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자비참법도량기도} 2월 14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2019-02-14

  

     안녕하십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기도에 참여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와 회향>, 기도와 회향이라는 요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말씀인데요,

 

기도공덕 수승수승 祈禱功德 殊勝殊勝

복업혜업 근수근수 福業慧業 勤修勤修

불생이해 필득구족 不生異解 必得具足

시위성취 시위해탈 是爲成就 是爲解脫

 

   어려운 말 아니고요, 기도공덕이 수승하다, 수승(殊勝), 다를 수, 이길 승. 신비하고 훌륭하고 불가사의하다, 이런 뜻을 수승하다고 해요. 수승, 기도공덕이 신비하고 기도공덕이 훌륭하고, 기도공덕이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다, 이런 말씀이죠. 그래서 그렇게 훌륭한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형식은 어떠튼지간에 전부 하나로 통하는데, 그것은 복업과 혜업을 닦는 것이다. 기도공덕은 선세업장을 소멸하는 것이다. 그게 기도예요. 선세, 과거세상의 업장을 소멸하고, 선세제업(先世諸業)을 소멸하고, 업장, 제업을 다 소멸하는 것이 기도고, 복업과 혜업을 닦는 것이 기도다.

   ​복업은 좋은 건데 이루는 거예요. 이루는 게 복업이고, 그걸 수성(修成)이라고 합니다. 닦을 수, 이룰 성, 복은 닦아서 이루는 게 복이고, 지혜는 덜어내는 게 지혜에요. 덜어내는 거, 遣除. 보낼 견, 제거할 제. 덜어내는 게 혜업, 지혜인데, 어떻게 덜어내느냐. 일체 번뇌망상을 다 덜어내는 게 그게 지혜예요. 번뇌, 망상, 쓸데없는 생각, 그걸 보통 진로망상이라고 하는데, 진로 술 말고, 티끌 진, 피로할 로(塵勞). 정신이 항상 물질과 사람에게 빠져있어요. 그래서 맨날 사람생각, 물질생각, 그걸 진로라고 해요. 사람이라는 티끌, 물질이라는 티끌에 항상 빠져서 피로해요. 그래서 온갖 허망한 생각을 하게 되요. 그래서 진로망상, 진로망상을 싹 제거해서, 보내버리면 거기서 지혜광명이 나온다. 구름이 싹 흩어지면 햇빛이 환히 밝는 거와 같은 이치다, 이런 말씀이죠. 그게 혜업이에요. 이런 복업과 혜업을 근수근수(勤修勤修)하고, 부지런할 근,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라고 천수경에 나오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끊임없이란 말이에요. 끊임없이 계속 닦고 또 닦고, 때때로 닦고, 중단 없이 닦고, 끊임없이 닦으면 그게 기도죠.

   ​부지런히 닦고 부지런히 닦고, 근수근수하고. 불생이해(不生異解)하면, 아니 불, 날 생, 다를 이, 견해 해, 다른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다른 견해라는 것이 번뇌고 망상인데, ‘이걸 꼭 해야 되나, 하면 뭐 좋은 게 있나,’ 이런 게 다른 견해거든요. 법문을 하고 더러 사석에서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미치겠어, 미치겠어.) “법문을 들었는데, 그 법문대로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요런 소리를 해요.(웃음) “법문대로 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요런 소리를 해요. 그런 것을 이해라고 해요, 다른 견해. 그리고 조상천도를 한다고 아미타불을 한참 불렀는데, 다 부르고 나서 극락세계가 정말 있는 겁니까?” 요딴 소리를 한단 말이에요. ‘그게 쉬운 일이냐, 정말 있느냐’, 이런 게 전부 다른 견해에요. 다른 견해를 내게 한다. 일단신심이라, 한 덩어리, 한 일자, 조각 단자(一團)가 있는데, 한 덩어리 신심으로 하는 게 불생이해, 다른 견해를 안 내는 거거든요. 그러면 필득구족이라, 반드시 구족, 갖출 구, 만족할 족, 다 갖추고 다 만족한 그런 결과를 얻는다. 이게 기도거든요.

