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2월 23일 49재 법문 2019-02-23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諸法從因生이요(제법종인생) 제법은 인연으로부터 나고

諸法從因滅이로다(제법종인멸) 제법은 인연으로부터 소멸한다.

如是滅與生(여시멸여생) 이와같은 소멸과 생성을

沙門說如是로다(사문설여시) 사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본행집경 제48)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생사실상을 깨달으셨는데요, 나고 죽는 진실상이 어떤 것이냐. 제법이 종인생이라(諸法從因生), 태어날 때도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고, 죽을 때도 인연으로 말미암아 죽는다. 인연이라는 것은 중국에서 번역한 말인데, <얽어맨다>는 뜻이에요. <말미암는다>. 인자는 말미암는다는 뜻이고, 연자는 두 조각을 한데 붙인다, 꿰맬 연자, 두 조각을 꿰매서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니까 말미암아서, 이쪽 천이 있고 저쪽 천이 있는데 이 두 조각이 하나로 꿰매어져서 옷이 되듯이, 태어나는 것도 말미암아서 태어나고 죽는 것도 말미암아서 죽는다. 이걸 깨달으신 거예요. 제법이 종인생이요, 제법이 생사인데, 생사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종인멸이다(諸法從因滅), 생사가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이렇게 여시멸여생(如是滅與生),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사라지는 이런 생사생멸을, 사문설여시(沙門說如是), 부처님이라는 말도 통용이 되기 전에, 보통 수행자를 인도에서 사문이라고 불렀거든요. 사문수행자. 사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초기에 하신 설법인데, 이 설법을 듣고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아주 유명한 사리불이라고 있는데-, 사리불이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됐어요. 이 법문을 다른 제자한테 전해 듣고.

  인류역사상, 문화발전상 엄청난 이야기예요. 인연법을 깨달아서 인연법을 말했다는 게 엄청난 일이예요. , ‘천지에 의해서 태어난다, 아니면 절대자에 의해서 태어난다등 이런 거를 믿던 때인데, 천지 이치, 절대자 능력 이런 걸 믿고 있을 때인데, 석가모니는 독특하게 인연법을 깨달았다. 생기는 것은 모두 다 말미암아서 생기고, 모든 사라지는 것도 다 말미암아서 사라진다, 이 말은 사라지고 생기는 것에 자체 본질 구조가 없다는 거예요. 불교에서는 자성, 자체 성격이라고 하는데, 자체 본질 구조가 없다. 이것을 무아생사(無我)라고 해요. 무아생사. 라고 하는 것은 자체본질구조고, 죽고 사는 데는 인연이지 자아가 없다. 인연뿐이다. 이게 무아거든요. 그러면 인연법을 깨달은 다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인연법을 깨달으면서, 생각으로 살아가다가 인연법을 깨달은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생각이 지혜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인연법을 누가 아느냐. 깨달음을 보는 사람이거든요. 깨달음이 없으면 인연법이 있는 줄 모르거든요. 인연법이 계속해서 있었는데, 인연법을 깨닫기 전에는 인연법을 몰랐다 그 말이죠. 인연법을 안 순간에 생각이 지혜로 바뀌었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할 때,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 해요. 전환할 때 전자, 인식 식자. 인식구조가 전환이 돼서, 성립할 성자, 지혜 지자, 지혜로 성립이 되었다. 전식성지. 그런데 그 지혜는 생각으로는 모르고, 생각이 맑아져야 안다. 이거예요. 그래서 불교는 과학이 아니라 생각을 맑히는 노력이에요. 그걸 수행이라고 해요. 과학하고 전혀 틀려요.  과학은 생각으로서 실험해서 증거를 찾아내는 게 과학인데, 불교는 생각자체를 맑혀야 불교예요. 이 방법이 굉장히 중요한 방법이에요. 생각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관찰을 하고 증거를 획득하는 방법은 과학인데, 불교는 그 생각 자체를 맑혀요. 이 방법이 있어요. 이걸 어려운 말로 도 닦는다, 수행한다 그러는데, 핵심은 생각을 맑히는 것이 도를 닦는 거고, 생각을 맑히는 것이 수행을 하는 거예요. 생각을 가지고는 인연법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눈에 뭐가 이렇게 가려있으면 정확하게 보이질 않듯이, 생각이 끼어있으면 죽으나 사나 생각의 굴레에서 머물게 된다는 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인연법을 깨달으려면 생각을 맑혀야 된다, 그러면 생각이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거죠.

