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11월 28일 5재 법문 2020-11-28

금일 도량 세연지고

오칠지신 천혼간도재자

지심제청 지심제수 至心諦廳 至心諦受

 

일체제법성一切諸法性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이여

기재대도사奇哉大導師 자각능각타自覺能覺他로다

나무아미타불

(화엄경, 수미정상게품)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해탈(解脫), 열반(涅槃), 극락(極樂), 이걸 가르치거든요. 해탈은 삶과 죽음이 속박에서 다 벗어났다, 이런 뜻이고. 열반은 삶과 죽음이 없다, 생멸이 아니라 적멸이다, 이런 말이에요. 극락은 고통은 없다, 즐거움뿐이다. 이게 극락인데, 그럼 해탈, 열반, 극락 이런 것이 어떡해서 생겼나. 보리(菩提), 깨달음, 깨달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보리의 해탈이고, 보리의 열반이고, 보리의 극락.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는데, 법성(法性), 성품 성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기재라(奇哉), 신기하다, 기재대도사께서, 부처님께서 그걸 자각하시고, 스스로 깨달으시어 능각타(能覺他)하셨다, 능히, 능자는 한다라는 뜻인데, 다른 이를 깨우치셨다. 그래서 법상(法相)은 유생유멸이고, 또 법성(法性)은 무생무멸이라.

 

삼세제불三世諸佛 성최정각成最正覺

불신충만佛身充滿 십방법계十方法界

각지보조覺智普照 상방광명常放光明

장엄찰해莊嚴刹海 중중무진重重無盡

 

     그 생기고 사라짐이 없는 법성을 깨달으신 것을 보리라고 합니다. 그 보리가 최상정각(最上正覺)이라고 해서, 가장 높은 바른 깨달음이라고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합니다. 최상정각이란 소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입니다. 그 보리는 그냥 해탈이 아니라 해탈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그걸 정각대지(正覺大智)라고 하는데, 바르게 깨달은 큰 지혜. 열반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정각대지. 또 극락을 아는 지혜가 있어요. 정각대지. 그래서 해탈도 알고, 열반도 알고, 극락도 아는 정각대지인 거예요.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淸淨法身

각지보조覺智普照 원만보신圓滿報身

원력화현願力化現 백억화현百億化身

 

     그래서 부처님이 표현을 할 때, 양쪽 손을 이렇게 맞잡고 계신데요, 이게 뭐냐. 양쪽 손을 맞잡는 의미는 여여법성(如如法性), 여여해요. 이 우주가 생기기 전이나, 이 우주가 생긴 중간이나 우주가 사라진 다음에나 여여해요. 그냥 같아. 그걸 법성이라고 한다 했거든요. 그러면 정각대지는 여여법성을 알고, 세간 생멸도 알고 양쪽을 다 살핀다고, 깨달은 지혜를 나타내는데요. 두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의미를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다. 청정이란 그것뿐이다, 섞인 게 없다란 거거든요.

 

      손을 이렇게 펴는 것을 각지보조(覺智普照), 각지가 보조라. 정각지혜가, 깨달은 지혜가 널리 비추어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 그것은 깨달은 보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고 해요. 깨달은 보답으로. 깨닫기 전에는 그걸 몰라요. 원만이란 모자람이 없는, 보답으로 얻은 몸이다. 이게 정각지혜거든요. 양쪽으로 이렇게 보신불인데, 각지보조覺智普照 원만보신불圓滿報身佛. 여여법성如如法性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그 다음에, 이렇게 손을 올린 모습이 있어요. 이건 두려움이 없는 걸 보이는 모습이라고 <시무외, 무외(無畏)를 보인다.>고 하는데, 그건 뭐냐 하면, 고통이 없다, 무고(無苦), 깨달음의 세계에는 고통이 없다, 나에겐 아무 고통이 아니다.

 

     그리고 한 손을 올리는 게 있어요. 유락(有樂)이라, 즐거움이 가득하다. 무고유락, 고통은 없고, 즐거움은 가득하다. 이걸 보이는 거거든요. 고통이 없다, 무고, 두려움이 없다. 이렇게 위로 손을 올리는 것은, 즐거움이 가득하다. 여원(與願), 원하는 대로 다 준다. 이게 뭐로 이루어지냐 하면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깨달음을 통해서 지혜가 이루어지고, 그 지혜로 해탈이 이루어지고, 열반이 이루어지고, 극락이 이루어진다.

