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국행수륙재] 9월 17일 국행수륙재2재 법문 2023-09-17

 

       진관사 수륙무차대회가 이번이 625년 됐다 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지 70, 그리고 무형문화재가 된 지 10. 그래서 아주 뜻깊은 이번 2023년 진관사 수륙재입니다.

        수륙재라고 하면은 물이나 육지, 그러니까 모든 생명들이 사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태란습화라고 해서 태생·난생·습생·화생 이야기하는데, 수륙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온 우주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영가들이 떠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어디에 집 잡으려면 집 터보고 산세 보고 그러죠. 그런데 영가여도, 이곳은 큰 스님들을 모시고 늘 기도하기 때문에 늘 맑은 영가들이 이 도량에 가득 찰 겁니다. 그래서 다른 데보다는 그런 수승한 기운에 의해서 영가는 천도되게 될 것이고요.

 

        또 오늘 주지스님 말씀 들어보니까, 자운 큰스님께서 이 수륙재를 복원하고 싶으셔서 고민하시다가 이곳을 정하고, 그 도반 스님들하고 칠일 칠야를 연구를 하셨다 해요. 근데 자운스님, 석주스님, 관응스님, 월산스님, 탄허스님 이런 분들은 제가 알기로는 회 이름이 있어요. 여석회(餘石會)라고 남을 려자, 돌 석자, 남은 돌 모임이라고 해서, 그냥 쓰고 남은 거, 그냥 이렇게 당신들이 겸양한 회입니다. 근데 그분들이 결국은 종정도 다 하시고, 조계종의 최고 어른들을 지내셨던, 그러면서도 도반들 간에 서로 겸양하고 이러셨던 분들입니다. 특히 석주스님 같은 분은 종정도 안 하셨는데, 종단에서 전계대화상을 좀 맡아달라니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전계대화상이라고 굉장한 자리예요. 출가하는 스님들이 전부 그 스님의 이름으로 계를 봤거든요. 그런데 나는 큰 산중에 안 있고 이 서울에 삽니다. 여기 칠보사, 근데 내가 몸이 늙다 보니까 계란은 먹어요. 계란 먹는 사람이 어떻게 전계대화상이요.” 이리 겸양하신 분이에요. 참 대단한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원력을 세워서 수륙재를, 옛날부터 오던 그 전통을 되살리시고, 또 지금 주지하시다가 회주로 계시는 계호 스님께서 이제 매년 하는 걸로 이렇게 정착을 시켰다 해요. 지금처럼 온 지구촌에 병자와 어려운 일들이 많은 이런 시기에 아주 적절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어떤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참으로 영가 천도가 뭘까, 진짜 의미는 뭘까>, 이걸 좀 생각해 봤어요. 제 주제는 이제 <물 속의 생명들 또 육지의 생명들도 이 법문을 듣는다.> 이렇게 이제 주지 스님이 법문 제목을 정하셨는데, 그 제목을 보면서 생각난 게 있습니다. 제가 4년 전에 스님들 80명과 티베트를 갔다 왔습니다. 수미산을 순례하려고. 정말 힘들었죠, 고산지대라. 근데 거기 가서 느낀 게 있는데, 거기는 장례법이 4가지로 구분되더라고요. 화장이 있습니다. 화장은 스님들만이 합니다, 티베트는. 일반인은 화장을 못 해요. 그다음에 여러분들 어디 화면에서 보는 천장이라는 거 있지요, 조장이라고도 하고. 저 바위 위에다가 세워놓고 육신마저도 이제 보시하면서 가는 거. 근데 이 천장은요, 우리가 볼 때 흉측한데요. 천장은 아무나 지내는 게 아니에요. 죄가 없는 사람이 천장을 지내요. 죄가 조금 있는 사람은 수장을 합니다, 수장.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물고기를 안 먹어요. 먹을 게 없잖아요, 티베트에. 근데 물고기를 안 먹어요. 수장하기 때문에 안 먹기도 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나 야크 한 마리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이래요. 정말 이 생명 존중 사상에 의해서 야크는 한 마리 잡으면, 거기는 뭐 야크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우유며 야크 털 이런 거 사용하니까, 많은 인원들이 나눠 먹는데, 물고기는 한 마리에 한 사람도 못 먹는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다가 알을 뱄을 때는 몇 억 마리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 사상에 입각해서 그 사람들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는 옛날에 다 매장을 했는데, 스님들은 화장했어도. 지금은 이제 다 화장 받아들이죠. 매장은 거기서는 매장이 좋은 게 아니에요. 죄가 많은 사람을 매장해요. 그런데 고이 쉬라고 매장하는 거잖아요, 돌아가신 분. 근데 구멍을 하나 뚫어놓고 팔을 하나 내놓고 여기 끈 달아 놔요, 밖에다. 지나가는 사람이 흔드는 거야. 쉴 만하면 흔들고, 쉴 만하면 흔들고, 이러니까 매장당할까 봐 죄를 안 지으려고 해요. 이런 생활화 불교를 하는구나. 우리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 법이 어떻게 수륙재 기간만 있겠어요. 그죠?

