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11월 14일 3재 법문 2020-11-14

금일 도량 세연지고

삼칠지신 천혼간도재자

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화장세계 華藏世界 화장세계여

연화정토 蓮華淨土 연화정토여

안양극락 安養極樂 안양극락이여

종하출래 從何出來 어디서 왔는가?

나무아미타불

 

     재를 모시고 공력(功力)이 많으세요. 공을 들이는 힘이 많다. 공 공자, 힘 력자. 공력이 많으시다.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첫 번째 법문이 뭐냐 하면, 화장세계(華藏世界), 꽃 화자, 창고 장자인데, 꽃은 공덕이란 뜻이에요. 공덕이 많은 세계라. 연화정토(蓮華淨土), 연화정토는 나쁜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란 뜻이에요. 연화도 깨끗하고 정토도 깨끗하고. 안양극락(安養極樂), 편안한 안자, 기를 양자인데, 여기서 기를 양자는 즐거울 락자과 똑같은 뜻이거든요. 안양을 안락이다. 편안하고 즐거움만 있다. 극락이다, 고통은 하나도 없고 즐거움만 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어디서 왔느냐. 이 세계를 누가 만들었고, 지금 어디 있고, 어디서 왔는가. 종하출래(從何出來),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나왔나. 그런 말씀이었고요.

     처음에 한 얘기는 오늘 삼재인데 날짜로 보면 삼칠이야, 7번이 세 번 들었다는 거죠, 삼칠. 언제 삼칠이냐. 세연이 지고, 세상 인연이 다함으로, 세상 인연이라는 것은 숨 쉬고 맥박 뛰고 생각하고, 수명과 체온과 의식이 세상 인연인데, 이것이 다한 것을 세연이 다했다. 물렀거라, 세연이 다하고 삼칠지신이라, 날짜를 말할 때 생신이라고 하는 것처럼, 스무하루 되는 날, 극락세계 가시라고 하는데, 극락세계는 대체 어디서 왔나. 그 얘기입니다.

 

