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6월10일 음력 5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1-06-10

 

-身命慧命 이야기-

 

     오늘 진관사 신축년 5월 초하루 법문은 <몸생명, 지혜생명>, 몸생명, 지혜생명,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생명을 신명(身命)이라고 하고,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활은 거의가 다 몸생명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몸생명을 위한 불교를 또 옛날에는 생활불교라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치유라고도 해요, 치유. 힐링(healing)이다. 그게 다 몸생명 불교라는 얘기에요. 생활불교, 치유불교. 다스린다는 말이죠, 치유는.

    우리나라가 70년대에 대학생 불교수련회가 사찰에서 많았거든요. 그런데 수련회를 하다 보면, 학생들의 관심 사항이 뭐냐.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불교 교의, 불교에서 가르치는 뜻, 그것에 관심이 있고요. 그다음에는 불교가 우리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생활에 도움, 생활의 이익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스님들이 기간을 정해서 여름에 결제를 하고, 겨울에 결제를 하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서 결제를 해서 참선을 하는데, 학생들이 하는 참선은 깨달음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는가, 운동선수들은 어떻게 하면 운동경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많았어요. 생활불교라고 하고요.

 

  福德 복덕

日日有 千祥之慶 時時無 白害之災

일일유 천상지경 시시무 백해지재

壽山高屹 福海汪洋

수산고흘 복해왕양

身無一切病苦厄難 心無一切貪戀迷惑

신무일체병고액난 심무일체탐연미혹

三障頓除 五福增崇 (釋門儀範 祝願篇)

삼장돈제 오복증숭 (석문의범 축원편)

 

     그리고 일상생활도 부처님께 축원을 하는데, 거의가 몸생명을 위한 축원이에요. 불교의식문 축원문에 보면 만날 하는 게, 일일유 천상지경이라(日日有 千祥之慶), 나날이 천 가지 좋은, 상서로운 복이 있고, 시시무 백해지재라(時時無 白害之災), 때때로 백 가지 해로운 재앙이 없어진다. 이런 걸 원하거든요. 수산이 고흘(壽山高屹)하고, 이런 거. 수명, 목숨 산이, 목숨이 저 산처럼 아주 높고, 복해가 왕양하고(福海汪洋), 복 바다가, 바다처럼 깊고 넓고,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원이고요. 신무일체병고액난(身無一切病苦厄難)하게 해주시고요, 몸에는 일체 병고와 액난, 병고가 없도록 해주시고, 심무일체탐연미혹(心無一切貪戀迷惑), 마음에는 탐연, 탐내고 얽매이는 미혹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런 게 전부가 몸과 생활을 위한 축원이거든요. 삼장이 돈제하고(三障頓除), 삼장이 있는데, 세 가지 장애, 세 가지 장애는 혹업고(惑業苦)라고 해서, 미혹장애, 업장장애, 고난장애, 마음이 미혹한 장애, 악업이 쌓이는 장애, 고난이 다가오는 장애, 이런 혹업고 삼장을 바로 한꺼번에 제거하게 해주시고. 오복이 증숭하고(五福增崇), 오복은 불교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유가 서적에서도 많이 말하는데, 사람이 항상 필요한 거예요. (), (), -수명, 재부, 재물부자,-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강녕(康寧, 건강할 강자, 편안할 녕자). , , 강녕, 항상 건강을 필요로 하잖아요. 늘 써붙여요. 수부강녕, 부모강녕, 이런 거. 어른들에게는 강녕이란 말을 쓰고, 아이들에게는 건강이란 말 쓰고 그러더라고요. 그 뜻은 같은 뜻인데, 애들에게 강녕하시오란 말 잘 안 쓰고요. 유호덕, 넉넉할 유자인데, 덕이 넉넉하고, 심덕이 있는 게 복이라고요. 마음의 덕이 있는 게. 고종명이라고 해서 자기 수명대로 사는 거, 수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횡사(橫死)라고 해요. 뜻밖에 죽었다고, 비명횡사, 이런 거. 객사, 밖에 나갔다가 생각지 않게 죽었다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 명을 차분히, 편안히 맞게 해주세요. 이런 게 오복인데, 오복이 증숭이라, 계속 높이 높이 불어나게 해주세요. 이런 축원을 매일 해요. 그게 복덕(福德)입니다. 이런 복덕 축원을 항상 한단 말이에요. 그게 신명이에요.