 

     처음부터 이런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손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이 땅에 닿을 정도로 누르는 모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건 깨닫기 전 모습인데, 깨닫기 전에는 형상에 자꾸 쫓아가서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의식, 관습이 있는데, 형상을 추종해서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의식 관습을 마군(魔軍)이라고 해요. , 형상 추종. 욕망 충족. 이거는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형상은 사라지고 욕망은 채우면 또 채워야 하기 때문에 안 채워져요. 그래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꿈과 형상은 아무리 쫓아가 봐도 사라져버려요, 무상해서. 그러니까 안 돼요. 뭔가 채우면 채우는 동시에 딴 욕망이 또 생겨서 욕망은 영원히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태어나면서 습관적으로 형상 추종, 욕망 충족을 위해 노력을 하게 돼요. 그걸로 온 고통이 생기는데, 그걸 항복시킨다. 그게 항마인(降魔印)이에요. 마라는 건 영원하지 않은 걸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쫓아가는 건데, 그걸 눌러버려요. 무릎 위에다 손을 딱 놓고 누르는 거예요. 그리고 한 손은 올려요. 그것도 무릎 위에 얹은 상태로 올려요. 그거는 성취소원,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그 표시거든요. 군마항복, 마군은 항복시키고, 성취소원, 원하는 바를 성취시킨다. 그래 가지고 깨달음을 이루면 무고, 아무 고통이 없다, 유락, 즐거움은 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리 하나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거지요, 보리 하나로, 깨달음.

 

     왜 그러냐. 이 세상에는 영전세계, 영후세계가 있는데, 한 생각 일으킨 뒤의 세계가 세간거리에요. 생멸, 삼세, 나고 죽고,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생멸, 삼세는 한 생각 일어난 뒤의 일이라고 해서 영후세계라고 해요. 또 무생무멸 여여법성세계는 한 생각 일으키기 전의 세계라고 해서 영전세계라고 해요. 생각 영자, 앞 전자, 영전세계. 영전세계가 극락세계예요. 영후세계가 생멸세계고. 그런데, 생각들이 많은데, 이게 다 여여법성인데 한 생각을 딱 일으켜서 좋다, 나쁘다라는 분별을 일으키게 돼요. 거기서부터 세간법이 펼쳐지게 되는 거예요. 영후세계. 그래서 이 우주만상에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애증, 싫어하고 좋아하는 애증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물들 염자, 들어갈 입자, 염입(染入)이라고 하는데요. 또 보면 애증을 안 일으키면 극락세계에요. 근데 좋고 나쁘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생멸세간이 되는 거예요. 한 생각이 이 허망한 현상세계에 애증심으로 물들어서 거기에 빠지게 되면, 거기에 몰입하면 거기서 고통이 오는 거예요. 염입이라고, 염입. 근데 한 생각을 딱 거두어서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면 그게 여여법성인데, 생각에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는 거를 증명서라는 증자가 있는데요, 증득할 증자, 들어갈 입자, 증입(證入)이라고 해요. 세간법으로 물드는 걸 염입이라고 하고, 불생불멸 법성법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걸 증입이라고 하는데, 그 염전일법(念前一法), 한 생각 이전의 한 법, 그게 분명해요. 찰라, 찰라왕생. 극락세계는 뭐 수속 밟고 교통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이 불생불멸 법성세계로 증득해 들어가면 그게 극락세계에요. 생로병사 희노애락이 왜 생기느냐. 한 생각이 허망한 형상세계에 애증심을 일으켜서 물들면 그게 생로병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염입이냐 증입이냐. 