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자비도랑참법기도회향] 2월 1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2020-02-01

 

 

 <祈禱(기도)智行(지행)>

 

       안녕하세요. 오늘은 <祈禱(기도)智行(지행)>, 지행은 지혜 지자, 행할 행자, 지혜를 실천한다는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祈禱 : 發願 精進 加被 成就

기도 : 발원 정진 가피 성취

        作法祈禱 日常祈禱

        작법기도 일상기도

            眞正力 意志力 持續力

            진정력 의지력 지속력

 

       기도는 발원(發願)에서부터 시작해요. 발원, 원을 일으킨다, 이런 뜻이거든요. 원하는 만큼 되요. 원하지 않으면 안 돼요. 발원이 없는 것은 종자가 없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땅이 좋아도 종자가 없으면 그 땅에서 이루어지는 게 없잖아요.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부모환경이라든지, 사회환경이라든지, 친지환경이라든지 환경이 좋아도 진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이 뭐냐. 본인 발원력이 없으면 안 돼요. 나만 좋다고 좋은 발원이 아니거든요. 발원이 그만큼 중요해요. 무엇을 어떻게 이뤄보고 싶다.

 

        그 다음에는 정진(精進)이에요. 정진을 계속해나가는 것. 정이라는 것은 정성을 들인다는 뜻이고, 정성을 들여서 중단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걸 정진이라고 해요. 정미소(精米所)라는 정자가 있거든요. 쌀이라는 건 벼 껍데기가 없다, 이런 뜻이거든요. 정진.

 

        그렇게 정진하다보면 가피(加被)라는 게 있는데, 가피는 평소의 내 능력보다 더 많이 이루어지는 걸 가피라고 해요. 더할 가자, 입을 피자, 더 입었다. 가피를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혼자는 못 가는데,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서는 가거든요. 그게 가피에요. 혼자 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이룬 거죠. 손에 이끌려서, 가피 때문에. 그런 걸 가피라고 그런다, 가피. 가피에는 현상가피(現相加被)가 있고 명훈가피(冥勳加被)가 있는데, 현상이란 말은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것, 나타날 현자, 모양 상자. 어떤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건데요. 갑자기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건 현상가피구요. 그리고 정진을 계속하다보면 내 몸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몸이라는 게 아주 신비해서 무슨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느끼는 경향이 있어요, 이게. 꿈꾸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꿈꾸는 것도 낮에 느낄 것을 밤에 느끼는 것이 꿈이에요. 그걸 영특한 꿈이라고 해요. 꿈을 꾸는 데 누구를 만났다, 어디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 몸이 느낀 거예요. 몸으로 느끼는 가피, 사람으로 느끼는 가피, 다른 모습으로 느끼는 가피, 사업으로 느끼는 가피, 이런 것을 현상가피라고 그런다. 불교에서는 상자를 사람인변에 안 쓰고 나무 목 변에 써요. 옛날 사람들이 주로 자연 속에 살았기 때문에 눈 뜨면 딱 보이는 게 나무여. 그래서 눈목 옆에 나무에요. 눈에 들어오는 걸 표현하는데, 나무목과 오른쪽에 눈목해서 서로 상이라고 하는데, 모양 상이라 불교에서는 주로 그 상자를 쓰거든요. 현상가피. 명훈가피라는 것은 어두울 명자, 연기 쏘일 훈자인데, 연기를 시나브로 쏘이다보면 언제 연기냄새가 옷에 뱄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연기냄새가 자욱하게 옷에 뱄어요. 그걸 명훈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거는 자기도 모르게 가피를 입은 거죠.

 

        이런 가피를 가지고 성취(成就)를 하는 거예요. 이뤄지는 거예요.

 