   닦고 닦고 다른 생각 없이 계속 닦으면 반드시 구족함을 얻어 복도 구족하고, 지혜도 구족하고, 복혜가 구족해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고, 모르는 거 하나도 없고, 그게 복혜구족이거든요. 시의성취다. 이것이 성취다, 이것이 기도 성취란 거예요. 이것이 기도에서 이루는 것이고, 시의해탈이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해요. 생존문제라든지, 인생문제라든지, 사회문제라든지, 이 모든 걸 해결하는 게 해탈이라고 해요. 복업과 혜업이 구족하면 그게 바로 해탈이다. 또 그것이 바로 원만이라고 해요. 구족이라는 말이나 원만이라는 말은 같은 개념이에요. 원만(圓滿), 둥글 원, 가득할 만, 모자라는 거 없이, 끊임없이. 원이란 변곡이 없다는 소리에요,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변제, 변곡, 원이란 한계가 없는 거예요. 한량없이 가득히 찬 것을 원만이라고 해요. 원만구족이고 구족원만이고, 이렇게 까지 되는 게 기도회향이에요.

 

    기도를 하면, 우리가 축원을 할 때도 회향을 하는데요, 회향은 돌리는 건데, 그 기도를 해서 얻어진 공덕을 어디다 쓰느냐. 이거거든요. 돈 벌어서 어디 쓸래 하듯이. 어린아이들은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 쓰는 것도 잘 가르쳐야해요. 그걸, 돈 쓰는 걸 출구라고 하거든요. 돈 버는 것을 입구라고 하고. 들어가면 나와야 되요. 그렇지 않아요?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어야 하는데, 돈 벌면 써야 되거든요. 안 쓰고 놔두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 없는 물건이라 천해빠져서 못써요. 재물은 안 쓰고 죽으면 쌍디귿 된다고 그래요. 쌍디귿에 오하고 이응하면.(웃음) 돈은 생전에 이룬 사람이 다 쓰고 죽어야지, 안 쓰고 죽으면 주인 없는 재물, 주인 없는 금전이라 쌍디귿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 어디다 쓸래, 그게 딱 정해져야 되요. 돈 쓰는 걸 소비라고 하는데, 소비가 그 사람의 행복이고,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의 희망이거든요, 소비하는 걸 딱 보면. 아주 중요해요. 소비를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불교에서는 목적소비를 가르쳐요. 목적소비.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게 다 소비인데, 왜 밥을 먹고 옷을 입느냐, 위성도업(爲成道業), 도업을 이루기 위해서 밥을 먹고 옷을 입는다, 이것이 목적소비거든요. 뭘 하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중국의 연변지역에 갔더니, 그 사람이 캐나다 교포인데, 가끔 만난 사람이에요, 먹는 것도 제일 허름한 걸 먹고, 숙소도 아주 급이 낮은 싼데서 자고, 갈 때마다 그래요.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수소문해서 물어보니, 1년에 한 10억씩을 북한에 쓴대요. 무슨 공장을 지원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먹는 것도 형편없게 먹고, 숙소도 아주 싼데서 자고, 이런다고. 그 사람이 하던 소비는 북한의 공장운영해서 북쪽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거예요. 그게 목적이에요. 목적소비. 또 만족소비가 있어요. 나는 요걸로 만족한다 하면 그만이에요.

자기만족을 하면 끝인 거예요. 명품소비가 있어요. 값 비싼 거, 명품을 소지를 해야 내 인격이 높아지고, 소비는 인격이라고 하거든요, 소비 없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소비 안 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어떤 생각으로 소비를 하느냐. 집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자동차를 어떻게 소비하느냐, 옷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집과 승용차와 옷과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을 자기 인격으로 보는 명품소비가 있어요. 그것도 소비하는 형태예요. 그래서 무조건 값나가는 것, 좋은 것을 해야 내가 격이 높아진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돈 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 돈을 어디다 쓸까, 좋은 거 사서, 좋은 거 쓰는데 쓸까, 그거는 그냥 배워지는 게 아니라 부모 하는 대로 영향을 받을 수 있거든요. 반대로 나갈 수도 있는데 똑같이 따라갈 수도 있어요. 아버지가 술을 평생을 먹어서 진저리가 나서 술을 안 먹을 수도 있지만, 같이 술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돈 버는 건 굉장히 중요해요. 난 내가 정서적으로 만족하면 그만이다, 아니다, 나는 좋은 거 써야 된다, 이렇게 향락소비하는 거죠. 명품으로 자기 즐거움을 누리는 거예요. 명품소비는 향락소비거든요. 아니면 목적소비, 나는 다 필요 없고, 이것만 이루면 된다. 이게 보살이 하는 소비거든요. 보살은 꼭 목적소비해요. 그래서 복을 많이 짓는데, 보살은 불수복덕(不受福德)을 해요. 복덕을 받질 않아요. 불수복덕. 또 불응탐착(不應貪着)을 해요. 자기 복덕을 탐하고 집착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 다 회향을 해요. 그게 회향이에요. 다 돌리는 거예요. 그럼 회향은 축원할 때 보면 삼처회향(三處回向)이라고 하거든요. 세 곳에 돌린다. 삼처는 화엄경의 십회향품이 있는데, 십회향품을 요약하면 삼회향이 되요.

