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수륙재] 10월 12일 국행수륙재 회향 법문 2019-10-12

     오늘 이 법회에 동참한 여러 영가분들, 이 인연으로 오늘 이 도량에 계신 불자님들, 불보살님의 보호가 있기를 심축드립니다.

 

     요즘 돼지들이 수난이지요? 일체 모든 미물까지 근본적으로 이고득락을 시키기 위해서 부처님이 출현하셨고, 그래서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을 위해서 수륙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륙재를 공덕재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복을 짓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 떠난 이에게는 그야말로 윤회의 모든 길에서 벗어나게끔 하기 위해서 수륙재를 지내는 겁니다.

 

     사람으로 한세상 살면서, 해야 할 일은 공덕을 짓는 일,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제일 귀한 일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복을 짓는 일입니다. 물론 다른 스님들 같으면 <복을 짓는다.>라는 말은 사용을 잘 안 해요. 복 타령을 하면 삼류D급으로 취급을 하기 때문에. 그러나 저로서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이 세상, 한 세상 살아가면서 복을 짓는 것보다 더 센 것은 없습니다. 복력이 있어야 수행도 하는 거예요. 불법도 이루는 겁니다. 그런데도 복을 우습게 안다. 뇌구조가 잘 못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 복을 짓는 일, 그 복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아마 이 수륙재에 동참하신 우리 불자님들, 오늘 수숭한 복을 짓는 날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수륙재에 동참하신 여러 영가분들, 아마 아주 큰 복을 짓는 날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우리가 세상 살면서 업을 푸는 일입니다. 내가 지은 업은 얼마인지 모릅니다. 아마 잠시라도 지금 여러분들 눈을 감고 자신들을 돌아보면 자기 업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크게는 수미산보다 더 많을 테고, 없는 분들은 하나도 없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업을 푸는 일, 정말이지 적은일이 아니에요. 한 세상 다 소모해도 오히려 모자랄 겁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라고 하지요, 하염없이 많은 세월동안 많이 쌓은 죄. 일념돈탕제(一念頓蕩除)라고 합니다. 한 생각에 다 없앨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만큼 부처님의 묘법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업을 푸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중요한 일인데 많은 분들이 한 세상 살면서 이것을 간과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 지금 현재 업의 노예가 되어서 살기 때문입니다. 현재 업의 노예란 말, 바로 탐진치 삼독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삶이지요. 탐진치 삼독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길, 어디 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한 생각에 있습니다. 정말 우리들의 생각, 맑은 한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업을 풀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만약입니다만, 다겁생으로 살아왔던 업을 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지은 업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 세상 오실 때를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필이면 그 분이 나의 아버지였을까. 왜 하필이면 그분이 나의 어머니였을까. 정말 묘하고 묘하게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되었고, 나의 어머니가 된 겁니다. 이 사실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으로 체감한다면 부처님의 법을 터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가 없을 거예요.

 