        발원, 정진, 가피, 성취 이런 걸 기도라고 그런다. 기도하는 방법은 작법기도(作法祈禱), 일상기도(日常祈禱). 작법은 작품 만들 듯이, 지을 작자, 법 법자인데, 어떤 법식을 갖춰서 법식을 만들어서 하는 걸 작법이라고 하거든요.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곡을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작법. 시간을 언제 한다, 형식을 어떻게 한다, 내용을 어떻게 한다, 정해놓고 하는 걸 작법기도라고 해요. 3일 하느냐, 100일 하느냐, 7일 하느냐. 모여서 하는 건 주로 작법기도죠. 그런데 일상기도가 있어요. 일상적으로, 날 일자 항상 상자, 날마다 항상 하는 발원 정진이 있는데요.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 맨날 하는 거예요, 자기 발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데 작법기도는 수시로 하는 거지만, 일상기도는 항상 하는 거예요. 무서운 거죠. 늘 일상적으로 발원하고 정진하니 그 힘이 불가사의한 거예요. 인생이라는 건 여건만 좋아진다고 성취되는 게 아니에요. 종자가 좋아야 하듯이 발원이 건강해야 되요. 좋은 종자에서 좋은 열매를 얻는 거예요. 이게 참 문젠 거예요. 내 발원종자가 얼마나 좋은가 점검을 해봐야 해요. 요즘 거창하게 가치관이니 가치체계니 얘기하던데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발원이에요. 진정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거 이외에는 안 이루어지니까요.

 

        그런데 기도에는 첫째 진정력(眞正力)이라는 게 있어요. 참 진자, 바를 정자. 진정이란 다른 게 섞이지 않은 무작(無作) 진실. 기도에는 항상 진정력이 있어요, 안에. 진정력이 나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인다. 움직이는 건 진정력이다. 진정력이 모든 걸 움직여요. 진정력이 없으면 안 움직여요. 우리나라 문화발전현상을 보면 50년 전과 지금과는 완전히 틀려요. 70년대 이전까지. 70년대면 50년 전인데, 그 때 문화하고 지금 2020년 문화하고는 50년 차이가 나는데요. 틀려요. 모든 게 다 틀려요. 2020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에요. 70년 이전의 대한민국은 후진국이에요. 후진국의 사고방식으로 선진국을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마찰이 생겨요. 2020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란 것을 명심해서 선진국에 동참해야 되요. 70년대 이전으로 살 수는 없는데, 그것도 자기도 모르게 고집하는 수가 있으면 어떻게 되냐. 충돌이 생겨요. 70년대까지 흔하게 듣던 얘기가 남아선호사상이었거든요. 남아선호사상. 그런데 요즘에 아들이 개뿔도 아니거든. 개한테 뿔이 없거든요. 그런데 뿔처럼 보이는 걸 가지고 있는데, 아들은 아예 보이는 것도 없다. 개뿔도 아니란 거예요. 차라리 개뿔보다 못하다. 근데 간혹 지금도 아들을 원하는 할머니가 계세요. 그게 70년대 이전 사고방식이에요.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요. 아들만 4형제를 난 할머니가 계신데, 아들들은 손자를 하나도 못 낳았대요. 며느리들만 보면 아들 낳기가 얼마나 쉬운데. 난 낳기만 하면 아들이었다. 너희들은 왜 아들 하나를 못 낳느냐. 그게 아들 낳고 딸 낳는 것은 여자 맘대로 된다는 게 70년대 이전 사고방식이었어요. 요즘은 의무지식이 보편화 돼서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하거든요. <여자 맘대로 아들딸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는 게 상식화 됐는데, 그 전에는 그걸 여자가 다 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봐. “난 낳기만 하면 아들이었는데, 너희들은 왜 아들 하나를 못 낳느냐.”고 맨날 아들손주, 아들 손주 이 말을 했대요. 서너 살 되었나,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손녀가 어느 날, 명절 때 다 모였는데, “할머니, 할머니도 여자면서 왜 남자만 좋아해?” 그 때 할머니가 완전히 입을 닫았대요. 며느리들은 서로 눈치 보면서 좋아 죽고, 아들들도 거봐, 거봐, 얘 말이 맞네. 아이만도 못 해.” 이러더래요, 반응을 보이기를. 그러면 그 할머니가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그 애 말이 진정성이 있었거든요. 아무 것도 숨기고 감추는 게 없고요, 할머니라고 체면 본 것도 없고요. 며느리들은 감히 어떻게 해요. 또 아들들도 못하죠, 어머니 상처받을까봐. 얘는 아닌 거예요, 그냥. 오직 자기가 느낀 거예요. ‘할머니도 여잔데, 왜 남자만 좋아할까. 이상하다.’ 그래서 이 진정력에는 모든 걸 다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움직이고, 아버지, 삼촌도 움직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움직이고. 그 말에 꼼짝을 못했어요. 할머니는 화가 나니까 소주만 하루 종일 마시더래요. 진정력이 이게 뭐든 걸 움직여요. 진정력 하나로.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지속력, 지속하는 것, 끊임없이 지속해 나가는 것이 굉장한 힘이에요.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한 순간 하고 안 하면 별 힘이 없어요. 하고 또 하고, 지속적으로 하는 것. 이게 전부 기도의 내용이거든요.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의지력이에요. 그만큼 모든 것이 의지에서 나와요.

