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4월1일 음력 3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2-04-01

      안녕하십니까.

      오늘 임인년 3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공양 이야기, 과일 공양의 진실, 공양 이야기, 과일 공양의 진실,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는 구경(究竟) 성불(成佛), 구경에, 마지막에 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럼 그 깨달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냐. 많은 인연으로 일체 선법, 일체 지혜, 일체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깨달음인데요. 그 깨달음을 물질적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열매예요. 열매. 과일. 그래서 불교에서 올리는 과일을 보리과(菩提果) 이렇게 얘기를 해요. 보리과. 보리는 깨달음이거든요. 이제 그 깨달음을 과일로 표현하고, 과일로 비유하고, 과일로 이해한다, 이런 식이거든요.

       그러면 그 과일을 가만히 보면, 첫째 종자 과일이 있어요. 종자 과일. 종과. 그 종자 과일을 땅에 심는 데서부터 출발하거든요. 그래서 먼저 뿌리가 난다고 그래요. 뿌리가 먼저 난다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줄기가 나고, 가지가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그래서 꽃 안에서 열매가 맺습니다. 그 열매를 딱 따 보면 뭐와 같냐. 종자 과일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꽃에서, 꽃 속에서 따는 과일이나 처음에 땅에 심었던 과일이나 똑같아요. 땅에 심었던 과일을 종과라고 그러고, 종자 종자(), 꽃에서 수확한 과일을 화과라고 하거든요. 화과(花果). 꽃 화자, 과일 과자.

        그래서 여기 참 오묘한 이치가 있어요. 이 우주 만법에는 인과가 있고 상즉이 있다. 인과와 상즉(相卽). 인과는 시작되는 게 인이고 이루어지는 게 과인데, 이게 인과 과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붙어 있다. 서로 붙어 있다라는 걸 즉이라고 그러거든요. 곧 즉자. 상즉. 그런데 그 심을 때 종자 과일하고, 수확할 때 꽃에서 이루어진 과일하고 똑같진 않아요. 그래서 이걸 똑같지 않은 걸 격별이라 그래요. 격별. 떨어져서 다르다. 격별인데 붙어 있어요. 종자에서 뿌리가 나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이런데 이게 다 하나로 붙어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다 다르지만은, 격별하지만은, 떨어져서 다르지만은, 함께 붙어 있다. 상즉이다. 상즉. 이거를 그대로 과일로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이 꽃에 대한 찬탄 게송이 있는데, 옛날 조선조 초기부터 이 한글로 번역을 해서 외우던 건데, 그런 게송이 있어요.

 

讚果 : 과일을 찬탄함

찬과

福地栽時今已熟 복지에 심을 때 벌써 익었으니

복지재시금이숙

心花結處自然成 마음 꽃 맺을 적에 자연히 이룬다.

심화결처자연성

就中常占御園春 이 중에 항상 좋은 곳 가지고 있으니

취중상점어원춘

直下共圓菩薩果 바로 보살과와 같이 원만하도다.

직하공원보살과

(眞言勸供,學祖譯)(직언권공, 학조역)

 

       복지재시(福地栽時), 복 복자, 땅 지자, 이 복된 땅에다가, 심을 재자, 때 시자 심을 때에, 금이숙이라(今已熟), 그때 이제 금자는 그때 금자도 되고 저때 금자도 되고 시간을 나타내는 건데 그때 이미 벌써 익었다. 이게 상즉의 도리란 말이죠. 상즉. 과일 종자를 심을 때 과일 열매가 벌써 익었다. 이게 상즉이에요. 출발지를 떠나기 전에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 이게 상즉입니다.

       그래 가지고 심화결처(心花結處), 마음 꽃이 열매를 맺을 적에 자연히 이루어진다. 자연성(自然成)이라. 자연히 성불이 이루어진다. 이거는 이제 법으로 말하는데요. 마음에서 불심이 일어나서 그 인연을 닦아서 결과가 맺는 곳에는 자연히 지혜가 나타나고 자연히 자비가 나타나고 공덕이 나타나서 이 불세계를 이룬다 이거죠.