  그러면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가. 생각은 아집이고,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 인연법을 깨달으면서 나라고 집착하는 생각이 지혜로 바뀐다.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고, 해탈했을 때 얻어지는 지혜를 해탈지견(解脫知見) 이라고 하는데, 해탈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인연법을 알아서 해탈을 이룬 지혜가 있어서 해탈을 못 얻고 인연법을 안 거죠. 그런데 일과 맨날 생각을 구조화하고, 생각을 체계화하고 생각을 전해주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요. 조상이 생활 속에서 얻어진 경험을 후대에게 잘 전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또 생활 속에서 지식을 얻는데, 이 지식이라는 게 왜 중요하냐하면 고난과 역경을 해결한 경험이에요. 아버지가 뭘 해보니 이런 게 있는데 난 이렇게 해결했다,’ 이것을 자식에게 계속 전해주려고 하는데, 자식은 아버지, 거기에서 무슨 성과를 얻었는데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했던 아버지의 경험체계는 무시하고 결과만 따지는 게 자식들의 심리입니다. 또 성공한 자식은 아버지가 내 성공에 해준 게 뭐가 있는데요.’, 해준 것만 따지는 게 자식이에요. 자식은 낳을 게 못 되요. 안 낳는 게 남는 장사예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는 배 아픈 경험도 해결하고, 배 고픈 경험도 해결하고,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어려운 것도 해결하고, 그 경험이 있어요. 이걸 잘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려고 하면 아버지 그래가지고 뭘 이뤘어요.’ 이룬 게 많은 아버지한테는 아버지가 이룬 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요.’ 이렇게 따지니까 제일해서는 안 되는 게 자식 낳아서 키우는 거더라고요, 내가 보니까. 그렇게 불확실한 사업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재를 지낸다는 건 엄청난 거예요. 재 안 지내도 되는데.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재를 지낸다는 것은 자식 중에 아주 모범적인 자식이에요. 대단한 자식이에요. 이게 전부 생멸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을 가지고. 그런데 이 생각이 영원히 생각이에요. 그래서 생각 속에는 고통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무서움이 있고, 절망이 있고. 즐거움도 있는데, 즐거움이 오래 안 가거든요. 거기서 해탈하는 게 인연법을 깨닫는 것이고, 인연법을 깨달으면 해탈로 보고, 해탈로 아는 해탈지견이 있는데, 생각에서 벗어나서 알고 보는 걸 지혜라고 한다. 지혜는 해탈지견이다. 그러면 해탈지견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唯有一物(유유일물)이 오직 한 무엇

圓成圓融(원성원융)이로다

원만히 이루어졌고 원만히 융통한다.

長靈長靈(장령장령)하야 길이 신령하고 길이 신령하여

常放光明(상방광명)하나니 항상 광명을 비추니

今日靈駕(금일영가)의 금일 영가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이로다 본래면목이다.

        나무아미타불

 

  그 해탈지견은 뭐라고 규정을 하고 해석을 하면 생각이니까, 이 생각이라는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무기인데 구분하는 거예요. ‘, 저거 무서운 거다, 안 무서운 거다.’ 이래가지고 선택을 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별로 힘도 없는 인간 종이 이렇게 온갖 사물을 다 쥐고 있거든요. 생각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사자, 호랑이, 여우한테 절대 안 되요. 쟤들은 생각 기능이 모자라서 저 모양이 된 거예요. 억울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사자, 호랑이에게 어림이나 있었겠어요. 그런데 인간은 구분을 할 줄 아니까, 무서우면 어떻게 해야 되고, 저건 안 무서우니까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항상 판단하고 취사선택하다가 죽어요. 그래서 맨날 구하다 죽고, 맨날 찾다 죽고, 맨날 헤매다 죽는 게 인생이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쳐요. 그게 고해라고 그래요. 구하다 죽는다, 찾다 죽는다, 헤매다 죽는다, 그럼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인생은 고해라는 거지요. 찾다 죽는다는 소리예요.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인생일생이라는 것이 참 기가 막혀, 맨날 찾다 죽어요. 찾는 게 삶과 죽음을 구별하는 거니까. 죽음을 멀리하고 삶을 가까이 하는 거. 구분하는 거예요. 이 구분이 없으면 생각이 아니에요. 이걸 불교에서는 분별이라고 해요. 나눠서 구별한다고. 분별, 생각이거든요. 영원히 생각 속에서 분별하고, 취사, 취하고 버리다가 끝나는 게 인생이거든. 근데 그 생각이 딱 지혜로 바뀌니까

