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재] 2월 1일 영가 100재 법문 2021-02-01

 

諸行無常 是生滅法

제행이 무상하니 시는 생멸법이로다

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멸이하면 적멸이 위락이로다

나무아미타불

(涅槃經 聖行品)

(열반경 성행품)

 

     涅槃經 聖行品(열반경 성행품)에서, 제행이 무상(諸行無常)하니, 제법이 삼세를 흐르면서 항상 하는 것이 없으니, 시는 생멸법(是生滅法)이다, 이것은 나고 죽는 법이다. 생멸이 멸이(生滅滅已)하면, 나고 죽는 법이 없어지면, 적멸이 위락(寂滅爲樂)이라,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법, 적멸법이 즐거움이 된다.

      열반경에서 하신 말씀인데요. 생멸과 적멸, 생멸은 생로병사고 적멸은 불생불멸인데, 생로병사가 없어지면 불생불멸이 즐거움이 된다. 이 말씀인데요.

      생로병사 생멸법이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가.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견상(見相), 볼 견자, 형상 상자, 견상하면 생멸이고, 볼 관자, 성품 성자, 관성(觀性)하면 적멸이다. 견상의 생멸이요, 관성의 적멸이다. 왜 그러냐. 상에는 집상(執相)이 있고 자상(自相)이 있는데, 일체중생이 태어나서 평생 보고 듣는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상밖에 볼 수 없다는 거죠, 모일 집자, 상이라는 상자, 집상. 전부가 집상이에요. 모여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면 일체사물의 자상, 자체 모습, 그것은 생멸이 아니고 적멸이다. 그것은 불생불멸이다. 하늘과 땅도 전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생로병사도 전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흥망성쇠도 다 모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모이기 전에 자상, 자기 모습, 모인 후에 자상, 자기 모습은 적멸이다, 적멸.

      근데 본분은 견상에 주상(住相)을 하고 모여서 이루어진 집상을 보고 거기에 머문다, 주상. 그래서 제법이 생멸이 되고, 삼세제불은 어상에 관성이라, 모든 집상에서 자체 자성 자상을 본다. 상에서 상을 보는 게 아니라 상에서 성을 본다 이거죠. 그래서 해탈자재(解脫自在)가 돼요. 그 해탈자재가 극락세계에요. 하늘을 봐도 하늘의 모양을 보는 게 아니라, 견상을 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자체상을 본다. 관성을 한다는 거죠. 상에서 성을 본다. 어상에, 어조사 어자가 있는데, 일체 상에서 관성을 하면 해탈자재가 되고, 견상에 주상을 하면, 상을 보고 상에 머물면 생로병사가 된다. 그래서 상에서 성을 보면 생로병사가 없어져요. 그게 생멸이 없어지면 이 소리예요. 언제 나의 생사가 끝나나, 어상에 관성을 하면, 상에서 사물의 자성을 보면 자성은 자상인데- 없어져요. 생멸은 없어요. 얼음에서 물을 보는 순간에 얼음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얼음에 자재하는 거예요. 얼음이 얼든지 안 얼든지. 물에 돌아가서 자재하니까 아무 속박과 고뇌가 없다 이거죠. 속박 고뇌 없는 적멸세계를 불생불멸 극락세계라고 한다 이거에요.

 

世間種種事 如露亦如電

세간종종사가 여로역여전이니

照見如如相 頓成圓成人

조견여여상하면 돈성원성인이로다

一切咸靈類 法性摠持身

일체함영류가 법성총지신이니

無垢圓淨光 任照常無痕

무구원정광이 임조상무흔이로다

나무아미타불

 