       취중상점어원춘(就中常占御園春)하니, 그중에 그렇게 시작과 끝이 격별하지만은 상즉한, 다르지만 함께 연결돼 있는 그런 곳에 항상 좋은 걸 가지고 있다. 옛날에 어원이라는 거는 임금만이 출입을 하는 정원을 어원이라고 그래요. 어라고 하는 건 임금을 말하는 거거든요. 제왕. 제왕이 특별히 관리하는 공원이 있는데 그 비원이죠. 비원. 그 비원에 봄이 들면 그렇게 좋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 아주 좋은 경치를 어원춘이라고 그래요. 제왕의 봄에 깃든 봄의 풍경이다. 이런 말이죠.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아주 좋은 그런 걸 늘 가지고 있다. 점자는 상점하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가장 좋은 걸 항상 상점, 늘 점유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직하(直下)에 이 말은 바로 곧 직자, 아래 하자인데, 아래 하자는 어조사고요. 바로 지금 그때, 공원보살과(共圓菩薩果). 보살의 결과를 함께 원만히 이룬다. 이렇게 돼 있는데, 보살과라는 게 이게 뭐냐. 보살 중에는 신심을 행하는 신행 보살이 있고, 지혜를 행하는 지행 보살이 있고, 바로 성불하기 직전에 등각보살이 있는데, 그 등각보살은 삼지보살이라고 그래가지고 석 삼자, 땅 지자, 등각은 삼지다. 삼지라는 게 뭐냐. 땅은 지위를 말하는데, 십지를 지나서 등각에 올라가는 보살은 과거에 신심으로부터 공덕을 닦았던, 원인이라는 인자, 땅 지자, 인지를 다 가지고 있어요. 인지. 그리고 부처님의 결과를 이루는 과지를 또 다 가지고 있어요. 과지. 과는 불이고 인은 신심인데 신심에서부터 성불 둘을 다 가지고 있고, 그래서 처음에 신심을 일으켰을 때 그 인지와 결과를 일으켰을 때 과지와 일체 여래의 원만 불과와 똑같아요. 등지. 같을 등자. 그래서 이 보살은 중생과도 같고, 처음에 불심을 일으켰을 때와도 같고, 결과를 이룰 때와도 같고, 성불했을 때와도 같아서, 그냥 등지만 얘기하는데 본래는 삼지에요. 인지도 있고 과지도 있고 등지도 있다. 이게 보살인데 이 과일을, 과일나무를 종자로 심을 때 이미 그 등지 보살의 결과를 벌써 이뤘다는 거죠. 등지라고 안 하고 이제 등각이라고 하거든요. 등각. 등각은 삼지라고 해서. 인지 과지 등지 이렇게 해서, 등자 하나만 딱 따서 등각이라고 그러는데, 등각보살이 되면 바로 부처님하고 똑같은 결과에 올라가기 때문에 이룰 걸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뭔 말이냐. 불교에 처음 과일 종자를 땅에 심는 것은 신심인데 처음 진심을 일으키는 순간에 이미 결과를 이루었다. 시작이 없는 끝이 없다. 이 말이죠. 근데 끝하고 시작하고는 다르기는 달라서 격별하는데, 떨어져서 다른데 상즉이라 종자 없이 뿌리가 없고 뿌리 없이 줄기 없고 줄기 없이 가지나 이파리나 꽃이 있을 수 없다. 이거죠. 다 붙어 있어요. 그래서 과일을 이렇게 보면서 그거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종자 씨앗도 보고, 자라나는 이파리도 보고. 나는 처음으로 신심을 일으켰지만, 이것이 다 따로따로 흩어지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지혜와 부처님의 공덕을 이루는 이런 한 톨의 과일이 나다. 그래서 과일을 보면서 나의 성불을 보는 거예요. 과일은 성불이다 이거죠. 그래서 열매를 보면서 시작과 중간을 다 알아요. 나는 이미 이제 시작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열매를 이루어서 결과를 맺는데, 결과를 다 이루고 보면 처음 시작했을 때 그 자리예요. 꽃 속에서 과일을 거두면 처음에 심었을 때 그거와 하나도 다름이 없단 말이죠. 그런 뜻이에요.