마음이 형상에 물들면 생멸이고 마음이 한 생각 이전으로 증득해 들어가면 극락이다. 그 세계로 모셔 드리는 게 이 재 지내는 거예요. 아주 간단해요. 그래서 항상 염전일도(念前一道), 한 생각 이전의 한 도, 이걸 보려고 하면, 막대기 주장자가 나오는데, 책도 보이고, 염전일도, 한 생각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이전에 한 도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법성이다 이거죠, 염전일도로. 그걸 성전일구(聲前一句)라고 해요. 한 소리 내기 전 한 구절. 소리가 나오면 염의 세계일 수 밖에 없어요. 좋다 나쁘다, 있다 없다 이것이 전부 한 생각 이후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에 한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은 증득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증입이에요, 증입. 떡 하니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간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세간법.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면 법성법. 법의 본성이다. 근데 법성도 훤히 알고 세간도 훤히 알아서, 원만보신은 양쪽으로 손을 펼치고 계시는데요. 세간법도 알고 법성법도 알아가지고. 아주 간단해요. 순간 극락 체험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순간 극락 체험. 한 생각을 딱 하면서 단 1초만이라도 한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가 극락세계거든요. 그런데 한 생각 이후로 펼쳐져서 그냥 자재하면 괜찮은데, 좋아하지도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오면 받아들이고 가면 내버려둬요. 그럼 해탈이에요. 가면 내버려 둬요. 물이 흐르듯이.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자재라는 게 그런 거예요. 자재. 형상세계에 애증과 속박을 받질 않아요. 그럼 그게 해탈이거든요. 마음이 복잡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나.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야만 마음이 환해지고 편안해져요. 그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딴 생각을 한다든지 하면 생각만 바뀌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편안하고 환한 건 없어요. 혼자 좀 따분하고 지루하고 답답하다 이게 마군인데, 따분하게 느끼는 생각, 답답하게 느끼는 생각,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별로야, 별로.” “뻥이야,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일을 또 벌리고 그 일 벌림의 결과로 고통이 오는 거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냐. 지루하고 따분하고 답답하고. 마음을 다 걷어들여서, 생각이라는 게 뭔가 돌아보면 없어요, 생각이. 구름과 같아서, 구름이 실체가 없고, 자세히 보면 허공뿐이에요. 그래서 구름에서 허공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 생각이 한 생각 이전으로 들어가는 건데, 아무것도 없으면서 초롱초롱하고, 이걸 적지(寂知)라고 하는데, 고요 적자, 알 지자, 초롱초롱하게 알면서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게 여여법성이거든요. 초롱초롱 아는 게 모든 걸 살피는, 생멸을 아는 그런 지혜인데, 이걸 처지비처지(處智非處智), 곳 처자, 처를 아는 지혜다라고 해서 곳 처자, 처지라고 해요. 법성을 아는 지혜를 비처지, 처와 아닌 걸 아는 지혜라고 해서 아닐 비자, 곳 처자 비처지라고 해요. 이 비처지는 적멸, 실상, 여여 그것뿐이에요. 여기엔 시간도 범접할 수가 없고, 물건도 범접할 수가 없고, 생각도 범접할 수가 없어서, 시간도 없고, 물건도 없고, 생각도 없는 성전일구, 한 말소리 이전의 한 말, 염전일도,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의 한 도, 그걸 살피는 게 비처지거든요. 처가 처가 아님을 살피는 게 비처지. 또 염세계 세간법. 일체 세간법을 다 살피는 게 처지라고 했고요.