원성무상최정각圓成無上最正覺 무상 최정각을 원성하여

정각공덕대지출正覺功德大智出 정각공덕으로 대지출하니

일체세간종종상一切世間種種相 일체세간의 종종상이

해인삼매소현물海印三昧所現物이로다 해인삼에서 나타났다.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는 불국토예요. 부처님이 계신 국토를 불국토라고 해요. 불국사라는 것도 다 극락세계를 말하는 거거든요. 화장사라는 것도 극락세계를 말하고, 극락암, 안양암(安養庵), 안양사(安養寺)도 다 극락세계를 말하는데, 불국토, 부처님에 계시는 곳이란 말이에요. 그럼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극락세계에 계시게 되나그 의미인데, 원성무상최정각圓成無上最正覺하야, 무상은 가장 높다는 말이고, 최정각은 제일로 바른 깨달음인데, 원성, 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히 성취하니, 거기서 뭐가 나왔나. 정각공덕대지출正覺功德으로 大智出이라. 바르게 깨달은 공덕으로 큰 대자, 지혜 지자, 큰 지혜가 나왔다. 지혜는 뭔가. 영지상지(靈知常知), 신령 령자, 알 지자, 신령스럽게 알고, 상지, 항상 상자, 알 지자, 항상 알고, 신광신통神光神通, 신비로울 신자, 빛 광자, 신비로운 광에, 신비로울 신자, 통할 통자, 신비로운 신통이다. 이걸 지혜라고 해요. 영지상지 신광신통을 깨닫기 전에는 의식인데, 의식은 대경인지하고, 자기 대상에 있는 경계, 형상들은 인식하게하고, 사량분별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시비성향을 분별하고, 그게 의식인데, 이 의식이 편안해지고, 조용해지고 맑아지고 맑아지는 게 삼매인데, 그런 삼매의 관문을 닫고 닫고 그 기점에 이르르면 그 의식은 없어지고, 지혜광명이 출현하는데, 그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의식이 지혜로 바뀌는 것이다, 그거지. 그것을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 해요. 식을 전환시켜서 지혜를 성취시킨다. 그러면 이 지혜가 나타나면 뭘 아느냐.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에 있는 걸 알아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든 물건이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 깨달은 거고, 자기 마음과 상관없이 모든 물건이 있다라고 하면 생각인 거예요. 지혜라는 것은 제법이 유심이라. 오직 마음이라는 걸 아는 게 지혜고, 모든 형상법이 대상으로 인식이 되고, 그 대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불편하면 그건 의식이다 이거죠. 그래서 뭐가 깨달음이냐. 오직 마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도대체 뭔 말인지, 불가사의인데요. 마음은 항상 있는 건데 모를 뿐이죠. 뭐가 마음이냐, 전부가 마음이에요. 책상을 볼 때도 그냥 책상으로만 보면 의식인데, 이 책상을 보는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보는 마음은 잊어버리고 책상만 쫓아가는 거예요. 이걸 의식의 분별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의식은 생멸이에요. 났다 죽었다, 났다 죽었다. 그런데 생기는 생각은 아는데, 사라지는 생각은 몰라요. 이 생각이 생기기만 하는 게 아니고 사라지거든요. 생각이 생길 땐 알아, 그런데 사라질 땐 몰라요. 그래서 맨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 의식인데, 이걸 세간(世間)이라고 그래요, 세간. 극락은 세간이 아니라 극락인데, 극락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서 왔다. 그게 극락세계에요. 글자를 보더라도, 글자도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걸 신령스럽게 알고, 영지, 항상 알아요. 아는 작용이 일어나도 그대로 지혜고, 안 일어나도 지혜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렇게 돼요. 그게 반야인데, 반야 지혜. (물컵을 가르키며)이것도 그릇인데, 이걸 잡으면 잡는 마음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보는 마음이 있어요. 이게 통째로 마음이에요. 그런데 그릇인 줄만 알지, 마음이 있는 걸 모르는 걸 생각이라고 해요. 그래서 삶과 죽음을 느끼는데, 삶과 죽음만 알고 삶과 죽음을 느끼는 영지상지, 신광신통 그게 극락세계인데요. 아는 마음은 극락세계고, 그 느끼는 대상을 쫓아가는 의식이 있다. 석가모니는 그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의식으로 분별하면 생로병사고요, 그 아는 마음에서 자유자재하면 극락세계에요. 아주 간단해요. 그래서 지혜로 살면 극락세계인데, 생각으로 살면 생로병사다.