     왜 수륙재를 해야 하느냐. 우리 살아계신 분들은 인연 따라 불교를,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떠나신 영가분들은 누가 해줄 사람이 없어요. 부득이 지어 놓은 인연들이 대신해서 해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수륙재에 많이 동참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다행하게도 이 진관사 국행수륙재를 국가무형문화재 126호로 인정받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태조가 1397년에 수륙재를 시작했습니다. 한나라를 세웠던 고조가 무엇 때문에 수륙재를 생각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라를 세우면서 많은 인명피해를 일으켰을 겁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양심이 작동했겠지요. 근본적인 양심에서 다른 생명을 빼앗았다, 그래서 그 빼앗은 생명들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국행수륙대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에서는 수륙대재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 짧게 하겠습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출가를 해서 절에서 스님들이 49재를 지낸다, 천도재를 지낸다, 용왕재를 지낸다고 하면 솔직히 그런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머리 깎고 산중에 살면서 뭐한다고 저걸 하고 있냐.’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저의 잘못된 생각이었지만은, 제가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 나이가 50정도 되었을 때, 어느 스님이 제게 간절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 지장기도를 한 번 해보십시오.” 근데, 제가 젊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안 들었거든요. 자랑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스님 이야기는 듣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 지장도량, 제일 좋다는 지장도량에 가서 100일 기도를 했습니다. 입재를 한 지 2주 만에 ! 내가 왜 이렇게 늦게 왔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환희심 넘치는 기도를 했습니다. 나이 50이 넘어서 남의 절에 가서 기도를 하려니까 거기 계시는 주지스님, 대중스님의 눈치를 봐야 하잖아요. 그래서 100일기도 회향하고, 또 우리나라 지장기도 도량, 남해에 있습니다, 에 갔는데, 보니까 비어있어요. 주지만 혼자 덩그러니 있고, 거기 가서 또 100일 기도를 했습니다. 그곳에 가니까 주지가 나보다 나이가 더 어려. 그런데는 더 처신하기가 힘이 들어요, 솔직히. 그러나 저러나 주지 눈치 보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는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100일 기도를 했는데, 100일 기도를 하고 나니까 그 때 또 속이 다 차질 않아요. 뭔가 속이 차질 않아. 100일 기도만 하겠다고 하고 와 놓고 더 있겠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그 도량 떠나기가 싫었더랬어요. 그만큼 환희롭게 기도를 했어요. 그래서 저한테 기도를 시켰던 그 스님을 만났어요. 그 스님이 밀양 표충사 앞의 토굴에서 기도를 했었거든요. “그 토굴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니까 비어있대요. 토굴이라고 가보니 방이 딱 두 칸이에요. 그래서 가서 정말 아무도 없으니까, 저 혼자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하루에 12시간, 그 이상 해보니까 정말 기쁘고 기뻐서 정진을 몇 개월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종단행사 때문에 불려나오면서 회향을 했습니다마는, 지장기도를 그렇게 하고난 뒤부터 , 정말 살아있는 모든 중생들은, 이 세상 떠난 중생들은 정말 그 업을 털어줘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는 49재 지내는데, 제가 인연이 있는 곳에는 꼭 참석을 했습니다. 젊을 때 제가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했구나. 부끄러운 생각을 가졌었구나.’ 제가 오늘 스님들 앞에서 발로 참회(發露懺悔)하는 겁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내 스스로 이렇게 드러내는 것을 발로참회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5,000년간 전쟁이 980여 차례 있었지요.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마다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래 시달리고 저래 시달리고 정말 얼마나 비참한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런 전쟁, 역대 왕들, 왕권시대만 살아왔기 때문에 왕과 관리들의 횡포가 정말 적지 않았습니다. 양반이라고 자랑하시는 분들, 가끔 이야기를 듣습니다마는, 듣기가 민망해요. 배웠다는 사람들, 글 모른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무시하고 하대를 했습니까. 그리고 많은 가난 때문에 배 한번 부르게 밥 한번 못 먹은 때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렇게 한이 맺혔을 이 땅에 살다가 떠나신 그런 영혼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못 가요. 어떻게 가느냐.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는 또 그런 응어리진 마음, 쌓였던 업을 어떻게 하겠어요. 밖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자비사상, 이 수륙대재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생의 업이라는 것은, 여러분 법문을 들어서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자기 스스로 짓는 겁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거지요그런데 이 생각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겁니다. 우리들의 한 생각, 그 한 생각은 우주 안에서 영원히 진동할 겁니다. 무서운 현실이에요. 우리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삽니다마는, 그 한 순간 한 순간 했던 생각들이 영원히 존재한다, 무서운 현실이에요. 그래서 업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마는, 업 가운데 가장 제일 큰 것이 살생의 업일 겁니다. 살생의 업을 짓는다. 살생, 거기는 사람이나, 소나 말이나, 닭이나, 돼지나 개나 뭍 축생들, 내 마음속으로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거나, 아니면 남에게 시켰거나, 내 스스로 했거나, 남이 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거나 내 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마음속으로 했는데도 업이 됩니까? , 당연히 업이 됩니다. 남이 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는데도 업이 됩니까? , 당연히 업이 됩니다. 정말 살생의 업이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겁니다. 살생의 업은 자기 종자를 끊게 되어있어요. 우리 불자라면 아마 삼귀오계를 받았을 텐데, 이 살생을 징치할게 아니라 방생을 해야 합니다. 방생을 함으로 해서 한 생명을,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만, 일체 중생은 다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불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비사상인 거예요. 흔히, 방생, 물고기 방생에 대해서 가끔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물고기 생명이나 사람의 생명이나 생명의 차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업의 차별은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하면 불자로서는 방생을 하는 것이 좋은 신행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살, 도라고 하지요. 그건 복덕의 종자를 끊는 일입니다. 오히려 보시를 해서 남에게 베풀어서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음행, 이것은 청정의 종자를 끊어놓기 때문에, 오히려 윤리를 살려야 합니다.