 생각에서 해탈해 가지고 알고, 해탈해 가지고 보니까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생각은 보고 이름붙이고, 남자다, 여자다, 저건 나무다, 바위다, 보고 이름 붙이는 거, 굉장히 번개보다 빠르게 하거든요. 근데 그건 생각이 붙여놓은 거지, 나무가 나무가 아니고 사람이 사람이 아닌 건데 그건 모르거든요. 나무가 나무가 아니라는 건 생각이 아니라 지혜에요. 그래서 저건 나무다.’라는 생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해요. 이건 불교학 강의 시간에 하는 말인데, 재 지내는 의식하고는 조금 안 맞거든요. 근데 이런 걸 아셔야 극락세계에 가시기 때문에, ‘생각의 속박에 머물지 마시고 해탈지견, 극락세계로 가셔라.’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생각에서 벗어난 진실지견, 해탈지견을 한 것(一物, 한 일자, 물건 물자. 물건 물자를 물건이라고도 하는데, 그냥 무엇이라고도 해요.)이라고 해요. 오직 한 무엇이 있다.

그런데 그 무엇은,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아는 그것은 개념도 없을 뿐 아니라 규격도 없어요. 그래서 오직 지혜로서 깨닫는 것이, 생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불교라. 과학시대에 과학과 다른 것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할 때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어요. 그런데 과학만 해가지고는 결과가 찾다 죽는 거거든요. 해탈은 할 수가 없어요. 생각을 맑게 해 해탈하는데, 생각을 체계화하면 찾다 죽어요. , 이거 참, 고민이에요.

생각에서 벗어난 세계는 뭐냐. 원성(圓成,둥글 원자, 이룰 성자), 원만하게 이루는 거예요. 뭘 지었다 부수고 지었다 부수는 게 아니고, 원성이다. 여기 다 하나 더 덧붙이면 본자원성(本自圓成),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거죠. 허공은 누가 부술 수도 없지만 뭔가 보탤 수도 없잖아요. 원융(圓融). 원만하게 다 통한다, 융통.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다 통해서 어디도 안 통하는 데가 없다. 이게 해탈지견이에요. 원성원융. 살아있는 생명체에도 통하고, 나무한태도 통하고, 바위한테도 통하고, 삶에도 통하고 죽음에도 통하고 이게 원융이거든요. 이게 깨달음에 대한 말씀이에요.