     그러니까 온 가족이 공력을 많이 키우면서 극락세계로 보내는 걸 천도(薦度)라고 그러는데, 불교는 천도지 추모(追慕)가 아니에요. 유가에선 추모를 해요. 추모는 뭐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실 때 그대로 의식을 대접하고 하는 거예요. 그게 추모예요. 불교에선 천도에요. 천도란 뭐냐. 생로병사 의식의 세계에서 극락세계 지혜의 세계로 잘 가십시오. 이게 극락왕생이거든요. 그래서 천도는 극락왕생이고, 일반제사는 생전추모다. 생전의 모습을 다 추모해서 추모하는 기간에는 고금이 상봉이라, 살아계실 때 그 부모하고 살아있는 후손하고 상봉하는 것을 제사라고 해요, 고금상봉. 그래서 제사 지낼 때 고대로 평소처럼 하는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고금이 상봉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로병사 의식세계에서 극락세계 지혜세계로 잘 가십시오.’ 이게 문화의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지혜가 되면 지혜는 생각을 일으켜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안 일으켜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지혜가 항상 선정에 들어있고, 항상 광명을 일으킨다. 이걸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하는데요. 해인이란 바다 해자, 도장 인자인데, 바다가 일부러 하늘에 있는 모양들을 담으려고 해서 그림자가 비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바다에는 온갖 그림자가 다 비치는 거지, 백지에 도장 찍는 거와 같이 나타난다는 그 소리예요. 하얀 종이에 도장 찍으면 종이는 안 보이고 도장만 보이거든요. 바다에 하늘에 있는 모양들이 다 비치면 바닷물은 안 보이고 모양만 보인다. 모양 모양 하나하나 다 바닷물인 거예요. 이렇게 바다가 있다 보면 물속에 온갖 그림자가 다 있을 거 아니에요. 거기 바다 속에 별이 있다고 건지러 바다에 들어갔다면 고생만 하지 아무 소득이 없어요. 왜냐하면 물속에 비친 별들이 바닷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게 바다의 그림자와 같아서 오직 보고 듣는 마음뿐이고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 자체가 없다. 그걸 해인삼매라고 해요. 바다가 일부러 그림자를 드러내려고 애쓴 것도 아니고 안 드러내려고 피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저절로. 하늘에 있는 별이 바닷물 속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바닷물이 하늘로 기어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별이 솟아 올라간 것도 아니고, 떨어져 빠진 것도 아닌데, 그냥 환히 비친단 말이지요. 그런데 언뜻 보면 바다 속에 해와 달과 별들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사실은 물이지 거기엔 없다. 그냥 생각으로 보면 나무는 나무대로 따로 있고, 흙은 흙대로 따로 있는 것처럼 느꼈는데, 전부 지혜광명 속에 한갓 그림자처럼 비춰질 뿐이고 쫓아가면 색즉시공(色卽是空) 다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뭐냐. 오직 지혜광명에는 신비롭게 밝고 항상 밝고 신비롭게 빛나고 신비롭게 통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게 극락세계고 이게 깨달은 세계에요. 그래서 일체세간종종상(一切世間種種相), 세간의 가지가지 모든 모양이 해인삼매소현물(海印三昧所現物)이라, 해인삼매에 나타나는 물건이다. 이래서 불교가 어렵다고 하고, 뭔가 들어보면 알 듯도 한데 돌아서면 몰라요. 그건 사실이에요. 왜냐. 생각으로 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극락세계를 체험을 하려면 생각을 거둬, 섭심(攝心), 거둘 섭, 마음 심, 경계를 인지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순간이라도 생각에서 지혜로 가는 순간체험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 극락세계를 체험하는 것, 생각으로는 안 되고 생각을 가둬서 지혜로 일순간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때 극락세계를 살아서 체험하는 것, 그게 극락체험훈련이죠. 돼요. 근데 왜 안 되냐. 밖의 것을 분별해서 안 되고 조금 하다 보면 잠이 들어서 안 돼요. 이 두 가진 안 돼요. 잠도 들지 말고 밖의 물건도 쫓아가지 말고, . 이것을 보관삼매(普觀三昧)라고 해요. 넓게 보는 삼매에 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에 극락광명이 나타난 걸 체험할 수 있다.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무상무공하고 무불공하며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거무래하고 무주하니

수수즉성무불성隨須卽成無不成 구하는 대로 이루어서

법계장엄보변만法界莊嚴普遍滿이로다 법계 장엄 끝이 없다.

나무아미타불

 

     이 생각에서 지혜광명을 딱 들어가 보면 지혜광명으로 보이는 세계가 일체형상이 형상이 아니에요. 무상. 형상은 생각이 만들어 낸 사량분별이에요, 형상. 그러면 형상 없는 게 따로 있느냐. 따로 있는 걸 공이라고 하는데 따로 있는 게 없어요, 무상무공이에요. 또 공한 게 없느냐. 있느냐. 공한 것도 없어요. 이게 첫 번째 맞이하는 지혜의 경계에요.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여기에 생각은 끼어들지 못해요. 생각은 살아있는 공이고, 또 공은 어떻다, 분별인데 무상무공무불공,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닌 것도 없다. 이게 지혜가 맞이하는 세계에요. 이게 극락의 텃밭인 거예요. 상이 상대로 딱 정해져 있으면 극락이 나올 수가 없어요. 상이 상이 아닐 때 극락일 수 있는 거예요.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극락세계는 어디로 가는 게 아니에요, 어디서 오는 게 아니에요, 머무는 게 아니에요. 무상무공무불공 무거무래역무주.