조선시대에 서산스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제자에게 편지를 쓰셨어요, <의지가 중요하다.> 의지가 어떻게 중요하냐.

 

志之所在 氣亦隨之 氣之所在 天地鬼神亦隨之 故云

지지소재 기역수지 기지소재 천지귀신역수지 고운

天地不能奪 匹夫之心(西山集 3)

천지불능탈 필부지심(서산집 제3)

 

志之所在(지지소재), 뜻 지자, 갈 지자, 뜻이 있는 곳에 氣亦隨之(기역수지)하고, 기운 기자, 또 역자, 따를 수자, 갈 지자, 기운도 따른다. 뜻이 있으면 기운이 따른다는 거예요. 뜻이 없는데 기력이 따를 리가 있어요? 안 할려고 작정하는데 기운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지지소재에, 뜻이 있는 곳에 기역수지하고, 기운도 또한 따르고, 氣之所在(기지소재), 기가 있는 곳에, 기가 살았다, 기가 죽었다 이런 말 있잖아요, 기지소재에, 天地鬼神(천지귀신)亦隨之(역수지), 하늘 땅 귀신까지도 따른다는 거예요. 다 거기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요. 귀신은 보이지 않는 힘인데, 보이지 않는 힘도 다 따라오고 보이는 하늘과 땅도 다 따라온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天地不能奪 匹夫之心(천지불능탈 필부지심)이라. 하늘과 땅도, 불능탈이란 말은 뺏을 수 없다는 말이거든요. 뭘 뺏을 수 없냐. 필부지지(匹夫之志), 필부라는 건 말이나 소를 셀 때 한필 두필 그래요. 그러니까 아주 보통 사람, 사회의 기층, 바탕을 이룬 사람을 필부라고 해요. 짝 필자인데, 동물을 세는 단위거든요. 필마로 돌아드니, 말 한필로 돌아다녔다 이 말이거든요. 필부란 뭐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 평범하고 보통사람. 평범하고 보통사람의 뜻을 하늘과 땅도 뺏을 수가 없다. 천지불능탈 필부지지(天地不能奪 匹夫之志).

 

        그러니까 뜻을 세우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는 게 기도인데,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나한테 있기는 있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나오게끔 하는 것. 일상적으로 아니면 수시로 뜻이 건강하면 거기서 힘도 나오고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돕고. 거봐요, 담배 좋아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담배 사다줘요.(웃음) 왜 사다주겠어요. 지가 좋아하니까 사다준 거잖아요. 지가 좋아해야 다른 이가 돕지, 지는 사투리인가요, 지가 안 좋아하면 다른 사람이 안 도와요. 의지가 있는 곳에 기운이 따르고, 기운이 따르는 곳에 하늘과 땅도 막을 순 없다. 서산스님이 공부하는 제자에게 한 법문이에요. 마음공부를 뜻을 가지고 해야 된다. 뜻이 없이 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이에요. 자기 뜻을 세워서 기운을 내서 많은 도움을 받아가지고 성취하는 거, 그게 기도에요. 가피, 도움 받는 게 가피에요. 뜻을 세워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도움이 저절로 와요. 기도가 있는 곳에 가피가 있고, 가피가 있는 곳에 성취가 있다.

 