      형상이 생기고 형상이 사라지는 것이 세간인데 세간의 온갖 일들이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금방 생겨났다 금방 사라진다, 그 말씀이죠. 거기서 집상, 생멸, 이런 거 말고 여여상, 자상, 자성, 그 여여상을 조견이라, 보면(照見如如相), 돈성원성인(頓成圓成人)이라, 원만히 이루어지는 극락세계 자재인을 바로 이룬다. 돈성이란 지체없이 바로 이룬다, 이런 소리예요. 일체함영류(一切咸靈類)가 일체중생이 법성총지신(法性摠持身)이라, 일체법에 자성이 모든 걸 다 포함하고 있는 그런 총지의 몸이다. 무구원정광(無垢圓淨光), 아무것도 섞인 게 없는 자상광명, 만법자성의 광명이 임조(任照), 임의로 비친다, 바다에 그림자가 비추듯이. 애써서 비추는 게 아니라 저절로 항상 비춘다. 그런데 아무 흠집도 없다. 이 말은 내가 언어 속에서 하는 말이 전부가 의식분별의 작용이에요. 태어났다 하지만은 자상에는 태어난 게 없고. 이 죽는다는 것도 전부 집상분별이에요, 상에 집착하는 분별이다. 허공에는 죽음이 없거든요. 처음이니 끝이니 구경이니 전부가 생각으로, 생각하는 거지 만법자성에는 처음이 없어요. 내가 태어난 날이 절대 처음이 아니고 내가 죽는 날이 절대로 마지막이 아니에요.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그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에요. 생각으로 마지막이라고 하는 거예요. 극락세계는 그런 거예요, 처음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고, 난 것이 난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게 적멸, 상락(常樂), 항상 상자, 즐거울 락자, 생사 없이 항상 즐겁다. 적멸, 상락 그게 여여 자성, 늘 같아요. 그게 자성인데 여여자성이 적멸상락이라, 생사 없이 항상 즐겁다. 그 세계로 가시라는 거예요.

      세간종종사는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아서 거기에 머물 데가 못돼요. 10년 머물다 사라지고, 20년 머물다 사라지고, 100년 머물다 사라지고. 100년이 순간이니까 금방 사라져요. 그러니까 적멸상락 극락세계로 잘 가십시오. 세상에 미련이 많아서 못 가면 할 수 없고. 본인이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고. 세상 경험을 크게 한 사람일수록 세상의 진실을 알아요. 세상 경험을 크게 한 사람일수록 세상에 매이지 않아요.

 

眞性自相 實相光明

진성자상 실상광명이

無苦有樂 名爲極樂

무고유락하니 명위극락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진성자상(眞性自相) 허공과 같은 것도 있고, 상락아정(常樂我淨)도 있고, 이 두 가지가 겸해서, 이건 깨닫기 전에는 몰라요. 허공은 불생불멸은 맞는데 상락아정이 없어요. 항상 즐겁고. 자체아, 집생아가 아니고 모여서 태어난 자아가 아니고 자체아, 또 상청정. 그래서 이게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이 겸해있는 거라. 깨닫기 전에는 도저히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로 허공을 들지만 허공은 상락아정을 거기서 표현할 수가 없거든요. 상락아정을 얘기하다 보면 허공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극락세계는 태허공과 같은 불생불멸과 늘 희로애락과 같은 상락아정이 있다. 겸해있어서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거죠. 불성은 불생불멸과 상락아정이 겸해있는 걸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이라고 해요.

      그럼 진성자상(眞性自相)의 실상광명(實相光明) 무고유락(無苦有樂)하니 고통은 없고 즐거움만 있으니, 명위극락(名爲極樂)이라, 이름을 극락이라 한다.

 

不生不滅 壽光無量

불생불멸이며 수광이 무량하며

常樂我淨 極樂世界

상락아정이니 극락세계로다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고, 무량수 무량광 수명이 한량이 없고 광명이 한량이 없어서, 수광이 무량하다. 불생불멸이며 수광이 무량하며 (不生不滅 壽光無量)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 항상 즐겁고 자성아이고 자성청정이니 극락세계다.