 

  生活 생활

三法和合 名爲衆生

삼법화합 명위중생

一壽 二煖 三識 (涅槃經33)

일수 이난 삼식 (열반경33)

行住坐臥 語默動靜 着衣喫飯 痾屎放尿

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그런데 몸이 살아가는 거, 몸이 구성된 거, 이런 걸 또 가르치고 있는데, 이 몸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열반경 제33권에서는 몸이라는 걸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요. 첫째는 뭐냐. 목숨 수자()를 썼는데, 목숨이 끊어지면 몸이 아니에요. 몸은 목숨이다. 목숨은 뭐냐. 숨 쉬는 거거든요. 그래서 수명이라고 그러는데, 그건 어려운 말이고, 목에 있는 숨이에요. 우리말로. 목에 숨이 있으면 그게 몸이에요. 한심해요. 몸이라는 거,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에 숨 쉴 때 몸이지, 몸에 숨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기가 막혀요. 그다음에, 따뜻할 난자(). 몸이 따뜻해야 몸이에요.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리면 몸이 아니에요. 체온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호흡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다음에 식이라고 해서, 알 식자()인데, 의식이에요. 의식이 없으면 몸이 아니에요. 의식이 있나 없나 이러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체온도 있고, 호흡도 있고 의식만 돌아오지 않은 걸 식물인간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의식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3가지가 다 함께 있을 때 그걸 중생이라고 한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산다는 게 아무리 복을 빌고 좋은 걸 많이 해도, 이 몸 자체가 생각에 잘못이 있다든지, 체온에 잘못이 있다든지, 호흡에 잘못이 있으면 그냥 몸이 아닌 거예요. 사는 게 아닌 거예요. 이런 거 참 중요해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생활(生活)을 뭐라고 그러냐. 행주좌와(行住坐臥), 이게 생활이에요. , 돌아다니고, , 멈추고, 머물 주자가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멈춘다는 뜻이거든. 돌아다니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 앉기도 하고, , 누워서 자기도 하고. 이게 생활이에요. 행주좌와. 어떤 삶을 살아도 행주좌와는 마찬가지예요. 다니고 멈추고 앉고 자고, 그거죠. 그리고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 말하고, ,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 움직이고, , 고요하고. 어묵동정. 행주좌와. 이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생활이에요. 생명활동. 그리고 생활을 항상 이야기하는 말 중에 착의끽반(着衣喫飯)이란 말을 써요. 착의, 옷 입고, 끽반, 밥 먹고. 이 옷 입고 밥 먹지 아니하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산다는 게 이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밥 먹는 게 사는 거고, 옷 입는 게 사는 거예요. 그 뭐 대단하게 생각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재밌는 게 있는데, 아시방뇨(痾屎放尿)란 말이 있는데, 아시는 대변보는 걸 말해요. 대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돼요. 방뇨는 소변보는 걸 말해요. 소변 안 보면 생활이 안 되거든요. 이게 사는 거예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착의끽반 아시방뇨. 가고 서고 앉고 자고, 말하고 조용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고, 또 옷 입고 밥 먹고, 대변보고 소변보고, 이거예요. 여기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똑같은 거예요. 이게 생활인데, 이걸 잘하기 위해서 옷 잘 입고, 밥 잘 먹고, 잘하기 위해서. 또 화장실 잘 꾸미고. 화장실도 참 웃겨요. 아시방뇨가 중요하지, 화장실 변기가 중요한 게 아닌데, 변기만 좋으면 뭐 해요. 변을 잘 보는 능력이 있어야 되고 그렇지. 근본이 이건 거예요. 변 보고, 옷 입고, 밥 먹고, 움직이고. 이게 생활인 거예요. 그게 그냥 생활이에요. 근데 이 생활이 오래가냐. 오래 안 가거든요. 만날 건강을 위해서 밥도 먹고, 건강을 위해서 병치레도 하지만, 밥을 먹는 사람이나 안 먹는 사람이나 죽어요. 병이 있는 사람도 죽고 병이 없는 사람도 죽어요. 건강하다고 좋아하지만, 건강한 사람도 죽는다는 거예요. 이걸 신명이라고 하거든요. 몸생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죽어요. 그러면 이게 죽고 나면 뭐가 남는 게 있나 없나, 도대체. 뭐가 남아. 아무것도 안 남나. 이거거든요.