 

有情來下種 뜻 있는 이가 와서 종자를 심으니

우정래하종

因地果還生 심은 곳에서 도로 열매가 난다.

인지과환생

無情旣無種 뜻이 없으면 이미 종자가 없으니

무정기무종

無性亦無生 종성(種性)도 없고 또한 남도 없다.

무성역무생

(六祖壇經 悟法傳衣1)(육조단경 오법전의제1)

 

       그래서 중생들이 뜻을 가지고 종자를 심으면, 인지에 과환생(因地果還生)이라. 그 종자 심은 자리에 열매가 도로 난다. 심은 자리에서 열매가 도로 나요. 심지 않으면 열매가 안 나요. 그러면 뜻이 없으면 이미 심는 게 없는데, 뜻도 없고 심는 게 없으면 종자 성품이 없어서, 종성이 없어서 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뜻을 가지고 심을 때 이미 결과를 이루는 거다.

       그래서 과일을 보고 그런 걸 또 관찰을 하고 신심을 더 높이는 것이 과일 올리는 지혜입니다.

 

   奉佛願 부처님 모시는 서원

   봉불원

莊嚴佛道場 불도량을 장엄하고

장엄불도량

發願大要事 발원하는 중요한 일은

발원대요사

四大肉團身 사대 육단의 몸으로

사대육단신

頓悟無生忍 생멸 없는 지혜를 바로 깨닫는 것이며

돈오무생인

六根身生命 육근의 몸 생명으로

육근신생명

相承慧生命 지혜의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다.

상승혜생명

 

       그러면 신심으로 종자 심는 일이 뭐냐. 봉불원(奉佛願)인데, 봉불은 부처님 모신다 이 말이죠. 부처님을 모시는 원인데, 우리가 왜 부처님을 왜 모시냐. 부처님을 모시는 일이 바로 성불이에요. 봉불하면 성불한다. 그 봉불은 땅속에 종자 심는 거고, 성불은 꽃 속에서 종자 거두는 거다 이 말이죠. 장엄불도량(莊嚴佛道場)하고, 불도량을 떡 세워서 꾸며서 장엄을 하고 발원하는 대요사(發願大要事), 발원을 하는 대요사, 크게 중요한 일은, 사대육단신(四大肉團身)으로, 사대라는 건 지수화풍이고, 육단이라고 하는 것은, 근육이라는 육자, 덩어리 단자, 근육 덩어리, 보이는 몸, 다른 말로 하면 색신이죠. 보이는 몸. 색신. 사대색신. 근데 사대육단신으로 돈오무생인(頓悟無生忍)하고, 이 우리 몸에는 형태로 보면 사대육단신인데, 그 안에는 생멸 없는 지혜가 들어있어요. 생멸 없는 지혜, 이걸 무생인이라고 해요. 인자는 참을 인자를 쓰는데, 참을 인자가 옛날에는 그 참을 인자 왼쪽에 말씀 언을 한 인식할 인자()하고 같이 썼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화엄경 십인품에서 참을 인자를 지혜 인자로 해석을 해요. 그래서 이 생멸 없는 지혜가 우리 몸속에 있다. 아주 중요한 게 몸에 있는 거예요. 이걸 그냥 썩히고 말면 그냥 사대육단으로 끝나는데, 이걸 잘 찾으면 나고 죽음이 없는 지혜가 몸 안에 있어요. 이건 마치 나무에 불의 성격이 있는 거와 같다. 이 나무에 불의 성격이 있어서 여기다 불을 갖다 대면 이 안에 나무 안에 있는 불의 성격이 타 올라오거든요. 이 나무의 불의 성격이 없으면 아무리 불을 점화를 해도 안 타요. 이 몸은 났다 죽는데 몸 안에 나고 죽음이 없는 지혜가 들어있다. 그걸 바로 깨닫는다고 돈오무생인. 그래서 절에 떡 들어와서 부처님 모시고 참배를 한번 딱 드리면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이 몸 안에 있는 지혜를 알게 돼요. 그게 봉불공덕이에요.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이다 그 말이죠.