 

        그런데 1365일 늘 그래야 되는데요. 재라는 것은 가지런히 한다, 삼간다 이런 뜻이에요. 내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수행이에요, 지금 재가. 재가 수행이라고. 평소에 하던 습관도 좀 내려놓고 좀 삼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래면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이 재인데, 365일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날짜를 정해서 49일 동안 큰 스님들을 모셔다가 법문을 듣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비구니 최초의 어장이라고 하시는 분 어산, 어장이라면 대단해요. 비구니 스님 중에 의식 염불론 최고로 권위 있는 자리가 어장이에요. 어산. 그분이 직접 여러 스님들과 함께 오셔서 집전을 해 주시니까 여기에 참여하신 모든 수중 육지 공중 떠돌아다니는 원혼들이 안식을 찾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 불국토 아시죠? 불국토. 불국토에는 누가 계셔요? 부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이 땅이 불국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이 스스로 다 부처인데 그걸 모르고 있는 거죠. 그러면은 내가 부처다라고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안 되죠. 교리적으로 이것은 이걸 것이다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에 가마솥에 펄펄 끓는 물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진짜 많이 끓은 건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서 뜨거운 물인지 모르고 손을 담그면 어떻게 돼요? 화상을 입죠. 화상 입은 사람은 절대 가마솥에 있는 물 그다음부터는 함부로 안 만집니다. 내가 부처라 해도, 우리가 부처라 해도, 확인하는 작업은 우리가 해야 된단 말이죠. 그것이 수행입니다. 오늘같이 수륙재에 참여한다든지, 참선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한다든지, 부처님 경전을 읽는다든지, 또 자기 여건에 맞게 재능 기부를 한다든지, 수많은 보시를 한다든지, 보시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보시입니다. 그죠? 불사도 보시고. 다 보시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중에 저는 이제 선원에서 왔으니까, 선 입장에서 몇 마디만 하자면, 요즘 스님들을 안 해요. 너무 안 돼요. 이것도 흐름이 있나, 신부님도 안 되고 수녀님도 안 돼요. 독신하는 사람들은 이제 잘 안 하더라고. 그런데 옛날에는 해인사에 암자가 많아요. 그중에 이제 어느 비구니스님 암자에 꼬마들이 많았어요. 꼬마들한테 승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아 놓으면 예쁘잖아요. 그리고 막 천방지축 다녀도 이뻐요. 관광객들이 지나가다가 너 왜 절에 왔니? 너 왜 절에 와서 사니?” 이래요. 그러니까 아기가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나중에 이제 스님 이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어느 스님이 그걸 묻거든, 세상이 무상해서요.” 이렇게 이야기해라. 그다음부터 누가 묻기만 하면 세상이 무상해서요.” 그런데 무상이 뭔데?” 하면은 막히는 거야. 그것만 알려줬잖아요. 이건 지혜를 빌린 거예요. 그죠? 또 하나는 옛날에는 큰 절은 절에다가 두부도 만드는 기계도 있고, 국수 미는 기계도 있고 이랬어요. 근데 작은 절은 반찬을 하려면 두부를 사와야 해요. 날마다 두부를 사오라고 해야 돼요. 동자승이 그 담당인데, “두부 사오너라.” 노스님이 그러면 .”하고 이제 마을에 내려가서 두부를 사러 가면, 꼭 그 장사하는 어느 분이 스님 어디 가세요?” 이렇게 묻는단 말이야. “두부 사러요.” 그 몇 날 며칠 그래도 또 묻고, 또 대답하고, 그러니까 이게 동자승이 또 스님한테 와서 자꾸 물어서 좀 짜증이 나요. 자꾸 물어요.” “그래? 그러면 묻거든 다음에는 극락정토 간다고 해라.” 기뻐서 내려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스님, 어디 가세요?” 그러니까 극락정토 가요.”“극락정토는 왜요?” “두부 사러요.” 이게 남의 지혜는 자기 게 아니에요. 그죠? 여러분 극락정토 가셔야지 그러지요, 여기가 극락정토인데. 이렇게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도, 이게 이제 불교는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을 같이 인정을 합니다. 부처님 가피가 당연히 있죠. 그런데 내가 하지 않으면 손뼉도 마주쳐야 되고, 기도도 자기가 해야 감흥이 오죠. 그죠? 부처님의 가피의 유신력을 기르는 것이 이제 타력 신앙입니다. 그럼 자력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뭘까?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기준이 뭘까?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뭐냐 이 말이에요. 많은 84천 법문이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있다. 뭐가 있다? 이것도 아니고. 없다. 