 

   慧命 혜명

謂自性清淨心 難可了知

위자성청정심 난가료지

彼心爲煩惱所染 亦難可了知 (勝鬘經自性清淨章13)

피심위번뇌소염 역난가료지 (승만경자성청정장 제13)

世尊 於此起煩惱 剎那心 剎那相應 (勝鬘經一乘章5)

세존 어차기번뇌 찰나심 찰나상응(승만경일승장제5)

自性清淨心 常寂常光

자성청정심 상적상광

煩惱所染心 剎那相應

번뇌소염심 찰나상응

無明行識 名色幻身

무명행식 명색환신

定觀照見 眞如法身

정관조견 진여법신

在水邊人 但見其水 與像別異 (法圖記叢髓錄)

재수변인 단견기수 여상별이 (법도기총수록)

只由不以其水 爲眼故也 (卷下之一 法記)

지유부이기수 위안고야 (권하지일법기)

 

     그래서 몸생명에는 지혜생명이 있다. 지혜생명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생명을 혜명(慧命)이라고 해요, 지혜 혜자, 목숨 명자, 혜명. 그래서 생명을 얻어서 생명으로 살다가 생명으로 죽고, 다음에 또 그렇게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이걸 윤회라고 그러는데, 혜명은 한번 얻으면 영원해요. 혜명. 그래서 부처님이 이 신명 속에서 혜명을 얻었다. 신명은 생로병사인데, 혜명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에요.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고 청정하고. 이 생로병사에서 상락아정의 혜명을 깨닫는 거예요. 깨닫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이 몸속에 지혜생명이 있는데 모르거든요. 있는데 모르는 거예요,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그래서 그걸 혜명을 얻는다. 또 혜명을 전한다. 혜명을 또 잇는다고 해요, 이어.