     요즘 사람들 한문 안 배우는데, 법문을 한문으로 하냐고 원성이 자자해요. 근데 왜 그러냐. 이렇게 가닥을 치지 않고 우리말로만 하면 싱거워서 이게 했는지 안 했는지, 사람은 있는데 이름 없는 것과 같아서 양이 안 차서 그래요. 무거무래역무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무거무래역무주를 말하지 않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싱거운 일이에요. 그것도 한자가 우리 글자가 돼버렸거든요, 이미. 외국 글자가 아니에요. 우리 글자가 돼버린 거예요. 그게 지혜의 세계에요. 근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것은 원력과 신통이 있는 거예요. 그런 지혜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에 뭔 생각이 또 나오냐 하면, , 이런 극락세계가 이렇게 뚜렷한데 이걸 모르고 낮이나 밤이나 고뇌에 시달리는 중생은 얼마나 괴로울까. 이런 자부심이 나와요. 이런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해야겠다는 원력심이 나와요. 이걸 비원이라고 해요. 정각비원(正覺悲願). 바르게 깨달으면 자비와 원력이 저절로 나와요. 해인삼매처럼. 정신이 건강한 것은 좋은 일 하려고 마음이 생기는 게 건강한 거예요. 남을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것은 건강한 게 아니에요. 비원이 있을 때 건강한 정신인 거예요. 비원. 자비와 원력. 원력은 이루려고 하는 원하는 힘이잖아요. 자비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자기처럼 자기화시키는 거잖아요. 부처님의 비원. 어떻게 되느냐. 법계장엄보변만法界莊嚴普遍滿이라, 법계를 공덕으로 장엄이란 온갖 걸 꾸미는 게 장엄인데, 중생들이 다 극락세계로 오를 때 공덕으로 온 법계를 장엄하게 되는데, 그래서 극락에는 없는 게 없는 거예요. 보변만이라, 편자를 불교한자로는 변으로 읽어요. 보편이라고 안하고 보변이라고 해요. 참 희안하지. 불교한자의 음이 일반한자와 음이 틀린 게 많아요. 도장(道場), 장자가 장소 장자인데, 불교한자에서는 도량으로 읽어요. 태권도에 가면 도장이라고 읽는데, 절에서는 도량이에요. 이렇게 틀리는 발음이 상당히 많아요. 그거 하나 모르면 저 사람 불교 모른다고 딱지 붙이기 쉬워요. 아무것도 아닌데. 보변만이라, 보자는 끝도 없이, 변자는 한계도 없이, 만자는 가득하다, 충만하다. 보변충만을 보변만이라고 해요. 극락세계는 그렇대요. 온갖 공덕장엄이 보변충만해요. 그게 전부 불국토다. 그래서 그 지혜광명은 끝이 없어서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처럼 부모가 없어요. 그거 묻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고요. 석가모니는 아버지는 정반왕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인데, 아미타불의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누구냐.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상하다. 석가모니는 능인(能人) 능할 능자, 사람인자. 이렇게 무상정각을 이루는 일을 성취했다고 해서 성취한 사람을 능인이라고 해요. 가능할 수 있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능인. 그런데 아미타불은 능인이 아니에요. 그럼 뭐냐. 석가모니가 깨달은 지혜광명의 무량수를 아미타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면 돌아간다는 이야긴데, 아미타불의 세계로 돌아간다. 생로병사의 의식세계에서 지혜광명의 극락세계로 간다. 입으로 말을 하고 생각으로 원을 세우는 순간에 이미 갔는데, 구칭의념이라고, 입으로 칭송을 하고 생각으로 염원을 하는 순간에 이미 갔는데, 이 생각이 의심하고 부정하니까 갔어도 간 걸 전혀 못 느끼는 거예요. 나무아미타불 한번 입으로 칭송을 하고 한번 마음 생각하면 이미 간 거예요.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상무공무불공(無相無空無不空) 이 세계에서 벌써 갔는데 못 느끼니까 극락세계 정말 있을까요? 어떡하면 가는데요?” 전부 생각으로 사량분별해서 극락을 자꾸 막는 거예요, 막아. 어떡해요. 그런 생각 안 날 때까지 닦을 수 밖에. 방법이 없어요. 일념공덕으로 왕생극락이라. 한번 생각하는 공덕으로 극락왕생하는 건데, 생각이 인정을 하지 못하고, 생각이 만족을 하지 못하니까 해도 해도 불안한 거예요. 극락이란 그런 거예요.

 

여래보현신如來普現身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어

변입어세간遍入於世間 빠짐없이 세간에 드러서

수중생락욕隨衆生樂欲 중생의 욕락을 따라

현시신통력顯示神通力이로다 신통력을 나타내도다.