 

     그러면 부처님이 깨달은 방법은 뭐냐. 능엄경 제 6권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는데,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하면 적조함허공寂照含虛空이니라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하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로다

나무아미타불

(능엄경권6)

 

     반야심경에 보면 보리살타도, 보리살타는 보살인데, 의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구경열반하고, 가장 깊은 열반에 들었고, 삼세제불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깨달은 분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반야바라밀이에요. 보리살타도 보살이 되는 이유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살이 되고,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삼세제불이 된다 이거거든요. 그럼 반야바라밀다는 뭐냐.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의 공덕을 이야기 하는 거고, 피안이라는 거, 한 생각 저쪽 세계, 그쪽으로 간다는 소리에요. 반야바라밀다가, 한 생각 저쪽세계로 간다. 세간법에서 법성법으로 간다 이 말이죠. 그래서 도피안, 피안에 도달한다.

 

     그럼 뭘로 도달하느냐. 반야로 도달한다. 반야는 뭐냐. 관조(觀照)예요. 볼 관자, 볼 조자. 조명이라는 조자가 있는데, 보는 거예요. 뭘 보느냐. 물건도 보고, 내 몸도 보고, 내 생각도 보는데, 물질과 자기 몸과 생각을 그냥 보는 거예요. 그리고 생각을 일으키질 않아요. 그걸 관조라 하고, 보기만 하지 생각을 안 일으킨다. 이게 반야에요. 전부 이 관조 반야에 의해서 보살도 되고 삼세제불도 되요. 싯다르타는 마야부인하고 정반왕이 부모가 되지만, 석가모니는 반야가 불모(佛母)예요. 반야가 부처님의 부모예요. 부처님은 반야에 의해서 태어나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의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요,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삼세제불은 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샴막샴보리를 얻었다. 관조, 생각은 멈추고 보기만 한다. 생각을 멈출 필요도 없이 그냥 보면 돼요. 멈추려고 하는 것도 생각이에요. 생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을 멈추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보면 생각을 멈춰지게 돼요. 저게 뭔가, 동서남북 생각을 일으키면 못 보게 돼요. 여행하는 처소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 좋다그러면 못 보는 거예요. 그냥 봐야 보이는 거예요. ‘! 좋네,’ 그러면 어제와 똑같네.’ 그러면 하나도 못 보고 가는 거예요. 그냥 딱 보기만 해야 보이지, ‘아름답네, 최고네,’ 이건 전부 생각으로 그 광경을 뒤덮어서 안 보여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보기만 하면 생각은 이미 그쳤거든, 보는 순간에. 그러면 그 보여지는 물질이 염전일법이에요. 생각 일으키기 전에 한 법이에요. 내 몸도 염전일법이고, 생각 일으키기 전에 한 법이요, 내 생각도 염전일법이고, 그게 극락세계예요. 염전일법으로 돌아간다. 염전일법으로 들어가는 건을 증입이라고 한다. 증득해 들어간다. 보이고 몸 느끼고, 생각으로 빠지고 하는 것은 염입이다, 물들어 들어간다. 물들어 들어가서 생로병사가 있는 거고, 증득해 들어가는 것은 극락세계다라는 거죠. 생각을 멈추고 보고 또 보고 하면, 생각에 찌들어 살던 물든 생각이 맑아지고 맑아지고 맑아져서, 맑아진 게 극에 달하여서, 이게 정극(淨極)이라고 해요. 깨끗할 정자에 극치라는 극자. 정극을 하면 어떻게 되냐. 광통달(光通達)이라. 빛이, 지혜의 빛이, 통달이란 밝을 통, 밝을 달 그런 뜻인데, 확 밝다는 거예요. 그 순간을 대웅이라고 해요. 크게 웅장하다. 생각에 묻혀있던 지혜가 생각이 맑아짐으로 인해서 확 드러나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크게 웅장하다, 대웅. 대광명이라고도 하는데, 절에 가면 대웅전, 대광명전, 극락전 그런 게 있잖아요. 들어오는 문을 해탈문. 다 똑같은 얘기에요. 깨달음의 세계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생각이 고요하고 고요해서 마지막에 지혜에 들어가서 확 밝아질 때, 웅장하다, 대웅이다. 그럼 어떻게 되냐. 적조가 함허공이라(寂照含虛空), 고요히 비추는 지혜가 온 허공을 다 삼켜버려요. 삼킬 함자가 있거든요. 허공을 다 삼켜요. 끝이 없다.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그런 상태로 죽고 사는 세간법을 다시 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마치 꿈속의 일과 같더라. 꿈이란 건 깨고 나면 없는 거예요. 꿈속에서는 아주 분명 분명한데, 깨고 나면 하나도 없어요. 어떤 사람은 꿈 해몽을 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다 헛거예요. 꿈은 이미 없어졌는데, 없어진 걸 해석해서 뭐 할 거예요. 꿈이라는 것은 없어진 다음에 꿈이에요. 한참 꿈이 있을 때, 꿈속에서는 꿈인 줄 모릅니다. 다 없어진 거 해석해서 뭐 할 거냐. 그러니까 천 가지 만 가지 많은 길이 있지만, 원칙은 딱 하나, 생각을 멈춘다. 관조, 본다. 맑히는 방법은 뭐냐. 그냥 본다. 불모인데, 부처님의 어머닌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고 아버지도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를 방편이라고 해요. 공덕도 짓고, 여러 가지 몸에 좋은 일도 짓고, 온갖 좋아지는 인연을 만드는 걸 방편이라고 하는데, 극락세계는 온갖 공덕의 아버지와 조용한 생각의 어머니가 만나서 극락세계로 가는 거거든요. 공덕과 정심으로, 깨끗한 마음과 공덕의 방편으로. 