        기도가 깊이 올라가면 그 원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요. 이루는 것에 따라서 원이 달라져요. 마음이 점점 지혜로워지면 어떤 의식이 돌아 오냐 하면 이 세상에 헛된 것과 참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겨요.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참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먹는데, 밥은 우선 입에서 즐거워야 되거든요. 뭐니 뭐니 해도 맛있어야 돼요.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안 먹어요. 그런데 입에서 맛만 보고 그냥 넘기질 않으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음식을 잘 만들어서 입에 넣기만 해가지고는 몸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또 좋은 거예요. 음식 딱 먹었을 때 맛이 있니 없니 그거는 좀 품격이 낮은 거거든요. 어떤 음식도 안 넘기면 도움이 안 돼요. 넘겨야 돼요. 넘기면 그때부터는 음식이 몸이 되는 거거든요. 그건 음식이 아니라 몸이 돼 버려요, .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고. 기운이 되고. 몸이 된다고요. 몸 되는 게 그게 참된 거지, 그 모양을 어떻게 내나, 그릇을 뭘 사용하나, 맛을 어떻게 내나, 다 헛된 거예요, 그거는. 문제는 몸 되는 게 참된 거예요. 음식을 맛이 있네, 없네 하는 건 절대 헛된 거예요. 내가 잘 먹어서 소화 잘 시켜 자기 몸 되면 그만이에요. 인생사가 다 그래요. 그래서 매사에는 헛된 것과 참된 것이 있다. 상당히 중요한데요. 헛된 데 헤매다가 죽는 사람이 많아요. 헛된 데 헤매다가 죽을 때 내가 뭐 했는고.’ 헛된 데 헤매고 있었던 거예요. 생각이 깊어지고 지혜가 자꾸 드러나면 밖에서 얻은 건 다 밖으로 가는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요. 남편도 가고 애인도 가고 재산도 가고 몸도 가고. 화장 용어에, 묘지 용어에 肉脫(육탈)이란 용어가 있어요. 근육이란 육자에 벗을 탈자. 육탈이라는 것은 무덤을 열어보면 뼈만 남은 거예요. 근육은 없는 거예요, 육탈돼서. 그걸 파괴해서 뼈까지 태워서 흩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몸이 가는 곳이 그것이거든요. 몸도 마지막엔 헛된 거예요. 아는 사람도 헛된 거고. 재산도 내가 죽으면 헛된 거예요.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중요한 거예요. , 인생이란 게 남은 게 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기도가 깊어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못하게 되요. 하루하루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렇게 절박하게 움직이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요.

 

菩薩智行 보살지행

菩薩智行 보살지행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光明覺品9)

여시료지삼세사 초제방편성십력(광명각품제9)

諸佛智行 제불지행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불신보편십방중 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

광대원운항부진 왕양각해묘난궁

本分人智行(了事人 了事凡夫) 본분인지행(요사인 요사범부)

無物可遣 無物可求

무물가견 무물가구

睡來合眼 飯來開口

수래합안 반래개구

 

一二三四五 六六三十六

일이삼사오 육육삼십육

本身自本身 不雲霞色

본신자본신 불규운하색

 

        그런데 정신력이 상당히 올라가면 생각하게 되요. 그 정신력 중의 하나가 普觀力(보관력)인데요. 넓을 보자, 볼 관자. 넓게 보는 힘이 생겨요. 넓게 본다. 一念普觀無量劫(일념보관무량겁)이라, 한 생각에 무량한 세월을 넓게 다 전체로 본다. 보관은 통관인데, 통자나 보자는 <전부 다> 이런 거거든요. 통상적으로 할 때, 그건 통할 통자인데, 모두 다 항상 한다는 게 통상이거든요. 근데 보관력이라는 것은 한 생각을 딱 멈춰서 이렇게 어느 부분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보관인데 이게 보살삼매에요. 보살은 항상 보관삼매를 해요. 보관일체, 보관무량겁, 보관삼세,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관해요, 다 봐요. 보관일체, 일체만물을 통관해요. 보편적으로 다 봐. 죽 보면 무슨 이론이 나타나는가.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이게 보살지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어디 갔는가. 지금 사람이 천 년 후에 어디 있을 건가. 그 생각을 해보면요, 지금 뭐 오고 가고, 성공, 실패가 의미가 없어요. 헛된 거예요. , 이거 참. 허무하네.(웃음) 헛되다는 걸 미리 알면 어떻게 성취를 해요. 그건 성취한 다음의 얘기거든요. 무거무래역무주라, 인생이 어디로 가느냐. 가는 거 없다, 어디서 오느냐. 오는 거 없다. 어디에 머무느냐. 머무는 곳 없다. 이게 보관력이에요. 널리 관찰하는 힘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지혜가 나와요. 지혜. 이게 보살의 지행이거든요. 보살은 언제나 보관을 해요. 보관일체, 일체 것을 널리 보고, 보관삼세,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삼세를 널리 본다. 그게 보살의 지혜에요.