회향중생처, 일체 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중생처에 다 회향을 하는 거예요.

회향보리처, 보리(菩提)는 깨달음이잖아요, 내가 성불할 때까지 성불하는 쪽으로 다 회향을 해요.

회향실제처, 진여, 불성, 청정, 법신, 그쪽으로 회향을 해요. 천수경의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법성, 법의 본성의 몸이 내가 될 때까지 그 쪽으로 회향하는 것을 실제라고 해요. 진실할 실, 국제의 제, 경계 제, 實際.

 

   이렇게 중생회향, 보리회향, 실제회향, 내가 청정법신이 될 때까지 청정법신 쪽으로 다 회향을 해요, 청정법신은 덜어야 해요, 지혜를 닦고, 지혜를 회향하고. 보리와 중생은 이뤄야 하는 거거든요. 이루는 쪽으로 회향. 그게 기도입니다. 복을 닦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복을 내가 받질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돌린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목적소비를 몸에 익히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모든 사건과 사고가 향락소비에서 생겨요. 향락소비에 물들면 여러 가지 죄업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소비가 건전하면 절대로 죄를 짓질 않아요. 작은 것 하나를 가지고 만족하는 만족소비를 하면 무슨 죄가 거기서 생겨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쪽으로 돌리는 데 무슨 죄가 생겨요. 더 좋은 거 갖고, 좋은 거 더 쓰고, 좋은 거 더 만들고, 여기서 죄업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돈 많이 벌어라, 잘 살아라, 부자 되라.’ 이런 것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돈 많이 벌어야죠. 그리고 나서 어디다 쓸래?’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근데 부모들이 잘 못해요. 왜 못하냐하면, 자식이 예쁘니까, 예쁜데 어떻게 이래요? 어떤 사람이, 택시 기사하는 분인데, 아들과 딸이 있어요, 아들이 군대 갔다 와서 취직을 안 한대요. 그럼 뭘 하느냐. 가끔씩 시간제 노동으로 다니더래요. 시급노동 보통 아르바이트라고 하는데, 그것도 며칠하고 안하고, ‘왜 그러냐?’했더니, ‘아버지, 나는 내 용돈 벌이만 하면 되요. 밥벌이는 안 해요. 아버지 돈이 많은데, 용돈 벌이만 하고 살다보면 아버지 것이 다 내거 아니에요.‘ 미치겠대요. 그리고 결혼한 딸이 있는데, 집에 들어와서 산대요. 처음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더니, 엄마와 한통속이 되어서 자기 일 나가고 없을 때 들어왔다가, 있을 때쯤에는 나갔다가, 또 없을 때는 들어왔다가, 그러다 나중에 차츰차츰 대놓고 산대요. 그런데 왜 들어오려고 하느냐?’ 하니 지금 생활비 딱 아끼고 그 돈 가지고 얼마 있다 집 사려고 들어와 산다.’고 하는 거예요. 또 작은 딸이 하나 있는데, 이 딸은 독립하라고 했더니, 겨우 바로 옆집 어디다가 원룸인가 하나 얻고, 꼭 저녁은 집에 와서 먹고, 갈 때는 휴지며 있는 것 다 가지고 간대요. 휴지 가져가면서 이건 나중에 사올게.’하고 간대요. 사오기 뭘 사와. 자기도 심하게는 못하고, 엄마는 더군다나 못하고. 왜 못 하냐, 그래도 예쁜데 어떡하냐. 예쁜 게 마약인데, 예쁘니까 그게 옳지 않은 길이란 걸 알면서도 못 잡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어릴 때부터 순간순간 자세를 제때제때 고쳐주지 않으면 못 고쳐요. 예쁜데 어떻게 고쳐. 휴지 가져가는 것도 예쁜 거라. 집에 들어오는 것도 예쁘고, 용돈벌이만 하고 사는 것도 예쁜 거예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망치거든요. 그래서 회향이라는 게 본인이 쓰면 회향이 안 되거든요. 돌려야 돼요. 돌린다는 것은 목적소비를 한다는 말이에요, 향락소비가 아니라.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아무리 적게 써도 만족하는 거죠. 그게 회향이에요. 그게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많이 벌어서 적게 쓰고 돌린다, 중생처로 돌리고, 깨달음으로 돌리고, 법성 진여 실상으로 돌린다. 이것이 회향삼처실원만(回向三處實圓滿) 기도예요. 소수공덕을 닦으면 됩니다. 이건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불수복덕하고, 복덕을 받지 않고, 회향삼처, 삼처에 회향해서 다 원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게 기도거든요.