방편의 아버지가 없으면 생각이 맑아지질 않아요. 계속 자극을 받고 장애가 생겨서, 아이가 태어날 때는 아버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애를 낳는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낳거든요. 어머니는 깨끗한 마음이에요. 염심이 아니라 모든 마음에 정심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항상 부처님은 각지가 보조라(覺智普照), 깨달은 지혜가 널리 비추니까 뭐 선정에 들고 선정에 나오고 그런 게 없어요. 항상 그대로예요. 상정제불이라고, 항상 정해주는 부처님이라고, 범부들은 늘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입정을 해야 돼요. 정에 들어야 해요. 범부는 입정이 있지만, 제불은 입정이 없다. 상정이라. 항상 선정에 있는 거지요. 왜냐하면 물질을 보나, 생각이 떠오르나, 자기 몸이 생로병사를 느끼나, 거기 애증 분별이 없어요. 분별없는 게 선정이거든요. 선이나 정이나 같은 소리예요. 선이라는 말은 인도말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정이라고 해요. 선과 정은 틀린 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에요. 같은 소리가 뭐냐. 자기 생각이 떠올라도 절대 거기 물들어 들어가지 않아요. 물질을 봐도 물들어 들어가지 않고. 자기 몸을 봐도 물들어 들어가지 않고. 물들어 들어가면 어떻게 되냐. 몸이 건강할 수 있겠나, 잘 될 수 있겠나. 몸에 따르는 걱정인데, 그건 물들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걱정, 사람에 물들면 사람 걱정하고, 물질에 물들면 물질 걱정하고. 몸 걱정, 물질 걱정, 사람 걱정. 이게 범부의 번뇌망상이에요. 평소에 산란했던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정에 듭시다 죽비를 딱딱딱 치는 게, 입정에 안 들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멈추는 기회를 잡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 지혜가 항상 밝은 지혜면 항상 뭐.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안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일어나는데 자기가 자기 생각에 딸려가지를 않아요. 인간의 생각은 좋은 생각이 기억되는 게 아니고, 나쁜 생각만 기억이 돼요. 그래서 과거 생각하면 99%가 기분 나쁜 생각이에요. 근데 깨달은 분들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거나 나쁜 생각이 떠오르거나 거기에 물들어 들어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떠올랐던 생각이 금방 없어져요. 거기에 물들어가면 기분 나쁜 생각이 한참 가요. 그런데 인간의 기억은 나쁜 것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을 자꾸 떠올려서 좋을 수가 없다. 저 사람 속에 많은 기억이 들어있는데, 그 기억 속에는 나쁜 게 90%, 좋은 게 10% 밖에 안 돼요. 그건 쫓아가면 안 되는데, 계속 그걸 쫓아가면서 살아요. 그 생각은 공허하고 공허해요. 염정, 생각을 보려고 하는데, 지발, 지혜는 일어난다. 염정지발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해요. 생각을 보려고 하는데, 지혜가 일으킬 발자, 출발한다는 말도 돼요. 그게 대웅이고 대광명이에요. 그게 원만보신. 지혜의 몸이다. 순간 극락 체험 같은 거 아주 중요해요. 1초만이라도 생각을 멈추고 이러고 있으면, 1초 극락이 되는 거예요. 1분이 되면 입문경지에 들어가고, 5분 지나면 고수에 속해요. 생각이 얼마나 복잡하고 활동적인지. 그럼 10분을 생각을 멈춘 상태에서 관찰하게 되면 대단히 상근기에 속한 사람이거든요. 1시간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주 대단한 거예요. 근데 처음에는 30초 안 돼, 절대 안 돼요. 10초도 안 돼요. 10초 극락 체험을 한다, 30초 극락 체험, 1분 극락 체험, 와 이거 엄청난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관조 수행과 관조 수행이 잘 될 수 있도록 방편 공덕. 방편 공덕이 아버지가 되고 관조 정신이 어머니가 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데, 그것이 보리다, 이거죠. 그럼 어떻게 되냐.

 

일체제불찰一切諸佛刹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일체제불찰一切諸佛刹,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깨달은 분들이 보신 모든 세계는 전부 극락세계이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나라가, 일체제불찰,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이라. 없는 거 없이 원만하고 가득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이면, 생각생각이 보리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처처가 안락국이라(處處安樂國), 곳곳이 다 극락세계다. 이 법문은 경전에 있는 말씀이지만, 제사 지낼 때마다 맨날 하는 소리여,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보리심 반대는 뭐냐 하면 생멸심이에요. 생멸심이란 뭐냐 하면 물들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

 

     그런데 이렇게 공력을 많이 일으켜서 재를 지내시고, 축원을 하시고 이런 것이 다 공덕인데요. 이게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한 순간이라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한순간이라도 선정에 들어 생각을 멈추고 바라보면 그게 어머니인데 정신증유로, 깨끗한 마음을 증득해 들어가는 노력으로 극락왕생을 하는 거지요.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