이것도 아니에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보세요. 내가 오늘 새벽에 여기를 출발하려고 머리를 깎으려고 보니까 바쁠 것 같아서 어제 깎았어요. 어제 깎을 때 내 머리가 맨들맨들 했어요. 지금 까칠까칠해요. 어제의 내가 아니에요. 그죠?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에 집착하는 순간 오늘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죠? 있던 것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우리가 왜 고통이 오느냐 하면 비교하니까 그래요, 비교. 있다 없다 비교하는 거야. 여러분 잘 살다가 동창회 갔다 오면은 배우자한테 불만이잖아요. 그죠? 옛날에는 나보다 공부도 못 했는데 다이아를 이만한 거 끼고 왔다. ‘당신은 뭐 했어이렇게 되는 거야.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없어요. 부처님이 왜 비교를 해요. 그래서 이 중도라는 것은 절대 모양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늘 오면서도, 저도 그런 말 하면서도, 오늘 비 안 오기를 발원했어요. 안 와요. 내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발 5분 전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요. 차를 타기 직전까지. ‘나 차 탈 때 우산 좀 안 받게 해주시오했더니 딱 5분 전에 멈춰서 지금까지 안 와. 늘 마음을 중도에 두는데도 또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좀 이루어지면 기쁜 거예요. 그죠? 또 안 이루어지면 또 슬프고. 근데 진짜 중도의 의미는 그게 아니에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또 모든 물건은 존재 이유가 있다. 이게 진짜 중도입니다. 물고기 존재 이유가 있어요. 날아다니는 새도 존재 이유가 있어요. 육지에서 사는 사람들도, 또 짐승들도 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으로 조금 더 가지려고 기후를 파괴하고, 생명을 함부로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불교는 그러지 않아요. 내가 아는 불교에서의 전쟁은 딱 이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다른 나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크게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러잖아요. 불교는 한 번인데 제가 8일 전에 여기 도착했어요, 우즈베키스탄 갔다가. 거기가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곳이에요. 구법승들이 신라나 당나라 현장 법사, 서유기가 다 우즈베키스탄이 무대인데. 정말로 이 큰 스님들이 그 많은 구법승들이 그 길을 넘어서 인도로 가서 부처님 법을 구하고 배우고 다시 돌아와서 역경을 하고 이랬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역경하는 스님이 국보입니다. 역경하는 스님. 범어를,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중국 같으면 한문으로 번역하는 거. 근데 아까 반야심경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이런 거 다 스님들이 역경한 거예요. 역경을 하려고 보니까 역경사가 필요한데, 전쟁을 일으켜요. 중국에 있는 전진의 왕 부견이가 전쟁을 일으켜서 한 개, 반개를 얻었다고. 한 개 반개 딱 그걸로 끝난 거예요. 한 개는 구마라집 스님이고 반 개는 외발인 습착지스님입니다.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뺏어온 거예요. 그거 말고는 불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생명 존중 사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부득이한 것 말고는. 근데 부득이하더라도 그래서 방생을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라는 것이죠. 그러지 않고는 취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나무에 생명이 없어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왜 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드러냅니까. 자기 보호하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필요 없이는 그렇게 함부로 나무를 꺾거나 꽃을 꺾거나 이러지 않아야 돼요. 필요하면 최소한으로 해야지. 그러니까 동물은 보이니까 그걸 하는데, 죽으면 안타깝고 그런데,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아니 살려고 햇볕 울창한 숲에서도 하늘로만 크잖아요. 햇볕 바라보고. 왜 생명이 없어요. 하물며 인간끼리, 또 자기가 사랑하는 강아지도 있고, 이거 함부로 살상하면 안 되잖아요. 함부로 살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수륙재를 맞이하면서 무차라는 말은 평등하다는 뜻이잖아요. 막지 않는다, 가리지 않는다 이 말이야. ? ‘모여드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인정한다이 뜻이 무차입니다. 평등. 부처님은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을 하신 분입니다.

