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49재] 9월 17일 49재 법문 2023-09-17

  

 

        오늘 49재일을 맞이하는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잠시 이 진관사에 강림하셔서 법다운 공양 받으시고 부처님 법문을 들으십시오.
        영가시여. 오늘 가족 친지가 49재를 맞이하여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드리고,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이 진관사에 모였습니다. 잠시 이 자리에 왕림하셔서 부처님 법을 들으십시오.

        오늘 돌아가신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한테 다 해당되는 부처님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태어남은 어디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죽어서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맑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잠시 모여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한 조각 구름이 다시 소멸되는 것 같다 했습니다. 나고 죽는 문제가 일대사라고 그럽니다. 가장 큰 문제죠. 그런데 뜬구름에 나고 죽는 문제를 비유했지만, 이 뜬구름 자체도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입니다. 원래 구름으로 끝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실다움이 없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구름은 비가 되고, 물이 되고, 얼음이 되고, 우박이 되고, 이슬이 되고, 서리가 됩니다. 본질은 같지만 그렇게 수많은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하는 것이 구름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죠. 뜬구름에 원래 실다움이 없다.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우리들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물상독로(獨一物常獨露)합니다. 한 물건이 홀로 딱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생사를 따르지 않는 이 한 물건이야말로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물건은 있다가 없다가 또 변화하고 이런 거지만은, 이 한마음, 이 본질적인 것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우박이 되고,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듯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모양만 변하는 겁니다. 근데 그 변화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 죽었다, 있다,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생사를 따르지 않는 한 물건이 윤회를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원래 생사를 따르지 않는 그 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업력을 짓게 됩니다. 업이라는 것은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습니다. 그 업의 그림자를 따라서 생사를 보고 가는 것이 삶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업의 자락을 끊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49재의 의미는, 돌아가신 지 49일 되는 날이 아주 중요한 날인 게 어떻게 보면은, 그분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물론 수행이 많이 된 분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이 필요 없겠지만, 수행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나마 부처님의 가피력과 이 법문의 내용을 듣고, 훌훌 가시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래서 아까 염불에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러잖아요? <나무는 귀의합니다> 이 말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번역하면은 무량광 무량수 그렇습니다. 한량이 없는 수명, 한량이 없는 광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정성을 들여서 아미타불을 10번만 해도 지옥의 과보는 면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가 아미타불을 신앙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 눈으로는 모양을 보게 되죠. 그러면 눈으로 모양을 보면은 거기에서 한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안식이라고요. 안계라고도 합니다. 저것은 저렇게 생겼고, 이것은 이렇게 생겼다. 눈이 주관이라면, 보여지는 모양은 대상, 객관이겠죠. , 그다음 이, . 귀는 소리를 듣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한 세계가 또 벌어집니다. 이것은 맑은 바람 소리다, 이것은 시끄러운 소음이다. 이렇게 우리가 또 판단하죠. 안이비, 비는 코입니다. 냄새. 이렇게 해서 비설, 혀는 또 말이죠. , 몸은 또 몸으로 접촉해서 촉감으로 접촉해서 부드럽다, 거칠다. 이런 느낌이 이런 식으로, 안이비설신의에 의해서 한 세계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분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업을 끊으려면은 분별을 떠나야 되는 것이죠. 근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꼭 비교 분석하잖아요. 무엇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고 이렇습니다. 근데 옛날 도인들은 그러지 않아요. 불교에서는 핵심 교리가 중도인데, 중도를 체득한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요. 예를 들자면, 옛날 당나라 때 마조도일이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한국불교의 선불교에 끼친 영향이 굉장합니다. 우리가 그 후손들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오는 시자가 산길을 가는데, 시자 스님이 자기 스승 마조 스님을 시험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앞에 가는 큰 스님을 불러요. “스님.”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하고 돌아보니까, 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땅에다가 하나는 길게 긋고, 세 개는 짧게 그었습니다. “한마디 일러보십시오. 짧다 길다를 떠나서 한마디 하시오.” 자기 스승에게 다그친 겁니다. 그러니까 마조스님이 당신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한 획을 아무렇게나 하나 긋고, 짧다 길다 말하지 않고 내가 이거 맞췄다이래요. 이게 뭐가 다를까요? , 보세요. 질문한 사람은 짧다 길다 생각이 들어가 있어요. 그죠?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마조스님의 한 획은 그것이 없어요. 절대의 한 획입니다. 즉 중도를 체득한 분들은 이런 것이 나온다는 거죠.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러 선문답하듯이 엉뚱한 소리한다고 이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중도 사상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중도 사상만 녹아들어 있으면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하고 그래요. 저는 오늘 설악산 백담사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는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럼 백담사가 아름답다고 하고, 설악산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 보이는 나무, 바위를 딱 잘라서 아파트처럼 획일적으로 해놓으면 아름답다 할까요? 그러지 않죠.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죠. 그렇기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소중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인공이다> 이 생각이 있으면 누구를 헤아릴 필요도 없고, 비교해가지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중도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 무엇이 낫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불교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 이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반야심경에 보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러잖아요.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다.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비어 있는 것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모양이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모양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즉이라는 말은 그 가운데 그것이 또 있다는 이야기예요. 틈 없이. 여러분 보이는 이 법당이 참 아름답잖아요. 그러나 이 법당도 공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하죠. 지금 우리가 기후 문제나 지구의 온난화 문제 이런 것 때문에 이상 기후가 오고 이런 말을 부처님은 옛날부터 하셨어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 이루어지고, , 머물고, , 무너지고, 공한 상태, 이것이 순환된다 했어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평소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며. 또 돌아가셔서는 또 그런 신이 완전히 자기가 자기 힘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을 들어야 되는데, 돌아가신 분은 이미 육신을 여의였어요. 우리 영가께서는 이제는 육신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식이 맑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염불도 이거 다, 염불 자체가 법문이거든요. 염불이 전부 법문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분명하게 왕생극락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라는 이 아미타 부처님 어느 곳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하라. 마음에 심두에 꽉 붙들어 갖고 간절히 잊지 말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면은, 생각이 도달하고 생각이 다해서 무념처에 이르게 되면. 무념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망상 번뇌가 없는 걸 무념이라고 그러지, 멍 때리는 게 무념이 아닙니다. 뭘 해도 할 뿐이지, 그 안에 망상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에 도달하는 무념처에 도달하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아까 말씀드린 안이비설신의, 이 육식인데, 이것이 육문인데, 이 육문에서 상대적으로 주관에서 객관을 보고 판단하는 여기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금광이에요. 자금색. 그 광명을 나툰다. 즉 불교는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즉했다는 말을 아까 드렸죠. 바로 육문에서 그냥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던 이 안이비설신의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나타내라. 이 말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49재일를 맞이해서 정성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가족 친지 복위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부디 모든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일체의 미련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 친지들을 잘 보살펴서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자비로 섭수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