 

    왜 그렇게 회향을 하는가? 불교는 가장 신봉하고 예경하고 존중하는 대상이 일체제불, 일체보살, 역대조사, 대선지식 이렇게 하거든요. 조사, 선지식, 보살, 제불, 이것이 불교가 신봉하고 예경하고 존중하는 대상인데요.

    일체제불이라고 하면 청정법신이에요. 청정법신은 적멸무주(寂滅無住), 이게 생멸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고 적멸해요.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 생멸이고요, 단멸이란 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 끊어질 단, 없어질 멸, 斷滅,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단멸이라고 해요. 그런데 적멸은 단멸도 아니고 생멸도 아니고, 실상, 진실상인데 무주, 머무는 데가 없어요. 생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단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햇빛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그늘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고 안 보이는 데 머무는 것도 아니고, 실상무주, 적멸무주라고 하거든요. 이게 부처님의 본성인데, 우리 중생의 본성이에요. 몸이 생겼다고 해서 거기에 머무는 게 아니에요. 죽었다고 해서 없는데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죽고 사는 거 걱정하는 건 전부 진로망상인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이 걱정하는 건 전부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에요. 본래 죽고 사는 게 없는데, 죽는 거 걱정하고 사는 거 걱정하는 거니까 그게 전부 다 쓸데없는 걱정이거든요. 이런 소리하면 꼭 그래요. ‘걱정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걱정 안한다는 게 그렇게 쉽습니까.’ 안 쉬우니까 기도하는 거지 쉬운 거면 뭐 하러 기도해요.

 

    부산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하여튼 제가 법문하는 걸 한 30년 따라다니며 들었어요. 그런데 한번은 그래요. “스님 법문 가만히 들어보면 세상에 구할 것이 하나도 없네요. 근데 사람이 어떻게 구하지 않고 삽니까.” 그러더니 얼마 안 있다 죽었더라고요. 구하려고 애를 썼는데 얼마 있다 보니 죽었어. 세상에서 구하는 것은 다 세상 거예요. 나한테 돌아오는 게 없어요. 자식에게 가면 부모에게 안 돌아옵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자식한테는 한번 가면 절대 안 돌아와요. 그걸 어떻게 아냐. 스님이 그걸 어떻게 아냐. 내가 날 보면 알거든요. 부모한테 받은 건 많지만, 해주기 싫어요, 안 했어, 처음엔. 근데 벌써 가셨더라고.

 

    지금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일본은 노인빈곤, 노인파산, 어려운 말인데, 옛날로 말하면 맨 몸, 빈털터리, 빈곤이니 파산이니 재미없는 말 쓸 게 아니라, 맨 몸, 빈털터리. 그걸 빈곤, 파산이라고 그래요. 쓸 데는 많은 데 충당이 안 되는 걸 파산이라고 하거든요. 일본은 노인 중에 그런 파산이 20%래요. 근데 우리나라는 46%래요. 반이 노인빈곤이에요. 그런 것이 왜 생겼냐. 원인을 알고 보면 젊을 때 돈 안 번 게 아니에요. 열심히 벌어서 그걸 자식들에게 전부 다 준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맨 몸, 빈털터리가 된 거예요. 옛날식으로 자식을 교육시키고, 자식을 양육시키면 자식이 부모 봉양하는 건 당연한 거라. 추호도 의심도 안하고 다 쏟아 부었거든요. 다 쏟아 부었는데 돌아오는 건 한 푼도 없어, 맨 몸, 빈털터리밖에 더 되요. 그러니까 그걸 노인파산이라고 하고, 노인빈곤이라고 하고 그런 거예요. 한번 가면 안 돌아오는구나. 휴지 가져가고 사올게, 사오긴 뭘 사와요. 안사와요, 절대 안사와요. 그래가지고 중생들은 이렇게 망상 속에서 살아가거든요. 죽음이 없는 건데 맨날 죽을까봐 걱정하면서 살아요. 죽을까봐 걱정이 되니까 모두 소유하려고 하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소유가 필요가 없어요. 소유는 생존이다. 죽음자체가 없는 청정법신을 알면 생존이 필요가 없는데, 소유가 왜 필요가 있냐, 그걸 해탈이라고 해요. 이게 제불이에요. 제불은 적멸무주, 지혜광명. 적멸무주는 화엄경에서 설명하기를 허공과 같다고 하고, 지혜광명은 태양과 같다고 설명을 해요. 대자대비 광대서원을 이야기 하는데, 구름과 같다고 해요. 구름이 끼어 비가 내려야 산천초목이 자랄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리 설명해요, 그게 부처님의 세계고요.

