요.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열반은 진실이라. 영단어생사(永斷於生死), 여래가 열반을 얻으니 생사가 영원히 없어졌다. , 끊어질 단자는 없어졌다는 소리예요. 생사는 없어요. 나고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오직 진실상이 있을 뿐이지 생사법은 없다. 무명에서 광명을 얻으면 모든 나고 죽는 모습이 전부 진실상 밖에 없다. 이거거든요. 영단어생사라, 영원히 생사가 없다. 약유지심청(若有至心聽)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들으면, 상득무량락(常得無量樂)이라,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런 법문인데, 열반경이라고 하는 경이 36권 열반경도 있고, 40권 열반경도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주로 보는 경은 36권 열반경이에요. 그래서 36권 열반경 제 20권에 수록된 거거든요.

     그러면 열반이라는 게 생사가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곧게 해석할 수가 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상락아정도 열반이라고 그러지만, 열반에 4차원으로, 4원으로, 열반에 4원이 있다, 열반에 네가지 근원이 있다. 첫째는 원적(圓寂)열반이에요. 원적열반. 원자는 둥글 원자인데, 둥글다는 것은 무변이라, 끝이 없다 이 소리거든요. 끝없이 고요해요. 이게 원적이에요. 고요할 적자. 끝없이 형태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고. 이것을 원적열반이라고 해요. 원적열반. 그 다음에는 원명(圓明)열반. 둥글면서 또 밝아요. 둥글 원자, 밝을 명자. 원명해요. 끝없이 밝아요. 끝없이 고요해요. 세 번째는 원성(圓成)열반이라고,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히 다 이루어졌어요. 네 번째는 원만(圓滿)열반, 끝없이 가득히 차서 없는 게 없어요. 열반을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열반은 원적이다, 열반은 원명이다, 열반은 원성이다, 열반은 원만이다. 이런 구경열반(究竟涅槃)을 떡 증득하고 나면 생사는 없다.

      그런데 이런 법문을 듣는 사람도 항상 한량없는 즐거움을 얻는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열반경 게송이에요.

 

掬水月在水 弄花香满衣 (法演禪師語錄卷中)

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 (법연선사어록권중)

 

      그러면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조교(祖敎)와 경교(經敎), 조사의 가르침, 달마나 육조나 임제나 마조나 이런 선사들을 조사라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경에서 가르침을 경교라고 그래요. 조사의 가르침을 조교라고 하고. 조교과 경교. 그래서 항상 경교와 조교,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이 뭐냐.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게 동북아시아의 불교현상이에요. 조교, 경교. 그런데 조교와 경교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데, 어떤 분은 조교와 경교의 차이점은 닭은 추우면 높은 횟대에 올라가고 오리는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이게 조사의 가르침이에요. 그거참, 닭은 날씨가 추우면 횟대로 올라가. 그런데 오리는 날씨가 추우면 물속으로 들어가. 이렇게 가르치는데, 어떤 조사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조교라는 것은, 조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국수에 월재수(掬水月在水)하고, 또 경교라는 것은 농화향만의(弄花香满衣). 참 기가 막힌 말씀인데, 국수라는 것은 물 뜰 국자, 움킬 국자가 있는데, 물을 그릇으로 뜬다는 말이에요. 물을 그릇으로 한 바가지 딱 떴는데, 뜨기는 물을 떴는데 물 안을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그 물속에 달이 있어요. 이 달은 생각지 못한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물을 떴단 말이에요. 물을 뜨고 물을 바라보니까 물 속에 달이 있어. 그게 조사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조사의 가르침은 뭐냐. 농화에 향만의라, 희롱할 농자, 꽃 화자. 희롱이라는 건 자꾸 가까이 하는 거죠. 꽃을 가까이 하고 꽃을 가까이하다 보니까, 향기 향자, 가득할 만자, 옷 의자, 그 꽃의 향기가 옷에 가득히 배어있다. 이걸 경교라고 해요. 경의 가르침이다. 참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금강경을 읽고, 법화경을 읽고, 화엄경을 읽고, 열반경을 읽고, 천수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으면 그 법의 향기가 몸에 가득히 배어요. 그래 읽기는 경을 읽었는데 그 향기가 몸에 가득해요. 이걸 농화에 향만의라고. 챙기기는 마음을 챙겼는데 마음 하나를 딱 챙기고 나와보니까 그 마음속에 무진무궁하게 다 있어요. 그걸 국수에 월계수라, 눈을 뜨고 보니 물에 달이 있더라.

     이런 식으로 죽 지금까지 법문을 해 온 법문이 마음법문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