네 번째는 망어, 이것은 진실의 종자를 끊기 때문에 도행이 없어지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주, 인간의 이성을 가장 흐리게 하는 것이 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를 끊어요.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업이 작용을 해서, <앙굿따라 니까야>에 보면 이런 구절들이 있을 겁니다.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지옥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많다.

아마 스님들은 이 경전을 보신 적이 있겠습니다마는, 아마 우리 일반 불자들은 앙굿따라 니까야를 보신 분이 없을 거 같은데, 이것이 바로 육도에서 윤회하는 이야기입니다. 설령 사람으로서 복을 좀 쥐었다 하더라도, 그래서 천상에 태어났다해도 천상의 인연이 다하면 어쩔 수 없이 지옥으로 가야하는 겁니다, 슬프게도.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축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많다.

왜 축생계로 가겠어요?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내가 지어놓은 업이 있으니까.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아귀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지옥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축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많다.

천상계에 있다가 인간세상으로 오면 아주 좋은데 오히려 축생계로 떨어진다니까 너무 슬픈 일이지요.

수행승들이여

천상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천상계에서 죽어서 아귀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이것이 <천상계의 경>이고, 그 다음에 <인간계의 경>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지옥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우리가 한 세상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도리를 다 안했기 때문에, 이 세상 살면서 사람 도리를 하고 사는 것은 적은 일이 아니에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도리, 사람의 도리를 다 안하면 어떻게 되나. 어쩔 수 없이 지옥세계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죠.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축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인간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아귀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이쯤해서, 우리 불자님들, 다음 세상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 분들 손들어 보세요. 적네요. 천상계에 갈 자신이 있나 봐요. 다음 세상에 사람으로 꼭 태어나고 싶으신 분?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다음 세상에 사람으로 꼭 태어나고 싶다면 오늘부터 실행해도 됩니다. 염불을 하시던지 다라니를 하시던지 간경을 하시던지 사경을 하시던지 화두를 하시던지, 이 세상 떠날 때까지 놓치지 않고 하신다면 틀림없이 다음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대답 안하신 분들은 안 해도 좋다 그건가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요. 그건 자유니까요.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지옥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축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수행승들이여

인간계에서 죽어서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아주 적고

반면에 인간계에서 죽어서 아귀계에 다시 태어나는 뭇 삶은 매우 많다.