 

    일체보살은 상구보리 하와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만 해요, 다른 건 구하질 않아요. 부처님과 같은 지혜만 구하고, 또 아래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만 하지 다른 건 안 해요. 다른 건 다 생멸이라 무상하고 허망해서 구해봤자 다 사라져요. 그런데 사라지는 걸 알면서 구하는 걸 번뇌라고 해요. 거 이상하다말예요. 해봐야 오래 가는 거 아니다, 없어지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요. 그걸 번뇌라고 해요. 번뇌가 뭐냐.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그게 번뇌예요. 안 되는 거 알아요. 옛날에 보면 <난 알아요!>란 노래가 있어요. 모르는 거 아녜요. 아는 소리를 자꾸 하니까 잔소리라고 하는 거예요. ‘엄아, 나 알거든.’ 그 다음에 하는 건 다 잔소리거든요. 그게 애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다 그런 거 해요. 안 되는 거 알면서 다 한다고요. 안하면 보살이게요. 근데 보살은 그것만 해. 없어질 거 구하지 않고, 그냥 오로지 상구보리, 위로는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구하고, 하와중생,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요것만 하는 게 보살이거든.

 

    또 역대조사는 늘 평상심을 가지고 있어요. 평상심이란 것은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이전에 본심, 본래면목, 자성청정심이라고 하는데, 남자 여자가 갈라지기 이전의 본심, 그게 평상심이에요. 중생과 부처가 갈라지기 이전의 마음, 그 평상심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한다, 곳에 따라서 주인이 된다.

대선지식은 뭐냐. 좌미진이(坐微塵裏)하야, 가는 티끌 속에 앉아서, 중생 속에서 아무 표시가 없는 거예요. 표시 없이 똑같이 앉아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작대법우作大法友, 대법우가 된다. 법의 벗이 된다 이거예요. 이게 오나가나 같은 자리에 앉아서 같은 모습으로 깨우침을 주는 게 법우거든요. 그게 선지식이거든요. 이런 분들은 구한다. 선지식을 만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진짜로 중요해요. 제 경우가 그런데, 강당에서 공부할 때 가끔 극락암에서 경봉스님께서 내려오시면 무서워서 가질 못했어요. 난 무서울 게 뭐 있어요. 평상에 앉아 계신데 쫓아가서 한마디 묻겠습니다.” “뭐냐?” “기신론에 보면 진여(眞如)라는 말이 있는데,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강주스님께 물어봤더니, 그건 말로 안 되는 거래요. 근데 이 양반은 도인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대답하나 보려고 질문했지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거든요. 다 그래요, 학생들이라는 게. 물을 때는 자기가 아는 내용 묻거든요. 모르는 내용 절대 안 물어요. 그 때 기를 꽉 꺾어야 제자가 되는 거예요. 그 때 어버버하면 제자고 뭐고 다 날아가요. 근데 이 양반이 뭐라고 하냐면, “야야, 말 배우는 사람 되지 마라.” 그게 첫 번째 선지식에게 걸려든 거예요. 세상 못 듣던 말이에요. ‘말 배우는 사람 되지 마라.’ 처음 듣는 얘기에요. 그 다음에 또 물었더니, 두 번째는 무는 근원이 뭐냐?” 이게 도대체가 접근이 불가능하네. 세 번째 내가 깨달았다고 한시를 지어갔어요. 그리고 보여드렸죠. “야야, 아니다, 아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왜 아닌지 몰랐어요. 그 다음에 한참 있다가 30년이 지나서 알았어요. 생각이 붙어있는 건 깨달음이 아니거든요. 깨달았다는 게송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붙어있으면 안되거든요. 그건 내 생각이지 청정법신에 들어간 게 아니거든요. 그 당시엔 모르는 거거든요. 알 수가 없어요. 모르는 걸 깨우쳐 주는 게 선지식이거든요. 그걸 대선지식이라고 해요. 이런 분들은 존중하고 예경하고 흠모하고 있으니까 이게 그쪽으로 회향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보면, 노후준비를 해야 된다, 건강관리를 해야 된다, 전부 준비, 관리.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 조심해야한다고 하고, 오래 살라고 하고. 그래서 요새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웃음) ‘건강하세요, 오래 사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이게 전부, 건강관리, 노후준비, 전부가 삶의 문제인데요, 살아서 뭐 할 거예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건강을 관리하고, 무엇을 위해서 노후준비를 하는 거예요. 뭐 해봐야 100세 정도라고 한다면은 100세 살고 나서 남는 게 뭔데요. 100년을 아쉬움 없이 살아야 하는데. 답이 없어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건강관리나 노후준비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마음관리를 가르쳤어요.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건강은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노후를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죽음을 누가 알아요, 마음이 알잖아요. 마음이 건강도 알고 생활도 알고 죽음도 아는데, 마음이 어둡다든지, 뭔가 잘못 되었다면, 전체가 다 잘못된 거예요. 비유로, <물로 청소를 하는데, 그 물이 더러우면 청소하는 모든 것이 더러워진다. 마음이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마음이 혼탁하면 모든 것이 혼탁해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관리를 이야기하지 건강관리라든지 노후준비라든지 이런 걸 말을 안 하는 게 불교에요. 왜냐하면 그건 하지 말래도 더 잘하니까.