 

        제불지(諸佛智)가 있는데, 제불지는 각지(覺智)가 변만(遍滿)이라, 깨달은 지혜가 우주에 가득하다. 늘 지혜광명으로 관을 안 해요, 그냥 적조(寂照)해요. 보관은 보살이요, 적조는 제불이라. 마음에 白淨심식(백정, 흰 백자, 깨끗할 정자)만 있어서, 깨끗한 정신밖에 없어요. 그걸 백정식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뭐가 섞이지 않았고, 보관만 하더라도 뭔가 가린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관을 딱 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린 게 전혀 없이 백정의식이 되버리면 언제나 백정청정 진실광명, 그게 고요할 적자 인데, 그냥 보는 거예요. 비칠 조자(), 그걸 적조라고 해요. 진실광명은 항상 그냥 보는 거예요. 일부러 선정에 드는 게 아니에요. 선정에 드는 것은 색계, 무색계, 망념이 있을 때 선정에 드는데, 망념이 다 백정청정이 되어 진실광명이 되면 그냥 적조가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이라, 고요히 비취는 것이 항상 대광명을 비춘다. 뭘 보든지 그냥 깨끗한 거울에 나타나면 그냥 나타나지, 가린다든지 더 보려고 한다든지 그런 거 없어요. 떠나는 건 떠나고 오면 또 나타나고. 그럼 떠나는 대로 나타나는 대로 아무 구애가 없는 거를 제불지라고 그래요. 적조광명이라고. 보살은 보관지혜, 제불은 적조광명. 늘 마음이 백정진실이에요. 그래서 거울 비추는 것처럼 그냥 비춰요. 그게 지혜거든요. 기도가 깊어지면 그런 데까지 가요. 무슨 소린지.(웃음) 정말이에요? 그런 얘기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가당치도 않아요.(웃음) 그게 다 필요하거든요. 이런 말을 들으면 종자가 돼서 나중에 싹이 날 수가 있거든요. 어린 아이가 대단한 전문선수들이 하는 걸 보면, 전혀 할 수 없지만, 그걸 본 아이가 나중에 그걸 이룰 수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안 보면 그 씨앗이 안 심어져서 안 돼요. 내 이런 얘길 들으면 어린 아이가 1등 선수들 경기하는 걸 보는 것처럼 마음에 심어져 이걸 이룰 수가 있어요. 제불은 적조광명이요, 조용히 비추는 광명으로 자재해요. 그게 지행이거든요.

 

        근데 부처가 아닌데 그 부처의 지혜실상만을 이루는 분들이 있는 데 그분들을 本分人(본분인)이라고 해요. 이는 중생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고 제불도 아니고, 본래 나, 본래 나의 분산, 본래 나의 분자, 나눌 분자를 쓰는데, 분수라, 자기 능력, 자기 지위, 자기역할에 따라서 한다. 이걸 분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분도 있고, 어머니분도 있고 형님분도 있고, 그게 전혀 아니고 본분, 자기 본래 분. 본분이란 말을 불교에서 쓰는데, 경에서도 본분이라고 쓰고요, 선어록에서 본분이라고 많이 씁니다. 본래 나. 본래 나, 본분으로 볼 때는 당신이 속인이냐, 나 속인 아니다. 당신이 도인이냐? 도인도 아니다. 당신이 여자냐? 난 여자도 아니다. 남자냐? 남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나다. 내가 왜 속인이냐, 내가 왜 도인이냐 나는 나야, 이게 본분이라고 그래요. 이거는 범부인데, 뭐라고 그러냐하면, 요사범부(了事凡夫)라고 해요. 수료할 료에 일 사자가 있는데, 모든지 헛된 세상일을 다 종료한 사람이에요. 세상일을 다 종료한 사람이라고 해서 요사인(了事人)이라고 해요. 근데 보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그냥 범부예요, 요사범부라고. 부처님처럼 32상을 갖추고 대인상(大人相)을 갖추고, 신통력을 갖추고, 자비력을 갖추고 그거 아니에요. 그냥 자기 본분. 그 불보살의 일이나 일체중생의 일을 전부다 마쳐버렸어요. 그거와는 상관이 없어요. 지행중에 본분지행이 있어요. 맘만 먹으면 다하는 거 아녜요. 부처 아니에요. 범부 아니에요. 그냥 나에요, . 그 얼마나 좋아.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져요. 성불하라고 하면 좋긴 좋은데 힘들게 보여. 어떡해 그 짓을 해요. 할 짓도 많은데. ‘너는 너대로 살아라. 본분대로. 하던 일, 쓸 데 없는 일 다 종료해버려라. 요사범부, 본분. 본분인은 아무 것도 버리는 게 없어요. 無物可遣(무물가견)이라, 물이란 어떤 것도 가견, 옳을 가자, 버릴 견자, 가견은 버린다는 말이거든요. 어떤 것도 버리는 게 없다. 버리는 게 자기 욕심이에요. 자꾸 버리려고 하잖아요, 자기 욕심별로, 그냥 놔두면 될 텐데. 전쟁하고 사람 살해하고 하잖아요. 사람을 왜 살해해요? 백년 기다리면 다 죽어요. 놔두면 죽는데 왜 죽여요.(웃음) , 기가 막혀서. 놔두면 다 죽어요, 왜 죽여. 그러니까 무물가견이라,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다. 無物可求(무물가구), 옳을 가자, 구할 구자, 구할 것이 없다. 버릴 것도 없고 구할 것도 없는 그 경지가 요사범부의 경지에요. 구하는 것도 자기 번뇌고, 버리는 것도 자기 번뇌망상이다. 그러면 어떡하냐. 睡來合眼(수래합안)이라, 잠잘 수자, 올 래자인데, 한자에서 올 래자는 주로 어조사로 많이 쓰여요, 본래, 원래 이런 거 있잖아요. 종래로 그럴 때. 수래하면 잠잔다는 얘기에요, 어디서 오는 게 아니라 잠을 잔다. 수래합안, 합할 합자, 눈 안자. 눈을 감아요. 이게 요사범부가 하는 일이에요. 잠잘 때는 눈을 감고. 飯來開口(반래개구), 밥 반자는 밥이라는 명사도 되지만, 먹는다는 동사도 되요. 그래서 반점이라고 할 때 밥집이라고도 하지만, 먹는 집이란 뜻도 되요. 먹을 때는 개구, 입을 벌려라. 열 개자, 입 구자. 그거예요.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고, 어떤 것도 구할 것이 없고, 잠 잘 때는 눈 감고, 먹을 때는 입 벌리고. 이것이 본분인지에요. 이게 다 미래를 보면 사라질 존재들인데, 뭘 열심히 구한다고 원수지고, 열심히 버린다고 원수지고, 전부 부질없는 거거든요. 이거는 기도가 성취되어 상당히 올라갔을 때 보이는 현상이에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런 지혜가 있어요.