나무아미타불

(화엄경, 여래 현상품)

 

     일념왕생一念往生이라, 나무아미타불. 이미 갔어요. 그런데 우리 생각은 못 갔어. 세계는 갔는데. 그래서 부처님이 모든 것은 마음뿐이다라는 것을 알고 이 물질이라는 것은 무상무공무불공 무거무래역무주라, 그러나 이것을 일체중생들은 모르니까 자비원력으로 중생을 인도하겠다. 뭘로 인도하냐, 신통으로 인도하는데, 자비원력 신통자재, 이게 불교용어인데, 신통자재란 뭐냐하면, 생각으로 보면 육법세계와 불법세계, 과거,미래, 현재가 있는데, 지혜로 보면 신통이라는 것은 이 순간에 현재도 되고 미래도 되고 과거도 되는 거예요. 생각은 과거는 과거 따로, 현재는 현재 따로, 미래는 미래 따로. 지혜로 보면 이것 저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무거무래역무주. 그래서 신통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저곳에 가요. 그걸 신통이라고 해요. 요새 문명의 발달로 교통수단을 계속 고속화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신통으로 보면 답답해요. 여기서 안 떠나고 저기 가는 것을 배워야 돼요. , 이것 참. 사업은 안 될텐데. 불이차방하고 즉도피방이라. 차방을 떠나지 않고 바로 피방에 도달하는 것을 신통이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가만히 앉아계시지만, 신통으로 여래보현신(如來普現身)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어 변입어세간(遍入於世間)이라 세간에 두룻이 다 들어간다 이거예요. 화엄경 여래출현품 법문인데, 그래서 수중생락욕(隨衆生樂欲)하야, 중생이 즐거워하고 욕심내는 것을 따라서 현시신통력(顯示神通力)이라, 나타낼 현, 보일 시, 신통력을 나타내 보인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원력이고, 신통자재거든요. 그리 가시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가냐. 신통력으로 가시는데 오직 생각을 믿는 사람들이 못 믿을 뿐이에요, 인정 못 할 뿐인 거예요. 우리가 극락 속에 안에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도 극락을 알지 못하고 믿지를 못해요. 여기 안 떠나고 가고자 하는데 바로 가요. 중생이 볼 때는 석가모니가 뭐 하늘에서 내려왔다,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났다, 구시라성에서 돌아가셨다, 이건 생각으로 보는 건데, 신통은 어떻게 보냐.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 하늘을 떠나기 전에 여기에 도착한 거예요. 그리고 태어나기 전에 벌써 열반에 든 거고. 열반에 든 상태로 태어난 거고. 이것이 신통이에요. 지난 번보다 법문시간이 길어지는 거 같은데, 생각으로 보면 시간이 길고 짧은데, 지혜로 보면 시간의 장단이 없어요. 길고 짧은 게 없어. 지금 억지로 하는 거여. 지혜시간으로 억지로. 무량겁이 일찰나, 그게 지혜의 시간이에요. 일찰나가 무량겁.

      한마디만 더하고 오늘 법문을 마치면, 과거, 현재만 해도 그래요. 법에서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오대를 중심으로 삼세를 나누는데, 오대삼세, 자기가 있고, 자기 위에 부모가 있고, 부모 위에 조부모가 있고, 또 자기가 있고, 자기 밑에 자녀가 있고, 자녀 밑에 손자녀가 있는데, 이게 오대거든요. 근데 나로 보면 나는 현재고, 부모는 과거고, 조부모는 과거의 과거가 되는 거예요. 또 나는 현재고, 자녀는 미래고, 손자녀는 미래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부모가 볼 때는 내가 미래가 되는 거예요. 내가 볼 때는 부모가 과거가 되는데. 자녀가 볼 때는 내가 과거가 되는 거예요. 손자녀가 볼 때는 나는 과거의 과거가 돼버려서,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는 정해진 게 아니에요. 무거무래역무주여. 그래서 극락자재하게 되는 거죠.

     공력을 이렇게 잘 쓰시니 영가께서 극락왕생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잘 믿고 하시면 그것이 무량공덕이 되는 거죠.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