  그래서 장령장령(長靈長靈)하야, 긴 장자, 신령스러운 령자, 길이길이 신령스럽고, 이게 수명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장령, 장구하게 신령해. 또 장구하게 신령해서,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런데 그게 누구냐. 오늘 영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본래모습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은 부모님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 모습이고, 인연실체고, 본래실체가 있는데, 본래면목, 면목은 얼굴인데 몸이란 소리잖아요. 그래서 이게 장영실체, 길이길이 신령스러운 몸, 본래면목. 극락세계는 장령실체,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면 그게 극락세계예요. 먼 곳도 아니고 가기 어려운 곳도 절대 아니거든요. 다만 생각이, 구분하고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는 그 생각의 장애를 입어서 못가요. 한 생각 딱 내려놓고 한 생각을 딱 닫으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거든요. 불교의 가르침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게 이게 너무 어려워서, 믿는 사람에게는 들어갈 수 있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못 들어가요.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요. 해보겠다고 절에 와서 스님이 되어 공부할 때도 맨날 싸워요.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해탈한 지혜를 가르치는데, 배우는 사람은 생각으로 공격하고 들이대거든요. ʻ극락세계 가봤냐. 간다, 못 간다는 구분하고 판단하는 생각이거든요. 저도 어릴 때 그랬어요. 강사선생님이 못 가봤다고 그러더라고요. ‘못 가본 걸 왜 가르치냐고 하니까 나 가보고 나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경전을 믿고, 그 경전대로 가르친다.’ 그 때 손들었어요. 믿고 가르친다는데 할 말 없잖아요. 다시는 그런 얘기 안했어요. 극락세계라는 것은 그 극락세계를 믿고 느끼는 사람이 없으면 극락세계를 말 할 수 없어요. 느끼는 분을 아미타불이라고 해요. 아미타불은 무량수(無量壽)라는 거거든요. 수명 수, 목숨 수. 계량할 수 없는 수명을 가진 아는 분이란 뜻이에요. 무량수불이다. 아미타불이라고 해요. 극락세계엔 아미타불이 있어요. 극락세계엔 모든 것에서 해탈을 했기 때문에 고통이 없어요. 판단하고 구분할 때 고통이 생기는데, 판단, 구분에서 다 벗어났기 때문에 고통이 없어요. 모든 건 인연법이라. 자체가 없다. 촛불도 인연으로 생겨서 자체가 없고, 하늘도 인연으로 생겨서 자체가 없고, 그런데 생각으로 그것을 구분해서 스스로 고통을 느꼈을 뿐인데, 자체가 없는 것은 자체가 없는 것으로 진실하게 보고, 진실하게 알면 그게 해탈이거든요. 그러면 수명은 없는 거예요. 인연은 수명이 있는데, 해탈에는 수명이 없다. 극락세계 아미타불께 나무아미타불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얼릴 때 절 밑에서 자랐는데요, 스님들이 지나가시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쫓아가면서 놀렸어요. 제가 40년대 출생인데, 50년대, 60년대까지 그랬어요. 60년대 초반에 제가 절에 왔거든요. 절에 온지가 50년이 훨씬 넘었어요.

  그래서 불교가 어렵다 해서 과학으로 가는데, 과학은 생각의 체계인데, 생각의 체계를 녹여야만 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한 번 들어가 놓으면, 이렇게 어마어마한 건데 그걸 못해서, 생각을 놓지 못해서 헤매다 죽는구나, 찾다 죽는구나. 長靈長靈(장령장령)하야 常放光明(상방광명)이라, 나무에도 허공이 있고, 하늘에도 허공이 있고, 일체에 허공이 없는 곳이 없듯이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것이 오늘 영가의 본래면목이다라는 거죠. 본래의 진실모습이다. 근데 우리는 지금까지 인연모습만 알고 살은 거예요. 진실모습은 찾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나의 진실모습은 뭔가. 한자로 본래면목이라고 그래요. 진실한 내 모습이거든요. 나 어릴 때 저 친구(어린아이)와 같이 어린 모습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저렇게 예쁜 모습이 이 속에 있나, 아니면 달아났나. 저런 친구도 한 60년 지나면 저 모습이 아닐 텐데, 60이 되면 저 모습이 어디로 달아나서 없나, 그 속에 있나. 이런 걸 몰라요. 어릴 때 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내 속에 숨어있을까, 어디로 도망갔을까. 모르는 거예요. 이건 다 인연모습이기 때문에 숨은 것도 아니고 달아난 것도 아니고, 저 모습도 인연모습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연모습이기 때문에 하나가 계속 상존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가 사라지고 하나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진실모습이 반드시 있는데, 그 진실모습은 왜 모르느냐. 생각으로 구분해서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참 문제예요.