 

<지옥의 경><아귀의 경>그리고<축생계의 경>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육도를 윤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 영가분들에게 최초로 부처님께서 하신 영가법문이 있습니다. 아마 <니까야>에 보면 <담장밖의 경>이라고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제가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해드린 거 같은데, 부처님 당시에 빔비사라 왕이 있었죠. 이 왕은 최초로 부처님을 위해 죽림정사를 지었죠. 그래서 죽림정사를 부처님께 시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참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서 잠을 자는데, 아귀들이 울어서 잠을 못 잤다고 그래요. 그래서 일어나 죽림정사에 가서 부처님께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신심이 나서 부처님께 절을 지어 바쳤는데, 아귀들이 울어서 지난 밤 잠을 못 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부처님께서는 그대가 과거 어느 생에 한 나라의 재상이었는데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베풀려고 했을 때, 그 공양을 준비했던 사람 가운데, 그대의 친척들이 공양 준비를 기쁜 마음으로 한 사람도 있지만, 기쁘지 않은 마음으로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아귀가 되어서 제대로 갈 곳을 못 가서 아마 이쯤 해서는 자기들이 천도를 해주면 좋겠는데, 천도를 해주지 못하니까 이렇게 아귀의 울음소리로 자기를 구원해 달라, 천도, 제도를 해달라는 뜻에서 그렇게 울음을 울은 것 같다.”

 

죽은 이들은 자신의 집으로 와서 담장 밖이나

벽이나 집의 세 갈래, 네 갈래로 갈라진 틈에 서있거나

문기둥에 의지해서 서있네.

하지만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씹을 것과 삼킬 것을

친지들이 가지고 있어도

그들의 불선업 때문에

아무도 그 죽은 이들을 기억하지 않네.

죽은 이를 연민하는 이라면

이 공덕이 죽은 친척들에게 회향이 되기를,

죽은 친척들이 행복하기를!”

라고 말하면서

깨끗하고 훌륭하고 공양 올릴만한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적당한 시간에 보시한다네.

그곳에 있는 죽은 친척들도 그 자리에 모여들어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보시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뻐한다네.

그들 때문에 이런 것을 얻었다.

살아있는 친척들이 오래 살기를!”

우리들에게 공양도 올렸고

보시한 친척들 자신들도 큰 결실을 얻는다.

사실 죽은 이들이 사는 곳에는 농사도 없다네,

목축도 쳐다볼 수 없고

돈으로 장사하는 것, 무역하는 것도 없다네.

목숨을 마친 그곳에 죽은 이들은 오직 이곳에서 보시하는 것만으로 살아간다네.

높은 곳에서 내린 빗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보시한 것이 죽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네.

마치 흘러들어오는 냇물로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가득 채우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보시한 것이

죽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네.

나에게 이러한 것을 주었고 이러한 것을 해주었다

나의 친척이고 친구이고 동료였다라고

죽은 이들이 이전에 해주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 공양 올려야 한다네.

울며 슬퍼하고 또한 땅을 치고 통곡하더라도.

죽은 이들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는데도

남은 친척들은 그렇게만 하며 지낸다네.

거룩한 승가에게 올린 공양은

오랫동안 복덕이 되고 즉시 이익을 가져다주네.

친척으로서 해야 할 도리도 보이는 것이고

죽은 이들을 위해 뛰어난 공양도 행한 것이고

비구들에게 힘도 선사한 것이네

그러니 그들은 적지 않은 공덕을

계속해서 실천할 것이네.

 

     이렇게 부처님은 아귀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했습니다. 제가 본 경전가운데 부처님의 최초 영가법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니까야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제가 본 니까야 경전 가운데서 이것을 보고 , 부처님의 최초 영가법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관사 수륙대재에 동참하신 영가님들,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하십시오.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하십시오.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하십시오.

 

진관사 국행수륙재에 동참하신 영가분들,

거룩하신 부처님 법에 귀의하십시오.

거룩하신 부처님 법에 귀의하십시오.

거룩하신 부처님 법에 귀의하십시오.

 

수륙재에 동참하신 우리 영가님들,

거룩한 이 승가에 귀의하십시오.

거룩한 이 승가에 귀의하십시오.

거룩한 이 승가에 귀의하십시오.

 

     제 이야기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