     그러니까 이 지혜생명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이게 마음인데,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번뇌심이 있고, 자성심이 있다. 번뇌심을 물들 염자, 마음 심자, 염심(染心)이라고 하고, 자성심을 깨끗할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도 하고. 항상 이걸 가르쳐요. 그러면 자성심은 청정심이라. 자성청정심(自性清淨心). 항상 있는 거예요, 자성청정심. 그런데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또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기도 해요. 이걸 번뇌소염심(煩惱所染心)이라고 해요. 번뇌에 물든 바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고, 자성청정심을 도대체 어떻게 아냐. 이걸 난가료지(難可了知)라고.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다. 승만경에서 아주 자세히 가르치고 있는데요. 우리에게 다 자성청성심이 있는데, 알기가 어렵다는 거거든요. 또 번뇌소염을, 그 자성청정심이 번뇌에 물들게 되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 번뇌심도 알기 어렵고, 자성심도 알기 어렵다. 자성이 그렇게 청정하면 왜 번뇌에 물드느냐. 번뇌에 물들었으면 왜 자성이 또 청정하냐. 청정과 번뇌가, 염심과 정심이 항상 함께 있어요. 번뇌심 떠나서 청정심이 있는게 아니고, 청정심 떠나서 번뇌심 있는 게 아니고, 항상 함께 해요. 항상.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승만경에서, 세존(世尊)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어차에(於此), 어차라는 건 무명을 말하는데, 미혹한 마음이다 이거죠, 미혹. 미혹이라는 게 뭐냐. 초기 경전에선 그렇게 설명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갔는데, 황금 덩어리가 있어요. 그래서 황금 덩어리를 싸가지고 와서 오래 있다 보니까 그게 누런 독사뱀이었어요. 독사뱀이 서려 있는 것을 황금으로 잘못 보는 것이 무명이다, 그것이 미혹이다라고 설명을 했어요. 독사가 잠 들어있는데 이걸 황금으로 봤단 말이죠, 독사를. 황금으로 보이니 그걸 주워 왔어요. 그게 업이란 말이에요. 나중에 독사가 집에서 깨어나서 사람을 해쳤어. 그게 고통이다.> 이렇게 혹업고를 설명을 하는데요. 대승 경전에서는 이 무명을 어떻게 설명을 하냐. <어떤 사람이 저녁에 뱀이 서려 있는 걸 봤는데, -역시 뱀이네.- 나중에 보니까 그 뱀이 뱀이 아니고 검은 삼 껍질로 만든 밧줄이었다. 그래서 검은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걸 미혹이라고 해요. 사실은 밧줄인데 , 여기 큰 뱀이 서려 있네.’ 해서 그걸 뱀으로 잘못 보는 순간에 겁이 나서 보이지도 않는데 도망가다가 넘어져서 다쳤어요. 도망가는 게 업이고 다치는 게 고라고, 혹업고.> 이게 번뇌에요. 첫째는 잘못 보는 거예요, 무명. 잘못 본 것에 기초를 해서 또 행위를 하는 거예요. 행위에 의해서 또 고통이 오는 거예요. 이게 전부 번뇌인데, 문제는 뱀으로 잘못 보는 마음이 아무리 잘못 봐도 그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에요. 달라짐이 없이 그대로 잘못 보는 거예요. 이게 청정심 그대로 번뇌심이다. 이게 어렵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 번뇌심은 근본이 뭐냐 하면 뭘 일으키는 건데, 일으킬 기자(), 번뇌는 기야라, 일으키는 거다. 일으킴이 없으면 번뇌가 아니에요. 뭘 자꾸 일으켜. 뭘 자꾸 만들어. 그럼 일으키면 어떻게 되냐. 찰나심(剎那心)이 돼요. 청정심이 찰나. 찰나심은 뭐냐, 순간순간 마음인데, 사람 볼 때는 순간 사람 보는 마음이 일어나요. 나무 볼 때는 순간 나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물건 볼 때는 순간 물건 보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게 찰나심이에요.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剎那心 剎那相應). 항상 함께해요, 보이는 것과. 함께하는 것을 상응이라고 하거든요. 서로 상자, 응할 응자. 내가 여기 물잔을 보면 이게 찰나심인데, ‘, 요거는 물을 마시는 그릇이구나.’ 이렇게 상응을 해요. 그래서 물을 마셔요. 이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이게 번뇌에요. 그래서 사람을 보면 사람을 딱 보고 그 사람과 함께해요. 그래서 마음에 들면 아주 좋은 생각이 일어나고, 마음에 안 들면 막 화가 나서 싸우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면 도망가기도 하고, 마음에 들면 쫓아가기도 하고 이게 번뇌에요. 번뇌심은 항상 찰나심이 찰나상응이라, 찰나 찰나 상응하는 거예요. 그게 오래 안 가요. 요거 볼 때는 요거에 함께 하다가, 또 다른 거 보면 다른 것과 함께해요. 금방 화를 내다가 그거 지나면 화가 안 나고 딴 게 와요. 또 어떤 때는 동시에 앞으로 볼 땐 화나고, 뒤로 돌아서서는 웃고 이런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찰나심이 찰나상응하는 게 아주 빠르고 복잡하고 이런데, 문제는 그 찰나찰나 대상과 함께 해도 함께 하는 그 근본 뿌리는 자성청정심이라는 거죠. 예를 들면 우리가 눈이 있는데, 얼굴의 눈이 나무를 보기도 하고, 사람을 보기도 하고, 물건을 보기도 하고 하는데, 물건을 볼 때도 눈이고, 나무를 볼 때도 눈이고, 사람을 볼 때도 눈이고, 눈 하나 그대로인 상태에서 온갖 걸 다 보고 온갖 것과 다 함께한다. 또 그거 지나가면 다른 것과 함께하고. 이게 찰나심 찰나상응이라고 가르쳐요. 자성청정심과 이렇게 찰나상응심이 항상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왜 괴로우냐. 늘 찰나상응심으로만 살기 때문에 그래요. 자성청성심으로 딱 돌아가면 찰나상응심은 없어요. 우리가 근심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대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거든요. 사람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물질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또 여러 가지 생각에 의해서 괴로움이 오고. 그래서 생각과 사람과 물질을 떠나면 괴로움이 없어요. 근데 그것은 전부가 찰나상응심이다. 찰나찰나에 다른 대상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괴로움은 밖에서 온 거기 때문에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뭐냐. 그게 자성청정심이거든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으로 딱 돌아가면 괴로움은 없어요. 그런데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괴로운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것을 갖다 집어넣어요. 사람한테 괴로우면 물건으로 그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또 물건한테 괴로우면 사람으로 또 괴로운 마음을 없앤다든지, 그거는 늘 찰나의 마음을 찰나로써 치료하려고 하니까 맨날 괴로움의 형태가 바뀔 뿐이지 괴로운 행위는 계속된다 이거죠.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상적상광이라(自性清淨心 常寂常光).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나는 게 자성청정심이에요.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우리 몸에 자성청정심이 있는데 찾아보면 없어요. 마음을 보려고 아무리 몸을 갈라봐도 안 보여요. 그런데 항상 마음이 있어요. 이걸 상적상광이라고 하거든요.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빛난다고. 번뇌소염심은, 번뇌에 물든 마음은 찰나상응이라(煩惱所染心 剎那相應). 늘 찰나찰나에 상응을 해요. 그래서 우리 주인이 항상 바뀌는 거예요. 어떤 때는 물질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재물이 내 주인이 됐다가, 어떤 때는 몸이 내 주인이 됐다가. 그래서 자성청정심은 늘 한평생 모르고 살다가 모르고 죽는다 말이지.