 

圓成圓明 常樂玄通

원성원명이니 상락현통하니

極樂世界 常生常用

극락세계의 상생상용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성(圓成)세계다. 생겼다 사라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 괴공이 없다 그거죠. 무너지고 없어지는 괴공이 없이 원성인데, 원만히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을 무량수라고 한다 이거에요, 무량수. 한량없는 수명. 원성, 무량수. 원성이란 말은 불교가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통용된 말이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제일 크게 말한 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있는데, 노자 도덕경에, 큰 그릇은 만성이라, 근데 그것들을 유교식으로 새겨서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그건 잘 못 새긴 거예요. 큰 그릇은 이루어진 모습이 안 보인다는 소리예요, 자연과 같이.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루어진 것이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다. 이루어진 게 안 보이는 게 만성이에요. 자연주의라, 자연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보이지 않거든요. 만든 게 보이는 건 사라져요. 만든 게 안 보이는 건 안 사라져. 이루어진 것이 안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큰 그릇이다. 이걸 노자라는 사람이 불교 들어오기 전에 얘길 했어요. 불교는 그릇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원성이에요. 원만히 이루어져서 수명이 끝이 없다, 원성. 원명(圓明)이라, 광명이 끝이 없다. 원성원명. 근데 인간이 태어나면서 햇빛광명도 보고 달빛광명도 보지만은 이 원명광명은 못 보거든요. 그런데 이 무량광을 떡하니 깨닫고 나면 일체 광명이 원명광명이다고 해요, 원광이다.

      그래서 어떤 큰스님한테 가서 물었어요. “이 세상에는 일광이 있고, 월광이 있고, 성광이 있고, 등광이 있는데, 햇빛, 달빛, 별빛, 등불빛이 있는데 도대체 이 원명원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가서 물으니까, “일월성등광명이 모두가 원명원광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이것이 깨달은 사람하고 못 깨달은 사람의 차이점인데,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게 다 깨달음이에요. 일체가 극락세계에요. 햇빛도 원광원명이요, 달빛도 원광원명이요, 별빛, 등불 빛이 다 원광원명이다.

      그러니까 생각으로 분별을 하면 햇빛이라고만 알지 무량광이란 걸 몰라요. 그래서 그걸 불교학회에 가면 깨달음과 못 깨달음의 차이점이 뭐냐는 걸 학술적으로 토론을 하는데, 깨달은 사람은 저 햇빛이 무량광이란 걸 알고 햇빛을 보고, 못 깨달은 사람은 무량광이란 걸 모르고 그냥 햇빛으로만 알고 햇빛을 보는 거다. 겨우 여기까지 토론을 해요. 그걸 어떤 수학자는 뭐라고 설명했냐 하면 못 깨달은 사람은 0도에 머물러 있는 거고, 깨달은 사람은 360도에 머물러 있는 거다.’해서, 깨닫고 못 깨닫고의 차이는 0도와 360도 차이다. 재밌는 말이에요. 근데 문제는 0도가 뭐고 360도가 뭔지는 조견(照見)을 해야 보여요. 딱 비춰보면 보여요. 생각으로는 안 보인다.

      그래서 원성원명이요, 상락(常樂)이요, 현통(玄通), 통함이 없이 다 통한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할 때 검을 현자와 통할 통자인데, 다 통해요. 상락현통이라. 원성원명 상락현통 극락세계의 상생상용이다(極樂世界 常生常用), 항상 하는 것이다. 항상 하는 것이고 항상 쓰는 것이다.

 

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碍

원아림욕명종시 진여일절제장애

面見彼佛阿彌陀 即得往生安樂剎 (普賢行願品)

면견피불아미타하야 즉득왕생안락찰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만법에 자성자상을 보면 그게 여여실상 극락세계니, 면견아미타불(面見彼佛阿彌陀), 아미타불이 무량수, 무량광, 구족대지혜 아미타불인데, 바로 눈앞에서 아미타불을 보시고 즉득왕생안락찰(即得往生安樂剎)하소서, 안락찰에, 편안하고 즐거운 극락세계에 바로 왕생하십시오. 그런 법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