 

    그래요. 그럼 마음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첫째는 자정기심(自淨其心), 그 마음을 맑혀라. 이것이 첫 번째 같아요. 마음을 자정을 해야 한다. 자정기심, 그 기자 마음 심자인데, <>라는 것은 자기라는 뜻이에요. 자기 심, 자기마음을 스스로 맑혀라.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멈추고 환하게 비춰라. 조명하라. 멈추고 비춰라. 그냥 딱 환하게 비추기만 비추고 생각을 멈추는 거예요. 똑같아요, 이 마음 공부하는 방법이. 비추고 멈춰라. 눈을 감는 게 아니라 눈을 딱 뜨고 저 나무를 보되 저 나무에 대한 생각은 안 해요, 멈춰. 그리고 마음 있는 그대로 환하게 비춰. 이것을 명명이라고 해요, 밝을 명자 2번 쓰는 明明, 명명히 하고, 멈춘다. 불생이해(不生異解), 다른 견해는 전혀 내지 않는다. 그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요, 자정기심이에요. 그 마음을 자정, 스스로 자자, 맑힐 정자, 스스로 맑힌다. 금강경에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야기해요. 자기 마음을 항복시켜라. 무슨 마음을 항복시키느냐. 쓸데없이 근심걱정하는 것을 쏵 항복시켜라, 없애버려라, 항복시키는 건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화엄경에서는 선용기심(善用起心)이라고 자기 청성심을 잘 써라 는 거예요. 그걸 보살이라고 해요. 마음 잘 쓰면 보살이에요. 지혜롭게 쓰고 복되게 쓰고. 번뇌망상을 쏵 항복시키면 보살이에요. 또 자기의 혼탁한 마음을 쏵 맑히면 그게 불자입니다. 이렇게 마음관리를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데, 요즘 건강관리 등 관리가 그렇게 많아요. 사회관리, 요즘은 애인이 많아 애인관리도 한다고. 1주일에 한번 전화할 사람, 한 달에 한번 할 사람, 매일 해야 할 사람, 이거 하다가 세상 다가는 거예요. 꿈같이 지나가버리는 거지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마음관리인데 이걸 우리가 못하잖아. 마음이 잘 못 되면 친구가 어디 있고, 죽음이 어디 있고, 다 잘못되는 거예요. 자정기심하라, 항복기심하라, 선용기심하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자기마음을 스스로 맑혀라. 쓸데없는 번뇌망상을 스스로 항복시켜라. 청정심을 잘 써라. 그러면 그게 기도고, 그게 성취고, 그게 해탈이고, 그게 성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