  근데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으로 무서운 동물세계에서 살아남았는데 생각을 포기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서 신심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요. 절대적인 믿음과 절대적인 용기가 있어야 된다. 그걸 석가모니를 들거든요. 석가모니 용기 대단하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항상 가르치는 게 지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신심, 흔들리는 것이 신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지식만 있어서는 흔들리거든요. 신심은 결정심이기 때문에 한번 딱 결정하는 게 신심이거든요. 해탈하면 찾고 헤매는 일이 전혀 없다. 부족한 게 전혀 없다. 무량수 극락세계. 그것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생각을 맑히면 된다. 금일 영가의 본래면목이니까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말고, 나의 진실모습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니 그리 돌아가십시오. 거기에는 무한한 공덕이 있다. 무한한 복락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봄을 딱 아는 순간에, 그게 춘기인데, 봄기운을 딱 아는 순간에 춘색춘향이 무궁무진해요. 봄빛과 봄향기가 끝도 없이 많다. 그걸 무궁무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봄을 몰랐을 때는 그냥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풀이 있다, 이것만 아는데, 봄기운을 딱 알고 나니까 풀도 봄기운이고, 나뭇잎도 봄기운이고 꽃도 봄기운이고 바람도 봄기운이고 전부가 봄기운이에요. 나의 진실모습을 딱 알고 나니까 그 진실세계에는 복락과 즐거운 행복, 평화와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거예요. 그걸 화장세계라고 그러는데, 꽃 하나를 보면 꽃잎들이 쫙 박혔잖아요. 꽃잎들이 저장되어있다고 해서 화장(華藏)이라고 해요. 화장세계가 불교용어예요. 엄청나게 많이 저장되어 있어서 부족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쪽으로 가시면 되요.

 

達無相法(달무상법) 무상법을 통달하여

到無障處(도무장처) 무장처에 이르니

華藏莊嚴(화장장엄) 헤아릴 수 없는 장엄이

圓滿具足(원만구족) 원만구족하다.

 

無盡佛刹(무진불찰) 끝없는 불찰의

華藏刹海(화장찰해)여 화장찰해여!

安樂常樂(안락 상락) 안락, 상락의

極樂淨土(극락정토) 극락정토!

今日靈駕(금일영가)께서는 금일 영가께서는

速得往生(속득왕생)하소서 속히 왕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불교에서 세계를 가르칠 때, 세계에는 세계를 관찰하는 지식세계를 중생세계라고 하고, 세계를 관찰하는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의식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세계는 중생세계이고, 지혜로 관찰하는 세계는 불세계라고 해요. 인도말로 <차트라>라는 말이 있는데, 그걸 찰해라고 해요. 해탈지견으로 보는 세계를 불찰이라고 해요. 중생계, 불찰. 無盡佛刹(무진불찰), 끝없는 해탈세계, 그 세계가 바다와 같이 넓고 많다. 그 세계가 안락상락(安樂常樂)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고. 두려움이라는 것은 형상에 매이면 두려워요. 몸을 유지하는 게 형상인데, 이것을 유지하려면 항상 두려움이 생겨요. 병날까 두렵고, 사고날까 두렵고, 몸이라는 게 기쁨을 느끼는 바탕도 되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바탕도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쁨을 느끼는 바탕뿐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는 바탕도 사라진 거예요. 어느 쪽으로 보냐는 거예요. ‘나는 고통을 느끼는 바탕이 사라졌으니까 좋다.’라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 사람도 솔직히 있었어요. 중국에 장자라는 이상한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어요, 좋은 날이라고. 딴 사람들은 모르고 재혼하려는가보다.’ 라고 했대요. 가서 물어봤어요.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고통을 가지고 살았는데, 오늘로 그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물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고분통(鼓盆之痛)>이라고 해요. 물동이를 두드리고 노래 부르는, 남편으로서 떠나보내는 애통함이 속에 있다는 거지요. ‘부부가 같이 사느냐를 유식하게 물어보려면 고분통을 겪지 않았나’, 부인이 여지까지 살아있냐는 말도 되요.

  그러니까 불찰이라는 게 깨달은 세계로 보는 세계, 깨달은 지혜로 보는 세계에는 안락과 상락이 한이 없고, 또 거기에는 극락정토다. 극락이라는 것은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것을 극락이라고 해요. 안락, 상락, 극락. 안락은 편안하고 즐겁다는 말이고, 상락은 항상 즐겁다는 말이고, 극락은 괴로움없이 즐겁다는 말이에요.

오늘 영가께서는 속득왕생(速得往生)이라. 빠를 속, 얻을 득자. 얻을 득자는 별 의미가 없고 조사고. 속히 왕생하소서. 안락, 상락, 극락세계로 왕생, 가서 나소서. 진실실체, 본래면목, 극락세계로 속히 가십시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오늘 법문을 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