 

        그 다음 또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하는데, 어떤 게 본분이냐. 一二三四五(일이삼사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것뿐이다. 하나가 제일인 것도 아니고 둘이 제일인 것도 아니고, 일이삼사오, 있는 그대로. 六六三十六(육육삼십육)이라, 육육은 삼십육이다. 여섯이 여섯이면 서른여섯이다. 빼고 더할 게 없다. 本身自本身(본신자본신)이라, 본래 나의 몸은 스스로 나의 몸이다. 본신, 본래라는 본자, 몸 신자. 본래 나의 몸은 스스로 나의 몸이다. 그런 거예요. 거기다 온갖 이름 다 갖다 붙이잖아요. 무슨 장, 전부 장 세상이고, 웬 장이 그렇게 많은 지.(웃음) 학사, 석사, 박사, 무슨 그리 이름이 그렇게 많아. 이게 전부 가짜예요. 내 본래 몸은 그런 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근데 그 이름 하나 얻으려고 시간들이고, 돈 들이고, 정성 드리는 거 보면 같잖아서. 박사를 받는다고 하면 박사를 받는 방법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한테 박사학위 받을 생각을 없애주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웃음) 받을 생각 하나를 없애면 얼마나 편하고 이익이 되고 행복할 텐데 그 개도 안 물어갈 걸 왜 자기 몸에다 때려 붙이려고 저러나. 본신은 자본신이에요. 본래 몸은 스스로 자기 몸이에요. 이게 요사인지혜, 범부인 지혜에요. 그래서 선어록에서 많이 나온 얘긴데, 아니 불자, 걸칠 괘자, 不卦雲霞色(불괘운하색), 운하색이 있어요. 운하란 하늘에 구름이 있잖아요. 노을이 있잖아요. 노을은 햇빛이 비치면 벌겋게 보이는 걸 노을이라고 해요. 저 아무 필요도 없는 구름과 노을의 색깔을 내 몸에 걸치지 않는다. 이걸 불괘운하색이라고 했어요. 운하색을 몸에 걸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 몸은 그대로 내 몸이다. 그런 지혜가 있어요.

 

        불교에서는 그런 지혜를 많이 가르쳐요. 처음에는 기도를 가르치고, 점점 지혜 쪽으로 가르치는 게 불교거든요. 보관지혜, 적조지혜, 본분지혜. 멋있잖아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