        왜? 탄생에 천상천하 유아독존했잖아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이것은 당신을 얘기한 게 아니고, 개개인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그 부처님의 성품, 본바탕 이것은 위아래로 나눌 수 없다 이래요. 지금은 여러분이 그 말씀을 인정할 겁니다. 그런데 2600년 전에 인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범천에 꼭대기로 나오고, 정수리로 나오고, 옆구리로 나오고 우리와 같이 나오고, 발바닥으로 나와서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 평등하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의 최초의 평등 선언이고, 또 모든 이에게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주 역사 속에서 가장 성스러운 선언입니다.

        그런 우리 부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일만 하겠습니까. 그죠? 그래서 그동안 좀 미뤄져 왔던 일이 있다고 하면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됩니다. 언제까지 계산만 하고 방향만 잡고 있을 거예요.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지면 걸어가는 겁니다. 여기 앞에 여기 계시는 분들은 조금 평균 나이가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고, 넘기도 했는데, 앞으로 우리가 -아주 젊은 분들은, 양해하세요.- 50년 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죠? 여러분 해마다 이 진관사 수륙대재에 참여하셔가지고 스님들 법문 듣고 이렇게 성스러운 자리를 갖는 게 앞으로 몇 번이나 있겠어요. 1년에 한 번씩 해도 몇 번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느슨할 수가 있습니까? 느슨할 수 없습니다. 느슨해도 좋은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느슨해도 좋아요. 내가 가는 곳을 아는 분들은 두려움이 아니지. 근데 내가 가는 곳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이 두렵죠? 죽음이 왜 두려워요? 가는 곳을 모르니까 그래요. 어제 저녁 잘 주무셨나요? 영진 스님 법문 듣는다고, 수륙재 회주 스님, 법해 스님 이런 분들 뵙는다고 못 주무신 분들도 있겠지만, 비교적 잘 거예요. 근데 만약에 여러분이 자다가 눈을 못 뜬다 하면 잘까요? 졸려도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할 거예요. 근데 왜 자요? 오늘 수륙대재 2재에 내가 참여해서 스님들 법문도 듣고, 진관사 스님들 친견도 하고, 염불 잘하시는 어장 스님들 이렇게 법다운 염불 소리도 듣고, 이걸 알잖아요. 아니까 두려움이 아니에요. 근데 만약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모습을, 가는 곳을 안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친 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앉아 죽고, 서서 죽고, 물구나무 서서 죽고.

 

        옛날 스님들 한 분만 더 이야기하죠. 은봉선사라는 스님이 있어요. 당나라 때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이분은 굉장히 괴각이었어요. 괴각이라는 말 아시죠? 성격이 좀 다른 이하고 보편적으로 같지 않았다 이 말이지요. 근데 이제 죽을 때가 돼가지고 고민이야. ‘이거 내가 좀 독특하게 죽고 싶은데 어떻게 죽으면 좀 잘 죽었다고 소문이 날까.’ 제자들을 모아놓고 얘들아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 있습니다.” “앉아 죽은 이는?” “있습니다.” 좌탈은 앉아 죽고 입망은 서서 죽는 게 좌탈입망(坐脫立亡), 실제로 많아요. 우리나라에도 많았어요. 6·25 막 지나고 돌아가신 방하남 스님 같은 분은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상원사 큰방에 앉아가지고, 불 내려고 하는데 방하남 스님이 앉아 계시니까 인민군이 불을 못 냈어요. 그래서 아직 그 문수정이 살아있는 거예요. 생사를 초월한 분이니까 그런 거예요. 인민군 장교도 감화된 거지. 근데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탁 앉아서 이렇게 돌아가시고. 서옹 큰스님도 앉아서 돌아가셨어요. 물론 꼭 그렇게 앉아서 돌아가신다고 다 최고고, 누워서 돌아가신다고 최고가 아니고 그런 건 아니에요. 성향 따라 다른데. 은봉 선사는 물으니까 다 있네. 그러니까 갑자기 물구나무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하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딱 물구나무서서 가버린다. “나 간다.” 아니 화장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안 넘어가는 거야. 물구나무서서. 그래 이제 소문이 나니까 그 은봉선사의 여동생이 비구니 스님인데, 수행을 잘하는 비구니스님이었어요. 소문을 듣고 오더니 오라버니는 살아생전에도 괴각해서 사람들 골탕 먹이더니 죽어서도 그래 사람 골탕 먹이기요. 제발 속 좀 차리시오.” 하니까 넘어가더라고. 생사를 좌지우지한다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두렵지 않고 해서 자유자재한다. 이제 이런 뜻으로 제가 비유를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 진관사 와서 수륙대재 지내고 싶지요. 만약에 0.01%라도 없으면, 없는 분들은 가는 곳을 알도록 하세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남의 힘 빌리지도 않고, 내 힘으로 그냥 극락정토에 가버리면은 그건 필요 없겠죠. 그러지 않으면은 하루하루, 또 수륙대재를 지내는 이 기간만이라도, 우리가 이곳에 와서 마음을 모으고, 부처님께 발원도 하고, 왕생극락을, 또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고, 그런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시면 누구보다도 무량대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복도 많이 지으시고, 그 받은 복을 널리 이웃을 위해서 회향하는 우리 불자들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