       그리고 육근신생명(六根身生命)으로, 육근이라는 건 눈코귀 이렇게 안이비설신의 육근인데, 이 육근을 가진 신생명, 몸생명으로, 이 몸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거거든요. 살아서 어디로 가냐 죽음으로 가요. 몸이 가는 길이 뻔해요.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 되고, 청년 되고, 청년은 또 세월이 지나면 늙어가요. 그래서 아동은 청년 되고, 청년은 노년 되고, 노년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노년이 가는 곳은 한 군데에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걸 죽는다고 그래요. 이게 몸에 가는 길인데 그 몸을 자세히 관찰하면 죽음이 없는 지혜가 있어요. 관찰 소득이라고, 관찰로 얻는 바라고, 몸을 살펴보지 않으면 몰라요. 근데 관찰을 깊이 하면 죽음 없는 지혜를 알게 되는데, 그건 관찰로 얻은 바지, 그냥 살아가면 모르거든요. 그래서 육근신생명, 육근의 몸생명으로, 상승혜생명(相承慧生命)이라, 지혜 생명, 지혜 생명을 항상 이어가는 것이다. 지혜 생명을 한 번 얻으면 계속 이어가고, 또 이 사찰에서는 지혜 생명을 서로 서로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전하고, 또 그 다음 사람이 그 다음 사람에게 전해서, 지혜의 생명을 전하는 것이 불교의 법통 상속이에요. 석가모니가 깨달은 건 지혜 생명을 깨달은 거거든요. 그래서 아이를 낳아서 자손을 전하는 게 아니라 지혜 생명을 앞사람이 깨달아서 뒷사람에게 전하고, 또 그 사람이 또 지혜 생명을 깨달아서 뒷사람에게 전하고, 이것이 혜명상속이라고 그러는데, 혜명. 지혜 혜자, 생명이라는 명자, 혜명을 서로서로 전하는 것이 불교의 혜명상속, 법통상속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이게 전부 과일로 표현이 돼요. 과일로.

 

       며칠 전에 진관사TV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진관사 경사 났다고 <진관사 경사 났네.> 그게 무슨 경사가 났는지 보니까 회주스님을 추대하고 주지스님이 취임하는 경사가 났다고. 정말 경사는 경사지요. 회주스님은 대중으로부터 추대가 되는 거거든요. 주지스님은 종단으로부터 임명이 돼요. 그런데 이 회주, 주지가 다 소임 중에 상소임인데 상소임. 윗자리에 놓이는 소임이다 이거죠. 그러면 다른 소임은 뭐냐. 평소임이에요. 평소임. 그러면 이런 게 유래가 어떻게 됐느냐. 경전에 보면 여러 대중이 함께 법회에 참여를 하는데 그 대중을 대표하는 상수 보살이 있어요. 상수보살. 보현보살이 상수가 되어, 문수보살이 상수가 되어, 이렇게 있거든요. 그러면 그 법회에 참가하는 이제 일반 대중은 그냥 평등대중이에요. 평등 대중. 그래서 소임도 상소임이 있고 평소임이 있는데 평소임은 그냥 평등한 소임을 맡아서 하는 거고, 상소임은 사중과 대중을 대표하는 소임이 상소임인데, 회주 스님은 사중에서 추대를 해서 이루어지고, 주지스님은 종단에서 임명을 받아서 이루어지는데, 근데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회주스님이나 주지스님이 지금까지 상소임을 계속 봐왔기 때문에 뭐 다를 바는 하나도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업무를 계속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그래가지고 기대가 많이 되더라고요. 아주 기대가 많이 돼요. 박수 한번 쳐주시면 어떨까요. 역시 늘 해오시던 일이니까, 이런 불보살님의 원력을 잘 받들어서 많은 공덕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

 

       법문 마치겠습니다.