     그래서 우리 몸을 명색(名色)이라고 그러는데, 이름 명자, 보인다는 빛 색자, 명색, 명은 생각이에요. 수상행식이라는 반야심경의, 수상행식은 안 보이고 이름만 있다고 이름 명자를 써요. 색은 우리 몸인데 지수화풍이라고 그래요. 우리 몸은 지수화풍, 흙과 물과 따뜻한 거와 호흡, 바람 이런 걸로 되어있다, 이게 색인데. 이 명색은 환신(名色幻身)이에요. 환같은 거예요, 헛개비와 같다. 금방 있다 금방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안에 자성청정심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걸 환속에서 참됨을 찾아야 된다고 해서 즉환명진(卽幻明眞)이라고 하는데, 환에 당도해서 참을 밝힌다. 즉환명진.

     그런데 여기서 정관조견(定觀照見)이라고, 선정이란 정자는 대승불교에서 멈춘다고 봐요. 멈춰서 보는 것으로, 멈춰 본다, 이게 정관인데, 선정이란 정자와 볼 관자. 멈춰 본다는 말이에요. 정관으로. 조견오온개공이라고 있는데, 조도 볼 조자고, 견도 본다는 볼 견자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딱 보면, 이게 정관조견이에요. 멈춰 봄으로 자성청정심을 보면, 정관으로 조견을 하면, 진여법신이라(眞如法身). 우리 명색환신이 그대로 진여, 참 그대로 법의 몸이다. 이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명색환신에서 진여법신을 조견한다, 본다. 보는 게 어렵나.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안 보이냐. 찰나상응으로 항상 사는 거예요.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찰나심이 찰나에 상응하고, 그래서 못 깨닫지. 정관으로 조견하면 진여법신이 이 생로병사 명색화신에서 그대로 보인다 이거죠. 이걸 깨닫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대로 있는데 왜 못 보냐. 이걸 신라화엄가에서는 뭐라고 하냐 하면,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잘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이 있는데 그걸 총수록(叢髓錄)이라고 해요,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해석한 제자들의 기록. 총수록이 있는데, 총수록 네권이 있는데 그 세 번째 권에 무슨 말이 있나 하면, 사대오온 명색화신에서 진여법신 자성청정심을 못 보는 이유를 비유로 설명을 해보자면, 수변인이(在水邊人), 물가의 사람이, 물가에 있는 사람이, 수변, 물가에 있는 사람이란 말은 맑은 연못이 있는데, 연못가에 어떤 사람이 갔어요.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연못 안에는 여러 가지 물에 비친 그림자 영상이 있는데, 그 영상만을 보지, 영상 그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는 순간에는 물을 못 봐요. ‘, 저건 산이다. 저건 나무다. 저건 돌이다.’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볼 때는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지 물은 볼 수가 없다. 그럼 물을 못 보는 이유는 뭐냐. 지유(只由), 오직, 말미암아, 오직 그것때문이다 그 말인데, 무엇 때문이냐. 기수로, 그 물로써 위안고(不以其水 爲眼故也), 눈을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이라고 하는 건 보는 건데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에요. 그 물가에 가서 물속에 비친 그림자만 보는 것은 오직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보지 못한다. 이게 뭔 소린가 하면, 연못 속에는 연못 속에 비친 물건이 없어요. 산이 보여도 물속에 산이 없고요. 사람이 보여도 물속에는 사람이 없고요. 구름이 보여도 물속에 구름이 없거든요. 오직 물 하나뿐이에요. 그런데 연못 속에 가서 보는 사람은 물속에 있는 그림자만 보지, 그림자 보는 그 순간에, 그 찰나에는 물은 전혀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연못가에 가서 보는 사람이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물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만 보고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 법문이었어요. 기가 막힌 법문.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사람을 봐도 전부 우리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인 거예요. 재물을 봐도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자고. 자성청정심이 없으면 사람을 보되 사람을 볼 수가 없고, 산을 보되 산을 볼 수가 없고, 물질을 보되 물질을 볼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물속에 뭐가 비쳐도 전부 물뿐인 거예요. 물 다 퍼 내봐요. 거기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지, 거기. 그냥 빈 연못 바닥뿐이지. , 이것 참 기가 막혀요. 밖에 걸 딱 보는데 이게 내 자성청정심에 비친 그림잔데, 밖에 것 보다가 내 자성청정심 모르는 거예요. 연못가에 가서 딱 보니까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 보다가 물은 못 본다 말이죠. 그래서 그 연못 속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 물뿐이라는 것을 알듯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게 전부 자성청정심이라는 걸 알게 되면 보이고 듣는데 절대 괴로울 수가 없어요. 항상 즐거워요. 그걸 상락아정이라고 그래요.

그럼 그걸 보는 방법이 뭐냐 이거죠. 기도하고, 경 읽고, 마음 닦고, 참선하고 하는 게 전부 이 찰나번뇌심에서 자성청정심을 보는 행위에요. 그거 전체를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